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뛰어난 지휘관은 훌륭한 무관을 지략적으로 지휘하면서 서로 서로 좋게 다독이고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말입니다. 아이젠하워 원수처럼 말이지요. 진짜 아이젠하워 원수가 아니었다면 연합군 지휘부는 진짜 엉망진창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패튼과 몽고메리의 자존심 싸움 때문에 말이지요.
@@jhshin9413 그런데 그런 제갈공명의 명줄을 제대로 파악한 인물이 바로 사마의 중달입니다. 단순히 포로로 잡힌 병졸의 말 하나만으로도 제갈공명은 오래 못 살거다 하는 것을 제대로 파악했으니까 말입니다. 다만 마지막에 '죽은 공명이 산 사마의 중달을 물리쳤다.' 하는 부분에서는 진짜 제갈공명의 머리에 본인조차도 완전히 속았으니까 말입니다. 그런 부분을 보면 손자병법의 구절인 '전쟁의 기본은 속임수이다. 적이 강하면 피하고 적이 화가 나 있으면 더 자극시켜라.' 하는 구절이 절묘하게 맞아들어간다고나 할까요?
@@jhshin9413 그 아두의 아비가 유비이고 유비의 본 모습이 배불뚝이 였고 거기에 촉나라 군사들을 개죽음 시킨 그 전투를 유비 본인이 지휘를 했다는 것은 진짜........... 애비나 아들이나 다 돌대가리였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것과 동시에 그런 것들을 상관으로 모셔야 했던 제갈공명의 고뇌는 진짜 극한직업 그 자체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여요 3차 전쟁 끝나고 송나라가 고려에게 함부로 못했고 그당시 고려 사신이 송나라가서 엄청나게 갑질하기도 했습니다. 송나라 입장에선 고려 기분을 나쁘게해서 좋을게 없으니 잘보이려 노력했었죠. 또한 여진족도 고려에 친조하였고 고려가 가장 평온하게 잘살수 있는 시대가 되었죠. 피땀흘려 평화를 찾았던 시기죠.
원래 뛰어난 지휘관은 훌륭한 무관을 지략적으로 지휘하면서 서로 서로 좋게 다독이고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말입니다. 아이젠하워 원수처럼 말이지요. 진짜 아이젠하워 원수가 아니었다면 연합군 지휘부는 진짜 엉망진창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패튼과 몽고메리의 자존심 싸움 때문에 말이지요.
작전에 대한 계획과 지휘는 병법적지식과 현상황에 대한 올바른 통찰이 필요한데... 저시대에 70먹은 문관이면 책도 많이봤을거고 살면서 경험도 많을것이고 들은얘기도 많을것이다 정보량이 많기 때문에 타고난 두뇌회전과 함께 빛을본것이다 장군이 직접 나가 부딫혀 싸우는게 아니기 때문에 사실 지휘하는 사령관에게 필요한건 지력이지 지력... 강감찬은 그 타고난 지력이 문곡성의 현신이라 당대에는 최고의 지략가였을것이다
그런 분이니 결국 대한민국 장군 중 위대한 장군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고 심지어는 군함에도 이름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나라든 그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세운 분의 이름을 군함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것은 기초적인 관례이자 영원히 기억되는 군인으로서의 최고의 명예이자 긍지 그 자체이니까 말입니다.
조선도 고려처럼 외세를 물리쳐 동북아의 균형자로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생존할수있었는데 조선에는 현종이 없었기에 백성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했지 무려 5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청나라로 노예로 끌려갔다는거 알아 이렇게 나라를 만든 장본인인 인조는 호위호식하며 살았고 말이야 이런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속할수있었다는게 우리민족의 비애
『고려사절요』권4 정종(靖宗) 12년 11월조 기록 11월.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대중상부(大中祥符) 3년(1010)에 거란이 들어와 노략질하였을 때,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양규(楊規)와 부지휘(副指揮) 김숙흥(金叔興) 등은 선봉에 나아가 힘써 격투를 벌이며 연이은 전투에서 적을 돌파하였지만 화살이 고슴도치의 털처럼 집중되어 모두 전장에서 전사하였다. 또한 대중상부 11년(1018) 거란 병사가 난입하였을 적에는 병부상서 지중추원사(兵部尙書知中樞院事) 강민첨(姜民瞻)이 원수(元帥)가 되어 북을 치며 힘써 돌격하여 반령(盤嶺)의 들판에서 크게 패배시켰으니, 거란군이 퇴각하면서 창과 갑옷을 내버려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강민첨은 이에 10,000명을 포로로 잡거나 참수하였다. 그 공을 추념한다면 포상을 시행하기에 합당할 것이다. 공신각(功臣閣)에 모습을 그려 이로써 후대를 권면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十一月. 制曰, “大中祥符三年丹兵入寇, 西北面都巡檢使楊規副指揮金叔興等挺身奮擊, 連戰破敵, 矢集如蝟毛, 俱沒陣下. 又於大中祥符十一年丹兵入,兵部尙書知中樞院事姜民瞻爲元帥, 鼓奮擊, 大敗於盤嶺之野, 丹兵奔北, 投戈委甲, 行路隘塞. 民瞻乃斬萬級. 追念其功, 合行褒奬. 可圖形功臣閣, 以勸後來.” 