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 진실] 32_11.광개토대왕비가 압록강 집안시에 있는 이유_한국인의 조국 '부여'를 찾아서(11편)_The land Koreans originated from(#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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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27 жов 2024

КОМЕНТАРІ • 64

  • @김우진-m4g
    @김우진-m4g 8 місяців тому +2

    그렇군요~아귀가 딱 맞아 떨어지네요..~

  • @yoonjk81
    @yoonjk81 Рік тому +34

    당대 사료를 중시하여 고조선,고구려의 원래 이름인 조선,고려를 되찾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고구려시대에는 고구려란 말이 존재하지 않았고 고구려국민들은 자신들을 고구려라고 부른 적이 없으며 고려라고만 불렀습니다.(고려:가장 높고 고운 나라라는 뜻).
    고구려당대기록에 중국사서에 무수히 둥장하는 고려는 당시 있지도 않았던 왕건고려를 가리키는게 아니라 당시 고구려가 고려라는 국명을 가지고 있었기 떄문인데,
    한국에서 고구려라고 부를 떄도 중국인들은 고려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역사기록에 고려라고 나와 있기 떄문에 그걸 무시할 수가 없어서.
    그러다 후대에 들어와 왕건고려와 자꾸 헷갈리게 되자 중국인들 나름대로 생각해낸게
    두 나라를 구분하기 위해 고고려,왕고려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고씨 고려,왕씨고려라는 뜻)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중국인들도 한국을 따라서 고구려,고려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는데요.이건 동북공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원조고려 (KOREA)가 현대 한국의 국명인 한국(영어명 KOREA)과 동일한 이름이기 때문에 난감해 했습니다.
    그래서 고려를 고구려라고 부르고 고구려는 현대한국(KOREA)과 다른 나라다라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동북공정이전이나 대만의 역사학에선 현대의 KOREA를 과거의 고려(고구려)를 동일성을 가진 후계국가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조선,고구려의 원래름을 찾아주고 그후의 고려,조선은 타국의 관례에 따라 2고려,2조선 등으로 변경시키는게 필요하다고 봅니다.(이집트문명의 1왕국,2왕국,3왕국 식으로,1,2,3 전부 같은 이집트지만 왕조가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고려,2고려라고 하게되면 고려가 한국사에 2개나 있게되니 중국인들이 고려(고구려)와 현대 KOREA와는 다르다는 주장이 힘을 잃게 되고,
    중국의 동북정이 고구려를 KOREA와는 다른 나라다 라고 주장한 순간에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켰던게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들통나게 됩니다.
    이런 중요한 사실이 현재 한국의 국사교과서에 실려있지도 않은 것은 현대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얼마나 멍청한 인간들인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 @seongsujeong9665
      @seongsujeong9665 Рік тому

      고구려 사람들이 고구려라고 부른 적이 없다? 고구려가 정식 명칭이고 '고려'는 약칭이죠. 신 왕망이 흉노를 치기 위해 고구려에게 원병을 청했을 때 고구려가 거부하자 '하구려'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구려를 정식 명칭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죠. 현재 대한민국을 줄여서 한국으로 부르듯 고려는 고구려의 약칭으로 불렀다고 봐야 합니다. '구려'도 있었습니다. 고구려를 대수맥 구려를 소수맥이라 했는데, 고구려가 큰 상인 송화강에 있었고 구려가 작은 강인 유하에 있었기 때문에 대비해서 한나라 사람들이 불렀습니다.

    • @yoonjk81
      @yoonjk81 Рік тому +6

      @@seongsujeong9665 제가 쓴 글의 요지나 본질과는 관계없는 부수적인 질문입니다.하구려라고 한게 하니고 하고려라고 했습니다.원문에 그렇게 나옵니다.당대 역사기록에 고려라고 나오는 건 무수히 많은데 고구려라고 나온 거 하나만 제시해도 제가 인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앞의 고려(고구려)를 고구려라고 고쳐부르기로 했었던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계시네요.

    • @user-kh8mb7vx3t
      @user-kh8mb7vx3t 9 місяців тому +1

      @@seongsujeong9665 무식하면 좀 가만히라도 있으세요

  • @오동진-i1l
    @오동진-i1l Рік тому +17

    동천왕을 언급할 때에는 반드시 평양성 천도도 언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평양은 낙랑군이 있었다고 강단 사학계는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김부식이 왕검을 언급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집안에 고구려 왕족의 묘지가 많은 이유를 선생님 강의를 듣고 이해가 갑니다.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jeolla-dotv
      @jeolla-dotv Рік тому

      지금 한국사가 강단 사학자 친일사학자의 국소적인 사대적인 해석으로 상고사가 부정받는데 모르시나요 지금 평양성이 아니고 요하쪽에 낙랑국 과 평양성이 있어야 역사의 궤가 이어집니다

  • @권보-l6z
    @권보-l6z Рік тому +7

    집안시에 고구려 왕릉들이 모여있는 이유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당히 설득력있는 설명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현 경북 경주에 모여있는 무덤들도 같은 관점으로 봐도 될런지요 ?
    왜냐하면
    1) 초기신라도 어차피 그 세력이 약할 때는 고구려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립간시기( ? ~지증왕 때까지)의 무덤인 호우총 청동호우, 서봉총의 은합 등이 고구려유물이고, 경북 영주 순흥면에서 고구려고분벽화가 발굴되었고, 삼국사기/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경북 포항시 청하면이 본래 고구려땅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고려사 초기 기록에도 외적의 침입으로 황성을 비우고 떠날 때 선왕의 시신을 꺼내서 함께 피난을 갔다가, 환도시에 다시 왕릉에 매장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고구려인들 처럼 사후세계를 중시하는 풍습이 조선말기까지도 있었습니다. 화적떼들이 부잣집 조상묘를 파헤쳐서 유골을 가져가고는 조상의 유골을 찾아가려면 거액을 가지고오라는 통지를 하기도 했으니까요.

