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걸 수입해서 먹고 외국인 노동자도 많이 들어오고 로봇도 도입 되는데 오직 성과 핏줄에 대해서만 옹졸 , 편협, 지독한 한국!!!!!!!! 한국의 핏줄 이기주의 문화!! 한국은 이 핏줄 문화 때문에 반드시 망합니다.!! 인구 전문가가 중국도 문화 혁명 때에 유교 문화 제거 하고 일본도 유교 문화가 많이 사라졌는데 한국만 유교 문화가 강해서 결혼->출산 밖에 생각을 못한데요. 한국은 세계최저 출산율 이죠. 매달 그 세계 최저를 스스로 갱신 하고 있구요.!! 한국은 동거 비율이 세계 최저 입니다. 일본인 사유리는 합법적으로 일본에서 정자 기증 받아서 출산 했구요. 미국은 한해 수만명씩 정자 기증으로 태어 난데요. 중국은 싸이트 내걸고 대리모 사업을 하고 있구요. 우크라이나는 대리모가 합법 입니다. 축구 선수 호날두는 총각 일때 대리모 통해서 애를 가졌죠.! 한국은 OECD중 공공정자 은행 없는 유일한 나라 입니다.!! 총각이든, 처녀든, 부부가 대리모 통해서든 , 부부가 남의 정자 받아서든 아기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은 능력 되면 누구나 가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한국만 모든게 막혀 있고 사람들의 인식 , 법과 제도가 옹졸 , 편협된 생각 가지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특히 핏줄에 대해서는 아주 심하죠!! 일본인 사유리가 아기와 같이 나온 방송에서 한국 아줌마들이 사유리에게 "애가 아빠가 없어서 어떻하냐~ 안됫다~ " 라고 하니까 사유리가 "그럼 아줌마 아들을 저에게 장가 보내세요" 라고 하니까 아줌마들이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부터 유교적 성억압 사회 성인의 야동 금지는 한국이 거의 유일. 야동 ,성매매,유사 성행위 금지. 동성애 , 리얼돌 반대 시위. 고등학생들에게 콘돔 사용법 성교육하자 학부모가 항의해서 취소됨. 공부하는 기계로 학생 키우는 나라. 기본 쾌락 말살 시키는 나라. 동거 비율 세계 최저. 비혼출산 oecd 평균 39% 한국은 1%. Oecd 중 공공 정자 은행 없는 유일한 나라. 미국은 한해에 수만명씩 정자 기증으로 태어남. 중국은 대리모 사업이 호황. 성이라면 치를 떠는 한국. 성진국 이라고 놀리는 일본은 출산율 1.3명. 성을 감추기만 하는 한국은 출산율 0.78명 성진국 보다 먼저 소멸될 나라.!
삶을 살아낼수록 이 세상에는 명징하게 떨어지는 객관적 사실이란게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지금 사실이라고 믿는 모든 것들은 아마 다수가 그렇다고 동의한 것들이 아닐까’라는 불안하지만 어떠한 확신에 기반한 물음들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요즘이었는데 영상을 보고 채 정돈되지 못한 제 생각들이 조금은 정리되는 귀한 경험을 했습니다. 좋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애초에 맞는 답과 아닌 답의 가르는 기준 자체가 애매모호 하고 주관적인 가능성이 높은 것 같아요. 물리학도 지속적으로 진리이자 답이라고 여겨져있는 것들이 계속 수정되어 온 것처럼, 부족해도 현재에 대한 좋은 질문과 의문이 반복되면 그래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생각에 근접 할 가능성이 높은 것 같네요. 물론 인류의 지식의 산물이 매우 고도화 되어 있어서 이런 지식을 유의미하게 개선 할 가능성이 높지는 않겠지만요. 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야겠지요.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내용같네요. 답은 자신에게 있다는 말처럼 철학은 그저 제가 고민할 거리들을 던져주는 역할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정답일것이라는 생각으로는 평생 정답을 찾지 못할 것이죠. 가치관도 신념도 매번 달라지기 마련이니 그저 지금 자신이 믿는대로 행동하시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니체에 대해서 제 주관적인 생각을 다섯 가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제 생각에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삶을 긍정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아가 삶을 더더욱 긍정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저는 나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생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곧 '힘에의 의지'라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침팬지나 범고래 같은 고등동물뿐만 아니라, 식물도 그러하고, 단세포생물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힘에의 의지'가 생명을 존중하고 축복하는 것과 친밀한 개념인 거라 생각합니다. 그걸 자꾸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건강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니체는 우울증 환자였거나 혹은 조울증 환자가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그는 그 스스로 나는 생리학자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는 감정에 관심이 많았고, 감정 또는 그 원인을 표상하는 것으로 '피'를 비유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까지도 합쳐서 '자기'라 한 것이라 이해하고요. 그런데 그는 우울증에서 건강을 되찾는 것에 관심이 있었고, 나아가 그 기회로 '고귀해지는 것'을 욕망한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인류를 높이는 길이라 생각한 걸로 이해합니다. 즉 고귀한 인물들이 생겨남으로써 세상이 이로워질 거라 생각한 것인 듯합니다. 에서 보여지는 그의 태도도 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에서 비극이 가리키는 대표적인 것은 일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프로메테우스에 감정이입을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프로메테우스가 무얼한 인물인가 하면, 인간에게 불을 준 인물이죠. 니체도 그렇게 생각한 거라 생각합니다. 힘에의 의지가 의미하는게, 초인 즉 신을 닮을 만큼 고귀해져서 불을 만들어 인간에게 주고자 한 거죠. 그리고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는 것, 그것을 생리적인 비유로 해석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괴테의 를 읽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파우스트는 정신적인 병에 걸린 인간 파우스트에게 이를 치유하기 위해 신이 악마를 보낸 이야기인 걸로 이해합니다. 왜 니체가 독한 얘기들을 하는지는 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니체가 왜 철학자들의 동기를 공격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철학자들의 감정과 의지, 욕구 이런 걸 공격하는 것은 니체는 인간의 인과관계란 것을 '생리적인 것'에 그 근본원인을 두고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의 문헌학자만이 아니라, 생리학자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가 왜 철학자들의 감정적, 감성적, 의지적인 면을 공격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니체가 훌륭하다 생각했던 점 중 하나는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알고 이를 믿는 것, 그런 걸 파악을 잘 했다는 것입니다. 니체의 어느 책에 자신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많은 수의 철학자들은 목적론적인 경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목적론이란게 인과관계를 거꾸로 볼 위험이 큰 거라 생각합니다. 순환논리가 들어가기 쉽고, 또한 여기에 철학자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이 은밀히 엮여 들어가기가 쉬운 거라 생각합니다. 네 번째는 니체의 '평범함'에 대한 태도에 관해서입니다. 이 부분은 민주주의가 활발한 오늘날,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일어날만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니체는 영국에 대해서도 평범하다고 평가한 걸로 기억하고, 칸트에 대해서도 평범하다고 평가한 걸로 기억합니다. 니체를 비판할 때에는 오히려 이 부분을 파고들 필요가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니체의 '여성'에 대한 평가도 오늘날 비판받을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평범함에 대해서는 그게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떤 의도가 있었을지에 대해 변호해줄 수 있는 부분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에 대해서는 곤란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니체의 여동생 등 주변 인물들의 영향을 받아 그리 생각한 것 같은데, 이는 균형을 잃은 것이고 편파적인 생각인 것 같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니체의 여동생이 히틀러 나치에 니체 사상을 왜곡해서 팔아넘기려고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고요. 저는 마르크스도 히틀러도 니체의 반대되는 인물들인 거라 생각합니다. 마르크스는 평범함 내지 천박함이라 불렸을 거라 생각하고요. 히틀러는 선동당한 독일 국민들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립심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 해석할 수 있겠지요. 순진한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에게 속아 넘어간 걸로 해석하는게 아니라, 독일 국민들의 내면에 있던 악한 것들이 히틀러로 인해 공명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죠. 이걸 보면 '평범함'을 가지고 니체를 비판하는게 만만치는 않은 일일 거라 생각합니다. 다섯 번째는 저는 니체의 심오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디오니소스'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은 니체의 대표작이자 또한 출발점이라고도 생각하는데요. 여기에도 심각한 오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파괴적인 것, 혼란한 것, 무질서한 것, 그런 것이 디오니소스이고, 그것이 니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걸 보면, 그 족보로 니체를 찾아 이야기하는 것 같고요. 그런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디오니소스는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맞지만, 또한 창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즉 단순히 파괴가 아니라, 창조가 함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통과 함께 기쁨이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미 귀한 것들을 가진 상태에서 그것들을 파괴하고 다시 창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폴론적인 것을 둔 상태에서 디오니소스인 것으로, 저는 이걸 '정신이 재조직화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기존에 훌륭한 음악들을 잘 이해하고 해석하고 배웠다고 해봅시다. 그걸 파괴하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 때에, 디오니소스적인 현상이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디오니소스는 비극적으로 탄생한 신이고, 디오니소스를 설명하는 하나는 포도주죠. 술 춤 피. 억압을 풀리게 하는 술, 그리고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반드시 내면의 혼돈을 잉태해야 한다.' 춤, 그리고 '나는 오직 피로 쓴 글만을 사랑한다.' 피, 이를 통해 나타나는 개인의 생리적인 욕구. 이로인해 새롭게 창작된 음악. 이런 것들을 떠올린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창조가 그냥 되는게 아니고, 이전에 훌륭한 것들을 배웠어야 하겠지요. 에서 아폴론을 이야기한게 그런 부분에 해당되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니체는 학생들이 기존의 훌륭한 것들을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걸로 기억하고요. 그런데 그런 부분 없이, 파괴와 혼란과 무질서면 그걸 니체와 엮는 것은 저로서는 오해이자 엉터리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중국 공산당이 문화대혁명을 하고, 중국의 전통적인 것들을 파괴해버린 것은 전혀 니체적인 것이 아닌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게 니체적이라거나, 혹은 그런 걸 하는 사상가나 예술가를 니체의 대를 이었다고 생각하는 듯하고, 이는 맞지 않는 얘기라 생각합니다.
