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철학적 고민을 담은 저의 책 📖 서점 링크 교보문고: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4578919 예스24: www.yes24.com/Product/Goods/135744489 알라딘: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0426887
이십년 넘게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정교수지만 충코씨같이 열정적으로 내면의 세계에 대해 대중과 소통하는 분, 소중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쿤데라의 농담을 처음 접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뎐 젊은날이 문득 그리워 지네요. 수많은 걸작을 남기고 그 흔한 (!) 노벨상 한번 못받고 작년에 작고한 쿤데라를 기립니다.
가령 게임을 예로 들자면 게임을 놓고서 이것은 게임이다, 게임에는 게임룰이 있다, 게임룰의 적용은 다양할 것이고 게임의 방향과 양상 또한 다양할 것이며 그에 따른 결과 또한 다를 것이다, 하지만 게임이 게임이라는 이 사실만은 변하지 않으며 나는 유독 이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라고 말하려는 것이 철학이라면 게임 속으로 들어가 게임룰을 적용하면서 직접 게임의 장면을 보여주는 것. 그리하여 게임의 방향과 게임룰의 적용 가능성을 다양하게 또는 무한하게 보여주려는 것. 이것이 소설이지 않을까 싶네요. 철학은 하나의 종결어를 향해 달려가지만 소설은 수많은 종결어를 향해 달려가지요. 철학은 하나의 정답을 향해 달려가지만 소설은 수많은 해답을 향해 달려가지요. 게임 자체를 다루는 철학은 완전성을 지향하고, 게임룰을 다루는 소설은 다양성을 지향합니다. 완전성을 지향하지만 완전에 도달하지 못하는 철학은 비완전성이라는 완전한 현실로 인해 목마를 수 있겠고 반면 현실의 비완전성을 인정하는 소설은 비완전성이라는 완전한 현실에 녹아들 수 있겠죠. 철학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구도자와 같다면 소설은 깨달음 담론을 좋아하는 취재기자나 시청자와 같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안녕하세요, 비슷한 나이 (조금 더 어린)의 대학원생입니다. 오래전부터 카프카와 쿤데라를 좋아했고, 오늘 설명하신 작가들의 의도나 탐구 영역 같은 건 전혀 알지 못했지만, 두 작가들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뭔가 알 수 없는 매력에 끌려 내가 뭘 읽는지 정확히 몰라도 순간순간의 몰입에 이끌리면서 읽었던 작가들입니다. 그들이 쓰려 했던 게 무엇인지, 가령 대체 수수께끼같은 시골의사의 의도가 무엇인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가 뭘 말하는지, 이런 질문에 대해 혼자서 알아내겠다고 아득바득 해석들을 안 봐왔었는데, 이런 자세한 설명을 접하고 나니 당최 몇번을 읽어도 몰랐었겠단 생각이 드네요 ㅎㅎ 충코님의 전반적인 (쿤데라의 말을 빌린) 아주 청자 친화적인 쉬운 설명 덕분에 내가 읽었던 게 무얼 의미했는지 어렴풋이 이해되는 것 같아서 그 책들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활활 솟아오르네요.. 기존에는 댓글 잘 안 달고 매번 그냥 보기만 했는데 처음으로 조곤조곤 설명해주시는 내용들이 너무 와닿아서 댓글 달게 되었습니다. 저는 철학이랑 소설을 사랑하지만 주변에 눈 씻고 찾아봐도 인문학을 사랑하는 친구는 없는데, 이렇게 또래의 아주 똑똑한 분께서 매번 신선한 주제를 가져와서 친절히 재밌게 설명해주는 것에 대해 항상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ㅎㅎ 나중에 독서모임을 또 하시면 꼭 여유되는 한에서 참여하고 싶네요! 항상 감사합니다!
제가 가진 관념들을 이렇게 말로 풀어내신게 개쩌십니다. 성장기때 하루키 소설 읽으면서 정확히 말씀하신 소설의 비논리적이나 합당히 직관적인 방향성들에 대해 절실히 피부로 느끼고 와닿았었죠. 그런 계기로 본의 아니게 그러한 것들이 스며들었고 자연스럽게 또한 그런 실존에 대해 이미 "니체가 말하던 방향성"으로 살아가고 있었더랬죠. (니체의 책을 읽고 난 후에 안 사실이지만) 삶의 결과가 목표이나 과정 또한 절대 놓치지 말 것. 제가 소설을 통해 얻은 것들입니다. 과정도 아름다울 수 있어요
무라카미 하루키 에서도 "경직된 시스템"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공허한 인간들" 이라는 내용이 나오죠 27:50 ------- 두 명의 여성이 도서관에 도착해서 도서관을 꼼꼼히 조사한다. 그리고 성평등을 위해서 도서관에 몇 가지를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남녀공용 화장실을 남 녀 각각 화장실로, 저자의 이름들이 남자가 먼저 되어 있으니 순서를 바꿔야 한다 등) 그에 오시마상은 비유를 들어주면서 이 도서관은 최대한 서비스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작은 도서관에 남녀 공용화장실을 비판하기전에 보잉사의 비행기 속 남녀공용화장실은 바꿀 생각을 안하냐고 되묻는다. 시골의 작은 도서관보다 더 혼잡하고 사람이 많은 비행기 속 남녀공용화장실이 더 문제가 아니냐고 묻는다. 여성들은 다른 곳으로 말을 바꾸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도서 책 저자의 이름의 순서는 알파벳 같은 순서로 그 순서를 바꾼다는 의미는 C 뒤에 D가 아니라 D 뒤에 C가 되는 거냐고 되묻고, 다른 비유로 67페이지는 66페이지 뒤에 있는데 그것을 67 뒤에 66페이지로 바꿔야 되냐는 식이었다. 이렇게 역질문을 하면 여성들은 하찮은 지식으로 주제를 흐리지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여성들은 오시마상을 전형적인 차별 주체로서의 남성적 남성이라고 말한다. 오시마상은 이때 또 하나씩 조곤조곤 반박한다. 그리고 정체를 밝힌다. 오미사상의 정체를 알고 두 여성들은 딱딱한 표정으로 도서관을 나간다. ...... 조금 뒤 오시마상은 주인공 카프카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보다시피 이런 인간(오시마상의 성 정체성(트랜스젠더))이다 보니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여러 의미에서 차별을 받아 왔어. 차별당하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인지, 그것은 차별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지. 아픔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어서, 그 뒤에는 개별적인 상처 자국이 남아. 그렇기 때문에 공평함이나 공정함을 추구하는 데에는 나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다만 내가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S.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이지.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공허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간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즉 쉽게 말하자면, 조금 전 도서관의 실태를 조사하러 온 두 여성 같은 인간들이라구." "게이든 , 레즈비언이든, 정상인이든, 페미니스트든, 파시스트의 돼지든, 공산주의자든, 힌두교 신자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떤 깃발을 내걸든 나는 전혀 상관하지 않아.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런 공허한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과 부딪치면, 나는 참을 수가 없거든. 나도 모르게 하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말을 입에 담게돼. 조금 전의 경우도 적당히 받아넘기고 적당히 맞장구를 쳤으면 됐을 텐데. 아니면 사에키 상을 불러서 맡겼으면 됐을텐데.. (생략)"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비관용성 독불장군 같은 계급 투쟁의 운동 방침, 공허한 말들, 찬탈된 이상, 경직된 시스템. 내가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런 것들이야. 나는 그런 것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증오해. 무엇이 옳고, 옳지 않은가- 물론 그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지. 그러나 그런 개별적인 판단은 혹시 잘못되었더라도 나중에 정정할 수가 있어. 잘못을 스스로 인정할 용기만 있다면, 대개의 경우는 돌이킬 수 있지. 그러나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것이나 관용할 줄 모르는 것은 기생충과 마찬가지거든. 중간 숙주를 바꾸고 형태를 바꾸어서 끝없이 이어져가는 거야. 거기에는 구원이 없어. 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을 여기에 들여놓고 싶지는 않아."
