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에서 날때부터 자라서 익산역을 자주 이용하고 지나다닙니다 이리역 폭발참사 몇주기 하면서 행사하는 모습도 많이 보았는데 사실 별 관심이 없었어요 70년대에 익산이 이리였던시절에 폭발사고가 있었다 정도만 알고있었는데 평소 즐겨보던 꼬꼬무에서 이리역 폭발사고를 다루어 주셔서 우리지역에 있었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알게되었어요 감사합니다..!
이거... 열차 공무원들도 문제 있었다는 점은 누락된 게 아쉽네요... 당시 급행료 지급을 안해서 화약운송열차가 계속 대기를 했다고 합니다... 화약과 같이 특수운송열차는 정차없이 통과시켜야하는데... 그걸 붙잡고 급행료를 뜯으려는 열차공무원들에게도 엄정히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닉네임없음-jjj 그쵸. 물론 참사는 익산에서 발생했지만 시외버스로 1시간도 안 걸릴 정도로 바로 옆 도시가 군산이라서 제가 어렸을 때 익숙하게 들었거든요. 심지어 다는 아니고 몇몇 군산 시민들, 특히 노년층분들은 저 소식 듣고 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추모하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최근에는 미디어 영향 덕분에 많이 알려지기도 했으니까요. 결정적으로 인명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니까요.
엄마가 어릴 때 일어난 일이지만 이 사건을 기억하고 계시더라고요. 보는 내내 경악하며 서로 슬쩍 보다가, 다시 TV 보다가 했습니다. 마지막에 사망자 집계수가 적었다는 구절에서 기분이 씁쓸해졌습니다. 외지인 혹은 지위가 낮은 사람인 이유만으로 통계에 포함되지도 못하고 사라진 수많은 피해자들이 더 있었을 것만 같은데, 그 유족들은 아직도 오지 않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 계속 기다리다가 눈을 감았는지...ㅜㅜ
저희 아버지도 이리역 앞에서 서점 운영하셨는데 건물무너지고 기어서 나오셨다고 하더라구요 살던집도 다무너져서 현재 이리남성고등학교 있는곳에서 거의 반념넘게 천막촌에생활하셨다고하고 어머니는 폭발사고나고 4일뒤에 저희누나 출산하셨다고 하셨는데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다 하시더군요..
그때 저는 1살 갓난 아이였죠 임피에서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잠들었다는 부모님 얘기를 들었고 사진을 보고 눈을 의심할수밖에 없었죠 그 이후로 역주변 집장촌이 전부 정리가 되고 모현동에 최초로 아파트가 지어지죠 모현 아파트 화약 수송원이 그 안에서 불을 피웠다는 말도 안되는 인재 그 화약 회사가 한화 아닌가요?에휴 그 때 희생 되신분들 너무 허망한 인재로 돌아 가셨다는 참 전라북도 익산의 아픈 기억중의 한편이죠...
우연히 인터넷 검색으로 익산을 쳐보니 이리역 폭발 사고라고 딱 뜨더라구요… 익산에서 태어나고 검색에 흥미가 있었던 저는 딱 그때 알았었었어요. 익산역이 원래 1995년 이전에는 이리역이였다고 깨달았습니다. 지금 중3이 되어가는데 가끔 익산역을 들릴 때 이리역에 관한 것들이 붙혀져있어서 한번씩 이제 1981년에 다른 시민들을 도와준 전 이리시민들에게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어요. 익산 사람으로서 겪어본 적은 없지만, 기억하는 사건입니다.
그때 제 주위에 잘 아는 언니가 서울로 휴가 차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그 시간에 기차표 티켓팅 하다가 그때는 서울 가는 것도 쉽지 않아서 간 김에 서울 구경하러 돌아서서 서울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그 시간에 기차가 폭파됐어요 전국이 이 방송으로 난리가 났는데 이를 본 국민 중에 서울 간 언니의 직장 근무지 담당 수녀님께서 그 소식을 듣고 시신이 안치 됐다는 전국의 모든 병원을 우시면서 뒤지고 다녀도 시신이 없어서 우시면서 기도만 하고 계셨는데 며칠 후 직장으로 돌아온 이 언니를 보고 그 수녀님은 기절하고 말았지요 얼마나 놀라고 반갑고 그 뒤에 이 언니는 사태를 알고 너무나 많은 주위사람들에게 폐를 끼쳤음을 죄송해 하고 고마워하며 ..... 지금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세우신 사랑의 선교회에서 봉사하며 수도자의 삶을 살고 계십니다
근데 이게 대기업이 사고에 가장 책임있게 대한 사례중에 하나임.. 꼬리짜르기안하고 빠르게 사과하고 그때 당시 어마어마한 보상을 함 그래서 사장이 욕 덜먹는거고 피해자들이랑 소송으로 피튀기면서 어떻게든 보상안하려는 대기업들 지금도 널렸고 저때 시대에 돈만먹였으면 뉴스에도 얼마안나왔을거임
초딩 4학년 때 벌어졌던 일인데, 당시에 신문과 TV에서 한 달 정도는 아주 난리를 쳤을 만큼 엄청난 사건이었지. 이리라는 지명이 사라지고 익산으로 바뀐 것도 순전히 이 사고 때문이었음. 이리란 말만 들으면 사람들이 "아, 이리역 폭발사고의 그 이리?" 이렇게 되물을 정도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씌워져 아예 지명을 익산으로 바꾸게 되었을 정도.
