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상을 보면서 생각난게 우리가 일상 중에 말이 안 통해서 오해가 생기거나 언어를 통해 하는 모든 상호작용이 엄청 재밌는 시간이며 거기에 새로운 고찰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의 언어와 타인의 언어가 같아 보일때 사실은 우리는 말이 통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문제가 꽤 있었을지도 ㅋㅋㅋㅋㅋ 하지만 사회에서는 큰 어려움 없이 모두가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것도 꽤 재밌는 대목이네요 ㅋㅋ 그리고 과학과 철학을 좋아해서 내가 언어의 본질을 파고 들었을까 싶기도 하구 ㅋㅋㅋㅋ 실용적 의미를 넘어 언어를 억압하고 언어의 규칙을 만들어냈다면 제가 언어에 대해 굉장한 오해를 하고 있었네요 ㅎㅎ 오늘도 영상 너무 재밌게 봤습니다. ㅎㅎ
그쵸, 비록 종교에 대해서 믿지 않는 저지만 그럼에도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의미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물론 저에게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야기 수단이지만, 여전히 그 효용성을 지닌 수단이며 그런 언어체계에서의 의미가 소중한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물론 과학의 언어는 늘 엄밀해야겠지만요!
작가 두분 중 한명인 닉 채터의 전작 도 너무 흥미롭게 읽었던터라 이 책이 무척 기대됩니다!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전 인공지능 언어모델 개발을 하면서 인지과학, 심리학, 뇌과학 쪽 책들을 주로 취미로 많이 읽었어요 인지과학 책들과 연구들을 보면 철학자들과 같이 연구하거나 철학자들이 주장했던 내용을 연구하는 경우도 많고, 철학자들을 인용하는 경우는 매우 빈번합니다 인지과학 쪽에서는 특히나 칸트, 흄, 쇼펜하우어, 메를로퐁티, 촘스키 외에도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름도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인공지능 언어모델 또한 뜻을 이해할 때 단어 전후의 맥락 뿐만 아니라 문장 전후의 맥락까지 따져서 확률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의미를 선택합니다 한 단어가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동음이의어 뿐만 아니라 은유적 표현의 다양성 때문에도 단어의 뜻은 한 가지로 확정될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이죠 때문에 저는 수소 원자 하나에 전자구름이 확률적으로 분포하듯이 단어의 뜻도 그런 구름처럼 중심성이 있고 주변에 여러 의미가 퍼져있는 집합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뇌에서 단어를 인식할 때도 발화되는 뉴런 집합의 패턴은 개개인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더욱 급진적으로는 한 단어의 뜻을 모두 주관적으로 해석한다고 말할 수도 있죠 그렇기 때문에 책을 좋아하는 입장으로서 많은 문장들로 깊은 맥락적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라는 수단이 점점 소비가 줄어드는 반면 틱톡이나 인스턴트 메세지같은 맥락이 제거된 짧은 메세지들로 의사소통이 대체되는 현상의 이면에 맥락을 덜 고려하게 되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저만해도 학교 다닐 때 책은 거의 읽지 않았고 전공 공부에 치중하기도 했지만 친구들과 대화할 때도 뭔가 설명하려는 시도만 해도 설명충 소리를 들어야했으니까요 단어나 문장의 뜻이 본질적으로 구름과 같기 때문에 더 정확한 의사소통을 위해선 서로가 어떤 맥락에서 메세지를 말하는지 질답을 주고받으며 확인하는 절차가 중요한데 일단 닫힌 마음으로 상대방의 말뜻을 내가 갖고있던 지식의 한계 내에서만 판단해버리고 반응하면 흔히 커뮤니티나 댓글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난독증적 비판이 되지 않나 싶어요 책은 꼭 사서 읽어보겠습니다 :)
좋은 의견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공지능 개발 쪽 일을 하시는 분의 견해를 직접 들으니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습니다. 책읽기에 대해서는 저는 아직 잘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책을 읽는 삶과 읽지 않는 삶 둘 중 어느 것이 더 인간을 지혜롭게 만드는지요. 물론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만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냐 안 읽냐가 핵심이라기보다는 책을 안 읽는 대신 뭘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맥락에서, 작성자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책을 읽는 시간이 짧은 영상을 보는 시간으로 대체되는 것은 분명 단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인간 사이의 대화의 경우 이 영상에서 말씀드린 제스처게임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과정이 되기 때문에 인간의 창의력이 발현될 확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일방향적인 짧고 쉬운 영상 시청은 그런 양방향의 작용이 잘 일어나지 않는 매체인 것 같아요. 반면 비교적 길고 어려운 책은 비록 일방향적인 매체이기는 하지만 읽는 데 힘이 많이 들고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질문을 스스로 던져봐야 한다는 점 때문에 어느 정도 쌍방향적인 소통을 활성화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책을 갈수록 안 읽는 건 어쩔 수 없는 흐름일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책 읽기를 대체해서 쌍방향 소통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 매체가 발달해야 사람들 사이의 창의적인 소통이 늘어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연 지금 시대의 인터넷 개인방송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네요.
@@chungco_phil 맞습니다 매체와 커뮤니케이션이 변화함에 따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하는게 쉽지 않죠 다만 저를 포함해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별로 하지 않고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공교육에 익숙하다보니 언어나 개념 자체가 의미와 일대일 대응이 아니고 상당히 유동적이라는 것만 더 절실하게 느낀다면 상대방이 말하는 메세지의 맥락에 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까 싶어요 꼭 책읽기가 필요하다기 보다는 포용적인 사고방식과 토론이 활발한 방식의 교육으로 가야만 상호간 오해가 줄어들고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는 말이 하고 싶었어요 ㅎㅎ
오늘 영상 너무 재미있는 주제네요. 저는 최근 들어 세대 간 혹은 성별 간 갈등이 첨예한 이유 중에 하나가 특정 언어표현에 대해 각 양극화된 집단마다 다른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즉, 서로 니가 진보니 보수니, MZ니 틀딱이니, 페미니 한남이니, 하는 표현을 써가며 혐오의 정서를 드러내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용어를 사용해도 각자의 집단마다 그 용어를 형상화하는 개념의 간극이 너무 크기 때문에 서로 간의 대화가 아예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러한 경우에는 같은 단어이지만 집단별로 이해하는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를 정리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첫번째 발걸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한번은 언어의 실존성으로 (1:1 매칭)으로 또 한번은 언어의 관계성(인식론)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감탄사 와를 그 자체로 또 한번은 관계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같은 감탄사지만 의미는 달라지죠. 그런 맥락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를 다시 한번 보세요.
나는 지금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지만, 나를 이해한 후 내 문장들이 의미 없다 인식한 누군가가 나를 넘어서서 세계를 더 올바르게 볼, 다시 말해, '내가 말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건 더는 말할 게 없는 내 몫이 아니다. 전후 문장을 보니 요런 느낌으로 보이기도 하네요.
