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왜란전후로 그렇게 자기들도 휘청할정도로 도왔던게 이럴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였을 겁니다. 조선 입장에선 이를 거절하기 쉽지 않았을 거고요.... 만약 지금의 미국이 우리에게 sos를 치면 거절할 수 있을까요? 다 그시대의 상황에 맞게 최선을 다한겁니다. 깔끔한 설명 잘봤습니다.
@@j.c.s7762 그건 아닌게 사르후전투는 조명 연합군이였는데(심지어 이때는 광해군) 개발살나고 그 이후 영원성 전투까지 명나라한테 단 한번도 진적없음. 10배 이상 강했다는건 도대체 어느 소식인지... 당대 사람들, 역사학자들도 부인하지 않는게 그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였음. 결과만 보고 판단하는게 아니라 당시에 인조도 그런걸 알고있었음. 그런데 친명배금이 정통성인 인조가 후금을 돕는다는건 자기를 부정하는거였지.
@@nWo4lifes 당시 인조는 친명배금에 입각해서 광해군을 내리고 들어선 정권이고 1641년 홍타이지가 산해관 외곽을 먹기 전까지 후금군은 절대 산해관을 넘지도 못했습니다. 누르하치도 원숭환이 이끄는 영원성을 함락하지 못했구요. 그 때 영원성 전투 당시 후금군이 기록상 16만(실제추정 10만~6만)이고 영원성 전력은 고작 2만(실제추정 1만5천~1만)입니다. 전쟁은 사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기에 후금은 당시 가장 강력한 군대였을지는 몰라도 공선전에는 그닥 강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12문 정도의 홍이포 또한 예상하지 못했죠. 애초에 전투를 오래 끌고 간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후금군이 신무기를 도입해도 근본이 팔기군을 이용한 유목민족식 전투인데 보병도 오래버티기 어려운 마당이 기병을 이끌고 전투를 오래 이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명나라가 망조여도 인조는 자신의 정당성과 명나라의 산해관이 뚫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후금편에 붙지 않은거죠. 하지만 이자성의 난으로 오삼계가 스스로 성문을 열어 명나라는 망하고 조선은 그 전에 뚜들겨맞죠. 영원성 전투가 1626년, 정묘호란이 1627년입니다. 아무리 얕잡아봐도 청나라 군이 강한건 알고 있었고요 당시 조정이 탁상공론에 빠진 문관들이 쥐고 흔드니까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인조가 무능하긴 해도 어쩔 수 없이 명나라 편을 든겁니다.
인조보다도...사르후전투를 치르기 전에 광해군이 궁궐공사에 나라 예산 몇년치를 다 쏟지 않고 군대를 대규모로 양성하고 했으면 사르후 전투에서 이겼을수도 있지요. 그리고 이겼으면...엄청난 혜자였겠자요. 잘하면 아예 북진해서 영토를 넓히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삼전도의 굴욕은 피할수 있었겠지요..그떄는 후금이 그리 막강한 때도 아니여서....
@@jc8ms 경복궁&창덕궁:새 도읍을 세웠으니까 당연히 새로 지어야 함 창경궁:태평성대라 국고가 빵빵하고, 애초에 규모가 그리 크지도 않음 이게 그냥 창덕궁 살기 싫다고 궁궐을 계속 찍어내던 광해군이랑 비교가 가능한 부분인가요? 그리고 폐모살제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이건 뭔;
그러고 사실 청나라는 중원을 먹을 생각자체가 전혀 없었다고 해요. 원래는 명나라에서 약탈을 할려고 했는데 이자성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뒤 청나라 오삼계와 합작해서 들어온다는 소문을 듣자 도주하면서 자금성을 불에 태우고 모든 식량도 불에 태워버리고 궁궐보물들을 약탈해서 도주해버리는 바람에 청나라가 중원에 들어왔을 때 중원은 무정부상태였고 청나라 관료가 이 상태면 중원이 무정부상태이니 혼란하고 백성들의 안보에도 안 좋으니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는게 좋겠다라고 권고해서 중원지배를 하게 된 거라고 해요.
근데 이괄도 깔 사람이 맞긴하지만 당시에 인조의 대처가 너무 미흡했다 생각합니다. 사실상 반정 1등공신인데 험한 북방으로 가서 군사육성하는데 지원도 제대로 못받았고, 자기아버지인 김류의 말고삐나 잡은 김경징과 똑같은 2등공신취급에다, 거기다가 하나뿐인 아들이 역모혐의를 뒤집어 씌웠는데 꼭지가 돌지 않을 사람은 없다 생각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괄의 아들의 역모혐의때 군사를 동원하여 이괄까지 빠르게 잡던지, 아니면 인조가 나서서 그럴일 없다 커버를 쳤어야했다 생각합니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에 대해서 제가 잠시 말씀을 드릴 것이 있는데, 당시 청은 당연히 그 이전의 여진과는 다른 차원의 국가가 되어 있었고 명을 몰아붙이긴 했으나 끝끝내 산해관을 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명은 북경에 다다르는 최대 관문을 잘 지키고 있었고, 청은 초반 러시로 몰아붙이기는 했는데 자원이 떨어져 가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 상황에서 산해관을 밀어붙이자니 뒤쪽의 조선이 뒤통수를 근질근질거리게 만들었고, 아무리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작살이 났던 국가였지만 여전히 동북아시아 대륙에서는 넘버 투의 군사력 국가였습니다. (일본은 도쿠가와 이후 다시 폐쇄모드로 들어갔고) 산해관도 제대로 못 뚫는 상황에서 조선에 뒤통수 맞고 산해관에서 명 병력이 북진하거나 전선이 장기고착화 되면 청은 그대로 아웃되는 상황이었어요. 명은 강남의 곡창지대가 여전히 쌩쌩하게 식량 뽑아내는 상황이었고, 조선도 비실대기는 하지만 병력들 보급은 쥐어짜내면 가능한 상황이나, 청은 전선이 장기화되면 그대로 굶는 상황이었어요. 원래 유목민족이었으니 살던대로 육포나 씹고 양젖이나 짜 먹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애초에 청이 산해관까지 밀고 내려올 수 있었던 건 만주와 산해관 사이에 있던 한족 및 기타 부족들에게 명에서 수입한 식량들을 무상제공하면서 포섭한 거라 명을 통한 식량 공급이 끊긴 상황에서 유목민이 아닌 이들이 배고프다고 칼날 방향을 바꾸면 청은 아작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홍타이지는 앞 쪽 본진인 산해관 방면을 일단 고착화시킨 다음 초고속으로 뒤통수에 있는 멀티인 조선으로 남하한 거에요. 정상적인 조선과의 전쟁이라면 주요 거점들을 쳐내면서 와야 하는데 그런 거 없이 그냥 우회해서 한양 방면으로 무지막지한 속도로 내달려오는데, (애초에 거점을 통해 장기적으로 올 수 있는 보급도 없어요...) 사실 이게 청이 조선에게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조선은 청이 한양까지 오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피난처를 강화도로 하려고 했습니다. 강화도는 말 그대로 섬이라서 뱃길 끊으면 청군이 쉽게 못 올라와요. 뚝딱 배 만들어서 오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유목민족이 배 만들어서 상륙작전 하는 건 마치 섬 맵에서 셔틀만으로 터렛 빽빽하게 박힌 적 본진에 드랍하는 꼬라지나 마찬가지입니다. 근데 강화도로 가기도 전에 청은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목까지 내려왔습니다. 자세한 기록을 보면 청군은 미친듯한 속도로 한양 방면을 위해 달려온 거였습니다. 중간에 임경업 등이 주요 거점 방어를 잡았는데 그냥 개무시하고 본진으로 내달린 겁니다. 그러면 남한산성에서 청은 왜 저러고 있었느냐? 이처럼 미친듯한 속도로 내달려왔으면 영화 남한산성처럼 홍이포로 개작살을 다 내고 인조를 쳐죽인 다음에 항복을 받아내고 다시 되돌아가면 되지 않느냐? 그게 아니었습니다. 홍타이지나 청 수뇌부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왕을 목베면 항복을 받아내는게 아니라 원수 갚자고 전국의 의병들이 다 일어나서 골 아프게 될 것을. (임진왜란 당시에도 이미 가토 기요마사가 섣불리 북쪽까지 올라갔다가 여진족들한테 깨갱당해서 도망치고, 여진은 우리에게 도와줄까? 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니 쌔빠지게 달려와서 목표로 한 건 인조의 모가지가 아니라 공식적인 항복이었습니다. 만약 빠르게 인조 모가지를 베고 아직 남은 조선의 근왕병과 기타 의병들을 다 쳐부순다고 하면 그 시간에 명이 산해관을 뚫고 오히려 청 본진이 위험해질 타이밍이었어요. 그러니 조선 입장에서는 최대한 개겨야 한다와 청 입장에서는 저 자식들한테 빨리 항복을 받아내야 하는데...의 요상한 조급한 상황이었어요. 물론 인조가 기본적으로 그다지 뛰어난 임금이 아닌 건 맞는데, 단순하게 이게 왕이 띨해서 그런 게 아니었어요. 애초에 정권 자체의 설립 명분이 광해군이 전쟁 내내 우리를 도와준 명을 홀대한다...였는데, 이제와서 그걸 쉽게 뒤집는다면 내부적인 정권의 정당성 자체가 무너지는 거고 (광해군은 여전히 유배지에서 살아있었습니다.) 또 실제로 명-청 전쟁 자체가 누가 이길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다가, 기존의 양쪽 전과나 잠재적인 국력의 차이를 보면 명이 쉽게 질 리가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어요. 그 상황에서 우리 앞마당까지 적이 왔으니 얼렁 명과의 사대를 풀고 청과 사대를 맺는다? 그러다가 상황 역전되면 우리 본진까지 쓸려나가고 이젠 사대하는 조공국이 아니라 성질머리 난 명에 의해 나라와 민족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는 도박의 상황이었어요. 당시의 상황은 단순한 사칙연산 수준의 상황이 아니라 고차원 방정식의 상황인데, 이걸 가지고 뭐 단순하게 멍청이네 어쩌네 하는 건 TV로만 축구보면서 저리로 패스해야지 병신 어쩌구 하다가 실제로 필드 들어가보면 조기축구회 수준에서도 어버버거리는 꼬라지와 같습니다. 1. 청은 산해관 제끼고 다른 곳으로 우회할 수도 있었어요. 아니 있을 수도 있긴 있었지만 (^^) 그 다음 관문인 산서는 산해관과 마찬가지인 요새, 그 다음으로 가면 아예 몽고까지 가야하는데, 이러면 보급이고 뭐고 포기하고 현지조달, 즉 약탈의 전술이라는 건데 이건 사실상 무리수였고 실제로 이 방법으로 북경 근처까지 러시한 적도 있었지만 이건 뭐 따지면 테란 본진에 저글링들만 쳐들어간 꼴이었죠. 아, 물론 이게 원숭환 모가지를 날리는 결과를 가져와서 결과적으로 성공적이김 했으나 이 우회전술 자체는 전쟁을 이길 수 있는 전술이 아니었습니다. 2. 여진족, 그러니까 청은 단순 유목민이 아니라 반농반목 민족이 맞아요. 근데, 말 그대로 반농일 뿐이라 그냥 자기들끼리 먹고 살 때에도 명이나 조선과의 교역을 통해서 농산물 부족분을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젠 포섭한 한족들에게까지 농산물 기반 식량을 나눠줘야 하는데 그걸 충당한 건 아이러니하개도 살살 달래보려는 명이 제공한 식량들이고, 본격적으로 전쟁에 접어든 이후 이게 끊어지니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등 나라 경제 꼬라지가 꼬라박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3. 청도 배 정도는 만들어서 강화도로 갈 수 있기는 했어요. 근데 문제는 조선 수군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수군의 명성은 임진왜란 당시의 그 분 덕택에 실제 모습이 어떻다는 것과는 별개로 명과 청, 일본까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존재였어요. 실제 청은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군의 특장점을 잘 알고 있었고, 이때문에 홍타이지는 계속 조선에게 산둥반도로 드랍 좀 하게 너네 수군 좀 빌려주라. 그러면 모문룡 수군따위 작살낼 수 있으니...라며 졸라댔죠. (당시 조선군에 대한 평가는 보병, 기병은 약졸이나 걔네들 수군과 포병, 총병들은 좀 무섭다....였습니다) 아, 물론 홍타이지가 겁낸 것과는 달리 조선 수군은 그다지 면밀하게 움직이지는 못했지만...일단 존재 자체가 강화로 건너가다가 모조리 수장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요...
