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사 이야기 53편 : 강렬(?)했던 미군의 첫 인상 : 시디부지드/카세린 협곡 전투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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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21 жов 2024
  • 안녕하세요?
    늦었지만 53편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
    이번 편은 2차 세계 대전 중 미군과 독일군의 첫 만남인
    시디부지드 전투와 카세린 협곡 전투 편입니다
    롬멜이 버티던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미군들은 처음 만난 독일군들에게
    무참히 깨지지만 이후 정신을 차리고 승승장구하며 유럽 전선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항상 감사드리며 구독자 여러분의 광고시청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즐감하세요!
    (잘못된 정보가 있어 정정합니다
    7분쯤 나오는 '판더' 전차는 오류입니다 판더 전차는 북아프리카에 파견되지 않았습니다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
    BGM
    Third Gate - Wydron
    Warrior_Strife - Jingle Punks
    Cavalry - Aakash Gandhi.mp3 (UA-cam's Audio Library)
    Hypnosis - Godmode.mp3 (UA-cam's Audio Library)
    Allegations of Investigations - Jesse Gallagher.mp3 (UA-cam's Audio Library)
    -----------------------------------------------------------------------------------------------
    en.wikipedia.o...
    en.wikipedia.o...
    mikesresearch....

КОМЕНТАРІ • 100

  • @1130kwc
    @1130kwc 2 роки тому +2

    좋은 영상 감사드립니다

  • @pillseung1804
    @pillseung1804 2 роки тому +5

    좋은 채널인데 응원합니다

  • @sjl8315
    @sjl8315 2 роки тому +18

    미군의 셔먼 전차를 상대한 독일군의 주력전차는 3호와 4호 전차였습니다. 성능만 보면 셔먼이 절대로 꿀리지 않았지만 미군의 경험부족에 따른 전술적인 실패로 피해를 많이 본 것입니다.

    • @조성민-z7b
      @조성민-z7b 2 роки тому +5

      사실 셔먼이 3,4호 보다 한 체급 큰 전차죠.

    • @박희수-t8d
      @박희수-t8d 2 роки тому +2

      @@조성민-z7b 화력에서 앞도적이고 방어력도 3,4호 공격은 이빨도 제대로 안걸린

  • @eddietheprodigy
    @eddietheprodigy 2 роки тому +3

    영화 퓨리 재미있게 봤었습니다. 티거 전차 관련 뒷이야기 몰랐는데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보고갑니다.

    • @defeatube
      @defeatube  2 роки тому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ㅎ

  • @황약사-d9y
    @황약사-d9y 8 місяців тому +2

    롬멜의 일기 " 우리는 오늘 미군들에게 전투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롬멜은 한 전사한 미군에게서 그 어머니의 편지와 같이 있던 초콜릿 케잌을 발견하고 가져온 부관에게 출처를 전해듣고는 패배를 직감했단... 당시 독일군은 식량부족, 탄약부족에 시달리던 때였는데, 미군은 본국에서 초콜릿 케잌까지 공수해다가 먹는다는 걸 보고는 보급에서 밀린 군대가 이긴적이 없다는 말을 히틀러에게 했단... 뭐 책에서 본 내용입니다. ^^

    • @rok-5858
      @rok-5858 7 місяців тому

      젊은시절 1차대전에서 말년까지 전장과 야전이 곧 일생의 배경이 되다보니 정말 전장의 이성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모자의 연민이 아닌, 보급상황에 탄식한, 진정한 전장의 T발(?) 롬멜 장군님

  • @miripdang
    @miripdang 2 роки тому +3

    참 지휘관이 멍청해서 지원도 보내도 한번를 보내는게아니라 조금씩보내서 포위당하고 구출하러보내도 똑같이 당하니..참
    오늘도 잘 봤습니다

  • @note20ultra5ggalaxy4
    @note20ultra5ggalaxy4 2 роки тому +1

    감사합니다^^

  • @무명유튜버-j2v
    @무명유튜버-j2v 2 роки тому +4

    미군의 전투초보이던 시절
    룸멜 장군님께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다는 전설

  • @lcg279
    @lcg279 2 роки тому +2

    기다렸습니다.. 반갑습니다. ^^

  • @vanderasantonio761
    @vanderasantonio761 2 роки тому +3

    형~~~😁😁
    자주자주 좀 만나요~~🤪🤪

  • @bluered7839
    @bluered7839 2 роки тому +12

    판터는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된 적이 없음. 그리고 중전차가 아니라 중형 전차로 분류함.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Рік тому

      저도 판터 전차 투입이야긴 처음 듣네요.

    • @AFVFactoryClubWWII
      @AFVFactoryClubWWII Рік тому +1

      이때는 티거 초기형과 4호전차 G 초기형 그리고 3호전차 N형이 투입됐죠

  • @megsan80
    @megsan80 2 роки тому +4

    물량 앞에서는 명장 롬멜이라도 어쩔 수가 없죠

  • @최고소비에트
    @최고소비에트 2 роки тому +8

    근데 그건 그렇고 북아프리카에서는 판터가 간적이 없긴합니다

    • @춘식이-g6o
      @춘식이-g6o 2 роки тому

      ㅇㅇ 그렇죠 쿠르스크때가 데뷔전인데 그보다 먼저인 저때 나온다 그러고 ㅋㅋ

    • @defeatube
      @defeatube  2 роки тому

      앗 죄송합니다! ㅜ

  • @최고소비에트
    @최고소비에트 2 роки тому +19

    미군이 연합군판 이탈리아던 시절ㅋㅋ

    • @coho3-d5v
      @coho3-d5v 2 роки тому +1

      2차대전때 미군부대들도 찾아보면 은근히 어이없는 삽질을 해서 패배하거나 큰 피해를 입는 부대들 있더군요

    • @신광인-y9l
      @신광인-y9l 2 роки тому +6

      @@coho3-d5v 전쟁전에 겨우 십여만명 있던 군대가, 단기간내에 백만단위로 불리는데, 당연히 장교 부사관 병 모든 계층의 인적자원들이 전문성이 있을리가;;;;

    • @혁신-s5y
      @혁신-s5y Рік тому +2

      애초에 당시에 미군은 전차는 보병 지원용이지 생각하고 중형전차보단 중전차 경전차에 포커스를 두고 전략 전술을 만들었지만
      영프가 털리는거 보고 그때서야 중형전차를 만들거 전략 전술을 만들었죠
      방면에 소련은 1940년에 중현전차인 t34를 실전 배치한 반면 미군은 1943년이 되어서야 m4셔먼을 실전 배치 하는등
      당시 소련 독일보다 기갑부대에 대한 기본 개념이 늦게 잡혀 있었죠

    • @혁신-s5y
      @혁신-s5y Рік тому +2

      @@신광인-y9l 독일도 상황은 비슷했는데 라인란트 재무장 전까지만해도 독일군수가 10만명으로 한정적이여서 부사관 장교로 10만명을 체우긴 했으나 실질적으로 라인란트 제무장 하고서 모집된 병사들은 대부분 훈련이 부족한 군대였음
      다만 당시 독일군은 전차병 숙련도가 넘버원이여서 기갑사단이 냅다 달리면 보병이 보조 해주는 식으로 하면서 독일군이 강하게 느껴 진거지 독일군 전체가 강했다고 보기는 힘듬
      기갑사단만 강했음 그리고 기갑사단이 초반에는 그렇게 많지도 않았고

    • @혁신-s5y
      @혁신-s5y Рік тому

      아르님이 롬멜을 시기 질투해서 롬멜과 군대 운영권을 두고 싸우는등 트롤짓만 안했다면 독일이 이겼을수도 있었죠 당시 기준애서 보자면

  • @박희수-t8d
    @박희수-t8d 2 роки тому +11

    아이젠하워 장군은 알면 알수록 명장인데 몽고메리는 알면 알수록 부하의 공세울 절호의 기회도 가로채고 똥고집으론 뭉쳐진 아집덩어리..근데 이 고집쟁이 영국놈을 잘 구슬려 써먹은 아이젠하워 장군은 진짜 용병의 최고봉을 보여줬다고 평하고 싶네요.

    • @scz8333
      @scz8333 Рік тому

      2차대전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 약 80%를 영국-캐나다군이 상대.
      당시 미군은 실전 경험 사실상 전무했던 신병들로 구성되어, 독일 주력 상대 불가능해 영국군이 독일 주력 담당.
      노르망디 전역에서 영국-캐나다군이 독일 5호 판터 및 6호 타이거 전차를 상대로 어떻게 싸웠는지 소개하죠.
      1. ua-cam.com/video/cNGGt1ORO-0/v-deo.html
      Sherman Firefly vs King Tiger | July 1944 | Tank Duel ----------------------> 44년 7월 18일, 파이어플라이 서부전선 최초 킹타이거 격파.
      2. ua-cam.com/video/V-jGdZ5XWNM/v-deo.html
      Sherman Firefly vs SS Panthers - Tank Battle At Normandy, France ------------------------------> 44년 7월 9일, 캐나다군 파이어플라이 판터 7대 격파.
      3. ua-cam.com/video/IrEtdMkFA00/v-deo.html
      Tank Battles of WW2 - The Firefly Ace that knocked out 5 Panthers with 5 rounds ------------------> 44년 7월 14일, 파이어플라이 1대가 5번 사격, 5대 판터 격파
      노르망디 전역에서 미하일 비트만이 탄 타이거 역시 영국군 파이어플라이에게 격파당해 전사.
      4. ua-cam.com/video/R4LyLCOUkzI/v-deo.html
      Cromwell vs 2 Panther tanks | September 1944 | Tank Duel ----------------------> 노르망디 돌파 후 44년 9월 19일 네덜란드, 영 크롬웰 전차 판터 2대 격파.
      파이어플라이와 같은 17파운드 포를 장비한 크롬웰도 판터 타이거 격파 가능. 크롬웰은 당시 전차 중에선 기동성 가장 좋아 최고 속도 시속 약 65km/h.
      영국은 북아프리카에서 타이거와 첫 교전 후 대응으로 43년 무렵 MBT 개발 시작,
      그 사이 과도기에 미 셔면에 17파운드 포를 장착한 파이어플라이 및 크롬웰 등으로 응급 조치하며 버틴 것.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 때 미군은 타이거 판터 대비 측면에선 사실상 멍 때렸던. 영국은 종전까지 약 2천대 파이어플라이 생산했고,
      노르망디 상륙 때는 파이어플라이 생산 초기여서 초기 생산분 약 350대를 투입했다고.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약 80%는 영국군이 담당.
      노르망디 전역에 투입된 미국과 영국의 전차 중에서 전차포로 독일 판터나 타이거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군 파이어플라어-크롬웰 정도.
      파이어플라이 역시 약한 장갑 때문에 극심한 피해를 당했지만, 독일 타이거나 판터 역시도 파이어플라이에게 먼저 공격당하거나 매복에 걸리면 격파당했기도.
      노르망디 전역은 이미 독일군이 방어진지를 구축한 이후에 벌어진 전투로, 탁 트인 들판에서 전차가 고속 기동하는 전투 아닌 보카쥬 지형에서의 매복성 전차 전투.
      처음엔 공격하는 영국군 전차가 매복한 독일군 전차에게 당하는 위치였지만, 전투가 계속되면서 독일군 전차도 영국군 매복이나 배후 침투에 당해 격파되었던.
      독일의 그 어떤 전차라도 격파할 수 있는 전차포를 가진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겁니다.
      원거리에서는 약한 장갑 때문에 독일 타이거에게 당할 위험이 컸지만, 보카쥬 지형에선 원거리 아닌 근접 전투도 많았기에 파이어플라이는 나름 역활을 한.
      하지만 미군의 일반적인 셔면은 판터나 타이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독일 패전 직전인 1945년 1월, 2대의 독일 판터가 21대의 미 셔먼과 교전했을 때 ----------------> 셔먼 9대 격파 + 셔먼 12대 포획.
      만일 보통의 셔먼만 아닌 파이어플라이와 혼성 편성되었다면 판터의 저런 전과 불가능. 45년에도 저랬으니 실전 경험 없었던 44년 노르망디에선 더 취약했을 것.
      2 SS Panthers vs. 21 US Shermans
      ua-cam.com/video/86K0ncTkAkA/v-deo.html
      1945년 ( 영 최초 MBT인 센츄리온의 직전 모델인 ) 실전 투입된 마지막 순항전차 코메트.
      ua-cam.com/video/tRxU0B8cybY/v-deo.html
      Comet Tank vs Tiger Tank | April 1945 | Tank Duel ----------------------------> 45년 4월 종전 직전, 영 코메트(센츄리온 직전 모델) 타이거 격파
      여기 영상의 코메트 모습은 현대 주력 전차 유사, 하지만 센츄리온으로 바로 대체된. 최초의 MBT인 센츄리온은 너무 늦게 투입되어 실전 경험 없었음.
      ua-cam.com/video/0AnoySTfvFM/v-deo.html Centurion - Tiger Tank's Nemesis
      1945년 5월 8일 독일 항복.
      독일 항복 직후인 5월 14일, 센츄리온 6대 영 항구에서 선적, 몇 일 후 안트워프 항에 하역.
      최전선 소련군 점령지 경계까지 약 400마일 자력 기동 영국군 기갑부대 배속, 영 미 탱크들과 함께 대규모 야전 기동 훈련 후 7월 귀환.
      ----------------------------------------------------------------------------------> 2차대전 종전 당시 미 퍼싱, 영 센츄리온 등장으로 이미 독일 전차의 질적 우위는 끝난 상태.