니체 영상을 세 편쯤 봤는데요, 저는 니체의 철학이 좋아요. 현실의 문제점을 의심하고, 그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나라는 존재의 삶을 긍정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것 같아요. 현실적 가치에 대한 의문은 좀 남지만...더 공부해보고 현실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생각해보고 싶네요! 니체철학은 고등학생보다는 대학생에게 훨씬 감명을 줄 것 같은 느낌이에요..
니체 같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마련한 보편적인 진리에 따르는 것을 '종속' 혹은 '예속' 상태라 볼 수 있겠지만 때로는 나의 방식으로 자신 안의 욕망, 에너지에 집중하다가 오히려 자신에게 큰 고통을 불러오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에너지를 다루는 데에 미숙한 사람들은 하나의 길잡이, 네비게이션을 마련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네비게이션을 따라 가는 것을 혹자는 '부자유'라 할 수 있겠지만,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에게는 그 방황으로 비롯된 혼란이 '자유'의 산물일 테니까요.
니체 본인의 근본적인 철학이 사도마조히즘적인 측면이 있어서 더 그런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불러온 고통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때문에 편하고 쉽고 안락한 것들을 대체로 거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래서인지 굉장히 니체의 철학이 좋습니다. 제가 고통을 마주하는 방식에 대해 공감받는 기분이랄까요.
삶이니 인생이니 하는 용어 자체가 우선 보편화 일반화의 문제적인 거고요, 삶은 보편적인게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다 개별적 조건과 상황의 개별적 사건만이 있는 거죠. 철학이나 학문이 보편적 개념일 수 밖에 없는 부조리함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하는 니체는 눈 밝은 선지자중 한분이죠.
철학을 몰라도 세상 사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지만.. 인간은 사유하는 동물이므로.. 사유하는데에 철학(기존 위대한 철학자들이 만들어놓은 여러 사유체계.. 도구들)이 도움이 많이 되는것은 사실입니다. 사유없이 그냥 주어진대로 본인 욕망대로 사는것도 방법이긴 하지만…… 천재(예,,니체)는 기존의 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사유의 세계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능력이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으니…뭐.. 공부해서 나쁠건 없는거 같아요. 공부한다고 다 이해할수도 없겠지만😩
기성적 사고의 틀을 깨야한다는 것 자체에서 이미 그 주장 또한 우리는 의심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러셀의 역설처럼 니체 또한 누군가에게는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기에 그의 주장은 꼬리를 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니체는 바로 그런것을 원하는거겠죠.
니체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써 좀 오만한 생각이라고 이야기를 듣지만 타락하지만 않는다면 굉장히 똑똑하고 지혜로운 인생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니체 철학을 싫어하시는 분들은 보통 인간의 선악에 대해서 민감하신 분들이 많고 그 분들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물론 저도 선악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악과 관련된 고통, 결핍, 무시, 시련, 가난, 욕망 등등이라는 안좋은 편견이 생길만한 요소들이 인간의 생활수준을 발전시켜왔고 이에따라 인간의 악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그 발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경험과 삶의 다양한 체험과 만족을 느낄수 있어서 행복을 느낄수 있는 요소는 많아졌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비교나 폭력, 전쟁 등의 부작용으로인해 발생하는 불안은 장애물이 되었지만 그 또한 극복해가는 과정이고 과거보다는 지금 현대사회에서는 누구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이분법적으로 단순하고 쉽게 생각하는건 본능에 가깝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상 모든 판단을 항시 예민하게 주시하다간 머리가 과부하가 걸려서 마비가 될 것이다. 특히나 사소하다고 생각하는것일 수록 그렇다. 세상에 절대적인건 없다지만 우리가 A라는 판단을 했을때 맞을 확률이 95%이고 틀릴 확률이 5%라고 할지라도 대부분은 A라는 판단을 하는것이 효용성이 높다. 만에하나의 틀릴 확률에 집착하다 보면 더 높은 혹은 더 치명적인 오류에 빠지기 쉽다. 다만, 니체와 같은 철자는 탐구자의 영역에서 1% 혹은 0.1% 의 영역의 영역울 추구한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틀린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민적이라는건 어쨌든 보편적인 것이고 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활하기에는 이분법적 판단이 대부분 삶을 유지시켜 줬고 인간에게 그 동안 유효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인류가 여태까지 살아 남았을 수 있을까?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세상의 자원은 한정적인데, 우리의 사고는 그 위에 놓여질 뿐이니 한계는 명확합니다. 하지만 그 한계를 직접 맞닥뜨리고 인정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듯 합니다. 살아가기 위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인간이, 스스로 만든 의미를 부수기는 어려울 테니까요. 결국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인간은 한계를 마주하기 보다 의미를 만들어 내는데에 조금 더 무게를 두게 됩니다. 그렇게 각각의 인간이 남겨놓은 의미들은 차곡차곡 쌓이게 되겠죠. 마주해야할 한계는 안개 속에 가려지고, 초라한 의미들로 쌓아올려진 벽은 점점 커져서 세상의 끝마냥 하늘을 가리게 되겠죠. 쿵쿵쿵, 쾅쾅쾅, 그 벽을 두드리는 사람, 두드려서 부수려는 사람, 그래서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 니체의 말은 여전히 불편합니다. 비록 그가 두드렸던 벽은 이미 많이 무너졌지만, 새로운 벽들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겠죠. 어쩌면 오래된 그의 말들은 더이상 새로운 벽들을 부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우리를 두드리면 우리 중 누군가는 자기가 마주한 벽들을 부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고생한다..../ 무언가를 제대로 정의하려면 그 토대를 쌓는데만 수많은 가정과 정의가 필요하다. 그런것 없이 이야기 하는 것은 그냥 바다가 모래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는 것과 같다. 다음번 파도가 몰려오면 한번에 쓸어가 지워진다. 뭐하러 그렇게 중구난방으로 떠드는가? 제대로 정의조차 하지 않고. / 내가 댓들을 달려고 해도 가을철 떨어진 낙옆처럼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며 떠도는 모습에 바람소리 더할 뿐이다. / 아주 단순화 시켜서 댓글을 단다면 그나마 니체의 철학은 근대 기독교적 사상과 대립으로 세상을 좀더 올바로 보려는 노력이였고, 그것에 필요한 사상의 토대였다. 지금 철학은 저 지하에서 조용히 과학의 지식에게 안겨 자신을 핥으며 지내고 있다. / 일반 대중에게 필요한 철학으로 한국사회에 필요한 것은 좀더 현대 철학까지 잘 살펴 대중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통찰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는 철학이 없으므로. 솔직히 상식도 말라비틀어진 사회이다.
니체가 왜 물리학이 감각적인 학문이라 서민적이라고 했는지는 알겠는데, 이걸 현대에 놓고 보니 현대의 물리학은 '양자역학'을 기초로 하고 있다보니 감각적인 영역에서도 벗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당시 물리학은 그렇지 않았을 테니 니체의 비판은 꽤 일리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과 역사수업을 하다 보면 아이들이 자주 묻는 말이 있어요.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인가요? 누구는 나쁜 사람인가요?”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데 아주 익숙한데, 이걸 일본인 철학자가 한국인은 성리학에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구요. 남과 여, 음과 양, 하늘과 땅, 상생과 상극 등 세상을 이분법적 대립 개념으로 바라보는 게 성리학이라고요. 다각도에서 살펴보고 세상의 모든 게 하나의 키테고리 안에 온전히 속할 수 없음을, 세상이 서로 상충되고 모순된 가치 속에서 존재하며 살아가는 것인지를 일깨우는 게 참 어렵습니다.
스스로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달리 말하면 어떠한 사건 사고 사안 사정에 대해 지 멋대로 일으키고 제 맛대로 해결할 수 있다는 뜻과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현실이라는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살아가겠다는건 사건 사고를 맘대로 해결할 수 있는 자리에 가겠다는 의지와 사회로 관계된 다른 인간이야 피해를 볼지언정 자신이 관여된 사건 사고를 지맘대로 일으켜 보겠다는 의지가 다 들어 있는 것이죠 고로 니체의 심리구조에 이 두 의지가 잘 드러나죠 간혹 아주 간혹은 지맘대로 해도 부작용 덜한 사건 사고도 있긴해요 하지만 인간은 사회생활을 해야하는 인격체로서 자신말고 상대해야할 또다른 인간이 있음을 인지하고 누락시키면 안됩니다 어떤 삶의 순간에서도... 이러 하기에 인간은 제대로 관계된 타인을 인지하고 있다면 남과 관계된 일에 사건 사고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야하며 남이 일으킨 사건 사고도 해결하기 위해 제대로 파악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삶의 주인은 너와 내가 함께 다 잘 사는 길에 이르는 삶의 주역이 되어 주체적으로 주동하는 자여야 하는 것이죠 즉 이러한 삶이 바로 도덕적 삶인 것이죠
철학이 왜 중요한지 왜 초등교육에서 철학교육을 하지않는지. 알겠네요 자본주의에선 모두가 잘살순 없기에 그리고 철학교육을하면 정치인들이나 기득권층에게 엄청난 위협이되기에 그런것 같아요 실제 모든학문 모든 기술꼭대기에 철학이 있기에 최고자리에 위치한 사람들이 철학을 바탕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기술이나 특정분야만 전공하신분들이 아쉬운게 시야가 좁아서 다른분야와의 통합적 사고가 부족하더라구요 참고로 최고기업 경영자들중에 유독 철학전공이나 베이스가 된분이 많습니다
확실히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은 위험하죠 마지막에 하신 말씀처럼 수도권이냐 아니냐 부터 시작해서 지역갈등 젠더갈등 등등에는 항상 이분법적인 사고로 인한 갈등이 존재 했다고 생각하거든요. 비슷한 맥락에서 무언가 옳다고 얘기하기 위해선 이분법적인 단 두개의 사고 방식이 아닌 다양한 관점과 사고해서 생각할 필요성도 느껴지네요.
