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38도선 있던 남과북이였는데 북한의 남침으로 수백만명의 군인분들과 민간인분들 희생자가 발생했고 결국 다시 38도선으로 휴전국가가 된거였어요. 전쟁으로 통일을 꿈꾸기도 했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네요. 역전다방 애청자로서 계속 쭈욱...전쟁역사 진행해주세요... 일주일에 하루 한시간이지만 기다려 집니다~^^
참고로 송악산만 먹으면 개성 시내 제대로 지킬 수 있고 개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지형도 보시면 송악산보다 그 위의 천마산, 묘지산, 제석산 등이 더 규모가 크고 고도가 높아서 다시 감제당하기 때문에 여전히 매우 어렵습니다. 결국 이 산들도 확보해야 하고 임진북예성남정맥 대부분 얻어서 최소 황해도 금천까지는 전선을 올려야 남측에서 개성 안전히 방어하고 게 가능합니다. 개성이 북쪽은 산맥으로 막혀 있고 나머지 3면은 강과 바다로 격리된 구조라 북측에서는 방어하기 쉽지만 남측에서는 방어하기 매우 까다롭습니다
이 때문에 38선 분단 시절의 개성은 마치 서울 도심은 대한민국령이지만 북악산 정상부터 북한산, 도봉산 봉우리들이 전부 북한령인 것과 똑같은 구도입니다. 휴전협상 시절 북한이 휴전선을 다시 38선으로 그대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는데 이는 개성을 다시 포기하고 철수하지만 어차피 임진북예성남정맥이 그대로 북한 땅이라 대한민국이 개성을 개발하지 못하고 버려진 땅으로 둘 것이므로 전략적으로 손해가 별로 없었고 그 대신 중,동부에서 많은 영토와 여러 요충지들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고려의 수도이자 대도시인 개성을 새롭게 얻어서 전쟁에서 이겼다는 명분을 가졌고 인민들에게 전쟁에서 일방적으로 지지 않았다고 선전할 수 있었죠. 38선 이북의 중부,동부의 많은 영토들을 (연천, 철원평야, 설악산, 화천발전소, 펀치볼, 백암산 등) 상실했고 영토 면적도 기존 38선 때에 비해 약 3,300km^2 가량이나 감소함에도 불구하고요
@@gggg33333ee 공산측은 자신들이 점령하고 있었던 개성을 협상장소로 관철하는데 성공했는데 이 목적은 명확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쭉 시종일관 군사분계선을 38선으로 다시 돌리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개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큰 무기로 삼아 이를 우리에게 돌려주는 대신 더 많은 이득을 협상으로 받아내겠다는 거죠. 기존 38선에 비해 더 줄어든 현재의 영토 손실을 만회하고 개성을 도로 포기하지만 어차피 개성 북쪽의 임진북예성남정맥이 그대로 북한 땅이라 개성을 일방적으로 감제할 수 있어 도발하기 쉽고 결국 대한민국이 개성 방어가 불가능해 개발 못하고 버려진 땅으로 둘 것이 분명해서 저들에게는 포기해도 전략적으로 불리할 점이 적었습니다. 이는 멸악산맥이 모두 북한 땅인 연백평야와 옹진반도도 마찬가지였죠. 포기하고 도로 남측에게 돌려줘도 손해볼 점이 적었다는 것. 그 대신 유엔군에게 빼앗긴 38선 이북의 중부,동부의 많은 영토들을 (철원평야, 연천, 백암산, 펀치볼, 설악산, 파로호 등) 협상으로 가져와 냉큼 먹고 서울 공격을 훨씬 쉽게 할 수 있어 훨씬 유리해집니다
51년 5월 춘계공세를 막아내고 전세 일발역전의 대기회를 맞이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아예 몰아부쳐서 협상을 더 유리하게 가져갔어야 했는데 라는 큰 아쉬움이 듭니다. 너무 나이브하게 협상에 임했다보니 공산군의 아주 노련하고 정치적인 협상에 말려들며, 참으로 아까운 청춘의 희생이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신맥아더라인의 설정으로 후퇴했던 순간보다도 그것을 반면교사삼아 다시 몰아부칠수있었던 기회를 놓친것이 더욱 아쉬운 대목입니다.
미국은 대체로 군인과 정치인이 분리되어 있으나 공산권은 정치인이자 사상가이자 군인이다. 순진한 군인이 항일전과 내전과 내부 이념투쟁을 걸쳐 단련된 공산주의자를 상대하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러나 순진한 군인도 계속 정치나 외교 현장에 노출되면 노회한 외교전략가가 될수있다.
미국 어느 신문이 뽑은 역대 미군 최악의 장군 베스트 5를 뽑은적 있는데, 그 중에 멕아더가 들어있죠. 다른 4명은 진짜 군사적 무능이 이유였고, 멕아더는 군인으로는 능력 있었지만, 너무 정치적이였다는게 최악의 장군 베스트5에 뽑힌 이유.그게 미국. 그 미국 좋다면서, 따라하기는 커녕. 군사쿠테타 주범인 전두환 빨아대는 아이러니.
문산, 통일대교에서 북서쪽으로 임진북예성남정맥이 매우 크고 웅장하게 보입니다. 가장 남쪽에 좀 낮은 산이 송악산이고 송악산 북쪽으로 천마산, 묘지산, 제석산, 봉화산, 수룡산, 삼송산 등이 쭉 펼쳐져 있습니다. 특히 제일 높고 뾰족한 봉우리들이 있는 곳은 송악산이 아닌 천마산, 묘지산이랍니다 ㅋ
이승만 대통령과 백선엽 장군도 고려의 수도이자 도시인 개성의 전략적 중요성과 큰 상징성을 생각해 동부전선 좀 포기하더라도 (반면 중부전선은 절대 버리면 안됨) 개성은 어떻게든 찾아서 가져와야 한다고 적극 주장하고 노력을 했으나 결국 개성은 북한의 영토로 영구 굳어지게 되었죠
방송 안보고 글써요? 먼 이승만이 노력하긴 뭘해요. 협상 자체에서 배제당했는데, 백장군 스스로도 나 그냥 옵져버같다 했다잖아요. 전쟁 당사국 대통령이 협상에서 배제된다?? 이걸 해석하는게 그리 어려워요? 그냥 무능한거잖아요. 그것도 안되는 지능으로 먼 그리 나라걱정들을 하시는지원.
매년 6월이면 여러채널에서 호국보훈의 달 특집을 많이 방송했는데 제가 잘 몰랐을수도 있겠지만 올해는 별로 없는것 같아요. 우리가 어떻게 이 나라의 자유를 수호하고 순국선열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알려면 방송을 비롯하여 여러 수단으로 많이 알려야 합니다. 이 채널을 정규방송에 편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케이블에서 역전다방이 방송되더라구요. 그보다 정규방송에 6.25 한국전쟁 파트만 편집하여 시리즈로 방송해주시면 정말 좋겠습니다.
역전다방이 전쟁사를 천천히 자세히 상세하게 다뤄주니 몰랐던 여러 지식들도 새롭게 알게 되고 공부하는 맛도 나고 재밌는데 언제부턴가 도대체 언제까지 하냐, 빨리 끝내고 다른 전쟁사 다루자 이러시는 분들이 왜케 많나요 ㅜ 3년 1개월 동안 얼마나 많은 전투들과 여러 사항들이 잇었는데 더 자세히 더 깊게 다루진 못할 망정 대충 끝내라고 하는 사람들 참 ㅜ
그냥 당시 한국정부의 무능임. 전쟁 당사국이 협상테이블에서 배제된다? 이거 해석하는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냥 당시 이승만 정부가 미국한데 개무시 당한거임. 협상에 도움안되는 존재로 인식되서 오늘 방송보면 보고조차 차단했다고 하니. 우러 전쟁은 협상된다면 당연히 젤렌스키 우크대통령이 될꺼고. 러시아랑 누가 협상해요? 밥상은 미국이 차려주고 주역은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하겠죠. 우리가 전시작전권등 비정상이였던거.
개성 지형도를 보시면 개성 시내 북쪽으로 거대한 임진북예성남정맥이 송악산을 시작으로 천마산,묘지산,제석산을 이어 수룡산 및 삼송산까지 30km 이상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 산들이 일방적으로 개성 시내를 감제하기 때문에 38선으로 분단된 시절 남측은 개성을 방어하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개성 시내 남쪽의 진봉산은 송악산 및 이북의 산들에 비하면 낮은 구릉에 불과합니다. 38선 분단 시절의 개성은 서울로 비유하자면 서울 도심은 대한민국 땅이지만 북악산 정상부터 북한산, 도봉산 줄기들이 전부 북한령인 것과 비슷합니다
6.25 전쟁으로 미국은 자국 군인 연인원 약180~190만명 파병에, 유엔 15개국 중 영연방군(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의 무기, 피복, 부식등의 보급과 더불어 일부국가는 한국으로의 수송까지 전부 책임지며 이 전쟁을 지휘했고,(6.25 전쟁 당시 미국군은 유엔군의 핵심 중추로써 유엔 지상군의 50.3%, 해군 85.9%, 공군 93.4%를 차치할 정도로 절대적 이었음), 약 36000명의 전사자와 막대한 전비를 투입하며 대한민국을 방어하고 있었으니, 어찌보면 협상단을 선정함에 있어 당연히 자국 군인 위주로 할수 밖에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또 유엔군측 대표단이 공산군측 대표단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고 했는데, 실예로 정전 협정 당시 북한측 대표 남일이 미국측 대표 조이 제독에게 담배 한개피를 달라고 해서 조이제독이 한개피를 건네며 미국 담배맛이 어떠냐고? 남일에게 물었답니다. 그러자 남일이 "난 지금 미국을 태워버리고 있다." 라고 했던 말이 유명하듯 조이제독을 포함한 유엔측 대표들은 공산측 대표들 때문에 엄청난 골머리를 앓았다고 합니다.
개성을 휴전협상 장소로 굳히면 서부전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 어렵게 되고 결국 유엔군의 북진은 제한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사 원래 목표인 38선 원상복귀안을 관철시키지 못하게 되어도 즉, 현 전선으로 휴전선을 긋게 되어도 고려의 수도이자 도시인 개성을 북한 영토로 확보할 수 있게 되는 전략적인 이득이 생깁니다.