    • @scz8333
      @scz8333 Рік тому

      타이거 전차 손실 통계 소개합니다.
      북아프리카-이태리-북서유럽전선 합산한 서방연합국과의 교전 중 손실 550대 + 동부전선 손실 1168대.
      노르망디 상륙 이후 즉 북서유럽 전선에서의 타이거 손실은 358대. 전투중 손실은 북서유럽전선 148대/총358대 + 동부전선 499대/총1168대.
      즉 타이거 전차는 비전투 손실율이 약 60%에 달할 정도로 전차 : 전차 전투에서 막강한 위력, 하지만 기계적 결함과 유지 보수 측면에서 문제가 많았던.
      서부전선 전체에서 당한 타이거 손실 550대는 동부전선-독소전에서 당한 타이거 손실의 약 47%.
      ( 이런 자료도 있더군요. 노르망디 전역에 투입된 독일 전차 약 2300대에, 그 중에서 5호-판터 + 6호-타이거 합이 약 500대라는 )
      ( 영국은 종전까지 파이어플라이 약 2,000대 생산,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 때는 생산 초기라 초도 생산분 약 350대 투입했다고 합니다. )
      ( 만일 영국이 노르망디 전역 당시 17파운드포 장착한 파이어플라이-크롬웰 등 투입하지 않았다면 전역 돌파는 더욱 힘들었을 것. )
      자료 인용
      Tiger Losses
      By Christian Ankerstjerne - Last modified 2022-08-13
      1. 손실 원인별 통계
      Detailed Group Tiger I Tiger II Total, detailed Total, group Percentage
      Combat losses
      Aircrafts Aircrafts - 30 1 31 2%
      Bombers Aircrafts 11 3 14
      Fighter-bomber Aircrafts 4 12 16
      Anti-tank gun Anti-tank gun 38 11 49 49 3%
      Assault gun Armor 4 4 8
      Tank destroyer Armor 2 2 4
      Tanks Armor 50 30 80
      Artillery Artillery 12 1 13 13 1%
      Combat Combat 406 89 495 495 29%
      Infantry Infantry 5 6 11 11 1%
      Mines Mines 1 - 1 1 0%
      Total, combat 533 159 692 692 40%
      Non-combat losses
      Abandoned Irrecoverable 46 50 96 341 20%
      Bogged down Irrecoverable 39 11 50
      Immobilized Irrecoverable 101 57 158
      Irrecoverable Irrecoverable 35 2 37
      Unrepairable Mechanical 127 3 130 260 15%
      Mechanical failure Mechanical 75 55 130
      Out of fuel Out of fuel 24 33 57 57 3%
      Total, non-combat 447 211 658 658 38%
      Unknown/other losses
      Friendly fire Accidents 11 - 11 18 1%
      Road accident Accidents 3 4 7
      Blown up Blown up 69 28 97 97 6%
      Captured Captured 16 3 19 22 1%
      Surrendered Captured 3 - 3
      Converted Other 1 - 1 18 1%
      Other Other 1 - 1
      Out of ammunition Other - 1 1
      Stranded Other 7 - 7
      Transit Other 8 - 8
      Unknown Unknown 139 74 213 213 12%
      Total, unknown/other 258 110 368 368 21%
      Total 1238 480 1718
      While many of the combat losses are not specified, it is clear from the numbers above
      that the common myth about Allied aircrafts being the scourge of the Tiger tank has no basis in fact.
      2. 전역별 손실 통계
      Losses by front ( 전역별 손실, 북아프리카-이태리-동부전선-북서유럽전선 )
      Destroyed Tiger I of schwere Panzer-Abteilung 501 at Hunt's Gap in Tunisia.
      Destroyed Tiger II of schwere SS-Panzer-Abteilung 101 in Jemappes, Belgium.
      Cause Tiger I Tiger II Total
      Africa
      Combat 6 - 6
      Non-combat 25 - 25
      Total 31 - 31 ---------------------------------> 엘 알라메인 패배 뒤, 튀니지 방어전에 투입된 타이거 손실이 총 31대.
      Italy
      Combat 39 - 39
      Non-combat 85 - 85
      Other/unknown 37 - 37
      Total 161 - 161 ---------------------------------> 이태리 전선에서 타이거 손실이 총 161대.
      Eastern Front
      Combat 402 97 499
      Non-combat 273 125 398
      Other/unknown 184 87 271
      Total 859 309 1168 ------------------------------> 동부전선에서 당한 타이거 손실 총 1168대.
      Western Front
      Combat 86 62 148
      Non-combat 64 86 150
      Other/unknown 37 23 60
      Total 187 171 358 ----------------------------------> 노르망디 상륙 이후 북서유럽 전선에서 타이거 손실이 총 358대.

    • @scz8333
      @scz8333 Рік тому

      노르망디, 미군의 코브라 돌파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ua-cam.com/video/p-9w2J5s0xU/v-deo.html
      코브라 돌파 직전 까지, 독일 기갑부대 약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는 까앵에서 영국군과 교전. 그 빈 틈으로 미군의 돌파.
      까앵 최종 함락 단일 작전에서 영국군은 약 500대의 전차 손실. 당시 영국군 총 전차의 약 35%를 단일 작전에서 손실.
      까앵 함락 때 독일군 전차 약 600대 및 독일의 거의 모든 판터 및 타이거 전차가 영국군에 붙들려 고착 분쇄되어 나감.
      당시 미군 전면에 배치된 독일 전차는 약 150대, 판터나 타이거는 거의 없었고.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교전국들의 최종 전차 손실.
      영국 약 1200대. 독일 보병을 주로 상대했던 미국 역시 약 1200대 손실. 독일은 약 1300대.
      당시 미 지상군이 독일 주력을 담당했던 영국과 거의 동일한 전차 손실을 당했다는 것은 미군이 신병 수준이었기에.
      독일이 당한 전차 손실은 전차 대 전차 전투 보다는 공중공격 및 함포사격 등 피해나 전차전 때 궤도 손상 후 후퇴할 때 유기 자폭 많음.
      즉 전차 대 전차 전투에서 영국과 미국이 독일 전차와 겨루기는 힘들 정도의 압도적 성능 차이.
      패튼의 미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던 것 아님.
      영국군은 노르망디 전역 독일 주력 기갑부대를 몸빵으로 처절하게 공격하며 독일군을 제거한 것.
      미국과 영국은 불행히도 45년 초가 되어서야 타이거와 대등하게 전투할만한 신형 전차를 전선에 투입.
      하지만 너무 늦게 투입되어 교전할만한 독일 전차 기갑부대 자체가 소멸해 별 전과 없음.
      ------------------------------------------------------------------------------------------------
      노르망디 전역 미군의 코브라 돌파에 대한 다큐 링크를 걸면 유튭에서 글이 삭제되곤 해서 간단 소개합니다.
      노인이 된 브래들리 장군의 인터뷰 및 코브라 돌파 상세한 과정을 다룬 다큐인데, 그 유튭 영상엔 수 많은 영미권의
      댓글들로 넘쳐났습니다. -------------------> 패튼이 코브라 돌파한 것 아닌 것에 놀라고, 패튼이 노르망디 상륙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놀라고, 그 영상 제목이 영어로 패튼의 코브라 돌파라는 어구도 포함되었는데 내용적으로 패튼은 나오지 않고 브래들리만 나왔기에
      영상 제목을 바꿔야한다는 댓글들도 있더군요. 패튼대전차군단 할리웃 영화 영향력 때문인지 미국 일반인들도 패튼이 코브라 돌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흔히 패튼이 지휘한 미3군이 코브라 돌파 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패튼이 아닌 브래들리 휘하 미1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냈고 패튼은 그 이후에,
      재편성된 신규 미3군의 지휘관으로 투입된 겁니다. 브레들리의 코브라 돌파는 44년 7월 말 이루어진.
      노르망디 상륙 당일만이 아니라 상륙 후 1달이 넘어서 까지 패튼은 영국 본토에서 대기.
      코브라 돌파를 해낸 미1군 지휘관, 오마 브래들리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해 직접 서술한 내용. 맨 앞 첫 구절만 우리 말로 옮기면 --------------------------------->
      (영국군은 독일군을 갈아버리기 위해 깡의 독일 기갑부대로 진입했다, 미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낼 수 있도록.)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압도적 전차 성능 차이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동안 영국군도 갈려나갔습니다. 소개된 뒷 부분을 옮기면
      (... ...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격 속도와 전진한 거리로 그 전투의 성공을 평가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즉 영국군의 돌파라는
      자부심을 계산하지 않고 몽고메리는 최종 작전 계획에 서명했다... ... 영국군은 인내와 자제력으로 그들에게 부여된 수동적 역활을 견뎌냈다.)
      -------------------------> 많은 이들은 인용한 원문 마지막 부분 주장과 같이, 군이 적진을 돌파하는
      진격 속도와 전진 거리로만 성공과 능력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적 주력을 견제-고착- 섬멸 등을 해야, 그런 돌파가 가능한.
      40년 프랑스를 항복시킨 전격전은 적 주력을 견제만 하는 뒤통수 때리는 돌파, 하지만 44년엔 견제만으로는 돌파가 불가능했던.
      40년엔 장난감 수준의 전차로도 전격전이 가능했지만, 전쟁 말에는 그 어떤 중무장 전차도 쉽게 뚫을 수 없이 변해버린, 게다가 전차
      성능에선 독일의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갈려나가면서 적 주력을 고착-분쇄시켜야만 했던.
      --------------------------> 노르망디 전역, 당시 미군은 독일군 주력을 상대할 역량이 없었기에,
      영국군이 갈려나가면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별로 폼나지 않는 수동적 역활을 담당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미군 지역의 독일군 방어력 약화를 이용해 미군이 돌파하도록 상륙 전에 이미 작전 계획을 세웠던 것.
      ----------------> 오마 브래들리가 얼마나 겸손하고 사려 깊은 지휘관인지 패튼의 알려진 언행과 비교해보길.
      만일 패튼이 코브라 돌파를 지휘했고 성공시켰다면, 오마 브래들리와 같이 서술하기는 힘들었을 것. 모든 것이 위대한
      미국과 탁월한 자신의 능력으로 독일군을 분쇄한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 큰.
      그렇다면 패튼은 왜 이렇게 과대 평가되고 널리 알려졌겠습니까? ----------------> 극한의 할리웃 영향력?
      또한 벌지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결정적 지상전 승리이기에 패튼을 미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킬 필요성도 있었을 것.
      (콰이강의 다리)-(패튼 대전차군단) 두 영화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영화 내용과 성격은 완전히 상반되죠.
      성조기 나부끼고 번쩍이는 별 박힌 철모에 상아 손잡이 권총의 지휘관이 2차대전 독일군 괴멸시킨 것으로 선전하는 영화가
      과연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만한 수준인지 지극 의심스럽지만 받았답니다. 어릴 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역사를
      좀 알게 된 이후에 그 영화 다시 보니 참... 자잘한 것 하나 더 추가한다면, 강릉에 잠수정 침투했을 때, 소탕전 나선 우리 군 일부
      번쩍이는 계급장 때문에 저격당해 전사.
      (오마 브래들리 서술 관련 펌.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While Collins was hoisting his VII Corps flag over Cherbourg, Montgomery was spending his reputation in a bitter siege against the old university city of Caen. For three weeks he had rammed his troops against those panzer divisions he had deliberately drawn towards that city as part of our Allied strategy of diversion in the Normandy Campaign. Although Caen contained an important road junction that Montgomery would eventually need, for the moment the capture of that city was only incidental to his mission. For Monty’s primary task was to attract German troops to the British front that we might more easily secure Cherbourg and get into position for the breakout.
      In this diversionary mission Monty was more than successful, for the harder he hammered towards Caen, the more German troops he drew into that sector. Too many correspondents, however, had overrated the importance of Caen itself, and when Monty failed to take it, they blamed him for the delay. But had we attempted to exonerate Montgomery by explaining how successfully he had hoodwinked the German by diverting him toward Caen from the Cotentin, we would have also given our strategy away. We desperately wanted the German to believe this attack on Caen was the main Allied effort.
      But while this diversion of Monty’s was brilliantly achieved, he never the less left himself open to criticism by over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his thrust toward Caen. Had he limited himself simply to the containment without making Caen a symbol of it, he would have been credited with success instead of being charged, as he was, with failure at Caen. For Monty’s success should have been measured in the panzer divisions the enemy rushed against him whilst Collins sped on toward Cherbourg. Instead, the Allied newspaper readers clammered for a place name called Caen which Monty had once promised but failed to win for them.
      The containment mission that had been assigned Monty in the Overlord plan was not calculated to burnish British pride in the accomplishments of their troops. For in the minds of most people, success in battle is measured in the rate and length of advance. They found it difficult to realise that the more successful Monty was in stirring up German resistance, the less likely he was to advance. For another four weeks it fell to the British to pin down superior enemy forces in that sector while we maneuvered into position for the US breakout. With the Allied world crying for blitzkrieg the first week after we landed, the British endured their passive role with patience and forbearing.)

