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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일본군에 대해 우세하게 싸운 것은 전쟁 개시 후 불과 3개월의 한산도 해전까지였고, 그 후 이순신은 7년간 모두 패전을 이어갔다. 이순신은 무서워 전쟁 명령을 무시했기 때문에 백의병으로 강등됐다. 원균의 사망으로 사령관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그 직후의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에는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도피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도망쳤다. 그 후 순천해전 등에서도 이순신은 패퇴하고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에 의해 쏘여 죽였다. 이상이 조선왕조실록이나 이순신의 일기에 의한 진실이다.
3월 9일 [양력 4월 6일]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 바 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 바 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 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女眞)과 잤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 번 관계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 번 관계했다. 여진(女眞)이 아파 울었다. 2월 12일 [양력 3월 10일] 맑다.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들은 하루 종일 같이 놀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3월 5일 [양력 4월 2일] 맑 다가 구름이 끼었다.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 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 해, 면, 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 한대(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 네 명과 잤다.
3월 9일 [양력 4월 6일]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 바 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 바 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 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女眞)과 잤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 번 관계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 번 관계했다. 여진(女眞)이 아파 울었다. 2월 12일 [양력 3월 10일] 맑다.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들은 하루 종일 같이 놀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3월 5일 [양력 4월 2일] 맑 다가 구름이 끼었다.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 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 해, 면, 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 한대(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 네 명과 잤다.
이순신이 일본군에 대해 우세하게 싸운 것은 전쟁 개시 후 불과 3개월의 한산도 해전까지였고, 그 후 이순신은 7년간 모두 패전을 이어갔다. 이순신은 무서워 전쟁 명령을 무시했기 때문에 백의병으로 강등됐다. 원균의 사망으로 사령관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그 직후의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에는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도피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도망쳤다. 그 후 순천해전 등에서도 이순신은 패퇴하고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에 의해 쏘여 죽였다. 이상이 조선왕조실록이나 이순신의 일기에 의한 진실이다.
영화를 먼저 보고, 평론가님 영상을 보게 되어서 다시금 영화를 봤습니다. 나이 들어서 N차 관람이란걸 해본 적이 없는데 다시 보니,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감독님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평론가님이 언급하신 장면과 상황이 더욱 영화를 집중할 수 있게 되었어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새삼 느껴지는 영화 였습니다. 영상 감사합니다. 참고로 책도 구입했습니다. 이해하기 조금 어려울 것 같은데요. 그래도 잘 해석하면서 읽어볼께요.
전장에서의 장수이자 지휘관이니 날씨에 대한 정보가 굉장히 중요할 겁니다. 고대 전투에서도 기후나 날씨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으니 이순신 장군도 그거에 매우 민감했을 거고 그걸 염두해서 일기에 기록한 건 아닐까 추측합니다. 게다가 전장이 바다니 오죽했겠습니까.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 3월 9일 [양력 4월 6일]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 바 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 바 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 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女眞)과 잤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 번 관계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 번 관계했다. 여진(女眞)이 아파 울었다. 2월 12일 [양력 3월 10일] 맑다.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들은 하루 종일 같이 놀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3월 5일 [양력 4월 2일] 맑 다가 구름이 끼었다.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 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 해, 면, 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 한대(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 네 명과 잤다.