에세이중에서 최고로 뽑는 책중에 하나인데. 다뤄주셨네요. 06:30 초에 해당하는 내용 인용글 올려드릴게요. 밀란 쿤데라 오직 소설이 발견할 수 있는 것만을 발견하라. 그것만이 한편의 소설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라는 헤르만 브로흐의 말을 나는 이런 뜻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그의 거듭된 말에 간직된 고집을 함께 나누고 있는 것이다.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존재의 부분을 찾아내지 않는 소설은 부도덕한 소설이다. 앎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도덕인 것이다. 인간은 선과 악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세계를 원한다. 인간에게는 이해하기에 앞서 심판하고자 하는 타고난, 길들일 수 없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 욕망 위에 세워진다. 이것은 소설의 상대성과 애매성의 언어를 자기네들의 명증적이며 도그마적인 담화로 바꾸지 않고서는 소설과 양립하지 못한다. 이것은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우긴다. 안나 카레니나가 옹졸한 폭군의 피해자이거나, 또는 카레닌이 부도덕한 한 여인의 피해자이다. 또는 아무 죄도 없는 k가 공정하지 못한 재판에 짓눌리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 법정의 뒤에는 신의 정의가 숨겨져 있어서 k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또는-또는' 에는 인간적 현상의 본질적인 상대성을 감당할 수 없다는 무력감, 지고의 심판관이 부재함을 직시할 수 없다는 무력함이 담겨 있다. 이러한 무력감 때문에 소설의 지혜(불확실함의 지혜)는 받아들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소설을 사회-정치적 예언이나, 예상할 수 있었던 오웰의 소설처럼 읽어서는 안된다. 오웰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평론이나 팜플렛을 통해서도 그만큼(또는 차라리 그보다 더 잘) 이야기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 소설가들은 '소설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종말적 역설이라는 상황 속에서 모든 실존적 범주들이 어떻게 돌연히 의미를 달리하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 쿤데라의 소설론? 물론 쿤데라는 이론(철학적이라면서)이라고 불리는걸 싫어했겠지만. 저런 연유로 쿤데라는 오웰의 소설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더군요. 정치적인 해석에 갇혀있는 소설이니까요. 실존적인 해석(상황에 따라 변주가 가능한)이 가능한 소설이 아니구요 --- 쿤데라의 생각을 엿보기 가장 간략한건 앙트완 드 고드마르의 서면 인터뷰입니다. 영상을 보고 밀란쿤데라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셨으면 읽어보시는걸 추천드리고. 흥미를 느끼셨으면 쿤데라는 정말 전권을 다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mijumunhak.net/youngla/board_15/59538 --------- 서면인터뷰중에서 쿤데라- 아닙니다. 난 비관적도 아니고 낙관적도 아닙니다. 내가 하는 말은 모두 가설일 뿐이죠. 난 소설가입니다. 소설가는 너무 단정적인 태도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걸 잘 알지요. 그는 최대한의 설득력을 가지고 자기 인물들의 ‘상대적’ 진실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그 진실과 동일시하지 않아요. 바보만이 만사에 대한 해답을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죠. 소설은 만사에 대해서 다 의문을 품는다는 점에서 현명한 장르입니다. 돈키호테가 자기집 대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서자 세상은 그의 눈앞에서 온갖 질문들로 변해버렸습니다. 세르반테스가 그의 후손들에게 남긴 메시지는, 소설가란 그의 독자들에게 세상을 하나의 질문으로 이해하도록 가르쳐주는 사람이다라는 겁니다. 신성불가침의 확신들 위에 세워진 세계 속에서는 소설이 살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은 그저 그같은 확신들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그거야말로 소설정신에 대한 배반이고 세르반테스에 대한 배반이죠. 레닌주의건 이슬람이건 그 무엇이건 전체주의적인 세계는 답의 세계일 뿐 질문의 세계가 아닙니다. 매스 미디어 정신에 온통 침투된 세계 역시 불행하게도 답의 세계일 뿐 질문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런 세계 속에서는 세르반테스의 유산인 소설이 설 자리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위험이 있습니다.
어떤분이 댓글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언급해서 생각난건데. 이러한 생각들을 소설에서 엿 볼 수 있는 부분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서도 "경직된 시스템"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공허한 인간들" 이라는 내용이 나오죠 ------- 두 명의 여성이 도서관에 도착해서 도서관을 꼼꼼히 조사한다. 그리고 성평등을 위해서 도서관에 몇 가지를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남녀공용 화장실을 남 녀 각각 화장실로, 저자의 이름들이 남자가 먼저 되어 있으니 순서를 바꿔야 한다 등) 그에 오시마상은 비유를 들어주면서 이 도서관은 최대한 서비스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작은 도서관에 남녀 공용화장실을 비판하기전에 보잉사의 비행기 속 남녀공용화장실은 바꿀 생각을 안하냐고 되묻는다. 시골의 작은 도서관보다 더 혼잡하고 사람이 많은 비행기 속 남녀공용화장실이 더 문제가 아니냐고 묻는다. 여성들은 다른 곳으로 말을 바꾸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도서 책 저자의 이름의 순서는 알파벳 같은 순서로 그 순서를 바꾼다는 의미는 C 뒤에 D가 아니라 D 뒤에 C가 되는 거냐고 되묻고, 다른 비유로 67페이지는 66페이지 뒤에 있는데 그것을 67 뒤에 66페이지로 바꿔야 되냐는 식이었다. 이렇게 역질문을 하면 여성들은 하찮은 지식으로 주제를 흐리지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여성들은 오시마상을 전형적인 차별 주체로서의 남성적 남성이라고 말한다. 오시마상은 이때 또 하나씩 조곤조곤 반박한다. 그리고 정체를 밝힌다. 오미사상의 정체를 알고 두 여성들은 딱딱한 표정으로 도서관을 나간다. ...... 조금 뒤 오시마상은 주인공 카프카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보다시피 이런 인간(오시마상의 성 정체성(트랜스젠더))이다 보니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여러 의미에서 차별을 받아 왔어. 차별당하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인지, 그것은 차별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지. 아픔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어서, 그 뒤에는 개별적인 상처 자국이 남아. 그렇기 때문에 공평함이나 공정함을 추구하는 데에는 나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다만 내가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S.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이지.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공허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간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즉 쉽게 말하자면, 조금 전 도서관의 실태를 조사하러 온 두 여성 같은 인간들이라구." "게이든 , 레즈비언이든, 정상인이든, 페미니스트든, 파시스트의 돼지든, 공산주의자든, 힌두교 신자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떤 깃발을 내걸든 나는 전혀 상관하지 않아.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런 공허한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과 부딪치면, 나는 참을 수가 없거든. 나도 모르게 하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말을 입에 담게돼. 조금 전의 경우도 적당히 받아넘기고 적당히 맞장구를 쳤으면 됐을 텐데. 아니면 사에키 상을 불러서 맡겼으면 됐을텐데.. (생략)"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비관용성 독불장군 같은 계급 투쟁의 운동 방침, 공허한 말들, 찬탈된 이상, 경직된 시스템. 내가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런 것들이야. 나는 그런 것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증오해. 무엇이 옳고, 옳지 않은가- 물론 그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지. 그러나 그런 개별적인 판단은 혹시 잘못되었더라도 나중에 정정할 수가 있어. 잘못을 스스로 인정할 용기만 있다면, 대개의 경우는 돌이킬 수 있지. 그러나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것이나 관용할 줄 모르는 것은 기생충과 마찬가지거든. 중간 숙주를 바꾸고 형태를 바꾸어서 끝없이 이어져가는 거야. 거기에는 구원이 없어. 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을 여기에 들여놓고 싶지는 않아." 27:50 근데 이제는 웃음과 유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직된 사람들. 통상적인 생각의 공허함..
“문학과 철학 무엇이 더 나은가?” 는 잘못된 질문같아요. 철학은 개념이나 사상에 불구하기에 철학을 기반으로 예술문학 혹은 사회적으로 표현되었을때, 비로소 진정한 가치가 더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즉 “문학과 철학은 공생”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문학이나 사회의 모습에서 철학을 연구하기도 하고 반대로 철학적인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품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철학이 없다면 깊이 있는 많은 작품을 볼수도 없고, 반대로 작품에서 철학적인 것들 발견하지 못한다면 감정이나 생각에 근간을 찾지 못할지도 모르죠:)
아름다움이 형태로부터 해방되면서 나타난 추상미술이 생각나네요. 중요한 건 아름다움이지 형태가 아니라고 봐요. 문학의 가치도 이야기가 지닌 아름다움이지, 논리적 형태를 갖추었느냐로 판단 할 수 없다고 보고요. 하지만 관념적인 아름다움보다 직관적인 형태를 가치 판단의 준거로 삼기 더 용이하죠. 때문에 형태에 근거한 잣대로 이야기들이 다듬어지며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지 않나 생각해요.
