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 역사 채널이 자료 화면을 보여주면서 나레이션으로 이어가는 구성인 것과 다르게 이 채널은 직접 가보는, 즉 답사하고 드론 띄워 촬영한다는 데 차별점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너무 소중합니다.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언제나 쥔장님의 열정을 응원하며 성원합니다.
얼마 전에 월악산 등산하고 충주에서 저녁 먹고 올라와서 그런가 더 와닿는 영상이라 감사합니다. 3:25 강물 위로 나르는 장면 너무 멋있군요! 4:21 2000년에 가봤을 때는 방송사 사극 촬영팀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깨끗하네요. 당시 박상아 배우를 봤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결국 신립은 소규모 일선부대 지휘관으로서 적합했지, 이런 대규모 전투를 감당할만한 총사령관급의 인물이 아니었다는게 학계의 평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니탕개의 난의 활약도 자세히 뜯어보면 기껏해야 몇 백명 단위의 적들을 상대로 싸운 경험이었을 뿐이지, 수천 단위의 정규군을 상대로 싸운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전략적 식견이 상당히 부족했고 결국 이 때문에 탄금대 전투와 같은 비극이 발생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나는 신립에 대해 지휘관으로 능력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고 부정적으로 보는데요. 그는 전투 전이나 전투 중에나 한번도 상황에 맞거나 상식적인 판단을 하질 안씁니다. 27일 일본군 선봉대는 조령과 충주까지 이어진 길을 무혈 점령하고 그날밤 일본군 정찰대는 단월역까지 진출합니다. 이건 일본측 기록에도 적혀있습니다. 단월역에서 그걸 목격한 조선군 정탐병은 신립에게 보고하지만 신립이 단월역을 확인한 결과 일본군 정찰대는 철수했는지 보이지 않자 허위보고라고 믿고 정탐병을 참수합니다. 이 부분ㅇㅔ서 정탐과 정보를 매우 중요시한 이순신과 극히 대조됩니다. 28일 정오경 고니시 본군이 단월역에 나타나자 신립은 그제서야 충주성에서 나와 전 병력을 탄금대앞 송산에 진을 칩니다. 이때 일본군 좌군과 우군은 조선군을 포위하고 퇴로 차단을 위해 각각 조선군 몰래 우회하여 전개하고 있었고 신립은 부대를 단월역 앞 달천평야로 이동시킵니다. 이때 단월역에는 고니시의 중군 병력이 7000명이 있었고 신립의 조선군은 8천 또는 1만6천이라는데 어쨌든 기병은 절대 5천을 넘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는 3~4천 정도 예상합니다. 그사이 일본군의 선봉부대는 텅비어 있던 충주성을 점령합니다. 신립은 성을 왜 비워둔 것일까요? 읍성이 전장과 지척이므로 수비병력과 예비대를 두었다가 전투시에 적절히 활용해도 됐을텐데. 왜 그랬을까요? 신립은 기병대에 돌격명령을 내리고 전투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상대는 지금까지 신립이 상대한 마적떼같은 여진족이 아니라 100년간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숱한 전투경험으로 만들어진 전투기술자들로 편성된 정규군이었다. 일본군은 전부가 보병이었지만 장창과 조총으로 기병을 잡을수 있다는건 그틀에게 상식이었고 하물며 중기병도 아닌 궁기병 정도는 학살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라운드 상태는 평원이 아니라 비온뒤의 논밭이어서 질척한 그라운드 상태와 논둑 밭둑은 말을 달리기에 장애가 되고 제약을 주어 기동을 어렵게 했다. 특히 조총병들의 전열사격전술은 조선 기병대에게 엄청난 타격과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는 기병으로 보병을 치면 필승이라는 신립의 상식을 뛰어넘는 상황이었다. 연속된 기병돌격이 좌절되는 동안 갑자기 조선군 본진 양측면으로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조선군은 와해되고 신립은 탄금대(나루터)로 후퇴하였다가 잡혔고 부장 김여물은 교전 중에 사로잡혀 둘다 수급이 떨어졌다. 일본군의 기록이다. 그 기록에 수급 3천에 포로가 수백명이었다고 한다. 설령 달천나루터와 탄금대나루터에서 강을 건넜다해도 강건너에도 일본군이 진출하여 구경하고 있었으니 말 그대로 전멸이었다. 공식적인 생존자는 전투 직전 이탈한 도망기술자 이일과 충주목사 이종장 등 4명이다. 이일과 이종장은 종사관 김여물과 함께 사전에 신립에게 조령에서 방어하기를 조언했었다. 이 둘은 결과를 예상하고 튀기로 작정한듯하다. 하기야 조령이든 어디든 고개마루에서 막아도 어떻게될지 모르는데 모든면에서 열세인데도 회전을 고집하는 지휘관이 적군보다 더 무서웠을 것이다. 징비록에는 유성룡이 출정하는 신립에게 신무기인 조총에 대해 우려를 표하자 그깟 조총이라고 쏘는대로 다 맞는답디까? 라며 호기로운 무쌍인지 무식인지 떠벌이는 신립의 그 한마디가 대부대 전투를 지휘할 능력이 안된다는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술적 전략적 사고능력이 없는것이다. 게다가 조총을 조선의 총통 정도로 생각하는 신립 등 조선군 지휘관들의 무지는 전국시대 동안 조총만 수입한게 아니라 운용방법과 제조술까지 섭렵한 일본군에게 조선군은 무자비한 참패와 엄청난 희생을 당했다. 이런 조선군 지휘관들의 무지는 탄금대 전투 한달후에 벌어진 용인전투에서 또한번 드러난다. 와키자카가 이끄는 1600명의 일본군에게 7만명의 조선군과의 전투에서 조선군 선봉대가 일본군 조총병을 무시하고 무모한 선제공격하다가 궤멸되고 이튿날 조선근왕군 본대가 습격당해서 도망가는 와중에 5만명이 죽는 참패를 당했다. 다만 신중한 공격을 조언한 권율과 황진이 이끄는 소부대 정도만 편제를 유지한채 독산성으로 후퇴하여 이치전투를 가능하게했다. 임진왜란의 3대패전인 탄금대패전, 용인패전, 칠천량패전에는 모두 무능한 지휘관이 있었다.
오 회전은 전투가 가능한 특정 지역에서(보통은 평지나 구릉) 양측의 군세를 동시에 투입하여 승패를 겨루는 방식입니다. (영문 Pitched battle, set-piece battle, 한자 會戰) 보통은 한번의 전투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기 때문에 양측의 가용전력을 전부 투입하며 위험부담이 큽니다. 탄금대전투에서 신립장군이 패배하여 한양이 고니시에게 점령당하고 선조가 의주로 몽진합니다. 전라순찰사 이광이 급히 하삼도(충청전라경상) 근왕군을 편성했으나 용인에서 와키자카에게 대패하고 흩어진 근왕군은 의병으로 되살아납니다. 이때 유일하게 질서있는 퇴각을 한 권율과 황진이 이치전투에서 일본군을 막아내고 다시 북상하여 독산성 전투를 승리로, 행주산성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임진왜란의 전세 전환이 일어납니다.
원래 신립이 임진왜란 이전에 함경도 병마절도사 시절에 여진족 니탕개의 난을 진압했던 적이 있어서 조령에 병력을 배치하지않고 탄금대로 진을 옮겼지만 결국 일본군의 조총에 몰살 당했다고 하지요 다른 설화도 있는데 신립이 산길을 가다 날이 저물었는데 멀리 불빛이 보여 찾아갔는데 여자 혼자 사는 집 이였는데 하룻밤을 묶고 길을 나서려는데 그 여자가 집을 불태워 자결했고 시간이 흘러 임진왜란 당시에 신립장군에게 나타나 탄금대로 옮기라고 해서 옮겼는데 결국엔 패전하고 신립장군은 탄금대에서 자결했다는 설화도 있답니다
충주성은 방어할수 있는 여건이 거의 없었습니다. 일단 성자체가 고을읍성이라 성벽 자체도 높지 않았고 (대략 3m) 최소 5m 이상은 되어야 성곽의 역활을 제대로 수행할수 있을 뿐더러 무엇 보다. 농성을 하려면 충주성에 백성들과 관리들 군사들이 있어야 하는데. 신립이 갔을 당시에 충주성은 백성들이 피난 하여 텅 비어 있었고 관리 와 병사들도 대부분 흩어진 상태였습니다. 심지어 곡식 창고 마져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피하는 바람에 창고도 비어 있었습니다. 식량도 없고 성자체도 방어가 제대로 안되는 상황에 들어가면 성을 포위 당하고 독안에 든 쥐 꼴이 됩니다. 거기다 일본군의 숫자는 많았으니 신립을 포위하고도 나머지 병력은 한성을 향해 진격하겠죠. 신립이 충주를 지키고자 하는게 아닌이상에야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 하는 목적 달성에는 실패입니다.. 신립도 이런 상황을 충분히 알았기에 충주성의 농성을 포기 한겁니다. 방벽 삼아 싸우지도 못하고 성안의 식량도 없고 휴대식량으론 얼마 못갈거고 조령 문경도 전쟁이 끝난후 중요성을 인정받아 길목마다 성곽을 쌓고 농성할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거지 그당시엔 아무런 준비도 없었습니다. 거기다 문경이나 조령은 우회로가 아예 없는것도 아니었다고. 신립의 머리속은 복잡 했을겁니다. 거기 막았는데 만약 우회하면 눈앞에서 일본군을 놓치게 되는 셈인지라.
