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암흑기중 하나인 원 간섭기는 솔직히 우리뿐만 아니라 정복한 나라들을 통치할때도 아주 혹독하게 다스렸던것과는 달리 어느정도 자치권을 인정해주면서 몽골 황실과의 혈연으로 얽혔다는거 자체가 몽골도 고려가 호구가 아닌 국가라는것을 보증해주는것 같습니다 상식적으로다가 아무리 약소국이라지만 남송과 더불어 30년을 항쟁해서 버텨냈다는것 자체가 그 당시 손에 꼽을정도로 적으니깐요 남송은 40년을 항쟁하였지만 결국 패망했지만 우리는 우리스스로의 주권과 자주의식을 지켜냈다는것에 +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한가지 아쉬운점은 그때 우리 고려가 무신정권으로 군사체계가 붕괴된 상태에서 전쟁을 치루어서 당시 정상적인 정부형태로 전쟁을 치루었으면 훗날 역사에 어떻게 기록되었을지 궁금하긴 합니다
고려가 전성기인 숙종, 예종 시기였다 해도 몽골의 침입은 막지 못했을 겁니다. 거의 100% 단정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부분 같습니다. 다만 몇천 명 단위의 소규모 부대에게 국토가 유린 당하고 여기저기 털리고 하는 수모까지는 겪지 않았을 듯하고, 몽골이 제대로 각 잡고 일정 규모 이상의 정예병력을 보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차이는 있을 것 같습니다.
고려는 쿠빌라이라는 라인을 정말 잘탔음. 쿠빌라이를 지원해준 거는 사실상 도박이었지만 그게 성공한거지. 그리고 고려출신 몽골 왕후가 나온것도 컸음. 게다가 고려풍 의복식이 원명기에 중국서 대대적으로 유행했음. 이는 고려패션과 멋을 중원서 따라하기 시작했다는거. 고로 고려에 대한 풍속은 존중해준듯.
푸빌라이 칸Poobilai khan 징기스 칸과 곰돌이 푸를 합성한 '푸빌라이 칸' 이라는 밈이 등장했습니다 이는 중국의 몽골 역사 공정을 비판하는 서구 미국의 초대형 소셜 뉴스 웹사이트 레딧Reddit 에 올라온 자료 입니다 최근 몽골제국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중국이 몽골제국을 자신의 역사로 규정하려는 움직임 때문입니다 이미 서구권 네티즌들은 몽골제국이 차이나 역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으며 이를 풍자하는 밈을 만들고 있습니다 최근 차이나 측에서 쿠빌라이칸 과 징키스칸 과 같은 몽골제국의 인물을 지나인으로 묘사하는 징기스 칸과 곰돌이 푸를 합성한 '푸빌라이 칸' 이라는 밈이 등장했습니다 이는 중국의 몽골 역사 공정을 비판하는 서구 미국의 초대형 소셜 뉴스 웹사이트 레딧Reddit 에 올라온 자료 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몽골제국의 신분제도입니다 몽골은 대략 네 단계의 신분 등급을 운영했는데 이 신분제도에 따르면 한족과 남송인 즉 양쯔강 유역의 몽골제국 내 한족들의 신분 등급이 나타납니다 이는 풍부한 농산물이 생산되었던 넓은 중원 지역을 몽골제국의 자금 원천으로 삼으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데이비드 M로빈슨은 2024년 최신 연구에서 16 - Koryǒ in the Mongol Empire from Volume I Part 3 - Views from the Edges Published online by Cambridge University Press: 01 January 2024 16 - 몽골 제국의 고려 1권 3부 -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온라인에서 바라본 풍경: 2024년 1월 01일 After a destructive war of nearly three decades (1231-1259), in 1274 the Koryǒ royal family formed a marriage alliance with the imperial Chinggisid throne that lasted a century. At the same time as Koryǒ-Mongol relations influenced Koryǒ's political, social, cultural, and economic history, Korean personnel also provided agricultural.labor and produced essential goods for the Mongols, campaigned in Chinggisid armies, acted as political advisers, offered religious sustenance, served as intimate attendants in the imperial palace, and married into empire's elite families, including the ruling Chinggisid line. This chapter comprises three parts first, a brief political narrative of Koryǒ's experience of the Mongol empire; second, thematic discussions of the military, personnel, and cultural exchange; and finally, some concluding comments, including the ambiguous legacy of the Mongol period for Korea. 거의 30년(1231~1259년)에 걸친 파괴적인 전쟁 끝에 1274년 고려 왕실은 한 세기 동안 지속된 제국 칭기즈 왕좌와 결혼 동맹을 맺었습니다. 고려 와 몽골의 관계는 고려 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역사에 영향을 미쳤음과 동시에 한국 인사들은 몽골에 농업 노동력을 제공하고 필수품을 생산했으며, 칭기즈 군대에서 활동하고, 정치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종교적 지원을 제공하고, 황궁에서 친밀한 수행원으로 활동했으며, 통치 칭기즈 왕조를 비롯한 제국의 엘리트 가문과 결혼했습니다. 이 장은 첫째, 고려 의 몽골 제국 경험에 대한 간략한 정치적 이야기, 둘째, 군대, 인사, 문화 교류에 대한 주제적 논의, 마지막으로 한국에 대한 몽골 시대의 모호한 유산을 포함한 몇 가지 결론적인 언급으로 구성됩니다. 몽골제국과 고려의 독특한 관계를 조명했습니다 그는 1274년 고려와 몽골이 결혼 동맹 관계를 맺었으며 고려인들이 정치 고문으로 활동하고 황궁의 일원으로서 몽골 제국 내 엘리트 가족과 통혼했음을 밝혔습니다 또한 2023년 9월에는 해외 학계에서 M.G. FOR CENTURIES THE MONGOLS FAILED TO TAKE KOREA. WHY? 수세기 동안 몽골은 한국을 점령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헤인스가 "왜 수세기 동안 몽골은 한국을 점령하지 못했는가?" 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The Great Khan's armies toppled empires but were always stopped short at Korea. What were they getting wrong? 수세기 동안 몽골은 한국을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왜? 대칸의 군대는 제국을 무너뜨렸지만 한국에서는 항상 막혔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For centuries, Mongolia has not been able to take over Korea. Why? 몽골제국 최상류층이던 고려인들 중국에서 몽골 역사 감추려는 이유 I 영국 학계 주목하는 이유
징기스칸 당시 몽골 총 군사 수가 6만이 될까 말까임. 금나라 잔당 토벌할때가 2만이었고 거란과 강동성전투때 몽골 1만 여진족 2만, 1차 침입때 비슷한 규모로 쳐들어왔기 때문에 고려 침공 당시 3만은 적은 규모가 아니었음 그래서 강화도에서 전쟁지휘를 한거고 입도전략을 수립해서 백성들을 피신시키고 주요성에 장군을 파견해서 농성전을 지휘했지.8차에 걸친 전쟁에서 몽골군이 졔대로 된 성을 손에 꼽을 만큼 정복못함 몽골군이 여러차례 침략했지만 1차에는 귀주성,2차는 처인성전투 3차는 자모산성,4차는 충주성등 결정적인 승리가 있어 철수한것임. 몽골군도 많은 피해를 입어서 철수한것이지 무인지경으로 돌아다닌게 아니었음 고려가 항복했다면 마찬가지로 몽고는 6사를 관철시켰을 것이다.즉 왕자들을 인질로 보내는 입질 , 호구 조사, 몽골군에 식량과 조부상납,군사 제공. 다루가치 주둔, 역참 설치. 이중에 입질외에는 죄다 무산되었어. 항복이 아니었단 거야. 이 영상에서 고려를 원의 영토로 그린 건 명백한 오류임. 몽골의 침략에 굴복한 수많은 나라들은 왕족들은 처형되었고 왕조는 사라지고 수백년동안 6사를 비롯해서 몽골의 수탈에 시달렸어. 중국은 초야권은 물론이고 해마다 인구조절이란 명목으로 수많은 죄없는 사람들이 바다에 던져저 살해당했어. 비교적 관대하다는 러시아조차 마찬가지였지. 반면 고려는 30년간 군사적으로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고 수많은 몽골군이 죽었고 고려를 점령하는데 실패했어, 그 때문에 고려태자를 만난 쿠빌라이가 그토록 기뻐한거고 덕분에 천명을 받았다는 명분이 생겼고 강화협상 즉 평화협상에 동의를 했고 동방 3가의 지지를 받아 황제가 될수 있었던거야. 고려의 공적으로 인해 쿠빌라이는 고려에 불개토풍 즉 내정불간섭 약속을 했던거고 외국인으로서 유일하게 사위국이 되어 황금씨족의 일원자격을 얻었고 인종,무종같은 황제를 선출하고 원나라 국정에도 관여했어. 충렬왕은 황위서열 4위, 충선왕은 6위. 즉 앞의 3~4명만 죽으면 고려왕이 원황제가 되는 거야. 전국이 유린되었다고 쉅게 말하지 마라. 수많은 전투에서 이겼고 백성들은 도서지방으로 피신해서 수탈을 피했으며 자기 고장을 지켜낸 곳도 많음
이 부분은 고려가 당시 송나라 등과 외교할때도.. 송나라등도 '고려' (고구려도 고려로 국호를 바꾸고 실질적으로 고려라고 많이 불림)가 멸망했다던데 아직도 국가 유지하고 있네 .?? 라며 놀란 부분이고.. 이 시대의 중국등 외국에선 고려가 여러 우여곡적을 겪고 왕의 성씨도 바뀌었지만 계속 유지하는걸로 알았죠 그래서 쿠빌라이가.. 당태종도 정복못한 고려가 나한테 항복했다.. 이게 천명이가보다..... 라고 웃엇던거죠..
현대인의 관점에서 분석한 내용 잘 봤습니다만, 고대인의 시각으로는 좀 다른 결론이 나옵니다. 1. 쿠빌라이칸의 계승 당시 고려 태자의 귀순은 명분은 주었을망정 결과에 변화를 일으킬 요소는 아닙니다. 2. 아무 왕가나 자신의 딸을 주어 기미국이나 분봉국으로 삼지 않습니다. 상대국에 공주를 시집보내는 것 자체가 상대국을 달래기 위한 굴욕적 행위였으니까요. 3. 고려의 전략적 위치를 강조하셨는데 그보다 압도적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영토가 남송입니다. 쌍성총관부와 동녕부로 서경을 포함한 북쪽 영토를 모두 빼앗긴 상황에서 썩어 문드러진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 동방3왕가를 견제하는 시늉도 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1.이분의 말이 맞음 쿠빌라이에겐 대외적인 정치쇼의 일환이고 어느정도 여론 형성에 도움이 됐을지언정 고려태자 덕을 봐서 이겼다고 해석할 정도로 대세에 엄청난 영향을 준 이벤트는 아님 이미 파벌은 갈린 상태에 그저 군사적으로 누가 이기느냐의 싸움이었을뿐 3.이미 오랫동안 몽골도 무신정권의 한심한 작태와 그에 눌려 있던 고려조정의 무능함을 봐온 상태라 후방에서 고려의 군사적 행동을 솔직히 견제할 정도로 위협적으로 보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MarcosRodriguez-jk5qz 아닌데??? 화친과 정복 그 사이 어디 쯤이 정확함... 고대사회에서 지배지라는 의미는 피지배 국민 전체가 노예신분이었음, 그런데 고려왕이 몽골의 노예신분이었나??? 몽골황제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고려왕에게 지시하거나 무례하게 못 했음, 심지어는 몽골황제의 명을 받고 온 최고위급 대신 조차도 고려왕 아래에서 보고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충선왕은 몽골 궁전에 머물면서 지금으로 말하면 총리급 대신에게 하대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의문인게 외국인이 쓴 칭기스칸에 대한 책을 읽었었는데 거기에 몽골 왕실과 결혼할수있는 자격은 몽고왕족과 몇나라 왕족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고려였다 3~4개 민족으로 한정했다는데 궁금했다 아시아 코딱지같은 나라 민족을 왜 그렇게 대했을까...중국 한족은 완전 하층민 취급했다는데 견제하려고 그랬나?
@@고앙이-z2z 피지배계층이기 때문에 특권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거임. 하루아침에 함락당한 곳들이랑은 차별점이 분명히 존재하고 공주를 보내서 굳이 사위국가로 맞이한 일화도 있고, 니 말대로 최상위 계급인 왕족들만 참여할수 있는 자리 그냥 술마시고 노는자리도 아닌 차세대 칸을 뽑는 중요한 정치사에 참석하고 관여했다는건 분명하게 남아있는 팩트임.
@@고앙이-z2z 1. 몽골 2 색목 3 화북인 4 남송인임.. 고려는 거란과 비슷한 대우였슴.. 나중엔 거란은 동족취급해서 몽골에 흡수됐고.. 고려도 부마국되고 충선왕땐 고려왕 +심양왕 자리까지 겸하게 해줬슴. 일단 화북인이나 남송인은 몽골어 배우는것도 금지했었슴. 관직도 지방 말단직이나 할수있었고.. 고려인은 원나라 관직에 나갔던 사람들 많았슴. 한영같은 사람은 종3품까지 올랐었고 이곡같은 사람경우 원나라 관직에 오른게 고려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 원나라 과거에 응시해서 합격해서 원나라 관직에 오른 사람임. (고려 과거에서도 통과해서 이미 고려 관직에 올랐던 사람임) 이사람 아들이 목은 이색임.
몽골이 이민족 흡스라고하는데... 사실 청나라도 그 근방의 부족 다 흡수해서.. 청나라 8기군이 만들어졌죠.. 근데.. 일단 청나라 성립이후.. 팔기군이 막 불어나진 않음. 국가 성립기.. 즉, 어떻게 보면 Nationalism처럼 국가 정체성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늘어나는건 맞는데... 일단 다 성립되고나면 막 늘어나진 않음. 그리고.. 몽골 지배이후에도.. 또 평화기가 한참되어서 인구는 늘어날수잇었죠
님아 말은 옳은데 이 채널이 그 옳은 걸 갖고 있질 않아요 ㅋㅋㅋ 자국역사를 3자국 역사들로 검증하는건 옳은 일이지만, 조선대에 편찬한 고려사 고려사절요 내용을 1도 참고치 않고 외세 입장으로 현세에 기술하는 역사는 도대체 어느 저지능 집단들이 하는 짓일까요? 고려역사를 논함에 있어 보물로 지정한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기반으로 안하는 애들은 역사학자란 명칭을 쓰면 안되는 애들입니다. 이 유튜버도 그냥 깨인척하는 저지능입니다. '역사'가 뭔지도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 역사를 논한다는게 이미 어불성설 고릴라 짓이죠. 세계사를 바라볼땐 인류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볼땐 민족관념으로 바라보는게 당연한거고, 3국의 역사는 팩트를 체크하는 참고 사항이 돼야하는데, 이 유튜버는 자국 역사서를 빼놓고 논리 전개를 하니 고릴라 만도 못한거죠. ㅋㅋㅋ 고릴라도 지 부모는 알아 볼 건데 ㅋㅋ 사람이라면 자기 조상 말 먼저 생각해야는 거죠 ㅋㅋ
제가 좋아하는 유투버이신 오랑님께서 좋게 봐 주셔서 뿌듯합니다. 저 또한 오랑님의 채널을 통해 많이 배우고 있으므로 항상 감사합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개인으로서의 정치적 성향은 당연히 존재합니다만, 영상에서는 그런 정치색을 최대한 배제한 채로 가급적 중립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사를 다루는 영상에서는 본의와는 다르게 각 진영의 관점에 따라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을 것 같아 조심스럽긴 합니다. 그래서 아직 현대사를 다루고 있지는 않았는데, 2주 뒤에 업로드 될 영상은 받아들이기에 따라 특정 정치 성향을 지닌 분들께는 꽤 자극적인 공격으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만, 그런 모든 걸 다 감안한다면 아예 현대사 관련 영상은 제작이 어렵기 때문에 감수하고 대본 마무리 후 편집자님께 전달해 드렸습니다. 그 영상 대본 작성하면서 그런 우려스러운 부분들 때문에 이후로 당분간은 현대사 관련 영상은 제작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가급적 불편함 없이 영상 보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몽골은 당시 황족끼리 결혼하면 대대로 결혼해야 하는 전통이 존재 고려왕이 끈질기게 쿠빌라이 딸을 찾아내 결국 부마국 사돈지간을 맺게됨 문제는 대대로 고려사람들이 몽골인들보다 장수했기에 나중에 원나라 황제들보다 항렬이 높아져 고려왕을 이리저리 바꾸기도함 고려외교 알고보면 재밌음
몽골이 고려를 잘해준 이유 1)고려왕이 항복한 왕자가 다음 몽골의 칸이 됨 그 저항하던 고려왕이 나에게 항복했다고 자랑 했고 그때부터 그 왕자가 승승장구함 2)다음 칸을 정할 때도 다들 반대해도 고려의 왕자가 의리로 믿고 따르던 몽골왕자가 다 밀어 내고 다음 칸이됨 ㅋㅋ 이때부터 고려가 몽골에게 특별 대우 받음. 서희때 부터 보면 고려의 외교력은 개 쩔었음. 그래서 고려왕은 만주까지 함께 다스림(사실 준거임) 또한 몽골의 공주랑 결혼 하면서 부마국이니 뭐니 많지만 고려로 온 공주는 그냥 공주가 아니고 칸의 직속만 왔음. 마지막으로 고려는 칸 지명권이 있어가지고 영향력도 적은 나라가 아니였음. 현 시점에서 약탈이니 제후국이니 하지만 당시 세계관으로 보면 몽골이 잘해준거 사실임. 존경하는 역사학자님이 말씀하시길 역사를 논할 때 절대 하지 말아야 할것이 현대의 윤리관으로 보지 말라고 하셨다.
제 생각에는 고려가 어느정도 대우받은건 충선왕시기까지임.. 충선왕이 황제등극에 도움준것 때문에 대우받고 심양왕도 겸하지만, 심양왕은 아들이 아닌 조카에게 물려주고, 본인도 황제가 바뀌자 유배당함. 이후부터는 그냥 핍박받는 속국.. 일본도 조선강제병합이후 조선왕족 중에서 핵심은 일본왕족과 결혼시켜서 호의호식은 했지만, 조선인들은 핍박했죠.
