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면서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선생님~ 시의성 있는 주제를 찾아다니다 무력함에 며칠 잠식당했는데요.. 시의성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세인의 기준에 맞춰 빠져있음의 상태에서 저를 찾아줄만한 글을 쓰려고 자꾸 한편으론 욕심을 내는 저를 보니 괴리가 큽니다 그럼에도 계속 깨어나려 노력해야겠지요 오늘도 감사히 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맑고 푸른 하늘에 찬란한 햇살이 보이면 그만큼 세상이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소비만큼 행복을 쉽게 쟁취하는 방법이 없고, 쉬운 행복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소비까지 이어질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행복이 꼭 어려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남이 선택한 행복을 그저 나의 행복이라 믿으면 주체적 행동은 없어지고, 수동적 행동만 남아 살아가는 것이죠.
자기 자신이 본래 있던 자리로 마땅히 회귀해야 한다. 자기기만으로 점철된 평균성에 만취해 만인의 도구화를 종용하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를 야기할 뿐이다. 평균적인 인간은 도구적인 것 이상을 상상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곧 그들 나름의 정신의 정수가 물화되어지는 동시대적 무기력과 냉소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타의적 존재방식'이라는 비극의 시작이다. 타자의 욕망을 대리욕망하는 것은 결코 결핍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너는 누구냐? 현각스님을 출가하게 만든 이 질문은 먼 옛날의 제게는, 우스꽝스럽다 생각했었습니다. 단지, 말장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현각스님에게는 그 말에 실린 무게로 인하여 무언가를 뒤집어놓는 결과를 도출하게 됩니다. 너는 누구냐? 아마 과거의 제가 현각스님이었다면, 쇼펜하우어를 공부한 현각스님의 경험에 따라 불교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착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마 물자체로서의 신체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에서야 눈에 들어오는 이야기의 뒷 부분은 저 말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네가 그것(이름)을 받기 전에는 이름이 없었다. 너는 누구냐?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공부해라. 그것만 공부해라. 이제 책은 그만 해! 제게 있어서, 물자체가 어떻고, 의지가 어떻고, 물론 당연히 중요하겠습니다만, 거기에 매몰되어 정작 그것이 나에게는 어떻게 적용되고 드러나는지에는 무관심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스로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지만, 정작 그 말 속에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겠지요. 후에, 현각스님이 그 때를 돌이켜 회고하기를, 자신이 날카롭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칼을 들고 돌아다니는 아이였으며, 숭산스님은 그 칼을 스스로의 목에 겨누게 했다고 회상합니다. 라캉의 안티고네 해석에서 제가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다른 인물들 혹은 국가의 몰락의 근원이 되는 안티고네 스스로의 몰락이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 시선의 초점이 사실은 나의 몰락보다는 세계의 몰락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깨어지지 않았는데, 무슨 근거로 자신의 세계에 변화를 바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내가 누구인지도 몰랐는데 말입니다. 이번 강의에서도 오묘한 위안을 받고 갑니다. 늘 감사합니다. 밀린 강의들을 보려 하는데, 최근 영상에서 보니 수척해 보이셔서 걱정이 됩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개인의 정신세계구축이라는 여정에 같이 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를 돌아 보니 슬퍼졌어요. 😂
자기로부터 자기가 소외되고 낯설게 되었다 실존을 잃어버렸다.우리의 물질적 조건은 필수지만 물질과 타인의 시선에 맟춘 우리는 길잃은 양. 선과 악과 더불어 인간의 오래 묵은 숙제이고 숙적이네요
추천합니다🎉
강의 감사합니다.
산책하면서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선생님~ 시의성 있는 주제를 찾아다니다 무력함에 며칠 잠식당했는데요.. 시의성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세인의 기준에 맞춰 빠져있음의 상태에서 저를 찾아줄만한 글을 쓰려고 자꾸 한편으론 욕심을 내는 저를 보니 괴리가 큽니다 그럼에도 계속 깨어나려 노력해야겠지요 오늘도 감사히 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맑고 푸른 하늘에 찬란한 햇살이 보이면 그만큼 세상이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소비만큼 행복을 쉽게 쟁취하는 방법이 없고, 쉬운 행복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소비까지 이어질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행복이 꼭 어려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남이 선택한 행복을 그저 나의 행복이라 믿으면 주체적 행동은 없어지고, 수동적 행동만 남아 살아가는 것이죠.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막힌 부분이 있었는데 덕분에 힌트를 얻었네요. 감사합니다!!
모든 정신의 정수가 물화되는 시대적 무기력 속에서 자기 자신은 기어코 소외되고 말았다.
자기 자신이 본래 있던 자리로 마땅히 회귀해야 한다. 자기기만으로 점철된 평균성에 만취해 만인의 도구화를 종용하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를 야기할 뿐이다. 평균적인 인간은 도구적인 것 이상을 상상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곧 그들 나름의 정신의 정수가 물화되어지는 동시대적 무기력과 냉소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타의적 존재방식'이라는 비극의 시작이다. 타자의 욕망을 대리욕망하는 것은 결코 결핍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너는 누구냐?
현각스님을 출가하게 만든 이 질문은 먼 옛날의 제게는, 우스꽝스럽다 생각했었습니다.
단지, 말장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현각스님에게는 그 말에 실린 무게로 인하여 무언가를 뒤집어놓는 결과를 도출하게 됩니다.
너는 누구냐?
아마 과거의 제가 현각스님이었다면,
쇼펜하우어를 공부한 현각스님의 경험에 따라 불교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착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마 물자체로서의 신체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에서야 눈에 들어오는 이야기의 뒷 부분은 저 말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네가 그것(이름)을 받기 전에는 이름이 없었다. 너는 누구냐?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공부해라.
그것만 공부해라.
이제 책은 그만 해!
제게 있어서,
물자체가 어떻고,
의지가 어떻고,
물론 당연히 중요하겠습니다만,
거기에 매몰되어 정작 그것이 나에게는 어떻게 적용되고 드러나는지에는 무관심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스로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지만, 정작 그 말 속에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겠지요.
후에, 현각스님이 그 때를 돌이켜 회고하기를, 자신이 날카롭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칼을 들고 돌아다니는 아이였으며, 숭산스님은 그 칼을 스스로의 목에 겨누게 했다고 회상합니다.
라캉의 안티고네 해석에서 제가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다른 인물들 혹은 국가의 몰락의 근원이 되는 안티고네 스스로의 몰락이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 시선의 초점이 사실은 나의 몰락보다는 세계의 몰락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깨어지지 않았는데, 무슨 근거로 자신의 세계에 변화를
바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내가 누구인지도
몰랐는데 말입니다.
이번 강의에서도
오묘한 위안을 받고 갑니다.
늘 감사합니다.
밀린 강의들을 보려 하는데, 최근 영상에서 보니 수척해 보이셔서 걱정이 됩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긴 편지 같은 글 감동스럽게 잘 읽었습니다. 은총님^^ 건강하게 잘 지내시지요? 저는 요즘 치과치료하느라 살이 빠져보이는 듯합니다. 점점 컨디션이 회복되고 있어요. 사막의 철학을 성원해주셔서 늘 감사하고 또 고맙습니다! 무더운 여름 건강하게 잘 건너가셔요!
@@TV-uw9lz 감사합니다.
선생님도 점점 더워지는 여름, 건강히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