저도 개인적으로는 소설을 몇권 읽지 않았음에도 쿤테라의 소설이 더 위대하다 말한 그 의도에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만 아직 스스로가 너무 미숙하기에 읽어봤자 그 의도, 그 위대함을 알지 못할까봐 조금 아쉬운 마음에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군대가서 많이많이 읽어야지
요약 현실적 소설이 주류가 됨 -> 소설이 지루해짐 '카프카 - 벌레' 같은, 현실을 비유하는 몽환적 현실주의가 필요함 (웨스 앤더슨, 봉준호 류 영화가 예시에 잘 맞을 듯? 한국 성인 대상 애니메이션의 건조하고 현실적인 톤 vs 일본 드라마의 비현실적인 과장 연기도 예시로 비교하기에 적절할 듯 하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신의 의지하던 인간이 그 의지를 벗어나게 되었다 과학의 발달로 정보나 지식을 갈망하면 누구나 쉽게 습득할 수 있는 지성의 보편화 되고 베일에 쌓여 있던 호기심과 의문들이 거짓과 진실로 드러났다 인간의 한계도 어느정도 인증하게 되어 한계점이 좀더 명확해졌다고 할까.그러므로 소설의 허구는 대중들로부터 흥미를 잃게 됐다.인간이 착각에 취약하고 불안을 가진 인간의 본성상 이성적인 동물로 삶의 유한성을 인식할 때 위안을 찿고자 허구보다는 진실 사실에 더 흥미를 가지는 건 아닐까??
근데 정작 사람등은 밀란 쿤데라가 말한 "구체성"하고는 별개로 살고 있을걸요? 아주 대표적인 예로 요즘 굉장히 조심스럽게 바라보는게 인터넷 상의 진화심리학의 활용입니다. 이게 남녀의 사랑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굉장히 천편일륜적일뿐만아니라 남녀를 수컷과암컷으로 격하시켜서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려고 시도하더군요. 인간은 유전자라는 하나의 요인만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전자 이외의 변수를 설명하기에는 "귀찮기 때문에" 간단하게 끼워맞추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면에서는 과학적 사고(철학 포함)보다는 문학이 훨씬 힘있고 설득력있게 받아드리게 되더군요.
사람들은 왜 이런 순기능을 가진 유튜브에 열광하지 않는 것일까. 저는 문학,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철학보다 문학이 상대적으로 더 가치가 있다고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모든 학문은 시대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처한 삶의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다만 충코님의 오늘 강연에 한 마디만 더 보태고자합니다. '철학은 실패를 전제로 한 성공이고, 문학은 성공을 전제로 실패다." 철학의 숨길이 점점 사멸하는 시대에 전력으로 철학에 심폐소생술을 하시는 충코님의 열정을 안간힘을 다해 지지합니다.
테레사에 대한 설명이 좀 아쉽군요. 쿤데라에게 테레사는 무거움, 대지, 안정의 희구, 구심성, 중력 등등을 의미하죠. 토마스가 가벼움, 하늘, 자유의 추구, 원심성, 발산 등을 의미하는 데 반해서요. 간단히 말해, 테레사는 가벼움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우리 삶의 면모라 할 수 있죠. 현기증은 가벼움에 대한 무거움의 작용인 셈이구요.
충코님 질문 하나만 드려듀 될까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를 요즘 읽고 있는데 읽고 싶었던 이유는 단지 하루키의 재즈바의 경영철학 ?을 알고 마음에 들어서 한번 그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어서 읽었는데 전 마라톤에 관심이 없지만 그 책을 펼친건 맞지만.. 읽으면서도 이걸 .. 내가 왜 알아야하지.. 라는 생각이 계속 들거든요 . 이런 정보 ? 와 가벼운 생각들 (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영감을 줄 수 있겠지만) 을 사람들은 왜 열광 하면서 읽지 .. 뭔가 내가 못느끼는 무언가가 있나 ? 하고 한번 정복 ? 해 보고자 꾸역 읽고 있는데 혹시 그 책을 읽어보셨다면 어떤 시선에서 읽혀졌는지, 어떤 재미로 읽혔는지 궁금합니다 ! ㅋㅋㅋㅋ 남들이 좋다는책 나에게는 당연히 안맞을 수 있겠지만 그런 책들이 너무 많아져서 이 고개? 를 한번 넘겨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요즘이네요 ㅎㅎ + 경영 마인드를 보고 끌렸는데 왜 마라톤책을 들었나 ? 그 브랜드에서 여성옷 라인을 잘 하는데 남성복도 멋지지 않을까 ? 혹은 멋진 내가 좋아하는 명품 브랜드에서 새롭게 호텔를 오픈한다는데 그것도 내맘에 드는 요소들이 좀 있지 않을까 ?! 라는 넓은 차원의 생각이었어요 히히
하루키 재즈바의 경영철학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를 읽는 게 잘못된 접근이라 의문이 드시는 것 같습니다. 하루키는 젊어서 재즈바를 경영했었고 그 틈틈이 글을 썼습니다. 그때 운영하던 것들에 대한 것들에 끌리셨다면 오히려 하루키의 초기작들을 읽는 게 더 도움이 되실 겁니다. (추천드리자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 더 깊게 알고싶다면 소설 쓰기 전에 하루키 생활이나 생각에 대한 것들을 찾아보는 게 알맞죠. 근데 이 책은 하루키가 소설가가 되고 나서 글을 쓰기 위해 루틴이 필요하다고 깨닫고, 달리기를 하기 시작한 후의 에세이입니다. 그러니까, 그 책에 담겨있는건 (부분적으론 재즈바 운영하던 20대 하루키도 있겠지만) 소설가로 삶을 사는 하루키의 생각들이 담겨있습니다. 틀린 방향으로 들어와 읽으니 왜 내가(재즈바 운영 하루키에 대해 궁금한 내가) 이 책(소설가로 살아가는 사고방식의 하루키의 글)을 읽지?라는 의문이 드는거죠. 우선 원래 의도에 맞는 하루키 초기작들을 읽고나서 적어주신 의문들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될 것 같습니다.
달리기를 말할때 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외 하루키의 여러 에세이들은 이게 하루키라서 책으로 펴낼 수 있는거지, 다른 작가였으면 출판사에서 빠꾸놨겠다 싶은 글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냥 가볍게 재미로, 그와중에 간간히 나름의 통찰을 얻는 맛으로 읽습니다. 문학 전반으로 확장해서 예기한다면 타고난 감수성이나 예민함, 독서 경험의 차이로 당연히 개인마다 감상의 방향이나 질이 다를 수 있습니다.
문학이 철학보다 대중에게 다가가기 쉬운 언어라서 그런거같아요 아무래도 어떤 가치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는가 아닌가는 꽤 중요하니까요 칼 마르크스도 기존 철학자를 비판할때 너무 현학적이고 자기들만의 리그로 논다, 세계로 적용하고 변혁에 직접 동참해야한다고 했죠 니체가 문학으로 철학을 세계에 적용하는 현명한 사람인것 같네요😊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디까지나 세계가 사각형의 틀이라면 그 틀에서 큰 덩어리들과 작은 부스러기들이 있다고치면 작은 부스러기를 주로 탐구하고 큰 덩어리를 비판하고 해체하며 재검토하는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부스러기들을 현시대에 걸맞는 요구만큼 필요만큼 충분히 탐구하고 확대하고 비율을 키우고 때로는 부스러기가 아니라 덩어리의 가능성인데 우리가 놓친것이었다면 그것을 충분히 키우고 하는 등의 가능성의 탐구에 대한 것이니까요. 오래된 시스템과 합리 속에 여전히 인류가 믿는 근본적인 가치들은 그대로 녹아들어있어서 그렇죠. 다만 시스템이 낡았는데도 혁신을 못해서 그렇지. 우리는 여전히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공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다음단계로 가려면 아직 멀었죠.