@@sazavytube “조선시대는 노예제사회” △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 취임한 제임스 팔레 미국의 대표적 한국사 연구자인 워싱턴대 명예교수 제임스 팔레(68)가 지난 27일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대원군과 유형원에 대한 방대한 연구서로 미국의 한국학계와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미국 주요 명문대학에서 한국학을 강의하며 제자들을 길러 “이른바 ‘팔레 마피아’라 불릴 정도로 독특한 학풍과 인맥을 구축”했다. 1960년 한국사 프로그램이 막 생겨난 하버드대의 박사과정에 진학한 팔레 교수는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승정원 일기〉, 〈일성록〉 등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규장각 바닥에 그냥 놓여 있던” 한국에서 자료를 찾으며 연구활동을 벌였다. 미국에 돌아가 노포크주립대학, 메인대학, 워싱턴대학 등에서 한국학을 가르친 그는 자신의 제자였던 브루스 커밍스와 함께 1980년대 초반 한국의 군사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하고, ‘아시아 워치’가 펴낸 〈한국의 인권〉이라는 보고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40여년 가까운 팔레 교수의 한국사 연구는 ‘관료제적 군주제’, ‘양반귀족제’와 ‘노예제사회’, ‘조선왕조사의 역사적 전망 및 동아시아사와의 비교사적 관점’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그는 “변화보다는 지속성을 강조하고, 자본주의 맹아론을 부인하는 등의 이유”로 국내 사학계에서 ‘정체론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특히 조선사회가 ‘노예제사회’였다는 그의 주장은 삼국시대 또는 통일신라 이후 시기를 ‘봉건제’나 ‘중세’로 규정한 남북한의 주류 역사인식과 정면으로 부딪친다. 팔레 교수는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고, 스탈린의 경제발전 5단계설을 따르지도 않는다”며, “전체 인구에서 노비의 비중이 30%를 훨씬 넘은 18세기 중반까지 한국이 노예제사회였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전쟁 전 미국 남부는 노예제사회였지만, 자본주의 질서에 속해 있던 것도 사실”이라며, “미국과 달리 한국의 학자들과 대중은 노비문제를 등한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한국사회의 내재적 발전론에 회의적인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를 보인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팔레 교수는 “서구 봉건제의 틀에 조선사회 분석을 끼워 맞추는 게 오히려 오리엔탈리즘”이라며 “조선시대에 분명한 발전이 있었지만, 진정한 자본주의는 없었다”고 반박했다. “도덕과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조선시대의 꼬장꼬장한 선비”를 닮은 팔레 교수는 2004년까지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으로 일하며 다양한 학제간연구를 진행시킬 계획이다.
난중일기는 말 그대로 일기이고 애초에 흥미로우라고 쓴게 아니라 소설이나 안네의 일기 같은것을 기대하고 읽으면 안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그 당시의 시대를 엿보는것 같은 느낌이 들어 흥미롭게 읽었네요. 그중 가장 재밌던 부분 몇가지를 꼽자면 -명령해전: 정말 독보적인 영웅담을 본인에게 직접 듣는 느낌이니 말 다했죠. -권율, 곽재우 같은 인물들의 이름에 언급될때 좀 반갑더라구요, 영화 까메오 보는 느낌? -한번은 우리 나라(조선)의 역사책을 읽고 한탄스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는 부분이 나오는데 과연 역사의 어느 사건을 읽고 그런 생각이 드셨던걸까요?…저 혼자 궁금해했던 적이 있네요. 여하튼 여정을 떠나시면서 사람들 만나는것도 그렇고 중간 중간 흥미로운 부분도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낸 과제때문에 휘릭 읽어본 느낌은... 으엄청!!! 꼼꼼한 사람이구나... 였습니다. 병장기 하나하나까지 체크하고 그러더군요.. 또 하나 3도 수군 통제사라면 지금의 해군참모총장인데... 하급무관이 점검해야할 일들을 일일이 챙기더군요 엄청나게 꼼꼼하고 세심하니까 무패의 신화가 생겨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이렇게 난중일기 리뷰를 보니... 천천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시.. 억지로 읽는 건 별로 건질게 없으.. ㅠㅠ
개인적으로는 난중일기를 이순신 장군의 주변 인물들이 어떤 마음으로 발견했고,사적인 비망록인데 어떤 마음으로 퍼트려서 널리 읽히려 했는지,즉 주변인들이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가졌는지 남아 있는 자들을 조명하는 이순신 없는 이순신 이야기도 극으로 나올 만한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 3월 9일 [양력 4월 6일]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 바 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 바 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 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女眞)과 잤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 번 관계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 번 관계했다. 여진(女眞)이 아파 울었다. 2월 12일 [양력 3월 10일] 맑다.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들은 하루 종일 같이 놀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3월 5일 [양력 4월 2일] 맑 다가 구름이 끼었다.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 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 해, 면, 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 한대(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 네 명과 잤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 3월 9일 [양력 4월 6일]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 바 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 바 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 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女眞)과 잤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 번 관계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 번 관계했다. 여진(女眞)이 아파 울었다. 2월 12일 [양력 3월 10일] 맑다.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들은 하루 종일 같이 놀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3월 5일 [양력 4월 2일] 맑 다가 구름이 끼었다.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 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 해, 면, 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 한대(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 네 명과 잤다.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그분이 직접 쓰신 글을 통해, 완벽한 인간이며 애국자이며 탁월한 군사전략가의 풍모를 접해보고자 하였으나, 난중일기 속의 이순신 장군은 우리 평범한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적 약점과 허약함을 모두 지닌 분이셔서 더 놀랐고, 그래서 더욱 인간미가 느껴졌다.