@올바른소리 그쵸 ㅋㅋ 뭐 안해보려고 하는 것까지야 아니지만, 사실 농담투 비속어 안쓰고 진지하게 말하자면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격변기에 유지하다가- 부적절한 방침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것] 뿐이죠. 1840년대에 중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서양의 문명발달을 모르고, 1850년대에 일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르고, 고종이 영의정에게 미국에 대해 묻자 "미리견은 단지 부락 몇이 모여있는 곳으로 화성돈(워싱턴) 촌장이 영길리(영국)와 교섭하는 해적같은 놈들이다"라는 식이었다는 게 절망스러울 뿐이죠. - 해적이라.....해양세력이 바다를 토대로 전 세계를 발견하고 연결하며 상업으로 국력을 키우던 시절에, 농사만 안짓고 벼슬 안하는 놈들은 조선인은 사람으로 안봤겠죠. 뱃놈에 장사꾼으로나 보지 반면 일본은 네덜란드로부터 지식수입하던 놈들이 유학도 가면서 20세기는 영국이 최고인 시대고, 영국과 독일로부터 배워야한다는 사실을 간파하던 때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20세기에 참 일을 잘 했지만 뭐랄까.....교만함이 문화적 병폐같아요. 자꾸 남을 얕잡아보려고 하고. 아주 어려워져야 오기로 잘난 놈 따라가고.
전쟁의 원인중의 하나가 선조-광해군으로 이어진 인재라인이 난으로 숙청되면서 없어졌다고 들은거 같음.. 어쨋든 가장 큰 이유는 광해군 쫓아내고 인조가 왕이되면서 도미노마냥 문제가 계속 생긴거임 그러다가 전쟁 터진거고 인조가 왕이되고 정치못한거 떠나서 처음부터 왕이 안됐더라면 좋았을듯
인조의 잘못이 먼지 전혀 모르는 영상. 광혜군 시절만 해도 신형포를 개발하는 등 준비를 하면서도 중립외교를 했음. 단순히 병력만 보낸 인조랑은 천지차이 거기다 이괄의 난도 이괄의 아들이 역적으로 몰려서가 아니라 이괄을 잡기 위해 이괄의 아들을 역적으로 본것 즉 전후가 바뀐거. 역적의 아버지가 역적이 되는 건 조선에서는 당연한 이야기니까. 실제 인조반정에서 이괄은 거의 대부분의 공을 차지해야 하는 무장이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찬밥 취급을 받은 사람임. 거기다 먼저 친것이 인조이기에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음. 백프로 인조의 미스로 일어났고 인조가 잘못한 일임.
월요일좋아 강화도 함락 안됬으면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는 시간을 더 길게 늘릴 수 있었음. 당시 청나라는 기근이랑 명과의 전쟁땜에 개판 직전의 상황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조선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황제가 직접 내려온 상황 갓경징이 강화도에서 잘 버텨내고 갓자점이 병력 똑바로 모아서 청군 후미를 거하게 후드려 깟으면 삼궤구고두례는 인조가 아닌 홍타이지가 해야 했을수도 있던 상황. 심지어 식량 모자랐던 곳이 남한산성 뿐만 아니라 청군 측도 심각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장에 우리가 받은 굴욕인 삼궤구고두례 직후 정상적인 상황이면 청 황제가 직접 왔으니 이것저것 내정간섭할 기구 설치 및 별의별 난리를 치고 여유롭게 떠날 수도 있었어야 하는데 저 굴욕만 뜯어내고 인질들만 데리고 호다다닥 청으로 복귀했죠. 요는 김자점은 그래도 생각의 여지라도 있는데 갓경징은....
참고로 병자호란 이전에 일본(에도 막부)에서 우리나라 측에 군사 원조를 제의했다고 하죠(속내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겠지만) 그나마 그 제안은 당시 조정에서 거절하였는데 만약에 진짜 일본이 개입되었더라면 여러모로 사태가 더 복잡해졌을 것 같습니다 진짜 이 때 일본이 개입 안 된 게 천만다행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3분이 2가 산악지대인데다 돌로 이루어진 산악지역이라 과거의 전쟁에서 절대 정복당한 적이 없습니다 초기에는 상대의 화력에 밀리게 되지만 장기적으로 가게 되면 전쟁물자는 다 떨어지고 결국 상대가 지지를 치고 떠나게 마련이었죠 이런 지형적 특성을 살려 예상되는 전쟁의 파고를 전략적으로 대응하여 장기전으로 몰고 갔었다면 후금에게 정복당하지 않고 물러나게 만들었을 겁니다 전쟁으로 굴욕을 맛본 최초의 사건이라 아쉬움이 남네요 정복당할 수 없는 천혜의 자연조건에 석전으로 전국민을 군사화시켜 대응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김민종-v7h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고전적 전쟁에서 우리 선조들이 살아남은 전술이 석전이라고 들었습니다 기마민족들은 활과 말로 전투를 하는데 산악지대에서 장기전으로 가면 무용지물입니다 우리나라가 전국 곳곳에 높고 넓게 성을 쌓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가 있구요 유사시엔 전백성들이 성안으로 들어와 침범하는 적을 돌로 박살냈다고 들었어요 활이 다 떨어지면 기마민족은 힘을 못써요
신무근 산성입보 전술에 대해서는 정확히 잘 모르겠구요 오랜 세월을 거쳐 중국 본토의 왕조가 아무리 바뀌어도 바로 이웃인 한반도를 점령하지 못한 이유가 산악지대의 지형을 이용한 요새화 석전 상대가 전쟁물자 소모하고 지쳐서 철군할 때까지 버티는 벼랄끝 전술을 썼다는 것이죠 이러한 천혜의 지형조건으로 정복당하지 않는 나라가 베트남 이란 등이 있습니다
광해가 키운건 이미 사르후에서 다 날아갔고요. 그 이후에는 궁궐병때문에 국방력과 내치가 ㅂㅅ되었습니다. 그걸 그나마 인조때 복구했는데 이괄의 난으로 박살나버렸습니다. 이후에는 목소리만 컸던 청서들의 주전론이 강세가되고요. 그리고 당대 조총이 야전에서 기병을 상대로 이기는건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훈련도가 낮은건 병자호란때 속오군체제에서 온 근왕병이 그랬지 남한산성 내에 있던 정예병은 잘싸웠습니다.
@@arsenalatleletico9874 어..정묘호란은 1627년인데 무슨 뜬금없는 말씀이신지 ㅎ 혹시 정묘호란을 일으켰으니 전후맥락 다버리고 병자호란도 똑같은 이유로 일으킨거라는 이상한 발상인가요? 이상하게 조선까의 반작용인지 조선 위정자들의 실리적인 면모를 강조하려고 상대국 위정자들을 미치광이로 만들고 싶어하는거 같네요 ㅠ
@@isaibnmaryam4761 뭐가 상대방의 위정자를 이상하게 만든거죠? 단순히 식량난뿐아니라 당시 명과의 교역이 끊긴 여파로 인플레이션이 심해서 경제적으로 피폐해서 심각해서 정묘호란뿐아니라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었다는 논문들 많던대요 지네 나라 국가적위기를 전쟁으로 해결하는것 나쁜놈들이지만 이상한 사람들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병자호란일으킨 원인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님이 말한 기록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전 3년전 기록하나로 아니라하는것도 웃기네요
1. 광해군 시절 부차전투로 인조 시기 이괄의 난으로 병력 날려먹음 2. 인조 시기 병력증강과 성곽 보수와 둔전(산성 축성은 무익하다는 주장도 있었음)을 했으나. 반란경험이 있는 인조가 원래 해야할 지방군 훈련을 감시하고, 지방관들도 훈련하는거 눈치봄 3. 후금의 전선 일원화와 후방 안전화, 기근 그리고 부양인구 증가로 조선 정벌 필요성 대두 (식량 문제는 홍타이지 치세때 어느정도 해결된것으로 추측함). 4. 3의 연장선상으로 복속한 몽골부족(내할하,코르친) 대치중인 조선과 차하르 그리고 점령지 한인의 반란과 언제 분해될지 모르는 버일러 연합체제. 이 난관을 타파하기 위해 교역단절과 소빙하기로 부족한 식량을 약탈로 공급하던지 아니면 전쟁을 통해 무력을 과시하던지 결론은.... 5. 정묘호란 발발전 침공로 예상과 성곽 축성 그리고 후금과 조선의 전력차 인식과 병력증강을 함. 하지만 병자호란때는 산성이 시간끌기 역할을 못했다는 지적이 있긴했다. 즉 인조의 처신 문제만이 원인이 아니란 소리
한 웹툰을 보다가 이런 댓글을 봤었는데... 선조 : 난 자식은 건들지 않았다 영조 : 손주는 지켜줌.. 인조 : ... 이었나? 일단.. 이괄의 난을 벌일 동기만 주지 않았더라도 더 발전했을 것 같고, 소현세자를 죽이지 않았다면 소현세자가 17대 왕이 되어서 조선을, 많이 발전시킬수 있지 않았을까 예상해봅니다.
