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과 공(空): 깨달음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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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8 лют 2025
  •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열반’, 그리고 그것이 내포하는 역설적인 측면은 오래전부터 많은 수행자와 사상가들에게 중요한 화두였다. 오늘날 서구 선진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에서도 불교의 명상, 또는 선(禪) 명상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만 보아도, 많은 이들이 마음의 안정을 찾고 내면의 깊은 진리를 체험하고자 하는 갈망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수행의 길을 제시한다는 수많은 스승과 도사들도, 정작 “의식을 무(無)의 상태로 유지한다”는 그 어려운 과정에 대해서는 말로써 충분히 전해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뇌가 본질적으로 ‘zero’ 상태, 즉 완전한 공(空)의 상태를 유지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생각’하려는 순간, 그 ‘없음’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대상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렇다면 불교 명상의 최고 목표라 일컬어지는 ‘열반’과 ‘부처’라는 경지는 도대체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흔히 불교 전통에서는 열반을 ‘모든 번뇌와 업(業)에서 벗어난 해탈의 상태’로 설명한다. 또한 부처가 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존재, 다시 말해 ‘무상정등정각’을 이룬 자를 말한다.
    이때 중요한 키워드는 ‘공(空)’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은 ‘텅 빔’이나 ‘없음’으로만 단순히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연(緣)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무자성(無自性) 상태”를 의미한다. 즉 스스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깨달음을 통해 모든 분별심이 사라진 상태가 바로 공이고, 그 공의 상태에 흠뻑 젖어드는 것이 곧 열반의 경지에 들어가는 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마주치는 문제는, ‘있는 것은 있다. 없는 것은 없다.’라는 상식적 명제에 기반한 논리적 미궁이다. 우리의 의식은 어떠한 형상이나 개념, 감각 등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다. 무(無)는 생각하는 순간 이미 ‘무’라는 대상이 되어 버리고, 이는 곧 ‘존재하는’ 무(無)가 된다. 이런 이유로, 이른바 ‘명상 중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상태’라는 표현은 굉장히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다”고 자각하는 바로 그 순간, 그 ‘아무 생각 없음’조차 인식의 대상으로 등장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선의 경지에 이르는 깨달음’이라는 것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말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이 개념은, 종종 일상적인 실패나 좌절을 통해서도 얻게 되는 수가 있다. 진정한 깨달음은 어쩌면 “사람이 계획하고 기대했던 삶”이 조금씩 금이 가고 무너지는 과정 속에서, 혹은 완전히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는 삶에 휩쓸렸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것이 불교가 말하는 ‘무상(無常)’의 진리와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모든 것이 덧없이 흘러가고 고정된 본질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 그 순간이야말로 인간이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통찰에 도달하게 되는 때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문맥 속에서, 여기에는 또 다른 역설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한번 상상해 보자. 깊은 산중 어느 절에 깨달음을 얻은 스님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이미 오랜 가부좌 수행을 통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열반의 세계로 막 들어가기 직전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그는 그 열반의 문턱에서 머뭇거리며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일까?
    대승불교가 강조하는 보살의 길, 즉 ‘다른 모든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함께 깨달음에 이른다’는 이상(理想)을 떠올려 보면, 우리는 곧 이 스님의 망설임을 이해할 수 있다. 스님이 진정으로 깨달음을 얻었다면, 자기 혼자만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극도로 이기적인 행위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대승불교에서 깨달음의 본질은 ‘자타(自他)가 둘이 아님’을 통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나와 너, 개인과 세상, 수행자와 중생을 분리된 존재로 보지 않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의 핵심이다. 따라서 오직 자기 혼자의 해탈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이미 깨달음의 정신에 어긋난다. “만약 누군가가 정말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는 그 누구보다도 이기심으로부터 벗어난 존재여야 하며, 동시에 타인을 돌보고 함께 구원하는 마음이 절실해야 한다”라는 것이 대승불교의 핵심 교의다.