거짓말도 유창하지못하게하시네....익산은 삼국시대부터있었으나, 이리는 일제강점기때 곡물수탈정책으로 세워진 도시요. 즉 일본애들이 이리라는 명칭을 만들었다는거죠. 원래 이리는 옥야 (=기름진 땅)이라는 뜻을지닌 이름이있었고 솜리라고도했죠. 이리, 익산통합할때 고유한 이름되찾기 일환으로 익산으로하자고 압도적으로 투표결과가 나와서 익산으로 정한거고, 익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뀐것은 이리역폭발사고때문이 절대로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마지막에 이리 복구를 위해 기부한 많은 사람들이나, 그 후에 81년도에 있었다던 경산 열차 추돌 사고에 있었던데 앞장서서 도운 이리 사람들도 감동이었네요 요즘 정치판 때문에 지역 감정도 가면 갈수록 더 악화되어서 안타까운 사고에도 욕하고 잘됐다는 댓글들이 많이 보는데 이렇게 따스하던 사람들이 많았던 옛날 시절이 부럽습니다
저희 장인어른이 근처 사시다가 이 사고로 평생 장애를 얻고 일가족을 잃으셨었습니다 장인어른의 병수발로 저를 비롯해 아내도 처고모님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엊그제 운명하시고 오늘 발인이네요 장인 어른 다음 생애는 꼭 이런 재해 피해도 안겪으시고 건강한 몸으로 손주들도 번쩍 안아들 수 있는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십쇼 ㅜㅠ
과거 1917년에 핼리팩스 폭발 사고가 있었는데 그 사고도 이리역 폭발사고와 마찬가지로 안전불감증이 가져온 사고였지요. 그 때는 핼리팩스 항구에 있던 탄약운반선이 폭발한 것이었는데 그 사고로 항구와 시가지가 완전히 날아가버리고 2000명이 즉사하고 700명 정도가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그 당시에는 국민학교였음) 이리역에서 만경강 넘어가면 있던 마을 백구정 이라는 곳에 몇 년 살았었는데 그 마을에 오랫동안 사시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폭발음이 들리길래 밖으로 달려나가 봤더니 커다란 불꽃이 터지고 있었고 잠시 후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팔다리가 날아왔다고 하시면서 너무 무서웠다고 하시더라구요
요약본이라 많이 빠진것도있는데 화약류운송차량,대통령탑승차량은 최우선 순위임 지금으로치면 KTX-청룡이여도 중간역에 강제정차시킨후 화약 및 대통령탑승차량이 추월해서 지나가야되는데 당시 이리역에 한 역무원이 강제정차 시켰다고함 목적은 돈, 여길 통과하려면 자기가 원하는 액수만큼 돈을 내놔라 안그러면 하룻동안 정차시킨다가 만연하던 시기... 운송사는 화약류가 있으니 빠른통과가 필요해서 돈을 쥐어주었지만 뇌물받은 이리역의 한 직원이 마음에 안들어서 못지나간다고 하는바람에 참사가 벌어진거라고함 그 직원은 폭팔로 죽었다고 들은 이후 저 사건이후로 정부차원에서 화약류를 운송하는 차량은 목적지까지 정차못하게하고 뇌물을 받는걸 아예 못받게끔 바꿨다고함
저희 아버지가 이리역에서 10년간 근무하시고 폭팔사고 나시기 10달전에 그만두셨습니다 그때 동료들이 미쳤다고 하고 집에서는 할아버지가 같은 밥상에서 밥도 먹지 못하게 하셨다가 폭발사고 접하시고 같이 밥을 먹을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지가 나가라고 조만간 사고난다고 하셨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고 동료들은 그대로 폭사 했습니다.
제가 아는 익산사시는 형님이 초등학교 시절에 사고 났는데 여기저기 시체도 많았고 주변건물은 다폐허됐고 열차 바퀴가 시청에까지 날아갔다고 했어요 대략 3키로 이상 된다고 하시더라구요 현 이편한자리 모현아파트 생기기 전에 거기에 시체를 많이 모셔놨다고 했고 100명 그 이상은 사망했다고 하시더라구요
외가 친척들도 익산이 고향인데 사고 난 곳 반경 20키로인 시골에서도 지진 난 것처럼 진동이 느껴졌다고 하셨죠. 지붕 기와가 떨어졌다고 그 사고로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섰고(5층짜리 모현아파트) 어릴때 할머니 모시고 부모님과 같이 살았었죠. 지금은 e편한세상으로 재개발 되었고 덕분에 익산역 철도길 옆의 서초등학교 졸업
5:17 나훈 기자님.. 기자라면.. 도망가서도 안되고, 사건이 클수록 더 붙어있어야 한다.. 인상깊은 말씀이에요.. 그 사명감으로 사고를 낸 사람을 발견하고 검거할수 있게 된거네요..
기레기들아 보고 있냐?
익산에서 날때부터 자라서 익산역을 자주 이용하고 지나다닙니다 이리역 폭발참사 몇주기 하면서 행사하는 모습도 많이 보았는데 사실 별 관심이 없었어요 70년대에 익산이 이리였던시절에 폭발사고가 있었다 정도만 알고있었는데 평소 즐겨보던 꼬꼬무에서 이리역 폭발사고를 다루어 주셔서 우리지역에 있었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알게되었어요 감사합니다..!
