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우리 역사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말씀하신 광개토대왕은 확실히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며 대외적인 위상을 드높인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동북아시아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을 크게 확장한 것은 정말 대단한 업적이죠. 하지만 이후 우리 역사가 계속 침략만 당했다고 보기에는 조금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려 시기의 거란 및 여진의 침입을 막아낸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이나 조선 시대 임진왜란에서 의병과 조선 수군(특히 이순신 장군)의 활약은 우리 민족이 국난을 극복하며 끈질긴 저항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또한, 내부적으로 강한 체제를 구축하고 외교로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꾸준히 이어져 왔습니다. 역사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기에, 침략의 역사가 있지만, 동시에 지켜내고 싸운 저항의 역사, 문화를 꽃피운 평화의 시기도 있었음을 함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 혹시 더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언제든 질문해주세요! 🌟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 광개토대왕과 고구려의 대외 정책에 대해 관심 가져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구독자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당시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관계는 매우 복잡했고, 광개토대왕의 선택은 지금도 흥미로운 논쟁 주제입니다. 광개토대왕이 왜 백제를 병합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 전략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광개토대왕의 대외 정책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세력을 북쪽과 남쪽으로 동시에 확장했습니다. 그는 북쪽에서는 거란과 숙신(현재 러시아 극동 지역)까지 진출하며 북방 민족을 제압했고, 남쪽에서는 백제, 신라, 왜(일본 열도)와의 갈등에 적극 대응했습니다. 백제를 병합하려 하지 않은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제기됩니다: (1) 백제의 군사력과 방어 능력 • 백제는 고구려 못지않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백제의 수도 한성(지금의 서울)은 자연적으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고, 이를 함락시키는 데는 막대한 희생이 따를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2) 신라와의 동맹 유지 • 광개토대왕은 신라를 보호하며 간접적으로 고구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습니다. 신라와 동맹을 강화함으로써 백제를 견제하고, 남쪽의 왜 세력까지 차단할 수 있었죠. 만약 백제를 병합하는 데 지나치게 몰두했다면, 신라와의 협력이 깨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3) 왕조의 한계와 자원 배분 • 광개토대왕의 치세는 22년으로 상대적으로 짧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국내 정비와 북방, 남방 전선을 모두 관리해야 했습니다. 백제의 완전 병합은 고구려에 지나치게 큰 부담을 안길 수 있었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백제 병합이 불가능했을까? 백제를 병합했다면 신라까지 고구려의 영향권에 들어올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역사적 가정으로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병합이 곧바로 성공했을지, 그리고 신라가 자발적으로 고구려의 품에 안겼을지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합니다. (1) 백제와의 문화적·경제적 경쟁 • 백제는 고구려와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키며 남방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백제를 완전히 병합하려면 단순한 군사적 승리뿐 아니라, 백제의 경제와 문화를 흡수할 방법도 마련해야 했습니다. (2) 신라의 자주적 성격 • 신라는 초기 약소국이었지만, 서서히 독립적인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고구려가 백제를 병합했다고 해서 신라가 고구려에 의존했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고구려의 팽창에 반발해 백제의 잔존 세력이나 외부 세력과 손을 잡을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광개토대왕의 선택, 그리고 이후의 역사 광개토대왕의 전략은 고구려의 장기적인 생존과 번영을 염두에 둔 결과였습니다. 그의 정책 덕분에 고구려는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오랜 기간 강국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백제와 신라를 병합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선택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한반도의 균형을 유지하며 고구려의 세력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결정일 가능성이 큽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독자님의 흥미로운 시각 덕분에 저도 다시 한 번 역사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었네요! 😊 혹시 다른 부분이 궁금하시거나 추가로 논의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 댓글 남겨주세요. 📜✨
