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역 폭발사고 자막이 인상적이네요 이영무 기도도 인상적이고.. 한때 버마가 참 잘했고 말레이시아도 꽤 인상적이었었죠 중동에서는 특히 쿠웨이트가 이 시점 이후로 굉장히 강해졌었던걸로 기억되네요 북한도 이때는 우리의 라이벌이었었는데 일본 축구는 우리보다 한참 아래였구요 참 그리운 시절입니다
@@이재현-l7m 그럼요. 73년에 예선 여름에 호주원정, 차범근이 단독찬스 놓치고 아쉬워하는 표정, 아직도 기억합니다. 0대0 가을에 2차전 홈경기. 2대2ㄴ가..스코어는 가물가물. 장신 김재한 선발.. 겨울에 홍콩 추가 경기 골킵이 김황호? 중거리 슛 허용 1대0패. 더 기억 나는 건, 74년 독일 월드컵 개막경기 서독대 동독. 동독 승리.ㅋㅋ
축구화, 축구공, 유니폼 등 사용하는 도구들이 일단 엄청 발전했고 잔디상태도 흑백이라 그런지 몰라도 안좋아보이네요. 훈련방식도 현대축구가 더 과학적으로 발전했을겁니다. 룰도 공격수에게 유리하게 바뀐 것도 지금 공격수들이 더 많은 득점이 가능하고 부상도 덜 겪게 된 계기가 되었죠.
초3 때였는던 걸로 기억이 생생히 남았던 그 해 마지막 12월 가는 추운 겨울 저녁, 온 가족이 함께 저녁 먹고 방 한 칸에 모여 이부자리 피고 형광등 불 끄고 테레비 앞에 얼굴 내밀며 그 당시 아무 생각 없이 국대 축구 보다가도 다른 티비채널 돌리면 각 방송사 특집 연말 연예시상식을 하며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들떠 있었는데 느닷없이 이리 기차역 폭발사고 속보가 축구중계 화면 하단에 띄었던거 보고 놀란던 기억이 새록새록 기억 나네요..
말레이지아 버마도 엄청 잘했지요 버마(미얀마)는 한국 과 우승을 서로 나눠가졌고 브라질 클럽팀(사실 무명)이라도 오면 박스컵(박대통령컵)우승은 거의 브라질클럽이고 당시는 한국국가대표를 A,B로 나눠서 경기를 했지요 지금과는 화질, 그리고 ,여러가지로 모자란부분이 있지만 초등생이었던 나는 라듸오에 귀를 집중하고 초조히 들었었던때, 아직도 기억 나죠!!! 말레이지아의 골키퍼 아르무감!!! 우리나라의 차범근 인기에 버금가는 쏘친온, 싼토크씽!!! 아직도 잊지못하지요 난 최애 축구선수는 조광래, 이영무를 꼽습니다
이 당시 화랑이란 명칭으로 불린게 국가대표 1군팀...충무라 불리던 2군(상비군)팀이 있었죠...두 팀이 맞붙는 경기도 중계를 해주었었죠...저는 이 분들과 센터포워드 대명사로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회자되는 키 큰 김재한 선수(붕대 감은 모습이 선합니다)도 기억합니다...김강한,김성남, 최종덕,박성화,박상인, 윙으로 빨랐던 신현호 선수 등도 기억합니다..쌍둥이 선수의 형인 김정남 코치는 선수보단 코치나 감독이 저에겐 더 익숙합니다...70년대 이 당시의 국가대표가 아무래도 뇌리에 깊이 새겨질 어린 시절이라 지금까지도 국가대표 선수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77년이면 테헤란 아자디 스타디움이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개최를 위해 만들어졌으니까 저 장소도 아자디 스타디움이 아닐까 생각해봤는데 다른 분들 글을 보니역시나네요~ 지금같은 엄격한 회교국이 아닌 저때는 이란도 팔레비 왕조시절이라 여자들도 축구장에 와서 축구를 볼 수 있었죠 ㅎ