고려에게 잘해준 이유는 심플하게 말하면 부려먹기 좋은 노예기 때문입니다. 쿠릴타이에서 원나라에게 1표주는 광대 짓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고 원나라는 고려가 제발 안망하길 바라는 나라가 된 겁니다. 지금의 중-북 관계처럼요. 정치를 할때 혈연관계가 제일 신뢰가 가지만 결국 정치는 정치임. 김정은이 왕되자마자 장성택 죽였듯이요. 살려두는 이유는 원하는게 있기 때문임. 1. 쿠릴타이에서의 역할. 2. 군사원조 및 병참기지 제공.(일본원정이 그 예) 3.. 만주의 동방 3왕가를 견제하기 위한 포석. 이중에 3는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에서도 유지가 됩니다. 조선이 매번 여진족을 패러 다니는 이유임.
@@afta-u8g그러게요 몽골이 중국이다 중동국가 어떻게 했는지 좀 알고 왔으면 러시아의 수도 기예프를 어떻게 했는지 고려에 시집 공주는 그냥 공주가 아니고 칸의 직속 공주만 보냈것만 봐도 그렇게 우습게 보는 국가는 아니였는데 진정 고려를 망처 놓은건 유교적 시점으로 평가하고 저술한 조선임.
고구려와의 관계는 몽골학자들이 더 관심있게 연구한다 들었음. 신화 풍습 인명 등에서 고구려와 관련성을 무시할 수 없음. 당시 몽골고원내 여러 부족이 유목등 문화적으로 같았지 혈통적으로 같지는 않았음. 나이만 타타르 메르키트 등 기타 부족들은 몽골 부족과 다른 기원이며 테무진이 대칸이 되었을 때 순수 몽골계는 40%정도였으며, 나머지는 몽골의 이름아래 협력하거나 지배당한 형태였음. 그러므로 같은 고원내 타 부족에게 무자비했던 설명이 됨. 정복한 땅에서 고려만 풍속을 유지하게 한게 아닌 것은 맞으나 킵차크 칸국의 경우 지배층은 몽골인이었으나 인구가 더 많은 투르크계에게 풍속을 유지하고 말고가 아닌 그냥 동화당한 것임. 고려의 경우 문화와 왕조를 유지하게 한 것도 모자라 딸을 내주어 황실의 일원이 되게 한 것은 이례적임. 심양왕을 통해 옷치긴가를 견제하려 했다는 설이 있으나 고려왕가를 멸하고 직접 통치하는 방법도 있었을텐데 바로 몽골의 코앞에 위치한 고려를 그러지 않았음.
물어볼게 있는데 2:29에서 드라마 무신 처럼 태자 원종이 쿠빌라이에게 무릎 굻고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는데 실제로 인조처럼 삼천도 굴욕한거 마냥 머리를 숙여서 절했나요? 드라마라서 믿음이 별로 가지 않아서요 게다가 왕씨 대학살 이후 몽골 황족 혼혈 왕족이랑 순수 왕족 후손들이 살아있나요?
원종이 실제로 머리를 조아렸을지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아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정황상 그 비슷한 정도의 예는 표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성계가 왕씨를 대거 숙청했습니다만, 그들 중 일부는 옥씨나 전씨로 성을 바꾸고 생존해서 가문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그들 스스로 숙청을 피해 과거를 지움으로써 왕족으로서의 과거 정체성이 사라졌기에 묻혀 버린 게 아닌가 합니다.
@@Hmentary 그럼 원종이 머리 조아린 기록에 나와있지 않았는데 드라마 무신은 원종이 인조처럼 머리 조아리는 없던일 만냥 사실로 역사왜곡하고 최충헌 미화 하는등 고증 개나줘 버리고 흥행만 바라본 쓰레기 드라마내요 최근에 조선구마사 같은 쓰레기 드라마 차이나 머니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래서 한국사극 드라마가 이미 완전 시궁창으로 빠진지 오래내요 이번 고려 거란 전쟁 한국사극이 부활할수 있는지 근대 사실 지금도 왕씨사람들이 있는데 그중 전지현이 원래 고려 왕족 후손이라는데 조선족 가짜뉴스 떼문에 지금 왕씨성 버리고 전씨고 개명해 왕지현에서 전지현이라는 이름을 바꿨습니다
쿠빌라이는 당시 대칸이 아니었고 동생과 싸우는 상황이고 수년간 굴복시키지 못한 고려국이 스스로 제후국을 청하며 숙이며 항복해서 쿠빌라이가 엄청나게 반겼다고 합니다. 즉, 쿠빌라이가 홍타이지처럼 반감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었지요.. 쿠빌라이가 얼마나 기분이 좋았으면 자기 딸을 원종의 아들에게 보내 사돈으로 삼았겠습니까?
@@frisebichon1519 홍타이지 같은 경우는 솔까 화낼만 했었죠 당시 심양 즉, 청 본진에서 오랑캐에게 절 못한다고 조선 사신이 거부했다고 하니 암울한 역사이지만, 병자호란은 막을수 있는 전쟁이었음 유목민 출신 답게 깐깐하게 조건 세운게 아니라 명이랑 전쟁중이니깐 가만히 있어라 그리고 명한테 사대하는거 까지는 허락해 줄께라는 선처(?)까지 베풀었는데도 병력 파견하고 이괄의 난까지 겹치는 상황인데 덤벼들었으니 뭐 현 축협같은 느낌이었겠죠 당시 조선 조정도
@@메뚜기-l3u 뭐지.?노비제폐지등 신분제 폐지는 갑오개혁때 되었구요.님이 보기엔 갑오개혁도 일본애들이 했고 그런 일본인들이 조선에 착취와 멸시를 했고 나라가 망해서 민족성이 단절되었으나 조선이면 못할 근대화의 길을 열어줬으니 일제강점기가 치욕이 아니라고 하는거에요?ㅋㅋㅋ
또한 일제강점기와 같은 역사라 하는데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라 여겨지죠 맞는건 아시다 시피 묘호에 충을 넣고 조와 종을 쓰지 못한것, 공녀나 각종 물품들의 수탈및 불합리한 대우등과 원나라가 신분을 매길때 고려사람은 3등급으로 취급한것(물론 이건 평민에 한에서의 이야기지만) 틀린건 일제강점기처럼 국체가 사라지지 않고 만약 그럴 행위를 하면 세조구제를 근거로 치열하게 막은점 불개토풍을 근거로 나라의 문화를 지킨것 또한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합단적(카디얀)이 준동할때 고려가 합단적을 토벌할때 공을 세우고 한희유와 원충갑등의 활약으로 동녕부를 평양에서 심양쪽으로 옮기고, 탐라총관부를 다시 고려가 가지는 외교적 성과도 있죠 비록 부마국이어도 끝까지 싸우고 불리한 상황에도 기회를 살펴 이익으로 바꾸는 자세야 말로 고려의 힘이 아닐까 하며 단순 일제강점기처럼 한심한 역사는 아니라는 점이 있죠
진짜 소름돋는다 이런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ㅋㅋ 이게 어떤논리냐면 일본이 일제강점기때 지배하면서 조선을 특별히 여겼다고 자랑스러워하는 것과 똑같은 생각임 ㅋㅋ 물론 지금 몽골하고 사이 좋지만 그렇다고 아픈 역사을 미화하지말자 여몽전쟁당시 얼마나 끔찍했는지 기록보면 다나와있고 그 후 100년간 지배하면서 여자, 각종 자원들 엄청 약탈해갔는데
제가 대학교때 배운걸로는 일단 언어의 어순이 같은걸로 알고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배우는것에 비해 서로의 언어를 배우기 쉬웠기 때문에 쉽게 가까워질수밖에 없었을것 같은데요. 한국 공녀들이 가서 말도 잘 배우고 높은 위치의 사람들과도 결혼하면서 계속 우호국의 위치를 유지했을듯 합니다
황제 선정과정에서 선택을 잘했지 불개토풍 쿠빌라이 칸한테 받은 게 좀 크긴 했음. 쿠빌라이칸이 군사력은 강했지만 그 당시 정당성이나 정치력이 약했음. 원종이 쿠빌라이칸을 선택한 게 무신정권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음. 정치나 정당성이 뭐가 중요하냐 군인 있으면 정변일어나서 우리나라도 무신이 득세하는데. 그래서 원종이 군사력 강한 쿠빌라이한테 붙음. 반대로 쿠빌라이는 군사력은 충분한데 정치력이나 정당성을 원종이 항복함으로서 얻을수 있다보니까 좋아함. 굳이 쿠빌라이가 고구려 언급하면서 기뻐하는 이유도 고려를 올려치면 스스로의 업적이 더 커져서 라는 이유도 있음
뿌리가 같니 형제의 나라라니 이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얘기냐면 대한민국 5000만 인구중에 10대쯤 올라가면 인척관계 아닐 사람이 없을뿐더러 실제로 친형제끼리도 싸우고 웬수지는 일이 많은데 그보다 더 몇백년전 몇천년전에 형제의 나라라고 도와준다는게 말이 안되는데 우리나라는 유교적이데올로기에 너무 매몰되서 감성적으로 항상 정치 역사 외교를 바라봄 각자의 나라의 이득이 되니 도와주는거임 맹목적인 사랑은 부모님이 자식한테 주는 사랑 밖에 없음 다만 목적이 있어서 도와준거여도 받은 사람이 되려 니들 그런 이유로 우리 도와준거잖아!! 이렇게 말하는건 또 말도 안되지만 어릴적 권선징악의 동화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엔 너무 많은것도 문제임 외교는 영국, 일본처럼 영악하게 해야됨
맞는 주장같지만 헛점 또한 많은 영상 '진짜 이유'라고 했지만 그또한 뇌피셜에 가까움 여러가지 지적하고 싶지만 우선 딱 한가지만 지적할께요 원나라가 망할때까지 우리가 부마국이었음 -- 이 이유는 이 영상이 '진짜 이유(일본정벌, 배후세력)'라고 한 이유와 안맞음 전략적 부마국이었다면 원나라가 망할때까지 부마국 지위를 가질 필요가 전혀 없음. 더구나 몽골은 상대국 공격할때 배후 따위 생각하지도 않는 나라였음. 또한 끝까지 항쟁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인은 거의 몽골인 다음의 지위까지 누렸음 아무튼 이런 전략적 이유보다 이 영상이 무시한 정서적 문화적 요인이 더 컸다는 사실이야말로 진짜 이유일 수 있음
@@Gold9-w1x 근거가 ㅋㅋㅋ 생긴게 닮았으니 우린 조상이 같다 ㅋㅋㅋㅋㅋ 유전적으로 꽤 가까운편은 맞지만 그럼 일본인은? 거긴 더 가까운데? 아 환단고기 신자들은 그래서 일본도 다 우리꺼라고 하긴한다더라 왜 그냥 인류의 발원지인 아프리카까지 다 우리 역사라고 하지? 거긴 좀 덜 닮아서 우기기 힘든가?
몽골 황족과 고려 왕족 피섞인건 사실임. 몽골 쿠빌라이 막내 공주가 충렬왕과 결혼 충선왕 부터는 쿠빌라이 외손자임. 외손자지만 쿠빌라이 핏줄이면 몽골황실에서 조차 함부로 대할수 없었음. 쿠빌라이 고려에 유리 하게한 결정 많았기 때문에 후대 황제들이 함부로 그걸 바꾸지 못함. 그걸 충선왕이나 고려 왕들이 잘 이용했음.
생각지 못했던 지점들, 일반적인 통념들을 전문성 있는 학자들의 의견을 토대로(고정댓글 댓글에서 그렇게 느꼈습니다.) 일반인도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를 정련하는 과정이 돋보이는 좋은 영상인것 같습니다! 혹시 역사가 전공분야이신 분이신가요? 다음에 영상을 올려주실때 혹 참고하신 논문이 있다면 그것또한 영상소개글에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려태자가 쿠빌라이한테 간것은 단순히 우연한 조우일 가능성은 낮음. 나라의 운명이 걸린일인데 우연히 동선이 일치했다하여 만났다는것은 설득력이 없음. 동선이 일치해서 근처에 이르렀다해도 만약 쿠빌라이가 별로였다고 판단됬다면 몽골로 방향을 돌렸겠지... 한 나라의 태자로써 책임감이 막중한일인데... 다 알아보고 신중하게 내린결론이었을 가능성이 높음. 당연한거 아닌가? 당시 송나라 정벌중인 군사력이 훨씬 강한 쿠빌라이한테가는게 인지상정이지...
고려사 기록으로만 보면 고려 태자(나중에 원종)가 쿠빌라이를 선택해 만난거지 우연일 확률은 낮아보입니다. 원종은 강화 협상을 하려 몽케 칸을 만나기 위해 이동 중이었는데 육반산에 도착했을때 몽케 칸이 죽은 사실을 알았고 곧바로 수도인 카라코룸에서 후계자 작업을 진행중이던 아리크부카를 만나러 올라갈수도 있었죠. 근데 중원에서 정벌중이던 쿠빌라이가 칸의 승하 소식을 듣고 급히 올라가던 중이었고 여기서 원종은 방향을 틀어 양주와 초주 근처에서 쿠빌라이를 만났다고 합니다. 고려사 내용이 고려 입장을 기반으로 한 고려 실록과 고려말 사초를 통해 지어지긴 했으니 우연을 필연의 선택으로 둔갑시켰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원종이 육반산에서 북쪽인 수도로 바로 안가고 굳이 양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후계자 다툼이 일어났을때 한쪽을 선택하기에 앞서 가까이 있는 쿠빌라이부터 황제에 오를만한 인물인지 군세는 어떤지 직접 만나서 살펴보는 정탐의 목적일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만났고 원종은 쿠빌라이에 자신의 명운을 거는 선택을 한거라 보여집니다. 그리고 그 배팅은 성공으로 귀결된거고요.
논란의 여지가 큰 앞 부분은 뺴고 본래 목적하신 것으로 보이는 지정학적 관점에서의 고려의 중요성만을 이야기하셨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앞서 이야기하신 부분의 주요 골자인 몽골 (선민족 - 실위, 선비, 동호)과 고려 (선민족 - 고구려/백제/신라, 고조선)의 민족적 친연성은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는 분야로 지금으로서는 어느 한쪽의 의견이 맞다라고 확신할 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민족적 친연성 때문에 고려를 중용했다는 관점이 옳지 않다는 점은 공감합니다. 나의 이익을 해치면 형제도 가차없이 제거하는 것이 몽골과 그 후속 국가들이 보여준 모습입니다. 아니 역사에서 대부분의 국가/권력집단이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렇게만 보면 테무진 아버지가 며느리를 구하러 동북쪽으로 왓던것. 많은 몽골 귀족들이 고려인을 부인으로 결혼한거. 등등이 이해하기 어려워지죠. 몽골초원과 만주를 포함한 지역은 고조선 시대부터 같은 국가를 이루었고, 물론 왕가는 단군이셧기에 왕가의 정통성에 있어서 고구리,고리 쪽이 정통이었던거죠.수당이 고구리를 정복하려 했던것도 이런 차원에서 접근해야 더 명확해진다고 봅니다.
현실적이라는 기준이 현대 우리 가치관으로의 현실적이면 안될거 같습니다. 철저하게 당시의 의식과 세계관으로 바라봐야 진정한 역사를 분석한다고 생각 됩니다.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가치관과 가치로 과거의 역사를 해석하면 역사는 점점더 왜곡될 뿐인거죠. 우리 시점에서는 말도 안되는게 당시에는 충분한 사유가 될수 있었던 겁니다. 당대를 살아가는 역사 학도들이 가장 실수하는것 중 하나가 당대의 가치관으로 과거를 판단하는것이죠.
진짜 제대로 된 고려 존속 이유를 알게 돼서 속이 후련하네요. 만주쪽은 테무게 옷치긴 전담인 줄 알았는데 테무친 동생들 삼형제가 분담 통치하고 있었군요. 지정학적 이유로 고려를 인심 쓰듯이 살려주고, 쿠빌라이 자신의 측면을 위협하는 우환거리 동방 3왕가를 언제든 찌를 수 있도록 그 남쪽의 제어 장치를 마련한 셈이네요. 그런데 실제로 고려가 몽골에 그런 이유로 도움이 된 적이 있었나요? 고려도 원나라에 파병한 적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그 때가 원 초엽인지 원 말엽인지....
고려가 원나라에 원군을 파견한 또 다른 사건은 원 말기 장사성의 난 때입니다. 당시 정세운 장군을 비롯한 여러 고려군 장수가 원나라에 지원군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정세운 장군에 대해서는 저희 채널의 해당 영상을 보시면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동방 3왕가에 대한 원 황실의 견제는 상당히 중요한 이슈였고, 그래서 심양왕, 나중에는 심왕이라고 아예 외자를 붙인 높은 격의 왕공 지위를 신설하고, 고려 왕족을 그 자리에 임명해서 심양왕과 고려왕을 통해 동방 3왕가를 이중견제했습니다. 심양왕은 심왕으로 격상되면서 고려왕보다도 높은 지위를 차지했지만, 사실상 실권은 거의 없는 명예직에 불과했지요.
@@Hmentary 울 나라는 안 버티고, 중국은 겁나 버텨서 심한 대우를 받았다는 듯한 뉘앙스로 말 하는 너같은 것 보다는 나음. 현실은 중국은 역사적으로 굴복이 패시브였던 나라고, 울 나라는 몽골 외에는 없지. 결국 너도 뇌피셜인데, 같은 뇌피셜이라도 너같은 것 보다는 나음
@@jhpakr8742 살아있는 시체죠. 당시에 '나라가 있으나 없는 것과 같다.' 라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님. 조선은 국제정세가 명, 청을 견제할 제 3의 세력이 없다는게 베짱플레이를 할수 없는 이유임. 고려시대의 중국은 요(금)-송(남송)-서하 이렇게 서로 싸우고 있으니까 게임체인저, 캐스팅보드처럼 행동할수 있지만 조선은 명나라와 1:1로 해야함. 그마저도 몽골제국이 중국을 모두 청소하면서 고려도 조선과 똑같이 됨.
@@Hmentary중국이 오래 버텨서 심한 대우를 받은 거라고? 여기서 웃고 간다. 역사 왜곡 오지게 하는구나. 역대 중원 왕조들이 북방 민족을 몰살에 가깝도록 못크고 이간질한게 쌓여서 중원 정벌 한 이후 그 원한에 일정 수 이상 인구가 쌓이면 정리 들어갔던거다. 수레바퀴 보다 큰 인간은 다 죽이라는 몽골 비사 내용 보면 그 원한의 크기 때문에 못살게 군거지 오래 버텼다고 못살게 굴었다고? 그런 왜곡을 퍼뜨리면서도 부끄럽지도 않냐?