광해군 중립외교는 이미 역사학계에서 아닌것으로 확정된지 오래됐습니다. 오히려 어느한쪽에 정확하게 붙지 않아서 어영부영 명 후금 양쪽의 눈쌀을 받게 된겁니다. 애초에 명나라는 조선에 5만명 파병을 요청해서 조선군이 아예 전선 하나를 더 형성해서 후금을 압박하길 바랫는데 광해군은 궁궐공사에 세금을 쓰는바람에 5만은 커녕 14000명만 지원합니다. 별 도움이 되기 힘든 숫자죠. 또한 지원 안할거면 아예 하지말앗어야 햇는데 14000명을 지원하는 바람에 후금에게 전쟁선포한것도 다름없게 되고 훗날 조선침입의 구실을 제공합니다. 너 전에 군사보냇엇잔아. 니가 먼저 싸움 건거잔아! 하고 침략명분만 제공한겁니다. 게다가 명나라와 후금이 20만 대 10만으로 후금이 숫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엿기에 조선이 5만이상 대규모 파병으로 후금의 후방을 급습하면 후금이 패배햇을수도 잇기때문에. 광해군의 외교는 명나라에게도 도움이 안됐고 후금의 미운털만 박히게 된 이상한 외교엿습니다.
광해군은 애초에 파병자체를 안 할려고 했습니다. 물론 궁궐복구하느라 많은 자원을 쓴건 사실이고 그점은 안 좋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파병에 대해선 광해군입장을 대변 해야겠습니다. 광해군은 애초에 파병자체를 안할려고 했지만 조정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이 무조건 파병을 해야한다고 광해군을 압박합니다. 광해의 세력이라면 북인들 밖에 없었는데 세력이 많이 약한상태였습니다. 이유는 선조새끼가 광해군을 매우 심하게 견제했기 때문이죠..... (이 이야기까지 하면 내용이 길어짐) 아무튼 광해는 대다수 정권을 잡고있던 서인들에 의해 어쩔수 없이 파병한거 뿐입니다.
인조의 판단이 문제가 아니라 조선의 상황이 문제였다 그놈의 유교,성리학만 고집하는 양반들은 세금도 내지않았고 세금은 다 농민이 내야해서 국가 재정이 고려보다 못한 수준이었음 또 조세를 거두는 과정에서 몇몇 비리가있어 조정으로 들어가는 수입이 엄청 줄어드는 상황도 빈번함 이렇게 국가재정이 빈약하니 군사를 키울려해도 돈이 없어서 못키운거지 왜란 후 직업군인들만 이루어진 훈련도감의 군인들도 당시 국가재정이 부족해서 월급도 제대로 못받았다고함 상비군이 월급을 못받는정도인데 속오군과 일반군들은 오죽하겠음? 그리고 조선의 양반들도 문제였다 조선에서 재산을 많이 가진것도 양반들인데 세금 조금 내라니깐 크게 반발하고 상소올려서 세금 못내겠다하고 도로를 정비하면 적이 침입하기 좋다해서 도로도 잘 안정비해서 길이 안좋으니 수레를 못끄니깐 사극보면 길거리에 대부분 지게지는 사람들이 보이는거임 솔직히 양반들도 세금내고 세종과같은 유능한 왕과 신하들이있었으면 조선 후기때도 잘성장했을거같다 조선이 저렇게된건 결국 무능한 왕과 신하들,양반의 타락,지나친 사대주의와 유교,조세문제가 원인이었던거같다
그럴수밖에 없는 이유는 애초 조선의 건국세력이 사대부(=실리보다 이상주의 위주로 명분으로 삼는 주로 책공부만 해왔던 샌님들)임. 이 명분자체도 지들끼리의 권력을 합리화한 도구였고, 이러한 권력을 잡고 자신들에게만 유리한 신분제사회를 만들어 그 권력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대를 이어 점점 타락하고 위선적으로 변질되니, 그러한 고매하신 지배층이 운영하는 사회가 되어가니 비참해질수밖에 었었음
@@정상적인사회생활위해 아니죠 오히려 실리주의자인거죠 당대 미국이나 다름없던 명에 1대1로 맞짱 뜨자는게 이상주의 아닙니까? 사대란 이름하에 명의 체면 세워주고 대신 우리 건들지마라가 옳은표현 같다생각이드는데요 실제로 명에게 겉으로는 굽신했지만 명나라의 벼슬을 받은 여진족을 똑같이 벼슬을주는등의 회유책과 혹은 토벌을 실시하는등 독자적인 모습을 계속 보여왔었죠
인조를 세운 서인과 사대부 전체의 죄를 인조가 다 써야 하는 것이 쿠데타한 임금의 운명인 것이 조선이고 양반들의 바지사장 이었고 심심하면 임금을 죽이고 바꾼애들이 양반들이고 가장 힘든 일들중 하나가 조선의 임금이었죠 ~ 제대로 수명대로 산 임금이 드물고 장자가 계승한 것도 드물고 임금은 그래도 되서 다행이지만 왕자들은 항상 죽음을 곁에 두어야 하는 극한 신분이었고 망나니 노릇을 가장하거나 중이 되거나 하는게 속이 편할 수도 ~
서인이 다 같은 서인이 아니며 인조를 세운게 아니라 인조가 직접 쿠데타한겁니다. 태종, 세조마냥. 솔직히 광해가 박살낸 국방력과 내치를 생각하면 그리고 광해의 애매한 외교스텐스, 인조입장에선 혼자 독박쓰는건 쫌 억울할만하죠. 물론 인조에게는 책임이 없다는건 아닙니다. 한 7대3정도?
저땐 조선측 군사수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대략 16만 정도인데 문제는 이 16만이 과연 정규군이라는거죠...애초에 전후 복구도 덜된 상태이고 안그래도 없는 병력에 난으로 대부분 쓸려나가니깐 기껏 모은게 거의 민병대 수준인 군대죠.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청군을 상대로 급하게 소집한 조선군이 제대로 당해낼리 없다고 봅니다.
@@61메테오 병자호란때 조선군의 대응을 보면 군사의 숙련도 부족은 조선 지휘관도 알고 있었기에 청이 쳐들어오면 김자점을 중심으로 하는 그래도 꽤 숙달된 함경도등의 북부조선군들이 1차적으로 막고 인조는 피난을 가면서 후방지역에서 꾸준히 징집하여 머릿수로 장기전을 끌고 가여 오래머무를수없는 청나라를 막으려는게 작전인것 같습니다 숙련이 안되도 수많은 산성에서 전방후방가릴것이 없이 치게 되면 불리해지는건 청이였고 임란때도 일본이 너무 빨리 진격하여서 후방의 관군이 뒷통수를 쳐서 1년만에 절반을 없앤 경험이 있었으니 나쁜판단은 아닌거같습니다만.... 제생각에 문제는 군사의 숙련도의 부족은 고려를 했는데 청의 장수들의 기량은 계산밖이였던게 가장 크지 않을까싶습니다....실제로 김자점은 축차적인 청의 침입에 어느것이 주공인지 파악을 못하여 어버버하다가 도르곤에게 싸먹히고 그러다보니 진로가 다뚫려버려서 진로 밖의 군대는 회전을 강요받을수밖에 없었고 함경도군의 기량이 조선에서 좀 나은수준이지 초반의 소수정예 팔기에 비할군대는 명나라의 요동철기나 홍군정도였고 함경도군은 이에 미치지못해 회전에서 작살나고 인조는 빨리 도망가지못하여서 후방 지역의 군대역시 급히 전투를 벌여야했고 그 집결점을 정확히 노려서 요토등이 제일 큰놈을 격파하니 나머지 군대도 지원올 엄두를 못내면서 동시에 홍타이지는 강화도정벌을 위한 함선건조를 하면서 한양포위....홍타이지의 계산이 딱딱 맞아떨어졌고 조선수뇌부는 이러한 청의 기동전에 대해 안타깝게도 잘몰랐던것같습니다.... 조선수뇌부 역시 말씀대로 많은 숫자의 병력을 확보하여 막으려고 대비까지 하였고 기량부족이란것도 냉정하게 판단하여 전술을 짰던것을 보면 나름 열심히 준비했다는것은 명백하나 병자호란은 홍타이지vs조선수뇌부에서 윗선 지휘관 군사 모든 부분에서 조선이 ko패했다고 밖에 말할수 없을껏 같습니다...
팩트. 인조가 제대로된 판단을 했어도 병자호란은 일어났겠지만 피해는 훨씬 줄었을것이다.
응 광해군이었다면 중립이라고 청한테 명하고 아무 관계 없다했겠지
그리고 인조는 더 쓰레기인게 소현세자 죽인거임... 소현세자가 왕 됐으면 청하고 외교 늘었으며 국가발전했을걸?
@@구독하면프사주움 저 10000 얻음
이괄의 난이 발생케한 책임도 피할 수는 없죠
@@구독하면프사주움 인조 잘한거 소현세자 낳은거
인조 잘못한거 소현세자 죽인거
인조반정이 안 일어났더라도 대규모 토목공사 때문에 재정적으로 심각해져서 군비문제에 심각한 타격이 되었을수도 있어서 병자호란도 좋은 양상으로 생각하기는 힘듭니다
명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왜란전후로 그렇게 자기들도 휘청할정도로 도왔던게 이럴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였을 겁니다. 조선 입장에선 이를 거절하기 쉽지 않았을 거고요.... 만약 지금의 미국이 우리에게 sos를 치면 거절할 수 있을까요? 다 그시대의 상황에 맞게 최선을 다한겁니다.
깔끔한 설명 잘봤습니다.
동감합니다 후금보다 명나라가 힘이 10배 이상은 강했는데 당연히 명나라 편에 서는게 맞았죠 명나라가 스스로 자멸하고 운좋게 후금이 먹은것이지 결과만 보고 판단하는 논리는 정말 무식한거라고 봅니다
ㅇㅈ
@@j.c.s7762 그건 아닌게 사르후전투는 조명 연합군이였는데(심지어 이때는 광해군) 개발살나고 그 이후 영원성 전투까지 명나라한테 단 한번도 진적없음. 10배 이상 강했다는건 도대체 어느 소식인지... 당대 사람들, 역사학자들도 부인하지 않는게 그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였음. 결과만 보고 판단하는게 아니라 당시에 인조도 그런걸 알고있었음. 그런데 친명배금이 정통성인 인조가 후금을 돕는다는건 자기를 부정하는거였지.
