그때를 그리워하는 분들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냥 추억보정입니다. 그때가 인심이 더 좋았고 정이 많았다고 하는 분들은 지나간 과거의 고통은 빨리 잊고 좋은 것만을 간직하는 좋은 마음씨의 분들이긴 한데, 정말 세세하게 따지면 저때도 많이 힘들었어요. 셋방사는 집은 노비처럼 그 자식들까지 눈치보며 살았고, 애들은 학교에서 돈봉투 노리는 선생들에게 시달리고, 온가족 세끼 겨우 밥먹고 살아서 콜라병 따위도 없는데 폐품 안가져왔다고 싸대기 쳐맞고 나서 울다가 집에 가서는 묵묵히 아무 일 없었다고 하던 시절입니다. 어머니는 반드시 애가 무슨 일이 있는 건 알지만 그게 다 당신들 무능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새벽에 찢어지는 마음 부여잡고 싸줄게 김치하고 콩자반밖에 없는 도시락에 콩밥이라도 꽉꽉 눌러담던 시절이었죠...
I agreeeeee. 지금보다 더 나았던 점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대부분 지금보다 열악했다고 보는 게 맞아요. 일례로, 80년대만 하더라도 수금하러 가정 방문 다니는 선생들이 많았어요(물론 좋은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제 담임 중엔 무려 별명이 '5만원에 3일'인 선생도 있었죠. 5만원짜리 현금을 갖다 바치거나 5만원짜리 구두표를 선물하면 정말 정확하게 3일 동안만 천사처럼 대해줬어요. 4일째 되는 날 아침부터 찬바람 쌩쌩. 마치 알아서 다음 선물을 준비하란 듯. 그런 놈도 선생이라고 스승의 날엔 "스승의 은혜~" 어쩌고 노래를 불러줬으니...미친 거죠.
저희 엄마는 대전 사람입니다. 현재도 대구 시민은 아니시지만 70년대... 저희 엄마의 20대 처녀 시절 대충 70년~72년도에 대구 원대동 대구중앙교회 근처에 금복주공장(지금은 달서구 장동에 있고)이 있고 그 바로 옆에 삼익직물 이라는 옷에 물들어 염색 하는 공장이 있었는데 저희 엄마께서 20대 처녀 시절 삼익직물 이라는 회사를 다니셨다고 들었습니다. 공장 바로 옆이 금복주 공장이 있다 보니 병 닦는 소리를 많이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엄마의 20대 처녀시절 옛추억을 떠올리시라고 대구를 찾아간 적도 있는데요. 여러번 갔었고, 최근에 간게 4년~5년 전이네요. 동인동 찜갈비는 고기 먹는 것 보다 마늘 양념에 밥을 비벼 먹는게 더 좋았다고 하셔서 햇마늘 나올는 시기에 맞춰서 동인동찜갈비골목도 가고 달성공원(4년~5년 전에 갔을때 주변 주차비는 받는데 공원 들어가는건 아직도 무료로 들어간다는거에 놀래고 신기 하셨습니다.), 서문시장, 동산의료원도 오래됬고... 자갈마당(지금은 아파트 공사 하고 있고)은 여자분들에게 위험한 곳이라고 하면서 주변 사람들이 가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안 가셨다고 합니다. 엄마 말씀으로는 비포장도로를 다 걸어서 다녔다고 하더라구요. 대구터미널(지금은 동대구터미널과 신세계가 들어와 있는 곳)이 땅이 푹 꺼져 있는 곳에 있어서 장마철이면 침수 한다고 하시고, 동촌유원지도 걸어서 다니시고~ 가로질러서 수성못도 걸어다니셨다고~ 엄마의 20대 처녀 시절 때문에 많이 들으면서 자란 저도 이 영상 보니 눈물이 나네요. ㅠㅠ 70년대 원대동에 있었던 금복주 공장과 그 바로 옆에 있던 삼익직물 공장이 있었던 사진이나 영상 같은거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엄마의 옛추억 속에만 있는 그곳을...
저는 71년도때 두살이 이었네요 16살에 3공단 으로 고등학교 때문에 대구로 나왔어요 너무나 어려운 시절이었죠 늘 배고팠고 학교갈때마다 버스비가 없어 매일 걱정을 달고 살았어요 30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놈에 가난을 못 벗어나네요 개천에서 성공하기란 정말 하늘에 별따기 입니다 대신 조금더 내려놓을줄 알고 게으러지만 않다면 먹고 사는건 문제없죠 71년 저때나 지금이나 누구나 실패를 합니다 포기만 하지않는다면 반드시 웃는날도 온담니다🥲🥲
아마 1974년인것 같은데 남산동 대도극장에서 이수미씨가 주제가를 부른 여고시절 영화를 상영하는데 그당시 제일여상 3학년에 재학중인 누나가 그 영화를 너무 보고 싶어했는데 당시만해도 고교생이 그정도 수준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다가 교사 합동순찰조에게 걸리면 정학내지는 경고를 당하는데요 부모님까지 학교에 불려가 사과를 하고 할때입니다 그래서 누나는 어머니 바바리코트를 입고 아직 초등학교도 안들어간 저를 데리고 애엄마 인 척하며 극장에서 영화를 다봤는데 아직 어린애였던 저는 재미도 없고 이해도 안되는 영화를 억지로 꾹참고 끝까지 보고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그게 벌써 50년전 일입니다
1971년.... 이런 사진이나 영상들 보면, 대한민국이 잘 살기 시작한지가 얼마 안되었다는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나라와 자식들을 위해서 열심히 사시고 아끼시던 모든 부모님들 너무 너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대한민국이 초심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골에서 살다가 부모님따라 1975년도에 대구로 이사 왔었는데 73년도에 국민학교(당시는 그렇게 불렀음) 수학여행을 경주가기전에 대구 당일치기로 영남일보(?),달성공원을 구경했던 기억이 납니다..대구로 이사온 뒤 당시 여동생이 5원짜리 핫도그 먹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대구 온지 48년... 부모님,처가부모님,여동생,집사람,학교 친구....제 주위의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세월이 화살 같이 날아가는 듯 합니다.