고려 거란 전쟁과 귀주대첩 구국의 영웅, 공신 원수(元帥) 강민첨(姜民瞻) 대장군의 초상은 현재 대한민국 보물 제588호로 국립 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요즘 고려 거란 전쟁 사극을 보면서 초중고때 배웠던 강감찬 장군님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우선 강감찬 님은 문관이지 장군이나 무관이 아니였다는 점 잘생긴 최수종 배우가 강감찬 장군님 역할을 하면 안된다는 점.^^* 실제 귀주대첩에서 강감찬 님의 연세가 71~72세인데 그당시 고려 남자들의 평균 수명이 39~40세 정도 인데 그당시 71세면 요즘 의학적 생체 나이로 치면 100세 가 넘는 나이에 어떻게 말타고 천리를 달리면서 칼싸움을 할수 있는지 경험칙으로 보면 불가능 할것 같습니다. 고려사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자료가 별로 없습니다 현재 고려 거란전쟁사극은 드라마 픽션 입니다. 실제 고려사에는 귀주대첩이 끝나고 강감찬 도통사가 현종에게 현직에서 물러난다고 하니 현종이 조정 조례 3일에 1번씩 참석하라고하고 의자와 지팡이를 하사합니다. 지팡이 집고 다니시는 요즘 노인과 비슷하셨을듯 추리해봅니다. 고려시대 장군명칭은 정6품에서~정3품 상장군 까지 입니다 정2품의 평장사 강감찬님은 부총리~총리대신급 문관 입니다. 그리고 문화시중은 종1품 수상입니다 무장의 계급으로 강감찬 님을 장군으로 부르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평생 문관으로 지내시다 귀주대첩에서 도통사 상원수 임시 사령관 3개월이 무관 경력? 장군? 보통 미국이나 선진국 에서 문관 출신이 국방부 장관을 해도 장군이라 부르지 않듯이 강감찬님은 문화시중 으로 불러야 맞지 않을까요? 그리고 귀주대첩 당시 실제 고려군을 통솔 하고 전쟁을 지휘하신 분은 원수 강민첨 대장군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부원수 또는 부관이라 잘못 알고 있는데 원수입니다. 고려사절요에도 나오는데 후세 사람들이 한역을 잘못하여 도울 부자를 부원수라 붙여서 오역이 생긴듯합니다. 실제 귀주대첩의 전쟁은 원수 강민첨 대장군이 전쟁을 도 맡아서 한것 같고 총 사령관은 행정 관례상 고려 조정에서 평장사 강감찬님을 서북면 도통사로 임명하여 상원수로 되신것 같습니다. 고려는 문신의 시대였고 권력중심의 문신들이 역사의 기록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적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 그래서 나중에 차별받는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무신의 난이 일어난 듯 합니다. 민족의 영웅 강감찬 장군님을 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귀주대첩에서 실제 전투 공과의 역사적 진실을 새로운 시점에서 재 발굴하고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고려 태사 강감찬은 키가 작고 못 생겼었다고 합니다. 잘 생긴 최수종이 하면 안 맞는건 맞습니다. ^^ 문화시중이 아니라 문하시중이 맞습니다. 그래서 고려 시중 강감찬 또는 강시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귀주대첩때는 고려 태사 강감찬이 상원수인 것이 맞습니다. 나이가 많아도 병법을 잘 알면 지휘를 할 수가 있고 직접 싸울 수도 있습니다. 지팡이를 준 것은 지팡이가 없으면 못 걸어다녀서 준게 아닙니다. 그냥 권위의 상징으로 나이 많은 신하에게 지팡이를 하사하는겁니다. 명나라에는 여자인데도 결혼하고 나서 젊을 때인 20대부터 70대까지도 갑옷을 입고 군의 지휘관으로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 싸운 충정후 진양옥이라는 묘족 여자 장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왜 못 합니까? 지중추사 강민첨도 문신이었으며 귀주대첩때 태사 강감찬을 보좌했습니다. 서생이었고 말 타고 활쏘는건 그다지 잘 하지는 못 했지만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도 독립을 위한 미국혁명때 인쇄업자, 출판업자와 외교관과 국회의원은 했지만 군경력이 전혀 없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군대의 사령관이 되고 군경력이 있는 사람이 보좌를 하여 전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독학으로 공부해서 영어 프랑스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독일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된 책을 읽고 프랑스에 가서 프랑스어로 외교를 했고 글도 잘 써서 출판업도 했습니다. 그리고 인쇄공이었으며 여러가지 과학 실험도 했고 사령관으로서 군 지휘도 했습니다.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에도 그렇게 다재다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숙주도 여러가지 외국어도 잘 하고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하고 책도 저술했고 문신이었으며 여진 정벌도 했습니다. 김종서도 문신이었으며 여러가지 다양한 책도 저술하고 4군6진 개척도 했죠. 연안군 이숙기라는 분은 문과 소과에 2등으로 합격하고 또 무과 대과에 1등으로 급제 했고 같은 해에 사촌인 분이 문과 대과 장원을 했죠. 문무겸전했죠. 늘 선봉에서 활 쏘며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건주위정벌에도 참여했습니다. 김부식도 고려에서 역사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삼국사기도 저술한 문신이었지만 군대를 지휘하여 서경에서 묘청의 난도 진압했죠. 그런데 자식 교육을 잘못하여서 무신의 난이 일어났죠.