장칼있으마 아니 여진 거란족이 있는 후금이 훨씬 쎗는데 명나라가 10배가 더쎄서 명에 붙었다구요? 그냥 후금 오랑캐 취급하고 명에 사대하는가죠 일본도 오랑캐 취급하다 얕잡아 본거구요
@@nWo4lifes 당시 인조는 친명배금에 입각해서 광해군을 내리고 들어선 정권이고 1641년 홍타이지가 산해관 외곽을 먹기 전까지 후금군은 절대 산해관을 넘지도 못했습니다. 누르하치도 원숭환이 이끄는 영원성을 함락하지 못했구요. 그 때 영원성 전투 당시 후금군이 기록상 16만(실제추정 10만~6만)이고 영원성 전력은 고작 2만(실제추정 1만5천~1만)입니다. 전쟁은 사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기에 후금은 당시 가장 강력한 군대였을지는 몰라도 공선전에는 그닥 강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12문 정도의 홍이포 또한 예상하지 못했죠. 애초에 전투를 오래 끌고 간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후금군이 신무기를 도입해도 근본이 팔기군을 이용한 유목민족식 전투인데 보병도 오래버티기 어려운 마당이 기병을 이끌고 전투를 오래 이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명나라가 망조여도 인조는 자신의 정당성과 명나라의 산해관이 뚫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후금편에 붙지 않은거죠. 하지만 이자성의 난으로 오삼계가 스스로 성문을 열어 명나라는 망하고 조선은 그 전에 뚜들겨맞죠. 영원성 전투가 1626년, 정묘호란이 1627년입니다. 아무리 얕잡아봐도 청나라 군이 강한건 알고 있었고요 당시 조정이 탁상공론에 빠진 문관들이 쥐고 흔드니까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인조가 무능하긴 해도 어쩔 수 없이 명나라 편을 든겁니다.
그림도 깔끔하고 목소리도 좋고 요약도 잘 하시고 그냥 다 좋음 님 짱이에요.👶🏻💧💧💗💗
공무원 공부중인데 이 영상 보니까 한국사 공부했던 내용이 머릿속에서 다시 한 번, 기억되네요
예송논쟁까지 설명해주시는데 너무 친절하신거 아닙니까??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ㅎㅎㅎ 좋은 결과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아 아 ㅋㅋㅋ 귀여우시네요 전 내년도 시험 준비중이라서요~~
홧팅 홧팅~~ :)
내용 이해도 잘되고 너무 좋아요!! 역사 영상 자주 만들어주세요!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잡지님 이런 역사 스토리 올려주는거 너무 유익하게 잘보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해요! 나오는 역사 스토리마다 좋아요 누르고갑니다
고맙습니다 :)
인조반정만 아니었으면 이괄의난도 없어서 북방수비도 탄탄해서 병자호란 초반에 비비면서 딴지역에서 군사모아서 공격했으면 이길수도 있었는데..
이괄의난도 이괄에게 제대로된 공훈을 안세워줬고 도리어 목숨의 위협을 느낀 무계획적인 반란이었음.
근데 그 반란세력이 어찌됐는 한양을 점령하는데 성공했고
제대로 뒤처리못해서 일부 후금으로 건너간 잔당이 그 침공루트하고 조선상황을 모조리, 모조오오리 다 알려줬음.
이게 정묘호란때 후금이 존나 한반도를 제집누비듯 요리조리피하면서 한양점령가능했던이유임.
결론은 이괄에게 제대로된 공훈을 안준게 나비효과로 정묘호란의 결정타가 된거
@@user-Ou38uwHZ3 긍까...
말씀하신 모든게 호란때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청이 한수위였던거죠 쉽게 말씀드리자면 아마추어테란과 김택용같은 토스가 200싸움을 할때 테란이 시즈박고 라인그어두니 멀티에 질럿 몇마리씩 보내서 그거막으려고 시즈풀때 덮친다고 해야하나....?
딱히 광해군이든 인조든 별다를건 없었을것입니다 광해때면 총도 못쐈겠죠 염초굽는다고 화약을 얼마나 갖다썼는데....
@@남호양-m5z 광해군도 ㅁㅊ게 궁궐을 짓겠다고 별지랄 다해서 조선 ㅂㅅ꼴남
@@신무근-l1u 요동이 점령되니 한말이 야 궁궐건설할 재료 어디서 수입하냐 이지랄한애임
우선 이괄의난만 안일어도 났어도 그리 농락은 당하지 않았을거라 생각해요
이괄의난 영향은 지금으로치면 국군의 7군단 전체가 삭제된거라 생각...
그게 다 눈치없고 고집세며 기득권에만 눈먼 서인세력책임이 크죠. 그게 나중에 병자호란의 참패책임을 짊어진 비참한 인조의 모습도 본인의 무능 + 서인세력들의 결과물입니다.
상관없어
2:29 생각없이 보다가 터졌네요ㅋㅋㅋㄱㅋㅋ
??:브륑~미 thㅏ~노스!!!!
@@DIO-1889 나는 필연적인 존재다
디지몬!
공무원시험 준비중인데 진짜잘보고갑니다!
ㅎㅇㅌ 꼭 붙으시길
꼭 합격하길 바라겠습니다
뭔가 공부를 재미있게 하는것 같아요!!
인조보다도...사르후전투를 치르기 전에 광해군이 궁궐공사에 나라 예산 몇년치를 다 쏟지 않고 군대를 대규모로 양성하고 했으면 사르후 전투에서 이겼을수도 있지요. 그리고 이겼으면...엄청난 혜자였겠자요. 잘하면 아예 북진해서 영토를 넓히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삼전도의 굴욕은 피할수 있었겠지요..그떄는 후금이 그리 막강한 때도 아니여서....
역대 왕들도 에먼돈으로 궁궐은 지엇고 폐모살제는 궁에서는 언제든 발생될수있는 일이죠
이게 다 쿠데타에 성공한 세력이 만든 허상
@@jc8ms
경복궁&창덕궁:새 도읍을 세웠으니까 당연히 새로 지어야 함
창경궁:태평성대라 국고가 빵빵하고, 애초에 규모가 그리 크지도 않음
이게 그냥 창덕궁 살기 싫다고 궁궐을 계속 찍어내던 광해군이랑 비교가 가능한 부분인가요?
그리고 폐모살제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이건 뭔;
명을 멸망시킨것은 이자성이고 이자성을 치고 중원을 먹은것은 오삼계와 청나라의 합작입니다 그리고 오삼계와 명의 잔당 세력들을 정리하여 마무리한게 청나라입니다 결코 청나라 혼자 중원을 먹을만한 힘은 없었습니다
그러고 사실 청나라는 중원을 먹을 생각자체가 전혀 없었다고 해요.
원래는 명나라에서 약탈을 할려고 했는데 이자성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뒤 청나라 오삼계와 합작해서 들어온다는 소문을 듣자
도주하면서 자금성을 불에 태우고 모든 식량도 불에 태워버리고 궁궐보물들을
약탈해서 도주해버리는 바람에 청나라가 중원에 들어왔을 때 중원은 무정부상태였고
청나라 관료가 이 상태면 중원이 무정부상태이니 혼란하고 백성들의 안보에도 안 좋으니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는게 좋겠다라고 권고해서 중원지배를 하게 된 거라고 해요.
역사 이거 공부하는데 감사해요! 도움 많이 될거같아용
설명 너무 잘하신다
재밌어요~
이괄의 난만 없었어도 조선도 충분히 정묘호란을 방어했을 것이고 그럼 필요한 물자를 얻지 못한 후금은 명나라의 무역봉쇄정책과 대기근으로 자멸했을 것이다. 결론 인조도 까야하지만 이괄도 까야한다.
