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왜 중 유명한 두 사람이 있다. 1.준사. 명량 대첩 당시 이순신 장군의 상선에 탑승 중 죽어 물에 떠다니던 구루지마를 발견하여 건져내어 승기를 확정짓는 역할을 했다. 2.사야가 침탈 즉시 항복하여 수 많은 공을 세움. 선조로부터 김해김씨 충선 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특히 조총 기술을 전하는 등 후대까지 활약!
저도 사야가 후손 입니다 보통은 사성 김해김씨라고 하는데 저희는 본관을 물어보면 보통 우록김씨라고 합니다. (집성촌이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참고로 조상님이 병자호란까지 살아계셔셔 활약을 하셨습니다. (정말 궁금해서 유전자 검사해봤는데 여타 한국사람이랑 유전자 비율이 같더라구요 ㅋㅋㅋ특별하게 일본인 유전가 많거나 그렇진 않았던~)
@@우마이우마이-l4t 요호님 유전자가 다른 한국인과 똑같은게 일본인이 한반도에서 건너갔기 때문이 아니고요. 한반도에 살고 있던 고대일본인과 고대한국인이 융합한 결과가 현대의 한국인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우리가 배우는 한국사조차 한반도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한반도 북방의 고조선 부여에서 시작하죠. 그들이 내려와 한반도를 장악해나가는 역사가 바로 삼한과 신라 백제의 역사죠. 고대사입니다. 그럼 한반도의 선주민은 누구일까요? 실제로 고대한국인과 일본의 야요이인의 DNA는 매우 유사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반도에는 야요이인이 살았던 취락이 발견 되고 있고 조몬인 유물이 발견 되고 있습니다. 야요이인 조몬인이 한반도에 살았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입증이 되어 있고. 한국인이 일본인과 유전적으로 비슷한 이유는 한국인 자체가 고대부터 고대일본인과 같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집단을 주도하는 언어가 달랐던 것 뿐이죠. 이를 떠나서도 요호님 일가가 10대 이상 내려오면서 모두 한국인과 결혼했을테니 유전적 특정은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저는 중국 성씨를 쓰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한중일이 멜팅팟 된 지역이 한반도인거죠. 한국어를 공용어로 하는 멜팅팟 된 민족이 한민족인 것이고요. 이렇게 보면 민족이란 무상하죠.
@@明成-h6v 그 도래인이 삼국이들이 아닙니다. 원래 한반도 중부 이남에는 야요이인 조몬인들이 살았고. 신라 백제가 성립하면서 일본으로 밀려났던 거죠. 남은 자들은 신라 백제에 동화 되었고요. 한국인들은 한국사가 한반도 북부에서 시작해서 이남으로 밀고 내려온 역사라는 걸 망각해요. 우리가 한반도에 살았던건 불과 2천년. 완전히 장악한건 1500년도 되지 않습니다.
임금도 피난가는 마당에... 조선에서도 왜에 투항한 사람 많았을 듯... 사실 백제 망하고 살아남은 백제지배층 대부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으로 잘 살았고.. 대한제국 망하고 고종의 후손들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으로 아주 잘 살았다. 왕가후손은 독립운동 한번 한적 없다.
@@백억-o1z 근거: 없음 순왜 숫자를 제시하지도 못함 페미니스트처럼 그냥 "전국 남성 70%가 성매매에 빠져 산다"라고 그냥 한국 비난하려고 멋대로 근거도 없이 추정함 ?? 항왜 여여문의 경우 투항했기 때문에 일본이 인질로 삼던 가족은 연좌제로 처형당했다는데 뭔 개소리야 애초에 영상에서 "왜군은 탈영병을 막기 위해 목책을 쌓고 왜군 장수들 가족을 인질로 삼았다"고 했는데 뭔 개소리야.
고일권 작가의 '칼부림' 이라는 네이버 웹툰이 이 항왜들을 다룬 작품이죠. 여기에 이름이 나온 인물들이 등장하고, 디테일한 고증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 수작 입니다. 네이버 웹툰의 특성상 학생들의 비율이 많고 예전처럼 흑백 작화방식이라 연재당시 높은 순위에 있진 않았지만,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은 기억 해둘만한 작품이죠.
@@ray-c4n 한국을 분열시키려고 안달난 중공 첩자나 할 개소리하네?? 의병 대부분은 공식 관직 받고 관군에 편입되었는데? 근거도 제시 못하고 역사왜곡을 하는 거 보니 쪽발이인가? 애초에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장 대부분이 양반이라 그냥 함부로 죽였을 리가 영상에서 "왜군은 탈영병을 막기 위해 목책 쌓고 왜군 가족을 인질로 삼았다"고 했는데? 항왜 여여문의 경우 투항했더니 일본이 가족을 연좌제로 처형했는데요? 사실 임진왜란 이전에 대마도주가 조공하다가 반란을 1510 삼포왜란이나 1544 사량진왜변을 사주하는 경우도 있어서 신뢰도가 이미 떨어졌네 진압하고 사죄하고 또 왜관을 중심으로 반란을 사주하고 진압되고 사죄하고 반복했죠 여진족과 일본인은 조선에 조공하다가 기회만 되면 배신할 오랑캐란 인식이 형성된 겁니다.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을 자처하면서 온 오우치-타타라 가문이 조선에 조공무역을 해서 돈 잘 벌어 일본 내에서 잘 나갈 1540년대까진 꽤 우호적이었고 조선에서도 다른 일본인들과는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1551년 휘하 스에 하루카타라는 사무라이의 배신으로 멸문되었죠. 몰락 후 방계로 도요타 가문이 있습니다. (오닌의 난 당시 전성기 때에도 난을 끝내지 않으니 다른 일본인들은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놈에게 일본에서 난이 끝나지 않는다!"라고 험담했죠. 수백년 동안 주장한 겁니다. 지금도 大内重弘公の墓 오우치 시게히로공의 묘 옆에 공영탑을 만들어 林聖太子供養塔 임성태자공양탑이라고 써놓았습니다)
@@재현-h8p 어디든 그렇죠 역사적 큰 흐름에 휩쓰리면.. 우리만 해도...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이나,, 거란, 여진으로 끌려간 백성들이나.. 일본 징접병으로 휘말려..소련군 포로가 되거나.. 고려계로..중앙아시라로강제이주당하거나.. 일본군에 의해 끌려갔다.. 남태평양섬에 정착하게된 ..사람들 등등
7:15 항왜 여여문. 그 짧은 시간에 상당한 통찰력이 있었네요. 말이 좋아 신중함이지 무능력 쫄보 근성은 조상탓 해야할듯.. 동시에 한류가 계기가 되어 한국에 온 일본유학생들이나 한국에 와서 일하려고 하는 일본기술자들 잘 대해줘서 우리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도 이런 교훈에서 얻을 수 있겠네요.
그들 후손중 박정희때 내무부장관 지낸 김치열이 있습니다 당시 너무나 빠듯한 국가살림에. 김치열이 녹동서원일대를 아스팔트를 깔아버렸지요 노한 박대통령이 다그쳐 묻자 , 자기고향의 사람들이 학교가려면 그 먼 두메산골길을 걸어 등교하는 것이 너무 사무쳐 그랬다고 해서, 박대통령이 묵묵히 듣고 있다가 용서 해 주었던 일화가 유명합니다
@@dong-t2h 우륵 마을에 포장은 되어 있었는데 노변쪽이 깨져서 교행에 불편 한정도고 우륵 마을 이 속한. 가창면 전체가 그린벨트인데 자기 ㅇ사을 우륵만 해제 시킨장본인입니다 제가 가참면 바로근처 파동에 살아서 잘알아요 님이. 이야기 한것은 미화된 내용이. 맞는것 같습니다 조선천지가 대도시 인근에 비포장포로 가 가당찬 이야긴니까.제가 알기론 도로 포장보다 그린벨트 해제는 전 가창면민이 다아는 사실이고. 저도 그곳에 살앟는데 그것 거짖말입니다 마을의 골목길은 가능하지만 이야기보니 대중교통의 도로는 아닙니다
@@김진욱-v9b 그렇군요 70년대 들은. 이야기로 기억합니다 당시 우록에서 내무부장관이 나온 것은 그 고장에선 대단한 일이었겠지요 나는 대구 살고 우록자전거 코스 자주 이용하지만 현지에 살고 있는 분 말씀이 맞겠지요 박대통령이 화냈던 것도 님의 내용같은 느낌이 들어 화를 냈지 않나 생각 됩니다
항왜인 얘기하는데 꼭.. 이런 거 얘기한 사람의 저의가 의심됨. 어쨌든 보급만의 문제로 이긴 거 아님. 그리고 임진왜란은 오히려 풍신수길이 조선민심 정책 쓰겠다고 도륙과 유린이 극심하질 않았음. 되려 그런 문제는 명이 더 심했지. 원래 일본은 자기 영주들끼리 싸워댔지 잇키는 건들지도 않는 타입들임. 정유재란 때나 풍신수길 빡쳐서 도륙하고 끌려간 거임. 초반에는 풍신수길이 조선에 가서 약탈도 방화도 금지시켰음. 조선이 학문에 더 추앙받는 거 사실인데 무에는 넘나 약해서 이순신장군도 절대로 왜와 안 벌이던 전투가 백병전이었음. 보급품 끊었다해도 주둔지가 대부분 조선 땅이었고, 작위? 준다는 명목으로 각지 주둔한 일본에 쌀 생산량이 없던 것도 아님. 만일 보급품 끊어지고 쌀도 없었음 일본은 다시 회군해야 함. 문제는 조선 내부라고 좋은게 아니니 일본의 이 전략이 먹힌게 아닌가 싶음. 특히 임해 순화.
이 항복한 항왜들이 일반 왜병들보다 더 무서운게 그 험난한 전장터를 마치 제 집 드나들듯 침투해서 싸우기도 하고 적들에게 다가가 공작도 했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들은 제 조국을 등지고 다른 나라로 왔기에 인정 받으려고 더욱 열심히 활동했다는거고. 그러나 오히려 그런 능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전부 토사구팽해버렸고 뭐 이해가 안되는건 아니지만 양쪽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불행한 사람들의 말로임.
@@dudrak7575 노량해전이 다른 이순신의 해전보다 전사자가 많고, 심지어 군관도 3명이나 죽어 피해가 컸던 것은, 멀찍히 떨어져서 화포로 승부를 보던 다른 해전과는 달리, 자기나라로 도망치는 왜군놈들을 한놈이라도 더 잡아 죽여야 하는 섬멸전이기 때문에.. 화포로 다 잡지 못하니..쫓아가서 배로 들이박고, 그 와중에 조선군과 왜군이 섞여 백병전을 벌일일이 많으니, 조선군의 사상자가 상당했죠. 왜군도 다른때와는 달리 저들이 평소처럼 하지않고 죽어라 배를 붙여서까지 덤비니 자기들의 주특기인 칼질을 유감없이 사용하고요. 뭐 명나라 수군사령관 진린도 왜군 칼에 죽을 뻔 했다하니...상당한 난전이었죠.
사실 임진왜란 이전에 대마도주가 조공하다가 반란을 1510 삼포왜란이나 1544 사량진왜변을 사주하는 경우도 있어서 신뢰도가 이미 떨어졌습니다 진압하고 사죄하고 또 왜관을 중심으로 반란을 사주하고 진압되고 사죄하고 반복했죠 여진족과 일본인은 조선에 조공하다가 기회만 되면 배신할 오랑캐란 인식이 형성된 겁니다.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을 자처하면서 온 오우치-타타라 가문이 조선에 조공무역을 해서 돈 잘 벌어 일본 내에서 잘 나갈 1540년대까진 꽤 우호적이었고 조선에서도 다른 일본인들과는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1551년 휘하 스에 하루카타라는 사무라이의 배신으로 멸문되었죠. 몰락 후 방계로 도요타 가문이 있습니다. (오닌의 난 당시 전성기 때에도 난을 끝내지 않으니 다른 일본인들은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놈에게 일본에서 난이 끝나지 않는다!"라고 험담했죠. 수백년 동안 주장한 겁니다. 지금도 大内重弘公の墓 오우치 시게히로공의 묘 옆에 공영탑을 만들어 林聖太子供養塔 임성태자공양탑이라고 써놓았습니다)
사야가는 규슈사람이고 가토 기요마사밑에 있던 부사령관중에 한사람임 사야가가 조선에 귀화한것은 현명한 판단이였음 임진왜란이후 전쟁에 참가했던 사무라이들이 섬으로 유배되거나 처형당하기도 했음 그리고 사야가는 본인이 먼조상들이 한반도에서 이주한 도래인의후손 이라는것을 알고 있었음 그래서 조선한테 어디가모르게 친밀감이 있었음
여여문의 답답한 조선은 아직도 여전한것 같습니다. "계획만 세우고 의논만 하며 실행이 적다. 할수 있는 일은 급히 실시하여 기회를 잃지 말아야 마땅하다." 아침마다 고놈의 쓸데없는 회의좀 하지말고 일을 합시다. 주간계획 월간계획 그만 세우고 그시간에 더 창의적인 무언가를 만들어 냅시다.
