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전속결로 공격을 감행하다보니 공성장비를 갖추지못하고 오로지 병력만 축차적 투입을 할수밖에 없었다고 다른 기록을 본적있음. 그리고 추운날씨, 안개, 잦은비 등이 아군에게는 불리하고 성안의 일본군에게는 유리한 조건이었다 함. 그리고 조명연합군 병력이 성을 포위 섬멸할정도로 충분한것은 아니었다고도 함. 그리고 울산성이 워낙방어에 잘하도록 설계되어있어 쉽게 함락시키기도 어려웠다고 함.
나는 학성공원(왜성)바로옆에서 태어난80대할베인데...우리어릴때 들은예기로는 가등청정이가 공원위에있는 바위구멍에 말오줌받아먹었다고들었다 그리고 공원동남쪽에는 태화강의 물이흘렀다고하고 그강물을 식수로했다고들었고 그곳에는 배를접안하는선착장도있엇다고하고 건너편 학성뒤산에는 조 명 연합군의 군사들이 대치했다고했지요......,
우리발음으로는 좀 그렇지만 이당시 명군 지휘관중 한명인 마귀가 참 훌륭한 장군이었다고 생각하네요. 조선인을 살해약탈한 자기부하들을 오히려 선조는 말리는데도 처형하고 이순신, 권율같은 조선 장수들에 대해서도 엄청 존중도 해주면서 남의나라 전쟁인데도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장군이죠. 왜군은 축성이나 전투에 있어서는 진짜 초베테랑 급이었다고도 생각됩니다. 비록 남해안에 짱박혀있었다곤 하지만 그들의 전투력은 조명군이 쉽게 극복할 수준은 절대 아니죠. 다만 보급능력은 양자모두 문제가 있었다고 봐야겠죠. 전에 본 글은 이당시 가토가 북상을 멈춘 이유는 사실 임진년당시 함경도에 가서 겪은 살인적인 추위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더군요. 대부분 일본에서 온난한 지역출신인 이들이 영하 30도를 견디는것 자체가 지옥이고 조선 이북쪽엔 가난한 조선에서도 더 열악한 지역이라 현지조달은 커녕 일본 본토에서 직접 날라줘야하는 고난의길을 과연 확실한 대책도 없이 그것도 임진년당시보다 훨 준비가 잘된 조선의 방어진도 뚫으면서 간다는것 자체가 불가능이고 그냥 조선 남도만 차지한다는 정유재침 목표가 가토측도 강력히 주장한거라고 생각합니다. 좀 다른 말이고 초딩에게나 할말같지만 그래서 애초 당하지않게 튼튼히 대비해야하죠. 개인적으로도 남에게 심하게 당하고 나중 갚아주겠다고 해도 그게 절대쉽지않죠. 괴롭히는 상대는 나보다 엄청 강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인간들이 내가 한짓 미안하다고 그냥 맞아줄리도 없는것이고.. 그럴 양심있으면 애초 일을 벌릴리가 없는것이고 그게 인간의 추악한 그러나 엄연한 본질이니.. 이당시 조선은 가토에 대해 사무친 원한을 갚고싶은건 너무나 당연지사지만 가토가 그렇다고 내가 잘못했으니 순순히 목을 내놓을리가 없죠. 그리고 복수할려면 역시 충분히 준비하고 적에 대해 많이 알아야한다는거.. 당시 왜성구조를 거의 몰라 특히 초반에 참살당한 조명군의 작전을 보면 좀 안타까워서요..