사실 고려사에 대해 해설본은 공개하면서 그러나 원본은 공개안함 그이전 역사서인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도 해석이 되면 지금역사가 가짜란게 알려지는건 번역 안함 예로 충주고구려비에 번역본 보면 동쪽 이란부분을 해석안한버전도 있음 삼국유사에 고조선은 환웅이 삼위 태백에 3천의 무리를 대리고 왔다란 문장이 있음 근데 한반도엔 태백은 있어도 삼위는 없음
몽골과 우리의 유전학적 차이가 크다란 표현은 약간 핀트가 어긋났어요... 몽골은 유전학적으로 보통 16~18민족 정도로 분류됩니다.. 그 중 세번 째로 많은 코리, 쿠다라를 포함하는 부리야트라 불리는 민족이 만주족과 우리랑 매우 유사성이 큽니다... 황금씨족은 흔히 말하는 할흐족에 포함되는데, 이 할흐족이 현 몽골인의 90프로에 해당됩니다... 문제는 이 할흐족이란 개념이 징키스칸 전후 결혼동맹 등으로 매우 광범위한 혼혈집단이라는 점입니다..... 돌아가서 징키스칸 시대 당시 순순히 굴복하고 혼혈된 가장 상위신분의 민족 중 하나가 부리야트족입니다... 해서 황금씨족들이 부리야트 계열을 같은 민족개념으로 생각하는 성향이 있다는 건 팩트에요.. 솔롱고란 말도 없는 말이 아녜요.. 실제로 몽골 역사학계에선 만주족이랑 예맥족을 우리 땅을 먼저 떠난 사람들이라고 정사화 하고 있습니다... 세계적 주류도 이와 다르지 않고요... 다시 말하지만, 부리야트, 만주족, 예맥족이 같은 뿌리라고 하는 건 이미 유전학적으로 확인된 부분입니다.. 이견이 있기 힘들어요.. 중국은 남방계인 진한시대 한족과, 북방계 정주국가와의 통일 후 현재까지 이들의 혼혈이 주류인 상태고... 몽골은 할흐족이란 이름으로 현재까지 무한 혼혈이 고착된 상태니... 지금 중국인이 몽골인보다 유전학적으로 더 가깝네 마네 하는 건 의미 없는 주장입니다...
어느 자료를 바탕으로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황금씨족이 할하족이라는 전제부터 오류입니다. 황금씨족은 차하르부의 지도층이었고, 현재의 내몽골 지역에 거주했다가 청나라에 협조한 이래 중국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래서 현대 중국인들이 칭기츠 칸 후손 = 차하르족 = 내몽골 = 중국인의 일부 이런 흐름을 주장하기도 하는 겁니다. 할하는 몽골 외곽의 한 집단이었지 주류였던 적은 초기에는 없으며, 이후 몽골 집단이 둘로 나뉘는 과정에서 제대로 형성되었습니다. 부리야트 언어는 할하나 차하르 언어와 좀 차이가 있고, 부리야트인들은 칭기즈 칸 정복 초기 과정에서 정복당해 흡수된 집단이며, 당연히 범 몽골계를 언급할 때에는 동질 집단으로 얘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든 우리와 몽골의 친연관계를 주장하고 싶어 하는 분들께는 안타깝습니다만, 유전학적으로 가장 과학적 근거 중 하나인 하플로그룹 지도에 따르면 우리 민족과는 상당한 유전적 거리가 있습니다. 팩트라는 단어를 손쉽게 사용하시기 전에 먼저 그와 같은 제반사항을 확인해 보심이 어떨까 싶습니다.
@@Hmentary 할흐가 황금씨족에 포함되는 개념이 아니고요... 현재 할흐라고 하는 민족부류에 황금씨족이 포함된다는 말입니다... 제가 표현을 헷갈리게 했나보네요... 차하르는 민족분류가 아니라 할흐에서 황금씨족 친계직속부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차하르란 말 자체가 황금씨족을 의미하는 단어에요.. 부족단위로 인지되고 몽골의 여러 세력 중 하나라고 여겨진 건 명나라 때 얘기고요... 부리야트가 몽골제국에 합류하게 된 것도 정복흡수라기 보단 굴복이라고 표현해야 맞는 부분이고요.. 그 후로 징키스칸에서 3대 이내의 모계에 부리야트 계가 셋이였나 넷이였나 섞입니다...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정확하진 않아서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죄송... 어쨌든 칭기즈칸에서 쿠빌라이까지가 3대니 황금씨족과 부리야트족은 혈연관계가 맞다는 얘깁니다.. 저는 쿠빌라이 이전까지 고려와 황금씨족이 친연관계라고 한 적 없습니다... 전 부리야트와 예맥족이 친연관계고.... 쿠빌라이 포함 이후 세대들은 이 부분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얘길한 거죠... 부리야트도 몽골제국 주류 중 하나니,,, 몽골인과 우리의 유전학적 차이가 크다란 말은 핀트가 어긋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쿠빌라이 이전까지 황금씨족과 고려랑 유전적 차이가 크다란 말이 딱 들어맞는 말이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일반 대중들이 말하는 몽골이 고려란 존재를 살려준 근거 중 하나라고 말하는 (같은 민족이라서) 란 건 틀린 말이 맞습니다... 근데 주인장님이 말씀하신 같은 민족이 아니라고 대는 근거로 유전학적 차이가 크다. 란 건 팩트는 맞지만 인과관계가 될 수 없다는 얘깁니다... 몽골 내의 부리야트와 우린 유전학적으로 매우 가깝거든요... 다시 말하지만 보편적 몽골인과 우리랑 가깝다는 말이 아닙니다... 몽골 내의 소수민족인 부리야트와 우리랑 가깝다는 말이지... 하플로그룹 해석도 다시 꼼꼼히 봐보세요... 근거를 대라고 하셔서 링크 뒷 숫자를 한글로 바꿔 올려놓으니 계속 지우시네요.... 링크가 거슬려서 그러시다면,,,, 몽골 고대사로 구글로 검색하셔서 꼼꼼히 찾아보시길....
21세기들어 유전자 분류 기술의 발전덕에 밝혀진 사실인데. 유전자 분류를 해보니 우리나라가 남방계의 흔적이 아주 강하게 나타난다네요. 북방보다 오히려 일본. 대만. 동남아에 있는 유전자의 흔적이 많이 나온답니다. 기마민족 유전자도 섞였겠지만 우리나라는 일본, 중국,만주족 여진족 등의 요소가 강하다고 합니다. 민족이라는 개념도 혈연 보다는 군집하며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개념이 강하다고 보면 되겠네요. 인간이라는게 순수혈통끼리 섞이다 보면 기형아도 많이 나오고 도태되니 먼곳에서 온 손님들을 환영하는 문화도 많이 있잖아요. 오래전부터 다들 섞여서 순수혈족이라는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으므로 혈연적 동질성은 확대해석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게 화북 지역의 한인들이나 양쯔강 이남의 한인인 남인들은 그렇게 존중하지 않고 철저하게 탄압했습니다. 아울러 중앙아시아 지역의 여러 국가에서도 해당 지역의 문화를 존중하지 않을 때가 많았지요. 하지만 티베트의 경우 확실하게 존중하고 오히려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기도 하는 등 몽골의 지역과 상대에 따라 달랐습니다.
새로운 정보, 새로운 시각은 좋은데 왜 화가 나셨나요? ㅎㅎㅎㅎㅎㅎ 우리는 많은 역사를 빼앗기고 잃어 버렸습니다. 그것을 되찾는 것도 너무 힘겹고 어려운 상황인데 겨우 저런 이유로 화를 내고 있는 모습이 씁쓸합니다. 주변국은 남의 역사를 꿀꺽하기 바쁜데 정작 해당 국민은 자국 역사를 까기 바쁜 사람들이 많군요. 댓글들 보면 가관입니다.
영상 설명 깔끔하네. 여기 안 나온 내용 중에 고려가 받은 특혜는 조세권이랑 징병권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거. 그러니까 몽골에 정복된 어떤 지역도 세금이랑 군사 징병을 마음대로 못하는데 고려만 가능했음. 그리고 부마국의 지위에 대해서 첨언하면. 몽골 풍습 중에는 한번 사돈 관계를 맺으면 대를 이어 계속 맺어지는게 있음. 다른 지역 결혼 정치는 한 세대 한정이고 볼모고 그런데. 쟤들은 저게 진짜 여러세대에 걸친 혈족간의 결합 개념임. 저기는 유목 생활이라 큰부족이 작은 부족이랑 동맹같은게 될 때. 영토의 구속력이 없으니까 혈연으로 피를 계속 섞는거임. 그러니까 한두세대 적용이 아니라 한번 결혼관계로 맺어지면 쟤들은 넒은 의미에서 같은 부족이나 큰부족 중심의 방계 혈족으로 동맹으로 여기는 거임. 그래서 아무랑은 또 결혼을 안하고. 정식 절차를 밟아서 한번 하면 계속 같이가야 되니까. 차라리 걍 신부를 약탈해 오고 막 그럼. 고려 후반이 몽골 간섭기 인것도 맞는데. 다른 나라는 간섭이 아니고 점령기였고. 고려가 멸망할 때는 몽골이랑 의리를 지킨다고 명나라 쳐들어가지 이러다 망한거니까 거의 동맹관계였다고 보는게 맞는듯.
@@Hmentary 울 나라는 안 버티고, 중국은 겁나 버텨서 심한 대우를 받았다는 듯한 뉘앙스로 말 하는 너같은 것 보다는 나음. 현실은 중국은 역사적으로 굴복이 패시브였던 나라고, 울 나라는 몽골 외에는 없지. 결국 너도 뇌피셜인데, 같은 뇌피셜이라도 너같은 것 보다는 나음
몽골이 발해의 후손이라고 하고 고려가 고구려랑 관련있는것도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칭기즈 칸이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의 후손이라고도 하고 원래 이름인 테무친도 대무신왕에서 따온 것이라하며 칭기즈 칸이라 불린 것도 발해의 왕을 칭하는 진국왕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자신의 뿌리와 관련되어 있으니 특별히 여긴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의 생각보다 고려의 국력이 셌다고 봅니다. 그정도의 힘으로 다른 국가들의 침략을 그렇게 잘 막기는 힘듭니다.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교육이란 사회와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게 구성원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봅니다. 사회와 과학기술 등이 고도로 발전해감에 따라 교육이 상정한 공동체의 범위는 계속해서 넓어져왔지만 그 중에서 국사교육은 언제나 국가라는 공동체에 소속과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 존재하여 왔다고 생각합니다. 제도화된 역사교육을 통해 민족적 자긍심(다민족 국가일 경우에는 다른 요소로 대체되겠죠)을 고취시키고 이를 위해 역사적 사실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한다거나 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닐겁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 시각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인류사에 수도 없이 많은 국가와 민족들의 발흥과 쇠퇴가 있어왔고 그 안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러운 역사일텐데도 말이죠 이러한 교육을 받아왔던 사람들이 현실을 마주하며 흑화해버리면 국까가 되어버리고 민족주의에 미쳐버리면 환빠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말씀하신 지점에 정확하게 동의합니다. 저도 우리 민족과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만, 균형을 지키기가 솔직히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먼저 사실 그 자체를 판단해야 하는데 민족이라는 필터를 끼고 역사를 바라보면서 정서적 희망사항을 현실인 것처럼 인식하는 분도 많고, 반대로 자학사관에 빠져 무조건 우리 역사를 부정적으로만 인식하는 분도 많고 그런 상황에서 사실 저 포함 모두가 균형을 완벽하게 잡기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다만 최대한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지요.
@@Hmentary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정비된 제도와 교육이 했어야 할 일들이 유튜브 등으로 외주화 되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론 제도 하에서는 다루거나 배울 수 없던 것들을 만날 수 있어 다행으로 여깁니다. 그렇다보니 컨텐츠를 창작하거나 정보를 전달하시는 많은 분들의 고뇌 또한 굉장히 클 것이라 생각합니다 노고에 언제나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좋은 영상 많이 부탁드립니다😁
교과서에 있는 잘못된 지도로 배워서 껴 맞추니 뭘 알겠냐. 쌍성이 저기냐? 중국 심양 근처에 쌍성이 버젓이 있어. 고려라는 이름을 유지하는 것부터 존중 받았던 것인데.. 현실적으로 보면 되는데, 너무 조상비하적인 사고방식이다. 그게 식민사학에 길들여져서 억지로 끼워맞히려는 사고방식이야.
다 맞을수도 있는데 기존의 인식은 틀렸고 내가 맞았다라고 주장할려면 뭔가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나요? 딱 저이유로 그나마우대했다라는 직접적 사료는 없는 상황아닌가요? 어차피 설과 설인 상황에서 이러한 관점도 있고 요즘은 이러한 관점으로 학자분들이 연구중이다 하고 소개해주는 정도가 좋았을듯 합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마치 직접사료가 나온것처럼 기존 주장들을 부정하는듯 보입니다 예를 들어 경로가 맞아서 만났는지 아니면 국운을 걸고 선택을 하신건지 양측 설 모두 주장이 있을뿐 사료가 없지않나요? 주장을 주장으로 소개하는 것과 앞의 주장이 틀렸고 내가 맞다고 주장할때는 다릅니다 후자는 근거가 없이는 공허하게 들릴 뿐이죠
@@허우석-o9f 유행했다는 말은 받아들였다는 말로 바뀌어야겠지요? 역사왜곡일 수도 있습니다. 몽골은 고려로부터 문화와 제도의 모든걸 받아갔고 그 방법은 고려인들 그 자체였지요 기황후가 혼자 잘나서 그렇게 되었을까? 몽골 칸이 아무리봐도 토호들보다 실무 관리들에게 힘 실어주는게 자기 권력에 도움되니까 그렇게 바뀌는 것이지요. 아랍 또한 페르시아 사람들 그대로 데려다 썼습니다.
몽골의 시조를 칭기스칸으로 생각하는 나라가.. 고구려까지 올라가서 생각한다? 어불성설입니다. 그냥 세력유지에 도움이 되었으니 초토화 안시키고 식민지로 삼아서 이용한것입니다. 신기한 점은 30년간의 대몽항전과 1270년대까지 이어진 삼별초의 항쟁이 있었음에도 중요성이 더 커서 놔둔것입니다. 오랜시간 버티면 버틸수록 안좋았던 다른 점령지랑은 다른것 같습니다.
30년간의 대몽항쟁이 정말 강화도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시나요. 인천의 강화도가 왕과 장군이 30년간 병사를 육성할 수 있는 곳이라 보십니까? 유라시아를 점령한 몽골이 도대체 산지가 80%에 달하는 한반도에 뭐 그리 젖과 꿀이 떨어져서 그 조그만 섬까지 점령하려 하겠습니까...? 또 여진이 우산국을 점령했다는데 기마민족인 여진이 오징어가 너무너무 먹고싶어가지고 울릉도에 배타고 가서 점령했답니까..? 왕건 휘하에 배가 많아 별명이 백선장군이었다는데 후백제의 견훤과 왕건이 전라도 나주에서 배를 200척 띄우고 싸울 곳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한반도에 외계문명이 남기고 간 유산이라도 있습니까? 강화도, 나주, 황산벌 등등 삼국유사, 삼국사기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지명은 대륙에 있습니다. 역사서엔 지명, 산, 성, 강(큰 강은 바다라고도 부름) 등 주요 지역과 방향 거리가 나오는데 한반도 내에선 합리적인 추정이 불가능 합니다. 백제가 멸망할 때만 해도 성이 수백개 였다는데... 산지가 80%인 한반도 내 성 모두 합해도 그만큼 안될겁니다. 한반도는 대륙의 지배자가 지배하는 땅일 뿐입니다. 지린 시(어딘지 아시나요?)는 한국말로 집안 시 입니다. 안전한 땅이라는 의미 입니다. 살수가 어디인지 아시나요? 노란물을 몽골어로 하면 shar us 키르기스스탄어로 하면 sarı suu 이씨조선 500년간 지운 역사를 일제가 완성하고 화하가 이용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한국은 대국이 자신들을 소중히 여긴다고 하면 마치 어린애가 부모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아 기뻐하거나, 깡패들같은 힘 있는 자들이 자신을 지켜주고 소중히 여긴다는 것에 매우 기뻐한다. 이런 심리는 자신들의 부족한 자존감을 스스로 매꾸기 보다 강한 자의 보호와 소중히 여겨준다는 특별함이라는 것에 취하기만 한다. 그러니,몽골이나 미국이 특별히 여긴다 하면 껌벅 죽어가는 것이다. 다 큰 어른들이 아이들처럼 누군가의 보호와 관심을 받고 기뻐하는건 정상이 아니다. 어리석은거지
발해 패망후 발해 유민 일부가 고려에 편입되고 나머지 말갈과 여진이 부족으로 남은것 그리고 읿부가 돌궐족을 따라 서역으로 이동함. 발해건국시 여러부족중 일원으로 돌궐족도 포함되었음.그리고 몽골족이 거란계이다..여기서 말갈은 한반도로 유입되어 고려에 편입 되지 못하고 부족을 이루고 살던 돌궐계이다
고려는 예 맥 숙신 거란 말갈 돌궐 선비 몽골까지 거대 유목집단중 하나임.. 완벽한 중앙집권은 아니었음... 동천왕때 북위 8만대군이 위나암성(국내성)까지 그냥 직행해도 요동쪽 구경만하고 그냥 뻥뻥뚫여서 포위당하고 겨우 죽을뻔한적도 있기도하고... 이미 왕권은 장수왕을 끝으로 막리지쪽으로 넘어가서 허수아비 고씨 왕들뿐임.. 물론 고려시대도 마찬가지 요나라 침공 몇번당한후 무신쪽세력이 강해지고 왕은 사실상 허수아비 되고 무신정권이 들어섯으니...