이괄이 쏘아올린 작은공
근데 이괄도 깔 사람이 맞긴하지만 당시에 인조의 대처가 너무 미흡했다 생각합니다. 사실상 반정 1등공신인데 험한 북방으로 가서 군사육성하는데 지원도 제대로 못받았고, 자기아버지인 김류의 말고삐나 잡은 김경징과 똑같은 2등공신취급에다, 거기다가 하나뿐인 아들이 역모혐의를 뒤집어 씌웠는데 꼭지가 돌지 않을 사람은 없다 생각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괄의 아들의 역모혐의때 군사를 동원하여 이괄까지 빠르게 잡던지, 아니면 인조가 나서서 그럴일 없다 커버를 쳤어야했다 생각합니다
그때 물자를 안지원 해줬으면 코로나는 없었을텐데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에 대해서 제가 잠시 말씀을 드릴 것이 있는데, 당시 청은 당연히 그 이전의 여진과는 다른 차원의 국가가 되어 있었고 명을 몰아붙이긴 했으나 끝끝내 산해관을 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명은 북경에 다다르는 최대 관문을 잘 지키고 있었고, 청은 초반 러시로 몰아붙이기는 했는데 자원이 떨어져 가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 상황에서 산해관을 밀어붙이자니 뒤쪽의 조선이 뒤통수를 근질근질거리게 만들었고, 아무리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작살이 났던 국가였지만 여전히 동북아시아 대륙에서는 넘버 투의 군사력 국가였습니다. (일본은 도쿠가와 이후 다시 폐쇄모드로 들어갔고) 산해관도 제대로 못 뚫는 상황에서 조선에 뒤통수 맞고 산해관에서 명 병력이 북진하거나 전선이 장기고착화 되면 청은 그대로 아웃되는 상황이었어요. 명은 강남의 곡창지대가 여전히 쌩쌩하게 식량 뽑아내는 상황이었고, 조선도 비실대기는 하지만 병력들 보급은 쥐어짜내면 가능한 상황이나, 청은 전선이 장기화되면 그대로 굶는 상황이었어요. 원래 유목민족이었으니 살던대로 육포나 씹고 양젖이나 짜 먹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애초에 청이 산해관까지 밀고 내려올 수 있었던 건 만주와 산해관 사이에 있던 한족 및 기타 부족들에게 명에서 수입한 식량들을 무상제공하면서 포섭한 거라 명을 통한 식량 공급이 끊긴 상황에서 유목민이 아닌 이들이 배고프다고 칼날 방향을 바꾸면 청은 아작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홍타이지는 앞 쪽 본진인 산해관 방면을 일단 고착화시킨 다음 초고속으로 뒤통수에 있는 멀티인 조선으로 남하한 거에요. 정상적인 조선과의 전쟁이라면 주요 거점들을 쳐내면서 와야 하는데 그런 거 없이 그냥 우회해서 한양 방면으로 무지막지한 속도로 내달려오는데, (애초에 거점을 통해 장기적으로 올 수 있는 보급도 없어요...) 사실 이게 청이 조선에게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조선은 청이 한양까지 오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피난처를 강화도로 하려고 했습니다. 강화도는 말 그대로 섬이라서 뱃길 끊으면 청군이 쉽게 못 올라와요. 뚝딱 배 만들어서 오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유목민족이 배 만들어서 상륙작전 하는 건 마치 섬 맵에서 셔틀만으로 터렛 빽빽하게 박힌 적 본진에 드랍하는 꼬라지나 마찬가지입니다. 근데 강화도로 가기도 전에 청은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목까지 내려왔습니다. 자세한 기록을 보면 청군은 미친듯한 속도로 한양 방면을 위해 달려온 거였습니다. 중간에 임경업 등이 주요 거점 방어를 잡았는데 그냥 개무시하고 본진으로 내달린 겁니다. 그러면 남한산성에서 청은 왜 저러고 있었느냐? 이처럼 미친듯한 속도로 내달려왔으면 영화 남한산성처럼 홍이포로 개작살을 다 내고 인조를 쳐죽인 다음에 항복을 받아내고 다시 되돌아가면 되지 않느냐? 그게 아니었습니다. 홍타이지나 청 수뇌부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왕을 목베면 항복을 받아내는게 아니라 원수 갚자고 전국의 의병들이 다 일어나서 골 아프게 될 것을. (임진왜란 당시에도 이미 가토 기요마사가 섣불리 북쪽까지 올라갔다가 여진족들한테 깨갱당해서 도망치고, 여진은 우리에게 도와줄까? 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니 쌔빠지게 달려와서 목표로 한 건 인조의 모가지가 아니라 공식적인 항복이었습니다. 만약 빠르게 인조 모가지를 베고 아직 남은 조선의 근왕병과 기타 의병들을 다 쳐부순다고 하면 그 시간에 명이 산해관을 뚫고 오히려 청 본진이 위험해질 타이밍이었어요. 그러니 조선 입장에서는 최대한 개겨야 한다와 청 입장에서는 저 자식들한테 빨리 항복을 받아내야 하는데...의 요상한 조급한 상황이었어요. 물론 인조가 기본적으로 그다지 뛰어난 임금이 아닌 건 맞는데, 단순하게 이게 왕이 띨해서 그런 게 아니었어요. 애초에 정권 자체의 설립 명분이 광해군이 전쟁 내내 우리를 도와준 명을 홀대한다...였는데, 이제와서 그걸 쉽게 뒤집는다면 내부적인 정권의 정당성 자체가 무너지는 거고 (광해군은 여전히 유배지에서 살아있었습니다.) 또 실제로 명-청 전쟁 자체가 누가 이길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다가, 기존의 양쪽 전과나 잠재적인 국력의 차이를 보면 명이 쉽게 질 리가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어요. 그 상황에서 우리 앞마당까지 적이 왔으니 얼렁 명과의 사대를 풀고 청과 사대를 맺는다? 그러다가 상황 역전되면 우리 본진까지 쓸려나가고 이젠 사대하는 조공국이 아니라 성질머리 난 명에 의해 나라와 민족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는 도박의 상황이었어요. 당시의 상황은 단순한 사칙연산 수준의 상황이 아니라 고차원 방정식의 상황인데, 이걸 가지고 뭐 단순하게 멍청이네 어쩌네 하는 건 TV로만 축구보면서 저리로 패스해야지 병신 어쩌구 하다가 실제로 필드 들어가보면 조기축구회 수준에서도 어버버거리는 꼬라지와 같습니다.
1. 청은 산해관 제끼고 다른 곳으로 우회할 수도 있었어요. 아니 있을 수도 있긴 있었지만 (^^) 그 다음 관문인 산서는 산해관과 마찬가지인 요새, 그 다음으로 가면 아예 몽고까지 가야하는데, 이러면 보급이고 뭐고 포기하고 현지조달, 즉 약탈의 전술이라는 건데 이건 사실상 무리수였고 실제로 이 방법으로 북경 근처까지 러시한 적도 있었지만 이건 뭐 따지면 테란 본진에 저글링들만 쳐들어간 꼴이었죠. 아, 물론 이게 원숭환 모가지를 날리는 결과를 가져와서 결과적으로 성공적이김 했으나 이 우회전술 자체는 전쟁을 이길 수 있는 전술이 아니었습니다.
2. 여진족, 그러니까 청은 단순 유목민이 아니라 반농반목 민족이 맞아요. 근데, 말 그대로 반농일 뿐이라 그냥 자기들끼리 먹고 살 때에도 명이나 조선과의 교역을 통해서 농산물 부족분을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젠 포섭한 한족들에게까지 농산물 기반 식량을 나눠줘야 하는데 그걸 충당한 건 아이러니하개도 살살 달래보려는 명이 제공한 식량들이고, 본격적으로 전쟁에 접어든 이후 이게 끊어지니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등 나라 경제 꼬라지가 꼬라박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3. 청도 배 정도는 만들어서 강화도로 갈 수 있기는 했어요. 근데 문제는 조선 수군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수군의 명성은 임진왜란 당시의 그 분 덕택에 실제 모습이 어떻다는 것과는 별개로 명과 청, 일본까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존재였어요. 실제 청은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군의 특장점을 잘 알고 있었고, 이때문에 홍타이지는 계속 조선에게 산둥반도로 드랍 좀 하게 너네 수군 좀 빌려주라. 그러면 모문룡 수군따위 작살낼 수 있으니...라며 졸라댔죠. (당시 조선군에 대한 평가는 보병, 기병은 약졸이나 걔네들 수군과 포병, 총병들은 좀 무섭다....였습니다) 아, 물론 홍타이지가 겁낸 것과는 달리 조선 수군은 그다지 면밀하게 움직이지는 못했지만...일단 존재 자체가 강화로 건너가다가 모조리 수장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요...
영상 정말 감사합니다. 이자성의 난도 조금이나마 설명해 주셨으면 좋았을텐데 그 점이 쪼끔 아쉽네요ㅎㅎ
잼나네요. 다음은 어떤 역사 이야기를 준비하고계신가요..?
인조가 반정하고나서 삼전도에서 대가리박고 이마피터지는 좋은세상?
엌ㅋㅋㅋ
대가리를 박았으면 내가 저 새끼를 따라잡고 이겨야겠다는 생각을 해야하는데, 유교충과 친척충이 말아묵음 ㅋㅋㅋㅋㅋㅋ
@올바른소리 그쵸 ㅋㅋ 뭐 안해보려고 하는 것까지야 아니지만, 사실 농담투 비속어 안쓰고 진지하게 말하자면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격변기에 유지하다가- 부적절한 방침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것] 뿐이죠.
1840년대에 중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서양의 문명발달을 모르고, 1850년대에 일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르고, 고종이 영의정에게 미국에 대해 묻자 "미리견은 단지 부락 몇이 모여있는 곳으로 화성돈(워싱턴) 촌장이 영길리(영국)와 교섭하는 해적같은 놈들이다"라는 식이었다는 게 절망스러울 뿐이죠.
- 해적이라.....해양세력이 바다를 토대로 전 세계를 발견하고 연결하며 상업으로 국력을 키우던 시절에, 농사만 안짓고 벼슬 안하는 놈들은 조선인은 사람으로 안봤겠죠. 뱃놈에 장사꾼으로나 보지
반면 일본은 네덜란드로부터 지식수입하던 놈들이 유학도 가면서 20세기는 영국이 최고인 시대고, 영국과 독일로부터 배워야한다는 사실을 간파하던 때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20세기에 참 일을 잘 했지만
뭐랄까.....교만함이 문화적 병폐같아요. 자꾸 남을 얕잡아보려고 하고. 아주 어려워져야 오기로 잘난 놈 따라가고.
전쟁의 원인중의 하나가 선조-광해군으로 이어진 인재라인이 난으로 숙청되면서 없어졌다고 들은거 같음.. 어쨋든 가장 큰 이유는 광해군 쫓아내고 인조가 왕이되면서 도미노마냥 문제가 계속 생긴거임 그러다가 전쟁 터진거고 인조가 왕이되고 정치못한거 떠나서 처음부터 왕이 안됐더라면 좋았을듯
인조가 판단을 잘해서 여진족이 더크기전에 이괄을 더키워 명과함께 여진족을 조졌으면..
ohemian b 그전에 김류 먼저 묵사발로 만들었어야 했음.
@@이동연-c6d 김류말고 김자점 김경징
신무근 맞다 걔들도 있었지. 그 3놈을 묵사발로 만들어야함
님말대로라면 임진왜란 끝나고 바로조져야 하는데 조선,명에 그런힘이 있음?
@@kisear455 명나라가 사르후에서 각개격파 안 당했으면 후금이 홍경 털리고 망했겠지만 ㅎ 병력 나눴다가 각개격파당했죠.
항상 ㄳㄳ
재미있게봐습니다 감사합니다 ♡♡
중국은 5000년 적
???아니 언제부터 만주족이 중국이지?
@@unitedaccountsofme9297 역사보시면 나오지 않나요?
왜 적이 아니죠? 설명좀 부탁드리겠습니다
@@Kevin-km2zo 현재중국 즉 한족은 역사상 한나라,명나라밖에 없어요
@@서정훈-c6k 님이 주장하시는걸 확실하게 설명하자면 민족사하고 지역사 차이입니다 지역사로만 따지면 고구려도 중국역사일수는 있죠(단 중국 한족 애기 꺼내면 절대 안됨)
@@임우진-v9n 송나라, 주나라도 있고 수당 황족의 조상 선비족들도 한족에 동화된 선비무리라 한명만 한왕조는 아닙니다
궁금한거 있어요 콜라는 코카콜라가 최초로 만든 음료일텐데 맨처음에 코카콜라로 출시했을터에도 불구하고 왜 콜라는 영어로 콜라라고 안하고 코크인가요?
태무너 미국에서 판매하는 코카콜라에는 coke라고 적혀있던데요
중국에선 크얼러 이럼 ㅇㅇ 빨리읽어서 컬러
걍 콜라가 영어로 코크인거
영상 잘 보고 있습니다 영상 만드는 기술이 정말 깔금하고 감탄을 하며 봤네요 ㅎㅎ
궁금한점이 있습니다
혹시 소현세자가 인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건 어디서 참고하신 내용인가요?
명에대한 의리론보단 청과 명의 경제력차이에서 명에 편에 스는것이 조선경제에 도움됨
청나라의 경제력과군비와의 관계가 정확히 안다면 전쟁의 원인과 결과가 명확해질듯
역사 공부 재밌네요 ㅋ
병자호란에 대해 말하면 보통 삼전도의굴욕은 다 아시는데 사실 핵심은 그게 아닙니다.. 전쟁중 그리고 전쟁후에 겁탈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간 여성들을 ' 화냥년' 이라고 부르고 배척했는데 이게 이 이후로 스노우볼링이 엄청 굴러갑니다.. 국가유지가 불가능 할정도로..