정장선 평택시장은 “원균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북방에서 뛰어난 무예로 솔선해 수많은 적들을 물리친 용맹한 장수로 명성을 얻었고 특히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의 많은 전투에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신 분”이라며 “평택시는 장군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후손에게 널리 알리고 계승하고자 지난 4월 교육홍보관을 건립해 운영 중에 있다. 원릉군 원균 장군 추모제향 행사를 준비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원유철 원주원씨대종회장은 “원균 장군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갖고 많은 분들이 제향에 참석해줘 감사하다”며 “역사적 필요에 의해 묻혀있던 원균 장군의 공을 널리 알려 후손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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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 bit.ly/3E1bCg5
[한산: 용의 출현] - bit.ly/3ThjfHH
이순신이 일본군에 대해 우세하게 싸운 것은 전쟁 개시 후 불과 3개월의 한산도 해전까지였고, 그 후 이순신은 7년간 모두 패전을 이어갔다. 이순신은 무서워 전쟁 명령을 무시했기 때문에 백의병으로 강등됐다. 원균의 사망으로 사령관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그 직후의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에는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도피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도망쳤다. 그 후 순천해전 등에서도 이순신은 패퇴하고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에 의해 쏘여 죽였다.
이상이 조선왕조실록이나 이순신의 일기에 의한 진실이다.
급박한 전쟁중이라 귀찮아서도 쓰기어려울일기를 꾸준히 썼다는것만도 생활습관을 엿볼수있는거고 고지식하게 쓴것도아니고 날씨포함 삶그대로를 표현했다는데 더 존경심이 생깁니다
전쟁을 하면서도 7년간이나 일기를 계속 써내려갔다는 그 자체가 멋있다 그 성실감을 배우고싶다
사람이 갑자기 일기를 쓴다는건 아주 이상한 일이고.
분명히 전쟁 이전에도 주욱 일기를 써 왔을것인데,
왜란 이전의 일기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davidjacobs8558 등용시험에 불합격을 이어 부끄러운 기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hiroono1한국말 하지도 못하는 외국인이 번역기로 어그로 끌고다니네
@@blue-d4g 한국어를 배울 가치는 없다. Google 번역으로 충분하다. 한국인은 한글의 특수성에 숨어 역사의 날조를 확대해 왔지만 앞으로는 그럴 수 없다. 자동 번역을 통해 외국인이 한국인의 거짓말을 항상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한국인은 알아야 한다.
@@hiroono1
임진왜란(일본측)
ua-cam.com/video/Lxc3Us0Lbbg/v-deo.htmlsi=6OMsGeqGDu1rzx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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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a-cam.com/video/Yi79ekE_Yp8/v-deo.html
ua-cam.com/video/KWMOdQVijj4/v-deo.html
원균을 재평가하자는 것 자체가 성웅에 대한 모독임
맞습니다. 재평가가 아니라 더평가를 해서, 더 짓밟아야 합니닷!
난중일기에서 가장 생각나는 부분은 어머니가 이순신 장군을 보러오다가 돌아가신 순간이죠.. 글만읽어도 눈물나더라구요
3월 9일 [양력 4월 6일]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
바 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
바 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 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女眞)과 잤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 번 관계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 번 관계했다. 여진(女眞)이 아파 울었다.
2월 12일 [양력 3월 10일]
맑다.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들은 하루 종일 같이 놀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3월 5일 [양력 4월 2일]
맑 다가 구름이 끼었다.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 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 해, 면, 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 한대(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 네 명과 잤다.
난중일기 보면 이순신장군의 감정을 조금 느낄수있어서 마음도무거워지고 감사한마음도들고 눈물남...
이순신장군님 존함만 들어도 가슴이 아리고 저릿하네요, 인간적으로나 장군으로서나 너무도 존경할만한 분입니다, 부디 마지막이 평안하셨기를...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가장 많이 본것, 망궐례를 했다, 날씨가 어떠어떠했다, 활쏘기 연습을 시켰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
그리고...원균 이 진짜로 x같다...