사람이란게 지식을 전달 받을 때, 자신은 그 안에 포함시키지 않고 외부적인 자극으로만 그래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만 생각하는데, 이 생각 자체가 천동설이랑 다를 바 없는 것 같네여.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할 때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지식을 기반으로 스스로에게 집중을 해본 적이 있는지 ;; 물리학이 왜 세상을 이해하는데 한 자리를 꿰찼는지 ;
세상에 좋고 나쁜 것은 없습니다 어떻게 지혜로이 사용, 이용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종교,철학,과학,인문학 등 어떠한 공부로도 지금 당장의 괴로움은 절대 해결 못 합니다 모두 잠깐의 위안을 주는 땜빵에 불과합니다 안타깝지만 최선으로 노력하고 결과는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게 진실입니다 먹고 자고 싸고를 수월히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삶임을 인지하며 삽시다 이것 절대 쉽지 않습니다 하늘의 핀 무지개가 진짜인줄 알고 하늘만 쳐다보고 쫒아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습니다 그냥 열심히 하루를 사세요 그걸로 족합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과거 진리를 쫓았던 수많은 철학자들, 지금의 철학자들 헛다리 짚은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충코님 니체에대해 보다 깊이있는 이해를 하려면 불교의 교리를 공부하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영상에서 말한 내용은 이천여년전 불교교리인 제법무아 제행무상 연기법 불이법의 내용들입니다. 형이상학적인 어느무언가를 시대의 상황에따라 제단하고 특정관점에서 절대적 가치로 못박는것을 시대 그이상의 시야에서 말한것이라 보여집니다.
"최근에 일어난 최대 사건 ㅡ '신은 죽었다 (Gott ist tot)'는 것, 기독교 신에 대한 신앙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 ㅡ 은 유럽에 이미 그 첫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 중략 ..) 신 자체가 우리의 가장 오래된 거짓말이라는 것이 이제 입증된다면?"
말씀하시는 '사고의 틀'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 니체가 하는 말들은, 시선이 한곳에 묶여 다른곳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 즉,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다이너마이트를 두르고 불을 붙이는 그야말로 머리통 자체를 깨부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저는 곧 곧 60이 됩니다 젊어서 신학을 공부하고 무직으로 집에서 지냅니다 젊은 도전의 길을 가는 충코님을 응원하며 배웁니다 그가 왜 mici ipsi scripsi 를 밀고 나갔는지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ㅡ욕망의 존재인 자기자신에게 솔직해지는 용기를 배우며 창백한 죽은도덕 위에 자기를 건축하려드는 전통의 철학과 종교가 얼마나 큰 괴물인지 다시한번 확인 하게 됩니다 ㅡ건강 잘 돌보며 공부해가시길 바라며 응원과 배움에 감사합니다
러셀이 자신의 철학사에서 "초인에게 부여한 힘을 향한 갈망 자체가 두려움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니체에게는 결코 떠오르지 않았다. 이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지배할 필요를 상상하지도 않는다. 두려움을 정복한 인간은 니체의 '예술가, 폭군' 네로처럼 미친 짓을 하지 않는다. 예술가, 폭군 네로는 음악과 대학살을 즐기지만, 그들의 심정은 불가피한 긍정 혁명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나는 부분적으로 니체의 가르침 탓에 현실 세계가 그의 학몽과 흡사해졌음을 부정하지 않을 테지만, 그것이 현실 세계를 덜 공포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한 대목이 있더라구요. 니체의 그러한 초인의 지배적인, 폭력적인 면모는 자신의 성장 과정과 관련이 있는 거 같기도 해요. 정말 어렸을 때부터 별 탈 없이 살아가고, 무난한 유전자를 타고난 사람들은, 별로 다른 이들을 지배할 욕망을 가지고 있는 거 같지는 않더라구요. 보통 억눌리고, 학대당하거나 어떤 것을 두려워했는 이들이 그러한 폭력적 욕망이나 권력욕을 더 많이 가지는 거 같아요.
네, 저도 러셀의 견해에 어느 정도 동감합니다. 저는 인간 안에 지배를 위한 힘이 유일한 우선적인 에너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니체가 그토록 비판하고자 했던 소위 '착한 사람들의 마음' 역시 단순히 왜곡된 심리적 결과물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안에 깊이 내재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람에 따라 그런 본인의 '선한' 힘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는 반면, 그 힘을 잘 인지하고 그 힘을 통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후자가 더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하고요. 다만 니체가 표방했던 힘을 향한 갈망이 과연 "두려움의 산물"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폭력적인 에너지와 사랑의 에너지가 둘 다 인간 안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거든요. 따라서 니체는 인간의 한 부분을 발견한 것이지,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한 케이스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러셀의 그러한 평가가 영미권 철학 특유의 인간에 대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관점을 잘 투영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서민적이라는 표현의 기저에는 어떠한 인식과 심리가 있을까? 그것도 궁금하고.. '물리학이 감각적 정보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학문' 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물리학이 우리 감각과 관계성을 지니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물리학에만 적용되는 사실이 아니라 대부분의 과학은 감각과 관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떠한 것에 대한 사유나 이해가 가능하려면 살아오면서 얻은 감각적 자극을 통해 얻은 정보들이나 전제가 필연적인데, 물리학에만 한하는 이야기인 듯 말하는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물리학은 현상을 이해하는 또다른 방법이나 체계일 뿐이고, 이러한 이론 혹은 관념을 절대적인 진리나 진실로 이해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가? 즉 어떠한 것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갇는 그 태도에 대한 지적을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순전히 그러한 태도를 문제삼는 것이 였다면 왜 물리학을 연결지어 설명했을까? 그러한 양상들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물리학에 대한 사례를 통해 이해시키려 했던 것일까?
충코님. (이 동영상이 왜 또 위로 올라왔는지 모르겠는데, 보다보니 옛날 본거네요.) 다시 듣게되어 댓글 하나 답니다./ 정말 한국에서 현재에 필요한 것은 무너진 상식입니다. 좀 생각 좀 하는 사람이 되어서 , 철학자라고 하세요. 철학책을 끼고 있다고 철학자가 아닙니다. 내가 장담하건데, 한국에서 교수든 학생이든 일반인이든 철학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대학 철학과라고 해 놓고 거기서 강의하면 철학자 입니까? 솔직히 원숭이보다 나은 것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본인의 식견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갖는 게 바람직할 뿐 아니라 더 나은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내 말을 너희가 한번 판단해보고 옳다면 따르지만, 옳지 않다면 버려라" 공자도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혜에 이르는 길은 하나인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고 아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파이드로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네는 아마도 말하는 상대가 어디 사람이며 누구인가가 문제될 걸세. 자네는 그 진리가 실제로 부합되느냐 하는 것만을 문제삼지 않으니까" 저 분들이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권위있는 사람의 말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으니까요. 그들은 사실 잘 모르면서, 자신이 어려운 말(권위있는 말)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아는 척을 합니다. 사과를 오이라고 속이는 사기꾼은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게 시각적으로 다르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철학에서 다루는 것들은 확실하게 확인하기 쉬운 것들 일까요? 아마도 아닐 겁니다. 이것은 사기꾼과 사이비가 많은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물리의 세계를 다루는 과학도 조금씩 발전해오다 본 궤도에 오르게 된 것이 몇 백 년 안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세균, 혈액형도 몰라서 수술을 하면서도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과학이 궤도에 오르고 하나의 과학적 관점이 생기면서 사이비나 사기꾼에 속는 게 현저히 적어졌죠. (과학적 현상을 미신이나 사기로 다른 사람을 현혹하는 일들) 제가 생각하기로는 아직 철학은 과학처럼 궤도에 오르지 못한 걸로 보입니다. 니체가 뜬구름 잡는 말을 잘한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저런 아무말 대잔치 하는 사람이 유명하다는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철학을 가르친다는 사람들이나 그런 관련 단체들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저는 사람의 똑똑함을 두 가지 정도로 판단합니다. 1. 권위에 속지 않고, 이상하거나 모르는 것을 분명히 하는 사람. 2. 어떤 현상이나 사물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는 부분이 아닌 다른 부분을 보려고 애쓰거나 잘 찾아내는 사람. 제가 보기에는 식견이 부족한 게 아니라,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는 듯 보입니다.
동영상에 나온 니체의 주장을 기준으로 잘못된 점을 알아보죠. 1. "결국 우리는 이 물리학적인 관점 아래서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현상은 무언가 더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원리가 발현돼서 나온 파생적인 현상이다. 이런 식의 생각을 품거든요?" 일단 위의 문장에서는 쓰지 않았지만, 그 바로 전에 언급(신적이다.)까지 조금 보태서, "신적이고 더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원리" 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일단 보편적인 원리에 (신적이고 더 초월적)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니체가 그렇게 말해서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보편적 원리를 생각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그것을 신적이고 더 초월적이라고 생각하나요? 인간이 하는 학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에 관한 학문과 인간이 만든 것에 관한 학문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별과 달, 행성, 빛과 그것들이 움직이는 운동과 관련된 것들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동물, 식물, 무생물도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죠. 그러한 것들(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들)을 탐구하는 학문이 있습니다. 건축학과, 문학과, 자동차학과, 컴퓨터학과 등등은 모두 인간이 만든 것에 관한 지식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위에서 말하는 보편적 원리를 정상적인 사고방식의 사람이 생각했을 때, 그것을 신적이거나 초월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단지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죠. 2. "한 마디로 보편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보다 더 우월한 것이라는 믿음이 암묵적으로 아직까지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3명의 사람이 있는데, 그날 점심에 2명은 빵을 먹고, 1명은 밥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빵을 먹은 2명이 식중독에 걸렸습니다. 니체도 이럴 때, 2명의 식중독의 원인을 빵으로 생각하지 않을까요? 어떤 현상에서 공통된 것들을 원인으로 생각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보편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의 원인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야 더 좋은 방향으로 가겠죠. 빵을 먹은 2명이 식중독에 걸렸는데, 보편적인 원인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인간들이 지금껏 지내왔다면, 우리는 지금도 독초와 식용 가능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구분하지도 못할 뿐더러, 식중독의 원인도 발견하지 못했을 겁니다. 보편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보다 낫다는 것이 단지 암묵적인 믿음 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3. "자신의 힘을 뻗치려는 의지 자체는 인간의 삶을 이루는 근본적인 에너지" 여기서 황당한 것은 보편적인 원리가 환상이라고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모순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니체 자신이 저런 발언을 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여러 인간의 보편적인 행동을 관찰해야만 가능하지 않을까요? 게다가 무지를 추구하라는 둥,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 라는 말은, 인간 공통의 무엇인가에 기대어 하는 말이 아닌가요? 보편적인 공통된 원리, 즉 모든 인간에게는 청산가리는 독약이다 라는 공통의 무엇인가가 있어야지만, 인간들이여 청산가리 먹지 말게나 할 수 있는 것이겠죠. 보편적인거 추구 안하는 사람이 왜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4. "원래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진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니체의 생각에 진리는 힘을 뻗치려는 의지가 발현된 한 형태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3에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니체 자신이 인간을 바라볼 때의 보편적인 원리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저 세상에 진실은 없고, 인간이 자신의 힘을 뻗치려는 의지의 한 형태만 있을 뿐이라는 말은, 그럼 니체 자신의 말처럼, "내 말은 진실이 아니고, 그저 내 힘을 뻗치려는 의지의 한 형태에 불과한 의미없는 것이야" 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아니면, 니체 자신만이 오직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두 가지 다 이상한 생각일 뿐이겠죠. 이런 상대주의자들은 그럴싸하게 말을 포장하지만, 결국에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니체가 말한 "권력에의 의지"를 보면 굉장히 1차원적인 생각일 뿐더러, 그 너머를 생각하지 못하는 한계를 볼 수 있습니다. 권력에의 의지는 왜 있을까요? 여기서 더 이상 나아가서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더 나아가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에 대한 학문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니체처럼 말이죠.