    • @scz8333
      @scz8333 Рік тому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더 쉽게 깨집니다.
      ua-cam.com/video/34oR2D1GVU4/v-deo.html :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2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결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인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 @scz8333
      @scz8333 Рік тому

      Secret 1944 Mission to Assassinate Germany's Panzer Leaders :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 지휘부 제거 공습
      ua-cam.com/video/c844En8XvC4/v-deo.html
      미군이 롬멜 공습해 전선 이탈시키지 않았습니다.
      미군이 핀포인트 공습으로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군 최고 지휘부 제거한 적 없습니다.
      미국이 가지지 못한 영국의 정보능력, 브레칠리 파크의 에니그마 암호 해독으로 얻은 정보 울트라.
      울트라 정보로 독일의 역습인 모르탱 반격과 독일 기갑부대 최고 지휘부의 위치 모두 알아냈습니다.
      영국 제2전술 공군의 전술기들이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 기갑부대 지휘부를 어떻게 제거했는지 보기를.
      동영상 4분50초 이후 참조 (영어 자막만 제공됨)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
      6월8일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 위치를 파악하고, 6월10일
      영국 제2전술공군은 호커 타이푼 42대, B-25 72대, 호위 스핏파이어 4개 편대 동원해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를 급습했습니다. 다수 지휘관 참모들이 사망하고, 지휘 통신차량등이 파손되어,
      노르망디 상륙지에 대한 독일 서부 기갑군의 반격을 하루 연기하려 했지만 지휘부 희생이 너무 커 파리에서
      새로 지휘부 구성하고 반격은 3주 연기되었습니다. 이 동영상 보니 영국은 이미 1차대전 때도 독일 빌헬름2세를
      공습으로 암살시도 했던 적이 있었군요. 북아프리카에서 롬멜 암살은 공습 아닌 특수부대 투입으로 시도했지만,
      롬멜은 행운으로 마침 숙소에 없어서 실패. 하지만 노르망디에서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 기습은 대성공.
      영국이 울트라 정보로 독일의 모든 방어 계획을 훤히 알고 있었지만 독 기갑군 상대 지극히 어려웠죠.
      적 정보를 아는 것과 적을 물리치는 것은 별개인 겁니다. 특히 전차전에서 전차의 성능 차이는 정보로 해결 안됨.
      격투기 헤비급 챔피온 상대로 그의 약점을 알아냈다고 해도 내가 격투기 선수가 아니면 아무 소용 없는 그런 상황.
      영국은 독일 암호 해독으로 독일의 모든 방어계획 반격작전을 파악하고 대응했지만, 그 대응에서 일선의 전차병들과
      군인들은 몸빵으로 떼워야 했습니다. 그래도 확연한 이점은 있었죠. 독일군 기갑군 주력이 까앵에 집결하고, 모르탱
      반격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대전차 함정을 파서 팔레즈 포켓으로 유인하고, 미군이 그 빈틈을 노려 돌파하도록
      미군에게 공세 개시 시점을 지정해준 것.
      미국이 2차대전 물주인 것 분명합니다.
      영국 보다 북서유럽 상륙군 최종 병력이 3 :1로 훨씬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노르망디 상륙과 그 이후의 전투를 거의 다했고 영국은 들러리라고 하긴 힘들죠.
      미군은 파리를 점령하고 그 쪽에서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베네룩스 3국을 경유하면서 해안가를 끼고 전진했죠.
      이유는 독일의 v-1, v-2, v-3 기지 제거와 해안 항구 확보로 보급을 해결하기 위해서.
      v-3는 초장거리 대포입니다. 포신 길이가 과장 좀 보태면 100m대. 영국 입장에선 최우선 목표.
      영국 본토가 독일 로켓과 장거리포로 타격당하던 시기라.
      영국 공군이 5톤, 10톤 짜리 블록버스터로
      우선 독 로켓 기지 예상 지점 폭격하고, 그 뒤에 영국 지상군이 점령해서 위협을 최종 제거.
      노르망디 상륙 때 동원된 해군 미군이 많겠습니까? 아니면 영국이 압도했겠습니까? 인공항구, 해저송유관도.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펜(영어 발음으로 안트워프) 점령을 영국이 해야 더 합리적이죠. 모든 유지보수 인력은
      미국이 아닌 영국이 담당하기 더 편하니까.
      또한 독일이 그런 중요한 항구 지역 순순히 내줄 이유 없으니, 항구와 항구 인근 해안과 강 지역에서
      소규모의 상륙전도 전개되었습니다. 항구 점령한다고 바로 사용할 수도 없죠. 독일군이 다 폭파시킨 후 점령.
      그것 다 치우고 새로 항구 개통도 영국 몫이죠. 미군은 독일군 상대로 전투 주력하며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잡다한
      일들 함께 하면서 전진했습니다.
      영국 본토가 아닌 최전선의 연합군을 향한 독일의 v-2 공격 ,
      역시 대부분은 미군 지역이 아닌 영국군이 담당한 안트베르펜등 항구 지역이었습니다.
      독일의 소중한 전략 자산 v-2, 패튼의 미3군과 같은 곳 보다는 전쟁 수행에 더 치명적인 지역 공격.
      미영소 당시 인구 영국은 5000만이 될까 말까, 소련은 1억5천만 이상, 미국도 1억3천만 정도.
      그 때문에 영국은 상시적 병력 부족에 시달렸던 겁니다. 미국이 북서유럽에 300만 투입할 때 왜 영국은
      고작 100만 밖에 투입하지 못했는지, 왜 영국이 겨우 100만 북서유럽에 투입하면서도, 지중해 북아프리카에
      육해공 100만 병력을 여전히 남겼는지 생각할 필요 있습니다. 영국군은 44년부터 그리스에서 빨치산 소탕.
      사실 수백만 미군을 대서양 건너 퍼나른 것도 영국이 더 많았죠.
      당시 세계 최대 여객선 7만톤 8만톤급이었던 퀸메리와 퀸엘리자벳은 미군 병력 만명 단위로 운반.
      퀸 메리호 1척이 2차대전 기간 동안 왕복하며 퍼나른 병력은 80만 조금 넘습니다. 퀸 메리와 퀸 엘리자벳 단 2척이 약 160만 병력 수송.
      저 거대 여객선이 미국에서 출발해 대서양 건너다 침몰당했다면, 미군 만명 이상이 한꺼번에 떼죽음 당하는 것.
      grey ghost 퀸 메리호, 단독으로 2차대전 기간 약 80만 병력 수송.
      ua-cam.com/video/MsoiKnnUskM/v-deo.html
      패튼 북아프리카에서 특별히 내세울 전투 없습니다.
      패튼 아니 미 지상군 전체는 북아프리카에서 사실 마지막 순간 숟가락만 얹은 겁니다.
      미공군은 지중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나름 역활했지만.
      1943년 5월 튀니스 함락 까지 미 지상군과 해군 별로 한 일 없습니다.
      영국 해공군은 몰타 방어 및 지중해 제해권, 영 지상군의 보급 유지와 지원 엄청난 전투치뤘죠.
      영국 지상군도 탁월한 롬멜을 상대로 고전했지만, 결국은 승리했습니다. 보급을 유지하는 것도 능력.
      롬멜이 보급만 충분했다면 승리?
      영국의 보급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면 그런 주장 할 수 없을 것.
      추축국 해상보급선은 시칠리에서 북아프리카 겨우 250마일, 영국은 최단 지중해 직항로
      지브롤타-몰타-알렉산드리아 3,500km, 전황 악화로 직항로 사용 못할 땐 아프리카 우회한 수만km 지구 차원.
      최단 3,500km도 집결 후 출발점인 지브롤타 기준입니다. 실제로는 영국-캐나다-미국에서 출발한 선단임을 고려해야.
      영국의 해상보급은 룰루랄라 진행된 것 아니죠.
      페데스탈 몰타 호송선단 보듯 어마어마한 자원이 투입된 겁니다.
      사실 2차대전 영국의 전쟁 수행, 최전방 전투 투입 아닌 보급 지원 운반에도 엄청난 자원 소모.
      대서양의 유보트전에서 유보트 1척 잡기 위해 미국과 영국은 함정과 항공기 합해서 약 100대 단위가 투입.
      되니츠 회고록, 전황 악화로 유보트를 철수시켜야 했지만 철수시킬 경우, 대잠전에 투입된 막대한 병력과 자원이
      독일 침공군의 전차 항공기 병력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을 보면서도 잠수함전 지속했다는 내용.
      북아프리카의 독일 이태리 추축군은 영국군에 의해 격멸되었습니다.
      미군은 횃불 상륙 때 나타났고, 전투다운 전투 해본 적 없고, 캐서린 패스의 미 기갑부대 데뷰전은 전멸.
      미 기갑부대가 캐서린 패스에서 노련한 독일군에게 전멸당할 무렵, 영국8군은 튀니지 거점 마랫 방어선을 뚫었고.
      시칠리에서도 패튼은 거의 전투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을 전투하면서 전진했고, 패튼은 지프 타고 손흔들면서 전진.
      패튼은 또한 노르망디 상륙에 직접 참여한 적도 없습니다. 상륙이 성공한 이후에 추가 투입되었습니다.
      패튼은 기만 유령부대 지휘관으로 도버에 있다, 상륙이 성공한 이후 투입됩니다.
      패튼이 일선에서 배제된 이유는 패튼대전차군단 영화에도 나오듯 사병 뺨싸대기 날린 후 징계탓도 있었고.