1970년대 초 국민학교 다녔는데, 누나가 저보다 2년 먼저 국민학교 다닐 때 누나 소풍 갈 때 어머니랑 따라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누나 담임이 저보고 "나중에 니 담임하면 좋겠다"라며 귀여워 해주셨는데, 나중에 제가 학교 들어가서 보니, 소풍, 운동회에 바나나 한송이, 찬합 몇개에 각종 도시락, 미제 맥주 한박스 기본적으로 들어가고, 담임이 남 선생이면 담배 한보루, 여 선생이면 외제 화장품에 봉투까지 줬으니 선생님들 입장에 귀여울 수 밖에 없었죠. 당시 육성회비 한달 300원인데, 새학기 시작하면 1년치 완납하고, 학교 행사 있으면 어머니 와서 도와주고 하니까 부모님 덕분에 국민학교는 아주 편하게 다녔던 것 같습니다
저는 60년생 남산국민학교 대성국민학교 원대국민학교 최종졸업 계성중1년 서울로 전학 서울서 중고등나오고 서울 모의대졸 피부과 전문의 대구처자와 결혼 군의관 공군 대구 K2 비행단 3년 복무 지금 제대후 서울서개원 남산국민학교때 평리동으로 소풍갔습니다 그때 그기는 산 들판 완전 야외였는데
그당시 달성군은 대구시가 아니였는데 달성군청이 서부정류장 바로 앞에 있었고 서부정류장이 바로 대구시와 달성군의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70년대의 일이고 1960년대 서부정류장은 지금의 대구대 (당시 한국사회사업대 (한사대) 당시는 사회복지라는 용어가 없어 사회사업이라고 했음) 대명동 캠퍼스 부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캠퍼스 부근은 공동묘지와 논밭만 있었습니다
0:43 지금 시내 따로 국밥집 건너편에 있었는 박성규비뇨기과 의원이 보이네요. 71년이후 30년 지난 2001년까지 가끔씩 갔는 병원이네요. 그 당시 일흔이 훨씬 지난 의사 선생님여섰는데 지금은 고인 되었겄네요. 2:14 신한아케이드 지금은 일흔된 둘째누님이 거기서 일을하셨는데 지금 교동 먹자골목 입구에 있었던 아케이드입니다. 기억이 나네요.
71년도때면 국민학교 2학년때네요. 외가집 조치원을 가기위해 기차를 많이 타고 갔는데 학교가기전에 동대구역이 아니라 대구역에서 탔을듯 하네요. 추억의 대구, 세월은 흐르고 부모님은 연로하여 돌아가시고 저희도 늙어가고 추억은 남네요. 저 동성로 거리를 수없이 다녔을텐데 기억엔 별로 없네요~
그때를 그리워하는 분들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냥 추억보정입니다. 그때가 인심이 더 좋았고 정이 많았다고 하는 분들은 지나간 과거의 고통은 빨리 잊고 좋은 것만을 간직하는 좋은 마음씨의 분들이긴 한데, 정말 세세하게 따지면 저때도 많이 힘들었어요. 셋방사는 집은 노비처럼 그 자식들까지 눈치보며 살았고, 애들은 학교에서 돈봉투 노리는 선생들에게 시달리고, 온가족 세끼 겨우 밥먹고 살아서 콜라병 따위도 없는데 폐품 안가져왔다고 싸대기 쳐맞고 나서 울다가 집에 가서는 묵묵히 아무 일 없었다고 하던 시절입니다. 어머니는 반드시 애가 무슨 일이 있는 건 알지만 그게 다 당신들 무능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새벽에 찢어지는 마음 부여잡고 싸줄게 김치하고 콩자반밖에 없는 도시락에 콩밥이라도 꽉꽉 눌러담던 시절이었죠...
동감입니다. 저때도 지금과 다를바 없었을듯합니다. 다만차이라면 못사는 집이 대다수라는게 차이죠. 80년대후반에도 있었던 가정환경 조사서..꼭 받고 기입해야 했는지.. 차라리 학생과의 일대일 면담 을 통해 조사했다라면 더 좋았을.. 그당시 아이들 그런걸로 상처받은 적 많았을듯.. 이웃간 정도 많았지만 사생활 간섭과 침해도 장난아니게 많았음. 옆집에 숟가락이 몇갠줄을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많았죠
I agreeeeee. 지금보다 더 나았던 점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대부분 지금보다 열악했다고 보는 게 맞아요.
일례로, 80년대만 하더라도 수금하러 가정 방문 다니는 선생들이 많았어요(물론 좋은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제 담임 중엔 무려 별명이 '5만원에 3일'인 선생도 있었죠. 5만원짜리 현금을 갖다 바치거나 5만원짜리 구두표를 선물하면 정말 정확하게 3일 동안만 천사처럼 대해줬어요. 4일째 되는 날 아침부터 찬바람 쌩쌩. 마치 알아서 다음 선물을 준비하란 듯.
그런 놈도 선생이라고 스승의 날엔 "스승의 은혜~" 어쩌고 노래를 불러줬으니...미친 거죠.
역사를 제대로 안가르치면 나라망하게됩니다
역사의공과를 확실이가르쳐야 나라의미래가
가능합니다 교육이정상적인사고를 가진산생님들이
우리미래세대에게 진실되게가르쳐야합니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바로섭니다
추억이란 마약은 다 희석시키는 묘한 마법을 부립니다
사람마다 각자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추억이 다르죠 본인이
살아온 그날이 악몽일수도 있고
천국일수도있다는겁니다 너무
피해의식만 있는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힘들어도 이겨내신분도 계시는데 말이죠
71년 ,,11살,, 장남으로서 아버지 위암 투병후 하늘가시고 두동생과 엄마와 처절하게 살던시절,,
아침저녁 두번먹던 식어빠진 국수,,
11살,, 어린나이에 인생이 참 고달프다고 느꼈었던 시간들..