철학이 무력하다 또 철학이 삶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참 건방진 소리군요 그건 당신이 당신 자신 안에서 소크라테스의 다이몬과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를 직접 자신의 내면에서 그것의 의미를 찾지 못했고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철학과를 전공으로 했으니 많이 읽고 그들이 주장하는 그 허망한 논리에만 그 뜻을 찾아 헤매기만 했겠죠 마치 소크라테스를 배우려는 젊은이들 대부분이 그의 논리법만 배워 사람들을 골탕 먹이려는 데 치중했듯이 마치 예수의 말과 논리를 빌어먹으며 교묘하게 신자들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게 하는 것에 치중하는 그들처럼 그러나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껍데기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다이몬이라는 신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모든 생각과 행동을 그것에 뜻에 따르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그 뜻에 따르며 살아오기만 했더니 법정에 서게 됐다고 변론을 통해 말했습니다 그 다이몬 그 내면의 신성한 다이몬 모든 것을 자명하게 따지기를 좋아했던 소크라테스가 자신은 그저 다이몬의 소리가 내가 무슨 행동을 하려 하면 내면에서 하지 못하게 울리고 어떤 일에 대해서는 하라고 울리고 너 자명해? 라며 계속 내면에서 울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다이몬과 합리적 추론이라고 할 수 있는 삼단논법이 같이 병행되는 사유를 하고 행동을 했기에 2000년이 넘는 그 빛으로 철학이 그 뿌리에서 자라났던 겁니다 (설마 탈레스나 피타고라스와 아낙사고라스 같은 사람들을 들먹이며 그들이 철학의 시조라고 하는 진부한 말을 하지 않으실 거라 믿겠습니다 그들은 추상적이고 현학적이고 신비스러운 말들이 가득했고 또 부분적 자명함은 있었지만 인간이 어떻게 살다가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길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살다가야 한다를 소크라테스가 제시했기에 거기서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픽테토스 마르쿠스아우릴레우스 같은 열매들이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단순히 이론에서 머무는 것이 아닌 내면에서 울리는 그 다이몬의 소리 동양에서는 우리의 양심의 본체를 사단으로 표현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그 소리가 무엇인지 선정이나 명상을 통해 끝까지 추적하여 그것에 통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도 아고라 광장에서 명상에 들면 그 다음날 아침까지 서있는 체로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불교의 정혜쌍수 역시 똑같은 말입니다 그것에 통했으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통해 늘 그것과 함께 흐르며 (소크라테스가 늘 다이몬과 함께하듯 마하리쉬 늘 참나 와 함께하듯 퇴계 선생이 늘 (경) 안에서 거하듯 이제 그것과 함께 행동과 언어와 생각과 같은 우리 물질계 차원을 닦아 나가야 합니다 그게 4대 성인들의 공통된 행보였습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진리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우리 인간 모두가 그들의 가르침을 통해 성을 통하고 자신을 닦아갈 수 있다면 모든 인간문제는 그것으로 다 풀릴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로 철학은 언어와 단어와 문장에 있지 않습니다 꼭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무엇이 늘 변하고 허망한 것인지 무엇이 늘 그대로 있는 알아차림인지를 본인이 직접 걸어들어가야 본인이 지금까지 배운 모든 철학들이 살아 움직일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도의 그 회의감이 풀리고 자유가 올 것입니다 나아가 본인이 이번 생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목적의식도 생길 것입니다 그 일원성의 자리는 본인의 내면에 있지 절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이미 충코님의 지식은 충분합니다 거기서 더 배워도 더 얻을 것은 없을 것입니다 꼭 자신의 내면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길을 걸으시길 기원합니다
삶의 철학적 고민을 담은 저의 책
📖 서점 링크
교보문고: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4578919
예스24: www.yes24.com/Product/Goods/135744489
알라딘: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0426887
이십년 넘게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정교수지만 충코씨같이 열정적으로 내면의 세계에 대해 대중과 소통하는 분, 소중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쿤데라의 농담을 처음 접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뎐 젊은날이 문득 그리워 지네요. 수많은 걸작을 남기고 그 흔한 (!) 노벨상 한번 못받고 작년에 작고한 쿤데라를 기립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ㅎㅎ
저도 살면서 가장 재밌게 의미깊게 본 소설 중 하나가 농담입니다 군생활하면서 읽어서 훨씬 재밌게 읽었습니다
밀란 쿤데라를 응원항 한 사람으로서 그 아쉬움에 공감이 가서 글을 남깁니다.
저도 정말 가슴이 아팠네요,,!
가령 게임을 예로 들자면
게임을 놓고서
이것은 게임이다, 게임에는 게임룰이 있다, 게임룰의 적용은 다양할 것이고 게임의 방향과 양상 또한 다양할 것이며 그에 따른 결과 또한 다를 것이다, 하지만 게임이 게임이라는 이 사실만은 변하지 않으며 나는 유독 이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라고 말하려는 것이 철학이라면
게임 속으로 들어가 게임룰을 적용하면서 직접 게임의 장면을 보여주는 것. 그리하여 게임의 방향과 게임룰의 적용 가능성을 다양하게 또는 무한하게 보여주려는 것. 이것이 소설이지 않을까 싶네요.
철학은 하나의 종결어를 향해 달려가지만 소설은 수많은 종결어를 향해 달려가지요.
철학은 하나의 정답을 향해 달려가지만 소설은 수많은 해답을 향해 달려가지요.
게임 자체를 다루는 철학은 완전성을 지향하고, 게임룰을 다루는 소설은 다양성을 지향합니다.
완전성을 지향하지만 완전에 도달하지 못하는 철학은 비완전성이라는 완전한 현실로 인해 목마를 수 있겠고
반면 현실의 비완전성을 인정하는 소설은 비완전성이라는 완전한 현실에 녹아들 수 있겠죠.
철학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구도자와 같다면 소설은 깨달음 담론을 좋아하는 취재기자나 시청자와 같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비유 굉장히 잘하셨네요.
안녕하세요, 비슷한 나이 (조금 더 어린)의 대학원생입니다. 오래전부터 카프카와 쿤데라를 좋아했고, 오늘 설명하신 작가들의 의도나 탐구 영역 같은 건 전혀 알지 못했지만, 두 작가들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뭔가 알 수 없는 매력에 끌려 내가 뭘 읽는지 정확히 몰라도 순간순간의 몰입에 이끌리면서 읽었던 작가들입니다.
그들이 쓰려 했던 게 무엇인지, 가령 대체 수수께끼같은 시골의사의 의도가 무엇인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가 뭘 말하는지, 이런 질문에 대해 혼자서 알아내겠다고 아득바득 해석들을 안 봐왔었는데, 이런 자세한 설명을 접하고 나니 당최 몇번을 읽어도 몰랐었겠단 생각이 드네요 ㅎㅎ
충코님의 전반적인 (쿤데라의 말을 빌린) 아주 청자 친화적인 쉬운 설명 덕분에 내가 읽었던 게 무얼 의미했는지 어렴풋이 이해되는 것 같아서 그 책들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활활 솟아오르네요..
기존에는 댓글 잘 안 달고 매번 그냥 보기만 했는데 처음으로 조곤조곤 설명해주시는 내용들이 너무 와닿아서 댓글 달게 되었습니다.
저는 철학이랑 소설을 사랑하지만 주변에 눈 씻고 찾아봐도 인문학을 사랑하는 친구는 없는데, 이렇게 또래의 아주 똑똑한 분께서 매번 신선한 주제를 가져와서 친절히 재밌게 설명해주는 것에 대해 항상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ㅎㅎ 나중에 독서모임을 또 하시면 꼭 여유되는 한에서 참여하고 싶네요! 항상 감사합니다!
모호성, 불확실성, 역설, 알수없음에 활짝 열려 있을 때, 그것을 기꺼이 환대하며 그 안에서 편안할 수 있을 때, 유희, 즐거움, 기쁨은 저절로 찾아옵니다.
그리운 밀란 쿤데라~~~❤❤❤
좋은 책들을 많이 남기고 가셨어요
1980년대 후반에 읽었던 그래서 너무나 좋아하게 된 작가 입니다
충코님 언제나 감사한 마음로 시청하고 있습니다🙏🙏🙏
감명 깊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재밌어요 ! 열심히 생각하고 고민했던 시간을 잊지 않고 사는 데에 충코님이 큰 도움을 주시는 것 같아요 꼭 오래오래 유튜브해주셔야 돼요🔥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꾸준히 올리겠습니다!
요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읽고 있는데!!! 다뤄주셔서 감사해요😊
나와는 전반적인 생각의 결이 많이 다르지만 재밌는 관점이네 ㅎㅎ 나도 가벼움과 즐거움이 중요한 요소중 하나라고 생각함 😊😊
불확실 것을 못견디는 철학 ㅋ . 견디는 소설
감사합니다👍
문학은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는 뭔가가 있습니다. 건조한 톱니바퀴에 누가 기름칠 하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말이죠. 헌데, 책 읽기라는 게 사실 극한의 효율을 따지는 한국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죠. 그래서 안타까울 때가 있지만 여전히 독서는 진리 입니다.
