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선플 달기 운동을 하고 있는 (정확히는 못 쓰지만)김건유 라고 합니다. 저는 살면서 궁금 하지만, 또 누구한테는 물어보기에 조금 사소한 궁금증을 달고 살았는데요 어느날 이, 사물궁이 잡학지식 채널을 보게되었습니다. 아무도 궁금하다고 생각 하지 않지만 제목을 보자마자 궁금하게 만드는 그런 사소한 궁금증들을 영상으로 만들어 주는 사물궁이 님이 지금도 너무 좋다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선플을 달 채널을 사물궁이님으로 정했어요. 앞으로도 응원 할게요. 그럼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 글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동인들 가운데 만약 부모나 형제의 상을 당하게 되면 한 냥씩 부의(賻儀)하고, 종이와 초로 정을 표시한다. 자식이 어려서 죽게 되면 술로써 위로한다. 집안에 상을 당하게 되면 성 밖까지 나가서 위로하며, 반드시 만사(輓詞)를 짓되 그 정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만장군은 각기 건장한 종 한명씩을 내어 놓는다.
당시 하루라도 안 굶으면 상위 20%입니다. 그런데 식량으로 부조를 한다는 것은… 엄청난 무리를 한 것입니다. 저기 부조를 한 사람도 어느 정도 잘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고요. 시골에 쓰러져 가는 집이 1천~2천만원 정도인데, 그게 쌀 다섯 섬… 이렇게 반대로 환산하면… 엄청난 액수죠. 참고로 번듯한 기와집 작은 것은 50섬. 큰 건 100석. 참고로, 같은 시기, 부자 동네였던 한양 북촌의 집은 수백냥에서 수천냥. 쌀로 치면 100섬에서 1천섬 정도. 조선 후기에는 1만석짜리 집도 있었다고 하죠
황당하지만 조선에서 화폐경제가 자리잡는 건 18세기부터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물물교환 경제였습니다. 그 정도로 시장경제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설 점포나 상설 음식점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100년, 200년 된 일본 음식점들이 많은데 반해 한국 음식점들은 거의 없는 이유죠. [안재성의 ‘돈’ 이야기…탐욕의 역사]화폐경제 없어 약탈 유발한 조선 명군, 돈 내고 식량 매입 시도…조선인들 거절 분노한 명군의 약탈…“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 비난 유행 임진왜란 당시 명(明)나라는 제후국을 도울 겸 또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논리에 따라 전화가 자국까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군을 파견해 조선을 도왔다. 1592년말 이여송을 총대장으로 하는 5만여 명의 명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그런데 나라를 망국의 위기에서 건져준 구원군임에도 조선에서 명군에 대한 평판은 매우 나빴다. 왜군과의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과 명군 지휘관들의 오만방자한 태도 등 때문이었다. 특히 명군 병사들이 조선 백성들을 약탈해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명군은 쌀, 콩 등 곡물은 물론 닭, 소, 돼지 등까지 뺏어가고, 심지어 아녀자들도 겁탈했다고 한다. 이들의 행패가 오죽 심했으면, 당시 조선 백성들 사이에서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란 유행어까지 돌았다. 촘촘한 참빗으로 긁어내는 것처럼 왜군보다 명군이 훨씬 더 심하게 수탈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슬픈 사실은 명군이 처음부터 약탈할 생각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심할 정도로 후진적인 조선의 경제시스템이 그들의 약탈을 유발했다. ◆은을 안 받는다고? 먼 곳까지 원정하는 병사들에게 군량을 충분히 보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천 리를 돌아 군량을 수송하면, 병사들의 얼굴에 굶주린 기운이 감돈다”는 오래된 격언이 있을 정도다. 