@@이윤석-x9b 왜성의 구조를 안다해도 많은 병력들을 쏟아부어야 해볼수 있다 정도여서... 임란후 도요토미군과 도쿠가와군의 천하를 두고 벌어진 싸움에서 도쿠가와군이 도요토미군과 일가가 농성하고 있는 오사카성 공력시에는 임란때 조선에서 노획해온 화포들을 동원 공성전에 사용했다고 함
조선의 울산성 전투의 기록을 보면 명군이 숫자는 훨씬 많았으나 성 공략에 주로 조선군이 출정했고 왜성의 구조를 파악하지 못한터라 많은 피해만 입고 철수하길 반복 나중에 울산성에서 철수한후 조선군은 남은 자들의 숫자를 보고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는 기록이 있음 울산성 전투를 양측에서 크게 언급이 없는건 조명 연합군측에선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전 왜군쪽에선 가토군을 구원하긴 했으나 워낙 궁상맞은 농성전에다 6만에 달하는 지원군을 동원하고서야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는 것때문에 서로가 수치스럽다 여겨 중히 다루지 않았음 이후로도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이 쌓은 왜성을 끝내 공략하지 못하고 종전
@@김선홍-c7v 울산성 공략에 직접적으로 동원돼서 왜성 입구까지 공략해서 들어간 병사들은 조선군 명군 할것없이 거의 살아남은 자가 없었음 왜성의 구조상 방어에는 극강의 구조라 어렵게 성문 입구를 돌파해 들어가도 꺾어들어가는 통로에 사방에서 조총과 화살을 몸을 숨긴채 날릴수 있는 구조로 왜성을 공략하는 군대는 많은 희생을 치를수밖에 없었음 그래서 임란내내 조명 연합군은 남해와 동해 일부에 건설된 왜성들을 하나도 깨부수지 못했고 공략은 모두 실패했음 울산성도 어디까지나 가토군의 철수지 함락이 아님
@@김종구-d8w 어떤 사람들은 순천성 전투에서 장도해전만 톡 떼어서 장도 해전은 이겼다며 어떻게든 이순신 장군님에게 무승부나 패전을 매기지 않으려고 하는데... 솔직히 장도 해전도 엄연히 순천성 전투의 일부였고 애초에 조명 연합함대가 순천성 함락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그 한 축으로서 출정했다는 점을 볼 때 (연합작전의 의미를 생각해야 됨) '순천성 전투는 패배여도 이순신의 패배는 아니아' 이렇게 선 긋는 거 좀 억지 쉴드 같음. 언제부터 어떤 전투의 승패가 전투 참가자 각자의 성과에 따라 개별 적용되었음?
진짜 많이 쳐야 무승부임. 근데 아무리 이순신이라도 처음부터 불가능한 작전이었음. 원래 공성전은 공격하는 쪽이 최소 10배 이상 돼야한다는게 병법 정석임. 조선수군이 상륙작전으로 무려 고니시를 상대로 공성을 해야되는데 당연히 말이 안되기 때문에 원래 유정과 권율 쪽에서도 동시에 공격하기로 했음. 근데 유정이 뇌물먹고 공격하는 척만 하는 바람에 그냥 수군쪽만 새됨. 참작은 충분히 할 수 있다봄. 그리고 시마즈가 도우러 안왔으면 고니시는 분명 바다에서 잡을 수 있었을거라봄.
젊고 인물 좋은 여성 아나운서라든가 고두심 같이 무게 있는 여성 탈렌트가 설명하는 형식이면 ㅡ더 좋았을 터인데 왜 하필 찬반 여론이 너무 뚜렷이 갈라지는 사람인 유인촌이가 주관해서 두고두고 욕을 먹게 만든 것인지ㅡㅡ참으로 안타깝네요ㅡ죄다 다시 촬영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생각이 너무 부족했다ㅡ유인촌~
참 가슴이답답해진다 임진왜란350년전에 몽골군대는 공성장비투석기로 중국과
유럽의성을 깨부셨다는데 400년이나지난저때
공성장비를사용해서공격했다는 공격이야기는하나도없다. 저런작은성을 함락시키지못했다고하니
조명연합군의전투력에 한숨만나온다 정말이지 말이안되는 전투다
저도 이게 궁금하더라고요. 이순신 장군 전투를 보면 화포가 그렇게 약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화포로 성벽은 몰라도 성문을 깨고 공략하는 방식으로 차근차근 전투하지 않은 이유가 뭐였을지 궁금합니다.
@@karlanderson6482 분명 썼을텐데 문제는 일본성이랑 조선성이 구조가 아예달라서 문뿌수고 들어가면 시가전이 아니라, 미로처럼 생긴곳에서 사방으로 공격이 날라옴. 사로병진 말고 하나씩 각개격파 시도했으면 최소 하나는 잡았다고 본다. 네마리 다잡으려다 다놓침
화포 썼습니다.