ㅎㅎ~~ 19977년7월4일 부산 구덕운동장에서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 한국 :이란 전반전 경기가 마무리되고 최정민 감독에 의해 교체됬는데... 당시 언론에 의하면 불만을 표출 하면서 축구화를 내동댕이 쳤다? 암튼 당시 나온 애기인데... 스타 이회택선수로서는 화가 날만도 했었죠 한국 이란 1차전은 한국의 우세에도 0:0 그리고 동영상에서 보는 2차전은 인저리타임때 이영무의 골로 2:2무승부 아시아 죄종예선 성적 1위 이란6승 2무(본선진출) 2위 한국 3승4무 1패(탈락) 이란의ㅈ2무는 한국전에서 무승부 한국의 1패는 시드니에서 호주에 2:1패
당시 한국과 이란은 베스트 프렌드로 수교 기념으로 테혜란에 서울로 서울은 테혜란로 만들어 주고 오일파동때 기름도 주고 우호적이었는데 이영무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 경기장에서 기도 세레머니 할까봐 걱정한 정보부에서 기도는 하지말라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골 넣은 이영무가 기도를 하면서 관계자가 아연실색 했다는 내용을 신문 기사로 본거 같습니다.
정말 귀중한 tv 중계방송임다. 70~80년대 다른 축구 경기도 계속해서 올려주세요.
경기중 하단자막. 이리 큰 폭파사건 발생. - 이 날 이리 열차 대폭파사건이 있었군. 역사에 남을 큰 사고임.
이리 폭발사고 하춘화..ㅎㅎ
비극이지만 그로인해 이주일이라는 스타가 탄생하는 아이러니!
그럼 1977년 11월 11일 영상이군요
북조선의 폭팔 공작 작품-이리기차역 탄약폭팔 대형사건.
저 당시에는 폭파사고 이재민 수용할 곳이 없어서 천막을 세워서 임시 거주했죠. 한 겨울을 천막에서 떨면서 보내시고 있던 모습들이 기억이 납니다.
추억의 경기~
너무나 귀한 영상~
쿠웨이트전 최종덕의 멋진 중거리포가 생각나네요~~
👍👍👍👍👍👍👍👍👍👍
너무나 귀한 영상.
국민학교 6학년 시절이었는데.
늦은밤 흑백tv로 봐었고.
호주전 원정길에서 변호영 선수가 부상으로 김황호 골기퍼가 들어 오면서 2골 주면서 2대1로 패한 경기가 아쉬웠네요.
또 김재한 선수와 노장 이회택 선수가 번갈아 뛴 경기
뱀띠이신분이 뱀띠해에 보셨네요
와 이런영상이 있었다니! 한국축구의 역사적인 경기들 자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KBS에 감사드립니다.
내가 국민학교 6학년때 경기 중계 봤었죠.... 그때 이리 폭발사고 나던 날..... 어그제 같았는데... 46년이 흘렀네요....우리 대표 선수들 다들 잘 계시는지...
이리역 폭발사고 자막이 인상적이네요 이영무 기도도 인상적이고.. 한때 버마가 참 잘했고 말레이시아도 꽤 인상적이었었죠
중동에서는 특히 쿠웨이트가 이 시점 이후로 굉장히 강해졌었던걸로 기억되네요 북한도 이때는 우리의 라이벌이었었는데 일본 축구는 우리보다 한참 아래였구요 참 그리운 시절입니다
크메르도 축구 잘했어요, 지금의 캄보디아 🇰🇭
@@onnuliTV000 저때쯤에는 아니었습니다.
@@grant70000
@grant70000
?? 저때쯤 박스컵 축구대회에서 크메르는 우리나라하고 공동 우승함. 70년대 중반에 ... 님은 언재쯤의 크메르 축구를 말하나요?