그 밖에 모순되는 것들을 지적해보자면, 이원론을 비판하면서 그 근거를 선악을 판단하는 니체만의 도덕관으로 하고 있습니다. "솔직하지 못하다." "선으로 포장하는 것이 치사하고 야비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 선악은 없고, 진리도 없는데, 대체 무엇을 근거로 삼아 선악의 도덕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저런 판단을 하는 것일까요? 니체가 말한대로, 모든 인간의 행동은, 더 깊은 차원에 놓인 에너지 의지의 발현인 현상일 뿐이라면, 그것으로 설명하면 되는 것 아닐까요? 니체 주장대로 보편적인 도덕은 존재할 수 없는데, 왜 저런 이상한 말을 하고 있을까요? 참과 거짓은 따질 수도 없다고 말하면서, 무엇이 옳은지 아닌지 따지고 있는 것을 보면 참... (기존 철학자들은 잘못되었다.) "더 깊은 차원에 놓인 에너지 의지의 발현" 이 부분도 위에서 언급한 부분이지만, 인간 행동의 더 깊은 차원을 말한다는 것은, 인간 행동이 보편적인 공통된 하나로부터 파생되어 나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니체 본인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 그 방식 그대로 사고하고 있습니다.
가끔 철학관련 영상이나 글들을 보면, 이원론(이분법)에 관한 얘기가 나올 때가 있는데, 하나같이 이원론이 왜 나쁜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나쁘다는 식의 뉘앙스로만 이야기 하더군요. 저 위의 영상에서, 니체가 이원론을 비판하는 내용을 봐도 이원론 자체가 나쁘다는 말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니체 자신이 선과 악의 이원론을 가져와 이원론에 나쁘다 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을 뿐입니다. 이원론이 나쁜 것일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해보죠. 누군가에게 무엇을 알려주기 위해서 손가락으로 어떤 것을 가리키는데, 그가 엉뚱한 곳을 바라본다면, 그 사람의 머리를 잡고 돌려서 올바른 곳을 바라보도록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눈으로 볼 수 없는 머리 속 풍경일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설명만이 가능하겠죠? 그럼 이해 못하고 헷갈려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큰 부분부터 나누어 점점 잘게 쪼개 나가는 식으로 전체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가야 할 겁니다. 스무고개를 생각해보면 되겠죠. 스무 번째에 답을 맞췄다고 가정했을 때, 이원론으로 이루어진 질문들이 하나가 아니라, 스무 개가 될 겁니다. 이것을 잘 생각해보면, 이원론으로 보이는 것이 단지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의 연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를 보면, 그냥 답을 찾기 위한 질문(이원론)들의 덩어리일 뿐입니다. 스무 개의 질문에 대한 힌트가 한꺼번에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을 한꺼번에 동시에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순차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생각해 처리해 나가겠죠. 우리의 사고는 전체, 혹은 전부를 한꺼번에 볼 수 없습니다. 케잌을 칼로 자를 때를 생각해보죠. 하나의 둥근 케잌을 반으로 자르고, 반토막이 된 케잌을 다시 반으로 자르고, 그렇게 반복해서 잘게 케잌을 나누겠죠. 인간은 칼이라는 도구로 케잌을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을 찔러 살해하기도 합니다. 칼은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나쁜 것일까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겠죠? 생각의 케잌을 나누는 이원론은 나쁜 것일까요?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닌 그저 도구일 뿐일까요? 위에서 설명한 것을 좀 더 간단히 말해보자면, 우리가 눈앞에 있는 사과 하나를 집어 드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과와 사과가 아닌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모든 사물을 그냥 하나의 덩어리로 보고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면, 사과를 집어 들 수 없었겠죠. 사과와 사과가 아닌 것, 두 가지로 나누었기에 가능한 겁니다. 무엇 하나로 나누어 보게 되면, 동전에 양면이 있듯, 필연적으로 무엇과 무엇 아닌 것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생각을 나누어 순차적으로 하지, 모든 정보를 한꺼번에 동시에 처리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우리가,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 머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펼쳐 놓고, 그 상태에서 비교해가며 답을 찾을 수 있다면, 훨씬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겠죠. 그렇기에 우리는 현명한 사고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시야가 넓다, 생각이 깊다, 폭넓게 생각한다, 입체적으로 생각한다, 이면을 볼 줄 안다 등등. 니체 같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시야가 미친 듯이 좁은데, 또 그 좁은 시야로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판단할만큼 생각이 깊지 못합니다. 그래서 코끼리의 꼬리 만을 보고 있으면서, 그게 코끼리의 전부라고 판단하죠.
타인의 사상을 통해 얻은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세상을 설명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이 생각한 체계와 생각이 아니므로 부자유한 상태, 노예상태이다. 자신이 '생각'하지 않으면 노예상태이다.
❤❤❤❤
사고의 틀을 깨는 철학자들의 말, 생각을 들여다 보는게 너무 재밌네요. 제대로 이해하기엔 스스로 모자람을 느끼며 다음에 또 좋은 영상 기대하겠습니다.
모든걸 수입해서 먹고 외국인 노동자도 많이 들어오고 로봇도 도입 되는데 오직 성과 핏줄에 대해서만 옹졸 , 편협, 지독한 한국!!!!!!!!
한국의 핏줄 이기주의 문화!! 한국은 이 핏줄 문화 때문에 반드시 망합니다.!!
인구 전문가가 중국도 문화 혁명 때에 유교 문화 제거 하고 일본도 유교 문화가 많이 사라졌는데
한국만 유교 문화가 강해서 결혼->출산 밖에 생각을 못한데요.
한국은 세계최저 출산율 이죠. 매달 그 세계 최저를 스스로 갱신 하고 있구요.!!
한국은 동거 비율이 세계 최저 입니다.
일본인 사유리는 합법적으로 일본에서 정자 기증 받아서 출산 했구요.
미국은 한해 수만명씩 정자 기증으로 태어 난데요.
중국은 싸이트 내걸고 대리모 사업을 하고 있구요.
우크라이나는 대리모가 합법 입니다.
축구 선수 호날두는 총각 일때 대리모 통해서 애를 가졌죠.!
한국은 OECD중 공공정자 은행 없는 유일한 나라 입니다.!!
총각이든, 처녀든, 부부가 대리모 통해서든 , 부부가 남의 정자 받아서든 아기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은 능력 되면 누구나 가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한국만 모든게 막혀 있고 사람들의 인식 , 법과 제도가 옹졸 , 편협된 생각 가지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특히 핏줄에 대해서는 아주 심하죠!!
일본인 사유리가 아기와 같이 나온 방송에서 한국 아줌마들이 사유리에게 "애가 아빠가 없어서 어떻하냐~ 안됫다~ " 라고 하니까 사유리가 "그럼 아줌마 아들을 저에게 장가 보내세요"
라고 하니까 아줌마들이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부터 유교적 성억압 사회
성인의 야동 금지는 한국이 거의 유일. 야동 ,성매매,유사 성행위 금지. 동성애 , 리얼돌 반대 시위.
고등학생들에게 콘돔 사용법 성교육하자 학부모가 항의해서 취소됨.
공부하는 기계로 학생 키우는 나라.
기본 쾌락 말살 시키는 나라.
동거 비율 세계 최저.
비혼출산 oecd 평균 39% 한국은 1%.
Oecd 중 공공 정자 은행 없는 유일한 나라.
미국은 한해에 수만명씩 정자 기증으로 태어남.
중국은 대리모 사업이 호황.
성이라면 치를 떠는 한국.
성진국 이라고 놀리는 일본은 출산율 1.3명.
성을 감추기만 하는 한국은 출산율 0.78명
성진국 보다 먼저 소멸될 나라.!
삶을 살아낼수록 이 세상에는 명징하게 떨어지는 객관적 사실이란게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지금 사실이라고 믿는 모든 것들은 아마 다수가 그렇다고 동의한 것들이 아닐까’라는 불안하지만 어떠한 확신에 기반한 물음들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요즘이었는데 영상을 보고 채 정돈되지 못한 제 생각들이 조금은 정리되는 귀한 경험을 했습니다. 좋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충코님 영상 잘보았습니다! :) 저에게는 교육에 관한 저번 영상과 일종의 통일성이 느껴지는 듯 하네요. "틀린 판단을 피하는 것은 삶을 피하는 것이고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라는 니체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헤겔보다 니체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어쩔때 드는생각은..유일하고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내존재가 보편성안에 있을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항상느낍니다. 머가 맞는지는 몰겠으요.
언어와 구조와 그 틀안에서요..