ㅡ33ㅡ3ㅡㅡㅡ3ㅡㅡ399ㅈㄷ695116😮
관심이 없으면
보지마
와중에 이주일님 두개골함몰인데 본인 머리 밟고 내려오라고.. 진짜 좋은분이셨네
그 뒤로 하준화 가 이주일에게 mc자리에서 가수자리로 승격된 이유가 됩니다
신씨는 지금 죽었겠지?
수천명을 죽이고 다치게 만든 장본인... 사형에 쳐해야 마땅한데
얼마나 멍청하면 다이너마이트위에 촛불을 꽂아두냐
이래서 멍청한 사람은 걸러야돼
그때 당시 하춘화씨가 이주일씨의 사실상의 밥줄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자긴 하춘화를 꼭 지켜야 했다. 고 이주일씨가 나중에 언급하셨었죠
@@iong1870대단하긴 하다 나같음 밥줄이고 뭐고 먼저 도망가기 바빴을텐데
@@iong1870이주일씨 특유의 유머입니다 사람들이 지금처럼 하춘화씨 욕할까봐서요
시체를 놓고 우는 사람들이 부럽다라는 말이 참...... 여운을 많이 남기게 하네요
이리역주변의 홍등가가 폭발사고를 계기로 정리되었고 어지럽던 시가지가 깨끗해졌으니 결과적으론 잘된일이라 했던사람이 실제론 많았답니다
@@chan2gim역전 사창가는 91~92년쯤에 정리됐는데요..
어디로 다 날아갔는지 기차바퀴도 저기 날아갔다는데…사람은 분해됐을듯하네요 불이야하니 불을끄려하셨겠죠.
@@chan2gim 엥?
@@chan2gim 뭔 개소리야 넌 빈대잡으려고 집태우냐?
이거... 열차 공무원들도 문제 있었다는 점은 누락된 게 아쉽네요... 당시 급행료 지급을 안해서 화약운송열차가 계속 대기를 했다고 합니다... 화약과 같이 특수운송열차는 정차없이 통과시켜야하는데... 그걸 붙잡고 급행료를 뜯으려는 열차공무원들에게도 엄정히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본방에 나옴
@@You_Suck_Yuck_ 그렇군요^^;;;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 테러 당시 대구 지하철 공사(現 대구 교통 공사) 측의 바보같은 대응이 테러의 참상을 더 키운 것처럼 이리역 폭발 사건또한 마찬가지였죠.
@@csh3102 ㅋㅋㅋㅋㅋㅋㅋㅋ ㅇㅈ
@@gocccre 뭐가 웃기냐
진짜 아무리 열차폭발이라 해도 무슨 폭격 당한 것 마냥 저리 됐을 줄이야... 군산 시민으로서 상당히 충격이 큰 사건이네요.
익산이라는데요??
@@닉네임없음-jjj 그쵸. 물론 참사는 익산에서 발생했지만 시외버스로 1시간도 안 걸릴 정도로 바로 옆 도시가 군산이라서 제가 어렸을 때 익숙하게 들었거든요. 심지어 다는 아니고 몇몇 군산 시민들, 특히 노년층분들은 저 소식 듣고 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추모하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최근에는 미디어 영향 덕분에 많이 알려지기도 했으니까요. 결정적으로 인명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니까요.
아 익산옆이 군산이군요 😢😢
군산시민 ㅎㅇㅎㅇ
그 사건 이후 이리라는 지명이 없어졌슴 그 만큼 큰 사건이였슴
원래 알고 있던 사고였고 알게될땐 직원의 무지와 당시 부조리했던 관행에 대해 초점을 맞춰서 알았는데 이번 방송을 통해서 사고로 피해자의 시점에서 무엇을 잃고 얼마나 가슴아픈 사고인지를 알게 됐습니다ㅜㅜ
19:30 화약회사 회장도 피해보상 비용을 결단력있게 내놓은 거 멋지다.. 잘못은 잘못이지만 그걸 본인이 인정하고 어디에 사과해야 하는지 아시는 분이네…
ㄹㅇ 잘못은 분명있지만 입싹닫고 모르는척 무시할수도 있었는데 90억 내놓은거 보면 신기함
그 회장님의 아들이 훗날 청계산 빳다교육을 하신…
아버지가 당시 시내에 사셨는데
폭발로 집을 잃어서 당시에
현재 남성재단학교들 앞인
소라산에 이재민들 텐트치고 천막촌처럼 몇년살다가 모현동에 주공아파트를 지어주고 입주했다네요,,,현재는 재개발로
E편한세상이 되었음
이런 현지썰 너무 좋음
당시 3살이였던 저는 천막치고 살았던 사진이있어 기억하는데 그자리가 소라산이였군요
결국은 보상받아서 좋앗다이거네
@@samuelpark1727그 주공아파트가 이리역하고 연관 있는거 아닌가요?
@@samuelpark1727 죄송합니다 어르신 ^^
안녕하세요! 저는 윤리와 사상 시간에 선플 달기 운동을 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이 영상을 보고 자신이 겪은 일도 힘드셨을 텐데😢 같은 사고가 일어났을 때 도움을 주시는 것이 대단하고 멋지다고 느꼈습니다. 저도 앞으로 이러한 모습을 본받아 많은 도움을 퍼뜨리겠습니다.