근대이전에는 유아사망율이 높았기에 평균수명이 낮은거지 당시 71세의 의학적 나이가 100세는 아닙니다. 물론 현대가 건강유지를 위한 의학적 처치가 가능하니 70대 중반정도는 볼 수 있겠군요, 다만, 현대의 성인병 같은 질환은 적었을테니 큰 차이는 없을것 같습니다. 그리고 강감찬 장군 (평장사)께서는 당시 전방에서 지휘할만한 건강한 상황이니 현종도 총지휘관에 임명한거겠지요, 또한 실질적인 군사적 지휘는 강민첨 장군이 했을 수 도 있을것 같습니다. 상원수라는 옥상옥을 만든 이유가 있겠지요.
글쎄.. 만주족이 고구려와는 정체성에 대해서 별 상관이 없을듯 애초에 괴뢰국이던 만주국은 청나라 왕조를 계승했고 청나라는 최초 여진통합 국가 금나라를 계승해서 후금을 건국했으니 고구려와는 일체 아무런 관련이 없음 해봤자 과거 청 제국이 갖고있던 영토에 대한 클레임이나 한국에 대한 피지배적인 욕망이 다였을듯
서경이 현재의 평양이고 고려의 수도가 개경이라면 고려는 30만 대군을 모집할 수 없다. 신라가 신의주, 함흥, 길주부터 남쪽땅을 보유할 때도 10만양병에 거쳤다. 따라서 거란과 전쟁시점 고려의 영토는 한반도보다 최소 3배 이상의 영토를 보유해야 가능하다. 고려사의 영토 해석은 다시 되어야 한다.
요나라도 송나라도 고려에 사신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며 송대 시인 소동파는 고려사신들에 행폐가 너무하다고 상소 하자 황제 말하길 제네들 요나라 가선 우리보다 더 뜯어 간다더라..... 사실 고려에 사신보단 통역을 담당하는 역관들이나 관료들이 고려사신에 권세에 더 난리를 쳤다네요 송은 물론이고 요나라도 마찬가지로....
강감찬 장군님과 이순신 장군님 모두 같은 생각을 하셨다. 퇴각하는 적의 무리들을 모두 섬멸해야 다시는 처들어올 생각을 못한다는것. 완벽한 항복을 받아내야하는것.
여요 3차 전쟁과 노량해전이후 다신 처들어올 생각을 못했지.
한국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인 소설속의 제갈량 캐릭터 실존 인물이 강감찬이네.
행정 사무 능력도 뛰어나면서 군사적감각과 전략도 뛰어난
원래 뛰어난 지휘관은
훌륭한 무관을 지략적으로 지휘하면서
서로 서로 좋게 다독이고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말입니다.
아이젠하워 원수처럼 말이지요.
진짜 아이젠하워 원수가 아니었다면
연합군 지휘부는 진짜 엉망진창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패튼과 몽고메리의 자존심 싸움 때문에 말이지요.
뻥국지보다 전세계가 인정하는 명대첩의 설계자 강감찬이 더쩜
제갈공명이 아둔한 2세 황제 아두때문에 혹사를 많이 해서
병으로 일찍 사망했습니다.
승상과 총지휘관을 같이 하며
북벌을 추진한 인물이 제갈공명.
@@jhshin9413 그런데 그런 제갈공명의 명줄을 제대로 파악한 인물이
바로 사마의 중달입니다.
단순히 포로로 잡힌 병졸의 말 하나만으로도
제갈공명은 오래 못 살거다
하는 것을 제대로 파악했으니까 말입니다.
다만
마지막에
'죽은 공명이 산 사마의 중달을 물리쳤다.'
하는 부분에서는
진짜 제갈공명의 머리에
본인조차도 완전히 속았으니까 말입니다.
그런 부분을 보면
손자병법의 구절인
'전쟁의 기본은 속임수이다.
적이 강하면 피하고
적이 화가 나 있으면 더 자극시켜라.'
하는 구절이
절묘하게 맞아들어간다고나 할까요?
@@jhshin9413 그 아두의 아비가 유비이고
유비의 본 모습이 배불뚝이 였고
거기에
촉나라 군사들을 개죽음 시킨
그 전투를
유비 본인이 지휘를 했다는 것은 진짜...........
애비나 아들이나 다 돌대가리였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것과 동시에
그런 것들을 상관으로 모셔야 했던
제갈공명의 고뇌는
진짜 극한직업 그 자체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고려는 거란침공받은디 거란이 잠시 본국으로 물러간디 고려는 이미 칼을 더갈고 거란이다시 침공을 예상을했고 이제부터 복수를 위해 다시 대비를 철저하게 준비했죠 그것이 뛰어난 강감찬 장군님의 지휘덕분이죠 감사합니다 우리나라 살리신 장군님
고려의 장군, 서희, 강감찬, 양규, 임금 현종의 지혜,
그래서 거란이 멸망, 위대한
사람들, 역사를 기억하자.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진짜 재밌게 본 다큐 중 하나.👍
역시 대한민국 선조님들 대단하십니다.❤
여요 3차 전쟁 끝나고 송나라가 고려에게 함부로 못했고 그당시 고려 사신이 송나라가서 엄청나게 갑질하기도 했습니다.
