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찬양이 아니더라도 좋은 연주곡, 아름다운 음악 자체가 사람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찬양도 분별하는게 맞습니다. 이 말은 초신자들이 아닌 신앙의 선배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은 꼭 하고싶은게 기독교가 추구하는 것이 '사랑'은 맞으나 되려 그것들이 문제가 될 때도 많다고 봅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잠언에는 '악인과 벗하지 마라' 등등. 하나님께서도 뭐든지 다 사랑하라고는 하지 않으셨어요. 사랑과 공의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말을 거창하게 했지만 위험할 수 있는 요소들을 캐치하고 분별하는 것은 정죄나 비난이 아닙니다. 우린 논쟁을 무조건 비난화하며 사랑을 내세웁니다. 물론 자기 의를 드러내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껍데기 논쟁밖에 안되겠지만 아이가 뭣모르고 음식에 이것저것 넣고있을 때 넣어야될 거, 말아야될 거를 알려주는 어른도 필요합니다. 이 세상엔 초신자 불신자부터 정말 많은 다양한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에. 저는 we love의 공감하시네 이찬양의 세월호 논란에 있어서 이렇게 다양한 의견이 나온 것 자체가 그래도 다행이고, 아직까지 한국교회가 건강한 거라 생각듭니다. 자기에게 당장 위로가 되고 좋은 찬양이라고 해서 이 찬양이 문제가 될 여지까지 덮어버릴 순 없으니까요. 또한 다른분 의견처럼 최근 ccm이 점점 세상음악코드나, 감성팔이에 의존하는 분위기나 카타르시스적인 음악이 많이 나오고 있기때문에 저는 어느 누구보다도 ccm찬양사역자들의 영적책임이 정말 막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루시퍼가 최고 위엄의,음악의 천사였으니까요. 음악은 사람의 영혼육을 좌지우지 시키는 것에 탁월한 영적무기이기 때문에 특히나 예배음악은 사실 매우 신중하고 책임감있게 선정되어야 되는게 맞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위험요소가 있는 것들이 있으면 당연히 분별해야되는 소리도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다양하기에 이런 찬양으로도 하나님을 만나는 브릿지가 될 수 있는 것이고 모든 상황을 쓰시지만 초신자들이 아닌 신앙의 선배들은 비난과 정죄가 아닌 분별과 신중함이 영적책임감이 있어야되는 게 맞다고 봅니다.
저는 이 찬양이 너무 좋습니다. 하지만 ‘예배 찬양으로 적합한가’에 대한 논의라면 아니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개인의 고백이자 곡조있는 기도로 본다면 이 찬양은 너무 은혜로운 찬양입니다. 기도하며 듣고 울고, 차를 타고 가다가 들으며 울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배에서 이 찬양을 불러야겠다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배는 나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시간이 아닌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58편의 기도도 찬양입니다. 58편을 읽으며 악인에 대한 반응을 볼 때 얼마나 통쾌하고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함께 찬양하기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비와이의 노래도 어느 찬양보다 더 큰 감동을 받을 때가 있었는데 이 곡도 예배 때 모두가 부를 수 있는 찬양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노래를 듣고 은혜받는 것과 찬양 때에 쓰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앨범으로써 기독교 문화로써 너무 좋은 가사이지만 예배가 무엇인지 본 의미를 생각한다면 조금 고려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다만... 사랑은 고전 13장 말씀처럼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기에... 옳고 그름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과 권면은 또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내용에 대해 옳은지 그른지, 어떤 '말과 주제'가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것인지는... 구약성경에서 신약성경까지 끊임없이 있었던 일입니다. 미가야, 예레미야 등등의 선지자 분들... 바울 사도와 또 그 외에 서신서들을 쓰신 선배님들... 무례하고, 무조건적인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진리에 대한 고민과 분별은 우리 그리스도인 사이에 계속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4:15-16]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다양한 주장들의 글도 읽어보고 찬반 글 모두 읽어보고 마지막으로 이영상을 보고 글을 적게 됩니다. 찬반 모두의 의견이 일리는 있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알려 듀오님처럼 좋은 마인드와 이성과 그에 따른 적절한 근거와 이해를 할 수 있다면 너무 좋겠습니다만 대다수의 교회 출석중인 젊은이들이 (젊은이들이 많이 영상에 등장하니 그렇게 표현했어요) 그와 같은 접근이 어려움 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로 들어 성육신, 부활, 하나님 나라 등등의 신학적 해석이 가능하면서 공감하시네 같은 찬양을 듣는 것과 그런 것에 대한 이해 없이 단순하게 공감이라는 단어에 빠져드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무엇이 먼저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신지 알고 부르는 공감하시네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고 '나'가 중심인 상태에서 부르는 공감하시네 그래서 저는 되도록 사람들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타낸 찬양에 좀 더 비중과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남겨봅니다 덧붙혀 영상 말미에 짧게 남겨주시긴 했는데 한국의 찬양이 유독 개인과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 많은 건 사실이라고 봅니다. 이것을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오래전부터 오는 한국인의 독특한 고유 정서에 근거할 수도 있음을 이해하려하고 하지만서도 너무 치우치진 않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그리고 되도록 이 이슈를 통해서 찬이든 반이든 정죄하거나 분열하거나 서로를 상처를 주는 것은 더더욱 없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23.08.27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공감을 해주셔서 놀랐습니다. 이 글 적은지도 2년이 지났네요. 이와 관련하여서는 지금도 계속 질문을 이어오고 있는데 한가지 더 적어봅니다. 이 찬양의 메세지가 정말 유익한가 아닌가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그간 들게 되었습니다. 한 순간의 감동 느낌으로 끝나게 되는 열매가 맺어진다면 우리는 진지한 도전의 질문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니의 나라가 세워지고 부흥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유익한 것일 것입니다. 댓글을 적은지 2년이 지났고 이 찬양이 나온지는 더 오래되었지요. 오늘 한국 교회와 젊은이 크리스천은 어떤 열매를 맺고 있을지요. 물론 찬양 하나가 아닌 복합적인 결과일 것입니다만 젊은이들에게 찬양은 매우 중요한 포지션을 갖고 있습니다. 여전히 이 주제는 스스로 많은 질문과 생각을 이어져 오게 하고 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믿음의 성숙이 전제 되지 않는 한 공감이란 단어가 주는 개인적 차이는 큽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공감이 될수도 있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한 공감이 되겠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참뜻을 자신의 삶에서 찾지 못한다면 그 공감이란 것은 한낱 인간의 공감에 지나지 않을겁니다. 그럼 문제가 생기죠. 온갖 인생살이 이슈에서 하나님을 가장해 이용해먹을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대표적인것이 이단 사이비구요, 정치적 이념도 포함되겠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개인적 공감으로 시작되더라도 하나님의 참 위로가 중심이 되도록 찬양뿐만 아니라 말씀선포도 병행되어야 균형을 그나마 이룰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공감하시네 가사를 듣자마자 이거 찬양으로서 너무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논란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일단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황에 공감해주시는 부분이 있는건 맞죠. 하지만 모든 상황이라는 것에는 오류가 있죠. 모든 상황을 이해하시고 위로해주시는건 맞지만 모든 상황에 공감을 하시진 않죠. 우리는 죄인이고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니까요. 공감이라는건 나도 같은 생각이야, 라는 의미인데 모든 상황에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생각과 같이 생각한다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특정상황에 공감을 해주시는거죠. 가사에 오류가 있는건 확실합니다. 그리고 찬양은 예배때 모두가 부르는 것이니만큼 보편성도 굉장히 중요한데, 이 보편성은 신학적관점에서 나옵니다. 가사를 듣고 이거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보편성이 떨어지는 거죠. 저는 그냥 평범한 모태신앙인이고 그 비난 영상? 보지도 않았지만 가사를 보자마자 잉 이게 뭐지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공감하시네 작곡가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고, 왜 그 곡을 작곡했고, 어떤 의도로 작곡했는지 듣기 전에는 사실 가사에 공감이 안됩니다. 이게 보편성이 떨어진다는 거죠. 찬양은 그러한 것 없어도 모두가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공감하시네 가사가 공감이 안되는 사람이 많잖아요.
음... 과연 특정 상황에서만 주님께서 공감해주실까요? 주님께선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이 뜻은 곧 죄를 지어도 난 그것에 공감해줄 수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죄를 지어도 된다는건 아니죠 그리고 주님께서 인간이 느끼는 것을 다 느껴보셨는데 무엇이라도 공감을 못하실게 무엇인가요? 그러므로 저는 공감하시네가 논란이 될 수 없다고생각합니다
@@바울처럼-m8z 좋은 의견 감사드려요. 하지만 3개월 동안 바뀐 점이 많은 지금또한 이 의견은 바뀌지 않았어요.ㅠ 오히려 저는 제 죄성을 잘 알기에, 그치만 주께선 그런 저희도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셨기에, 주께서 사랑으로 우릴 놓지 못하시기에, 우릴 주님의 친구, 주님의 날빛이라 해주시기에, 진노하시는 주일지라도 그 상황에 공감하기에, 저는 주께서 우리에게 공감해주실거라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뜻이 있지만 언젠가 서로 다른 뜻을 이해해봤으면 좋겠네용.!!
모태신앙에, 중고등부 내내 찬양팀에서 섬기고 인도도 하며 찬양에 대한 많은 고민들을 하였고, 한 아이의 아빠인 지금도 찬양팀에서 섬기고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CCM'과 '경배와 찬양'의 경계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경배와 찬양과 CCM을 명확히 구분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경배와 찬양의 곡 전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간 중심의 가사를 가진 곡들이 많습니다. '예배찬양'으로만 봤을 때는 위러브의 곡들은 자전적인 가사들이 많아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대중에게 복음을 쉽고 친근하게 전하는 의도의 CCM으로서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CCM의 경우 예전에 생각해보면 더 가사가 파격(?)적인 곡들이 많았던 것 같네요. 애초에 위러브의 곡들이 경배와찬양에 적합하려면 성경구절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어야 하나, 딱히 떠오르는 성경말씀은 없네요. 또한 위러브라는 팀의 특성은 예배팀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집회 때 회중들이 위러브를 촬영하는데, 위러브 측에서는 주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장려한다고 하더군요. 확실히 경배와 찬양 보다는 전도가 목적인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영상에서 나오는 내용 중 '동정'을 '공감'이라고 해석하시는건 너무 끼워맞추기식 논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논란이 있다는거 첨 알았네요 이번에는 좀 아쉬웠다 치고 다음에 만들 때는 성경에 입각해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욤 뉴에이지도 그렇고 어느 곡이든 위로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하다못해 작년인가 제작년인가에 ‘딱히 죽고싶은 건 아닌데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간다‘이런 뜻의 가요에도 위로 받는 사람들 많더라구요 많은 위로되는 가사들이 있지만 우리가 세상의 가요와 다른건 가사 중심에 예수가 있느냐 없느냐 같아서욤
혼자라고 느껴지고 외롭고 땅속에 파묻힌 것만 같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찬양이라고 생각했고 나또한 나혼자 남은것 같고 그 누구도 내곁에 남지 않은 것 같다 생각되었을때 이 찬양을 듣고 아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봐주고 계시는구나 함께해 주시는구나 했습니다 성경적이든 성경적이지 않든 오직 진리는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무엇도 확고히 힐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배음악으로 적합하지 않다?? 그런 건 누가 정하나요? 그리고ㅠ이 곡은 세상 노래도 아니고 사랑의 하나님의 속성을 담은 노래입니다. 뭐가 문제죠? 만약 설교자가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의 고통을 공감하십니다" 라고 설교하면 예배에 적잘하지 않은 설교가 되는 건가요? ... 어줍잖은 비판때문에 작사작곡가가 위축되고 찬양팀이 위축되는 것은 안 보이시나요? 회개하세요.
찬양은 경배는 내위의 분에게 드리는것입니다 찬양에서는 주님이 주가 되셔야하고 그분이 높임 받으셔야합니다 . 찬양이란것은 . 그분의 뜻안에서 그리고 성경안에서 그분이 우리를 부르시고 그런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께서 인도하시어 완성시킬 그 열망을 기대하는겁니다. 공감하시네 찬양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가 주가되어 있습니다 . 하나님은 부가 되어있죠 이것은 찬양같아보이나 자기만족이요 자기위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감사하고 그분의 사랑안에서 두려움등 문제는 해결되는것인데 찬양은 지극히 인본적이며 사람이 중심이되어있고 감정을 건드릴 찬양이지만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예배이냐하면 아니라고하겟습니다 . 다만 그리스도를 좀더 쉽게 알아가기위해 가요 비스무리하게 준비한부분 그리고 위로와 공감의 부분이 꼭 나쁘다할순 없다고 생각하지만 . 찬양과 예배는 경건한것이며 질서가있고 . 말씀이 살아잇어야하며 초점은 오직 메시아 구원자인 그분께 집중되어야합니다 . 공감하시네 찬양은 그것과는 멀어보입니다 . 선택은 본인의 몫이나 가인의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치 아니하십니다 . 물론 가요도 때론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부르면 은혜가되지만 이는 예배가 아니죠 가인은 추구하는바가 하나님은 자신을 지키는분으로 추구하엿고 가인은결국 보호하심을 입엇으나 예배는 드려지지 못햇습니다. 예수를 믿고 여전히 자신의 연민과 나약함을 보고 우울해잇다가 그런나를 위로하는 하나님은 찬양의 대상자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되는것입니다 결국 찬양의 추구하는바는 하나님은 이렇게 연약한 나를 위로하시고 그런나에게 공감한다는 말이 되기때문입니다. 또 공감하시네 찬양은 . 세월호당시 하나님이 공감하신다는둥 이상한 말을 들어서 준비된 찬양이란 말도있습니다 . 그저 감정에 허덕이는 찬양 그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것일지 자기를 찬양하는것일지는 본인만 알겟지요
시험과 고난 속에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하다가, 이 찬양을 들으며 울고 있을 때 주님이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나도 아파. 나도 아파…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로운 속성 중 하나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중심을 가지고 부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bulchung0614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우리의 아픔을 당연히 공감하십니다. 그렇지만 나의 의를 위한 찬양 . 나를 공감. 위로 는 절대 주 가 되어선 예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찬양하는것은 그분의 의. 아들을 주시기위한 하나님의 경륜.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으로. 죄사함으로 인한 완전한 그리스도의 의 를 얻음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것이지 그리스도께서 부 가 되어 나를 중심으로. 찬양을 하면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논란 자체가 이해가 안되네요.. 세상 살면서 믿음이 흔들리고 주님이 멀게 느껴졌던 분들 없으세요? 그럴때 주님을 바라보고.. 우리의 아픔을 아시는 분이 계심을 믿고 나아가자는 너무나 위로가 되는 찬양인데.. '공감'이라는 단어에만 집착해서.. 감히 공감이란 말을 붙일 주님이 아니라는 주장..너무 의미없고 비본질적입니다. 우리 마음 다 아시는 주님. 그게 이 찬양의 목적이자 주제입니다. 이 찬양 들으면서 예수님을..주님을.. 더욱 가까이 느꼈다면 충분히 은혜로운 찬양 아닌가요. 성경적으로 맞다 틀리다 따질 명분이란게 없어보입니다. 에효~ 왜 그러실까들~
담배끊기로 작정하며 기도했지만, 4년동안 담배를 끊지 못하고 해맸습니다. 결국 끊었지만 돌아보니 하나님은 나의 담배를 끊고 싶어도 끊지 못하는 연약한 마음을 이해해 주시고 공감해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공감과 이해와 기다려주심으로 인해, 나약한 제가 4년만에 담배를 끊고 금연한지 어언 20년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나는 하나님의 공감해주심, 이해해주심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예배는 나를 위해 드리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드리는 자리입니다. 그러면 나를 드러내는 기도소리와 마찬가지인 위러브의 노래는 부합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찬송가나 ccm에서도 나를 나타내어 부르는 찬양은 없습니다. 위러브와 비슷하게 나타나는 자리는 특송에서나 나타나도 어긋나는 생각이 듭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무엇하나도 어긋날게 없으나 예배 라는 자리는 다름아닌 하나님을 위한 오직 주님만을 위해 준비하고 드리는 찬양이 왜 나를 위해서 드리는 아픔에 대한걸 주님이 무슨 이유로 공감해야하죠? 이건 지극히 나와 하나님과의 기도자리에서나 가능한 부분을 끌어다 내려서 예배하는 그 자리에 모두가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며 나는 티끌같아 엎드려 경배드리는 자리에 버젓이 서서 저 아픕니다 라고 외쳐야하나요?