우리는 왜 말을 하는가? 말은 내 안에서 나의 몸을 통해 외부 세계로 나오는 것이다. 말은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외부로 꺼내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내 안에 있는 것, 말로써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그것을 말을 통해서 드러낼 수밖에 없는가? 사실을 외부 세계에 있는 사물들과 그것들의 상호작용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같은 것으로 경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몸을 가지고 있고, 하나의 시공간을 점유할 수 없고, 따라서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는 감각기관과 시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험한 것에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한다. 내가 본 것을 말하고, 나와 다른 각도에서 본 것을 듣고,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듣기 위해서 말을 한다. 차이를 확인하고 정보를 보완하고 세계 전체를 볼 수 있기 위해서 말을 한다. 그렇다면 내가 본 것이 사실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실의 일부이기는 하겠지만 사실 전체는 아닐 것이다. 내가 받아들인 현상이 사실의 일부이고, 그마저도 나의 표상체계로 생략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말로써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의미이다. 의미는 말하는 사람이 자신있는 위치(시간, 공간, 문화 등)에서 사실을 경험하고 구성한 것이다. 사실 그 자체와는 다른 것이다. 나는 사실을 말한다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말은 사실을 담을 수 없다. 내 안에는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의 나머지, 즉 말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말할 필요가 없는 것다. 말하기가 사실 그대로를 전하기 위한 기술이라면 지금은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미래에 감각을 공유하는 기술이 발명된다면 그 때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때 말할 필요는 사라진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말할 필요가 생길 것이다.
영상을 보고 생각해봤어요 어떤 것들은, 표현하기 힘들어서 부정확하게 표현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면 스스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말하기(표현하기) 보다는 차라리 침묵(표현안하기)하는 편이 낮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것 같아요. fps 게임에서 익힌 저만의 플레이 스타일을 표현하고 싶어서 문장을 고안하려 한 적이 있어요. 어찌저찌 표현하기는 했는데, 나중에 문장의 의미에 따라 게임을 해보니 그때와 다른 플레이 스타일로 게임을 하고 있더라구요. 김익한 교수님께 배운 '자기화된 표현' 이 떠올랐어요. 본인이 무언가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그것을 미리 의미가 정해진, 즉 정의된 표현으로 늘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기 때문에, 스스로가 느끼기에 가장 정확히 표현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표현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편이 좋겠죠. 물론 남들은 알아듣기 힘들겠지만요.
국어사전의 효용은 무엇일까요? 위에 어떤 분이 언어의 의미를 전자구름에 비유하셨는데, 국어사전에 적힌 의미는 통용되는 그 구름의 중심에 가까운 의미를 써놓은, 임의의 기준점 같은 것일까요? 한 단어에 여러 의미가 써있는 경우도 많은데, 연속적으로 수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단어들에 이산적으로 몇 가지 의미를 정의해 놓은 것이 한계가 많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말할수없는거는 사회적으로 흔한 뜻을 가진 언어가 아니기에 상대방에게 말해도 못알아들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괜히 말해서 상대방 혼란스럽게하지말고 말할수있는 언어가 될때까지 자기혼자 그것에 대해 갈고닦고 생각하는편이 낫다고 봐서 그런가 하고 추측해봄 사람들이 더 성숙해져서 그 말할수없는것에 대해 표현을 못해도 조금이라도 인지할수있다면 이제 말할수 있는언어 바뀌는것은 시간문제가 되고
사실 이게 책을 전부 읽거나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는 문장 앞에서 말한 전후 상황까지 있으면 모두가 완벽하게 이해했겠지만 대다수 사람이 비트겐슈타인하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를 거의 파블로프의 개처럼 학습해서 그렇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리고 첨언해서 제 의견이나 생각을 붙이자면 대부분 사람들이 명언이 포함된 글 중에서도 딱 그 명언만 생각하고 직관적으로 생각하거나 그걸 타인에게 말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많이 와전되어 소실되어서 그런 경우 같네요. 이 부분은 비트겐슈타인의 이 철학적 문장 외에도 다양한 명언들이 화자의 마음에 따라 해석되는 경우가 많은거 같구요. 또한 일부 잘못된 정보를 퍼트린데 지분이 큰 이유 중에 특히 요즘 짤막하게 명언과 일화에 대해서만 편집되어 많은 이들에게 소비되는 소위 철학 유튜브 때문인 것도 있는거 같아 아쉽습니다. 물론 절대다수가 바쁘거나 철학에 쏟을 시간이 부족하여 유튜브같은 간단한 컨텐츠로 철학을 보고 소비하는데 이게 과연 철학이라는 것을 본질 그 자체로 즐기고 또한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생각까지도 이어지네요. 뭐 이건 지극히 제 의견이기에 이런 생각도 있구나 라고 봐주시면 좋겠네요 ㅎㅎㅎ 그리고 또한 이 부분에서 찔린 분들은 충코의 철학 채널을 보거나 ㅎㅎㅎ 혹은 관심 있어진 사상이나 철학에 대하여 직접 책을 읽어보는 노력을 해보면 좋겠네요 ㅎㅎ
단어는 의미를 부여 받았고 언어는 단어의 조합이고, 말할 수 없는 것이란 이미지나 느낌 등 머릿속에 흩날리는 모호한 관념을 붙잡을 만한 의미를 모르는 것인데 모름의 정도는 인간 마다 다르다. 그러니까 비트머시기의 의도는 자기 말뜻을 모르겠으면 그냥 조용히 들어라~라는 의미를 살짝 돌려 말한 겁니다.
당연히 후자로 생각하고 살았는데, 전자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많구나.. 요새 또 이 주제가 핫하니까 나름(?). 다들 쉽게 이해할줄. 이성주의, 합리주의에 현대인들은 너무 기대어 산다는 쇼펜하우어의 뜻을 이제서야 사람들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고, 과학유튜브나 여러가지 인문학, 철학 유튜브들 보면 이런 것들 많이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홍상수 한 편 보면 뚝딱ㅋㅋ 충코님 영상보면서 홍상수영화가 비트겐슈타인 철학과 좀 닮아있다는 생각도 드네. 어떤 정답이나 목적성의 영화가 아닌 수단과 계기의 영화.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여야 한다. 그의 가족 유사성이라는 개념에서 짐작컨데, 우리의 언어는 고정적 형태가 아닌, 서로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의미화 시킨 범주의 인식을 통해 소통한다라는걸 말하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자유주의자들이 자유는 옳다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자유라는 상태를 직관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동시에 상대방의 자유와 나의 자유라는 다를 수가 있다. 자유로운 상태는 동시에 무질서로 치환되는 위험성조차 내포하기 때문이다. 나는 도둑질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자유라고 믿는 이들은 없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침범은 자유인 것인가? Freedom과 Liberty는 같은 것인가? 우리는 그저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끔 그의 침묵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인식 자체에 대해서 말할 수 있도록 공유될 때 까지, 관계성에 의해 형성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한 단어의 의미는 계속 변하는데 각주구검 뱃사람처럼 최초 표지해둔 의미 한 가지로 만 소통하려 한다면 (이미 떠나온 과거 의미로 사용한다면)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겠군요 심하게 말하자면 사전 무용론도 나오겠는데요~^^ 그러니 예전 선불교 스님들의 불립문자 개념이 충분히 설득력 있는 생각 같습니다...