선조와 조정대신들만 안썩었다면 그 많은 희생을 치르진 않았겠지요. 사대주의 사상에 찌들어 거들먹 거리며 당파싸움이나 하던 자들이 왜군의 침략에 무슨 생각이 있었겠습니까? 왜군들의 면면을 잘 이해하고 투항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면 일본이 조선의 속국이 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당파싸움? 그럼 말로 하지 않고 일본 전국시대처럼 칼들고 사람 쳐죽여야할까요? 그게 이괄의 난 같은 반란 아닌가 사실 임진왜란 이전에 대마도주가 조공하다가 1510 삼포왜란이나 1544 사량진왜변 같은 반란을 사주하는 경우도 있어서 신뢰도가 이미 떨어졌습니다 진압하고 사죄하고 또 왜관을 중심으로 반란을 사주하고 진압되고 사죄하고 반복했죠 여진족과 일본인은 조선에 조공하다가 기회만 되면 배신할 오랑캐란 인식이 형성된 겁니다.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을 자처하면서 온 오우치-타타라 가문이 조선에 조공무역을 해서 돈 잘 벌어 일본 내에서 잘 나갈 1540년대까진 꽤 우호적이었고 조선에서도 다른 일본인들과는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1551년 휘하 스에 하루카타라는 사무라이의 배신으로 멸문되었죠. 몰락 후 방계로 도요타 가문이 있습니다. (오닌의 난 당시 전성기 때에도 난을 끝내지 않으니 다른 일본인들은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놈에게 일본에서 난이 끝나지 않는다!"라고 험담했죠. 수백년 동안 주장한 겁니다. 지금도 大内重弘公の墓 오우치 시게히로공의 묘 옆에 공영탑을 만들어 林聖太子供養塔 임성태자공양탑이라고 써놓았습니다)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사무라이와 자국민을 백만명이나 해외에 성노예로 수출해서 (1500년대 조총사려고+1800년대 가라유키상 팔아 일본 개발자금 벌려고) 돈 번 일본이야말로 한심하죠 부국강병은 말이죠, 불평도 못할 만큼 백성을 쥐어짜야 되는 겁니다. 백성들이 피곤해요. 중국 한나라 때 흉노를 북벌한다고 50만 대군 끌어모아 싸우고 난 뒤 경제 파탄나고 각종 환난으로 3000만명 인구가 1500만명으로 줄어들었어요. 다 죽은 건 아니겠지만 도망가서 도적이 된 유민들이 많았다는 말. 후지와라 세이카가 강항에게 "지금 일본 꼴이 말이 아닙니다. 백성들에게 세금지옥으로부터 구해준다고 하면서 조선과 명이 일본을 벌하러 온다면, 시라가와 검문소(일본 동북쪽)까지 진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죠. 선조도 전쟁 준비해야한다고 백성들이 힘들어한다는 신료들 반대를 무시하고 강행했습니다. 단지 2만명 정도 올줄 알고 대비한 건데 15만명이나 올 줄은 아무도 예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번 항왜 뿐만 아니라 모든 뛰어난 능력을 가진자들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발전시키지 못하고 항상 처단하거나 숙청시킨일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것이 우리민족이 가진 대표적 민족성인 시기나 질투입니다 오죽하면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아프다는 속담이 있겟습니까 그것은 현시대까지 이어져서 어떤일을 해도 비난이 있고 남이 질되면 까내리지못해 안달을 하는 민족성이 잘드러나지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또한 아무리 잘해도 만족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또한 발전을 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요
@@user-dj9go6mr8d 예를 희한하게 드시는데 돈벌려고 일부러 죽는게 아니라 죽음을 무릎쓰면서 까지 돈을 벌려고 전쟁터에 나가는 겁니다... 과거에는 변변한 직업이랄게 없으니 영주밑에서 꼬박꼬박 월급 타먹으면서 생존하는것도 하나의 살아가는 방법이었어요 전장에 나가는건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하나의 세력에 속함으로서 생활안정을 보장받는 면도 있었습니다. 그냥 소작만해가지고는 실컷 농사지어봐야 세금으로 따뜯기고 약탈,강도에 노출되고 하기 때문에 살아가기 상당히 빡빡했어요
전국시대 때 영주 밑에서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사무라이와 자국민을 백만명이나 해외에 성노예로 수출해서 (1500년대 조총사려고+1800년대 가라유키상 팔아 일본 개발자금 벌려고) 돈 번 일본이야말로 한심 영상에서 "왜군은 탈영병을 막기 위해 목책 쌓고 왜군 가족을 인질로 삼았다"고 했는데? 항왜 여여문의 경우 투항했더니 일본이 가족을 연좌제로 처형했는데 못봤나요? 사실 임진왜란 이전에 대마도주가 조공하다가 1510 삼포왜란이나 1544 사량진왜변 같은 왜관의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반란을 사주하는 경우도 있어서 신뢰도가 이미 떨어졌습니다 진압하고 사죄하고 또 왜관을 중심으로 반란을 사주하고 진압되고 사죄하고 반복했죠 여진족과 일본인은 조선에 조공하다가 기회만 되면 배신할 오랑캐란 인식이 형성된 겁니다.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을 자처하면서 온 오우치-타타라 가문이 조선에 조공무역을 해서 돈 잘 벌어 일본 내에서 잘 나갈 1540년대까진 꽤 우호적이었고 조선에서도 다른 일본인들과는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1551년 휘하 스에 하루카타라는 사무라이의 배신으로 멸문되었죠. 몰락 후 방계로 도요타 가문이 있습니다. (오닌의 난 당시 전성기 때에도 난을 끝내지 않으니 다른 일본인들은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놈에게 일본에서 난이 끝나지 않는다!"라고 험담했죠. 수백년 동안 주장한 겁니다. 지금도 大内重弘公の墓 오우치 시게히로공의 묘 옆에 공영탑을 만들어 林聖太子供養塔 임성태자공양탑이라고 써놓았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도 아케치의 배신때문에 죽었잖아요? 부국강병은 말이죠, 불평도 못할 만큼 백성을 쥐어짜야 되는 겁니다. 백성들이 피곤해요. 중국 한나라 때 흉노를 북벌한다고 50만 대군 끌어모아 싸우고 난 뒤 경제 파탄나고 각종 환난으로 3000만명 인구가 1500만명으로 줄어들었어요. 다 죽은 건 아니겠지만 도망가서 도적이 된 유민들이 많았다는 말. 후지와라 세이카가 강항에게 "지금 일본 꼴이 말이 아닙니다. 백성들에게 세금지옥으로부터 구해준다고 하면서 조선과 명이 일본을 벌하러 온다면, 시라가와 검문소(일본 동북쪽)까지 진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죠. 선조도 전쟁 준비해야한다고 백성들이 힘들어한다는 신료들 반대를 무시하고 강행했습니다. 단지 2만명 정도 올줄 알고 대비한 건데 15만명이나 올 줄은 아무도 예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좋은 동영상 자료 잘 봤습니다 헌데 조심할 것은 국가관 민족주의 부족주의 개념이 명확히 정립됨이 없이 혼용되어 이해될 수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종국적 승리는 물론 카리스마적 영웅(권율 이순신 등)을 포함하여 한 국가 나 민족에 소속된 개개인(지휘관 장수 의병 민초 등)으로 구성된 집단(우월한 정신 문명.문화)적 힘(그게 민족주의든 사무라이정신이든)의 승리가 누가 더 크고 위대하냐에 있다고 개인적으로 봅니다. 전투력(전국시대 살인기술)보다는 명분없고 의롭지 못한 것에 굴하지 않으려고 존버하며 멸하고자(노량) 정신 승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잘 싸우면 잘 데리고 있으면서 써먹을 생각을 해야지 죽이려부터 한 것을 보면 진짜 옹졸한 겁쟁이들이었다는 걸 알 수 있음. 진짜 대장부였으면 언제든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살려서 부렸을 것임..참 이런 내용 들으면 학문적으로나 문화적으로는 존경가는데 옹졸함은 어찌 형용할 수 없는 (예를 들어 저는 길가다 뱀을 보면 때려죽이려 하지만 진짜 용감한 사람은 그냥 동물 중 하나로만 보며 그냥 살려서 보냄)
보통 일본의 군사력이 임진왜란 이전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통해 길러진 것이란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고려말이나 조선초의 기록을 보면 이미 그 때 기록에도 검술은 일본이 최고라고 하는 기록들이 꽤 있어요. 저 나라의 문화 자체가 건들면 죽여버린다는 조폭적인 마인드가 굉장히 강한데, 이게 임진왜란 100년전부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전부터 오래된 풍속이란 생각이 듭니다.
조선이 참 답답해요, ㅠㅠ 어디 지역, 지방에서 특출나고 비범한 재주의 아이가 나면, 곧 역적될 놈이라 싹수부터 죽이고(아기장수 설화), 전장에서 큰 무공을 세운 장수도 나중에 누명 받아 죽었는데. 임란 때 항왜들 참수시킨 건 정말 슬프네요 ㅠㅠ 물론 그들 중에 흉폭한 자들도 있었겠지만, 조정에선 이들이 만일 향후 왜와 내통하면 큰일날 거라는 이유를 댔을 것 같은데... 역사란 참....