. 일단 회전을 택한 이유는 왜군에게 충격을 줘서 (고니시의 1군 즉 예봉을 꺽어) 진격을 주춤 시킨후 퇴각을 고려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 1군을 격파하면 따라오던 2군과 3군 역시 진격이 주춤 할수 밖에없겟죠. 퇴각을 염두 하고 있었다 는건 임용한 박사님의 신립 전투기록을 보면 수원으로 퇴각해서 그곳의 방어군과 ㅎ 같이 막는다 란식의 장계를 이미 올린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기병의 공격이 효과를 발휘 하지 못했고 일본군의 몰이에 걸려 반대로 배수진을 강요 당하지 않았나 싶음. 궁기병이 효과적이지 않다 는걸 안 시점에선 이미 퇴각이 무리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혹은 퇴각을 하려 했으나 이미 퇴로를 차단 당했을 수도 있고 .. 거기다, 훈련도 안된 군대에게 질서 정연한 퇴각 이라는게 사실 말이 쉽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지고 있는데 섣불리 퇴각을 명하면 퇴각은 커녕 오히려 뿔뿔이 흩어져 도망을 하려 하겠죠. 오죽하면 중세 유럽에서도 질서 정연하게 퇴각하면 대단히 기강 잘 잡힌 군대라고 평가를 받았을 정도니.
정보의 비대칭이지 않을까 싶네요. 어차피 왜군은 한양까지 올라가서 선조를 잡는 것이라 선택사항이 별로 없이 그냥 밀고 올라가면 되지 않있나 싶습니다. 신립은 여러 대안 중에 본인이 가장 자신있는 기병을 이용한 회전을 택했는데 날씨나 조총 변수로 봤을때 아쟁쿠르 급으로 털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병력차이로 봤을때 자살이지 않을까도 싶네요. 아무도 모르는 게 아닐까요. 탄금대 아름답긴 하지만 슬픔이 있네요.
왜란기 전반에 공통되는 현상입니다만, 그 중에서도 탄금대 전투는 지나치게 결과론으로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본은 단순히 조총이라는 무기의 특성을 떠나서 수십년 간의 전투로 이미 각종 병종에 의한 공격에 대한 대응방법, 그리고 전투 대형(소나에)으로 전환을 염두에 둔 행군 대열, 집중 방어시설을 입체적으로 설치한 성채에 대해 희생을 최소화 하며 강행 돌파 하는 방법 등 다각도에서 숙련된 병사, 병력의 운용법이 확립이 된 정예병을 넘어 정예군에 가까운 군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정을 속속들이 알수도 없는 상황이니, 북방 이민족들을 상대로 하던 전술과 일본 정규 병력의 전술이 계급장 떼고 맞짱을 떠서 어느 한 쪽이 깨지는 전투는 어디서 일어나도 일어났어야 하는 전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전투를 통해 북방에서 통하던 전술은 일본에서 온 군세에는 통하지 않는 다는 교훈도 얻을 수 있게 되었고요. 그리고 적의 대규모 병력의 진군을 소규모 병력으로 목을 차단해서 지연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단정도 성급한 판단이라고 봅니다. 당시 일본군의 전투 스타일을 보면 소규모 병력으로 목을 차단 해봐야 돌파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당시 히데요시 직속 병력들은 공성전 귀신들이었고, 각종 해자와 집중 방어시설로 수십겹으로 쌓인 산성도 강행 돌파로 함락 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을 미루어 보아, 조선의 방어 시설은 그 정도로 고도화 되진 않아서 길목을 막는 전술만 택했으면 능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건 어렵다고 봅니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군조직은 토목공사도 장기였던데다, 야전에서는 임시 진지를 계속 옮겨 다니는 방식이라 공격군은 일본측이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단순한 전투대형끼리의 결전인듯 싶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져 보면 방어측이 공성을 하고 있는 듯한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만드는 전투방식이 많았는데, 결국 신립도 이런 스타일에 패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이나, 상대에 대한 파악이 되지 않은 상황이니 직접 엊어 맞아가며 알아가는 과정은 필연이었지 않았을까 싶네요. 다만 피해가 커 아쉬움이 더하긴 합니다만.
와 저는 이거 보고 더 혼란이 왔어요ㅜㅜ 저는 제승방략의 문제점으로 어중이 지방군이 충주로 모여서 신립이 조령 등 산맥에서 막다가 병사들이 싸우지도 않고 도망갈까봐 배수진 친 거로 알고 있었는데요 말씀하신 내용 중 궁기병이면.... 기동력으로 치고 빠지고 해야 하는 병종인데 이러면 그냥 잡병이라고는 할 수 없고... 기병전술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신립이... 단순 보병대 기병 회전으로 생각했다면 기동력을 발휘할 수 없는 충주를 택한 것도 이해 할 수 없고..... 와 고대사도 아니고 기록 많은 조선사인데도 이게 분명하지 않네요
병력 전부가 궁기병이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 8000-16000의 병력 중 기병은 많아야 반이었겠지만 편제된 기병 모두가 궁기병이었다고 생각하는것은 좀 곤란해요😅 조선의 기병 전술은 기본적으로 궁기병이 교란->창기병 돌격이었습니다. 근데 문제는 궁기병의 사거리는 조총보다 길지 않아 궁기병들이 접근하자마자 조총에 전열이 붕괴했을겁니다. 그리고 단병전에 능숙한 일본군이 참마도 등으로 빠르게 접근하자 창기병이 뒤따라 돌격할 시간도 없이 기병대가 무너졌을꺼에요
해당 전투의 임무가 무엇이었는지도 중요할 듯 합니다. 적의 섬멸이였는지, 후방에서 방어선 구축을 위한 시간을 버는 것이였는지요. 전자라면 모이는 지점인 충주에서 사력으로 막으려 했던게 납득이 가고, 후자가 목적이였다면 납득이 어렵지만 당시 조선의 상황을 보면 적의 섬멸을 기대하고 보내지 않았을까 합니다. 양쪽의 군사적 능력 차이는 고려되지 않은 상태에서요.
머리가 나쁜 장수의 최후 일뿐입니다 똑똑한 여러부하들이 그렇게 건의하고 만류를 해도 지만 잘난줄 아는 수도없는 전쟁을 했던 왜군들을 멍청이들로 보는 오만함과 똥고집 때문에 한양에서출발한 조선최대 정예군 기병대 8천명과 충청도 병사 1만2천명을 합쳐서 2만명의 조선군을 몰쌀 시키는 대단한 전과를 올리고 자신도 목이 날아갔죠 물이찬 논이 없는 함경도에서 기마병으로 재미좀 봤다고 지형과 지리가 다른 평야지대 물이 가득찬 논에서 그리고 비온후에 질퍽질퍽한 들판에서 기마병으로 공격하면 이길줄 알았다는 ... 이일인가 하는놈은 경상도에서 부하들 다죽이고 와서 그와중에도 또 도망치고 ...
머리가 나쁜 장수의 최후 일뿐입니다 똑똑한 여러부하들이 그렇게 건의하고 만류를 해도 지만 잘난줄 아는 수도없는 전쟁을 거친 왜군들을 멍청이들로 보는 오만함과 똥고집 때문에 한양에서출발한 조선최대 정예군 기병대 8천명과 충청도 병사 1만2천명을 합쳐서 2만명의 조선군을 몰쌀 시키는 대단한 전과를 올리고 자신도 목이 날아갔죠 물이찬 논이 없는 함경도에서 기마병으로 재미좀 봤다고 지형과 지리가 다른 평야지대 물이 가득찬 논에서 그리고 비온후에 질퍽질퍽한 들판에서 기마병으로 공격하면 이길줄 알았다는 ... 이일인가 하는놈은 경상도에서 부하들 다죽이고 와서 그와중에도 또 도망치고 ...