평소에 잘 배우고 있습니다. 를 쓴 진화생물학자는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입니다. 비트겐 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유대교 로고스 신화를 바탕으로 형성된 서양의 언어관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대 중국의 노장사상적 언어관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재미지기에 무식하게 일차식으로 풀어봅니다. 침묵이란 말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의로 말하지 않는 것이죠. 즉, 논리라는 이성의 판단이 좌절할 때 사건입니다. 인간이 만나는 모든 소여는 말(생각과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없지만 말이 미처 다가가지 못한 광활한 미지의 영역은 있을 겁니다. 그래서 비트겐의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쪽이 아니고 '참과 거짓을 가리는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 이지요. 말하자면 논리가 없거나 희박한 직관 철학자들에게 논리에 맞지 않는 것들을 마구 뱉어서 철학의 중추적 논리를 혼란스럽게 하지말라는 부탁이 아닐까합니다~ 당시 분위기 상~ 그가 중도하차 한 이유도 논리를 마스터했기 때문보다는 그 숲을 헤쳐나가기 싫었을 것입니다. 무논리나 비논리 영역도 논리나 마찬가지로 언어의 영역이라는 점을 과소평가~ 인간은 무지하지만 엄청난 피를 흘리며 종교와 철학을 양립시키는 길을 택해온 역사 ~
비트켄슈타인은 언어로 자기만의 이해한 이 세계를 설명했다. '말할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는 비트켄슈타인 자신의 세계에서 바라본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세계를 받아들이는 나는 침묵해야 한다란 생각이면 그사람의 세계에 수긍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말이란 언어이고 언어의 세계는 그자체로 생각이기에 생각(말)할 수 없는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얘기 같습니다. 침묵이라는것도 말할수 없는 or 생각할 수 없는 그것(실재?)을 언어로는 설명을 할수 없었기에 그런거 아니지요? 결국 말할수 생각할 수 없는것은 무의식의 발현 일수도 있겠네요. 그걸 표현하자니 그건 의식(생각) 너머의 것이기에 침묵해야한다고 비트켄슈타인 그 자신만의 세계를 타자인 우리에게 설명한거 같습니다.
제 옛 애인이 자주 쓰던 말이었어요. 말할 수 없는 것엔 침묵해라, 완전히 알지 못 하는 한 그 주제에 대해선 말을 안 하는 것이 낫다… 처음엔 그 반복된 문장에 현혹되고 설득되었지만 그저 자신의 무지를 가리기 위해 오용하던 말이란 걸 깨닫게 되었을 때 적잖이 실망했던 게 기억나네요. 무엇보다, 충코님이 말씀하신 댓글의 용례처럼 제 입을 닫으려는 용도로 사용했던 말이었으니까요.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던 문장이었단 걸 처음 알려준 이 채널에서 자주 듣는 말인 것 같아요. 이상한 기분이 드네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이야기 하지 말아라....? 그것만큼 비겁하고 겁쟁이가 있을까요? 지금껏 사람들이 자신이 확실하게 모르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면 인간이 이런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요? 한국 사람들이 정말 많이 하는 말 중에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라는 말 저는 이 말을 지독히도 혐오합니다.
정리하면 한국은 허세가 심하거나 태도가 건방진 사람들이 많아서 아는척하면서 나대는 사람이 너무많기때문에 그걸 듣고 괴로워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엔 침묵하라는 문장이 한국 사회에서 자주인용되기 시작한거고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모르는걸 질문한다는건 그다지 나쁘지않은 태도인것같네요~
충코님, 영상 잘봤습니다, 알고리즘 타고 유입했는데, 최근의 인생화두가 떠올라서 적어봅니다. 최근 유튜브에 자기개발 개념의 유튜브가 많이 화제인데 이게 과연???이라는 회의감이 듭니다, 최근의 자기개발 열풍에 관한 충코님의 견해를 한번 주제잡고 영상 만들어줬으면하고 요청합니다, 자기개발 유튜브 열풍 , 이게 좀 현대사회의 병리학적 현상과 맞닿아ㅇ.ㅆ는 지점이 있어보여요, 이에 대한 철학적접근이 현 유튜브에는 없는것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관적인 의견과 말씀을 본인만의 관점을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말할수 없는 말들을 너무 많이 해주시는건 아닌가 해요 너무 막연한 말씀만 뱅뱅 돌려서 말씀해주셔서 ... 어려운 해석과 관점을 타인에게 전달한다는건 반대로 본인도 모르고하는 말들이 많듯이 제 수준에는 너무 뱅뱅 돌려 어렵게 아니면 제가 경험하지 않은 해석으로 말씀해주셔서 더 어려워요 영상을 모두 보며 느낀건 ‘넌 어차피 모를거라야’ 라는 관념하에 이해수준이 높은 분들을 기준으로 설명해 주시는것 같아요
언어적 사고의 한계... 직관적 통찰은 언어와 논리적 사고로 담지 못하는 세계를 드러내 보이죠. 그러한 체험을 하지 못하는 이상 언어로 아무리 비판하고 분석해도 거기에 닿지 못합니다. 여전히 존재와 비존재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책을 덮고 창 밖 구름이 전하는 메시지와 충돌해 보세요. 비트겐슈타인의 말도 이해가 아니라 체험될 때 웃음지을 수 있을까 합니다.
철학은 종교보다 못하고 장사꾼보다 못하다. 종교는 그래도 헌금만 조금 내면 위안이라도 받을 수 있고, 장사꾼은 물품공급 서비스라도 하지만, 철학은 사람들로부터 시간만 빼았고, 또 사람들로하여금 스스로 뭔가를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뜨린다. 그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색안경과 같아서 사물의 실존을 제대로 보는데 장애가 될 뿐이다. 근께 철학을 통해서 사물을 보려 하지 말고 맨눈으로 있는 그대로 보면 충분하다. 시력이 나빠서 안되면 할 수 없고. 철학이 산더미 같아도 경험에 의존하지 않으면 걸림돌이 될 뿐이다. 단언컨데 철학이란 유식을 가장한 무지의 일종이다. 그냥 살아봐라. 바보가 아닌 이상 알게 되어 있다. 위스키 맛을 알기 위해서 아무리 책을 뒤져 봐도 알 수 없다. 맛을 봐야만 알 수 있다. 철학이란 위스키 맛은 보지 않고 위스키 맛에 대한 공부만 하는 꼴이다. 어떤 사람들이 철학을 하는가? 살아볼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겁쟁이라서 돌다리도 두들겨 보다가 관두는 사람들이다. 비트켄슈타인은 장가도 가보지 못했다.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 놓고서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죽으면서 자신은 행복했다고 말했는데 행복하지 못했던 자신을 있는 그대로 털어낼 용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철학자들은 말 빼면 시체다. 그래서 말하는 데는 용감하다. 유일하게 자신이 있는 부문이고, 말해서 손해 본다고 해도 돈이 들어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삐뚤어진슈타인은 얼마나 사는 것이 재미가 없었으면 억지로 군입대 해서 전장에 나갔겠는가. 전장에 나갔으면 총들고 싸워야 하는데 전장에서 책만 팠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는 언제나 과녁을 빗나간다. 다 때려치우고 그냥 살아봐라. 알게 될 것이다. 모르면 할 수 없고. 그런 사람은 철학을 해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마침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 글을 좀 길게 남기겠습니다. 사람들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뭘까요? 유식해보이기 위해서? 잘난 척 하려고? 아님 상대방의 심리을 파악하기 위해서? 뭐 이유는 다양하겠죠. 하지만 가벼운 동기를 가진 만큼 그 사람이 파고드는 깊이 또한 얕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종종 가볍게 시작해서 깊게 파고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이는 굉장히 적으니 예외로 칩시다. 희욱님은 인간이 여태 진화해왔다고 생각하시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이 진화해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글쎄요. 인간의 지능은 진화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진화한 것이 맞지만, 그 정도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됐죠. 하지만 과거에는 어땠죠? 지구가 평평하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들은 우리보다 미개했기 때문에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것일까요? 또, 과거에는 하늘이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죠? 하늘이 아닌 지구가 움직인다는 내용은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럼 저 당시에 천동설을 믿었던 사람들은 우리보다 열등하고 미개했기 때문에 천동설을 믿었던 것일까요? 이번에는 조금 다른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공산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서, 또 이로 인해 벌어졌던 파멸적인 결과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문제점들과 결과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과거 사람들보다 우월하기 때문일까요? 