내면의 목소리를 들여다보는 것을 중시하며 틀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강조하는 철학이 정말 깊이 와닿네요!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댓글이.없다고 안보는 것이 잘대 아니라는걸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챕터가 추가되어 시청하기 편하네요👍
오늘도 하나 알아갑니다 :)
애초에 맞는 답과 아닌 답의 가르는 기준 자체가 애매모호 하고 주관적인 가능성이 높은 것 같아요. 물리학도 지속적으로 진리이자 답이라고 여겨져있는 것들이 계속 수정되어 온 것처럼, 부족해도 현재에 대한 좋은 질문과 의문이 반복되면 그래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생각에 근접 할 가능성이 높은 것 같네요. 물론 인류의 지식의 산물이 매우 고도화 되어 있어서 이런 지식을 유의미하게 개선 할 가능성이 높지는 않겠지만요. 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야겠지요.
사유할수있는 기회를 주는 정말 좋은 채널 감사합니다.
저도 자유를 추구하는 영혼(?)의 소유자로써 유일하게 좋아하는 철학자가 바로 니체 입니다 ㅎㅎ 제가 학교 다닐때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한것 같습니다. 언어영역 문제를 풀 때 마치 답이 딱딱 정해있다는 듯이 사고를 강요하는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반면에 충코님은 국어황이었습니다.....
저는 니체를 가장 좋아합니다!! 꼭 충코님 후배가 되어서 니체에 대해 더욱 깊이 공부할게요!!
니체 철학 특유의 서고의 틀을 깨는 생각이
현실에서도 위안과 용기를 가져다 주는 것 같습니다.
곧 대학생이 될 고딩으로서 내가 어떤 대학을 가서 어떤 공부를 할지에 대해
주체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철학은 굉장히 중요한 학문임 개인적으로 철학은 가장 실용적 학문이라고 봄 이게 없으면 개인이나 조직이나 나라나 방향성이 없음
문명의 근간은 철학이죠…
그래서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방향성이 없는듯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내용같네요.
답은 자신에게 있다는 말처럼 철학은 그저 제가 고민할 거리들을 던져주는 역할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정답일것이라는 생각으로는 평생 정답을 찾지 못할 것이죠.
가치관도 신념도 매번 달라지기 마련이니 그저 지금 자신이 믿는대로 행동하시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철학의 세계를 쉽게 인도해주시는 채널을 찾아 반갑네요. 좋은 강의 잘 들었습니다. 자주 방문할게요.
세상을 알아가고 나이를 먹어 살아갈수록 논리가 없는 게 가장 논리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보편성은 따질 수록 그 절대성과 멀어지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어떤 확고한 진리도 이제껏 그래왔다는 데이터의 반복에 의한 착각일 뿐이죠.
니체에 대해서 제 주관적인 생각을 다섯 가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제 생각에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삶을 긍정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아가 삶을 더더욱 긍정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저는 나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생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곧 '힘에의 의지'라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침팬지나 범고래 같은 고등동물뿐만 아니라, 식물도 그러하고, 단세포생물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힘에의 의지'가 생명을 존중하고 축복하는 것과 친밀한 개념인 거라 생각합니다. 그걸 자꾸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건강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니체는 우울증 환자였거나 혹은 조울증 환자가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그는 그 스스로 나는 생리학자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는 감정에 관심이 많았고, 감정 또는 그 원인을 표상하는 것으로 '피'를 비유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까지도 합쳐서 '자기'라 한 것이라 이해하고요. 그런데 그는 우울증에서 건강을 되찾는 것에 관심이 있었고, 나아가 그 기회로 '고귀해지는 것'을 욕망한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인류를 높이는 길이라 생각한 걸로 이해합니다. 즉 고귀한 인물들이 생겨남으로써 세상이 이로워질 거라 생각한 것인 듯합니다. 에서 보여지는 그의 태도도 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에서 비극이 가리키는 대표적인 것은 일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프로메테우스에 감정이입을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프로메테우스가 무얼한 인물인가 하면, 인간에게 불을 준 인물이죠. 니체도 그렇게 생각한 거라 생각합니다. 힘에의 의지가 의미하는게, 초인 즉 신을 닮을 만큼 고귀해져서 불을 만들어 인간에게 주고자 한 거죠. 그리고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는 것, 그것을 생리적인 비유로 해석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괴테의 를 읽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파우스트는 정신적인 병에 걸린 인간 파우스트에게 이를 치유하기 위해 신이 악마를 보낸 이야기인 걸로 이해합니다. 왜 니체가 독한 얘기들을 하는지는 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니체가 왜 철학자들의 동기를 공격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철학자들의 감정과 의지, 욕구 이런 걸 공격하는 것은 니체는 인간의 인과관계란 것을 '생리적인 것'에 그 근본원인을 두고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의 문헌학자만이 아니라, 생리학자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가 왜 철학자들의 감정적, 감성적, 의지적인 면을 공격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니체가 훌륭하다 생각했던 점 중 하나는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알고 이를 믿는 것, 그런 걸 파악을 잘 했다는 것입니다. 니체의 어느 책에 자신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많은 수의 철학자들은 목적론적인 경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목적론이란게 인과관계를 거꾸로 볼 위험이 큰 거라 생각합니다. 순환논리가 들어가기 쉽고, 또한 여기에 철학자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이 은밀히 엮여 들어가기가 쉬운 거라 생각합니다.
네 번째는 니체의 '평범함'에 대한 태도에 관해서입니다. 이 부분은 민주주의가 활발한 오늘날,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일어날만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니체는 영국에 대해서도 평범하다고 평가한 걸로 기억하고, 칸트에 대해서도 평범하다고 평가한 걸로 기억합니다. 니체를 비판할 때에는 오히려 이 부분을 파고들 필요가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니체의 '여성'에 대한 평가도 오늘날 비판받을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평범함에 대해서는 그게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떤 의도가 있었을지에 대해 변호해줄 수 있는 부분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에 대해서는 곤란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니체의 여동생 등 주변 인물들의 영향을 받아 그리 생각한 것 같은데, 이는 균형을 잃은 것이고 편파적인 생각인 것 같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니체의 여동생이 히틀러 나치에 니체 사상을 왜곡해서 팔아넘기려고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고요. 저는 마르크스도 히틀러도 니체의 반대되는 인물들인 거라 생각합니다. 마르크스는 평범함 내지 천박함이라 불렸을 거라 생각하고요. 히틀러는 선동당한 독일 국민들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립심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 해석할 수 있겠지요. 순진한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에게 속아 넘어간 걸로 해석하는게 아니라, 독일 국민들의 내면에 있던 악한 것들이 히틀러로 인해 공명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죠. 이걸 보면 '평범함'을 가지고 니체를 비판하는게 만만치는 않은 일일 거라 생각합니다.
다섯 번째는 저는 니체의 심오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디오니소스'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은 니체의 대표작이자 또한 출발점이라고도 생각하는데요. 여기에도 심각한 오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파괴적인 것, 혼란한 것, 무질서한 것, 그런 것이 디오니소스이고, 그것이 니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걸 보면, 그 족보로 니체를 찾아 이야기하는 것 같고요.
그런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디오니소스는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맞지만, 또한 창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즉 단순히 파괴가 아니라, 창조가 함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통과 함께 기쁨이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미 귀한 것들을 가진 상태에서 그것들을 파괴하고 다시 창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폴론적인 것을 둔 상태에서 디오니소스인 것으로, 저는 이걸 '정신이 재조직화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기존에 훌륭한 음악들을 잘 이해하고 해석하고 배웠다고 해봅시다. 그걸 파괴하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 때에, 디오니소스적인 현상이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디오니소스는 비극적으로 탄생한 신이고, 디오니소스를 설명하는 하나는 포도주죠. 술 춤 피. 억압을 풀리게 하는 술, 그리고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반드시 내면의 혼돈을 잉태해야 한다.' 춤, 그리고 '나는 오직 피로 쓴 글만을 사랑한다.' 피, 이를 통해 나타나는 개인의 생리적인 욕구. 이로인해 새롭게 창작된 음악. 이런 것들을 떠올린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창조가 그냥 되는게 아니고, 이전에 훌륭한 것들을 배웠어야 하겠지요. 에서 아폴론을 이야기한게 그런 부분에 해당되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니체는 학생들이 기존의 훌륭한 것들을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걸로 기억하고요. 그런데 그런 부분 없이, 파괴와 혼란과 무질서면 그걸 니체와 엮는 것은 저로서는 오해이자 엉터리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중국 공산당이 문화대혁명을 하고, 중국의 전통적인 것들을 파괴해버린 것은 전혀 니체적인 것이 아닌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게 니체적이라거나, 혹은 그런 걸 하는 사상가나 예술가를 니체의 대를 이었다고 생각하는 듯하고, 이는 맞지 않는 얘기라 생각합니다.
순수한 힘에의 의지가 충만한 창조적인 사회, 니체가 생각하는 전인적 개인들이 관계하는 사회의 혼란성을 보았다면(어쩌면 니체는 현대 사회가 그가 상상한 사회로 가기 위한 과정 쯤으로 흐뭇하게 보고 있을 것 같지만) 어떤 말을 했을까요?
와 진짜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설명 미쳤다.
완벽주의가 행복의 가장 큰 적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져ㅎㅎ
니체 영상을 세 편쯤 봤는데요, 저는 니체의 철학이 좋아요. 현실의 문제점을 의심하고, 그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나라는 존재의 삶을 긍정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것 같아요. 현실적 가치에 대한 의문은 좀 남지만...더 공부해보고 현실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생각해보고 싶네요! 니체철학은 고등학생보다는 대학생에게 훨씬 감명을 줄 것 같은 느낌이에요..
니체 같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마련한 보편적인 진리에 따르는 것을 '종속' 혹은 '예속' 상태라 볼 수 있겠지만
때로는 나의 방식으로 자신 안의 욕망, 에너지에 집중하다가 오히려 자신에게 큰 고통을 불러오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에너지를 다루는 데에 미숙한 사람들은 하나의 길잡이, 네비게이션을 마련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네비게이션을 따라 가는 것을 혹자는 '부자유'라 할 수 있겠지만,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에게는 그 방황으로 비롯된 혼란이 '자유'의 산물일 테니까요.