꼬꼬무 보고있었는데 할머니가 꼬꼬무 보고 '까먹고 있었다가 기억나네'하셨어 신기해요
엄마가 어릴 때 일어난 일이지만 이 사건을 기억하고 계시더라고요. 보는 내내 경악하며 서로 슬쩍 보다가, 다시 TV 보다가 했습니다. 마지막에 사망자 집계수가 적었다는 구절에서 기분이 씁쓸해졌습니다. 외지인 혹은 지위가 낮은 사람인 이유만으로 통계에 포함되지도 못하고 사라진 수많은 피해자들이 더 있었을 것만 같은데, 그 유족들은 아직도 오지 않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 계속 기다리다가 눈을 감았는지...ㅜㅜ
초등학생 때 담임선생님이 손가락 두개가 없으셨음. 열차 폭팔 사고에 날아온 돌에 맞아서 그렇게 되셨다고 했는데 그게 이리역 폭발사고였구나..
값으로 칠 수 없겠지만 책임을 지신거라고 해도 당시 전재산 90억 내놓은 사장님도 대단하시고
그마음 알고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해 다음 열차사고때 트라우마로 힘드실텐데도 도움을 주신 이리시민들도 대단합니다
사장이 아니라 회장 사장은 벌금 냈고 이후 회사 회장이 회사 대표로 사과와 90억 내놓은것
한화 회장
이 당시 그 부근에 계시던 저희 고모님 말씀으로는 직접 피해권이 아닌 곳도 유리창이 깨지고 난리가 났었다고 하시더라구요
몇년전에는 이를 주제로 사진전도 열었습니다
익산시민으로써 알게되었어요 감사합니다
진짜 안전이 무시되면 어떤일이 벌어지는지 알게되는 대표적인 사건이죠..
담당자는 무면허에 취사.촛불까지..에휴..
ㅠㅠ수많은 사건 피해자와 돌아가신 분들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리역은 익산의 구 지명으로 현재 ktx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는 현 익산역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고가 재반복되는 일이 없도록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익산의 옛날 지명이 아니라 도농복합 때 익산군과 이리시가 통합되면서 익산이 된 지역이랍니다
처음 알게된 사건이에요.. 너무 눈물나네요
열차 관련 꼬꼬무 나온김에 90년대에 구포역 열차 전복사고도 방송해주세요!!!
저때 이리역에 유조열차 있었는데 인근에 살던 기관사가 역에 불났다는소리에 튀어와서 유조열차를 황등역으로 대피시켰다고함.
그분아니었음 이리는 폭8에 이어 불바다 되었을거임
그리고 추가하자면 당시 호남선은 단선이었는데 이리역으로 진입하려는 여객열차를 이리역의 역무원이 기관사한테 대형화재가 발생해서 진입하지 말라고 연락을 해서 참사를 막았지요.
안타깝게도 해당 역무원은 당시 사고로 순직하셨다고 하네요.
저희 아버지도 이리역 앞에서 서점 운영하셨는데 건물무너지고 기어서 나오셨다고 하더라구요 살던집도 다무너져서 현재 이리남성고등학교 있는곳에서 거의 반념넘게 천막촌에생활하셨다고하고 어머니는 폭발사고나고 4일뒤에 저희누나 출산하셨다고 하셨는데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다 하시더군요..
바로 앞이면 제일서점이거나 대한통운 가나서점이겠네요....
진짜 가까운데...살아서 다행입니다...
😊😊😊😊😊😊😊😊😊😊
헉 고향이 익산입니다. 익산의 아픈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ㅠ
안녕하세요. 선플달기 활동중인 중학생입니다.
장성규님이 이야기에 대해서 아주 실감나게 얘기해 주시니 더 몰입감도 올라가고 보기 좋습니다.
이 사건은 진짜 깜짝놀랐는데... 여기 나온 대구지하철참사 다음으로 제일 끔찍한 기차사건... 다시는 이런 기차 사고로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저희 어머니도 이 폭발사고로 인해 왼쪽팔에 큰 화상 자국이 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때 저는 1살 갓난 아이였죠 임피에서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잠들었다는 부모님 얘기를 들었고 사진을 보고
눈을 의심할수밖에 없었죠 그 이후로 역주변 집장촌이
전부 정리가 되고 모현동에 최초로 아파트가 지어지죠 모현 아파트
화약 수송원이 그 안에서 불을 피웠다는 말도 안되는 인재
그 화약 회사가 한화 아닌가요?에휴 그 때 희생 되신분들 너무 허망한
인재로 돌아 가셨다는 참 전라북도 익산의 아픈 기억중의 한편이죠...
한명의 잘못된 판단과 지능으로 인한 많은 사망자와 사상자를내고.. 너무 슬프네요 진해없이 사라져버린 사람들…
또 다른 지역의 열차 피해가 이리분들의 수준높은 시민의식으로 잘 수습되는 훈훈한 마무리가 아름답습니다. 40년이 지난 오늘날 많이 반성해야할거 같습니다. 미개하고 덜떨어진 정치인들..그보다 그들을 무턱대고 지지하는 분별없는분들의 사회참여가 시들해지기를 진심 바랍니다.