송나라 입장에선 고려 기분을 나쁘게해서 좋을게 없으니 잘보이려 노력했었죠. 또한 여진족도 고려에 친조하였고 고려가 가장 평온하게 잘살수 있는 시대가 되었죠. 피땀흘려 평화를 찾았던 시기죠.
서희와 강감찬은 고려 최고의 정치가이자 사령관이다.
1.2.3차 거란침공과 역사서 읽어보세요... 전부 .. 방송 뇌피셜이 ..당신 정신을 지배함
양규 어디?
양규는 어디?
@@후아유-w9o 저때는 양규장군님은 없습니다 김숙흥장군과 함께 백성들을 구하기위해 도망가는 시간을 벌기위해 자신을 희생을 했습니다 ㅠㅠ 그리고 10만명의 병사들을 데리고왔을때는 양규장군님은 세상을 떠났죠 ㅠㅠ
@@풍물화이팅 서희는 더 일찍 죽었는뎁쇼? 죽은거랑 2차 전쟁 영웅이 무슨상관
100여 년 간의 평화를 쉽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참고로 우리 대한민국은 건국 된 지 고작 76년 되었고, 마지막 전쟁을 치룬 지 이제 겨우 70년은 지난 중이다.
전쟁쿨타임 다 찼다
다시한번 싸워 북한전 지역을 수복하자
@@wvwvwvwv0328 북한만 수복할거면 우리 마음대로 하면 되는데, 지금은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등등 얽히고 섥힌 국제관계 때문에 우리 맘대로 뭘 할 수가 없음.
북한으로 밀고 올라갈 전쟁을 일으키려면 만주까지 뚫고 들어갈 생각으로 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으로 젊은이들이 죽고 전비를 낭비한 한국을 중국과 일본은 침흘리며 쳐다볼거다. 쉽지 않다는 거다.
@@wvwvwvwv0328방구석 퐈이터의 ㅂㅅ소리 였습니다!
그러다 허허벌판되서 일본이나 중국의 속국될래?
@@wvwvwvwv0328 본인이 직접 총알날아오고 폭탄 터지는데 뛰어드신다면 암말 안합니다.
그렇군요.. 귀주대첩은 정말 당당한 나라로 거듭나게하는 승리였네요.
이따 드라마 감상 전 보기 딱이네요! 감사합니다😊
원래 뛰어난 지휘관은
훌륭한 무관을 지략적으로 지휘하면서
서로 서로 좋게 다독이고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말입니다.
아이젠하워 원수처럼 말이지요.
진짜 아이젠하워 원수가 아니었다면
연합군 지휘부는 진짜 엉망진창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패튼과 몽고메리의 자존심 싸움 때문에 말이지요.
고려 초기는 왕건의 유지(무관 쿠데티 견제)로 전쟁시 최고 사령관은 무조건 문관으로 임명.
원래 문관 출신 명장이 훨씬 많아요 ... 이순신 김종서 등등 ...
전략가 이자 뛰어나 지휘관 강감찬 장군 역시 존경인물이네요ㅎ
사무직 30년차 강감찬 😅;;; 전쟁은 몸으로도 싸우지만 머리로 싸운다는 말이 있듯 전략 전술도 잘 짜야 전쟁애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
지금이나 옛날이나 똑같아요 중국 미국 러시아 미국 열강속에 있는 대한민국 외교중심잡아서 잘헤처가는게 중요 외교
결국 외교의 유리함도
기본적인 무력이 보장된 상태여야 한다는것임.
강력한 무력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외교력인것임
재밌게 보겠습니다 올려주셔서 너무너무너무 감사해요 업로더님!!!!
이 시기는 그냥 스토리 자체가 너무 재밌음
작전에 대한 계획과 지휘는 병법적지식과 현상황에 대한 올바른 통찰이 필요한데... 저시대에 70먹은 문관이면 책도 많이봤을거고 살면서 경험도 많을것이고 들은얘기도 많을것이다 정보량이 많기 때문에 타고난 두뇌회전과 함께 빛을본것이다 장군이 직접 나가 부딫혀 싸우는게 아니기 때문에 사실 지휘하는 사령관에게 필요한건 지력이지 지력... 강감찬은 그 타고난 지력이 문곡성의 현신이라 당대에는 최고의 지략가였을것이다
그런 분이니
결국 대한민국 장군 중 위대한 장군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고
심지어는 군함에도 이름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나라든
그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세운 분의 이름을 군함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것은
기초적인 관례이자
영원히 기억되는
군인으로서의 최고의 명예이자 긍지 그 자체이니까 말입니다.