아기 장수 설화는 설화인데 뭔 개소리죠? 설화 갖고 역사비판 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진짜 국민이 가축화된 나라에서는 저런 이야기도 나올 수 없어요. 일본의 성폭력 통계가 사실 제3세계 아프리카 국가처럼 '낮은' 이유와 같음. 전국시대 때 영주 밑에서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사무라이와 자국민을 백만명이나 해외에 성노예로 수출해서 (1500년대 조총사려고+1800년대 가라유키상 팔아 일본 개발자금 벌려고) 돈 번 일본이야말로 한심 후지와라 세이카가 강항에게 "지금 일본 꼴이 말이 아닙니다. 백성들에게 세금지옥으로부터 구해준다고 하면서 조선과 명이 일본을 벌하러 온다면, 시라가와 검문소(일본 동북쪽)까지 진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죠. 사실 임진왜란 이전에 대마도주가 조공하다가 1510 삼포왜란이나 1544 사량진왜변 같은 왜관의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반란을 사주하는 경우도 있어서 신뢰도가 이미 떨어졌습니다 진압하고 사죄하고 또 왜관을 중심으로 반란을 사주하고 진압되고 사죄하고 반복했죠 여진족과 일본인은 조선에 조공하다가 기회만 되면 배신할 오랑캐란 인식이 형성된 겁니다.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을 자처하면서 온 오우치-타타라 가문이 조선에 조공무역을 해서 돈 잘 벌어 일본 내에서 잘 나갈 1540년대까진 꽤 우호적이었고 조선에서도 다른 일본인들과는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1551년 휘하 스에 하루카타라는 사무라이의 배신으로 멸문되었죠. 몰락 후 방계로 도요타 가문이 있습니다. (오닌의 난 당시 전성기 때에도 난을 끝내지 않으니 다른 일본인들은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놈에게 일본에서 난이 끝나지 않는다!"라고 험담했죠. 수백년 동안 주장한 겁니다. 지금도 大内重弘公の墓 오우치 시게히로공의 묘 옆에 공영탑을 만들어 林聖太子供養塔 임성태자공양탑이라고 써놓았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도 아케치의 배신때문에 죽었잖아요? 부국강병은 말이죠, 불평도 못할 만큼 백성을 쥐어짜야 되는 겁니다. 백성들이 피곤해요. 중국 한나라 때 흉노를 북벌한다고 50만 대군 끌어모아 싸우고 난 뒤 경제 파탄나고 각종 환난으로 3000만명 인구가 1500만명으로 줄어들었어요. 다 죽은 건 아니겠지만 도망가서 도적이 된 유민들이 많았다는 말. 선조도 전쟁 준비해야한다고 백성들이 힘들어한다는 신료들 반대를 무시하고 강행했습니다. 단지 2만명 정도 올줄 알고 대비한 건데 15만명이나 올 줄은 아무도 예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님이 강도짓으로 큰 나라들을 선망하면 조폭들이 님 집 털고 그 재산으로 가게 차리면 님 자식들이 칭찬해줘야겠네요
@@stardemjason6176 아기 장수 설화는 설화인데 뭔 개소리죠? 설화 갖고 역사비판 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진짜 국민이 가축화된 나라에서는 저런 이야기도 나올 수 없어요. 일본의 성폭력 통계가 사실 제3세계 아프리카 국가처럼 '낮은' 이유와 같음. 전국시대 때 영주 밑에서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사무라이와 자국민을 백만명이나 해외에 성노예로 수출해서 (1500년대 조총사려고+1800년대 가라유키상 팔아 일본 개발자금 벌려고) 돈 번 일본이야말로 한심 후지와라 세이카가 강항에게 "지금 일본 꼴이 말이 아닙니다. 백성들에게 세금지옥으로부터 구해준다고 하면서 조선과 명이 일본을 벌하러 온다면, 시라가와 검문소(일본 동북쪽)까지 진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죠. 사실 임진왜란 이전에 대마도주가 조공하다가 1510 삼포왜란이나 1544 사량진왜변 같은 왜관의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반란을 사주하는 경우도 있어서 신뢰도가 이미 떨어졌습니다 진압하고 사죄하고 또 왜관을 중심으로 반란을 사주하고 진압되고 사죄하고 반복했죠 여진족과 일본인은 조선에 조공하다가 기회만 되면 배신할 오랑캐란 인식이 형성된 겁니다.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을 자처하면서 온 오우치-타타라 가문이 조선에 조공무역을 해서 돈 잘 벌어 일본 내에서 잘 나갈 1540년대까진 꽤 우호적이었고 조선에서도 다른 일본인들과는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1551년 휘하 스에 하루카타라는 사무라이의 배신으로 멸문되었죠. 몰락 후 방계로 도요타 가문이 있습니다. (오닌의 난 당시 전성기 때에도 난을 끝내지 않으니 다른 일본인들은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놈에게 일본에서 난이 끝나지 않는다!"라고 험담했죠. 수백년 동안 주장한 겁니다. 지금도 大内重弘公の墓 오우치 시게히로공의 묘 옆에 공영탑을 만들어 林聖太子供養塔 임성태자공양탑이라고 써놓았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도 아케치의 배신때문에 죽었잖아요? 부국강병은 말이죠, 불평도 못할 만큼 백성을 쥐어짜야 되는 겁니다. 백성들이 피곤해요. 중국 한나라 때 흉노를 북벌한다고 50만 대군 끌어모아 싸우고 난 뒤 경제 파탄나고 각종 환난으로 3000만명 인구가 1500만명으로 줄어들었어요. 다 죽은 건 아니겠지만 도망가서 도적이 된 유민들이 많았다는 말. 선조도 전쟁 준비해야한다고 백성들이 힘들어한다는 신료들 반대를 무시하고 강행했습니다. 단지 2만명 정도 올줄 알고 대비한 건데 15만명이나 올 줄은 아무도 예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님이 강도짓으로 큰 나라들을 선망하면 조폭들이 님 집 털고 그 재산으로 가게 차리면 님 자식들이 칭찬해줘야겠네요
@@stardemjason6176 일본의 18세기 화한삼재도회 7권에 일본의 노비라고 (노복奴僕) 그림까지 딱 그려져서 나오는데 뭔소리야 조선통신사 그림에서 바지도 안입고 나오는 일본 가마꾼들/노잡이들 전부 일본의 노비지. 성종 때 임복처럼 8000석의 곡식을 가진 부자 사노비는 일본에서는 꿈도 못 꿔 일본은 개발자금과 신식무기를 사서 서로 죽이려고 자국 여성을 해외에 성노예로 수출함: 1500년대에 50만명 판 것도 그렇고 1800년대 메이지 45년간에도 50만명을 '가라유키상'으로 팔고, 1만엔권 지폐에 모셔놓은 후쿠자와 유키치도 생전에 '일본 개발 자금 벌기 위해서는 일본 여성 판매를 중단하면 안됨'이라고 함. 그렇게 팔려 죽은 여자들은 싱가포르에 '일본인의 묘지'까지 따로 만듬. 자국민 노예로 부린 건 모든 나라인데? 그리고 일본에선 자유민조차, 사유재산有+군역면제(시대차이 있음)+세금면제(종류차이 있음)+관직가능+100%재산상속가능이라서 사실상 그냥 2등국민이라 말만 노비인 조선의 노비보다 훨씬 못했다. 자유민 중 세금 회피하려고 自賣하는 사람도 꽤 있었고 이땐 명망 있는 주인을 골라서 감. 19세기까지 각국의 유럽의 농노는 땅에 귀속되어 있어서, 그 땅에서 도망가면 일본의 기리시테고멘 법처럼 그냥 재판회부 없이 그자리에서 죽여도 됨. 반면 조선에서는 주인이 노비 살해하면 살인죄가 적용됨. 그리고 유럽의 농노는 여자가 타지로 시집가면 주인인 영주에게 노동력을 더 이상 제공 못하니까 몸값 선불해주고 가야했음. 16세기 일본 서적 규슈어동좌기에서 일본인들이 이웃끼리 서로 외국인에게 노예로 팔아넘긴다고 한탄했는데? 이런 자료 일본 사이트에서도 잔뜩 나옴. 1500년대 전국시대에 50만명중 30만명은 규슈에서 팔림. 여기서 볼 수 있듯 서양 상선 입장에선 해류와 지리적 위치상 난파당하거나 발견하기 쉬운 자리가 규슈임. 조선은 더 안쪽에 있고 해류가 극악이라 접근이 늦었던 거. 송나라 때 허한 소식 등의 중국 관료들이 고려에서 쓸모 없는 물건 들고 조공할때마다 사신들 접대한다고 중국의 백성들이 노비로 팔린다 불평하는데? - 중국 관리들이 고려 사신을 위해 중국 수도 개봉까지 직통 운하도 파주는 건 너무하다고 간언하자 재상이 빡쳐 파직시키고 高麗入貢,調民開運河,民間騷然。中書舍人孫傅論高麗於國無功,不宜興大役,傅坐罷。翰謂傅不當黜,時相怒,落職,提舉江州太平觀 - 처마지붕이 벽을 넘어가는 휘황찬란한 '고려정' 만든다고 숲은 허허벌판이 되고 사람들이 노역에 동원 되면서 농사 못짓게 되자 집이 망해 노비로 팔려나가고 《元豐七年有詔京東淮南築高麗亭館密海二州騷然有逃亡者明年軾過之嘆其壯麗留一絕雲》 檐楹飛舞垣牆外,桑柘蕭條斤斧余。盡賜昆耶作奴婢,不知償得此人無。 그럼 중국에 노비는 없었단 말이냐? 중국 옛날에는 한국에도 없던 노시 (奴市)라고 노예시장도 있었는데? 영국령의 인도는 19세기에나 20세기에나 수백만명씩 굶어 죽었지. 그런데 얘네는 법적으로 "자유인"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떼죽음당하는데 그게 뭔 소용이지? 예니체리는 오스만 제국의 노예였다. 그런데 환관처럼 국정을 장악함. 영국의 런던에서는 1900년에 찍힌 사진 보면 자유민들이 하루 일당 50% 써서 Two penny hangover라는, 벽과 기둥 사이에 밧줄 하나 걸어놓고 여러명이 다닥다닥 붙어 기대면서 새우잠 자는 사진 있다. 좁은 관짝에서 두발 뻗고 잘 수 있는 호사를 누리려면 4펜스 내야함. 그럼 대영제국의 돈은 어디로 흘러갔냐고? 어디긴 어디야 제국의 식민지 늘리려고 끝없는 전쟁을 지속하는 데 쓰였지. 그 극히 일부만 조금 본국 하층민에게 흘러가고 대부분은 상류층이 먹었지. 남의 나라 전체를 식민지라는 "노예화" 시켜 험한 일 아웃소싱 다하니까, 본국에는 노예제가 필요없게 되어 일찍 폐지한 거지. 본국 하층민 밑에 외국에 최하층민 만든 게 좋은 건가? 일본에서는 자유민조차 마비키한지가 수백년인데? 60~80% 세율로 입하나 덜자고 엄마들이 자기 아기를 죽이는 게 당연시되었지. Fabian Drexler 作 마비키 찾아봐 에도시대의 번영은 마치 북한의 평양이 번영했다고 포장하는 꼴. 평양이야 50년전보다 발전했지, 타 지역을 희생시키서. 에도시대는 각지 영주들이 다시는 사병 모집해서 전국시대 못하게 수도에 돈을 집중하는 정책을 편 것 뿐. 다테 마사무네와 우에스기 겐신은 전국시대 투탑 노예상이었지. 한명당 20, 30문씩 팔았지 이거 때문에 선교사 따라 개종해서 로마 갔다와본 덴쇼 소년 사절단 때, 일본 소년들이 동남아, 인도, 동아프리카, 서아프리카, 포르투갈, 등 배가 정박하는 곳마다 일본인 노예가 보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건 중개 차익을 노린 포르투갈 노예상보다는 가축보다 싸게 판 일본인들의 잘못"이라고 함 중국을 갖고 논 환관들은 법적으로 노비였지. 황제의 노비. 마찬가지로 내시들도 조선 왕의 노비인데 종2품까지 관직 해먹을 수 있었는데? 정창수 김만덕 같은 노비들 봐라. 김만덕은 대기업 여자 회장이고, 정창수는 명문대 입시 1타강사. 원래 높으신 분의 노비가 되면 일반인들보다 실질적 지위가 높음. 말만 노비지 그냥 2등국민이잖아 사유재산 소지가능해서 그걸로 관직까지 산 사례도 있는데? (19세기 영국 동인도회사가 과거제도 따라 임용시험 도입하고 영국 정부도 따라하기 전까지는 유럽에선 매관매직이 정상이었음)
이성계집안은 여진족 출신이 아닙니다 잘못아셨네요. 이성계 고조부가 사고를 쳐서 그 집안일족이 함경도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았고, 당시 그지역은 원나라소속이었을 뿐입니다 함경도일대에 노비나 가솔들이 다 옮겨 갔는데 그 가솔과 노비들의 집단이 가별초였고 이성계집안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이 있을정도 였습니다 다만 이성계가 여진족 출신인 이지란과 의형제사이를 맺었다 정도입니다
조선 환도가 짧았던건 여진족 기마병들과 근접해서 싸울때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왜그런지 모르겠는데 북쪽전선에선 일본처럼 긴 창을 안썼습니다. 활 특히 편전과 화기의 위력이 워낙 좋아서 치고 빠지는 여진족들 상대하기 충분했던겁니다. 근데 왜군이 조총이 생기자 조선궁시의 위력이 상쇄되니 그동안 상대할 필요가 없었던 일본의 다치(타도:일본도) 나기나타(치도:자루 긴 칼) 가마야리(겸창:직선날에 가지달린 장창)의 위력앞에 크게 당했습니다.
활쏘기가 원거리 공격에 유리하지만 헐리우드 영화나 중국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탄막형성 공격이 아닌 조준사임. 조선 각궁은 바로 눈앞의 적부터 유효사거리 150m까지 다양한 타격거리를 가짐. 쉽게 말해 반지의 제왕의 활이 주무기인 엘프족이 조선군 스탈에 가까움. 레골라스 생각하면 됨.
이괄의 난때 항왜 2백여명이 선두에 섰는데 대부분 중년 노년이었을 그들이 워낙 창칼 싸움의 명수들이라 아무리 젊은 조선병사들이 삼수병 체제로 근접전투 훈련을 받았어도 전투현장에서 맞붙으니 도저히 상대가 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임란 이후 검술을 훈련시킨 조선 병사들을 항왜들에게 보여주자 애들 장난 같다고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아무튼 김충선 같은 경우 말고는 굉장히 위협적인 자들이 될것이라 생각한 조선 측에서 지레 겁먹고 탄압한 것으로 보는게 타당합니다.
저는 일본 장수 사야가 후손입니다 선조가 명한 이름이라 사해 김씨라 후손은 몇천명 안되내요..김충선 입니다 저의 조상님 존경을 안해줘도 평화를 사랑했던 저의 조상님을 욕만 안했어면 ..
