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츠학님 좋은 영상 매번 감사합니다. 저는 장로교인으로 자라왔고 지금도 장로교인 입니다. 하지만 구원론의 메커니즘에 있어서 칼빈의 주권 강조와 인간의 책임의 양립에 대해서 깊이 공부하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다. 이중예정에 있어서 저명한 설교자들 R.C. Sproul 이나 John Piper 목사님들도 매우 긍정적이게 평가하는데 이 영상 7:39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그 분들을 하이퍼 칼빈주의자로 분류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마 이중예정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일반 칼빈주의 처럼 출애굽 때의 파라오나 비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passive hardening of the heart(수동적 유기; passive reprobation)를 믿는다면 과격한 신학적인 스탠스를 피할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마서 1:24). 선행적 은혜가 있다고 가정하면 선행적 유기도 있는 것인가요? 이를 통해서 이중 예정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전적 타락으로 인한 죄에서 자유롭지 못해 선을 행할 의지의 부족함을 강조했지만 어거스틴은 선행적 은혜와 타락의 원인에 있어서 자유의지와 인간의 책임을 인정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구원론에 있어서 저는 어거스틴 쪽으로 기우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장로교회에서 자란 30대 입니다. 감리교인인 제친구는 목회의 길을 걷고있어요 그 친구와 이야기하다보면 예를들자면.. 하나의 사과를 보고 왼쪽에서 바라보냐 오른쪽에서 바라보냐의 차이일 뿐이지 하나의 사과를 바라보고있다는 생각이 들었었거든요 ㅎㅎ 아주 명쾌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래오래 목회해주세요^^응원합니다
다만 이 채널이 지지하는 쪽은 이중예정 쪽이긴 할 거예요. 전에 제가 이 채널 주인 분과 라이브에서 대화를 나눠본 바, 지옥 갈 사람은 지옥 가게끔 살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닌가 라고 말씀드려 봤더니, 그게 맞고 그러면 왜 안 되냐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사실 전지성 관련해서는 논리적으로 그게 가장 맞긴 하고요...
구원받은 자는 선한 열매로 구원받지 못한 자는 악의 열매로 자신을 드러내게 되겠죠 개역개정 마태복음 7장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번에도 흥미로운 영상 감사합니다. 중간에 다양한 이론들을 비교하는 표를 보니 이중예정과 구원 취소가 없음을 하이퍼 칼빈주의로 분류를 해놓으셨던데, 이 두 가지는 일반적인 칼빈주의 범주 내에서도 받아들여지는 사항아닌가요? 잘은 모르지만 인간 행위의 완전 무의미, 전도 무의미, 율법 폐기 이런 정도의 주장으로 나아가는 것이 하이퍼 칼빈주의라고 알고 있어서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인격을 비인격적 존재로 만들게 됩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에 지배당하는 분인가요?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다 쓰지 않습니다. 부모도 자녀들에게 자신의 주권을 다 요구하지 않고, 참고, 양보하고, 절충하고, 포기합니다. 그것을 인격이라고 합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십계명 제 2계명을 범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원하는 방식으로 깎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선한 인품의 하나님십니다. 전능하다 할지라도 그 전능함을 다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다 알아도 다 안다고 하지 않고 알아보려하십니다. 하나님은 프로그램된 컴퓨터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로 이해할 때, 하나님을 바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제가 아르미니우스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이든 논리적으로 질문해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제가 드리는 질문들에 어떻게 답변하실지 궁금합니다. 1. 아담이 죄를 짓는 순간에도 개입하지 않으실 정도로 개인의 선택과 의지를 인정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믿다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돌아서면 그들의 선택과 의지를 무시하시는지? 2. (1번과 연결)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써 인간이 어떤 선택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용"을 하셨다면 인간이 구원을 받았다가 다시 반납하는 선택 조차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계획 아래에 허용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3. 로마서 8장에서 사랑을 "끊을 수 없다"고 했는데 (영어로는 separate) 그렇다면 만약 사랑을 밧줄에 비유하면 아무도 끊을 수 없는 쇠밧줄일지라도 만약 내가 손을 놓아 버린다면? 4. 구원이 변치 않는 것이라면 사탄은 왜 아직도 신자들을 유혹하는지? 5.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자에게만 성령이 있을 수 있는데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는데도 용서받지 못하고 구원 못받는 사례가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닌지? 6. 구원의 확신이라는 개인의 감정이 실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유효성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쉽게 말해서 만약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면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확신이 있은 없든 상관이 없는 것 아닌지? 저는 사실 칼빈주의의 가장 큰 맹점이 "이신칭의"를 너무 강조하다보니 가톨릭 측에서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데? 너희 말대로 행위로 구원을 받는게 아니라면 우리가 마리아한테 기도하고 성상에 대고 기도해도 괜찮은거 아니야?"라는 반박에 논리적으로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너네가 구원을 못 받는 이유는 하나님께 선택을 받지 못 했기 때문이지!!!"라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선택"만을 앵무새처럼 읊어댔던 것에 있다고 봅니다. 결국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과 그 열매로써 마땅히 나타나야 하는 행위가 성경에 근거하여 둘 다 정립되어야 문제가 해결되는데 믿음만 가르치고 행위는 ㅎ자도 못 꺼내게 "무조건 믿음!" 이러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제 사견을 써봅니다 1. 돌아선 그 사람이 죽을 때 까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당장 제 지인도 하나님 없어, 안 믿어, 교회 안갈꺼야 하다가(방치일까요?) 몇 년 만에 돌아오셨죠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죽을 때 까지 가봐야 안다고 생각합니다 (선한 길로 인도 하시리라 믿습니다) 2.구원을 반납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논리적으로 보면 자기가 구원을 거절 했다고 생각하지만 애초에 이런 사람은 구원 받는 사람이라 예정 되어 있지 않은 버림받은 사람이 아닐까요? 3. 역설해서 나의 어떠함과 선택으로 인해 끊어질 구원을 하시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실까요? 4. 죽을 때 까지 끊임 없이 유혹할 것입니다 유혹은 사탄의 당연한 일이자 사명이고 존재 이유?라고 할까나요 제 몫을 하는 것 일뿐 그렇다고 구원이 변할까요? 5.(일단 전제가 잘못 됬습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가 아니고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막3:29) 사례가 있을까요? 사례가 없는 게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시인한다는 개념 자체가 그냥 아무 일반인이 "저는 예수님을 주로 시인합니다" 라는 문장을 읽었다고 그 일반인에게 성령님이 함께하실까요? 시인한다는 개념 자체가 단순한 말이아닌 영혼의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이 함께하시는데 용서받지 못하고 구원 받는 사례가 존재x 6.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이 개인의 감정일까..? 믿음도 o와 x 가 아니라 1~10까지 성장하는 과정과 단계가 어느정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깊어지고 넓어지는? 성화의 과정 이라고도 하죠 (성경에서 믿음은 자라난다 라는 표현이 많습니다) 제가 느끼기엔 아직 전반적인 질문이 신앙적 경험 이랄까요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시면서 인생을 살다보면 본 질문들의 많은 답을 하나님을 통해 얻으실꺼라 생각합니다 칼빈주의의 이신칭의는 결국 말하신 행위(가톨릭의 면죄부 등) 가 구원의 많은 영향을 끼치는 시대에서 살았기 때문에 더욱 그럴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종교개혁을 통해 기존 가톨릭에서 나오기도 했구요 당연히 성경속 사도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행위에 대해 쭉 읽어보시면 결국 믿음=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은 나뉘는 것도 분리되는 것도 아니며 동일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위로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영상에서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어차피 난 하나님 믿고 믿음이 있으니 구원 받았으니까 세상에서 막살고 죄 지어도 괜찮아 라는 전제를 가진 것 자체가 이미 맛탱이가 갔다니깐요? 어느 머리에서 이런 논리가 나오는 것이죠? 본인에게 이런 논제가 성립합니까? 말 그대로 세상 사람들 머리에서 이런 논리가 나오는 것 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사람들에게 얘기해야겠습니까? 위에 목사님 처럼 하면 되겠습니다