  • @viewtheviewers4804
    @viewtheviewers4804 Рік тому +7

    훌륭하십니다 귀한 강의 잘 들었습니다

  • @김봉두-x8d
    @김봉두-x8d Рік тому +4

    지도로 위치 집어주시며 설명 해주시니 너무 이해하기 좋습니다

  • @kygo1781
    @kygo1781 3 місяці тому +1

    천재다

  • @bokhanlee4049
    @bokhanlee4049 Рік тому +6

    kbs 역사 스페셜 신라왕 직함이 고구려 왕 무덤지기 입니다 ~

  • @sky2024
    @sky2024 Рік тому +3

    잃어버린 고구려역사서가 어디선가 발견되기를 기대한다 !!!

  • @김성태-i6b6j
    @김성태-i6b6j 6 місяців тому

    오랜 세월동안 궁금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 @김광섭-k6l
    @김광섭-k6l Рік тому +4

    광개토왕릉비 문화혁명떄 압록강 옮겼음

  • @hyugi-papa
    @hyugi-papa Рік тому +16

    북경이 고구리(麗 : 고울 려(여), 나라 이름 리(이)) 중심지였다는 선생님의 의견에 절대 공감입니다. 고대에는 영토의 크기와 인구수가 국력에 비례합니다. 영토의 크기가 중요한 이유는 농업생산력 때문입니다. 농업생산력은 군대를 운영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지표입니다. 압록강 중류지방에 고구리가 있었다면 나라의 군대를 운영하는데 1천명의 군사도 먹여살리기 어려울 겁니다. 인근 지역에 드넓은 평야지대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강력한 군대를 운영할 수가 없습니다. 인근에 넓은 평야지대를 점령한다 하더라도 거기서 세금은 어떻게 거둘 것입니까? 넓은 평야지대를 점령했다면 신속히 그 지역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입니다.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나라를 건국해서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공격할 수도 없을 뿐더러 호태왕의 정복전쟁도 불가능합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보급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필패입니다. 압록강 중류의 나라가 무슨 수로 그 막대한 군량미를 공급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의 북경지역 정도는 되어야 그 지역에서의 농업생산력으로 나라를 유지하고 대규모 정복전쟁도 가능했던 것입니다. 압록강 중류의 나라는 싸움은 잘하겠지요. 인근지역 노략질은 잘 하겠지요. 하지만, 점령지를 운영할 수는 없습니다. 후방지원이 안되는데 어떻게 점령지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노략질 정도밖에 못합니다.
    역사해석을 평면지도를 놓고 보면 제대로 된 해석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입체지도를 통해서 지형지도를 살펴봐 가면서 해석을 해야 합니다. 또한, 지금의 상식으로 역사해석을 하면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은 지금처럼 영토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고지전 중심의 전쟁이 아니라 성을 뺏기 위한 공성전과 수성전 중심으로 전쟁이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행정은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성 안 사람들은 지배세력이라고 해서 人이라 하였고, 성밖의 사람들은 피지배계층으로 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둘을 합쳐 인민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성밖의 사람들의 정체성은 자기들을 지배하고 있는 성밖에 모릅니다. 안시성 밖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물으면 안시성 사람이라고 했을 겁니다. 성 안 사람들이나 자신들을 고구리사람이라고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공성전과 수성전은 성 사람들끼리의 싸움입니다. 나라와 나라가 맞붙은 대규모 전쟁이 아니고서는 성밖의 민들을 좀처럼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주가 어느 나라에 충성하느냐에 따라서 접경지역의 성들은 혼재돼 있습니다. 안시성 동쪽에 수나라 성이 있을 수도 있고, 요서지역에 고구리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백제 영역에서 고구리 성이 있을 수 있고, 고구리 영역 안에 백제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이 혼자 독립해서 존재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이 경우는 대부분 어느 한쪽에 항복을 합니다.
    옛날에는 성을 중심으로 모든 행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성이 항복하지 않으면 그 지역을 점령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고구리 평양성이 멸망하였다 하여 고구리 영역을 당나라가 모두 접수한 것은 아닙니다. 평양성이 무너지면 그 주변 성들이 항복해야 비로소 그 영역을 당나라가 접수할 수 있었습니다. 평양성이 무너진 뒤 고구리의 성을 차지하기 위해서 당나라와 신라가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것이 7년전쟁입니다. 이 점은 당나라나 신라가 서로 잘 알았던 것입니다. 서로 배신한 것이 아니라 고구리 변방의 성들로부터 항복을 받기 위해 경쟁을 한 것입니다. 그 지역의 패권을 당나라가 가져가느냐 신라가 가져가느냐에 따라서 고구리의 성들이 당나라에 항복할지 신라에 항복할지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7년 동안 한 것입니다.
    부흥운동이라고 하는 것도 고구리 보장왕을 다시 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고구리를 복원하는 건 보장왕이 아닌 자신을 중심으로 복원하려 한 것입니다. 평양이 멸망했으니 이제는 자기가 고구리의 중심이라면서 독립국가로 서기 위한 전쟁을 벌인 것이 우리가 말하는 소위 "고구려 부흥운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운동은 무슨 운동입니까? 이 나라 사학자들의 수준이란... 이 모든 것이 지금의 영토국가 개념에서 역사를 바라보니 이런 엉뚱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고대사의 많은 의문이 풀립니다.

    • @yoonjk81
      @yoonjk81 Рік тому +3

      현대 한국인들이 가장 잘못알고 있는 사실이,
      역사교과서나 역사부도에 있는 고대지도들이 당대에 존재했던 지도들이 아니라
      현대에 와서 추정으로 그린 것들인데 이건 당시 사실들과 많이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추정이란게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왜곡과 날조가 심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삼국시대 지도나 고려국경도 그 당시 존재했던 지도가 아니라 일제시대 일본의 한 만화가가 근거도 없이 그린 지도를 조선총독부가 채용하면서 그게 근거도 없이 오늘날 초중등고교의 역사교과서에 버젓히 올라와 있구요.
      중국의 위촉오 삼국시대는 위촉오가 중국을 온통 다 차지한 것처럼 나오지만 이건 현대 중국사람들이 그린 것이고.
      실상은 위촉오가 고구려보다도 작은 조그마한 나라들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당시 중국이 위촉오만 있었던게 아니라 국가급 아닌 부족단위 지역공동체들이 많았고 오랑캐들이 지배하는 영역이 많아
      삼국간에 사신을 파견하는 것도 오랑캐 떄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중간에 다 털리고 그냥 돌아와.
      그러고보면 명나라시대에 지어진삼국지연의(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지,진수의 삼국지와 다름)는 중국사상 최대의 역사왜곡이었던 겁니다.
      현대중국인들은 소설인 삼국지를 사실인 것처럼 믿고 있고,이런 왜곡도 없습니다.