2분대에 이리역폭팔사고 자막이 뜨네요. 이 경기 보려고 거실 나왔다가 기차화통이 공부방에 떨어져 목숨을 건진 학생 뉴스도 있었는데 그때 경기를 이렇게 보내요
너무 귀한 그림이네요. 감사합니다.
74년 서독 월드컵 예선 그림도 부탁드립니다.
77년은 제가 고3이어서 셤 공부하느라 경기를 많이 못봤지만,74년 게임은 아직도 기억합니다.
특히 호주 원정전. 홈게임, 홍콩에서의 통한의 패배...
죽을 때까지 아마 못잊을 겁니다.
74년에도 생중계 했었나요?
@@이재현-l7m 그럼요.
73년에 예선 여름에 호주원정, 차범근이 단독찬스 놓치고 아쉬워하는 표정, 아직도 기억합니다. 0대0
가을에 2차전 홈경기. 2대2ㄴ가..스코어는 가물가물. 장신 김재한 선발..
겨울에 홍콩 추가 경기 골킵이 김황호?
중거리 슛 허용 1대0패.
더 기억 나는 건, 74년 독일 월드컵 개막경기 서독대 동독. 동독 승리.ㅋㅋ
김황호 지독히 못했죠😅
장수하시네. 만수 누리소.
홍콩에서 1대0으로 진 경기는 이세연 골키퍼 프리킥 으로 골 먹음
그후론 변효영이 국대 골키퍼몇년간 하다 김황호로 바뀜
박상인.조광래.최종덕.차범근.이영무.허정무.지금봐도 멤버가 웅장하다😊
옛날 경기 보니 확실히 당시에는 최고 선수들이었지만 볼 트래핑 능력, 드리블 능력, 패스 정확성 등에서 현재 한국 국대 선수들 수준과는 많은 차이가 있군요. 하여튼 추억 새록새록 돋는 영상입니다.
70년 월드컵의 펠레와 58년 월드컵 펠레는 몸 움직임, 드리블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흑백과 켤러 필름의 차이 때문이죠..흑백 필릉이 너무
낡으면 전체적으로 움직임이 느리고 투박해 보이죠..
경기장 식사 과학적훈련 조선시대 군대와 현대군대와?
축구화, 축구공, 유니폼 등 사용하는 도구들이 일단 엄청 발전했고 잔디상태도 흑백이라 그런지 몰라도 안좋아보이네요. 훈련방식도 현대축구가 더 과학적으로 발전했을겁니다. 룰도 공격수에게 유리하게 바뀐 것도 지금 공격수들이 더 많은 득점이 가능하고 부상도 덜 겪게 된 계기가 되었죠.
이야..이리역 폭발사건 나던날이 이 경기일이라 들었는데 역사네역사~!ㄷㄷ
이리역 폭파사건이면 1977년 11월 11일 금요일날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작년 2022년 11월 11일도 금요일이었죠.
저런 방송을 보면 한창 젊었을 아버지가 생각남. 당시 우리집에 티비가 있었던 걸로 알고 있고, 아마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봤을 그 장면이 상상됨.
저희 아버지는 저때 사우디 막 도착하셨을 겁니다... 당시 한국 못 산다고 뭐만 없어졌다 하면 우리 노동자들 불러서 의심했다고 하심 ㅜㅜ
당시 이영무 선수가 진심 부지런했었음 분명 골라인 밖으로 나갈볼이였는데도 끝까지 따라가서 In play 시키는거 보면 감탄사 밖에 ᆢ
박지성의 구버전이 이영무죠
그게 다 예수님이 도와주셔서 가능한거였죠
이영무 선수는 지치질 않았죠. 82스페인 월드컵 예선까지 뛰었는데 그때는 쿠웨이트에 막혀서 ㅠ
@@sanmicheal6754 이영무가 할렐루야 팀
정말 귀중한 자료 잘봤습니다.
이영무 박성화 조광래 허정무.... 참 그리운 분들이 나오네요
.