아니죠. 우리가 지구가 둥글다고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지동설을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공산주의가 가진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그들보다 우월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그들보다 후대의 사람들이기에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진화를 했다면 그것은 지능의 영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축적 기술의 영역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짐승들도 종의 분화와 진화가 일어나기까지 짧게는 수천년에서 길게는 수만년까지 걸리는데 고작 몇백년만에 인간의 지능이 진화했다고 보기는 많이 어렵겠죠. 희욱님의 논지에는 자신의 전지전능함이 전제로 깔려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잘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 또한 누군가의 축적의 산물이라는 것을요.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인생을 살아왔던 부모님들의 서로 다른 인생이 만나 그 결실로 하나의 생명이 탄생했으며 또 그 기반 위에 조성된 환경 속에서 새로이 희욱님만의 자아를 세웠던 것을요. 하지만 이 환경은 너무나 제한적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또 그로인해 파생된 환경이 너무나 많은데 그리고 인간은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는 그 한계가 너무나 명확합니다. 사람들이 독서를 하는 이유는, 그니까 사람들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들여다보기 위함입니다. 특정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선조들이 후대로 물려준 축적의 산물들 덕분에 우리는 거기까지 도달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고, 그 뿐만 아니라 남은 시간으로 그 위에 새로운 무언가를 쌓을 수 있었던 겁니다. 즉 현대 문명이란 축적의 문명입니다. 철학 서적이란 그 사람의 세계를 탐험하는 데 있어서 도와주는 지도와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작은 지도들이 부분부분 모여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표현하기에 이르렀고 이제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지도들이 필요하게 됐습니다. 제가 장담하는데 당신은 비트겐슈타인의 서적들을 단 한 줄도 읽어보지 않았을 겁니다. 아님 읽어는 봤지만 단 한 줄도 이해하지 못했겠지요. 그 세계를 한 번도 다녀오지 못했는데 떠드는 사람의 말과 그래도 그 세계를 한 번이라도 다녀온 적 있는 사람의 말 중 사람들은 과연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할까요?
좋은 글들을 올려서 내가 한 조언 줍니다. /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말의 정확한 뜻은 그대로 말 말 수 없는 것에대해서 말하지 말라.'라는 말입니다. 말 할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말 합니까? 침묵이라고 하니깐 다른 무슨 의미가 있는 듯 여기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이해가 됩니까? 말 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라! 그런데 인간은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고 여깁니까? 진정 중요한 것은 말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거죠? 첫번째 말해 놓고 후회할 말을 하지 말라. 입니다. 나중에 후회할 말을 알려면 지혜로워야 하죠. 지혜롭지 못하면 말 하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죠. 두번째, 잘못된 것 또는 거짓인 것을 말하지 말라입니다. 이것 역시 지혜롭지 못하면 알지 못하죠. 거짓을 진실로 믿는 인간들이 많고 거의 대부분의 인간이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죠. 세째. 하나 더 있는데... 심오한 것이라 여기서는 이정도까지만...
저도 한국어본으로는 10년 정도 전에 잠깐 들춰봤던 게 다여서,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제 경험상으로는 독일어로 보는 게 가장 쉽고, 그 다음이 영어고, 그 다음이 한구거인 것 같아요. 그래서 한국어만으로 보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요즘에는 유튜브 등에 강의도 많이 나와 있으니 어느정도 배경지식을 갖고 읽으신다면 독해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독일어 지식이 없으시다면, 영어본이라도 참고하시면서 읽으시면 훨씬 도움 될 거예요. PDF를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이 영상을 보면서 생각난게 우리가 일상 중에 말이 안 통해서 오해가 생기거나 언어를 통해 하는 모든 상호작용이 엄청 재밌는 시간이며 거기에 새로운 고찰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의 언어와 타인의 언어가 같아 보일때 사실은 우리는 말이 통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문제가 꽤 있었을지도 ㅋㅋㅋㅋㅋ 하지만 사회에서는 큰 어려움 없이 모두가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것도 꽤 재밌는 대목이네요 ㅋㅋ 그리고 과학과 철학을 좋아해서 내가 언어의 본질을 파고 들었을까 싶기도 하구 ㅋㅋㅋㅋ 실용적 의미를 넘어 언어를 억압하고 언어의 규칙을 만들어냈다면 제가 언어에 대해 굉장한 오해를 하고 있었네요 ㅎㅎ 오늘도 영상 너무 재밌게 봤습니다. ㅎㅎ
그쵸, 비록 종교에 대해서 믿지 않는 저지만 그럼에도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의미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물론 저에게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야기 수단이지만, 여전히 그 효용성을 지닌 수단이며 그런 언어체계에서의 의미가 소중한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물론 과학의 언어는 늘 엄밀해야겠지만요!
언급하신 댓글 논쟁과 충코님께서 지적하신 댓글내용을 보고 비트겐슈타인 얘기를 한번 더 다뤄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갈증을 일찍이 파악해주시고 영상으로 제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작가 두분 중 한명인 닉 채터의 전작 도 너무 흥미롭게 읽었던터라 이 책이 무척 기대됩니다!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전 인공지능 언어모델 개발을 하면서 인지과학, 심리학, 뇌과학 쪽 책들을 주로 취미로 많이 읽었어요
인지과학 책들과 연구들을 보면 철학자들과 같이 연구하거나 철학자들이 주장했던 내용을 연구하는 경우도 많고, 철학자들을 인용하는 경우는 매우 빈번합니다
인지과학 쪽에서는 특히나 칸트, 흄, 쇼펜하우어, 메를로퐁티, 촘스키 외에도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름도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인공지능 언어모델 또한 뜻을 이해할 때 단어 전후의 맥락 뿐만 아니라 문장 전후의 맥락까지 따져서 확률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의미를 선택합니다
한 단어가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동음이의어 뿐만 아니라 은유적 표현의 다양성 때문에도 단어의 뜻은 한 가지로 확정될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이죠
때문에 저는 수소 원자 하나에 전자구름이 확률적으로 분포하듯이 단어의 뜻도 그런 구름처럼 중심성이 있고 주변에 여러 의미가 퍼져있는 집합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뇌에서 단어를 인식할 때도 발화되는 뉴런 집합의 패턴은 개개인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더욱 급진적으로는 한 단어의 뜻을 모두 주관적으로 해석한다고 말할 수도 있죠
그렇기 때문에 책을 좋아하는 입장으로서 많은 문장들로 깊은 맥락적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라는 수단이 점점 소비가 줄어드는 반면
틱톡이나 인스턴트 메세지같은 맥락이 제거된 짧은 메세지들로 의사소통이 대체되는 현상의 이면에 맥락을 덜 고려하게 되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저만해도 학교 다닐 때 책은 거의 읽지 않았고 전공 공부에 치중하기도 했지만 친구들과 대화할 때도 뭔가 설명하려는 시도만 해도 설명충 소리를 들어야했으니까요
단어나 문장의 뜻이 본질적으로 구름과 같기 때문에 더 정확한 의사소통을 위해선 서로가 어떤 맥락에서 메세지를 말하는지 질답을 주고받으며 확인하는 절차가 중요한데
일단 닫힌 마음으로 상대방의 말뜻을 내가 갖고있던 지식의 한계 내에서만 판단해버리고 반응하면 흔히 커뮤니티나 댓글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난독증적 비판이 되지 않나 싶어요
책은 꼭 사서 읽어보겠습니다 :)
좋은 의견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공지능 개발 쪽 일을 하시는 분의 견해를 직접 들으니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습니다.