@@새송홀릭 답변 감사합니다. 애석하게도 거의 대부분 들어본 답변들이고 논리적인 한계가 분명한 것 같습니다. 1.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돌아가신 분들의 사례는 어떻습니까? 칼빈주의에서는 너무나도 간편하게 “그 사람은 원래 믿음이 없었을 뿐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선택을 받지 못해서 그런거야”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명제를 진리로 못박아 놓고 결과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2. 그것은 논리가 아니라 모순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예정에 의한 것이고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데 나중에 그것을 반납했으면 사실은 예정이 된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논리가 전개가 된다면 애초에 그 사람이 구원을 처음에 받는 일조차 없었어야 합니다. 3. 반례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데 왜 아담을 지으셔서 죄를 짓도록 내버려두셨죠? 마찬가지로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고 절대적인 주권이 있으셔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비유적으로 얘기하겠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노예를 사서 풀어주면서 왕의 권한으로 자유인의 신분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의 어떤 사람이 와도 그 사람을 더 이상 노예 취급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유인이 된 그 사람이 그 나라 백성이 되기를 거부하고 다른 나라로 건너가면 그 왕의 권위가 손상이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출입국 사무소에 있던 모든 직원들은 왕의 권위로 내려진 “그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내버려두라”는 명령에 순종을 한 것이고 왕의 권위는 그대로 지켜진 것입니다. 4. 공중 권세를 잡은 마귀가 두루 다니며 삼킬 영혼을 찾아 다닌다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냥 유혹하는 것이 사명이 아니라 영혼을 집어 삼키는 것이 사명입니다. 마귀가 성도들을 계속 유혹을 하는 이유는 성도들이 유혹에 넘어가 계속 죄를 짓다보면 죄에 무뎌지면서 자기 죄를 죄라고 하는 교회와 하나님이 나쁘게 생각이 들면서 결국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5. 성령을 받아 예수를 주로 시인하던 자들 중에 성령을 모독한 사례가 없다니요? 칼빈주의적 관점에서는 그 사람들이 “진짜로 예수를 시인한게 아니고 진짜로 성령을 받은게 아니니까” 사례가 없다고 주장하시는건가요? 그것은 명제를 이미 진리라고 못박아놓고 시작하는 전형적인 오류입니다. 6번에 대해서는 사실 크게 중요한 질문은 아니므로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반론하지는 않겠습니다. 마지막 하단부에서 상당한 영적인 교만이 느껴지네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충분히 인생을 경험해야지만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쎄요... 그런 분들 중에서도 저랑 똑같은 의문 내지는 견해를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으신데 자동적으로 “경험해보지 못한”분들이 되시는건가요? 덧붙이자면 저는 막 살고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논리에 동조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행위로 나올 수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그 행위를 누가 규정하냐는 것입니다. 제가 예를 들었던 것처럼 우리 개신교 입장에서 가톨릭은 우상 숭배를 하므로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개신교 내에서도 돈이나 명예를 우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 역시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으며 견인의 역사로 성화되는 과정”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도중에 이탈한 사람들에게는 “애초에 참 믿음이 없었다”고 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상황에 따라 자기 편의에 맞게 해석하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세계 중심의 구원관은, 그것이 어느 평형 위치에 있을 때에 세계의 역사와 그 안에서 모종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 자아의 역사에 대해 어떤 목적의식과 세계의 존재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세계의 역사에 목적(의미)이 부여되고, 세계의 존재에 가치가 부여될 때, 그곳으로부터 자신의 (삶의)목적과 가치도 노정될 수 있다. 그렇게 노정된 개념(세계관, 가치관)으로부터 자아(개인, 존재)의 구원이 구성될 수 있다. 자아로부터 시도된 구원관은 세계와의 관계와 보다 객관적이고 분명한 구원관의 형성을 불가능하게 한다. 즉 주관적이고 모호한 구원관으로 자아를 포섭하게 된다. 기독교적 구원관이 이미 그 구원의 중심을 자아(개인, 존재)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고, 존재세계관 역시 (내재적으로는)세계 중심의, 그리고 보다 초월적으로는 신 중심의 구원관을 제시한다. 자아 중심의 구원관이 자아의 보존을 절대선으로 하게 되는 것 즉 일반적인 구원관을 설명할 수 있는 것과 대비되어서, 세계 중심의 구원관, 또는 보다 초월적 개념으로서는 신 중심의 구원관은 기독교적 구원의 특징적 요소들, 즉 죽음과 부활의 요소들을 가지는 카타르시스(반전)적 가치관을 설명하게 된다. 두 구원관의 차이는 이와 같이 그 구원관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서, 논리적인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적 구원관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세계(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를 사랑(신앙)하는 자아(개인, 존재)의 개념을 지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알미니안에 대한 설명은 매우 유익했지만, 후반부, 구원론에서 논리적으로 언뜻 이해가 어려운것이 구원= 하나님이 하신일 비구원= 자신이 한일 입니다. 여러 내용을 보완하여 위 내용에 동의해도 여기에 '예정'이란 개념이 끼어드니까 논리적으로나 직관적으로나 꼬여버린다고 생각합니다.
왜 비구원은 자기가 한 일이냐면 애초에 모든 인간은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의 노예의지를 가지고 있걸랑요. 인간은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모두가 하나같이 구원을 거부하게끔 만들어졌습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구원을 받아들이지 못하게끔,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해주셔야 믿게끔 만들어졌어요. 그럼 그렇게 만드신 분은 대관절 누구인가? 이게 문제지만요. 여기에 더불어 예정론이 전제하는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의 논리적 귀결인 결정론까지 더해지면? 사실 논리적으로 이걸 깰 수 없다는 걸 이츠학님이든 아델포스님이든 다 아실 겁니다. 과거에 양시무스님이 라이브에 나오셔서 이츠학님께 가르쳐주시기도 하고 그랬어요. 요컨대 논리적으로 그냥 답이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결국 신비로 퉁치면서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고 믿으면 된다로 빠지죠. 거기서부터는 논리고 뭐고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가 하나같이 스스로의 의지로는 구원을 받아들이지 못하게끔 태어났거든요. 비구원을 선택하게끔 태어났거든요. 그게 인간의 노예의지죠. 다시 말해 모두가 하나같이 스스로의 의지로는 구원을 선택하지 못하게끔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택자로 하여금 구원에 대한 의지를 작동시켜서(마치 다크아칸의 마인드 컨트롤처럼) 믿게끔 만들어졌습니다. 그럼 인간을 그렇게, 스스로의 의지로는 구원을 거부하게끔 만드신 분은 대관절 누구인가? 라는 게 문제지만요. 더불어 예정론이 전제하는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이 결정론을 함의한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인간에게는 애초에 자유의지 자체가 아예 없었던 게 되죠. 결정론적 세계의 모든 사건들은 그 세계를 결정론적으로 주조한 신의 자유 선택이자 창조 결정으로 수렴하니까요. 요컨대 예정론적 세계에서 모든 사건들의 주체란 개별자가 아니라 오직 신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츠학님도 아델포스님도 이걸 논리적으로 깨지 못한다는 건 하실 거에요. 전에 라이브 방송 때 양시무스님이 찾아오셔서 이츠학님한테 이거 가르쳐주고 그랬었죠. 논리적으로 대답 못하니까 결국 신비로 퉁치게 되고요. 예정론 관련 담론의 전형적인 래퍼토리입니다.
@@HB-nb4pf 하이퍼 칼빈주의를 묘사할때 예정의 방법중 이중예정을 포함시켜서 그렇지 않을까요? 이중예정을 믿는다 해서 꼭 능동적 유기(하나님꼐서 작정하고 지옥갈 사람들을 태어나기도 전에 만드심 혹은 지옥갈 비신자들이 하나님을 알수없도록 설계하심)를 믿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근본주의라느니 보수 유튜버랑 똑같다느니 뭐 그런 단편적인 비판은 저도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뭣보다 보수적으로 믿을 수도 있다고 보구요. 어떻게 믿든 자유이지요. 다만 논리적으로 어떤 부분이 취약한지, 그와 관련된 얘기를 조금 드려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문자 그대로 참이라 함은, 구원받는 것뿐만 아니라 구원받지 못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귀책이란 것이죠. 물론 구원문제뿐 아니라 모든 것이, 살인도 학살도 하나님의 행위란 뜻이구요. 칼빈주의가 함의하는 전지성이 참이어서 결정론도 참이라면, 결정론적인 이 세상의 모든 결정론적인 사건들이 하나부터 열끝까지 우리 세상을 결정론적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행위로 수렴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칼빈주의자들 중에서도 하여튼 구원 말고는 자유의지 있다는 분들이 계시지만요. 논리적으로는 모순이죠. 알미니우스주의도 결국 전지성과 자유의지를 양립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모순이지만요. 다만 1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어쨌든 알미니안들은 눈가리고 아웅으로 악의 문제는 커버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인간의 불신 내지 배반은 그 자신의 책임이 되거든요. 하지만 칼빈주의적 세계관 하에서 인간의 불신이나 배반은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그렇게 지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 본인이시기에. (그 이전에 인간을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드신 것 또한 물론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창조해 놓으시고 결국 믿지 않고 지옥 가게끔 살도록 결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기에. 요컨대 불신자들은 사실 불신이라는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선택은 물론 하나님이 하시지요. 이때 선택이라 함은 단지 택정이나 유기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의 불신 또는 배반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실로 진실로 불신하고 배반한 주체는 하나님 본인이 되시는 거지요. 우리 세계의 유일한 주체는 오직 하나님뿐이니까. 다른 존재는 모두 인형에 불과하니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전선하실 수 있습니다. 토기장이 비유 시전하면서. 인간은 하나님의 선악판단에 불평할 수 없다고 하면서요.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정말로 선악을 그렇게 설정하신 거라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설정하셨다고 칼빈주의자들이 해석하는 거지만요. 정확히는 그 해석에 대해 반박하면 나오는 전형적인 래퍼토리 같은 거죠.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감히 인간된 시선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려 들지 마라! 이러면서 말입죠. 뭐 하여튼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고 인간은 감히 불평할 수 없다고 해석할 수도 있긴 하지요. 다만 그 모든 해석을 긍정해준다 하더라도 세계의 유일 주체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불평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 불평의 주체가 아닙니다. 그 불평의 주체 또한 물론 하나님입니다) 살인도 학살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 하셨고 인간은 선도 악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까지 시인할 수 있어야지요. 따라서 타락 가설도 기각입니다. 왜냐하면 예정론이 참이고, 예정론이 함의하는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도 참이라면, 결정론도 참이어서 인간에게는 일말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으니까요. 노예의지조차 없습니다. 자유가 아예 일말도 허락되지 않는 세계에서 타락이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타락 전에나 후에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타락 전에나 후에나 전지하시기에. 