ㅋㅋㅋ
3월 9일 [양력 4월 6일]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
바 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
바 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 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女眞)과 잤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 번 관계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 번 관계했다. 여진(女眞)이 아파 울었다.
2월 12일 [양력 3월 10일]
맑다.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들은 하루 종일 같이 놀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3월 5일 [양력 4월 2일]
맑 다가 구름이 끼었다.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 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 해, 면, 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 한대(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 네 명과 잤다.
이순신이 일본군에 대해 우세하게 싸운 것은 전쟁 개시 후 불과 3개월의 한산도 해전까지였고, 그 후 이순신은 7년간 모두 패전을 이어갔다. 이순신은 무서워 전쟁 명령을 무시했기 때문에 백의병으로 강등됐다. 원균의 사망으로 사령관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그 직후의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에는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도피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도망쳤다. 그 후 순천해전 등에서도 이순신은 패퇴하고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에 의해 쏘여 죽였다.
이상이 조선왕조실록이나 이순신의 일기에 의한 진실이다.
ㅎㅎㅎ
날씨가 제일 많이적혀있다고하고 유일하게 원균 욕만 아주 적나라하게 썻답니다 ㅋㅋㅋㅋ 아예 원균이란이름 쓰지도않고 원이라고 쓴것도있다구합니다
이순신의 최대의 적은 이순신이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 많은데, 그 부분 볼 때마다 자아 성찰의 모범 답안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원균같은 기회주의자를 지금와서 재평가 하자는 사람들은 진짜 생각이 있나 싶다...
정치적 이야기는 별로지만
원균의 후손 원유철(국민의힘 윤석열대통령후보 상임고문 / 원주원씨대종회장)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원유철 전 미래한국당 의원에게 실형 확정.
원유철 전 대표 부인, 화천대유 고문으로 활동 중.
세상은 안 변합니다.
원유철 원주원씨대종회장은 “역사적 필요에 의해 묻혀있던 원균 장군의 공을 널리 알려 후손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
재평가해서 더 파묻어야죠. 아예 이름도 못 꺼내도록
재평가 해서 더 조져야지
배를 날려먹어서 명량같은 역사적 전투의 배경 제공
어머님에 대한 효심...괜시리 눈물이 나네...
이충무공은 임란을 막기위해 태아난 사람이다. 세계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람중에 일인이시다. 존경합니다.~~
이순신...중국의 전설적인 "순"임금을 본 받아 살아가길 원해서 이름이 이렇게 순신으로 지었던 중화사대주의자......를 존경하는 너는 중꿔인???
어디서 듣고 오신 거예요? 조선족 의심되는데@@HotSoil510
@@HotSoil510너는 인간은 맞냐? ㅅㅂ 일제 장교들도 존경한 게 이순신인데?
@@blue-d4g 뻥/국뽕은 정신건강에 해로움...순신은 중화사대주의를 상징하는 이름임.
순신으로 이름을 이순신 본인이 지었니 몽한놈.그리고 순임금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HotSoil510
원균 후손들 행동꼬라지 보면 원균은 어땠을지 ㅎㄷㄷ 이게 바로 핏줄의 힘인가
맞아요 저도 그 생각함 그 유전자에 그 유전자. 원유철만 봐도 뭐...
이순신의 후손들은 그의 이름에 먹칠이 되지 않기위해 나라를 위해 힘쓰다 대가 끊겨버린 안타까움 ㅜㅜ
원균의 자손 친인척들도 원균을 욕했답니다. 원균의 지척 중 임진왜란중 전과를 올린 분들도 계시지만 현재의 원씨는 누구 밑에서 싹싹 기죠?
그렇게 유전자 연좌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고려 원충갑, 원균 동생 원연, 독립운동가들도 있기 때문이죠.
영화를 먼저 보고, 평론가님 영상을 보게 되어서 다시금 영화를 봤습니다.
나이 들어서 N차 관람이란걸 해본 적이 없는데 다시 보니,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감독님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평론가님이 언급하신 장면과 상황이 더욱 영화를 집중할 수 있게 되었어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새삼 느껴지는 영화 였습니다.
영상 감사합니다.
참고로 책도 구입했습니다.
이해하기 조금 어려울 것 같은데요.
그래도 잘 해석하면서 읽어볼께요.