10여년 전 다큐멘터리로 처음 접하고 기억하고 있던 이름입니다. 험난한 역사 속 한 저마다의 선택 중에서도 참 쉽지 않은 결정을 한 분으로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뿌리로 생각하고 자부심을 가지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한 나라를 국난에서 구하고 옳은 일을 하신 분께 욕 이라뇨...당치도 않습니다. 사야가 김충선은 영웅입니다.
오!
김해 김씨를 하사받았는 줄 아는데,
사해 김씨군요.
감사합니다~~~~
조선을 위해 일한 선조이십니다.
항왜 중 유명한 두 사람이 있다.
1.준사.
명량 대첩 당시 이순신 장군의 상선에 탑승 중 죽어 물에 떠다니던 구루지마를 발견하여 건져내어 승기를 확정짓는 역할을 했다.
2.사야가
침탈 즉시 항복하여 수 많은 공을 세움.
선조로부터 김해김씨 충선 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특히 조총 기술을 전하는 등 후대까지 활약!
김충선은 청나라 침공때도 활약 했던걸로 알고 있습니다.. 찐 충신
김해김씨가아니라 사해김씨래요!
3.시미켄
치사하게 유튜브가 수익인증을 안내주자 바다건너 멀리 이웃나라로 망명와서 자신이 가진 우수한 기술과 지식을 전파하며 현지 남성들의 영웅이 되었다.
여여문
@@ykk7482 정확히는 사성 김해김씨 입니다~ 김해김씨 성을 하사받았으나 기존의 김해김씨와 구분하기위해 사성 김해김씨로 부릅니다 ㅎㅎ
저도 사야가 후손 입니다 보통은 사성 김해김씨라고 하는데 저희는 본관을 물어보면 보통 우록김씨라고 합니다. (집성촌이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참고로 조상님이 병자호란까지 살아계셔셔 활약을 하셨습니다.
(정말 궁금해서 유전자 검사해봤는데 여타 한국사람이랑 유전자 비율이 같더라구요 ㅋㅋㅋ특별하게 일본인 유전가 많거나 그렇진 않았던~)
원래 일본인 자체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유전자가 상당히 많죠
@@우마이우마이-l4t 요호님 유전자가 다른 한국인과 똑같은게 일본인이 한반도에서 건너갔기 때문이 아니고요. 한반도에 살고 있던 고대일본인과 고대한국인이 융합한 결과가 현대의 한국인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우리가 배우는 한국사조차 한반도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한반도 북방의 고조선 부여에서 시작하죠. 그들이 내려와 한반도를 장악해나가는 역사가 바로 삼한과 신라 백제의 역사죠. 고대사입니다. 그럼 한반도의 선주민은 누구일까요?
실제로 고대한국인과 일본의 야요이인의 DNA는 매우 유사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반도에는 야요이인이 살았던 취락이 발견 되고 있고 조몬인 유물이 발견 되고 있습니다. 야요이인 조몬인이 한반도에 살았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입증이 되어 있고. 한국인이 일본인과 유전적으로 비슷한 이유는 한국인 자체가 고대부터 고대일본인과 같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집단을 주도하는 언어가 달랐던 것 뿐이죠.
이를 떠나서도 요호님 일가가 10대 이상 내려오면서 모두 한국인과 결혼했을테니 유전적 특정은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저는 중국 성씨를 쓰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한중일이 멜팅팟 된 지역이 한반도인거죠. 한국어를 공용어로 하는 멜팅팟 된 민족이 한민족인 것이고요. 이렇게 보면 민족이란 무상하죠.
대부분 삼국시대 때 건너간 도래인이 일본의 조상이라던데요~
@@明成-h6v 그 도래인이 삼국이들이 아닙니다. 원래 한반도 중부 이남에는 야요이인 조몬인들이 살았고. 신라 백제가 성립하면서 일본으로 밀려났던 거죠. 남은 자들은 신라 백제에 동화 되었고요. 한국인들은 한국사가 한반도 북부에서 시작해서 이남으로 밀고 내려온 역사라는 걸 망각해요. 우리가 한반도에 살았던건 불과 2천년. 완전히 장악한건 1500년도 되지 않습니다.
유전학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동족입니다.
고대 가야, 백제의 유민이 많이 건너갔고요 신라와 고구려의 유민도 많이 건너갔어요~^^
사야가 후손이 많이 보이네요 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릴때는 어린 마음에 내 조상이 일본사람이라는거에 엄청난 부끄러움을 느꼈었는데 지금은 한국을 위해 싸우셨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 김충선 장군 다들 인정하는데 왜 그런생각 했어요?
@@user-yamaejisik 어렸을때 반일세뇌교육을 받아서 일본인은 무조건 나쁜놈 이라고 생각한듯
김충선 장군은 임진왜란뿐 아니라 이괄의 난, 병자호란에서 전부 활약한 당대 조선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이었습니다
제정신인 한국인 이라면 김충선 선생님께 감사해야지요 자부심 가지셔도 됩니다. 저희 집안 조상님은 그때 빤스런 하는 선조 옆에 있었다고 대접받았는데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불의가 아닌 정의를 위해 싸우신 당신의 시조 조상님을 존경합니다
임란 때만 1만명이 투항했다면 상당한 숫자입니다. 조선 성씨를 하사받은 몇몇 유명한 분들 외에는 다들 우리 민족으로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겠네요.
임금도 피난가는 마당에... 조선에서도 왜에 투항한 사람 많았을 듯...
사실 백제 망하고 살아남은 백제지배층 대부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으로 잘 살았고..
대한제국 망하고 고종의 후손들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으로 아주 잘 살았다.
왕가후손은 독립운동 한번 한적 없다.
순왜도 수만명
진짜 놀라운 일을 알게됏네요...옛날 김충선이란 장수 들은 적이 있다만 이토록 임진왜란때 조선을 위해 싸우셧다니 감동...
@@young3228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도공들은 막상 대우를 잘해주자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을려고 했다고 하더군요 ㅋㅋㅋ
@@백억-o1z 근거: 없음
순왜 숫자를 제시하지도 못함
페미니스트처럼 그냥 "전국 남성 70%가 성매매에 빠져 산다"라고 그냥 한국 비난하려고 멋대로 근거도 없이 추정함
?? 항왜 여여문의 경우 투항했기 때문에 일본이 인질로 삼던 가족은 연좌제로 처형당했다는데 뭔 개소리야
애초에 영상에서 "왜군은 탈영병을 막기 위해 목책을 쌓고 왜군 장수들 가족을 인질로 삼았다"고 했는데 뭔 개소리야.
비록 적이었지만 투항한 이후엔
조선군의 든든한 한축이 되었네요
그 수가 일만에 달한다니 지금 대한민국에
상당수의 항왜 후손들이 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이괄의 난때 거의 죽어버려서 후손은 별로 없을겁니다…
생각보다 후손이 많이 남은편은 아니라고 하네요. 본인이 항왜의 후손인지도 모르는 사람도 많고요
양쪽 진영에서 뼈속까지 부려먹히다 숙청당하거나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다니
어디서도 알려주지 않은 역사적사실을 알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항상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어딘가 빠진 부분이 있는데 이렇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니 늘 감사합니다.
입시위주+민족사관이 들어간 교육이라 허점이 많을수밖에요
어느나라나 다 그럼 특히 일본은 제대로된 역사서도 없어서 끼워 맞추기 형식인데.. 뭐.ㅋㅋ
@@김수인-b3o 세계적으로 일본의 역사고증을 더 알아줍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Hoi_88 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댓글을 지금 봤네 ㅋㅋㅋㅋㅋㅋㅋ 어이가 없네 ㅋㅋㅋㅋㅋㅋ 정사로 취급받던 속일본기도 논란이 있는데 뭔 ㅋㅋㅋㅋㅋ
고일권 작가의 '칼부림' 이라는 네이버 웹툰이 이 항왜들을 다룬 작품이죠.
여기에 이름이 나온 인물들이 등장하고, 디테일한 고증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 수작 입니다.
네이버 웹툰의 특성상 학생들의 비율이 많고 예전처럼 흑백 작화방식이라 연재당시 높은 순위에 있진 않았지만,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은 기억 해둘만한 작품이죠.
명작
개씹씹명작 두번 봐라
맞아요...서아지...그 캐릭터가 대표적이죠
추천 감사합니다 메모하고 꼭 보려구요
고효내 서아지 사쇄문.. "무사답게 갔소"
"나는?" "무사 다웠소" "고맙네 조카.."
항왜만 숙청한게 아니라 대부분의 의병장들을 숙청했습니다...
왜병이라 죽인게 아니었던것...
이순신한테도 고따구로 했으니 말 다했지 ㅋㅋㅋㅋ
뭔소리지 선조가 죽인 의병장은 아무것도 안한 두명뿐이고
왜란이후 정국잡은게 의병장 많았던 북인인데?
걍 선조가 핵등신
@@ray-c4n 한국을 분열시키려고 안달난 중공 첩자나 할 개소리하네?? 의병 대부분은 공식 관직 받고 관군에 편입되었는데? 근거도 제시 못하고 역사왜곡을 하는 거 보니 쪽발이인가? 애초에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장 대부분이 양반이라 그냥 함부로 죽였을 리가
영상에서 "왜군은 탈영병을 막기 위해 목책 쌓고 왜군 가족을 인질로 삼았다"고 했는데? 항왜 여여문의 경우 투항했더니 일본이 가족을 연좌제로 처형했는데요?
사실 임진왜란 이전에 대마도주가 조공하다가 반란을 1510 삼포왜란이나 1544 사량진왜변을 사주하는 경우도 있어서 신뢰도가 이미 떨어졌네
진압하고 사죄하고 또 왜관을 중심으로 반란을 사주하고 진압되고 사죄하고 반복했죠
여진족과 일본인은 조선에 조공하다가 기회만 되면 배신할 오랑캐란 인식이 형성된 겁니다.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을 자처하면서 온 오우치-타타라 가문이 조선에 조공무역을 해서 돈 잘 벌어 일본 내에서 잘 나갈 1540년대까진 꽤 우호적이었고 조선에서도 다른 일본인들과는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1551년 휘하 스에 하루카타라는 사무라이의 배신으로 멸문되었죠. 몰락 후 방계로 도요타 가문이 있습니다. (오닌의 난 당시 전성기 때에도 난을 끝내지 않으니 다른 일본인들은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놈에게 일본에서 난이 끝나지 않는다!"라고 험담했죠. 수백년 동안 주장한 겁니다. 지금도 大内重弘公の墓 오우치 시게히로공의 묘 옆에 공영탑을 만들어 林聖太子供養塔 임성태자공양탑이라고 써놓았습니다)
김덕령 의병장도 역모혐의로고문해서 죽이고..
선조는 부관참시해야한다
항왜들을 보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아픔이 느껴지네요
왜에서도 조선에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불운한 사람들이죠. 왜를 등지고 조선으로 왔으나 조선에서까지 찬밥신세로... 그걸 알았다면 항왜자가 되었을지 의문입니다.
그렇죵.. 크윽~~~ 그래도용.. 우리들은용.. 바로 일본이라면 치가 떨린다라고 말씀을 하신 우리들의 할머니들 때문에용... 사람 미치게 만들었는데용... 크으윽~~~~ 헐~~.. 쩝~~ 흠~~~ 음~~~~~~~♥♥♥♥♥.. 그래서리.. 전 지금은용.. 일본이라면 치가 떨립니다... 그래서리..... 전 전혀들 안 좋아하고들 있답니다... 쩝~~ 헐~~~ 그래서리.. 저는요... 지금은요.. 비롯 하는 일도 없이들
조선 백성도 마찬가지였죠.
@@재현-h8p 어디든 그렇죠 역사적 큰 흐름에 휩쓰리면.. 우리만 해도...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이나,, 거란, 여진으로 끌려간 백성들이나.. 일본 징접병으로 휘말려..소련군 포로가 되거나.. 고려계로..중앙아시라로강제이주당하거나.. 일본군에 의해 끌려갔다.. 남태평양섬에 정착하게된 ..사람들 등등
지금의 재일교포의 심정과 비슷할까요?
어디에속하지못한 이방인같은 느낌...
일러스트가 너무 멋있어요
ㅇㅈ
어떻게 보면 일본인 스스로도 잘 모르는 전국시대 일본 무사들의 진면목을 외부 세계의 시점인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으로 더욱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7:15 항왜 여여문. 그 짧은 시간에 상당한 통찰력이 있었네요. 말이 좋아 신중함이지 무능력 쫄보 근성은 조상탓 해야할듯..
