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 박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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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26 бер 2024
  • 봄은 짧지만 봄노래는 넘쳐납니다. 누구나 봄 앞에서 흔들리기 때문일텐데, 비라도 흩뿌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박인수의 ‘봄비’가 봄노래의 대영사가 아닐까요? 사실 박인수가 불러 유명해졌지만 작사 작곡자인 신중현을 빼고는 얘기할 수 없는 노래입니다. 1969년 그가 이끄는 밴드 덩키스의 앨범에서 이정화가 먼저 불렀습니다. 그러나 박인수가 다시 불러 히트시켰습니다.
    국내최초 최고의 소울(soul)가수 박인수는 가슴을 파고드는 창법으로 soulful한 느낌을 극대화시켜 이 노래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이정화가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를 불러오는 목소리라면 박인수는 바람에 흩뿌리는 '봄비'를 부르는 가수입니다. 이후 김추자, 장사익, 인순이, 체리보이, 홍서범, 하현우 등이 끊임없이 리메이크하면서 불후의 명곡이 되었습니다.
    함북 길주 태생의 박인수는 1·4후퇴 때 부모와 헤어져 껌팔이를 하다가 미군부대에서 일하게 됩니다. 14살 때 미국으로 입양을 간 그는 켄터키 중학교와 베어모어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러나 향수병 때문에 21세 때 한국으로 돌아와 미8군 무대서 노래하던 그는 신중현을 만나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결혼과 이혼, 대마초로 인해 인생의 굴곡을 겪었던 그는 훗날 극적으로 어머니도 찾았으나 잦은 투병으로 평탄하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창법으로 부른 그의 ‘봄비’는 우리 가슴속에 봄의 문신처럼 남아있습니다.
    봄비
    신중현작사 작곡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면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면
    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달래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내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봄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면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면
    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달래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내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봄비
    나나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나
    봄비가 내리네
    봄비가 내리네
    봄비가 내리네
    봄비가 내리네
    박인수의 '봄비' 처럼 독특한 느낌을 받은 곡도 드물 것입니다. 이 한곡으로 박인수는 전설이 됩니다.
    감성이 봄비처럼 푹 젖어 드는 한국적 R&B의 태동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신중현을 비롯해 이후 많은 가수가 이 곡을 불렀지만 박인수를 넘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곡을 가장 먼저 받아 취입한 것은 이정화였으며 두번째로 부른 것은 신중현(1970)이었고, 박인수에 이어 네번째로 부른 김추자의 '봄비(1971)'도 좋았습니다. '봄비'라는 곡이 가수 개인의 개성을 살리기 좋은 곡인데다가 박인수의 해석에 그 뒤에 따라오는 가수들이 평범하게 부르지 못하게 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한국 Rock의 대부 "신중현 선생"의 회고록에 나오는 박인수에 관한 내용입니다. "내 사단 최초의 남자 가수 박인수가 절창(絶唱)하던 모습을 영영 잊지 못 한다. 두 손으로 뭔가 쥐어 짜 올리는 듯한 특유의 무대 매너, 거기에 완벽한 흑인 영어 발음등 박인수는 그야말로 한국화 된 흑인이었다.
    그와 맞닥뜨린 곳은 미 8군 소속 군인들을 상대로 하는 서울 이태원 입구의 클럽 ‘NX-1’이었다. 1967년 어느 날 거기서 연습을 하던 중 박인수가 자기를 한 번 테스트 해 달라며 찾아왔다.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소울(soul) 음악을 부르는 사람”이라는 답이 금방 돌아오는데, 자신감이 느껴졌다.
    테스트를 해 보았다. 'Temptations'의 ‘My Girl’과 'Otis Redding'의 ‘Dock Of The Bay’ 같은 곡은, 한 번 불렀다 하면 그야말로 흑인이 울고 갈 정도였다. 거기에다 'Platters', 'Sam Cook', 'Ray Charles' 등 흑인 가수의 노래라면 못 하는 게 없었다. 바로 그날 저녁 무대에 세웠다.