그래서 대개 군왕들은 멀리 원정에 나설 경우 병사들에게 평소보다 훨씬 후한 급여를 지급하곤 했다. 그 돈으로 현지에서 식량을 사먹으라는 뜻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요동을 돌아 직접 군량을 수송하자니 너무 멀고 비효율적이다. 전 국토가 왜군에 짓밟혀 세수가 끊긴 조선 조정에 충분한 군량 조달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명나라 조정은 병사들에게 급여를 풍족하게 줘 현지에서 식량을 구입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막상 식량을 사러 간 병사들은 황당한 꼴을 겪어야 했다. 병사들이 조선 백성들에게 은을 내밀자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을 받고 곡식이나 고기를 내줄 순 없다”며 모두가 고개를 흔든 것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일조편법 시행 후 은본위제가 확립된 상태였다. 명나라뿐 아니라 일본도 동전을 중심으로 한 화폐경제가 잘 형성돼 있었다. 유럽은 이미 수천년 전부터 화폐경제를 영위했다. 하지만 조선은 그 시기, 16세기말까지도 여전히 물물교환 경제였다. 쌀, 비단, 무명 등이 화폐 대신 쓰였으며, 관리들의 급여도 쌀로 지급했다. 물론 세금 역시 곡식이나 특산품으로 받았다. 조선 초기의 우수한 정치시스템을 가리켜 “조선이 매우 선진적인 사회”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화폐경제에 관한 한 조선은 거의 원시사회 수준이었다. “돈을 내고 사겠다”는데도 거절당한 명군 병사들은 결국 분노를 터뜨린다. 화가 난 그들은 은을 주는 대신 무력을 앞세워 강제로 곡식과 고기 등을 빼앗았다. 쓴웃음이 비져나올 만큼 슬픈 광경이다. ◆17세기말에야 화폐경제 수립 일이 그렇게 되고 나서야 조선 조정은 화폐경제의 소중함을 깨달았지만, 전쟁 중에 화폐 발행이나 유통이 가능할 턱이 없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뒤 화폐 유통 논의가 나왔지만, 정묘호란 및 병자호란 등 때문에 불발로 끝났다. 간신히 화폐가 도입된 것은 17세기말 숙종조에 이르러서였다. 광해군 재위 시절 조선은 대동법을 시행, 진상을 특산품이 아니라 곡식으로 내게 했다. 덕분에 방납의 폐단이 대부분 개선됐지만, 나라와 왕실에 필요한 특산품을 따로 구입해야 하니 자연스럽게 화폐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됐다. 1678년, 숙종은 상평통보의 발행을 시작했다. 흔히 엽전으로 알려진 그 화폐다. 조정에서 상평통보로 물건을 구입하고, 관리들의 급여도 돈으로 주기 시작해 점점 화폐경제가 자리잡아간다. 물론 훗날 당백전이나 당오전 같은 폐단도 등장했지만 말이다. 화폐제도 확립은 곧 경제의 발달을 의미한다. 화폐 도입 후 조선의 상공업은 그 전보다 크게 발전한다. 일본이나 청나라와의 무역이 국가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였다. 때문에 “열강의 간섭 없이도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자본주의가 탄생했을 것”이라는 ‘자본주의 맹아론’이 존재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회의론적인 시각이 더 많다. 겨우 자리를 잡았다고 하나 조선 후기의 화폐경제 수준은 유럽과 비교해 산업혁명 시대는 물론 르네상스 시대, 아니 고대 로마 시대만도 못했다. ‘암흑의 중세’라고 불리는 중세시대에도 네덜란드 등의 화폐경제는 조선과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세도정치 이후의 조선 위정자들은 너무나 무능하고 부패해 이들에게 제대로 된 경제정책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모든 것을 궁금해 할 수 있게 해주는 채널
평생 살면서 비슷한 의문조차 떠올린 적 없지만 제목 보자마자 궁금해지게 만드는 채널...
내 상식의 미개발지역에 궁금증과 해답을 뿌려주는, 말하자면 신도시 '농사짓지 마시오' 구역에 들어선 고추&상추 텃밭 같은 채널...
오늘도 정말 유익한 영상 감사합니다 ㅎㅎ
3:25 그당시엔 식비외엔 나갈게 많이 없기에 엄청 큰 돈이죠
난 생긴지 오래되지 않은 문화라고 생각했었는데 유서가 깊었군요!
아무 생각없었는데 궁금해지게만드는 채널
1시간전! 사물궁이님 사랑해요~♡
상부상조의 정신이니 있었을 것이고 역시 화폐보단 식량이나 생필품으로 부조를 했군요!