책읽기에 대해서는 저는 아직 잘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책을 읽는 삶과 읽지 않는 삶 둘 중 어느 것이 더 인간을 지혜롭게 만드는지요. 물론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만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냐 안 읽냐가 핵심이라기보다는 책을 안 읽는 대신 뭘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맥락에서, 작성자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책을 읽는 시간이 짧은 영상을 보는 시간으로 대체되는 것은 분명 단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인간 사이의 대화의 경우 이 영상에서 말씀드린 제스처게임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과정이 되기 때문에 인간의 창의력이 발현될 확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일방향적인 짧고 쉬운 영상 시청은 그런 양방향의 작용이 잘 일어나지 않는 매체인 것 같아요. 반면 비교적 길고 어려운 책은 비록 일방향적인 매체이기는 하지만 읽는 데 힘이 많이 들고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질문을 스스로 던져봐야 한다는 점 때문에 어느 정도 쌍방향적인 소통을 활성화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책을 갈수록 안 읽는 건 어쩔 수 없는 흐름일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책 읽기를 대체해서 쌍방향 소통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 매체가 발달해야 사람들 사이의 창의적인 소통이 늘어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연 지금 시대의 인터넷 개인방송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네요.
@@chungco_phil 맞습니다 매체와 커뮤니케이션이 변화함에 따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하는게 쉽지 않죠
다만 저를 포함해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별로 하지 않고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공교육에 익숙하다보니
언어나 개념 자체가 의미와 일대일 대응이 아니고 상당히 유동적이라는 것만 더 절실하게 느낀다면 상대방이 말하는 메세지의 맥락에 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까 싶어요
꼭 책읽기가 필요하다기 보다는 포용적인 사고방식과 토론이 활발한 방식의 교육으로 가야만 상호간 오해가 줄어들고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는 말이 하고 싶었어요 ㅎㅎ
단어가 갖는 성격을 전자구름에 비유하시다니 정말 감탄했습니다.
오늘 영상 너무 재미있는 주제네요. 저는 최근 들어 세대 간 혹은 성별 간 갈등이 첨예한 이유 중에 하나가 특정 언어표현에 대해 각 양극화된 집단마다 다른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즉, 서로 니가 진보니 보수니, MZ니 틀딱이니, 페미니 한남이니, 하는 표현을 써가며 혐오의 정서를 드러내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용어를 사용해도 각자의 집단마다 그 용어를 형상화하는 개념의 간극이 너무 크기 때문에 서로 간의 대화가 아예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러한 경우에는 같은 단어이지만 집단별로 이해하는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를 정리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첫번째 발걸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집단마다 언어의 쓰임새가 다르기도 하고, 또 개인마다다도 다를 수 있으며, 파악된 유형과는 다른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점을 잘 주의하는 것 역시 중요할 것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한번은 언어의 실존성으로 (1:1 매칭)으로
또 한번은 언어의 관계성(인식론)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감탄사 와를 그 자체로
또 한번은 관계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같은 감탄사지만 의미는 달라지죠.
그런 맥락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를 다시 한번 보세요.
나는 지금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지만, 나를 이해한 후 내 문장들이 의미 없다 인식한 누군가가 나를 넘어서서 세계를 더 올바르게 볼, 다시 말해, '내가 말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건 더는 말할 게 없는 내 몫이 아니다.
전후 문장을 보니 요런 느낌으로 보이기도 하네요.
총코님 은근 전도하는 사람같은 관상이네요ㅋㅋ
개인적으로 너무 유익했습니다.
언어에 대한 개방적 사고에 도움이 되네요.
감사드려요. 충코님
좋아하는 주제가 나와 반가웠네요, 더글라스 호프스테더의 사고의 본질이라는 책에서는 언어를 넘어 그렇게 사고하는 인간의 기본적 사고 자체를 탐구하도록 견인합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결국 절대적 진리나 개념 및 정의에 편증(기울어진 증거나 증명)되기를 거부하는 탐구적 실체가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매우 훌륭한 책입니다. 동의합니다.
신기하네요. 이 영상도 5분뚝딱철학이랑 지혜의빛에서도 다른 말들로 영상을 만드셨는데 의미가 하나라는 게요 😂
우리는 왜 말을 하는가?
말은 내 안에서 나의 몸을 통해 외부 세계로 나오는 것이다. 말은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외부로 꺼내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내 안에 있는 것, 말로써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그것을 말을 통해서 드러낼 수밖에 없는가?
사실을 외부 세계에 있는 사물들과 그것들의 상호작용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같은 것으로 경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몸을 가지고 있고, 하나의 시공간을 점유할 수 없고, 따라서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는 감각기관과 시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험한 것에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한다. 내가 본 것을 말하고, 나와 다른 각도에서 본 것을 듣고,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듣기 위해서 말을 한다. 차이를 확인하고 정보를 보완하고 세계 전체를 볼 수 있기 위해서 말을 한다.
그렇다면 내가 본 것이 사실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실의 일부이기는 하겠지만 사실 전체는 아닐 것이다. 내가 받아들인 현상이 사실의 일부이고, 그마저도 나의 표상체계로 생략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말로써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의미이다. 의미는 말하는 사람이 자신있는 위치(시간, 공간, 문화 등)에서 사실을 경험하고 구성한 것이다. 사실 그 자체와는 다른 것이다. 나는 사실을 말한다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말은 사실을 담을 수 없다. 내 안에는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의 나머지, 즉 말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말할 필요가 없는 것다. 말하기가 사실 그대로를 전하기 위한 기술이라면 지금은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미래에 감각을 공유하는 기술이 발명된다면 그 때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때 말할 필요는 사라진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말할 필요가 생길 것이다.
영상을 보고 생각해봤어요
어떤 것들은, 표현하기 힘들어서 부정확하게 표현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면 스스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말하기(표현하기) 보다는 차라리 침묵(표현안하기)하는 편이 낮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것 같아요.
fps 게임에서 익힌 저만의 플레이 스타일을 표현하고 싶어서 문장을 고안하려 한 적이 있어요. 어찌저찌 표현하기는 했는데, 나중에 문장의 의미에 따라 게임을 해보니 그때와 다른 플레이 스타일로 게임을 하고 있더라구요.
김익한 교수님께 배운 '자기화된 표현' 이 떠올랐어요. 본인이 무언가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그것을 미리 의미가 정해진, 즉 정의된 표현으로 늘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기 때문에, 스스로가 느끼기에 가장 정확히 표현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표현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편이 좋겠죠. 물론 남들은 알아듣기 힘들겠지만요.