타락 전에나 후에나 그 어떤 자유도 없었던 까닭이지요. 요컨대 아담은 선악과를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선택하는 주체였던 적이 없기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에 대한 진정한 주체도 물론 하나님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양시무스님이 이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긍정하는 점 하나만큼은 정말 높이 평가합니다. 양시무스님은 예정론이 참이라면 논리적으로 타락이 불성립한다고 일전의 대화에서 인정하셨습니다. 물론 그걸 온전히 받아들이기란 무리라서 양시무스님께서도 그냥 전지성과 자유의지가 양립 가능하다고 비논리적으로 믿는다 하셨지만요. 좌우간 비논리적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인정한다는 점에서 보통의 칼빈주의자들보다야 한참 낫다고 볼 수 있겠지요. 예정과 자유의지 문제를 다소 벗어난 관점에서 보자면 구원과 인간 심리의 역학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진실로 믿게 된다면 배반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요. 허나 구원취소도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정녕 다 정해놓으셨냐 아니냐의 문제의식이라 봅니다. 물론 알미니안들도 전지성을 포기할 수 없었는지 예지예정 같은 도피처로 빠졌지만요.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을 포기 안 하면 결국 자유의지 불성립으로 귀결될 뿐인데 말이죠. 다만 어쨌든 구원에 대해서도 자유의지를 비논리적으로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즉 하나님에게로 인간의 불신 내지 배반을 귀책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귀책마저도 하여튼 선하다 한들, 귀책 자체는 유신론적 결정론 하에서 논리적으로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악의 문제에 대한 나름의 돌파구를 마련해 보려던 시도였던 셈이라 보구요. 예정론이나 전지성과 관련된 무수한 논의들이 이와 비슷한 구도를 갖추고 있다고 봅니다. 신비로 퉁칠 것이냐, 아니면 정직하게 논리적으로 다 받아들일 것이냐 그것도 아니면 비논리적이라는 자각조차 못하는 수준에 머물 것이냐
답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결론적으로 캭하님은 예지, 예정-자유의지 사이의 어려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어떤 해석의 결론을 내리신건가요? '대안 없는 비판은 누구나 할수 있다' 라는말을 제가 평소에 새기고 살아서 여쭤봅니다.. 케노시스 신학?쪽인가요? 시비 아니고 정말로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sjrho640 저만의 어떤 독창적인 대안이 있다기보다는 저도 이미 나와 있는 여러 가지 대안적인 설명들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다만 기본적으로는 심플하게 예지가 성립하는 영역에서는 자유의지가 불성립하고 자유의지가 성립하는 영역에서는 예지가 불성립한다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 문제에 있어서는 원론적으로 자유가 열려 있어야 악의 문제를 회피할 수 있다고 보구요(적어도 유기의 이중예정은 수용하기 곤란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전지하시지 않다는 거냐! 라고 반론하는 분들도 물론 계시겠죠. 지금껏 수도 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지가 불성립하는 영역에서는 하나님도 어떤 미래가 실현될지는 아실 수 없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나 이는 전능역설 해결법이랑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논리적으로는 하나님의 전능도 완벽하게 성립하지 않아요. 들 수 없는 바위를 들 수 있냐거나 네모이면서 세모인 도형을 그릴 수 있냐 같은 문제들 말입니다. 이는 개념적으로 성립이 불가능한 논제들입니다. 그러나 이를 하나님의 불능이라 해석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조하신 우리 세계의 섭리 내지 이치쯤으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식으로 해결하죠. 전지성과 자유의지의 양립 문제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구요(나이브하게 전지성의 제한이라고도 부르는 설명이죠). 그리고 이건 여담입니다만, 이런저런 설명을 주절거려 놓긴 했으나, 저는 사실 대안이 꼭 있어야 유효한 비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안이 전혀 없었더라도 전지성과 자유의지 양립 문제가 초래하는 악의 문제와 귀책 문제는 여전히 유효한 지적일 것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실 수는 있겠죠. 다만 누구나 할 수 있든 말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게 논리적으로 합당하냐 그렇지 못하냐가 중요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애가 할 수 있는 비판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자각하지 못하거나 자각하고 있더라도 인정하지 못하는 설명에 대한 타당한 비판이라면, 누구라도 충분히 해볼 수 있는 거죠. 뭐 대안을 제시하면 더 좋겠지만요. 아몰라 그냥 비논리적으로 믿을래 해도 뭐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윤태민-z5g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함은 예정과 관련되어 있는 설명이라 볼 수 있고, 예정론과 예정론이 전제하는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은 결정론을 함의한다. 결정론적 세계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성립하지 않는다. 결정론적 세계의 모든 사건들은 그 세계를 결정론으로 창조한 신의 창조 결정이다. 즉 결정론적 세계에서는 신 이외의 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건들의 진정하고도 유일한 주체는 신뿐이다. 살인도 학살도 신의 행위로 귀착된다. 따라서 타락조차도 불성립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취식한 결정도 아담의 결정이 아니라 신의 결정이다. 이와 같은 악의 문제와 귀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유의지와 양립 가능하도록 클래식한 전지성이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여기까지가 그나마 축약해본 거고 세부 설명은 윗댓 참고 부탁드립니다.
@윤태민-z5g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함은 예정과 관련되어 있는 설명이라 볼 수 있고, 예정론과 예정론이 전제하는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은 결정론을 함의한다. 이는 자유의지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더불어 결정론적 세계의 모든 사건들은 그 세계를 결정론적으로 주조한 신의 자유 선택이자 창조 결정이 된다. 즉 결정론적 세계에서 신 이외의 주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건들의 진실하고도 유일한 주체는 신뿐이고 인간은 그 어떤 선택 자체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타락조차도 불성립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취식한 선택조차도 아담의 결정이 아니라 신의 결정이다. 요컨대 살인이나 학살 같은 악행의 주체조차도 신인 것이다. 이와 같은 악의 문제와 귀책 문제, 그리고 타락 불성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유의지와 양립 가능하도록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을 제한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여기까지가 그나마 축약해본 거고 부연 설명은 윗댓 참고 부탁드립니다.
제 생각에 이 논쟁의 포인트는 칼빈주의는 신의 전능을 선이 아닌 힘으로 생각합니다 그들 스스로가 전능을 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유의지나 선을 위해 신이 능력을 제한한다는 설명이 못마땅한 것이고 우리가 신과 같이 되어간다는 합일의 개념도 신의 모습을 선이 아닌 힘을 떠올리기 때문에 바로 교만한 자신의 모습이 따라오게 되어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죠 사실 신과 같이 선해지는 것은 신의 뜻인건데요 하지만 정통적으로 기독교는 힘이 아닌 선이 곧 신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 전선 자체가 전능이죠 이같은 맥락에서 정교회에선 칼빈주의를 이단판정 내린것이구요 이것은 신관의 문제이지 어느시대에는 칼빈주의로 어느시대에는 알미니안으로 이런 시대상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기독교는 항상 전통적으로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신의 전능함은 힘이 아닌 선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다 좋은말씀이긴 한데... 교회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 덕분인데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것은 자기 탓이라는 점이 이해가 잘 안 되네요. 제 개인적인 측면에서 해석하자면, 교회에 들어간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ok, 그러나 인간관계 때문에 교회활동을 축소하고 있는 제 관점에서는 그것에 대한 잘못이 제게 있다는 듯이 들려서 기분이 좀 언짢네요. 여전히 저는 기독교적 논증에도, 성경에도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적 가치관을 내면화하려 노력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의 접점을 줄이려는 까닭은 교회 내에서 세상일보다 교회일이 우선이라는 명목하, 그리고 개개인의 환경적인 요소는 무시한채 공동체에 참여하지 않고 싶어하는 의견을 묵살하는 행위 및 강제하는 행위가 경멸스러워서 그런 것이거든요. 이를 아델포스님은 어떻게 보실지 그 의견이 궁금하네요...
인간관계 문제 때문에 교회활동을 축소 하신다면.. 말씀에선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지 아시는가 묻고 싶습니다 경멸스럽게 보시는 교회와 그 공동체의 연약함 들을 성경에선 어떻게 바라보고 내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며 어떤 행위로 까지 나오시길 바라시는지 성경에서 답을 찾기 바랍니다 성경 안에 답이 있습니다 기도하시면서 성경을 통해 답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분명한것은 예수님께서 이천년전에 죄를 제거하셨다는 겁니다. 그것을 믿고 안믿고는 우리에게 달려있어요. 우리의 믿음은 밀물썰물처럼 왔다갔다하지밀 해변은 그자리에 그대로 있어요!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은 2천년 전에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의해 구원을 잃어버릴수있어요. 하나님께서 광야로 자기 백성을 구출하셨지만 그곳 광야교회에서 전부 구원받았나요? 수많은 사람이 멸망했잖아요!그래서 끝까지 견디라는 말씀이 있는겁니다. 개인적으로 죽음이 임할때까지 믿음의 끈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 특별은총은 인간이 거부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도 작정 가운데 있는 것이죠. 결국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냐?자유 의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주권과 충돌하지 않는 다고 생각합니다. 모순이 아니냐 질문할수 있는데 저는 성경에 있는 그대로 받아 들입니다. 인간의 지적 수준으로 성경을 끼워 맞추기 때문에 이분법적 사고에 갖혀 있다고 생각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는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음을 증거 하고 있죠. 인간이 이해 안간다고 해서 양자택일 해야 할까요? 여러분들은 양자역학을 이해 하십니까?리차트 파인만은 양자역학을 이해할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죠. 그러나 존재 합니다.