어렸을 때 봤던 흑백TV 이란경기 보니 새롭네요. 마을 중에 백곡초등학교 정문 앞 가게에만 유일하게 1대뿐이었던 시절...good.^^
이때 이란은 이미 컬러방송을 하고있었음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E조예선 대한민국. 이스라엘 동대문운동장...전경기 없을까요?
77년 3월 20 일.. 첫골 먼저먹고 차범근의 동점골, 최종덕의 중거리슛, 박상인의 골로 3 대1로 이겼던 경기. 당시 6학년이던 제가 정확히 10년뒤인 87년 3월 20 일 군 입대. ㅎㅎ
영상 잘봤습니다...전반전 영상은 없나요? 감사합니다
초3 때였는던 걸로 기억이 생생히 남았던 그 해 마지막 12월 가는 추운 겨울 저녁, 온 가족이 함께 저녁 먹고 방 한 칸에 모여 이부자리 피고 형광등 불 끄고 테레비 앞에 얼굴 내밀며 그 당시 아무 생각 없이 국대 축구 보다가도 다른 티비채널 돌리면 각 방송사 특집 연말 연예시상식을 하며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들떠 있었는데 느닷없이 이리 기차역 폭발사고 속보가 축구중계 화면 하단에 띄었던거 보고 놀란던 기억이 새록새록 기억 나네요..
라디오로 듣던시절 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태국에서도 방콕입니다. 아나운서의 맨트 지금생각하니 추억이 아련합니다. 감사합니다.
조춘제. 아나운서 축구 전담케스터
조굉래선수가 지금봐도 두뇌축구를 했다는 생각이😊
조광래는 롱패스가 아주 정확했어요. 지금이로 치면 기성용이 하는 패스
이때 기억나네요! 이리역폭파자막뜨고..국민학교6학년때..당시 한국팀 페턴 양쪽센터링 김제한 헤딩 떨어지는볼 슛팅..이영무.조광래.조영증.황재만.변호영...
1977년 11월 17일 한국시간 9시에 열렸던 경기입니다
이날 이리역 폭발사고가 났었습니다.
티브이로 중계방송 보다가 폭발사고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제나이 23살떄 일입니다.새롭네요^^
동갑이네요. 반갑습니다. 저도 이 경기 기억합니다. 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한국 월드컵 우승할 때까지.ㅋㅋㅋ🤗👍🎊
진짜 귀중한 화면이네요... 당시는 선수들한테 조광래군, 허정무군... 이런 식으로 군...을 붙여서 호칭했는데... 때문에 어렸을 때 차범근 선수 이름이... '차범'인 줄 알았음...
ㅋㅋㅋ 귀엽습니다 ㅋㅋ
독일에서 차붐이라고 부르니 맞긴 맞네요 ㅎㅎㅎ 차붐-군
저는 차 봉 君 인줄 알았습니다
그때는 라디오 시대라서ᆢ
2:25 뉴스속보
말레이지아 버마도 엄청 잘했지요
버마(미얀마)는 한국 과 우승을 서로 나눠가졌고 브라질 클럽팀(사실 무명)이라도 오면 박스컵(박대통령컵)우승은 거의 브라질클럽이고 당시는 한국국가대표를 A,B로 나눠서 경기를 했지요
지금과는 화질, 그리고 ,여러가지로
모자란부분이 있지만 초등생이었던 나는 라듸오에 귀를 집중하고 초조히 들었었던때,
아직도 기억 나죠!!!
말레이지아의 골키퍼 아르무감!!!
우리나라의 차범근 인기에 버금가는
쏘친온, 싼토크씽!!!
아직도 잊지못하지요
난
최애 축구선수는
조광래, 이영무를 꼽습니다
크메르도 잘했어요. 지금의 캄보디아 🇰🇭.