오 👍 철학을 나만의 삶으로 녹여낸 이런 의견 너무좋습니다 진짜 배운거 제대로 활용하시는분
철학에 관심있는 대중들에게 이번 방송은 특별히 가치로운 내용였던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매우 매우 좋은 전달력에
감사 드립니다.
바르게 이해가 쏙쏙 들어오는
강의력
감사 합니다
인간이 인간일수있는 인간일수 있게하는 (공동체의식을 위한)말을 해야한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국어사전의 효용은 무엇일까요? 위에 어떤 분이 언어의 의미를 전자구름에 비유하셨는데, 국어사전에 적힌 의미는 통용되는 그 구름의 중심에 가까운 의미를 써놓은, 임의의 기준점 같은 것일까요? 한 단어에 여러 의미가 써있는 경우도 많은데, 연속적으로 수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단어들에 이산적으로 몇 가지 의미를 정의해 놓은 것이 한계가 많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말할수없는거는 사회적으로 흔한 뜻을 가진 언어가 아니기에 상대방에게 말해도 못알아들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괜히 말해서 상대방 혼란스럽게하지말고 말할수있는 언어가 될때까지 자기혼자 그것에 대해 갈고닦고 생각하는편이 낫다고 봐서 그런가 하고 추측해봄
사람들이 더 성숙해져서 그 말할수없는것에 대해 표현을 못해도 조금이라도 인지할수있다면 이제 말할수 있는언어 바뀌는것은 시간문제가 되고
생각의 범위를 넓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이게 책을 전부 읽거나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는 문장 앞에서 말한 전후 상황까지 있으면 모두가 완벽하게 이해했겠지만 대다수 사람이 비트겐슈타인하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를 거의 파블로프의 개처럼 학습해서 그렇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리고 첨언해서 제 의견이나 생각을 붙이자면 대부분 사람들이 명언이 포함된 글 중에서도 딱 그 명언만 생각하고 직관적으로 생각하거나 그걸 타인에게 말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많이 와전되어 소실되어서 그런 경우 같네요. 이 부분은 비트겐슈타인의 이 철학적 문장 외에도 다양한 명언들이 화자의 마음에 따라 해석되는 경우가 많은거 같구요.
또한 일부 잘못된 정보를 퍼트린데 지분이 큰 이유 중에 특히 요즘 짤막하게 명언과 일화에 대해서만 편집되어 많은 이들에게 소비되는 소위 철학 유튜브 때문인 것도 있는거 같아 아쉽습니다. 물론 절대다수가 바쁘거나 철학에 쏟을 시간이 부족하여 유튜브같은 간단한 컨텐츠로 철학을 보고 소비하는데 이게 과연 철학이라는 것을 본질 그 자체로 즐기고 또한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생각까지도 이어지네요.
뭐 이건 지극히 제 의견이기에 이런 생각도 있구나 라고 봐주시면 좋겠네요 ㅎㅎㅎ 그리고 또한 이 부분에서 찔린 분들은 충코의 철학 채널을 보거나 ㅎㅎㅎ 혹은 관심 있어진 사상이나 철학에 대하여 직접 책을 읽어보는 노력을 해보면 좋겠네요 ㅎㅎ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어려운 책 중 하나이자. 유일한 천재.
결국은 본절적인 것들에 대해 철학적 고찰을 해나갈때
알 수 있는 영역내에서 객관적 논리적 고찰을 통해서
최대한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같음.
이렇게 제시한 방법은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얘기같음. 결국은 전자의 얘기가 맞는
것같음.
저렇게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해주시는데도 도무지 이해를 할수없는 나는 천재?
단어는 의미를 부여 받았고 언어는 단어의 조합이고,
말할 수 없는 것이란 이미지나 느낌 등 머릿속에 흩날리는 모호한 관념을 붙잡을 만한 의미를 모르는 것인데 모름의 정도는 인간 마다 다르다.
그러니까 비트머시기의 의도는 자기 말뜻을 모르겠으면 그냥 조용히 들어라~라는 의미를 살짝 돌려 말한 겁니다.
비트겐까지 안가도 이미 2천년전 경에 나오는 말씀이죠. 말장난 철학자가 컨닝을 했을 가능성이 농후함. 불이법문 - 유마거사의 침묵
당연히 후자로 생각하고 살았는데, 전자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많구나.. 요새 또 이 주제가 핫하니까 나름(?). 다들 쉽게 이해할줄.
이성주의, 합리주의에 현대인들은 너무 기대어 산다는 쇼펜하우어의 뜻을 이제서야 사람들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고, 과학유튜브나 여러가지 인문학, 철학 유튜브들 보면 이런 것들 많이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홍상수 한 편 보면 뚝딱ㅋㅋ
충코님 영상보면서 홍상수영화가 비트겐슈타인 철학과 좀 닮아있다는 생각도 드네. 어떤 정답이나 목적성의 영화가 아닌 수단과 계기의 영화.
비슷한 것으로는 암묵지라는게 있습니다. 저희는 저희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여야 한다.
그의 가족 유사성이라는 개념에서 짐작컨데,
우리의 언어는 고정적 형태가 아닌, 서로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의미화 시킨 범주의 인식을 통해 소통한다라는걸 말하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자유주의자들이 자유는 옳다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자유라는 상태를 직관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동시에 상대방의 자유와 나의 자유라는 다를 수가 있다.
자유로운 상태는 동시에 무질서로 치환되는 위험성조차 내포하기 때문이다.
나는 도둑질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자유라고 믿는 이들은 없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침범은 자유인 것인가?
Freedom과 Liberty는 같은 것인가?
우리는 그저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끔 그의 침묵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인식 자체에 대해서 말할 수 있도록
공유될 때 까지, 관계성에 의해 형성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충코는 실명인가요?별명인가요? 자꾸 코로 눈이가요
감사합니다 영상 잘보았습니다^^
'언어로 표현 가능한것들과 그렇지 않은것들이 있다'
'언어로 표현 불가능한 영역 또한 탐구의 영역이 될 수 있다'
'언어로 표현 불가능한 영역을 어떻게 탐구할까?'
'그것은 언어로 탐구 할 수 없다'
'그러니 그것들에 대해서 언어로 규정하지 말라'
뭐 이런 의미인가요
이 영상을 봤기때문일까요? 저도 후자 같네요.
한 단어의 의미는 계속 변하는데
각주구검 뱃사람처럼
최초 표지해둔 의미 한 가지로 만 소통하려 한다면
(이미 떠나온 과거 의미로 사용한다면)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겠군요
심하게 말하자면
사전 무용론도 나오겠는데요~^^
그러니
예전 선불교 스님들의
불립문자 개념이
충분히 설득력 있는 생각 같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아이의 생각이 이상하고 창의적이라는 것에 대한 설명좀 해주세요...
평소에 잘 배우고 있습니다. 를 쓴 진화생물학자는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입니다. 비트겐 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유대교 로고스 신화를 바탕으로 형성된 서양의 언어관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대 중국의 노장사상적 언어관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재미지기에 무식하게 일차식으로 풀어봅니다.
침묵이란 말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의로 말하지 않는 것이죠. 즉, 논리라는 이성의 판단이 좌절할 때 사건입니다.