    • @hyugi-papa
      @hyugi-papa Рік тому +1

      @@yoonjk81백퍼 동의합니다.

    • @yoonjk81
      @yoonjk81 Рік тому

      @@agisekkieo 무식한 후진국(중국) 국민이 뭘 안다고 까부냐?
      너희나라국민이 초등학생 수준이면 한국은 대졸자수준이다. 평균적인 지식수준이 그만큼 차이가 난다.
      후진국국민이 선진국국민한테 까부는 경우는 중국인이 한국인한테 까부는 경우밖에 없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없는 현상이다.
      한국은 중국의 아버지나라입니다.
      한국은 30년동안 중국을 업어키우다시피했습니다.
      한국과 중국이 처음으로 외교관계수립했던 1991년 한국GNP 8200$,중국380$였고,
      중국은 수출입규모가 한국보다도 훨씬 적었고 경제규모도 한국보다 작았습니다.
      중국이 경제발전을 위해 몸부림칠 때 중국에 기술주고 자본주고 키워준 것은
      미국도 아니고 일본,영국도 아니고 유일하게 한국입니다.
      중국의 아버지나라 한국입니다.
      중국의 철강,전자전기,자동차,조선,석유화학,일반화학 등 중국의 현대 모든 산업은 한국에서 기술배우고 자본 가져다 발전했습니다.
      한국은 영원한 중국의 아버지 나라입니다.

  • @Dolphin3840club
    @Dolphin3840club Рік тому +3

  • @TheRoadNotTaken153
    @TheRoadNotTaken153 Рік тому +1

    👍

  • @jasonjaejae
    @jasonjaejae 5 місяців тому

    일리가 있어!!

  • @청산김우진
    @청산김우진 Рік тому +1

    태왕비입니다.왕중의 왕 태왕님입니다

  • @dennythedavinchi3832
    @dennythedavinchi3832 Рік тому

    고구려의 동쪽 경계 책구루는 요사와 북송시대 무경총요를 볼때 현재 동쪽으로 요하를 넘지도 못합니다.
    제가 대왕비 관련된 논문과 관련지역 사물들을 보고 경과를 찾아보니, 일본이 처음부터 제작한 비석으로 보입니다.

  • @황성태-w6m
    @황성태-w6m Рік тому +3

    호태왕비는 집안이 아니라 휠씬 서북쪽 북중국 내지 내몽고일대 어느 곳에 위치한것을 일제가 관구검 기공비나 점제현신사비를 이동 배치시킨것과 같은 맥락에서 현 압록강 이북에다 고정 시켜 놓은 것으로 봐야 할 것 입니다
    (생각 보다는 비신이 크게 훼손 된 점은 자연적인 과정이 아닌 인위적인 이동과정중 거대한 비신을 운송하다 생긴 손궤된 흔적이라고 봄이다)

  • @dragon9947
    @dragon9947 Рік тому

    영락제 호태왕의 무덤이 만주에 있단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고,
    호태왕비를 무덤 옆에 세웠다는 기록이 엄연히 있는데 밑단도 없이 쓰러진채 발견된 호태왕 비문이 원래 그곳에 있었을까요?

  • @수구리suquri
    @수구리suquri Рік тому +3

    장수왕이 선왕인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하여 AD 414년 세운 비가 광개토대왕비입니다 ♥AD 414년의 고구려 수도는♥ 평양 동황성(진황도시 평양의 동쪽에 있는 고구려 황성)인 요하동쪽의 요양시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비가 중국 고대국가로 부터 안전한 집안시에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 @수구리suquri
      @수구리suquri Рік тому

      ♥관구검의 침입으로 동천왕이 진황도시 평양성으로 AD 247년 천도했고, ♥전연의 모용황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파괴되자 고국천왕이 평양 동쪽 황성(평양 동황성)인 요하동쪽 요양시로 AD 343년 천도했고, ♥장수왕이 평양(하평양=남평양)인 요동성(하북성 형태시 안평현)으로 427년에 천도했습니다

    • @아두은인
      @아두은인 Рік тому

      고구려 평양은 머리가 아픔
      평양은 편평하고 햇빛이 잘드는 곳이라는 것은 확실함
      평양이 몇개인지
      한 시대에도 평양이 여러개일 수도
      고구려왕은 여러군데ㅡ옮겨다니며
      적의 공격을 피했는데
      연남생이 배반하고, 고구려왕이 잇는 곳을 탁 집어서, 고구려를 무너뜨린 것임,
      백개가 넘는 고구려성은 건재했으니, 다시 고구려 유민이 발해를 세운듯

    • @수구리suquri
      @수구리suquri Рік тому

      @@아두은인 평양은 여러개입니다 가장 관심있는 평양, 고구려 위치 확인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평양은 고구려 멸망 당시의 평양인 장안성입니다(평원왕 28년인 586년에 도읍한 장안성)

  • @eon210able
    @eon210able Рік тому +1

    맞는 것 에는 ⭕️
    틀린 것 에는 ❌️
    참에는 ⭕️ 거짓은 ❌️
    거짓을 설명하는 것은 거짓을 말하는 것보다 더 나쁠 수 있습니다

  • @stylered
    @stylered Рік тому

    옥저의 위치가 너무 한반도에 가깝게 그려졌네요. 발해만 옆에 발해가 있는거 처럼, 오호츠크해 옆에 옥저가 있어야 말이 되는데.? 오호츠크가 옥저거든요

  • @user-el5jc4vf3o
    @user-el5jc4vf3o Рік тому +1

    이제사 이해되는게 호태왕릉을 지키는 사람을 전쟁 노비 등을 시키고 많은 수를 왜 배치했는가가 하는 갑니다
    아무리 태왕능이라 해도 릉을 지키는 수가 너무 많은 게 이해되지 않았음
    수도와 멀리 떨어져있으니카 그것을 안전하게 보호하려면 인력이 많이 있어야 할 듯

  • @권보-l6z
    @권보-l6z Рік тому

    한가지 질문드립니다.
    후한서/삼국지 동이전에서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옥저가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개마대산'을 어디라고 보시는지요 ? 또 개마대산을 그곳이라고 비정하는 근거는 무엇인지요 ?