저 당시 구 소련에 핵무기가 없었다면 스탈린이 저런 배짱 부릴수 있었을까 미국만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만약이지만 미국도 2차 세계대전 그리고 일본과 태평양전쟁 끝난지 얼마 안된 시점이라 트루먼 자신도 다음 대선에서 재선을 위해서는 안전하게 나가야 되고 급한건 본인들 이라고 다 드러내놓고 협상을 하는데 협상이 제대로 될리가 없지 그러다 보니까 전쟁 전에는 개성 전체가 남한측 관리하에 있었는데 걸국 넘겨줘버렸고 철원지역도 마찬가지 협상력 부재로 인해서 공산측에 끌려가다가 한반도 지리적 특성상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두 지역 개성은 완전히 넘어갔고 철원지역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방어지역도 북한에 넘어가 버렸고 철원평야를 남한측이 가져왔다고 자화자찬하는 학자들이 아직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는 현실
1차대전 미 지상군의 실전 경험은 사실 경미한 수준에 불과, 맥아더-패튼-트루먼 등 당시 투입된 모든 미군 장교들 실전 경험은 지극 짧았던. 1차대전 미국의 대독일 선전포고 1917년에 했지만 + 대규모 징병과 훈련 등 대서양 건널 준비 과정이 필요했고 + 선발대는 1918년 초, 이후 축차로 대서양 건너 파병. 즉 투입된 미군이 본격 전투 참여 시작한 것은 독일 항복 전 몇 개월에 불과. 맥아더 1차대전 전 실전 경험 하기 힘들었고 + 1차대전 때 훈장을 받았지만 미 지상군 전체가 제대로 된 실전 경험 미약했으며 + 전간기 때는 아예 실전 경험 없었음. ---------------------------------> 아버지 후광으로 필리핀에서 총독 비스무리 위세를 떨쳤던 것이 태평양 전쟁 직전 맥아더 상황. ---------------------------------> 막상 태평양 전쟁 발발하고 일본군의 필리핀 침공 후 맥아더는 필리핀 탈출. 이 정도가 맥아더의 태평양전쟁 이전 전투 경력. 대한민국은 미국과 한국전쟁 특수 관계로 엮여서 냉철하게 맥아더를 보지 않았던 측면이 있습니다. 중공군 개입에 전혀 대비하지 않고 멍 때렸던 것은 치명적 + 명 때리다 중공군에 당한 다음에 핵폭??? -------------------------------> 게다가 중공군 개입은 예고 없이 갑자기 일어난 것 아니며, -------------------------------> 지속적으로 특정 조건, 즉 유엔군이 38선 넘어 북으로 진격할 경우 반드시 개입한다고 반복적으로 밝힌 상황에서, -------------------------------> 맥아더는 중공군에 대한 그 어떤 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중공군에 사전 대비만 철저히 했다면 충분히 격퇴할, -------------------------------> 군사적-경제적-과학기술 능력 모두를 갖추었기에 맥아더의 멍때림으로 치명적 후폭풍. -------------------------------> 수학에서 유효숫자 개념, 이미 소수점 아래 첫째 자리에서 오차 발생했다면 10째 100째 자리 정밀 계산은 할 필요도 없는 시간 낭비. -------------------------------> 중공의 개입 협박을 깡그리 무시하고 멍때린 자가 + 중공군에게 충격받고 핵폭 운운하다가 + 군통수권자에게 해임당했던 것. 맥아더를 해임한 미국 대통령과 정부의 판단이 더 합리적. 1949년 즉 한국전 발발 1년 전, 소련 최초 원폭 실험 성공. 즉 미국의 핵독점 이미 깨진 현실. 또한 중일전쟁 당시 일본은 만주 전체 + 북경-상해-남경 등 중국 핵심지역 점령 + 중국 해안선 사실상 거의 다 장악하고서도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 1949년 소련 핵무장 현실화 + 1949년 장개석이 대륙을 상실하고 대만으로 축출. 저런 조건에서 압록강 다리 다 부수고 + 중공군의 만주 보급기지 거점 서너 곳 폭격하면 승리 가능하겠습니까? ---------------------------------------------->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은 고작 1년 전 대륙 통일 완수하고 아직도 잔당 반군 소탕 와중에 한국전을 빌미로 ----------------------------------------------> 미국과 장개석이 다시 대륙 회복에 나설 가능성을 차단 차원에서라고 판단해야 합리적. ----------------------------------------------> 즉 중공 입장에선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한반도 전체가 미국 세력권으로 넘어가는 것 방치할 수 없었던 것. 그리고 영국 미국은 원래 상륙 작전은 기본입니다. 또한 상륙작전 설계 및 실행 주체는 명백히 해군. --------------------------------> 2차대전 북아프리카 횃불 상륙 + 시칠리 상륙 + 노르망디 상륙 + 남부 프랑스 엔빌 상륙, 1차대전 때 실패했지만 갈리폴리 등. --------------------------------> 영국은 지난 수 백년, 지구 차원에서 전쟁 수행했는데 그 모두는 기본적으로 상륙을 전제. 2차대전 미영 연합국이 벌인 상륙 작전의 주도 세력은 미영 해군력. --------------------------------> 미영의 지상군은 퍼날라지는 택배 배송품 수준의 수동적 역활이었으며, 실질적 상륙 작전 수행은 해군 + 압도적 공군의 엄호 한국전쟁 인천상륙 아닌 군산이건 어디건 일단 상륙만 하면 적에겐 치명타. ----------------------------------> 2차대전 노르망디 역시 반드시 거기여서 승리했던 것이 아니라, 어디건 상륙만 성공하면 독일군은 패배할 조건. ----------------------------------> 압도적 제공권으로 독일의 방어선 정보를 사실상 모두 획득했기에 독일이 A에 방어 집중하면 A 지역 피해 다른 B,C 선택하면 그만. ----------------------------------> 롬멜전사록에서 롬멜 역시 그런 점 밝힌, 미영은 상륙 지점을 선택할 권리가 있고 + 독일은 모든 해안선을 철저히 방어할 역량 없음을 인정. ----------------------------------> 따라서 여러 선택지들 가운데 오로지 노르망디여서 성공했다고 착각해선 안되는. 즉 인천상륙 맥아더의 천재성으로 과감히 벌인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전쟁 역전했다는 것은 냉정하게 본다면 착각. --------------------------------> 맥아더 아닌 그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 인천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 상륙전 했었어도, --------------------------------> 압도에 압도에 압도적인 해공군력으로 유엔군은 돌파구를 말들었다고 판단해야 합리적. --------------------------------> 사실 냉정하게 본다면 인천상륙 없이 낙동강에서 북괴군을 돌파 섬멸했을 때 적의 타격이 더 컸을 수도 있습니다. 상륙작전은 애초 영국 미국과 같이 지구 차원에서 군사력 투사 적을 공격하는 세력이 취하는 것. --------------------------------> 영불해협-지중해-대서양-북해를 건너야만 적을 공격할 수 있기에 필수적인 상륙. --------------------------------> 한반도와 같은 좁아 터진 국지전에서 신규 상륙 병력 투입도 아닌 + 기존 투입된 병력 빼서 상륙??? 문제도 큰 겁니다. 그리고 진주만 기습 당시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아마 킴멜? 제독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문책성 해임. --------------------------------> 만일 니미츠가 선배여서 킴멜 제독 보다 먼저 태평양함대 사령관 임명되고 그 직후 진주만 기습 당했다면 니미츠도 문책 해임당했을 것. --------------------------------> 킴멜 제독 가족과 후손들이 21세기 최근도 명예 회복시켜달라는 청원도. ( 킴멜은 41년 2월 진주만에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부임. 미 태평양함대는 원래 미 서부 해안에 위치, 하지만 루즈벨트 명령으로 진주만으로 전진 배치. ) ( 일본 위협 대비한다면서 태평양함대 사령부를 미 본토에서 진주만으로 전진 배치한 루즈벨트 + 지중해에서 영국의 타란토 기습 성공 및 영국측의 진주만 역시 타란토와 유사하기에 일본 위협에 철저 대비하란 경고 무시했던 루즈벨트 + 태평양함대 이전에 반대하던 제독을 해임하고 과거 루즈벨트가 해군성에 근무할 때 부관이었던 킴멜을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않히고선 진주만 기습당하자 해임 + 루즈벨트 자신의 멍 때림은 책임 안지고. ) ---------------------------------> 맥아더 역시 필리핀에서 사실상 혼자 탈출한 책임을 물어, ---------------------------------> 진주만으로 해임된 태평양함대 사령관 처럼 해임시켰더라도 솔직히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던 위치. ---------------------------------> 필리핀 함락 당시 해임되어도 별 문제 없었던 맥아더가 ---------------------------------> 미 해군이 사실상 주도한 태평양전쟁의 연합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일본 항복 받아낸 그 사실 자체가 보기에 따라선 넌센스. ---------------------------------> 냉정하게 본다면 태평양전쟁은 미 해군의 전쟁 + 태평양전쟁에서 미 지상군은 사실상 들러리 수준에 불과. ---------------------------------> 필리핀 상륙 따위는 하거나 말거나 태평양 전쟁 승패에 아무런 영향 없는, 보기에 따라선 미 육군과 맥아더 개인 위신 체면치레용 성격도. ---------------------------------> 필리핀 상륙은 미 육군 입장에선 반드시 관철시켜야 하는 육군의 역활 존재감 과시용. 맥아더는 자신의 능력으로 검증받은 제대로 된 실전 성과 탁월함??? 의문입니다. 1차대전이전 + 1차대전 + 전간기 + 필리핀함락 + 태평양전쟁수행, 원수가 되어야할 그 어떤 합리적 이유도 없는. ----------------------------------> 그리고 맥아더 주연 패튼 조연 흑역사 잊지 말아야. ----------------------------------> 대공황 당시 생계 어려움을 겪던 1차대전 참전 용사들이 그 동안 지급되지 않았던 참전 보상금 지급 시위하자, ---------------------------------->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던 맥아더는 공산주의 시위라고 폄하하며 패튼 중령에게 무력 해산 지시. ----------------------------------> 1차대전 참전 동료들을 향해 맥아더와 패튼은 장갑차까지 동원하고 + 가족들도 함께 있던 시위대 텐트 불사르며 강경 진압 부상자 발생하기도.