교회 나오는건 은혜, 공로이고 교회를 안나오는건 자기 탓 자기 의지인게 모순적아닌가요.. 그럼 베자는 인생이 난잡해지는 기독교인을 보고도 그냥두는 스탠스였나요? 목회적 관점에서 시대에 따라 메시지가 필요한것은 이해가 되는데 교회 다니는건 은혜고 아닌건 자기 탓이고.. 둘중하나여야 되는거 아닌가요? 명확히 정리가 안되네요 ㅠㅠ
@@jonathansik472 인간은 아담의 범죄때문에 태어날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죠. 그 원죄 때문에 스스로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벌을 받는 것이구요. 그래서 벌을 받는건 자기탓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중 일부를 선택하셔서 구원을 하셨죠. 그래서 구원받는건 은혜라고 하는겁니다. 이렇기 때문에 벌받는건 우리탓, 구원받는건 은혜라고 말하는 겁니다.
@@sdm0089 그렇다면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신 분은 대관절 누구란 말씀입니까? 인간은 죄를 자유의지로 택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죄를 유전시키셨으니까요(비유적인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원죄는 개인의 자유선택에 따른 인격적 하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계적 하자, 즉 태생적인 장애에 가깝습니다. 장님으로 태어나서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인데, 이걸 그 장님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는 꼴이죠. 더구나 위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아담조차도 자유 선택으로 선악과를 취식한 적이 없습니다. 예정론이 전제하는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은 결정론을 함의합니다. 그리고 결정론적 세계의 모든 사건들은 그 세계를 결정론적으로 주조한 신의 자유 선택이자 창조 결정으로 수렴하구요. 요컨대 아담이 선악과를 취식하기로 결정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결정하신 겁니다. 인간은 선이든 악이든 무엇이든 그 어떤 선택이라는 것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거죠 예정론적 세계관에서는요. 주체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sdm님께서도 위에서부터 논리적으로 타당한 해답을 궁구하는 대신, 결국 신비로 묻어두고 계셨던 거 아닙니까. 합리적으로 대답을 못하시겠으니까요. 따라서 jonathansik님의 의문은 참으로 타당한 사유인 거죠. 신비로밖에는 대답할 길이 없는 지점에 대한 통찰이니까요. 물론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과 자유의지의 양립 문제로 한정하자면 그렇다는 거지만요.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을 수정하면 논리적으로도 해결 가능합니다. 이는 전능역설 해결법과도 비슷한 해결법이고요.
이츠학님!~ 신혼부부가 전세집 계약하는데 남편이 계약을 했는데 아내가 자꾸 본인이 계약자라고 우기면 아내가 계약자가 되나요? 아내는 그냥 남편에게 접붙여져서 그집에서 함께 사는것 아닐까요? 왜 주의깊게 듣지 않고 댓글을 지우시나요? 2000년간 본인들이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면서 본인들이 계약자요, 신부라고 주장해온걸로 만족합니다. 이방교회는 교정이 필요해요. 제발 정신좀 차리세요.
@@새송홀릭 메시아 왕국때에는 참감람나무가 될것입니다. 그 날에는 이방인도 몸과 마음에 할례를 하지 않으면 하솀을 섬기러 성전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셨으니까요. 하지만 아직은 이방인으로써 일요일이 아닌 안식일에 교회가 아닌 유대교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햇던 유대적 신앙 공동체에 함께 해야죠.
나의 구원에 대한 소견은 영생과 구원은 여기에 있음. 죽은 후가 아니고.. 죄 가운데 좀 있어도 천국간다? 죄 가운데 있는 말초적 쾌락에 쏟은 내 시간이 딱 한번만 살 수 있는 나의 인생에서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영원한 형벌이고 소멸이며 교회에서 지지고 볶고 체력 개 털리고 툴툴 거리면서 월요일 출근하는 성도의 삶이 영원한 천국에 살았던 날이고 상급임 영원한 행복과 번영이 있다는 멀린의 이야기를 듣고 아더왕이 순결한 기사들과 온 천지를 들쑤시고 찾던 성배 처럼(헛짓거리하다 불륜과 배반으로 멸망)(어디 쏘다니지말고 그냥 매일 그 자리에서 무릎꿇고 예수님을 만나고 동행하면 영원한 행복과 평화와 번영이 있었을걸) 구원이 죽은 후에 내가 받을 어떤 부동산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모순이 있겠지만. 죽은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십자가 피로 죄 사함 받고 교회안에 함께 사랑하고 봉사하고 말씀과 찬양 안에 살아가는 시간이 천국이고 구원. 역설적인 것이 없음. 하나님이 한분이시며 여럿으로 존재하시듯. 그 형상으로 지음 받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른 사람임. 이 시간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고 옛 나의 죄성들이 있고 내 자아가 있고 과거의 흔적들이 숨겨져 마치 독립적으로 존재하듯 내 하루 하루 내 의지로 어떻게 사는가 오늘의 나를 탐욕과 말초신경의 호르몬에 개처럼 반응하는 동물로 사는가 아니면 개 처럼 살던 나를 처절하게 기억하면서도 은혜를 힘입어 염치 없지만 기쁘고 감사하게도 기독교 인으로 사랑과 나눔과 헌신과 찬양으로 내 선물받은 하루라는 시간을 기쁘게 영원한 나라에 남기느냐. 철저하게 나의 의지와 나의 자유에 달려있음. 예수님은 자기 피 묻은 끈적한 천국 입장 티켓을 오늘 아침에도 공짜로 내 손에 쥐어주심.. 구원받은 하루로 살래? 아니면 멸망의 타락에 던져 한번 뿐인 생명의 시간을 영원한 불에 태울래?
천국은 아침에 받은 티켓으로 구원받은 날의 나만 들어가는게 아닐까.. 죄 지은 수많은 나들이 지옥에 떨어져 소멸되고 심판 받고 영원히 멸망하고 마지막 날에 회심하고 구원의 은혜를 전하고 섬기고 찬양하던 나만 천국에 간다면 이 세상 살면서 마음 아픈 상처들 내 죄로 내가 받은 아픔들을 용서받고 회복할 수 있다면 그게 진짜 천국일것 같습니다. 혹은 선데이 크리스천이라 80평생 11년의 모습이 남는다면 매일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더 많은 시간을 천국으로 가지고 갈수 있지 않을까.
노란딱지 붙은 영상입니다. 사유는 불명입니다. 재검토요청을 신청한 상황인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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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149-194435(우리은행,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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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qedah근데 이전영상(10.27 연합예배주제) 뿐만 아니라 지금 이 해당영상도 노란딱지가 붙었다는 말씀이신가요?? 왜요???
@@amd761 모르겠습니다... 업로드 직후부터 수기검토되기 전까지 유튜브측 자동분석 결과 노란딱지가 붙었습니다.
이츠학님 좋은 영상 매번 감사합니다. 저는 장로교인으로 자라왔고 지금도 장로교인 입니다. 하지만 구원론의 메커니즘에 있어서 칼빈의 주권 강조와 인간의 책임의 양립에 대해서 깊이 공부하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다.
이중예정에 있어서 저명한 설교자들 R.C. Sproul 이나 John Piper 목사님들도 매우 긍정적이게 평가하는데 이 영상 7:39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그 분들을 하이퍼 칼빈주의자로 분류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마 이중예정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일반 칼빈주의 처럼 출애굽 때의 파라오나 비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passive hardening of the heart(수동적 유기; passive reprobation)를 믿는다면 과격한 신학적인 스탠스를 피할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마서 1:24).
선행적 은혜가 있다고 가정하면 선행적 유기도 있는 것인가요? 이를 통해서 이중 예정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전적 타락으로 인한 죄에서 자유롭지 못해 선을 행할 의지의 부족함을 강조했지만 어거스틴은 선행적 은혜와 타락의 원인에 있어서 자유의지와 인간의 책임을 인정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구원론에 있어서 저는 어거스틴 쪽으로 기우는 것 같습니다.
이삭님 늘 좋은 영상 감사해요. 방구석에 누워서 양질의 컨텐츠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어서 참 감사하네요😊
최근엔 요환목사님이 영상에 많이 나와서 좋아요,, 모든 말씀이 큰 은혜가 됩니당!
커피 사드세용
귀한 후원 감사합니다! 동료들과 맛있는 커피 잘 마시겠습니다! 항상 강건하시고 승리하세요!
저는 어려서부터 장로교회에서 자란 30대 입니다. 감리교인인 제친구는 목회의 길을 걷고있어요
그 친구와 이야기하다보면 예를들자면..
하나의 사과를 보고 왼쪽에서 바라보냐 오른쪽에서 바라보냐의 차이일 뿐이지 하나의 사과를 바라보고있다는 생각이 들었었거든요
ㅎㅎ
아주 명쾌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래오래 목회해주세요^^응원합니다
참으로 반갑고 감사한 말씀입니다. 깨닫는 자가 적은 시대에 귀한 사역자를 통해서 진리가 전파됨을 감사드립니다.
김요환 목사님을 볼 때면 참 탁월하다고 느껴집니다. 모든 신자들이 한번쯤은 이 영상을 봤으면 좋겠네요
기대가 된다
정말 좋은 정보 최고입니다 안들어야될 사람이 듣고 들어야될 사람이 못듣는 아이러니한 상황 ㅋㅋ
아주 그냥 바울의 성경적 논리대로 제대로 풀어주시네요!! 진짜 복음적 웨슬리안 목사님은 진정으로 칼빈의 신학의 핵심을 잘 알고 통전적으로 수용하시네요! 탁월하셔서 감탄할 따름입니다. 이런 분이 감리교단의 복음주의 조직신학 교수님이 되셔야 합니다!!!