주둥이만 산 무능한 양반놈들이 그 탓을 전부 피해자들에게 전가한 한심한 짓거리죠
인조의 잘못이 먼지 전혀 모르는 영상.
광혜군 시절만 해도 신형포를 개발하는 등 준비를 하면서도
중립외교를 했음. 단순히 병력만 보낸 인조랑은 천지차이
거기다 이괄의 난도 이괄의 아들이 역적으로 몰려서가 아니라
이괄을 잡기 위해 이괄의 아들을 역적으로 본것 즉 전후가 바뀐거.
역적의 아버지가 역적이 되는 건 조선에서는 당연한 이야기니까.
실제 인조반정에서 이괄은 거의 대부분의 공을 차지해야 하는 무장이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찬밥 취급을 받은 사람임. 거기다 먼저 친것이 인조이기에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음. 백프로 인조의 미스로 일어났고 인조가 잘못한 일임.
인조와 서인들의 잘못도 있지만... 이상기후로 인해 수많은 나라의 역사와 운명을 바꾼 것 같다.
그건맞음
구한말때 개고생한 이유도 이상기후 있음
요즘 시험 범위로 여기 근처 하는데 감사합니당
누르하치 착하게 그렸네ㅋㅋ인물들이 다 착하게그렸네요ㅋㅋㅋ
누루하치는 조선에 대해 호의적이였다 합니다
@@1625a5 아 그렇습니까? 전혀 몰랐던 사실이였습니다 그럼 홍타이지는 그냥 밟으려고 들어온 사나운 군주 였군요 사실 조선이 홍타이를 개무시하면서 빡치게했던 사실도 있겠군요
@@골드러쉬-e7n 홍타이지는 매우 유능한 왕입니다 그냥 쳐들어온건 아니고 명을 치기전에 후방을 안정시키려고 쳐들어 온거죠
@@1625a5 호의적인게 아니라 계산적인거지. 이제막 나라 이르키고 여진족들도 다 통합못시켰는데 후방의 조선을 왜 자극하겠음ㅋㅋㅋ
누르하치가 청나라 왕조에 있어서는 신적인 존재이자 전설적인 영웅임.
이건 도저히 반박못함. 여진족 특성상 부족으로 흩어져 따로 유목 생활하는데 이걸 통합시켜 명을 이긴것이 대한한거
근데..... 결론을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병자 호란이 벌어졌다 할지라도, 강화도가 함락되지 않았고, 물자 수송만 어떻게든 이루어 졌었다면.....
오히려 승리하는쪽은 조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병자호란때는 강화도가 함락된게 아니고 강화도로 가는도중에 남한산성에서 발이 묶여서 버티다가 항복합니다.
강화도도 어떻게 보면 잘 버틸 수 있었는데 장수하나가 병크를 터트리죠...ㅎㅎ
월요일좋아 강화도 함락 안됬으면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는 시간을 더 길게 늘릴 수 있었음.
당시 청나라는 기근이랑 명과의 전쟁땜에 개판 직전의 상황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조선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황제가 직접 내려온 상황
갓경징이 강화도에서 잘 버텨내고 갓자점이 병력 똑바로 모아서 청군 후미를 거하게 후드려 깟으면 삼궤구고두례는 인조가 아닌 홍타이지가 해야 했을수도 있던 상황.
심지어 식량 모자랐던 곳이 남한산성 뿐만 아니라 청군 측도 심각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장에 우리가 받은 굴욕인 삼궤구고두례 직후 정상적인 상황이면 청 황제가 직접 왔으니 이것저것 내정간섭할 기구 설치 및 별의별 난리를 치고 여유롭게 떠날 수도 있었어야 하는데 저 굴욕만 뜯어내고 인질들만 데리고 호다다닥 청으로 복귀했죠.
요는 김자점은 그래도 생각의 여지라도 있는데 갓경징은....
@@이경윤-d6x 갓경징은 걍 능지형이 답..
조선이 우주 방어 펼치고 명나라에서는 오삼계가 산해관 문 열고 뛰쳐나왔다면 역으로 후금이 작살났을지도
진짜 힘들게 살았겠다 다들....ㅠㅠ
그러게요 무기까지 들고있는 상태라면 손도 얼어서 못들텐데 ㄷㄷ
이런 일러스트는 어디서 구하나요?
직접 그립니다!
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어떻게 됬을까요?
사실 청나라 스스로 명을 이긴게 아니긴함. 안에선 이자성의 난 밖에선 *유목민족부대* 청나라
어떻게이기라는거임
강희제,옹정제,건륭제,3번의 난,강경책,회유책 이번 역사시험 중요 단어
어쨌든 인조 잘못인건 변치 않음. 이괄이 북쪽만 잘지켯으면 이겼을 전쟁인데 대우를 안해줘서 반란이나 일으키게 만들엇으니....
물론 맞는말이나 인조주변의 서인세력이 드세니 본인도 그 분위기때문에 어쩔수 없었을겁니다. 애초 인조는 서인세력이 올려준 왕이기때문에 입지가 좁았겠죠..
그래서 인조는 왕이 되선 안될놈이었죠. 이 사건까지의 모든 원흉이 서인세력이죠~국익에 도움 1도 안되는 병신들이죠.
@@정상적인사회생활위해 뭔 소리지 인조 본인자체가 반란세력중 하나인데 ㅋㅋ 뭔 서인세력이 세워ㅋㅋㅋ
참고로 병자호란 이전에 일본(에도 막부)에서 우리나라 측에 군사 원조를 제의했다고 하죠(속내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겠지만) 그나마 그 제안은 당시 조정에서 거절하였는데 만약에 진짜 일본이 개입되었더라면 여러모로 사태가 더 복잡해졌을 것 같습니다 진짜 이 때 일본이 개입 안 된 게 천만다행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이야기도 있었군요 몰랐던 이야기인데 감사합니다
@@은잡지 그렇게 따지자면 임진왜란때 태국도 군사원조 한다고 했죠
상식적으로
전쟁때 자기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피흘리며 지원해주려는
미친나라 몇이나 되나요^ ^
그게 꿍꿍이라니ㅋㅋ
저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음량이 크면 음이 잘 들리고 음량이 작으면 베이스 소리가 잘들리거든요?
그 이유 알려주실 수 있나요?(저만그러거면 님만그럼이라고 말해주세요.)
님만 그럼
임진왜란(+정유재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경신대기근, 을병대기근을 거치고도 나라가 남아있었다는게 더 신기하네요ㅡ.ㅡ;
우리나라는 국토의 3분이 2가 산악지대인데다 돌로 이루어진 산악지역이라 과거의 전쟁에서 절대 정복당한 적이 없습니다 초기에는 상대의 화력에 밀리게 되지만 장기적으로 가게 되면 전쟁물자는 다 떨어지고 결국 상대가 지지를 치고 떠나게 마련이었죠 이런 지형적 특성을 살려 예상되는 전쟁의 파고를 전략적으로 대응하여 장기전으로 몰고 갔었다면 후금에게 정복당하지 않고 물러나게 만들었을 겁니다 전쟁으로 굴욕을 맛본 최초의 사건이라 아쉬움이 남네요 정복당할 수 없는 천혜의 자연조건에 석전으로 전국민을 군사화시켜 대응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우택이 이것도 힙합이가
확실히 후금의 상황도 좋지 않았으니 장기전으로 갔다면 승산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김민종-v7h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고전적 전쟁에서 우리 선조들이 살아남은 전술이 석전이라고 들었습니다 기마민족들은 활과 말로 전투를 하는데 산악지대에서 장기전으로 가면 무용지물입니다 우리나라가 전국 곳곳에 높고 넓게 성을 쌓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가 있구요 유사시엔 전백성들이 성안으로 들어와 침범하는 적을 돌로 박살냈다고 들었어요 활이 다 떨어지면 기마민족은 힘을 못써요
함경도에는 개마고원이 있어 힘들고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를 지나쳐 한양까지 와야하는데 평안도 지키라했더니 반란일으켜서... 지금으로치면 경기도 gop랑 전방부대에서 반란일으켜서 텅텅비게 만들어서 북한이 쳐들어 온거니 뭐 막을 방법이...
신무근 산성입보 전술에 대해서는 정확히 잘 모르겠구요 오랜 세월을 거쳐 중국 본토의 왕조가 아무리 바뀌어도 바로 이웃인 한반도를 점령하지 못한 이유가 산악지대의 지형을 이용한 요새화 석전 상대가 전쟁물자 소모하고 지쳐서 철군할 때까지 버티는 벼랄끝 전술을 썼다는 것이죠 이러한 천혜의 지형조건으로 정복당하지 않는 나라가 베트남 이란 등이 있습니다
잘 보고 있습니다. '삼궤 구 고두례' 라고 읽으셨음 더 멋있을 뻔..
그런식으로 읽는 거였군요 ㅠㅠㅠ
역사심이 욕망으로 차오른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와 묘하게 겹쳐보이는게 젤렌스키가 우크라이나판 인조가 아닌지..? ㅇㅇ
실제로 저 삼전도비에 가보면 낙서가 심하게 되있다고합니다. 없애라고말이죠.
그렇군요...
이런 역사유물은 오히려 없애면 안되고 잘 보존해서 후손들에게 타산지석으로 삼게해야죠. 안그럼 또 잊게되서 언젠가 역사를 반복할수도 있습니다. 그나저나 쓸데없이 자존심만 내세우는 한국인들의 근성이란...ㅉㅉㅉ
딸꾹질을 멈출수 있는 방법으로 정말 멈출수 있는 건가요?
오 이거 궁금하닼ㅋㅋㅋㅋㅋ
저는 숨을 참을 수 있는 만큼 참으면 멈추더라고요
전쟁은 외부적 상황이니 어쩔수 없다고쳐도 왕의 자리는 소현세자나 그 아들한테 물려주고 가야 욕이라도 덜 먹었을듯.
효종도 괜찮은 왕아니였나요?
남호양 재위기간이 짧아서 북벌을 해야한다고 주장한거 말고는 큰 업적이 없습니다.
효종재위기간에 군사력이 약간 강해진거 외엔 예송논쟁으로 신하들이 상복입는걸로 2차례나 크게 싸우는데 정통성이 있는 소현세자나 그 아들한테만 물려줬어도 저런 쓸데없는 일은 안일났을겁니다.
8분쯤에 통일이라뇨 점령이죠 청과 명은 다른나라 다른 민족구성원인데
결론은 조선이 청나라 키워줬네
궁금한것 안경쓰면 얼굴형이바뀌나요?