팩트는 무신정권이 몽골군 전술을 완벽하게 카운터친거임 몽골인 기병은 총 전력이 30만이 전부였음 이것도 금나라라는 당대 최강의 국가를 상대하기 위해서 몽골 초원에 총동원령을 내려서 싸움이 가능한 남자랑 말은 전부 긁어모은 숫자 호라즘 원정을 떠날때도 몽골은 금나라에 몽골 기병 2만명만 배치함 그런데 무칼리가 현지 군대를 흡수하고 징병하면서 휘하 부대는 훨씬 늘어남 몽골군의 큰 작계는 현지 정권에 부정적인 협력자를 얻어내는것임 이 협력자는 작게는 길잡이, 크게는 전투병으로 활동함 헌데 고려는 북방의 여진족이나 양계의 일부 인원을 빼면 이런 이탈이 없었음 강화도로 도망갔지만 국가의 행정기능까지 같이 들고 도망갔음 몽골군이 쳐들어와도 무신정권이 내부단속을 최대한 하니깐 고려 국민들은 이악물고 저항하고 어찌저찌 몽골이 물러나면 강화도의 정부는 적당히 상도 내리고 민심 달래고 나름대로 중앙군도 만들어서 몽골군 요격을 시도함 살리타의 몽골기병 1~2만명은 작은 숫자가 아니라 몽골제국 기준으로는 거대한 국가 하나를 상대하는 전력이였음 쳐들어와도 현지인은 몽골군에 협력을 안하고 정부가 있는 강화도는 요새로 도배를 해놨고 조운선을 비롯한 해군도 작동하고 정부 기능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꼭 철수할때면 어디선가 정규군아 나타나 뒤를 노림 그냥 서로 지쳐가는 판국에 고려가 항복한거고 몽골도 어느정도 포기한거임 무신정권이 마냥 무능한게 아니라 상당히 효율적인 방어전을 수행했음
맞습니다. 쿠빌라이가 결혼 시키지 않으려고 빙빙 돌리고 시간 끌고 했지만 원종이 얼굴에 철판 깔고 우겨서 결국 사돈 맺게 되었지요. 그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고려를 살린 성군이 원종 같습니다. 비록 항복은 했지만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고자 노력했으니까요.
과거부터 현재까지 전쟁에서 명분이란 아주 중요한 것이죠. 명분은 이용하려고 할 때 가치가 생기는 것입니다. 비슷한 민족임을 자처하는 것이라기보다 과거 가장 강대했던 기마민족인 고구려의 후손으로부터의 항복이라는 점이 작용하려면 상대인 고려를 높게 쳐줘야 했던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야 항복이 가지는 의미가 크게 다가오기 때문인것이죠. 전쟁 전 항복을 하면 자치권을 인정해줬던 것과는 다른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쿠빌라이가 받아온 항복의 의의를 높게 만들기 위함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는 거죠. 또, 지정학적 위치에서 더욱 중요한 부분은 기마병으로 대륙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던 것과 다르게 일본이라는 해적을 상대하고, 대륙의 가장 끝부분인 고려에 계속적인 병력의 투입을 없애기 위함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겁니다. 고려를 완전 점령하려면 고려를 멸망시키고 고려군을 해체해야 하는 데, 짧은 바닷길인 강화도도 점령하는 데 고생을 했던 몽골군이 당시 만주, 고려, 중국의 동부해안을 계속 유린하는 일본의 해적들을 상대하기 까다롭기에 고려해군을 이용하자는 목적이 더 강했다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당시 일본해적은 여러 역사서에서 말하듯이 많으면 몇만, 적어도 몇천이 한번에 상륙해서 지방을 유린하기도 하였으며, 소규모 해적은 기록조차 안될 정도로 많습니다. 그래서 고려를 놔둠으로 해서 얻어지는 이득이 점령 후 직접 통치하는 것보다 더 크기에 앞선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서 놔둔 것이죠. 결과론적으로 완전 점령하지 않은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고 하여도 내부적인 반발이나 이해충족을 위해 부마국으로 만들었던 것이고, 고려가 가진 인적, 물적 자원을 끊임없이 징발하였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죠.
허~~~몽고의 기원과 초원민족의 기원을 모르시군요. 쟤들이 고려를 심적으로 가깝게 생각했습니다. 고려여인을 왜 잡아갔는지 아나요? 몽고인과 고려여인 사이에 낳은 아들은 몽고인이 되었습니다. 혈연적으로 가깝다는 것은 걔네가 먼저 인지했으며 공주를 수차례 시집 보낸 나라가 고려입니다
유사역사라고 자꾸 치부하는데, 관련되는 사건이 계속 나오면 그건 인과관계가 있는겁니다. 몽골 자기들 스스로 고구려 후예라고 예전부터 대놓고 말해왔고, 부마국으로 만드는데는 전략도 있지만 역사적으로도 상관관계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청나라가 왜 조선을 완전히 정벌하지 않은지만 봐도 이 사건과 유사하게 봐야하는거죠. 사료로 남아있지 않다고 해서 역사적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야사로도 얼마든지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전후관계를 살펴봐야 하는거죠.
고려의 암흑기중 하나인 원 간섭기는 솔직히
우리뿐만 아니라 정복한 나라들을
통치할때도 아주 혹독하게 다스렸던것과는
달리 어느정도 자치권을 인정해주면서 몽골
황실과의 혈연으로 얽혔다는거 자체가
몽골도 고려가 호구가 아닌 국가라는것을 보증해주는것 같습니다
상식적으로다가 아무리 약소국이라지만
남송과 더불어 30년을 항쟁해서
버텨냈다는것 자체가 그 당시 손에 꼽을정도로 적으니깐요
남송은 40년을 항쟁하였지만 결국
패망했지만 우리는 우리스스로의 주권과
자주의식을 지켜냈다는것에 +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한가지 아쉬운점은 그때 우리 고려가
무신정권으로 군사체계가 붕괴된 상태에서
전쟁을 치루어서 당시 정상적인 정부형태로
전쟁을 치루었으면 훗날 역사에 어떻게 기록되었을지 궁금하긴 합니다
어떻게되긴요. 그냥 개발렸겠죠. 저당시 몽골군 막을 나라는 없었습니다
고려가 전성기인 숙종, 예종 시기였다 해도 몽골의 침입은 막지 못했을 겁니다. 거의 100% 단정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부분 같습니다.
다만 몇천 명 단위의 소규모 부대에게 국토가 유린 당하고 여기저기 털리고 하는 수모까지는 겪지 않았을 듯하고, 몽골이 제대로 각 잡고 일정 규모 이상의 정예병력을 보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차이는 있을 것 같습니다.
고려의 저항은 남송의 저항과 격이 다릅니다... 전 국력을 쏟아 남송 정벌에 도입한 것과 그저 남송 정벌에 매진하기 전에 사전 정지작업을 한 고려와는 상황이 다르죠.
저때 몽골 기병은 세계최강 군단임 그렇다고 공성전도 못한게 아님 금이 못하던 철옹성인 중국남송 양양성도 무너뜨림
나라가 건강했으면 오히려 진심펀치맞고 뻗어버렸을 수도
고려는 쿠빌라이라는 라인을 정말 잘탔음. 쿠빌라이를 지원해준 거는 사실상 도박이었지만 그게 성공한거지. 그리고 고려출신 몽골 왕후가 나온것도 컸음. 게다가 고려풍 의복식이 원명기에 중국서 대대적으로 유행했음. 이는 고려패션과 멋을 중원서 따라하기 시작했다는거. 고로 고려에 대한 풍속은 존중해준듯.
한류???
@@NaSoGaJang실제로 한류의 원조 중 하나라고 인정받는 것이 고려양임.
고려 = 코리아 유례
그에반해 고려에서는 몽골풍이 유행. 그러니 이런 븅따같은 글 다시는 쓰지마삼 ㅋㅋㅋ
저당시 전세계가 뚜들겨맞았는대 창피할게있나? 나만 처맞으면 수치스럽겠지만 다같이 처맞았으니 뭐 이정도면 선방했다~ 생각하면되는거임
푸빌라이 칸Poobilai khan
징기스 칸과 곰돌이 푸를 합성한
'푸빌라이 칸' 이라는 밈이 등장했습니다
이는 중국의 몽골 역사 공정을 비판하는 서구 미국의 초대형 소셜 뉴스 웹사이트 레딧Reddit
에 올라온 자료 입니다
최근 몽골제국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중국이 몽골제국을 자신의 역사로 규정하려는 움직임 때문입니다
이미 서구권 네티즌들은 몽골제국이 차이나 역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으며
이를 풍자하는 밈을 만들고 있습니다
최근 차이나 측에서 쿠빌라이칸 과 징키스칸 과 같은 몽골제국의 인물을 지나인으로 묘사하는
징기스 칸과 곰돌이 푸를 합성한
'푸빌라이 칸' 이라는 밈이 등장했습니다
이는 중국의 몽골 역사 공정을 비판하는 서구 미국의 초대형 소셜 뉴스 웹사이트 레딧Reddit
에 올라온 자료 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몽골제국의 신분제도입니다
몽골은 대략 네 단계의 신분 등급을 운영했는데
이 신분제도에 따르면 한족과 남송인 즉 양쯔강 유역의 몽골제국 내 한족들의 신분 등급이 나타납니다
이는 풍부한 농산물이 생산되었던 넓은 중원 지역을
몽골제국의 자금 원천으로 삼으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데이비드 M로빈슨은 2024년 최신 연구에서
16 - Koryǒ in the Mongol Empire from Volume I Part 3 - Views from the Edges Published online by Cambridge University Press: 01 January 2024
16 - 몽골 제국의 고려 1권 3부 -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온라인에서 바라본 풍경: 2024년 1월 01일
After a destructive war of nearly three decades (1231-1259), in 1274 the Koryǒ royal family formed a marriage alliance with the imperial Chinggisid throne that lasted a century. At the same time as Koryǒ-Mongol relations influenced Koryǒ's political, social, cultural, and economic history, Korean personnel also provided agricultural.labor and produced essential goods for the Mongols, campaigned in Chinggisid armies, acted as political advisers, offered religious sustenance, served as intimate attendants in the imperial palace, and married into empire's elite families, including the ruling Chinggisid line. This chapter comprises three parts first, a brief political narrative of Koryǒ's experience of the Mongol empire; second, thematic discussions of the military, personnel, and cultural exchange; and finally, some concluding comments, including the ambiguous legacy of the Mongol period for Korea.
거의 30년(1231~1259년)에 걸친 파괴적인 전쟁 끝에 1274년 고려 왕실은 한 세기 동안 지속된 제국 칭기즈 왕좌와 결혼 동맹을 맺었습니다. 고려 와 몽골의 관계는 고려 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역사에 영향을 미쳤음과 동시에 한국 인사들은 몽골에 농업 노동력을 제공하고 필수품을 생산했으며, 칭기즈 군대에서 활동하고, 정치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종교적 지원을 제공하고, 황궁에서 친밀한 수행원으로 활동했으며, 통치 칭기즈 왕조를 비롯한 제국의 엘리트 가문과 결혼했습니다. 이 장은 첫째, 고려 의 몽골 제국 경험에 대한 간략한 정치적 이야기, 둘째, 군대, 인사, 문화 교류에 대한 주제적 논의, 마지막으로 한국에 대한 몽골 시대의 모호한 유산을 포함한 몇 가지 결론적인 언급으로 구성됩니다.
몽골제국과 고려의 독특한 관계를 조명했습니다
그는 1274년 고려와 몽골이 결혼 동맹 관계를 맺었으며
고려인들이 정치 고문으로 활동하고 황궁의 일원으로서
몽골 제국 내 엘리트 가족과 통혼했음을 밝혔습니다
또한 2023년 9월에는 해외 학계에서 M.G.
FOR CENTURIES THE MONGOLS FAILED TO TAKE KOREA. WHY?
수세기 동안 몽골은 한국을 점령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헤인스가 "왜 수세기 동안 몽골은 한국을 점령하지 못했는가?" 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The Great Khan's armies toppled empires but were always stopped short at Korea. What were they getting wrong?
수세기 동안 몽골은 한국을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왜?
대칸의 군대는 제국을 무너뜨렸지만 한국에서는 항상 막혔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For centuries, Mongolia has not been able to take over Korea. Why?
몽골제국 최상류층이던 고려인들 중국에서 몽골 역사 감추려는 이유 I 영국 학계 주목하는 이유
ㅋㅋㅋㅋㅋ왜케 웃기짘ㅋㅋ
맞는 말이지 유럽조차도 싹 밀려버렸고 역사상 가장 큰나라중 하나를 만든건데 거기 쳐맞은걸 굴욕이다라고 할 순 없음. 지금도 미국 주도하의 세계 질서안에 편입되어있는데 뭐
@@멍멍남 맨날 쳐맞아서 그런거ㅇㅇ
지금 미국도 마찬가지...
역사에서 국뽕은 암세포다
솔직히 식민지
맞지
원나라에서 한족은 공식적인 3등급 인종, 한족여성은 몽골인에 초야권
오히려 이걸 딱히 수치스러워 할 이유도 없습니다.
너네 시진핑이나 잘모셔!
TMI : 사실 원간섭기에 변발이나 호복은 쿠빌라이가 아닌 충렬왕이 강요한것이다
충렬왕이 아닌 충선왕임. 충렬왕은 쿠릴타이 서열 39위 충선왕은 쿠릴타이서열 4위 황금씨족은 정말 강한 영향력을 가짐.. 충선왕은 충렬왕의 아들이지만 황금씨족으로 심양왕 자리를얻고 충렬왕을 쫒아내고 고려칸까지 얻게되고 변발호복을 강요함
징기스칸 당시 몽골 총 군사 수가 6만이 될까 말까임. 금나라 잔당 토벌할때가 2만이었고 거란과 강동성전투때 몽골 1만 여진족 2만, 1차 침입때 비슷한 규모로 쳐들어왔기 때문에 고려 침공 당시 3만은 적은 규모가 아니었음
그래서 강화도에서 전쟁지휘를 한거고 입도전략을 수립해서 백성들을 피신시키고 주요성에 장군을 파견해서 농성전을 지휘했지.8차에 걸친 전쟁에서 몽골군이 졔대로 된 성을 손에 꼽을 만큼 정복못함
몽골군이 여러차례 침략했지만 1차에는 귀주성,2차는 처인성전투 3차는 자모산성,4차는 충주성등 결정적인 승리가 있어 철수한것임. 몽골군도 많은 피해를 입어서 철수한것이지 무인지경으로 돌아다닌게 아니었음
고려가 항복했다면 마찬가지로 몽고는 6사를 관철시켰을 것이다.즉 왕자들을 인질로 보내는 입질 , 호구 조사, 몽골군에 식량과 조부상납,군사 제공. 다루가치 주둔, 역참 설치. 이중에 입질외에는 죄다 무산되었어. 항복이 아니었단 거야. 이 영상에서 고려를 원의 영토로 그린 건 명백한 오류임.
몽골의 침략에 굴복한 수많은 나라들은 왕족들은 처형되었고 왕조는 사라지고 수백년동안 6사를 비롯해서 몽골의 수탈에 시달렸어. 중국은 초야권은 물론이고 해마다 인구조절이란 명목으로 수많은 죄없는 사람들이 바다에 던져저 살해당했어. 비교적 관대하다는 러시아조차 마찬가지였지.
반면 고려는 30년간 군사적으로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고 수많은 몽골군이 죽었고 고려를 점령하는데 실패했어,
그 때문에 고려태자를 만난 쿠빌라이가 그토록 기뻐한거고 덕분에 천명을 받았다는 명분이 생겼고 강화협상 즉 평화협상에 동의를 했고 동방 3가의 지지를 받아 황제가 될수 있었던거야.
고려의 공적으로 인해 쿠빌라이는 고려에 불개토풍 즉 내정불간섭 약속을 했던거고 외국인으로서 유일하게 사위국이 되어 황금씨족의 일원자격을 얻었고 인종,무종같은 황제를 선출하고 원나라 국정에도 관여했어.
충렬왕은 황위서열 4위, 충선왕은 6위. 즉 앞의 3~4명만 죽으면 고려왕이 원황제가 되는 거야. 전국이 유린되었다고 쉅게 말하지 마라. 수많은 전투에서 이겼고 백성들은 도서지방으로 피신해서 수탈을 피했으며 자기 고장을 지켜낸 곳도 많음
신기하게 이런 팩트에 기반한 첨예한 의견에는 답글이 잘 안달림..
당시 군사수는 거의 십만이었다는게 학개점심
그리고 역사상으로 방어가 유리하긴 하지만 우리가 전투에서 승리한게 많긴했음
하지만 몽골3만군이랑 싸워서 고려는 전체 군사의 절반이상이나 전사했음, 전투는 승리했지만,
피해는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기긴 이겼는데
역사를 잘아시는분이 중요한 부분을 빼드셨네요
전투는 이기긴 이겼습니다
다만 고려는 매 침입마다 피해가 너무컷고 싸울 병력, 무기, 식량등 바닥이 난 상태였습니다
전투에서 승리 몇번했다고
몽골군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금나라 보세요
몽골 부족들이 합치기 전부터 지들이 쌔다고 몽골을 괴롭혔다가 원한 잊지않고 결국 그강대국이 멸망했습니다
우리라고 다를까요
본격적으로 장기주둔 가능하고 병력 준비한뒤 침공당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당시는 몽골에게 개기는순간 멸망테크는 확정이었는데요
그당시 송나라나 금나라가 고작 몇만명한테 멸망당할거라 생각했겠습니까?
강화도에서 황제와 신하들만 호흡기 붙여서 항쟁해서 전투서 이겼다는 기록보고 좋아하지 마세요
우리가 진 전쟁인건 맞습니다
다행히 황제와 신하들이 외교를 잘해서 혜택은 받긴 했지만 국토가 쓸려나가고 개판됐는데
국정에 관여한게 자랑입니까
몽골에서 생활하고 관직받고 일한 포로들인 그놈들이 왕이되서 몽골 좋은일만 할텐데
우리가 진 전쟁은 맞지만 매운 맛을 보여준 거겠지요..동사강목을 읽으며 느낀 생각입니다. 😊
졌지만 청피하지 않은 느낌
@@sjpark5586 점심임?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걸 알았던 게 아니라 그냥 같은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편의상 중세 고려와 구분을 위해 고구려라 칭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고구려를 그냥 고려라고 불렀습니다. 다만 고씨 고려에서 왕씨 고려로 왕조가 바뀌었다고 생각했죠.
이 부분은 고려가 당시 송나라 등과 외교할때도.. 송나라등도 '고려' (고구려도 고려로 국호를 바꾸고 실질적으로 고려라고 많이 불림)가 멸망했다던데 아직도 국가 유지하고 있네 .?? 라며 놀란 부분이고.. 이 시대의 중국등 외국에선 고려가 여러 우여곡적을 겪고 왕의 성씨도 바뀌었지만 계속 유지하는걸로 알았죠
그래서 쿠빌라이가.. 당태종도 정복못한 고려가 나한테 항복했다.. 이게 천명이가보다..... 라고 웃엇던거죠..