맥아더에 비해 실전 경험 훨씬 많은 패튼, 그 패튼의 실전 경험, 1차대전-전간기-2차대전 다 통틀어 본다면 이렇습니다. 1차대전 전 경험 제외. ( 세계대전급 아니며 + 강대국 상대 실전 아니기에 ) 패튼은 과연 실전 경험 얼마나 많았을까요? 어림셈으로 간단히 추정하면 정말 믿기지 않는 놀라운 수치에 도달합니다. 패튼의 1차대전 + 2차대전 모든 실제 전투 기간 다 합산해도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수치가 되는 넉넉하게 추정해보죠. 1차대전 참전 실전 기간 ------------------> 후하게 1년 (실제론 불과 몇 개월 정도.) 2차대전 북아프리카 -----------------------> 3개월 (제대로 된 실전 경험 사실상 0 수준) 2차대전 시칠리 상륙 관련 --------------> 3개월 (시칠리 상륙 준비 빼고 실제 상륙 후 전투 길어도 1개월???) ( 1차대전 미국의 대독일 선전포고 1917년 4월경. 하지만 대규모 지상군 편성하고 대서양 건너 파병하는데 약 1년의 시간 필요. 준비 차원의 조사관들은 즉시 대서양 건넜지만 최초 소규모 선발부대는 18년 2월경 유럽에 도착 + 이후 축차적 대서양 횡단 병력 증강. 독일 항복은 1918년 11월, 대서양 건넌 미군이 유럽에서 부대 편제 제대로 갖추고 실전 투입은 독일 항복 얼마 전으로 6개월 내외로 판단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 저 1년 6개월이 패튼이 노르망디에서 미3군 지휘하기 전의 모든 실전 기간입니다.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만 따진다면 아마 몇 분의 일로 대폭 대폭 대폭 줄어서 솔직히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군요. 노르망디 이후 독일 항복 까지 ---------> 9개월 (패튼 투입 시점인 44년8월~독일 항복 45년5월) 즉 패튼의 실전 경험 기간, 후하게 평가할 때 이렇게 됩니다. 1차대전 + 2차대전 전체 ----------------------------------------------------------------------> 고작 27개월?, 2년 3개월.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한 수치로 줄이면 ------------------------------------------> 어쩌면 1년 될지 안될지도 모르겠군요. 즉 패튼은 2차대전 참전하고 살아남은 어지간한 미 신병 소총수와 비교해도 실전 경험 많다고 보기 힘듭니다. 미국은 전쟁 늦게 참전했으니, 처음 부터 끝까지 전투한 영국이나 독일의 생존한 참전 용사 대부분과 비교하면 짧았던 실제 전투 경험이라고 보아야. 장교들 실전 경험으로 비교해보면, 1차대전 발발 때 영국해군 초급장교 참전했던, 2차대전 때 제독급 장교와 비교하면 패튼은 새발의 피 수준. 저런 케이스의 영국 해군 장교 실전 경력은 1차대전 4년 + 2차대전 6년 = 10년입니다. 미국의 전쟁은 너무 짧았습니다. 패튼 저 정도 실전 경험 상태에서 시칠리 전투에서 겁장이 사병 뺨싸대기 발생. 맥아더는 패튼과 같이 야전에서 직접 대규모 전투 지휘한 경험도 없다는 점에서 맥아더의 원수 계급은 냉정하게 본다면 극단적 계급 인플레.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까지의 날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북아프리카 전역 미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캐서린 협곡 전투. 사실상 전멸급 패배 ------------------------------------------> 1943년 2월 2. 캐서린 전투 패배 후 패튼이 교체되어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 -------------------------------------------> 1943년 2월 3.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 1943년 5월 4. 시칠리 상륙 시작은 --------------------------------------------------------------------------------------------------------------------------------------------> 1943년 7월 5. 시칠리에서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 1943년 8월 튀니지에서 추축국 최종 항복할 때, 이집트에서 부터 진격한 영8군이 결정적 역활했습니다. 횃불(토치) 상륙했던 미영 연합군은 사실 보조 역활. 튀니지의 독일군 주방어선은 영8군에게 돌파당해 최종 항복. 냉정히 바라본다면, 사실 패튼은 북아프리카-지중해 전역에서 제대로 된 전투 경험 없습니다. 독일이 패튼을 특별히 두려워 할만한 그런 독일군과의 교전 경험 자체가 없었습니다. ---------------> 미국측 자가발전 성격. 롬멜 전사록에 미군에 대한 높은 평가 부분도 자세히 살펴보면 롬멜의 착각도 포함. 특히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롬멜의 생각에는 완전한 오류들 포함되어 있고, 그 오류는 노르망디 전역 부분 감수를 맡았던 롬멜 부관 출신이자 노르망디 전역에서 싸웠던 바이얼라인 장군이 각주를 통해 직접 수정 언급하기도.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영국의 기발한 상륙 장비 및 지뢰 제거 전차 등에 대해, 롬멜은 신대륙 미국의 창조성이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했는데 사실은 모조리 영국의 창의력에서 나온 결과물들.) (전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배우지 못하는 영국군을 냉정하게 비판한 롬멜은, 영국과 달리 편견 없는 백지장 상태의 미군이 오히려 더 빨리 실제 전투에 적응했다고 대단히 미군을 높이 평가했는데, 실상 롬멜은 미군 특히 패튼과는 단 1번도 교전해본 적 없었고 롬멜의 신대륙에 대한 편견 환상도 큰 역활.) (당시 인구 5천만에 최대 징집된 상태의 영국군은 인명 피해를 지극히 우려해 소극적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영국 인구를 압도했었고, 참전이 늦어 그 때 까지 인명 손실 자체도 미미 그 자체라 여유가 있었던.) (영국이 아무리 졸전을 벌이거나 대패해도, 영국군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습니다. 즉 기본은 철저했던. 당시 독일군 장병들의 평가에서도 미군은 자신들이나 영국군 보다 스킬-숙련은 없지만 단위 부대에 투입되는 화력 압도적 이어서 그 화력에 바탕한 전투 수행을 한다는 기록도 많은.) (영국이 당시 만일 소련이나 미국 정도의 거대한 인구를 가졌다면, 독일군이 대전 초 그렇게 활약하기 힘들었을 것.)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 패튼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주력군, 패튼은 사실 구경도 해본 적 없다가 정확할 겁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독일 주력을 고착 소모시킬 때, 브리들리 미1군이 코브라 돌파했을 때도 패튼은 대기 중.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약 80%를 영국-캐나다 연연방군이 상대. 당시 독일 타이거 및 판터 전차 격파할 전차포 갖춘 전차는 영연방군 파이어플라이 정도. 코브라 돌파 후 패튼이 신규 재편성된 쌩쌩한 미3군 이끌고 쾌속 진군해서 독일군이 패했겠습니까?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군은 깡에서 영국군에게 고착 소모 및 브래들리 미1군에게 돌파당해 붕괴된 겁니다. 실제 코브라 돌파를 해낸 브래들리의 겸손함과 지극 대비되는 패튼이었음은 부인하기는 불가능. 노르망디 전역 깡에서 그렇게 고전했던 영국군 역시 코브라 돌파 후 노르망디 전역 붕괴되자, 해안선을 따라 베네룩스 3국 거치면서 쾌쾌쾌속 진군, 아주 단기간에 수 백km 전진해서 마켓-가든 직전 까지 도달. 롬멜과 단 1번도 교전하지 못한 패튼이 어떻게 롬멜의 최대 맞수 라이벌이 될 수 있습니까? --------------------> 할리웃 선전! 독일 지상군과 본격적 교전, 노르망디 이후 1년도 안되는 짧았던 미국이 과연 독일의 주적? ---------------------> 어불성설. 저 짧았던 1년도 안되는 북서유럽 전투를 배경으로, 1970년대 부터 전투(컴뱃) 시리즈 및 2000년대 이후 제목 조차 표절 성격인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리즈로 전세계에 선전. 패튼이 미3군 지휘 맡기 직전 까지의 실전 경험 기간 따져본다면, 최대로 산정해도 6개월. 그 6개월 중 43년2월~43년5월 기간은 사실상 실질적 전투 경험 없었던. 즉 냉정하게 패튼의 실제 전투 경험 산정한다면 시칠리 상륙 때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 조차도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 산악 지대에서 격렬한 전투 수행했었고, 미군은 상대적 으로 낮은 강도의 전투를 평지에서 치르며 더 빨리 진군했던. 몇 시간 빨리 도시 진입하면 독일군 쳐부순 것이 되는 겁니까? 저럼에도 패튼이 이렇게 널리 알려진 이유. 벌지전투가 아마도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지상군 최대 단독 승리였기에 그랬을 것. 하지만 벌지전투 역시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당시 패튼의 위치에 다른 미군 지휘관 누가 있었더라도 독일군은 돌파할 수 없었던. 날씨만 잠시 개이면 그 즉시 독일군은 무력화되는 상태. 저 때 패튼이 서부연합군 전선 붕괴와 패전을 막았던 것 아닙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냉정하게 벌지전투를 바라본다면, 왜 독일군이 하필 그 지역을 공격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부터 냉정하게 고려한다면, --------------------------------------------> 거기가 당시 서방 연합군 최전선 중에서 가장 약했던 곳이었기에 그랬을 것. --------------------------------------------> 설마 독일이 국가와 군의 명예-자부심을 걸고 가장 강력한 방어선을 선택해 공격했겠습니까? --------------------------------------------> 독일 최후의 공세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선 미군에 대한 푸대접일 수도 있는 겁니다. ------------------------> 하지만 독일의 그 푸대접 선택이,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단독의 최대 지상전 승리가 되었던. 저런 성격들 있음을 고려하면서 패튼 냉정하게 바라봐야.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2차대전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 약 80%를 영국-캐나다군이 상대. 당시 미군은 실전 경험 사실상 전무했던 신병들로 구성되어, 독일 주력 상대 불가능해 영국군이 독일 주력 담당. 노르망디 전역에서 영국-캐나다군이 독일 5호 판터 및 6호 타이거 전차를 상대로 어떻게 싸웠는지 소개하죠. 1. ua-cam.com/video/cNGGt1ORO-0/v-deo.html Sherman Firefly vs King Tiger | July 1944 | Tank Duel ----------------------> 44년 7월 18일, 파이어플라이 서부전선 최초 킹타이거 격파. 2. ua-cam.com/video/V-jGdZ5XWNM/v-deo.html Sherman Firefly vs SS Panthers - Tank Battle At Normandy, France ------------------------------> 44년 7월 9일, 캐나다군 파이어플라이 판터 7대 격파. 3. ua-cam.com/video/IrEtdMkFA00/v-deo.html Tank Battles of WW2 - The Firefly Ace that knocked out 5 Panthers with 5 rounds ------------------> 44년 7월 14일, 파이어플라이 1대가 5번 사격, 5대 판터 격파 노르망디 전역에서 미하일 비트만이 탄 타이거 역시 영국군 파이어플라이에게 격파당해 전사. 4. ua-cam.com/video/R4LyLCOUkzI/v-deo.html Cromwell vs 2 Panther tanks | September 1944 | Tank Duel ----------------------> 노르망디 돌파 후 44년 9월 19일 네덜란드, 영 크롬웰 전차 판터 2대 격파. 파이어플라이와 같은 17파운드 포를 장비한 크롬웰도 판터 타이거 격파 가능. 크롬웰은 당시 전차 중에선 기동성 가장 좋아 최고 속도 시속 약 65km/h. 영국은 북아프리카에서 타이거와 첫 교전 후 대응으로 43년 무렵 MBT 개발 시작, 그 사이 과도기에 미 셔면에 17파운드 포를 장착한 파이어플라이 및 크롬웰 등으로 응급 조치하며 버틴 것.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 때 미군은 타이거 판터 대비 측면에선 사실상 멍 때렸던. 영국은 종전까지 약 2천대 파이어플라이 생산했고, 노르망디 상륙 때는 파이어플라이 생산 초기여서 초기 생산분 약 350대를 투입했다고.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약 80%는 영국군이 담당. 노르망디 전역에 투입된 미국과 영국의 전차 중에서 전차포로 독일 판터나 타이거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군 파이어플라어-크롬웰 정도. 파이어플라이 역시 약한 장갑 때문에 극심한 피해를 당했지만, 독일 타이거나 판터 역시도 파이어플라이에게 먼저 공격당하거나 매복에 걸리면 격파당했기도. 노르망디 전역은 이미 독일군이 방어진지를 구축한 이후에 벌어진 전투로, 탁 트인 들판에서 전차가 고속 기동하는 전투 아닌 보카쥬 지형에서의 매복성 전차 전투. 처음엔 공격하는 영국군 전차가 매복한 독일군 전차에게 당하는 위치였지만, 전투가 계속되면서 독일군 전차도 영국군 매복이나 배후 침투에 당해 격파되었던. 독일의 그 어떤 전차라도 격파할 수 있는 전차포를 가진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겁니다. 원거리에서는 약한 장갑 때문에 독일 타이거에게 당할 위험이 컸지만, 보카쥬 지형에선 원거리 아닌 근접 전투도 많았기에 파이어플라이는 나름 역활을 한. 하지만 미군의 일반적인 셔면은 판터나 타이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독일 패전 직전인 1945년 1월, 2대의 독일 판터가 21대의 미 셔먼과 교전했을 때 ----------------> 셔먼 9대 격파 + 셔먼 12대 포획. 만일 보통의 셔먼만 아닌 파이어플라이와 혼성 편성되었다면 판터의 저런 전과 불가능. 45년에도 저랬으니 실전 경험 없었던 44년 노르망디에선 더 취약했을 것. 2 SS Panthers vs. 21 US Shermans ua-cam.com/video/86K0ncTkAkA/v-deo.html 1945년 ( 영 최초 MBT인 센츄리온의 직전 모델인 ) 실전 투입된 마지막 순항전차 코메트. ua-cam.com/video/tRxU0B8cybY/v-deo.html Comet Tank vs Tiger Tank | April 1945 | Tank Duel ----------------------------> 45년 4월 종전 직전, 영 코메트(센츄리온 직전 모델) 타이거 격파 여기 영상의 코메트 모습은 현대 주력 전차 유사, 하지만 센츄리온으로 바로 대체된. 최초의 MBT인 센츄리온은 너무 늦게 투입되어 실전 경험 없었음. ua-cam.com/video/0AnoySTfvFM/v-deo.html Centurion - Tiger Tank's Nemesis 1945년 5월 8일 독일 항복. 독일 항복 직후인 5월 14일, 센츄리온 6대 영 항구에서 선적, 몇 일 후 안트워프 항에 하역. 최전선 소련군 점령지 경계까지 약 400마일 자력 기동 영국군 기갑부대 배속, 영 미 탱크들과 함께 대규모 야전 기동 훈련 후 7월 귀환. ----------------------------------------------------------------------------------> 2차대전 종전 당시 미 퍼싱, 영 센츄리온 등장으로 이미 독일 전차의 질적 우위는 끝난 상태.
