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탐(探)] 신라, 천년의 역사를 만나다 2부 - 신라 왕권 양날의 칼, 골품제도 / YTN D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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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22 вер 2024
  • 신라 천년의 역사를 지켜온 강력한 신분제, 골품제도!
    건국초기, 신라는 6개 부족이 연합하여 성립한 연합부족체제였다.
    그렇다보니, 귀족들의 세력에 왕의 권한이 좌지우지되는 불안한 정세를 보였는데...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신라 왕족은 폐쇄적인 신분제를 골품제를 정립하였다.
    왕족은 성골과 진골을 그 외 귀족들에게 6두품에서 4두품을 평민에게는 3두품에서 1두품이라는 차등을 두어 사회진출의 벽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난 1986년에 발굴된 경주시 용강동 고분에서는 다양한 인물 토용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서 신라는 신분제별 독특한 복식제도가 있었음을 발견하였다.
    당시 신라인들에게는 신분별, 주거지, 복식 등 정해진 규정이 있었던 것이다.
    외관만 보더라도 뚜렷이 신분제를 알 수 있도록 제정한 것이다.
    신라는 골품제도를 통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성골신분을 통해 안정적인 왕권 강화를 이뤄냈고, 이를 통해 최초의 여왕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시대가 더해갈수록 폐쇄적인 신분제에 대한 불만은 거세져갔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인재라할지라도 신분제를 뛰어넘어 사회적 진출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특히, 6두품은 경제적 여건과 교육 수준이 높았음에도 주요 관직에 오를 수 없어 당나라 유학, 당나라 관직 진출에 뛰어들게 되는 현상을 만들었는데...
    결국 이러한 골품제도에 불만을 품은 지방 귀족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점차 키워나갔고 신라의 중앙집권은 약해져갔다.
    호족들의 반발과 끊임없는 농민 봉기, 그리고 후고구려와 후백제의 등장으로 혼란스러운 후삼국시대를 겪었던 신라는 왕건의 고려가 통일을 하면서 그 천년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전무후무한 신분제도로 왕권강화를 꿈꿨던 신라.
    하지만 단 하나의 왕을 성립하려는 정책으로 수많은 인재들이 좌절했고 최고위층들만의 세상을 만들어버렸다.
    신진 세력 차단과 동시에 뛰어난 인재마저 놓친 폐쇄성은 신라를 역사속의 나라로 가둬버린 멸망의 한 원인이었다.
    [YTN DMB 기사원문] www.ytndmb.co.k...

КОМЕНТАРІ • 6

  • @Yolre
    @Yolre 2 роки тому +1

    경순왕이 견훤의 동생이라니....YTN같이 공인된 방송이 참 이상한 소리를 하시네요

  • @nayeonlee1157
    @nayeonlee1157 3 роки тому +1

    요즘 세상에 무슨 왕족 돈 많고 직장 좋으면 왕족이지...

  • @jiwonkim342
    @jiwonkim342 2 роки тому +1

    지금 북한을 생각하면 됩니다.
    백두혈통ㅋㅋㅋ

  • @삶바른
    @삶바른 3 роки тому

    38:30장보고 해적이 신라인을 노예호 삼음, 당나라 일본 무역,
    40:00 장보고 피살

  • @VitorJKhan
    @VitorJKhan 3 роки тому +2

    골품제?
    한마디로 골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은 단순히
    집안이나 신분이 다르다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품종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뼈를 말한 것이다.
    인도의 타스트제도를 보면
    아리안과 드라비단, 몽골로이드등
    여러 인종적 차별이다.
    즉 김씨왕조는
    원래 다스리는 신라인과 인종이 다르다는 뜻이다.
    흉노선우의 종자다.
    즉 신라식 카스트제도이고
    여기에는 인종적 요소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