    • @arirung
      @arirung Рік тому

      연산산맥이 아닐까요.

    • @권보-l6z
      @권보-l6z Рік тому

      @@arirung 그럴수도 있겠네요.
      태행산맥과도 연결된 산맥이니 ....

    • @arirung
      @arirung Рік тому

      ​@@권보-l6z진황도시 어느한 마을전체가 민족을 조선족으로 바꾸는 사례가 있었는데, 그분들의 조상이 고구려인이라고 합니다. 동북공정 전에 일이니 지금은 불가능하겠죠.
      그리고 진황도 노용현 갈석산에서 바다가 안보입니다. 그들의 해석은 해수면 하강 ㅋㅋ

    • @실크로드다시보기
      @실크로드다시보기 Рік тому

      개마는 태행산맥 중간 아닐지요? 고구리사초략 및 추모경을 보시길~

    • @권보-l6z
      @권보-l6z Рік тому

      @@실크로드다시보기 고맙습니다.
      고구려사략의 진실성과 사료적 가치를 믿지만, 반도사관에 찌든 이들을 설득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어서,
      중국 사서들에서 그 위치를 밝혀주는 부분이 있으면 소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 @besuhof9360
    @besuhof9360 Рік тому

    [후한서와 삼국지 위지 시대에, 동옥저는 함경북도-두만강 지역에 중첩합니다.]

    • @besuhof9360
      @besuhof9360 Рік тому

      [수경주의 시간]
      수경주는 중국남북조시대 탁발북위 역도원이 편집했다고 나옵니다.
      @수경주소 서문 (수경주소, 서. 水經注疏, 序)
      탁발북위 역도원이 [수경주를] 편찬하였다. [*역도원 생애. 서기 466년 쯤 ~ 서기 527년]
      [양자강 중류 호북성 의도시의] 양수경이 추가로 [수경주소를] 편집하였다. [*양수경 생애. 서기 1839년 ~ 서기 1915년]
      [양자강 중류 호북성 기강시의] 문인 웅회정 등이 추가로 [수경주소를] 편집하였다. [*웅회정 생애. 서기 1859년 쯤 ~ 서기 1936년]
      (
      수경주소, 후위 력도원 찬, 의도 양수경 찬소, 문인 기강 웅회정 참소.
      水經注疏, 後魏酈道元撰, 宜都楊守敬纂疏, 門人枝江熊會貞參疏)
      그런데, 또한편 수경주 포구수에는 림구현(臨泃)이 나옵니다.
      @수경주 포구수
      [3-1]
      포구수가 옹노현 옛 성 서북쪽에서 동쪽으로 흘러서 옹노현의 북쪽을 지나는데, 또 동쪽에서 글귀-구하(泃河)가 포구수에 합류한다.
      글귀-구수(泃水)는 우북평군 무종현 서쪽 산 백양곡에서 나오는 강물이고, 어양군 평곡현을 지난다.
      (
      포구수 자옹노현고성서북, 구 분 사구수 동출, 금사구수단, 중천동주 혼성일독, 동 경 기[옹노]현북, 우 동 여구하 합.
      (구하=구수)수출 우북평무종현서산백양곡, 서북 류 경 [어양군]평곡현, 굴 서남 류 독락수입언
      鮑丘水自雍奴縣故城西北,舊分笥溝水東出,今笥溝水斷,衆川東注,混成一瀆,東逕其縣北,又東與泃河合,
      水出右北平無終縣西山白楊谷,西北流逕平谷縣,屈西南流,獨樂水入焉。)
      ...
      글귀-구하(泃)는 또 동남쪽으로 흘러서 림구성(臨泃城) 북쪽을 지나고, 굽어 흐르면서 림구성(臨泃城)의 동쪽을 거쳐서 남쪽으로 나온다.
      (
      구하 우 남 경 앙성 동, 이 남 합오백구수. (오백구수)수출칠산북, 동 경 평곡현지앙성남, 동 입우 구하
      구하 우 동남, 경 림구성 북, 굴 이 력 기성동, 측성남 출, 양혜성왕십육년 제사급연전어구수 제사둔 즉시수야
      泃河又南逕紻城東,而南合五百溝水。水出七山北,東逕平谷縣之紻城南,東入于泃河。
      泃河又東南逕臨泃城北,屈而歷其城東,側城南出。《竹書紀年》:梁惠成王十六年,齊師及燕戰於泃水,齊師遁,即是水也。 )
      글귀-구하(泃)는 또 남쪽으로 흘러서 포구수에 들어간다.
      (
      구하 우 남 입포구수, 포구수 우 동 합천주거구.
      泃水又南入鮑丘水, 鮑丘水又東合泉州渠口.)
      @구당서 지리지 하북도(河北道)의 유주(幽州)
      - 구당서지리지 유주 로현.
      한서지리지 어양군 로현이다. 수나라 때도 고치지 않았다.
      당나라 때 서기 619년에 로현에 현주(玄州)를 설치했고, 아울러 림구현(臨泃)을 설치했다.
      현주(玄州)는 로현, 림구현(臨泃), 어양현, 무종현 4개 현을 가졌다.