공산측이 정전협상 장소를 개성으로 고집한 목적은 분명합니다. 개성 및 개풍군 지역이 공산군의 점령지였기 때문에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것. 애초에 저놈들의 제안에 말려들면 안 되었고 중립국이나 원산 앞바다 병원선으로 했어야만 했는데 휴전을 서두르려는 워싱턴 본부의 일방적인 판단 미스로 시작부터 공산측의 속셈에 말려드고 만 것이죠
특별한 날에 보는 역전회담 특별펀 너무 좋습니다.
김보영 박사님 설명도 정말 좋으네요. 어디서 이렇게 귀한 분을 모셔왔는지, 지난 번 유고때 판사님 모셔온 것도 그렇고 제작진 분들의 섭외 능력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역전다방은 전쟁사에 정말 진심 이네요
출연자분들, 제작진분들 좋은 방송 만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번 주는 왜 링크가 안 올라왔지?
쉬어가나 싶어 검색했더니 올라와있었군요. ㅋㅋㅋㅋ
알고리즘 한 대 쥐어박고 싶네. ㅋㅋㅋ
보통 나오자 말자 보는데 ㅋㅋㅋ
고맙습니다....^^*
참....힘없는 나라의 설움도 느껴지네요.....
⇖🌕
이런 프로는 솔직한 말로 공중파에서 해줘야 되는거 아니냐?
좌파 사회주의자들이 공중파를 많이 장악해서 이런 명품 방송은 절대로 안할거임.
유감스럽게도 공중파는 정치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각색되지 않은 그대로의 정상적인 역사를 말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skb22ggg 아무래도 그렇겠죠 좌우편향은 아닙니다만, 정말 역사스페셜도 재미있게 봤는데 폐지, 역사저널 그날도 없어지고
영원할 수 없음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역전다방만큼은 인사라도 제대로 하고 갔으면 좋겠네요. 토전사에서 너무 서운했어서ㅋㅋㅋㅋㅋㅋ항상 좋은 영상 감사드립니다.
하 역전다방 정말 Best야.....
태평양전쟁때던가 스튜디오가 파주?? 에 있다고 들은거 같은데. 이렇게 가끔 나오셔서 야외촬영도 해주헤요 너무 좋습니다. 영상 감사합니다!
동생도 JSA에서 근무했었는데 가족 초대의 날 생각나고 오늘도 좋았습니다.
다들 너무 고생들 하시고~감사합니다
전쟁사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하게 다루는 프로그램 너무 좋아요. 계속 다른 주제로 진행하는 것 맞죠?
어차피 38도선 있던 남과북이였는데 북한의 남침으로 수백만명의 군인분들과 민간인분들 희생자가 발생했고 결국 다시 38도선으로 휴전국가가 된거였어요.
전쟁으로 통일을 꿈꾸기도 했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네요.
역전다방 애청자로서 계속 쭈욱...전쟁역사 진행해주세요...
일주일에 하루 한시간이지만 기다려 집니다~^^
그래도 38선에 비해서는 국토 면적이 약 3300km^2 가량 증가했죠
@@게딱지-x3i 쓸모없는 산악지역이 늘어나고 유용한 평야와 역사적 가치가 높고 많은 인구가 거주가능한 지역을 잃어버렸죠. 거리도 짧아서 서울불바다 발언으로 여러번 협박이 가능했던 이유이기도 함.
참고로 송악산만 먹으면 개성 시내 제대로 지킬 수 있고 개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지형도 보시면 송악산보다 그 위의 천마산, 묘지산, 제석산 등이 더 규모가 크고 고도가 높아서 다시 감제당하기 때문에 여전히 매우 어렵습니다. 결국 이 산들도 확보해야 하고 임진북예성남정맥 대부분 얻어서 최소 황해도 금천까지는 전선을 올려야 남측에서 개성 안전히 방어하고 게 가능합니다. 개성이 북쪽은 산맥으로 막혀 있고 나머지 3면은 강과 바다로 격리된 구조라 북측에서는 방어하기 쉽지만 남측에서는 방어하기 매우 까다롭습니다
이 때문에 38선 분단 시절의 개성은 마치 서울 도심은 대한민국령이지만 북악산 정상부터 북한산, 도봉산 봉우리들이 전부 북한령인 것과 똑같은 구도입니다. 휴전협상 시절 북한이 휴전선을 다시 38선으로 그대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는데 이는 개성을 다시 포기하고 철수하지만 어차피 임진북예성남정맥이 그대로 북한 땅이라 대한민국이 개성을 개발하지 못하고 버려진 땅으로 둘 것이므로 전략적으로 손해가 별로 없었고 그 대신 중,동부에서 많은 영토와 여러 요충지들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고려의 수도이자 대도시인 개성을 새롭게 얻어서 전쟁에서 이겼다는 명분을 가졌고 인민들에게 전쟁에서 일방적으로 지지 않았다고 선전할 수 있었죠. 38선 이북의 중부,동부의 많은 영토들을 (연천, 철원평야, 설악산, 화천발전소, 펀치볼, 백암산 등) 상실했고 영토 면적도 기존 38선 때에 비해 약 3,300km^2 가량이나 감소함에도 불구하고요
사실 ... 휴전협상 개최 이전 까지 밴플리 말대로 39도선 까지 진군해서 평양에서 휴전협정개최하고 평양을 대동강 이남이북으로 나눠 베를린 처럼 통치했었어야 했는데 많이 아쉽네요
@@gggg33333ee 공산측은 자신들이 점령하고 있었던 개성을 협상장소로 관철하는데 성공했는데 이 목적은 명확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쭉 시종일관 군사분계선을 38선으로 다시 돌리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개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큰 무기로 삼아 이를 우리에게 돌려주는 대신 더 많은 이득을 협상으로 받아내겠다는 거죠. 기존 38선에 비해 더 줄어든 현재의 영토 손실을 만회하고 개성을 도로 포기하지만 어차피 개성 북쪽의 임진북예성남정맥이 그대로 북한 땅이라 개성을 일방적으로 감제할 수 있어 도발하기 쉽고 결국 대한민국이 개성 방어가 불가능해 개발 못하고 버려진 땅으로 둘 것이 분명해서 저들에게는 포기해도 전략적으로 불리할 점이 적었습니다. 이는 멸악산맥이 모두 북한 땅인 연백평야와 옹진반도도 마찬가지였죠. 포기하고 도로 남측에게 돌려줘도 손해볼 점이 적었다는 것. 그 대신 유엔군에게 빼앗긴 38선 이북의 중부,동부의 많은 영토들을 (철원평야, 연천, 백암산, 펀치볼, 설악산, 파로호 등) 협상으로 가져와 냉큼 먹고 서울 공격을 훨씬 쉽게 할 수 있어 훨씬 유리해집니다
분단은 운명이다?😂😂
통일대교 바로 옆 중대에서 복무하면서 수없이 봐왔는데 역전다방에서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ㅋㅋ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와 진짜 대박이다 이프로
지금까지 왜 서부 전선이 동부전선에 비해 38도선 이상 못 올라 갔을까 궁금했는데, 결국은 공산군의 치밀한 군사적 목적과 그에 비해 현장감 떨어지는 워싱턴 정부 때문이었군요..
개성은 전쟁 전에도 우리 땅이었는데..ㅜㅜ
김보영 박사님의 설명은 귀에 쏙쏙 잘들어오네요. 역시 전문가입니다.
다른거 필요없고 공산세력에겐 핵무장으로 대답하는게 답이다
아색다르고 너무 좋에요 고생많으셧어여
억울한 휴전이라고 하지만 막말로 미군이 손 때면 당장 한국은 다 밀려서 남한도 못지키지....그래서 그이후로 포방부 해가면서 전차랑 자주포를 그렇게 찍어낸거지...저당시는 어쩔수 없는 상황일듯....
와.. 진짜..
토크멘터리 전쟁사때도 최소한 저정도로 현지 로케이션 했으면 얼마나 좋냐?
그때 임용한 박사님과 윤지연 아나운서가 200회 특집으로 마지막회 방송한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화난다
임진강 하류가 강폭도 넓고 절벽 지형이라 이쪽으로 북한군의 대규모 기동과 진격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개성-문산 축선이 서울과 최단거리는 제일 짧지만 지금도 북한군이 주공으로는 못 쓰죠. 가장 주공으로 내려올 길은 연천,철원 축선이죠
어느덧 역전다방이 6.25 후반부를 향해 가네요...6.25 이후엔 베트남전쟁도 있을거고(이세환 기자님이 자세하게 다루셔서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음) 걸프전등등 현대전이야기가 많이 나올듯 합니다
걸프전은 했고 베트남전은 국방홍보원에서 못다룬다고 못 박았다고 함
@@세잡쓰왜 못하나요?