다만 벽을 뚫는것이 힘들었을뿐
속전속결로 공격을 감행하다보니 공성장비를 갖추지못하고 오로지 병력만 축차적 투입을 할수밖에 없었다고 다른 기록을 본적있음.
그리고 추운날씨, 안개, 잦은비 등이
아군에게는 불리하고 성안의 일본군에게는 유리한 조건이었다 함.
그리고 조명연합군 병력이 성을 포위 섬멸할정도로 충분한것은 아니었다고도 함.
그리고 울산성이 워낙방어에 잘하도록 설계되어있어 쉽게 함락시키기도 어려웠다고 함.
공성장비를 들일많금 명나라가 재정상태가 안좋은 상태임
나는 학성공원(왜성)바로옆에서 태어난80대할베인데...우리어릴때 들은예기로는 가등청정이가 공원위에있는 바위구멍에 말오줌받아먹었다고들었다 그리고 공원동남쪽에는 태화강의 물이흘렀다고하고 그강물을 식수로했다고들었고 그곳에는 배를접안하는선착장도있엇다고하고 건너편 학성뒤산에는 조 명 연합군의 군사들이 대치했다고했지요......,
할아버지 젊은세대같으시네요 ㅋㅋ
학성공원아무생각없이지나첫는데이런역가있엇다니,
동국유치원다닐때 (1965년도)
소풍 갔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후 서울에서 살았고
1981년1월28일 아침 7시경 울산역도착했는데 (TMO) 학성공원 앞에 있었어요 (논산훈련소에서 훈련후 울산경비사배치받았습니다)
🐎 피겠죠
토사가 무너지지 않도록 기울인 것 이라 생각함 .
치열한전투였구나. 이순신장군의 친구였던 선거이장군이 공격선봉에서 순직하셨던 곳이구나. 한맺힌 전황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발음으로는 좀 그렇지만 이당시 명군 지휘관중 한명인 마귀가 참 훌륭한 장군이었다고 생각하네요. 조선인을 살해약탈한 자기부하들을 오히려 선조는 말리는데도 처형하고 이순신, 권율같은 조선 장수들에 대해서도 엄청 존중도 해주면서 남의나라 전쟁인데도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장군이죠. 왜군은 축성이나 전투에 있어서는 진짜 초베테랑 급이었다고도 생각됩니다. 비록 남해안에 짱박혀있었다곤 하지만 그들의 전투력은 조명군이 쉽게 극복할 수준은 절대 아니죠. 다만 보급능력은 양자모두 문제가 있었다고 봐야겠죠.
전에 본 글은 이당시 가토가 북상을 멈춘 이유는 사실 임진년당시 함경도에 가서 겪은 살인적인 추위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더군요. 대부분 일본에서 온난한 지역출신인 이들이 영하 30도를 견디는것 자체가 지옥이고 조선 이북쪽엔 가난한 조선에서도 더 열악한 지역이라 현지조달은 커녕 일본 본토에서 직접 날라줘야하는 고난의길을 과연 확실한 대책도 없이 그것도 임진년당시보다 훨 준비가 잘된 조선의 방어진도 뚫으면서 간다는것 자체가 불가능이고 그냥 조선 남도만 차지한다는 정유재침 목표가 가토측도 강력히 주장한거라고 생각합니다.
좀 다른 말이고 초딩에게나 할말같지만 그래서 애초 당하지않게 튼튼히 대비해야하죠. 개인적으로도 남에게 심하게 당하고 나중 갚아주겠다고 해도 그게 절대쉽지않죠. 괴롭히는 상대는 나보다 엄청 강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인간들이 내가 한짓 미안하다고 그냥 맞아줄리도 없는것이고.. 그럴 양심있으면 애초 일을 벌릴리가 없는것이고 그게 인간의 추악한 그러나 엄연한 본질이니.. 이당시 조선은 가토에 대해 사무친 원한을 갚고싶은건 너무나 당연지사지만 가토가 그렇다고 내가 잘못했으니 순순히 목을 내놓을리가 없죠. 그리고 복수할려면 역시 충분히 준비하고 적에 대해 많이 알아야한다는거.. 당시 왜성구조를 거의 몰라 특히 초반에 참살당한 조명군의 작전을 보면 좀 안타까워서요..