우리나라 전투 기록이라고 하는 것이 직접 보고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들었다는 이야기 라던지 패전병의 변명이 섞인 것이 많고 조선왕조 실록 조차 들은 이야기와 소문을 적은 것이 많아서 여러가지를 유추해 봐야 합니다. 특히 탄금대 전투처럼 패전은 정확한 기록이 없고 소문을 많이 적을 수 밖에 없는데 이럴 경우 대부분 '장수가 무능해서 졌다.'는 식의 기록이 많을 수 밖애는 없습니다. 그래야 왕조와 핵심 관리들이 책임을 피해갈수 있으니까요. 이것의 핵심은 우리 병력이 많았는데 장수가 작전을 잘못 세워서 졌다고 하는 것이죠. 저는 궁기병의 숫자부터 의문 입니다. 1000마리가 넘는 말이 탄금대에서 풀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군마가 하루에 먹는 풀이 최소 10kg의 풀을 먹는데 1000마리면 하루 1톤이 넘는 풀을 먹었다는 이야기 인데 충청도에서는 불가능한 숫자 입니다. 조선시대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파발마를 운영하는 데도 풀이 많아서 골치를 앓는 조선 정부 입니다. 1000마리의 말이 한곳에 모여 있다면 말먹이를 댈 방법이 없습니다. 또한 조령에 대해서도 좀 의문입니다. 당시 우리나라 산은 나무가 많지 않았습니다. 특히 삼남지방의 경우 사람이 많이 모여 살아서 나무를 땔감으로 써야 하기 떄문에 지금처럼 빽빽한 나무는 없었습니다. 당시 조령에는 성도 없었습니다. 대부분 흙으로 이루어진 지역인데 이런 지역에서 방어전을 하려면 참호를 파고 장애물을 설치 해야 합니다. 이건 상당한 시간이 드는 일입니다. (이치나 웅치 전투에 승리 원인은 여기에 있습니다. 미리 조선의병들이 가서 충분한 참호와 장애물을 설치 했습니다. ) 저의 개인적인 생각은 일단 궁기병 숫자가 많지 않았고 남쪽 징집병들이 많았는데 이 병력이 대부분 도망간 것으로 보입니다. 한양으로 보고한 병사 보다 훨씬 적은 병사들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신립이 조령을 보니 방어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판단한 것 같습니다. 참호 파고 목책 설치하고 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이거 하다가 군사들이 지칠수도 있고 기습을 당하면 방법이 없으니 그나마 가지고 있던 기병으로 공격한 것을 보입니다. 그런 판단으로 기병을 이동시켰는데 적어도 300여마리 이상의 말이 있었다고 하면 이 말들이 물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탄금대로 이동한 것으로 맞을 겁니다.
조선시대 조령 주위에 나무가 없었다는것에는 동의 하지않습니다 당시 나무가 적었던것은 한양과 전주 경주 평양같은 그시대의 대도시 주변에 그리고 농업인구가 많이 사는 평야주위에 산에 나무가 없었을뿐입니다 강원도나 조령같은 높고 험준한 산까지 나무하러 가지 않습니다 한양은 조선시대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라서 주위의 산에 나무가 없었지만( 밥짓는데 땔감으 로 쓰고 겨울에 온돌방 난방으로 사용했음) 가까운곳에 평야가 없고 그당시만 하더라도 호랑이 늑대 표범 곰이 많아서 나뭇꾼들도 나무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즉 인구가 적고 나무하러 가기 힘든 높은 산들에는 나무가 많았습니다 이건 조선말까지도 그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군사용 말들은 풀만 먹이지 않았습니다 귀리나 보리등 잡곡으로 전투시 높은영양을 공급하기에 한양 에서 출발할때나 가면서 말의 식량과 건초를 어느정도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시기가 4월28일 이라 곳곳에 이미 풀은 많았습니다 충주성 주위의 산에도 나무가 없는 대신에 풀들이 많았습니다
선조 인조 문조 라고 본인도 모르게 적군의 편에서 적군을 도와준 사람들입니다 신립도 적당한 인물이 아니었음에도 함경도나 만주에서 작은 전공좀 몇개 있다고 과장하고 부풀려서 평가된 인물(하기사 조선은 전쟁을 극도로 기피하고 무관들을 눌렀으니 제대로된 무관이 없었죠 이순신은 예외이지만) 신립을 핵심적인 위기에서 중용했기 때문입니다 탄금대 실패로 한양의 백성들 20만은 도망도 못가고 인질로 잡혀서 양반과 고관대작 부인과 딸들 젊고이쁜 양반녀들은 모조리 강0 당하고 나중에 명나라군이 평양전투에서 이기고 한양으로 왔을때 인질이 되었다가 전투가 시작되자 내부에서 난을 일으킬까봐 대부분 강0 하고 목을 베어 처형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후에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평민이나 노비출신 여자들까지 한양으로 가서 살아남은 양반가의 부인이나 첩이 되는행운을 누렸죠 전라도는 임진왜란 피해는 적었으나 대신에 정유재란때 왜군들이 여수로 상륙해서 전라남북도 에서만 맴돌면서 전라도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보이는 민간인들은 모조리 목을 쳐서 인구가 3분의1로 줄었고 섬에 살던 사람과 산간지역 사람들만 살아남았을 정도 였습니다
저는 굳이 산성 방어를 포기하고 평지에서 회전을 선택한 이유가 1. 모집한 군의 자질 부족, 2. 한양에 있는 임금의 존재, 3. 신립 본인의 일본군의 전략,전술 및 신무기 활용에 대한 이해도 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 니탕개의 난 당시 여진족의 전략 목표는 약탈이었고, 신립이 동원했던 부대는 물론 하삼도에서 추가 병력 지원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북방에서 잦은 교전으로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지역 사람들로 이루어진 병력이었습니다. 따라서 신립이 어떤 전략, 전술을 수립할 때 만약 어떤 지역을 희생되는 선택지가 있더라도 충분히 그것을 감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 병력의 궤멸이 아닌 이상 잃을 게 크진 않으니까요. (물론 전공에 따라 조정의 논공행상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겠지만) 더군다나 여진족의 공격 방향도 사실상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시의적절한 방어 전술이 선택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본 정규군과의 회전 상황은 예전 여진족과 상대할 때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본군은 세 부대로 나뉘어 한양으로 동시에 진격하는 중이었고, 이는 유교국가 조선의 장수인 신립 입장에선 어쩔 수 없이 방어에 유리한 지형 선택보단 유사시 한양으로 바로 달려가기 좋은 위치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또 신립은 당시 일본군 수준을 예전과는 달리 수가 매우 많아진 상태의 왜구 정도로 낮잡아 보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구들 역시 가장 큰 목표는 빠른 약탈과 히트 앤 런으로, 육지에서 정규군 수준의 대규모 전투를 치르는 전술엔 미흡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신립이 일본 정규군과 마주하게 되었음에도 그동안의 경험을 정보 삼아 왜구들을 토벌하던 때와 비슷한 선택(기병으로 적진을 빠르게 휘젓고 나머지 부대로 일망타진한다.)을 또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신립 본인의 실책도 꽤 있지만 여러 불행한 상황들이 한데 뒤엉켜 저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끔 강요당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즘 말로는 억까라고 하죠...?) 가만 보면 조선이 군을 운용할 때 건국 초엔 척후 관리와 정보 탐색, 취합, 분석에 대한 노력을 꽤 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날수록(특히 성종 이후로) 이런 암묵지나 실전 경험 같은 요소들을 등한시하고 수치 같이 겉으로 쉽게 드러나는 부분들만 중시했던 것 같아 아쉽습니다.
대규모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기본적으로 신립은 인성에 문제가 아주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상당히 난폭하고 독단적인 성격이었죠. 공식 기록으로 그게 다 확인될 정도면 진짜 문제가 아주 많았던 인물이라는 얘기죠. 그냥 지 성질과 능력대로 막 나가다가 기본적으로 해야 할 것도 못하고 다 말아처먹은 겁니다. 겁쟁이는 아니었지만 말이죠. 물론 그 당시 조선군의 상태가 너무 개판이라서 문제가 많았던 것도 팩트고요.
여러가지가 맞아 떨어지면서 전멸이라는 최악의 결과가 나온것 같습니다 첫째는 부하들의 조언을 무시했습니다. 일본의 전력에 대해서 과소평가 한것 같습니다. 당시 일본 육군 전력은 동아시아 최강수준이었고. 기병전에서도 다 대비가 되어있었는데, 그걸 조언하는 이일이나 휘하 장수들의 의견을 완전 무시했죠. 둘째는 탄금대를 보면 단순한 평야가 아닌 강이 두르고 있는 지형입니다. 아마도 기병으로 일본군을 포위섬멸하려 했던 것 같은데, 이는 조선군이 포위될 수 도 있는 것인데, 이에 대한 플랜 B가 없었습니다 자기 뜻대로 안될때는 적어도 퇴각할 전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마저도 세워 놓지 않고 신립 자신이 일격정면승부만을 고집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과신이고, 무모함입니다 자신이 일본군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몇차례 소규모 전쟁이라도 직접해봤으면 일본군에 대한 기세와 전략을 체험했을텐데 첫 전투에 정면승부...전군 투입이라는 최악의 수들만을 두고 무리했으니...전멸이지요...