'공감' 이것을 마치 인간과 인간 관계에서만 사용되는 단어라 생각하기 때문에 저런 비판이 나온 것 같아요. 하지만 인간 안에서도 누군가를 100% 공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100퍼센트 공감이라는 단어는 사실 인간 관계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시어 누구보다도 우리를 잘 아시며, 더욱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셔 우리와 같은 삶을 사신 하나님께만 어울릴 수 있는 단어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단순 아픔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더나아가 그 아픔에 같이 참여하시는 그 하나님이시기에... 이 찬양을 들으면서 저는 한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독일 나치군에 의해 교수형에 처한 한 아이... 그 아이와 함께 교수형에 매달렸던 어른들은 이미 죽고.. 그 아이는 계속해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그 모습을 주변 사람들이 보면서 보는 이들 역시 너무 고통스러웠다.. "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신건가!!?" 라고 누군가 소리 지를 때... 자신 안에서 나즈막한 음성이 들리는데..... "그분이 어디 있느냐고? 그분은 여기에 있어 저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어..." 이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라 믿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종교적으로 믿으려 하니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어색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근본주의적 사상과 성경해석..그리고 신봉하는 목사들... 한국의 신학을 아주 갈기갈기 찢어 놓고 후퇴시키는 사람들.... 생각할 수록 부아가 치밀어 오르네요... 알려듀오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드러내기 보다는 인간인 우리의 입장 우리의 상황 우리의 위로가 훨씬더 중심이 되는 곡들이 많은게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의 가사에 대해서 민감하게 들여다보고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게 되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는 우리가 좀 더 넓게 보고 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찬양을 너무 신학적인 것에 비추어 생각하기에는, 찬양이란 너무나도 포괄적이고 넓고 큰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의 표현들처럼 말이죠.. 이 영상을 올린 분은 너무 많은 것을 예로 들어 말씀하신것 같고, 우리는 성경말씀을 바탕으로 찬양이 고백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말씀이 없고 삶이 다르면서 찬양이 바르게 나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공감의 참 의미는 우리의 아픈 감정과 소망 없는 현실에 대해 알고 이해하신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 죽음과도 같은 우리의 현실에 오셔서 아파하시고 죽으시고 또 부활하셨기에 우리 또한 그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게 우리의 실력되어 살도록 하시려고 공감하신 것입니다. 이 찬양은 연고를 발라주는 게 아닌, 그 상처들이 그 인생을 끝장내지 못함을 알려주는 찬양입니다.
여기서 라떼님의 Praise는 아마도 CCM을 말씀하시려는 것 같아요. 저는 미국 무디신학교를 나왔고 미국 교회를 지금 까지 다니고 있습니다. 라떼님을 지적하는 의도가 아닌 보통 미국교회에서 쓰는 단어들이기이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서 같이 나누고 싶어서 댓글을 답니당. Praise는 Worship에 한 부분인 찬양파트를 칭하는 단어로 알고있습니다만 ^^; Praise band/team를 찬양팀이라고 하는 이유죠. Worship은 예배 전체를 말하는 단어로 쓰이죠. 그리고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Service라고 부르기도합니다 (Wednesday Night Service/수요저녁예배, Sunday Service/주일예배). 영어단어이다보니 한국에서 받아들이는 의미는 조금 다른 것 같군요. 저도 "공감하시네"는 CCM으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배 찬양곡으로는 잘 모르겠어요ㅠㅠ.
저 찬양과 다른 인본주의적이라며 비판받는 찬양들도 저는 들으면서 주님에 대한 사랑,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만 느꼈는데 왜 문제가 되는것인지 이해가 잘 안됩니다. 자기고백적인 찬양(노래?)도 제가듣기엔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이러이러하게 해주셨다 주님을 믿자 의 느낌만 있는데요. 아직 어리고 견해가 짧아 다른 의견을 가지신 분의 반박을 꼭 보고싶습니다.
댓글들 보니까 찬양의 내용이 뭐가 중요하냐 내마음이 주를 향하고 있으면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주를 향하고 있다는게 중요한것은 알지만 로마서 10장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면 들음은 그리스도에 말씀에서 나온다 하였습니다 들음.. 우리가 듣는 찬양의 내용이 중요한지 아닌지 알수있는 말씀입니다 극단적으로 찬양의 가사가 주를 욕하는것이라도 내 마음이 주를 향하고 있다면 괜찮은걸까요? 오늘날 많은사람들이 교회를 욕합니다 같이 욕하고 내 마음이 주를 향하면 괜찮은걸까요? 한번 생각해 보심이 좋을것같습니다 공감하시네..라는노래 주를위한 노래가아닌 세월호를 추모하기위해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다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나 칼빈이나 마르틴 루터라면 이 곡을 반대했을것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찬양집회때 부른다라던지 혼자서 부른다라던지면 괜찮다싶지만 ‘예배’시간때 드리는건 잘못된다 생각이 듭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제도요 법입니다. 받으시는분이 기뻐하시는걸 드려야지 우리가 좋은걸 드리는게 아닙니다.
저는 이 노래를 오늘 처음 들었는데요 , 공감 이라는 단어는 옳지 않습니다 . 인간 과 인간에 관계 에서나 쓰는 단어 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아픔에 함께 하신다 라던지 , 예를 들어 , 주님 제 이런 상황을 양해해 주세요 .. 라는 맥락과 똑같은 것 같습니다. 노래와 찬양을 확실하게 구분 지어 교회 예배 때 부르도록 해야겠습니다.
말씀하신 영상을 보았고 거기에서 파생된 영상들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 핵심적인 부분이 빠져 있는 거 같아 보완하려 합니다 찬양이 되지 않는다를 말한 것이 아니라 예배 찬양으로 쓰일 수 없다는 부분이 핵심이었는데 그 부분이 잘못된 방향으로 파생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예배학적인 부분에서 예배에 사용되어지는 찬양은 하나님에 대한 '영광송'만이 사용되어 집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공적 예배의 시간에 찬송가가 사용되어 지는 부분이 큰 것입니다(찬송가는 긴 세월동안 불려진, 그리고 많은 편찬위원들에 의해 검증된 곡들이지요). 찬양으로서가 아니라 예배찬양으로 라는 가장 큰 맥락을 봐주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튼 많은 문제재기와 고민이 있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것이겠지요. 저도 영상을 통해 많이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예배 찬양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썸네일과 영상 마지막 결론 부분을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보입니다만, 그러나 영상 전체적인 내용은 예배 찬양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내용보다는, 찬양 자체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고, 지적된 문제점 역시 신학적, 음악적으로 상당히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브라이언 채플의 '그리스도 중심적 예배'라는 책만 보아도 그렇고, 상당 수 많은 예배학을 다루는 서적들에서도 단순히 '영광송'만을 사용하도록 요구하거나 권장하지는 않습니다. 복음 중심적인 내용이 들어간다면 수용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복음이란, 결국 그리스도 중심적이란 말이겠죠. 하나님에 대한 영광을 찬양하는 곡들만이 예배 때에 사용될 수 있다고 한 발 물러서도,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물론이고, 우리의 삶 속에서 세밀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 곧 하나님에 대한 영광을 찬양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예배 때 무분별한 찬양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적극적으로 지양합니다만, 이야기의 흐름을 좁혀 위러브의 '공감하시네'가 과연 예배찬양으로서 적합한지에 대한 논의가, 단순히 찬송가가 아니라 CCM이라서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문제라고 하는 것 역시 논란의 소지가 있습니다. 찬송가 안에 주옥같은 곡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송가 역시 사람들에 의해 편집된 가곡에 불과합니다. 마치 찬송가는 거룩하고 특별하며, CCM은 찬송가에 비해 덜 거룩하다거나 좀더 세속적이라는 구분은 지나친 이분법입니다. 성과 속의 구분이 찬송가냐 CCM이냐로 구별되어서는 안되니까요. 따라서 예배때 찬송가는 되지만 CCM은 위험하다는 것 역시 지나친 전통주의로 회귀하는 역발상이 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공예배를 귀하게 여기고, 예전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과 예배찬양의 적합성을 논하는 것이 과연 일치할 수 있는지도 깊이 고민해봐야 합니다. 예배의 거룩함은 우리가 부르는 찬양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가사가 복음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우리의 마음의 문제가 더 중요합니다. 거룩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려듀오 댓글 달아주셔서 이렇게 의견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니 참 좋네요^^ 앞서 말씀해주신 CCM과 찬송가의 구분을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 찬송가 역시 CCM이라고 하는 큰 카테고리 안에 조금 더 세부적인 요소라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찬송가 역시 편집된 가곡이라는 명칭에서는 조금의 수정을 요청 드립니다 콘트라팍타,콘트라팍튬이라고 하는 정식적인 장르에 소속이 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이러한 부분에서 잘못된 정보전달의 오류가 있을 수 있기에 정확히 체크하고 넘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찬송가와 CCM 특히 요즘 불리어지는 찬양들을 구분짓는 것은 이분법이 아니라 CCM이 조금 더 심화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해주신대로 콘트라팍타라고 하는 장르는 당대 유명한 노래 또는 민요와 같이 작자미상의 멜로디에 가사를 신앙적인 가사를 덮는 장르인데 그 역시 그 당시에는 CCM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곡들이 전 세대가 함께 고백되어지고 살아남은 곡이 소위 찬송가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분법으로 가르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두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됩니다 말씀해주신대로라면 칼빈이 시편 찬송가 이외의 찬송을 금지시킨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부분이 되어 버리는 것이겠죠 그 시대에 금지되어야 했던 시대의 알리가 없기 떄문에 말이죠. 의견이 나누어지고 조율되어 가면서 우리가 고백해야할 찬양의 풀이 넓어지는 것은 맞지만 전세대와 함께 고백되어지는 것이 교회의 사역에 더 유익하며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모습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대학원에서 예배음악을 전공하면서 3년간 동문들과 함께 나누었던 정보를 짧게나마 공유를 해보았습니다^^ 물론 제가 진리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라고 봐주시면 좋을거 같습니다^^
왜 《공감하시네》라는 노래가 찬양이 아닌가?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찬양은 인간이 주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노래를 듣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한 노래입니다 신학의 부재, 체휼, 뭐 이런 것들이 아니라. 기본 전제가 이미 뒤틀려 있다는 것입니다 ua-cam.com/video/VZ1G2Zucdck/v-deo.html
@@rehym763 위러브 인터뷰 중에 이 찬양은 세월호 유족들을 생각하며 위로하기 위해 만든 노래라 했습니다. 단연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노래가 아닌 명확히 세월호 유족을 위로하기 위한 노래로 지어졌으니 예배때 쓰면 안되죠. 찬양이 아니라 그냥 찬양팀이 만든 일반적인 노래 입니다.
"하나님을 내가 이해하고자 하는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이 말자체가 교만한 마음에서 나온 말입니다. 몰지각, 몰이해입니다. 주님은 지적장애자와도 교제하시고 낮은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낮은곳으로 천한곳으로 내려오십니다. 이 찬양이 왜 논란인지 모르겠어요 수준을 끌어내렸다는 표현은 율법주의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할법한 표현같네요
하나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 그분은 친구이시지만 존귀하신분이시며 그분은 인간의 형상으로오셧지만 본체는 하나님이십니다 . 하나님이 우리의수준에 맞추시어 우리와함께하시는것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될때에는 반드시 그분의 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 또한 공감하시네는 세월호 사건을 통해 쓰인 찬양이다하여 논란이 많은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듣기좋고 내가맘이 편하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함이 가벼워져선아니될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린아이의 찬양을하는것은 그들이 할수있는 최선이 그것이라그렇지만 우리는 어린아이가아니요 그분의자녀요 왕같은제사장입니다 감정적으로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요 인류를 살리시기위해 자신을버리시어 인류를 구원하신 귀한분이기에 더욱더 귀히여겨야하고 . 찬양이 깊이가잇어야합니다.