조선도 고려처럼 외세를 물리쳐 동북아의 균형자로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생존할수있었는데 조선에는 현종이 없었기에
백성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했지 무려 5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청나라로 노예로 끌려갔다는거 알아
이렇게 나라를 만든 장본인인 인조는 호위호식하며 살았고 말이야 이런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속할수있었다는게 우리민족의 비애
조선 최악의 왕
당시 인구 통계랑 전쟁 양상 보면 50만명은 말도 안 됨 그낭 뻥튀기한거임
광해군 이였으면. 병자호란때. 청에. 굴복하지. 않을수도 있는데. 무능과. 멍청한. 인조놈이. 왕이되서. 백성만. 죽어나갔지. 지금의. 어떤놈하고. 비슷하네.
@@유수윤-m4o
50만이 말도 안 된다 생각 하시면 수 양제 100만 대군도 안 믿으시겠네요?
둘 다 정사라 할 수 있는 관찬 사서에 나오는 내용인데?
궁금한게 있는데
여진족이 명 황실을 없애고
청나라를 세우고
실질적으로 그곳의
수많은 대륙 노예들이 넘쳐나는데
왜 굳이 조선인들을 잡아갔나요?
조선인이 대륙놈들보다
더 좋은 점이 있어서 그렇나요?
문무겸비의 표본 구국의 영웅 보통 나라를 구한 영웅은 황제입장에선 거슬리는 존재가 되는 법인데 강감찬은 저때도 현종이 직접 마중나가 손까지 마주잡았다죠
역사의 영웅 강감찬 장군~ 만세~
장군 아닌디
그럼 머지? 병사?
지휘관은 책임 감이 강해야 하죠.그리고 머리도 엄청 좋아야 함 그래서 시험쳐서 뽑는거임. 뽑혀도. 바로 지휘관 할수 있는것도 아니고.경험을 쌓고 부하들이 인정해야 진정한 지휘관이 된는건데.
싸움은 힘으로만 하는게 아니지~!
70에 은퇴못한 강감찬
요기 장군은 오십대
같은. 😅
은퇴요청하니 지팡이 하사 ㅠ
알고보니 사무직으로 30년이었다 그분이 강감찬장군이시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위치에 자리를 잡았는지.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 고생하셨습니다.
아따 이번편 진짜 재밌네
이걸 라노벨식 제목으로 지으면
- 사무직만 30년을 한 문신인 내가 장군으로 출신해 거란을 물리친 대영웅?!!
이거 아녀?
고려 문무 통합체계가 참 신기하다 인사관리할때 인재를 어떻게 판별했을까...
애초에 조선시대 때에도 문관의 필수 소양 중 하나가 궁술, 기마술이었음.
한국은 역대 왕조에서 문무 통합체계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음.
정말
"노장은 죽지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와
"백전 노장"
의 주인공 강감찬 대장군..;
문관 이라고 해도 병법에 밝고 전략에 능한 행정직 군무원이 총사령관을 맡은 거죠.
총리급 아니었나?
@@mool_tissue추후에 총리
거란때는 종4품
대부분 문관이 잘싸움
@@박세정-k8c 문관이 잘 싸운 것이 아니라. 병사들이 잘 싸운 것이다.
그 당시에 문관 무관 따로 역할분담하던 시대가 아니라
문관으로 들어가도, 무예에 대해서는 다들 기본 가다꾸는 다들 있었던 시대였을 것임
귀주대첩에서 이길 수 있었던건 강감찬의 능력도 있지만 거란군이
거점도 없이 무리한 진격에다 함락도 못시킨상태로 시간이 끌리다보니
제대로 보급도 못한 상태에 병사들의 사기와 체력은 바닥을 보였을거라 생각함
거기다 고려군은 20만 요는 10만 개발릴만 했음
유튜브 편집.잘.하셧내요.👍🏻
사실 우리나라의 위대한 장군들 대부분은 문관 출신입니다.
강감찬 그 분도
장군이라고 불리지만
실제로 갑옷을 입으신 것은 마지막 귀주대첩 때 뿐이었고
그 전까지는 갑옷은 손도 대 보신적이 없지요.
거기에
김종서, 권율 같은 분도 다 문관 출신이니까요.
문관보고 왜 장군이라는고 하는지 희한하다
그 분들 장군 아니예요. 강감찬은 태사나 시중이라고 불러야 하고 좌의정 김종서나 도원수권율이라고 불러야 해요.
장군 이라는 호칭은, "군 지휘권자" 라는 뜻입니다. 문관 무관 출신은 상관없습니다.
@@SangHyunHan-r1d 대통령들도 다 장군이라하니? 더 본래역할을 가져다 부르지 겸직을 누가 고유명사처럼 불러
고려시대에는 군최고 지휘자에 무관이 못앉게 차별을 했으니까 강감찬같이 문관 출신이 많았던거고 조선이나 그전에는 무관출신들 많았슴::
무관출신이 아니였다는걸 지금까지 몰랐다는게 더 황당함...(교과서가 문제야 문제;;).이전까지 강감찬장군은 호전스런 무장 이미지로 드라마에 나왔는데..어쩌면 이순신 장군과 같은 꽈..가 아니였을까 싶네요 ..이순신장군도 원래 문신 지망생이였고 자꾸 안되서 무관이 된건데...같은 문관출신 전략가 였지 않았을까도 싶네요.