머리가 나쁜 장수의 최후 일뿐입니다 똑똑한 여러부하들이 그렇게 건의하고 만류를 해도 지만 잘난줄 아는 수도없는 전쟁을 거친 왜군들을 멍청이들로 보는 오만함과 똥고집 때문에 한양에서출발한 조선최대 정예군 기병대 8천명과 충청도 병사 1만2천명을 합쳐서 2만명의 조선군을 몰쌀 시키는 대단한 전과를 올리고 자신도 목이 날아갔죠 물이찬 논이 없는 함경도에서 기마병으로 재미좀 봤다고 지형과 지리가 다른 평야지대 물이 가득찬 논에서 그리고 비온후에 질퍽질퍽한 들판에서 기마병으로 공격하면 이길줄 알았다는 ... 이일인가 하는놈은 경상도에서 부하들 다죽이고 와서 그와중에도 또 도망치고 ...
잘들었습니다. 설득력 있는 설명입니다. 일본군의 공격속도가 매우 빨랐습니다. 그런데다 부산진과 다대진, 동래성의 성민을 도륙하여 공포가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신립 장군으로서는 사지로 간 것이고, 아마도 전투준비할 시간이 없었다고 봐야 합니다. 26일 충주에 도착해서 28일 싸웠다면 전투를 강요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더 뒤에서 방어진을 쳤어야 하는데, 양 어깨에 걸린 왕의 기대와 책임감 때문에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일본병력 500명을 죽인 것으로 나오는데 거의 일본군 한 개 대대 이상을 죽였으니 혈투였다고 봅니다. 그나마 배수진이어서 그만큼이라도 싸웠다고 봅니다.
신립은 명장이될 자질이 처음부터 없는 인간입니다. 아주 단편적인게, 군관이 적이 코앞에 왔다는 보고를 했는데 그 군관을 참 한다는건 적 정보 획득에 소홀을 넘어 무시 했다는 뜻이고,, 정보 보고를한 군관이 참수되는걸 본 군인들이 그다음 부터는 보고 자체를 안할 겁니다.. 이순신 장군은 군관도 아닌 목동의 보고를 듣고 정찰병을 보내 전투에서 승리한 기록이 있습니다.. 신립은 포악한 성정에, 소대장 정도라도 잘하기 쉽지 않은 인사고, 그냥 명령받고 나가 용맹히 싸우는 병사 정도의 그릇입니다..
👏👏👏대다수 역사 채널이 자료 화면을 보여주면서 나레이션으로 이어가는 구성인 것과 다르게 이 채널은 직접 가보는, 즉 답사하고 드론 띄워 촬영한다는 데 차별점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너무 소중합니다.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언제나 쥔장님의 열정을 응원하며 성원합니다.
좋은말씀 감사드립니다. 현장방문 드론촬영은 작년 8월이후로 채널의 정체성으로 가져가고있습니다😄
얼마 전에 월악산 등산하고 충주에서 저녁 먹고 올라와서 그런가 더 와닿는 영상이라 감사합니다.
3:25 강물 위로 나르는 장면 너무 멋있군요!
4:21 2000년에 가봤을 때는 방송사 사극 촬영팀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깨끗하네요.
당시 박상아 배우를 봤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월악산은 몇번이나 촬영이 엎어진 곳이라 한이 맺혀있습니다😄
결국 신립은 소규모 일선부대 지휘관으로서 적합했지, 이런 대규모 전투를 감당할만한 총사령관급의 인물이 아니었다는게 학계의 평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니탕개의 난의 활약도 자세히 뜯어보면 기껏해야 몇 백명 단위의 적들을 상대로 싸운 경험이었을 뿐이지, 수천 단위의 정규군을 상대로 싸운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전략적 식견이 상당히 부족했고 결국 이 때문에 탄금대 전투와 같은 비극이 발생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설이 요즘 많이 보이는것 같습니다🤔
늘 감사히 잘 보고 있어요 ~
오 시청 감사드려요😄😌
수준높은 고퀄의 영상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시청 감사드립니다😌😄
자세한설명으로. ....귀에 쏙쏙 ~~~~ 감사합니다 ^^
오 시청 감사드려요😄😌
뜬금없지만 이런영상을 볼때마다 다시한번 이순신 장군이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어렸을때는 신립장군이 참 어리석고 무능한 장수라 생각했는데 나이를 먹고보니 신립도 그 순간에는 자신이 내릴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ㅠ ㅠ
복안이 있었고 최선의 방법이었다 판단한 결과일것이겠지요, 제일 믿을수 있는 기병으로 할수 있는 전투를 한것같습니다😞
그럼 조령에 올라가서 고니시부대와 유격전술 피려고 했는데 고니시가 안싸워봐?? 시간은 가고 다른부대가 신립 보급 끊고, 가토든 구로다든 그 부대는 선조향해 가고, 신립은 산에 쳐박혀 굶어 죽는게 전술이라는 겁니까??
나는 신립에 대해 지휘관으로 능력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고 부정적으로 보는데요. 그는 전투 전이나 전투 중에나 한번도 상황에 맞거나 상식적인 판단을 하질 안씁니다. 27일 일본군 선봉대는 조령과 충주까지 이어진 길을 무혈 점령하고 그날밤 일본군 정찰대는 단월역까지 진출합니다. 이건 일본측 기록에도 적혀있습니다. 단월역에서 그걸 목격한 조선군 정탐병은 신립에게 보고하지만 신립이 단월역을 확인한 결과 일본군 정찰대는 철수했는지 보이지 않자 허위보고라고 믿고 정탐병을 참수합니다. 이 부분ㅇㅔ서 정탐과 정보를 매우 중요시한 이순신과 극히 대조됩니다. 28일 정오경 고니시 본군이 단월역에 나타나자 신립은 그제서야 충주성에서 나와 전 병력을 탄금대앞 송산에 진을 칩니다. 이때 일본군 좌군과 우군은 조선군을 포위하고 퇴로 차단을 위해 각각 조선군 몰래 우회하여 전개하고 있었고 신립은 부대를 단월역 앞 달천평야로 이동시킵니다. 이때 단월역에는 고니시의 중군 병력이 7000명이 있었고 신립의 조선군은 8천 또는 1만6천이라는데 어쨌든 기병은 절대 5천을 넘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는 3~4천 정도 예상합니다. 그사이 일본군의 선봉부대는 텅비어 있던 충주성을 점령합니다. 신립은 성을 왜 비워둔 것일까요? 읍성이 전장과 지척이므로 수비병력과 예비대를 두었다가 전투시에 적절히 활용해도 됐을텐데. 왜 그랬을까요? 신립은 기병대에 돌격명령을 내리고 전투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상대는 지금까지 신립이 상대한 마적떼같은 여진족이 아니라 100년간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숱한 전투경험으로 만들어진 전투기술자들로 편성된 정규군이었다. 일본군은 전부가 보병이었지만 장창과 조총으로 기병을 잡을수 있다는건 그틀에게 상식이었고 하물며 중기병도 아닌 궁기병 정도는 학살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라운드 상태는 평원이 아니라 비온뒤의 논밭이어서 질척한 그라운드 상태와 논둑 밭둑은 말을 달리기에 장애가 되고 제약을 주어 기동을 어렵게 했다. 특히 조총병들의 전열사격전술은 조선 기병대에게 엄청난 타격과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는 기병으로 보병을 치면 필승이라는 신립의 상식을 뛰어넘는 상황이었다. 연속된 기병돌격이 좌절되는 동안 갑자기 조선군 본진 양측면으로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조선군은 와해되고 신립은 탄금대(나루터)로 후퇴하였다가 잡혔고 부장 김여물은 교전 중에 사로잡혀 둘다 수급이 떨어졌다. 일본군의 기록이다. 그 기록에 수급 3천에 포로가 수백명이었다고 한다. 설령 달천나루터와 탄금대나루터에서 강을 건넜다해도 강건너에도 일본군이 진출하여 구경하고 있었으니 말 그대로 전멸이었다. 공식적인 생존자는 전투 직전 이탈한 도망기술자 이일과 충주목사 이종장 등 4명이다.