동시에 한류가 계기가 되어 한국에 온 일본유학생들이나 한국에 와서 일하려고 하는 일본기술자들 잘 대해줘서 우리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도 이런 교훈에서 얻을 수 있겠네요.
매번!! 기달려지는 영상 너무나도. 잘보고 있어요?? 너무나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저가 해달라는걸 해주실거라곤 생각못했었는데 기록이 워낙 짧아서 힘들줄 알았는데(군대가기전에 이렇게 영상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야가는. 우리 대구달성군에 있는마을이 있ㅈ습니다.저도 몇번갔는데 몆년전 도로포장보수 할때도 조총이 나오곤 했습니디ㅡ
항왜들이 참불쌍하네요 여기도저기도 인정받지 못샜으니
그들 후손중 박정희때 내무부장관 지낸 김치열이 있습니다
당시 너무나 빠듯한 국가살림에. 김치열이 녹동서원일대를 아스팔트를 깔아버렸지요
노한 박대통령이 다그쳐 묻자 ,
자기고향의 사람들이 학교가려면 그 먼 두메산골길을 걸어 등교하는 것이 너무 사무쳐 그랬다고 해서,
박대통령이 묵묵히 듣고 있다가 용서 해 주었던 일화가 유명합니다
@@dong-t2h 우륵 마을에 포장은 되어 있었는데 노변쪽이 깨져서 교행에 불편 한정도고 우륵 마을 이 속한. 가창면 전체가 그린벨트인데 자기 ㅇ사을 우륵만 해제 시킨장본인입니다
제가 가참면 바로근처 파동에 살아서 잘알아요 님이. 이야기 한것은 미화된 내용이. 맞는것 같습니다 조선천지가 대도시 인근에 비포장포로 가 가당찬 이야긴니까.제가 알기론 도로 포장보다 그린벨트 해제는 전 가창면민이 다아는 사실이고. 저도 그곳에 살앟는데 그것 거짖말입니다 마을의 골목길은 가능하지만 이야기보니 대중교통의 도로는 아닙니다
@@김진욱-v9b 그렇군요 70년대 들은. 이야기로 기억합니다
당시 우록에서 내무부장관이 나온 것은 그 고장에선 대단한 일이었겠지요
나는 대구 살고 우록자전거 코스 자주 이용하지만 현지에 살고 있는 분 말씀이 맞겠지요
박대통령이 화냈던 것도 님의 내용같은 느낌이 들어 화를 냈지 않나 생각 됩니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조선사회에 더 빠르게 동화되었다는 K진실..
몇백년이 후 그들의 명복을 마음을
다해 빌어봅니다
항왜들은 말하자면 직업군인.
전쟁이 끊이질 않으니 언젠가는 전장에서 죽는다는 각오였겠죠.
항왜들의 특성상 잘 대해 주었으면 진심으로 목숨바쳐 충성을 다 했을텐데 능력없는 조선의 상관들이 그들의 능력이 두려워 수많은 항왜들을 품지 못하고 체포해서 목을 베어 죽였다. 항복한 왜군들 조차 두려워 죽였를 정도로 조선이 무능했으니 통합된 여진족을 어찌 감당했으랴..
진심. 100번 양보해서 전쟁이 끝나고 숙청 했을지 몰라도
전시상황에 숙청을,,? 한명이라도 귀한데..
사실 그게 조선의 그릇이죠. 한민족의 그릇도 딱 그 정도라는 뜻
맨날 처맞고 애환 가득한 역사인 이유가 있음..
@@지옥도랏맨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데 우리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라는데 웃음뿐이네요.. 나라가 힘들어지면 나서는사람 반 바로 역적질하는 사람이 반일듯합니다.. 그게 조선 대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수준일듯합니다
능력과 재능있는 천재들만 골라 죽여버린 놀라운 조선! 지금도 그렇다!
그놈의 기득권과 돈.권력!
@@eum2429 그건 어딜가나 비슷함
영화로 만들어도 히트칠만한 소재네요. 재밌게 잘봤습니다.
와 근데 새삼 보급의 힘을 다시 느끼고 가네
말 그대로 넘치는 힘을 밖에다 쏟았더니 한 나라 전체가 바로 도륙 및 유린 당해버리는데 그 기세를 끊은건 보급..
갓순신이다 ㄹㅇ 진짜
항왜인 얘기하는데 꼭..
이런 거 얘기한 사람의 저의가 의심됨.
어쨌든 보급만의 문제로 이긴 거 아님. 그리고 임진왜란은 오히려 풍신수길이 조선민심 정책 쓰겠다고 도륙과 유린이 극심하질 않았음. 되려 그런 문제는 명이 더 심했지. 원래 일본은 자기 영주들끼리 싸워댔지 잇키는 건들지도 않는 타입들임.
정유재란 때나 풍신수길 빡쳐서 도륙하고 끌려간 거임. 초반에는 풍신수길이 조선에 가서 약탈도 방화도 금지시켰음.
조선이 학문에 더 추앙받는 거 사실인데 무에는 넘나 약해서 이순신장군도 절대로 왜와 안 벌이던 전투가 백병전이었음.
보급품 끊었다해도 주둔지가 대부분 조선 땅이었고, 작위? 준다는 명목으로 각지 주둔한 일본에 쌀 생산량이 없던 것도 아님. 만일 보급품 끊어지고 쌀도 없었음 일본은 다시 회군해야 함.
문제는 조선 내부라고 좋은게 아니니 일본의 이 전략이 먹힌게 아닌가 싶음.
특히 임해 순화.
@@용가리-x3l ??? 내가 무슨 저의를 숨기고 있는거같음?
그만큼 거지만 득실대는 나라엿다는거...ㅋㅋ 청야전술도 필요없는 하루살이들만 득실 ㅋㅋㅋ
@@이정훈-g2l1x 정훈이 미필이냐?
매번 기달려지는 영상 너무나도 잘보고 있어요 너무나도 좋습니다
원래 살았던 땅에서도 증오를 느꼈는데 후환 때문에 참수당해서 사후에서는 얼마나 원통할까 ㅠㅠ 마음이 아프네요
선조의 졸렬함은 어딜가나 빛나는 구나
이 항복한 항왜들이 일반 왜병들보다 더 무서운게 그 험난한 전장터를 마치 제 집 드나들듯 침투해서 싸우기도 하고 적들에게 다가가 공작도 했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들은 제 조국을 등지고 다른 나라로 왔기에 인정 받으려고 더욱 열심히 활동했다는거고. 그러나 오히려 그런 능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전부 토사구팽해버렸고 뭐 이해가 안되는건 아니지만 양쪽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불행한 사람들의 말로임.
조국을 등진게 아니라 본인들의 나라(번 : 수장이 영주)가 점령당해 원한이 컸음
항왜들 공통점이 몰락한 영주들의 가신이었기 때문에 조선과의 전쟁이 의미없는 전투였고 원한은 도요토미한테 있어서
일본군 상대로 더 잔인하고 악귀같이 잘싸웠던거죠
충성하던 주인잃은 무인이 그만큼 무서움
항왜는 전통적으로 보병으로 강했고 전통적으로 기병에 고자인 특성은 여전해서 기병으로 밟아 버리면 맥을 못춘다고.
. 다만 자기들이 기병에 약하다는 단점을 잘 알고는 있어서 개활지에서 회전은 최대한 회피하면서 나름 잘 싸웠다고
신립이 기병 군단의 장점을 못 살리고 패한게 정말 안타까운 일
일본이 전통적으로 기병이 고자에 가깝고 일본군의 무기도 보병용 양손무기인걸 초반에 잘 알았으면 북관대첩이나 직산전투처럼 왜군 짓밟아 털어 버렸을 텐데..
임란 초기에 수성전은 왜군이 좋아하던 입맛에 맞는 전술이었고.. 전국시대에 공성전으로 밥벌어먹던 왜군이라
김충선의 자손들이여..귀화하는 순간 조선인입니다..한국인으로 당당하게 사세여..
ㅋㅋ 그냥반들 조선사람 된게 500년전입니다. 뭘 당당히 살아요..한국사람인데..
나나 댁의 조상도 중국이나 만주나 동남아등 어디서 흘러들어와 한반도인이 된지 몰라요.ㅋ
서아지 고효내 사쇄문은 칼부림이란 웹툰으로 항왜란걸 알게 됐는데 불쌍했네 항왜들도 어이없게 죽게돼다니
항왜가 1만에 달했는데 이괄에게 가담한건 그중 200여명
줄을 잘 서야함…
임진왜란 때 항왜자는 들어 봤는데
생각 외로 꽤 많은 인원이었군요.
이순신 장군은 항왜자를 포함해서 인적, 물적 자원을 최대한 활용을 했구요.
이런 귀한 지식을 알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500년 전의 일이지만 명복을 빕니다
이순신 장군도 인정 왜군은 능히 조선군 10명 과 대적해도 쉽게 이긴다 하여,,이순신은 절대 단병접전 하지 않앗음,,,
절대는 아니지요.
마지막 해전인 노량은 어쩔 수 없는 근접전이 이른어졌으며,
그 난전에서 전사하셨으니..
10대 1 이 아니라 3 대 1입니다 일본 소년무사 하나를 못이긴다고 급전전을 피해야겠다고 했죠 (황현필 한국사 참조)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중
조선수군 다섯이 왜나라 소년검사 하나를 당해내지 못한다
@@bungbung692 가덕도해전에서 비록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지만 육박전에서 일본군을 이김 선조실록에 나오는 내용
@@dudrak7575 노량해전이 다른 이순신의 해전보다 전사자가 많고, 심지어 군관도 3명이나 죽어 피해가 컸던 것은, 멀찍히 떨어져서 화포로 승부를 보던 다른 해전과는 달리, 자기나라로 도망치는 왜군놈들을 한놈이라도 더 잡아 죽여야 하는 섬멸전이기 때문에.. 화포로 다 잡지 못하니..쫓아가서 배로 들이박고, 그 와중에 조선군과 왜군이 섞여 백병전을 벌일일이 많으니, 조선군의 사상자가 상당했죠. 왜군도 다른때와는 달리 저들이 평소처럼 하지않고 죽어라 배를 붙여서까지 덤비니 자기들의 주특기인 칼질을 유감없이 사용하고요. 뭐 명나라 수군사령관 진린도 왜군 칼에 죽을 뻔 했다하니...상당한 난전이었죠.
정말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인거 같습니다!
참... 모든걸 버리고 와서 투항한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차별하고 배척하며 사회에서 밀어내는걸 보니 안타깝네요.
현재도 외지인을 배척하는게 남아있기는 하지만 당시 조상들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고 따뜻하게 대해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란당시에는 당장 어제 적이었고 전투력자체도 무지막지했으니 여러의미로 반감이 컸을겁니다.
다른 외지인은 몰라도 회회교는 모이지도 못하게 할 정도로 배척이 아닌 금지가 있음. 지금도 문제인데 이 회회교가 뭐냐면 이슬람, 무슬인들임.
이 것들을 다양 문화니 뭐니 말은 뻔지르게 하는 인간들로 지금 골머리 안고 있는데 한국 좀 정신 차렸음 좋겠음.
자기 눈앞에서 왜인들이 가족과 동료를 무참히 죽였는데.. 하루아침에 아군이 되어 싸우라니 반감이 클 수 밖에 없죠
@@자꾹새그걸따지지 않더라도 조선은 씹찐따의 나라가 맞음
사실 임진왜란 이전에 대마도주가 조공하다가 반란을 1510 삼포왜란이나 1544 사량진왜변을 사주하는 경우도 있어서 신뢰도가 이미 떨어졌습니다
진압하고 사죄하고 또 왜관을 중심으로 반란을 사주하고 진압되고 사죄하고 반복했죠
여진족과 일본인은 조선에 조공하다가 기회만 되면 배신할 오랑캐란 인식이 형성된 겁니다.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을 자처하면서 온 오우치-타타라 가문이 조선에 조공무역을 해서 돈 잘 벌어 일본 내에서 잘 나갈 1540년대까진 꽤 우호적이었고 조선에서도 다른 일본인들과는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1551년 휘하 스에 하루카타라는 사무라이의 배신으로 멸문되었죠. 몰락 후 방계로 도요타 가문이 있습니다. (오닌의 난 당시 전성기 때에도 난을 끝내지 않으니 다른 일본인들은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놈에게 일본에서 난이 끝나지 않는다!"라고 험담했죠. 수백년 동안 주장한 겁니다. 지금도 大内重弘公の墓 오우치 시게히로공의 묘 옆에 공영탑을 만들어 林聖太子供養塔 임성태자공양탑이라고 써놓았습니다)
조선은 탁상공론에만 빠져 실익에 도움이 되는 항왜의 전력을 너무 잘활용하지 못했다
항왜들은 임진왜란 후 어디에도 소속 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어디 시골에 박혀 천천히 조선에 동화되었으나, 일부는 계속 차별 당하며 끊임없이 떠돌았고, 급기야 누르하치의 후금 진영, 산해관 명나라 진영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죠.