과찬이세요ㅜ 감사합니다..😢
@@yo-qw5xd안녕하세요 목사님. 해당 주제와는 상관이 없지만 유신진화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거를 꼭 여쭤보고 싶었는데 따로 유튜브 채널같은걸 운영하시지 않으신거 같아서 물어볼 기회가 없었거든요.
해당 영상 내용은 아주 잘 들었습니다
@@amd761 이쪽 애들 전부다 유신진화론 입니다. 참고로 이친구 전도사 시절에 동성애 반대 어쩌고로 유명해졌다가 지금 완전히 혓바닥 뒤집엎죠.
@@hddsente 혓바닥 뒤집혔다는게 무슨 의미인지요?
@@amd761 [충격!! 꼭 보십시오!!] 교계에서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 이츠학아카데미, 구성감리교회 김요환 | 김영현 전도사 " 검색어로 검색해보세요.
총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칼빈신학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목사님의 이번 영상에 매우 동의하는 바입니다 칼빈은 절대로 운명론적 이중예정을 이야기하지 않았음을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이 채널이 지지하는 쪽은 이중예정 쪽이긴 할 거예요. 전에 제가 이 채널 주인 분과 라이브에서 대화를 나눠본 바, 지옥 갈 사람은 지옥 가게끔 살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닌가 라고 말씀드려 봤더니, 그게 맞고 그러면 왜 안 되냐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사실 전지성 관련해서는 논리적으로 그게 가장 맞긴 하고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동의해요!!
좋다 설명 쉽고 좋아
아델포스 목사님, 이츠학 목사님! 오늘도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평소에 궁금하던 주제였는데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역시 명쾌👍👍👍
구원받은 자는 선한 열매로
구원받지 못한 자는 악의 열매로 자신을 드러내게 되겠죠
개역개정 마태복음 7장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보아 하니 크게 될 양반이구먼!
영상 잘 봤습니다~ ^^
자막 수정(^^) : 0:25 불가학력 -> 불가항력
올바른 청년
총신에서 대놓고는 아닌데 둘러둘러 이단 이라 하죠
영상 잘 봤습니다 :) 목사님은 바르트의 예정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요근래 (한국을 제외한) 개혁주의 쪽에서는 칼뱅의 예정론보다 바르트가 해석한 예정론을 많이 인정하는 분위기인 것 같아요
이번에도 흥미로운 영상 감사합니다. 중간에 다양한 이론들을 비교하는 표를 보니 이중예정과 구원 취소가 없음을 하이퍼 칼빈주의로 분류를 해놓으셨던데, 이 두 가지는 일반적인 칼빈주의 범주 내에서도 받아들여지는 사항아닌가요? 잘은 모르지만 인간 행위의 완전 무의미, 전도 무의미, 율법 폐기 이런 정도의 주장으로 나아가는 것이 하이퍼 칼빈주의라고 알고 있어서요
아주 좋은메시지입니다~~~~
하지만 성도님들은 좀 혼동할 여지도 있네요~~ ^^
적절한 설명이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인격을 비인격적 존재로 만들게 됩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에 지배당하는 분인가요?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다 쓰지 않습니다. 부모도 자녀들에게 자신의 주권을 다 요구하지 않고, 참고, 양보하고, 절충하고, 포기합니다. 그것을 인격이라고 합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십계명 제 2계명을 범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원하는 방식으로 깎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선한 인품의 하나님십니다. 전능하다 할지라도 그 전능함을 다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다 알아도 다 안다고 하지 않고 알아보려하십니다. 하나님은 프로그램된 컴퓨터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로 이해할 때, 하나님을 바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제가 아르미니우스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이든 논리적으로 질문해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제가 드리는 질문들에 어떻게 답변하실지 궁금합니다.
1. 아담이 죄를 짓는 순간에도 개입하지 않으실 정도로 개인의 선택과 의지를 인정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믿다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돌아서면 그들의 선택과 의지를 무시하시는지?
2. (1번과 연결)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써 인간이 어떤 선택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용"을 하셨다면 인간이 구원을 받았다가 다시 반납하는 선택 조차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계획 아래에 허용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3. 로마서 8장에서 사랑을 "끊을 수 없다"고 했는데 (영어로는 separate) 그렇다면 만약 사랑을 밧줄에 비유하면 아무도 끊을 수 없는 쇠밧줄일지라도 만약 내가 손을 놓아 버린다면?
4. 구원이 변치 않는 것이라면 사탄은 왜 아직도 신자들을 유혹하는지?
5.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자에게만 성령이 있을 수 있는데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는데도 용서받지 못하고 구원 못받는 사례가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닌지?
6. 구원의 확신이라는 개인의 감정이 실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유효성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쉽게 말해서 만약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면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확신이 있은 없든 상관이 없는 것 아닌지?
저는 사실 칼빈주의의 가장 큰 맹점이 "이신칭의"를 너무 강조하다보니 가톨릭 측에서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데? 너희 말대로 행위로 구원을 받는게 아니라면 우리가 마리아한테 기도하고 성상에 대고 기도해도 괜찮은거 아니야?"라는 반박에 논리적으로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너네가 구원을 못 받는 이유는 하나님께 선택을 받지 못 했기 때문이지!!!"라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선택"만을 앵무새처럼 읊어댔던 것에 있다고 봅니다. 결국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과 그 열매로써 마땅히 나타나야 하는 행위가 성경에 근거하여 둘 다 정립되어야 문제가 해결되는데 믿음만 가르치고 행위는 ㅎ자도 못 꺼내게 "무조건 믿음!" 이러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너무 궁금하네요~!
제 사견을 써봅니다
1. 돌아선 그 사람이 죽을 때 까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당장 제 지인도 하나님 없어, 안 믿어, 교회 안갈꺼야 하다가(방치일까요?) 몇 년 만에 돌아오셨죠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죽을 때 까지 가봐야 안다고 생각합니다 (선한 길로 인도 하시리라 믿습니다)
2.구원을 반납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논리적으로 보면 자기가 구원을 거절 했다고 생각하지만 애초에 이런 사람은 구원 받는 사람이라 예정 되어 있지 않은 버림받은 사람이 아닐까요?
3. 역설해서 나의 어떠함과 선택으로 인해 끊어질 구원을 하시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실까요?
4. 죽을 때 까지 끊임 없이 유혹할 것입니다 유혹은 사탄의 당연한 일이자 사명이고 존재 이유?라고 할까나요 제 몫을 하는 것 일뿐 그렇다고 구원이 변할까요?
5.(일단 전제가 잘못 됬습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가 아니고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막3:29)
사례가 있을까요? 사례가 없는 게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시인한다는 개념 자체가 그냥 아무 일반인이 "저는 예수님을 주로 시인합니다" 라는 문장을 읽었다고 그 일반인에게 성령님이 함께하실까요? 시인한다는 개념 자체가 단순한 말이아닌 영혼의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이 함께하시는데 용서받지 못하고 구원 받는 사례가 존재x
6.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이 개인의 감정일까..? 믿음도 o와 x 가 아니라 1~10까지 성장하는 과정과 단계가 어느정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깊어지고 넓어지는? 성화의 과정 이라고도 하죠 (성경에서 믿음은 자라난다 라는 표현이 많습니다)
제가 느끼기엔 아직 전반적인 질문이 신앙적 경험 이랄까요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시면서 인생을 살다보면 본 질문들의 많은 답을 하나님을 통해 얻으실꺼라 생각합니다
칼빈주의의 이신칭의는 결국 말하신 행위(가톨릭의 면죄부 등) 가 구원의 많은 영향을 끼치는 시대에서 살았기 때문에 더욱 그럴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종교개혁을 통해 기존 가톨릭에서 나오기도 했구요
당연히 성경속 사도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행위에 대해 쭉 읽어보시면 결국 믿음=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은 나뉘는 것도 분리되는 것도 아니며 동일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위로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영상에서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어차피 난 하나님 믿고 믿음이 있으니 구원 받았으니까 세상에서 막살고 죄 지어도 괜찮아 라는 전제를 가진 것 자체가 이미 맛탱이가 갔다니깐요?
어느 머리에서 이런 논리가 나오는 것이죠? 본인에게 이런 논제가 성립합니까? 말 그대로 세상 사람들 머리에서 이런 논리가 나오는 것 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사람들에게 얘기해야겠습니까? 위에 목사님 처럼 하면 되겠습니다
@@새송홀릭 답변 감사합니다. 애석하게도 거의 대부분 들어본 답변들이고 논리적인 한계가 분명한 것 같습니다.
1.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돌아가신 분들의 사례는 어떻습니까? 칼빈주의에서는 너무나도 간편하게 “그 사람은 원래 믿음이 없었을 뿐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선택을 받지 못해서 그런거야”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명제를 진리로 못박아 놓고 결과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2. 그것은 논리가 아니라 모순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예정에 의한 것이고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데 나중에 그것을 반납했으면 사실은 예정이 된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논리가 전개가 된다면 애초에 그 사람이 구원을 처음에 받는 일조차 없었어야 합니다.
3. 반례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데 왜 아담을 지으셔서 죄를 짓도록 내버려두셨죠? 마찬가지로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고 절대적인 주권이 있으셔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비유적으로 얘기하겠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노예를 사서 풀어주면서 왕의 권한으로 자유인의 신분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의 어떤 사람이 와도 그 사람을 더 이상 노예 취급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유인이 된 그 사람이 그 나라 백성이 되기를 거부하고 다른 나라로 건너가면 그 왕의 권위가 손상이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출입국 사무소에 있던 모든 직원들은 왕의 권위로 내려진 “그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내버려두라”는 명령에 순종을 한 것이고 왕의 권위는 그대로 지켜진 것입니다.