구독자님께서 언급하신 거란(契丹)과 비려(碑麗)를 동일시하는 문제는 동아시아 고대 민족사 연구에서 복잡한 논점 중 하나입니다. 말씀처럼 이 두 집단을 동일시하는 데에는 여러 해석과 학계의 논의가 있으며, 이에 대한 비판적 시각 또한 충분히 타당합니다. 이 주제를 학술적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 1️⃣ 거란과 비려의 역사적 배경 거란(契丹): 거란은 몽골계 또는 퉁구스계로 분류되는 북방 민족으로, 10세기에 요(遼) 제국을 세우며 동아시아의 주요 세력으로 떠올랐습니다. 거란의 기원은 4~5세기경부터 등장하지만, 《위서》와 《북사》 등의 기록에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비교적 후대입니다. 비려(碑麗): 비려는 주로 《삼국사기》와 중국 《위서》에서 등장하며, 고구려와 충돌하거나 협력했던 세력으로 기록됩니다. 비려는 부여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특히 고구려와 같은 계통의 동이족으로 해석됩니다. 2️⃣ 거란과 비려를 동일시하는 논리와 한계 학계에서 거란과 비려를 동일시하는 해석은 주로 이들이 비슷한 시기에 고구려와 충돌했던 기록에 기반합니다. 유사 시기의 활동: 5세기경 고구려와 북방 유목 민족 간의 충돌이 자주 언급되며, 이 시기 비려와 거란이 모두 등장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두 민족을 동일시하거나 혼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언어적 혼동: 일부 학자들은 "비려"와 "거란"이라는 이름이 음운적으로 연관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이는 명확히 입증되지 않았으며 단순한 추측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큰 한계가 존재합니다: 문화적·언어적 차이: 거란은 몽골계 또는 퉁구스계로 분류되는 반면, 비려는 부여 계통의 동이족으로 해석됩니다. 두 집단의 언어, 생활 방식, 사회 구조는 상당히 달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리적 차이: 비려는 주로 고구려의 북쪽 또는 북동쪽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이는 반면, 거란은 요하 유역과 내몽골 일대에서 활동한 것으로 기록됩니다. 3️⃣ 비려를 부여족으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 구독자님의 말씀처럼 비려를 부여족의 일파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주장이 강합니다. 족속적 연관성: 비려는 고구려와 문화적, 언어적 유사성이 언급되며, 이는 부여계 민족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역사적 맥락: 《삼국사기》와 중국 사서에 나타난 비려는 고구려와 협력하거나 충돌하는 과정에서 동이족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이는 북방 유목 민족인 거란과는 차별화된 특징입니다. 4️⃣ 강단사학계의 한계와 개선 방향 구독자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기존 학계에서는 거란과 비려를 동일시하거나 혼동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는 학술적 게으름이라기보다는, 사료 부족과 고고학적 증거의 미비로 인해 이루어진 추론의 결과로 보입니다. 사료 부족 문제: 동아시아 고대사에서 많은 사료가 소실되었거나 후대의 관점에서 왜곡된 경우가 많아, 민족 간의 관계를 명확히 밝히기 어렵습니다. 다각적 접근 필요: 언어학, 유전학, 고고학을 활용한 다각적 연구가 필요하며, 비려와 거란의 구분을 더욱 명확히 하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구독자님의 비판처럼 비려를 부여 계통으로 보는 시각이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려와 거란을 동일시하려는 시도는 단순화된 접근일 가능성이 크며, 더 많은 학문적 논의가 필요한 주제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문제를 깊이 고민하시고 지적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흥미로운 주제로 함께 이야기 나누길 기대합니다! 😊 📚 참고자료: 《삼국사기》 《위서》 김용만,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 정수일, 《동아시아의 민족과 국가》
나두 구독 열혈시청하는이유. ᆢ역사적 내용이 매우 충실하고 듣기좋고. 내용도. 매우 충실한. 진심 유투버 ᆢ감사
와.. 정말 감사합니다. 힘이 납니다 ㅜㅜ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대고구려가 우리의 참 모습이다 우리 옛영토를 반드시 되 찾아 우리의 본질을 회복하고 선조들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
멋진 댓글 감사합니다
정확한말은 광개토태왕이다
그것은 광개토태왕비에서 증명된다 그리고 그 당시 고구려는 그 주변 나라들을 모두 굴복시켰기에 명백한황제며 천하중심국가다
역사적 고견감사합니다~!
1388년 이전의 현재의 만주와 한반도는
그저 조용하고 평화로운 고려의 소소한 안전지대.
구독자님 역사적 고견 감사합니다~!
태왕이시죠 고구리의 황제들은!
