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유학 당시에 일반 음식부터 시작해서 컵라면까지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게 정말.. 컵라면 새벽에 먹고 냅뒀는데 다음날 기름이 벽에 굳어서 원형을 이루고 있을때는 진짜 놀람.. 게다가 귀국하기 전에 기차여행 한번 해보자 했는데 도시 벗어나면 우리나라 시골보다 더 깡시골이고.. 버스 타다가 크로스백 뒤쪽 주머니 약봉지 털린것도 놀람. 택시 역주행이나 공안부장이랑 잘 안다고 깝치니까 통화후 걍 보내주는 것도 놀랐고..
명나라는 아무래도 몽골의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생각됩니다. 몽골의 유습을 배격하였지만 은연중에 잔인한 풍속이 많이 생겼죠. 주원장이 승상제를 없애기 전에 임명하였던 재상들을 처형한 것을 보면 정말 잔인하기 이를데가 없어요. 꿀을 발라서 숲에 버려 파리와 모기에게 뜯겨 죽이지 않나... 무협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동창이나 금의위들의 잔인한 즉결 처형도 그때 생겨났죠. 송나라에서 굉장한 기술과 인문주의적 형벌제도의 전통이 생겼는데 몽골의 지배는 그런 싹을 잘라낸 계기가 되었다는 것....그런 면에서 조금 아쉽죠.
성호사설에 따르면 하루는 천장이 계두(桂蠹)를 바쳤는데, 이는 바로 계수나무 속에서 생긴 좀벌레로서 빛깔은 붉고 맛은 맵고 향기로웠다. 남월왕(南越王)이 중국에 공물(貢物)을 바칠 때 비취(翡翠)는 40쌍까지 바쳐도 계두는 겨우 한 그릇 밖에 바치지 않았다 하니, 그 계두란 희귀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 주상(主上)은 오래도록 주저하고 젓가락 대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라고 하는데 선조가 결국은 먹은건가요?
송나라 때는 수천년전부터 먹던 날생선요리들을 먹었다고 기록되었는데 원나라의 포악한 정치를 많은 문화가 없어지거나 몽골을 통해 역수입되었어요. 아직까지 채소마저도 날것으로 먹기를 좀 꺼려하는 수준까지 됨. 순장문화의 재도입, 홍치제가 공식적으로 없앤 고려양 한복도 원나라 때 인기를 얻은 패션이다가 나중에 없앤다고 했지만 그래도 입을 사람들은 입고, 또는 없앤다고 해도 한족의 전통인 "상의하상" 대신 북방민족(+한복)인 "상유하고" (저고리와 바지) 그 영향은 남아있게 되었죠...
@@garangbii 그래도 이등체강의 이치로 중원의 황제 (그게 당나라 선비족, 금나라 여진족, 원나라 몽골인, 청나라 여진(만주)족 그 누구가 중원을 먹었던 간에)와 황태자 다음 계급으로 쳐주던데, 명나라 입장에서도 가만보니까 조선임금의 계급은 인정하는데 선조 개인의 품성을 좋게 보진 않고 오히려 기록에 따르면 이순신이 선조보다 계급 높아질 뻔한 적도 있었다고 함. 정유재란 이유 중 하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직후 명나라와 조선 사신단 앞에서 단령 입고 일본국왕으로 책봉받고 조아리는데 이제 옛날처럼 짭짤한 조공무역해도 되냐고 여쭙자 명나라는 “니깟게 조공은 무슨, 빨리 조선땅에서 철군하라” 라고 면박을 주자, 국제적 체면은 다 구겨놓고 대가로 얻어놓은 거 하나도 없자 동일본 도쿠가와에게 쳐발릴 일만 남아서 발악한 거. 예전에 도쿠가와에게 이미 싸우지말고 내조하라고 압박 줄때 먼저 안전보장차원에서 볼모로 히데요시가 자기 어머니와 이복누나를 도쿠가와에게 줬는데, 몇년 뒤 히데요시 입장이 난처해지니까 오히려 진짜 인질될 상황이 됨. (볼모와 인질의 차이는, 먼저 주는 사람이 요구를 하느냐, 데리고 있는 사람이 요구를 하느냐의 큰 차이임. 