수성못에 앉아서 배고파서 늦도록 울다가 잠든 기억,,
힘들었던 유년시절의 기억이 가득한 그시절 대구,,,
입하나 줄이려고 어째어째 국민학교 졸업후 집을나와 공장과 천막등에서 간신히 풀칠하다가 16살에 서울로 올라와 영화같은 처절한 인생을 시작했었던 기억 들,,
지금은 어느덧 60대 중반의 나이..
, 그런 유년시절의 기억들과 회색빛 추억들이 생각나 한달전 찾아가 본 수성못과 수성초교,,,
같은 동년배 이시네요 반갑습니다 우리남은생 건강하게 지내보입시더
@@진병철-j1e 네.. 님도 항상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길,,.
지금은 행복 하시길 바랍니다
네..감사합니다.@@진짜-보수-c3e
수성국민학교에 65년도에 입학해서
71년도에는 대구 대성중 1학년였는데,
세월이 뭔지 시간이 뭔지,그냥 어른들의 이야기로만 알았는데
어느새 그 자리가 내 자리가 돼버렸습니다.
어쨌거나 그 때가 그립습니다~2024.12.19.(木)21:59.
아주아주 희미하게 조각처럼 남아있는 형의 뒷모습...
나를 구해주고 떠난 형!
형,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났다면
인연이 되어서 나를 만나줘!
너무너무 보고싶은 우리형!
여행자님..부탁이 있습니다. 혹여나 다시 과거의 대구로 가실일 있으시면 저 한번 꼭 좀 데리고 가주십시오. 고생만 하다 갑작스레 떠나가신 울 어무니 한번만 꼭 안아드리고 싶어서요..
눈물이 ㅠㅠ
왜 울려요 ~~~~
ㅠㅠ
저도요.
ㅜㅜ
저는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초 중 고 대학 대구에서 다녀서 정말 고향입니다
지금은 직장 서울에서 다니지만 한달에 한번씩 본가 대구가서 어머님뵙고 옵니다
정말 대구 어느도시보다도 살기 좋읍니다
자연재해도없고
공기좋고 물좋고
농산물풍족한 대구입니다
정주여건이 최고좋은
도시가 대구입니다
중국인명나라사신이고 풍수가인 두사충이라분이 조선의
명당이라는곳이 대구이고
대구에정착하였고 만촌동에가면 그분모신
모명재있지요
1971년
18살 아버지 , 14살 어머니
50년전 거기선 안녕들 하셨습니까~^^
안녕들 할수가 없는 시절이지요 먹고살기힘든시절 다들 고생만 하든시절
71년23살 만촌 제2군사령부 여군하사 시절동대구역은벌판에새로신축 고속도로 부산까지개통해서타고기분좋게달려지요
군인들 계엄군이 시내곳곳에 신고하면 바로바로달려왔지요
중학교 1학년때 대구 모습이네요...남산동 영남중학교 다닐때 납작만두 원조점 미성당 나이드신 아저씨(당시 할아버지로 보였음) 생각이 나네요~~
후배님 이시네요.난중고등졸엽했고 고졸을 63년도,,이제내나이도 80 이넘었어니,, 많이들 세상하직하고,학교 운동장 담옆에,화장터가 기억이 벤더연습한게 기역이지워지지 않읍니다,,대구
대명동 계명대 건너편 대성연탄 공장 뒷쪽 영남중고 담벼락 사이에 화장터가 있었지요..
@@추풍령-x7g 점심시간이면 연남중학교 학생들 도시락 위로 재가 떨이지던...
영중남문 연못옆 남광의원 문화빵 화장터 노란연기가 학교쪽으로 바람불면 국어선생. 허은선생님 곤장쥐고 창문닫아라고 고함. 추억이 세롭네요
우리아빠 어린시절 대구모습ㅠ.ㅠ 왜 눈물이나지 보고싶다 아빠
아 저때가 제가태어날때이네요
저때로다시가서 작년암으로돌아가신 어머니와 5년전암으로돌아가신아버지가 보고싶어요 아버지어머니한테 못난아들이 죄송하고 너무사랑한다고안아드리고싶어요
1971년...
내 어린 날의 대구네요.
ㆍ
그리운 시절입니다.
ㆍ
그땐 분명 어려운 시절이었는데도...
그때가 그리운 건...
그 시절 내 젊은 날이 그리운 것이겠지요.
감사합니다. 눈물이 나네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렵게 청년기를 보낸 대구라서요
참으로 대구사람으로 옛날 모습 건물 도로들을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귀하고 귀한 영상 잘보고 갑니다.감사합니다 ~^^
저희 엄마는 대전 사람입니다.
현재도 대구 시민은 아니시지만 70년대... 저희 엄마의 20대 처녀 시절 대충 70년~72년도에 대구 원대동 대구중앙교회 근처에 금복주공장(지금은 달서구 장동에 있고)이 있고
그 바로 옆에 삼익직물 이라는 옷에 물들어 염색 하는 공장이 있었는데 저희 엄마께서 20대 처녀 시절 삼익직물 이라는 회사를 다니셨다고 들었습니다.
공장 바로 옆이 금복주 공장이 있다 보니 병 닦는 소리를 많이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엄마의 20대 처녀시절 옛추억을 떠올리시라고 대구를 찾아간 적도 있는데요. 여러번 갔었고, 최근에 간게 4년~5년 전이네요.
동인동 찜갈비는 고기 먹는 것 보다 마늘 양념에 밥을 비벼 먹는게 더 좋았다고 하셔서 햇마늘 나올는 시기에 맞춰서 동인동찜갈비골목도 가고
달성공원(4년~5년 전에 갔을때 주변 주차비는 받는데 공원 들어가는건 아직도 무료로 들어간다는거에 놀래고 신기 하셨습니다.),
서문시장, 동산의료원도 오래됬고...