오늘 제 결혼식인데 마침 재미있는 주제네요 ㅎㅎ
오랜만에 들었는데
귀여움은 그대로 인데 조금 지친 귀여움이 느껴져요 ㅠ.ㅠ
진짜 썸넬 개귀여워요
수능 출제위원들은 결혼식 못 가는데 그 사람들은 축의금을 우편으로 보내야 하는군요.
부조금이랑 부의금 뜻을 같다고 알고 있었네... 반성
마침 다음주에 사촌 결혼식이 있어서 부조금 액수를 고민 중 이었는데 타이밍이 좋네요~bb
다음주 28일이 제 결혼인데 타이밍에 맞는 주제네요ㅋㅋㅋ🎉
축하드려요!! 🎉🎉
축하합니다
결혼 축하드려요~~🎉🎊
축하합니다 ^^
축하드립니다 ㅑ ㅏ🎉🎉🎉
조선시대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흥미롭고 기대됩니다. 시간탐험하는 기분임.
안녕하세요, 선플 달기 운동을 하고 있는 (정확히는 못 쓰지만)김건유 라고 합니다.
저는 살면서 궁금 하지만, 또 누구한테는 물어보기에 조금 사소한 궁금증을 달고 살았는데요 어느날 이, 사물궁이 잡학지식 채널을 보게되었습니다.
아무도 궁금하다고 생각 하지 않지만 제목을 보자마자 궁금하게 만드는 그런 사소한 궁금증들을 영상으로 만들어 주는 사물궁이 님이 지금도 너무 좋다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선플을 달 채널을 사물궁이님으로 정했어요.
앞으로도 응원 할게요.
그럼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 글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선시대 기준이라면 의식주에서 식이 차지하는 비율이 클 것 같으니 아마 만원보단 더 크지 않을까요?
와 오늘 결혼식 다녀왔는데 타이밍 보소
썸넬에 줄서있는 분들 너무 귀여운데요 ㅋㅋ
1:03에 결혼식은 축의금 아닌가요?
장례랑 제사 이미지가 반대로 된것 같아요
1:00
진짜 궁금한 적 없는데 궁금하다
사물궁이 러버🩷
테니스 라켓으로 테니스 공을 자를수 있을까요
코미디 만화보면 테니스 라켓을 너무 빨리 휘둘러 테니스공이 조각조각 나는 장면이 종종 나오는데
사람은 무리지만 기계로는 가능할지 궁금해요
썸넬 등에 생선 메단거 왤캐 웃기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 지금도 외국에서 시골 사회에는
누가 결혼하면 살아있는 닭 데리고 가거나 염소 대리고 가거나 그렇슴...
조개 백합은 보통 흰색이 아니던데 왜 백합이라는 이름이 붙었나요? 제가 아는 조개 백합은 다 다른색이던데..
질문이 있으면 어디에 하나요?
문어는 지능이 높고 탈출도 잘하는대..
왜 재래시장 빨간 다라이에 있는
문어는 뽕 맞은거마냥 늘어져서
탈출 안하나요?
이번에도 당연한 건 없다는 걸 또 느껴요. 삼시세끼가 불변의 진리는 아니었다는 거! 2:56
혼인의 일에 재물(의 많고 적음)을 논하는 것은 오랑캐의 도이다.
자고 일어나서 주먹을 쥐면 간질한게 왜지요?
내 결혼은 안했으나 장례식때 한분당 최소 천명이상 오셨던 것 같음. 부조금만 1억이 넘었으니. 두분다 5일장 했는데 무릎 작살나는줄 알았음.
예전 축의는 오롯이 축하와 성의라면
요즘엔 축하는 나중문제. 당사자, 하객 모두 돈계산이 먼저임ㅋㅋ
우리 동인들 가운데 만약 부모나 형제의 상을 당하게 되면 한 냥씩 부의(賻儀)하고, 종이와 초로 정을 표시한다. 자식이 어려서 죽게 되면 술로써 위로한다. 집안에 상을 당하게 되면 성 밖까지 나가서 위로하며, 반드시 만사(輓詞)를 짓되 그 정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만장군은 각기 건장한 종 한명씩을 내어 놓는다.