이일과 이종장은 종사관 김여물과 함께 사전에 신립에게 조령에서 방어하기를 조언했었다. 이 둘은 결과를 예상하고 튀기로 작정한듯하다. 하기야 조령이든 어디든 고개마루에서 막아도 어떻게될지 모르는데 모든면에서 열세인데도 회전을 고집하는 지휘관이 적군보다 더 무서웠을 것이다. 징비록에는 유성룡이 출정하는 신립에게 신무기인 조총에 대해 우려를 표하자 그깟 조총이라고 쏘는대로 다 맞는답디까? 라며 호기로운 무쌍인지 무식인지 떠벌이는 신립의 그 한마디가 대부대 전투를 지휘할 능력이 안된다는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술적 전략적 사고능력이 없는것이다. 게다가 조총을 조선의 총통 정도로 생각하는 신립 등 조선군 지휘관들의 무지는 전국시대 동안 조총만 수입한게 아니라 운용방법과 제조술까지 섭렵한 일본군에게 조선군은 무자비한 참패와 엄청난 희생을 당했다. 이런 조선군 지휘관들의 무지는 탄금대 전투 한달후에 벌어진 용인전투에서 또한번 드러난다. 와키자카가 이끄는 1600명의 일본군에게 7만명의 조선군과의 전투에서 조선군 선봉대가 일본군 조총병을 무시하고 무모한 선제공격하다가 궤멸되고 이튿날 조선근왕군 본대가 습격당해서 도망가는 와중에 5만명이 죽는 참패를 당했다. 다만 신중한 공격을 조언한 권율과 황진이 이끄는 소부대 정도만 편제를 유지한채 독산성으로 후퇴하여 이치전투를 가능하게했다. 임진왜란의 3대패전인 탄금대패전, 용인패전, 칠천량패전에는 모두 무능한 지휘관이 있었다.
오 장문의 댓글 감사드립니다😌
영상 늘 감사합니다.
오 시청 감사드립니다😌😄
드디어 드디어 여행 중 유일하게 찾은 탄금대가 나왔네요. 저전거 타고 조령을 넘었습니다 ㅎㅎㅎ 아 생각해 보니 낙안읍성도 갔네요 ㅎㅎㅎ
오 낙안읍성이면 끝까지 가셨군요😮
5년전에 탄금대 답사를 거쳤는데 달천평야도 다음에 충주답사 때 들러야겠습니다. 사적돌님 영상을 보며 앞으로 답사할 곳을 체크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충주산성+ 대림산성+ 달천평야)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청하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대림산성 영상을 아직 못만들었군요😮
진짜 해설 잘한다♡♡♡♡
맘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모레 새벽이면
배에 차를 싣고
완도로 가서
8박9일 여정에 듭니다.
가는 곳곳 마다
선조들의 얼을 많이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
🧧🧧🧧👍
가을의 완도라니.. 그러고보니 가을에 방문한적이 없네요, 좋은 여정되시길 빕니다😄😌
영상 초반에 회전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전투의 결과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오 회전은 전투가 가능한 특정 지역에서(보통은 평지나 구릉) 양측의 군세를 동시에 투입하여 승패를 겨루는 방식입니다. (영문 Pitched battle, set-piece battle, 한자 會戰)
보통은 한번의 전투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기 때문에 양측의 가용전력을 전부 투입하며 위험부담이 큽니다.
탄금대전투에서 신립장군이 패배하여 한양이 고니시에게 점령당하고 선조가 의주로 몽진합니다.
전라순찰사 이광이 급히 하삼도(충청전라경상) 근왕군을 편성했으나 용인에서 와키자카에게 대패하고
흩어진 근왕군은 의병으로 되살아납니다.
이때 유일하게 질서있는 퇴각을 한 권율과 황진이 이치전투에서 일본군을 막아내고 다시 북상하여 독산성 전투를 승리로, 행주산성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임진왜란의 전세 전환이 일어납니다.
@@사적돌
자세하고 친절한 부연 설명 감사합니다.❤
원래 신립이 임진왜란 이전에 함경도 병마절도사 시절에 여진족 니탕개의 난을 진압했던 적이 있어서 조령에 병력을 배치하지않고
탄금대로 진을 옮겼지만 결국 일본군의 조총에 몰살 당했다고 하지요 다른 설화도 있는데 신립이 산길을 가다 날이 저물었는데 멀리 불빛이 보여 찾아갔는데 여자 혼자 사는 집 이였는데 하룻밤을
묶고 길을 나서려는데 그 여자가 집을 불태워 자결했고 시간이 흘러 임진왜란 당시에 신립장군에게
나타나 탄금대로 옮기라고 해서 옮겼는데 결국엔 패전하고 신립장군은 탄금대에서 자결했다는 설화도 있답니다
오 외딴여자 설화 들어봤습니다😮
충주성은 방어할수 있는 여건이 거의 없었습니다. 일단 성자체가 고을읍성이라 성벽 자체도 높지 않았고 (대략 3m) 최소 5m 이상은 되어야 성곽의 역활을 제대로 수행할수 있을 뿐더러 무엇 보다. 농성을 하려면 충주성에 백성들과 관리들 군사들이 있어야 하는데. 신립이 갔을 당시에 충주성은 백성들이 피난 하여 텅 비어 있었고 관리 와 병사들도 대부분 흩어진 상태였습니다. 심지어 곡식 창고 마져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피하는 바람에 창고도 비어 있었습니다. 식량도 없고 성자체도 방어가 제대로 안되는 상황에 들어가면 성을 포위 당하고 독안에 든 쥐 꼴이 됩니다. 거기다 일본군의 숫자는 많았으니 신립을 포위하고도 나머지 병력은 한성을 향해 진격하겠죠. 신립이 충주를 지키고자 하는게 아닌이상에야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 하는 목적 달성에는 실패입니다.. 신립도 이런 상황을 충분히 알았기에 충주성의 농성을 포기 한겁니다. 방벽 삼아 싸우지도 못하고 성안의 식량도 없고 휴대식량으론 얼마 못갈거고 조령 문경도 전쟁이 끝난후 중요성을 인정받아 길목마다 성곽을 쌓고 농성할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거지 그당시엔 아무런 준비도 없었습니다. 거기다 문경이나 조령은 우회로가 아예 없는것도 아니었다고. 신립의 머리속은 복잡 했을겁니다. 거기 막았는데 만약 우회하면 눈앞에서 일본군을 놓치게 되는 셈인지라.
오 덧글감사드립니다😌
❤❤❤
. 일단 회전을 택한 이유는 왜군에게 충격을 줘서 (고니시의 1군 즉 예봉을 꺽어) 진격을 주춤 시킨후 퇴각을 고려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 1군을 격파하면 따라오던 2군과 3군 역시 진격이 주춤 할수 밖에없겟죠. 퇴각을 염두 하고 있었다 는건 임용한 박사님의 신립 전투기록을 보면 수원으로 퇴각해서 그곳의 방어군과 ㅎ 같이 막는다 란식의 장계를 이미 올린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기병의 공격이 효과를 발휘 하지 못했고 일본군의 몰이에 걸려 반대로 배수진을 강요 당하지 않았나 싶음. 궁기병이 효과적이지 않다 는걸 안 시점에선 이미 퇴각이 무리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혹은 퇴각을 하려 했으나 이미 퇴로를 차단 당했을 수도 있고 .. 거기다, 훈련도 안된 군대에게 질서 정연한 퇴각 이라는게 사실 말이 쉽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지고 있는데 섣불리 퇴각을 명하면 퇴각은 커녕 오히려 뿔뿔이 흩어져 도망을 하려 하겠죠. 오죽하면 중세 유럽에서도 질서 정연하게 퇴각하면 대단히 기강 잘 잡힌 군대라고 평가를 받았을 정도니.
고니시와 회전이 시작되고 시간차가 거의 없이 가토가 충주성 뒤로 우회하여 북상했습니다, 이를 일본군의 포위기동으로 보고
할수있는 전투를 한것 같습니다. 제생각도 말씀하신바와 제일 가깝습니다😌
진입로가 너무나도 협소하고 주차공간도 상당히 부족합니다.특히 주말에 차 몰고 갔다가 주차공간 없어서 다시 나오는데 진짜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면 길 이 구불구불해서 곡예하듯 후진해야함.충주시 제발 돈 투자좀 해서 길 넓히고 주차장좀 넓히세요.
충주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장소가 탄금대 제철유적이지요, 충주시에서 빌견되는수많은 고대유적들의 중심이자 시작점이될수있는곳이지요😮
신 립 장군!! 안타까운 인물 이지요...😊
안타까운 최후입니다😞
정보의 비대칭이지 않을까 싶네요. 어차피 왜군은 한양까지 올라가서 선조를 잡는 것이라 선택사항이 별로 없이 그냥 밀고 올라가면 되지 않있나 싶습니다. 신립은 여러 대안 중에 본인이 가장 자신있는 기병을 이용한 회전을 택했는데 날씨나 조총 변수로 봤을때 아쟁쿠르 급으로 털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병력차이로 봤을때 자살이지 않을까도 싶네요. 아무도 모르는 게 아닐까요. 탄금대 아름답긴 하지만 슬픔이 있네요.