찬드란, 목타르다하리
마지막에 이리역 폭발사고ㅠ
이영무선수가 두골을 넣었네요.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부지런히 뛰었던 선수라던데..기도세리머니가 인상깊네요 ⚽️
1954년 🇨🇭 월드컵 본선진출 이후로 32년 동안 지역예선에서 번번히 쓴맛을 봤고 1986년 🇲🇽 월드컵 본선진출로 시작해서 많은 시행착오를 극복하는 노력이 있었기에 2002 월드컵 4강신화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해봅니다🤔
이란의 최전성기
1968-1972-1976 아시안컵 3연패
1974 테헤란 아시아게임 금메달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진출
이란은 78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해서 유럽 스코틀랜드에게 1:1 무승부 승점 1점을 기록, 비록 8강 진출은 실패했으나, 대회 최종순위에서 헝가리 멕시코를 제치고 78월드컵 14위를 기록 했습니다.
아시안컵3연패 중에 2개가 이란홈....
참 옛날 생각나네요
진짜 저때가 한국축구 황금새대
변호영 이영무 등등
그립습니다
아나운서 원해종
이 당시 화랑이란 명칭으로 불린게 국가대표 1군팀...충무라 불리던 2군(상비군)팀이 있었죠...두 팀이 맞붙는 경기도 중계를 해주었었죠...저는 이 분들과 센터포워드 대명사로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회자되는 키 큰 김재한 선수(붕대 감은 모습이 선합니다)도 기억합니다...김강한,김성남, 최종덕,박성화,박상인, 윙으로 빨랐던 신현호 선수 등도 기억합니다..쌍둥이 선수의 형인 김정남 코치는 선수보단 코치나 감독이 저에겐 더 익숙합니다...70년대 이 당시의 국가대표가 아무래도 뇌리에 깊이 새겨질 어린 시절이라 지금까지도 국가대표 선수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77년이면 테헤란 아자디 스타디움이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개최를 위해 만들어졌으니까 저 장소도 아자디 스타디움이 아닐까 생각해봤는데 다른 분들 글을 보니역시나네요~ 지금같은 엄격한 회교국이 아닌 저때는 이란도 팔레비 왕조시절이라 여자들도 축구장에 와서 축구를 볼 수 있었죠 ㅎ
맞습니다.
테헤란이 미니스커트 입은 처자들로 넘쳐나던 시절.
이란의 아지디 스타디움 무패 신화가 몇십년 동안 지속되다가 이천수의 올림핃 팀에 의해 깨진 것으로 압니다.
아테네 올림픽 예선인가 그럴 겁니다.
이회택 선수의 경기도 볼 수 있나요?
아시아 최고의 골게터를 다시 보고 싶어요.
당시 이란이 6승2무 승점14점으로 1위였고 우리가 3승4무1패 승점10점으로 2위였는데 이란의 2무가 우리상대로 나온거였죠
한국도 잘했군요. 그 당시 월드컵 본선진출이 무산되고 얼마나 아까웠을까요
그 당시 골키퍼 누구였나유?
@@이재원-r6p 변호영
이란은 78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해서 유럽 스코틀랜드에게 1:1 무승부 승점 1점을 기록, 비록 8강 진출은 실패했으나, 대회 최종순위에서 헝가리 멕시코를 제치고 78월드컵 14위를 기록 했습니다.
우리가 못나가 아쉬웟지만
이란 대단햇군요
이란 네덜란드 1-3으로패했읍니다
어릴적 친구들끼리 흥얼거리던.. 떴다 떴다 축구공 차범근 올린볼 김재한이 헤딩슛~ 헤딩슛 골인.... 이런 시절이 있었어요..^^
이때도 경기 내용상으로는 상당히 고전했네
그때나 지금이나 이란은 까다로움
13:32 이리역 폭발사고 속보
77년고3때..이때는 아시아 오세아니아 1팀, 아프리카 1팀만 월드컵 나갔음! 총16팀만 월드컵 4개조 16팀! 한국 일본 이란 사우디 호주 이라크 쿠웨이트 여기서1팀만! 이집트 모로코 튀니스 가나 세네갈 알제리 코트틔브아르 라베리아 여기서1팀만 월드컵 진출 ㅠㅠㅠㅠ
반갑습니다.