하 축의금 정말 우리나라 문화 중 가장 이해 안 되는 것 중 하나인데… 나름 오래 전부터 있었던 전통이었군요😅 오래된 문화인만큼 오늘날에 맞게 개선해서 잘 유지되었으면 합니다…!
결혼식 안하고싶어요…축복받는다는 의미 부여도 웃김…하객들은 주차/축의금/밥 생각밖에 안할 듯. 걍 하루 몇천만원짜리 주인공 놀이하고 부모님이 뿌린 돈 걷어오는거…
요즘은 완전 비즈니스로 봐서 의미가 많이 퇴색된 거 같네요.
김한빛님 출연 기원 1일
개인적으로 지금 축의금 문화가 개판이 된건 주입식 교육 때문이 아닌가 싶음.
일평생 정답만을 추구했고 정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선 안배움.
그러니 부조금을 누군가 정해주지 않아서 갈피를 못잡고 개판 난거.
아님 그냥 구걸헤서 그럼.
평소 친하지도 않은사람.
고등하교 졸업하고 한번도 연락 없던사람.
갑자기 연락오면 사기치려고하거나 축의금 구걸 하는거임.
회사에서도 업무외적으로 말한번 안섞어본사람들 ㅋㅋㅋ
결혼식되면 일단 돌리고 안가면 안갔다고 뭐라함.
하루 15홉이라니... 2.7L만큼의 쌀을 하루만에 어떻게 먹었을까요 ㅋㅋㅋ
하긴 요즘 막걸리 한병, 달걀 10개를 축의금 대신으로 줄바엔 안주고 말죠 ㅋㅋㅋ
옛날사람은 통이 컷네요
15만원이 적당한거구 7만원은 적은거구나..
아항
다음 주제 추천 : 통역관들도 급여를 받을까?
결론: 이것도 조선시대 때부터 이어온 폐단이다.
쓰레기같은 축의금 문화
결혼 하시나여??
지금 결혼식장 가는 길인데 뜨는 거 무엇 ㅋㅋㅋ
당시 하루라도 안 굶으면 상위 20%입니다.
그런데 식량으로 부조를 한다는 것은… 엄청난 무리를 한 것입니다.
저기 부조를 한 사람도 어느 정도 잘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고요.
시골에 쓰러져 가는 집이 1천~2천만원 정도인데, 그게 쌀 다섯 섬…
이렇게 반대로 환산하면… 엄청난 액수죠.
참고로 번듯한 기와집 작은 것은 50섬. 큰 건 100석.
참고로, 같은 시기, 부자 동네였던 한양 북촌의 집은 수백냥에서 수천냥. 쌀로 치면 100섬에서 1천섬 정도.
조선 후기에는 1만석짜리 집도 있었다고 하죠
황당하지만 조선에서 화폐경제가 자리잡는 건 18세기부터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물물교환 경제였습니다.
그 정도로 시장경제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설 점포나 상설 음식점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100년, 200년 된 일본 음식점들이 많은데 반해
한국 음식점들은 거의 없는 이유죠.
[안재성의 ‘돈’ 이야기…탐욕의 역사]화폐경제 없어 약탈 유발한 조선
명군, 돈 내고 식량 매입 시도…조선인들 거절 분노한 명군의 약탈…“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 비난 유행
임진왜란 당시 명(明)나라는 제후국을 도울 겸 또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논리에 따라 전화가 자국까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군을 파견해 조선을 도왔다. 1592년말 이여송을 총대장으로 하는 5만여 명의 명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그런데 나라를 망국의 위기에서 건져준 구원군임에도 조선에서 명군에 대한 평판은 매우 나빴다. 왜군과의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과 명군 지휘관들의 오만방자한 태도 등 때문이었다.
특히 명군 병사들이 조선 백성들을 약탈해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명군은 쌀, 콩 등 곡물은 물론 닭, 소, 돼지 등까지 뺏어가고, 심지어 아녀자들도 겁탈했다고 한다.
이들의 행패가 오죽 심했으면, 당시 조선 백성들 사이에서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란 유행어까지 돌았다. 촘촘한 참빗으로 긁어내는 것처럼 왜군보다 명군이 훨씬 더 심하게 수탈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슬픈 사실은 명군이 처음부터 약탈할 생각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심할 정도로 후진적인 조선의 경제시스템이 그들의 약탈을 유발했다.