제가 가진 관념들을 이렇게 말로 풀어내신게 개쩌십니다. 성장기때 하루키 소설 읽으면서 정확히 말씀하신 소설의 비논리적이나 합당히 직관적인 방향성들에 대해 절실히 피부로 느끼고 와닿았었죠. 그런 계기로 본의 아니게 그러한 것들이 스며들었고 자연스럽게 또한 그런 실존에 대해 이미 "니체가 말하던 방향성"으로 살아가고 있었더랬죠. (니체의 책을 읽고 난 후에 안 사실이지만) 삶의 결과가 목표이나 과정 또한 절대 놓치지 말 것. 제가 소설을 통해 얻은 것들입니다. 과정도 아름다울 수 있어요
무라카미 하루키 에서도 "경직된 시스템"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공허한 인간들" 이라는 내용이 나오죠 27:50
-------
두 명의 여성이 도서관에 도착해서 도서관을 꼼꼼히 조사한다.
그리고 성평등을 위해서 도서관에 몇 가지를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남녀공용 화장실을 남 녀 각각 화장실로, 저자의 이름들이 남자가 먼저 되어 있으니 순서를 바꿔야 한다 등)
그에 오시마상은 비유를 들어주면서 이 도서관은 최대한 서비스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작은 도서관에 남녀 공용화장실을 비판하기전에 보잉사의 비행기 속 남녀공용화장실은 바꿀 생각을 안하냐고 되묻는다. 시골의 작은 도서관보다 더 혼잡하고 사람이 많은 비행기 속 남녀공용화장실이 더 문제가 아니냐고 묻는다. 여성들은 다른 곳으로 말을 바꾸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도서 책 저자의 이름의 순서는 알파벳 같은 순서로 그 순서를 바꾼다는 의미는 C 뒤에 D가 아니라 D 뒤에 C가 되는 거냐고 되묻고, 다른 비유로 67페이지는 66페이지 뒤에 있는데 그것을 67 뒤에 66페이지로 바꿔야 되냐는 식이었다. 이렇게 역질문을 하면 여성들은 하찮은 지식으로 주제를 흐리지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여성들은 오시마상을 전형적인 차별 주체로서의 남성적 남성이라고 말한다. 오시마상은 이때 또 하나씩 조곤조곤 반박한다. 그리고 정체를 밝힌다. 오미사상의 정체를 알고 두 여성들은 딱딱한 표정으로 도서관을 나간다.
......
조금 뒤 오시마상은 주인공 카프카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보다시피 이런 인간(오시마상의 성 정체성(트랜스젠더))이다 보니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여러 의미에서 차별을 받아 왔어. 차별당하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인지, 그것은 차별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지. 아픔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어서, 그 뒤에는 개별적인 상처 자국이 남아. 그렇기 때문에 공평함이나 공정함을 추구하는 데에는 나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다만 내가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S.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이지.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공허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간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즉 쉽게 말하자면, 조금 전 도서관의 실태를 조사하러 온 두 여성 같은 인간들이라구."
"게이든 , 레즈비언이든, 정상인이든, 페미니스트든, 파시스트의 돼지든, 공산주의자든, 힌두교 신자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떤 깃발을 내걸든 나는 전혀 상관하지 않아.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런 공허한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과 부딪치면, 나는 참을 수가 없거든. 나도 모르게 하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말을 입에 담게돼. 조금 전의 경우도 적당히 받아넘기고 적당히 맞장구를 쳤으면 됐을 텐데. 아니면 사에키 상을 불러서 맡겼으면 됐을텐데.. (생략)"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비관용성 독불장군 같은 계급 투쟁의 운동 방침, 공허한 말들, 찬탈된 이상, 경직된 시스템. 내가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런 것들이야. 나는 그런 것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증오해. 무엇이 옳고, 옳지 않은가- 물론 그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지. 그러나 그런 개별적인 판단은 혹시 잘못되었더라도 나중에 정정할 수가 있어. 잘못을 스스로 인정할 용기만 있다면, 대개의 경우는 돌이킬 수 있지. 그러나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것이나 관용할 줄 모르는 것은 기생충과 마찬가지거든. 중간 숙주를 바꾸고 형태를 바꾸어서 끝없이 이어져가는 거야. 거기에는 구원이 없어. 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을 여기에 들여놓고 싶지는 않아."
에휴 친일파 ㅉㅉ
너무 좋은 내용이었어요. 열심히 들었어요. 감사해요^^
나는 경직되고 어둡고 부정적인 사고방식에만 매몰된 사람을 정말 싫어함. 그리고 특정한 개인에게만 소유되거나 귀속되는 어떤 베타적인 지식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라고 할수가 없는데...
재밌다!!! 충코 포기못합니다ㅜㅜ오래 활동해주십셔
감사합니다
밀란 쿤데라 ㅎㅎㅎㅎ 행복합니다
와 몇달전에 읽었던 책인데... 영상 잘 보겟습니다.
그러게요. 노벨문학상에 정신 번쩍드는 요즘입니다.
아..제가 중고등 진로를 선택할 때부터 중년이 된 지금까지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고민하던 생각인 것 같아요. 바로 그 애매모호함을 견디는 것. 충코님이 올려주신 내용을 좀 더 일찍 깨닫게 되었다면 인생이 많이 달라져 있었을텐데...
캬 너무 재밌다.
사고가 깊어지는 재미…감사합니다 👏🎶
굉장히 재밌네요 감사합니다
에세이중에서 최고로 뽑는 책중에 하나인데. 다뤄주셨네요. 06:30 초에 해당하는 내용 인용글 올려드릴게요.
밀란 쿤데라
오직 소설이 발견할 수 있는 것만을 발견하라. 그것만이 한편의 소설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라는 헤르만 브로흐의 말을 나는 이런 뜻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그의 거듭된 말에 간직된 고집을 함께 나누고 있는 것이다.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존재의 부분을 찾아내지 않는 소설은 부도덕한 소설이다. 앎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도덕인 것이다.
인간은 선과 악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세계를 원한다. 인간에게는 이해하기에 앞서 심판하고자 하는 타고난, 길들일 수 없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 욕망 위에 세워진다. 이것은 소설의 상대성과 애매성의 언어를 자기네들의 명증적이며 도그마적인 담화로 바꾸지 않고서는 소설과 양립하지 못한다. 이것은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우긴다. 안나 카레니나가 옹졸한 폭군의 피해자이거나, 또는 카레닌이 부도덕한 한 여인의 피해자이다. 또는 아무 죄도 없는 k가 공정하지 못한 재판에 짓눌리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 법정의 뒤에는 신의 정의가 숨겨져 있어서 k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또는-또는' 에는 인간적 현상의 본질적인 상대성을 감당할 수 없다는 무력감, 지고의 심판관이 부재함을 직시할 수 없다는 무력함이 담겨 있다. 이러한 무력감 때문에 소설의 지혜(불확실함의 지혜)는 받아들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소설을 사회-정치적 예언이나, 예상할 수 있었던 오웰의 소설처럼 읽어서는 안된다. 오웰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평론이나 팜플렛을 통해서도 그만큼(또는 차라리 그보다 더 잘) 이야기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 소설가들은 '소설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종말적 역설이라는 상황 속에서 모든 실존적 범주들이 어떻게 돌연히 의미를 달리하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
쿤데라의 소설론? 물론 쿤데라는 이론(철학적이라면서)이라고 불리는걸 싫어했겠지만. 저런 연유로 쿤데라는 오웰의 소설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더군요. 정치적인 해석에 갇혀있는 소설이니까요. 실존적인 해석(상황에 따라 변주가 가능한)이 가능한 소설이 아니구요
---
쿤데라의 생각을 엿보기 가장 간략한건 앙트완 드 고드마르의 서면 인터뷰입니다. 영상을 보고 밀란쿤데라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셨으면 읽어보시는걸 추천드리고. 흥미를 느끼셨으면 쿤데라는 정말 전권을 다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mijumunhak.net/youngla/board_15/59538
---------
서면인터뷰중에서
쿤데라- 아닙니다. 난 비관적도 아니고 낙관적도 아닙니다. 내가 하는 말은 모두 가설일 뿐이죠. 난 소설가입니다. 소설가는 너무 단정적인 태도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걸 잘 알지요. 그는 최대한의 설득력을 가지고 자기 인물들의 ‘상대적’ 진실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그 진실과 동일시하지 않아요. 바보만이 만사에 대한 해답을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죠. 소설은 만사에 대해서 다 의문을 품는다는 점에서 현명한 장르입니다. 돈키호테가 자기집 대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서자 세상은 그의 눈앞에서 온갖 질문들로 변해버렸습니다. 세르반테스가 그의 후손들에게 남긴 메시지는, 소설가란 그의 독자들에게 세상을 하나의 질문으로 이해하도록 가르쳐주는 사람이다라는 겁니다. 신성불가침의 확신들 위에 세워진 세계 속에서는 소설이 살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은 그저 그같은 확신들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그거야말로 소설정신에 대한 배반이고 세르반테스에 대한 배반이죠. 레닌주의건 이슬람이건 그 무엇이건 전체주의적인 세계는 답의 세계일 뿐 질문의 세계가 아닙니다. 매스 미디어 정신에 온통 침투된 세계 역시 불행하게도 답의 세계일 뿐 질문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런 세계 속에서는 세르반테스의 유산인 소설이 설 자리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위험이 있습니다.