『고려사절요』권4 정종(靖宗) 12년 11월조 기록
11월.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대중상부(大中祥符) 3년(1010)에 거란이 들어와 노략질하였을 때,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양규(楊規)와 부지휘(副指揮) 김숙흥(金叔興) 등은 선봉에 나아가 힘써 격투를 벌이며 연이은 전투에서 적을 돌파하였지만 화살이 고슴도치의 털처럼 집중되어 모두 전장에서 전사하였다. 또한 대중상부 11년(1018) 거란 병사가 난입하였을 적에는 병부상서 지중추원사(兵部尙書知中樞院事) 강민첨(姜民瞻)이 원수(元帥)가 되어 북을 치며 힘써 돌격하여 반령(盤嶺)의 들판에서 크게 패배시켰으니, 거란군이 퇴각하면서 창과 갑옷을 내버려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강민첨은 이에 10,000명을 포로로 잡거나 참수하였다. 그 공을 추념한다면 포상을 시행하기에 합당할 것이다. 공신각(功臣閣)에 모습을 그려 이로써 후대를 권면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十一月. 制曰, “大中祥符三年丹兵入寇, 西北面都巡檢使楊規副指揮金叔興等挺身奮擊, 連戰破敵, 矢集如蝟毛, 俱沒陣下. 又於大中祥符十一年丹兵入,兵部尙書知中樞院事姜民瞻爲元帥, 鼓奮擊, 大敗於盤嶺之野, 丹兵奔北, 投戈委甲, 行路隘塞. 民瞻乃斬萬級. 追念其功, 合行褒奬. 可圖形功臣閣, 以勸後來.”
고려 거란 전쟁과 귀주대첩 구국의 영웅, 공신 원수(元帥) 강민첨(姜民瞻) 대장군의 초상은 현재 대한민국 보물 제588호로 국립 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당시 70세까지 살았다는 것이 더 놀라운 사실...
귀주성까지 오는동안 1인당 3마리였던 말도 인당 1마리가 안돼었을 것입니다
군량이 없으니 잡아먹었겠죠.
저 시대에는 무관이 따로 없었음
조선 태종 이방원으로 인해 개혁이 되기전까지
호족들이 세를 유지하고 군?을 보유하고 있었음
군을 보유하고 있다는건 그 주인도 무력이 있었다는것
자랑스러운 강씨 조상님
후손은 지금 빌빌 싸고 있습니다 ㅠㅠ
죽겠습니다 진짜
웃프네요.ㅋ
그냥...서희나 강감찬..
제갈량 스타일이었다고 생각하잨..
강감찬의 후예 😊
평화는 강력한 국방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알수있었던 셈.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장면이죠
말도 서러브레드 종이라 1마리의 출연료도 장난이 아니고요
거란이 고려에 패했을 때 고려는 기회를 살려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기 위해 거란을 쳐들어가야만 했었다
고려거란전쟁 보고 왔습니다.
웅장하다.대회전 대승 귀주대첩
거란과의 전쟁을 끝으로 달콤한 평화를 누렸다지만 왕조국가로서는 독사과였다. 기나긴 평화는 국방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만들었고 결국 침략을 당할때는 처참하게 무너졌음을 조선사를 통해서 배웠다. 전쟁이란 고통이지만 스스로를 강하게 하는 촉매제와 같다.
장군이 슈퍼맨이라면 모를까어차피 장군의무술을중요한게 아님머리가 중요한거지
요즘 고려 거란 전쟁 사극을 보면서 초중고때 배웠던 강감찬 장군님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우선 강감찬 님은 문관이지 장군이나 무관이 아니였다는 점 잘생긴 최수종 배우가 강감찬 장군님 역할을 하면 안된다는 점.^^*
실제 귀주대첩에서 강감찬 님의 연세가 71~72세인데 그당시 고려 남자들의 평균 수명이 39~40세 정도 인데 그당시 71세면 요즘 의학적 생체 나이로 치면 100세 가 넘는 나이에 어떻게 말타고 천리를 달리면서 칼싸움을 할수 있는지 경험칙으로 보면 불가능 할것 같습니다.