  • @나이스바디-w7p
    @나이스바디-w7p 2 роки тому +3

    그 많던 티거는 다 어디가고,,,저 1대가 유일하게 굴러간다니 ㅎㅎ

  • @coho3-d5v
    @coho3-d5v 2 роки тому +7

    0:50 영상에서 좀 잘못된게 있는데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와 알제리, 튀니지는
    2차대전까지는 독일의 협력국인 비시 프랑스의 영토라서 독일, 이탈리아군에게 점령된적 없습니다. 1:06 영국군의 경우 북아프리카 전역 초반에 튀니지를 점령한적 없습니다. 이탈리아령 리비아 동부까지 진격하다 늘어난 보급선 때문에 진격을 그만두고 방어에 들어가다 롬멜의 역공을 받고 리비아 - 이집트 국경까지 후퇴하게 됩니다

    • @coho3-d5v
      @coho3-d5v 2 роки тому +1

      참고로 미군의 최초의 실전투입은 가잘라 전투인데 미국 1기갑사단 소속 3개 의용대대가 영국군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덤으로 북아프리카 전역의 경우 '클로즈 컴뱃'(Close Combat: The Bloody First)이나 오더 오브 배틀 게임(Order of Battle : Allies Defiant & Allies Resurgent)으로 구현되어있습니다

    • @defeatube
      @defeatube  2 роки тому

      제가 표현이나 팩트 체크가 정확하지 않았던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정확한 정보 감사드립니다!

  • @timeplayer940
    @timeplayer940 2 роки тому +4

    셔먼 전차는 3,4호 전차정도는 쉽게 때려잡을 수 있었는데 하필 처음으로 조우한 전차가 티거였음. 미군 입장에서는 정찰하라고 소대급으로 보냈는데 꼴랑 몇대있던 티거 전차한테 전멸 당해버렸으니 공포심이 생기는 건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함. 쏘면 이빨도 안 먹히는데 상대 전차는 쏘면 차체랑 포탑이 분리되는데 안 도망가고 계속 싸운게 용하지

  • @JW-wq7vq
    @JW-wq7vq Рік тому +5

    움직이는 티거는 2대 ..퓨리를 찍을때도 2대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 @lamoking647
    @lamoking647 2 роки тому +4

    북아프리카 전선에는 판터가 안보네진걸로 아는데요?

    • @defeatube
      @defeatube  2 роки тому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된 정보를....ㅜ

    • @김민성-u2n1h
      @김민성-u2n1h 2 роки тому +2

      네 저 때는 5호 전차가 없었어요 43년 쿠르스크전투에 처음 투입된걸로 알고 있어요 아마 장포신 4호 G형이 갔을 거에요 티이거하고

  • @rightbloodyelbow
    @rightbloodyelbow Рік тому +4

    패튼대전차군단 첫장면 생각나네

  • @조영민-t4y
    @조영민-t4y Рік тому +1

    카세린전투는 미군입장에선 진정으 12:06 로싸우는법을 가르처준 전투였습니다, 독일이패한이유는
    첫째.만성적인 물자족독일에 방어전에 귀재 발터모젤은 하루만이라도 미군과 장비를 바꿔서 싸우고십다라고 말하였고 북아프리카를 지원하기위해 히틀러는U보틀 지중해에 파견해 독안에쥐처럼 전쟁기간이길어짐에 따라 소련과연합군은 독일군과 싸우는법을 알게되며
    독일입장에선 계륵인 북아프리카에서 수십만에 정예벙력이 포로가되니 만성적인 장비와 병력부족을격게 되니다

  • @dugo7119
    @dugo7119 2 роки тому +4

    잘봤습니다.
    진것이 훨씬 교훈이 되죠. 멋진컨텐츠
    1.롬멜은 기본 닥돌유형..세부적으론 기만유인후 당시 최고의 만능화포 88미리와 연동한 협격이 기본.. 하지만 쑈지만 원수지위까지가선 안될인물.. 어짜피 러시아 점령위해 사활인 히틀러입장.. 한두개 군단쯤 잡아두는 북아프리카가 중요한게 아니죠. 이탈리아군 사고친고 영국군 견제해라가 애초 입장인데.. 그말은 어짜피 군수지원 불가능.. 롬멜본인은 영국군에 구멍이 훤히 보이는데.. 안밀어붙이면 직무유기다 논리 그냥 밀어붙였는데.. 방어거점이 딱히 없는 지형특성상 한번 밀면 몇백키로가 전진하게 되는거../ 롬멜은 본인위해 소탐대실한거.. 물론 이때.. 가만 지키고 있었으면 독일입장 유리했나?? 그건 다른문제.. 하지만 롬멜입장에선 생각할 필요없는 문제..
    2.미군의 오퍼레이션 토치.. 실행할때 애초 독일군 지중해 해군기타에서 놔둔게... 이집트 지원부대쯤 착각한것.. 일단 상륙허용한시점.. 물량자체가 상대가 안되는거.. 패배는 기정사실..
    당시 프랑스 비시해군.. 저랬던 이유중 큰게... 독일에 항복후.. 처질 영국해군이 프랑스해군 대형 전함기타 주력함정 격침시킨게 있습니다.. 이 관점은.. 일반적으로 나치에 저항하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완 다르게... 노르망디이후 2달이상 교착상태인데.. 당시나치점령 프랑스에서 연합군 포로 행진당시 프랑스시민이 린치를 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 그건 오히려 레지스탕스가 극소수이고.. 반면 ss참전 프랑스인은 상대적 많았고... 일반적인 장면.. 훗날 베트남전 장시 프랑스 외인부대.. 사실 나치ss독일군 출신이 주...갈때 없으니깐. 오즉하니 당시 북베트남 삐라가 독일어로 씌였을정도
    3.틀을깨는 관점의 다양성..이 있으면 더 멋진 컨텐츠일듯.. 프랑스 전역 점령 성공한 독일군의 신박함은.. 갸들이 스페인내전에 단련된게 원인이고.. 이후 지속적으로 몰리는건.. 민간 항공학교.. 베르사유조항의 족쇄도 큰 역활이죠.. 맨마지막 독일 항공기 생산량은 역설로 최대였슴.. 사람이 부족한

    • @박희수-t8d
      @박희수-t8d 2 роки тому

      롬멜을 낮게 평가하시는데 전쟁 전부터 초반에 맹활약하는 등 기갑전의 달인 중 한명입니다, 패튼 정도 되는 장군 아니면 못 버텨요.
      몽고메리는 아프리카 전역 사령관 자리를 여럿 거부해오다가 직전 사령관이 영국의 닥달을 무시하고 그런 축차전은 의미없다며 물자비축한 양이 공세에 충당될만큼 쌓이자 자리 뺏어찼죠, 패튼 참전 아니었으면 그 늙은 똥쟁이는 승전이 더 늦었을 겁니다.

    • @scz8333
      @scz8333 Рік тому

      @@박희수-t8d
      패튼은 롬멜과 단 1번도 교전한 적 없습니다.
      패튼은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43년 2월 북아프리카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전멸급 패배 뒤에 신임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패튼이 그렇게 등장할 무렵 롬멜은 본국으로 송환되었고 + 롬멜을 본국으로 송환시킨 튀니지에서의 롬멜 최종 패배 역시 영 8군에게 당했습니다.
      --------------------------------> 북아프리카 미국 + 영국 토치 상륙 작전 전인 42년 10월 2차 엘알라메인 전투는 시작되었고, 승리 역시 사실상 결정되었습니다.
      --------------------------------> 롬멜은 튀니지까지 2천km 후퇴를 반복하다,
      --------------------------------> 최후 거점 방어선 마렛 라인이 영 8군에게 돌파당하며 본국 송환당했습니다.
      또한 몽고메리는 자리를 빼았지 않았습니다. 몽고메리는 신임 8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고트 장군이 8군 부임지로 이동 중 항공기 추락으로 사망하면서, 긴급히 대타로 8군 사령관에 임명된.
      오킨렉 장군은 처칠의 성급한 공세 명령을 끝까지 거부하면서,
      엘알라메인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물자를 축적했지만, 토부룩 함락에 대한 책임 성격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처칠은 결국 해임했습니다.
      몽고메리와 알렉산더, 덩케르크 철수 당시 영국 대륙 원정군 사단장으로서
      1940년 당시 이미 독일군과 전투했으며 당시 그 사단들을 지휘했던 영 2군단장 앨런 브룩에게 지휘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덩케르크 철수 당시 장비는 잃었지만 병력은 거의 무사히 탈출시킨 능력을 인정받아,
      군단장 앨런 브룩은 처칠에게 발탁되어 영국 육군 참모총장이 되어 2차대전 내내 영국의 전쟁 계획을 주도했습니다.
      ---------------------------------------------> 앨런 브룩이 설계한 전쟁 계획이 영국과 미국의 대독일 전쟁 계획의 기본 뼈대라는 것 확인하게 될 것, 해보길.
      그 유능한 앨런 브룩 휘하 사단장 알렉산더는 나중에 영국 지중해-북아프리카 총사령관이 되었고,
      몽고메리는 항공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8군 사령관의 대타로 8군에 부임해 2차 엘알라메인 전투를 승리했던 겁니다.
      미국의 마셜, 아이젠하워는 실제 야전 전투 지휘 경험이 없었지만
      -----------------------------------------------> 앨런 브룩은 2차대전 초 독일의 날카로운 칼날과 직접 부딪치며 야전 전투를 지휘한 경험이 있습니다.
      -----------------------------------------------> 독일의 2차대전 초 전격전에서 앨런 브룩 휘하의 영국 지상군만 대규모 인명 피해를 거부하며 거의 온전히 병력 보존.
      -----------------------------------------------> 마셜-아이젠하워가 1940년 덩케르크에 고립된 병력 지휘했다면 잘 해냈을 것이란 아무런 보장 없었던.
      -----------------------------------------------> 아이젠하워는 독일이 폴란드 침공하던 39년 9월 소령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야전 전투 경험 0.
      ( ~ 패튼 정도 되는 장군 아니면 못 버텨요.
      몽고메리는 아프리카 전역 사령관 자리를 여럿 거부해오다가 직전 사령관이 영국의 닥달을 무시하고 그런 축차전은 의미없다며 물자비축한 양이 공세에 충당될만큼 쌓이자 자리 뺏어찼죠, 패튼 참전 아니었으면 그 늙은 똥쟁이는 승전이 더 늦었을 겁니다. )
      -------------------------------------------------> 님의 주장은 많은 곳에서 오류.
      -------------------------------------------------> 패튼이 북아프리카 등장 전에 이미 2차 엘라메인 전투 승리.
      -------------------------------------------------> 롬멜은 엘알라메인 이전에도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에게 여러 번 전투 패배를 당했습니다.
      -------------------------------------------------> 사막전 특성상 늘어진 보급선 취약점으로 영국군과 독일군 모두 전투 승리로 전진하다 보급에 문제 생기면 패배당했던.
      -------------------------------------------------> 롬멜도 신나게 전진하다 두들겨 맞고 다시 거의 출발선으로 밀려나기를 반복하다, 토부룩 점령으로 깃발 날렸던.
      -------------------------------------------------> 토부룩 점령 직후에 최연소 육군 원수가 된 롬멜, 불과 몇 개월 후엔 42년 10월 2차 엘알라메인 전투에서 결정적 패배.
      기본적인 데이터, 중요 전투 발생 시점 + 주요 인물 등장 시점 등에서 오류는 치명적. --------------------------> 그 이후 논리 전개는 무의미할 정도로 치명적.