ㅇㅡ.
,😮,
+정기룡장군+한명련장군
정문무의 북관대첩이후
왜성의 축성기술..
@@이윤석-x9b 왜성의 구조를 안다해도 많은 병력들을 쏟아부어야 해볼수 있다 정도여서...
임란후 도요토미군과 도쿠가와군의 천하를 두고 벌어진 싸움에서 도쿠가와군이 도요토미군과 일가가 농성하고 있는 오사카성 공력시에는 임란때 조선에서 노획해온 화포들을 동원 공성전에 사용했다고 함
@@스뎅깡통
세키가하라 이후 오사카 공방성싸움에서
그당시 천하의요새라 불리는 오사카성은 축성기술뿐만아니라 2중3중으로 둘러있는 해자의역활이 컸다합니다 오사카공방전은 1차2차 싸움자체로 함락시킬수없던 도쿠가와측에서 협상후 해자를 매우기도하고 전황상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승산이없어서 히데요리 가신및 엄마가 항복을하게되죠
지금 울산성이 현재의 학성왜성이지요.. 현재와 달리 당시에는 태화강이 학성왜성 바로 밑에까지 있어서.. 보급선이 오기에 유리했죠.. 구원군이 강을 타고 왔을시 도망치기도 좋구요..
성자체가 크지않기때문에 그리고 돌산위에 지은 성이라.. 당연히 우물이 없습니다.. ㅎ
이런 영상좀 제발 많이 올려주세요 넘 재밌음
ㅈㅁ졸라 없다.
2002년8월3일방영된 안시성편도 올려주세요
가토 기요마사가 용장이긴 하네요 쿠마모토에서는 지금도 수호신급으로 숭배되고 있는 인물이죠 그가 울산성전투 이후 그때의 경험으로 만든 쿠마모토성 또한 가볼만 할거같습니다
친왜매국노들이 너무많다
애초에 일본에서는 무장이 아니라 성 축조와 토목공사로 더 유명함
울산성에서 죽을고비 넘기고 구마모토 성안에 우물을 100개 이상인가 파고..다다미도 고구마줄기로 만들었다하죠..
개놈
일단 키가 너무 작아 콤플렉스였고 그걸 만회하기 위해 높은 투구를 썼음. 그에 비해 매우 잔인하고 포악하여 코와 귀를 베어 바치는데 열정적이였음.
좀 애들 정서가 원시적이랄까. 문명화가 덜되었다고 봐야할까, 악랄한짓을 행하는데 거리낌이 적다 일본 쟤들은 지금도.
전국시대 겪으며
보고 자라고 전장터에서 봐왔던게
시체, 수급 등이니
사람 죽이는건 그냥 밥먹는 거랑 같은 하루일과였겠지요
본방 당시에 우연히 처음 부분을 봤다가 손에 땀을 쥐게 해서 끝까지 봤는데...
불멸의 이순신에서 눈여겨 보니까 이 내용 그대로 묘사함.
그림체 개귀엽넼ㅋㅋ
49:45 사지마 이끼고 교수님 여기에도 출연하셨군요 ㅋㅋ 저 당시엔 염색 하셨네요 ㅋ
누구신데요??
조선의 울산성 전투의 기록을 보면 명군이 숫자는 훨씬 많았으나 성 공략에 주로 조선군이 출정했고 왜성의 구조를 파악하지 못한터라 많은 피해만 입고 철수하길 반복
나중에 울산성에서 철수한후 조선군은 남은 자들의 숫자를 보고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는 기록이 있음
울산성 전투를 양측에서 크게 언급이 없는건 조명 연합군측에선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전 왜군쪽에선 가토군을 구원하긴 했으나 워낙 궁상맞은 농성전에다 6만에 달하는 지원군을 동원하고서야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는 것때문에 서로가 수치스럽다 여겨 중히 다루지 않았음
이후로도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이 쌓은 왜성을 끝내 공략하지 못하고 종전
남은 자들의 숫자가 어땠ㅇ요?