◆은을 안 받는다고?
먼 곳까지 원정하는 병사들에게 군량을 충분히 보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천 리를 돌아 군량을 수송하면, 병사들의 얼굴에 굶주린 기운이 감돈다”는 오래된 격언이 있을 정도다.
그래서 대개 군왕들은 멀리 원정에 나설 경우 병사들에게 평소보다 훨씬 후한 급여를 지급하곤 했다. 그 돈으로 현지에서 식량을 사먹으라는 뜻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요동을 돌아 직접 군량을 수송하자니 너무 멀고 비효율적이다. 전 국토가 왜군에 짓밟혀 세수가 끊긴 조선 조정에 충분한 군량 조달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명나라 조정은 병사들에게 급여를 풍족하게 줘 현지에서 식량을 구입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막상 식량을 사러 간 병사들은 황당한 꼴을 겪어야 했다.
병사들이 조선 백성들에게 은을 내밀자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을 받고 곡식이나 고기를 내줄 순 없다”며 모두가 고개를 흔든 것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일조편법 시행 후 은본위제가 확립된 상태였다. 명나라뿐 아니라 일본도 동전을 중심으로 한 화폐경제가 잘 형성돼 있었다. 유럽은 이미 수천년 전부터 화폐경제를 영위했다.
하지만 조선은 그 시기, 16세기말까지도 여전히 물물교환 경제였다. 쌀, 비단, 무명 등이 화폐 대신 쓰였으며, 관리들의 급여도 쌀로 지급했다. 물론 세금 역시 곡식이나 특산품으로 받았다.
조선 초기의 우수한 정치시스템을 가리켜 “조선이 매우 선진적인 사회”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화폐경제에 관한 한 조선은 거의 원시사회 수준이었다.
“돈을 내고 사겠다”는데도 거절당한 명군 병사들은 결국 분노를 터뜨린다. 화가 난 그들은 은을 주는 대신 무력을 앞세워 강제로 곡식과 고기 등을 빼앗았다.
쓴웃음이 비져나올 만큼 슬픈 광경이다.
◆17세기말에야 화폐경제 수립
일이 그렇게 되고 나서야 조선 조정은 화폐경제의 소중함을 깨달았지만, 전쟁 중에 화폐 발행이나 유통이 가능할 턱이 없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뒤 화폐 유통 논의가 나왔지만, 정묘호란 및 병자호란 등 때문에 불발로 끝났다.
간신히 화폐가 도입된 것은 17세기말 숙종조에 이르러서였다. 광해군 재위 시절 조선은 대동법을 시행, 진상을 특산품이 아니라 곡식으로 내게 했다. 덕분에 방납의 폐단이 대부분 개선됐지만, 나라와 왕실에 필요한 특산품을 따로 구입해야 하니 자연스럽게 화폐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됐다.
1678년, 숙종은 상평통보의 발행을 시작했다. 흔히 엽전으로 알려진 그 화폐다. 조정에서 상평통보로 물건을 구입하고, 관리들의 급여도 돈으로 주기 시작해 점점 화폐경제가 자리잡아간다. 물론 훗날 당백전이나 당오전 같은 폐단도 등장했지만 말이다.
화폐제도 확립은 곧 경제의 발달을 의미한다. 화폐 도입 후 조선의 상공업은 그 전보다 크게 발전한다. 일본이나 청나라와의 무역이 국가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였다.
때문에 “열강의 간섭 없이도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자본주의가 탄생했을 것”이라는 ‘자본주의 맹아론’이 존재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회의론적인 시각이 더 많다.
겨우 자리를 잡았다고 하나 조선 후기의 화폐경제 수준은 유럽과 비교해 산업혁명 시대는 물론 르네상스 시대, 아니 고대 로마 시대만도 못했다. ‘암흑의 중세’라고 불리는 중세시대에도 네덜란드 등의 화폐경제는 조선과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세도정치 이후의 조선 위정자들은 너무나 무능하고 부패해 이들에게 제대로 된 경제정책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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