봐뀐다면 왜봐뀌나요?
주로 안경을 오목렌즈를 쓰게되는데 이때문에 눈이 작아보입니다.
@@sungminlee9259 그럼 볼록랜즈는요
조선은 이괄의난, 명나라는 이자성의난으로 거의 망했다고 보면됨....
사실 광해군때 광해군은 군사력을키웠습니다 덕분에 조선의군사력은 강력해졌죠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강력하게 정예화된군사대부분이 죽었습니다 병자호란때 조선의강력한조총부대가 졌던것도 이런이유였죠 대부분에 훈련도가 낮았기때문
광해가 키운건 이미 사르후에서 다 날아갔고요.
그 이후에는 궁궐병때문에 국방력과 내치가 ㅂㅅ되었습니다. 그걸 그나마 인조때 복구했는데 이괄의 난으로 박살나버렸습니다. 이후에는 목소리만 컸던 청서들의 주전론이 강세가되고요.
그리고 당대 조총이 야전에서 기병을 상대로 이기는건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훈련도가 낮은건 병자호란때 속오군체제에서 온 근왕병이 그랬지 남한산성 내에 있던 정예병은 잘싸웠습니다.
어쩔수 없었다...는 사실 무의미 하다 생각함. 어쩔수 없지 않았던 적이 있나? 늘 우위에 있었나?
역사에서도 현실에서도 패배와 실패의 변명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나오고 합리화는 끝없이 가능한 걸
오늘도 역사를 인터넷을 통해 알아갑니다....
0:11 광해군 대머리 설
봉림대군도 끌려갔었나요?
소현세자만 그런줄알았는뎅....내가잘못알고있나
마지막 말실수한거같은데 인조가 판단을 제대로 했어도 전쟁은 피하지 못했다 과연
1633년에 열린 후금대장회의 기록을 보면 조선을 칠 생각이 없었는데, 어떻게든 식량난을 원인으로 만드려고 하시네요.
칠생각이 없는데 이전 정묘호란을 일으켜 우리나라와서 악착같이 돈을 뜯어내려 했군요
@@arsenalatleletico9874 어..정묘호란은 1627년인데 무슨 뜬금없는 말씀이신지 ㅎ 혹시 정묘호란을 일으켰으니 전후맥락 다버리고 병자호란도 똑같은 이유로 일으킨거라는 이상한 발상인가요? 이상하게 조선까의 반작용인지 조선 위정자들의 실리적인 면모를 강조하려고 상대국 위정자들을 미치광이로 만들고 싶어하는거 같네요 ㅠ
@@isaibnmaryam4761 뭐가 상대방의 위정자를 이상하게 만든거죠? 단순히 식량난뿐아니라 당시 명과의 교역이 끊긴 여파로 인플레이션이 심해서 경제적으로 피폐해서 심각해서 정묘호란뿐아니라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었다는 논문들 많던대요 지네 나라 국가적위기를 전쟁으로 해결하는것 나쁜놈들이지만 이상한 사람들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병자호란일으킨 원인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님이 말한 기록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전 3년전 기록하나로 아니라하는것도 웃기네요
@@arsenalatleletico9874 논문 어느거요? ㅎㅎ 솔직히 논문들 많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피터 퍼듀 선생님 서술외에 다른걸 가져오시는 분을 단 한번도 못봤어요 ㅎ
@@isaibnmaryam4761 ㅎㅎ 뭐 퍼듀선생 논문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교수들이 만든 논문을 봤었네요 별로 실효성이 없다고 느끼시는것 같은데 당신이 말하고 싶은것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왜 익선관 벗으니 대머리가 되나요?
원래 대머리니까요 ㅎㅎ
아마
@젤다의전설 꿈꾸는섬 자연대머리는 어떻게되는건가요
@@II2458II 가체도 있는데 그냥 대머리로 산다군요
@@남호양-m5z 자연대머리는 효도못한 호로새끼취급받나요?
인조는 결과적으로 3번이나 도성을 버리고 피신함. 정묘호란-이괄의 난-병자호란...그리고 인조보고 무조건 무능하다고들 하는데 인조 입장에선 친명배금책을 쓸수밖에 없었음.반정을 일으킨 서인들에게 옹립된 왕이니 그럴수밖에 없었음.
상황이 비슷했다면 우리가 먼저 쳐들어가는건 불가능했던가?? 씁쓸하구먼...
쩝.. 뭔가 아쉬운역사랄까요
ㅇㅈ 인조가 너무 시대 사상에 빠져있었음...
일반 술을 먹다가 과일술을 먹으면 취하고 숨쉬기 힘든이유
대기근은훨씬뒤에일아닌가요?병자호란이1636년인데?
임진왜란때도 대기근이 있었습ㄴ대
경신, 을병대기근은 1644년 후금이 중원으로 들어간 이후아님??
조선도 소빙하기의 영향이 있었다는 걸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1. 광해군 시절 부차전투로 인조 시기 이괄의 난으로 병력 날려먹음
2. 인조 시기 병력증강과 성곽 보수와 둔전(산성 축성은 무익하다는 주장도 있었음)을 했으나. 반란경험이 있는 인조가 원래 해야할 지방군 훈련을 감시하고, 지방관들도 훈련하는거 눈치봄
3. 후금의 전선 일원화와 후방 안전화, 기근 그리고 부양인구 증가로 조선 정벌 필요성 대두 (식량 문제는 홍타이지 치세때 어느정도 해결된것으로 추측함).
4. 3의 연장선상으로 복속한 몽골부족(내할하,코르친) 대치중인 조선과 차하르 그리고 점령지 한인의 반란과 언제 분해될지 모르는 버일러 연합체제. 이 난관을 타파하기 위해 교역단절과 소빙하기로 부족한 식량을 약탈로 공급하던지 아니면 전쟁을 통해 무력을 과시하던지 결론은....
5. 정묘호란 발발전 침공로 예상과 성곽 축성 그리고 후금과 조선의 전력차 인식과 병력증강을 함. 하지만 병자호란때는 산성이 시간끌기 역할을 못했다는 지적이 있긴했다.
즉 인조의 처신 문제만이 원인이 아니란 소리
한 웹툰을 보다가 이런 댓글을 봤었는데...
선조 : 난 자식은 건들지 않았다
영조 : 손주는 지켜줌..
인조 : ...
이었나? 일단.. 이괄의 난을 벌일 동기만 주지 않았더라도 더 발전했을 것 같고, 소현세자를 죽이지 않았다면 소현세자가 17대 왕이 되어서 조선을, 많이 발전시킬수 있지 않았을까 예상해봅니다.
소현세자걍 청나라 따까리였음 상황이..
@@신무근-l1u 소현세자가 그렇게 강단없는 사람이 아님. 용골대에게 자기를 겁박하지말라고 쏟아붙임
우리나라로 치면 미국과 동맹을 끊는 건가..?
음 지금으로 따지면 한국이 핵무기 보유 하갰다 설치고 북.중.일 에 전쟁선포 하는정도?
전쟁의 발발 자체는 어쩔 수 없었다 쳐도 전쟁의 준비와 대응은 임진왜란 준비가 미국의 걸프전 준비로 보일 지경
현재 쭝꿔가 한국을 무시하는 이유도 납득이가네 반만년 조공국이었으니
중국 포털 바이두만 가도 한국개무시함 반면일본은 인정하고,찬양하는 글도있음
청일전쟁때 털려서 그런가... 씁쓸하다
소현세자가 암살당한거 확실한 건가요?
영상 보시면 암살이 아니라 독살 이고요 그마저도 정확하진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런 소리가 나온이유는 인조가 슬퍼하지도 않았고 관련자 문책 도하지 하지 않아서 다들 인조가 범인이다 추측한 것입니다 즉 근거가 없지만 심증은 있단 거죠
선견지명이있었다면 항복할필요없었다
광해군 중립외교는 이미 역사학계에서 아닌것으로 확정된지 오래됐습니다. 오히려 어느한쪽에 정확하게 붙지 않아서 어영부영 명 후금 양쪽의 눈쌀을 받게 된겁니다. 애초에 명나라는 조선에 5만명 파병을 요청해서 조선군이 아예 전선 하나를 더 형성해서 후금을 압박하길 바랫는데 광해군은 궁궐공사에 세금을 쓰는바람에 5만은 커녕 14000명만 지원합니다. 별 도움이 되기 힘든 숫자죠. 또한 지원 안할거면 아예 하지말앗어야 햇는데 14000명을 지원하는 바람에 후금에게 전쟁선포한것도 다름없게 되고 훗날 조선침입의 구실을 제공합니다. 너 전에 군사보냇엇잔아. 니가 먼저 싸움 건거잔아! 하고 침략명분만 제공한겁니다. 게다가 명나라와 후금이 20만 대 10만으로 후금이 숫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엿기에 조선이 5만이상 대규모 파병으로 후금의 후방을 급습하면 후금이 패배햇을수도 잇기때문에. 광해군의 외교는 명나라에게도 도움이 안됐고 후금의 미운털만 박히게 된 이상한 외교엿습니다.
그렇군요 중립외교에 대해서 조금 더 찾아봐야겠습니다
광해군은 애초에 파병자체를 안 할려고 했습니다. 물론 궁궐복구하느라 많은 자원을 쓴건 사실이고 그점은 안 좋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파병에 대해선 광해군입장을 대변 해야겠습니다.
광해군은 애초에 파병자체를 안할려고 했지만 조정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이 무조건 파병을 해야한다고 광해군을 압박합니다.
광해의 세력이라면 북인들 밖에 없었는데 세력이 많이 약한상태였습니다. 이유는 선조새끼가 광해군을 매우 심하게 견제했기 때문이죠.....
(이 이야기까지 하면 내용이 길어짐)
아무튼 광해는 대다수 정권을 잡고있던 서인들에 의해 어쩔수 없이 파병한거 뿐입니다.
그리고 5만대군?
궁궐복구 예산 다 빼도 그만한 자원과 식량이 조선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열심히그냥 조선이 전성기때 야전최대 동원력이 6만정도니 당시 조선이 영혼까지 모아도 3만 못넘기죠.
인조의 판단이 문제가 아니라 조선의 상황이 문제였다
그놈의 유교,성리학만 고집하는 양반들은 세금도 내지않았고
세금은 다 농민이 내야해서 국가 재정이 고려보다 못한 수준이었음
또 조세를 거두는 과정에서 몇몇 비리가있어 조정으로 들어가는 수입이 엄청 줄어드는 상황도 빈번함
이렇게 국가재정이 빈약하니 군사를 키울려해도 돈이 없어서 못키운거지
왜란 후 직업군인들만 이루어진 훈련도감의 군인들도 당시 국가재정이 부족해서
월급도 제대로 못받았다고함 상비군이 월급을 못받는정도인데
속오군과 일반군들은 오죽하겠음?