      서기 627년에 현주를 폐지했다. 림구현(臨泃)과 무종현을 없앴고, 로현과 어양현을 유주에 속하게 했다.
      (
      - 구당서지리지 유주 로현. 한현. 속 어양군. 수 불개.
      무덕2년[=서기 619년], 우현 치 현주, 잉치 림구현. 현주 령 로 림구 어양 무종 4현.
      정관 원년[=627년] 폐 현주, 생 림구 무종 2현, 이 로 어양 속 유주.
      潞後漢縣,屬漁陽郡,隋不改。
      武德二年,于縣置玄州,仍置臨泃縣。玄州領潞、臨泃、漁陽、無終四縣。
      貞觀元年,廢玄州,省臨泃、無終二縣,以潞、漁陽屬幽州.)
      림구현(臨泃)은 로현을 나눈 지역인데, 당나라 때에만 일시적으로 존재하였습니다.
      즉, 수경주의 시간은 중국남북조시대 및 수나라-당나라에 걸쳐 있습니다.
      또한, 수경주는 서기 207년 후한말 삼국지 조조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경주(水經注) 요서놘음유수(濡水 놘수)
      [2-4]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영지현에 고죽성이 있다. 즉 옛 고죽국이다.
      (
      지리지왈 영지유고죽성 고고죽국야
      《地理志》曰:令支有孤竹城,故孤竹國也。)
      [3-1]
      요서놘음유수(濡)는 고죽 옛 성[=영지현]의 남쪽 [*= 해양현 북쪽]을 지나서, 2개의 강물로 나뉜다.
      요서놘음유수(濡)-낙안정-남쪽물길은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낙안정의 남쪽을 지나서, 동쪽으로 흐르면서,
      삼국지-조조-신하(新河)와 만난다.
      삼국지조조신하는 어양군 옹노현에서 포구수를 타고 동쪽으로 나오는 물길인데, 이것을 염관구(鹽關口)라고 한다.
      [서기 207년,] 삼국지 조조가 오환 답돈과 싸웠는데, 그때 포구수-옹노현의 물길이 동쪽으로 이어지는 염관구(鹽關口) 구간을 구구(泃口. * 글귀-구수 출구 및 요서놘음유수-본래 출구 지역.)에 이어지도록 새로운 물길(신하新河)을 만들었다.
      삼국지조조신하(新河)는, [요서놘음유수-낙안정-남쪽물길과 만난 지점을 지나서,]
      또 동북쪽으로 연결되는데, 경수(庚水)를 끊고 [=합쳐서] 이어지고,
      또 동북쪽으로 나가서 우북평성을 지나서, 구거지수(泃渠之水)를 끊고 [=합쳐서] 이어지고,
      또 동북쪽으로 연결되어 [우북평군의] 창성현(昌城縣) 옛 성의 북쪽을 지난다.
      (
      유수 자고죽성 동 남 경 서향 북, 호구수 주지, [호구수] 수출성동남 동류 주유수.
      濡水自孤竹城東南逕西鄉北,瓠溝水注之,水出城東南,東流注濡水。
      유수 우경고성 남, 분위 2수,
      북수지출 세위지 소유수야, 동 경 락안정북, 동남 입해.
      유수 동남류 경 락안정 남, 동 여신하고독 합, [신하고독] 독 자옹노현 승포구수 동출, 위지 염관구.
      위태조 정 답돈, 여구구 구도야, 세위지 신하의.
      진수 운 이통해야,
      濡水又逕故城南,分為二水,
      北水枝出,世謂之小濡水也。東逕樂安亭北,東南入海。
      濡水東南流,逕樂安亭南,東與新河故瀆合,瀆自雍奴縣承鮑丘水東出,謂之鹽關口。
      魏太祖征蹋頓,與泃口俱導也。世謂之新河矣。
      陳壽《魏志》云:以通海也。
      신하 우동북 절 경수, 우동북출 경 우북평, 절 구거지수, 우동북 경 창성현고성 북, 왕망지숙무야
      新河又東北絶庚水,又東北出,逕右北平,絶泃渠之水,又東北逕昌城縣故城北,王莽之淑武也。)
      [3-2]
      삼국지조조신하(新河)는 또 동쪽으로 이어져서, 요서군 해양현(海陽縣) 옛 성의 남쪽을 지난다.
      위토지기에서 이르기를, 영지성(令支城) 남쪽 60리에 해양성(海陽城)이 있다고 하였다.
      [*즉, 지금까지의 내용은 모두 고죽-영지현에서 요서놘음유수가 낙안정을 지나면서 갈라지고 난 후 해양성까지 60리 공간의 내용이다.]
      (
      신하 우동 경 해양현고성남, 한고조육년 봉요모여위후국
      新河又東逕海陽縣故城南,漢高祖六年,封搖母餘為侯國。
      ...
      위토지기 왈, 령지성 남 60리 유 해양성자야.
      《魏土地記》曰:令支城南六十里有海陽城者也。)
      수경주 포구수는 서기 207년 삼국지조조신하의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수경주는 대략 한서지리지의 시대 즉 후한시대 등을 포함하고, 또한 그 작성 시기는 중국남북조시대와 수나라-당나라의 시간에 걸쳐 있습니다.