어떤분이 댓글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언급해서 생각난건데.
이러한 생각들을 소설에서 엿 볼 수 있는 부분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서도 "경직된 시스템"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공허한 인간들" 이라는 내용이 나오죠
-------
두 명의 여성이 도서관에 도착해서 도서관을 꼼꼼히 조사한다.
그리고 성평등을 위해서 도서관에 몇 가지를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남녀공용 화장실을 남 녀 각각 화장실로, 저자의 이름들이 남자가 먼저 되어 있으니 순서를 바꿔야 한다 등)
그에 오시마상은 비유를 들어주면서 이 도서관은 최대한 서비스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작은 도서관에 남녀 공용화장실을 비판하기전에 보잉사의 비행기 속 남녀공용화장실은 바꿀 생각을 안하냐고 되묻는다. 시골의 작은 도서관보다 더 혼잡하고 사람이 많은 비행기 속 남녀공용화장실이 더 문제가 아니냐고 묻는다. 여성들은 다른 곳으로 말을 바꾸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도서 책 저자의 이름의 순서는 알파벳 같은 순서로 그 순서를 바꾼다는 의미는 C 뒤에 D가 아니라 D 뒤에 C가 되는 거냐고 되묻고, 다른 비유로 67페이지는 66페이지 뒤에 있는데 그것을 67 뒤에 66페이지로 바꿔야 되냐는 식이었다. 이렇게 역질문을 하면 여성들은 하찮은 지식으로 주제를 흐리지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여성들은 오시마상을 전형적인 차별 주체로서의 남성적 남성이라고 말한다. 오시마상은 이때 또 하나씩 조곤조곤 반박한다. 그리고 정체를 밝힌다. 오미사상의 정체를 알고 두 여성들은 딱딱한 표정으로 도서관을 나간다.
......
조금 뒤 오시마상은 주인공 카프카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보다시피 이런 인간(오시마상의 성 정체성(트랜스젠더))이다 보니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여러 의미에서 차별을 받아 왔어. 차별당하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인지, 그것은 차별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지. 아픔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어서, 그 뒤에는 개별적인 상처 자국이 남아. 그렇기 때문에 공평함이나 공정함을 추구하는 데에는 나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다만 내가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S.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이지.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공허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간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즉 쉽게 말하자면, 조금 전 도서관의 실태를 조사하러 온 두 여성 같은 인간들이라구."
"게이든 , 레즈비언이든, 정상인이든, 페미니스트든, 파시스트의 돼지든, 공산주의자든, 힌두교 신자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떤 깃발을 내걸든 나는 전혀 상관하지 않아.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런 공허한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과 부딪치면, 나는 참을 수가 없거든. 나도 모르게 하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말을 입에 담게돼. 조금 전의 경우도 적당히 받아넘기고 적당히 맞장구를 쳤으면 됐을 텐데. 아니면 사에키 상을 불러서 맡겼으면 됐을텐데.. (생략)"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비관용성 독불장군 같은 계급 투쟁의 운동 방침, 공허한 말들, 찬탈된 이상, 경직된 시스템. 내가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런 것들이야. 나는 그런 것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증오해. 무엇이 옳고, 옳지 않은가- 물론 그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지. 그러나 그런 개별적인 판단은 혹시 잘못되었더라도 나중에 정정할 수가 있어. 잘못을 스스로 인정할 용기만 있다면, 대개의 경우는 돌이킬 수 있지. 그러나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것이나 관용할 줄 모르는 것은 기생충과 마찬가지거든. 중간 숙주를 바꾸고 형태를 바꾸어서 끝없이 이어져가는 거야. 거기에는 구원이 없어. 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을 여기에 들여놓고 싶지는 않아."
27:50
근데 이제는 웃음과 유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직된 사람들. 통상적인 생각의 공허함..
“문학과 철학 무엇이 더 나은가?” 는 잘못된 질문같아요. 철학은 개념이나 사상에 불구하기에 철학을 기반으로 예술문학 혹은 사회적으로 표현되었을때, 비로소 진정한 가치가 더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즉 “문학과 철학은 공생”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문학이나 사회의 모습에서 철학을 연구하기도 하고 반대로 철학적인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품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철학이 없다면 깊이 있는 많은 작품을 볼수도 없고, 반대로 작품에서 철학적인 것들 발견하지 못한다면 감정이나 생각에 근간을 찾지 못할지도 모르죠:)
참을수없는존재의가벼움에 대해서 한시간동안 떠들어주세요😂😂
막판에 경직된 생각에 대한 얘기는 지금 인터넷에서의 수많은 갈등과 혐오의 모습들을 설명할 수 있는 것 같음. 글은 많아지지만 좋은 이야기는 오히려 줄어드는 아이러니한 모습. 많은 좋은 이야기가 눈과 눈으로, 입과 귀로 전달되어야지 하지 않나 생각드네요.
무슨 말을 하기가 어려워진 시대이긴 하죠...
13:19 😊
소설. 인간의 구체성에 관한 탐구.
4:19
아름다움이 형태로부터 해방되면서 나타난 추상미술이 생각나네요. 중요한 건 아름다움이지 형태가 아니라고 봐요. 문학의 가치도 이야기가 지닌 아름다움이지, 논리적 형태를 갖추었느냐로 판단 할 수 없다고 보고요. 하지만 관념적인 아름다움보다 직관적인 형태를 가치 판단의 준거로 삼기 더 용이하죠. 때문에 형태에 근거한 잣대로 이야기들이 다듬어지며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지 않나 생각해요.
저도 개인적으로는 소설을 몇권 읽지 않았음에도 쿤테라의 소설이 더 위대하다 말한 그 의도에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만 아직 스스로가 너무 미숙하기에 읽어봤자 그 의도, 그 위대함을 알지 못할까봐 조금 아쉬운 마음에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군대가서 많이많이 읽어야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인공지능이 바둑기사들에게 새로운 세계 새로운 수법을 보여주듯(물론 인간 지능의 한계상 충분히 모방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철학자나 소설가에게 인간이 기존에 알고 있던 문학작품이나 철학서를 초월하는 작품을 보여줄 날이 곧 오지 않을까요?
솔직히 좋은책이 드물고 시간이 없음. 기억이 중요한데 한번봐서는 기억이 안남. 그래서 좋은책 여러번 읽어야하는데 좋은책을 찾기 힘듬. 입양아들 모국어도 몇년 안쓰면 까먹을 정도로 기억이 ㅁ미약한데 책을 대충보면 남는게...
철학은 무력하지 않아요. 철학은 비현실적인 듯 하지만 더 현실적입니다. 왜냐하면 일희일비의 답답함보다 약간 위에서 삶을 내려보는 여유를 주니까요. 시간이 걸리는것도 무르익는 시간이지요. 횡설수설인가요? 철학은 머리를 시원하게 해줍니다. 저에게는.
우리 아들이 철학을 택하지 않은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신 물리를 선택했어요 ~ 같은것을 결국 선택한거죠^^
철학은 Ocean, 문학은 Swimming 🏊♀️ Pool
문학의 관점에서 이야기 하셨으니..궁금합니다. ‘미술은 철학의 눈이다’ 라는 책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문학과 미술, 혹시 비교 가능하실까요? 어느쪽이 더 찰학에 가까울까요? 개인적으로 문학/미술 모두 사랑합니다.