@@이천우-k7u 저는 모태신앙이지만 지난 30년간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년정도 전에 정말정말 인격적으로 만난 뒤 인생의 가치관이 완전 바뀐 사람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은 '공감하시는 하나님' 이 맞다는 것입니다 밑바닥에서 살려달라고 매일 밤마다 부르짖어 보신적 있으신가요? 모든 것을 다 순종하겠다고 바닥을 구르며 밤을 지새우면 새벽이 올때까지 기도해보신적 있으신가요? 내가 하나님께 원하는 것은 문제해결에 대한 답과 환경의 변화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그보다 먼저, '힘들었지?' '나도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저에게 와주셨습니다 저도 이런 하나님이신 줄 몰랐고 정말 너무너무 놀라고 감사해서 펑펑 울었었습니다 저는 이 찬양을 들을 때 마다 이 찬양을 만드신 분은 진실로 친밀하게 하나님을 만나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경험에서 나오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찬양이니깐요 이 찬양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는데 어떤 의미로 참 놀랍네요 찬양의 깊이는 누가 정하죠? 저는 이 찬양을 부를때마다 내가 바닥을 치며 기도할때 내게 공감해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은혜에 아직도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해서 간절하게 부르는데 이게 깊이가없이 부르는 걸까요?
믿음의 성숙이 전제 되지 않는 한 공감이란 단어가 주는 개인적 차이는 큽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공감이 될수도 있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한 공감이 되겠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참뜻을 자신의 삶에서 찾지 못한다면 그 공감이란 것은 한낱 인간의 공감에 지나지 않을겁니다. 그럼 문제가 생기죠. 온갖 인생살이 이슈에서 하나님을 가장해 이용해먹을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대표적인것이 이단 사이비구요, 정치적 이념도 포함되겠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개인적 공감으로 시작되더라도 하나님의 참 위로가 중심이 되도록 찬양뿐만 아니라 말씀선포도 병행되어야 균형을 그나마 이룰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적 내용을 담기에 우리의 모든 상황에 공감하시는 주님은 아니시다. 우리의 아픈맘을 아시지만 그 아픈 마음이 하나님을 전하면서 아픈 마음인지 죄로인해 아픈마음인지 사고로 인해 아픈 마음인지는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전부 철저히 복음이 전파되고 예수님의 성육신으로부터의 구원에 집중되어 있으며 모든 위로와 격려가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집중되어 있다. 가사를 보면 주님이 메인이 아니라 우리가 메인이고 모든 상황에 공감하신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다. 구약시대에 정해지지 않은 불을 드리고 정해지지 않은 방법으로 언약궤를 나르다가 죽는 제사장들도 있었다. 이토록 죄에 대하여 엄격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에 공감하신다는 것은 맞지 않다. 찬양이 우리나 나나 너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찬양하며 그 행한일을 찬양함이 진정한 찬양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가사를 작사하는 분의 기준과 찬양속 묘한 표현; ‘우리’와 ‘나’에서 -> 주님께로 나아가는 의지와 주체자의 순서에 있어 혼돈을 줄수 있고(우리의 구원은 ’주님께로부터‘ 가 본질이고 절대적인 가치) 찬양가사 의혹이 자꾸 나오는 이유는 주님께로부터가 아닌 자꾸 ‘나’와‘우리’의 의지적인 관점들로 구원을 이루는듯한 가사들이 찬양속에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왜 다른그룹과 달리 유독 위러브의 찬양가사에 계속 의혹들이 생기는지는 말그대로 찬양 가사가 주는 그 오묘하고 묘한표현들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수십년간 찬양 사역을 해 온 사역자로서... 신학적이다 아니다를 놓고 고민하는 분들도 무조건 비판하고 외면할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서 찬양이라 함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음악으로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즘 전세계의 찬양 곡들을 보면 약간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곡들이 많은게 사실이기 때문이죠. 한
예배에 적합한지 부적합한지 왜 그쪽들이 판단하세요? 이 찬양으로 주님께서 어떤일을 행할줄 알고 계시나요? 전 모르겠어서 감히 제가 판단 못하겠는데 이 찬양으로 이미 위로받고 은혜받은 사람들, 앞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왜 무시하세요? 그 또한 주님께서 행한 일이시고 하실 일들인데 아니 최소한 이 찬양 예배시간에 부르기 적합한지 기도로 주님께 물어보고 댓글 써대시는건 맞죠?
예수님은 많은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셨습니다. 눈물도 흘리셨지요.. 그래서 이 곡의 의미는 알겠지만... 무언가 살짝 2퍼센트 부족한 느낌이긴 합니다. 예수님은 사실 공감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그 아픔의 근원을 치유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 곡에서도 공감하셨네 까지로 가사가 끝나서 좀 아쉽긴 합니다. (신학적인 내용은 패스....!)
찬양에 불순한 의도가 있거나 한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찬양의 가사 뜻도 잘 알아보도 않고 신학만을 운운하며 다소 억지로 보일 수 있는 비판을 하는 건 마음이 아프네요. 벌써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여러 모습으로 기독교 관련 문제가 나오는 건 우리의 부족함과 그릇된 모습을 하나님이 말씀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꼭 주님의 음성과 꿈에서 주님의 얼굴을 뵈어야만, 그리고 해당 주일에 가장 많은 헌금을 하고 고개를 빳빳하게 세워야만 믿음이 강한 사람이 된다는 바리새인들의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요? 저는 아직도 주님의 음성과 얼굴을 뵌 적이 없어요. 그래도 예영모를 통해서 하나님이 항상 제게 손을 내밀고 계셨다는 걸 알게 되고 그 뒤로 주님을 믿게 되었죠. 찬양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준이 예수님의 사랑을 폄하하는 상황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논란이 있었구나, 허허.. 예배라는 행위에 만약 딱 한곡의 찬양만 해야한다면 '공감하시네'가 서사적으로 적절하진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배에는 흐름이 있으니까요. 나의 연약함이나 죄악된 모습을 내려놓고 주님을 바라보는 그리고 하나님을 결국에는 예배하는 서사가 바른 예배라고 생각하니까요, 제가 예배인도자이고, 딱 한곡의 찬양만 허용된다면 많은 경우에는 '공감하시네'는 선곡하지 못할거같기는 합니다만, 하지만!, 우리의 예배는 많은 요소들이 있고, 예배의 찬양또한 한곡이 아닌 여러곡이 있고, 또 그 모든 곡들이 한곡 그 자체로 다 신학적 내용을 빼곡히 알차게 담고있지는 않지요, 때문에 예배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그 안에서 찬양의 흐름에 따라서 많은 내용의 찬양들이 선곡되어 그 흐름을 만들어가게 되는데 이런 맥락안에서 '공감하시네'는 훌륭한 찬양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영역에서 모든 처지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예배케 하시기 때문에 '신학적내용이 틀리지않다면' 부르지 않아야 할 이유가 못되죠. 단순히 '상대적으로 빈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예배에 사용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경배와찬양의 구성이나 신학적 흐름에 대해 다소 생경해서 그런것이 아닐까 싶네요. 신학을 공부한 저로써는 이 가사안에서 신학적 오류는 찾아보기 힘든것같네요. 말씀하신것처럼 히브리서의 대제사장적 지위에 대한 동정(공감)하심, 원어적 의미로도 공감으로 해석될수 있고, 공생애중에 신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살며 바리새나 기득권층을 위하기보다 세리와 창기와 가난한자와 아픈자들에게 찾아오셨던 것과, 나사로의 죽음앞에 슬퍼하는 이들을 보며 눈물흘리며 비통해하신 것들 등.. 우리의 역약함을 아시고 똑같은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신다는 내용.. 우리에게 오신 임마누엘이신 주님.. 거의 모든 부분이 성경적으로 충분해 보입니다. 다만 이분들의 주장들도 이 찬양에 대해 신학적 고민을 던져주었다는 것 자체로 이 찬양을 더 깊이 생각해보는 유익함을 주었다고생각합니다. 또 우려했던것처럼 예배 안에서 사용할 때는 예배의 신학에 따라 나 자신에서 예배가 멈추지 않도록 그 흐름에 맞는 지혜로운 선곡을 한다면 충분히 아름답고 선한 영향력을 예배안에서 드러낼 수 있다고 봅니다(이미 예배안에서나 일상에서 그런 찬양이 되고 있지만요~) 잘 정리 해주셔서 유익했네요. 어떤 교회신학과 교단신학을 가졌느냐에 따라 해석하는바가 다르겠지만, 성경신학적인 입장에서 잘 비판해 주신거 같아 이 영상에 공감하게 되었네요. 좋은영상 감사해요. 영상올라온지 한참이지만 이번주에 공감하시네를 예배때 부르게 되어 연주영상을 찾다가 이곳까지와서 생각보다 깊이 찬양을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군요..
앞에서 인도하시는 분이든 악기를 연주하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냥 performance일 가능성이 크죠. 진심으로 찬양을 부른다고 하지만, 기타 연주만 보더라도 애드립때 그렇게 찡그리는 연주는 그냥 performance에요 사람들을 의식한, 친양을 보면 너무 웃긴것들이 많죠. 예수님이 피흘려 고통받고 죽은시는 가사임에서 멜로디가 신나면 방방 거리죠. 가사가 힘들주고 희망을 주어도 melody에 따라 depressed해요. 찬양을 앞에서 하는 사람이든 따라 부르는 사람이든 보세요 모두 같은 표정이죠. ㅋㅋ 오히려 인생의 전부를 걸로 음악 프로그램에 나와 부르는 가수 지망생들이 더 진실되게 불러요
딱히 비판할 생각 하나도 없는데 첨 들었을때 은혜롭지 않아서 그냥 잘 안 들었던 기억이... 하지만, 비기독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기독교 입문용(?)으론 좋은것 같아요. 기독교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훨씬 많고 잘 믿는 청년들이 점점 없어지고 있는 추세니... 청소년들이 좋아할 만한 이런 요소들이 있으면 교회로 인도 하는데 나쁠것 같진 않네요 ㅋㅋ 근데 정말..첨 들을때도 끝까지 잘 못 들었던 기억이...가요 같아서 그랬나봐요..
이 찬양에 논란이 있었는지도 몰랐네요ㅋ 예전에 일때문에 운전하던중에 공감하시네 찬양듣고 그냥 나도 모르게 눈물 흘렸던게 생각나네요... 그런데 이전에 찬양의 멜로디에 취해 내 감정을 신앙적 감동으로 착각하고있진 않는지에 대해 계속 고뇌하다가 시험든적이 있었는데 이 영상을 보고 조금 회복된것같아요. 그때의 감정도 사실 하나님이 주신거라는걸 잊고있었어요. 내 입에서 뱉어지는 찬양의 가사가 나를 위한게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간증이 될수 있게 날마다 기도해야겠습니다.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교회에 이데올로기를 끌어오는 행태가 슬프다. 오직 예수님의 구원과 부활 하나님의 사랑만이 강조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좌파적 이념이 들어와 설치고 우파적 이념이 들어와 분열시킨다. 알려듀오, 위러브, FTNER, 이정훈교수 모두 다 회개하고 예수님의 사명에만 집중하길 기도한다.
눈먼자를 고치시는데 다리를 안고치셨다고 생떼를 쓰는 격처럼 보이네요... 찬양속에 나에게 응답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더 중요하지않을까요?? 신학적이네 성경적이네.. 그것을 따지면서 찬양하시는 분들께서는 그냥 자신들의 방식대로 하세요... 타인의 찬양을 트집잡는 오지랍이 성경적이고 신학적 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 같네요...
양쪽 모두 성경에 근거해서 주장하신다 생각이 듭니다. 다만 신학적 견해는 자기의 주관이 들어가는 것이므로 완벽하지 못할수 있음을 분명히 전제로 해야됩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대해 성경을 잘 모른다는 식의 말은 다분히 공격적이며 무시하고 판단하는 것으로 그 안에 예수 안에서의 형제 사랑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로 찬양하고 신학적으로 옳고 그름을 가린다고 해도 그 안에 하나님의 교회를 나누는 일은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 일인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찬양이어서 들어보려고 들어왔다가 자동재생으로 보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에서 댓글 남겨봅니다.
- 좌파는 감성으로 영혼을 파괴하고 우파는 이성으로 영혼을 재건한다. - 그냥 기독교인들이 혼자 흥얼거리기에 알맞은 생활노래 정도가 아닐까요? 찬송은 수직적인 노래입니다. 내가 위로받고 내가 힘을 얻기보다는 구원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예식 행위입니다. CCM은 집에서 대중가요 대신 부르기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좋죠.. 주님이 공감하시고 그런데 가사가 그리고 끝이잖아요? 예수님이 직장생활에서 지치고 학교에서 스트레스 받는 것 공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지신것 아니잖아요. 그러니 찬양이 아닌 개인고백정도 수준으로 느껴지는 것이죠. 다윗과 아삽이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노래하는가 보십시오. 그래서 더욱 분별하지 못하는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진리가 무엇인지 쉽고 명확하게 전달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네요. 진리가 명확하니까요
찬양의 가사가 무조건 '십자가 사건'에만 국한되어야 하는 건가요? 그런 기준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주님의 성품을 찬양하는 시편의 찬양 역시 넘치고 넘칩니다. 추가로, 이미 말씀 드렸지만, '공감'이란 단어는 기독교적 용어인 '체휼'과 그 뜻을 같이 합니다. 그리스도의 체휼하심에 대해서 좀 더 공부를 해보시면, 우리의 모든 아픔에 공감한다는 가사 내용이 학교에서 스트레스 받는 것으로만 그 아픔을 국한시키지 않으며, 주님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모든 아픔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오신 '의사'라는 것 역시도 누가복음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입니다. 성경을 통전적으로 보셔야 합니다. 이미 님은 찬양의 가사 속 아픔과 공감을 실생활 속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국한 시켜놓고 논의를 전개하고 계신데, 저는 찬양의 가사를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아마 이게 저와 님과의 다른 점인 것 같습니다.
@@알려듀오 알려듀오님 말씀은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성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고초를 겪으셨으니 그 분의 체휼이 우리에게는 위로가 되겠죠. 그런데 이 가사는 그 분의 성품에 대한 찬미는 될 수 있어도 찬양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하려는 말이 이해가 되시나요?