@@yongsuki어? 고려? 고구려? 그 수당도 정복못한 고구려를 우리가먹었네 헤헤
경비 아껴야죠😅
고려의 한자 뜻은 높고 화려하다 입니다
고구려 또한 높구 화려하다 입니다 구자는 그냥 접속사입니다
광개토왕 비문에도 고려태왕이라고 썼습니다
고구려 발해 고려 다 그냥 같은 고려죠 고씨 대씨 왕씨 지배층만 다를뿐
현대인의 관점에서 분석한 내용 잘 봤습니다만, 고대인의 시각으로는 좀 다른 결론이 나옵니다. 1. 쿠빌라이칸의 계승 당시 고려 태자의 귀순은 명분은 주었을망정 결과에 변화를 일으킬 요소는 아닙니다. 2. 아무 왕가나 자신의 딸을 주어 기미국이나 분봉국으로 삼지 않습니다. 상대국에 공주를 시집보내는 것 자체가 상대국을 달래기 위한 굴욕적 행위였으니까요. 3. 고려의 전략적 위치를 강조하셨는데 그보다 압도적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영토가 남송입니다. 쌍성총관부와 동녕부로 서경을 포함한 북쪽 영토를 모두 빼앗긴 상황에서 썩어 문드러진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 동방3왕가를 견제하는 시늉도 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1.이분의 말이 맞음
쿠빌라이에겐 대외적인 정치쇼의 일환이고
어느정도 여론 형성에 도움이 됐을지언정
고려태자 덕을 봐서 이겼다고 해석할 정도로
대세에 엄청난 영향을 준 이벤트는 아님
이미 파벌은 갈린 상태에 그저 군사적으로 누가 이기느냐의 싸움이었을뿐
3.이미 오랫동안 몽골도 무신정권의 한심한 작태와 그에 눌려 있던 고려조정의 무능함을 봐온 상태라 후방에서 고려의 군사적 행동을 솔직히 견제할 정도로 위협적으로 보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55CM-kc8bm 고대사회 상식 기준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2번입니다... '딸을 달라는 자와 결국 고민 끝에 딸을 준 자', 이게 제일 중요한 팩트입니다.
고려가 몽골에게 침략당한후 인구가 300만명이 안됬다고하니 군사키울 여력도 없었을껍니다 공물을 바칠려면 농작이 우선시되는 정책을 해야죠 군사를 키울려면 식량과재물이 많이 필요하기도하죠 그래서 군사를 이르킬 여력이 없다고보는게 맞습니다
'간섭기'라는 말 자체가 '우리는 다르다'라는 간절함의 소산. 외부인의 시선(몽골의 강역을 표시하는 각종 외국의 지도)으로 볼 때는 그냥 정복지이자 지방정권.
ㅇㅇ 지배기임
@@MarcosRodriguez-jk5qz 아닌데??? 화친과 정복 그 사이 어디 쯤이 정확함... 고대사회에서 지배지라는 의미는 피지배 국민 전체가 노예신분이었음, 그런데 고려왕이 몽골의 노예신분이었나??? 몽골황제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고려왕에게 지시하거나 무례하게 못 했음, 심지어는 몽골황제의 명을 받고 온 최고위급 대신 조차도 고려왕 아래에서 보고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충선왕은 몽골 궁전에 머물면서 지금으로 말하면 총리급 대신에게 하대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일제시대는 서로 전쟁도 없이 평화적 합의본건데 "강점기"라고 우기고 아주 역사를 입맛대로 바꿈..ㅋㅋ
의문인게 외국인이 쓴 칭기스칸에 대한 책을 읽었었는데 거기에 몽골 왕실과 결혼할수있는 자격은 몽고왕족과 몇나라 왕족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고려였다 3~4개 민족으로 한정했다는데 궁금했다 아시아 코딱지같은 나라 민족을 왜 그렇게 대했을까...중국 한족은 완전 하층민 취급했다는데 견제하려고 그랬나?
송나라가 몽골에게 끝까지 저항해서 하층민 취급함
색목인도 서열 높음.. 한족은 고위층 만들면 한족이 다수여서 몽골족이 밀림
한족은 저항을 너무 심하게해서...
징키스칸 네번째 부인 한국인이였는데 부인한테 빠져 왕정을 뒷전으로함
한족은 제일 아래서열이었고 고려가 천자국임 북방계는 고려를 무너뜨려야 진정한 천자국이 된다고 여겻음 그래서 수나라 원나라 여진 할거없이 고려 조선을 무너뜨릴려고 옴 . 혈통 족보 연구햇던 교수있엇는데 징키스칸을 거둔 케레이족이 부여계인가 그랬던걸로 암
속국이 되겠다고 찾아왔을 때
칸이 될 명분으로 생각할 정도로
크게 기뻐한것 보면 결국 고구려의
오랜 수성능력을 꽤 높이 평가한건
맞는것 같습니다. 결국 몽골 지배계층으로
합류 할 수 있었던 그 자체가 꽤 큰 특권
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몽골이 고려에게 굉장히 인정 받고 싶어한 것이죠. 대 고구려족의 근본을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뭔 개소리임 계급 크게 나누면 1왕족 2몽골인 3색목인(서양) 4한인(거란 여진 금지배하에 한족 고려) 5 남인(남송). 걍 피지배층 그자체인데 위치가 중원에서 먼 만큼 관심이 비교적 남인보다 떨어져 간섭이 아주 조금 덜 했을뿐이지 뭔 높이 평가임
@@고앙이-z2z 피지배계층이기
때문에 특권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거임.
하루아침에 함락당한 곳들이랑은
차별점이 분명히 존재하고 공주를 보내서
굳이 사위국가로 맞이한 일화도 있고,
니 말대로 최상위 계급인 왕족들만 참여할수 있는 자리 그냥 술마시고 노는자리도
아닌 차세대 칸을 뽑는 중요한 정치사에
참석하고 관여했다는건 분명하게 남아있는
팩트임.
@@박서준-c9m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마세요 ㅋㅋ
@@고앙이-z2z 1. 몽골 2 색목 3 화북인 4 남송인임.. 고려는 거란과 비슷한 대우였슴.. 나중엔 거란은 동족취급해서 몽골에 흡수됐고.. 고려도 부마국되고 충선왕땐 고려왕 +심양왕 자리까지 겸하게 해줬슴. 일단 화북인이나 남송인은 몽골어 배우는것도 금지했었슴. 관직도 지방 말단직이나 할수있었고..
고려인은 원나라 관직에 나갔던 사람들 많았슴. 한영같은 사람은 종3품까지 올랐었고 이곡같은 사람경우 원나라 관직에 오른게 고려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 원나라 과거에 응시해서 합격해서 원나라 관직에 오른 사람임. (고려 과거에서도 통과해서 이미 고려 관직에 올랐던 사람임) 이사람 아들이 목은 이색임.
몽골........과 싸우기전 고려는 거란과 여진과 결전을 벌임..... 몽골은 싸워서 이긴민족을 흡수하는 경향이 있기에 그수가 불어나갔지만... 고려의 경우 그러지 못했기에...인구수가 현저히 줄어들어있는 시기였음.... 다시 말하지만..... 고려말에 그정도로 버틴것 자체가 기적같은 일이었으
훌륭하신 댓글 추천입니다.
몽골이 이민족 흡스라고하는데... 사실 청나라도 그 근방의 부족 다 흡수해서.. 청나라 8기군이 만들어졌죠.. 근데.. 일단 청나라 성립이후.. 팔기군이 막 불어나진 않음.
국가 성립기.. 즉, 어떻게 보면 Nationalism처럼 국가 정체성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늘어나는건 맞는데... 일단 다 성립되고나면 막 늘어나진 않음.
그리고.. 몽골 지배이후에도.. 또 평화기가 한참되어서 인구는 늘어날수잇었죠
고려가 가장 불쌍했음😢😢
역사는 사실적시 그 자체로만 봐야하며 미화되서도 안되고 굴욕이라 하여 피하여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참 좋은 역사채널을 찾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님아 말은 옳은데 이 채널이 그 옳은 걸 갖고 있질 않아요 ㅋㅋㅋ
자국역사를 3자국 역사들로 검증하는건 옳은 일이지만, 조선대에 편찬한 고려사 고려사절요 내용을 1도 참고치 않고 외세 입장으로 현세에 기술하는 역사는 도대체 어느 저지능 집단들이 하는 짓일까요?
고려역사를 논함에 있어 보물로 지정한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기반으로 안하는 애들은 역사학자란 명칭을 쓰면 안되는 애들입니다.
이 유튜버도 그냥 깨인척하는 저지능입니다.
'역사'가 뭔지도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 역사를 논한다는게 이미 어불성설 고릴라 짓이죠.
세계사를 바라볼땐 인류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볼땐 민족관념으로 바라보는게 당연한거고, 3국의 역사는 팩트를 체크하는 참고 사항이 돼야하는데,
이 유튜버는 자국 역사서를 빼놓고 논리 전개를 하니 고릴라 만도 못한거죠.
ㅋㅋㅋ 고릴라도 지 부모는 알아 볼 건데 ㅋㅋ 사람이라면 자기 조상 말 먼저 생각해야는 거죠 ㅋㅋ
요약 : 라인 잘탔음
러시아는 몽골이고 우크라이나는 고려야
우크라는 일단 납작 엎드려서 나라 지키고 봐야지 싸운다고 될게 아님
@@DonaldJohnTrumpV2그러면 사실 고구려도 수나라에 납작 엎드렸어야 맞고 베트남도 미국에 납작 엎드렸어야 맞는데 현실을 보면 결과는 모르는 거지.
@@minkyukim7354 고구려가 수, 당에 저자세로 나갔다면 삼국통일은 고구려가 하고
베트남이 미국을 따랐다면 지금 우리나라보다 잘 살았을지도
뭐 역사란게 만약이란 가정이 무의미하지만용
내용 너무 재밌네요. 최근에 즐겨 보던 한 역사 채널 주인장이 정치색에 빠져 갈 데를 잃었었는데 역사멘터리 자주 보러 와야겠네요!
동방 3 왕가 같은 내용은 전혀 몰랐는데 덕분에 많이 배워 갑니다~
우와 오랑님 반가워요 여기서 오랑님 보내요 ㅋㅋㅋ
@@jungbrain5989 반가워요 모험가님~
제가 좋아하는 유투버이신 오랑님께서 좋게 봐 주셔서 뿌듯합니다. 저 또한 오랑님의 채널을 통해 많이 배우고 있으므로 항상 감사합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개인으로서의 정치적 성향은 당연히 존재합니다만, 영상에서는 그런 정치색을 최대한 배제한 채로 가급적 중립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사를 다루는 영상에서는 본의와는 다르게 각 진영의 관점에 따라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을 것 같아 조심스럽긴 합니다.
그래서 아직 현대사를 다루고 있지는 않았는데, 2주 뒤에 업로드 될 영상은 받아들이기에 따라 특정 정치 성향을 지닌 분들께는 꽤 자극적인 공격으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만, 그런 모든 걸 다 감안한다면 아예 현대사 관련 영상은 제작이 어렵기 때문에 감수하고 대본 마무리 후 편집자님께 전달해 드렸습니다.
그 영상 대본 작성하면서 그런 우려스러운 부분들 때문에 이후로 당분간은 현대사 관련 영상은 제작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가급적 불편함 없이 영상 보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Hmentary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만으로도 이미 주인장께서는 역사를 태도가 멋진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컨텐츠 많이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올린 영상들 전부 봤는데 다음편이 기대되는 채널입니다. 감사합니다.
심씨?
몽골은 당시 황족끼리 결혼하면
대대로 결혼해야 하는 전통이 존재
고려왕이 끈질기게 쿠빌라이 딸을 찾아내 결국 부마국 사돈지간을 맺게됨
문제는 대대로 고려사람들이 몽골인들보다 장수했기에 나중에 원나라 황제들보다 항렬이 높아져 고려왕을 이리저리 바꾸기도함 고려외교 알고보면 재밌음
그래서 몽골피가 귀함
몽골이 고려를 잘해준 이유
1)고려왕이 항복한 왕자가 다음 몽골의 칸이 됨
그 저항하던 고려왕이 나에게 항복했다고 자랑 했고 그때부터 그 왕자가 승승장구함
2)다음 칸을 정할 때도 다들 반대해도 고려의 왕자가 의리로 믿고 따르던 몽골왕자가 다 밀어 내고 다음 칸이됨 ㅋㅋ
이때부터 고려가 몽골에게 특별 대우 받음.
서희때 부터 보면 고려의 외교력은 개 쩔었음. 그래서 고려왕은 만주까지 함께 다스림(사실 준거임) 또한 몽골의 공주랑 결혼 하면서 부마국이니 뭐니 많지만 고려로 온 공주는 그냥 공주가 아니고 칸의 직속만 왔음. 마지막으로 고려는 칸 지명권이 있어가지고 영향력도 적은 나라가 아니였음.
현 시점에서 약탈이니 제후국이니 하지만 당시 세계관으로 보면 몽골이 잘해준거 사실임.
존경하는 역사학자님이 말씀하시길 역사를 논할 때 절대 하지 말아야 할것이 현대의 윤리관으로 보지 말라고 하셨다.
제 생각에는 고려가 어느정도 대우받은건 충선왕시기까지임..
충선왕이 황제등극에 도움준것 때문에 대우받고 심양왕도 겸하지만, 심양왕은 아들이 아닌 조카에게 물려주고,
본인도 황제가 바뀌자 유배당함. 이후부터는 그냥 핍박받는 속국..
일본도 조선강제병합이후 조선왕족 중에서 핵심은 일본왕족과 결혼시켜서 호의호식은 했지만, 조선인들은 핍박했죠.
@@gracus7 충선왕 때문에 생긴 비극이죠. 충선왕이 고려로 안돌아가고 심양에만 있으니까 고려가 개판이 되어버리는데 이때 원나라가 충선왕에게 고려로 돌아가라고 하니까 아들에게 고려왕을 물려주고 본인은 심양에서 심왕자리를 계속 유지하다 죽으면서 조카에게 물려 줍니다.
심왕과 고려왕 직위가 쪼개진 이유죠.. 심지어 고려왕을 물려준뒤 본인은 상왕질해서 고려왕의 권위를 개박살냄. 심왕이 된 조카가 그 못된 짓을 따라하려고 했고요.
고려에게 잘해준 이유는 심플하게 말하면 부려먹기 좋은 노예기 때문입니다. 쿠릴타이에서 원나라에게 1표주는 광대 짓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고 원나라는 고려가 제발 안망하길 바라는 나라가 된 겁니다. 지금의 중-북 관계처럼요. 정치를 할때 혈연관계가 제일 신뢰가 가지만 결국 정치는 정치임. 김정은이 왕되자마자 장성택 죽였듯이요. 살려두는 이유는 원하는게 있기 때문임.
1. 쿠릴타이에서의 역할.
2. 군사원조 및 병참기지 제공.(일본원정이 그 예)
3.. 만주의 동방 3왕가를 견제하기 위한 포석.
이중에 3는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에서도 유지가 됩니다. 조선이 매번 여진족을 패러 다니는 이유임.
객관적이니 감성을 싹 빼고 이성적으로만 봐야 맞는거랍시고 자국을 깎아내리거나 낮게 치부하기를 서슴치 않고 행하는 사람들이 날이 가면 갈수록 많아져 깝깝했습니다. 당장의 여기 댓글을 좀 읽어보아도 영 탐탁치 않았었다가 님 댓글 읽고나서야 좀 안심이 됐던 기분ㅜㅜ
@@afta-u8g그러게요 몽골이 중국이다 중동국가 어떻게 했는지 좀 알고 왔으면 러시아의 수도 기예프를 어떻게 했는지
고려에 시집 공주는 그냥 공주가 아니고 칸의 직속 공주만 보냈것만 봐도 그렇게 우습게 보는 국가는 아니였는데 진정 고려를 망처 놓은건 유교적 시점으로 평가하고 저술한 조선임.
짧지만 참 유의미한 내용영상이네요
잘봤씁니다.
쿠릴타이 서열 7위입니다. 고려왕은 황금씨족의 후예로 대칸의외손자로 영향력이 상당했어요
사실상 고려의 항전이라고 떠드는 삼벌초는 대막리지 최씨 정권 때려잡을라는 사건... 고려왕실은 이미 오래전에 항복햇지.,.
03:19 스포츠 토토하듯 쿠빌라이 선택 멘트 개웃겼넼ㅋㅋㅋㅋㅋ
역배에 걸었누
잘 배우고 갑니다!
고구려와의 관계는 몽골학자들이 더 관심있게 연구한다 들었음. 신화 풍습 인명 등에서 고구려와 관련성을 무시할 수 없음.
당시 몽골고원내 여러 부족이 유목등 문화적으로 같았지 혈통적으로 같지는 않았음. 나이만 타타르 메르키트 등 기타 부족들은 몽골 부족과 다른 기원이며 테무진이 대칸이 되었을 때 순수 몽골계는 40%정도였으며, 나머지는 몽골의 이름아래 협력하거나 지배당한 형태였음. 그러므로 같은 고원내 타 부족에게 무자비했던 설명이 됨.
정복한 땅에서 고려만 풍속을 유지하게 한게 아닌 것은 맞으나 킵차크 칸국의 경우 지배층은 몽골인이었으나 인구가 더 많은 투르크계에게 풍속을 유지하고 말고가 아닌 그냥 동화당한 것임.
고려의 경우 문화와 왕조를 유지하게 한 것도 모자라 딸을 내주어 황실의 일원이 되게 한 것은 이례적임. 심양왕을 통해 옷치긴가를 견제하려 했다는 설이 있으나 고려왕가를 멸하고 직접 통치하는 방법도 있었을텐데 바로 몽골의 코앞에 위치한 고려를 그러지 않았음.
👍👍👍👍👍
물어볼게 있는데 2:29에서 드라마 무신 처럼 태자 원종이 쿠빌라이에게 무릎 굻고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는데
실제로 인조처럼 삼천도 굴욕한거 마냥 머리를 숙여서 절했나요? 드라마라서 믿음이 별로 가지 않아서요
게다가 왕씨 대학살 이후 몽골 황족 혼혈 왕족이랑 순수 왕족 후손들이 살아있나요?