이건 나당연합에 없어진 백제도 이랬음) 임란 직후 동일본 도쿠가와 세력이 먼저 조선에 접촉한 것도 지금 일본은 동서세력으로 나뉘어 먼저 조선으로부터 국제적으로 일본유일 합법정권으로 인정을 받아 내부적으로 결속을 다지려고 한 겁니다. 히데요시 정유재란도 단령 입고 ‘일본국왕’으로 책봉 받고 저자세로 숙인 대가로 옛날처럼 중국에 조공(무역)할 수 있게 요청하더니 ‘조공은 무슨. 그냥 조선에서 빨리 철군하라’라고 답이 돌아오자 화난 이유도 한몫했습니다. 도쿠가와가 집권한 뒤, 조선에서 이제까지 ‘장군’이라 부르던 걸 격상시켜줬는데 그래봤자 조선에서 일개 왕자의 칭호인 “대군”으로 불렀습니다. 나중에 아라이 하쿠세키가 ‘일본국왕’으로 격상하라고 항의하지만 묵살됨. 애초에 임란초 서울까지 쉽게 가던 것도 수백년 조공길을 익혀서 그런 거고 (전국시대 사방이 적이라 일본에서 할 수 없는 ‘임금의 피신’에 놀라 왜군의 속전속결 전쟁 계획이 다 틀어짐. 프랑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때도 알렉산드르1세가 ‘베링해까지 따라와봐라’고 수도를 버리더니 나폴레옹이 패배함. 미국 1812년 영미전쟁 때도 매디슨 대통령 일가가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고 영국군이 백악관을 불태움. 그런데 이들 나라에서는 아무도 문재삼지 않고 잘했다고 칭찬함. 그런데 식민사관에 찌들어 이걸 문제시하고 침소봉대하며 호들갑 떠는 놈들이 많아서 문제) 그래서 훗날 통신사 때는 일본측 사절단은 부산쪽 왜관에만 머물러야했던 반면 조선에 사신단에겐 내해까지 다 둘러볼 수 있게 됨. 그리고 조선에서는 일개 왕자인 대군으로 부름 (아라이 하쿠세키가 이거 가지고 너무 낮춰부른다, 일본국왕이라고 부르라고 했다가 이듬해에 쇼군이 죽어 실각해버려 없던 일이 됨)
선물이라고 음식이 각 나라에 대한 존중이 있었다면야 비위가 덜 한걸 보냈을듯 그런 음식만 있었겠음? 자기들보다 위니깐 장군이 왕에게 권하는거고 자기들 딴에서는 우린 예의를 지켰다 귀한걸 보내줬다 포장하면서 우위에 있다는걸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지금도 중국에선 한반도의 역사에서 일어난 것은 다 중국사에 포함되는 밑 변방국가의 역사라고 생각함
돈 많으세요? 조선에서도 첩을 둘 수 있으려면 남자가 양반이거나 돈이 많아야 했지요. 현대에서 여러 여자 데리고 살려면 당연히 그 많은 자식들에게 물려줄 유산이 많으면 여자들이 돈 보고 그냥 살겠지만 돈도 없으면 남자는 부인 한 명도 못 구하는 일이 다반사... 지금도 일부일처 해도 돈 없으면 결혼하기 어려운데 일부다처까지 하면 흠...
사실 그당시까지만 해도 나눠줄 토지가 충분했었거든요. 조선중기 쯤 들어가게 되면 나눠줄 토지가 부족하게 되는데 그 토지를 균등하게 자녀들에게 나눠줄 경우 "양반"이란 신분제 자체가 흔들리게 되다보니 그 신분제를 유지하고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서 장자에게 재산을 몰아주기 시작한 거라고 해요. 그러면서 양반가에서 일부다처제가 시작된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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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남겨주셨던 분들에게는 정말 죄송합니다.
바보킴
또보고 좋죠 뭐 ㅎ
@@노해민-w7y
진정한 문화 충격을 보여주고 싶으셨ㄷ...읍읍!
여러분들이 남겨주신 실제 겪은 문화차이에 대한 댓글들이 정말 재밌었는데 아쉽네요
사랑해요 파파킴 역사
우리로서는 이게 진정한 문화 충ㄱ...읍읍!