@@Whatisthis1217 정말 죄송하지만 찬미는 가능하나 찬양은 안된다는 건 순전히 사람의 입장에서 워드플레이에 불과한 겁니다. 하나님도 정말 그렇게 보실거라고 100프로 확신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이란 주어가 아예 언급되지 않은 아가서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알려듀오 참.. 주관이 뚜렷하시군요. 듀오님이야말로 이 곡이 100%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곡일지 생각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아가서와 이 곡의 가사와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우선은, 사람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것이 다르니 찬양이란 것에 대해 다르게 이해할 수 있겠다 생각이 듭니다. 묻고 싶은 것은 듀오님은 그저 그리스도의 체휼이란 내용만으로, 곡의 가사를 현재 연구된 신학적으로 변증할 수 있다면 모두 찬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거야말로 끼워맞추기식 워드 플레이인것 같은데요. '주님이 우리의 아픈 맘을 아시네 가까이서 우리의 아픔에 공감하시네 우리 가운데 찾아 오셨던 그 주님이 우리의 모든 상황에 공감하시네' 곡의 메인이 되는 후렴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은 나와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분을 높이거나 찬양한다거나 의지한다거나 하는 가사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실험적인 곡이 아니라면, 현대의 모든 곡은 기승전결이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왜 굳이 A,B형태의 곡에서 핵심 결론에 이르는 B파트의 마지막을 '우리의 모든 상황에 공감하시네' 라는 가사로 끝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거론되었다고 전부 찬양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찬양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기준이 되어, 그 분께 시선을 돌리고 그 분을 높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찬송가 가사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주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바라기는 대중들을 위한 찬양팀이라면, 특히 젊은층의 그리스도인들을 타겟으로 한다면 더욱 접근성있고 하나님 중심의 가사를 써야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가사가 말씀, 곧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 있는 초심자분들과 청소년 청년들을 배려한다면 더욱요. 앞으로 사람이 듣기좋게 맞추는 노래들이 아닌, 하나님이 곡의 주인이 되는 찬양들이 많이 나올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Whatisthis1217 주님이 우리의 아픈 맘을 아신다는 것, 그리고 단순히 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신다는 것, 바로 그 공감의 존재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친히 우리 곁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것이 어떻게 주님을 높이는 가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체휼이라는 주제가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 아닌가요? 주님을 향한 노래가 아닌가요? 찬양 가사에 반드시 '높인다' '영광을 돌린다' 는 언급이 누락되어 있으면 그건 하나님이 기준이 아닌 사람이 기준이 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엄마도 힘든 상황이셨을텐데, 그래도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주신 것 잘 알아요. 우리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 바로 엄마에요" 라고 자녀가 엄마에게 편지를 썼는데, 여기에 '감사하다' 또는 '고맙다'라는 표현이 없으니 이건 감사하는 내용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걸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반드시 감사하다거나 고맙다는 언급이 없을지라도 전체적인 분위기와 맥락이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면, 억지로 그렇게 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런 맥락과 분위기가 글에서 느껴진다면 그건 당연히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편지겠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 중심의 가사가 무조건 하나님이란 단어가 반복되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아가서를 읽어보세요. 님의 논리와 주장대로면 아가서는 절대로 정경으로 채택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찬양이 아니네요 . 찬양이 아닌 나가 주가되고 주님이 부가된 찬양 아닌가요? 내가 아플때 주님이 나를 .이해하시고 공감 한다는 대략적인 내용인데요 .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 이것이 찬양하는것입니까 아니면 나를 위로하는 노래입니까? 내가 추구하는것을 예배하는것인데 이찬양은 예수님의 위로와 사랑을 뜻하는듯 하나 사실 찬양 이 아닌 나를 위로하는듯 한 이것이 찬양이라고 부르기엔 . 좀 이해가 안되네요 찬양에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에 대해서 나아가야하는것입니다. 찬양은 기본적으로 .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십자가 에대해 감사하고. 감사하고 그이름을 높이고 그 분에게 사랑한다고백하며 그분과 내가 신랑과 신부처럼 하나가되는것이죠 또는 그이후 그분의 목적을 기억하고. 그분의사랑을 입은자들이 그분의뜻대로 가겟다는 . 결단 각오죠 . 그리고 그분의 임재를 . 그분께 의탁하는것으로 끝내기도하지요 저건 인간감정적인 찬양이 맞습니다.
이 논란이 왜 논란인지 저는 잘 모르겠음 물론 하나님은 높고 높으신분이 맞음 하지만 육신의 아버지가 있기전에 하나님은 우리의 아빠 아버지이신데 아빠가 아들, 딸의 힘든 마음을 공감하고 위로해주는게 잘못된건 아니지않나요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아빠와 더 친해져야한다고 생각함
삼위일체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승천을 했기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승천 이전과 이후의 내재적 삼위일체에 차이가 있는가?에 대한 논문도 있을정도로 성육신과 육체성에 대한 논의는 다양한 것인데, 논문도 교리도 학문으로써의 신학도 아닌 찬양 가사의 단어하나에 문제삼는건....
예수님은 이 땅에서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아가며 인생의 가장 처절한 순간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죄악 가운데 빠진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새 생명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시지면 그 이전에 더 중요한 문제는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공감하시네는 이런 "죄의 문제"를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지 않게 하는, 주님을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 도구 정도로 생각하려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찬양이 될 수 있기에 언급하신 유튜브에서 비판을 하였던 것입니다.
꼭 찬양이 아니더라도 좋은 연주곡, 아름다운 음악
자체가 사람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찬양도 분별하는게 맞습니다.
이 말은 초신자들이 아닌 신앙의 선배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은 꼭 하고싶은게
기독교가 추구하는 것이 '사랑'은 맞으나
되려 그것들이 문제가 될 때도 많다고 봅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잠언에는 '악인과 벗하지 마라' 등등.
하나님께서도 뭐든지 다 사랑하라고는 하지 않으셨어요. 사랑과 공의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말을 거창하게 했지만
위험할 수 있는 요소들을 캐치하고 분별하는 것은
정죄나 비난이 아닙니다.
우린 논쟁을 무조건 비난화하며 사랑을
내세웁니다. 물론 자기 의를 드러내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껍데기 논쟁밖에 안되겠지만
아이가 뭣모르고 음식에 이것저것 넣고있을 때
넣어야될 거, 말아야될 거를 알려주는 어른도
필요합니다.
이 세상엔 초신자 불신자부터
정말 많은 다양한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에.
저는 we love의 공감하시네 이찬양의
세월호 논란에 있어서
이렇게 다양한 의견이 나온 것 자체가 그래도 다행이고, 아직까지 한국교회가 건강한 거라 생각듭니다.
자기에게 당장 위로가 되고 좋은 찬양이라고 해서
이 찬양이 문제가 될 여지까지 덮어버릴 순 없으니까요.
또한 다른분 의견처럼 최근 ccm이 점점
세상음악코드나, 감성팔이에 의존하는 분위기나 카타르시스적인 음악이 많이 나오고 있기때문에 저는 어느 누구보다도 ccm찬양사역자들의 영적책임이 정말 막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루시퍼가 최고 위엄의,음악의 천사였으니까요.
음악은 사람의 영혼육을 좌지우지 시키는 것에 탁월한 영적무기이기 때문에 특히나 예배음악은 사실 매우
신중하고 책임감있게 선정되어야 되는게 맞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위험요소가 있는 것들이 있으면 당연히 분별해야되는
소리도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다양하기에
이런 찬양으로도 하나님을 만나는 브릿지가 될 수 있는 것이고
모든 상황을 쓰시지만
초신자들이 아닌 신앙의 선배들은
비난과 정죄가 아닌 분별과 신중함이
영적책임감이 있어야되는 게 맞다고 봅니다.
동의합니다
200% 동감입니다
네 맞습니다
저는 이 찬양이 너무 좋습니다. 하지만 ‘예배 찬양으로 적합한가’에 대한 논의라면 아니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개인의 고백이자 곡조있는 기도로 본다면 이 찬양은 너무 은혜로운 찬양입니다.
기도하며 듣고 울고, 차를 타고 가다가 들으며 울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배에서 이 찬양을 불러야겠다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배는 나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시간이 아닌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58편의 기도도 찬양입니다. 58편을 읽으며 악인에 대한 반응을 볼 때 얼마나 통쾌하고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함께 찬양하기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비와이의 노래도 어느 찬양보다 더 큰 감동을 받을 때가 있었는데 이 곡도 예배 때 모두가 부를 수 있는 찬양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노래를 듣고 은혜받는 것과 찬양 때에 쓰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앨범으로써 기독교 문화로써 너무 좋은 가사이지만 예배가 무엇인지 본 의미를 생각한다면 조금 고려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분말씀이 제일 맞다고 생각이 드네요.
개인적으로 듣거나 부르거나 그러는건 괜찮다 생각되지만 예배시간때 드리는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도요 법이기 때문에 받으시는분이 기뻐 받으시는걸 드려야지 우리가 좋다생각해서 우리마음에 기쁜걸 드리는게 아니기때문입니다
여러분... 다들 믿는 분들 맞으시죠...? 맞다 틀리다로 싸우지들 좀 맙시다...
지식이 많아질 수록 사람이 높아만 지는 느낌이네요...
사랑 빼면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셨는데...ㅜㅜ
100퍼 공감합니다
동의합니다. 상당히 공격적인 말로 서로에게 상처주기를 마다하지 않는데 니가 옳냐 내가 옳냐 따지기 전에 글쓴이님 말대로 사랑의 마음이 있는건지 돌아보십쇼. 사랑의 마음이 없고 분노의 마음만 있다면 그 마음은 누가 준걸까요?
맞는 말씀입니다. 다만... 사랑은 고전 13장 말씀처럼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기에... 옳고 그름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과 권면은 또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내용에 대해 옳은지 그른지, 어떤 '말과 주제'가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것인지는...
구약성경에서 신약성경까지 끊임없이 있었던 일입니다.
미가야, 예레미야 등등의 선지자 분들...
바울 사도와 또 그 외에 서신서들을 쓰신 선배님들...
무례하고, 무조건적인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진리에 대한 고민과 분별은 우리 그리스도인 사이에 계속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Ihojc 공감합니다. 근데 해당영상 한번 보시면 좀 너무하다 싶은 제스처와 어감이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뽈롱-x8p 아... 그 교회에서 올린 영상 말씀이신거죠? 네네. 그러게요. 유튜브 영상이라는 이유로 민감할 수 있는 사항을 다소 가볍게 다루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4:15-16]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주님이 나를 공감하신다는 말은 곧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감 받을 때 안정감을 얻고 사랑 받는다는 느낌을 얻기 때문이죠. 즉, 공감은 사랑의 기본 속성입니다. 따라서 공감하시네 곡은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드러내는 곡입니다.
다양한 주장들의 글도 읽어보고 찬반 글 모두 읽어보고 마지막으로 이영상을 보고 글을 적게 됩니다.
찬반 모두의 의견이 일리는 있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알려 듀오님처럼 좋은 마인드와 이성과 그에 따른 적절한 근거와 이해를 할 수 있다면 너무 좋겠습니다만
대다수의 교회 출석중인 젊은이들이 (젊은이들이 많이 영상에 등장하니 그렇게 표현했어요) 그와 같은 접근이 어려움 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로 들어 성육신, 부활, 하나님 나라 등등의 신학적 해석이 가능하면서 공감하시네 같은 찬양을 듣는 것과 그런 것에 대한 이해 없이
단순하게 공감이라는 단어에 빠져드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무엇이 먼저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신지 알고 부르는 공감하시네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고 '나'가 중심인 상태에서 부르는 공감하시네
그래서 저는 되도록 사람들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타낸 찬양에 좀 더 비중과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남겨봅니다
덧붙혀 영상 말미에 짧게 남겨주시긴 했는데 한국의 찬양이 유독 개인과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 많은 건 사실이라고 봅니다. 이것을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오래전부터 오는 한국인의 독특한 고유 정서에 근거할 수도 있음을 이해하려하고 하지만서도 너무 치우치진 않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그리고 되도록 이 이슈를 통해서 찬이든 반이든 정죄하거나 분열하거나 서로를 상처를 주는 것은 더더욱 없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23.08.27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공감을 해주셔서 놀랐습니다. 이 글 적은지도 2년이 지났네요.
이와 관련하여서는 지금도 계속 질문을 이어오고 있는데 한가지 더 적어봅니다.
이 찬양의 메세지가 정말 유익한가 아닌가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그간 들게 되었습니다.
한 순간의 감동 느낌으로 끝나게 되는 열매가 맺어진다면 우리는 진지한 도전의 질문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니의 나라가 세워지고 부흥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유익한 것일 것입니다.
댓글을 적은지
2년이 지났고 이 찬양이 나온지는 더 오래되었지요.
오늘 한국 교회와 젊은이 크리스천은 어떤 열매를 맺고 있을지요.
물론 찬양 하나가 아닌 복합적인 결과일 것입니다만 젊은이들에게 찬양은 매우 중요한 포지션을 갖고 있습니다.
여전히 이 주제는 스스로 많은 질문과 생각을 이어져 오게 하고 있습니다.
헛..너무나 공감가는 글을 써주셨네요~~
백 번 공감합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믿음의 성숙이 전제 되지 않는 한 공감이란 단어가 주는 개인적 차이는 큽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공감이 될수도 있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한 공감이 되겠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참뜻을 자신의 삶에서 찾지 못한다면 그 공감이란 것은 한낱 인간의 공감에 지나지 않을겁니다. 그럼 문제가 생기죠. 온갖 인생살이 이슈에서 하나님을 가장해 이용해먹을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대표적인것이 이단 사이비구요, 정치적 이념도 포함되겠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개인적 공감으로 시작되더라도 하나님의 참 위로가 중심이 되도록 찬양뿐만 아니라 말씀선포도 병행되어야 균형을 그나마 이룰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공감하시네 가사를 듣자마자 이거 찬양으로서 너무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논란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일단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황에 공감해주시는 부분이 있는건 맞죠. 하지만 모든 상황이라는 것에는 오류가 있죠. 모든 상황을 이해하시고 위로해주시는건 맞지만 모든 상황에 공감을 하시진 않죠. 우리는 죄인이고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니까요. 공감이라는건 나도 같은 생각이야, 라는 의미인데 모든 상황에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생각과 같이 생각한다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특정상황에 공감을 해주시는거죠. 가사에 오류가 있는건 확실합니다. 그리고 찬양은 예배때 모두가 부르는 것이니만큼 보편성도 굉장히 중요한데, 이 보편성은 신학적관점에서 나옵니다. 가사를 듣고 이거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보편성이 떨어지는 거죠. 저는 그냥 평범한 모태신앙인이고 그 비난 영상? 보지도 않았지만 가사를 보자마자 잉 이게 뭐지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공감하시네 작곡가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고, 왜 그 곡을 작곡했고, 어떤 의도로 작곡했는지 듣기 전에는 사실 가사에 공감이 안됩니다. 이게 보편성이 떨어진다는 거죠. 찬양은 그러한 것 없어도 모두가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공감하시네 가사가 공감이 안되는 사람이 많잖아요.