난중일기는 원문으로 읽는 것이 제일 힘들었는데, 잘 설명해 주셔서 다시 한 번 더 원문으로 도전을 자극받게 돕니다.!!!!
동진이형 항상 건강하세요.. 유익한 자료들 항상 감사합니다! 이동진 파이팅
난중일기..많이 들어봤는데 오늘도 언제나처럼 어김없이 정말 유익하고 흥미로운 영상 감사합니다 ㅎㅎ
이동진님 목소리만 들어도 맘이 편해지고 내용도 유익해서 정말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참 성실하고도 원칙주의자였구나 싶다 딱 그 자리에 맞는 인물 꿈속에서 여자가 나와서 뿌리쳐버렸다는거 너무 멋있다..
전장에서의 장수이자 지휘관이니 날씨에 대한 정보가 굉장히 중요할 겁니다. 고대 전투에서도 기후나 날씨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으니 이순신 장군도 그거에 매우 민감했을 거고 그걸 염두해서 일기에 기록한 건 아닐까 추측합니다. 게다가 전장이 바다니 오죽했겠습니까.
이순신 장군님의 일기에 나온 그대로 원균을 묘사해서 영상물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영상물을 대대손손 우리 후손들에게 잘 보존하여 전하고 싶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
3월 9일 [양력 4월 6일]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
바 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
바 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 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女眞)과 잤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 번 관계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 번 관계했다. 여진(女眞)이 아파 울었다.
2월 12일 [양력 3월 10일]
맑다.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들은 하루 종일 같이 놀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3월 5일 [양력 4월 2일]
맑 다가 구름이 끼었다.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 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 해, 면, 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 한대(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 네 명과 잤다.
@@HotSoil510 잘못 해석해 놓은 것을 그대로 믿는다니...허참.
@@sazavytube “조선시대는 노예제사회”
△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 취임한 제임스 팔레
미국의 대표적 한국사 연구자인 워싱턴대 명예교수 제임스 팔레(68)가 지난 27일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대원군과 유형원에 대한 방대한 연구서로 미국의 한국학계와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미국 주요 명문대학에서 한국학을 강의하며 제자들을 길러 “이른바 ‘팔레 마피아’라 불릴 정도로 독특한 학풍과 인맥을 구축”했다.
1960년 한국사 프로그램이 막 생겨난 하버드대의 박사과정에 진학한 팔레 교수는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승정원 일기〉, 〈일성록〉 등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규장각 바닥에 그냥 놓여 있던” 한국에서 자료를 찾으며 연구활동을 벌였다. 미국에 돌아가 노포크주립대학, 메인대학, 워싱턴대학 등에서 한국학을 가르친 그는 자신의 제자였던 브루스 커밍스와 함께 1980년대 초반 한국의 군사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하고, ‘아시아 워치’가 펴낸 〈한국의 인권〉이라는 보고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40여년 가까운 팔레 교수의 한국사 연구는 ‘관료제적 군주제’, ‘양반귀족제’와 ‘노예제사회’, ‘조선왕조사의 역사적 전망 및 동아시아사와의 비교사적 관점’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그는 “변화보다는 지속성을 강조하고, 자본주의 맹아론을 부인하는 등의 이유”로 국내 사학계에서 ‘정체론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특히 조선사회가 ‘노예제사회’였다는 그의 주장은 삼국시대 또는 통일신라 이후 시기를 ‘봉건제’나 ‘중세’로 규정한 남북한의 주류 역사인식과 정면으로 부딪친다. 팔레 교수는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고, 스탈린의 경제발전 5단계설을 따르지도 않는다”며, “전체 인구에서 노비의 비중이 30%를 훨씬 넘은 18세기 중반까지 한국이 노예제사회였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전쟁 전 미국 남부는 노예제사회였지만, 자본주의 질서에 속해 있던 것도 사실”이라며, “미국과 달리 한국의 학자들과 대중은 노비문제를 등한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한국사회의 내재적 발전론에 회의적인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를 보인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팔레 교수는 “서구 봉건제의 틀에 조선사회 분석을 끼워 맞추는 게 오히려 오리엔탈리즘”이라며 “조선시대에 분명한 발전이 있었지만, 진정한 자본주의는 없었다”고 반박했다. “도덕과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조선시대의 꼬장꼬장한 선비”를 닮은 팔레 교수는 2004년까지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으로 일하며 다양한 학제간연구를 진행시킬 계획이다.