잘봤습니다. 참고로 네이버 웹툰 수요일 고일권 작가의 '칼부림'에 사쇄문, 서아지, 김충선 등장함. 연재초기 아래에있을때부터 쿠키구워 흥미롭게 보고있는 작품.
진짜 감사합니다
오 이런내용의 역사스토리 너무좋네요 영화명량에서 준사라고 부르던 그 항왜가 진짜 고증이었구나
와... 항왜.. 처음 봤네요 단지 이괄의난 때 이들을 선봉으로 세워 싸운것만 알고 있을뿐 살인귀에 관련된 설명은 첨 보네요 와..
와 처음 알았네요 이런 귀한 영상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채널 흥하십시오
이거 드라마로 만들면 진짜 대박이겠네요.
한일합작으로 항왜 일대기도 영화로 한번 나와줬음 좋겠네요
그들도 워낙 기구한 삶이었던지라
이야기가 많을것같네요
사야가는 규슈사람이고 가토 기요마사밑에 있던 부사령관중에 한사람임 사야가가 조선에 귀화한것은 현명한 판단이였음 임진왜란이후 전쟁에 참가했던 사무라이들이 섬으로 유배되거나 처형당하기도 했음 그리고 사야가는 본인이 먼조상들이 한반도에서 이주한 도래인의후손 이라는것을 알고 있었음 그래서 조선한테 어디가모르게 친밀감이 있었음
목소리 딕션이 독특하시네요??ㄷㄷ
여여문의 답답한 조선은 아직도 여전한것 같습니다. "계획만 세우고 의논만 하며 실행이 적다. 할수 있는 일은 급히 실시하여 기회를 잃지 말아야 마땅하다."
아침마다 고놈의 쓸데없는 회의좀 하지말고 일을 합시다. 주간계획 월간계획 그만 세우고 그시간에 더 창의적인 무언가를 만들어 냅시다.
항왜가 있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는데... 이렇게 귀하게 잘봤네요~~
사대주의, 당파싸움이나 하던 조상들이니...
이순신 같은 영웅이 나왔다는게 기적인 세상.
항왜
임란 이후 조선 전쟁사에서 빠질수가 없죠.
임란에서 이야기는 말 할 필요도 없고
이어지는 이괄의 난, 병자호란 에서도
항왜의 위상은 상당히 높았습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소속받고,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욱 뛰어다니지 않았을까 싶네요.
선조 진짜 가족같네...
진짜 선조는 전설이다 ㅋㅋㅋㅋ 유명한 항왜로 김충선은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항왜가 1만이나 되었고 그 사람들을 대접은 못해줄망정 참수라니... 그딴 놈들이 정치를 하는데도 나라가 안망했던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모르겠네
선조와 조정대신들만 안썩었다면 그 많은 희생을 치르진 않았겠지요. 사대주의 사상에 찌들어 거들먹 거리며 당파싸움이나 하던 자들이 왜군의 침략에 무슨 생각이 있었겠습니까? 왜군들의 면면을 잘 이해하고 투항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면 일본이 조선의 속국이 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님의 말대로 했었다면 머지않은 훗날 정묘 병자 두번의 호란에 그리 무기력하게 당하지는 않았겠죠
당파싸움? 그럼 말로 하지 않고 일본 전국시대처럼 칼들고 사람 쳐죽여야할까요? 그게 이괄의 난 같은 반란 아닌가
사실 임진왜란 이전에 대마도주가 조공하다가 1510 삼포왜란이나 1544 사량진왜변 같은 반란을 사주하는 경우도 있어서 신뢰도가 이미 떨어졌습니다
진압하고 사죄하고 또 왜관을 중심으로 반란을 사주하고 진압되고 사죄하고 반복했죠
여진족과 일본인은 조선에 조공하다가 기회만 되면 배신할 오랑캐란 인식이 형성된 겁니다.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을 자처하면서 온 오우치-타타라 가문이 조선에 조공무역을 해서 돈 잘 벌어 일본 내에서 잘 나갈 1540년대까진 꽤 우호적이었고 조선에서도 다른 일본인들과는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1551년 휘하 스에 하루카타라는 사무라이의 배신으로 멸문되었죠. 몰락 후 방계로 도요타 가문이 있습니다. (오닌의 난 당시 전성기 때에도 난을 끝내지 않으니 다른 일본인들은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놈에게 일본에서 난이 끝나지 않는다!"라고 험담했죠. 수백년 동안 주장한 겁니다. 지금도 大内重弘公の墓 오우치 시게히로공의 묘 옆에 공영탑을 만들어 林聖太子供養塔 임성태자공양탑이라고 써놓았습니다)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사무라이와 자국민을 백만명이나 해외에 성노예로 수출해서 (1500년대 조총사려고+1800년대 가라유키상 팔아 일본 개발자금 벌려고) 돈 번 일본이야말로 한심하죠
부국강병은 말이죠, 불평도 못할 만큼 백성을 쥐어짜야 되는 겁니다. 백성들이 피곤해요.
중국 한나라 때 흉노를 북벌한다고 50만 대군 끌어모아 싸우고 난 뒤 경제 파탄나고 각종 환난으로 3000만명 인구가 1500만명으로 줄어들었어요. 다 죽은 건 아니겠지만 도망가서 도적이 된 유민들이 많았다는 말.
후지와라 세이카가 강항에게 "지금 일본 꼴이 말이 아닙니다. 백성들에게 세금지옥으로부터 구해준다고 하면서 조선과 명이 일본을 벌하러 온다면, 시라가와 검문소(일본 동북쪽)까지 진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죠.
선조도 전쟁 준비해야한다고 백성들이 힘들어한다는 신료들 반대를 무시하고 강행했습니다. 단지 2만명 정도 올줄 알고 대비한 건데 15만명이나 올 줄은 아무도 예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전에 임란때 조선으로 귀순한 항왜의 후손 특집 다큐 했었는데
후손들 대부분 김씨 성을 갖고 조상이 왜병이었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감추려하지 않았습니다.
근데 지금 다 섞여서 어차피 조선인이죠 머 ㅎㅎ
전혀 부끄러울 이유가 없죠
대부분의 한국인 조상들은 임진왜란때 줄행랑치거나 아무것도 못하고 항복또는 죽임을 당했을텐데 오히려 이게 더 부끄럽죠
항왜후손들을 본인 조상들이 저렇게 조선으로 귀순해서 맞서싸웠단걸알면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게 정상입니다
제작자님,, 6:16 부터 나오는 BGM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너무 좋아서 원곡 듣고 싶어요.
지금 작업 컴퓨터 확인이 어려워서
제목 확인이 어렵네요.ㅜㅜ
메일 보내주시면 파일 보내드리겠습니다.
제가 모션엘리먼츠를 통해 사용해서
상업용은 불가 입니다.
아.. 항왜들 어렴풋이 알고있었는데 이리보니 불쌍.. ㅠ ㅠ
조선에서도 결국찬밥..
항왜만 있었어도
병자호란의 치욕은 안당했을 텐데
인조는 정말 쓰레기다
ㄴㄴ 병자호란 태 사야가가 참전했었습니다
@@양지욱-s6s 불리한 낮은지형에서 인왕산 고지를 점령하고 움직이지않는 장만군을 향해 여러 차례 중앙 돌파 시도 중 역풍을 맞아 흉포하고 용맹한 항왜 대부분이 전멸함
내가 아직 혈기왕성하고 꿈이 남아있다면 항왜로 다큐나 영화를 만들어볼텐데... 참으로 흥미롭고 또 애석한 사람들이다.
영화계에 종사하시는 분이시군요. 항왜를 주인공으로 작품을 만들면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국민 수준이나 정서상 저들을 전쟁에 당면한 인간개인으로, 입체적이게 받아드리지 못할겁니다.. 선입견만 강하고 역사왜곡이니 친일이니 소리만 나올겁니다..
@@Utillity 전쟁에 당면한 인간 개인이라니 멋진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여문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화해도 재미있을거 같네요.
명량 노량 한산에서 봤어요 난항왜다
올해 10만 가즈아!
항왜들의 용맹함에 대한 지식을 더 알고 싶은데 추천해줄 만한 자료가 있으신가요? 또한 해당 영상 내용은 어디서 참고하셨나요?
항왜의 이름을 조사하고 선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참고했습니다.^ ^
네이버 웹툰 칼부림 추천 드립니다. 이괄의난 소재인데 가상의 주인공이 이괄의 부하 항왜의 의붓아들 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번 항왜 뿐만 아니라 모든 뛰어난 능력을 가진자들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발전시키지 못하고 항상 처단하거나 숙청시킨일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것이 우리민족이 가진 대표적 민족성인 시기나 질투입니다
오죽하면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아프다는 속담이 있겟습니까
그것은 현시대까지 이어져서 어떤일을 해도 비난이 있고 남이 질되면 까내리지못해 안달을 하는 민족성이 잘드러나지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또한 아무리 잘해도 만족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또한 발전을 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요
김충선 역사 드라마 좀 만들어 주세요.
가볍게 말고 9번에서 하는 역사 드라마 처럼요.
김충선장군은 일본전국시대에 전쟁에 지친상태에서 또 조선침략선봉에 섰지만..문"과 유교문화에 평소동경한지라..조선에 귀화하여 조선의 국방에 일조한 애국장군" 입니다...무기개발과 보병전술에 일조했습니다..조선의영웅!
조선의 진정한 영웅!
보통 전쟁에서 활약하고 전과가 뚜렷한 나라들 영연방, 미국, 일본 등을 보면 특유의 자신이나 가족을 초월한 명예라고 해야하나.. 무언가를 위해 겁도 없이 싸우는 투쟁심리가 있어서 몸 안사리고 내던지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음
그게 아니고 돈때문에 싸우는겁니다 ㅋㅋㅋ
@@우마이우마이-l4t 혹시 돈 줄테니 죽으라면 죽으실건가요?? 궁금해져서..
@@user-dj9go6mr8d 예를 희한하게 드시는데 돈벌려고 일부러 죽는게 아니라 죽음을 무릎쓰면서 까지 돈을 벌려고 전쟁터에 나가는 겁니다... 과거에는 변변한 직업이랄게 없으니 영주밑에서 꼬박꼬박 월급 타먹으면서 생존하는것도 하나의 살아가는 방법이었어요 전장에 나가는건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하나의 세력에 속함으로서 생활안정을 보장받는 면도 있었습니다. 그냥 소작만해가지고는 실컷 농사지어봐야 세금으로 따뜯기고 약탈,강도에 노출되고 하기 때문에 살아가기 상당히 빡빡했어요
겁쟁이 민족인 한국인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정신이지
@@kokekuka24 그것보다도 가족이나 혈육의 보존에 대한 심리가 얼마나 강하게 깔려있는지에 대한 여부가 가늠하는 것 같기도 함
이 채널은 역사의 “과오”을 알려줘서 좋네요.
전국시대 때 영주 밑에서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사무라이와 자국민을 백만명이나 해외에 성노예로 수출해서 (1500년대 조총사려고+1800년대 가라유키상 팔아 일본 개발자금 벌려고) 돈 번 일본이야말로 한심
영상에서 "왜군은 탈영병을 막기 위해 목책 쌓고 왜군 가족을 인질로 삼았다"고 했는데? 항왜 여여문의 경우 투항했더니 일본이 가족을 연좌제로 처형했는데 못봤나요?
사실 임진왜란 이전에 대마도주가 조공하다가 1510 삼포왜란이나 1544 사량진왜변 같은 왜관의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반란을 사주하는 경우도 있어서 신뢰도가 이미 떨어졌습니다
진압하고 사죄하고 또 왜관을 중심으로 반란을 사주하고 진압되고 사죄하고 반복했죠
여진족과 일본인은 조선에 조공하다가 기회만 되면 배신할 오랑캐란 인식이 형성된 겁니다.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을 자처하면서 온 오우치-타타라 가문이 조선에 조공무역을 해서 돈 잘 벌어 일본 내에서 잘 나갈 1540년대까진 꽤 우호적이었고 조선에서도 다른 일본인들과는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1551년 휘하 스에 하루카타라는 사무라이의 배신으로 멸문되었죠. 몰락 후 방계로 도요타 가문이 있습니다. (오닌의 난 당시 전성기 때에도 난을 끝내지 않으니 다른 일본인들은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놈에게 일본에서 난이 끝나지 않는다!"라고 험담했죠. 수백년 동안 주장한 겁니다. 지금도 大内重弘公の墓 오우치 시게히로공의 묘 옆에 공영탑을 만들어 林聖太子供養塔 임성태자공양탑이라고 써놓았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도 아케치의 배신때문에 죽었잖아요?