    그런데 그 클럽은 원래가 백인 전용 클럽이어서 흑인들은 원한다면 문 간에 서서 음악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흑인 한 명이 문간에 붙어 음악을 훔쳐 듣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가 노래를 듣다 말고 갑자기 밖으로 뛰어 나가는 것 아닌가. 온통 새까맣게 보였다. 그의 말을 듣고 우르르몰려 온 흑인들은 박인수의 ‘모션’ 하나 하나에 박수를 치고 난리였다. 게다가 박인수가 흑인 특유의 은어(slang)를 몇 마디 구사하자 그들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거기는 백인 클럽. 노래를 끝내자마자 지배인이 오더니 당장 나가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 미국의 위선을 절감했다. 나는 박인수를 연세대 앞의 내 사무실로 데려갔다. ‘봄비’만 갖고 1주일 내내 연습 시킨 뒤, ‘펄’과 '김추자'의 히트곡을 섞어 음반을 한 장 냈다. 뒤이어 시민 회관에서 가진 무대는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봄비’ 후렴 부분에서 무릎을 꿇고 땅을 치며 뽑아 올린 절창에 공연장이 떠나갔다. 국내 최초의 소울 무대였다. 아마 어릴 적 기지촌에서 자라 그 곳 무대에서 봐 둔 듯 했다. 지금도 사람들에게는 박인수하면 ‘봄비’다. 미 8군이 철수하고 난 뒤에도 박인수를 주변의 비공식 무대에 데리고 나갔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졌던 6개월 간의 무대였는데, 흑인들은 그의 언행하나하나에 죽고 살았다. 요즘 흑인들이 여대생들한테 인기가 있다던 데, 당시 ‘흑인보다 더 한 흑인의 영혼’을 지닌 박인수에게 쏟아졌던 열광은 아마 지금보다 더 했을 거라 믿는다. 그를 가까이서 보고 싶어 하는 여성 팬들에게 납치되는 일마저 종종 있었으니,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여자들을 실제로 보고 많이 놀랐다. 안타까운 것은 여자에게 너무 인기가 너무 많다 보니 사생활이 흐트러진 점이다. 하기 사 박인수의 삶이란 게 ‘브레이크가 없는 것'이었다. 박인수가 속해 있던 그룹 ‘퀘션스’가 해체된 것 역시 스타로 부상하고 난 박인수가 활동을 소홀히 했던 탓이 크다. 나의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활동 금지된 그는 두 차례의 결혼 실패 후 여지없이 망가지고 말았다. 박인수는 태생적으로 슬픔의 영혼을 갖고 태어났다. 한국전쟁 때 고아가 된 그는 어린 시절 미국에 입양된 후 귀국했으나, 한국과 미국 어디에도 정(情)을 붙일 곳이 없었다. 미국에서 난 데 없이 혈육이 찾아 왔다는 등 알 수 없는 소문만 뒤를 이었다.
    1980년대 “몸이 아프다. 도와 달라” 며 종종 나를 찾더니 1995년 후배 연예인들과 대마초로 구속되고 말아 안타까운 마음 뿐 이다. 그를 마지막 본 것은 1997년 후배들이 잠실 체조 경기장에서 마련한 나의 헌정 공연 분장실이었다. 그는 말없이 나의 손을 으스러질 정도로 잡더니 돌아갔다. 그래도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까? 2002년 6월 후배들이 저혈당 등으로 고생하는 그를 위해 ‘박인수 사랑의 콘서트’를 열었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이미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명의 내 사단 멤버를 떠나보냈다."
    2022년도 현재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 힘겹게 투병 중입니다.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라는 봄비의 노래 가사처럼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10년 전부터 지병인 알츠하이머, 파킨슨 질환 등이 심해지면서 집에서 투병을 이어오고 있으며, 병세가 악화해 걷지도 못한 채 온종일 누워 지낼 정도로 쇠약한 상태입니다. 부인 곽복화(72)씨는 “대화는 잘 안 되는 상황인데도 가끔 당신의 노래는 기억하고 흥얼거린다”고 합니다. 10년 전 재결합한 부인 곽씨는 거동을 못 하는 남편 박씨를 간병인 없이 홀로 보살피고 있습니다. 생활보호 대상자인 박씨 부부는 현재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방 두칸짜리 월셋집에 살고 있으며, 정부에서 지원하는 기초생활수급비로 연명하는 생활 수준이라고 합니다.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동료 및 후배 가수들이 박씨를 돕기 위해 뭉쳤습니다. ‘목화밭’을 불렀던 ‘하사와 병장’ 출신 재즈 가수 이경우씨가 앞장서 자선음악회를 강서구 화곡동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아트홀에서 열었습니다. 이경우(71·설악문화창조 대표)씨는 “한국 솔 음악의 대부격인 박인수씨는 한국 대중 가요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개척한 인물”이라며 “딱한 형편에 제대로 된 요양이 힘든 가운데 중환 속에 투병 중인 박인수 선배가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후배 음악인들이 정성을 모아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평북 길주에서 태어난 박인수는 5살 때 같이 월남한 어머니와 열차에서 뜻하지 않게 헤어지면서 전쟁고아 신세가 됩니다. 이후 어린 박군은 어머니를 찾기 위해 수시로 열차에서 노래를 부르고 다녔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 미군의 눈에 띄면서 인생 2막을 맞게되고, 소년의 남다른 노래 솜씨를 눈여겨본 이 미군이 제대하면서 박군을 미국 가정으로 입양했습니다.
    그는 이후 청소년기를 미국 뉴욕에서 보내고는 청년이 된 후 한국으로 돌아와 미8군 클럽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중 ‘신중현 사단’에 합류했습니다. 이후 신중현씨가 작사·작곡한 ‘봄비’를 발표하면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후 그는 대마초 파동, 이혼 등을 겪으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게되고, 급기야 가사를 자꾸 잊어버리는가 하면 저혈당 증세로 쓰러지는 일이 반복되면서 1990년대엔 노래를 접고 무대를 떠났습니다. 이후 경기도 고양시의 한 교회가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에서 지내다 2002년 4월 갑자기 쓰러져 중환자실에서 입원하기도 하였습니다. 치료비도 없었던 당시 박씨의 사연을 접하고 그의 근황을 언론에 알리고 동료 가수들과 자선음악회를 여는 등의 방법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 바로 이경우씨였습니다. 이후 췌장 종양 제거 수술과 병원 치료를 거쳐 건강을 추스른 박씨는 이후 요양원 생활을 거친 뒤 2012년 부인 곽씨와도 40년 만에 극적으로 재결합을 합니다. 박씨의 이런 굴곡진 삶은 같은 해 KBS 1TV ‘인간극장-봄비’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다시 건강이 악화한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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