저도 77년에 고3.ㅋㅋㅋ
일본아니고 홍콩 그리고 사우디 이라크 아님
이날 저녁먹으면서 축구보다가 폭팔사고 났는데 그나마 이리역과 많이 떨어져있어서 우리집강아지죽고 유리창깨지고 기억이 생생하네요.
강아지 불쌍 ㅜㅜ
저 당시 초딩 1학년이었는데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지금하고 비교하면 재미난 점은 저당시에는 이란은 침대축구를 하지 않았고, 아자디 경기장은 관중숫자도 그렇지만, 워낙에 고지대여서 적응에 힘들다고 합니다. 항상 동아시아 원정팀들의 무덤이 되는.
이란 골키퍼 이름이 독특했었죠..
해jaji.. 45년 전인데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어떤 으르신이 댓글 달은거 있는데 해ㅈㅈ 부인이름은 별ㅂㅈ라고 애들끼리 불렀다는🤣🤣
척준경 영화가 만들어질수 없는이유 절친장군 이름이 왕자지
아시아 쿼트에 부여된 월드컵 본선 진출 한장을 이란이 가져갔네요 ~~ 저 당시가 한국이 그나마 86멕시코 월드컵 진출전까지 월드컵 본선에 갈수있었던 기회였는데 아시아지역 2위를 해서 못갔으니 말이죠
70년대 흑백tv 공민영 합동중계... 이야기로만 듣던 이야기네요
저 당시까지는 아시아+오세아니아 합동예선으로 월드컵 16개국 진출 티켓이 단 1장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란 골키퍼 이름이 헤자지였습니다. 게다가 한국에서 경기할때 미끄러지며 바지가 벗겨지는 일이 있었던게 기억나네요
저 당시 이영무 선수 진짜 부지런하셨죠
옛날엔 축구 지면 진짜 나라가 어찌 되는줄로만 알았음. 진 다음날 너무 멀쩡해서 놀랐던 기억이 남. 학교 가면 온통 그 전날밤의 축구경기 얘기.
변호영
최종덕 황재만 김호곤
박성화 조광래 박상인
허정무 이영무 차범근 김재한
(김강남 김성남 조영증 오석재 )
김재한, 김진국, 김황호 선수도 있었지요
악바리 이영무선수 반갑네요..저당시엔 월드컵 아시아티켓이 2.5장인가 2장인가해서 참 본선진출 힘들었죠...당시 호주.이스라엘.이란이 걸림돌이었죠
당시 아시아+오세아니아 합쳐서 티켓 1장 ㅜㅜ
70~78년 대회는 아시아 오세아니아 합쳐 1장,
82년 대회는 2장을 줬네요.
78년 대회는 이란에 밀려서 아깝게 2위로 탈락
82년 대회는 쿠웨이트에 밀려서 최종예선도 못가보고 탈락...
@@jcpohuy8280 86년에도 힘들게 나갔죠. 1차 예선 말레이시아원정에서 져서 긴장감이 컸던 시절었어요. 그때는 서울 아시안게임 올림픽 개최로 스포츠에 대한 지원이 정부 민간 할것 없이 가장 좋았을때라 관심도 컸거든요.
1장이였던걸로기억합니다
원조 2개의 심장. 원조 악바리. ㅎㅎ
찬다찬다 차범근 달린다 이영무 높이 떴다 김재한
헤딩 슛 골인
자막에 이리폭발사고 ㅠ
78 월드컵 최종예선.. 이란이 1위로 본선진출. 한국은 2위로 탈락. 본선티켓 1장이던 시절이라..