4. 공중 권세를 잡은 마귀가 두루 다니며 삼킬 영혼을 찾아 다닌다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냥 유혹하는 것이 사명이 아니라 영혼을 집어 삼키는 것이 사명입니다. 마귀가 성도들을 계속 유혹을 하는 이유는 성도들이 유혹에 넘어가 계속 죄를 짓다보면 죄에 무뎌지면서 자기 죄를 죄라고 하는 교회와 하나님이 나쁘게 생각이 들면서 결국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5. 성령을 받아 예수를 주로 시인하던 자들 중에 성령을 모독한 사례가 없다니요? 칼빈주의적 관점에서는 그 사람들이 “진짜로 예수를 시인한게 아니고 진짜로 성령을 받은게 아니니까” 사례가 없다고 주장하시는건가요? 그것은 명제를 이미 진리라고 못박아놓고 시작하는 전형적인 오류입니다.
6번에 대해서는 사실 크게 중요한 질문은 아니므로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반론하지는 않겠습니다.
마지막 하단부에서 상당한 영적인 교만이 느껴지네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충분히 인생을 경험해야지만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쎄요... 그런 분들 중에서도 저랑 똑같은 의문 내지는 견해를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으신데 자동적으로 “경험해보지 못한”분들이 되시는건가요?
덧붙이자면 저는 막 살고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논리에 동조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행위로 나올 수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그 행위를 누가 규정하냐는 것입니다. 제가 예를 들었던 것처럼 우리 개신교 입장에서 가톨릭은 우상 숭배를 하므로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개신교 내에서도 돈이나 명예를 우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 역시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으며 견인의 역사로 성화되는 과정”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도중에 이탈한 사람들에게는 “애초에 참 믿음이 없었다”고 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상황에 따라 자기 편의에 맞게 해석하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새송홀릭 그리고 5번 관련해서 한 가지 추가합니다. 마태복음 12:32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것도 용서받지 못할 죄가 맞습니다.
세계 중심의 구원관은, 그것이 어느 평형 위치에 있을 때에 세계의 역사와 그 안에서 모종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 자아의 역사에 대해 어떤 목적의식과 세계의 존재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세계의 역사에 목적(의미)이 부여되고, 세계의 존재에 가치가 부여될 때, 그곳으로부터 자신의 (삶의)목적과 가치도 노정될 수 있다.
그렇게 노정된 개념(세계관, 가치관)으로부터 자아(개인, 존재)의 구원이 구성될 수 있다.
자아로부터 시도된 구원관은 세계와의 관계와 보다 객관적이고 분명한 구원관의 형성을 불가능하게 한다. 즉 주관적이고 모호한 구원관으로 자아를 포섭하게 된다.
기독교적 구원관이 이미 그 구원의 중심을 자아(개인, 존재)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고,
존재세계관 역시 (내재적으로는)세계 중심의, 그리고 보다 초월적으로는 신 중심의 구원관을 제시한다.
자아 중심의 구원관이 자아의 보존을 절대선으로 하게 되는 것 즉 일반적인 구원관을 설명할 수 있는 것과 대비되어서,
세계 중심의 구원관, 또는 보다 초월적 개념으로서는 신 중심의 구원관은 기독교적 구원의 특징적 요소들, 즉 죽음과 부활의 요소들을 가지는 카타르시스(반전)적 가치관을 설명하게 된다.
두 구원관의 차이는 이와 같이 그 구원관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서, 논리적인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적 구원관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세계(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를 사랑(신앙)하는 자아(개인, 존재)의 개념을 지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알미니안에 대한 설명은 매우 유익했지만,
후반부, 구원론에서
논리적으로 언뜻 이해가 어려운것이
구원= 하나님이 하신일
비구원= 자신이 한일
입니다.
여러 내용을 보완하여 위 내용에 동의해도
여기에 '예정'이란 개념이 끼어드니까
논리적으로나 직관적으로나 꼬여버린다고 생각합니다.
왜 비구원은 자기가 한 일이냐면 애초에 모든 인간은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의 노예의지를 가지고 있걸랑요. 인간은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모두가 하나같이 구원을 거부하게끔 만들어졌습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구원을 받아들이지 못하게끔,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해주셔야 믿게끔 만들어졌어요. 그럼 그렇게 만드신 분은 대관절 누구인가? 이게 문제지만요. 여기에 더불어 예정론이 전제하는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의 논리적 귀결인 결정론까지 더해지면?
사실 논리적으로 이걸 깰 수 없다는 걸 이츠학님이든 아델포스님이든 다 아실 겁니다. 과거에 양시무스님이 라이브에 나오셔서 이츠학님께 가르쳐주시기도 하고 그랬어요. 요컨대 논리적으로 그냥 답이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결국 신비로 퉁치면서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고 믿으면 된다로 빠지죠. 거기서부터는 논리고 뭐고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가 하나같이 스스로의 의지로는 구원을 받아들이지 못하게끔 태어났거든요. 비구원을 선택하게끔 태어났거든요. 그게 인간의 노예의지죠. 다시 말해 모두가 하나같이 스스로의 의지로는 구원을 선택하지 못하게끔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택자로 하여금 구원에 대한 의지를 작동시켜서(마치 다크아칸의 마인드 컨트롤처럼) 믿게끔 만들어졌습니다. 그럼 인간을 그렇게, 스스로의 의지로는 구원을 거부하게끔 만드신 분은 대관절 누구인가? 라는 게 문제지만요. 더불어 예정론이 전제하는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이 결정론을 함의한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인간에게는 애초에 자유의지 자체가 아예 없었던 게 되죠. 결정론적 세계의 모든 사건들은 그 세계를 결정론적으로 주조한 신의 자유 선택이자 창조 결정으로 수렴하니까요. 요컨대 예정론적 세계에서 모든 사건들의 주체란 개별자가 아니라 오직 신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츠학님도 아델포스님도 이걸 논리적으로 깨지 못한다는 건 하실 거에요. 전에 라이브 방송 때 양시무스님이 찾아오셔서 이츠학님한테 이거 가르쳐주고 그랬었죠. 논리적으로 대답 못하니까 결국 신비로 퉁치게 되고요. 예정론 관련 담론의 전형적인 래퍼토리입니다.
죄송합니다.
설명을 잘못하신 것인지, 아니면 듣는 사람에게 맞춘것인지 모르겠지만,
구원을 내세로 설명한 것은 성경적이지도 신학적이지도 않습니다.
구원은 언제나 현재적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구원을 내세적으로 이해하니까, 구원받았으니까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 말 하는데 본인이 못 알아 듣는 거 같은딩.....
성경에도 행위로 인한 구원취소 써있습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다번역성경찬송]
개역개정 요한계시록 3장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결국 이 인간들이 의지로 은혜를 거부할수 있다고 하니 또 다른 쪽으로 갑니다. 세대주의나 거기서 더 악질적으로 바뀐 신사도로 넘어가서 성경을 부정하는 단계까지 가니까 그게도 크게 문제인것 같습니다…..참 인간들 이란 ㅉㅉㅉㅉ
7:30 이 표는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이 표는 좀 문제가 있긴합니다
@@sreecvdr3724 어? 어째서죠??
@@HB-nb4pf 하이퍼 칼빈주의를 묘사할때 예정의 방법중 이중예정을 포함시켜서 그렇지 않을까요? 이중예정을 믿는다 해서 꼭 능동적 유기(하나님꼐서 작정하고 지옥갈 사람들을 태어나기도 전에 만드심 혹은 지옥갈 비신자들이 하나님을 알수없도록 설계하심)를 믿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은혜를 거절할 수 없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겁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시기 때문이죠~~
절대주권과 은혜를 오해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칼빈주의로도 충분히 훈계 가능한데..
성혈감로교회가 아니고 정확하게는 성혈장리교회가 맞습니다 😅
가롯유다는 어떻게 된걸까요? 유다도 예수의 제자로서 사역 많이하고 많이 전하고 여러 기적도 행한걸로 아는데 예수님을 팔았는데도 천국에 갔을까요? 못갔다면 애초부터 예수님을 안믿은걸로 치는건지요.
근본주의라느니 보수 유튜버랑 똑같다느니 뭐 그런 단편적인 비판은 저도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뭣보다 보수적으로 믿을 수도 있다고 보구요. 어떻게 믿든 자유이지요.
다만 논리적으로 어떤 부분이 취약한지, 그와 관련된 얘기를 조금 드려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문자 그대로 참이라 함은,
구원받는 것뿐만 아니라 구원받지 못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귀책이란 것이죠.
물론 구원문제뿐 아니라 모든 것이, 살인도 학살도 하나님의 행위란 뜻이구요.
칼빈주의가 함의하는 전지성이 참이어서 결정론도 참이라면, 결정론적인 이 세상의 모든 결정론적인 사건들이
하나부터 열끝까지 우리 세상을 결정론적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행위로 수렴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칼빈주의자들 중에서도 하여튼 구원 말고는 자유의지 있다는 분들이 계시지만요.
논리적으로는 모순이죠. 알미니우스주의도 결국 전지성과 자유의지를 양립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모순이지만요.