음... 과연 특정 상황에서만 주님께서 공감해주실까요?
주님께선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이 뜻은 곧 죄를 지어도 난 그것에 공감해줄 수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죄를 지어도 된다는건 아니죠 그리고 주님께서 인간이 느끼는 것을 다 느껴보셨는데 무엇이라도 공감을 못하실게 무엇인가요? 그러므로 저는 공감하시네가 논란이 될 수 없다고생각합니다
@@MiLiNa07433 제 생각엔 주님께서 공감보단 아파하고 질책하실 일이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작사가라면 제 안에 있는 죄성을 잘 알기에 감히 '공감'이라는 단어조차 꺼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바울처럼-m8z 좋은 의견 감사드려요. 하지만 3개월 동안 바뀐 점이 많은 지금또한 이 의견은 바뀌지 않았어요.ㅠ
오히려 저는 제 죄성을 잘 알기에, 그치만 주께선 그런 저희도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셨기에, 주께서 사랑으로 우릴 놓지 못하시기에, 우릴 주님의 친구, 주님의 날빛이라 해주시기에, 진노하시는 주일지라도 그 상황에 공감하기에, 저는 주께서 우리에게 공감해주실거라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뜻이 있지만 언젠가 서로 다른 뜻을 이해해봤으면 좋겠네용.!!
이 찬양을 엄청 복음적이기보다 다윗처럼 하나의 시편으로 생각하면 되죠...
맞다 틀리다 그런걸 굳이 왜 따져요....ㅠㅠ
맞다 틀리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높이는것이 중심이 되는것이
예배음악인데 예배때 사용하기에는
조심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에 마니 치우쳐있기에..
( 평소때 부르는 것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0925florida그런 논리면 축복송도 부르면 안 되겠네요? 하나님을 높이는 노래가 아니잖아요. 단편적으로 생각지 말아주세요.
@@rehym763 그래서 예배학에는(신학) 찬송가만을 부르게 되어있죠.
모태신앙에, 중고등부 내내 찬양팀에서 섬기고 인도도 하며 찬양에 대한 많은 고민들을 하였고, 한 아이의 아빠인 지금도 찬양팀에서 섬기고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CCM'과 '경배와 찬양'의 경계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경배와 찬양과 CCM을 명확히 구분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경배와 찬양의 곡 전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간 중심의 가사를 가진 곡들이 많습니다. '예배찬양'으로만 봤을 때는 위러브의 곡들은 자전적인 가사들이 많아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대중에게 복음을 쉽고 친근하게 전하는 의도의 CCM으로서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CCM의 경우 예전에 생각해보면 더 가사가 파격(?)적인 곡들이 많았던 것 같네요.
애초에 위러브의 곡들이 경배와찬양에 적합하려면 성경구절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어야 하나, 딱히 떠오르는 성경말씀은 없네요.
또한 위러브라는 팀의 특성은 예배팀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집회 때 회중들이 위러브를 촬영하는데, 위러브 측에서는 주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장려한다고 하더군요. 확실히 경배와 찬양 보다는 전도가 목적인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영상에서 나오는 내용 중 '동정'을 '공감'이라고 해석하시는건 너무 끼워맞추기식 논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처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던 곡입니다. 너무 큰 위로를 받은 찬양이에요
이런 논란이 있다는거 첨 알았네요 이번에는 좀 아쉬웠다 치고 다음에 만들 때는 성경에 입각해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욤 뉴에이지도 그렇고 어느 곡이든 위로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하다못해 작년인가 제작년인가에 ‘딱히 죽고싶은 건 아닌데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간다‘이런 뜻의 가요에도 위로 받는 사람들 많더라구요 많은 위로되는 가사들이 있지만 우리가 세상의 가요와 다른건 가사 중심에 예수가 있느냐 없느냐 같아서욤
혼자라고 느껴지고 외롭고 땅속에 파묻힌 것만 같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찬양이라고 생각했고 나또한 나혼자 남은것 같고 그 누구도 내곁에 남지 않은 것 같다 생각되었을때 이 찬양을 듣고 아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봐주고 계시는구나 함께해 주시는구나 했습니다 성경적이든 성경적이지 않든 오직 진리는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무엇도 확고히 힐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성경적이지않다면.
단호한 태도로 조심할 필요는있지요!!.
성경적이지 않든 / 진리는 오직 한분.
이런 문장은 어딘가 이상해보입니다.
평소에 부르지말라는게 아니라
예배음악으로서의 적합성이 쟁점입니다
성경적이지 않은 하나님은 누구인가요? ㅋㅋㅋ
예배음악으로 적합하지 않다?? 그런 건 누가 정하나요? 그리고ㅠ이 곡은 세상 노래도 아니고 사랑의 하나님의 속성을 담은 노래입니다. 뭐가 문제죠?
만약 설교자가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의 고통을 공감하십니다" 라고 설교하면 예배에 적잘하지 않은 설교가 되는 건가요? ... 어줍잖은 비판때문에 작사작곡가가 위축되고 찬양팀이 위축되는 것은 안 보이시나요? 회개하세요.
찬양은 경배는 내위의 분에게 드리는것입니다
찬양에서는 주님이 주가 되셔야하고
그분이 높임 받으셔야합니다 .
찬양이란것은 . 그분의 뜻안에서
그리고 성경안에서 그분이 우리를 부르시고
그런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께서 인도하시어 완성시킬 그 열망을 기대하는겁니다.
공감하시네 찬양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가 주가되어 있습니다 .
하나님은 부가 되어있죠
이것은 찬양같아보이나
자기만족이요 자기위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감사하고
그분의 사랑안에서 두려움등 문제는 해결되는것인데
찬양은 지극히 인본적이며
사람이 중심이되어있고
감정을 건드릴 찬양이지만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예배이냐하면 아니라고하겟습니다 .
다만 그리스도를 좀더 쉽게 알아가기위해
가요 비스무리하게 준비한부분 그리고 위로와 공감의 부분이 꼭 나쁘다할순 없다고 생각하지만 . 찬양과 예배는 경건한것이며
질서가있고 . 말씀이 살아잇어야하며
초점은 오직 메시아 구원자인 그분께 집중되어야합니다 .
공감하시네 찬양은 그것과는 멀어보입니다 . 선택은 본인의 몫이나
가인의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치 아니하십니다 . 물론 가요도 때론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부르면 은혜가되지만 이는 예배가 아니죠
가인은 추구하는바가 하나님은 자신을 지키는분으로 추구하엿고 가인은결국 보호하심을 입엇으나 예배는 드려지지 못햇습니다.
예수를 믿고 여전히 자신의 연민과 나약함을 보고 우울해잇다가 그런나를 위로하는 하나님은 찬양의 대상자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되는것입니다 결국 찬양의 추구하는바는 하나님은 이렇게 연약한 나를 위로하시고 그런나에게 공감한다는 말이 되기때문입니다.
또 공감하시네 찬양은 . 세월호당시 하나님이 공감하신다는둥 이상한 말을 들어서 준비된 찬양이란 말도있습니다 . 그저 감정에 허덕이는 찬양 그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것일지 자기를 찬양하는것일지는 본인만 알겟지요
너무나 좋은 말씀입니다. 찬양의 본질에 대한 좋은 지적이시네요.
하..정말 구구절절 맞는 말씀이십니다
시험과 고난 속에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하다가, 이 찬양을 들으며 울고 있을 때 주님이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나도 아파. 나도 아파…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로운 속성 중 하나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중심을 가지고 부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bulchung0614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우리의 아픔을 당연히 공감하십니다.
그렇지만 나의 의를 위한 찬양 . 나를 공감. 위로 는 절대 주 가 되어선 예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찬양하는것은 그분의 의. 아들을 주시기위한 하나님의 경륜.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으로. 죄사함으로 인한 완전한 그리스도의 의 를 얻음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것이지 그리스도께서 부 가 되어 나를 중심으로. 찬양을 하면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논란 자체가 이해가 안되네요.. 세상 살면서 믿음이 흔들리고 주님이 멀게 느껴졌던 분들 없으세요? 그럴때 주님을 바라보고.. 우리의 아픔을 아시는 분이 계심을 믿고 나아가자는 너무나 위로가 되는 찬양인데.. '공감'이라는 단어에만 집착해서.. 감히 공감이란 말을 붙일 주님이 아니라는 주장..너무 의미없고 비본질적입니다. 우리 마음 다 아시는 주님. 그게 이 찬양의 목적이자 주제입니다. 이 찬양 들으면서 예수님을..주님을.. 더욱 가까이 느꼈다면 충분히 은혜로운 찬양 아닌가요. 성경적으로 맞다 틀리다 따질 명분이란게 없어보입니다. 에효~ 왜 그러실까들~
성경적으로 틀리면 그게 찬양 인가요?
그냥 신성모독이고 우상숭배죠
받느시는분이 기뻐하시는걸 드려야지 우리 마음이 기쁘다고 드리는게 예배가 아닙니다.
@@дней-ь8ч 성경적으로 틀린걸 찬양해도 된다는게 아니라 저 곡을 맞다 틀리다 해야할 이유가 없다는거죠.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아시네’가 주제인데 왜 물고뜯는지 모르겠다는 의미입니다.
@@Sungjun_h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으로 관계하길 원하시는데.. 우리가 이 찬양을 듣고 부르며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면 그래도 이 찬양이 비난받아야할까요.
@@indigok9900 찬양을 부르는거에 대해서 논점을 잡고 말씀드리는게 아닙니다. 저는 위러브 찬양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배때 부르는건 반대합니다. 예를들자면 김복유의 레아의노래, 잇쉬가 잇샤에게 등이 기독교 노래이지만 예배때 드리지 않는것처럼 위러브도 듣거나 부르는건 좋다만 예배때는 쓰일수없다고 생각하는게 예배는 하나님께서 직접 명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제도이자 법이기때문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니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하나님이 명하신것에 순종을 하는게 낫지 않을까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내가 원하는 예배를 드린다면 아벨과 가인중 가인의 제사밖에 되지 않다 생각되어요.
뭐 아무튼 저는 찬양에 대한 초점이 아닌 예배에 대한 초점으로 말씀드린것뿐입니다.
담배끊기로 작정하며 기도했지만, 4년동안 담배를 끊지 못하고 해맸습니다. 결국 끊었지만
돌아보니 하나님은 나의 담배를 끊고 싶어도 끊지 못하는 연약한 마음을 이해해 주시고 공감해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공감과 이해와 기다려주심으로 인해, 나약한 제가 4년만에 담배를 끊고 금연한지 어언 20년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나는 하나님의 공감해주심, 이해해주심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예배는 나를 위해 드리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드리는 자리입니다. 그러면 나를 드러내는 기도소리와 마찬가지인 위러브의 노래는 부합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찬송가나 ccm에서도 나를 나타내어 부르는 찬양은 없습니다. 위러브와 비슷하게 나타나는 자리는 특송에서나 나타나도 어긋나는 생각이 듭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무엇하나도 어긋날게 없으나 예배 라는 자리는 다름아닌 하나님을 위한 오직 주님만을 위해 준비하고 드리는 찬양이 왜 나를 위해서 드리는 아픔에 대한걸 주님이 무슨 이유로 공감해야하죠? 이건 지극히 나와 하나님과의 기도자리에서나 가능한 부분을 끌어다 내려서 예배하는 그 자리에 모두가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며 나는 티끌같아 엎드려 경배드리는 자리에 버젓이 서서 저 아픕니다 라고 외쳐야하나요?
'공감' 이것을 마치 인간과 인간 관계에서만 사용되는 단어라 생각하기 때문에 저런 비판이 나온 것 같아요. 하지만 인간 안에서도 누군가를 100% 공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100퍼센트 공감이라는 단어는 사실 인간 관계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시어 누구보다도 우리를 잘 아시며, 더욱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셔 우리와 같은 삶을 사신 하나님께만 어울릴 수 있는 단어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단순 아픔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더나아가 그 아픔에 같이 참여하시는 그 하나님이시기에...
이 찬양을 들으면서 저는 한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독일 나치군에 의해 교수형에 처한 한 아이...
그 아이와 함께 교수형에 매달렸던 어른들은 이미 죽고..
그 아이는 계속해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그 모습을 주변 사람들이 보면서
보는 이들 역시 너무 고통스러웠다..
"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신건가!!?" 라고 누군가 소리 지를 때...
자신 안에서 나즈막한 음성이 들리는데.....
"그분이 어디 있느냐고? 그분은 여기에 있어 저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어..."
이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라 믿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종교적으로 믿으려 하니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어색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근본주의적 사상과 성경해석..그리고 신봉하는 목사들...
한국의 신학을 아주 갈기갈기 찢어 놓고 후퇴시키는 사람들....
생각할 수록 부아가 치밀어 오르네요...
알려듀오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드러내기 보다는 인간인 우리의 입장 우리의 상황 우리의 위로가 훨씬더 중심이 되는 곡들이 많은게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의 가사에 대해서 민감하게 들여다보고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게 되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는 우리가 좀 더 넓게 보고 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찬양을 너무 신학적인 것에 비추어 생각하기에는, 찬양이란 너무나도 포괄적이고 넓고 큰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의 표현들처럼 말이죠..
이 영상을 올린 분은 너무 많은 것을 예로 들어 말씀하신것 같고, 우리는 성경말씀을 바탕으로 찬양이 고백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말씀이 없고 삶이 다르면서 찬양이 바르게 나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공감의 참 의미는
우리의 아픈 감정과 소망 없는 현실에 대해 알고 이해하신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 죽음과도 같은 우리의 현실에 오셔서 아파하시고 죽으시고 또 부활하셨기에 우리 또한 그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게 우리의 실력되어 살도록 하시려고 공감하신 것입니다.
이 찬양은 연고를 발라주는 게 아닌,
그 상처들이 그 인생을 끝장내지 못함을 알려주는 찬양입니다.
Praise는 가사와 멜로디가 인간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찬양이고
Worship은 찬양-주체가 전적으로 하나님인 찬양들입니다.
Praise 본다면 별 어려움이 없을거 같습니다.