  • @조영민-t4y
    @조영민-t4y Рік тому +2

    티거1은 현제 티거2보다 귀합니다.
    아직 움직이는 티거2는몇대 있으나 움직이는 티거1은 보빙턴에 1대가 유일하다네요

  • @lamoking647
    @lamoking647 2 роки тому +4

    미군에 수업료는 비싸도 너무 비쌌다 ㅋㅋ

  • @정호연-b6d
    @정호연-b6d 2 роки тому

    삼국지 제갈량 롬멜 같은 심정이게네요

  • @SuperJungjaehun
    @SuperJungjaehun 2 роки тому +4

    판터는 아프리카전선에 투입된적이 없는데, 아마 4호전차를 말씀하시는듯하네요

  • @MrBrianJung
    @MrBrianJung Рік тому +7

    미군의 가장 큰 힘은 물량도 돈도 기술도 아닌 바로 지속적인 학습과 개선능력입니다.
    그리고 미국인들 하면 동부양키나 서부히피들 생각하는데,
    미군의 핵심전력은 중부지역의 마초백인들입니다.
    폭력적이고 공격적이면서 세계 그 어느나라 사람들이상으로 힘든상황을 잘 버티는 사람들입니다.
    미국에서는 화이트트래시나 레드넥이라고 저주받는 사람들이지만 군인으로는 최고자원이죠.

    • @scz8333
      @scz8333 Рік тому +1

      2차대전 후 미국의 군사 개입, 사실 제대로 된 승리가 없습니다.
      1945년 2차대전 종전, 불과 5년 뒤 한국전쟁 비기기로 시작해서 줄줄이 쓴 맛.
      2차대전 종전 후 미국이 왜 베트남에서 패배성 철군했고, 중동에서 겉보기 사상누각 승리 수렁에 빠졌겠습니까?
      냉정하게 본다면 미국은 사상 최약체 패권일 수도, 패권 장악 확인 도장 찍고서 고작 5년 후부터 저런 허약한 패권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2차대전 후 미국이 대응에서 실패했던 중국 공산화,
      최초로 승리하지 못한 한국전, 최초로 패배성 철군 당한 베트남 및 수렁에 빠진 중동 개입에 대해.
      중국-베트남 --------> 저들의 반외세 투쟁은 왜 좌익의 최종 승리로 끝났을까요?
      ----------------------------> 저들 내부의 우익은 왜 좌익에게 패배당했거나, 아예 존재감 자체가 없었을까요?
      중국-베트남 공산화 모두에서 서방측 책임은 치명적 결정적.
      그에 비해 한반도의 반식민지 항일투쟁은 폭 넓은 좌우 스펙트럼, 왜?
      중국-베트남, 특히 베트남과 한반도의 반식민 독립투쟁의 좌우 스펙트럼 차이 냉정하게 따져본다면,
      2차대전 직후 미국이 압도적 국력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제대로 된 개입과 승리가 없었던 원인에 다가설 수도.
      1. 중국 공산화 : 미국이 아무리 장개석 지원해도 막기 힘들었던.
      아편전쟁 이후 반식민지 상태의 굴욕을 당한 중국인들 입장에선,
      자신들에게 치욕을 안긴 주도 세력은 영국-미국-일본 등 우익 자본주의 국가들.
      국공 내전 당시 미국-영국 지원받는 장개석 아닌 미영일 모두의 적인 소련의 지원받는 모택동에 민심 쏠린.
      즉 중국 공산화는 아편전쟁 이후 서방 주도의 중국 반식민화 침략에 대한 중국의 저항으로 해석할 수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정의로운 미국이 장개석 정부 지원했지만, 부패한 장개석을 파고든 교활한
      모택동 무리들에게 어리석은 중국인들이 현혹된 공산화라고 여기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은.
      2. 베트남 민족주의는 왜 좌익-공산주의 일색이었나?
      베트남의 반프 독립투쟁, 프랑스의 동맹이자 식민지를 보유했던 미영은 지원할 수 없음.
      베트남의 반프 독립운동이 지원받을 유일한 곳은 미영프 모두의 적인 공산주의 소련 밖에 없었던 상황.
      즉 베트남 민족주의는 공산주의가 좋아서가 아닌,
      국제정세 제약 조건으로 좌익-공산주의를 반식민지 투쟁의 유일한 도구 선택 몰려버린.
      (철수하는 프랑스 대타로 개입한 미국, 민심을 얻지 못했기에 패배성 휴전, 휴전 후 철군, 철군 후 공산화.)
      베트남 공산화 이후 얼마 뒤, 바로 미국과 수교하고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편입된 것으로 명백.
      3. 왜 한반도의 항일투쟁은 좌우익의 폭 넓은 스펙트럼이었나?
      한국전 --------------> 2차대전 후 처음 터진 대규모 국지전 아닌 국지전.
      미국 이외의 모든 강대국들이 초토화된 상태에서, 미국은 단독도 아닌 유엔군과 함께 하고도,
      거기다 소련의 직접 개입 없는 상태에서, 49년 막 공산화 직후 아직 내부 혼란 상태였던 중공 상대로도,
      미국은 비겼습니다. 대한민국 내부의 수 많은 미국 우호 세력이 없었다면 그 마저도 힘들었을 수.
      (한국전에서 초라했던 중공 상대로도 승리하지 못한 미국이,
      21세기 G2로 변해버린 중국 상대로 동북아의 전면전에서 승리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베트남과 한반도, 어떤 차이점이 있었겠습니까?
      지난 세기 초 카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으로 러시아-소련 남하 막는 미영의 방패로 선택된 일본.
      하지만 진주만 기습으로 일본에게 뺨싸대기 쳐맞은 이후 미영은 비로서 우리 항일독립 투쟁 지원 시작.
      만일 진주만으로 일본이 미영의 적이 되지 않았다면 미영은 우리 항일투쟁에 그 어떤 지원도 없었을 것.
      즉 진주만 기습 이후 미영이 일본의 적이 된 조건 하에 우리 우익 독립투쟁이 미영의 지원을 받은 것.
      대한민국엔 천만다행으로 미국의 항일 독립투쟁 지원으로,
      해방 후 38선 남에서 대한민국 우익이 미국 지원을 정당화할 명분을 획득.
      그런 상태에서 한국전쟁이 터져 미국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할 수 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있었기에 비기기 정도로 마감된 것.
      만일 한국전쟁이 베트남과 유사하게
      철수하는 일본 대타로 미국이 개입하는 형식이었다면,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과 대한민국에 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은 베트남 처럼 한반도 공산화로 마감 가능성.
      그런 상황에선 한반도의 민심은 미국에게 향할 수 없기 때문.
      모든 인간은 시대 조건이라는 제약에 예속됩니다.
      4. 중동의 반미 반영 반서방 정서
      걸프전-이라크전-아프칸전, 겉보기엔 엄청난 대승. 하지만
      최근 아프칸 사태에서 보듯 사상누각-임시방편 수준 승리에 지나지 않는.
      아프칸에서 미군과 미국인 철수 완료되기도 전에, 수도 카불이 함락당할 정도로 황당 사태.
      이라크 역시 미국 철수 즉시 원위치 될 가능성 큰.
      십자군 부터 21세기 현재 까지 서방측의 무력 개입이 잦았던.
      투르크 시절 발칸반도와 스페인 일부 점령한 시기를 제외하면 서방측의 중동 개입이 주였던.
      그러한 역사적 배경에 2차대전 후 철수하는 영국 대타로 개입한 미국이었기에 민심을 얻을 수 없는.
      근본적 해결책은 미영을 필두로 한 서방측이 무력에 기반한 중동에서의 이권 유지를 포기하는 것.
      아프칸에 1,000조 투입했는데도 부패한 정권과 군 때문에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이 복귀했다는
      오판에서 벗어나야 하는. 미국이 퍼부은 1,000조 중 아프칸의 헐벗은 주민들에게 지원된 비중은 아마
      극히 일부이고, 거의 대부분은 미군수업체-국방부-미민간군사업체 쪽으로 투입되었을 것. 미국은 중동인들의
      마음을 얻는 곳에 별 투자하지 않았기에 미군과 미국인 철수 완료되기도 전에 수도 카불이 함락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인.
      현재 미국이 어떤 깃발을 내걸고 중동에서 군사개입 하건,
      명백한 것은 21세기 현 시점에서 미국은 중동인들에게 불청객임을 부인하기 힘든.
      중동에서 미군이나 영국군 1명 전사할 때, 그 상대편은 아마도 수 십배 비율로 죽어나갈 겁니다.
      저런 식으로 중동인들 마음이 열릴 수는 없기에, 저런 식의 중동 개입은 벗어날 수 없는 수렁이 되는.
      이런 관점에서 2차대전과 그 후 미국의 군사개입을 바라본다면,
      2차대전은 미국이 마땅히 수행해야 했고 반드시 승리해야만 했던 전쟁이었지만,
      2차대전 이후 잦았던 미국의 군사개입 대부분은 그렇지 못했던 성격이라 초래된 차이 아닐까 합니다.
      2차대전과 종전 후 미군의 정신력과 태도 차이.
      대공황-풍요 경험 차이라기 보다는,
      왜 전쟁 군사개입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정당성과 국민적 합의 여부.
      그리고 미국의 군사개입을 바라보는 개입 대상 지역 사람들의 미국에 대한 태도 차이.
      2차대전 때 미군은 어디서건 환영받았지만, 2차대전 후 미군은 자신들을 배척하는 이들도 만나게 되는.
      1차대전 윌슨 민족자결주의에서 벗어나 프랑스 대타로 개입하는 등의 미국의 변화가 초래한.
      그리고 사실 미국은 아직 독일, 영국 수준의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더 나아가 미국은 단독으로는 특정 시점 최강 적성국과 붙어본 적도 없는 지극 취약함도.
      1. 미국이 독일 수준의 경험을 하려면,
      미국을 제외한 사실상 전세계인 중-러-유럽연합과 동시에 투쟁해 저들을 그로기로 몰아야.
      그것도 2번 연속을. 미군과 미국 민간인 수 백만이 희생되면서, 적들에게 수 천만의 인명피해를
      강요하는 전쟁을 수행해야만. 하지만 미국이란 공동체는 한국전이나 베트남전 수준의 인명 피해
      에도 즉시 휴전이나 철군 여론 빗발침을 고려한다면 미국에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2. 미국이 영국 수준이 되려면,
      앞으로 수 백년 매 시기 가장 강력한 적성국을 상대로,
      단독이건 동맹과 함께건 투쟁해서 최강의 적을 모두 패배시키고 승리해야만.
      그러나 이미 한국전-베트남전 비기기-패배성철군으로 불가능해졌고, 그 기초 단계를
      성공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미국은 영국 레벨이 될 수 없습니다. 영국은 패권을 잃을 때 조차도 적대세력의
      패권 장악을 저지하며, 같은 언어-문화-가치관을 가진 미국이라는 대체 세력 자체도 파생시키면서 패권을 평화적으로 잃었기에.