자갈마당(지금은 아파트 공사 하고 있고)은 여자분들에게 위험한 곳이라고 하면서 주변 사람들이 가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안 가셨다고 합니다.
엄마 말씀으로는 비포장도로를 다 걸어서 다녔다고 하더라구요.
대구터미널(지금은 동대구터미널과 신세계가 들어와 있는 곳)이 땅이 푹 꺼져 있는 곳에 있어서 장마철이면 침수 한다고 하시고, 동촌유원지도 걸어서 다니시고~
가로질러서 수성못도 걸어다니셨다고~
엄마의 20대 처녀 시절 때문에 많이 들으면서 자란 저도 이 영상 보니 눈물이 나네요. ㅠㅠ
70년대 원대동에 있었던 금복주 공장과 그 바로 옆에 있던 삼익직물 공장이 있었던 사진이나 영상 같은거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엄마의 옛추억 속에만 있는 그곳을...
저도 노원동 금복주 공장 바로 뒤쪽에 살았어요 엄마 처녀쩍 얘기들 들어보니 그곳에 살던때가 추억 됩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시절 ㅠㅠ
덕분에 잠시 옛생각에 잠겨봅니다😂😂
전 원대동근처 비원교 철길옆에 자랐는데 장마때 매미채들고 달서천 잠수교에
공잡던 기억이 ~~ 아 세월아~~
금복주 공장이 있던곳이 원대오거리였죠 빈공병을 세척하는 하는 소리도 많이 들었고요 삼익직물뿐 아니라 그 일대가 방직공장도 많았고 면직견직 기계 부품공장들도 많았답니다
금복주가 원대동있다가
성서공단으로 간거군요~
원대동 섬유공장에
비산동 염색단지까지~
어릴때 달서천도 생각나네요
@@가라 혹시 삼익직물 회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나요?
지금도 있는 회사인지,
어디로 이전 했다던지,
이름이 바꿨다던지,
회사가 어떻게 된건지 궁금해셔요
추억소환 !! 혹시라도 내 모습이 찍히지 않았나하고 눈 부릅뜨고 봤습니다.ㅎ 감사합니다.
능금꽃 향기로운 내고향이네요 교동시장과 북성로 향촌동 거리 이네요 어떻게 칼라사진이 있네요 국민학교시절에 가본거 같습니다
수창국민학교 3학년때네~~그땐 걱정도 없고 마냥 좋았는데...달성공원을 놀이터 삼아 놀던때 그립다.
^^ 후배님, 반가워요 ~~~
51회 졸업생입니다.
유튜브에서 동창생을 만나니 더 반갑네.
저보다 한살 많으시네요. 달성공원은 친척들 오면 꼭 들르던 코스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작았네요. 과천대공원 동물원은 돌다돌다 지쳐서 그냥 내려오게 되던데..
저는 58회인데 반갑습니다
수창학교 앞에서 우리고모 문방구 했는데
봉덕동 변두리 학교 다니던 시절이라서... 그 때 국민학교 연주 경연대회가서 본 수창국민학교 학생들은 왜 그리 귀티가 나던지...
서울엔 리라학교 대구엔 수창학교...
내 고향 대구 저 시절로 정말 다시 돌아가고 싶다 너무 그립고 그리워서...😂
저당시 중학생이던 시절이라 까마득한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영상 잘 봤습니다 영화 시시리안 기억나죠. 마피아단원들의 뿌리라는 이태리 시칠리섬 출신의 갱단들 얘기를 다룬 저영화 당근 기억납니다
71년도 어머님께서 동산병원에서 간암선고 받고 그 해 가을 하늘나라로 가셨네요 ~ 눈물 납니다
당시 달서구청 뒤 월성아파트5단지 자리 야산에 매장하였는데 이제는 도시화가 되어 그 흔적도 없어졌지요 ㅜ
마리아산에 매장하셨군요 ㅠ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3단지 5단지가 공동묘지터라고 했던거 같은데 맞나봅니다 2000년도에 그쪽에서 17년정도살고 남구로 이사와서 살고 있어요 울딸이 그때 추억을 싫어 해요 삶이 넉넉지 않아서 그래도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데 취업 했어요
참으로 슬픈일입니다
지금세월이었으면
수술하고 어쩜 생존하셨겠지요
위로의 말씀올립니다
마리아산을 아시네요 ㅡ 가무내 앞산이지요 ᆢ@@ililiiiilillliiillliillilili
그립다..저 시절엔 부모님두분다 살아계서서 저 거리를 다니셨을 생각하니 눈물 납니다... 두분다 편히쉬시고 감사합니다
정말 귀한 자료네요...한국전쟁 이후 서울부터 전국에서 대구로 피난와서 살았고 정착을 했으니 대구 인구 바글바글 모든 산업의 메카였던 시절..
중년의 나이를 먹다보니 지나간 시절이 너무 그립습니다, 한번쯤 그시절로 돌아갈수만 있다면....
저는30대 인데요 여기 먼저 태어나신 분들 글 읽으면 . 지금 제가 좀 힘든상황인데도. 여기 남긴 글들 읽어보니 어머니 살아계시고 아버지 살아계시고 지금 이 시간이, 지금 어머니 아버지 다계시는시간 자체만으로 행복한 시간이구나를 느끼게 되네요
저는 71년도때 두살이 이었네요 16살에 3공단 으로 고등학교 때문에 대구로 나왔어요 너무나 어려운 시절이었죠 늘 배고팠고 학교갈때마다 버스비가 없어 매일 걱정을 달고 살았어요 30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놈에 가난을 못 벗어나네요 개천에서 성공하기란 정말 하늘에 별따기 입니다
대신 조금더 내려놓을줄 알고 게으러지만 않다면 먹고 사는건 문제없죠 71년 저때나 지금이나
누구나 실패를 합니다 포기만 하지않는다면 반드시 웃는날도 온담니다🥲🥲
맞습니다
어디론가 가버리시고
볼수없는 부모님
살아 계실때 자주보세요~~^^
고생 많으셨읍니다!