여기서 라떼님의 Praise는 아마도 CCM을 말씀하시려는 것 같아요. 저는 미국 무디신학교를 나왔고 미국 교회를 지금 까지 다니고 있습니다. 라떼님을 지적하는 의도가 아닌 보통 미국교회에서 쓰는 단어들이기이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서 같이 나누고 싶어서 댓글을 답니당. Praise는 Worship에 한 부분인 찬양파트를 칭하는 단어로 알고있습니다만 ^^; Praise band/team를 찬양팀이라고 하는 이유죠. Worship은 예배 전체를 말하는 단어로 쓰이죠. 그리고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Service라고 부르기도합니다 (Wednesday Night Service/수요저녁예배, Sunday Service/주일예배). 영어단어이다보니 한국에서 받아들이는 의미는 조금 다른 것 같군요. 저도 "공감하시네"는 CCM으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배 찬양곡으로는 잘 모르겠어요ㅠㅠ.
본인이 누군지 말하고 이런 이야기를 했으면 하네요. 무분별한 비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전에 자신이 누군지 이야기하고 말했으면 좋겠어요
누구에게도 말할수도 설명할수도 없는 나의 아픔을 하나님께서 다 알아주시고 안아주시는 느낌을 받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데, 왜 이게 논란이 되어야하는지...저는 이 찬양 좋습니다~
내가 필요하니까 존재해야 하는 하나님이라고 격하 시킨게 문제의 요소 아닐까요?
요즘 살아가면서 많이 힘들고 지쳐진 현대인들(기독교인분들)의 입장을 의도로 두며 만든 노래인듯하네요
저 찬양과 다른 인본주의적이라며 비판받는 찬양들도 저는 들으면서 주님에 대한 사랑,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만 느꼈는데 왜 문제가 되는것인지 이해가 잘 안됩니다. 자기고백적인 찬양(노래?)도 제가듣기엔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이러이러하게 해주셨다 주님을 믿자 의 느낌만 있는데요. 아직 어리고 견해가 짧아 다른 의견을 가지신 분의 반박을 꼭 보고싶습니다.
정죄할 것은 아니지만 위험요소는 존재하겠죠...
조심스럽게 접근하자는 것입니다.
내 감정에 취해서 감성에 충만해서
감성팔이하는 곡들 자체에 마음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욱 더 집중하는 찬양의 종류가
분명히 있거든요.
예배음악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본인이 느낌이 좋으면 문제가 없는건가요?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아픔속에 이찬양으로 은혜받고 좀전에 찬양을 올린 다음 이영상받는데 순간 너무 놀랐네요 반박할만한 논쟁이 되지않을것 같습니다 중심이 중요하니깐요~유익한 내용 감사합니다
welove 공감하시네 라는 찬양을 정말정말 좋아하는데 이렇게 옳고 그름을 따지는것이 정말 맞는것인가..? 라는 생각이 드네요…. ㅠ
지지세력이 작든가 한가보죠 잘나가면 누구든 시기질투허게 마련입니다
시편을 제대로 읽었다면 그리고 노래했다면 아픔, 공감 키워드를 진작 읽었습니다
댓글들 보니까 찬양의 내용이 뭐가 중요하냐 내마음이 주를 향하고 있으면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주를 향하고 있다는게 중요한것은 알지만
로마서 10장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면 들음은 그리스도에 말씀에서 나온다 하였습니다 들음.. 우리가 듣는 찬양의 내용이 중요한지 아닌지 알수있는 말씀입니다 극단적으로 찬양의 가사가 주를 욕하는것이라도 내 마음이 주를 향하고 있다면 괜찮은걸까요? 오늘날 많은사람들이 교회를 욕합니다 같이 욕하고 내 마음이 주를 향하면 괜찮은걸까요? 한번 생각해 보심이 좋을것같습니다 공감하시네..라는노래 주를위한 노래가아닌 세월호를 추모하기위해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다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찬양을 부르며~ 들으며~ 은혜롭고 위로받았다면 계속 들으면 되고, 논란에 흔들리면 듣지않으시는 선택을 하시면 될거같네요... 🤩
사도 바울이나 칼빈이나 마르틴 루터라면 이 곡을 반대했을것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찬양집회때 부른다라던지 혼자서 부른다라던지면 괜찮다싶지만 ‘예배’시간때 드리는건 잘못된다 생각이 듭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제도요 법입니다. 받으시는분이 기뻐하시는걸 드려야지 우리가 좋은걸 드리는게 아닙니다.
저는 이 노래를 오늘 처음 들었는데요 ,
공감 이라는 단어는 옳지 않습니다 .
인간 과 인간에 관계 에서나 쓰는 단어 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아픔에 함께 하신다 라던지 ,
예를 들어 , 주님 제 이런 상황을 양해해 주세요 ..
라는 맥락과 똑같은 것 같습니다.
노래와 찬양을 확실하게 구분 지어 교회 예배 때 부르도록 해야겠습니다.
말씀하신 영상을 보았고 거기에서 파생된 영상들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 핵심적인 부분이 빠져 있는 거 같아 보완하려 합니다 찬양이 되지 않는다를 말한 것이 아니라 예배 찬양으로 쓰일 수 없다는 부분이 핵심이었는데 그 부분이 잘못된 방향으로 파생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예배학적인 부분에서 예배에 사용되어지는 찬양은 하나님에 대한 '영광송'만이 사용되어 집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공적 예배의 시간에 찬송가가 사용되어 지는 부분이 큰 것입니다(찬송가는 긴 세월동안 불려진, 그리고 많은 편찬위원들에 의해 검증된 곡들이지요).
찬양으로서가 아니라 예배찬양으로 라는 가장 큰 맥락을 봐주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튼 많은 문제재기와 고민이 있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것이겠지요.
저도 영상을 통해 많이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예배 찬양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썸네일과 영상 마지막 결론 부분을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보입니다만, 그러나 영상 전체적인 내용은 예배 찬양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내용보다는, 찬양 자체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고, 지적된 문제점 역시 신학적, 음악적으로 상당히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브라이언 채플의 '그리스도 중심적 예배'라는 책만 보아도 그렇고, 상당 수 많은 예배학을 다루는 서적들에서도 단순히 '영광송'만을 사용하도록 요구하거나 권장하지는 않습니다. 복음 중심적인 내용이 들어간다면 수용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복음이란, 결국 그리스도 중심적이란 말이겠죠.
하나님에 대한 영광을 찬양하는 곡들만이 예배 때에 사용될 수 있다고 한 발 물러서도,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물론이고, 우리의 삶 속에서 세밀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 곧 하나님에 대한 영광을 찬양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예배 때 무분별한 찬양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적극적으로 지양합니다만, 이야기의 흐름을 좁혀 위러브의 '공감하시네'가 과연 예배찬양으로서 적합한지에 대한 논의가, 단순히 찬송가가 아니라 CCM이라서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문제라고 하는 것 역시 논란의 소지가 있습니다.
찬송가 안에 주옥같은 곡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송가 역시 사람들에 의해 편집된 가곡에 불과합니다. 마치 찬송가는 거룩하고 특별하며, CCM은 찬송가에 비해 덜 거룩하다거나 좀더 세속적이라는 구분은 지나친 이분법입니다. 성과 속의 구분이 찬송가냐 CCM이냐로 구별되어서는 안되니까요.
따라서 예배때 찬송가는 되지만 CCM은 위험하다는 것 역시 지나친 전통주의로 회귀하는 역발상이 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공예배를 귀하게 여기고, 예전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과 예배찬양의 적합성을 논하는 것이 과연 일치할 수 있는지도 깊이 고민해봐야 합니다.
예배의 거룩함은 우리가 부르는 찬양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가사가 복음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우리의 마음의 문제가 더 중요합니다. 거룩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려듀오 댓글 달아주셔서 이렇게 의견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니 참 좋네요^^
앞서 말씀해주신 CCM과 찬송가의 구분을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 찬송가 역시 CCM이라고 하는 큰 카테고리 안에 조금 더 세부적인 요소라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찬송가 역시 편집된 가곡이라는 명칭에서는 조금의 수정을 요청 드립니다
콘트라팍타,콘트라팍튬이라고 하는 정식적인 장르에 소속이 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이러한 부분에서 잘못된 정보전달의 오류가 있을 수 있기에 정확히 체크하고 넘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찬송가와 CCM 특히 요즘 불리어지는 찬양들을 구분짓는 것은 이분법이 아니라 CCM이 조금 더 심화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해주신대로 콘트라팍타라고 하는 장르는 당대 유명한 노래 또는 민요와 같이 작자미상의 멜로디에 가사를 신앙적인 가사를 덮는 장르인데 그 역시 그 당시에는 CCM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곡들이 전 세대가 함께 고백되어지고 살아남은 곡이 소위 찬송가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분법으로 가르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두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됩니다
말씀해주신대로라면 칼빈이 시편 찬송가 이외의 찬송을 금지시킨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부분이 되어 버리는 것이겠죠 그 시대에 금지되어야 했던 시대의 알리가 없기 떄문에 말이죠.
의견이 나누어지고 조율되어 가면서 우리가 고백해야할 찬양의 풀이 넓어지는 것은 맞지만 전세대와 함께 고백되어지는 것이 교회의 사역에 더 유익하며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모습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대학원에서 예배음악을 전공하면서 3년간 동문들과 함께 나누었던 정보를 짧게나마 공유를 해보았습니다^^ 물론 제가 진리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라고 봐주시면 좋을거 같습니다^^
@@알려듀오 댓글테러나하지말아 쪽팔리게
@@알려듀오 니는 쪽팔리지도않냐?
왜 《공감하시네》라는 노래가 찬양이 아닌가?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찬양은 인간이 주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노래를 듣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한 노래입니다
신학의 부재, 체휼, 뭐 이런 것들이 아니라.
기본 전제가 이미 뒤틀려 있다는 것입니다
ua-cam.com/video/VZ1G2Zucdck/v-deo.html
듣는이를 위로한다라.. 그것은.. 이웃사랑!!
하나님의 뜻이네요! 성경의 주제!
진리네요! 와우^0^
이 곡을 듣는 사람들이 위로를 얻는 게 잘못인가요? 세상적 위로가 아니잖아요. 위로를 얻게 되는 근거가 '세상의 다른 무엇'이 아니라 '나를 잘 아시고 나를 공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곡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때문에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rehym763 위러브 인터뷰 중에 이 찬양은 세월호 유족들을 생각하며 위로하기 위해 만든 노래라 했습니다. 단연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노래가 아닌 명확히 세월호 유족을 위로하기 위한 노래로 지어졌으니 예배때 쓰면 안되죠. 찬양이 아니라 그냥 찬양팀이 만든 일반적인 노래 입니다.
이 가사만을 가지고 비판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몇몇 문제삼을 수 있는 것들은 있을 수 있습니다. 아직 welove라는 팀이 오래 되지도 않았고, 이 팀의 행방을 지켜봐야 될것 같기는 합니다.
네
저도 오늘 들어보았습니다.
무척 뉴에이지스럽고
몽환적인 음악이었어요.
"하나님을 내가 이해하고자 하는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이 말자체가 교만한
마음에서 나온 말입니다. 몰지각, 몰이해입니다. 주님은 지적장애자와도
교제하시고 낮은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낮은곳으로 천한곳으로
내려오십니다.
이 찬양이 왜 논란인지 모르겠어요
수준을 끌어내렸다는 표현은
율법주의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할법한 표현같네요
하나님을 이해한다는건 나와 하나님을 같은선상에 놓는것인데 우리는 마치 하나님의 작은부분을 알고서 하나님을 이해한다는둥 말을 하는데 이는교만이라볼수도있습니다.
@@이천우-k7u 하나님을 이해한다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이해한다는 가사인데요..
하나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
그분은 친구이시지만 존귀하신분이시며
그분은 인간의 형상으로오셧지만
본체는 하나님이십니다 .
하나님이 우리의수준에 맞추시어 우리와함께하시는것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될때에는 반드시 그분의 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
또한 공감하시네는 세월호 사건을 통해 쓰인 찬양이다하여 논란이 많은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듣기좋고 내가맘이 편하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함이 가벼워져선아니될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린아이의 찬양을하는것은 그들이 할수있는 최선이 그것이라그렇지만
우리는 어린아이가아니요
그분의자녀요 왕같은제사장입니다
감정적으로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요 인류를 살리시기위해 자신을버리시어 인류를 구원하신 귀한분이기에 더욱더 귀히여겨야하고 . 찬양이 깊이가잇어야합니다.
@@이천우-k7u 저는 모태신앙이지만 지난 30년간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년정도 전에 정말정말 인격적으로 만난 뒤 인생의 가치관이 완전 바뀐 사람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은 '공감하시는 하나님' 이 맞다는 것입니다
밑바닥에서 살려달라고 매일 밤마다 부르짖어 보신적 있으신가요?
모든 것을 다 순종하겠다고 바닥을 구르며 밤을 지새우면 새벽이 올때까지 기도해보신적 있으신가요?
내가 하나님께 원하는 것은 문제해결에 대한 답과 환경의 변화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그보다 먼저, '힘들었지?' '나도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저에게 와주셨습니다
저도 이런 하나님이신 줄 몰랐고 정말 너무너무 놀라고 감사해서 펑펑 울었었습니다
저는 이 찬양을 들을 때 마다 이 찬양을 만드신 분은 진실로 친밀하게 하나님을 만나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경험에서 나오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찬양이니깐요
이 찬양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는데 어떤 의미로 참 놀랍네요
찬양의 깊이는 누가 정하죠?
저는 이 찬양을 부를때마다
내가 바닥을 치며 기도할때 내게 공감해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은혜에 아직도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해서 간절하게 부르는데
이게 깊이가없이 부르는 걸까요?