    • @besuhof9360
      @besuhof9360 Рік тому

      [포구수와 경수의 사이에 있는 밀운저수지]
      명나라 고수는 장가구광역시 회래현 서쪽 강물이고, 서기 2020년대 상건하-영정하 수계이고, 베이징-서쪽강물입니다.
      수경주에서 고수는 서로수이고, 포구수는 동로수인데, 로현에서 만납니다.
      명나라지리지에서, 상건하-영정하 수계는 순천부 통주 로현에서 명나라 통주백하와 만납니다.
      즉, 명나라 통주백하는 포구수가 될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명나라-청나라 순천부 밀운현에 서쪽 강물 백하가 있고, 동쪽 강물 조하가 있습니다.
      청나라지리지에서는 밀운현에서 백하와 조하가 만나고, 그것을 조백하 라고 부릅니다.
      명나라 때 백하와 조하는 밀운현에서 안 만나고, 밀운현 남쪽의 순의현에서 안 만나고, 순의현 남쪽의 삼하현에서도 안 만나고, 그 남쪽 텐진 지역에서 만납니다.
      명나라지리지-청나라지리지 공통적으로, 텐진-무청구는 옹노현 옹노늪에 해당합니다.
      아무튼, 청나라는 밀운현-서쪽강물-백하를 고수라고 하고, 밀운현-동쪽강물-조하를 포구수라고 합니다.
      청나라지리지는 밀운현에서 서로수와 동로수가 만난다, 라는 것인데, 사실 수경주에서는 로현에서 서로수와 동로수가 만납니다.
      청나라지리지는 수경주의 내용과 다르다, 라는 것에 해당합니다.
      즉, 수경주 시대의 포구수는 단지 밀운현-서쪽강물-백하이고, 수경주 시대의 고수는 베이징-서쪽을 흐르는 서기 2020년대 상건하-영정하 수계입니다.
      당나라지리지에서 비여현은 노룡현입니다.
      즉, 수경주 시대에 노룡현은 비여현입니다.
      비여현은 수경주 포구수와 경수의 사이에 있고, 즉 밀운 저수지 강물의 유역에 있고, 밀운저수지 지역의 남쪽에 있습니다.
      즉, 수경주 시대에 노룡이라는 지명, 노룡현 및 서기 207년 삼국지 조조 노룡성, 삼국지 조조 노룡새 및 서기 353년 모용준-노룡장성도로 출발점 등은 모두 밀운저수지 지역에 분포합니다.
      명나라-청나라 영평부 노룡현은 서기 2020년대 진황도광역시-서쪽끝부분-노룡현이므로, 명나라-청나라 때 지명이 동쪽으로 4개~5개 현 간격 쯤 변동한 상태입니다.
      사실, 원나라 때 쿠빌라이 도성을 방60리 규모로 새로 만들었는데, 기존 요나라 연경에서 동북쪽으로 고수-강물을 건너서 새로 만들었고, 그것이 명나라-청나라 순천부에 해당합니다.
      맥락상, 한서지리지 이후 원나라 쿠빌라이 직전까지, 고수와 포구수는 베이징 지역에 그대로 있었고, 변동하지 않았다, 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경주 시대의 해영현은 대략 텐진-계주구 ~ 탕산 서남쪽 해안가 쯤에 걸쳐 있고, 수경주 시대의 요서갈석은 탕산시 중간에 들어 있습니다.
      한편, 밀운이라는 지역은 탁발북위 - 수나라 - 당나라 - 요나라 등에 이르기까지, 포구수 상류 도인계수 지역, 치해현 지역 및 백단현 지역에 모두 걸쳐 있습니다.
      즉, 서쪽에서 동쪽으로 도인계수-밀운, 치해현-밀운 및 백단현-밀운 등 3개의 밀운지역이 모두 밀운이고, 그 지역들이 접합니다.
      명나라 밀운현에 백단산이 들어있습니다.
      즉, 명나라-청나라 순천부 밀운현은 백단-밀운현이고, 역사적으로 밀운지역의 동쪽끝부분입니다.
      수경주 요서놘음유수에서 백단은 노룡의 서북쪽에 있습니다.
      서기 207년 삼국지 조조는 밀운저수지 남쪽과 중간 부분의 노룡성에서 출발하여 전주의 인도를 받고, 산악경로를 따라서 서북쪽으로 우회하면서 백단을 거쳐서, 백단의 동쪽으로 평강을 거쳐서 백랑산에 도달했습니다. 산악경로로써 수백리이고 우회구간이 들어 있습니다.
      요수는 한서지리지에서 수나라-당나라-요나라-금나라 때까지, 탕산 동쪽경계선을 흐르는 탕산-란하입니다.
      수경주 백랑수는 요수의 서북쪽 지류입니다.
      탕산-란하의 서북쪽 수계인 승덕광역시 지역에 백랑이 있습니다.
      즉, 탕산은 요서-요동 접경지역입니다.

    • @besuhof9360
      @besuhof9360 Рік тому

      [구야한국 및 방4천리]
      후한서와 삼국지 위지 기준으로, 방4천리 한국이 존재하고, 그 동남쪽 끝에 구야한국-김해시가 있습니다.
      방4천리는 방1천리가 4개 있는 것입니다.
      방1천리는 가로 1천리, 세로 1천리의 정사각형입니다.
      북주서와 수서에서 백제본토의 영역이 세로 900리 가로 450리인데, 이것은 충청-전라 지역입니다.
      즉, 한국 남해안의 가로 간격은 450리 * 2= 900리인데, 이것을 후한시대 거리값으로 치환하면 10%를 늘려서 1천리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방4천리 한국은 가로 1천리 세로 4천리의 모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략, 대련-신의주-만포-함흥북청 지역 쯤에 방4천리 한국의 북쪽 경계가 있습니다.
      후한서 마한은 방4천리 한국의 서쪽에 길게 되어 있습니다.
      후한서 진한과 변한은 마한의 동쪽인데, 이때 진한이 변한의 북쪽입니다.
      후한서와 삼국지 위지 기준으로, 왜는 바다 가운데에 있습니다.
      후한서와 삼국지 위지 기준으로, 마한과 변한이 왜에 접합니다.
      즉, 동일 사서인 후한서와 삼국지 위지 기준으로, 마한과 변한은 바다를 건너서 왜에 접하는 땅이 있습니다.
      BC 200년대 영씨 진나라 때 연,제,조의 난민들이 육로로써 및 바다를 건너서 마한왕에게 왔고, 마한왕이 그들을 나라의 동쪽인 진한에 살게 했는데, 그것이 신라본기 서나벌로 이어지고, 서나벌은 변진한을 합친 것입니다.
      즉, 최소한 BC 200년대에 이미 김해시를 포함하는 방4천리 한국이 있고, 이미 그 때의 한국은 큐슈 지역 등에 접하는 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마한 비미국(卑彌國) 등이 있습니다.
      @삼국지 위지 한국
      마한은 서쪽에 있다.
      마한에는 50 여개의 나라들이 있다.
      원양국(爰襄國), 모수국(牟水國), 상외국(桑外國), 소석색국(小石索國), 대석색국(大石索國),
      ...
      신흔국(臣釁國), 지침국(支侵國), 구로국(狗盧國), 비미국(卑彌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
      이 있다.
      (
      마한재서, 기민토저 종식 지잠상 작면포, 각유장수 대자자명위신지 기차위읍차, 산재산해간, 무성곽.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散在山海間, 無城郭.
      유 원양국, 모수국[*모양수국], 상외국[*상수국], 소석색국, 대석색국,
      우휴모탁국[*우휴모록국], 신분고국 [북송본, 활작고. *= 신분활국, 혹은 신분첨국], 백제국, 속로불사국, 일화국,
      有 爰襄國 牟水國[*牟襄水國] 桑外[*水]國 小石索國 大石索國
      優休牟涿[*淥]國 臣濆沽[*活 혹은 沾]國[北宋本, 活作沽]. 伯濟國 速盧不斯國 日華國
      ...
      신흔국[*신첩국], 지침국, 구로국, 비미국, 감해비리국,
      고포국[*고만국], 치리국국, 염로국, 아림국, 사로국,
      臣釁[*疊]國 支侵國[*支侵支] 狗盧國 卑彌國 監奚卑離國
      古蒲[*滿]國 致利鞠國 冉路國 兒林國 駟盧國
      ...
      범 50 여 국.
      凡五十餘國.)