🖤🖤🖤
@@re8939 파파김 아니쥬 퍄퍄김 맞습니다~
@돌멘 파파김 아니쥬 퍄퍄김 아니쥬 퍄퍄킴 역사 맞습니다~
핵심은 상대에게 악심을 품었냐 선심을 품었냐의 차이지.. 악심을 품고 주는 소고기는 독이지만, 선심을 품고 주는 기피식품이라면 그건 기피식품이 아니라 선물임. 모든것은 마음을 어떻게 먹냐에 따라 다른것이다.
결국 서로의 다름을 존중해주는게 중요하다는거군요
중국 유학 당시에 일반 음식부터 시작해서 컵라면까지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게 정말..
컵라면 새벽에 먹고 냅뒀는데 다음날 기름이 벽에 굳어서 원형을 이루고 있을때는 진짜 놀람..
게다가 귀국하기 전에 기차여행 한번 해보자 했는데 도시 벗어나면 우리나라 시골보다 더 깡시골이고..
버스 타다가 크로스백 뒤쪽 주머니 약봉지 털린것도 놀람. 택시 역주행이나 공안부장이랑 잘 안다고 깝치니까 통화후 걍 보내주는 것도 놀랐고..
2:44 이것이 손가락 욕 "박유"의 시작이...아 아닙니다
나라마다 가깝든 멀든 간에 문화를 접하면 색다른 느낌이 나면서 신기하고 놀랍고 충격받을 듯
나중에 이해가 되거나 비슷한 게 있으면 교류하고 배우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 것 같습니다.
재업로드가 떠서 봤더니 실수로 삭제하는 바람에 재업로드 했군요.
정보) 조선은 단 한번도 일부다처제였던 적이 없음.
법으로 보호하는건 정실 부인이고 첩은 아무때나 내쳐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함.
그리고 이것은 왕도 예외는 아니어서 중전은 단 한명, 후궁은 첩이었음.
일부다처랑 축첩제랑은 다르지. 기본적으로 처와 그의 자식의 상속권이 있지만, 첩과 그의 자식은 상속권이 없음.
상속권을 갖는 자식이 많아질수록 가문의 부와 권력이 줄기 때문에, 가문의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 상속권을 갖는 자식은 한정시킬 수 밖에 없음.
그렇다고 일부일처도 아니죠. 고려 때만 해도 처첩제는 금지되었습니다. 조선은 사실상 일부다처제이면서 처와 첩을 차별했던 악질적인 국가입니다
그냥 사실상 묵인한것 아닌가?
정확히는 일부일처다첩제
첩에겐 처만큼의 존중을 해주지 않았고 가난한 집에선 먹는 입이라도 줄이자고 돈 몇푼에 딸을 물건 팔듯 팔아치우는 일이 많았음 그리고 가난한 남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장가갈 수 없었고...
첩은 아내가 아니라는 궤변을;;
명나라는 아무래도 몽골의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생각됩니다. 몽골의 유습을 배격하였지만 은연중에 잔인한 풍속이 많이 생겼죠.
주원장이 승상제를 없애기 전에 임명하였던 재상들을 처형한 것을 보면 정말 잔인하기 이를데가 없어요. 꿀을 발라서 숲에 버려 파리와 모기에게 뜯겨 죽이지 않나... 무협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동창이나 금의위들의 잔인한 즉결 처형도 그때 생겨났죠.
송나라에서 굉장한 기술과 인문주의적 형벌제도의 전통이 생겼는데 몽골의 지배는 그런 싹을 잘라낸 계기가 되었다는 것....그런 면에서 조금 아쉽죠.
몽골에도 인신공양은 없습니다.주원장이 마교출신이라 그런거겠죠.
몽골때문에 몽골에 침략받은 나라들은 모두 보수적이고 엄숙주의 생김 한국이랑 중국도 마찬가지고 외국 대표적인 예가 이슬람.........
그 외에도 송나라 때는 수천년전부터 먹던 날생선요리들을 먹었다고 기록되었는데 원나라 거치고 다 없어졌어요. 아직까지 채소마저도 날것으로 먹기를 좀 꺼려하는 수준까지 됨.
성호사설에 따르면
하루는 천장이 계두(桂蠹)를 바쳤는데, 이는 바로 계수나무 속에서 생긴 좀벌레로서 빛깔은 붉고 맛은 맵고 향기로웠다. 남월왕(南越王)이 중국에 공물(貢物)을 바칠 때 비취(翡翠)는 40쌍까지 바쳐도 계두는 겨우 한 그릇 밖에 바치지 않았다 하니, 그 계두란 희귀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 주상(主上)은 오래도록 주저하고 젓가락 대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라고 하는데 선조가 결국은 먹은건가요?