@@여름-h3w 찬양과 위로는 다르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내가 찬양에 위로를 받는것과 내 하나님을 경배하는것은 다른것입니다. 물론 위로 받는것으로 하나님께 찬양드릴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자기위안일뿐이 아닐까요 ?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공감하시기위해 .이땅에 오신것은 아닙니다 .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시어 구원의 뿔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예비하셧고 . 모든죄를 예수그리스도께 쏟으신후 . 우리죄를 사하셧습니다 . 이처럼 구원이란 단순히 불쌍해서 용서햇다는 감정적인게 아닌 공의와 심판 그리고 용서가 포함된것입니다 . 이찬양이 홀로 부를때에 . 또는 친구끼리 흥알거리고 받아들이고 은혜받는것은 죄도아니며 .때론 가요속에서도 은혜안에선 주를 찾기도 만나기도 하는것을 보면 도움이 되는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 진정 내 의로우신 주님을 높히고 기리고 경외하느냐는 다른것입니다 . 찬양이란 그분의 구원을 높이는것입니다 . 그분이 우리의 찬양이 되시는것은 각사람의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서일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 그완전한 사랑의 완성인 십자가때문입니다 . 그렇기에 그십자가가아닌 단순한 감정적 언어를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 찬양 하는것이라고 볼수없는것이지요 . 이찬양을 들으면 내가 위로받지요 .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기만 하시고. 공감하시고 . 낮은자를 섬기시고 . 그런데 주된것은 . 성경에서 무얼말합니까? 성경은 온갖 판타지가 적혀잇죠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가 무너지고 요나단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블레셋을 쳐부수고 . 다윗이 골리앗을 . 사무엘이 지개작대기같은 군대들을 하나님을 의지하여 철기인 블레셋을 이기고 .찬양이란 내가 할수없는 불가능에서 . 하나님이란 가능성으로 그분과 동행하여 . 그분으로인해 . 불가능한 그상황이 .진실로 가능해짐으로 믿음이 강하여지고 그분을 높이는것입니다. 찬양엔 .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
첫째 감사 . 둘째 . 죄사함 . 셋째 회개
넷째. 위로 다섯째 . 경배. .
성소에서 시작되어 지성소로 나아감과같이 .
찬양은 내삶을 이끄신분을 찬양하고.
그분의 죄사함을 영죽을 나를 살리신분을 기리고 . 인생에서 . 그분이아닌 나를 왕으로 여긴부분을 돌이키고 . 그분의 은헤안에서 나를 용서하고 나를 안아주시는 그분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사랑으로 충만해지는것입니다.
위로는 엄밀히말하면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하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위로받는것이죠 .
다시나아갈수있도록 . 힘을 주시는것이죠 . 그건이 내가 아버지께 드리는 찬양이라 할수있습니까?
찬송가에 나의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주 . 이런찬양과 공감하시네 찬양을 비교해보시면 무슨뜻인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운전하면서 “공감하시네”듣다가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랑, 진심으로 나에게 공감을 해주시는 것에 위로와 은혜가 되어 검색했습니다. 의미없는 논란이라고 생각됩니다. 계속 좋은 찬양 만들어주세요. welove 감사합니다.
맞는것같습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예배때는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이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신다고 했던것같애요..
믿음의 성숙이 전제 되지 않는 한 공감이란 단어가 주는 개인적 차이는 큽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공감이 될수도 있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한 공감이 되겠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참뜻을 자신의 삶에서 찾지 못한다면 그 공감이란 것은 한낱 인간의 공감에 지나지 않을겁니다. 그럼 문제가 생기죠. 온갖 인생살이 이슈에서 하나님을 가장해 이용해먹을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대표적인것이 이단 사이비구요, 정치적 이념도 포함되겠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개인적 공감으로 시작되더라도 하나님의 참 위로가 중심이 되도록 찬양뿐만 아니라 말씀선포도 병행되어야 균형을 그나마 이룰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적 내용을 담기에 우리의 모든 상황에 공감하시는 주님은 아니시다. 우리의 아픈맘을 아시지만 그 아픈 마음이 하나님을 전하면서 아픈 마음인지 죄로인해 아픈마음인지 사고로 인해 아픈 마음인지는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전부 철저히 복음이 전파되고 예수님의 성육신으로부터의 구원에 집중되어 있으며 모든 위로와 격려가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집중되어 있다. 가사를 보면 주님이 메인이 아니라 우리가 메인이고 모든 상황에 공감하신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다. 구약시대에 정해지지 않은 불을 드리고 정해지지 않은 방법으로 언약궤를 나르다가 죽는 제사장들도 있었다. 이토록 죄에 대하여 엄격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에 공감하신다는 것은 맞지 않다. 찬양이 우리나 나나 너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찬양하며 그 행한일을 찬양함이 진정한 찬양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아주 적절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 차분히, 논리적으로 전달해주셔서 아주 매우 감사합니다.
가사를 작사하는 분의 기준과 찬양속 묘한 표현; ‘우리’와 ‘나’에서 -> 주님께로 나아가는 의지와 주체자의 순서에 있어 혼돈을 줄수 있고(우리의 구원은 ’주님께로부터‘ 가 본질이고 절대적인 가치)
찬양가사 의혹이 자꾸 나오는 이유는
주님께로부터가 아닌 자꾸 ‘나’와‘우리’의 의지적인 관점들로 구원을 이루는듯한 가사들이 찬양속에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왜 다른그룹과 달리 유독 위러브의 찬양가사에 계속 의혹들이 생기는지는
말그대로 찬양 가사가 주는 그 오묘하고 묘한표현들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수십년간 찬양 사역을 해 온 사역자로서... 신학적이다 아니다를 놓고 고민하는 분들도 무조건 비판하고 외면할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서 찬양이라 함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음악으로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즘 전세계의 찬양 곡들을 보면 약간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곡들이 많은게 사실이기 때문이죠.
한
예배에 적합한지 부적합한지 왜 그쪽들이 판단하세요? 이 찬양으로 주님께서 어떤일을 행할줄 알고 계시나요?
전 모르겠어서 감히 제가 판단 못하겠는데
이 찬양으로 이미 위로받고 은혜받은 사람들, 앞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왜 무시하세요? 그 또한 주님께서 행한 일이시고 하실 일들인데
아니 최소한 이 찬양 예배시간에 부르기 적합한지 기도로 주님께 물어보고 댓글 써대시는건 맞죠?
그럼 내가힘들때마다 이찬양듣고 아~주님이...내마음도공감하시는구나 내가혼자가아니구나 이세상에 나혼자가 아니구나 ...이런마음들고 너무나큰위로를 받습니다 ...그럼 그위로는 하나님이 주시는게아니고 사탄이주는건가요...?별걸다 트집잡네요
예수님은 많은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셨습니다. 눈물도 흘리셨지요.. 그래서 이 곡의 의미는 알겠지만... 무언가 살짝 2퍼센트 부족한 느낌이긴 합니다. 예수님은 사실 공감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그 아픔의 근원을 치유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 곡에서도 공감하셨네 까지로 가사가 끝나서 좀 아쉽긴 합니다. (신학적인 내용은 패스....!)
그 치유의 과정조차도 주님의 위로와 공감이 포함되었다는 점을 강조 시키고 싶은거 아닐까요?
@@Daawon-m6s ... 제 글은 곡 내용이 그렇다는 것이지, 곡이 정말 "공감하셨네"로 끝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이 말씀보다 앞서서 생긴 논란인듯합니다.
공감보단 함께하시네 더 적합하는거 같은 개인적인 생각
후크송도 아닐 뿐 더러.. 공감하시네가 후크송이 되려면 A파트 B파트로만 이루어진 모든 찬송가도 후크송이 되어야합니다. 찬양의 클래식인 찬송가부터 문제라는건가… 답답하기만 하더라고요 에휴
찬양에 불순한 의도가 있거나 한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찬양의 가사 뜻도 잘 알아보도 않고 신학만을 운운하며 다소 억지로 보일 수 있는 비판을 하는 건 마음이 아프네요. 벌써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여러 모습으로 기독교 관련 문제가 나오는 건 우리의 부족함과 그릇된 모습을 하나님이 말씀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무슨 행위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찬양 또한 그렇습니다. 포커스가 어떻든, 영광 받으실 분은 오로지 하나님이십니다.
꼭 주님의 음성과 꿈에서 주님의 얼굴을 뵈어야만,
그리고 해당 주일에 가장 많은 헌금을 하고 고개를 빳빳하게 세워야만 믿음이 강한 사람이 된다는 바리새인들의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요?
저는 아직도 주님의 음성과 얼굴을 뵌 적이 없어요.
그래도 예영모를 통해서 하나님이 항상 제게 손을 내밀고 계셨다는 걸 알게 되고 그 뒤로 주님을 믿게 되었죠.
찬양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준이 예수님의 사랑을 폄하하는 상황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느 교단 소속인지요?
영상마다 그저 저격 밖에 없네요
우리는 멍청해 빠진 경직된 한국 교리주의를 벗어나야 비로서 주님을 만날수 있다.
이런 논란이 있었구나, 허허..
예배라는 행위에 만약 딱 한곡의 찬양만 해야한다면 '공감하시네'가 서사적으로 적절하진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배에는 흐름이 있으니까요. 나의 연약함이나 죄악된 모습을 내려놓고 주님을 바라보는 그리고 하나님을 결국에는 예배하는 서사가 바른 예배라고 생각하니까요, 제가 예배인도자이고, 딱 한곡의 찬양만 허용된다면 많은 경우에는 '공감하시네'는 선곡하지 못할거같기는 합니다만,
하지만!, 우리의 예배는 많은 요소들이 있고, 예배의 찬양또한 한곡이 아닌 여러곡이 있고, 또 그 모든 곡들이 한곡 그 자체로 다 신학적 내용을 빼곡히 알차게 담고있지는 않지요, 때문에 예배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그 안에서 찬양의 흐름에 따라서 많은 내용의 찬양들이 선곡되어 그 흐름을 만들어가게 되는데 이런 맥락안에서 '공감하시네'는 훌륭한 찬양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영역에서 모든 처지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예배케 하시기 때문에 '신학적내용이 틀리지않다면' 부르지 않아야 할 이유가 못되죠. 단순히 '상대적으로 빈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예배에 사용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경배와찬양의 구성이나 신학적 흐름에 대해 다소 생경해서 그런것이 아닐까 싶네요.
신학을 공부한 저로써는 이 가사안에서 신학적 오류는 찾아보기 힘든것같네요. 말씀하신것처럼 히브리서의 대제사장적 지위에 대한 동정(공감)하심, 원어적 의미로도 공감으로 해석될수 있고, 공생애중에 신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살며 바리새나 기득권층을 위하기보다 세리와 창기와 가난한자와 아픈자들에게 찾아오셨던 것과, 나사로의 죽음앞에 슬퍼하는 이들을 보며 눈물흘리며 비통해하신 것들 등.. 우리의 역약함을 아시고 똑같은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신다는 내용.. 우리에게 오신 임마누엘이신 주님.. 거의 모든 부분이 성경적으로 충분해 보입니다.
다만 이분들의 주장들도 이 찬양에 대해 신학적 고민을 던져주었다는 것 자체로 이 찬양을 더 깊이 생각해보는 유익함을 주었다고생각합니다. 또 우려했던것처럼 예배 안에서 사용할 때는 예배의 신학에 따라 나 자신에서 예배가 멈추지 않도록 그 흐름에 맞는 지혜로운 선곡을 한다면 충분히 아름답고 선한 영향력을 예배안에서 드러낼 수 있다고 봅니다(이미 예배안에서나 일상에서 그런 찬양이 되고 있지만요~)
잘 정리 해주셔서 유익했네요. 어떤 교회신학과 교단신학을 가졌느냐에 따라 해석하는바가 다르겠지만, 성경신학적인 입장에서 잘 비판해 주신거 같아 이 영상에 공감하게 되었네요. 좋은영상 감사해요.
영상올라온지 한참이지만 이번주에 공감하시네를 예배때 부르게 되어 연주영상을 찾다가 이곳까지와서 생각보다 깊이 찬양을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군요..
거짓입니다 구라입니다
'시간을 뚫고'와 '공감하시네'를 많이듣고 마음에 담았던 성도로서, 새로운 것을 무조건 틀에 박힌 신학에 비추어 은혜없이 성령님의 검증없이 하는 비판이 아닌가 의심해 블 필요가 있네요. 성경전문가가 기독교전문가가 성령충만 하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오히려 가사가 간단해서 더 은혜로운 찬양입니다.
공감하시네는 신학적으로 크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찬양을 만든 사람의 의도와 목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검색을 잘 해보시길..
위러브도 노래 만들 때 이런거 상상도 못했겠지 ㅇㅇ.. 나같아도 못하고 만들듯 ..
저도 공감하시네를 처음 듣고 아주 신학적인 찬양이라고 생각했는데 논리적으로 잘 설명해주셨네요
앞에서 인도하시는 분이든 악기를 연주하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냥 performance일 가능성이 크죠. 진심으로 찬양을 부른다고 하지만, 기타 연주만 보더라도 애드립때 그렇게 찡그리는 연주는 그냥 performance에요 사람들을 의식한, 친양을 보면 너무 웃긴것들이 많죠. 예수님이 피흘려 고통받고 죽은시는 가사임에서 멜로디가 신나면 방방 거리죠. 가사가 힘들주고 희망을 주어도 melody에 따라 depressed해요. 찬양을 앞에서 하는 사람이든 따라 부르는 사람이든 보세요 모두 같은 표정이죠. ㅋㅋ
오히려 인생의 전부를 걸로 음악 프로그램에 나와 부르는 가수 지망생들이 더 진실되게 불러요
찬양이 하나님을 입으로는 하면서
마음은 없기에 그저 자기의강정에 취한것인데 이것이 찬양이라볼순없죠
그렇다면 가인은 왜 예물이 드린바되지 못햇을까요
딱히 비판할 생각 하나도 없는데 첨 들었을때 은혜롭지 않아서 그냥 잘 안 들었던 기억이...
하지만,
비기독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기독교 입문용(?)으론 좋은것 같아요.
기독교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훨씬 많고
잘 믿는 청년들이 점점 없어지고 있는 추세니...
청소년들이 좋아할 만한 이런 요소들이 있으면 교회로 인도 하는데 나쁠것 같진 않네요 ㅋㅋ
근데 정말..첨 들을때도 끝까지 잘
못 들었던 기억이...가요 같아서 그랬나봐요..
이 찬양에 논란이 있었는지도 몰랐네요ㅋ
예전에 일때문에 운전하던중에 공감하시네 찬양듣고 그냥 나도 모르게 눈물 흘렸던게 생각나네요...
그런데 이전에 찬양의 멜로디에 취해 내 감정을 신앙적 감동으로 착각하고있진 않는지에 대해 계속 고뇌하다가 시험든적이 있었는데 이 영상을 보고 조금 회복된것같아요. 그때의 감정도 사실 하나님이 주신거라는걸 잊고있었어요. 내 입에서 뱉어지는 찬양의 가사가 나를 위한게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간증이 될수 있게 날마다 기도해야겠습니다.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찬양은 사람을 위로하는게 아니고 신을 높이는게 원래 역할이죠
안나옵니다 세월호가 어디나와
이쪽이나 저쪽이나 교회에 이데올로기를 끌어오는 행태가 슬프다. 오직 예수님의 구원과 부활 하나님의 사랑만이 강조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좌파적 이념이 들어와 설치고 우파적 이념이 들어와 분열시킨다. 알려듀오, 위러브, FTNER, 이정훈교수 모두 다 회개하고 예수님의 사명에만 집중하길 기도한다.