다만 1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어쨌든 알미니안들은 눈가리고 아웅으로 악의 문제는 커버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인간의 불신 내지 배반은 그 자신의 책임이 되거든요.
하지만 칼빈주의적 세계관 하에서 인간의 불신이나 배반은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그렇게 지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 본인이시기에.
(그 이전에 인간을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드신 것 또한 물론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창조해 놓으시고 결국 믿지 않고 지옥 가게끔 살도록 결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기에.
요컨대 불신자들은 사실 불신이라는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선택은 물론 하나님이 하시지요. 이때 선택이라 함은 단지 택정이나 유기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의 불신 또는 배반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실로 진실로 불신하고 배반한 주체는 하나님 본인이 되시는 거지요.
우리 세계의 유일한 주체는 오직 하나님뿐이니까. 다른 존재는 모두 인형에 불과하니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전선하실 수 있습니다.
토기장이 비유 시전하면서. 인간은 하나님의 선악판단에 불평할 수 없다고 하면서요.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정말로 선악을 그렇게 설정하신 거라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설정하셨다고 칼빈주의자들이 해석하는 거지만요.
정확히는 그 해석에 대해 반박하면 나오는 전형적인 래퍼토리 같은 거죠.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감히 인간된 시선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려 들지 마라! 이러면서 말입죠.
뭐 하여튼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고 인간은 감히 불평할 수 없다고 해석할 수도 있긴 하지요.
다만 그 모든 해석을 긍정해준다 하더라도 세계의 유일 주체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불평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 불평의 주체가 아닙니다. 그 불평의 주체 또한 물론 하나님입니다)
살인도 학살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 하셨고 인간은 선도 악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까지 시인할 수 있어야지요.
따라서 타락 가설도 기각입니다. 왜냐하면 예정론이 참이고, 예정론이 함의하는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도 참이라면,
결정론도 참이어서 인간에게는 일말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으니까요.
노예의지조차 없습니다. 자유가 아예 일말도 허락되지 않는 세계에서 타락이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타락 전에나 후에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타락 전에나 후에나 전지하시기에.
타락 전에나 후에나 그 어떤 자유도 없었던 까닭이지요.
요컨대 아담은 선악과를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선택하는 주체였던 적이 없기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에 대한 진정한 주체도 물론 하나님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양시무스님이 이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긍정하는 점 하나만큼은 정말 높이 평가합니다.
양시무스님은 예정론이 참이라면 논리적으로 타락이 불성립한다고 일전의 대화에서 인정하셨습니다.
물론 그걸 온전히 받아들이기란 무리라서 양시무스님께서도 그냥
전지성과 자유의지가 양립 가능하다고 비논리적으로 믿는다 하셨지만요.
좌우간 비논리적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인정한다는 점에서
보통의 칼빈주의자들보다야 한참 낫다고 볼 수 있겠지요.
예정과 자유의지 문제를 다소 벗어난 관점에서 보자면
구원과 인간 심리의 역학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진실로 믿게 된다면 배반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요.
허나 구원취소도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정녕 다 정해놓으셨냐 아니냐의 문제의식이라 봅니다.
물론 알미니안들도 전지성을 포기할 수 없었는지 예지예정 같은 도피처로 빠졌지만요.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을 포기 안 하면 결국 자유의지 불성립으로 귀결될 뿐인데 말이죠.
다만 어쨌든 구원에 대해서도 자유의지를 비논리적으로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즉 하나님에게로 인간의 불신 내지 배반을 귀책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귀책마저도 하여튼 선하다 한들, 귀책 자체는 유신론적 결정론 하에서 논리적으로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악의 문제에 대한 나름의 돌파구를 마련해 보려던 시도였던 셈이라 보구요.
예정론이나 전지성과 관련된 무수한 논의들이 이와 비슷한 구도를 갖추고 있다고 봅니다.
신비로 퉁칠 것이냐, 아니면 정직하게 논리적으로 다 받아들일 것이냐
그것도 아니면 비논리적이라는 자각조차 못하는 수준에 머물 것이냐
답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결론적으로 캭하님은 예지, 예정-자유의지 사이의 어려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어떤 해석의 결론을 내리신건가요? '대안 없는 비판은 누구나 할수 있다' 라는말을 제가 평소에 새기고 살아서 여쭤봅니다.. 케노시스 신학?쪽인가요? 시비 아니고 정말로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sjrho640 저만의 어떤 독창적인 대안이 있다기보다는 저도 이미 나와 있는 여러 가지 대안적인 설명들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다만 기본적으로는 심플하게 예지가 성립하는 영역에서는 자유의지가 불성립하고 자유의지가 성립하는 영역에서는 예지가 불성립한다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 문제에 있어서는 원론적으로 자유가 열려 있어야 악의 문제를 회피할 수 있다고 보구요(적어도 유기의 이중예정은 수용하기 곤란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전지하시지 않다는 거냐! 라고 반론하는 분들도 물론 계시겠죠. 지금껏 수도 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지가 불성립하는 영역에서는 하나님도 어떤 미래가 실현될지는 아실 수 없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나 이는 전능역설 해결법이랑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논리적으로는 하나님의 전능도 완벽하게 성립하지 않아요. 들 수 없는 바위를 들 수 있냐거나 네모이면서 세모인 도형을 그릴 수 있냐 같은 문제들 말입니다. 이는 개념적으로 성립이 불가능한 논제들입니다. 그러나 이를 하나님의 불능이라 해석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조하신 우리 세계의 섭리 내지 이치쯤으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식으로 해결하죠. 전지성과 자유의지의 양립 문제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구요(나이브하게 전지성의 제한이라고도 부르는 설명이죠). 그리고 이건 여담입니다만, 이런저런 설명을 주절거려 놓긴 했으나, 저는 사실 대안이 꼭 있어야 유효한 비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안이 전혀 없었더라도 전지성과 자유의지 양립 문제가 초래하는 악의 문제와 귀책 문제는 여전히 유효한 지적일 것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실 수는 있겠죠. 다만 누구나 할 수 있든 말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게 논리적으로 합당하냐 그렇지 못하냐가 중요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애가 할 수 있는 비판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자각하지 못하거나 자각하고 있더라도 인정하지 못하는 설명에 대한 타당한 비판이라면, 누구라도 충분히 해볼 수 있는 거죠. 뭐 대안을 제시하면 더 좋겠지만요. 아몰라 그냥 비논리적으로 믿을래 해도 뭐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윤태민-z5g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함은 예정과 관련되어 있는 설명이라 볼 수 있고, 예정론과 예정론이 전제하는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은 결정론을 함의한다. 결정론적 세계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성립하지 않는다. 결정론적 세계의 모든 사건들은 그 세계를 결정론으로 창조한 신의 창조 결정이다. 즉 결정론적 세계에서는 신 이외의 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건들의 진정하고도 유일한 주체는 신뿐이다. 살인도 학살도 신의 행위로 귀착된다. 따라서 타락조차도 불성립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취식한 결정도 아담의 결정이 아니라 신의 결정이다. 이와 같은 악의 문제와 귀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유의지와 양립 가능하도록 클래식한 전지성이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여기까지가 그나마 축약해본 거고 세부 설명은 윗댓 참고 부탁드립니다.
@윤태민-z5g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함은 예정과 관련되어 있는 설명이라 볼 수 있고, 예정론과 예정론이 전제하는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은 결정론을 함의한다. 이는 자유의지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더불어 결정론적 세계의 모든 사건들은 그 세계를 결정론적으로 주조한 신의 자유 선택이자 창조 결정이 된다. 즉 결정론적 세계에서 신 이외의 주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건들의 진실하고도 유일한 주체는 신뿐이고 인간은 그 어떤 선택 자체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타락조차도 불성립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취식한 선택조차도 아담의 결정이 아니라 신의 결정이다. 요컨대 살인이나 학살 같은 악행의 주체조차도 신인 것이다. 이와 같은 악의 문제와 귀책 문제, 그리고 타락 불성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유의지와 양립 가능하도록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을 제한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여기까지가 그나마 축약해본 거고 부연 설명은 윗댓 참고 부탁드립니다.
제 생각에 이 논쟁의 포인트는 칼빈주의는 신의 전능을 선이 아닌 힘으로 생각합니다
그들 스스로가 전능을 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유의지나 선을 위해 신이 능력을 제한한다는 설명이 못마땅한 것이고 우리가 신과 같이 되어간다는 합일의 개념도 신의 모습을 선이 아닌 힘을 떠올리기 때문에 바로 교만한 자신의 모습이 따라오게 되어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죠
사실 신과 같이 선해지는 것은 신의 뜻인건데요
하지만 정통적으로 기독교는 힘이 아닌 선이 곧 신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 전선 자체가 전능이죠
이같은 맥락에서 정교회에선 칼빈주의를 이단판정 내린것이구요
이것은 신관의 문제이지 어느시대에는 칼빈주의로 어느시대에는 알미니안으로 이런 시대상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기독교는 항상 전통적으로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신의 전능함은 힘이 아닌 선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다 좋은말씀이긴 한데... 교회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 덕분인데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것은 자기 탓이라는 점이 이해가 잘 안 되네요. 제 개인적인 측면에서 해석하자면, 교회에 들어간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ok, 그러나 인간관계 때문에 교회활동을 축소하고 있는 제 관점에서는 그것에 대한 잘못이 제게 있다는 듯이 들려서 기분이 좀 언짢네요. 여전히 저는 기독교적 논증에도, 성경에도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적 가치관을 내면화하려 노력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의 접점을 줄이려는 까닭은 교회 내에서 세상일보다 교회일이 우선이라는 명목하, 그리고 개개인의 환경적인 요소는 무시한채 공동체에 참여하지 않고 싶어하는 의견을 묵살하는 행위 및 강제하는 행위가 경멸스러워서 그런 것이거든요. 이를 아델포스님은 어떻게 보실지 그 의견이 궁금하네요...
