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는 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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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20 вер 2024
  • 다음은 김성우 선생님이 쓴 책 『선답禪答』에서 소개된 하나의 글 ‘귀로 들으면 잘못 듣는 법문이니라’ 전문입니다. 글을 먼저 읽고 영상을 보시길 권장드립니다.
    ◎◎◎
    1939년 동안거 해제 때였다. 몽술(원담) 행자가 만공 노스님께 나아가 절을 하니, 만공 스님이 물었다.
    "네가 누구냐?"
    "몽술이라 합니다."
    이곳에 무슨 일로 왔느냐?"
    "노스님의 법문(法門)을 들으러 왔습니다."
    “법문을 어디로 듣느냐?"
    "귀로 듣습니다."
    "귀로 들으면 잘못 듣는 법문이니라."
    "그렇다면 어디로 듣습니까?"
    노스님이 쥐고 있던 주장자로 행자의 머리를 한 번 '딱!' 때리고 물었다.
    "알았느냐?"
    다시 한 번 더 때릴 기세로 주장자를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알았다 하여도 이 주장자를 면치 못할 것이고, 알지 못하였다 하여도 이 주장자를 면치 못하리라. 속히 일러라.”
    행자가 머리를 만지며 "아야! 아야!" 하니, 스님은 주장자를 내리고 박장대소하였다.
    몽술 행자는 훗날 만공 스님의 선문답에 사미나 시자로 자주 등장하는 진성(眞性, 혹은 眞惺), 즉 원담 스님이다. 이 문답은 하룻 강아지처럼 물정(物情) 모르는 행자가 덕숭산의 호랑이를 놀린 격이지만, 만공 스님은 오히려 손뼉을 치며 좋아하고 있다. 막 절에 들어온 어린 행자가 알고 모르고 하는 분별심을 떠나, “아야! 아야!" 하는 무심의 지혜 작용을 드러낼 줄 아는 법기(法器)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문답에서 만공 스님은 법문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디로 듣는다는 말인가? 흔히 '마음 땅'을 촉촉하게 적시는 '법의 비'를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 한다. 마음 땅에 뿌려진 불법의 씨앗을 싹틔우기 위해서는 학인의 '마음의 귀가 열려 있어야만 선지식의 '마음 법문'이 진실하게 들린다는 것이다.
    남악 회양 스님은 마조 스님의 "도가 모습(色相)이 아니라면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심지법안(心地法眼)으로 도를 볼 수 있으니 모습 없는 삼매도 그러하다"라고 답했다. 마음의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진리를 볼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실제로 온갖 고정관념과 사량분별,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중생이 진리의 말씀을 진실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마조 스님은 "옷 입고 밥 먹으며 말하고 대꾸하는 6근의 작용과 모든 행위가 모조리 법성(法性)이다. 그러나 근원으로 돌아갈 줄 모르고서 명상(相)을 좇으므로 미혹한 생각(情)이 허망하게 일어나 갖가지 업(業)을 지으니, 가령 한 생각 돌이켜본다면(返照) 그대로가 성인의 마음이다(《마조록》)"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진리의 법문을 바로 듣기 위해서는 개념과 분별심에 걸리지 않고 텅 빈 마음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성철 스님은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바위가 항상 설법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부처님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항상 설법을 하고 있다. 심지어 저 산꼭대기에 서 있는 바위까지도 법당에 계시는 부처님보다 몇백 배 이상의 설법을 항상 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모양도 없고 형상도 없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허공까지도 항상 설법을 하고 있다.
    - 《마음에 새겨듣는 성철 큰스님의 법문》
    이른바 '무정물의 설법(無情'을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말이 아닌 주변의 풍경이나 사물이 드러내는 진실을 '무정설법'이라 한다. 그것은 의식으로 조작해서는 알 수 없는 진실의 세계다. 쓸데없는 망상과 분별의식, 일체 관념이 사라졌을 때, 있는 그대로 보이고 들리는 것이 선(禪)의 세계다.
    '무정설법'을 보고 들을 수 있으면, 온 세상에 설법 안 하는 존재가 없고 불사(佛事) 아닌 일이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된다. 소위 곳곳에 부처가 있고, 매사가 불공(佛供) 아님이 없다'는 말이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눈만 뜨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귀도 열린다고 한다. 눈으로 소리를 보고, 눈으로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도리는, 유정(有情, 생명체)에 대해 무정(無情, 무생물)이 존재하고 있다거나 물질에 대해 마음이 있다거나 하는 이분법적 사고, 즉 사량 분별심에 머물러 있는 한 깨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보는 놈과 보이는 대상이 따로 있다고 여기는 한,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뒤 56억 7천만년이 되는 때에 다시 사바세계에 출현한다는 미륵불이 나타날 때를 기다려도 알기 어렵다고 했다. 온갖 번뇌 망상을 비워버리고, 지금 당장 온몸이 귀가 되어 무정설법을 들어 보자.
    ◎◎◎
    방을 서로 이웃하고 있는 두 사람의 죄수는 벽을 두드리면서 소통한다.
    벽은 두 사람을 분리시키는 것이지만 소통의 수단이기도 하다.
    우리도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모든 분리는 고리다.
    -Simon Weil
    분리는 고리입니다. 비록 생사로써 분리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 생사를 통해서 비로소 연결될 수가 있습니다. 생사가 곧 무생사이기 때문입니다. 용무생사는 ‘생사란 없어!!’라고 용렬하게 윽박지르는 고집과 어거지가 아니라, 생사를 삶으로써 잘 융화하는 데에서 생기는 안목과 역량, 그리고 여유입니다.
    생사가 이 분리이면서도 동시에 고리입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생사로 펼쳐진, 다양한 분리로 드러난 이 삶을 원만하게 잘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잘 익어질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잘 익어졌을 때야 비로소 삶을 제대로, 시의적절하게 잘 쓸 수 있고 나라는 존재를 잘 부릴 수 있습니다.
    #원담스님 #만공스님 #선어록 #진리 #깨달음 #무정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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