인간이 만나는 모든 소여는 말(생각과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없지만 말이 미처 다가가지 못한 광활한 미지의 영역은 있을 겁니다.
그래서 비트겐의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쪽이 아니고 '참과 거짓을 가리는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 이지요. 말하자면 논리가 없거나 희박한 직관 철학자들에게 논리에 맞지 않는 것들을 마구 뱉어서 철학의 중추적 논리를 혼란스럽게 하지말라는 부탁이 아닐까합니다~ 당시 분위기 상~
그가 중도하차 한 이유도 논리를 마스터했기 때문보다는 그 숲을 헤쳐나가기 싫었을 것입니다.
무논리나 비논리 영역도 논리나 마찬가지로 언어의 영역이라는 점을 과소평가~
인간은 무지하지만 엄청난 피를 흘리며 종교와 철학을 양립시키는 길을 택해온 역사 ~
구독햇숩니다
서양의 근간은 형이상학에서 시작되서 성공한 것.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도 결국 신이라는 형이상학적 존재의 탐구와 맞닿아 있다. 괴력난신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공자의 말. 그리고 그걸 따라 산 동양. 어디가 성공했을까?
언어란 대상을 자기가 이해한것을 표현하는것
대상은 그 대상자체로 존재하지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비트켄슈타인은 언어로 자기만의 이해한 이 세계를 설명했다.
'말할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는 비트켄슈타인 자신의 세계에서 바라본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세계를 받아들이는 나는 침묵해야 한다란 생각이면 그사람의 세계에 수긍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말이란 언어이고 언어의 세계는 그자체로 생각이기에 생각(말)할 수 없는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얘기 같습니다.
침묵이라는것도 말할수 없는 or 생각할 수 없는 그것(실재?)을 언어로는 설명을 할수 없었기에 그런거 아니지요?
결국 말할수 생각할 수 없는것은 무의식의 발현 일수도 있겠네요.
그걸 표현하자니 그건 의식(생각) 너머의 것이기에 침묵해야한다고 비트켄슈타인 그 자신만의 세계를
타자인 우리에게 설명한거 같습니다.
제 옛 애인이 자주 쓰던 말이었어요.
말할 수 없는 것엔 침묵해라, 완전히 알지 못 하는 한 그 주제에 대해선 말을 안 하는 것이 낫다…
처음엔 그 반복된 문장에 현혹되고 설득되었지만 그저 자신의 무지를 가리기 위해 오용하던 말이란 걸 깨닫게 되었을 때 적잖이 실망했던 게 기억나네요. 무엇보다, 충코님이 말씀하신 댓글의 용례처럼 제 입을 닫으려는 용도로 사용했던 말이었으니까요.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던 문장이었단 걸 처음 알려준 이 채널에서 자주 듣는 말인 것 같아요. 이상한 기분이 드네요.
오호 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이야기 하지 말아라....? 그것만큼 비겁하고 겁쟁이가 있을까요? 지금껏 사람들이 자신이 확실하게 모르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면 인간이 이런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요? 한국 사람들이 정말 많이 하는 말 중에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라는 말 저는 이 말을 지독히도 혐오합니다.
@@킹씨그 말이 잘 쓰이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도 잘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며 , 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듣는 사람은 그걸 알기 때문에 듣기 괴로워 그런 말을 할 것 같네요.
정리하면 한국은 허세가 심하거나 태도가 건방진 사람들이 많아서 아는척하면서 나대는 사람이 너무많기때문에 그걸 듣고 괴로워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엔 침묵하라는 문장이 한국 사회에서 자주인용되기 시작한거고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모르는걸 질문한다는건 그다지 나쁘지않은 태도인것같네요~
불교의 화두라는게 이런 것인가?
충코님, 영상 잘봤습니다, 알고리즘 타고 유입했는데, 최근의 인생화두가 떠올라서 적어봅니다.
최근 유튜브에 자기개발 개념의 유튜브가 많이 화제인데 이게 과연???이라는 회의감이 듭니다, 최근의 자기개발 열풍에 관한 충코님의 견해를 한번 주제잡고 영상 만들어줬으면하고 요청합니다,
자기개발 유튜브 열풍 , 이게 좀 현대사회의 병리학적 현상과 맞닿아ㅇ.ㅆ는 지점이 있어보여요, 이에 대한 철학적접근이 현 유튜브에는 없는것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충고님의 영상중에 자기개발 관련이 있는데...이 자기개발이라는게 과연 의미가 있는가?? 복잡한 사회체계 속에서 한 인간이 과연 자기개발로서 삶을 나아지게 할수있는가? 그것이 한 사라의 인생에 보탬이 되고 근원적인 갈등,결핍,삶의 방향성을 제시해주는지에는 의문입니다.
주관적인 의견과 말씀을 본인만의 관점을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말할수 없는 말들을 너무 많이 해주시는건 아닌가 해요
너무 막연한 말씀만 뱅뱅 돌려서 말씀해주셔서 ...
어려운 해석과 관점을 타인에게 전달한다는건 반대로 본인도 모르고하는 말들이 많듯이 제 수준에는 너무 뱅뱅 돌려 어렵게 아니면 제가 경험하지 않은 해석으로 말씀해주셔서 더 어려워요
영상을 모두 보며 느낀건 ‘넌 어차피 모를거라야’ 라는 관념하에 이해수준이 높은 분들을 기준으로 설명해 주시는것 같아요
음 제가 볼 땐 잘 설명해주신 것 같은데..
아님 5분뚝딱 철학이라고 있는데 거기는 가보셨나요?
아직 안 가보셨다면 저 채널에 있는 영상들부터 시작하는 것도 굉장히 좋습니다
재밌는 분이시네요. 구독하고가요!
언어적 사고의 한계... 직관적 통찰은 언어와 논리적 사고로 담지 못하는 세계를 드러내 보이죠. 그러한 체험을 하지 못하는 이상 언어로 아무리 비판하고 분석해도 거기에 닿지 못합니다. 여전히 존재와 비존재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책을 덮고 창 밖 구름이 전하는 메시지와 충돌해 보세요. 비트겐슈타인의 말도 이해가 아니라 체험될 때 웃음지을 수 있을까 합니다.
고정된 실체는 없다
이거 불교의 핵심인데…
가족유사성?
우울증환자에게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한 당신은 멋있어 보여요
말장난 하지 말자
과학은 아인슈타인
인생은 아인슈타인이 존경하는 쇼펜하우어
쉽게 풀이하자
중코도 참 쉬운말을 어렵게 해
제스처도 언어를 통해 나온다
보편문법이 있다는걸 저는 경험으로 알았습니다.
명제가 아닌 것에 명제처럼 논하지 말라는 의미 ㅇㅇ
허허 신계 노크하신다?
우주의식
저거 선불교에선 상식인데
❤😂❤ 🎉🎉🎉🎉🎉🎉🎉
아무생각 없이 남의 말을
복붙 하지말자"앵무새처럼
그게 무슨 토론이냐..재 방송
이지 ㅋㅋㅋㅋㅋ 오죽이나
이런 사람들이 많았으면
이걸 주제로 영상까지 만들
었을까 ㅋㅋㅋ
걍 박구용 꺼를 들어
1등 🎉
철학은 종교보다 못하고 장사꾼보다 못하다.