인간관계 문제 때문에 교회활동을 축소 하신다면.. 말씀에선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지 아시는가 묻고 싶습니다 경멸스럽게 보시는 교회와 그 공동체의 연약함 들을 성경에선 어떻게 바라보고 내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며 어떤 행위로 까지 나오시길 바라시는지 성경에서 답을 찾기 바랍니다 성경 안에 답이 있습니다 기도하시면서 성경을 통해 답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분명한것은 예수님께서 이천년전에 죄를 제거하셨다는 겁니다. 그것을 믿고 안믿고는 우리에게 달려있어요. 우리의 믿음은 밀물썰물처럼 왔다갔다하지밀 해변은 그자리에 그대로 있어요!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은 2천년 전에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의해 구원을 잃어버릴수있어요. 하나님께서 광야로 자기 백성을 구출하셨지만 그곳 광야교회에서 전부 구원받았나요? 수많은 사람이 멸망했잖아요!그래서 끝까지 견디라는 말씀이 있는겁니다. 개인적으로 죽음이 임할때까지 믿음의 끈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 특별은총은 인간이 거부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도 작정 가운데 있는 것이죠. 결국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냐?자유 의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주권과 충돌하지 않는 다고 생각합니다. 모순이 아니냐 질문할수 있는데 저는 성경에 있는 그대로 받아 들입니다. 인간의 지적 수준으로 성경을 끼워 맞추기 때문에 이분법적 사고에 갖혀 있다고 생각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는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음을 증거 하고 있죠. 인간이 이해 안간다고 해서 양자택일 해야 할까요?
여러분들은 양자역학을 이해 하십니까?리차트 파인만은 양자역학을 이해할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죠. 그러나 존재 합니다.
앞부분에 하나님이 인간보다 약하냐? 이건 좀 억지 주장인듯.. 그럼 하나님이 사탄보다 약해서 이 세상이 이 모양입니까? ㅎㅎ
노회,총회에서 정치하는 타락한 목사들이 엄청 많은데... 그분들을 보면 칼빈보다, 아르미니우스의 말이 맞는것같아요. 그분들도 정치하기전에는 은혜가 넘치며 사명감 불타오르는 신실한 목회자였을텐데..... 그렇게 변할수가있나??? 결국 본인들의 정치욕망에 은혜를 거절한거일뿐
최초는...아니지않나
교회 나오는건 은혜, 공로이고 교회를 안나오는건 자기 탓 자기 의지인게 모순적아닌가요..
그럼 베자는 인생이 난잡해지는 기독교인을 보고도 그냥두는 스탠스였나요? 목회적 관점에서 시대에 따라 메시지가 필요한것은 이해가 되는데 교회 다니는건 은혜고 아닌건 자기 탓이고.. 둘중하나여야 되는거 아닌가요? 명확히 정리가 안되네요 ㅠㅠ
@@jonathansik472 인간은 아담의 범죄때문에 태어날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죠. 그 원죄 때문에 스스로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벌을 받는 것이구요. 그래서 벌을 받는건 자기탓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중 일부를 선택하셔서 구원을 하셨죠. 그래서 구원받는건 은혜라고 하는겁니다. 이렇기 때문에 벌받는건 우리탓, 구원받는건 은혜라고 말하는 겁니다.
@@sdm0089 벌과 구원이아니라 교회를 가는것과 안가는게 둘다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인게 되어야 모순이 안되는거같은데. 어떻게생각하시나요
@@jonathansik472 일단 사실만 정정해 드리면, 교회 나오는것 자체가 은혜는 아니고, 공로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떠나서 질문 자체가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적어주세요
@@sdm0089 그렇다면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신 분은 대관절 누구란 말씀입니까? 인간은 죄를 자유의지로 택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죄를 유전시키셨으니까요(비유적인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원죄는 개인의 자유선택에 따른 인격적 하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계적 하자, 즉 태생적인 장애에 가깝습니다. 장님으로 태어나서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인데, 이걸 그 장님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는 꼴이죠. 더구나 위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아담조차도 자유 선택으로 선악과를 취식한 적이 없습니다. 예정론이 전제하는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은 결정론을 함의합니다. 그리고 결정론적 세계의 모든 사건들은 그 세계를 결정론적으로 주조한 신의 자유 선택이자 창조 결정으로 수렴하구요. 요컨대 아담이 선악과를 취식하기로 결정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결정하신 겁니다. 인간은 선이든 악이든 무엇이든 그 어떤 선택이라는 것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거죠 예정론적 세계관에서는요. 주체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sdm님께서도 위에서부터 논리적으로 타당한 해답을 궁구하는 대신, 결국 신비로 묻어두고 계셨던 거 아닙니까. 합리적으로 대답을 못하시겠으니까요. 따라서 jonathansik님의 의문은 참으로 타당한 사유인 거죠. 신비로밖에는 대답할 길이 없는 지점에 대한 통찰이니까요. 물론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과 자유의지의 양립 문제로 한정하자면 그렇다는 거지만요. 클래식한 전지성 개념을 수정하면 논리적으로도 해결 가능합니다. 이는 전능역설 해결법과도 비슷한 해결법이고요.
참으로 정상적이고 올바른 사유이십니다.
물론 jonathansik님께서 가지시는 의문에 대한 논리적인 해법도 존재합니다.
하여튼 믿으라는 스탠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관련 논의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츠학님!~
신혼부부가 전세집 계약하는데 남편이 계약을 했는데 아내가 자꾸 본인이 계약자라고 우기면 아내가 계약자가 되나요?
아내는 그냥 남편에게 접붙여져서 그집에서 함께 사는것 아닐까요?
왜 주의깊게 듣지 않고 댓글을 지우시나요?
2000년간 본인들이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면서 본인들이 계약자요, 신부라고 주장해온걸로 만족합니다.
이방교회는 교정이 필요해요.
제발 정신좀 차리세요.
참감람나무가 되길..
@@새송홀릭 메시아 왕국때에는 참감람나무가 될것입니다.
그 날에는 이방인도 몸과 마음에 할례를 하지 않으면 하솀을 섬기러 성전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셨으니까요.
하지만 아직은 이방인으로써 일요일이 아닌 안식일에 교회가 아닌 유대교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햇던 유대적 신앙 공동체에 함께 해야죠.
나의 구원에 대한 소견은 영생과 구원은 여기에 있음. 죽은 후가 아니고..
죄 가운데 좀 있어도 천국간다?
죄 가운데 있는 말초적 쾌락에 쏟은 내 시간이 딱 한번만 살 수 있는 나의 인생에서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영원한 형벌이고 소멸이며
교회에서 지지고 볶고 체력 개 털리고 툴툴 거리면서 월요일 출근하는
성도의 삶이 영원한 천국에 살았던 날이고 상급임
영원한 행복과 번영이 있다는 멀린의 이야기를 듣고 아더왕이 순결한 기사들과 온 천지를 들쑤시고 찾던 성배 처럼(헛짓거리하다 불륜과 배반으로 멸망)(어디 쏘다니지말고 그냥 매일 그 자리에서 무릎꿇고 예수님을 만나고 동행하면 영원한 행복과 평화와 번영이 있었을걸)
구원이 죽은 후에 내가 받을 어떤 부동산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모순이 있겠지만. 죽은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십자가 피로 죄 사함 받고 교회안에 함께 사랑하고 봉사하고 말씀과 찬양 안에 살아가는 시간이 천국이고 구원.
역설적인 것이 없음.
하나님이 한분이시며 여럿으로 존재하시듯.
그 형상으로 지음 받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른 사람임.
이 시간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고 옛 나의 죄성들이 있고 내 자아가 있고 과거의 흔적들이 숨겨져 마치 독립적으로 존재하듯
내 하루 하루 내 의지로 어떻게 사는가
오늘의 나를 탐욕과 말초신경의 호르몬에 개처럼 반응하는 동물로 사는가
아니면 개 처럼 살던 나를 처절하게 기억하면서도 은혜를 힘입어 염치 없지만 기쁘고 감사하게도 기독교 인으로 사랑과 나눔과 헌신과 찬양으로 내 선물받은 하루라는 시간을 기쁘게 영원한 나라에 남기느냐.
철저하게 나의 의지와 나의 자유에 달려있음.
예수님은 자기 피 묻은 끈적한 천국 입장 티켓을 오늘 아침에도 공짜로 내 손에 쥐어주심.. 구원받은 하루로 살래? 아니면 멸망의 타락에 던져 한번 뿐인 생명의 시간을 영원한 불에 태울래?
천국은 아침에 받은 티켓으로 구원받은 날의 나만 들어가는게 아닐까.. 죄 지은 수많은 나들이 지옥에 떨어져 소멸되고 심판 받고 영원히 멸망하고
마지막 날에 회심하고 구원의 은혜를 전하고 섬기고 찬양하던 나만 천국에 간다면
이 세상 살면서 마음 아픈 상처들
내 죄로 내가 받은 아픔들을 용서받고 회복할 수 있다면
그게 진짜 천국일것 같습니다.
혹은 선데이 크리스천이라 80평생 11년의 모습이 남는다면
매일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더 많은 시간을 천국으로 가지고 갈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