맞습니다 이재명 지지하는 것들이 그렇죠..
왜 이나라는 정치하는 사람들로인해 서로 물고 뜯고 편가르고 이렇게 한다는게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미친
저 때 돌아가신 희생자분들 명복을 빕니다
이 사태의 발단은 화약류를 실은 열차라 우선순위로 통과 시켜야 했음에도 뇌물을 안 준다고 통과를 안 시킨거지.
우연히 인터넷 검색으로 익산을 쳐보니 이리역 폭발 사고라고 딱 뜨더라구요… 익산에서 태어나고 검색에 흥미가 있었던 저는 딱 그때 알았었었어요. 익산역이 원래 1995년 이전에는 이리역이였다고 깨달았습니다. 지금 중3이 되어가는데 가끔 익산역을 들릴 때 이리역에 관한 것들이 붙혀져있어서 한번씩 이제 1981년에 다른 시민들을 도와준 전 이리시민들에게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어요. 익산 사람으로서 겪어본 적은 없지만, 기억하는 사건입니다.
한화가 이름을 바꾸게 된 또다른 이유...
윤석열=조선고종한의사=검사
윤석열한의사검사 >>>>>>>>>>>>>>>>> >>>>>>>>>>>>>>>>>>>>>>>>>>>>>>>>> 이재명약사변호사
윤석열=임금 >>>> 이재명=신하
한의사=검사 >>>> 약사=변호사
@@김동규-r7d여 와서 왜이라노?
친정이 익산이여서 이리역 폭발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얼핏 들어본적은 있었는데 영상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되었네요.
좋은 영상 감사드립니다.
온전한 시신을 놓고 우는 사람이 부러웠다니... 너무 슬프다
익산 사는데 이리역 사고에 대해 자세히 알게되어서 좋네요ㅎㅎ
그때 제 주위에 잘 아는 언니가 서울로 휴가 차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그 시간에 기차표 티켓팅 하다가 그때는 서울 가는 것도 쉽지 않아서 간 김에 서울 구경하러 돌아서서 서울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그 시간에 기차가 폭파됐어요 전국이 이 방송으로 난리가 났는데 이를 본 국민 중에 서울 간 언니의 직장 근무지 담당 수녀님께서 그 소식을 듣고 시신이 안치 됐다는 전국의 모든 병원을 우시면서 뒤지고 다녀도 시신이 없어서 우시면서 기도만 하고 계셨는데 며칠 후 직장으로 돌아온 이 언니를 보고 그 수녀님은 기절하고 말았지요 얼마나 놀라고 반갑고 그 뒤에 이 언니는 사태를 알고 너무나 많은 주위사람들에게 폐를 끼쳤음을 죄송해 하고 고마워하며 ..... 지금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세우신 사랑의 선교회에서 봉사하며 수도자의 삶을 살고 계십니다
이거 비하인드있음. 원래 저런 폭발물은 역정차 없이 다이렉트로 목적지로 가야함. 근데 당시 철도역에서 뇌물(급행료) 받아먹으려고 강제로 40시간 저 역에 정차시킴. 그리고 그 와중에 관리자 삽질로 폭발한거고. 진짜 온갖 악습의 하모니
정말 세상은 진짜 소잃고 외양간 고치듯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바뀌는건가요?😢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도 하면 다행입니다 현실은 고치는 시늉만 하죠
뭘고쳐야되는데 ㅋㅋㅋ 이것도 정부탓이냐...
이건 또 처음보는 사건이네요..
익산에서 대학교 다니는 대학생입니다.어제도 익산역에서 기차타고 본가에 도착했는데 이런 사건이 있었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근데 이게 대기업이 사고에 가장 책임있게 대한 사례중에 하나임.. 꼬리짜르기안하고 빠르게 사과하고 그때 당시 어마어마한 보상을 함 그래서 사장이 욕 덜먹는거고
피해자들이랑 소송으로 피튀기면서 어떻게든 보상안하려는 대기업들 지금도 널렸고 저때 시대에 돈만먹였으면 뉴스에도 얼마안나왔을거임
지금이야 코레일이 됐지만 저 당시 역무원과 역 직원들 무정차 열차 세워서 뇌물 많이 받아쳐 먹었죠 뇌물 안줘서 못지나간 열차 운전수는 열받아서 거기서 양초켜놓고 잠든거죠 화약들 더미 안에서
운전수가 아니라 호송원
내가 이리에서 태어났는데 이것만 보면 심장이 뛰어요... 13년에 태어났지만 이리가 옛날에 저렇게 기차가 폭팔헤서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하고 돌아가신것만 생각하면 심장이 뛰네요...
저희 할머니댁은 익산역에서 도보로 30분정도 떨어진 거리인데도 유리창이 깨졌다고 하셨으니... 엄청 큰 폭발이었네요
'도움은 도움을 낳는다' 기억하겠습니다.
달리님 구독자 딱 100만명이네요 우와
두개골 함몰인데 머리를 내어주다니...😭😭
초딩 4학년 때 벌어졌던 일인데, 당시에 신문과 TV에서 한 달 정도는 아주 난리를 쳤을 만큼 엄청난 사건이었지. 이리라는 지명이 사라지고 익산으로 바뀐 것도 순전히 이 사고 때문이었음. 이리란 말만 들으면 사람들이 "아, 이리역 폭발사고의 그 이리?" 이렇게 되물을 정도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씌워져 아예 지명을 익산으로 바꾸게 되었을 정도.