아니 자지도못함? 뭐 이순신장군은 여자들하고 자지말란법있음? 내가 저당시 신분을 떠나서 이순신장군이라면 진짜 같이자고싶었을듯
한반도 역사상 올타임 GOAT
세종이랑 쌍두마차인듯
하늘이 지랄 같아서
신이 내려오지
.....
하 눈물난다 그의 삶 자체가 감동이다
난중일기는 말 그대로 일기이고 애초에 흥미로우라고 쓴게 아니라 소설이나 안네의 일기 같은것을 기대하고 읽으면 안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그 당시의 시대를 엿보는것 같은 느낌이 들어 흥미롭게 읽었네요.
그중 가장 재밌던 부분 몇가지를 꼽자면
-명령해전: 정말 독보적인 영웅담을 본인에게 직접 듣는 느낌이니 말 다했죠.
-권율, 곽재우 같은 인물들의 이름에 언급될때 좀 반갑더라구요, 영화 까메오 보는 느낌?
-한번은 우리 나라(조선)의 역사책을 읽고 한탄스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는 부분이 나오는데
과연 역사의 어느 사건을 읽고 그런 생각이 드셨던걸까요?…저 혼자 궁금해했던 적이 있네요.
여하튼 여정을 떠나시면서 사람들 만나는것도 그렇고 중간 중간 흥미로운 부분도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난중일기도 읽어봐야겠어요! 오늘도 교양 줍줍하고 갑니다 😊
영화에 맞춰 또 이렇게 많은 주제와 인물들을 다뤄주셔서 좋아요❤
학교에서 낸 과제때문에 휘릭 읽어본 느낌은...
으엄청!!! 꼼꼼한 사람이구나... 였습니다. 병장기 하나하나까지 체크하고 그러더군요..
또 하나 3도 수군 통제사라면 지금의 해군참모총장인데... 하급무관이 점검해야할 일들을 일일이 챙기더군요
엄청나게 꼼꼼하고 세심하니까 무패의 신화가 생겨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이렇게 난중일기 리뷰를 보니... 천천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시.. 억지로 읽는 건 별로 건질게 없으.. ㅠㅠ
긴 세월을 뛰어넘는 마음의 동함이 있는 얘기네요.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나옵니다
현대판 원균들이 여기저기 날 뛰고 있는 현실
감옥의 문을 나섰다 ㅠㅠ
일이 힘들어서 찡찡 대는 저를 반성합니다.
난중일기 전에 함경도 국경에 근무할때 함경도 일기도 적어서 남기셨죠....누가 시키지 않아도 작는걸 보면 얼마나 철저한 분이지 알려주는 사례 입니다
이순신장군 최고입니다
존경하는 장군님
이순신 장군님 짱짱❤
영화 노량 예고편만 봐도 마음이 무거워지게 하는 이순신 장군님ㅠㅠ
개인적으로는 난중일기를 이순신 장군의 주변 인물들이 어떤 마음으로 발견했고,사적인 비망록인데 어떤 마음으로 퍼트려서 널리 읽히려 했는지,즉 주변인들이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가졌는지 남아 있는 자들을 조명하는 이순신 없는 이순신 이야기도 극으로 나올 만한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쓴 일기에 자꾸 배탈이 나고 멀 먹으면 모두 올리고 위장병으로 계속 잠을 이루지 못하고 등등 극심한 스트레스에 격무가 계속되면서 몸상태가 엉망 이더라고 그러면서도 명량해전을 철저하게 준비하고..
난중일기 완역본은 노승석 교수가 독보적인 전문가. 내가 본 난중일기 중에 최고.
항상 이렇게 명징하게 직조해낸 좋은 설명들 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ㅜㅜ
이걸 무료로 들어도 되는 건지..
최고로존경하는위인!!!!
대한검국을 대한민국으로 지켜주십시오장군님ㅠ
시대를 초월한 최고의 위인.. 너무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그리고 압송되기 전과 압송된 이후의 기록이 달라질수밖에 없다는게 중론입니다....실제로 압송될때 난중일기도 뜯어서 갖고...이순신장군도 선조의 질투를 느끼고 그 뒤로는 무조건 천행이라던가 신성이 알려줬다는 식으로 서술이 바뀜
연필로 또박또박 쓴 것 같은 이 동진 평론가님의 설명에 감사합니다. 역시 성웅 이 순신 장군은 주저리 주저리 자기 공적을 떠들지 않고 태산 같았다는 말 깊이 공감합니다.