@@tladnwls1234 이유는 대충 뭐 짐작가지만 확실히 말할 수 없을뿐
베트남전 하면 우리 국군이 민간인 학살했다는 헛소리하는 애들이 분탕질 할게 뻔해서 아닐까요... 민간인 복장한다고 총쏘는 애들이 민간인이 되는건 아닌데 말이죠.
로케이션도 로케이션인데, 천막을 이용한게 더 현장감도 좋고 멋지네요. 토전사 멸망이후로 좆망티비였는데, 역전다방에서 뚝심박아주면서 다시 구독도 박고 계속 보게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디오 감독님. ❤
국방부는 회식비 자주 지원해줘라❤
전진~^^ 1사단❤❤❤
5:09 왘ㅋㅋㅋ 이렇게 보니까 진짜 충격적이네요ㄷㄷ
51년 5월 춘계공세를 막아내고 전세 일발역전의 대기회를 맞이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아예 몰아부쳐서 협상을 더 유리하게 가져갔어야 했는데 라는 큰 아쉬움이 듭니다. 너무 나이브하게 협상에 임했다보니 공산군의 아주 노련하고 정치적인 협상에 말려들며, 참으로 아까운 청춘의 희생이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신맥아더라인의 설정으로 후퇴했던 순간보다도 그것을 반면교사삼아 다시 몰아부칠수있었던 기회를 놓친것이 더욱 아쉬운 대목입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자국민들이 계속 죽어나가고 국민들도 전쟁 확대, 지속을 반대해서 저들로선 휴전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죠 ㅠ 그리고 중공군 공세들로 넘 데여서 중공군의 역량을 너무 높게 보고 쫄았고요
51년 5월 용문산전투 이후에 바로 북진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기상이 악화되서 못했다고 하죠.
1사단 출신인데 뿌듯하네요~ ㅎㅎ
미국은 대체로 군인과 정치인이 분리되어 있으나 공산권은 정치인이자 사상가이자 군인이다. 순진한 군인이 항일전과 내전과 내부 이념투쟁을 걸쳐 단련된 공산주의자를 상대하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러나 순진한 군인도 계속 정치나 외교 현장에 노출되면 노회한 외교전략가가 될수있다.
미국 어느 신문이 뽑은 역대 미군 최악의 장군 베스트 5를 뽑은적 있는데,
그 중에 멕아더가 들어있죠.
다른 4명은 진짜 군사적 무능이 이유였고, 멕아더는 군인으로는 능력 있었지만, 너무 정치적이였다는게 최악의 장군 베스트5에 뽑힌 이유.그게 미국.
그 미국 좋다면서, 따라하기는 커녕.
군사쿠테타 주범인 전두환 빨아대는
아이러니.
와 박사님 89년부터 연구할정도면 지금 환갑앞두고 계실텐데 개동안이시네..
문산, 통일대교에서 북서쪽으로 임진북예성남정맥이 매우 크고 웅장하게 보입니다. 가장 남쪽에 좀 낮은 산이 송악산이고 송악산 북쪽으로 천마산, 묘지산, 제석산, 봉화산, 수룡산, 삼송산 등이 쭉 펼쳐져 있습니다. 특히 제일 높고 뾰족한 봉우리들이 있는 곳은 송악산이 아닌 천마산, 묘지산이랍니다 ㅋ
필리핀군 에디오피아군 활약전도 방송에 번외로 방영부탁 합니다😊
어휴, 속터져.
와 캠프 보니파스 너무 오랜만이다 ㅠ
진짜 속탄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 클라우제비츠 -
준아 ,계좌번호 불러.... 허준에게 가슴 떨리는 형의 전화소리 겠다
다음은 월남전 갑시다 채명신 청룡 백마 맬호
10군번 포병대대인데 ㅎㅎ 저 다리는 행군때도 지나감
이승만 대통령과 백선엽 장군도 고려의 수도이자 도시인 개성의 전략적 중요성과 큰 상징성을 생각해 동부전선 좀 포기하더라도 (반면 중부전선은 절대 버리면 안됨) 개성은 어떻게든 찾아서 가져와야 한다고 적극 주장하고 노력을 했으나 결국 개성은 북한의 영토로 영구 굳어지게 되었죠
고려를왜찾아요? 이승만북한출신ᆢ조선을찾아야지
중공군이 지들이 불리해지기 시작하자마자 일부러 더 밀고 오지 못하도록 개성에서 휴전협정 맺으려고 했죠... 부정부패의 온상 이승만과 백선엽형제들은 여기서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
개딸당과 추종자들이 댓글로 또 거짓 선전 선동 하네
방송 안보고 글써요?
먼 이승만이 노력하긴 뭘해요.
협상 자체에서 배제당했는데,
백장군 스스로도 나 그냥 옵져버같다 했다잖아요. 전쟁 당사국 대통령이
협상에서 배제된다??
이걸 해석하는게 그리 어려워요?
그냥 무능한거잖아요.
그것도 안되는 지능으로
먼 그리 나라걱정들을 하시는지원.
사람목숨 파리취급하고 거짓말로 주둥이로 사람 가지고 장난치는 쓰레기들이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인민민주주의자들...지금 우리나라에도 저런 쓰레기들이 많다는 게 참 걱정스럽네요.
매년 6월이면 여러채널에서 호국보훈의 달 특집을 많이 방송했는데 제가 잘 몰랐을수도 있겠지만 올해는 별로 없는것 같아요. 우리가 어떻게 이 나라의 자유를 수호하고 순국선열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알려면 방송을 비롯하여 여러 수단으로 많이 알려야 합니다. 이 채널을 정규방송에 편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케이블에서 역전다방이 방송되더라구요. 그보다 정규방송에 6.25 한국전쟁 파트만 편집하여 시리즈로 방송해주시면 정말 좋겠습니다.
최근에는 독일(당시 서독)도 의료지원국에 포함됐죠
역전다방이 전쟁사를 천천히 자세히 상세하게 다뤄주니 몰랐던 여러 지식들도 새롭게 알게 되고 공부하는 맛도 나고 재밌는데 언제부턴가 도대체 언제까지 하냐, 빨리 끝내고 다른 전쟁사 다루자 이러시는 분들이 왜케 많나요 ㅜ 3년 1개월 동안 얼마나 많은 전투들과 여러 사항들이 잇었는데 더 자세히 더 깊게 다루진 못할 망정 대충 끝내라고 하는 사람들 참 ㅜ
토전사도 못한 야외촬영을 역전다방은 했음
파로호 전투때 전과확대 못한 무지가 결국 이 지경이 된거지... 개성도 금강산도... 평양까지도 갈 수 있었을텐데... 공산당이 지들 불리하니까.. 정전협정 맺자고 하니.. 덥썩 물어가지고선...
5:09 헐 그럼 샤를세환님 71년생, 채박사님 75년생, 심중령님 82년생 이시라는건데 와꾸는 심중령님이 맏형처럼 보인다능... 11살 형인 샤를보다 형으로 보이네.. 현역이셔서 그런가.. 심중령님 82년생이신데 육사 62기 (83년생) 시면 재수해서 육사가셨네
정전회담 이야기 역전다방 금성전투 마지막인가?! 2차대전 독소전쟁 노르망디 상륙작전 국공내전 인도차이나전쟁 베트남전쟁 아프간전쟁 다뤄주세요 😂
포로문제가 다음주 예정이고 그리고 군사분계선 설정 논의, 여러 주요한 몇 고지전들, 그리고 피날레인 금성 전투가 남았습니다
난 왠지 이렇게 할것 카더라~~~ㅎㅎㅎㅎㅎ
개성 남부 지역은 한국 해병대가 통제하고 있었는데..ㅜㅜ 진짜 양보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개풍군 남부, 즉 관산반도 일부만 우리가 좀 장악하고 있었죠 ㅠ 결국 공산군이 여기를 밀어내서 점령해 버립니다
아니 내 50분 어디갓어
북한측 대표중에 이상조는 나중에 숙청된 후 소련으로 돌아가서 80년대인가 90년대인가 즈음해서 전쟁시 공산측에 가담했던 사람들과 고향방문단 형식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해서 지상파 방송에 출연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때에 이 사람들의 증언도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중간에 동부전선의 미 해군 이야기가 나오는데 고성의 월비산 351고지 공격 작전 당시에 미 해군이 지원포격을 했줬고 거기에 미 공군과 신생 대한민국 공군까지 참가해서 수많은 활약을 합니다. 다만 53년 6월에 피탈당하고 합니다ㅜㅜ
월비산과 351고지를 그대로 가졌으면 고성읍까진 진격할 가능성도 있었죠. 그러지 못해도 동해안에서 정확히 남강으로 전선 형성해 방어도 더 편해지고 지금과 달리 전망대에서 금강산 주요부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죠
이런 프로를 유튜브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니 행복하네요
워싱턴 선언
실제 협상 내용을 다뤄주던가
영상 내내 협상을 어떻게 주고 받았는지 내용이 없네
때려쳐
나도 전진부대 출신이다! 전진!
임진각 다리 ㅎㅎ 지뢰작전 하러 지나다닐때 생각난다
미국은 베트남 전 부터 매번 이상주의와 wishful thinking 때문에 너무 삽질 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국민들도 그런 사람이 많아서 그렇겠지만... 맥마스터 전 장군도 책에서 그런 부분을 지적하던데 정치인들 참 답답합니다
역전다방 2차대전 독소전쟁 노르망디 상륙작전 국공내전 인도차이나전쟁 베트남전쟁 아프간전쟁 다뤄주세요 😂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고 천천히 기다리셔야 ㅎㅎ. 한국전쟁이 끝나면 다른 전쟁들도 차근차근 다루실 겁니다
ㅋㅋㅋ 전 임진왜란.. 이것도 한국전쟁처럼 정치와 보급, 전선 등으로 다시 알고 싶네요 (근대는 아니지만 ㅠ)
재생목록 찾아보사면 걸프전쟁 있습니다
셰팡 ㅋㅋㅋ
6.25전쟁 당시 필리핀은 대한민국보다 더 잘 살았고 필리핀만큼이라도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였죠 ㅋㅋ 장충체육관 세우는데 도와준 기술자도 필리핀 출신이죠 ㅋ
6.25의 이런 협정 과정을 보면 현재의 우크라이나도 러시아와 협정을 맺을 때 주역이 못 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고 젤렌스키가 왜 그렇게 전세계에 자꾸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려는지도 이런 부분에서는 이해가 가네요.
그냥 당시 한국정부의 무능임.
전쟁 당사국이 협상테이블에서 배제된다?
이거 해석하는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냥 당시 이승만 정부가 미국한데 개무시 당한거임. 협상에 도움안되는 존재로 인식되서 오늘 방송보면 보고조차 차단했다고 하니.
우러 전쟁은 협상된다면
당연히 젤렌스키 우크대통령이 될꺼고.
러시아랑 누가 협상해요?
밥상은 미국이 차려주고
주역은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하겠죠.
우리가 전시작전권등 비정상이였던거.