거짓말도 유창하지못하게하시네....익산은 삼국시대부터있었으나, 이리는 일제강점기때 곡물수탈정책으로 세워진 도시요. 즉 일본애들이 이리라는 명칭을 만들었다는거죠. 원래 이리는 옥야 (=기름진 땅)이라는 뜻을지닌 이름이있었고 솜리라고도했죠. 이리, 익산통합할때 고유한 이름되찾기 일환으로 익산으로하자고 압도적으로 투표결과가 나와서 익산으로 정한거고, 익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뀐것은 이리역폭발사고때문이 절대로 아닙니다.
익산으로 바뀐건 이리시 하고 익산군하고 통합하면서 익산으로 했죠.
보통 군하고 시하고 통합을 하면 시의 지명을 따르는데 이곳은 이리역 사건도 있지만 당시 이리시에는 전국에서 알아줄만큼 깡패.살인사건.등등 안좋은 이미지가 엄청났죠.
그래서 익산시로 지명이 통합된것입니다.
이리 익산 통합은 93년인가 94년입니다. 깡패도 깡패지만 이리에서 익산시로 바뀐건 익산군이 빚 많은 이리시 지원 조건으로 해서 바뀌엇을거에요
이 사고 뒤로 없어졌는데
당시 검수원들 뒷 돈.......
돈 안주면 절대 열차 통과 안시킨다
러는 심보로 술먹고 해당 열차에서
촛불키고 잠 들어서 이사단이 났죠...
그리고
그 화약회사
지금의 한국화약 한화입니다
아.... 그 당시 90억이면 엄청 큰돈이라 망했나 했는데 그래도 재건했나보네요. 한국화약이란건 알았는데 한화인줄은 몰랐어요...그래서 여의도 불꽃놀이를 글케 성대하게 할 수 있나보네요😂
한화라는기업명이 한국화약의 줄임말 아닌가요?
@@youngnam944맞아요
검수원이 아니라 배차 직원 아닌가요..? 꼬꼬무 영상에서도 검수원이 아닌 별도 직원으로 언급하는 것 같던데...
불끄고자 달려가서 사망하신 검수원 유족분들도 보실텐데 반복해서 '검수원'이란 동일 단어, 동일 댓글 작성하시는 건 좀 그런 같아요.
전주 사는데 부모님이 이리 이리 하실때 대체 거기가 어디일까 했는데 익산이었군요. 이리역 폭발사고도 언뜻 듣기는 했지만 내용은 몰랐는데 엄청난 사고였단걸 알게 되었네요 기억하겠습니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빌고 또 빕니다 모든분들의 아픔이 조금은 나아지길 기도하겠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사고를 당했다는게 너무 슬프고 목이 메이네요
당시 천막촌에서 사셨다는 어머니 말씀을 들었네요. 천막촌은 지금 남성고 자리, 남성고는 남성맨션 자리, 남성여고는 서초등학교 자리, 이리상소는 제일고라고 들으면서 많이 근50년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구나, 익산 역사가 이렇구나 생각하게 되네요.
화약물운송법에 따라 무정차 통과해야할 열차가 이리역에 서야 했던것에 대해선 이야기가 안나왔네요. 당시에 관행적 통행료 징수때문에 이리역에 정차한것도 있는데....
본방에 나옴
이리역폭발사고에 대해 다루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꼬꼬무 볼때마다 나라는 필요없으면 버리고 쓸모있으면 쓰고 사람대 사람이면 그럴수 있다 치는데 나라가 그러면 안되지,... 하
오와 익산역 열차폭발사고라니.. 저희엄마가75년생인데 77년에 익산역이 이리역이었어요? 오마이걸 유아도 나오네요 심야괴담처럼 살짝오싹하면서 재밌는 얘기하는데 그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니 근데 가수공연과 월드컵을 TV로 보느라 거리엔 텅비었고 3:36 개깜놀했네요..시내도흔들리고 전쟁난줄 알갰네요 나훈기자가 그때겪었던 일을 회상하는데 5:42기차바퀴가 왜거갔어요? 이리역 주변은 완전페허되고 건물무너지고 난리났네요 공연도중 폭파가 일어나 가수도수술하고 사망자도 생기다니 거기다 수남은 남편을 잃은거에요? 멀리떨어진곳도 페허되고 무너지다니..어떻게 저런일이 일어나요?11:46 다이너마이트가 기차에 있었다니 그래서 폭파한거에요? 신씨가 범인이었다니 술김에 기차에서 촛불키고 잤는데 그사이불나서 터진거였네요 어휴 기차는왜탔고 거기다 불붙이면 어떡해요..
옛날에 이주일 살아 있을 때 이리역 사고 얘기 많이 했었지...
한국에서 1400명에서 사상자가 발생한 최악의 열차 폭발 사고 이런거를 보니 진짜 덜덜했어요 ㅠㅠㅠㅠ. 3:36진짜 놀랐어요 저도 ㅠㅠㅠ
어... 죄송한데 1400명의 사상자가 아니라 부상자 아닌가요?