@@김선홍-c7v 울산성 공략에 직접적으로 동원돼서 왜성 입구까지 공략해서 들어간 병사들은 조선군 명군 할것없이 거의 살아남은 자가 없었음
왜성의 구조상 방어에는 극강의 구조라 어렵게 성문 입구를 돌파해 들어가도 꺾어들어가는 통로에 사방에서 조총과 화살을 몸을 숨긴채 날릴수 있는 구조로 왜성을 공략하는 군대는 많은 희생을 치를수밖에 없었음
그래서 임란내내 조명 연합군은 남해와 동해 일부에 건설된 왜성들을 하나도 깨부수지 못했고 공략은 모두 실패했음
울산성도 어디까지나 가토군의 철수지 함락이 아님
패전이라기보다 공략 실패인데 이때부터 공수가 서로 바뀌었다는게 중요 결국 방어적 전투만 벌이다 도망감
가토...저때 보냈어야 되는데...에...휴..아까비!
죽이기 일보직전까지 간 애들은 많은데 매번 딱 한발짝이 부족했다. 진짜 사람힘으로 어찌못할 운이 라는게 확실히 존재함.
자주국방 합시다.
울산성을 부수어 울산왜성과 서생포왜성을 지었다고 하지.... 그렇다면 그 성을 부수어 울산성을 복원하는게 맞아
지금 학성공원 올라가면 작은 연못 있던데? 그건 나중에 공사 한건가요??
아 니 저 왜성에 우물도 없었단얘기? 식수와 식량보급은 전쟁할때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저럼 당연히 장기전가면 패배할 수밖에
저 울산성에서 다 죽어가던 가토를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구해줬죠~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니말대로라면,
신라도 스키타이계니깐 인도이란계역사지 왜 신라만 한국역사라고함?? 해명좀 해보셈 ㅋㅋ
같은 경우인데 서로 다른 개념을 대입해서 말하고있노 ㅋㅋ 고구려백제가 중국역사면 신라도 인도•이란의 역사지 ㅋㅋ 말에 모순이 있네 ㅋㅋ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선비면은 동호 몽골걔쪽인가여? 아무래도 고구려 이미지 자체가 야만족 같은느낌이 잇는데 반도 남부에 삼하민족과 전 다를거라고 생각함
일본인들은 이 울산 전투를 아주 처참하게 기억하는거 같습니다. 일본 전국시대.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름임. 그들은 울산이라 하지않고 우루산이라고 하는데 우루산데와...(울산에서는...)하면서 그 전투를 회상하곤 하더군요
우리나라랑 중국은 진 전투라서 대중들이 거의 모르는 것 같아요
일본이졌다고도할수없는데 일장수들은 왜 순천울산등을포기해야한다고 도요토미에게 보고했을까요
고립된채 각개격파 당할까봐 그런거 아닐까요
조명 연합군이 홈의 잇점을 안고 몰아 붙엿으니
도망 갔으니까 지지 않고 끝났지 억지로 버티면 몰살이니까요.
저때 가토기요마사를 꼭 처죽였어야 하는데…
하긴 뭐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성 버리고 도망쳤다고하니 이긴거나 마찬가지지 뭐
그래서 울산왜성 점령함? 결국 전쟁끝날때까지 점령 못했잖아. 그럼 진것이지.
성벽을 .......하나 하나 ..깨부셨어야 ㅠㅠ 아프넹
경상도에선 가등청정 모르는 사람이 없을정도로 악랄하다고 어릴때부터 전해들은 기억이 남.
쾌지나칭칭나네~~~
이때 적장의 목을베어서 돌아가지 못하게햇으면 일제시대 치욕을 겪지 않앗을텐데 역사는 되풀이된다는말 뼈져리게 느낍니다. 뼈아픈 교훈.
조총병이 주력인줄 아는대.. 실제로 왜군의 20%만이 조총병이였습니다.. 왜란이후 조선군은 조총의 위력을 겪은뒤라 조총병의 비중을 40%까지 올립니다.
아는대-->아는데
참 서글픈전투력이다. 울산왜성하나공략못하는전투력으로 저러니뭘하겠나?