세상에 흑백 중계영상이라니...박물관도 아니고 규장각 수준이네요ㄷㄷㄷ
1980년까지는 흑백TV시절이라 규장각수준까지는 무리인 것 같네요^^
흑백밖에 없을 때는 전혀 불편함없이 흑백방송을 시청했지요. 신세계백화점가면 칼라로 송출된 미군방송 AFKN 을 칼라티비로 볼 수 있었지요.
지금의 컴팩트한 축구와는 좀 다르게 1-2-3선 사이가 멀고 압박이 덜 하네요. 귀중한 자료 잘봤습니다 ^^
캐스터가 숨도 안쉬고 중계를 하네요
저땐 차범근도 별볼일 없었네 ㅎㅎ
그중 이영무 제외하고 3명은 훗날 국대감독 한번씩 맡았지!
추억의 이름들이네요
얼마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냐
해자지!! ㅎㅎㅎㅎ
경기중 이리역 폭팔 사고 자막이 떴지요
당시 캐스터보신분 누구신지 아시는분?
전반전 자료는 없나요
아나운서 중계가 박진감 넘칩니다
이 경기보면서 이리역 폭파사고가 자막으로 나오며 많이 놀랬던 기억이 이대회서 이란이 아르힌티나월드컵참가 우리나라가 조2위던가?
손흥민 선수는 알아도 차범근씨는 이젠 관심도 없다!
역시 훌륭한 선수는 인품과 실력이 말해주는 걸 깨닫는다.
이란 이슬람혁명 일어나기전 이네요
77년 예선은 이회택이 최정민 감독한테 대들다 쫓겨난 일..
이영무의 분전 등이 생각나는데
지금 보니, 고 황재만, 조영증, 박상인..
박종원도 있네요. 카이저스 라우테른에서 두 시즌인가 뛰었죠.
김재한도 있고..
조광래가 발군이네요.ㅎㅎ
ㅎㅎ~~
19977년7월4일 부산 구덕운동장에서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 한국 :이란
전반전 경기가 마무리되고 최정민 감독에 의해 교체됬는데...
당시 언론에 의하면 불만을 표출 하면서 축구화를 내동댕이 쳤다?
암튼 당시 나온 애기인데...
스타 이회택선수로서는 화가
날만도 했었죠
한국 이란 1차전은 한국의 우세에도 0:0
그리고 동영상에서 보는 2차전은 인저리타임때 이영무의 골로 2:2무승부
아시아 죄종예선 성적
1위 이란6승 2무(본선진출)
2위 한국 3승4무 1패(탈락)
이란의ㅈ2무는 한국전에서 무승부
한국의 1패는 시드니에서 호주에 2:1패
해설자도 있었네요 ㅎ
팔레비 왕조때 경기네요
이런 영상을 언제 보냐
당시 한국과 이란은 베스트 프렌드로 수교 기념으로 테혜란에 서울로 서울은 테혜란로 만들어 주고 오일파동때 기름도 주고 우호적이었는데 이영무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 경기장에서 기도 세레머니 할까봐 걱정한 정보부에서 기도는 하지말라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골 넣은 이영무가 기도를 하면서 관계자가 아연실색 했다는 내용을 신문 기사로 본거 같습니다.
이영무선수 70년대 박주영이군요 기도하는
@@민영규-m3q 지금은 그냥 사기꾼 그 자체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골 넣고 기도하는 축구선수는 이영무 선수가 처음 인 것으로 기억됨
아자디 원정에서 우리가 이길 날은 언제쯤 올까? 요새나 저때나 저 압도적인 분위기는 변함이 없구만. 심지어 저때는 호메이니 혁명 전이라 이란이 자유롭던 시절
축구광팬 이주일씨 이런 중요한 경기도 안보고 공연다녔구나
그리고 이란이 이겨서 월드컵 나갔던건가요?
이란 원정은 예나 지금이나........
풀백 최종덕 감독님 작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근데 기사 한줄 안나오더라고요. 서글프네요.
아.... RIP.....
