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atest Singers 41 - Franco Corelli - Core 'ngrato(무정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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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Опубліковано 5 лют 2025
- Franco Corelli
1921년 4월 8일(이탈리나 앙코나) ~ 2003년 10월 19일(이탈리아 밀라노)
마리오 델 모나코와 그 시절 쌍벽을 이뤘던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스핀토 or 드라마틱 테너.
184cm의 위너였으며 늘씬하고 잘생긴 사기캐이자 단 한순간도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천재+노력파로, 압도적이고 시원시원한 고음에서는 소름이 안돋고 배길수가 없었다
그의 집안은 음악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의 직계부모만 그러하고 친할아버지가 성악가 였고 친형은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우고 바리톤이 되기 위해 공부를 다시 시작했으며 삼촌 두명이 전문적인 가수였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배를 건조 하는 사람이였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는지 코렐리는 직업을 갖기 위해 볼로냐 대학에서 해상공학을 전공했다. 그러면서도 틈틈히 음악과 성악을 공부하여 콩쿨에 나가보지만 탈락한다.
그래도 심사위원들이 성악공부는 계속해 보라고 독려하여 형처럼 대학을 때려치우고 페사로 음악원에 들어가 성악공부에 매진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험난한 그의 발성탐구여정이 시작되는데 오히려 자신의 목소리가 가르침하에 망가지고 있다고 판단한 그는 독학하기 시작하고 성악교사들은 위험한 사람들이니 성악가에겐 질병이니란 표현을 써댄걸 보면 어지간히 열받았던 모양. 독학하면서 당시 이름을 날리던 멜료끼 창법을 배운 학생으로부터 간접적으로 멜료끼 창법을 전수받았고 멜료끼로부터도 직접 몇번 레슨을 받기도 했다. 그밖에도 수많은 가수들의 앨범을 듣고 따라하고 연구하면서 자신만의 창법을 확립했고 결국 콩쿨에 나가 우승하는데 이때가 그의 나이 30세였다.
1951년 여름 30세의 늦은 나이에 피렌체 극장에서 주관한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그해 가을 오페라 무대에도 데뷔하게 된다. 원래는 아이다의 라다메스 역으로 데뷔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석달간이나 오페라 극장에서 해당 배역을 리허설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비제의 카르멘의 돈 호세 역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의 지방 극장에서 출연하며 빠르게 이름을 알렸다. 1952년 로마에서 데뷔했고 1953년부터 로마 극장의 주역 테너로 계약하여 1958년까지 활동하게 되었다.
1954년에는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극장인 밀라노 라 스칼라에 데뷔하였고 이후 스칼라에서 여러 역할을 섭렵했다.
또한 빠르게 명성이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1957년 빈 국립 가극장에 아이다 라다메스 역으로 데뷔했고, 같은 해에 토스카 카라바도시 역으로 런던 로열 코벤트 가든에도 데뷔하면서 유럽의 최고의 오페라 극장에 연이어 데뷔했다. 이듬해인 1958년에는 대서양 건너 미국의 시카고 리릭 오페라와 샌 프란시스코 오페라에도 초청되어 미국에 데뷔했다.
1961년 1월 일 트로바토레 만리코 역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뷔했으며 이후 그의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61년에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에 데뷔했으며 1962년에는 라 스칼라 무대에 다시 섰고, 카라얀의 부름을 받고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무대에 일 트로바토레 등을 공연하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그의 활동무대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중심으로 인근 미국 동부의 필라델리아, 보스턴 등으로 좁혀지는 경향이 있었다. 자기 관리에 극도로 민감한 사람이었던 만큼 대서양을 오가며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것보다 한 곳에 정착하며 컨디션을 유지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그가 60년대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위주로 활동 반경을 줄였기 때문에 의외로 음반 녹음을 별로 남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60년대에 스테레오 녹음 방식이 보편화되면서 오페라 분야의 음반 녹음 산업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는데, 당시 대부분의 녹음은 유럽에서 이루어졌다.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가수들은 화려했지만 오케스트라의 수준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고, CBS, RCA[1] 등 미국의 메이저 음반사들이 오페라 녹음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많은 녹음을 남기지 못했다.[2] 실제로 60년대 그가 남긴 음반은 가끔 유럽에 갔을 때 이루어진 것이 많다.
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수많은 공연에 출연했으며, 1974년 메트로폴리탄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은퇴 후에도 이따금씩 콘서트, 리싸이틀을 가졌다.
또한 은퇴 뒤에는 뉴욕에서 성악 교사로서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정작 코렐리 본인은 성악 선생들을 경멸했고 주로 독학으로 스스로 연습하고 터득했던 점과 비교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Core 'ngrato(무정한 마음)
Salvatore Cardillo,1874 ~1947
원제목은
'무정한 마음' 또는'은혜를 모르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박정(薄情)이라고 번역되지만,
보통은 '카타리 카타리'(Catari Catari)라는
또 다른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 나폴레나타 입니다.
카르딜로는 나폴리에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지휘를 공부하던 중
이노래를 1908년에 발표했지만저속하다는 평을받자
고향땅에서는 유명해질수 없음을 깨닫고
1903년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고 합니다.
가슴을 찡하게 울려주는[무정한 마음]은 뉴욕에서 다시 태어나
이민자들 사이에서 최고 인기곡으로 자리잡게 되자
곧바로 나폴리로 ‘역수출’되기에 이르렀다 합니다.
오페라의 대본 작자 리카르도 코르디페로 작사,
살바토레 카르딜로 작곡의 드라마틱한 명곡으로
1951년의 이탈리아 영화 순애(원제"Corengrato")의
주제곡으로 사용되었으며,
무정한 사람 때문에 고뇌하는 마음을 절절히 노래하고 있고,
테너라면 한번쯤 속 시원하게 불러보고 싶어 하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카타리, 카타리, 왜 이렇게 쓰디쓴 말을 하는지… .”라고 시작하는데,
‘카타리’는 카타리나(Catarina)라는 이름을 나폴리식으로 축약해 버린 것입니다
Core 'ngrato(무정한 마음)
Catari, Catari, pecche me dice sti parole amare,
카타리, 카타리, 왜 그대는 그토록 모진 말을 하시나요?
Pecche me parle e 'o core me turmiente, Catari?
왜 그대는 내 마음에 고통을 주는 말을 하나요, 카타리?
Nun te scurda ca t'aggio date 'o core, Catari,
Nun te scurda
내가 그대에게 내 마음을 주었음을 잊지 말아 주세요,
카타리, 잊지 말아 주세요
Catari, Catari,
che vene a dicere stu parla ca me da spaseme?
카타리, 카타리,
왜 그대는 내게 와서 그토록 상처를 주는 말을 하시나요?
Tu nun'nce pienzea stu dulore mio,
당신은 나의 고통을 모릅니다.
Tu nun'nce pienze, tu nun te ne core
당신은 몰라요. 상관도 없군요
Core, core, 'ngrato,
무정한 마음
T'aie pigliato'a vita mia,
당신은 내 삶을 빼앗아 갔어요
Tutt'e passato
모든 것이 끝났어요
E Nun'nce pienze chiu
그대는 더 이상 기억하지 마세요
Tutt'e passato e
모든 것이 끝났어요.
Nun'nce pienze chiu
그대는 더 이상 기억하지 마세요
Incredible bello
그는 전설입니다…
@@Grace_zu 전설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