개성 지형도를 보시면 개성 시내 북쪽으로 거대한 임진북예성남정맥이 송악산을 시작으로 천마산,묘지산,제석산을 이어 수룡산 및 삼송산까지 30km 이상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 산들이 일방적으로 개성 시내를 감제하기 때문에 38선으로 분단된 시절 남측은 개성을 방어하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개성 시내 남쪽의 진봉산은 송악산 및 이북의 산들에 비하면 낮은 구릉에 불과합니다. 38선 분단 시절의 개성은 서울로 비유하자면 서울 도심은 대한민국 땅이지만 북악산 정상부터 북한산, 도봉산 줄기들이 전부 북한령인 것과 비슷합니다
리커눙? 중국 총리 리커창하고 관련이 있을수도 있겠네요
6.25 전쟁으로 미국은 자국 군인 연인원 약180~190만명 파병에, 유엔 15개국 중 영연방군(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의 무기, 피복, 부식등의 보급과 더불어 일부국가는 한국으로의 수송까지 전부 책임지며 이 전쟁을 지휘했고,(6.25 전쟁 당시 미국군은 유엔군의 핵심 중추로써 유엔 지상군의 50.3%, 해군 85.9%, 공군 93.4%를 차치할 정도로 절대적 이었음), 약 36000명의 전사자와 막대한 전비를 투입하며 대한민국을 방어하고 있었으니, 어찌보면 협상단을 선정함에 있어 당연히 자국 군인 위주로 할수 밖에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또 유엔군측 대표단이 공산군측 대표단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고 했는데, 실예로 정전 협정 당시 북한측 대표 남일이 미국측 대표 조이 제독에게 담배 한개피를 달라고 해서 조이제독이 한개피를 건네며 미국 담배맛이 어떠냐고? 남일에게 물었답니다. 그러자 남일이 "난 지금 미국을 태워버리고 있다." 라고 했던 말이 유명하듯 조이제독을 포함한 유엔측 대표들은 공산측 대표들 때문에 엄청난 골머리를 앓았다고 합니다.
개성을 휴전협상 장소로 굳히면 서부전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 어렵게 되고 결국 유엔군의 북진은 제한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사 원래 목표인 38선 원상복귀안을 관철시키지 못하게 되어도 즉, 현 전선으로 휴전선을 긋게 되어도 고려의 수도이자 도시인 개성을 북한 영토로 확보할 수 있게 되는 전략적인 이득이 생깁니다.
참전국이 16개국인가요?? 부산 유엔공원에선 22개국가라던데
할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625 초기에는 인천상륙작전만 한다는 식으로 나와서, 짧다고 불만이 많던데 이제는 너무 길다고 불만이 많으니 참 아이러니하네여....
저도 다음 전쟁과 새로오실분 누구일지 기대되긴 하지만요
토전사 꼴만 안 났으면 좋겠네요
자세히 천천히 상세하게 다뤄주니 몰랐던 여러 지식들도 배우고 좋은데 왜 자꾸 언제 끝나냐고 한숨 내쉬는 사람들이 많은지
알아야 할 내용이지만 갑갑한 내용이네요
기승전 한국인은 없는 란국전쟁
저 당시 구 소련에 핵무기가 없었다면 스탈린이 저런 배짱 부릴수 있었을까 미국만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만약이지만 미국도 2차 세계대전 그리고 일본과 태평양전쟁 끝난지 얼마 안된 시점이라 트루먼 자신도 다음 대선에서 재선을 위해서는 안전하게 나가야 되고 급한건 본인들 이라고 다 드러내놓고 협상을 하는데 협상이 제대로 될리가 없지 그러다 보니까 전쟁 전에는 개성 전체가 남한측 관리하에 있었는데 걸국 넘겨줘버렸고 철원지역도 마찬가지 협상력 부재로 인해서 공산측에 끌려가다가 한반도 지리적 특성상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두 지역 개성은 완전히 넘어갔고 철원지역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방어지역도 북한에 넘어가 버렸고 철원평야를 남한측이 가져왔다고 자화자찬하는 학자들이 아직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는 현실
한국전쟁사 자세히 꼼꼼히 이어 다루는 것이 그렇게 언짢고 싫으시는 분들은 보지 마세요. 불편하시면 안 보시면 될 것을. 그리고 여기 오셔서 자꾸 한국전쟁 제발 언제 끝나냐, 계속 끄니 지겹다 이런 글 써서 분위기 나쁘게 만들지 마시고요.
김보영박사님! 감탄만 하네요. 펙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펙트만을 말씀하시는 펙트만이 안보의 최우선임을 말씀하시네요. 샤를같은 유튜버는 국뽕의 끝판왕이고 조횟수 늘리려 혈안인데 참 진실과 펙트만을 말씀하시네요. 응원합니다.
그당시에 백선엽 장군님은 키도 미군에 비해 안꿀리시네..
초반 장갑차는 미군 스트라이커인가요? 알려주세요 고수님들
스트라이커 맞는 거 같아요
이번 패널은 586 정치인인가요
중국군이라고 해야 할것 같습니다. 그때 중국이 지금 중국입니다. 실질적 위협국가
맥아더 있었음 개성에서 협상하자는 헛소리 듣자말자 개성까지 밀어버렸을껀데...
1차대전 미 지상군의 실전 경험은 사실 경미한 수준에 불과, 맥아더-패튼-트루먼 등 당시 투입된 모든 미군 장교들 실전 경험은 지극 짧았던.
1차대전 미국의 대독일 선전포고 1917년에 했지만 + 대규모 징병과 훈련 등 대서양 건널 준비 과정이 필요했고 + 선발대는 1918년 초, 이후 축차로 대서양 건너 파병.
즉 투입된 미군이 본격 전투 참여 시작한 것은 독일 항복 전 몇 개월에 불과.
맥아더 1차대전 전 실전 경험 하기 힘들었고 + 1차대전 때 훈장을 받았지만 미 지상군 전체가 제대로 된 실전 경험 미약했으며 + 전간기 때는 아예 실전 경험 없었음.
---------------------------------> 아버지 후광으로 필리핀에서 총독 비스무리 위세를 떨쳤던 것이 태평양 전쟁 직전 맥아더 상황.
---------------------------------> 막상 태평양 전쟁 발발하고 일본군의 필리핀 침공 후 맥아더는 필리핀 탈출. 이 정도가 맥아더의 태평양전쟁 이전 전투 경력.
대한민국은 미국과 한국전쟁 특수 관계로 엮여서 냉철하게 맥아더를 보지 않았던 측면이 있습니다.
중공군 개입에 전혀 대비하지 않고 멍 때렸던 것은 치명적 + 명 때리다 중공군에 당한 다음에 핵폭???
-------------------------------> 게다가 중공군 개입은 예고 없이 갑자기 일어난 것 아니며,
-------------------------------> 지속적으로 특정 조건, 즉 유엔군이 38선 넘어 북으로 진격할 경우 반드시 개입한다고 반복적으로 밝힌 상황에서,
-------------------------------> 맥아더는 중공군에 대한 그 어떤 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중공군에 사전 대비만 철저히 했다면 충분히 격퇴할,
-------------------------------> 군사적-경제적-과학기술 능력 모두를 갖추었기에 맥아더의 멍때림으로 치명적 후폭풍.
-------------------------------> 수학에서 유효숫자 개념, 이미 소수점 아래 첫째 자리에서 오차 발생했다면 10째 100째 자리 정밀 계산은 할 필요도 없는 시간 낭비.
-------------------------------> 중공의 개입 협박을 깡그리 무시하고 멍때린 자가 + 중공군에게 충격받고 핵폭 운운하다가 + 군통수권자에게 해임당했던 것.
맥아더를 해임한 미국 대통령과 정부의 판단이 더 합리적.
1949년 즉 한국전 발발 1년 전, 소련 최초 원폭 실험 성공. 즉 미국의 핵독점 이미 깨진 현실.
또한 중일전쟁 당시 일본은 만주 전체 + 북경-상해-남경 등 중국 핵심지역 점령 + 중국 해안선 사실상 거의 다 장악하고서도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 1949년 소련 핵무장 현실화 + 1949년 장개석이 대륙을 상실하고 대만으로 축출.
저런 조건에서 압록강 다리 다 부수고 + 중공군의 만주 보급기지 거점 서너 곳 폭격하면 승리 가능하겠습니까?
---------------------------------------------->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은 고작 1년 전 대륙 통일 완수하고 아직도 잔당 반군 소탕 와중에 한국전을 빌미로
----------------------------------------------> 미국과 장개석이 다시 대륙 회복에 나설 가능성을 차단 차원에서라고 판단해야 합리적.
----------------------------------------------> 즉 중공 입장에선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한반도 전체가 미국 세력권으로 넘어가는 것 방치할 수 없었던 것.
그리고 영국 미국은 원래 상륙 작전은 기본입니다. 또한 상륙작전 설계 및 실행 주체는 명백히 해군.
--------------------------------> 2차대전 북아프리카 횃불 상륙 + 시칠리 상륙 + 노르망디 상륙 + 남부 프랑스 엔빌 상륙, 1차대전 때 실패했지만 갈리폴리 등.
--------------------------------> 영국은 지난 수 백년, 지구 차원에서 전쟁 수행했는데 그 모두는 기본적으로 상륙을 전제. 2차대전 미영 연합국이 벌인 상륙 작전의 주도 세력은 미영 해군력.
--------------------------------> 미영의 지상군은 퍼날라지는 택배 배송품 수준의 수동적 역활이었으며,
실질적 상륙 작전 수행은 해군 + 압도적 공군의 엄호 한국전쟁 인천상륙 아닌 군산이건 어디건 일단 상륙만 하면 적에겐 치명타.
----------------------------------> 2차대전 노르망디 역시 반드시 거기여서 승리했던 것이 아니라, 어디건 상륙만 성공하면 독일군은 패배할 조건.
----------------------------------> 압도적 제공권으로 독일의 방어선 정보를 사실상 모두 획득했기에 독일이 A에 방어 집중하면 A 지역 피해 다른 B,C 선택하면 그만.
----------------------------------> 롬멜전사록에서 롬멜 역시 그런 점 밝힌, 미영은 상륙 지점을 선택할 권리가 있고 + 독일은 모든 해안선을 철저히 방어할 역량 없음을 인정.
----------------------------------> 따라서 여러 선택지들 가운데 오로지 노르망디여서 성공했다고 착각해선 안되는.
즉 인천상륙 맥아더의 천재성으로 과감히 벌인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전쟁 역전했다는 것은 냉정하게 본다면 착각.
--------------------------------> 맥아더 아닌 그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 인천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 상륙전 했었어도,
--------------------------------> 압도에 압도에 압도적인 해공군력으로 유엔군은 돌파구를 말들었다고 판단해야 합리적.
--------------------------------> 사실 냉정하게 본다면 인천상륙 없이 낙동강에서 북괴군을 돌파 섬멸했을 때 적의 타격이 더 컸을 수도 있습니다.
상륙작전은 애초 영국 미국과 같이 지구 차원에서 군사력 투사 적을 공격하는 세력이 취하는 것.