우리가 주의해야할것은 가사나 분위기가 아니라 찬양을 받으시는분이 누구인지 헷갈리지 않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색에 따라 찬양팀들을 비판하고 세월호 사건을 안타깝다고 한것만으로 잘못된 찬양팀이다 하셨던 전도사라 하시는 분의 영상이 떠오르네요...
참고로 저는 '빈들에 마른풀같이 ' 찬송가도 참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아니야 찾아봐 세월호가 어디나오냐 세상살아가면서 지치고 힘들때 이 공감하시다는거지 어디 나오냐고 구라임 안나옴
눈먼자를 고치시는데 다리를 안고치셨다고 생떼를 쓰는 격처럼 보이네요... 찬양속에 나에게 응답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더 중요하지않을까요?? 신학적이네 성경적이네.. 그것을 따지면서 찬양하시는 분들께서는 그냥 자신들의 방식대로 하세요... 타인의 찬양을 트집잡는 오지랍이 성경적이고 신학적 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 같네요...
양쪽 모두 성경에 근거해서 주장하신다 생각이 듭니다. 다만 신학적 견해는 자기의 주관이 들어가는 것이므로 완벽하지 못할수 있음을 분명히 전제로 해야됩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대해 성경을 잘 모른다는 식의 말은 다분히 공격적이며 무시하고 판단하는 것으로 그 안에 예수 안에서의 형제 사랑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로 찬양하고 신학적으로 옳고 그름을 가린다고 해도 그 안에 하나님의 교회를 나누는 일은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 일인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찬양이어서 들어보려고 들어왔다가 자동재생으로 보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에서 댓글 남겨봅니다.
한 마디로 쾌변의 주절거림이다, 인간이 신을 판단하냐, 공감의 주체가 누구란 말인가? 인간이 하나님의 판단을 재단하지 마라, 괘변이 심하구나
저기서 노래부르는 여자중에 김다미 닮은 사람있음 졸귀임 ㅋㅋㅋ
나는 노래 좋기만 하는데...
그런데 저런거 가지고 너무 억지로 안좋다고 하는 것 같음
이렇게 굳이 비판한다는게 참 아쉽네요,,, 찬양의 고백을 이렇게 따질 필요가 있을지 생각하고,,, 이게 율법주의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아시지,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네요.
매번 좋은 글 감사드리며,
어떤 분이실지
너무 궁금하네요.
응원합니다 ^^
거기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카타치는 그 분이 참 그랬죠 ㅎㅎ
알려듀오님 혹시 기회가 된다면... 좀 뵙고 싶습니다.. 어떻게 커넥팅이 어려울까요....
어렵지는 않은데요^^ 개인적으로 연락을 드릴 방법이 쉽지가 않네요ㅠ
억지 같군요.. 후크송에서..ㅎㅎㅎ
부르신곳에서 곡의 첫 소절이 "따스한 성령님 마음 으로보네" 인데
성령님이 왜 따스하냐,, 성령을 마음으로 본다는게 맞냐.. 라고 딴지 거는 부류가 있었습니다.
이거랑 뭐가 다를까요...
- 좌파는 감성으로 영혼을 파괴하고 우파는 이성으로 영혼을 재건한다. -
그냥 기독교인들이 혼자 흥얼거리기에 알맞은 생활노래 정도가 아닐까요?
찬송은 수직적인 노래입니다. 내가 위로받고 내가 힘을 얻기보다는 구원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예식 행위입니다.
CCM은 집에서 대중가요 대신 부르기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좋죠.. 주님이 공감하시고 그런데 가사가 그리고 끝이잖아요? 예수님이 직장생활에서 지치고 학교에서 스트레스 받는 것 공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지신것 아니잖아요.
그러니 찬양이 아닌 개인고백정도 수준으로 느껴지는 것이죠. 다윗과 아삽이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노래하는가 보십시오.
그래서 더욱 분별하지 못하는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진리가 무엇인지 쉽고 명확하게 전달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네요. 진리가 명확하니까요
찬양의 가사가 무조건 '십자가 사건'에만 국한되어야 하는 건가요? 그런 기준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주님의 성품을 찬양하는 시편의 찬양 역시 넘치고 넘칩니다.
추가로, 이미 말씀 드렸지만, '공감'이란 단어는 기독교적 용어인 '체휼'과 그 뜻을 같이 합니다. 그리스도의 체휼하심에 대해서 좀 더 공부를 해보시면, 우리의 모든 아픔에 공감한다는 가사 내용이 학교에서 스트레스 받는 것으로만 그 아픔을 국한시키지 않으며, 주님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모든 아픔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오신 '의사'라는 것 역시도 누가복음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입니다.
성경을 통전적으로 보셔야 합니다.
이미 님은 찬양의 가사 속 아픔과 공감을 실생활 속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국한 시켜놓고 논의를 전개하고 계신데, 저는 찬양의 가사를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아마 이게 저와 님과의 다른 점인 것 같습니다.
@@알려듀오 알려듀오님 말씀은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성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고초를 겪으셨으니 그 분의 체휼이 우리에게는 위로가 되겠죠.
그런데 이 가사는 그 분의 성품에 대한 찬미는 될 수 있어도 찬양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하려는 말이 이해가 되시나요?
@@Whatisthis1217 정말 죄송하지만 찬미는 가능하나 찬양은 안된다는 건 순전히 사람의 입장에서 워드플레이에 불과한 겁니다. 하나님도 정말 그렇게 보실거라고 100프로 확신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이란 주어가 아예 언급되지 않은 아가서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알려듀오 참.. 주관이 뚜렷하시군요. 듀오님이야말로 이 곡이 100%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곡일지 생각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아가서와 이 곡의 가사와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우선은, 사람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것이 다르니 찬양이란 것에 대해 다르게 이해할 수 있겠다 생각이 듭니다.
묻고 싶은 것은 듀오님은 그저 그리스도의 체휼이란 내용만으로, 곡의 가사를 현재 연구된 신학적으로 변증할 수 있다면 모두 찬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거야말로 끼워맞추기식 워드 플레이인것 같은데요.
'주님이 우리의 아픈 맘을 아시네
가까이서 우리의 아픔에 공감하시네
우리 가운데 찾아 오셨던 그 주님이
우리의 모든 상황에 공감하시네'
곡의 메인이 되는 후렴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은 나와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분을 높이거나 찬양한다거나 의지한다거나 하는 가사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실험적인 곡이 아니라면, 현대의 모든 곡은 기승전결이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왜 굳이 A,B형태의 곡에서 핵심 결론에 이르는 B파트의 마지막을 '우리의 모든 상황에 공감하시네' 라는 가사로 끝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거론되었다고 전부 찬양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찬양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기준이 되어, 그 분께 시선을 돌리고 그 분을 높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찬송가 가사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주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바라기는 대중들을 위한 찬양팀이라면, 특히 젊은층의 그리스도인들을 타겟으로 한다면 더욱 접근성있고 하나님 중심의 가사를 써야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가사가 말씀, 곧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 있는 초심자분들과 청소년 청년들을 배려한다면 더욱요.
앞으로 사람이 듣기좋게 맞추는 노래들이 아닌, 하나님이 곡의 주인이 되는 찬양들이 많이 나올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Whatisthis1217 주님이 우리의 아픈 맘을 아신다는 것, 그리고 단순히 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신다는 것, 바로 그 공감의 존재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친히 우리 곁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것이 어떻게 주님을 높이는 가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체휼이라는 주제가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 아닌가요? 주님을 향한 노래가 아닌가요? 찬양 가사에 반드시 '높인다' '영광을 돌린다' 는 언급이 누락되어 있으면 그건 하나님이 기준이 아닌 사람이 기준이 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엄마도 힘든 상황이셨을텐데, 그래도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주신 것 잘 알아요. 우리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 바로 엄마에요" 라고 자녀가 엄마에게 편지를 썼는데, 여기에 '감사하다' 또는 '고맙다'라는 표현이 없으니 이건 감사하는 내용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걸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반드시 감사하다거나 고맙다는 언급이 없을지라도 전체적인 분위기와 맥락이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면, 억지로 그렇게 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런 맥락과 분위기가 글에서 느껴진다면 그건 당연히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편지겠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 중심의 가사가 무조건 하나님이란 단어가 반복되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아가서를 읽어보세요. 님의 논리와 주장대로면 아가서는 절대로 정경으로 채택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창조목적을알고찬양을만들면좋을것같아요.
누가 도대체 그런 질타를?
신학적이지 않다고 전혀못느꼈는디?
공감하시네 찬양에 은혜 많이 받고 있습니다
좋은 이야기 많이 해주시는데 이상하게 불편해요 ㅜㅜ
꼭 단어하나하나, 말꼬투리 잡는 듯한...
제일 아쉬운건, 보잘것없는 피조물인 우리의 상황과 아픔을 공감해주시는 인격적인 주님께 감사와 영광,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 아닐까요?
공감하시네로 끝나버리니...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이겁니다. 누구를 위한 노래인지 분명히 했으면 합니다. 찬양이라면 주님이 곡의 주인공이 되어야죠
저도 이 분 영상 보는데 마음이 너무 불편하네요 성령님은 한 분이시니 같은 생각을 주시는 거라 생각됩니다 당당하시면 교단이랑 소속교회, 본인 신분은 밝히고 이런 영상 제작 하는게맞다고봅니다 영상 제작 동기가 중요하다고 생각되서요
@@김고은-j1w 아직 교단. 소속도 안 밝힌 사람이예요?? 그렇군요. 어쩐지
@@Whatisthis1217 그럼요 무엇이 중심인가가 중요한거죠.
우리의 감정이 중심이 되어선 안된다는 조심스러운 견해를 아주아주 폄하하고 왜곡하는
목회자호소인이네요
형제님의 논리적인 비판에 박수를 보내며, 여전히 근본주의적 시각과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신학만이 우월하다는 식의 착각에 빠져사는 몇몇 목사를 대신해 사과의 마음을 전합니다. 앞으로도 균형감 있는 컨텐츠 부탁합니다. 샬롬.
비판한 녀석들 곡좀 함 보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찾아 십자가에서 달 리신 주님의 입장에 더 공감하는게 맞지 않을까요 굳이 십자가에서 달리실 필 요가 없었으니까요
이찬양은 주님이 우리가 어떠하든지 우리편이라는 내용인데 개인적으로 부르기가 꺼려집니다
이 찬양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악까지도 공감하신다는 내용이 아니라, 우리의 '아픔'에 공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곡해하셨습니다.
찬양이 아니네요 . 찬양이 아닌 나가 주가되고 주님이 부가된 찬양 아닌가요?
내가 아플때 주님이 나를 .이해하시고 공감 한다는 대략적인 내용인데요 .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
이것이 찬양하는것입니까 아니면
나를 위로하는 노래입니까?
내가 추구하는것을 예배하는것인데
이찬양은 예수님의 위로와 사랑을 뜻하는듯 하나 사실 찬양 이 아닌 나를 위로하는듯 한 이것이 찬양이라고 부르기엔 . 좀 이해가 안되네요
찬양에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에 대해서 나아가야하는것입니다.
찬양은 기본적으로 .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십자가 에대해
감사하고. 감사하고 그이름을 높이고
그 분에게 사랑한다고백하며 그분과 내가 신랑과 신부처럼 하나가되는것이죠
또는 그이후 그분의 목적을 기억하고.
그분의사랑을 입은자들이 그분의뜻대로 가겟다는 . 결단 각오죠 . 그리고 그분의 임재를 . 그분께 의탁하는것으로 끝내기도하지요 저건 인간감정적인 찬양이 맞습니다.
@@이천우-k7uwelove 제가 걷고있는 계절은 들어보셨는지.. 저 되게 충격먹음 가사보고
@@인갇딘 가사가 어떤데요?? 더 심각한가요?
@@이천우-k7u 너무너무 공감합니다.설명잘해주셨네요
따지는게 뭐이리많노? 다른 찬양 가사내용들 보면 사람이 과연 부를수 있을가? 의문이드는 찬양이 한두개인줄아나 ㅋㅋ
똑같은 수백수천곡에 무슨 비판까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유투버가 있어서 기쁨이 됩니다.
어우 내가 하려던 말이 딱 이거예요ㅋㅋ 공감됩니다. 🎉
이 논란이 왜 논란인지 저는 잘 모르겠음 물론 하나님은 높고 높으신분이 맞음 하지만 육신의 아버지가 있기전에 하나님은 우리의 아빠 아버지이신데 아빠가 아들, 딸의 힘든 마음을 공감하고 위로해주는게 잘못된건 아니지않나요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아빠와 더 친해져야한다고 생각함
그것이 찬양은 아닙니다 . 그래서 논란이되는것이고요 .
아멘!
동성애자가 작곡한 찬양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곡의 작곡자가 동성애자인가요?
그게 문제가 되나요??
깊이 없는 쒜끼들이 멀 아는 척 하려는 거짓 선동이었고만. ㅎ.
그래도 그들을 공감해주실꺼야. 하나님은...
삼위일체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승천을 했기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승천 이전과 이후의 내재적 삼위일체에 차이가 있는가?에 대한 논문도 있을정도로 성육신과 육체성에 대한 논의는 다양한 것인데, 논문도 교리도 학문으로써의 신학도 아닌 찬양 가사의 단어하나에 문제삼는건....
율법만 강조하는 바리새인들 같네요..
우리가 눈물 흘릴때 같이 아파해주시고 눈물흘려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표현한 곡이 무엇이 문제가 되나요.
논란이 안되게 작사를 하고 작곡을 하면 되지 않나요? 근데 이 영상 제작자는 목회자이신가요? 보통 어설프게 신학하는 사람들이 이런 영상 많이 만들던데.. 본인이 누구인지 오픈하시고 옹호하시길~
별게 다 논란이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아가며 인생의 가장 처절한 순간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죄악 가운데 빠진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새 생명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시지면 그 이전에 더 중요한 문제는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공감하시네는 이런 "죄의 문제"를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지 않게 하는, 주님을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 도구 정도로 생각하려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찬양이 될 수 있기에 언급하신 유튜브에서 비판을 하였던 것입니다.
공감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