    • @scz8333
      @scz8333 Рік тому

      2차대전 종전 후에도, 미국과 영국은 거의 함께 싸웠습니다.
      투입한 병력 규모에선 미국이 압도적이었지만, 전장의 다양성 측면에선 의외로 미국이 뒤진 면도.
      미국이 전혀 경험하지 못한 전쟁을 영국은 경험했으며, 같은 전투에서 조차 미국이 뒤쳐진 부분도.
      1. 제트기-미슬 시대의 함대 방공전 -------------------> 미국 실전 경험 없음, 영국만이 포클랜드전으로 유일
      포클랜드전에서 시스키밍 대함미슬 요격에 실패, 종전 뒤 세계 각국은 본격 근접방어 체계 도입 시작.
      2차대전 후 실전 함대방공전에서 적기를 격추한 경험은 영국 해군만이.
      2. 잠수함의 적함 격침 -------------------> 미해군 아직 없음, 단 2건의 기록 중 1건이 영국 핵잠의 기록
      잠수함 등장 이후 21세기 현재까지 잠수함 : 잠수함의 수중 전투에서 적 잠수함 격침 기록 역시 45년 종전 직전
      북해에서 수중 항해중이던 영 잠이 수중 항해중이던 독 유보트 격침한 사례가 유일한 전과.
      3. 대함미슬을 함대공 미슬로 요격 ----------------------> 미해군 전과 없음, 오직 영 해군이 걸프만에서 사상 최초 요격.
      걸프만에서 재취역한 미 전함 아이오와급이 포함된 미 함대를 호위하던, 영 방공구축함 T42가 이란의 실크웜 대함
      미슬을 시다트 함대공 미슬로 요격한 것이 유일한 전과. 당시 그 함대 소속 미 이지스함의 CIWS는 근처의 미 함정
      을 향해 오발 사고. 또한 그 무렵 걸프만의 다른 미 이지스함은 이란 여객기를 적기로 오판 격추해, 민간인 수 백명
      이 희생되는 대참사. 뿐만 아니라 그 무렵 걸프만의 또 다른 미 수상함은 고무보트 자살 폭탄 테러당해 함정 옆구리
      구멍 뚫려 바지선에 태워져 후송. 분명 미 이지스함이 영 T42 보다 고성능인데 막상 실제 상황에선 저런 일 터진.
      4. 전차 : 전차, 최장거리 격파 기록 -----------------> 1차 걸프전 때, 영 챌린저1 약 4.7KM 거리에서 적 전차 격파
      저 당시 미군이 병력과 투입 전차 수에서 압도적이었지만, 소수의 영국 전차부대가 최장거리 격파 기록.
      사막 지형이라 가능한 기록. 한반도의 굴곡진 지형에선 저 정도 거리에선 적 전차 관측할 곳도 별로 없음.
      걸프전 영국과 미국의 전차전 전과는 이렇습니다.
      영국은 192대? 전차 투입하고서 300 : 0 전과를 기록했고 특히 전차전 교전 손실 0 달성.
      미국은 영국 보다 압도적인 수량의 전차 투입, 끝 자리 수에서 0을 하나 더 붙여 투입하고 600 : 2 전과, 하지만 전차전 전투 손실 2 발생.
      우크라이나 전쟁 진행중인 2023년, 발트해 연안 에스토니아에서 실시된 나토 기갑부대 경연에서,
      ----------------------------------------> 주력 전차 MBT 부분 성적, 1위 영국 챌린저2 + 2위 스페인 레오파드2 + 3위 미국 에이브럼스2
      5. 아프칸 등에서의 최장거리 저격 기록 -------------------> 캐나다 영국이 주도하며 미국이 뒤 따르는.
      투입 병력은 미군이 압도적이지만 소수의 영국군과 더욱 소수의 캐나다군이 우세한 저격 기록. 캐나다 1위-3위-4위 영국-2위 미국-5위
      캐나다의 1위 기록은 2위 이하 기록과 차원이 다른 초장거리, 기억으로 약 3.5KM, 2위~5위는 2KM대 기록. 미군이 투입 병력은 많음에도 실전 기록은 저런.
      2차대전 이후 최강 패권국으로 등장한 미국.
      냉정하게 평가하면 덩치에 비해 내실 부족하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지난 70년.
      투입한 병력과 보유한 장비 및 과학기술 수준을 고려할 때, 믿기지 않는 비효율적 개입과 철수 반복된.
      21세기 현재, 서방측에서 미군이 가장 거대하고
      장비 또한 최상이지만 미군의 질적 수준이 그렇다는 아무런 보장 없고,
      이런 상태에서 미국이 아직 까지 경험하지 못한 단독으로 최강 적성국과 전쟁에서 승리 기대하기 힘들 것.
      생각해보길, 2차대전 이후 그리고 21세기 현 미국이 단독으로
      중국이나 러시아 국경 근처나 국경을 넘어 침공해 재래식 전쟁 벌여 승리할 의지나 능력이 있을지를.
      미국과 달리 영국은 안쑤시고 다닌 대륙이나 국가 찾기가 힘들 정도, 그것도 지극히 적은 병력으로 치명적 승리를 거두며.
      --------------------------------------------------------------------------------------------> 미국은 아직 단독으로는 최강의 적성국과 붙어 승리해본 경험도 없는.
      21세기 미 핵항모전단

    • @scz8333
      @scz8333 Рік тому

      1. 100 Greatest Generals in History 역사상 승리 많은 장군 랭킹 : 전투 중요도 가중치 없이 횟수만, 나폴레옹 1위
      ua-cam.com/video/TmSQriq0zTc/v-deo.html
      2. Have the British really invaded 90% of the countries in the world? 영국은 전세계 국가 90%를 실제로 침략했는가?
      ua-cam.com/video/t86J_zZjjq4/v-deo.html : 유엔 회원국 193개 시점에서, 무려 171개국 군사적 침공
      1. 승리 횟수로 본 장군 랭킹 정리
      1위 나폴레옹 56회, 2위 웰링턴 39회, 3위 칼리드 이반 알 왈리드 28회, 4위 줄리어스 시저 23회, 5위 알렉산더 22회
      전투 승리 횟수로 본 국가 랭킹과 달리 실제 체감과 차이가 훨씬 더 나는 편입니다.
      단순한 전투 승리 횟수 보다 전투의 중요성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국가 랭킹에서는 누적 전투 수가 1만회를 넘어가지만,
      장군 지휘관들의 한 평생 전투 누적 기록은 아무리 많아도 100회를 넘기 어렵게 때문에 통계적 오류 발생 확률이 커서.
      하지만 그렇게 단순화시켜도 랭킹 1위, 4위, 5위에는 나폴레옹, 시저, 알렉산더가 포함됩니다.
      문제는 한니발과 같은 위대한 장군이 20위 근처인데 그런 부분은 결정적 오류라고 보아야 할 겁니다.
      전투 횟수 산정에 애매한 점이 있기 때문이죠.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어 이태리에 진공한 다음 로마군과 거의 20년을
      이태리 반도에서 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치러진 전투를 어떻게 구분하고 횟수 산정할지 지극히 애매하죠.
      한니발은 횟수만이 아닌 질도 결정적이죠. 고국 카르타고의 지원 없이 고립된 상태에서.
      섬멸전의 원조, 망치와 모루의 원조인 칸나 전투 하나만으로도 한니발은 1위가 될 여지가 있습니다.
      문제는 한니발은 최종적으로 로마에 패했다는 약점이 있고, 알렉산더는 아예 패전을 경험한 적이 없이 젊은 나이에 병사.
      승리 횟수로만 산정할 때 일본 전국시대 장수들이 꽤나 순위에 들어가는 오류도 생깁니다.
      그런 부분들은 고려하면서 영상 보면 될 겁니다. 충무공이 11승으로 나오는데, 23전 23승 아닌 무패로 본 모양.
      (충무공의 23전에는 매우 인접한 장소에서 몇 일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각각 셈한 결과. 그런 전투들은 1개로 통합될 여지도.)
      (충무공의 23전 식으로 횟수 산정할 경우, 2차대전 대서양 해전은 어마어마한 횟수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 수송선단과 유보트 교전
      횟수는 약 1,000회에 개별 항해 선박과 유보트 교전은 수천 회에 달하지만 모두 다 교전 횟수로 계산하지는 않았겠죠.)
      근대 이후로는 단연 나폴레옹이 압도적입니다.
      1차, 2차대전의 탁월했던 그 어떤 독일 장군도 감히 넘보지 못할 기록이며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 중반부 이후 포병 장교로 등장해서 워털루에서 패배 까지 20년 동안 유럽을 석권.
      1차 대전 독일 4년, 2차대전 독일 6년과 비교할 수 없고 나폴레옹은 모스코바를 점령 후 후퇴했지만 독일은 불가능했죠.
      웰링턴의 승리 횟수 대부분은 스페인에서 벌어진 전투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형제 친척들은 유럽 각각의 국왕으로 임명하면서 스페인 국왕 역시 그렇게 되었죠.
      그 때문에 스페인과 포르투칼에서 반 프랑스 봉기가 일어났고, 영국은 10년 이상 이베리아 반도에서 장기적 전투를 수행.
      스페인 전역에서 영국군은 프랑스군에 패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기억이 희미한데 프랑스가 스페인에서 손실한 병력이
      10년 동안 누적해서 대략 30만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가랑비에 몸이 젖은 셈이죠.
      만쉬타인, 구데리안, 롬멜, 패튼 몽고메리 등도 나옵니다.
      롬멜, 패튼, 몽고메리는 제 아무리 유능한 장군이라고 해도 만쉬타인급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2차대전에서 그토록 유능했던 전쟁의 대가 만쉬타인 조차도 인류 전쟁사에선 앞 순위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
      독일과 영국의 가장 큰 차이
      독일은 무수한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쟁엔 패배.
      영국은 수 많은 전투의 패배에도 결국 전쟁에선 승리. 그 원인은 전투의 중요도 결정성 때문.
      1588년 무적함대 격파는 세계제국 팽창 시발점,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충무공의 승리는 조선의 강대국 부상과 아무 관련 없고.
      영국 북미와 인도에서의 결정적 승리로 대륙 장악, 트라팔가와 워털루는 유럽의 향후 100년을 결정.
      독일은 분명 압도적 대승을 거두었지만, 전략적으로는 결정적 승리가 아닌 지역적 일시적 승리에 지나지 않았고.
      2. 영국은 과연 오늘날 존재하는 전세계 모든 국가 90%를 그 어떤 이유건 침공한 적이 있는가?
      정리하면 상당 부분 근거는 있는 것 같군요. 침공 후 지배 까지는 아니더라도 군사적 개입, 주둔, 압박.
      동영상에 소개된 책자 발행 시점 당시 유엔 회원국 193개국 중에서 무려 171개국이 영국의 군사적 침공을 경험.
      현 최강국 미국의 대통령 관저 : 화이트 하우스, 불 탄 후 흰색 페인트로 가림.
      나폴레옹 전쟁과 같은 시기 잠시 일어났던 미영 전쟁 중 수도 워싱턴이 점령당해 대통령 관저가 불타버렸죠.
      막강한 군사강국 러시아 :
      크림 전쟁 때 크림 반도만 점령당한 것이 아니고,
      그 무렵 극동에서 캼차캬 반도 까지 일시적이지만 점령당했습니다.
      그 충격으로 알래스카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미국에 매각했죠.
      알래스카는 영국령 캐나다와 미국과 접하고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영국이나 미국에 먹힐 것이라고 판단해 손 턴 것.
      러시아 혁명 당시 적백 내전이 벌어졌고,
      영국이 주도한 영국 미국 일본 등이 무르만스크, 흑해의 크림반도, 극동의 블라디보스톡 등에 상륙해서 상당기간 점령.
      하지만 트로츠키가 지휘하는 적군의 승리로 백군 반혁명군이 패배하자 결국은 모두 철수.
      중국과 인도는 말할 필요도 없고. 카리브해와 남미에도 영국령 섬들과 영령 가이아나.
      심지어 조선말 우리도 거문도를 점령당했죠. 일본 역시 일부 지역 번들이 영국과 소규모지만 전쟁 했고.
      프랑스는 백년전쟁의 전쟁터,
      독일은 18세기초 말버러공이 이끄는 대륙 원정군의 전쟁터. 지중해는 영국의 연못. 중동 아프리카 생략.
      정리하면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국가들의 대다수는 영국의 직간접 침공, 주둔, 압박등 경험한 적이 있다.
      없는 곳을 구태여 찾자면, 바다로 부터 완전 격리된 몽골과 같은 정도.
      그런데 다른 강대국들과 차별되는 점이 있죠.
      대영제국은 위대한 영웅에 의존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건설되었다는 것.
      알렉산더, 징키즈칸, 시저, 나폴레옹 급의 탁월한 군사지도자 없이
      고만 고만한 장군들과 그렇게 많지 않은 병력으로 세계 최초로 전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가 되었죠.