@@youngakim1650 맞아요
@@youngakim1650 사망자와 부상자를 합쳐서 사상자라고 해요~
화약사장 대단하네그당시 90억 후덜덜...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5,000억 정도 된다고 하네요
저 당시의 90억원은 요즘 가치로는 5000억원 이상입니다
사장이 아니라 회장 사장은 벌금 20만원 받은사람
한화..
대통령이 박정희인데 안냈으면 남산행임
대구 사람이라가 잘 몰랐는데, 오늘에서야 이 사건을 알게 됐네예...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 사건이나 대구 지하철 참사(참사라 쓰고 테러라 읽는다)보다도 더 참혹하네요
개인적으로 마지막에 이리 복구를 위해 기부한 많은 사람들이나, 그 후에 81년도에 있었다던 경산 열차 추돌 사고에 있었던데 앞장서서 도운 이리 사람들도 감동이었네요
요즘 정치판 때문에 지역 감정도 가면 갈수록 더 악화되어서 안타까운 사고에도 욕하고 잘됐다는 댓글들이 많이 보는데 이렇게 따스하던 사람들이 많았던 옛날 시절이 부럽습니다
그때 저희 할아버지가 철물점을 하셨었는데 저 사건때문에 집집마다 창문이 다깨져서 창문 장사가 엄청 잘됬다고 말씀하시긴햇슴
저희 장인어른이 근처 사시다가 이 사고로 평생 장애를 얻고 일가족을 잃으셨었습니다 장인어른의 병수발로 저를 비롯해 아내도 처고모님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엊그제 운명하시고 오늘 발인이네요 장인 어른 다음 생애는 꼭 이런 재해 피해도 안겪으시고 건강한 몸으로 손주들도 번쩍 안아들 수 있는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십쇼 ㅜㅠ
좋은곳으로 가셨기를 바라겠습니다
헉..엄청난 사건이였었네요😱😱😱😱
이 사건이랑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사고도 충격적이었음,,
무면허 마약 취급 음주로 실수 폭파 처벌이 징역 10년이니
음주운전 처벌이 가벼운 것도 이해가 되네요.
전에 어느 방송에서 이 사고 본적 있었는데.. 나는 이런 대형 사고를 방송에서나 알고 살았네.. 사망, 부상자들.. 그 가족들.. 너무 힘들었을것 같아요..
빠진 내용이 있네요
원래 화약열차는 이리역을 무정차로 지나가야 했는데, 철도 직원이 뇌물을 주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는다 하여, 실랑이 하다 홧김에 술 먹고 이런 사태가 벌어진겁니다
정답입니다
위험물 수송열차는 목적지까지 무정차운행이 원칙이나 돈 안주면 세웠죠
검수원들 뒷 돈......
돈 안주면 절대 열차 통과 안시킨다
심보로 술먹고 해당 열차에서
촛불키고 잠들어서 이사단이 났죠...
북쪽이여도 역시 라도다 이건가 ㅋㅋ
이런건 왜 말안하나요?
검수원 미화하네...
본방에서 얘기했습니다.
역에서 멀리 살았는데 우리집도 창문날라가고 문지방날라가고
역근처 모현동 사창가였는데 다날라가서 거기서 있던분들 피해많이 봤을듯...
그때 열차타러간 누나 찾아본다고 나가봤는데 시내가 온통 유리파편으로 난리도 아녔던
청춘을 돌려다오~
열차사고 하니까 생각나는 안타까운 큰 재난사건이 또 있죠 부산 구포역 참사도 꼬꼬무에서 다뤄주면 좋을것 같아요
과거 1917년에 핼리팩스 폭발 사고가 있었는데
그 사고도 이리역 폭발사고와 마찬가지로 안전불감증이 가져온 사고였지요.
그 때는 핼리팩스 항구에 있던 탄약운반선이 폭발한 것이었는데
그 사고로 항구와 시가지가 완전히 날아가버리고
2000명이 즉사하고 700명 정도가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하는게 아니라 타인을 불행하게 한다는말 많이 공감간다
지금은 없어진 당시 이리대대에서 하사로 복무하셨던 분 예기로는 이리역 서쪽이 평지가 되었다고......😱
53세 남편이 당시 이리역 근처에 살았는데 이리열차사고에 어릴때 자다가 기와장이 머리위로 떨어졌는데 자기는 다치지도 안았다고 머리단단하다고 웃으면서 얘기했는데 자세한 내막을 몰라 그냥 웃고지나갔는데 웃을일이 아니었네요 그 사고난 우리시댁집이 이리역에서 걸어서 10분도 안걸렸는데 ㅠㅠ
지금익산역을보면 예전이리역 폭발사고는 과거에폭발사고가 있었다로만 기록되어있는데 이게생각보다 대참사였네요...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그 당시에는 국민학교였음) 이리역에서 만경강 넘어가면 있던 마을 백구정 이라는 곳에 몇 년 살았었는데 그 마을에 오랫동안 사시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폭발음이 들리길래 밖으로 달려나가 봤더니 커다란 불꽃이 터지고 있었고 잠시 후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팔다리가 날아왔다고 하시면서 너무 무서웠다고 하시더라구요
여기가 내가 사는 곳이 맞나?이런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다니 무섭다
요약본이라 많이 빠진것도있는데
화약류운송차량,대통령탑승차량은 최우선 순위임
지금으로치면 KTX-청룡이여도 중간역에 강제정차시킨후 화약 및 대통령탑승차량이 추월해서 지나가야되는데
당시 이리역에 한 역무원이 강제정차 시켰다고함
목적은 돈, 여길 통과하려면 자기가 원하는 액수만큼 돈을 내놔라
안그러면 하룻동안 정차시킨다가 만연하던 시기...