요약
현실적 소설이 주류가 됨 -> 소설이 지루해짐
'카프카 - 벌레' 같은, 현실을 비유하는 몽환적 현실주의가 필요함 (웨스 앤더슨, 봉준호 류 영화가 예시에 잘 맞을 듯? 한국 성인 대상 애니메이션의 건조하고 현실적인 톤 vs 일본 드라마의 비현실적인 과장 연기도 예시로 비교하기에 적절할 듯 하고)
내 생각에 도스토옙스키는 니체를 능가한다.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이 니체의 철학을 넘어선다. - 조던 피터슨
서쪽은좀 힘들까요? 서부권 균형발전이 주요과제라했는데 동부권을추천해주셔서 살짝헷갈리네요
문명이 발달하면서 신의 의지하던 인간이 그 의지를 벗어나게 되었다 과학의 발달로 정보나 지식을 갈망하면 누구나 쉽게 습득할 수 있는 지성의 보편화 되고 베일에 쌓여 있던 호기심과 의문들이 거짓과 진실로 드러났다 인간의 한계도 어느정도 인증하게 되어 한계점이 좀더 명확해졌다고 할까.그러므로 소설의 허구는 대중들로부터 흥미를 잃게 됐다.인간이 착각에 취약하고 불안을 가진 인간의 본성상 이성적인 동물로 삶의 유한성을 인식할 때 위안을 찿고자 허구보다는 진실 사실에 더 흥미를 가지는 건 아닐까??
문창과 학부시절 영감과 곤란함(싫지만은 않은 고민을 주기에)을 주던 수업들이 생각나네요.
근데 정작 사람등은 밀란 쿤데라가 말한 "구체성"하고는 별개로 살고 있을걸요?
아주 대표적인 예로 요즘 굉장히 조심스럽게 바라보는게 인터넷 상의 진화심리학의 활용입니다.
이게 남녀의 사랑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굉장히 천편일륜적일뿐만아니라 남녀를 수컷과암컷으로 격하시켜서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려고 시도하더군요.
인간은 유전자라는 하나의 요인만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전자 이외의 변수를 설명하기에는 "귀찮기 때문에" 간단하게 끼워맞추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면에서는 과학적 사고(철학 포함)보다는 문학이 훨씬 힘있고 설득력있게 받아드리게 되더군요.
격하시키는게 아니라 근본적인걸 탐구하고 그 영향력의 크기에 대해 탐구하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쿤데라의 정체성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분이 노벨상을 못받았다구요? 헐~~밥 딜런도 받았는데?
tv는 몰라도 유튜브는 결코 바보상자가 아니다. 감사합니다.
마치 그림을 사진처럼 그린다는 건가요?
사람들은 왜 이런 순기능을 가진 유튜브에 열광하지 않는 것일까. 저는 문학,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철학보다 문학이 상대적으로 더 가치가 있다고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모든 학문은 시대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처한 삶의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다만 충코님의 오늘 강연에 한 마디만 더 보태고자합니다. '철학은 실패를 전제로 한 성공이고, 문학은 성공을 전제로 실패다." 철학의 숨길이 점점 사멸하는 시대에 전력으로 철학에 심폐소생술을 하시는 충코님의 열정을 안간힘을 다해 지지합니다.
과학도 사람을 단순하게 단편적으로 보는 건 아닙니당!
충코님은 재독 하시나요?
소설가는 99%의 사실이 떠다니는 현대적 시공간과 인과들 속에서 1%로의 아름다운 민낯인 진실을 폭로하고자 한다. 즉, 키치의 감각으로.
인문학 안에 철학이 포함되어 있지요. 혹자는 철학이 메타학문이라고 으스대며 허영심 부리지만 결국에 인문학의 한 분야일 뿐입니다.
메타학문이라고 주장하죠 ㅋㅋ 진짜 메타학문이라는게 있기나 한지는 모르겠음
테레사에 대한 설명이 좀 아쉽군요. 쿤데라에게 테레사는 무거움, 대지, 안정의 희구, 구심성, 중력 등등을 의미하죠. 토마스가 가벼움, 하늘, 자유의 추구, 원심성, 발산 등을 의미하는 데 반해서요. 간단히 말해, 테레사는 가벼움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우리 삶의 면모라 할 수 있죠. 현기증은 가벼움에 대한 무거움의 작용인 셈이구요.
'현기증'이라는 상징이 님이 말한 모든 개념을 또는 그 넘어서의 가능성을 수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테라자와 토마시를 정반대의 or적 개념으로 치환하는 건 쿤데라 소설의 가장 중요한 메세지를 놓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미디어세계를 너머 인공지능 시대가 왔어요. 미래에는 인간 실존은 어디에서 찾을까요.
잘 들었습니다. 들으며 제게 문득 떠오르는 키워드는 반역사, 대체역사 , 나심 탈레브, 구전설화.
걍 디자이너와 개발자의 관계에요
충코님 지금도 좋지만 자막 달아주시면 너무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ㅜㅜ
거장께서 돌아가신 게 안타깝네요...
소설은 상상과 우연의 일치의 나열인데
정당성,의문으로 부터 자유로운 실화소설,자서전과는 구별되어야죠.
그렇게
마음의 여유가 사라져 가면서 객관화 일반화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은 변신에서 주인공이 외형의 변화로 밖에 못나가듯 내면이 왜곡되어 자체적으로 고립되는거 같네요.
충코님 질문 하나만 드려듀 될까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를 요즘 읽고 있는데
읽고 싶었던 이유는 단지 하루키의 재즈바의 경영철학 ?을 알고 마음에 들어서 한번 그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어서 읽었는데 전 마라톤에 관심이 없지만 그 책을 펼친건 맞지만..
읽으면서도 이걸 .. 내가 왜 알아야하지.. 라는 생각이 계속 들거든요 .
이런 정보 ? 와 가벼운 생각들 (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영감을 줄 수 있겠지만) 을 사람들은 왜 열광 하면서 읽지 .. 뭔가 내가 못느끼는 무언가가 있나 ? 하고 한번 정복 ? 해 보고자 꾸역 읽고 있는데 혹시 그 책을 읽어보셨다면 어떤 시선에서 읽혀졌는지, 어떤 재미로 읽혔는지 궁금합니다 ! ㅋㅋㅋㅋ 남들이 좋다는책 나에게는 당연히 안맞을 수 있겠지만 그런 책들이 너무 많아져서 이 고개? 를 한번 넘겨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요즘이네요 ㅎㅎ
+ 경영 마인드를 보고 끌렸는데 왜 마라톤책을 들었나 ?
그 브랜드에서 여성옷 라인을 잘 하는데 남성복도 멋지지 않을까 ? 혹은
멋진 내가 좋아하는 명품 브랜드에서 새롭게 호텔를 오픈한다는데 그것도 내맘에 드는 요소들이 좀 있지 않을까 ?! 라는 넓은 차원의 생각이었어요 히히
저의 생각은 단순히 그 책이 안 맞는거라고 생각함. 저도 하루키 책 중에 인생책이 있는 반면 이 책은 도대체 뭔 소리야 하면서 읽은 책이 있거든요. 모든 책이 나와 맞을거란 것도 지극히 당연히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까 생각해 봅니다
제가 그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온갖 찬사를 지식인들에게 받는 작가는 그러한 내용들이 결국 큰 하나의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더라구요.
하루키 재즈바의 경영철학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를 읽는 게 잘못된 접근이라 의문이 드시는 것 같습니다.
하루키는 젊어서 재즈바를 경영했었고 그 틈틈이 글을 썼습니다. 그때 운영하던 것들에 대한 것들에 끌리셨다면 오히려 하루키의 초기작들을 읽는 게 더 도움이 되실 겁니다. (추천드리자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 더 깊게 알고싶다면 소설 쓰기 전에 하루키 생활이나 생각에 대한 것들을 찾아보는 게 알맞죠.
근데 이 책은 하루키가 소설가가 되고 나서 글을 쓰기 위해 루틴이 필요하다고 깨닫고, 달리기를 하기 시작한 후의 에세이입니다. 그러니까, 그 책에 담겨있는건 (부분적으론 재즈바 운영하던 20대 하루키도 있겠지만) 소설가로 삶을 사는 하루키의 생각들이 담겨있습니다.