덕분에 후손들이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읍니다!
이런걸 보여주시다니...
어릴적 추억에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추억보정이든 뭐든 현실에 지친사람들이 자신만의 추억에 눈시울 붉히며 감성에 젖느것도 나쁘지않다고 생각함.
그럼요~~~
인정~
1978년 대륜중 2 년때 문화교실로 대구극장에 스타워즈 보러간 기억이 나네요. 학생들로 바글바글 했덕 기억이 아련합니다
대륜학교~신천옆에 있을때인가요
와 그때도 학교에서 영화관으로 영화 보러 갔나요? 유구한 전통이었나 보네요 ㅋㅋㅋ지금도 그런데
와 근데 스타워즈1 이라니 체감이 안된다 세기의 명작을 학교에서 보러 가다니 그때는 스타워즈가 뭔지도 모르고 보러 갔겠지
와..2013년에 입학했는데..ㄷㄷ
78년도 대륜고3학년 음악실 옆에서 무더기로 담배피면 중학생들이 불이야 ~~~ 하고 지나기도 했었지요
아마 1974년인것 같은데 남산동 대도극장에서 이수미씨가 주제가를 부른 여고시절 영화를 상영하는데
그당시 제일여상 3학년에 재학중인 누나가 그 영화를 너무 보고 싶어했는데 당시만해도 고교생이 그정도 수준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다가
교사 합동순찰조에게 걸리면 정학내지는 경고를 당하는데요 부모님까지 학교에 불려가 사과를 하고 할때입니다
그래서 누나는 어머니 바바리코트를 입고 아직 초등학교도 안들어간 저를 데리고 애엄마 인 척하며 극장에서 영화를 다봤는데 아직 어린애였던 저는 재미도 없고 이해도 안되는 영화를 억지로 꾹참고 끝까지 보고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그게 벌써 50년전 일입니다
1971년.... 이런 사진이나 영상들 보면, 대한민국이 잘 살기 시작한지가 얼마 안되었다는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나라와 자식들을 위해서 열심히 사시고 아끼시던 모든 부모님들 너무 너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대한민국이 초심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옛날 교동시장의 골목상가도 보이고 대로변 서문시장의 옷가게 문구점도 보이네요! 어련한 옛추억이 살아납니다...
처녀시절 대구역 뒷편에서 살았습니다 옛 교동시장 대구극장이 무척이나 그립습니다 그땐 부모님 밑에 아무런 걱정없이 철없던 시절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되돌아 갈수없는 그시절 그때가 좋았습니디ㅡ. 추억여행하게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항상건강하십시요
칠성동살았군요 저도거기..
고담대구 ㅋㅋㅋㅋ
@@ah-rang개쉑
대구극장 앞에 토스트 만들어 파는 가게 맛 죽이지요 😂😂😂
거기는 로라스케이트장도 있었지요...
인간은 지나고 나서 그때가 행복했다고 느낀다 고로 지금 내옆에 있는 사람 내 환경을 사랑하며 감사하며 살자 금보다 더 중요한건 지금!
이시대에 살지 않았지만 사진들을 보니 눈물이 날것같아요.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나도 ... 먼가 그리워
멋지네요. 대구에서만 몇백년 살았네요.할아버지의 할아버지때부터 쭉요. 잘봤습니다.
어딘가에 우리 아빠가 있을것 같은… 그땐 총각이셨을텐데ㅠㅠ 지금은 어디에도 없는 .. 맘이 찡 하네요😢
여기 나오는 30대 이상 분들은 대부분 고인이시겠네요. 참 인생사 길지가 않다는걸 느낍니다.
예 화살입니다.....
인생 매우 짧습니다
시간여행자님, 2:02초의 극장은 대구 "한일극장" 입니다. 지금은 "CGV 대구한일"로 운영되고 있답니다.
시시리안 저 영화 보고 싶었는데 못 보고(미성년 불가라 해도 사실은 주머니 사정이 그래서) 어른 되어 TV로 봄. 별 재미 없더만.....
@@youncheolshin6304 저 때는 표값이 현재 물가로 치면 어느정도였나요?
제가 두살때네요~~
장사하는 엄마대신
저를 업어키우신
외할머니가 너무너무
보고싶어요..
휴대폰에 외할머니
사진을 봐도 그리움만 더해지고
너무 너무 보고싶어
김천대덕 산골짜기
산소에 찾아가도
외할머니 향기는 느낄
수 가없고 ...........
20년전에 돌아가셨지만
외할머니의 사랑은
죽는날까지 소중히
간직하렵니다.
제 어린시절
전부셨거든요~~
시골에서 살다가 부모님따라 1975년도에 대구로 이사 왔었는데 73년도에 국민학교(당시는 그렇게 불렀음) 수학여행을 경주가기전에 대구 당일치기로 영남일보(?),달성공원을 구경했던 기억이 납니다..대구로 이사온 뒤 당시 여동생이 5원짜리 핫도그 먹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대구 온지 48년... 부모님,처가부모님,여동생,집사람,학교 친구....제 주위의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세월이 화살 같이 날아가는 듯 합니다.
세월이 금방 지나가네요😂
건강하시고 즐겁게 사세요~~
광음여시..인생 선배님 늘 건강챙기시고 행복한 나날 보내소서..
아련한
옛추억 젖어봅니다
아주 소중한 영상입니다
그시절로 돌아갈수는 없지만
그립습니다
좋은 영상 고맙습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요
만경관에서 아버지와 누나와 벤허를 보앗던기억이 떠오르네요
그때가 그립습니다
아버지 보여드려야겠어요.자료 감사합니다.