역사적 고견감사합니다~!
저때 고구려가 삼국을 하나로 묶지 않은것이 큰실수였어 ㆍ
저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ㅜㅜ
幽,然,齊,魯,吳,越
이들이 백잔에 있으면서, 고구려로 부르는 별칭의 상대방은. (대명여지도 초기본,초중본,초말본,중초본,중중기본,중중초본)
구독자님 역사적 고견 감사합니다~!
북평(大都)의 도착
(대명여지도 초기본,초중본,중초본) 북방지역의 상실.
上都의 도착 (초중본) (금, 거란, 여진, 원나라의 과거사가 북방에 도착하는 토대가 됨)
구독자님 역사적 고견 감사합니다~!
幽,然,齊,魯,吳,越의 도착.
(대명여지도 초기본,초중본,초말본) 출발지 기준.
구독자님 역사적 고견 감사합니다~!
담덕 : 으아아아아아
우리 역사에 영토를 이렇게 확장하신 분은 광개토대왕이 유일하고 그 이후에는 늘 침략 당하고 살았다고 할 수 있지요.
구독자님, 우리 역사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말씀하신 광개토대왕은 확실히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며 대외적인 위상을 드높인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동북아시아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을 크게 확장한 것은 정말 대단한 업적이죠.
하지만 이후 우리 역사가 계속 침략만 당했다고 보기에는 조금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려 시기의 거란 및 여진의 침입을 막아낸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이나 조선 시대 임진왜란에서 의병과 조선 수군(특히 이순신 장군)의 활약은 우리 민족이 국난을 극복하며 끈질긴 저항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또한, 내부적으로 강한 체제를 구축하고 외교로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꾸준히 이어져 왔습니다.
역사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기에, 침략의 역사가 있지만, 동시에 지켜내고 싸운 저항의 역사, 문화를 꽃피운 평화의 시기도 있었음을 함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
혹시 더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언제든 질문해주세요! 🌟
대조영의 발해는 우리 역사가 아니라는거야?
@@asdf1234.2 발해 대조영도 광개토대왕 만큼 영토를 확장하지 못하였지요.
국강상광개토겸평안호태왕
감사합니다
광개토태왕 담덕은 탤런트 배용준 & 이태곤 씨죠~~ ㅎㅎㅎ 😀😃😄😁😆😅
맞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문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광개토대왕이 아니라 광개토태왕이라 칭하는게 맞지않을까요?
역사적 고견감사합니다~!
내가 구독하는 이유
.. 정말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 더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한반도에 국한된 영토로
고구리를 이야기한다?
대륙을 빼고는 고구리, 백제,
신라, 통일신라, 고리, 발해를 논하지 말라.
역사적 고견 감사합니다~!
광고가 자막을 가리는 컨텐츠!
제 영상에는 광고가 없습니다 ㅜㅜ
@전지적역사시점 영상 말고 좌측 하단에 계속 광고 떠요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쩜쩜이 클릭해서 닫기하세요.
신라는 몰라도 백제는 충분히 병합할수 있었을텐데 그냥 놔둔건 아쉬운 선택임은 확실하네. 백제만 병합했어도 신라는 자연스럽게 품안으로 들어왔을거고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 광개토대왕과 고구려의 대외 정책에 대해 관심 가져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구독자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당시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관계는 매우 복잡했고, 광개토대왕의 선택은 지금도 흥미로운 논쟁 주제입니다.
광개토대왕이 왜 백제를 병합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 전략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광개토대왕의 대외 정책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세력을 북쪽과 남쪽으로 동시에 확장했습니다. 그는 북쪽에서는 거란과 숙신(현재 러시아 극동 지역)까지 진출하며 북방 민족을 제압했고, 남쪽에서는 백제, 신라, 왜(일본 열도)와의 갈등에 적극 대응했습니다.