운송사는 화약류가 있으니 빠른통과가 필요해서 돈을 쥐어주었지만
뇌물받은 이리역의 한 직원이 마음에 안들어서 못지나간다고 하는바람에 참사가 벌어진거라고함
그 직원은 폭팔로 죽었다고 들은
이후 저 사건이후로
정부차원에서 화약류를 운송하는 차량은 목적지까지 정차못하게하고
뇌물을 받는걸 아예 못받게끔 바꿨다고함
이주일님 아니였으면 하춘화님 지금까지 살아 계시지 않았을듯... 자기도 큰 부상 입었는데 피 흘리면서 하춘화님 업고 달리다니ㅠㅜ
이리역 폭발사고는 현재까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당시 익산과 접했던 지역이였던 군산 김제 전주 완주에서도 폭발로 인한 진동이 감지되었다죠...
저희 아버지가 이리역에서 10년간 근무하시고 폭팔사고 나시기 10달전에 그만두셨습니다 그때 동료들이 미쳤다고 하고 집에서는 할아버지가 같은 밥상에서 밥도 먹지 못하게 하셨다가 폭발사고 접하시고 같이 밥을 먹을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지가 나가라고 조만간 사고난다고 하셨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고 동료들은 그대로 폭사 했습니다.
익산 사는데 전에 익산역 폭발했었다는 거 듣고 진짜 놀람… 지금은 익산역 너무 멀쩡해서…
지금 제가 다니는 학교도 저때 폭발로 박살나고 다시 지었다고 해요
한화가 이때 모든 피해를 보상하고 김승연회장의 구도 가 이루어진계기
당시 초등학생이시던 엄마께서 옛날의 이리.지금의 익산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서 사셨는데 그곳에서도 집이 흔들리셨다고 합니다;;시간이 엄청 지났는데도 지금도 그만큼 익산에서는 유명한사건.우리엄마는 환갑이심.
안녕하세요 고등학생 2학년 학생입니다
통합사회시간에서 선플달기운동을 하고있습니다
꼬꼬무라는 프로그램이 생겨서 몰랐던 역사를 알고갑니다
그래도 회사가 양심은 있어서 다행이네요..
와 다이너마이트 천지에서 불을 켜놓고 싶나...ㅋ 강심장이라면 강심장이네
내가 77년 11월 11일 익산에서 태어났지
이리 옆에 함열 저때 대단한 일이였는데
익산 지역이 원래 함열 함라 낭산 쪽으로 석제 석산들이 많아서
다이나마이트사용처가 전라북도쪽일거라고 생각 했는데
이런 내용으로 전말을 알게 됐네 ....
기차 바퀴 300kg 짜리가 1km를??? 우와 엄청난 사고였구나.
장도연 앞에 누구인가요??
한명의 실수로 이렇게 큰 사고가 난게 너무 화나고 ,,,, 술먹고 다이너마이트 많은데서 촛불키고 잤다는것도 진짜 충격적이고,,, ㅡㅡ
익산에 이런 사고 있는지도 몰랐네 익산 사는데 ㅠㅠ 너무 슬프네 ㅠ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제가 아는 익산사시는 형님이 초등학교 시절에 사고 났는데 여기저기 시체도 많았고 주변건물은 다폐허됐고 열차 바퀴가 시청에까지 날아갔다고 했어요 대략 3키로 이상 된다고 하시더라구요 현 이편한자리 모현아파트 생기기 전에 거기에 시체를 많이 모셔놨다고 했고 100명 그 이상은 사망했다고 하시더라구요
외가 친척들도 익산이 고향인데 사고 난 곳 반경 20키로인
시골에서도 지진 난 것처럼 진동이 느껴졌다고 하셨죠. 지붕 기와가 떨어졌다고
그 사고로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섰고(5층짜리 모현아파트)
어릴때 할머니 모시고 부모님과 같이 살았었죠. 지금은 e편한세상으로 재개발 되었고
덕분에 익산역 철도길 옆의 서초등학교 졸업
이 사고땜에
이리라는 이름을 버리고 익산이 되었다는 애기가 있죠.
보통 주변군과 시를 합병하여 도농복합시 만들때
시의 이름을 계속쓰는 경유가 많은데,
군의 이름이었던 익산을 사용하였다고 하더라구요.
저희아빠의 고향이익산이라서 물어봤는데 그때 난리도아니였다고함 그때아빠가 국민학교 그니깐지금으로따지면 초등학생시절인데 정확한건아닌데 아주미미하게 기억나신다고하심
구포 열차 사건도 해주세요.
사망자가 56명으로 아주 큰사건 이였는데. 93년 이였나.
부산 구포역 열차 전복 사고는 사망자가 78명이고 부상자가 198명이었습니다. 사고 원인은 삼성종합물산과 한국전력공사의 무허가 발파 작업이었습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다음으로 사망자가 많았던 두번째 철도 사고였습니다.
1993년3월 28일의 일입니다
@@염정아-x4s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