틀린 방향으로 들어와 읽으니 왜 내가(재즈바 운영 하루키에 대해 궁금한 내가) 이 책(소설가로 살아가는 사고방식의 하루키의 글)을 읽지?라는 의문이 드는거죠.
우선 원래 의도에 맞는 하루키 초기작들을 읽고나서 적어주신 의문들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될 것 같습니다.
그럼 그냥 다음책으로 넘어가시면 되고 나중에 달리기를 하시는 상황이 생기게 되면 책장에 있는 하루키의 책이 나를 부르고 있다는걸 느끼실 수 있습니다ㅎ
달리기를 말할때 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외 하루키의 여러 에세이들은 이게 하루키라서 책으로 펴낼 수 있는거지, 다른 작가였으면 출판사에서 빠꾸놨겠다 싶은 글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냥 가볍게 재미로, 그와중에 간간히 나름의 통찰을 얻는 맛으로 읽습니다.
문학 전반으로 확장해서 예기한다면 타고난 감수성이나 예민함, 독서 경험의 차이로 당연히 개인마다 감상의 방향이나 질이 다를 수 있습니다.
소설가 니들보다 철학자인 내가 픽션을 더 잘 쓴다는 걸 보여줄게. -밀란 쿤데라
책은 좋은 장작이기도 함 ㅋㅋㅋ
정말로 문학이 노멜상을 수상했네요 ㅜㅜ
예수님의 황금법칙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장 12절
저 같은 초짜한테는 너무 어려운 내용이라 이해가 잘 안가요. 좀 쉽게 설명이 가능한 영상도 올라왓으면 합니다. ㅠㅠ
한마디로 쿤데라가 본 시대의 소설은 엄근진해서 쿤데라 소설 같은 유머와 희극 재미가 없다 ,
제목부터가 농담. 무의미의 축제죠 유머를 겸비한 소설이 쿤데라죠
우열을 가리지 좀 마라. 학문이라는거 자체가 권력이고 우위에 있으려는 행위이다. 명제적 지식이 결코 암묵적, 절차적 지식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
철학으로 살아야..
문학이 철학보다 대중에게 다가가기 쉬운 언어라서 그런거같아요
아무래도 어떤 가치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는가 아닌가는 꽤 중요하니까요
칼 마르크스도 기존 철학자를 비판할때 너무 현학적이고 자기들만의 리그로 논다, 세계로 적용하고 변혁에 직접 동참해야한다고 했죠
니체가 문학으로 철학을 세계에 적용하는 현명한 사람인것 같네요😊
때로는 철학보다 더 넖고 깊은 사유의 언어로 오히려 철학보다 난해해 다가가기는 힘들지만 존재의 본질을 보여주는 생명수같은 소설이 많습니다.
뭘 그리 구분 짓나. 소설가 정도면 이야기푸는 철학자다
개추
엄마나이상형 만났어ㅜ나처럼 뇌로섹스할줗 아는남자같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ㅁ
현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인 줄 알았는데 왜 아직도 시스템과 합리에 매몰되어 있을까요
탈구조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신가 보네요 😅
@@박태수-n1w 그러면 탈구조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매몰돼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근데 왜 여전히 근대 모더니즘에 갇혀있는 걸까요? 전자는 제 생각엔 현대예술인데, 후자가 왜 문학에서, 일상에서 드러나는 걸까요? 인간소외나 기후변화같은 모더니즘적 문제도 그대로고요.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디까지나 세계가 사각형의 틀이라면 그 틀에서 큰 덩어리들과 작은 부스러기들이 있다고치면 작은 부스러기를 주로 탐구하고 큰 덩어리를 비판하고 해체하며 재검토하는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부스러기들을 현시대에 걸맞는 요구만큼 필요만큼 충분히 탐구하고 확대하고 비율을 키우고 때로는 부스러기가 아니라 덩어리의 가능성인데 우리가 놓친것이었다면 그것을 충분히 키우고 하는 등의 가능성의 탐구에 대한 것이니까요. 오래된 시스템과 합리 속에 여전히 인류가 믿는 근본적인 가치들은 그대로 녹아들어있어서 그렇죠. 다만 시스템이 낡았는데도 혁신을 못해서 그렇지. 우리는 여전히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공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다음단계로 가려면 아직 멀었죠.
다 흥미로운 문답이네요ㅎ 다 수긍하며 의견 제시 안하도 될꺼같습니다. 동감하는 바 입니다
철학이 무력하다
또 철학이 삶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참 건방진 소리군요
그건 당신이 당신 자신 안에서 소크라테스의 다이몬과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를 직접 자신의 내면에서 그것의 의미를 찾지 못했고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철학과를 전공으로 했으니
많이 읽고 그들이 주장하는 그 허망한 논리에만
그 뜻을 찾아 헤매기만 했겠죠
마치 소크라테스를 배우려는 젊은이들 대부분이
그의 논리법만 배워 사람들을 골탕 먹이려는 데
치중했듯이
마치 예수의 말과 논리를 빌어먹으며
교묘하게 신자들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게 하는 것에 치중하는 그들처럼
그러나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껍데기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다이몬이라는 신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모든 생각과 행동을 그것에 뜻에 따르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그 뜻에 따르며 살아오기만 했더니 법정에 서게 됐다고
변론을 통해 말했습니다
그 다이몬 그 내면의 신성한 다이몬
모든 것을 자명하게 따지기를 좋아했던
소크라테스가 자신은 그저 다이몬의 소리가
내가 무슨 행동을 하려 하면
내면에서 하지 못하게 울리고
어떤 일에 대해서는 하라고 울리고
너 자명해?
라며
계속 내면에서 울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다이몬과
합리적 추론이라고 할 수 있는 삼단논법이
같이 병행되는 사유를 하고 행동을 했기에
2000년이 넘는 그 빛으로 철학이 그 뿌리에서 자라났던 겁니다
(설마 탈레스나 피타고라스와 아낙사고라스 같은 사람들을 들먹이며 그들이 철학의 시조라고 하는 진부한 말을 하지 않으실 거라 믿겠습니다
그들은 추상적이고 현학적이고 신비스러운 말들이 가득했고
또 부분적 자명함은 있었지만 인간이 어떻게 살다가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길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살다가야 한다를 소크라테스가
제시했기에 거기서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픽테토스 마르쿠스아우릴레우스 같은 열매들이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단순히 이론에서 머무는 것이 아닌
내면에서 울리는 그 다이몬의 소리
동양에서는 우리의 양심의 본체를 사단으로 표현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그 소리가 무엇인지 선정이나 명상을 통해 끝까지 추적하여 그것에 통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도 아고라 광장에서 명상에 들면
그 다음날 아침까지 서있는 체로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불교의 정혜쌍수 역시 똑같은 말입니다
그것에 통했으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통해 늘 그것과 함께 흐르며
(소크라테스가 늘 다이몬과 함께하듯
마하리쉬 늘 참나 와 함께하듯
퇴계 선생이 늘 (경) 안에서 거하듯
이제 그것과 함께 행동과 언어와 생각과 같은
우리 물질계 차원을 닦아 나가야 합니다
그게 4대 성인들의 공통된 행보였습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진리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우리 인간 모두가
그들의 가르침을 통해 성을 통하고 자신을 닦아갈 수 있다면
모든 인간문제는 그것으로 다 풀릴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로 철학은 언어와 단어와 문장에 있지 않습니다
꼭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무엇이 늘 변하고 허망한 것인지
무엇이 늘 그대로 있는 알아차림인지를 본인이 직접 걸어들어가야
본인이 지금까지 배운 모든 철학들이 살아 움직일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도의 그 회의감이 풀리고 자유가 올 것입니다
나아가 본인이 이번 생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목적의식도 생길 것입니다
그 일원성의 자리는 본인의 내면에 있지
절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이미 충코님의 지식은 충분합니다
거기서 더 배워도 더 얻을 것은 없을 것입니다
꼭 자신의 내면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길을 걸으시길 기원합니다
꽉막힌 타인은 지옥이다 😅
님의 댓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뭔가 온전치 못한 반쪽짜리 사고방식에 매몰된것 같아요.
님 댓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영상을 보면 뭔가 온전치 못한 반쪽짜리 사고방식에 매몰된거 같아요.
배부른 소리 그냥 배부르면 하는소리야 혼자 많이 읽으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