저도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그게 제가 니체의 사상을 아주 선호하지는 않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니체 본인의 근본적인 철학이 사도마조히즘적인 측면이 있어서 더 그런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불러온 고통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때문에 편하고 쉽고 안락한 것들을 대체로 거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래서인지 굉장히 니체의 철학이 좋습니다. 제가 고통을 마주하는 방식에 대해 공감받는 기분이랄까요.
좋은 글입니다 사회에서 더불어살기 위해서 최소한의 네비게이션이 작동해야한다고 생각해요 근데 네비게이션이 고장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죠 고칠 생각은 없고 서로 네탓이다 하고만 있는데요 이것도 혼란이네요
네비를 따른다고 두려움과 방황이 해결되지는 않죠. 네비를 지식의 확장으로 본다해도 어느 시점에서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읽어내지 못한다면 모방이 주는 단점은 더 치명적일수 있을겁니다.
@@wanangeo 옳은 말씀입니다. 모방 전 스스로 자아를 들여다보는 과정이 필수인 것 같아요.
삶이니 인생이니 하는 용어 자체가 우선 보편화 일반화의 문제적인 거고요,
삶은 보편적인게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다 개별적 조건과 상황의 개별적 사건만이 있는 거죠. 철학이나 학문이 보편적 개념일 수 밖에 없는 부조리함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하는 니체는 눈 밝은 선지자중 한분이죠.
저는 쇼펜하우어를 정말 좋아 합니다. 기회가.된다면 부탁드립니다
철학을 몰라도 세상 사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지만.. 인간은 사유하는 동물이므로.. 사유하는데에 철학(기존 위대한 철학자들이 만들어놓은 여러 사유체계.. 도구들)이 도움이 많이 되는것은 사실입니다. 사유없이 그냥 주어진대로 본인 욕망대로 사는것도 방법이긴 하지만…… 천재(예,,니체)는 기존의 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사유의 세계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능력이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으니…뭐.. 공부해서 나쁠건 없는거 같아요. 공부한다고 다 이해할수도 없겠지만😩
철학을 몰라도 아무지장이 없지만
우리자신도 모르게 철학적 사고를 할때가 많고
왜 하고 의문을 느꼈을때 철학에 좀더 파고들고 싶은게 아닐까요
저는 제자신이 철학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심도있는 철학만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공감 되는 말 같아요. 범법만 아니면 비도덕적이라고 여겨지는 행동을 하는것도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환상(힘에의 의지는 보편적 원리가 아닌가?)
이원론에 대한 거부(노예와 주인의 이분법)
학문 뒤에 숨어있는 추악한 욕망(살아본적도 알지도 못하는 고대 그리스에 대한 추억?팔이 그저 "간지남"이란 허깨비, 허황된 '느낌'을 쫓은 철학)
아 ㅋㅋ
지금도 어떤 원칙을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며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니체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죠
지리네요 니체
탈근대 포스트모던 시대의 미술과 비슷한 상황이네요.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고전스러운 그림을 그리거나 모더니즘 미술을 계속 반복하고 화가나 갤러리 미술관들이 주류인 현대미술이 그렇다 볼 수 이껬네요.
기성적 사고의 틀을 깨야한다는 것 자체에서 이미 그 주장 또한 우리는 의심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러셀의 역설처럼 니체 또한 누군가에게는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기에 그의 주장은 꼬리를 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니체는 바로 그런것을 원하는거겠죠.
감사합니다.
저도 감사합니다!
니체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써 좀 오만한 생각이라고 이야기를 듣지만 타락하지만 않는다면 굉장히 똑똑하고 지혜로운 인생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니체 철학을 싫어하시는 분들은 보통 인간의 선악에 대해서 민감하신 분들이 많고 그 분들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물론 저도 선악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악과 관련된 고통, 결핍, 무시, 시련, 가난, 욕망 등등이라는 안좋은 편견이 생길만한 요소들이 인간의 생활수준을 발전시켜왔고 이에따라 인간의 악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그 발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경험과 삶의 다양한 체험과 만족을 느낄수 있어서 행복을 느낄수 있는 요소는 많아졌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비교나 폭력, 전쟁 등의 부작용으로인해 발생하는 불안은 장애물이 되었지만 그 또한 극복해가는 과정이고 과거보다는 지금 현대사회에서는 누구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이분법적으로 단순하고 쉽게 생각하는건 본능에 가깝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상 모든 판단을 항시 예민하게 주시하다간 머리가 과부하가 걸려서 마비가 될 것이다. 특히나 사소하다고 생각하는것일 수록 그렇다. 세상에 절대적인건 없다지만 우리가 A라는 판단을 했을때 맞을 확률이 95%이고 틀릴 확률이 5%라고 할지라도 대부분은 A라는 판단을 하는것이 효용성이 높다. 만에하나의 틀릴 확률에 집착하다 보면 더 높은 혹은 더 치명적인 오류에 빠지기 쉽다. 다만, 니체와 같은 철자는 탐구자의 영역에서 1% 혹은 0.1% 의 영역의 영역울 추구한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틀린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민적이라는건 어쨌든 보편적인 것이고 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활하기에는 이분법적 판단이 대부분 삶을 유지시켜 줬고 인간에게 그 동안 유효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인류가 여태까지 살아 남았을 수 있을까?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세상의 자원은 한정적인데, 우리의 사고는 그 위에 놓여질 뿐이니 한계는 명확합니다. 하지만 그 한계를 직접 맞닥뜨리고 인정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듯 합니다. 살아가기 위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인간이, 스스로 만든 의미를 부수기는 어려울 테니까요. 결국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인간은 한계를 마주하기 보다 의미를 만들어 내는데에 조금 더 무게를 두게 됩니다. 그렇게 각각의 인간이 남겨놓은 의미들은 차곡차곡 쌓이게 되겠죠. 마주해야할 한계는 안개 속에 가려지고, 초라한 의미들로 쌓아올려진 벽은 점점 커져서 세상의 끝마냥 하늘을 가리게 되겠죠. 쿵쿵쿵, 쾅쾅쾅, 그 벽을 두드리는 사람, 두드려서 부수려는 사람, 그래서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 니체의 말은 여전히 불편합니다. 비록 그가 두드렸던 벽은 이미 많이 무너졌지만, 새로운 벽들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겠죠. 어쩌면 오래된 그의 말들은 더이상 새로운 벽들을 부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우리를 두드리면 우리 중 누군가는 자기가 마주한 벽들을 부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고생한다..../ 무언가를 제대로 정의하려면 그 토대를 쌓는데만 수많은 가정과 정의가 필요하다. 그런것 없이 이야기 하는 것은 그냥 바다가 모래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는 것과 같다. 다음번 파도가 몰려오면 한번에 쓸어가 지워진다. 뭐하러 그렇게 중구난방으로 떠드는가? 제대로 정의조차 하지 않고. / 내가 댓들을 달려고 해도 가을철 떨어진 낙옆처럼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며 떠도는 모습에 바람소리 더할 뿐이다. / 아주 단순화 시켜서 댓글을 단다면 그나마 니체의 철학은 근대 기독교적 사상과 대립으로 세상을 좀더 올바로 보려는 노력이였고, 그것에 필요한 사상의 토대였다. 지금 철학은 저 지하에서 조용히 과학의 지식에게 안겨 자신을 핥으며 지내고 있다. / 일반 대중에게 필요한 철학으로 한국사회에 필요한 것은 좀더 현대 철학까지 잘 살펴 대중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통찰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는 철학이 없으므로. 솔직히 상식도 말라비틀어진 사회이다.
니체가 왜 물리학이 감각적인 학문이라 서민적이라고 했는지는 알겠는데, 이걸 현대에 놓고 보니 현대의 물리학은 '양자역학'을 기초로 하고 있다보니 감각적인 영역에서도 벗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당시 물리학은 그렇지 않았을 테니 니체의 비판은 꽤 일리있었던 것 같습니다.
11:49 양자역학에 이르러서는 물리학이 관측으로만 진행될 수 없고 사고실험으로 증명하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고는 하던데ㅋㅋㅋ..
아이들과 역사수업을 하다 보면 아이들이 자주 묻는 말이 있어요.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인가요? 누구는 나쁜 사람인가요?”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데 아주 익숙한데, 이걸 일본인 철학자가 한국인은 성리학에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구요.
남과 여, 음과 양, 하늘과 땅, 상생과 상극 등 세상을 이분법적 대립 개념으로 바라보는 게 성리학이라고요.
다각도에서 살펴보고 세상의 모든 게 하나의 키테고리 안에 온전히 속할 수 없음을, 세상이 서로 상충되고 모순된 가치 속에서 존재하며 살아가는 것인지를 일깨우는 게 참 어렵습니다.
스스로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달리 말하면 어떠한 사건 사고 사안 사정에 대해 지 멋대로 일으키고 제 맛대로 해결할 수 있다는 뜻과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현실이라는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살아가겠다는건 사건 사고를 맘대로 해결할 수 있는 자리에 가겠다는 의지와 사회로 관계된 다른 인간이야 피해를 볼지언정 자신이 관여된 사건 사고를 지맘대로 일으켜 보겠다는 의지가 다 들어 있는 것이죠
고로 니체의 심리구조에 이 두 의지가 잘 드러나죠
간혹 아주 간혹은 지맘대로 해도 부작용 덜한 사건 사고도 있긴해요 하지만 인간은 사회생활을 해야하는 인격체로서 자신말고 상대해야할 또다른 인간이 있음을 인지하고 누락시키면 안됩니다 어떤 삶의 순간에서도...