종교는 그래도 헌금만 조금 내면 위안이라도 받을 수 있고,
장사꾼은 물품공급 서비스라도 하지만,
철학은 사람들로부터 시간만 빼았고, 또
사람들로하여금 스스로 뭔가를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뜨린다.
그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색안경과 같아서
사물의 실존을 제대로 보는데 장애가 될 뿐이다.
근께 철학을 통해서 사물을 보려 하지 말고 맨눈으로 있는 그대로 보면 충분하다.
시력이 나빠서 안되면 할 수 없고.
철학이 산더미 같아도 경험에 의존하지 않으면 걸림돌이 될 뿐이다.
단언컨데 철학이란 유식을 가장한 무지의 일종이다.
그냥 살아봐라. 바보가 아닌 이상 알게 되어 있다.
위스키 맛을 알기 위해서 아무리 책을 뒤져 봐도 알 수 없다.
맛을 봐야만 알 수 있다.
철학이란 위스키 맛은 보지 않고 위스키 맛에 대한 공부만 하는 꼴이다.
어떤 사람들이 철학을 하는가?
살아볼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겁쟁이라서 돌다리도 두들겨 보다가 관두는 사람들이다.
비트켄슈타인은 장가도 가보지 못했다.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 놓고서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죽으면서 자신은 행복했다고 말했는데
행복하지 못했던 자신을 있는 그대로 털어낼 용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철학자들은 말 빼면 시체다.
그래서 말하는 데는 용감하다. 유일하게 자신이 있는 부문이고,
말해서 손해 본다고 해도 돈이 들어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삐뚤어진슈타인은 얼마나 사는 것이 재미가 없었으면 억지로 군입대 해서 전장에 나갔겠는가.
전장에 나갔으면 총들고 싸워야 하는데 전장에서 책만 팠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는 언제나 과녁을 빗나간다.
다 때려치우고 그냥 살아봐라. 알게 될 것이다.
모르면 할 수 없고. 그런 사람은 철학을 해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감사합니다.
당신 덕분에 사람들이 철학이란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것이구나 하고 깨달을 것 같네요.
마침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 글을 좀 길게 남기겠습니다.
사람들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뭘까요?
유식해보이기 위해서?
잘난 척 하려고?
아님 상대방의 심리을 파악하기 위해서?
뭐 이유는 다양하겠죠.
하지만 가벼운 동기를 가진 만큼 그 사람이 파고드는 깊이 또한 얕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종종 가볍게 시작해서 깊게 파고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이는 굉장히 적으니 예외로 칩시다.
희욱님은 인간이 여태 진화해왔다고 생각하시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이 진화해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글쎄요. 인간의 지능은 진화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진화한 것이 맞지만, 그 정도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됐죠.
하지만 과거에는 어땠죠? 지구가 평평하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들은 우리보다 미개했기 때문에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것일까요?
또, 과거에는 하늘이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죠?
하늘이 아닌 지구가 움직인다는 내용은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럼 저 당시에 천동설을 믿었던 사람들은
우리보다 열등하고 미개했기 때문에 천동설을 믿었던 것일까요?
이번에는 조금 다른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공산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서, 또 이로 인해 벌어졌던
파멸적인 결과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문제점들과 결과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과거 사람들보다 우월하기 때문일까요?
아니죠. 우리가 지구가 둥글다고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지동설을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공산주의가 가진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그들보다 우월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그들보다 후대의 사람들이기에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진화를 했다면 그것은 지능의 영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축적 기술의 영역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짐승들도 종의 분화와 진화가 일어나기까지 짧게는 수천년에서 길게는 수만년까지 걸리는데
고작 몇백년만에 인간의 지능이 진화했다고 보기는 많이 어렵겠죠.
희욱님의 논지에는 자신의 전지전능함이 전제로 깔려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잘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 또한 누군가의 축적의 산물이라는 것을요.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인생을 살아왔던 부모님들의 서로 다른 인생이 만나 그 결실로 하나의 생명이 탄생했으며
또 그 기반 위에 조성된 환경 속에서 새로이 희욱님만의 자아를 세웠던 것을요.
하지만 이 환경은 너무나 제한적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또 그로인해 파생된 환경이 너무나 많은데
그리고 인간은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는 그 한계가 너무나 명확합니다.
사람들이 독서를 하는 이유는,
그니까 사람들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들여다보기 위함입니다.
특정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선조들이 후대로 물려준 축적의 산물들 덕분에
우리는 거기까지 도달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고,
그 뿐만 아니라 남은 시간으로 그 위에 새로운 무언가를 쌓을 수 있었던 겁니다.
즉 현대 문명이란 축적의 문명입니다.
철학 서적이란 그 사람의 세계를 탐험하는 데 있어서 도와주는 지도와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작은 지도들이 부분부분 모여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표현하기에 이르렀고
이제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지도들이 필요하게 됐습니다.
제가 장담하는데 당신은 비트겐슈타인의 서적들을 단 한 줄도 읽어보지 않았을 겁니다.
아님 읽어는 봤지만 단 한 줄도 이해하지 못했겠지요.
그 세계를 한 번도 다녀오지 못했는데 떠드는 사람의 말과
그래도 그 세계를 한 번이라도 다녀온 적 있는 사람의 말 중
사람들은 과연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할까요?
말장난 하지 말자 증말 짜증난다
좋은 글들을 올려서 내가 한 조언 줍니다. /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말의 정확한 뜻은 그대로 말 말 수 없는 것에대해서 말하지 말라.'라는 말입니다.
말 할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말 합니까? 침묵이라고 하니깐 다른 무슨 의미가 있는 듯 여기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이해가 됩니까? 말 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라!
그런데 인간은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고 여깁니까? 진정 중요한 것은 말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거죠?
첫번째 말해 놓고 후회할 말을 하지 말라. 입니다. 나중에 후회할 말을 알려면 지혜로워야 하죠. 지혜롭지 못하면 말 하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죠.
두번째, 잘못된 것 또는 거짓인 것을 말하지 말라입니다. 이것 역시 지혜롭지 못하면 알지 못하죠. 거짓을 진실로 믿는 인간들이 많고 거의 대부분의 인간이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죠.
세째. 하나 더 있는데... 심오한 것이라 여기서는 이정도까지만...
뭐라는 거야 ㅋㅋ
충코님은 독어로 논리철학논고를 읽으셨나요?
독일어랑 영어랑 같이 있는 걸로 봤습니다ㅎㅎ 비트겐슈타인 글은 그렇게 병치돼 있는 자료가 많은 것 같아요.
@@chungco_phil 와..대단하시네요. 국내 번역판으로 논리철학논고를 해석하는 것은 무리나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저도 한국어본으로는 10년 정도 전에 잠깐 들춰봤던 게 다여서,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제 경험상으로는 독일어로 보는 게 가장 쉽고, 그 다음이 영어고, 그 다음이 한구거인 것 같아요. 그래서 한국어만으로 보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요즘에는 유튜브 등에 강의도 많이 나와 있으니 어느정도 배경지식을 갖고 읽으신다면 독해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독일어 지식이 없으시다면, 영어본이라도 참고하시면서 읽으시면 훨씬 도움 될 거예요. PDF를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영상을 자료화면으로 대체하고 목소리만 나오면 금방 20만 된다. 껍데기 비하라 생각말고 냉정히 말한거니 참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