    • @besuhof9360
      @besuhof9360 Рік тому

      [방4천리의 북쪽]
      마한의 북쪽에 후한서 낙랑이 접합니다.
      이를테면, 후한서 낙랑은 신의주-만포의 북쪽 및 심양 지역 등에 걸쳐 있습니다.
      진한의 북쪽에 후한서 예국이 접하고, 후한서-예국은 동쪽으로 바다에 접하는데, 후한서-예국의 바다는 함경남도 바다와 중첩합니다.
      후한서 예국의 북쪽에 후한서-동옥저가 접하고, 후한서-동옥저는 동쪽으로 바다에 접하는데, 후한서-동옥저의 바다는 함경북도-두만강 바다와 중첩합니다.
      후한서 낙랑의 북쪽에 후한서 고구려가 접하고, 고구려의 남쪽에 조선이 접합니다.
      즉, 후한서 낙랑군은 조선국입니다.
      낙랑군이라는 것은 후한에게는 군현으로 인식되지만, 사실은 조선국입니다.
      고려 태조왕건은 후당의 현도주 도독입니다.
      즉, 현도주는 후당에게 군현으로 인식되지만, 단지 태조왕건의 땅입니다.
      대조영의 나라는 당나라 발해군입니다.
      조선국은 후한의 낙랑군입니다.
      사기 서남이열전에서 야랑국이 건위군으로 되는 과정도 그러한데, 그러한 방식을 당몽의 협약이라고 부릅니다.
      당몽의 협약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나라가 즉, 중국과 야랑국이 외교를 수립하는 관계이고, 이때 중국의 관리를 야랑국의 장소에 파견하여 상주하게 하고, 야랑국왕의 아들을 야랑현령으로 삼아서 중국관리와 함께 업무를 수행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이때 중국관리는 건위군 태수가 됩니다.
      야랑현에는 야랑국 왕자가 있고, 야랑국왕은 여전히 건위군-야랑국을 모두 다스립니다.
      즉, 탕산 동쪽의 유주 낙랑군 등은 중국의 외교적 군현입니다.
      다만, 보정광역시의 유주 광양군-탁군 등 장성 안쪽의 지역들은 중국의 직할 행정 군현입니다.
      후한시대 낙랑군-조선국은 마한과 함께 온조의 나라에 해당합니다.
      구체적으로는 비류-온조 등의 통합국가에 해당합니다.
      백제본기 서문에서, 비류와 온조가 패수와 대수를 건너서 미추홀에 도달했는데, 비류는 미추홀에 남았고, 온조는 또 한수를 건너서 하남에 자리잡았습니다.
      즉, 미추홀은 한수의 북쪽, 패수-대수의 남쪽, 그 사이에 있고, 낙랑-미추홀에 해당합니다.
      사마씨 진서 지리지에서 대방은 후한말요동태수-공손탁 때 부여왕 위구태와 연합하여 만든 것이고, 낙랑의 7현을 떼어서 만든 것입니다.
      즉, 북사가 말하는 대방옛땅은 후한말 기준 낙랑군의 일부인 대방 지역에 해당하고, 대방현은 심양의 서남쪽 공간 쯤입니다.
      동옥저의 북쪽에 북옥저가 접하는데, 북옥저는 동쪽으로 바다에 접하고, 북옥저의 바다는 겨울에 어는 바다입니다.
      즉, 북옥저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북쪽이면서 연해주 남쪽 부분에 중첩합니다.
      동옥저는 가절방천리입니다. 즉, 한변이 1천리, 다른 변이 5백리입니다.
      북옥저의 남쪽 8백리에 남옥저가 있습니다.
      즉, 토폴로지의 관점에서, 남옥저 수도는 북옥저 수도의 서남쪽으로 8백리에 있고, 남옥저는 동옥저의 서쪽에 접합니다.
      후한서에서 서옥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besuhof9360
      @besuhof9360 Рік тому