이러 하기에 인간은 제대로 관계된 타인을 인지하고 있다면 남과 관계된 일에 사건 사고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야하며 남이 일으킨 사건 사고도 해결하기 위해 제대로 파악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삶의 주인은 너와 내가 함께 다 잘 사는 길에 이르는 삶의 주역이 되어 주체적으로 주동하는 자여야 하는 것이죠 즉 이러한 삶이 바로 도덕적 삶인 것이죠
철학이 왜 중요한지 왜 초등교육에서 철학교육을 하지않는지. 알겠네요 자본주의에선 모두가 잘살순 없기에 그리고 철학교육을하면 정치인들이나 기득권층에게 엄청난 위협이되기에 그런것 같아요
실제 모든학문 모든 기술꼭대기에 철학이 있기에 최고자리에 위치한 사람들이 철학을 바탕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기술이나 특정분야만 전공하신분들이 아쉬운게 시야가 좁아서 다른분야와의 통합적 사고가 부족하더라구요 참고로 최고기업 경영자들중에 유독 철학전공이나 베이스가 된분이 많습니다
확실히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은 위험하죠
마지막에 하신 말씀처럼 수도권이냐 아니냐 부터 시작해서 지역갈등 젠더갈등 등등에는 항상 이분법적인 사고로 인한 갈등이 존재 했다고 생각하거든요.
비슷한 맥락에서 무언가 옳다고 얘기하기 위해선 이분법적인 단 두개의 사고 방식이 아닌 다양한 관점과 사고해서 생각할 필요성도 느껴지네요.
사람이란게 지식을 전달 받을 때, 자신은 그 안에 포함시키지 않고 외부적인 자극으로만 그래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만 생각하는데, 이 생각 자체가 천동설이랑 다를 바 없는 것 같네여.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할 때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지식을 기반으로 스스로에게 집중을 해본 적이 있는지 ;; 물리학이 왜 세상을 이해하는데 한 자리를 꿰찼는지 ;
세상에 좋고 나쁜 것은 없습니다
어떻게 지혜로이 사용, 이용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종교,철학,과학,인문학 등
어떠한 공부로도
지금 당장의 괴로움은 절대
해결 못 합니다
모두 잠깐의 위안을 주는 땜빵에 불과합니다
안타깝지만
최선으로 노력하고 결과는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게 진실입니다
먹고 자고 싸고를 수월히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삶임을 인지하며 삽시다
이것 절대 쉽지 않습니다
하늘의 핀 무지개가 진짜인줄 알고
하늘만 쳐다보고 쫒아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습니다
그냥 열심히 하루를 사세요
그걸로 족합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과거 진리를 쫓았던 수많은 철학자들, 지금의 철학자들
헛다리 짚은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잘봤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이야기했던 악의 평범성이 떠오릅니다. ‘악이란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악’이라고 이야기했기에 또 다른 이원론일지도 모르겠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노자랑 굉장히 비슷하네요
이원론-음양..
무지-무위..
구독완료
잘해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충코님 니체에대해 보다 깊이있는 이해를 하려면 불교의 교리를 공부하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영상에서 말한 내용은 이천여년전 불교교리인 제법무아 제행무상 연기법 불이법의 내용들입니다.
형이상학적인 어느무언가를 시대의 상황에따라 제단하고 특정관점에서 절대적 가치로 못박는것을 시대 그이상의 시야에서 말한것이라 보여집니다.
저는 니체를 가장좋아합니당^^
영상끝에 니체를 두고 아주 좋아하는 철학자는 아니라고 하셔서, 또 정말 좋아하는 철학자는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영상 잘봤습니다^^
나채의 생각을 부정하면 니체스러워 지네요
틀린게 아니라 다르다는게
"최근에 일어난 최대 사건 ㅡ '신은 죽었다 (Gott ist tot)'는 것, 기독교 신에 대한 신앙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 ㅡ 은 유럽에 이미 그 첫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 중략 ..) 신 자체가 우리의 가장 오래된 거짓말이라는 것이 이제 입증된다면?"
틀린 판단은 현재의 가치체계, 진리체계에서 틀리다고 도출되었을 뿐, 사실 틀리지 않을 수 있다.
니체의 사상이 진보 계열의 사상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네요
굿
쇼펜하우어+랄프왈도에머슨=니체
안 됨. 틀리는 것을 두려워해야함. 안 하면 아주 큰일남
먹고 자고 싸는게 곧 진리다. 철학이란 작고 푸른별에서 찰라의 순간을 살아가는 고차원적 존재라고 착각하는 미생물들의 언어유희일뿐
니체가 지식이 절대적이 아니라고 한 말의 의미는 톨스토이의 고백록에 나오는 이성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 즉 시공간을 초월한 실재의 추구로서의 의미로 이야기한거 같습니다
다른건 모르겠고 사고의 틀을 깬다라는게 뭔지 느껴지네요..
말씀하시는 '사고의 틀'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 니체가 하는 말들은, 시선이 한곳에 묶여 다른곳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 즉,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다이너마이트를 두르고 불을 붙이는 그야말로 머리통 자체를 깨부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els6072 오호 표현이 좋으시네요. 저도 공감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지만 내 입으로는 설명 못 하겠는 이 답답함^^;;;
저는 곧 곧 60이 됩니다 젊어서 신학을 공부하고 무직으로 집에서 지냅니다
젊은 도전의 길을 가는 충코님을 응원하며 배웁니다
그가 왜 mici ipsi scripsi 를 밀고 나갔는지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ㅡ욕망의 존재인 자기자신에게 솔직해지는 용기를 배우며 창백한 죽은도덕 위에 자기를 건축하려드는 전통의 철학과 종교가 얼마나 큰 괴물인지 다시한번 확인 하게 됩니다 ㅡ건강 잘 돌보며 공부해가시길 바라며 응원과 배움에 감사합니다
그래서 제가 무지외반이 있나봐요 ㅋㅋ
여전히 현대는 니체의 시대이죠?
러셀이 자신의 철학사에서 "초인에게 부여한 힘을 향한 갈망 자체가 두려움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니체에게는 결코 떠오르지 않았다. 이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지배할 필요를 상상하지도 않는다. 두려움을 정복한 인간은 니체의 '예술가, 폭군' 네로처럼 미친 짓을 하지 않는다. 예술가, 폭군 네로는 음악과 대학살을 즐기지만, 그들의 심정은 불가피한 긍정 혁명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나는 부분적으로 니체의 가르침 탓에 현실 세계가 그의 학몽과 흡사해졌음을 부정하지 않을 테지만, 그것이 현실 세계를 덜 공포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한 대목이 있더라구요.
니체의 그러한 초인의 지배적인, 폭력적인 면모는 자신의 성장 과정과 관련이 있는 거 같기도 해요. 정말 어렸을 때부터 별 탈 없이 살아가고, 무난한 유전자를 타고난 사람들은, 별로 다른 이들을 지배할 욕망을 가지고 있는 거 같지는 않더라구요. 보통 억눌리고, 학대당하거나 어떤 것을 두려워했는 이들이 그러한 폭력적 욕망이나 권력욕을 더 많이 가지는 거 같아요.
네, 저도 러셀의 견해에 어느 정도 동감합니다. 저는 인간 안에 지배를 위한 힘이 유일한 우선적인 에너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니체가 그토록 비판하고자 했던 소위 '착한 사람들의 마음' 역시 단순히 왜곡된 심리적 결과물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안에 깊이 내재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람에 따라 그런 본인의 '선한' 힘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는 반면, 그 힘을 잘 인지하고 그 힘을 통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후자가 더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하고요.
다만 니체가 표방했던 힘을 향한 갈망이 과연 "두려움의 산물"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폭력적인 에너지와 사랑의 에너지가 둘 다 인간 안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거든요. 따라서 니체는 인간의 한 부분을 발견한 것이지,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한 케이스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러셀의 그러한 평가가 영미권 철학 특유의 인간에 대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관점을 잘 투영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chungco_phil 좋은 답글 감사합니다
유튜브에 몇없는순기능 ..
철학을 해야 하는데 철학사나 문학을 하며 철학한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철학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chungco_phil개인적으로는 만학이 철학이라 생각합니다.모든 지식을 습득하고 정진해 세상의 이치를 깨달음이 찰학이닐까요? 요즘은 인문학이 찰학
자리를 꿰차고 주인행세를 하지요..
"매사에 비판적인 자세를 보였지만 가끔 파격적으로 비판적리었던 분"
서민적이라는 표현의 기저에는 어떠한 인식과 심리가 있을까? 그것도 궁금하고..
'물리학이 감각적 정보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학문' 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물리학이 우리 감각과 관계성을 지니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물리학에만 적용되는 사실이 아니라 대부분의 과학은 감각과 관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떠한 것에 대한 사유나 이해가 가능하려면 살아오면서 얻은 감각적 자극을 통해 얻은 정보들이나 전제가 필연적인데, 물리학에만 한하는 이야기인 듯 말하는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물리학은 현상을 이해하는 또다른 방법이나 체계일 뿐이고, 이러한 이론 혹은 관념을 절대적인 진리나 진실로 이해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가? 즉 어떠한 것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갇는 그 태도에 대한 지적을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순전히 그러한 태도를 문제삼는 것이 였다면 왜 물리학을 연결지어 설명했을까? 그러한 양상들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물리학에 대한 사례를 통해 이해시키려 했던 것일까?
들어보니 제목에 비해 별로 와닿는 것도 큰 깨달음도 없는 것 같습니다. 말씀인 즉슨, 솔직한 심정이라면 악플도 마구 달아라! 이런 얘기로 들리네요.
분별을 멈춰.
분별 속에서 우월해지려고 철학 들먹이면 더 이상한 사람이 된다.
이분법도 이해 못하는 나 ㅠㅠ 있음과 없음
니체 쫌치제 나랑 사고방식이 좀 비슷한듯
충코님. (이 동영상이 왜 또 위로 올라왔는지 모르겠는데, 보다보니 옛날 본거네요.) 다시 듣게되어 댓글 하나 답니다./ 정말 한국에서 현재에 필요한 것은 무너진 상식입니다. 좀 생각 좀 하는 사람이 되어서 , 철학자라고 하세요. 철학책을 끼고 있다고 철학자가 아닙니다. 내가 장담하건데, 한국에서 교수든 학생이든 일반인이든 철학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대학 철학과라고 해 놓고 거기서 강의하면 철학자 입니까? 솔직히 원숭이보다 나은 것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니체는 뭔가 뜬구름 잡는 말을 잘하는 것 같아요… 아직 제가 식견이 부족한 것일 수도..