    이 논리를 확장해 보면, 깨달음을 얻지 못한 평범한 중생은 당연히 열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존재마저도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열반에 안주하려 한다면 이미 깨달음에서 멀어져 버리게 된다.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열반에 들어가지 못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열반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역설은 여기서 비롯된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는 수행이 부족하기 때문에 갈 수 없고, 깨달음을 얻은 이는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 없기에 자발적으로 열반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 ‘결국 아무도 열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일견 허무맹랑한 논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불교 역사 속에서 “나 혼자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돌아가야 할 자리”라는 대승적 사유의 전통을 살펴보면, 그 역설이 곧 더 깊은 차원의 깨달음을 유도하는 ‘장치’임을 알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의 길은 해탈을 미루면서까지 모든 중생을 먼저 구제하려 하고, 심지어 중생이 다 구제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열반을 거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기까지 한다. 이를 ‘보디사트바(보살)의 서원’이라고 부른다. 이 발원(發願)은 “중생이 다 제도되지 않고서는 나도 열반에 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바꿔 말해, ‘열반에 들 자격이 있음에도 오히려 남아 있는 고통받는 존재들을 위해 기꺼이 그 길을 미룬다’는 태도가 바로 대승불교의 도덕적 역설이자 궁극적인 이상이다.
    따라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과 ‘깨달은 뒤 열반에 드는 행위’는 비록 이론적으로 한 몸처럼 보이지만, 대승불교의 교의에서는 둘 사이에 극적인 역설이 존재한다. 열반에 드는 것은 궁극적 해탈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깨달음에 이른 자라면 결코 자기만의 해탈을 목적으로 그 문턱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깨달았다’는 상태가 목표가 아니라, ‘모든 이가 함께 깨달음을 향해 가는 과정’ 자체가 곧 불교 수행의 핵심 가치임을 재차 상기하는 일이다. 이 대승적 시각에서 보면, 깨달음이란 개인의 기쁨이나 성취감이 아니라, 나와 타인의 분별을 허무는 ‘공(空)’의 지혜를 통해 누구나 함께 자유로워지는 길을 열어 주는 내적 통찰이다.
    결국 이 역설을 조금 달리 표현하자면, “열반에 들어갈 수 있는 이는 곧 열반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자”라는 것이다. 진정한 자비와 깨달음은 “내가 없는 자리”에서 동시에 “그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 자리”를 향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중생은 번뇌 때문에 열반에 갈 수 없고, 완전히 깨달은 이는 번뇌가 없으되 끝내 열반에 들기를 마다하는 배려심으로 인해 그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적인 구도가 오히려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 즉 보살 정신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역설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선의 경지’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진정한 의미를 조금씩 체험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논리가 함축하는 바는 “깨달음이란 내 안에서 머무는 자그마한 성취감을 넘어선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나와 타자의 구분을 지워 버리는 자비의 지평에서만 진정으로 드러나며, 공(空)을 이해하는 순간 동시에 자신과 세상의 관계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따라서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작은 실패나 좌절, 혹은 명상 중에 느끼는 모호한 무(無)의 경험조차도, 결국 ‘나만의 깨달음’이 아닌 ‘모두와 함께하는 깨달음’을 향해 가는 걸음일 수 있다.
    이 역설적인 길 위에서, 대승불교가 추구하는 참된 깨달음이란 결코 “나만의 열반”에 매달려 있지 않음을 재인식하게 해 준다. 그리고 이처럼 함께 걸어가는 길 자체가, 어쩌면 우리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선(禪)의 심오함을 스스로 체득하게 해 주는 장이 아닐까.

КОМЕНТАРІ • 2

  • @명섭정-u6n
    @명섭정-u6n 20 днів тому +1

    앉아서 오래있지 마라. 허리 아프고 다리 저리다.

    • @inmunhak
      @inmunhak  20 днів том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