이순신 장군님 덕분에 초딩때 샘한테 많이 혼난거였군요 ㅋ
나의 최고의 영웅 장군님 얘길 들으면 이순간에도 눈물이납니다
편히쉬소서~
위인들중 최고로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님
원균 후손 국회의원이 원균 재평가해야된다고 재단인가 뭔가 설립한 거같던데..
와 이순신 장군님까지 해주시다니 너무 유익해요 ㅎㅎ
아쿠아맨 기념으로 아틀란티스도 다뤄주세요!
성웅 이순신 장군님은 솔직히 지금도 저평가됐다고 생각합니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
3월 9일 [양력 4월 6일]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
바 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
바 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 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女眞)과 잤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 번 관계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 번 관계했다. 여진(女眞)이 아파 울었다.
2월 12일 [양력 3월 10일]
맑다.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들은 하루 종일 같이 놀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3월 5일 [양력 4월 2일]
맑 다가 구름이 끼었다.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 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 해, 면, 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 한대(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 네 명과 잤다.
@@HotSoil510네 나라로 가라😊
@@hyshin6870 내나라는 자유 대한민국이지 잘살고있음. 너 나라는 조선왕국? 나라와 백성들이 왕 개인의 재산으로 취급했던 노예제사회 조선왕국이 너의 나라? ㅋㅋㅋ 후기조선 북조선 으로 너나 가라 ㅋㅋㅋ.
@@HotSoil510이 내용 거짓말이라고 판명난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런걸로 선동질하고 다니냐 ㅉㅉ
@@살인미소핑구 어디가 거짓말임???
영상 너무 잘봤습니다. 난중일기 많이 들어만 봤는데 꼭 읽어봐야겠네요. 그리고 빨간책방 종방할때 너무 아쉬웠는데 혹시 여건이 되신다면 종종 좋은 소설도 짧게라도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
3월 9일 [양력 4월 6일]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
바 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
바 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 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女眞)과 잤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 번 관계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 번 관계했다. 여진(女眞)이 아파 울었다.
2월 12일 [양력 3월 10일]
맑다.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들은 하루 종일 같이 놀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3월 5일 [양력 4월 2일]
맑 다가 구름이 끼었다.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 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 해, 면, 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 한대(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 네 명과 잤다.
@@HotSoil510 균이 후손이니?
@@얄릐요 너는 조선노비 후손???
손현주 배우님, 이 와중에 원균에 너무 잘 어울리심🤭
난중일기 읽어보고 싶어서 찾아보다 마침 이동진 선생님이 리뷰해주셨네요. 앗싸! 하면서 클릭했습니다. 우리나라 위인중에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 이순신 장군. 영상 감사합니다.
예지몽에 대한 부분은 이순신장군이 정말 신끼가 잇엇던 것이 아니라 굉장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노량 리뷰도 해주세요!!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이순신장군의 영화는 좀더 디테일하고 현실적으로 제작하였으면 하는 욕심이 너무 생기네요 ㅠㅠ
세계의 모든 장군들이 리더들이 보고 배워야 할 장군 이순신 장군
순신은 중국의 순임금을 따라서 배우라는 의미로 만든 이름임....이순신은 중화사대주의자임...민족의식 따위는 없는 사람.
공직자와 리더의 표본 이순신👍
반면 게으르고 멍청하고 낮술하는 원균을 보면 누구 생각이나네...
윤균..ㅋ
평론가님 같은 모범생도 일기를 몰아 써보신 적이 있군요! ㅋㅋㅋㅋㅋㅋㅋ
추천해주신 책도 챙겨보겠습니다. 😊
대단한 성웅이시다.
장군이 사랑한 아들 면은 왜군 선봉장 가토가 장군에게 가족을 잃은 고통을 주어 보복하려고 선발한 특공대를 장군 고향으로 보내 일어난 전투 와중에 전사 한 것이죠
생각해보면 난중일기는 듣기만 하고 읽을 생각을 안했네요...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난중일기가 조금 읽기 그러면 칼의 노래 강추합니다. 항상 힘들거나 실패한 일이 있을 때 읽던 김훈 작가의 소설인데 좋아요.