본인의 식견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갖는 게 바람직할 뿐 아니라 더 나은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내 말을 너희가 한번 판단해보고 옳다면 따르지만, 옳지 않다면 버려라"
공자도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혜에 이르는 길은 하나인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고 아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파이드로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네는 아마도 말하는 상대가 어디 사람이며 누구인가가 문제될 걸세. 자네는 그 진리가 실제로 부합되느냐 하는 것만을 문제삼지 않으니까"
저 분들이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권위있는 사람의 말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으니까요.
그들은 사실 잘 모르면서, 자신이 어려운 말(권위있는 말)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아는 척을 합니다.
사과를 오이라고 속이는 사기꾼은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게 시각적으로 다르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철학에서 다루는 것들은 확실하게 확인하기 쉬운 것들 일까요?
아마도 아닐 겁니다.
이것은 사기꾼과 사이비가 많은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물리의 세계를 다루는 과학도 조금씩 발전해오다 본 궤도에 오르게 된 것이 몇 백 년 안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세균, 혈액형도 몰라서 수술을 하면서도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과학이 궤도에 오르고 하나의 과학적 관점이 생기면서 사이비나 사기꾼에 속는 게 현저히 적어졌죠. (과학적 현상을 미신이나 사기로 다른 사람을 현혹하는 일들)
제가 생각하기로는 아직 철학은 과학처럼 궤도에 오르지 못한 걸로 보입니다.
니체가 뜬구름 잡는 말을 잘한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저런 아무말 대잔치 하는 사람이 유명하다는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철학을 가르친다는 사람들이나 그런 관련 단체들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저는 사람의 똑똑함을 두 가지 정도로 판단합니다.
1. 권위에 속지 않고, 이상하거나 모르는 것을 분명히 하는 사람.
2. 어떤 현상이나 사물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는 부분이 아닌 다른 부분을 보려고 애쓰거나 잘 찾아내는 사람.
제가 보기에는 식견이 부족한 게 아니라,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는 듯 보입니다.
동영상에 나온 니체의 주장을 기준으로 잘못된 점을 알아보죠.
1. "결국 우리는 이 물리학적인 관점 아래서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현상은 무언가 더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원리가 발현돼서 나온 파생적인 현상이다. 이런 식의 생각을 품거든요?"
일단 위의 문장에서는 쓰지 않았지만, 그 바로 전에 언급(신적이다.)까지 조금 보태서,
"신적이고 더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원리" 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일단 보편적인 원리에 (신적이고 더 초월적)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니체가 그렇게 말해서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보편적 원리를 생각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그것을 신적이고 더 초월적이라고 생각하나요?
인간이 하는 학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에 관한 학문과
인간이 만든 것에 관한 학문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별과 달, 행성, 빛과 그것들이 움직이는 운동과 관련된 것들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동물, 식물, 무생물도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죠.
그러한 것들(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들)을 탐구하는 학문이 있습니다.
건축학과, 문학과, 자동차학과, 컴퓨터학과 등등은 모두 인간이 만든 것에 관한 지식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위에서 말하는 보편적 원리를 정상적인 사고방식의 사람이 생각했을 때, 그것을 신적이거나 초월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단지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죠.
2. "한 마디로 보편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보다 더 우월한 것이라는 믿음이 암묵적으로 아직까지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3명의 사람이 있는데, 그날 점심에 2명은 빵을 먹고, 1명은 밥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빵을 먹은 2명이 식중독에 걸렸습니다.
니체도 이럴 때, 2명의 식중독의 원인을 빵으로 생각하지 않을까요?
어떤 현상에서 공통된 것들을 원인으로 생각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보편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의 원인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야 더 좋은 방향으로 가겠죠.
빵을 먹은 2명이 식중독에 걸렸는데, 보편적인 원인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인간들이 지금껏 지내왔다면,
우리는 지금도 독초와 식용 가능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구분하지도 못할 뿐더러,
식중독의 원인도 발견하지 못했을 겁니다.
보편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보다 낫다는 것이 단지 암묵적인 믿음 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3. "자신의 힘을 뻗치려는 의지 자체는 인간의 삶을 이루는 근본적인 에너지"
여기서 황당한 것은 보편적인 원리가 환상이라고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모순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니체 자신이 저런 발언을 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여러 인간의 보편적인 행동을 관찰해야만 가능하지 않을까요?
게다가 무지를 추구하라는 둥,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 라는 말은, 인간 공통의 무엇인가에 기대어 하는 말이 아닌가요?
보편적인 공통된 원리, 즉 모든 인간에게는 청산가리는 독약이다 라는 공통의 무엇인가가 있어야지만, 인간들이여 청산가리 먹지 말게나 할 수 있는 것이겠죠.
보편적인거 추구 안하는 사람이 왜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4. "원래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진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니체의 생각에 진리는 힘을 뻗치려는 의지가 발현된 한 형태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3에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니체 자신이 인간을 바라볼 때의 보편적인 원리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저 세상에 진실은 없고, 인간이 자신의 힘을 뻗치려는 의지의 한 형태만 있을 뿐이라는 말은,
그럼 니체 자신의 말처럼,
"내 말은 진실이 아니고, 그저 내 힘을 뻗치려는 의지의 한 형태에 불과한 의미없는 것이야"
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아니면, 니체 자신만이 오직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두 가지 다 이상한 생각일 뿐이겠죠.
이런 상대주의자들은 그럴싸하게 말을 포장하지만, 결국에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니체가 말한 "권력에의 의지"를 보면 굉장히 1차원적인 생각일 뿐더러,
그 너머를 생각하지 못하는 한계를 볼 수 있습니다.
권력에의 의지는 왜 있을까요?
여기서 더 이상 나아가서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더 나아가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에 대한 학문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니체처럼 말이죠.
그 밖에 모순되는 것들을 지적해보자면,
이원론을 비판하면서 그 근거를 선악을 판단하는 니체만의 도덕관으로 하고 있습니다.
"솔직하지 못하다."
"선으로 포장하는 것이 치사하고 야비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
선악은 없고, 진리도 없는데, 대체 무엇을 근거로 삼아 선악의 도덕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저런 판단을 하는 것일까요?
니체가 말한대로, 모든 인간의 행동은, 더 깊은 차원에 놓인 에너지 의지의 발현인 현상일 뿐이라면, 그것으로 설명하면 되는 것 아닐까요?
니체 주장대로 보편적인 도덕은 존재할 수 없는데, 왜 저런 이상한 말을 하고 있을까요?
참과 거짓은 따질 수도 없다고 말하면서, 무엇이 옳은지 아닌지 따지고 있는 것을 보면 참... (기존 철학자들은 잘못되었다.)
"더 깊은 차원에 놓인 에너지 의지의 발현"
이 부분도 위에서 언급한 부분이지만, 인간 행동의 더 깊은 차원을 말한다는 것은, 인간 행동이 보편적인 공통된 하나로부터 파생되어 나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니체 본인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 그 방식 그대로 사고하고 있습니다.
가끔 철학관련 영상이나 글들을 보면, 이원론(이분법)에 관한 얘기가 나올 때가 있는데, 하나같이 이원론이 왜 나쁜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나쁘다는 식의 뉘앙스로만 이야기 하더군요.
저 위의 영상에서, 니체가 이원론을 비판하는 내용을 봐도 이원론 자체가 나쁘다는 말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니체 자신이 선과 악의 이원론을 가져와 이원론에 나쁘다 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을 뿐입니다.
이원론이 나쁜 것일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해보죠.
누군가에게 무엇을 알려주기 위해서 손가락으로 어떤 것을 가리키는데,
그가 엉뚱한 곳을 바라본다면,
그 사람의 머리를 잡고 돌려서 올바른 곳을 바라보도록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눈으로 볼 수 없는 머리 속 풍경일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설명만이 가능하겠죠?
그럼 이해 못하고 헷갈려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큰 부분부터 나누어 점점 잘게 쪼개 나가는 식으로 전체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가야 할 겁니다.
스무고개를 생각해보면 되겠죠.
스무 번째에 답을 맞췄다고 가정했을 때, 이원론으로 이루어진 질문들이 하나가 아니라, 스무 개가 될 겁니다.
이것을 잘 생각해보면, 이원론으로 보이는 것이 단지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의 연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를 보면, 그냥 답을 찾기 위한 질문(이원론)들의 덩어리일 뿐입니다.
스무 개의 질문에 대한 힌트가 한꺼번에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을 한꺼번에 동시에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순차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생각해 처리해 나가겠죠.
우리의 사고는 전체, 혹은 전부를 한꺼번에 볼 수 없습니다.
케잌을 칼로 자를 때를 생각해보죠.
하나의 둥근 케잌을 반으로 자르고,
반토막이 된 케잌을 다시 반으로 자르고,
그렇게 반복해서 잘게 케잌을 나누겠죠.
인간은 칼이라는 도구로 케잌을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을 찔러 살해하기도 합니다.
칼은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나쁜 것일까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겠죠?
생각의 케잌을 나누는 이원론은 나쁜 것일까요?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닌 그저 도구일 뿐일까요?
위에서 설명한 것을 좀 더 간단히 말해보자면,
우리가 눈앞에 있는 사과 하나를 집어 드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과와 사과가 아닌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모든 사물을 그냥 하나의 덩어리로 보고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면,
사과를 집어 들 수 없었겠죠.
사과와 사과가 아닌 것, 두 가지로 나누었기에 가능한 겁니다.
무엇 하나로 나누어 보게 되면, 동전에 양면이 있듯, 필연적으로 무엇과 무엇 아닌 것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생각을 나누어 순차적으로 하지, 모든 정보를 한꺼번에 동시에 처리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우리가,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 머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펼쳐 놓고, 그 상태에서 비교해가며 답을 찾을 수 있다면, 훨씬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겠죠.
그렇기에 우리는 현명한 사고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시야가 넓다, 생각이 깊다, 폭넓게 생각한다, 입체적으로 생각한다, 이면을 볼 줄 안다 등등.
니체 같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시야가 미친 듯이 좁은데, 또 그 좁은 시야로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판단할만큼 생각이 깊지 못합니다.
그래서 코끼리의 꼬리 만을 보고 있으면서, 그게 코끼리의 전부라고 판단하죠.
니체 존나 웃긴놈이엿네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