      [졸본부여국에서 가섭원-동부여까지]
      삼국사기가 인용하는 괄지지에서, 환도성과 국내성은 같은 지역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서기 246년.
      관구검 등이,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을 새기고 돌아갔다.
      [불내성과 국내성이 같은 지역에 있으므로, 환도산과 국내성은 서로 인접한 것이다.]
      (
      시역야, 위장 도 숙신남계 각석기공, 우도 환도산 명 불내성 이귀.
      是役也,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㓛,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
      괄지지운, 불내성즉국내성야, 성루석위지. 차즉 환도산 여 국내성 상접.
      括地志云, “不耐城即國内城也. 城累石爲之.” 此即丸都山與國内城相接.)
      국내성과 환도성은 마자수 유역에 함께 있습니다.
      마자수는 심양 지역을 지나면서 서남쪽으로 흐릅니다.
      국내성과 환도성은 심양광역시 지역 주변에 분포합니다.
      비류수는 마자수의 서쪽 지류입니다. 미천왕 을불은 비류수와 마자수 사이에서 배를 타고 다니면서 소금을 팔았습니다.
      즉, 염난수와 비류수는 모두 시라무렌강 수계에 들어 있습니다.
      비류수의 북쪽에 후한서 부여 즉 삼국지 위지 부여의 수도가 있습니다.
      심양-마자수와 탕산-란하-요수의 사이에 한서지리지 요동군이 들어 있습니다.
      한서지리지 요동군의 북쪽에 한서지리지 현도군이 접합니다.
      즉, 한서지리지 현도군은 탕산-북쪽-적봉시와 심양의 사이에 들어 있습니다.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편에서, 졸본은 한서지리지 현도군 고구려현입니다.
      한서지리지 현도군 고구려현은 현도군의 서쪽부분이고, 소요수의 상류지역입니다.
      소요수는 대요수의 동쪽 지류이고, 탕산-란하의 동북쪽 지류입니다.
      졸본은 탕산 북쪽으로 적봉시 지역 등의 사이에 들어있습니다.
      한서지리지 낙랑군은 조선국이면서 마한과 함께 백제본기의 영역입니다.
      한서지리지 현도군은 졸본부여국이고, 졸본부여국은 비류수-비류국 및 마자수 국내성 지역 등과 함께 고구려 본기의 영역입니다.
      후한서 부여는 방2천리이고, 이것은 방1천리가 2개 있습니다.
      이때 부여는 읍루를 가지고 있는데, 읍루는 너무 넓어서 면적을 헤아릴 수 없지만, 부여는 방2천리입니다.
      즉, 중국사서는 외국의 면적을 말할 때 그 직할지역만을 말합니다.
      후한서 부여 방2천리 직할 지역은 적봉시와 시라무렌강 중상류 지역에서 동북쪽으로 송화강 하얼빈-치치하얼 지역 등에 걸쳐서 대각선 모양으로 두껍게 되어 있습니다.
      후한서 고구려의 직할 지역도 방2천리입니다.
      후한서 고구려는 현도군을 제외한 직할 지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후한서 고구려는 적봉시-조양시-졸본부여국 등을 제외합니다.
      서기 200년대에 졸본부여국은 이이모의 형의 나라이면서 비류수-연노부와 함께 있고, 후한서 고구려와 별도로 존재하고, 그것은 후한서 현도군입니다.
      관구검이 현도를 나와서 비류수에 도착하였고, 동천왕이 마자수-환도성을 나가서 비류수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 삼국지 위지 부여의 일부 대가들이 위구태의 왕실을 배반하고, 관구검 및 현도-졸본부여 왕기의 군대에게 군량을 제공했습니다.
      즉, 서기 240년대의 전쟁에서, 관구검 군벌과 모용의 선조와 졸본부여-연노부 및 삼국지위지 부여-일부가 연합한 상태입니다.
      관구검은 삼국지 위나라 태부 사마의에게서 군비를 받아서 삼국지 위지 부여의 일부 대가들 및 졸본부여국에게 제공하는 방식이고, 군비가 많이 소모됩니다.
      나중에 관구검은 사마의에 의해 숙청됩니다.
      아무튼, 관구검과 졸본부여-연노부의 상대편에 계루부 동천왕이 있는데, 이때 낙랑은 동천왕의 편입니다.
      @고구려본기
      서기 246년. 동천왕 20년.
      왕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빠르게 이들을 공격하니, 삼국지 위나라의 군대가 어지러워져서 싸우지 못하고, 드디어 낙랑(樂浪)에서 퇴각하였다.
      (왕분군 위3도, 급격지, 위군요란, 불능진, 수자낙랑이퇴.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 不能陳, 遂自樂浪而退.)
      이때의 낙랑은 대방을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즉, 서기 240년대의 전쟁에서 백제본기-낙랑대방-위구태 계통은 계루부 동천왕의 편입니다.
      지리가 잘못되는 경우, 단지 사서의 글자를 바꾸어서 해석하는 오류가 생길 뿐이다, 라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후한서 고구려는 심양 주변 지역을 포함하면서 그 동쪽으로 길림 지역 너머 등으로 이어지는 산악 지역입니다.
      후한서 고구려는 후한서 부여의 남쪽-동남쪽에 비스듬하게 접하고, 북옥저의 서쪽에 접합니다.
      정황상, 가섭원 동부여는 후한서 부여의 동쪽 부분 및 후한서 고구려의 동북쪽 부분, 그 사이에 중첩하면서 걸쳐 있는 어떤 상태로 존재합니다.
      대략, 남옥저는 후한서 고구려와 후한서 예국의 사이에 중첩하여 들어 있습니다.
      후한서 북옥저의 북쪽 및 후한서 부여의 동북쪽에 후한서 읍루가 접합니다.
      다만, 숙신과 읍루가 정확히 일치하는가, 에 대해서는 모호합니다.
      삼국유사 말갈 편을 보면, 간혹 북옥저를 말갈의 영역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그럴 경우, 숙신-말갈은 북옥저와 남옥저의 경계선 쯤을 기준으로 볼 수도 있게 됩니다.

  • @무쵸-g5f
    @무쵸-g5f Рік тому +1

    강단사학은
    머리가 식민의식으로
    꽉 막혀서
    민족자존 정신교육 부터 받고
    뇌를 리필해야 한다

  • @seolhalbi2076
    @seolhalbi2076 Рік тому +1

    단편적인 강의만으로는 영원히 야사에 그칠 겁니다. 최소한 고대사 통사를 저술하면 좋겠네요

  • @윤무섭-o6d
    @윤무섭-o6d Рік тому

    그 당시 평양일 것입니다

  • @이영민-b1c
    @이영민-b1c 8 місяців тому

    대왕 이름. " 안 "...!!!

  • @재철김-n7l
    @재철김-n7l Рік тому

    영토니까 거기에 세운것이쬬

  • @최경혜-q4r
    @최경혜-q4r Рік тому

    잘하면 찾을수도있고 그런상황이 오긴오는데 좀더기다려야 단군똥개들 진도가 되기가 하늘의별따기라 한심하기도하고

  • @kellyjoe8896
    @kellyjoe8896 Рік тому

    안성일.안성준? 혹 형제.친척

  • @놀새-d3v
    @놀새-d3v Рік тому

    부여가 한국인의 조국이면 한국인은 만주족이란 말이군요. 한반도 남부에 살던 토착인들은조상이 아니던가요? 어이가 없군요

    • @실크로드다시보기
      @실크로드다시보기 Рік тому

      부여는 하북성. 산서성 북쪽에 있었지요. 동부여도 그 오른쪽 산.
      산이 땔감 나무도 있고 옥.철도 영양분이 많으니까요.

    • @brgb90
      @brgb90 9 місяців тому

      토착민이랑 섞였죠 확실한건 지배계급은 중앙아시아에서 시작했어요

  • @modugasarang4988
    @modugasarang4988 Рік тому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딱 증거가 있는데도 부정하네요
    무덤이 많은 것은 그 당시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는 증거인데 그것마저 부정하네요

    • @yikihoon
      @yikihoon  Рік тому

      ua-cam.com/video/TC9U0v3f4bs/v-deo.html 참고하세요

    • @brgb90
      @brgb90 9 місяців тому

      중국사서를 보면 집안이라는 지명이 나오지가 않는데 증거를 좀 보고 사세요 ㅋㅋ

  • @박홍렬-k8d
    @박홍렬-k8d Рік тому +3

    우리나라 사학자 전부 퇴출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