70년대 말쯤에 대구 고모님댁에 간 기억이 있습니다.그때 허허 벌판에 아파트단지가 한창 들어서던때 같았어요.지금의 대구와 완전 딴판이었죠.
71년이면 경북중학교 3학년때 이구나...참 많은 세월이 흘렀네....
경고 56회 시군요.
고등학교 1학년 때인데 기억보다 더 낙후한 것으로 보이네요.
시내 중심가는 제법 큰 건물도 있었는데~~~
그당시 젊음을 바친분들께 감사 합니다
국민학교 6학년 ᆢ
아쉬움과 약간의 그리움이
교차되는 순간 이네요 ㆍ
추억여행 은 늘 애잔합니다 ㆍ
어머니 보고 싶어요. 고생만하다 돌아가신 울어머니. 71년도에 영천에서 대구로 이사나왔네요.
영천은 제가 86년 군에 있을때 육본검열로 포사격하러 갔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ㅡ시골 마을에 있던 꼬맹이들 군인아저씨 왔다고 좋아하고 그랬었는데 나중에 위문편지도 받았던 기억이 있네요.
@@paran822 그땐 우리모두 순수했는데,,,,,
저는 71년도 영천중앙국민학교1년 다니다가 다른 도시로 전학갔었지요..
위문편지 나도 보내고 답장도 받고 신기했었는데ᆢ😅
저희는 60년도때 영천오미동에서 월배 희망원밑으로 이사왓어요
1974년에 대구 역에서 달성공원 방향으로 도로포장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메인도로는 포장이 다되어 있었는데, 어떤 도로를 말하시는지? 대구역 지하도(도청방향) 개통 시기 쯤 되는듯한데, 잘못알고 계시는듯..
추억의 대구아가씨. 예쁘장하고 당찬 목소리. 영화 보디가드. 잘 살지 혜정아 😁
아... 할아버지가 동대구역 갈대밭 일때 아버지 한테 저 갈대밭 될수 있는데로 많이 사라고 하면서 돈을 줬는데 아버지가 건설업 하겠다고 수억 써버리고 몇년후 동대구역 생김 ㅠㅠ
화병으로 할부지 돌아 가심 ㅠㅠ;; 옛 생각이 나네요 하 하 하...
국민 학교 6학년 졸업 71년 신도극장 신성 극장 아~ 그립네요!
동영상 감사 하옵니다 💕
신도극장 2편씩 할때 가서 보고 그랬던 추억이 나네요^^
@@paran822 신도극장 뒷공장으로 담넘어가서 극장으로 공짜 영화많이도 봤지.
오지명이 있었죠
@@황덕수-v2p 동인 로터리 신천교 복현동 하며 아~ 그리운 옛날이여!
저희 아빠가 옛날을 그리워하면서 많이 보시던데 20대초반인 제가 보니 마냥 신기하기만 하네요 ㅎ 얼마 시간이 흐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바뀌다니ㅠㅠ
너무나 그리운 가슴가득 아련함만 남아있는 옛공간들 아스라히 사라진줄 알았지만 바래진 사진한장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입니다. 아직도 우리마음은 그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사랑과 함께
저때도 저런 풍성한 과일이 있었다니? 바나나에 토마토까지~ 저는 80년대생인데 한번씩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곤 합니다 정말 그리운 기억
대구 도깨비 시장이나 중앙통 서문시장 약전 골목앞 남문시장 염매시장쯤 되면 저 정도 과일은 진열이 되었습니다. 그 때 벌써 소니 칼라테레비로 AFKN 방송 보던 남산동 부자 동네들도 있었으니...
그시절 남산동에 부자들중 매일신문 사장과 영남재단이사장 서현재단이사장 세명의 집는 500평이 넘었죠
울아부지 연애하시던 시절이겠네요 ㅎㅎ좋은영상 감사합니다 ^^
사진을 보는데 숨이 턱 막히면서 그때 그순간의 흙내음. 길거리의 여러 내음들이 순간순간 떠오름니다.
마치 그순간에 왔있듯이요.
나이 서른 일곱입니다
정말 애매하게 과거도 겪고 지금도 살아가고있지만 아버지어머니랑 보낸시간만큼은 꼭다시 보내고싶었습니다
안되는거알지만 되돌릴수없지만 이렇게 그때의 비냄새, 흙냄새, 중앙씨네마 문어냄새, 버스에 담배냄새, 조그만골목의 양잿물냄새 기억나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옛생각이 새록새록나네요~
저 거리 어디쯤에 나도 있을것 같은...
같은세월입니다.
20대 난 어디서 헤메이고 있을까?
아버지사업이 다망해서
서울로 이사갈려고 잠깐
옛날엔 변두리인.. 만촌동..
살때..그땐 중딩졸업생시절
킹구빵공장... 비포장도로
만촌동뒷동산..봄종달새 우지지고
....방죽에서 낚시드리우고...
저땐 부모님살아계시고...
그러다 다서울로이사왔던 71년
도...새록새록 옛시절... 생각나네요... 그리운 내고향
대구....떠난지 반세기가....
저도 대구떠난지 40년이네요~ 그리운 친구들
73년도 국민학교6학년때 만촌못에서 낚시해서 붕어잡아서 걸어서20분거리에있는 집에가서 아버지 조림해드리면 맛나게 드시던 그시절 어느덧 60십 중반이 되였네 내고향 대구을 떠나 무작정 서울온지도 어년 40년이되어가네요 그리운 어린시절의대구 참그립네요
@@김동락-s6p 만촌못에서 낚시해봤습니다. 어느듯 70이 넘었네요. 휴 ~
킹구빵, 오랜만에 듣습니다.
건빵봉지는 보잘것 없어 보여도 맛은 좋았습니다.