고려사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자료가 별로 없습니다 현재 고려 거란전쟁사극은 드라마 픽션 입니다. 실제 고려사에는 귀주대첩이 끝나고 강감찬 도통사가 현종에게 현직에서 물러난다고 하니 현종이 조정 조례 3일에 1번씩 참석하라고하고 의자와 지팡이를 하사합니다. 지팡이 집고 다니시는 요즘 노인과 비슷하셨을듯 추리해봅니다. 고려시대 장군명칭은 정6품에서~정3품 상장군 까지 입니다 정2품의 평장사 강감찬님은 부총리~총리대신급 문관 입니다. 그리고 문화시중은 종1품 수상입니다 무장의 계급으로 강감찬 님을 장군으로 부르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평생 문관으로 지내시다 귀주대첩에서 도통사 상원수 임시 사령관 3개월이 무관 경력? 장군? 보통 미국이나 선진국 에서 문관 출신이 국방부 장관을 해도 장군이라 부르지 않듯이 강감찬님은 문화시중 으로 불러야 맞지 않을까요? 그리고 귀주대첩 당시 실제 고려군을 통솔 하고 전쟁을 지휘하신 분은 원수 강민첨 대장군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부원수 또는 부관이라 잘못 알고 있는데 원수입니다. 고려사절요에도 나오는데 후세 사람들이 한역을 잘못하여 도울 부자를 부원수라 붙여서 오역이 생긴듯합니다. 실제 귀주대첩의 전쟁은 원수 강민첨 대장군이 전쟁을 도 맡아서 한것 같고 총 사령관은 행정 관례상 고려 조정에서 평장사 강감찬님을 서북면 도통사로 임명하여 상원수로 되신것 같습니다. 고려는 문신의 시대였고 권력중심의 문신들이 역사의 기록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적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 그래서 나중에 차별받는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무신의 난이 일어난 듯 합니다. 민족의 영웅 강감찬 장군님을 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귀주대첩에서 실제 전투 공과의 역사적 진실을 새로운 시점에서 재 발굴하고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상 뇌피셜 이였습니다 .... 역사학자중 님처럼 생각하는 분 있을거예요.. 그치만 결론은 우리가아는게 맞아요...
고려 태사 강감찬은 키가 작고 못 생겼었다고 합니다. 잘 생긴 최수종이 하면 안 맞는건 맞습니다. ^^
문화시중이 아니라 문하시중이 맞습니다. 그래서 고려 시중 강감찬 또는 강시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귀주대첩때는 고려 태사 강감찬이 상원수인 것이 맞습니다. 나이가 많아도 병법을 잘 알면 지휘를 할 수가 있고 직접 싸울 수도 있습니다. 지팡이를 준 것은 지팡이가 없으면 못 걸어다녀서 준게 아닙니다. 그냥 권위의 상징으로 나이 많은 신하에게 지팡이를 하사하는겁니다.
명나라에는 여자인데도 결혼하고 나서 젊을 때인 20대부터 70대까지도 갑옷을 입고 군의 지휘관으로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 싸운 충정후 진양옥이라는 묘족 여자 장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왜 못 합니까?
지중추사 강민첨도 문신이었으며 귀주대첩때 태사 강감찬을 보좌했습니다. 서생이었고 말 타고 활쏘는건 그다지 잘 하지는 못 했지만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도 독립을 위한 미국혁명때 인쇄업자, 출판업자와 외교관과 국회의원은 했지만 군경력이 전혀 없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군대의 사령관이 되고 군경력이 있는 사람이 보좌를 하여 전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독학으로 공부해서 영어 프랑스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독일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된 책을 읽고 프랑스에 가서 프랑스어로 외교를 했고 글도 잘 써서 출판업도 했습니다. 그리고 인쇄공이었으며 여러가지 과학 실험도 했고 사령관으로서 군 지휘도 했습니다.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에도 그렇게 다재다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숙주도 여러가지 외국어도 잘 하고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하고 책도 저술했고 문신이었으며 여진 정벌도 했습니다. 김종서도 문신이었으며 여러가지 다양한 책도 저술하고 4군6진 개척도 했죠. 연안군 이숙기라는 분은 문과 소과에 2등으로 합격하고 또 무과 대과에 1등으로 급제 했고 같은 해에 사촌인 분이 문과 대과 장원을 했죠. 문무겸전했죠. 늘 선봉에서 활 쏘며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건주위정벌에도 참여했습니다. 김부식도 고려에서 역사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삼국사기도 저술한 문신이었지만 군대를 지휘하여 서경에서 묘청의 난도 진압했죠. 그런데 자식 교육을 잘못하여서 무신의 난이 일어났죠.
그 의문의 시발점이자 근거의 기반이 드라마인게 레전드네요 ㅋㅋㅋ
평균수명이 40세 정도라는건
그전에 굶어죽거나 병으로 죽거나 전쟁으로 죽는겁니다
노환으로 40세에 죽는게 아닙니다
근대이전에는 유아사망율이 높았기에 평균수명이 낮은거지 당시 71세의 의학적 나이가 100세는 아닙니다. 물론 현대가 건강유지를 위한 의학적 처치가 가능하니 70대 중반정도는 볼 수 있겠군요, 다만, 현대의 성인병 같은 질환은 적었을테니 큰 차이는 없을것 같습니다. 그리고 강감찬 장군 (평장사)께서는 당시 전방에서 지휘할만한 건강한 상황이니 현종도 총지휘관에 임명한거겠지요, 또한 실질적인 군사적 지휘는 강민첨 장군이 했을 수 도 있을것 같습니다. 상원수라는 옥상옥을 만든 이유가 있겠지요.
화면에 나온 고려땅덩어리 표기가 맞습니까??
거란족같은 유목민족은 현지조달이 가능하다는게 왜 그런지 설명이 부족한 것 같은데요?