원래 옛날 책들이 다 애매모호하게 쓰여져 있어서 해석을 잘 해야 하는데 올리신 글만 놓고 보면 계두를 즐겨하지 않았다니 억지로라도 한 두숟가락은 먹었을 겁니다
즐겨 하지 않았다 = 딱 한 번 해보기는 했지만 그 뒤로는 손도 대지 않았다.
젓가락대는 것을 즐기지는 않았다. 라고 해석됨.
아예 안먹는건 외교적 결례라 즐겨하지 않았다는 건 한두입 맛만 보고 더 먹진 않았다는 의미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진정한 문화 충격은 재업로ㄷ...읍읍!
조선시대 명나라 사신들이 와서 선비들이랑 같이 술자리 하는데 물고기 회랑 산낙지 먹는거 보고 충격받았다고 한거 생각나네ㅋㅋㅋ
송나라때 역병이 돌면서 중국에선 익히지 않는 음식 즉 회를 먹는 문화가 사라짐
그러면서 자기들은 원숭이 뇌랑 갓 태어난 새끼쥐도 먹음서...
@@Yoúmushin인디아나 존스에서나 나오던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 우리나라도 우환이나 멍멍이 등 다른나라에서 보면 기겁할만한거 많이 먹져. 먹는거 가지고 뭐라하진 맙시다.
송나라 때는 수천년전부터 먹던 날생선요리들을 먹었다고 기록되었는데 원나라의 포악한 정치를 많은 문화가 없어지거나 몽골을 통해 역수입되었어요. 아직까지 채소마저도 날것으로 먹기를 좀 꺼려하는 수준까지 됨.
순장문화의 재도입, 홍치제가 공식적으로 없앤 고려양 한복도 원나라 때 인기를 얻은 패션이다가 나중에 없앤다고 했지만 그래도 입을 사람들은 입고, 또는 없앤다고 해도 한족의 전통인 "상의하상" 대신 북방민족(+한복)인 "상유하고" (저고리와 바지) 그 영향은 남아있게 되었죠...
그래도 선조는 꾸역꾸역 먹기라도 했는데 이여송은 아예 입에도 안 댔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더 아쉬운건 선조긴함ㅋㅋㅋㅋ 아 안먹으면 나라망한다고 ㅋㅋㅋ
그러게요. 이여송 선조가 고려사람이면서 말이죠
선조: 이거 우리는 못 구해서 못 먹는데...
이여송: 이건 대체 어떻게 먹는 겁니까?
@@garangbii 그래도 이등체강의 이치로 중원의 황제 (그게 당나라 선비족, 금나라 여진족, 원나라 몽골인, 청나라 여진(만주)족 그 누구가 중원을 먹었던 간에)와 황태자 다음 계급으로 쳐주던데, 명나라 입장에서도 가만보니까 조선임금의 계급은 인정하는데 선조 개인의 품성을 좋게 보진 않고 오히려 기록에 따르면 이순신이 선조보다 계급 높아질 뻔한 적도 있었다고 함.
정유재란 이유 중 하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직후 명나라와 조선 사신단 앞에서 단령 입고 일본국왕으로 책봉받고 조아리는데 이제 옛날처럼 짭짤한 조공무역해도 되냐고 여쭙자 명나라는 “니깟게 조공은 무슨, 빨리 조선땅에서 철군하라” 라고 면박을 주자, 국제적 체면은 다 구겨놓고 대가로 얻어놓은 거 하나도 없자 동일본 도쿠가와에게 쳐발릴 일만 남아서 발악한 거. 예전에 도쿠가와에게 이미 싸우지말고 내조하라고 압박 줄때 먼저 안전보장차원에서 볼모로 히데요시가 자기 어머니와 이복누나를 도쿠가와에게 줬는데, 몇년 뒤 히데요시 입장이 난처해지니까 오히려 진짜 인질될 상황이 됨. (볼모와 인질의 차이는, 먼저 주는 사람이 요구를 하느냐, 데리고 있는 사람이 요구를 하느냐의 큰 차이임. 이건 나당연합에 없어진 백제도 이랬음)
임란 직후 동일본 도쿠가와 세력이 먼저 조선에 접촉한 것도 지금 일본은 동서세력으로 나뉘어 먼저 조선으로부터 국제적으로 일본유일 합법정권으로 인정을 받아 내부적으로 결속을 다지려고 한 겁니다. 히데요시 정유재란도 단령 입고 ‘일본국왕’으로 책봉 받고 저자세로 숙인 대가로 옛날처럼 중국에 조공(무역)할 수 있게 요청하더니 ‘조공은 무슨. 그냥 조선에서 빨리 철군하라’라고 답이 돌아오자 화난 이유도 한몫했습니다. 도쿠가와가 집권한 뒤, 조선에서 이제까지 ‘장군’이라 부르던 걸 격상시켜줬는데 그래봤자 조선에서 일개 왕자의 칭호인 “대군”으로 불렀습니다. 나중에 아라이 하쿠세키가 ‘일본국왕’으로 격상하라고 항의하지만 묵살됨.