원종이 실제로 머리를 조아렸을지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아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정황상 그 비슷한 정도의 예는 표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성계가 왕씨를 대거 숙청했습니다만, 그들 중 일부는 옥씨나 전씨로 성을 바꾸고 생존해서 가문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그들 스스로 숙청을 피해 과거를 지움으로써 왕족으로서의 과거 정체성이 사라졌기에 묻혀 버린 게 아닌가 합니다.
@@Hmentary 그럼 원종이 머리 조아린 기록에 나와있지 않았는데 드라마 무신은 원종이 인조처럼 머리 조아리는 없던일 만냥 사실로 역사왜곡하고
최충헌 미화 하는등 고증 개나줘 버리고 흥행만 바라본 쓰레기 드라마내요 최근에 조선구마사 같은 쓰레기 드라마 차이나 머니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래서 한국사극 드라마가 이미 완전 시궁창으로 빠진지 오래내요 이번 고려 거란 전쟁 한국사극이 부활할수 있는지
근대 사실 지금도 왕씨사람들이 있는데 그중 전지현이 원래 고려 왕족 후손이라는데 조선족 가짜뉴스 떼문에 지금 왕씨성 버리고 전씨고 개명해 왕지현에서 전지현이라는 이름을 바꿨습니다
쿠빌라이는 당시 대칸이 아니었고 동생과 싸우는 상황이고
수년간 굴복시키지 못한 고려국이 스스로 제후국을 청하며 숙이며 항복해서
쿠빌라이가 엄청나게 반겼다고 합니다.
즉, 쿠빌라이가 홍타이지처럼 반감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었지요..
쿠빌라이가 얼마나 기분이 좋았으면 자기 딸을 원종의 아들에게 보내
사돈으로 삼았겠습니까?
삼전도가 진짜 굴욕인 이유는 원래 여진족은 세종이래로 조선을 어버이의 나라라고 하며 섬겼기 때문임
@@frisebichon1519 홍타이지 같은 경우는 솔까 화낼만 했었죠 당시 심양 즉, 청 본진에서 오랑캐에게 절 못한다고 조선 사신이 거부했다고 하니
암울한 역사이지만, 병자호란은 막을수 있는 전쟁이었음 유목민 출신 답게 깐깐하게 조건 세운게 아니라
명이랑 전쟁중이니깐 가만히 있어라 그리고 명한테 사대하는거 까지는 허락해 줄께라는 선처(?)까지 베풀었는데도 병력 파견하고
이괄의 난까지 겹치는 상황인데 덤벼들었으니 뭐 현 축협같은 느낌이었겠죠 당시 조선 조정도
우리역사중 가장 수치스런 시기는 일제강점기 아닌가?
일제시대가 되어서 노비가 해방되고 현대사회로 진입한 측면도 있죠.
대일본제국 2등신민이 뭐가 부끄럽냐
@@메뚜기-l3u 뭐지.?노비제폐지등 신분제 폐지는 갑오개혁때 되었구요.님이 보기엔 갑오개혁도 일본애들이 했고 그런 일본인들이 조선에 착취와 멸시를 했고 나라가 망해서 민족성이 단절되었으나 조선이면 못할 근대화의 길을 열어줬으니 일제강점기가 치욕이 아니라고 하는거에요?ㅋㅋㅋ
@@메뚜기-l3u 역사를 일베에서 배웠나?ㅉㅉ
200년 청 속국이지
또한 일제강점기와 같은 역사라 하는데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라 여겨지죠
맞는건 아시다 시피
묘호에 충을 넣고 조와 종을 쓰지 못한것, 공녀나 각종 물품들의 수탈및 불합리한 대우등과 원나라가 신분을 매길때 고려사람은 3등급으로 취급한것(물론 이건 평민에 한에서의 이야기지만)
틀린건
일제강점기처럼 국체가 사라지지 않고 만약 그럴 행위를 하면 세조구제를 근거로 치열하게 막은점
불개토풍을 근거로 나라의 문화를 지킨것
또한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합단적(카디얀)이 준동할때 고려가 합단적을 토벌할때 공을 세우고 한희유와 원충갑등의 활약으로
동녕부를 평양에서 심양쪽으로 옮기고, 탐라총관부를 다시 고려가 가지는 외교적 성과도 있죠
비록 부마국이어도 끝까지 싸우고 불리한 상황에도 기회를 살펴 이익으로 바꾸는 자세야 말로
고려의 힘이 아닐까 하며 단순 일제강점기처럼 한심한 역사는 아니라는 점이 있죠
진짜 소름돋는다 이런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ㅋㅋ
이게 어떤논리냐면 일본이 일제강점기때 지배하면서 조선을 특별히 여겼다고 자랑스러워하는 것과 똑같은 생각임 ㅋㅋ
물론 지금 몽골하고 사이 좋지만 그렇다고 아픈 역사을 미화하지말자 여몽전쟁당시 얼마나 끔찍했는지 기록보면 다나와있고 그 후 100년간 지배하면서 여자, 각종 자원들 엄청 약탈해갔는데
어쨌거나 고려 원종이 라인을 잘 탔던 것 만큼은 팩트.
고려는 현북경과 양자강 하류 남경까지 대륙동부 를 본토로하는 강대국이였기에 유일하게 멸망하지않고 혈연으로 유지되는사이였죠 고려랑 싸우면서 국력소모가 심했습니다.
쿠릴타이 서열이 처음에야 39위였지 매대마다 결혼을 시키니 나중에는 거의 다섯손가락안으로 들어갔다고 알고 있음.. 일부다처인 왕실 특성상 다섯손가락 안이면 거의 직계 한집안이라는 뜻임..
그쵸..하지만 그때되면 원나라도 힘이 약해질대로 약해질 시기라 큰 의미는 없다고 봄
제일 큰 원인은 오래 살아서임. 부마라 왕족에 낀게 충렬왕인데 나이 72세에 죽었슴. 쿠빌라이가 칸 등극하게 도와줬는데 쿠빌라이 죽고.. 쿠빌라이 손자가 황제가 되는데 그 손자가 죽고 증손자가 황제가 될때까지 산게 충렬왕이라 ㅋㅋㅋ
@@jamisont1 존버는 승리한다 ㅋㅋ
근데 중국은 그래도 닮은 경우가 많긴한데 해외인 중 한국은 몰골과 생김새가 제일 비슷하지 않나요?
이것도 그냥 편견이었나?
따지는거 아니에용
제가 대학교때 배운걸로는 일단 언어의 어순이 같은걸로 알고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배우는것에 비해 서로의 언어를 배우기 쉬웠기 때문에 쉽게 가까워질수밖에 없었을것 같은데요. 한국 공녀들이 가서 말도 잘 배우고 높은 위치의 사람들과도 결혼하면서 계속 우호국의 위치를 유지했을듯 합니다
충선왕시기까지는 그래도 어느정도 대우는 받았지만, 이후에는 그냥 속국이죠. 공녀들이 성공한다 한들.. 고려에 조국이라는 의식있는 경우는 거의 없을듯요. 기황후도 오빠들이 고려를 핍박할뿐이었으니까요.
고려는 무신정변이후.. 헬고려였음.
황제 선정과정에서 선택을 잘했지 불개토풍 쿠빌라이 칸한테 받은 게 좀 크긴 했음.
쿠빌라이칸이 군사력은 강했지만 그 당시 정당성이나 정치력이 약했음. 원종이 쿠빌라이칸을 선택한 게 무신정권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음. 정치나 정당성이 뭐가 중요하냐 군인 있으면 정변일어나서 우리나라도 무신이 득세하는데. 그래서 원종이 군사력 강한 쿠빌라이한테 붙음. 반대로 쿠빌라이는 군사력은 충분한데 정치력이나 정당성을 원종이 항복함으로서 얻을수 있다보니까 좋아함. 굳이 쿠빌라이가 고구려 언급하면서 기뻐하는 이유도 고려를 올려치면 스스로의 업적이 더 커져서 라는 이유도 있음
뭐가 되었던 우리는 몽골의 침약 앞에서 살아 남았고 국채도 유지했었음 몽고가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어떻게 했는지를 알고 있다면 굉장한 성과임.
유명한 말이 있죠.
센놈이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가는 것이 센놈이더라
웅 칭기즈칸이 죽고 쿠빌라이가 칸이 되면서 통치하려하는 체재로 바뀌게된 운빨을 받은거지 고려가 잘버티긴 개풀
고려가 아니고 정동행성임 ...고려는 원식민지임 ...
일본도 합병하고 대한제국 왕은 잘해 주듯이 원나라도 정동행성 성장으로 임명하고 잘해줌 ...이때는 고려국왕 아니고 원식민지 정동행성임 .충렬왕은 고려국왕 아니고 정동행성 성장임 ... ..
@@ghwnsha그 운빨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도 재주지 파키스탄 핵개발 역사 봐라 미국이 그렇게 제재 때렸다가 빈라덴 잡아야 하니까 풀어줬는데 그때까지 파키스탄이 못 버텼으면 핵무기가 있었을까?
@@유튜브까마귀 백성들은 다 학살당하고 노예로 끌려가고 여자들은 강간당하고 유린당하며 끌려갔는데 뭐가 얼어죽을 잘버틴거래 ㅋㅋ
@@ghwnsha 일본이 초토화되지 않은 것도 그야말로 운빨이죠. 태풍 운빨
뿌리가 같니 형제의 나라라니 이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얘기냐면 대한민국 5000만 인구중에 10대쯤 올라가면 인척관계 아닐 사람이 없을뿐더러 실제로 친형제끼리도 싸우고 웬수지는 일이 많은데
그보다 더 몇백년전 몇천년전에 형제의 나라라고 도와준다는게 말이 안되는데
우리나라는 유교적이데올로기에 너무 매몰되서 감성적으로 항상 정치 역사 외교를 바라봄
각자의 나라의 이득이 되니 도와주는거임
맹목적인 사랑은 부모님이 자식한테 주는 사랑 밖에 없음
다만 목적이 있어서 도와준거여도 받은 사람이 되려 니들 그런 이유로 우리 도와준거잖아!!
이렇게 말하는건 또 말도 안되지만
어릴적 권선징악의 동화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엔 너무 많은것도 문제임
외교는 영국, 일본처럼 영악하게 해야됨
맞는 주장같지만 헛점 또한 많은 영상
'진짜 이유'라고 했지만 그또한 뇌피셜에 가까움
여러가지 지적하고 싶지만 우선 딱 한가지만 지적할께요
원나라가 망할때까지 우리가 부마국이었음 -- 이 이유는 이 영상이 '진짜 이유(일본정벌, 배후세력)'라고 한 이유와 안맞음
전략적 부마국이었다면 원나라가 망할때까지 부마국 지위를 가질 필요가 전혀 없음. 더구나 몽골은 상대국 공격할때 배후 따위 생각하지도 않는 나라였음. 또한 끝까지 항쟁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인은 거의 몽골인 다음의 지위까지 누렸음
아무튼 이런 전략적 이유보다 이 영상이 무시한 정서적 문화적 요인이 더 컸다는 사실이야말로 진짜 이유일 수 있음
니 댓글이 진짜 뇌피셜 거의 개소리급
여기 정병 두명 발견
@@Gold9-w1x여기 이덕일씨 채널 아니에요.
@@Gold9-w1x 근거가 ㅋㅋㅋ 생긴게 닮았으니 우린 조상이 같다 ㅋㅋㅋㅋㅋ 유전적으로 꽤 가까운편은 맞지만 그럼 일본인은? 거긴 더 가까운데? 아 환단고기 신자들은 그래서 일본도 다 우리꺼라고 하긴한다더라 왜 그냥 인류의 발원지인 아프리카까지 다 우리 역사라고 하지? 거긴 좀 덜 닮아서 우기기 힘든가?
@@우비-q4g몽골라인부터 일본까지뿌리는 북방민족이 맞음... 한족은 중국남쪽에 있던 민족이였고..
충렬왕이 몽골(돌궐)족이랑 피가 섞인게 굴욕이라뇨 고구려때부터 이미 섞였는걸요 소고구려왕은 돌궐계 고구려인이였고 연개소문의 아내는 돌궐공주였습니다
우리역사 역사상 가장 수치는 일제강점기 입니다
1000만명 인구가 3000만명이 늘고 노비가 없어짐. ㅋ 오히려 수치는 조선시대 아닌가 ? 신분이 있던 시대인데 ? ㅋ
뭔개소리냐
역시 예전부터 몽골이 특별 대우했다는 말은 안 믿었는데
국뽕이었어 ㅋㅋㅋ
저항하면 다 쳐죽인 몽골이 울 나라가 잘 싸워서 봐주고 존중했다는 게
말이 안된다 생각하고 있었음
그 엄청났던 거란과 그 엄청났던 금나라도 탈탈털리고 포기했던게 고려정복이였는데 몽골은 고려의 항복을 받고 자신들의 부마국 까지 되었으니 진정한 천하의 주인이된듯하고 칸으로써 위엄이 서니까
수백년 지난 역사는 단어로만 남지 그렇게 구체제으로 형상화하지는 못합니다.
@@goggle02
역사학자들은 그냥 다 나가 뒤져야겠네
뻘짓거리니까
그옛날 당태종과 요 성종에게도 무릎꿇지 않았던 민족의 태자가 본인에게 찾아와 항복했다.
상당한 선전효과가 있으리라 봅니다만..
@@차재문-r8x 지금같이 sns나 역사정보 접하기 쉬운시절도아니라서 민중들은 당태종이 뭔지도 모를텐데 선전효과가 있을리가..
@@doubleballb고려가 거란을 물리쳤을때 동북아시아 근방국가는 물론 동남아시아까지 다 소문났었다고 했음.. 그 이후 고려는 200년간 태평성대를 누렸다고했음
몽골 황족과 고려 왕족 피섞인건 사실임.
몽골 쿠빌라이 막내 공주가 충렬왕과 결혼
충선왕 부터는 쿠빌라이 외손자임.
외손자지만 쿠빌라이 핏줄이면
몽골황실에서 조차 함부로 대할수 없었음.
쿠빌라이 고려에 유리 하게한 결정 많았기 때문에
후대 황제들이 함부로 그걸 바꾸지 못함.
그걸 충선왕이나 고려 왕들이 잘 이용했음.
누가 물어봤나요?
@@데스나이트-n8q 분위기 파악 못하지 말고 닥치셈 ㅋㅋ
@@성이름-r9p4h 오골계신가
생각지 못했던 지점들, 일반적인 통념들을 전문성 있는 학자들의 의견을 토대로(고정댓글 댓글에서 그렇게 느꼈습니다.) 일반인도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를 정련하는 과정이 돋보이는 좋은 영상인것 같습니다! 혹시 역사가 전공분야이신 분이신가요? 다음에 영상을 올려주실때 혹 참고하신 논문이 있다면 그것또한 영상소개글에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필사적인 저항으로 고려가 만만한 나라가 아니라는 인식이 쿠빌라이가 하늘이 자신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된건데 역시 현실에 최선을 다하라는게 진리인듯
고려태자가 쿠빌라이한테 간것은 단순히 우연한 조우일 가능성은 낮음. 나라의 운명이 걸린일인데 우연히 동선이 일치했다하여 만났다는것은 설득력이 없음. 동선이 일치해서 근처에 이르렀다해도 만약 쿠빌라이가 별로였다고 판단됬다면 몽골로 방향을 돌렸겠지... 한 나라의 태자로써 책임감이 막중한일인데... 다 알아보고 신중하게 내린결론이었을 가능성이 높음. 당연한거 아닌가? 당시 송나라 정벌중인 군사력이 훨씬 강한 쿠빌라이한테가는게 인지상정이지...
저도 같은생각입니다 세상에 이런 우연은 없지요!~
때론 우연한계기로 역사가 바뀌기도 합니다 순전히 운일수도 있는일이죠
고려사 기록으로만 보면 고려 태자(나중에 원종)가 쿠빌라이를 선택해 만난거지 우연일 확률은 낮아보입니다. 원종은 강화 협상을 하려 몽케 칸을 만나기 위해 이동 중이었는데 육반산에 도착했을때 몽케 칸이 죽은 사실을 알았고 곧바로 수도인 카라코룸에서 후계자 작업을 진행중이던 아리크부카를 만나러 올라갈수도 있었죠. 근데 중원에서 정벌중이던 쿠빌라이가 칸의 승하 소식을 듣고 급히 올라가던 중이었고 여기서 원종은 방향을 틀어 양주와 초주 근처에서 쿠빌라이를 만났다고 합니다. 고려사 내용이 고려 입장을 기반으로 한 고려 실록과 고려말 사초를 통해 지어지긴 했으니 우연을 필연의 선택으로 둔갑시켰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원종이 육반산에서 북쪽인 수도로 바로 안가고 굳이 양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후계자 다툼이 일어났을때 한쪽을 선택하기에 앞서 가까이 있는 쿠빌라이부터 황제에 오를만한 인물인지 군세는 어떤지 직접 만나서 살펴보는 정탐의 목적일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만났고 원종은 쿠빌라이에 자신의 명운을 거는 선택을 한거라 보여집니다. 그리고 그 배팅은 성공으로 귀결된거고요.
이렇게라도 살아 있어서 다행이죠. 이걸 못해서 사라져버리면 기회조차 없어짐.
논란의 여지가 큰 앞 부분은 뺴고 본래 목적하신 것으로 보이는 지정학적 관점에서의 고려의 중요성만을 이야기하셨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앞서 이야기하신 부분의 주요 골자인 몽골 (선민족 - 실위, 선비, 동호)과 고려 (선민족 - 고구려/백제/신라, 고조선)의 민족적 친연성은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는 분야로 지금으로서는 어느 한쪽의 의견이 맞다라고 확신할 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민족적 친연성 때문에 고려를 중용했다는 관점이 옳지 않다는 점은 공감합니다. 나의 이익을 해치면 형제도 가차없이 제거하는 것이 몽골과 그 후속 국가들이 보여준 모습입니다. 아니 역사에서 대부분의 국가/권력집단이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
하지만 논란은 영원할것이고 대체적으로 맞는것은 인정하지 못하는건 비참함과 바램이 섞여있기때문 즉 일본인들과 비슷한 옹졸함 떄문이 아닐지
몽골 입장에서 한반도는 강준치 (맛도없고 가시가 많아 딱히 잡아먹지 않음) 임.
그냥 놔두면 짜증나게 하는데 막상 투자하고 먹자니 서쪽 원정에 비해서 얻을수 있는 전리품이 비교가 안됨.