그분 나오셨다
우리가 대륙으로 나아가지않은건 농업국가였기때문이지 국력이 약해서가아니다
이래서 전쟁터지면 문관이 무관은뒤로하고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진두지휘 하는 이유가 이거구나;;
무력보다는 머리가 위다라는 예를 확실히 보여줌
강감찬이 아니고 신광 이감찬입니다
이레서 우리 7기동군단 중요합니다
고려사 전공 이익주 교수는 3차전 후 고려가 먼저 화평을 제의했다고 하던데...
드라마 고거전이랑 내용이 다른거같은데 드라마가 팩션이라 각색이 많이된건가요?
거란 최고의 장수들(소손녕,소배압)을 물리친 고려 최고의 공무원(서희,강감찬)들
원래 사무직들이 전략적이다
아니 고거전은 맨날 10명만 나오던데 전쟁씬이 이게 더 전쟁같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KOREA !
기병씬 이게 고거던보다 더 웅장하노
제갈공명도 비슷한 듯
송이 존버 잘했네
나도 고려거란전쟁 보고나서 문관인거 처음 알았다
제갈량도 문인인뎁쇼
한신도 문인인데용
문무를 다 갖춘 강감찬.
노 저어주셔서 감사🫶🏻
역사는 사무직이 쓴다.....인가요
일흔이면 완전 말년에 공 세우셨네
직접 칼휘두르지도 않는데 할수있지 하고 생각하는 분들은 삼국지 마속을 생각해보세요. 마속자리에 강감찬장군 데려다 놨으면 장합은 고생만하고 돌아갔을듯 마속도 참모로 조언할때는 잘했지만 지휘관으로서 압박감을 못이겨서 그런 삽질을 한거죠.
오우야 70살에 중노동
어제 드라마 보니까 남한산성 영화 생각나더라 최수종이랑 김윤석이랑 오버랩되고..
양규같은 사람 하나만 있었어도 병자호란 어케 됐을까나
출장입사라 했다. 지략이 있는 장수. 요사이 국회에 비례원을 보면 웃음이 먼저 떠오른다.
제네럴 강
와우 ebs가 고증 끝장나네.. 요즘 kbs 는역사는 12월 인데 여름싸움 하고 있음
맞아요
무력으로만 전쟁하는게 아님
침공법이 625에도 됵같겟지,,,
지금처럼 일본과 미국의 속국으로 사는 것과는 정말 많이 달랐겠네요
??? : 고려중갑기병 돌격!!!! 고려검차 돌겨억!!!!!
무관이 문관은 될 가능성이 낮지만 문관은 무관이 될 가능성이 높음
머리가 좋아야 전략을 잘 짬
그래서 조선때는 무관 뽑을때 전략 짤 능력도 같이 봄
장수 중에 왕이 된 사람은 결국 이성계네
일제시대 만주국이 현재 존재한다면 고구려의 한민족과 만주족 사이 정체성에 싸움이 날듯~ 어리석은 한족이 지금 중국을 통일 했으니 인구수에 밀리는 상황이라 짜증남.
글쎄.. 만주족이 고구려와는 정체성에 대해서 별 상관이 없을듯 애초에 괴뢰국이던 만주국은 청나라 왕조를 계승했고 청나라는 최초 여진통합 국가 금나라를 계승해서 후금을 건국했으니 고구려와는 일체 아무런 관련이 없음 해봤자 과거 청 제국이 갖고있던 영토에 대한 클레임이나 한국에 대한 피지배적인 욕망이 다였을듯
런승만과는 달랐던 현종이군요 🎉
이후의 외교마저도 완벽
검차요 검차, 나를 믿지말고 검차를 믿으시오
그러니까 지휘관이 멍청하면 다 죽는다는거임
짐 나라꼴 봐도 알수 있음
200년뒤 몽골군이 한반도전체를 유린하죠
거란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는데 우리는 얼마나 죽음?
200여명이라고 기록함
소배압이 왜 한족 두발을 하고 있소?
4:58
아니 병사나 강감찬의 갑주부터 시작해서 상투의 모양 까지 왜 전부 한족 양식임?
저런 양식은 고려나 거란이 아닌 송의 양식인데?
대부분 명장이라고 하는분은 문관임 김종서도 문관이고
서경이 현재의 평양이고 고려의 수도가 개경이라면 고려는 30만 대군을 모집할 수 없다. 신라가 신의주, 함흥, 길주부터 남쪽땅을 보유할 때도 10만양병에 거쳤다. 따라서 거란과 전쟁시점 고려의 영토는 한반도보다 최소 3배 이상의 영토를 보유해야 가능하다. 고려사의 영토 해석은 다시 되어야 한다.
❤❤❤❤
저렇게 잘 나가던 선조들이 지켜낸 이 나라인데...
지금은 😂
요나라도 송나라도 고려에 사신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며 송대 시인 소동파는 고려사신들에 행폐가 너무하다고 상소 하자 황제 말하길 제네들 요나라 가선 우리보다 더 뜯어 간다더라..... 사실 고려에 사신보단 통역을 담당하는 역관들이나 관료들이 고려사신에 권세에 더 난리를 쳤다네요 송은 물론이고 요나라도 마찬가지로....
수나라와 당나라의 실패를 잘 활용한 거지.
멍청한 오랑캐가 고려인삼이 되기위해 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