국민학교 2학년때 우리집 근처인 교동시장과 동성로 모습이 아련히 떠오르네 . ..교동시장은 지금모습과 변화가 크게 없네요
62년생범띠. 그땐 동인동에 살았는데. 맟아요 동성로 교동시장. 가까이 살고있었어요
63.토끼띠 .
동덕국민학교 입니다
@@임화자-r2u 중앙극장... 구경은 하고싶은데 돈은 없고,,,,,
중앙극장 바로 붙은집이 우리집 인데
여기에 나오는 어른들 중 지금은 없는 분들이 더 많을 거란 생각에 더 슬프네요...
제가 태어나기전 대구를 볼수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71년도 제가 국민학교 6학년이었네요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님 따라 동산동 동산약국 뒷골목 식당에서 처음으로 소고기 양념구이 먹었는데 ㅡ 쇠고기를 국이 아닌걸 먹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ㅠ
동산약국, 대구에서 제일 잘나가는 약국이었지요...
보고 싶었던 옛날 대구 모습 신기한게 많네유~ ㄷㄷㄷ
저런 돗이 10년뒤에는 눈이 번쩍 뜨일정도로 발전했지. ㄱ
립다. 다시 돌아가고 싶다…
이 영상 나오는 분들 절반은 살아계실까...
저때 서른둘 울아부지는 벌써 돌아가심...
애니콜 탱크 들고 다니시던 울아부지...
스마트폰 사용해보셨으면 정말 좋아하셨을 거 같은데...
모두 건강하소서...
의외로 많이 살아계실겁니다...지금 80대이신데...요즘 한국 사람 평균연령이 80초반이니까...살아계신분도 많을거라고 생각되네요..
이영상보다가 저도 눈물흘리네요 71년 국민학교2학년 시골에서 살다가 대구로 온해는76년
처음왔을때 평리동은 미나리깡이고 연탄제 쓰래기장이였는데~
편지쓸때주소는 경상북도
대구시해서 참 뿌듯했었죠
영상에 중앙로 한일극장이네요
떠나신지30년이된 엄마생각에 눈물이하염없이흘러ᆢ
영상 감사합니다
친구들께 보낼까 합니다
평리동의 추억에 .. 아직도 본집은 평리네거리 쪽 입니다. 겨울 되면 미나리깡 에서 시게트 타고 많이 놀았는데..ㅋ
부모님이 말씀하시길 평리동.. 비산동.. 대구에서도 가장 못사는동네였다고.. 저시대를 살아오신 어르신들 존경합니다.
평리동 제가 태어난곳...모두들 어디선가 잘 살고계시길...평리 국민학교...제 모교
한일극장 ,,,,,, ㅎ
사진속 건물에서 영화본 기억이 나네요 ㅎ ㅎ
BGM과 영상이 너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네요. 좋은 영상입니다.
1:53 한일극장입니다. 90년대 말까지 저 건물이 남아있었어요. 장국영 주연 야반가성 상영 후 다음 상영작 끝내고 철거했었던 것 같아요. 영화가 끝나면 2층 상영관에서 낡은 난간이 있는 계단을, 많은 사람들과 북적대며 내려오던 기억이 납니다.
저때로 되돌아 갈수만 있다면 부모님께 잘해드리고 싶네...
나이가 중년이 되니까 마음이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가네 ㅋㅋ
1970년대 초 국민학교 다녔는데, 누나가 저보다 2년 먼저 국민학교 다닐 때
누나 소풍 갈 때 어머니랑 따라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누나 담임이 저보고 "나중에 니 담임하면 좋겠다"라며 귀여워 해주셨는데,
나중에 제가 학교 들어가서 보니, 소풍, 운동회에 바나나 한송이, 찬합 몇개에 각종 도시락, 미제 맥주 한박스 기본적으로 들어가고,
담임이 남 선생이면 담배 한보루, 여 선생이면 외제 화장품에 봉투까지 줬으니 선생님들 입장에 귀여울 수 밖에 없었죠.
당시 육성회비 한달 300원인데, 새학기 시작하면 1년치 완납하고, 학교 행사 있으면 어머니 와서 도와주고 하니까
부모님 덕분에 국민학교는 아주 편하게 다녔던 것 같습니다
전형적인 후진국의 모습이었죠~ 지금은 사라져서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래도 추억은 추억으로 남으니까. 저도 누나랑 6살 차이나는데 누나소풍때 따라가서 찍은 사진이 있더라구요. 그리운 시절^^
음악이 참 좋네요 좋은 영상 감사드립니다.
저희 부모님이 대구로 오기 한참전 모습이네요,
시내 안가본지 정말 오래되엇네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사진들이라 그저 신기할 따름~
저 시대에 살아본 적은 없지만 한 번 가보고 싶다.
평리국민학교 1학년때네.평리국민학교 앞 서구청 자리가 그 당시 연못이었는데.아련한 추억...
저는 60년생 남산국민학교 대성국민학교 원대국민학교 최종졸업
계성중1년 서울로 전학
서울서 중고등나오고
서울 모의대졸 피부과 전문의 대구처자와 결혼
군의관 공군 대구 K2 비행단 3년 복무 지금 제대후 서울서개원
남산국민학교때 평리동으로 소풍갔습니다
그때 그기는 산 들판 완전 야외였는데
큰못이라고 불렀죠. 도롱뇽들이 많았던...
그당시 달성군은 대구시가 아니였는데 달성군청이 서부정류장 바로 앞에 있었고 서부정류장이 바로 대구시와 달성군의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70년대의 일이고 1960년대 서부정류장은 지금의 대구대
(당시 한국사회사업대 (한사대) 당시는 사회복지라는 용어가 없어 사회사업이라고 했음) 대명동 캠퍼스 부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캠퍼스 부근은 공동묘지와 논밭만 있었습니다
@@준삼-b7x 매립고 아마 아파트 다 들어섰지요. 연애상남밭(향나무밭)도 있은 기억
@@이통영-y9v 1960년대 서부정류장은 내당주차장이라고 했지요.내당사거리부근.. 한사대가 인근에 있기는 했지요. 거긴 대명동이고..