새로운 사료가 나오지 않는 이상은 알기 어렵겠지요, 조선시대에도 내내 갑론을박이었다고합니다🤔
과거에 산성에는 요즘처럼 나무가 많았나요??? 아니면 구한말처럼 민둥산 이엿나요?
평시에는 땔나무 목책 등의활용으로, 전시에는 공격군의 화공에 대비하여 잘라냈을겁니다😌
왜란기 전반에 공통되는 현상입니다만, 그 중에서도 탄금대 전투는 지나치게 결과론으로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본은 단순히 조총이라는 무기의 특성을 떠나서 수십년 간의 전투로 이미 각종 병종에 의한 공격에 대한 대응방법, 그리고 전투 대형(소나에)으로 전환을 염두에 둔 행군 대열, 집중 방어시설을 입체적으로 설치한 성채에 대해 희생을 최소화 하며 강행 돌파 하는 방법 등 다각도에서 숙련된 병사, 병력의 운용법이 확립이 된 정예병을 넘어 정예군에 가까운 군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정을 속속들이 알수도 없는 상황이니, 북방 이민족들을 상대로 하던 전술과 일본 정규 병력의 전술이 계급장 떼고 맞짱을 떠서 어느 한 쪽이 깨지는 전투는 어디서 일어나도 일어났어야 하는 전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전투를 통해 북방에서 통하던 전술은 일본에서 온 군세에는 통하지 않는 다는 교훈도 얻을 수 있게 되었고요.
그리고 적의 대규모 병력의 진군을 소규모 병력으로 목을 차단해서 지연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단정도 성급한 판단이라고 봅니다. 당시 일본군의 전투 스타일을 보면 소규모 병력으로 목을 차단 해봐야 돌파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당시 히데요시 직속 병력들은 공성전 귀신들이었고, 각종 해자와 집중 방어시설로 수십겹으로 쌓인 산성도 강행 돌파로 함락 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을 미루어 보아, 조선의 방어 시설은 그 정도로 고도화 되진 않아서 길목을 막는 전술만 택했으면 능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건 어렵다고 봅니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군조직은 토목공사도 장기였던데다, 야전에서는 임시 진지를 계속 옮겨 다니는 방식이라 공격군은 일본측이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단순한 전투대형끼리의 결전인듯 싶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져 보면 방어측이 공성을 하고 있는 듯한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만드는 전투방식이 많았는데, 결국 신립도 이런 스타일에 패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이나, 상대에 대한 파악이 되지 않은 상황이니 직접 엊어 맞아가며 알아가는 과정은 필연이었지 않았을까 싶네요.
다만 피해가 커 아쉬움이 더하긴 합니다만.
장문의 댓글 감사드립니다😄😌
군마가 파발마가 구분이 있었을까요 ?
군마는 식량이 두배는 들었는데,ㅡㅡ제대된 군마는 없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군마가 그 총소리를 감당했을까요 ?
시청 감사드립니다😌
2007년에 징비록을 우연히 읽었는데 유성룡이 신립이 가기전에 조총을 조심하라 했지만 조총이 세대하도 쏜다고 다 맞지는 않는다고 했다네요
징비록은 꼭한번 읽어봐야되는 책이지요😌
와 저는 이거 보고 더 혼란이 왔어요ㅜㅜ
저는 제승방략의 문제점으로 어중이 지방군이 충주로 모여서 신립이 조령 등 산맥에서 막다가 병사들이 싸우지도 않고 도망갈까봐 배수진 친 거로 알고 있었는데요
말씀하신 내용 중 궁기병이면.... 기동력으로 치고 빠지고 해야 하는 병종인데 이러면 그냥 잡병이라고는 할 수 없고...
기병전술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신립이... 단순 보병대 기병 회전으로 생각했다면 기동력을 발휘할 수 없는 충주를 택한 것도 이해 할 수 없고.....
와 고대사도 아니고 기록 많은 조선사인데도 이게 분명하지 않네요
그만큼 논란이 많은 결정이지요.. 임진왜란의 향방을 결정한 전투라서...😞
병력 전부가 궁기병이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 8000-16000의 병력 중 기병은 많아야 반이었겠지만 편제된 기병 모두가 궁기병이었다고 생각하는것은 좀 곤란해요😅 조선의 기병 전술은 기본적으로 궁기병이 교란->창기병 돌격이었습니다. 근데 문제는 궁기병의 사거리는 조총보다 길지 않아 궁기병들이 접근하자마자 조총에 전열이 붕괴했을겁니다. 그리고 단병전에 능숙한 일본군이 참마도 등으로 빠르게 접근하자 창기병이 뒤따라 돌격할 시간도 없이 기병대가 무너졌을꺼에요
해당 전투의 임무가 무엇이었는지도
중요할 듯 합니다.
적의 섬멸이였는지, 후방에서 방어선 구축을 위한 시간을 버는
것이였는지요.
전자라면 모이는 지점인 충주에서 사력으로 막으려 했던게 납득이 가고, 후자가 목적이였다면 납득이 어렵지만 당시 조선의 상황을 보면
적의 섬멸을 기대하고 보내지 않았을까 합니다.
양쪽의 군사적 능력 차이는 고려되지 않은 상태에서요.
그 즈음 비가 왔다면 말이
뻘밭에 묶여 기동이 매우
낮았을 것인데. 기병이 평야에서 싸우는 것이 정답일까요?
저같아도 궁기병을 저기에 밀어넣지 않을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신립의 잘못된 판단으로 생각 됨..........왜군에 어느 정도 피해을 입혔는데 군사력 차이로 졌다면 이해되지만 고니시 군에 아무런 타격을 입히지 못한 건 지휘관으로서 자질 부족임........
너무 안타까운 전투지요😞
정보의 부재가 아닐까요
척후를 안돌린 이유가 궁금합니다🤔
머리가 나쁜 장수의 최후 일뿐입니다 똑똑한 여러부하들이 그렇게 건의하고 만류를 해도 지만 잘난줄 아는 수도없는 전쟁을 했던 왜군들을 멍청이들로
보는 오만함과 똥고집 때문에 한양에서출발한 조선최대 정예군 기병대 8천명과 충청도 병사 1만2천명을 합쳐서 2만명의 조선군을 몰쌀 시키는 대단한
전과를 올리고 자신도 목이 날아갔죠 물이찬 논이 없는 함경도에서 기마병으로 재미좀 봤다고 지형과 지리가 다른 평야지대 물이 가득찬 논에서 그리고
비온후에 질퍽질퍽한 들판에서 기마병으로 공격하면 이길줄 알았다는 ... 이일인가 하는놈은 경상도에서 부하들 다죽이고 와서 그와중에도 또 도망치고 ...
아.. 신립..
안타까운 최후입니다😞
머리가 나쁜 장수의 최후 일뿐입니다 똑똑한 여러부하들이 그렇게 건의하고 만류를 해도 지만 잘난줄 아는 수도없는 전쟁을 거친 왜군들을 멍청이들로
보는 오만함과 똥고집 때문에 한양에서출발한 조선최대 정예군 기병대 8천명과 충청도 병사 1만2천명을 합쳐서 2만명의 조선군을 몰쌀 시키는 대단한
전과를 올리고 자신도 목이 날아갔죠 물이찬 논이 없는 함경도에서 기마병으로 재미좀 봤다고 지형과 지리가 다른 평야지대 물이 가득찬 논에서 그리고
비온후에 질퍽질퍽한 들판에서 기마병으로 공격하면 이길줄 알았다는 ... 이일인가 하는놈은 경상도에서 부하들 다죽이고 와서 그와중에도 또 도망치고 ...
지형에 잘 몰랐던건 고니시도 마찬가지 였을거라 생각하면 오로지 지휘관의 역량차이겟네요 오랜내전으로 다져진 장수와 반란진압이 대부분이었던 장수의 차이
두 장수의 결이 많이 다르지요😌
그 기병이 조총에 녹아내렸죠;; 몇 십년 잘 훈련된 기사들이 칼도 못휘둘루는 농민에게 지는게 총이였죠.
열병기의 등장도 일종의 산업혁명이 아닐까요🤔
사거리는 활이 더 길지 않았나요?
조총은 재장전 시간이 보통1분정도라고 얘기 하시는걸 봤는데
@@바람바람바람-l4d 근데 활은 편전이 아닌이상 날아가는 모습도 보이고 파워면에서는 조총이 우세하죠. 결국은 종합적으로 볼때 활보다는 조총이 우세인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평지 회전에서 승리한 유명한 전투는....