--------------------------------> 영불해협-지중해-대서양-북해를 건너야만 적을 공격할 수 있기에 필수적인 상륙.
--------------------------------> 한반도와 같은 좁아 터진 국지전에서 신규 상륙 병력 투입도 아닌 + 기존 투입된 병력 빼서 상륙??? 문제도 큰 겁니다.
그리고 진주만 기습 당시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아마 킴멜? 제독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문책성 해임.
--------------------------------> 만일 니미츠가 선배여서 킴멜 제독 보다 먼저 태평양함대 사령관 임명되고 그 직후 진주만 기습 당했다면 니미츠도 문책 해임당했을 것.
--------------------------------> 킴멜 제독 가족과 후손들이 21세기 최근도 명예 회복시켜달라는 청원도.
( 킴멜은 41년 2월 진주만에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부임. 미 태평양함대는 원래 미 서부 해안에 위치, 하지만 루즈벨트 명령으로 진주만으로 전진 배치. )
( 일본 위협 대비한다면서 태평양함대 사령부를 미 본토에서 진주만으로 전진 배치한 루즈벨트 + 지중해에서 영국의 타란토 기습 성공 및 영국측의 진주만 역시 타란토와 유사하기에 일본 위협에 철저 대비하란 경고 무시했던 루즈벨트 + 태평양함대 이전에 반대하던 제독을 해임하고 과거 루즈벨트가 해군성에 근무할 때 부관이었던 킴멜을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않히고선 진주만 기습당하자 해임 + 루즈벨트 자신의 멍 때림은 책임 안지고. )
---------------------------------> 맥아더 역시 필리핀에서 사실상 혼자 탈출한 책임을 물어,
---------------------------------> 진주만으로 해임된 태평양함대 사령관 처럼 해임시켰더라도 솔직히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던 위치.
---------------------------------> 필리핀 함락 당시 해임되어도 별 문제 없었던 맥아더가
---------------------------------> 미 해군이 사실상 주도한 태평양전쟁의 연합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일본 항복 받아낸 그 사실 자체가 보기에 따라선 넌센스.
---------------------------------> 냉정하게 본다면 태평양전쟁은 미 해군의 전쟁 + 태평양전쟁에서 미 지상군은 사실상 들러리 수준에 불과.
---------------------------------> 필리핀 상륙 따위는 하거나 말거나 태평양 전쟁 승패에 아무런 영향 없는, 보기에 따라선 미 육군과 맥아더 개인 위신 체면치레용 성격도.
---------------------------------> 필리핀 상륙은 미 육군 입장에선 반드시 관철시켜야 하는 육군의 역활 존재감 과시용.
맥아더는 자신의 능력으로 검증받은 제대로 된 실전 성과 탁월함??? 의문입니다.
1차대전이전 + 1차대전 + 전간기 + 필리핀함락 + 태평양전쟁수행, 원수가 되어야할 그 어떤 합리적 이유도 없는.
----------------------------------> 그리고 맥아더 주연 패튼 조연 흑역사 잊지 말아야.
----------------------------------> 대공황 당시 생계 어려움을 겪던 1차대전 참전 용사들이 그 동안 지급되지 않았던 참전 보상금 지급 시위하자,
---------------------------------->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던 맥아더는 공산주의 시위라고 폄하하며 패튼 중령에게 무력 해산 지시.
----------------------------------> 1차대전 참전 동료들을 향해 맥아더와 패튼은 장갑차까지 동원하고 + 가족들도 함께 있던 시위대 텐트 불사르며 강경 진압 부상자 발생하기도.
맥아더에 비해 실전 경험 훨씬 많은 패튼,
그 패튼의 실전 경험, 1차대전-전간기-2차대전 다 통틀어 본다면 이렇습니다. 1차대전 전 경험 제외. ( 세계대전급 아니며 + 강대국 상대 실전 아니기에 )
패튼은 과연 실전 경험 얼마나 많았을까요?
어림셈으로 간단히 추정하면 정말 믿기지 않는 놀라운 수치에 도달합니다.
패튼의 1차대전 + 2차대전 모든 실제 전투 기간 다 합산해도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수치가 되는
넉넉하게 추정해보죠.
1차대전 참전 실전 기간 ------------------> 후하게 1년 (실제론 불과 몇 개월 정도.)
2차대전 북아프리카 -----------------------> 3개월 (제대로 된 실전 경험 사실상 0 수준)
2차대전 시칠리 상륙 관련 --------------> 3개월 (시칠리 상륙 준비 빼고 실제 상륙 후 전투 길어도 1개월???)
( 1차대전 미국의 대독일 선전포고 1917년 4월경.
하지만 대규모 지상군 편성하고 대서양 건너 파병하는데 약 1년의 시간 필요.
준비 차원의 조사관들은 즉시 대서양 건넜지만 최초 소규모 선발부대는 18년 2월경 유럽에 도착 + 이후 축차적 대서양 횡단 병력 증강.
독일 항복은 1918년 11월, 대서양 건넌 미군이 유럽에서 부대 편제 제대로 갖추고 실전 투입은 독일 항복 얼마 전으로 6개월 내외로 판단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
저 1년 6개월이 패튼이 노르망디에서 미3군 지휘하기 전의 모든 실전 기간입니다.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만 따진다면 아마 몇 분의 일로 대폭 대폭 대폭 줄어서 솔직히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군요.
노르망디 이후 독일 항복 까지 ---------> 9개월 (패튼 투입 시점인 44년8월~독일 항복 45년5월)
즉 패튼의 실전 경험 기간, 후하게 평가할 때 이렇게 됩니다.
1차대전 + 2차대전 전체 ----------------------------------------------------------------------> 고작 27개월?, 2년 3개월.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한 수치로 줄이면 ------------------------------------------> 어쩌면 1년 될지 안될지도 모르겠군요.
즉 패튼은 2차대전 참전하고 살아남은 어지간한 미 신병 소총수와 비교해도 실전 경험 많다고 보기 힘듭니다.
미국은 전쟁 늦게 참전했으니, 처음 부터 끝까지 전투한 영국이나 독일의 생존한 참전 용사 대부분과 비교하면 짧았던 실제 전투 경험이라고 보아야.
장교들 실전 경험으로 비교해보면,
1차대전 발발 때 영국해군 초급장교 참전했던, 2차대전 때 제독급 장교와 비교하면 패튼은 새발의 피 수준.
저런 케이스의 영국 해군 장교 실전 경력은 1차대전 4년 + 2차대전 6년 = 10년입니다. 미국의 전쟁은 너무 짧았습니다.
패튼 저 정도 실전 경험 상태에서 시칠리 전투에서 겁장이 사병 뺨싸대기 발생.
맥아더는 패튼과 같이 야전에서 직접 대규모 전투 지휘한 경험도 없다는 점에서 맥아더의 원수 계급은 냉정하게 본다면 극단적 계급 인플레.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까지의 날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북아프리카 전역 미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캐서린 협곡 전투. 사실상 전멸급 패배 ------------------------------------------> 1943년 2월
2. 캐서린 전투 패배 후 패튼이 교체되어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 -------------------------------------------> 1943년 2월
3.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 1943년 5월
4. 시칠리 상륙 시작은 --------------------------------------------------------------------------------------------------------------------------------------------> 1943년 7월
5. 시칠리에서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 1943년 8월
튀니지에서 추축국 최종 항복할 때, 이집트에서 부터 진격한 영8군이 결정적 역활했습니다.
횃불(토치) 상륙했던 미영 연합군은 사실 보조 역활. 튀니지의 독일군 주방어선은 영8군에게 돌파당해 최종 항복.
냉정히 바라본다면, 사실 패튼은 북아프리카-지중해 전역에서 제대로 된 전투 경험 없습니다.
독일이 패튼을 특별히 두려워 할만한 그런 독일군과의 교전 경험 자체가 없었습니다. ---------------> 미국측 자가발전 성격.
롬멜 전사록에 미군에 대한 높은 평가 부분도 자세히 살펴보면 롬멜의 착각도 포함.
특히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롬멜의 생각에는 완전한 오류들 포함되어 있고, 그 오류는 노르망디 전역 부분 감수를
맡았던 롬멜 부관 출신이자 노르망디 전역에서 싸웠던 바이얼라인 장군이 각주를 통해 직접 수정 언급하기도.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영국의 기발한 상륙 장비 및 지뢰 제거 전차 등에 대해, 롬멜은
신대륙 미국의 창조성이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했는데 사실은 모조리 영국의 창의력에서 나온 결과물들.)
(전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배우지 못하는 영국군을 냉정하게 비판한 롬멜은,
영국과 달리 편견 없는 백지장 상태의 미군이 오히려 더 빨리 실제 전투에 적응했다고 대단히 미군을 높이 평가했는데,
실상 롬멜은 미군 특히 패튼과는 단 1번도 교전해본 적 없었고 롬멜의 신대륙에 대한 편견 환상도 큰 역활.)
(당시 인구 5천만에 최대 징집된 상태의 영국군은 인명 피해를 지극히 우려해 소극적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영국 인구를 압도했었고, 참전이 늦어 그 때 까지 인명 손실 자체도 미미 그 자체라 여유가 있었던.)
(영국이 아무리 졸전을 벌이거나 대패해도, 영국군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습니다. 즉 기본은 철저했던.
당시 독일군 장병들의 평가에서도 미군은 자신들이나 영국군 보다 스킬-숙련은 없지만 단위 부대에 투입되는 화력 압도적
이어서 그 화력에 바탕한 전투 수행을 한다는 기록도 많은.)
(영국이 당시 만일 소련이나 미국 정도의 거대한 인구를 가졌다면, 독일군이 대전 초 그렇게 활약하기 힘들었을 것.)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 패튼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주력군, 패튼은 사실 구경도 해본 적 없다가 정확할 겁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독일 주력을 고착 소모시킬 때, 브리들리 미1군이 코브라 돌파했을 때도 패튼은 대기 중.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약 80%를 영국-캐나다 연연방군이 상대. 당시 독일 타이거 및 판터 전차 격파할 전차포 갖춘 전차는 영연방군 파이어플라이 정도.
코브라 돌파 후 패튼이 신규 재편성된 쌩쌩한 미3군 이끌고 쾌속 진군해서 독일군이 패했겠습니까?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군은 깡에서 영국군에게 고착 소모 및 브래들리 미1군에게 돌파당해 붕괴된 겁니다.
실제 코브라 돌파를 해낸 브래들리의 겸손함과 지극 대비되는 패튼이었음은 부인하기는 불가능.
노르망디 전역 깡에서 그렇게 고전했던 영국군 역시 코브라 돌파 후 노르망디 전역 붕괴되자,
해안선을 따라 베네룩스 3국 거치면서 쾌쾌쾌속 진군, 아주 단기간에 수 백km 전진해서 마켓-가든 직전 까지 도달.
롬멜과 단 1번도 교전하지 못한 패튼이 어떻게 롬멜의 최대 맞수 라이벌이 될 수 있습니까? --------------------> 할리웃 선전!
독일 지상군과 본격적 교전, 노르망디 이후 1년도 안되는 짧았던 미국이 과연 독일의 주적? ---------------------> 어불성설.