우리 어머니 아버지 결혼하고 1년 지난 뒤 큰형님 태어날때 대구네요 ....5년 뒤 저도 경북 고령군에서 태어나서 대구로 왔지만 그때 어릴적 대구가 그립습니다.
내가태어나던해
부모님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생각하니 눈물이납니다
힘들어서. 술드셨겠죠 늘 술드셨는데..
1971년 화려한 대도시 모습이네요! 저는 같은 해에 전기가 처음 들어오던 깡촌에서 태어났읍죠!
내가 3살때구나 저때는 엄마 아버지 두분다 살아계신때 큰언니 둘째언니 할머니 모두다 보고 싶다~가슴이 뭉클하고 그리워 진다~~
지금 대구 사는데 옜날 저런 시절이 있었다는게 정말 신기하네요...
지금 교동 한일극장 북성로 대구역전앞인거 같습니다.
영상보니 저 어릴때 우리동네인데 찢어지게 가난하던시절이라 보는내내 울컥합니다. 참으로 귀한영상 감사합니다..
1971년도 풍경이 아니다.. 71년, 대구역 근방은 정비가 되었고, 차도는 전부 포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70년대 초에 동대구역이 새로이 완공된, 현대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네요! 그리고 반야월 여관골목은? 그때도 대구백화점은 있었던 같은데?
맞아요 60년대 사진들고 온거같음
69년도 경주 기차타고 소풍갓는데 선생님께서 기차역 이 16개라고 .. . 증기차는 아닌것 같네요 60년대 한표드립니다.
@@미르말뫼사람 반야월이 아니고 반월당 여관골목 이었겠지요..
한미여관,안도여관..^^
나중 이골목이 찌짐집 골목으로 바뀌었고..ㅎ
영화제목이 시시리안인데 1969년 영화라고 나오는것보니 비슷합니다
0:43 지금 시내 따로 국밥집 건너편에 있었는 박성규비뇨기과 의원이 보이네요. 71년이후 30년 지난 2001년까지 가끔씩 갔는 병원이네요. 그 당시 일흔이 훨씬 지난 의사 선생님여섰는데 지금은 고인 되었겄네요. 2:14 신한아케이드 지금은 일흔된 둘째누님이 거기서 일을하셨는데 지금 교동 먹자골목 입구에 있었던 아케이드입니다. 기억이 나네요.
교동시장 골목 그 공간속 어디에 아버지가 계신다 생각하니 감회가....
5:23 능금이 아니고 토마토 같은데요
귀한 추억의 영상 감사합니다^^
6:00 말이 끄는 수레 달구지는 70년대 후반까지도 있었죠. 칠성시장 근처에 가면 달그락 거리는 말발굽소리내며 가는 달구지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때 그 말들 이미 세상에 없겠지만..
옥산초등다닐때…칠성동 건널목에서 철로위에 못올려놓고..납작하게 만든 기억과 느려터진 증기기관차뒤에 매달려서 대구역으로 가던 추억이. 60 년대 후반에….
저는 신암국민. 진짜 납짝해진 못가지고 놀았지. 그때는 놀이문화가 별로 없으니까
옥산초등학교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자리에 있나요?
그대로 있어요…경명여고옆..
철로 위에 못 올려 놓고 놀던 때를 아시는군요~~저도요.
옥산초 옛날 건물은 싹 다 허물고 새로 멋지게 지었더군요~~
이거참...눈물 이... 대한극장. 시장길...사라진 기억인줄 알았는데...
70년도 국민학교 들어가기전 미도극장 부근 시장에서 길을 잃어 형아들 누나들이 인근 남산파출소에 데려다준 기억이 나네요!
71년도 국민학교 1년때 남산동(구 대명동) 미도극장뒤 고모집에 들렸던 기억이
그리고 좁디좁은 달동네 골목 등
1969~1972년에 군대 K2에서 군 생활 했는데 이것 보다 더 발전 했던것 같은데 , 옛날에 그 많았던 사과 농장은 하나도 없더군. 불로동 오이밭도 없네요
저도 2군사령부 에서 여군 하사관 시절 69~72년도23세 꽃다운아가씨였네요
지금도대구에서 50지난세월 쫄굴쫄굴 할머니입니다
그때 그시절 나도 그곳에 있었다. 사람냄새 물신 풍기는 아름다운 정감넘치는 그시절이였다.
저 시대땐 많이 어려 거리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한일극장만은 또렷이 기억나네요^^ 그리고 교동시장의 모습도 어렴풋하게 비슷 하고... 바나나나 토마토도 요즘은 없는 품종이라 그맛이 그립네요^^
71년도때면 국민학교 2학년때네요.
외가집 조치원을 가기위해 기차를 많이 타고 갔는데 학교가기전에 동대구역이 아니라 대구역에서 탔을듯 하네요. 추억의 대구, 세월은 흐르고 부모님은 연로하여 돌아가시고 저희도 늙어가고 추억은 남네요. 저 동성로 거리를 수없이 다녔을텐데 기억엔 별로 없네요~
대구oo극장----> 한일극장(현재 한일CGV)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보면 마지막 한일극장 모습나와요.
몇번 가서 본적 있었는데 ㅎ
그시절 약속장소.대백 남문이랑
@@이차돌-h4e 중앙파출소
한일극장 그보다 더 앞에는 '키네마극장'이라고 했지요.
대구 사람이 아닌듯...
1971년이면 내가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인데 편집된 사진들이 다 그때 사진인지 모르겠네요. 일부 사진은 너무 오래된 거같고 아무튼 지금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1967년부터 1972년까지 대구에서 학창시절을 보내습니다. 진짜 오래된 기억의 저편입니다.
저때가희망도있고좋았습니다
저 시대에 살진 않았지만 뭔가 영상이 아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