    • @scz8333
      @scz8333 Рік тому

      셰익스피어 헨리5세, 밴드 오브 브러더스 :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be he ne'er so vile,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And gentlemen in England now-a-bed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d they were not here,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오늘의 이야기는 (참전한 너희들이)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할 것이고,
      성 크리스핀의 날은(아쟁꾸르 전투 일) 결코 잊혀지지 않고,
      오늘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이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다.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는
      내 형제가 될지니, 그 신분이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오늘부로 그 신분은 귀족이 될 것이고,
      지금 잉글랜드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여기 있지 못한 것을 저주할 것이고
      우리와 성 크리스핀의 날에 함께 싸운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들의 용기 없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유명한 미국 2차대전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
      그 어원은 세익스피어 원작 헨리5세에 나오는 국왕의 연설.
      미국이 많이 베끼는 편이죠.
      형제들의 모임, 집단이라는 의미로
      백년전쟁 아쟁쿠르 전투 직전, 병력 열세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병사들에게 헨리5세가 했던 연설이라고 합니다.
      빈 말이라도 저렇게 하는 국왕, 국가, 군이라면 목숨을 바칠만 하겠죠.
      백년전쟁 시기 헨리5세 연설, 사실인지 아니면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창조된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부럽긴 하네요.
      아쟁쿠르 전투 승리 후 헨리5세는 영국-프랑스 통합 왕국 국왕에 올랐지만
      영국엔 불행, 프랑스엔 천만다행으로 헨리5세는 저 전투 승리 얼마 후 젊은 나이에 병사합니다.
      저 전투로 부터 약 20년 후, 쟌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는 백년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게 되고.
      그리고 미국은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저런 신화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미 할리웃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대사, 아마도 스타워즈 및 터미네이터 대사 아닐까 합니다.
      스타워즈의 명대사 우리 말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 " 내가 니 애비다. "
      터미네이터 시리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역시 우리 말로 옮기면 ------------------------> " 내 돌아올끼다. "

    • @scz8333
      @scz8333 Рік тому

      2차대전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 약 80%를 영국-캐나다군이 상대.
      당시 미군은 실전 경험 사실상 전무했던 신병들로 구성되어, 독일 주력 상대 불가능해 영국군이 독일 주력 담당.
      노르망디 전역에서 영국-캐나다군이 독일 5호 판터 및 6호 타이거 전차를 상대로 어떻게 싸웠는지 소개하죠.
      1. ua-cam.com/video/cNGGt1ORO-0/v-deo.html
      Sherman Firefly vs King Tiger | July 1944 | Tank Duel ----------------------> 44년 7월 18일, 파이어플라이 서부전선 최초 킹타이거 격파.
      2. ua-cam.com/video/V-jGdZ5XWNM/v-deo.html
      Sherman Firefly vs SS Panthers - Tank Battle At Normandy, France ------------------------------> 44년 7월 9일, 캐나다군 파이어플라이 판터 7대 격파.
      3. ua-cam.com/video/IrEtdMkFA00/v-deo.html
      Tank Battles of WW2 - The Firefly Ace that knocked out 5 Panthers with 5 rounds ------------------> 44년 7월 14일, 파이어플라이 1대가 5번 사격, 5대 판터 격파
      노르망디 전역에서 미하일 비트만이 탄 타이거 역시 영국군 파이어플라이에게 격파당해 전사.
      4. ua-cam.com/video/R4LyLCOUkzI/v-deo.html
      Cromwell vs 2 Panther tanks | September 1944 | Tank Duel ----------------------> 노르망디 돌파 후 44년 9월 19일 네덜란드, 영 크롬웰 전차 판터 2대 격파.
      파이어플라이와 같은 17파운드 포를 장비한 크롬웰도 판터 타이거 격파 가능. 크롬웰은 당시 전차 중에선 기동성 가장 좋아 최고 속도 시속 약 65km/h.
      영국은 북아프리카에서 타이거와 첫 교전 후 대응으로 43년 무렵 MBT 개발 시작,
      그 사이 과도기에 미 셔면에 17파운드 포를 장착한 파이어플라이 및 크롬웰 등으로 응급 조치하며 버틴 것.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 때 미군은 타이거 판터 대비 측면에선 사실상 멍 때렸던. 영국은 종전까지 약 2천대 파이어플라이 생산했고,
      노르망디 상륙 때는 파이어플라이 생산 초기여서 초기 생산분 약 350대를 투입했다고.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약 80%는 영국군이 담당.
      노르망디 전역에 투입된 미국과 영국의 전차 중에서 전차포로 독일 판터나 타이거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군 파이어플라어-크롬웰 정도.
      파이어플라이 역시 약한 장갑 때문에 극심한 피해를 당했지만, 독일 타이거나 판터 역시도 파이어플라이에게 먼저 공격당하거나 매복에 걸리면 격파당했기도.
      노르망디 전역은 이미 독일군이 방어진지를 구축한 이후에 벌어진 전투로, 탁 트인 들판에서 전차가 고속 기동하는 전투 아닌 보카쥬 지형에서의 매복성 전차 전투.
      처음엔 공격하는 영국군 전차가 매복한 독일군 전차에게 당하는 위치였지만, 전투가 계속되면서 독일군 전차도 영국군 매복이나 배후 침투에 당해 격파되었던.
      독일의 그 어떤 전차라도 격파할 수 있는 전차포를 가진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겁니다.
      원거리에서는 약한 장갑 때문에 독일 타이거에게 당할 위험이 컸지만, 보카쥬 지형에선 원거리 아닌 근접 전투도 많았기에 파이어플라이는 나름 역활을 한.
      하지만 미군의 일반적인 셔면은 판터나 타이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독일 패전 직전인 1945년 1월, 2대의 독일 판터가 21대의 미 셔먼과 교전했을 때 ----------------> 셔먼 9대 격파 + 셔먼 12대 포획.
      만일 보통의 셔먼만 아닌 파이어플라이와 혼성 편성되었다면 판터의 저런 전과 불가능. 45년에도 저랬으니 실전 경험 없었던 44년 노르망디에선 더 취약했을 것.
      2 SS Panthers vs. 21 US Shermans
      ua-cam.com/video/86K0ncTkAkA/v-deo.html
      1945년 ( 영 최초 MBT인 센츄리온의 직전 모델인 ) 실전 투입된 마지막 순항전차 코메트.
      ua-cam.com/video/tRxU0B8cybY/v-deo.html
      Comet Tank vs Tiger Tank | April 1945 | Tank Duel ----------------------------> 45년 4월 종전 직전, 영 코메트(센츄리온 직전 모델) 타이거 격파
      여기 영상의 코메트 모습은 현대 주력 전차 유사, 하지만 센츄리온으로 바로 대체된. 최초의 MBT인 센츄리온은 너무 늦게 투입되어 실전 경험 없었음.
      ua-cam.com/video/0AnoySTfvFM/v-deo.html Centurion - Tiger Tank's Nemesis
      1945년 5월 8일 독일 항복.
      독일 항복 직후인 5월 14일, 센츄리온 6대 영 항구에서 선적, 몇 일 후 안트워프 항에 하역.
      최전선 소련군 점령지 경계까지 약 400마일 자력 기동 영국군 기갑부대 배속, 영 미 탱크들과 함께 대규모 야전 기동 훈련 후 7월 귀환.
      ----------------------------------------------------------------------------------> 2차대전 종전 당시 미 퍼싱, 영 센츄리온 등장으로 이미 독일 전차의 질적 우위는 끝난 상태.

  • @canislupuswild9014
    @canislupuswild9014 2 місяці тому

    프리덴덜??
    미군?에 있었네? 울나라 어떤 부류의 장교들... 모범?? 사례가?

  • @qlnmnlp8561
    @qlnmnlp8561 2 роки тому +2

    프레덴덜장군 불쌍하넹..
    첫 전투는 누가와도 졌을확률이 높았을텐데 다 뒤집어쓰고 가네

    •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2 роки тому

      차라리 패튼을 처음 파견했다면 어땠을지......

    • @박희수-t8d
      @박희수-t8d 2 роки тому

      전혀 안 불쌍합니다, 사령부가 전선에서 그리 멀면 통신선 끊어졌을 때 전령도 제 때 못 보냅니다, 더불어 집무실을 마호가니가구로 꾸민다고 허송세월했죠.
      영국이 해군에 명장이 많고 육군에 똥쟁이들이 많지만 프레덴탈도 영국 똥쟁이들 흉내내다 경질당한 겁니다.