그랬군요. 젊은 기자들이 어른들에 대해 잘 모르니 축협이 언론에 통보를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조영증 최종덕 최고의 수비수 그립다. 지금 김민재 말고는 수비가 너무 약하다. 이란 사우디 쿠웨이트 호주 말레이시아 등 만만하지 않았다. 말련의 아르무감 이란 헤자지 변호영 골기퍼 나의 70년대 추억
저 시절 공과 잔디와 축구화 등 장비와 환경이 너무 다르니 요즘 축구와 비교하면 안될듯. ^^
추꾸보다가 돌으가신분들 많았깄네 이리역 기차폭발 ㅠㅠ
이때 차범근을 보유한 한국이 최강 전력이였음에도 월드컵을 못나간 것이 불운이였지.
야
이경기 영상이 있네요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예선인데
호주와의 경기도 위성중계로 봤었죠
이란의 골키퍼 헤자지는 우리나라 이세연 골키퍼처럼 구가대표 엄청 오래하더군요 애들이 장난친다고 헤자지 골키퍼 마누라는 달보지라고 했었는데 ㅋ
중계일자: 1977년 11월 11일
2:27에 힌트
이세연이 은퇴하고 김황호가 나오기전 잠시 변호영선수가 골키퍼 했고, 중앙에 조영증,박성화, 양쪽 백에 황재만,최종덕. 링커에 박상인, 이영무, 조광래, 공격에 차범근,김재한.. 공격수 한명이 누군지 안나오네요.
박종원입니다.
김호곤,강병찬,김진국,김강남,김성남~
허정무는 부산서 이란전 마치고 이회택 축구화 던지고 그만 두면서 대타로 투입~
모든 선수의 등번호와 이름을 외웠던 기억이... 1 변호영 김황호, 3 김호곤 4 조광래 5 황재만 6 7 신현호 8 조영증 9 이영무 10 박병철 11 차범근 12 13 14 김진국 16 김재한 ... 중간중간 기억이 가물가물해...
12 최종덕, 17박상인, 16은 김재한
변호영은 21번을 주로 달았던 기억...
대단하십니다. 저 경기 봤습니다. 저는 4번 조광래 11번 차범근 정도 기억합니다.
ㅋㅂㅅ박물관❤️
저때는 캐스터 혼자서 중계를 했네요
옛날 축구화가 흑백최고지
이 경기 보는데 이리 폭발 사건 자막으로 나온 거 기억 나네.
투지의 화신 이영무는 아무리 뛰어도 지치지 않아 마라톤 시합에 나가 보려 했는데 주위에서 말렸다는 소문까지 있었음.
90년대초 국가대표경기보면 측면돌파는 잘되는데 항상 크로스가 아쉬웠는데, 저때도 그랬군요.. 지금도 그러고...
80년대 유공 김석원 선수의 측면돌파에 이은 센터링이 일품이었는데, 부상으로 86년 월드컵 본선에는 못갔지요
한국 축구 고질병입니다.
저거 안고쳐지더라고요
사실 지금도 ….
이란은 언제부터 침대축구 한거야? 저땐 개열심 전력을 다해 뛰었네
알리다에이 아지지 카림바게리 마다비키아등 걸출한 선수 은퇴하고나서 침대축구한듯요.
1977년 11월 11일(금)
아자디 스타디움 오후 9시30분(한국시간)
기술없이 정신력과 스피드로만 싸우던 시대
★77년이면 내가 국민학교 6학년때였구나..최종덕선수 가끔 터지는 중.장거리슛 일품이었죠.
저하고 동갑이시군요.. 저도 그시절 최종덕 중거리슛, 박상인 선수 팬이었었죠.
77년이면 제가 없을때네요..
@@huckleberryp 어딨었는데??
최종덕 군 슛~~~ 어림없는 볼
아빠 주머니에
저때도 전방압박에 풀백 오버래핑등 현대축구 전술이 어느정도 있었구나
저때는 외국선수도 나자리~군 이라 했네요. 메시군 호날두군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