애초에 임란초 서울까지 쉽게 가던 것도 수백년 조공길을 익혀서 그런 거고 (전국시대 사방이 적이라 일본에서 할 수 없는 ‘임금의 피신’에 놀라 왜군의 속전속결 전쟁 계획이 다 틀어짐. 프랑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때도 알렉산드르1세가 ‘베링해까지 따라와봐라’고 수도를 버리더니 나폴레옹이 패배함. 미국 1812년 영미전쟁 때도 매디슨 대통령 일가가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고 영국군이 백악관을 불태움. 그런데 이들 나라에서는 아무도 문재삼지 않고 잘했다고 칭찬함. 그런데 식민사관에 찌들어 이걸 문제시하고 침소봉대하며 호들갑 떠는 놈들이 많아서 문제) 그래서 훗날 통신사 때는 일본측 사절단은 부산쪽 왜관에만 머물러야했던 반면 조선에 사신단에겐 내해까지 다 둘러볼 수 있게 됨. 그리고 조선에서는 일개 왕자인 대군으로 부름 (아라이 하쿠세키가 이거 가지고 너무 낮춰부른다, 일본국왕이라고 부르라고 했다가 이듬해에 쇼군이 죽어 실각해버려 없던 일이 됨)
상궁&나인: 오히려 좋아
일부다처제의 반댓말은 모두안전제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데자뷰 느껴본적 있어?
그렇소 지금도 느끼고 있구먼
새로운 구독자는 언제나 환영이야!
작은 고추가! 애썼어~
저번주에 본것만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어디서 본것만 같아
2:38 그 손가락이 혹시 중지가 아니였나요? ㅋㅋㅋㅋㅋ 박유! 하면서?
배우자가 젊고 자식이 어릴때는 알콩달콩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웬수잖아.
일부다처의 현실은 웬수가 곱배기로 늘어나는 것이 아닐까.
일부 다처면 사실 상 시간이 지나면 1~2명 하고 지내고 나머지는 병풍처럼 변함.
일부다처 하면 알콩달콩한 시간만 쏙 빼먹고 웬수되면 바로 버리고 새로운 알콩달콩을 구하는거임.
요즘 사우디같은데서도 일부다처 빡세다고 집에 와이프가 셋이라니 으악 이러면서 자기들이 알아서 뭐라 하더라. 정상적인 인성을 소유하고 있다면 일부다처는 피곤하기만 하지...
@@ryu9s13 게다가 이슬람 율법에서 모든 와이프를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규율이 있어서 재산을 분배하는 것도 엄청난 골머리일거임.
@@dri13829 이슬람의 일부다처제는 율법상 모든 부인을 똑같이 대해야 한다든 내용이 있어서 그렇게 할수가 없음 ㅋㅋㅋ
고양이가 고마움 표시로 벌레 대령하던 거 생각나네요 ㅋㅋ 크라켄요리로 복수!!
감사드리며 환절기 건강하시길........
진짜 순장 풍습은 멈춰야됩니다 ㅠㅠ 산 사람을 죽여서 묻는다니...
동천왕이 진짜 사람이 좋긴 좋았나보다
근데 캐릭터들이 너무 귀여움ㅋㅋㅋㅋ
와!
일본의 사 무라이라이차차차 사무라이님께선 소년들과 사무라이애를 하시는걸 즐기셨으니 여간 기합이 아니었다!
새끼... 부시도!
사무라이의 전우애! 아련한 노딱의 추억이여!