귀주대첩만 떠오르네요 ~^^
우리나라는 유독 회전에서 약하지요🤔
우리나라 전투 기록이라고 하는 것이 직접 보고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들었다는 이야기 라던지 패전병의 변명이 섞인 것이 많고 조선왕조 실록 조차 들은 이야기와 소문을 적은 것이 많아서 여러가지를 유추해 봐야 합니다. 특히 탄금대 전투처럼 패전은 정확한 기록이 없고 소문을 많이 적을 수 밖에 없는데 이럴 경우 대부분 '장수가 무능해서 졌다.'는 식의 기록이 많을 수 밖애는 없습니다. 그래야 왕조와 핵심 관리들이 책임을 피해갈수 있으니까요. 이것의 핵심은 우리 병력이 많았는데 장수가 작전을 잘못 세워서 졌다고 하는 것이죠.
저는 궁기병의 숫자부터 의문 입니다. 1000마리가 넘는 말이 탄금대에서 풀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군마가 하루에 먹는 풀이 최소 10kg의 풀을 먹는데 1000마리면 하루 1톤이 넘는 풀을 먹었다는 이야기 인데 충청도에서는 불가능한 숫자 입니다. 조선시대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파발마를 운영하는 데도 풀이 많아서 골치를 앓는 조선 정부 입니다. 1000마리의 말이 한곳에 모여 있다면 말먹이를 댈 방법이 없습니다.
또한 조령에 대해서도 좀 의문입니다. 당시 우리나라 산은 나무가 많지 않았습니다. 특히 삼남지방의 경우 사람이 많이 모여 살아서 나무를 땔감으로 써야 하기 떄문에 지금처럼 빽빽한 나무는 없었습니다. 당시 조령에는 성도 없었습니다. 대부분 흙으로 이루어진 지역인데 이런 지역에서 방어전을 하려면 참호를 파고 장애물을 설치 해야 합니다. 이건 상당한 시간이 드는 일입니다. (이치나 웅치 전투에 승리 원인은 여기에 있습니다. 미리 조선의병들이 가서 충분한 참호와 장애물을 설치 했습니다. )
저의 개인적인 생각은 일단 궁기병 숫자가 많지 않았고 남쪽 징집병들이 많았는데 이 병력이 대부분 도망간 것으로 보입니다. 한양으로 보고한 병사 보다 훨씬 적은 병사들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신립이 조령을 보니 방어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판단한 것 같습니다. 참호 파고 목책 설치하고 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이거 하다가 군사들이 지칠수도 있고 기습을 당하면 방법이 없으니 그나마 가지고 있던 기병으로 공격한 것을 보입니다. 그런 판단으로 기병을 이동시켰는데 적어도 300여마리 이상의 말이 있었다고 하면 이 말들이 물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탄금대로 이동한 것으로 맞을 겁니다.
오 장문의 덧글 감사드립니다😄😌
조선시대 조령 주위에 나무가 없었다는것에는 동의 하지않습니다 당시 나무가 적었던것은 한양과 전주 경주 평양같은 그시대의 대도시 주변에 그리고 농업인구가 많이 사는 평야주위에
산에 나무가 없었을뿐입니다 강원도나 조령같은 높고 험준한 산까지 나무하러 가지 않습니다 한양은 조선시대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라서 주위의 산에 나무가 없었지만( 밥짓는데 땔감으
로 쓰고 겨울에 온돌방 난방으로 사용했음) 가까운곳에 평야가 없고 그당시만 하더라도 호랑이 늑대 표범 곰이 많아서 나뭇꾼들도 나무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즉 인구가 적고 나무하러 가기
힘든 높은 산들에는 나무가 많았습니다 이건 조선말까지도 그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군사용 말들은 풀만 먹이지 않았습니다 귀리나 보리등 잡곡으로 전투시 높은영양을 공급하기에 한양
에서 출발할때나 가면서 말의 식량과 건초를 어느정도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시기가 4월28일 이라 곳곳에 이미 풀은 많았습니다 충주성 주위의 산에도 나무가 없는 대신에 풀들이 많았습니다
자기가 잘하고 잘할수 있는 방법으로 전투한거죠 그래서 신립은 우장 아니지만 명장 또한 아니지요
400년을 회자되고 있으니 확실히 역사에 남게 되었네요🤔
솔직히, 조령에서 매복을 하지 않고, 남산성에서 농성전을 전개하지 않은 것은 미스테리입니다. 다만, 전혀 준비가 안된 지방군에 현장을 모른 지휘관이 배수의진으로 궁지의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는 전략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선조만 잡으면 될줄알고 한양가는데만 급급했던 고니시가 나중에 보급때문에 고생한것을 보면 산성에 들어가는것도 더 좋은 방법이었을것 같습니다🤔
선조 인조 문조 라고 본인도 모르게 적군의 편에서 적군을 도와준 사람들입니다 신립도 적당한 인물이 아니었음에도 함경도나 만주에서 작은 전공좀 몇개 있다고 과장하고 부풀려서
평가된 인물(하기사 조선은 전쟁을 극도로 기피하고 무관들을 눌렀으니 제대로된 무관이 없었죠 이순신은 예외이지만) 신립을 핵심적인 위기에서 중용했기 때문입니다 탄금대 실패로
한양의 백성들 20만은 도망도 못가고 인질로 잡혀서 양반과 고관대작 부인과 딸들 젊고이쁜 양반녀들은 모조리 강0 당하고 나중에 명나라군이 평양전투에서 이기고 한양으로 왔을때
인질이 되었다가 전투가 시작되자 내부에서 난을 일으킬까봐 대부분 강0 하고 목을 베어 처형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후에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평민이나
노비출신 여자들까지 한양으로 가서 살아남은 양반가의 부인이나 첩이 되는행운을 누렸죠 전라도는 임진왜란 피해는 적었으나 대신에 정유재란때 왜군들이 여수로 상륙해서 전라남북도
에서만 맴돌면서 전라도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보이는 민간인들은 모조리 목을 쳐서 인구가 3분의1로 줄었고 섬에 살던 사람과 산간지역 사람들만 살아남았을 정도 였습니다
저는 굳이 산성 방어를 포기하고 평지에서 회전을 선택한 이유가 1. 모집한 군의 자질 부족, 2. 한양에 있는 임금의 존재, 3. 신립 본인의 일본군의 전략,전술 및 신무기 활용에 대한 이해도 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 니탕개의 난 당시 여진족의 전략 목표는 약탈이었고, 신립이 동원했던 부대는 물론 하삼도에서 추가 병력 지원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북방에서 잦은 교전으로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지역 사람들로 이루어진 병력이었습니다. 따라서 신립이 어떤 전략, 전술을 수립할 때 만약 어떤 지역을 희생되는 선택지가 있더라도 충분히 그것을 감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 병력의 궤멸이 아닌 이상 잃을 게 크진 않으니까요. (물론 전공에 따라 조정의 논공행상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겠지만) 더군다나 여진족의 공격 방향도 사실상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시의적절한 방어 전술이 선택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본 정규군과의 회전 상황은 예전 여진족과 상대할 때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본군은 세 부대로 나뉘어 한양으로 동시에 진격하는 중이었고, 이는 유교국가 조선의 장수인 신립 입장에선 어쩔 수 없이 방어에 유리한 지형 선택보단 유사시 한양으로 바로 달려가기 좋은 위치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또 신립은 당시 일본군 수준을 예전과는 달리 수가 매우 많아진 상태의 왜구 정도로 낮잡아 보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구들 역시 가장 큰 목표는 빠른 약탈과 히트 앤 런으로, 육지에서 정규군 수준의 대규모 전투를 치르는 전술엔 미흡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신립이 일본 정규군과 마주하게 되었음에도 그동안의 경험을 정보 삼아 왜구들을 토벌하던 때와 비슷한 선택(기병으로 적진을 빠르게 휘젓고 나머지 부대로 일망타진한다.)을 또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신립 본인의 실책도 꽤 있지만 여러 불행한 상황들이 한데 뒤엉켜 저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끔 강요당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즘 말로는 억까라고 하죠...?)
가만 보면 조선이 군을 운용할 때 건국 초엔 척후 관리와 정보 탐색, 취합, 분석에 대한 노력을 꽤 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날수록(특히 성종 이후로) 이런 암묵지나 실전 경험 같은 요소들을 등한시하고 수치 같이 겉으로 쉽게 드러나는 부분들만 중시했던 것 같아 아쉽습니다.
경직된 조직의 한계지요😞 장문의 덧글 감사드려요😄
병자호란과 대비가 되는 전투죠
병자호란에서 신속기동이 가능한 부대가 저랬다면 상황이 달랐겠죠.
물론 임진왜란 이후 모든게 바뀌었고
궁기병의 몰락이 후에 삼전도까지 영향을 미치는 스노우볼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드네요
오 덧글 감사드립니다😌
쏜다고 다 맞는답니까 참내, 신립의말
시청감사드립니다😌
신립 입장도 들어봐야겠죠.