저 짧았던 1년도 안되는 북서유럽 전투를 배경으로,
1970년대 부터 전투(컴뱃) 시리즈 및 2000년대 이후 제목 조차 표절 성격인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리즈로 전세계에 선전.
패튼이 미3군 지휘 맡기 직전 까지의 실전 경험 기간 따져본다면, 최대로 산정해도 6개월.
그 6개월 중 43년2월~43년5월 기간은 사실상 실질적 전투 경험 없었던. 즉 냉정하게 패튼의 실제 전투 경험 산정한다면
시칠리 상륙 때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 조차도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 산악 지대에서 격렬한 전투 수행했었고, 미군은 상대적
으로 낮은 강도의 전투를 평지에서 치르며 더 빨리 진군했던. 몇 시간 빨리 도시 진입하면 독일군 쳐부순 것이 되는 겁니까?
저럼에도 패튼이 이렇게 널리 알려진 이유.
벌지전투가 아마도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지상군 최대 단독 승리였기에 그랬을 것.
하지만 벌지전투 역시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당시 패튼의 위치에 다른 미군 지휘관 누가 있었더라도 독일군은 돌파할 수 없었던.
날씨만 잠시 개이면 그 즉시 독일군은 무력화되는 상태. 저 때 패튼이 서부연합군 전선 붕괴와 패전을 막았던 것 아닙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냉정하게 벌지전투를 바라본다면,
왜 독일군이 하필 그 지역을 공격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부터 냉정하게 고려한다면,
--------------------------------------------> 거기가 당시 서방 연합군 최전선 중에서 가장 약했던 곳이었기에 그랬을 것.
--------------------------------------------> 설마 독일이 국가와 군의 명예-자부심을 걸고 가장 강력한 방어선을 선택해 공격했겠습니까?
--------------------------------------------> 독일 최후의 공세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선 미군에 대한 푸대접일 수도 있는 겁니다.
------------------------> 하지만 독일의 그 푸대접 선택이,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단독의 최대 지상전 승리가 되었던.
저런 성격들 있음을 고려하면서 패튼 냉정하게 바라봐야.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2차대전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 약 80%를 영국-캐나다군이 상대.
당시 미군은 실전 경험 사실상 전무했던 신병들로 구성되어, 독일 주력 상대 불가능해 영국군이 독일 주력 담당.
노르망디 전역에서 영국-캐나다군이 독일 5호 판터 및 6호 타이거 전차를 상대로 어떻게 싸웠는지 소개하죠.
1. ua-cam.com/video/cNGGt1ORO-0/v-deo.html
Sherman Firefly vs King Tiger | July 1944 | Tank Duel ----------------------> 44년 7월 18일, 파이어플라이 서부전선 최초 킹타이거 격파.
2. ua-cam.com/video/V-jGdZ5XWNM/v-deo.html
Sherman Firefly vs SS Panthers - Tank Battle At Normandy, France ------------------------------> 44년 7월 9일, 캐나다군 파이어플라이 판터 7대 격파.
3. ua-cam.com/video/IrEtdMkFA00/v-deo.html
Tank Battles of WW2 - The Firefly Ace that knocked out 5 Panthers with 5 rounds ------------------> 44년 7월 14일, 파이어플라이 1대가 5번 사격, 5대 판터 격파
노르망디 전역에서 미하일 비트만이 탄 타이거 역시 영국군 파이어플라이에게 격파당해 전사.
4. ua-cam.com/video/R4LyLCOUkzI/v-deo.html
Cromwell vs 2 Panther tanks | September 1944 | Tank Duel ----------------------> 노르망디 돌파 후 44년 9월 19일 네덜란드, 영 크롬웰 전차 판터 2대 격파.
파이어플라이와 같은 17파운드 포를 장비한 크롬웰도 판터 타이거 격파 가능. 크롬웰은 당시 전차 중에선 기동성 가장 좋아 최고 속도 시속 약 65km/h.
영국은 북아프리카에서 타이거와 첫 교전 후 대응으로 43년 무렵 MBT 개발 시작,
그 사이 과도기에 미 셔면에 17파운드 포를 장착한 파이어플라이 및 크롬웰 등으로 응급 조치하며 버틴 것.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 때 미군은 타이거 판터 대비 측면에선 사실상 멍 때렸던. 영국은 종전까지 약 2천대 파이어플라이 생산했고,
노르망디 상륙 때는 파이어플라이 생산 초기여서 초기 생산분 약 350대를 투입했다고.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약 80%는 영국군이 담당.
노르망디 전역에 투입된 미국과 영국의 전차 중에서 전차포로 독일 판터나 타이거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군 파이어플라어-크롬웰 정도.
파이어플라이 역시 약한 장갑 때문에 극심한 피해를 당했지만, 독일 타이거나 판터 역시도 파이어플라이에게 먼저 공격당하거나 매복에 걸리면 격파당했기도.
노르망디 전역은 이미 독일군이 방어진지를 구축한 이후에 벌어진 전투로, 탁 트인 들판에서 전차가 고속 기동하는 전투 아닌 보카쥬 지형에서의 매복성 전차 전투.
처음엔 공격하는 영국군 전차가 매복한 독일군 전차에게 당하는 위치였지만, 전투가 계속되면서 독일군 전차도 영국군 매복이나 배후 침투에 당해 격파되었던.
독일의 그 어떤 전차라도 격파할 수 있는 전차포를 가진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겁니다.
원거리에서는 약한 장갑 때문에 독일 타이거에게 당할 위험이 컸지만, 보카쥬 지형에선 원거리 아닌 근접 전투도 많았기에 파이어플라이는 나름 역활을 한.
하지만 미군의 일반적인 셔면은 판터나 타이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독일 패전 직전인 1945년 1월, 2대의 독일 판터가 21대의 미 셔먼과 교전했을 때 ----------------> 셔먼 9대 격파 + 셔먼 12대 포획.
만일 보통의 셔먼만 아닌 파이어플라이와 혼성 편성되었다면 판터의 저런 전과 불가능. 45년에도 저랬으니 실전 경험 없었던 44년 노르망디에선 더 취약했을 것.
2 SS Panthers vs. 21 US Shermans
ua-cam.com/video/86K0ncTkAkA/v-deo.html
1945년 ( 영 최초 MBT인 센츄리온의 직전 모델인 ) 실전 투입된 마지막 순항전차 코메트.
ua-cam.com/video/tRxU0B8cybY/v-deo.html
Comet Tank vs Tiger Tank | April 1945 | Tank Duel ----------------------------> 45년 4월 종전 직전, 영 코메트(센츄리온 직전 모델) 타이거 격파
여기 영상의 코메트 모습은 현대 주력 전차 유사, 하지만 센츄리온으로 바로 대체된. 최초의 MBT인 센츄리온은 너무 늦게 투입되어 실전 경험 없었음.
ua-cam.com/video/0AnoySTfvFM/v-deo.html Centurion - Tiger Tank's Nemesis
1945년 5월 8일 독일 항복.
독일 항복 직후인 5월 14일, 센츄리온 6대 영 항구에서 선적, 몇 일 후 안트워프 항에 하역.
최전선 소련군 점령지 경계까지 약 400마일 자력 기동 영국군 기갑부대 배속, 영 미 탱크들과 함께 대규모 야전 기동 훈련 후 7월 귀환.
----------------------------------------------------------------------------------> 2차대전 종전 당시 미 퍼싱, 영 센츄리온 등장으로 이미 독일 전차의 질적 우위는 끝난 상태.
정전회담 이야기인가?!
레드갱이들 다 때려부수는 그날까지 싸우자
싸우자고 떠드는 꼰대 노친네들은 뒤에서 유튜브로 전쟁 쳐보고 젊은이들은 나가 싸우다 죽으라고? 니들부터 총알받이로 나가던가
시징핀이 트럼프에게 한국은 중국의 일부라고 했던말을 잊으면 안된다 대만 다음 우리다 이번 북중의침략 막고난후 만주회복 협상은 우리가 직접나설수있도록 정치적 군사적 준비를 완료해야한다
아...이런 아무 근거없는 유언비어 퍼뜨리는 인간이나 그걸 믿는 인간이나
좋아요 누르는 인간이나..한심하다.
시진핑이 트럼프한테 한국은 중국의 일부라고 했다고?
너 정신병자냐?
협상은 트럼프지
백선엽 감회가 새롭겠네 영미귀축을 주장하다 웃는 얼굴을 대하려니 장평산은 조선의용대 출신의 독립운동 경험이 있습니다
독립운동을 경험했지만 남녘의 동포에게 총부리를 겨누다니...
@@우라칸-l8d 마찬가지지요 자칭 독립운동가라면서 자기 국민을 파리잡듯 잡아죽인 국부 리승만도 있는데 ㅋㅋ
@@푸른이리-d5v 앗 그러면 이승만도 개xx고 장평산도 개xx군요..
625를 1년동안 할줄이야
유엔측은 정말로 정전을 하기 위해서 정전협상에 임한 반면 공산측에서는 정전협상을 그동안 입은 손실을 메꾸고 병력을 증강하여 재공격을 할 기회로 삼았습니다. 공산측이 정전협상에 임한 마인드는 이 말 한 마디로 드러납니다. "협상도 전쟁의 일부이다"
그럼 협상도 전쟁의 일부지.
전 전선에 걸쳐 어제까지 피터지게
죽고죽이던 양측 백만명의
군인이 실시간 풀무장 하고
대치하고 있는데
협상은 전쟁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게
더 병신 아니냐?
공산측이 정전협상 장소를 개성으로 고집한 목적은 분명합니다. 개성 및 개풍군 지역이 공산군의 점령지였기 때문에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것. 애초에 저놈들의 제안에 말려들면 안 되었고 중립국이나 원산 앞바다 병원선으로 했어야만 했는데 휴전을 서두르려는 워싱턴 본부의 일방적인 판단 미스로 시작부터 공산측의 속셈에 말려드고 만 것이죠
백선엽은 논란이 많은 군인이죠..
당시 미국정부는 왜이리 무능했냐 ㅋㅋㅋㅋㅋㅋㅋ
김보영 사상 검정바랍니다
지금도 북한한테 놀아나는 우리나라에많음 ㅉㅉ
이렇게 말하는 당신같은 사람도 많지.
간첩 보면 신고해서 5억 받고 부자되라.
댓글쓰고 다니지 말고.
@@JP-vb3rv 네 ㅉ
백선엽 이미지 세탁 끝내주네
6.25 졸라 오래도 하네
이거 끝나고 베트남 전쟁할듯ㅋㅋ
윤석렬이 빨리 내려와야
좀 세계적인 전쟁사도 다루고 할텐데
독소전 언제 할래
세환이형 수트핏 난다 멋있네
공산 진영에서 했던 악질적인 떼쓰기 전술은 정확히 민주당이 하는 짓거리군
대표단의 인원수를 보고 전쟁의 주체가 누군지를 알 수 있다니 미첬구나ㅋㅋㅋㅋㅋ 그런 지력으로 뭔 연구를 한다는거야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