사쎄이...기합!
@@pq6543 앆! 사 무라이정신으로사무라이애실시해라사쎄이 사무라이님!
따흐흑.. 황-근추르 카이헤님...
문어 내주고 흐뭇해하는 선조 왤케 귀엽게 그리셨어요ㅋㅋㅋ
고양이들,,, 너무 이뻐요~~ ㅎㅎ
아이고 조상님
몽골 사람이 “새우”를 보면… 벌레라고 생각해서 안먹는다고 합니다.
깜짝 놀랐는데, 별일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선물이라고 음식이 각 나라에 대한 존중이 있었다면야 비위가 덜 한걸 보냈을듯 그런 음식만 있었겠음? 자기들보다 위니깐 장군이 왕에게 권하는거고 자기들 딴에서는 우린 예의를 지켰다 귀한걸 보내줬다 포장하면서 우위에 있다는걸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지금도 중국에선 한반도의 역사에서 일어난 것은 다 중국사에 포함되는 밑 변방국가의 역사라고 생각함
1:25 "일부" 사람들이 "일부"다처를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그렇구나
우마:오늘의 컨텐츠 중국 황제가 먹던 계두 먹기!!!!!!!!!
일부다처제는 1960년대에도 아직 남아있었음
어?? 왜 재업이..
으잉 재업?
1:35 박유? 박규? fxxk.......
03:54 고구려는 황제국이기 때문에 전하라고 표현하면 안 되지 않나.
정상적인 것이 아니고 가통(家統)을
끊어서 천생연분을 살생한 겁니다.
고려 시대의 사상범 쯤 되겠네요.
항상 일부일처가 법도입니다.
당시에 ‘가명(家名)’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시대의 뜻이 있었습니다.
2:36~
박유의 의안은 뻑유 됐다지 아마..??
계두 벌레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싶은데 검색해도 안나오네요
박유 이름부터 문화충격이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법규 ㅋㅋㅋㅋㅋ
고려 여인들 아주 현대적~
일부다처제는 문란 그 자체
박공께서 큰 뜻이 계셨거늘..
돈 많으세요? 조선에서도 첩을 둘 수 있으려면 남자가 양반이거나 돈이 많아야 했지요. 현대에서 여러 여자 데리고 살려면 당연히 그 많은 자식들에게 물려줄 유산이 많으면 여자들이 돈 보고 그냥 살겠지만 돈도 없으면 남자는 부인 한 명도 못 구하는 일이 다반사... 지금도 일부일처 해도 돈 없으면 결혼하기 어려운데 일부다처까지 하면 흠...
뭐..뭐지? 분명 며칠 전에 올라온거 같은데 뭐지?
선조 나름의 보복이였네요 문어 대접은. ㅋㅋㅋㅋㅋㅋㅋㅋ
본인은 나름대로 귀한 음식 대접하는 거였지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데뷰자!!!!!!
깨알 만력제😂
추리닝입은 백수 만력제 깨알같네ㅋㅋㅋㅋ
옛날에 임진록 그 아동 도서용? 가기서 본건데 선조가 대접한게 산낙지였다고...ㅋㅋㅋ
악의없는 엿맥이기😊
복습
그래서 이여송하고 선조 뒤에 어떻게 됐어요??
순장이나 인신공양 같은거 보면 기독교나 유교가 고등종교이긴 하구나 라는 생각이 듬.
만화 '히스토리에' 나오는 유명한 명언 '문화가 달라'
한 사람이 둘 이상과 결혼할 수 있을때 사회 혼란은 상당합니다
보통 이런 곳에 불만을 품은 젊은 남성들이 엄청난 사회 혼란을 야기해요
재업!
이여송만 먹지 않았군..
일부다부제와 일처다처제는 없나요?
아이를 못만들어서 전근대에는 없었습니다
@@nosaster 동성끼리 아이를 못 만든다는건 '편견' 아닐까요?
@@송이버섯-k6q 게이게이야...그런거는 일본에서 찾아라 게이야...거기 사무라이들은 소년들과 사무라이애 실시! 했으니
@@송이버섯-k6q 그걸 편견이라 생각하는건 편견이 아닐까요?
@@멈뭄미-b5h 게이가 동성애자라는건 '편견' 아닐까요?
도르마무??
근대 고려때 지방에 부인한명 한양의한명 두지않았나?