그리고 조선의 양반들도 문제였다
조선에서 재산을 많이 가진것도 양반들인데 세금 조금 내라니깐 크게 반발하고
상소올려서 세금 못내겠다하고
도로를 정비하면 적이 침입하기 좋다해서 도로도 잘 안정비해서 길이 안좋으니 수레를 못끄니깐 사극보면 길거리에 대부분
지게지는 사람들이 보이는거임
솔직히 양반들도 세금내고 세종과같은 유능한 왕과 신하들이있었으면
조선 후기때도 잘성장했을거같다
조선이 저렇게된건 결국 무능한 왕과 신하들,양반의 타락,지나친 사대주의와 유교,조세문제가 원인이었던거같다
내용 아직 안보고 제목만 보고 댓글 달아봅니다...(영상은 바로 시청하겠습니다)
인조가 뭘 알겠습니까.. 꼭두각시인데..
뭘 할수 있어야 잘못도 하죠...
잘못은 서인.. 노론쉑히들 개똘빡이들이 문제였겠지요...
홍타이지는 유능한 군 전략가였다
초반에 자막이 이상한건 저만 그런가요 ㅠㅠ
어떻게 이상한가요?
근데 진짜 조선역사 보면 화만 나는듯...
그럴수밖에 없는 이유는 애초 조선의 건국세력이 사대부(=실리보다 이상주의 위주로 명분으로 삼는 주로 책공부만 해왔던 샌님들)임. 이 명분자체도 지들끼리의 권력을 합리화한 도구였고, 이러한 권력을 잡고 자신들에게만 유리한 신분제사회를 만들어 그 권력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대를 이어 점점 타락하고 위선적으로 변질되니, 그러한 고매하신 지배층이 운영하는 사회가 되어가니 비참해질수밖에 었었음
@@정상적인사회생활위해 아니죠 오히려 실리주의자인거죠 당대 미국이나 다름없던 명에 1대1로 맞짱 뜨자는게 이상주의 아닙니까?
사대란 이름하에 명의 체면 세워주고 대신 우리 건들지마라가 옳은표현 같다생각이드는데요
실제로 명에게 겉으로는 굽신했지만 명나라의 벼슬을 받은 여진족을 똑같이 벼슬을주는등의 회유책과 혹은 토벌을 실시하는등 독자적인 모습을 계속 보여왔었죠
@@arsenalatleletico9874 서인종자
@@mssrskn2030 ??
다음에 거짓말,긴장을 하면 식은땀이 나는 이유 알려주세여ㅓㅓㅔ
소현세자가 인조한테 죽임을 당했다는 추정만 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추측이라는 단어를 넣었어야 했는데 실수했네요 죄송합니다
인조를 세운 서인과 사대부 전체의 죄를 인조가 다 써야 하는 것이 쿠데타한 임금의 운명인 것이 조선이고 양반들의 바지사장 이었고 심심하면 임금을 죽이고 바꾼애들이 양반들이고 가장 힘든 일들중 하나가 조선의 임금이었죠 ~ 제대로 수명대로 산 임금이 드물고 장자가 계승한 것도 드물고 임금은 그래도 되서 다행이지만 왕자들은 항상 죽음을 곁에 두어야 하는 극한 신분이었고 망나니 노릇을 가장하거나 중이 되거나 하는게 속이 편할 수도 ~
서인이 다 같은 서인이 아니며 인조를 세운게 아니라 인조가 직접 쿠데타한겁니다. 태종, 세조마냥.
솔직히 광해가 박살낸 국방력과 내치를 생각하면 그리고 광해의 애매한 외교스텐스, 인조입장에선 혼자 독박쓰는건 쫌 억울할만하죠. 물론 인조에게는 책임이 없다는건 아닙니다. 한 7대3정도?
솔직히 형제관계는 어느정도는 맞음(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과거 고구려인들과 발해를 세워서 어느정도는 형제가 맞음)
국제관계에서 형제 이지랄하면 걍 명분을 위한거지 개소리임 걍
@@신무근-l1u ㅇㅈ
여기서 형제관계는 뭐 역사적으로 민족이 친하고 말고 이딴 의미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동맹'이냐 '전략적 동반자' 관계냐 같은 외교적 수사다 모자란 것아
참고로 고구려는 북부지역 주민들 대부분이 여진족 출신임
그 때는 명나라도 이상기후와 정치로 나라꼴이 개판이여서
일본빼고는 동북아시아전부가 개반아니였나?
ㄴ일본도박살남 탠매이대기근몰르시나요
그때일본도식임함
@@김진-p5o 아 일본사는 안배워서
ㄱㅅ
잇키라고 농민봉기 오지게남..이상기후로 쌀생산량 줄어서 사무라이들도 몰락하고
10:14
저때 비격진천뢰를 사용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다.
사용함.
벼룩의 간을 쏙쏙 빼먹었군요..
근데,진짜 청이 조선을 병합시키지 않은것도 고려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여긴것도 있긴함
처음엔 병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천연두가 돌아서ㅋㅋㅋ급하게 단순 조공의 관계를 맺기로 했져
@@unitedaccountsofme9297 천연두도 돌았군요 ㅎㅎ 전 이자성이 깽판을 치고있긴 해도 청나라가 아직 산해관을 못 넘은 상태이고 조선 팔도 전역을 지배할만한 병력은 동원하지 못해서 속전속결로 끝낸 줄요.
@@crouchingstone 기록에 따르면 홍타이지가 조선 백성들을 모아놓고 변발을 시키며 너희또한 청의 신민이라는 장황한 연설도 했다고 써있더군요.
@@crouchingstone 애초에 식량없어서 도박한거이고 심지어 보급로 마저 확보 안한상태에서 무리하게 진격한거임
근데 여기에 쓰는 브금좀 알려주세요.
Clouds입니다
인조가 이괄의 아들이 연류된 반란건만 잘 처리했어도 북방 병력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고 그렇다면 설령 호란에서 패배했더라도 손실은 크게 줄일 수 있었읉텐데 ㅋㅋ
괜히 인조ㅈ이 아니네 ㅋㅋ
纠正错误:明亡于国内农民起义
Ming dynamic Perish reason Peasant uprising
이렇게 해서 여진족이 세운 후금이 청이되고 300년간 하다 중국으로 변한
우리나라 군대도 많이 뜯겼죠ㅠ
저땐 조선측 군사수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대략 16만 정도인데 문제는 이 16만이 과연 정규군이라는거죠...애초에 전후 복구도 덜된 상태이고 안그래도 없는 병력에 난으로 대부분 쓸려나가니깐 기껏 모은게 거의 민병대 수준인 군대죠.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청군을 상대로 급하게 소집한 조선군이 제대로 당해낼리 없다고 봅니다.
@@61메테오 병자호란때 조선군의 대응을 보면 군사의 숙련도 부족은 조선 지휘관도 알고 있었기에 청이 쳐들어오면 김자점을 중심으로 하는 그래도 꽤 숙달된 함경도등의 북부조선군들이 1차적으로 막고 인조는 피난을 가면서 후방지역에서 꾸준히 징집하여 머릿수로 장기전을 끌고 가여 오래머무를수없는 청나라를 막으려는게 작전인것 같습니다 숙련이 안되도 수많은 산성에서 전방후방가릴것이 없이 치게 되면 불리해지는건 청이였고 임란때도 일본이 너무 빨리 진격하여서 후방의 관군이 뒷통수를 쳐서 1년만에 절반을 없앤 경험이 있었으니 나쁜판단은 아닌거같습니다만....
제생각에 문제는 군사의 숙련도의 부족은 고려를 했는데 청의 장수들의 기량은 계산밖이였던게 가장 크지 않을까싶습니다....실제로 김자점은 축차적인 청의 침입에 어느것이 주공인지 파악을 못하여 어버버하다가 도르곤에게 싸먹히고 그러다보니 진로가 다뚫려버려서 진로 밖의 군대는 회전을 강요받을수밖에 없었고 함경도군의 기량이 조선에서 좀 나은수준이지 초반의 소수정예 팔기에 비할군대는 명나라의 요동철기나 홍군정도였고 함경도군은 이에 미치지못해 회전에서 작살나고 인조는 빨리 도망가지못하여서 후방 지역의 군대역시 급히 전투를 벌여야했고 그 집결점을 정확히 노려서 요토등이 제일 큰놈을 격파하니 나머지 군대도 지원올 엄두를 못내면서 동시에 홍타이지는 강화도정벌을 위한 함선건조를 하면서 한양포위....홍타이지의 계산이 딱딱 맞아떨어졌고 조선수뇌부는 이러한 청의 기동전에 대해 안타깝게도 잘몰랐던것같습니다....
조선수뇌부 역시 말씀대로 많은 숫자의 병력을 확보하여 막으려고 대비까지 하였고 기량부족이란것도 냉정하게 판단하여 전술을 짰던것을 보면 나름 열심히 준비했다는것은 명백하나 병자호란은 홍타이지vs조선수뇌부에서 윗선 지휘관 군사 모든 부분에서 조선이 ko패했다고 밖에 말할수 없을껏 같습니다...
@@남호양-m5z 궁금한게 그런건 어디서 배울수 있나요? 이런 내용이 재밌어서 한 알아보고 싶은데...
@@61메테오 일단 호란쪽은 길공구님 블로그에서 보아서 대강 흐름만은 배웠고 제가 명청교체기를 관심있게 봐와서 중국위키백과+바이두백과를 읽거나(중국어를 할줄알아서..ㅎ) 이것저것 보아서 호란기의 배경을 좀 쉽게 이해하지 않았나 싶네요...ㅎ
그래봤자 진짜로 아시는분에 비하면 새발의 피이지만요
소름돋는건 의외로 중국백과쪽이 잘서술되어있어서 한국보다 더 한국인물을 잘서술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이두는 주변인물의 평까지 다적혀져있더군요 그래도 지명 관직 이름등이 들어가는지라 읽기어렵긴하다만....
상황이 나쁘다면 항복하라는 기록이 어딨다고 ? 걍 보냈음. 현대전에서 30프로만 갈려도 괴멸이라 칭하는데 할복했을때 이미 60프로 이상 전사했는데 무슨..
질문!
→왜 손바닥에 딱지가 생긴 걸 본 적이 없을 까요??...
우유에다 재티 타먹으면 맨날 컵 바닥에 검은색으로 동글동글한 물집같은게 생기는데 왜생기는 거져
녹지 않고 남은 제티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