징기스칸이울고가겠다 400년전에공성격파투석기를사용 모든성곽을부수었는데
왜성의구조를몰라서 격파가어려웠다 웃음도안나오는 전투력이다
진심 몽고군이 투석기 들고와서 성 다때려부수면 아무리 왜성이라도 바로무너짐 ㅋㅋㅋㅋ
성은 보급을 끊고 시간만 끌면 되는데 무리하게 적을 함략 시킬려 하다보니 무리한 희생이 따른것이다
애초에 무리한 공격때문에 조명 연합군이 후퇴한게 아니라 후방에서 오는 구원군 때문에 철수한거에요
포위해서 말려죽이는것도 후방을 잘 지킬정도의 힘이 있어야 가능한거
원래 전략은 보급 끊고 물 끊고 말려죽이기 전략이었습니다. 다만 왜군 지원병력에게 역포위 당할 위기에서 희생은 불가피해졌죠
적의 원군이 밀려오는데 어떻게 시간만 끌어요 ㅋㅋ;
대일본제국의 위대한 방어능력을 보여준 전투였다
👍
💜
어차피 쪼그라드는 일본군의 수비 전투. 결정적 전투가 아니다. 임란의 마즈막을 향해가는 과정에 불과. 이 전투땜에 임란이 끝난게 아니다.
기록이 대부분 일본 기록이네요. 조선은 기록을 별로 남기지 않았나 봅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다행히 살아 돌가는 통에 거북선과 이순신에 관한 기록이 남았지
이순신은 현재알고 있는 인물과 달러
“쾌재라, 청정(가등청정)이 나가네” 하던 것이 바뀌어 요즘처럼 쾌지나 칭칭나네로 불리게 된 유래가 있음.
ㅋㅋㅋ [@고구려 백제 중국사들-전라왜구임나 일본사]← 여기에도 니가 댓글 달겠지 ㅋㅋ
오우 증말? 쾌재나칭칭 말이되냐? 흠, 진짜 레알🤔🤔🤔😔
@@motohyun9359 맞아 ㅡ 가토가 강원도에서 물러나자 불려졌지 ㅡ
가사를 보면 불교행사와 관련된 가사가 나옵니다.
불교와 관련된 민요입니다.
임진왜란과는 관련이 없어요.
이 학설은 북한이 주장한거임.
가등청정을 잡아 죽여야지왜 도망가게 만들엇나?
가토 기요마사는 영악한 지략가인데
돌대가리 조명이 잡다가 개피밧지
실력이 안되는데 멀 잡어
전쟁을 하면서 일본이 하나로 단결하고 통일 된거죠? 전쟁 아니면 일본은 나라가 또 찢어져서. 통일 전쟁을 했을것 같은데요
조선족 국가만이 아니고 왜나라도 문제가 많아. 풍신수길이는 조선.명나라 정복보다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는것이 정답이었다.
임진난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났다고 어느유트브방송이 있던데
그거 저기 밑에 친일파시키 같은 애들이 헛소리 하는 유튜브 방송 ㅋㅋ
ㅋㅋㅋ 신라가 중국에 있어다고 하는거랑 비슷합니다. 지식 짧아서
책보고라는 유튜버 아니냐 ㅋㅋㅋㅋ
고대한국인이 일본에건너가서 일본을 건국한것이죠! 고대한국식민지 일본! 수천년전부터 아버지나라 대한민국에 수천년간 약탈 도적 성폭행 고문 학살한점은 안타깝습니다 ~~사죄하고 반성해야합니다 ~~
고구려도 부모나라 부여를 병합했는데 자스가
헛소리 작작해라. 신창성씨록 보아도 일본 귀족성씨 1180개중에서 한국계 도래인계열 성씨는 26%정도다.
중국애들은 중국 복건성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 간거라 하던데 문물 전해주고 우리나라에서는 백제가 했다고 하고
우크전쟁과 비슷한거지.
전쟁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명나라는 전쟁없었는데
막대한 재정이 전쟁으로 허비되는게 오히려 줄었지.
그러니 전쟁을 멈출 이유가 없는거지.
임진왜란 박물관..