???:"박유에게 빡유를 날렸다"
문어가 얼마나 맛있는데
현재 흙수저들의 남성들은 결혼 못하는것을 상기시켜주네요.
ㅇㅇ 한국 여자들이 성매매를 요구하는데
흙수저 남자들은
이 성매매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음...
흙수저 차은우 vs 금수저 유병재->닥 차은우
2:43 고려여자들 상여자였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김치의 패악질은 김치가 없던 시절부터....
근데 외척 발호 막으려면 순장이 맞지않나 긴역사에 노파 10년20년 더 사는게 뭔 의미고
퍄퍄??
고려 시대 까지만 해도 남녀 지위가 거의 동등했다고 하죠😂
저자가 Park you 다
사실 왕의 수라상에 벌레 알이 올라온 적이 있다고 함.
지금이라도 도이ㅂ...
??? : 00월 00일 000도읍지 근처에서 한 남성의 싸늘한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목에는 지문이 남아있었는데, 분석 결과 5~60십대 여성의 지문으로 판명났습니다.
와 썸네일보고 저거 내가 본거같은데..? 하고 데자뷰현상인줄 알았네요 ㅋㅋㅋ
하필 이름이 박. 유. 였군..
이여송 입장에선 자기는 황제가 먹는 음식도 싸들고와서 대접한건데, 조선왕은 크툴루 촉수 삶아온거자나ㅋㅋㅋㅋ 억울했을거같은데?
박유 ㅋㅋㅋㅋ
일부다처제를 하고싶거나 어디가 다처지고싶은듯ㅋㅋ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고봉밥그릇 먹는다면 들고 못먹는다 ㅋㅋ
저는 번데기, 문어 다 싫어하고 선물이 싫으면 안 받음.
아 일부다처 마렵다~
여자들도 제발 일부다처 ..능력있고 잘생긴 100번째 첩이라도 좋아 ㅋㅋㅋㅋㅋㅋㅋㅋ
@@hhhytd 정보) 일부다처제는 한 명의 남성이 여러 명의 여성을 아내로 두는 제도
쌍방딜 넣었는데 선조는 먹었는데 이여송은 안 먹은 게 웃기네
문화 라는 단어만 봐도 크킹 땡김 ㅋ
동천왕이 인성 좋다고 배웠지만 어떤 인물이길래 스스로 순장을 자원하면서까지 단체로 죽냐..
당시엔 아직 지도자를 신성시했던 걸 감안해도 성군이었음은 확실하겠죠
우리도 일부다처제 하면 저출산 문제가 해결될지도...^^
불교에서는 사음(아내나 남편이 아닌 자와 하는 음탕한 짓)을 금지하는데요. 이는 불교의 십악 중 하나입니다.
혼전순결? 지키라는 뜻 아닐까요.
결혼한 상대 아니면 성관계 하지 말라는거.
이 나라 왕은 벌레를 먹어줬는데 문어를 한입도 안먹네 쓰벌 ㅋㅋ
사운드가 이상해요
요즘은 여자들 티비에서 연예인.재벌 첩이되는게 더 났다고 하던데
군무원의 역사역할이야기해주세요 41트
문어를 못 먹는다는건 인생의 즐거움을 잃어버린다는것...
고려 여인들이 박유에게 박유를 날렸겠네
노파가 박유에게 손가락질하며 "박유! 박유!"라 외쳤고. 이는 훗날 팍유 > 퍽유 로 변질되며 현재의 욕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부다첩이겠지...
고려 조선 보다 나은 거
일부다처 지지한다
박유 선생님 말대로 했으면 한민족은 더 번성했을 것이다. 요즘 프랑스에서 혼외자 지위 상향해주는 것과 같다.
사실 그당시까지만 해도 나눠줄 토지가 충분했었거든요. 조선중기 쯤 들어가게 되면 나눠줄 토지가 부족하게 되는데 그 토지를 균등하게 자녀들에게 나눠줄 경우 "양반"이란 신분제 자체가 흔들리게 되다보니 그 신분제를 유지하고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서 장자에게 재산을 몰아주기 시작한 거라고 해요. 그러면서 양반가에서 일부다처제가 시작된거고요.
오빠. 그러다 다쳐.
전 희안하게 생각하는건 유럽에서는 나이에 관계없이 이름 대놓고 부르며 친구하는게 참 신기하고 이상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