원균은 행실이 정말 쓰레기였구나..
한 때 미친 자들이 이순신 장군을 격하시키고 원균이라는 자의 공이 크다는 미친 소리를 해댄 시절도 있었죠. 그 때 그런 짓을 한 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슨 짓을 하는지........
이런 책의 리뷰가재밌고감동적일거하고
생각해본적이없어서 감동
교양이집사포레버!!!!
술 좋아해서 패악질을 한다는 부분에서 현 시대 누구가 떠오른다.
윤균
술은 좋아해도 패악질은 안함
@@poiuy6655 패악질의 정의가 별건가? 지 멋대로 행동하며 국가의 위신을 땅에 패대기치고, 국민의 삶에 여러 해악을 끼치면 그게 바로 패악질이지.
패악질맞다
요즘 중대장, 르노, 동탄경찰서 사태를 보면 패악질을 어느쪽이 더 부추기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이동진이 말하는 이순신? 일단 추천 댓글박고 감상합니다
3번째 보네요 늘 유익한 정보 얻습니다~
원균은 취사병이 딱맞는 사람입니다
영상에 소개된 책은 교감완역 난중일기입니다
이 책의 후속작 이 있습니다
원균 부관참시 마렵네
항상 건강하세요
05:19 1492년이 아니라 1592년 이네요.
하늘이 내린 명장
자막 중 '수훈'을 '훈장을 받음'으로 풀이했는데, '공훈을 세움'이 정확합니다.
일기에 날씨 적는 건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었네요 ㅋㅋ
이순신장군님이 원균을 원망하고 증오하는건 이해하지만
사실상 원균도 대단한 전략가이고 명가로서 여러 전투에서 좋은 성과를 냈는데 어느 시점부터 사람이 망가지기 시작함
그야말로 민족 전체를 어루살피는 거대한 태산과도 분
칠천량해전 당시에도. 만취해서 기생과 나타났다지 ㅋㅋㅋ지금하고 비슷
원균과 부끄러운 성렬이와 겹치는 모습이 나만에 생각인가!
공무를 보았다
원균은 진짜 추악한자
정말 종교가 되어도
즉 신이 되었어도
흠잡을 것이 앖다
원균 은 누구 같네
이수신이 아나고 이순신 임니다
난중일기의 첫날의 시작을 어떻게 시작하느냐 “1492년”으로 이야기 하시는데 1592년이죠,
칠천량해전만 생각하면 에효
겸손하시고 귀여우신 동진님 뽀에버!!!!
수요일에 노량 예약 했습니다
"노량" 보고 기립 박수 쳤습니다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그분이 직접 쓰신 글을 통해, 완벽한 인간이며 애국자이며 탁월한 군사전략가의 풍모를 접해보고자 하였으나, 난중일기 속의 이순신 장군은 우리 평범한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적 약점과 허약함을 모두 지닌 분이셔서 더 놀랐고, 그래서 더욱 인간미가 느껴졌다.
명량은 2.5점을 주셨는데 추천작으로 마지막에 꼽으시네요...?
파이아이카 보고 파퀴아오가 생각났었
그리고 학교 과제 때문에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긴 하지만... 기록한 사람이 승자가 아닐까? 그 생각이 들더군요
영화보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더 명작이다.
이정도면 예수와 부처의 삶과 비견되는 거 아닌가?
일본에서는 신으로 인정했어요 신한테 쳐발린게 그나마 정신건강에 좋다는 판단임
원균 후손 원희룡?
정장선 평택시장은 “원균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북방에서 뛰어난 무예로 솔선해 수많은 적들을 물리친 용맹한 장수로 명성을 얻었고 특히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의 많은 전투에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신 분”이라며 “평택시는 장군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후손에게 널리 알리고 계승하고자 지난 4월 교육홍보관을 건립해 운영 중에 있다. 원릉군 원균 장군 추모제향 행사를 준비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원유철 원주원씨대종회장은 “원균 장군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갖고 많은 분들이 제향에 참석해줘 감사하다”며 “역사적 필요에 의해 묻혀있던 원균 장군의 공을 널리 알려 후손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난중에 쓴 일기
5.18 이나 12.12 도 해주세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