이딴거 까지 만든거 참
이 싸움에서 뼈아픈 실패를 맛본 조명연합군은 이후 야심차게 사로병진을 추진했으나 순천·사천·울산 어느 한 곳도 떨어뜨리지 못함. 특히 순천성 싸움은 이순신 장군 커리어의 거의 유일한 실패
이순신 패배? 해전 대 해전?
@@김종구-d8w 어떤 사람들은 순천성 전투에서 장도해전만 톡 떼어서 장도 해전은 이겼다며 어떻게든 이순신 장군님에게 무승부나 패전을 매기지 않으려고 하는데... 솔직히 장도 해전도 엄연히 순천성 전투의 일부였고 애초에 조명 연합함대가 순천성 함락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그 한 축으로서 출정했다는 점을 볼 때 (연합작전의 의미를 생각해야 됨) '순천성 전투는 패배여도 이순신의 패배는 아니아' 이렇게 선 긋는 거 좀 억지 쉴드 같음. 언제부터 어떤 전투의 승패가 전투 참가자 각자의 성과에 따라 개별 적용되었음?
李舜臣输的战役很多
진짜 많이 쳐야 무승부임. 근데 아무리 이순신이라도 처음부터 불가능한 작전이었음. 원래 공성전은 공격하는 쪽이 최소 10배 이상 돼야한다는게 병법 정석임. 조선수군이 상륙작전으로 무려 고니시를 상대로 공성을 해야되는데 당연히 말이 안되기 때문에 원래 유정과 권율 쪽에서도 동시에 공격하기로 했음. 근데 유정이 뇌물먹고 공격하는 척만 하는 바람에 그냥 수군쪽만 새됨. 참작은 충분히 할 수 있다봄. 그리고 시마즈가 도우러 안왔으면 고니시는 분명 바다에서 잡을 수 있었을거라봄.
일본은 백제의 영토이니 한국에 영토를 내 놓아야할 것이다
헛소리 작작해라. 애초에 삼국사기보면 백제가 일본에 왕자를 볼모로 보낸다고 나온다.
울산성 가등청정 가토 기요마사 조명연합군
사천은 소서행장 고니시유키나가
아마도 동남해안변으로 굳히기 들어갈려고 했던 모양이다...한반도의 홍콩처럼 만들려고...하지만 그러기엔 조명연합군이 너무 많았지
전쟁 포로들 조선 사람이 만들어것제 ㅎㅎ
단순 노가다에만 동원되었고 핵심 설계는 전국시대 설계식으로 만든것.
국뽕 차오르냐
ㅔ
호구가 여기서 나오네 들어가면 죽는 곳
악 재수없어
이순신장군의 대왜수군을 괴멸시키고 일본과의 조일전쟁의 대승리로 결말! 전쟁 배상금과 민간인 학살 고문 구타 성폭행 도둑질한것은 제네바협정위반입니다....배상금청구와 사죄하고 반성해야합니다!
ㅂ
촌이 나왔네
그만보자
그때 거만했지
지금까지도
장관할줄 알았겠지
모자란‥
역사는 유구하나 너는 역사를 씨부릴 자격이 없다.
젊고 인물 좋은 여성 아나운서라든가 고두심 같이 무게 있는 여성 탈렌트가
설명하는 형식이면 ㅡ더 좋았을 터인데
왜 하필 찬반 여론이 너무 뚜렷이 갈라지는 사람인 유인촌이가 주관해서 두고두고 욕을 먹게 만든 것인지ㅡㅡ참으로 안타깝네요ㅡ죄다 다시 촬영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생각이 너무 부족했다ㅡ유인촌~
저 당시까지는 유인촌 이미지 좋았음 이미지는 나중에 장관 해먹고나서 망가진거임
유인촌 괜찮은데 ㅅㅂㄹㅁ
유인촌형은 이름부터가 인촌
그건 니가...
이 ㅃㄱㅇ ㅅㄲㅇ
좋은 프로에 밉상이 해설하니 선호도 떨어지네요
우매하고 멍청한 선조로 인해 조선민국 백성
들만 고통 받았죠
오늘날 대통령 누구와 너무 닮아 참 걱정이다
선조처럼 전쟁없다며 낭만질 하다보면 개박살 나는게 양산 소머리의 수준
제발 쫌 유인촌 영상 내려주시오
역시 한중연합군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