백제를 병합하려 하지 않은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제기됩니다:
(1) 백제의 군사력과 방어 능력
• 백제는 고구려 못지않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백제의 수도 한성(지금의 서울)은 자연적으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고, 이를 함락시키는 데는 막대한 희생이 따를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2) 신라와의 동맹 유지
• 광개토대왕은 신라를 보호하며 간접적으로 고구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습니다. 신라와 동맹을 강화함으로써 백제를 견제하고, 남쪽의 왜 세력까지 차단할 수 있었죠. 만약 백제를 병합하는 데 지나치게 몰두했다면, 신라와의 협력이 깨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3) 왕조의 한계와 자원 배분
• 광개토대왕의 치세는 22년으로 상대적으로 짧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국내 정비와 북방, 남방 전선을 모두 관리해야 했습니다. 백제의 완전 병합은 고구려에 지나치게 큰 부담을 안길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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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제 병합이 불가능했을까?
백제를 병합했다면 신라까지 고구려의 영향권에 들어올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역사적 가정으로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병합이 곧바로 성공했을지, 그리고 신라가 자발적으로 고구려의 품에 안겼을지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합니다.
(1) 백제와의 문화적·경제적 경쟁
• 백제는 고구려와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키며 남방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백제를 완전히 병합하려면 단순한 군사적 승리뿐 아니라, 백제의 경제와 문화를 흡수할 방법도 마련해야 했습니다.
(2) 신라의 자주적 성격
• 신라는 초기 약소국이었지만, 서서히 독립적인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고구려가 백제를 병합했다고 해서 신라가 고구려에 의존했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고구려의 팽창에 반발해 백제의 잔존 세력이나 외부 세력과 손을 잡을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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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광개토대왕의 선택, 그리고 이후의 역사
광개토대왕의 전략은 고구려의 장기적인 생존과 번영을 염두에 둔 결과였습니다. 그의 정책 덕분에 고구려는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오랜 기간 강국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백제와 신라를 병합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선택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한반도의 균형을 유지하며 고구려의 세력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결정일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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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님의 흥미로운 시각 덕분에 저도 다시 한 번 역사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었네요! 😊 혹시 다른 부분이 궁금하시거나 추가로 논의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 댓글 남겨주세요. 📜✨
한반도 이야기가 아닙니다 관미성은 황하주변입니다
역사적 고견 감사합니다
이것도 웃기는게 광개토대왕릉비문에도 등장하는 왜군과 가야역사죠 임나가라는 한국이었습니다 조선이아니라 가야였던것
이 당시 왜는 오키나와였답니다
역사적 견해 감사합니다
태왕이랑 대왕은 다른거란다. 이런것좀 알고 이런거 제작해라ㅉㅉㅉ
역사적 고견감사합니다~!
예전 국토를 찾아야.
크으..예전의 지도를 회복할수있다면!
대왕이 아니라 태왕이다
중국이 고구려 동북공조땜시
대왕이라고 표현하는거야
역사적 고견감사합니다~!
광개토대왕이라는 이름을 보니 중국의 소수민족 사람 같음. 한국은 신라와 백제같은 왕 이름이 맞지
역사적 의견 감사합니다
광개토는 호칭입니다 이름은 고담덕이구요. 소수민족이라니 고조선 - 부여 - 고구려- 백제신라로 이어지는 우리역사를 중국역사로 만드는 어리석은짓 하지마세요😂
@@조세핀사도 고조선은 실존했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당신 조상의 어느분께서 고조선 사람이셨나요? 이름 알려주세요
@seahawk7893 ㅋㅋㅋㅋㅋㅋ고조선은 세계석학들과 학계에서 인정한 고유한 한민족 역사입니다. 새로운 가설에 통탄을 금치못하고 갑니다
@@seahawk7893 고조선 실제 존재하는 역사 입니다....뭔소리 입니까..역사책에도 나옵니다,,유물도 나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사군?을 평양을 한반도내로 알고 있다면 이미 역사공정에 세뇌당한 상태!
역사적 의견 감사합니다!
서쪽 국경이 요하라고? 남북 2천리 둥서 6천리의 고구려 영토라는 중국사서인 구당서의 기록은 구라인가😂😂😂 아니면 이 영상이 왜곡하는건가😮
역사적 고견 감사합니다~!
영토 설명이.
너무 틀리다!
백제도. 고구려도.
대륙에 있다.
역사적 고견 감사합니다
세종을 광개토대왕에 비교하는건 좀 아닌듯 !