역사는 있었던 사실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렇게만 보면 테무진 아버지가 며느리를 구하러 동북쪽으로 왓던것. 많은 몽골 귀족들이 고려인을 부인으로 결혼한거. 등등이 이해하기 어려워지죠. 몽골초원과 만주를 포함한 지역은 고조선 시대부터 같은 국가를 이루었고, 물론 왕가는 단군이셧기에 왕가의 정통성에 있어서 고구리,고리 쪽이 정통이었던거죠.수당이 고구리를 정복하려 했던것도 이런 차원에서 접근해야 더 명확해진다고 봅니다.
일본은 가야나 백제..또는 고구려에서 넘어간 사람들이 우리와 유전적으로 비슷한 거지.. 거기 토착인은 동남아 사람들과 유전적으로 비슷함.
창피했던 자랑스러웠던 우리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발전이 있겠죠.
현실적이라는 기준이
현대 우리 가치관으로의 현실적이면 안될거 같습니다.
철저하게 당시의 의식과 세계관으로 바라봐야
진정한 역사를 분석한다고 생각 됩니다.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가치관과 가치로
과거의 역사를 해석하면
역사는 점점더 왜곡될 뿐인거죠.
우리 시점에서는 말도 안되는게
당시에는 충분한 사유가 될수 있었던 겁니다.
당대를 살아가는 역사 학도들이
가장 실수하는것 중 하나가
당대의 가치관으로 과거를 판단하는것이죠.
결과적으로 러시아와 중국은 몽골족에게 엄청 뚜드려맞은거였다 동방3왕가가 결국 청나라의 뿌리가되는거니까
조선이 건국하면서 고려 실록을 없애버린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이었고, 실제 유튜브 등 다양한 곳에서 역사적 고증없이 카더라 통신만 남발하는 거라고 봐요. 조선 실록도 고려 실록을 바탕이 되서 만들어진 것은 역사적 사실이죠.
진짜 제대로 된 고려 존속 이유를 알게 돼서 속이 후련하네요. 만주쪽은 테무게 옷치긴 전담인 줄 알았는데 테무친 동생들 삼형제가 분담 통치하고 있었군요. 지정학적 이유로 고려를 인심 쓰듯이 살려주고, 쿠빌라이 자신의 측면을 위협하는 우환거리 동방 3왕가를 언제든 찌를 수 있도록 그 남쪽의 제어 장치를 마련한 셈이네요. 그런데 실제로 고려가 몽골에 그런 이유로 도움이 된 적이 있었나요? 고려도 원나라에 파병한 적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그 때가 원 초엽인지 원 말엽인지....
고려가 원나라에 원군을 파견한 또 다른 사건은 원 말기 장사성의 난 때입니다. 당시 정세운 장군을 비롯한 여러 고려군 장수가 원나라에 지원군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정세운 장군에 대해서는 저희 채널의 해당 영상을 보시면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동방 3왕가에 대한 원 황실의 견제는 상당히 중요한 이슈였고, 그래서 심양왕, 나중에는 심왕이라고 아예 외자를 붙인 높은 격의 왕공 지위를 신설하고, 고려 왕족을 그 자리에 임명해서 심양왕과 고려왕을 통해 동방 3왕가를 이중견제했습니다. 심양왕은 심왕으로 격상되면서 고려왕보다도 높은 지위를 차지했지만, 사실상 실권은 거의 없는 명예직에 불과했지요.
@@Hmentary 울 나라는 안 버티고, 중국은 겁나 버텨서 심한 대우를 받았다는 듯한 뉘앙스로 말 하는 너같은 것 보다는 나음. 현실은 중국은 역사적으로 굴복이 패시브였던 나라고, 울 나라는 몽골 외에는 없지.
결국 너도 뇌피셜인데, 같은 뇌피셜이라도 너같은 것 보다는 나음
@@AdeZbv조선 이후는 굴복 패시브 맞는뎅 ㅋㅋ 오히려 고려때 제일 잘 버틴거 아닌가?
@@jhpakr8742 살아있는 시체죠. 당시에 '나라가 있으나 없는 것과 같다.' 라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님. 조선은 국제정세가 명, 청을 견제할 제 3의 세력이 없다는게 베짱플레이를 할수 없는 이유임. 고려시대의 중국은 요(금)-송(남송)-서하 이렇게 서로 싸우고 있으니까 게임체인저, 캐스팅보드처럼 행동할수 있지만 조선은 명나라와 1:1로 해야함. 그마저도 몽골제국이 중국을 모두 청소하면서 고려도 조선과 똑같이 됨.
@@Hmentary중국이 오래 버텨서 심한 대우를 받은 거라고? 여기서 웃고 간다. 역사 왜곡 오지게 하는구나. 역대 중원 왕조들이 북방 민족을 몰살에 가깝도록 못크고 이간질한게 쌓여서 중원 정벌 한 이후 그 원한에 일정 수 이상 인구가 쌓이면 정리 들어갔던거다. 수레바퀴 보다 큰 인간은 다 죽이라는 몽골 비사 내용 보면 그 원한의 크기 때문에 못살게 군거지 오래 버텼다고 못살게 굴었다고? 그런 왜곡을 퍼뜨리면서도 부끄럽지도 않냐?
우리 고유 문화를 유지한건 한족은 고유문화를 못 쓰도록 억압받은 것보다는 훨씬 큰대우지
전체 재생목록도 만들어쥬세요❤
사실 고려사에 대해 해설본은 공개하면서 그러나 원본은 공개안함 그이전 역사서인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도 해석이 되면 지금역사가 가짜란게 알려지는건 번역 안함 예로 충주고구려비에 번역본 보면 동쪽 이란부분을 해석안한버전도 있음
삼국유사에 고조선은 환웅이 삼위 태백에 3천의 무리를 대리고 왔다란 문장이 있음 근데 한반도엔 태백은 있어도 삼위는 없음
친일파라면 치를떨면서 친원파 인사들의 대우는 위인급 ㅋㅋㅋㅋㅋㅋㅋ
몽골과 우리의 유전학적 차이가 크다란 표현은 약간 핀트가 어긋났어요...
몽골은 유전학적으로 보통 16~18민족 정도로 분류됩니다..
그 중 세번 째로 많은 코리, 쿠다라를 포함하는 부리야트라 불리는 민족이 만주족과 우리랑 매우 유사성이 큽니다... 황금씨족은 흔히 말하는 할흐족에 포함되는데, 이 할흐족이 현 몽골인의 90프로에 해당됩니다...
문제는 이 할흐족이란 개념이 징키스칸 전후 결혼동맹 등으로 매우 광범위한 혼혈집단이라는 점입니다.....
돌아가서 징키스칸 시대 당시 순순히 굴복하고 혼혈된 가장 상위신분의 민족 중 하나가 부리야트족입니다... 해서 황금씨족들이 부리야트 계열을 같은 민족개념으로 생각하는 성향이 있다는 건 팩트에요.. 솔롱고란 말도 없는 말이 아녜요.. 실제로 몽골 역사학계에선 만주족이랑 예맥족을 우리 땅을 먼저 떠난 사람들이라고 정사화 하고 있습니다... 세계적 주류도 이와 다르지 않고요...
다시 말하지만, 부리야트, 만주족, 예맥족이 같은 뿌리라고 하는 건 이미 유전학적으로 확인된 부분입니다.. 이견이 있기 힘들어요..
중국은 남방계인 진한시대 한족과, 북방계 정주국가와의 통일 후 현재까지 이들의 혼혈이 주류인 상태고... 몽골은 할흐족이란 이름으로 현재까지 무한 혼혈이 고착된 상태니...
지금 중국인이 몽골인보다 유전학적으로 더 가깝네 마네 하는 건 의미 없는 주장입니다...
어느 자료를 바탕으로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황금씨족이 할하족이라는 전제부터 오류입니다.
황금씨족은 차하르부의 지도층이었고, 현재의 내몽골 지역에 거주했다가 청나라에 협조한 이래 중국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래서 현대 중국인들이 칭기츠 칸 후손 = 차하르족 = 내몽골 = 중국인의 일부 이런 흐름을 주장하기도 하는 겁니다.
할하는 몽골 외곽의 한 집단이었지 주류였던 적은 초기에는 없으며, 이후 몽골 집단이 둘로 나뉘는 과정에서 제대로 형성되었습니다.
부리야트 언어는 할하나 차하르 언어와 좀 차이가 있고, 부리야트인들은 칭기즈 칸 정복 초기 과정에서 정복당해 흡수된 집단이며, 당연히 범 몽골계를 언급할 때에는 동질 집단으로 얘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든 우리와 몽골의 친연관계를 주장하고 싶어 하는 분들께는 안타깝습니다만, 유전학적으로 가장 과학적 근거 중 하나인 하플로그룹 지도에 따르면 우리 민족과는 상당한 유전적 거리가 있습니다.
팩트라는 단어를 손쉽게 사용하시기 전에 먼저 그와 같은 제반사항을 확인해 보심이 어떨까 싶습니다.
@@Hmentary 할흐가 황금씨족에 포함되는 개념이 아니고요... 현재 할흐라고 하는 민족부류에 황금씨족이 포함된다는 말입니다... 제가 표현을 헷갈리게 했나보네요...
차하르는 민족분류가 아니라 할흐에서 황금씨족 친계직속부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차하르란 말 자체가 황금씨족을 의미하는 단어에요.. 부족단위로 인지되고 몽골의 여러 세력 중 하나라고 여겨진 건 명나라 때 얘기고요...
부리야트가 몽골제국에 합류하게 된 것도 정복흡수라기 보단 굴복이라고 표현해야 맞는 부분이고요.. 그 후로 징키스칸에서 3대 이내의 모계에 부리야트 계가 셋이였나 넷이였나 섞입니다...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정확하진 않아서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죄송...
어쨌든 칭기즈칸에서 쿠빌라이까지가 3대니 황금씨족과 부리야트족은 혈연관계가 맞다는 얘깁니다..
저는 쿠빌라이 이전까지 고려와 황금씨족이 친연관계라고 한 적 없습니다... 전 부리야트와 예맥족이 친연관계고.... 쿠빌라이 포함 이후 세대들은 이 부분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얘길한 거죠...
부리야트도 몽골제국 주류 중 하나니,,, 몽골인과 우리의 유전학적 차이가 크다란 말은 핀트가 어긋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쿠빌라이 이전까지 황금씨족과 고려랑 유전적 차이가 크다란 말이 딱 들어맞는 말이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일반 대중들이 말하는 몽골이 고려란 존재를 살려준 근거 중 하나라고 말하는 (같은 민족이라서) 란 건 틀린 말이 맞습니다...
근데 주인장님이 말씀하신 같은 민족이 아니라고 대는 근거로 유전학적 차이가 크다. 란 건 팩트는 맞지만 인과관계가 될 수 없다는 얘깁니다...
몽골 내의 부리야트와 우린 유전학적으로 매우 가깝거든요... 다시 말하지만 보편적 몽골인과 우리랑 가깝다는 말이 아닙니다... 몽골 내의 소수민족인 부리야트와 우리랑 가깝다는 말이지... 하플로그룹 해석도 다시 꼼꼼히 봐보세요...
근거를 대라고 하셔서 링크 뒷 숫자를 한글로 바꿔 올려놓으니 계속 지우시네요....
링크가 거슬려서 그러시다면,,,, 몽골 고대사로 구글로 검색하셔서 꼼꼼히 찾아보시길....
꼼꼼하게 잘 봤습니다. 😊
21세기들어 유전자 분류 기술의 발전덕에 밝혀진 사실인데. 유전자 분류를 해보니 우리나라가 남방계의 흔적이 아주 강하게 나타난다네요. 북방보다 오히려 일본. 대만. 동남아에 있는 유전자의 흔적이 많이 나온답니다. 기마민족 유전자도 섞였겠지만 우리나라는 일본, 중국,만주족 여진족 등의 요소가 강하다고 합니다. 민족이라는 개념도 혈연 보다는 군집하며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개념이 강하다고 보면 되겠네요. 인간이라는게 순수혈통끼리 섞이다 보면 기형아도 많이 나오고 도태되니 먼곳에서 온 손님들을 환영하는 문화도 많이 있잖아요. 오래전부터 다들 섞여서 순수혈족이라는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으므로 혈연적 동질성은 확대해석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핀트라는 말 너무 거슬려 ㅜㅜ
영상 제목만 보면 어그로인 줄 알았는데 내용을 보니 아주 깊고 냉철해서 맘에 드네요. 아직도 정신승리 하는 분들 보면 많이 부끄러운데 그렇지 않고 중립적으로 파악하셨네요.
너무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이분 나레이션 개좋넹
반식민지였지. 원간섭기는. 근데 자주국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많지
👍
저 당시 몽골은 정말 욱일승천하는 나라였어서 고려가 저 당시 끝까지 저항했다고 했으면 결국 나라가 멸망 당했을듯
재밌었습니다.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고려만 특별대우한게 아니라 몽골은 원래 종교랑 지역풍습 존중해주잖아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게 화북 지역의 한인들이나 양쯔강 이남의 한인인 남인들은 그렇게 존중하지 않고 철저하게 탄압했습니다. 아울러 중앙아시아 지역의 여러 국가에서도 해당 지역의 문화를 존중하지 않을 때가 많았지요.
하지만 티베트의 경우 확실하게 존중하고 오히려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기도 하는 등 몽골의 지역과 상대에 따라 달랐습니다.
새로운 정보, 새로운 시각은 좋은데
왜 화가 나셨나요? ㅎㅎㅎㅎㅎㅎ
우리는 많은 역사를 빼앗기고 잃어 버렸습니다.
그것을 되찾는 것도 너무 힘겹고 어려운 상황인데
겨우 저런 이유로 화를 내고 있는 모습이 씁쓸합니다.
주변국은 남의 역사를 꿀꺽하기 바쁜데
정작 해당 국민은 자국 역사를 까기 바쁜 사람들이 많군요.
댓글들 보면 가관입니다.
영상 설명 깔끔하네. 여기 안 나온 내용 중에 고려가 받은 특혜는 조세권이랑 징병권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거. 그러니까 몽골에 정복된 어떤 지역도 세금이랑 군사 징병을 마음대로 못하는데 고려만 가능했음.
그리고 부마국의 지위에 대해서 첨언하면. 몽골 풍습 중에는 한번 사돈 관계를 맺으면 대를 이어 계속 맺어지는게 있음. 다른 지역 결혼 정치는 한 세대 한정이고 볼모고 그런데. 쟤들은 저게 진짜 여러세대에 걸친 혈족간의 결합 개념임.
저기는 유목 생활이라 큰부족이 작은 부족이랑 동맹같은게 될 때. 영토의 구속력이 없으니까 혈연으로 피를 계속 섞는거임.
그러니까 한두세대 적용이 아니라 한번 결혼관계로 맺어지면 쟤들은 넒은 의미에서 같은 부족이나 큰부족 중심의 방계 혈족으로 동맹으로 여기는 거임.
그래서 아무랑은 또 결혼을 안하고. 정식 절차를 밟아서 한번 하면 계속 같이가야 되니까. 차라리 걍 신부를 약탈해 오고 막 그럼.
고려 후반이 몽골 간섭기 인것도 맞는데. 다른 나라는 간섭이 아니고 점령기였고. 고려가 멸망할 때는 몽골이랑 의리를 지킨다고 명나라 쳐들어가지 이러다 망한거니까 거의 동맹관계였다고 보는게 맞는듯.
역사를 객관적 입장에서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이 배우고 갑니다.
영상 좋게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유익한 영상을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Hmentary 울 나라는 안 버티고, 중국은 겁나 버텨서 심한 대우를 받았다는 듯한 뉘앙스로 말 하는 너같은 것 보다는 나음. 현실은 중국은 역사적으로 굴복이 패시브였던 나라고, 울 나라는 몽골 외에는 없지.
결국 너도 뇌피셜인데, 같은 뇌피셜이라도 너같은 것 보다는 나음
과거 황제국은 아무나라가 칭할수 있는게 아님. 연맹장 같은 것임.
고려는 한반도에 찌그러진 국가가 아니라 과거 중국동부의 패자.
고려를 무시할수 없었던건 고려의 연맹세력이 많았기 때문임.
몽골에 인정 받은 코리아. 미국에 인정받는 한국. 뿌듯. ???
ㅇㅇ
응 아주 뿌듯해서 행복에 겨워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미국이나 몽골처럼 패권국이 될 수는 없잖음
전라도에게.인정 받는 것보다야ㅜ낫지 ㅋㅋㅋ
@@hhhhjjjjjify거긴 대중이의 나라 외국이자나
중국.한국역사서에보면 고려가 고구려보다 땅이 더컷다고합니다 한반도는세로로 길지만 고려땅은 가로로 더길었다고 합니다 고구려 고려 역사를 한반도로 몰아넣어서는 안됩니다 이성계잡놈이 고려를 다지우는바람에 우리의역사가 이렇게 왜곡된겁니다 일본은 그것을 이용한거구요
문제는 징기스칸은 부마국이 되면 전쟁에서 부마가 사망을 하게 만들어서 공주들이 그나라의 모든 실권을 장악을 했다는 겁니다.
몽골이 발해의 후손이라고 하고 고려가 고구려랑 관련있는것도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칭기즈 칸이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의 후손이라고도 하고 원래 이름인 테무친도 대무신왕에서 따온 것이라하며 칭기즈 칸이라 불린 것도 발해의 왕을 칭하는 진국왕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자신의 뿌리와 관련되어 있으니 특별히 여긴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의 생각보다 고려의 국력이 셌다고 봅니다.
그정도의 힘으로 다른 국가들의 침략을 그렇게 잘 막기는 힘듭니다.
ㅋㅋㅋㅋㅋㅋ 이런식으로 소수 학자들의 끼워맞추기식으로 할꺼면 일본이 독도는 지네땅이라고 하는거랑 중국이 동북공정하는거랑 뭐가 다른지 ㅋㅋㅋ 뭐만 하면 식민사학이라고 하고ㅋㅋㅋㅋ 고증 사서에 나와있지도 않은 내용 상상의 나래 펼쳐가는게 마치 일본 중국인 같네...
@@뀨-2p 무슨 소리임?
원나라 책 원조비사랑 일칸국 책 집사에 있는 내용인데...
원조비사가 위서라 쳐도 집사는 위서가 절대 아닐 텐데...
싸움도 못하는게 항상 말로써 강하다고.....꿀밤한대 쎄려주면 눈물글썽이는것들이
고려가 최고긴한거 맞나봄 결국 고려가 코리아가 됐자나 이새기들아
부리야트 노인네들한테 물어보면 알려줌.