원균은 닥쳐도 되지만
신립은 솔직히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 같은데
극단적으로 평가 절하 하는건
좀 그래요
일본군은 여러갈래로 갈라진데다 아군의 병력열세인 상황에서 궁기병으로 차단목적의 전투를 벌여야했지요,, 사실상 회전이 가장 좋지요🤔
아파요
시청 감사드립니다😌
대규모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기본적으로 신립은 인성에 문제가 아주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상당히 난폭하고 독단적인 성격이었죠. 공식 기록으로 그게 다 확인될 정도면 진짜 문제가 아주 많았던 인물이라는 얘기죠. 그냥 지 성질과 능력대로 막 나가다가 기본적으로 해야 할 것도 못하고 다 말아처먹은 겁니다. 겁쟁이는 아니었지만 말이죠. 물론 그 당시 조선군의 상태가 너무 개판이라서 문제가 많았던 것도 팩트고요.
오 해당 기록을 봤습니다. 과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선조가 부족한 이를 앞장서게했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너무 황당한 패배라서 그렇지요🤔
"지금으로 치면 수기사나 제7기동군단 전력을 지휘관의 삽질로 완샷에 말아먹은 경우네..!!"
병종의 활용에서도 상당히 아쉬웠지요😞
여러가지가 맞아 떨어지면서 전멸이라는 최악의 결과가 나온것 같습니다
첫째는 부하들의 조언을 무시했습니다.
일본의 전력에 대해서 과소평가 한것 같습니다. 당시 일본 육군 전력은 동아시아 최강수준이었고.
기병전에서도 다 대비가 되어있었는데, 그걸 조언하는 이일이나 휘하 장수들의 의견을 완전 무시했죠.
둘째는 탄금대를 보면 단순한 평야가 아닌 강이 두르고 있는 지형입니다.
아마도 기병으로 일본군을 포위섬멸하려 했던 것 같은데,
이는 조선군이 포위될 수 도 있는 것인데, 이에 대한 플랜 B가 없었습니다
자기 뜻대로 안될때는 적어도 퇴각할 전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마저도 세워 놓지 않고 신립 자신이 일격정면승부만을 고집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과신이고, 무모함입니다
자신이 일본군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몇차례 소규모 전쟁이라도 직접해봤으면
일본군에 대한 기세와 전략을 체험했을텐데
첫 전투에 정면승부...전군 투입이라는 최악의 수들만을 두고 무리했으니...전멸이지요...
오 장문의 덧글 감사드립니다😌
머리가 나쁜 장수의 최후 일뿐입니다 똑똑한 여러부하들이 그렇게 건의하고 만류를 해도 지만 잘난줄 아는 수도없는 전쟁을 거친 왜군들을 멍청이들로
보는 오만함과 똥고집 때문에 한양에서출발한 조선최대 정예군 기병대 8천명과 충청도 병사 1만2천명을 합쳐서 2만명의 조선군을 몰쌀 시키는 대단한
전과를 올리고 자신도 목이 날아갔죠 물이찬 논이 없는 함경도에서 기마병으로 재미좀 봤다고 지형과 지리가 다른 평야지대 물이 가득찬 논에서 그리고
비온후에 질퍽질퍽한 들판에서 기마병으로 공격하면 이길줄 알았다는 ... 이일인가 하는놈은 경상도에서 부하들 다죽이고 와서 그와중에도 또 도망치고 ...
회전을 설명하세요
양측의 군대가 개활지에서 동원가능한 전력을 투입하여 맞서 싸우는것입니다
말이 총소리에 적응이 안되었나보네요
오 덧글 감사드립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신립같은 명장이 도대체 왜그랬을까 하는 논란이 많은 전투였죠.
500년을 회자되니, 얼마나 아쉬운 전투였는지요😞
립이형.. 왜그랬어 ㅠㅜ
안타깝지요😞
여진족과 왜군 정규군의 차이를 몰랐던 불쌍한 신립....
조총의 밥이 되었네요....
마치 신겐이 노부나가에게 녹아난 것같이....
안타까운 전투입니다😞
잘들었습니다. 설득력 있는 설명입니다. 일본군의 공격속도가 매우 빨랐습니다. 그런데다 부산진과 다대진, 동래성의 성민을 도륙하여 공포가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신립 장군으로서는 사지로 간 것이고, 아마도 전투준비할 시간이 없었다고 봐야 합니다. 26일 충주에 도착해서 28일 싸웠다면 전투를 강요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더 뒤에서 방어진을 쳤어야 하는데, 양 어깨에 걸린 왕의 기대와 책임감 때문에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일본병력 500명을 죽인 것으로 나오는데 거의 일본군 한 개 대대 이상을 죽였으니 혈투였다고 봅니다. 그나마 배수진이어서 그만큼이라도 싸웠다고 봅니다.
오 장문의 덧글 감사드립니다😌
알고잇는것과 무시하는것은 다르지
알고도 무시햇다가 맞지
시청 감사드립니다😌
오만함의 기병술로 이길줄 알고 배수의 진으로 했다고 알고 있는데
여러갈래 일본군을 적은병력으로 차단해야했으니 고민이 많았을거라는 생각도 들지요 참 안타깝습니다😞
기병에 너무 과신하지 않았을런지요
아쉬워요
승전은 아니더라도
지연전은 됐어야 했는데요 ㅜㅜ
하삼도근왕군이 편성될때까지만 버텼으면 됐을텐데 참 아쉽습니다😌
신립~
대승이 아쉬운 통한임다.
부담이 많은 전투였지요, 여러갈래로 북상하는 대군을 차단 및 지연전을 펼쳐야했으니 암담했을겁니다😞
궁기병이 돌격하나 멀리서 쏘지 않나
일본군도 원거리 투사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으니 별로 좋은 판단이 아니었지요🤔
@@사적돌 늪이였네요 그리고 일본군이 돌격하고 활이 더 멀리나감 늪에 빠졌으니까 보병이 무브하지
일본은 100년의 내전을 겪은 군대입니다. 그걸 너무 무시했지요.
삼포왜란만 생각했던것 같지요, 정규군과 구분했어야하는데...😞
민족과 인간과 이런 윤회의 반복되는 것을 끊는 것이 본질적인 해답이라고 생각된다.
시청 감사드립니다😌
원균보다 더 멍청한 신립
시청 감사드립니다😌
오날날 용산돈까스 와 유사
신립 진짜 바보임
안타깝습니다😞
그 수많은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회전을 선택한 신립...안타깝다. 내가 볼땐 신립은 탄금대에서 죽으려 한 것 같다. 아무리 머리가 없는 장수라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일본군을 상대로 평야에서 회전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둔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자기 혼자 죽는거라면 모르지만 수 많은 병럭과 함께, 잘못하면 나라도 함께 죽는겁니다. 그런 감상적 생각 보다는 제한된 상황에서도 최대한 유불리 따저서 싸우고 빠지고 했어야 합니다. 통제사영감은 그걸 했지요.
충주성은 왜 방기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을 충주성 옆에짜고 화포의 도움도 받았더라면...🤔
신립이 개 무능했구만
시청 감사합니다😌
첫번째
오 시청 감사드립니다😄
신립은 명장이될 자질이 처음부터 없는 인간입니다.
아주 단편적인게, 군관이 적이 코앞에 왔다는 보고를 했는데 그 군관을 참 한다는건
적 정보 획득에 소홀을 넘어 무시 했다는 뜻이고,, 정보 보고를한 군관이 참수되는걸
본 군인들이 그다음 부터는 보고 자체를 안할 겁니다.. 이순신 장군은 군관도 아닌
목동의 보고를 듣고 정찰병을 보내 전투에서 승리한 기록이 있습니다..
신립은 포악한 성정에, 소대장 정도라도 잘하기 쉽지 않은 인사고, 그냥 명령받고
나가 용맹히 싸우는 병사 정도의 그릇입니다..
조총의 존재도 알았고 궁기병에게 돌격을 명하기도했지요 전술적인 판단에서 반대되는 행동들만 계속해서 많은분들이 더 의아하게 생각하시는듯합니다😞
무능력한 자를 유능한 장군으로여겨 이는 사람을 잘못 뽑았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그 시대 이후 현재에도 지도자 잘못 선택한 시대의 잘못이지요 말이 총알보다 빠릅니까 ?
신립의 최후를 안타까워한지가 벌써 400년이 넘었네요, 얼마나 대중의 탄식이 큰지 짐작조차 할수 없네요🤔
상황을 자신에 끼워맞춘 무능한 장수. 선조의 사위답다😢
너무나 중요한 전투였건만...😞
오날날 돌머리 용산멧돼지와 비슷한 신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