세종은
한나라의 같은 민족을 노예로 만드는데 확고하게 만든 악랄한 왕입니다!
에미뒤진소리
어떻게 거란과 비려를 동일 족속으로 해석하지 단지 동일년대 사건이란 이유로?????강단사학계의 한계 ㅋ 공부 더럽게 안하는 티가 나네 비려는 부여족으로 해석해야 하죠😮
비려는 두막루국잉둣 두막루국은 발해 무왕시절까지 존재했었다는다고 하던데요
구독자님께서 언급하신 거란(契丹)과 비려(碑麗)를 동일시하는 문제는 동아시아 고대 민족사 연구에서 복잡한 논점 중 하나입니다. 말씀처럼 이 두 집단을 동일시하는 데에는 여러 해석과 학계의 논의가 있으며, 이에 대한 비판적 시각 또한 충분히 타당합니다. 이 주제를 학술적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
1️⃣ 거란과 비려의 역사적 배경
거란(契丹): 거란은 몽골계 또는 퉁구스계로 분류되는 북방 민족으로, 10세기에 요(遼) 제국을 세우며 동아시아의 주요 세력으로 떠올랐습니다. 거란의 기원은 4~5세기경부터 등장하지만, 《위서》와 《북사》 등의 기록에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비교적 후대입니다.
비려(碑麗): 비려는 주로 《삼국사기》와 중국 《위서》에서 등장하며, 고구려와 충돌하거나 협력했던 세력으로 기록됩니다. 비려는 부여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특히 고구려와 같은 계통의 동이족으로 해석됩니다.
2️⃣ 거란과 비려를 동일시하는 논리와 한계
학계에서 거란과 비려를 동일시하는 해석은 주로 이들이 비슷한 시기에 고구려와 충돌했던 기록에 기반합니다.
유사 시기의 활동: 5세기경 고구려와 북방 유목 민족 간의 충돌이 자주 언급되며, 이 시기 비려와 거란이 모두 등장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두 민족을 동일시하거나 혼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언어적 혼동: 일부 학자들은 "비려"와 "거란"이라는 이름이 음운적으로 연관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이는 명확히 입증되지 않았으며 단순한 추측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큰 한계가 존재합니다:
문화적·언어적 차이: 거란은 몽골계 또는 퉁구스계로 분류되는 반면, 비려는 부여 계통의 동이족으로 해석됩니다. 두 집단의 언어, 생활 방식, 사회 구조는 상당히 달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리적 차이: 비려는 주로 고구려의 북쪽 또는 북동쪽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이는 반면, 거란은 요하 유역과 내몽골 일대에서 활동한 것으로 기록됩니다.
3️⃣ 비려를 부여족으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
구독자님의 말씀처럼 비려를 부여족의 일파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주장이 강합니다.
족속적 연관성: 비려는 고구려와 문화적, 언어적 유사성이 언급되며, 이는 부여계 민족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역사적 맥락: 《삼국사기》와 중국 사서에 나타난 비려는 고구려와 협력하거나 충돌하는 과정에서 동이족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이는 북방 유목 민족인 거란과는 차별화된 특징입니다.
4️⃣ 강단사학계의 한계와 개선 방향
구독자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기존 학계에서는 거란과 비려를 동일시하거나 혼동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는 학술적 게으름이라기보다는, 사료 부족과 고고학적 증거의 미비로 인해 이루어진 추론의 결과로 보입니다.
사료 부족 문제: 동아시아 고대사에서 많은 사료가 소실되었거나 후대의 관점에서 왜곡된 경우가 많아, 민족 간의 관계를 명확히 밝히기 어렵습니다.
다각적 접근 필요: 언어학, 유전학, 고고학을 활용한 다각적 연구가 필요하며, 비려와 거란의 구분을 더욱 명확히 하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구독자님의 비판처럼 비려를 부여 계통으로 보는 시각이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려와 거란을 동일시하려는 시도는 단순화된 접근일 가능성이 크며, 더 많은 학문적 논의가 필요한 주제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문제를 깊이 고민하시고 지적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흥미로운 주제로 함께 이야기 나누길 기대합니다! 😊
📚 참고자료:
《삼국사기》
《위서》
김용만,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
정수일, 《동아시아의 민족과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