부국강병은 말이죠, 불평도 못할 만큼 백성을 쥐어짜야 되는 겁니다. 백성들이 피곤해요.
중국 한나라 때 흉노를 북벌한다고 50만 대군 끌어모아 싸우고 난 뒤 경제 파탄나고 각종 환난으로 3000만명 인구가 1500만명으로 줄어들었어요. 다 죽은 건 아니겠지만 도망가서 도적이 된 유민들이 많았다는 말.
후지와라 세이카가 강항에게 "지금 일본 꼴이 말이 아닙니다. 백성들에게 세금지옥으로부터 구해준다고 하면서 조선과 명이 일본을 벌하러 온다면, 시라가와 검문소(일본 동북쪽)까지 진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죠.
선조도 전쟁 준비해야한다고 백성들이 힘들어한다는 신료들 반대를 무시하고 강행했습니다. 단지 2만명 정도 올줄 알고 대비한 건데 15만명이나 올 줄은 아무도 예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좋은 동영상 자료 잘 봤습니다
헌데 조심할 것은 국가관 민족주의 부족주의 개념이 명확히 정립됨이 없이 혼용되어 이해될 수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종국적 승리는 물론 카리스마적 영웅(권율 이순신 등)을 포함하여 한 국가 나 민족에 소속된 개개인(지휘관 장수 의병 민초 등)으로 구성된 집단(우월한 정신 문명.문화)적 힘(그게 민족주의든 사무라이정신이든)의 승리가 누가 더 크고 위대하냐에 있다고 개인적으로 봅니다.
전투력(전국시대 살인기술)보다는 명분없고 의롭지 못한 것에 굴하지 않으려고 존버하며 멸하고자(노량) 정신 승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항왜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임진왜란 원균도 해주세요~~
여기서 알 수 있는 한국인들의 치졸함을 볼 수 있다.남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들의 장점을 배우기 보다 시기하고 질투하며 제거하려고 하는 저 근성은 버려야 한다.당파 싸움이나 남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치졸함.한국인의 약점이다.
종특이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죠
@@김현준-s9y1dㄹㅇ 이게 열등민족이 되버림
@@김현준-s9y1d 너무잘아네 ㅋㅋ
정말 고퀄리티의 영상입니다
좋은영상 감사합니다 임경업 영상 만들어주시는것도 가능할까요?
목소리가 너무 좋으시네요
성우 이신가요?
내용도 좋고
잘 듣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배경으로 항왜 스토리 라인나오면 뭔가 잼날듯 한때 동료였으나 적으로 만나는
항왜들의 전투력을 시험하려 북방 여진족과의 국지전에 투입했었는데, 너무 잘 싸워서 죽여버렸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토전사 임진왜란 편에 나옴니다.
잘 싸우면 잘 데리고 있으면서 써먹을 생각을 해야지 죽이려부터 한 것을 보면 진짜 옹졸한 겁쟁이들이었다는 걸 알 수 있음.
진짜 대장부였으면 언제든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살려서 부렸을 것임..참 이런 내용 들으면 학문적으로나 문화적으로는 존경가는데 옹졸함은 어찌 형용할 수 없는
(예를 들어 저는 길가다 뱀을 보면 때려죽이려 하지만 진짜 용감한 사람은 그냥 동물 중 하나로만 보며 그냥 살려서 보냄)
@@박희수-t8d 언제든 제압못하는 게 현실이니까
그러니 이순신장군을 죽이려했죠 ㅠ 더럽고 치사한 선조
얼마나 겁이많았으면 그런 최우수 병력들을 써먹을 생각도 못 하고 무서워서 죽였겠냐
나라자체가 겁쟁이들의 나라임
항왜보러 왔다가 조선이 한 뻘짓만 잔뜩보고 가네요
잘보았습니다 혹시조선왕조실록에
그들의 무용담이있는지요?
감사합니다 ㆍ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인은 신의가 없다
네이버 수요일 웹툰 '칼부림'이 1~2부가 항왜 중심 이야기입니다. 재밌어요!
정말 너무도 하는군요. 투항을해서 조선을 위해 싸운 항왜들을 죽이다니..
선조가 왜 조선최고의 암군인지
이유를 알겠네요.
김충선님 존경합니다
항왜도 참수시키고 의병장도 참수시키고
병자호란때 개 털리고
왕과 간신들이 토사구팽 시키는 흑역사
이런일이 있었습니까 몰랐습니다!
뭔가 많이 안타깝다ㅜㅜ
보통 일본의 군사력이 임진왜란 이전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통해 길러진 것이란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고려말이나 조선초의 기록을 보면 이미 그 때 기록에도 검술은 일본이 최고라고 하는 기록들이 꽤 있어요.
저 나라의 문화 자체가 건들면 죽여버린다는 조폭적인 마인드가 굉장히 강한데,
이게 임진왜란 100년전부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전부터 오래된 풍속이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는 조상때부터 포용력이 부족하고 마음이 닫혀있고 폐쇄적입니다
농경민족의 특성이지요
옛날에는 전부다 농경이었어요
신라구에 대해서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왜구가 출몰하기전 큐슈지방에는 신라구가 유명했다는데
우리중 많은 이들이 항왜의 후손들인지 모른다.
맞아요 항왜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숨겼다고 하네요
김충선 , 김해 김씨(사성 김해 김씨)가 대표적인 귀화 성씨입니다.
고딩때 친구 한명은 일본인에 가까운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조상 중에 일본인이 있나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이 영상을 보면 충분히 납득할 만하네요.
헉 저 사성 김해 김씨 입니다. 아 어쩐지 일본인들이 날보면 같은 일본인인줄 알고 늘 일본어로 대화하고 기랫지
@@킴식스-z6t 조상님들이 총포제작과 사격술에 능하셨을 듯.
조선이 참 답답해요, ㅠㅠ 어디 지역, 지방에서 특출나고 비범한 재주의 아이가 나면, 곧 역적될 놈이라 싹수부터 죽이고(아기장수 설화), 전장에서 큰 무공을 세운 장수도 나중에 누명 받아 죽었는데. 임란 때 항왜들 참수시킨 건 정말 슬프네요 ㅠㅠ 물론 그들 중에 흉폭한 자들도 있었겠지만, 조정에선 이들이 만일 향후 왜와 내통하면 큰일날 거라는 이유를 댔을 것 같은데... 역사란 참....
재능이 있거나 공을 세워봤자 나중에 왕권에 해가될까하고 죽이는걸 보면 참 겁이 많은 나라란걸 알수있음
걍 서자 아들이라고 ㅂ신 취급한 노답 나라였는데 그정도는 놀랄것도없죠ㅋㅋ
아기 장수 설화는 설화인데 뭔 개소리죠? 설화 갖고 역사비판 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진짜 국민이 가축화된 나라에서는 저런 이야기도 나올 수 없어요. 일본의 성폭력 통계가 사실 제3세계 아프리카 국가처럼 '낮은' 이유와 같음.
전국시대 때 영주 밑에서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사무라이와 자국민을 백만명이나 해외에 성노예로 수출해서 (1500년대 조총사려고+1800년대 가라유키상 팔아 일본 개발자금 벌려고) 돈 번 일본이야말로 한심
후지와라 세이카가 강항에게 "지금 일본 꼴이 말이 아닙니다. 백성들에게 세금지옥으로부터 구해준다고 하면서 조선과 명이 일본을 벌하러 온다면, 시라가와 검문소(일본 동북쪽)까지 진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죠.
사실 임진왜란 이전에 대마도주가 조공하다가 1510 삼포왜란이나 1544 사량진왜변 같은 왜관의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반란을 사주하는 경우도 있어서 신뢰도가 이미 떨어졌습니다
진압하고 사죄하고 또 왜관을 중심으로 반란을 사주하고 진압되고 사죄하고 반복했죠
여진족과 일본인은 조선에 조공하다가 기회만 되면 배신할 오랑캐란 인식이 형성된 겁니다.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을 자처하면서 온 오우치-타타라 가문이 조선에 조공무역을 해서 돈 잘 벌어 일본 내에서 잘 나갈 1540년대까진 꽤 우호적이었고 조선에서도 다른 일본인들과는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1551년 휘하 스에 하루카타라는 사무라이의 배신으로 멸문되었죠. 몰락 후 방계로 도요타 가문이 있습니다. (오닌의 난 당시 전성기 때에도 난을 끝내지 않으니 다른 일본인들은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놈에게 일본에서 난이 끝나지 않는다!"라고 험담했죠. 수백년 동안 주장한 겁니다. 지금도 大内重弘公の墓 오우치 시게히로공의 묘 옆에 공영탑을 만들어 林聖太子供養塔 임성태자공양탑이라고 써놓았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도 아케치의 배신때문에 죽었잖아요?
부국강병은 말이죠, 불평도 못할 만큼 백성을 쥐어짜야 되는 겁니다. 백성들이 피곤해요.
중국 한나라 때 흉노를 북벌한다고 50만 대군 끌어모아 싸우고 난 뒤 경제 파탄나고 각종 환난으로 3000만명 인구가 1500만명으로 줄어들었어요. 다 죽은 건 아니겠지만 도망가서 도적이 된 유민들이 많았다는 말.
선조도 전쟁 준비해야한다고 백성들이 힘들어한다는 신료들 반대를 무시하고 강행했습니다. 단지 2만명 정도 올줄 알고 대비한 건데 15만명이나 올 줄은 아무도 예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님이 강도짓으로 큰 나라들을 선망하면 조폭들이 님 집 털고 그 재산으로 가게 차리면 님 자식들이 칭찬해줘야겠네요
@@stardemjason6176 아기 장수 설화는 설화인데 뭔 개소리죠? 설화 갖고 역사비판 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진짜 국민이 가축화된 나라에서는 저런 이야기도 나올 수 없어요. 일본의 성폭력 통계가 사실 제3세계 아프리카 국가처럼 '낮은' 이유와 같음.
전국시대 때 영주 밑에서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사무라이와 자국민을 백만명이나 해외에 성노예로 수출해서 (1500년대 조총사려고+1800년대 가라유키상 팔아 일본 개발자금 벌려고) 돈 번 일본이야말로 한심
후지와라 세이카가 강항에게 "지금 일본 꼴이 말이 아닙니다. 백성들에게 세금지옥으로부터 구해준다고 하면서 조선과 명이 일본을 벌하러 온다면, 시라가와 검문소(일본 동북쪽)까지 진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죠.
사실 임진왜란 이전에 대마도주가 조공하다가 1510 삼포왜란이나 1544 사량진왜변 같은 왜관의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반란을 사주하는 경우도 있어서 신뢰도가 이미 떨어졌습니다
진압하고 사죄하고 또 왜관을 중심으로 반란을 사주하고 진압되고 사죄하고 반복했죠
여진족과 일본인은 조선에 조공하다가 기회만 되면 배신할 오랑캐란 인식이 형성된 겁니다.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을 자처하면서 온 오우치-타타라 가문이 조선에 조공무역을 해서 돈 잘 벌어 일본 내에서 잘 나갈 1540년대까진 꽤 우호적이었고 조선에서도 다른 일본인들과는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1551년 휘하 스에 하루카타라는 사무라이의 배신으로 멸문되었죠. 몰락 후 방계로 도요타 가문이 있습니다. (오닌의 난 당시 전성기 때에도 난을 끝내지 않으니 다른 일본인들은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놈에게 일본에서 난이 끝나지 않는다!"라고 험담했죠. 수백년 동안 주장한 겁니다. 지금도 大内重弘公の墓 오우치 시게히로공의 묘 옆에 공영탑을 만들어 林聖太子供養塔 임성태자공양탑이라고 써놓았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도 아케치의 배신때문에 죽었잖아요?
부국강병은 말이죠, 불평도 못할 만큼 백성을 쥐어짜야 되는 겁니다. 백성들이 피곤해요.
