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김재영 (전등사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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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24 тра 2024
  • 강화 삼랑성 (남문)
    강화 삼랑성은 일명 정족산성 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고려사]에 남아 있다. 성안에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전등사가 있다. 고려 시대에는 임시로 지은 궁궐이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 사고와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이 있었다. 이곳은 조선 고종 3년 1866에 프랑스 군대가 침공한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 오던 160여명의 프랑스 군을 무찌른 곳으로 유명하며, 동문 안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양헌수 승전비가 있다.
    삼랑성은 강화산성과 더불어 고려 -조선시대에 수도 개경과 한양의 외곽을 방어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강화 삼랑성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곳으로, 예로부터 신성한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병인양요 : 고종 3년인 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과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로 침범한 사건.
    전등사 대조루 인천광역시 문화제 자료 제 7호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전등사로 37-41
    전등사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운 누각식 건물이다. 전등사 대조루가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말 대학자 목은 이색의 전등사 시 에서 읆은 시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는 이미 대조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사찰안의 건물들을 수리하면서 대조루도 다시 지었다고 한다.
    강화 정족산 사고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인 장사각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선원보각이 있던 곳이다. 조선은 초기부터 [조선왕조실록]을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곳에 보관하였다. 임진왜란 때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이 묘향산 사고로 옮겼다. 다시 마니산 사고를 거처 현종1년 1660 이곳으로 옮기고, 오른편에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에 이 사고의 사진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이후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실록은 1910년 국권침탈 이후 서울로 옮겨졌고,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1998년 두 건물을 복원 후 옛 현판 '장사각'과 선원보각을 다시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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