부리야트 4부족이 볼가트, 예하리트, 코리, 훈고도르 인데 이중에 코리족이 한국인들이라고 함.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교육이란 사회와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게 구성원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봅니다. 사회와 과학기술 등이 고도로 발전해감에 따라 교육이 상정한 공동체의 범위는 계속해서 넓어져왔지만 그 중에서 국사교육은 언제나 국가라는 공동체에 소속과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 존재하여 왔다고 생각합니다. 제도화된 역사교육을 통해 민족적 자긍심(다민족 국가일 경우에는 다른 요소로 대체되겠죠)을 고취시키고 이를 위해 역사적 사실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한다거나 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닐겁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 시각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인류사에 수도 없이 많은 국가와 민족들의 발흥과 쇠퇴가 있어왔고 그 안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러운 역사일텐데도 말이죠
이러한 교육을 받아왔던 사람들이 현실을 마주하며 흑화해버리면 국까가 되어버리고 민족주의에 미쳐버리면 환빠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말씀하신 지점에 정확하게 동의합니다.
저도 우리 민족과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만, 균형을 지키기가 솔직히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먼저 사실 그 자체를 판단해야 하는데 민족이라는 필터를 끼고 역사를 바라보면서 정서적 희망사항을 현실인 것처럼 인식하는 분도 많고,
반대로 자학사관에 빠져 무조건 우리 역사를 부정적으로만 인식하는 분도 많고
그런 상황에서 사실 저 포함 모두가 균형을 완벽하게 잡기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다만 최대한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지요.
@@Hmentary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정비된 제도와 교육이 했어야 할 일들이 유튜브 등으로 외주화 되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론 제도 하에서는 다루거나 배울 수 없던 것들을 만날 수 있어 다행으로 여깁니다. 그렇다보니 컨텐츠를 창작하거나 정보를 전달하시는 많은 분들의 고뇌 또한 굉장히 클 것이라 생각합니다
노고에 언제나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좋은 영상 많이 부탁드립니다😁
@@Hmentary솔까 우리 민족 역사 그대로 가감없이 봐도 충분히 괜찮은거 같아요.
한반도 같은 스타팅에서 우리만큼 하는거 쉬운일이 아닌듯.
교과서에 있는 잘못된 지도로 배워서 껴 맞추니 뭘 알겠냐. 쌍성이 저기냐? 중국 심양 근처에 쌍성이 버젓이 있어. 고려라는 이름을 유지하는 것부터 존중 받았던 것인데.. 현실적으로 보면 되는데, 너무 조상비하적인 사고방식이다. 그게 식민사학에 길들여져서 억지로 끼워맞히려는 사고방식이야.
혹시 북한도 같은 핏줄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전쟁위협과 갈등을 만들고 있는건가요?
다 맞을수도 있는데 기존의 인식은 틀렸고 내가 맞았다라고 주장할려면 뭔가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나요? 딱 저이유로 그나마우대했다라는 직접적 사료는 없는 상황아닌가요? 어차피 설과 설인 상황에서 이러한 관점도 있고 요즘은 이러한 관점으로 학자분들이 연구중이다 하고 소개해주는 정도가 좋았을듯 합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마치 직접사료가 나온것처럼 기존 주장들을 부정하는듯 보입니다
예를 들어 경로가 맞아서 만났는지 아니면 국운을 걸고 선택을 하신건지 양측 설 모두 주장이 있을뿐 사료가 없지않나요? 주장을 주장으로 소개하는 것과 앞의 주장이 틀렸고 내가 맞다고 주장할때는 다릅니다
후자는 근거가 없이는 공허하게 들릴 뿐이죠
우리나라가 중국과 직접 닿지않은 반도인 데다가 중국 극동쪽에 위치한 점은 "직접 다스리기는 어렵지만 견제 세력으로 쓰기 좋은" 포지션으로 자리잡는 데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원의 선택도 그런 점을 약간 고려한듯합니다.
이슬람이 페르시아를 먹은 후 페르시아의 문화와 제도를 흡수한것처럼 몽골에게도 고려가 그와 같은것이지요.
통치수단이 있어야 통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몽골의 분국들은 결국 서쪽과 남쪽에서 막혔습니다.
고려풍습이 몽골에 유행한거 말고는 제도적으로 고려가 페르시아가 이슬람문화권에 준 영향만큼 준게 뭔가요?
@@허우석-o9f없어요
@@허우석-o9f 유행했다는 말은 받아들였다는 말로 바뀌어야겠지요?
역사왜곡일 수도 있습니다.
몽골은 고려로부터 문화와 제도의 모든걸 받아갔고 그 방법은 고려인들 그 자체였지요
기황후가 혼자 잘나서 그렇게 되었을까? 몽골 칸이 아무리봐도 토호들보다 실무 관리들에게 힘 실어주는게
자기 권력에 도움되니까 그렇게 바뀌는 것이지요.
아랍 또한 페르시아 사람들 그대로 데려다 썼습니다.
동녕부, 쌍성총관부 위치 비정 잘못되었네요. 역사 채널 하실려면 더 정확한 정보를 주셔야지 국민에게 해가 안되죠. 동녕부가 몽고 원나라 원사에 명확히 요양이라고 나오느데 도대체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왜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정말 드라이한 설명 감사합니다. 감정을 버리고 역사를 보니까 본질이 이해가 되더라구요.
영상 좋게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역사 앞에서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사실 그 자체의 확인을 위해서는 최대한 감정을 젖혀 둔 채로 접근해야 하고, 이후 의미 부여 단계에서 어느 정도 감정이 개입되는 건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몽골이 쌍썽총관부를 사람도 몇 살지 않는 동해안 산골짜기에 두었다고 믿는 역사학자들은 도데체 머리는 있는걸까?
몽골의 시조를 칭기스칸으로 생각하는 나라가.. 고구려까지 올라가서 생각한다? 어불성설입니다. 그냥 세력유지에 도움이 되었으니 초토화 안시키고 식민지로 삼아서 이용한것입니다. 신기한 점은 30년간의 대몽항전과 1270년대까지 이어진 삼별초의 항쟁이 있었음에도 중요성이 더 커서 놔둔것입니다. 오랜시간 버티면 버틸수록 안좋았던 다른 점령지랑은 다른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명분이 중요해서 쿠빌라이가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 천명이란 식으로 덮어씌운게 맞는것 같습니다.
몽골비사에 나온 징기스칸의 조상들에 대한 설화를 보면 고구려 부여의 주몽설화와 비슷한게 있습니다
30년간의 대몽항쟁이 정말 강화도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시나요. 인천의 강화도가 왕과 장군이 30년간 병사를 육성할 수 있는 곳이라 보십니까? 유라시아를 점령한 몽골이 도대체 산지가 80%에 달하는 한반도에 뭐 그리 젖과 꿀이 떨어져서 그 조그만 섬까지 점령하려 하겠습니까...? 또 여진이 우산국을 점령했다는데 기마민족인 여진이 오징어가 너무너무 먹고싶어가지고 울릉도에 배타고 가서 점령했답니까..? 왕건 휘하에 배가 많아 별명이 백선장군이었다는데 후백제의 견훤과 왕건이 전라도 나주에서 배를 200척 띄우고 싸울 곳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한반도에 외계문명이 남기고 간 유산이라도 있습니까?
강화도, 나주, 황산벌 등등 삼국유사, 삼국사기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지명은 대륙에 있습니다. 역사서엔 지명, 산, 성, 강(큰 강은 바다라고도 부름) 등 주요 지역과 방향 거리가 나오는데 한반도 내에선 합리적인 추정이 불가능 합니다. 백제가 멸망할 때만 해도 성이 수백개 였다는데... 산지가 80%인 한반도 내 성 모두 합해도 그만큼 안될겁니다. 한반도는 대륙의 지배자가 지배하는 땅일 뿐입니다. 지린 시(어딘지 아시나요?)는 한국말로 집안 시 입니다. 안전한 땅이라는 의미 입니다.
살수가 어디인지 아시나요?
노란물을 몽골어로 하면 shar us
키르기스스탄어로 하면 sarı suu
이씨조선 500년간 지운 역사를 일제가 완성하고 화하가 이용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중시한 게 아니다
대륙으로 계속 뻗어나기기 위해 후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그 중 혼인이 가장 확실한 선택지이자 효율적인 인질이었을 뿐이지
우리나 고려를 독립국으로 생각하지 세계사적으로는 원의 영토였다
우리는 항상약소국이라고배운다 수당은 세계전사상유래없는 군대를동원하고 거란은1차80만 어마무시한병력으로 침략하고 금원청 당대최강의군사력이지만 한결같이 항복협상만받고 물러간다 배후가두렵다면 없애면되지 왜 왜왜 항상 항복만요구할까 한국 역사의미스터리다?????
손자병법엔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라고 강조함
한국은 대국이 자신들을 소중히 여긴다고 하면 마치 어린애가 부모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아 기뻐하거나, 깡패들같은 힘 있는 자들이 자신을 지켜주고 소중히 여긴다는 것에 매우 기뻐한다. 이런 심리는 자신들의 부족한 자존감을 스스로 매꾸기 보다 강한 자의 보호와 소중히 여겨준다는 특별함이라는 것에 취하기만 한다. 그러니,몽골이나 미국이 특별히 여긴다 하면 껌벅 죽어가는 것이다. 다 큰 어른들이 아이들처럼 누군가의 보호와 관심을 받고 기뻐하는건 정상이 아니다. 어리석은거지
발해 패망후 발해 유민 일부가 고려에 편입되고 나머지 말갈과 여진이 부족으로 남은것 그리고 읿부가 돌궐족을 따라 서역으로 이동함. 발해건국시 여러부족중 일원으로 돌궐족도 포함되었음.그리고 몽골족이 거란계이다..여기서 말갈은 한반도로 유입되어 고려에 편입 되지 못하고 부족을 이루고 살던 돌궐계이다
고려는 예 맥 숙신 거란 말갈 돌궐 선비 몽골까지 거대 유목집단중 하나임.. 완벽한 중앙집권은 아니었음... 동천왕때 북위 8만대군이 위나암성(국내성)까지 그냥 직행해도 요동쪽 구경만하고 그냥 뻥뻥뚫여서 포위당하고 겨우 죽을뻔한적도 있기도하고... 이미 왕권은 장수왕을 끝으로 막리지쪽으로 넘어가서 허수아비 고씨 왕들뿐임.. 물론 고려시대도 마찬가지 요나라 침공 몇번당한후 무신쪽세력이 강해지고 왕은 사실상 허수아비 되고 무신정권이 들어섯으니...
일단 고려를 거치면서 유전적으로 많이 똑같아짐,,,
일본도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거치면서 많이 섞여서 그럼
펙트는 손바닥만한 나라 먹는것 보다 대륙, 유럽이 크니까.
팩트는 무신정권이 몽골군 전술을 완벽하게 카운터친거임
몽골인 기병은 총 전력이 30만이 전부였음
이것도 금나라라는 당대 최강의 국가를 상대하기 위해서 몽골 초원에 총동원령을 내려서 싸움이 가능한 남자랑 말은 전부 긁어모은 숫자
호라즘 원정을 떠날때도 몽골은 금나라에 몽골 기병 2만명만 배치함
그런데 무칼리가 현지 군대를 흡수하고 징병하면서 휘하 부대는 훨씬 늘어남
몽골군의 큰 작계는 현지 정권에 부정적인 협력자를 얻어내는것임
이 협력자는 작게는 길잡이, 크게는 전투병으로 활동함
헌데 고려는 북방의 여진족이나 양계의 일부 인원을 빼면 이런 이탈이 없었음
강화도로 도망갔지만 국가의 행정기능까지 같이 들고 도망갔음
몽골군이 쳐들어와도 무신정권이 내부단속을 최대한 하니깐 고려 국민들은 이악물고 저항하고 어찌저찌 몽골이 물러나면 강화도의 정부는 적당히 상도 내리고 민심 달래고 나름대로 중앙군도 만들어서 몽골군 요격을 시도함
살리타의 몽골기병 1~2만명은 작은 숫자가 아니라 몽골제국 기준으로는 거대한 국가 하나를 상대하는 전력이였음
쳐들어와도 현지인은 몽골군에 협력을 안하고 정부가 있는 강화도는 요새로 도배를 해놨고 조운선을 비롯한 해군도 작동하고 정부 기능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꼭 철수할때면 어디선가 정규군아 나타나 뒤를 노림
그냥 서로 지쳐가는 판국에 고려가 항복한거고 몽골도 어느정도 포기한거임
무신정권이 마냥 무능한게 아니라 상당히 효율적인 방어전을 수행했음
팩트에 발끈하는 꼴이라니
그냥 ㅈㄴ 귀찮은 꼬맹이라서 관용해준거지 ㅋㅋㅋ
고려가 황제국이었으니 그렇지
원에 간섭때도 고려영토는 지금의 한반도보다는 훨씬 넓었다 ㅋㅋㅋㅋ
현실적인 이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ㅎ
영상이 도움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아 다행입니다.
모쪼록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이익을 중심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일본인도 다 한국인과 유사한 게 아니고 건너간 동이족이 유사하지 일본 원주민 또 있어 그들은 멀지 피 섞인 게 있겠지
중시한게 아니고, 큰 영역에 비해서 고려는 너무 작은 지역이라, "그냥 무시해도 되는 존재" 였습니다.
국뽕들이 이악물고 발작함ㅋㅋㅋ
크기가 어떻든간에 끝까지 저항하면 다 죽여버리던게 몽골이였는데 단순무시라기엔 좀 그런듯
일본을 침략하기위해 살려두었다는 편이 오히려 더 현실적인듯
@@brandonheet 국뽕 조차도 없는 당신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님의 국적이 어디든 님의 마인드는 항상 자존감 없이 존재하는 노예와 같아 보입니다.
그럼 계속 무시하지 왜 쳐들어왔누; 이해가 잘 안됨
그렇게 작은 지역이면 걍 무시하거나 몽골제국 ‘읍’으로 둬도 되는거 아님??ㅋㅋㅋㅋㅋ
흔히 말하는 천자국 황제국이 고려임. 영토도 마찬가지 한국역사 사학에서는 한반도를 벗어나지못함 훨씬 큰 나라엿음.
원나라 공주와 혼인은 고려가 먼저 요청한거라 딱히 치욕스러운건 아님
오히려 원세조가 혼인 안시킬려고 핑계대고 한게 재밌지
맞습니다. 쿠빌라이가 결혼 시키지 않으려고 빙빙 돌리고 시간 끌고 했지만 원종이 얼굴에 철판 깔고 우겨서 결국 사돈 맺게 되었지요.
그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고려를 살린 성군이 원종 같습니다. 비록 항복은 했지만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고자 노력했으니까요.
그점이 불리한 상황에도 기회를 엿보고 국익으로 연결시키는 고려의 특징중 하나인것 같지만요
딸을 달라는게 왜 치욕스러운 것임??? 고대사회에서 딸을 달라는 것은 강자의 권리인데??? 사실, 요즘도 비슷하지 않나???
과거부터 현재까지 전쟁에서 명분이란 아주 중요한 것이죠. 명분은 이용하려고 할 때 가치가 생기는 것입니다. 비슷한 민족임을 자처하는 것이라기보다 과거 가장 강대했던 기마민족인 고구려의 후손으로부터의 항복이라는 점이 작용하려면 상대인 고려를 높게 쳐줘야 했던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야 항복이 가지는 의미가 크게 다가오기 때문인것이죠. 전쟁 전 항복을 하면 자치권을 인정해줬던 것과는 다른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쿠빌라이가 받아온 항복의 의의를 높게 만들기 위함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는 거죠.
또, 지정학적 위치에서 더욱 중요한 부분은 기마병으로 대륙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던 것과 다르게 일본이라는 해적을 상대하고, 대륙의 가장 끝부분인 고려에 계속적인 병력의 투입을 없애기 위함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겁니다. 고려를 완전 점령하려면 고려를 멸망시키고 고려군을 해체해야 하는 데, 짧은 바닷길인 강화도도 점령하는 데 고생을 했던 몽골군이 당시 만주, 고려, 중국의 동부해안을 계속 유린하는 일본의 해적들을 상대하기 까다롭기에 고려해군을 이용하자는 목적이 더 강했다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당시 일본해적은 여러 역사서에서 말하듯이 많으면 몇만, 적어도 몇천이 한번에 상륙해서 지방을 유린하기도 하였으며, 소규모 해적은 기록조차 안될 정도로 많습니다. 그래서 고려를 놔둠으로 해서 얻어지는 이득이 점령 후 직접 통치하는 것보다 더 크기에 앞선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서 놔둔 것이죠.
결과론적으로 완전 점령하지 않은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고 하여도 내부적인 반발이나 이해충족을 위해 부마국으로 만들었던 것이고, 고려가 가진 인적, 물적 자원을 끊임없이 징발하였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죠.
허~~~몽고의 기원과 초원민족의 기원을 모르시군요. 쟤들이 고려를 심적으로 가깝게 생각했습니다. 고려여인을 왜 잡아갔는지 아나요?
몽고인과 고려여인 사이에 낳은 아들은 몽고인이 되었습니다.
혈연적으로 가깝다는 것은 걔네가 먼저 인지했으며 공주를 수차례 시집 보낸 나라가 고려입니다
맞습니다. 나라땅이 이웃하지 않고 멀어진지 오래되어서 현재가 다르다는게 더 정확하죠.
고려 여인 잡아갔으면 그게 맞는 말이겠지 ㄲㄲㄲ 다른 민족도 다 그랬다.
실제로 고려인말고도 지배한곳의 여성수탈은 다 비슷했다고 봄
@@martinj8935👍👍👍
고려만 골라잡아간줄 아는게 웃기네 ㅋㅋㅋ 몽골이 점령지에서 여자 잡아간게 고려뿐인줄 아냐?
유사역사라고 자꾸 치부하는데, 관련되는 사건이 계속 나오면 그건 인과관계가 있는겁니다. 몽골 자기들 스스로 고구려 후예라고 예전부터 대놓고 말해왔고, 부마국으로 만드는데는 전략도 있지만 역사적으로도 상관관계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청나라가 왜 조선을 완전히 정벌하지 않은지만 봐도 이 사건과 유사하게 봐야하는거죠.
사료로 남아있지 않다고 해서 역사적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야사로도 얼마든지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전후관계를 살펴봐야 하는거죠.
잘 배웠습니다.😊
영상이 도움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아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유익한 영상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