중국 한나라 때 흉노를 북벌한다고 50만 대군 끌어모아 싸우고 난 뒤 경제 파탄나고 각종 환난으로 3000만명 인구가 1500만명으로 줄어들었어요. 다 죽은 건 아니겠지만 도망가서 도적이 된 유민들이 많았다는 말.
선조도 전쟁 준비해야한다고 백성들이 힘들어한다는 신료들 반대를 무시하고 강행했습니다. 단지 2만명 정도 올줄 알고 대비한 건데 15만명이나 올 줄은 아무도 예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님이 강도짓으로 큰 나라들을 선망하면 조폭들이 님 집 털고 그 재산으로 가게 차리면 님 자식들이 칭찬해줘야겠네요
@@stardemjason6176 일본의 18세기 화한삼재도회 7권에 일본의 노비라고 (노복奴僕) 그림까지 딱 그려져서 나오는데 뭔소리야
조선통신사 그림에서 바지도 안입고 나오는 일본 가마꾼들/노잡이들 전부 일본의 노비지. 성종 때 임복처럼 8000석의 곡식을 가진 부자 사노비는 일본에서는 꿈도 못 꿔
일본은 개발자금과 신식무기를 사서 서로 죽이려고 자국 여성을 해외에 성노예로 수출함:
1500년대에 50만명 판 것도 그렇고 1800년대 메이지 45년간에도 50만명을 '가라유키상'으로 팔고, 1만엔권 지폐에 모셔놓은 후쿠자와 유키치도 생전에 '일본 개발 자금 벌기 위해서는 일본 여성 판매를 중단하면 안됨'이라고 함. 그렇게 팔려 죽은 여자들은 싱가포르에 '일본인의 묘지'까지 따로 만듬.
자국민 노예로 부린 건 모든 나라인데? 그리고 일본에선 자유민조차, 사유재산有+군역면제(시대차이 있음)+세금면제(종류차이 있음)+관직가능+100%재산상속가능이라서 사실상 그냥 2등국민이라 말만 노비인 조선의 노비보다 훨씬 못했다. 자유민 중 세금 회피하려고 自賣하는 사람도 꽤 있었고 이땐 명망 있는 주인을 골라서 감.
19세기까지 각국의 유럽의 농노는 땅에 귀속되어 있어서, 그 땅에서 도망가면 일본의 기리시테고멘 법처럼 그냥 재판회부 없이 그자리에서 죽여도 됨. 반면 조선에서는 주인이 노비 살해하면 살인죄가 적용됨. 그리고 유럽의 농노는 여자가 타지로 시집가면 주인인 영주에게 노동력을 더 이상 제공 못하니까 몸값 선불해주고 가야했음.
16세기 일본 서적 규슈어동좌기에서 일본인들이 이웃끼리 서로 외국인에게 노예로 팔아넘긴다고 한탄했는데? 이런 자료 일본 사이트에서도 잔뜩 나옴.
1500년대 전국시대에 50만명중 30만명은 규슈에서 팔림. 여기서 볼 수 있듯 서양 상선 입장에선 해류와 지리적 위치상 난파당하거나 발견하기 쉬운 자리가 규슈임. 조선은 더 안쪽에 있고 해류가 극악이라 접근이 늦었던 거.
송나라 때 허한 소식 등의 중국 관료들이 고려에서 쓸모 없는 물건 들고 조공할때마다 사신들 접대한다고 중국의 백성들이 노비로 팔린다 불평하는데?
- 중국 관리들이 고려 사신을 위해 중국 수도 개봉까지 직통 운하도 파주는 건 너무하다고 간언하자 재상이 빡쳐 파직시키고 高麗入貢,調民開運河,民間騷然。中書舍人孫傅論高麗於國無功,不宜興大役,傅坐罷。翰謂傅不當黜,時相怒,落職,提舉江州太平觀
- 처마지붕이 벽을 넘어가는 휘황찬란한 '고려정' 만든다고 숲은 허허벌판이 되고 사람들이 노역에 동원 되면서 농사 못짓게 되자 집이 망해 노비로 팔려나가고
《元豐七年有詔京東淮南築高麗亭館密海二州騷然有逃亡者明年軾過之嘆其壯麗留一絕雲》 檐楹飛舞垣牆外,桑柘蕭條斤斧余。盡賜昆耶作奴婢,不知償得此人無。
그럼 중국에 노비는 없었단 말이냐? 중국 옛날에는 한국에도 없던 노시 (奴市)라고 노예시장도 있었는데?
영국령의 인도는 19세기에나 20세기에나 수백만명씩 굶어 죽었지. 그런데 얘네는 법적으로 "자유인"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떼죽음당하는데 그게 뭔 소용이지?
예니체리는 오스만 제국의 노예였다. 그런데 환관처럼 국정을 장악함.
영국의 런던에서는 1900년에 찍힌 사진 보면 자유민들이 하루 일당 50% 써서 Two penny hangover라는, 벽과 기둥 사이에 밧줄 하나 걸어놓고 여러명이 다닥다닥 붙어 기대면서 새우잠 자는 사진 있다. 좁은 관짝에서 두발 뻗고 잘 수 있는 호사를 누리려면 4펜스 내야함.
그럼 대영제국의 돈은 어디로 흘러갔냐고? 어디긴 어디야 제국의 식민지 늘리려고 끝없는 전쟁을 지속하는 데 쓰였지. 그 극히 일부만 조금 본국 하층민에게 흘러가고 대부분은 상류층이 먹었지. 남의 나라 전체를 식민지라는 "노예화" 시켜 험한 일 아웃소싱 다하니까, 본국에는 노예제가 필요없게 되어 일찍 폐지한 거지. 본국 하층민 밑에 외국에 최하층민 만든 게 좋은 건가?
일본에서는 자유민조차 마비키한지가 수백년인데? 60~80% 세율로 입하나 덜자고 엄마들이 자기 아기를 죽이는 게 당연시되었지. Fabian Drexler 作 마비키 찾아봐
에도시대의 번영은 마치 북한의 평양이 번영했다고 포장하는 꼴. 평양이야 50년전보다 발전했지, 타 지역을 희생시키서. 에도시대는 각지 영주들이 다시는 사병 모집해서 전국시대 못하게 수도에 돈을 집중하는 정책을 편 것 뿐.
다테 마사무네와 우에스기 겐신은 전국시대 투탑 노예상이었지. 한명당 20, 30문씩 팔았지
이거 때문에 선교사 따라 개종해서 로마 갔다와본 덴쇼 소년 사절단 때, 일본 소년들이 동남아, 인도, 동아프리카, 서아프리카, 포르투갈, 등 배가 정박하는 곳마다 일본인 노예가 보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건 중개 차익을 노린 포르투갈 노예상보다는 가축보다 싸게 판 일본인들의 잘못"이라고 함
중국을 갖고 논 환관들은 법적으로 노비였지. 황제의 노비. 마찬가지로 내시들도 조선 왕의 노비인데 종2품까지 관직 해먹을 수 있었는데?
정창수 김만덕 같은 노비들 봐라. 김만덕은 대기업 여자 회장이고, 정창수는 명문대 입시 1타강사. 원래 높으신 분의 노비가 되면 일반인들보다 실질적 지위가 높음.
말만 노비지 그냥 2등국민이잖아
사유재산 소지가능해서 그걸로 관직까지 산 사례도 있는데? (19세기 영국 동인도회사가 과거제도 따라 임용시험 도입하고 영국 정부도 따라하기 전까지는 유럽에선 매관매직이 정상이었음)
우리나라는 항상 우리편한테 제일 못해주더라
근데 저런 투항한 적군이 집단으로 있으면 당시 조정측에서도 엄청 부담됐을듯 마치 고조선 시기 위만이 준왕을 몰아낸 사례나 고려말 여진족출신에 가까운 이성계를 떠올려본다면... 결국 좋은 인재가 있어도 그걸 등용하는쪽이 못나면 서로 곤란해질뿐
이성계집안은 여진족 출신이 아닙니다
잘못아셨네요. 이성계 고조부가 사고를 쳐서 그 집안일족이 함경도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았고, 당시 그지역은 원나라소속이었을 뿐입니다
함경도일대에 노비나 가솔들이 다 옮겨 갔는데 그 가솔과 노비들의 집단이 가별초였고 이성계집안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이 있을정도 였습니다
다만 이성계가 여진족 출신인 이지란과 의형제사이를 맺었다 정도입니다
@@람쥐썬더1 네... 역사적 기록이 제일 중요한거니깐요...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도있듯이 어찌됐던 정당성을 부여하고 신격화시키는건 당연한거니깐요 분명한건 이성계의 뿌리가 뭐든간에 원래부터 고려조정의 신하는 아니었다는거죠.
@@OTL-T_T그냥 조선이 무능한게 아닐까?ㅋㅋ 씹 보수적이고 유교에 집착하니까
일본역사도 재미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본은 근접전 위주의 전술이라 큰칼과 긴창으로 무장하였고 조선군은 근접전 보다 멀리 있는 적을 활로 쏘아 죽이는 전술을 쓰다보니 활을 쏘기에 불편해진 칼과 창이 짧아지게 됨
원거리 잡병만 중시하니 저렇게 털린거...
조선 환도가 짧았던건 여진족 기마병들과 근접해서 싸울때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왜그런지 모르겠는데 북쪽전선에선 일본처럼 긴 창을 안썼습니다. 활 특히 편전과 화기의 위력이 워낙 좋아서 치고 빠지는 여진족들 상대하기 충분했던겁니다. 근데 왜군이 조총이 생기자 조선궁시의 위력이 상쇄되니 그동안 상대할 필요가 없었던 일본의 다치(타도:일본도) 나기나타(치도:자루 긴 칼) 가마야리(겸창:직선날에 가지달린 장창)의 위력앞에 크게 당했습니다.
@@Lucas-HH 궁수는 고급병종임.
그러니 항왜들을 잘활용해 그들로 구성된 근접전투병은 물론 그들에게 조선군을 훈련시켜 조선군으로 구성된 근접전투병을 양성 했다면 원거리 전투와 근접전투를 병합한 전략을 구성할수 있었겠죠
활쏘기가 원거리 공격에 유리하지만 헐리우드 영화나 중국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탄막형성 공격이 아닌 조준사임. 조선 각궁은 바로 눈앞의 적부터 유효사거리 150m까지 다양한 타격거리를 가짐. 쉽게 말해 반지의 제왕의 활이 주무기인 엘프족이 조선군 스탈에 가까움. 레골라스 생각하면 됨.
항왜를 주제로 영화나 드라마 한번 잘만들면 대박칠듯 한건 나뿐인가?
항왜가 당연히 전투 잘하겠지만 소수고 실질적으로는 승군(서산대사와 두제자가 장군)들이 육지와 바다(이순신을 도움)에서 양동으로 왜를 격멸했습니다.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순왜 일본으로 귀화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부탁드립니다.
전쟁나니까 도망가기 바빴던 ㅂㅅ같은 왕과 좀비같은 신하들이 다스린 찬란한 조선왕조500원짜리 역사 ㅋㅋㅋㅋ
진린의 후손이 우리땅에서 성씨 만들고 있다고 알고있어요 한국땅에 살면서 동화되고 한국인과 생각이 같은면 한국인이죠
저렇게 분전한 병사들을 왜 토사구팽했는지 의문이네요. 당시 전란으로 혼란스럽던 조선 입장에선 매우 귀중한 전력이었을 텐데...
이괄의 난때 항왜 2백여명이 선두에 섰는데 대부분 중년 노년이었을 그들이 워낙 창칼 싸움의 명수들이라 아무리 젊은 조선병사들이 삼수병 체제로 근접전투 훈련을 받았어도 전투현장에서 맞붙으니 도저히 상대가 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임란 이후 검술을 훈련시킨 조선 병사들을 항왜들에게 보여주자 애들 장난 같다고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아무튼 김충선 같은 경우 말고는 굉장히 위협적인 자들이 될것이라 생각한 조선 측에서 지레 겁먹고 탄압한 것으로 보는게 타당합니다.
와.. 일본인들이 서로 죽이고 싸우다...조선에 넘어와서.. 조선을 많이 도와준거네여..
항왜도.. 엄청난 힘을 보태준듯...
모든지.. 역사는
전쟁의 탐욕은 끝이 없네여
한국이나 일본이나 배신때리는것은 다똑같은듯..
6.25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북한군이 설치한 기뢰제거 작전을 미군군속 일본인들이 했고,
기뢰제거 작전중 많은 일본인이 희생됐지만,
정작 이들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작전중 사망자로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이 나라는 일본에 대한 반감이 워낙에 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