    • @scz8333
      @scz8333 Рік тому

      @@박희수-t8d
      1. 100 Greatest Generals in History 역사상 승리 많은 장군 랭킹 : 전투 중요도 가중치 없이 횟수만, 나폴레옹 1위
      ua-cam.com/video/TmSQriq0zTc/v-deo.html
      2. Have the British really invaded 90% of the countries in the world? 영국은 전세계 국가 90%를 실제로 침략했는가?
      ua-cam.com/video/t86J_zZjjq4/v-deo.html : 유엔 회원국 193개 시점에서, 무려 171개국 군사적 침공
      1. 승리 횟수로 본 장군 랭킹 정리
      1위 나폴레옹 56회, 2위 웰링턴 39회, 3위 칼리드 이반 알 왈리드 28회, 4위 줄리어스 시저 23회, 5위 알렉산더 22회
      전투 승리 횟수로 본 국가 랭킹과 달리 실제 체감과 차이가 훨씬 더 나는 편입니다.
      단순한 전투 승리 횟수 보다 전투의 중요성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국가 랭킹에서는 누적 전투 수가 1만회를 넘어가지만,
      장군 지휘관들의 한 평생 전투 누적 기록은 아무리 많아도 100회를 넘기 어렵게 때문에 통계적 오류 발생 확률이 커서.
      하지만 그렇게 단순화시켜도 랭킹 1위, 4위, 5위에는 나폴레옹, 시저, 알렉산더가 포함됩니다.
      문제는 한니발과 같은 위대한 장군이 20위 근처인데 그런 부분은 결정적 오류라고 보아야 할 겁니다.
      전투 횟수 산정에 애매한 점이 있기 때문이죠.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어 이태리에 진공한 다음 로마군과 거의 20년을
      이태리 반도에서 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치러진 전투를 어떻게 구분하고 횟수 산정할지 지극히 애매하죠.
      한니발은 횟수만이 아닌 질도 결정적이죠. 고국 카르타고의 지원 없이 고립된 상태에서.
      섬멸전의 원조, 망치와 모루의 원조인 칸나 전투 하나만으로도 한니발은 1위가 될 여지가 있습니다.
      문제는 한니발은 최종적으로 로마에 패했다는 약점이 있고, 알렉산더는 아예 패전을 경험한 적이 없이 젊은 나이에 병사.
      승리 횟수로만 산정할 때 일본 전국시대 장수들이 꽤나 순위에 들어가는 오류도 생깁니다.
      그런 부분들은 고려하면서 영상 보면 될 겁니다. 충무공이 11승으로 나오는데, 23전 23승 아닌 무패로 본 모양.
      (충무공의 23전에는 매우 인접한 장소에서 몇 일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각각 셈한 결과. 그런 전투들은 1개로 통합될 여지도.)
      (충무공의 23전 식으로 횟수 산정할 경우, 2차대전 대서양 해전은 어마어마한 횟수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 수송선단과 유보트 교전
      횟수는 약 1,000회에 개별 항해 선박과 유보트 교전은 수천 회에 달하지만 모두 다 교전 횟수로 계산하지는 않았겠죠.)
      근대 이후로는 단연 나폴레옹이 압도적입니다.
      1차, 2차대전의 탁월했던 그 어떤 독일 장군도 감히 넘보지 못할 기록이며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 중반부 이후 포병 장교로 등장해서 워털루에서 패배 까지 20년 동안 유럽을 석권.
      1차 대전 독일 4년, 2차대전 독일 6년과 비교할 수 없고 나폴레옹은 모스코바를 점령 후 후퇴했지만 독일은 불가능했죠.
      웰링턴의 승리 횟수 대부분은 스페인에서 벌어진 전투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형제 친척들은 유럽 각각의 국왕으로 임명하면서 스페인 국왕 역시 그렇게 되었죠.
      그 때문에 스페인과 포르투칼에서 반 프랑스 봉기가 일어났고, 영국은 10년 이상 이베리아 반도에서 장기적 전투를 수행.
      스페인 전역에서 영국군은 프랑스군에 패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기억이 희미한데 프랑스가 스페인에서 손실한 병력이
      10년 동안 누적해서 대략 30만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가랑비에 몸이 젖은 셈이죠.
      만쉬타인, 구데리안, 롬멜, 패튼 몽고메리 등도 나옵니다.
      롬멜, 패튼, 몽고메리는 제 아무리 유능한 장군이라고 해도 만쉬타인급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2차대전에서 그토록 유능했던 전쟁의 대가 만쉬타인 조차도 인류 전쟁사에선 앞 순위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
      독일과 영국의 가장 큰 차이
      독일은 무수한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쟁엔 패배.
      영국은 수 많은 전투의 패배에도 결국 전쟁에선 승리. 그 원인은 전투의 중요도 결정성 때문.
      1588년 무적함대 격파는 세계제국 팽창 시발점,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충무공의 승리는 조선의 강대국 부상과 아무 관련 없고.
      영국 북미와 인도에서의 결정적 승리로 대륙 장악, 트라팔가와 워털루는 유럽의 향후 100년을 결정.
      독일은 분명 압도적 대승을 거두었지만, 전략적으로는 결정적 승리가 아닌 지역적 일시적 승리에 지나지 않았고.
      2. 영국은 과연 오늘날 존재하는 전세계 모든 국가 90%를 그 어떤 이유건 침공한 적이 있는가?
      정리하면 상당 부분 근거는 있는 것 같군요. 침공 후 지배 까지는 아니더라도 군사적 개입, 주둔, 압박.
      동영상에 소개된 책자 발행 시점 당시 유엔 회원국 193개국 중에서 무려 171개국이 영국의 군사적 침공을 경험.
      현 최강국 미국의 대통령 관저 : 화이트 하우스, 불 탄 후 흰색 페인트로 가림.
      나폴레옹 전쟁과 같은 시기 잠시 일어났던 미영 전쟁 중 수도 워싱턴이 점령당해 대통령 관저가 불타버렸죠.
      막강한 군사강국 러시아 :
      크림 전쟁 때 크림 반도만 점령당한 것이 아니고,
      그 무렵 극동에서 캼차캬 반도 까지 일시적이지만 점령당했습니다.
      그 충격으로 알래스카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미국에 매각했죠.
      알래스카는 영국령 캐나다와 미국과 접하고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영국이나 미국에 먹힐 것이라고 판단해 손 턴 것.
      러시아 혁명 당시 적백 내전이 벌어졌고,
      영국이 주도한 영국 미국 일본 등이 무르만스크, 흑해의 크림반도, 극동의 블라디보스톡 등에 상륙해서 상당기간 점령.
      하지만 트로츠키가 지휘하는 적군의 승리로 백군 반혁명군이 패배하자 결국은 모두 철수.
      중국과 인도는 말할 필요도 없고. 카리브해와 남미에도 영국령 섬들과 영령 가이아나.
      심지어 조선말 우리도 거문도를 점령당했죠. 일본 역시 일부 지역 번들이 영국과 소규모지만 전쟁 했고.
      프랑스는 백년전쟁의 전쟁터,
      독일은 18세기초 말버러공이 이끄는 대륙 원정군의 전쟁터. 지중해는 영국의 연못. 중동 아프리카 생략.
      정리하면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국가들의 대다수는 영국의 직간접 침공, 주둔, 압박등 경험한 적이 있다.
      없는 곳을 구태여 찾자면, 바다로 부터 완전 격리된 몽골과 같은 정도.
      그런데 다른 강대국들과 차별되는 점이 있죠.
      대영제국은 위대한 영웅에 의존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건설되었다는 것.
      알렉산더, 징키즈칸, 시저, 나폴레옹 급의 탁월한 군사지도자 없이
      고만 고만한 장군들과 그렇게 많지 않은 병력으로 세계 최초로 전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가 되었죠.

    • @scz8333
      @scz8333 Рік тому

      @@박희수-t8d
      2차대전 종전 후에도, 미국과 영국은 거의 함께 싸웠습니다.
      투입한 병력 규모에선 미국이 압도적이었지만, 전장의 다양성 측면에선 의외로 미국이 뒤진 면도.
      미국이 전혀 경험하지 못한 전쟁을 영국은 경험했으며, 같은 전투에서 조차 미국이 뒤쳐진 부분도.
      1. 제트기-미슬 시대의 함대 방공전 -------------------> 미국 실전 경험 없음, 영국만이 포클랜드전으로 유일
      포클랜드전에서 시스키밍 대함미슬 요격에 실패, 종전 뒤 세계 각국은 본격 근접방어 체계 도입 시작.
      2차대전 후 실전 함대방공전에서 적기를 격추한 경험은 영국 해군만이.
      2. 잠수함의 적함 격침 -------------------> 미해군 아직 없음, 단 2건의 기록 중 1건이 영국 핵잠의 기록
      잠수함 등장 이후 21세기 현재까지 잠수함 : 잠수함의 수중 전투에서 적 잠수함 격침 기록 역시 45년 종전 직전
      북해에서 수중 항해중이던 영 잠이 수중 항해중이던 독 유보트 격침한 사례가 유일한 전과.
      3. 대함미슬을 함대공 미슬로 요격 ----------------------> 미해군 전과 없음, 오직 영 해군이 걸프만에서 사상 최초 요격.
      걸프만에서 재취역한 미 전함 아이오와급이 포함된 미 함대를 호위하던, 영 방공구축함 T42가 이란의 실크웜 대함
      미슬을 시다트 함대공 미슬로 요격한 것이 유일한 전과. 당시 그 함대 소속 미 이지스함의 CIWS는 근처의 미 함정
      을 향해 오발 사고. 또한 그 무렵 걸프만의 다른 미 이지스함은 이란 여객기를 적기로 오판 격추해, 민간인 수 백명
      이 희생되는 대참사. 뿐만 아니라 그 무렵 걸프만의 또 다른 미 수상함은 고무보트 자살 폭탄 테러당해 함정 옆구리
      구멍 뚫려 바지선에 태워져 후송. 분명 미 이지스함이 영 T42 보다 고성능인데 막상 실제 상황에선 저런 일 터진.
      4. 전차 : 전차, 최장거리 격파 기록 -----------------> 1차 걸프전 때, 영 챌린저1 약 4.7KM 거리에서 적 전차 격파
      저 당시 미군이 병력과 투입 전차 수에서 압도적이었지만, 소수의 영국 전차부대가 최장거리 격파 기록.
      사막 지형이라 가능한 기록. 한반도의 굴곡진 지형에선 저 정도 거리에선 적 전차 관측할 곳도 별로 없음.
      걸프전 영국과 미국의 전차전 전과는 이렇습니다.
      영국은 192대? 전차 투입하고서 300 : 0 전과를 기록했고 특히 전차전 교전 손실 0 달성.
      미국은 영국 보다 압도적인 수량의 전차 투입, 끝 자리 수에서 0을 하나 더 붙여 투입하고 600 : 2 전과, 하지만 전차전 전투 손실 2 발생.
      우크라이나 전쟁 진행중인 2023년, 발트해 연안 에스토니아에서 실시된 나토 기갑부대 경연에서,
      ----------------------------------------> 주력 전차 MBT 부분 성적, 1위 영국 챌린저2 + 2위 스페인 레오파드2 + 3위 미국 에이브럼스2
      5. 아프칸 등에서의 최장거리 저격 기록 -------------------> 캐나다 영국이 주도하며 미국이 뒤 따르는.
      투입 병력은 미군이 압도적이지만 소수의 영국군과 더욱 소수의 캐나다군이 우세한 저격 기록. 캐나다 1위-3위-4위 영국-2위 미국-5위
      캐나다의 1위 기록은 2위 이하 기록과 차원이 다른 초장거리, 기억으로 약 3.5KM, 2위~5위는 2KM대 기록. 미군이 투입 병력은 많음에도 실전 기록은 저런.
      2차대전 이후 최강 패권국으로 등장한 미국.
      냉정하게 평가하면 덩치에 비해 내실 부족하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지난 70년.
      투입한 병력과 보유한 장비 및 과학기술 수준을 고려할 때, 믿기지 않는 비효율적 개입과 철수 반복된.
      21세기 현재, 서방측에서 미군이 가장 거대하고
      장비 또한 최상이지만 미군의 질적 수준이 그렇다는 아무런 보장 없고,
      이런 상태에서 미국이 아직 까지 경험하지 못한 단독으로 최강 적성국과 전쟁에서 승리 기대하기 힘들 것.
      생각해보길, 2차대전 이후 그리고 21세기 현 미국이 단독으로
      중국이나 러시아 국경 근처나 국경을 넘어 침공해 재래식 전쟁 벌여 승리할 의지나 능력이 있을지를.
      미국과 달리 영국은 안쑤시고 다닌 대륙이나 국가 찾기가 힘들 정도, 그것도 지극히 적은 병력으로 치명적 승리를 거두며.
      --------------------------------------------------------------------------------------------> 미국은 아직 단독으로는 최강의 적성국과 붙어 승리해본 경험도 없는.
      21세기 미 핵항모전단

    • @scz8333
      @scz8333 Рік тому

      @@박희수-t8d
      셰익스피어 헨리5세, 밴드 오브 브러더스 :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be he ne'er so vile,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And gentlemen in England now-a-bed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d they were not here,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오늘의 이야기는 (참전한 너희들이)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할 것이고,
      성 크리스핀의 날은(아쟁꾸르 전투 일) 결코 잊혀지지 않고,
      오늘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이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다.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는
      내 형제가 될지니, 그 신분이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오늘부로 그 신분은 귀족이 될 것이고,
      지금 잉글랜드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여기 있지 못한 것을 저주할 것이고
      우리와 성 크리스핀의 날에 함께 싸운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들의 용기 없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유명한 미국 2차대전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
      그 어원은 세익스피어 원작 헨리5세에 나오는 국왕의 연설.
      미국이 많이 베끼는 편이죠.
      형제들의 모임, 집단이라는 의미로
      백년전쟁 아쟁쿠르 전투 직전, 병력 열세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병사들에게 헨리5세가 했던 연설이라고 합니다.
      빈 말이라도 저렇게 하는 국왕, 국가, 군이라면 목숨을 바칠만 하겠죠.
      백년전쟁 시기 헨리5세 연설, 사실인지 아니면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창조된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부럽긴 하네요.
      아쟁쿠르 전투 승리 후 헨리5세는 영국-프랑스 통합 왕국 국왕에 올랐지만
      영국엔 불행, 프랑스엔 천만다행으로 헨리5세는 저 전투 승리 얼마 후 젊은 나이에 병사합니다.
      저 전투로 부터 약 20년 후, 쟌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는 백년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게 되고.
      그리고 미국은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저런 신화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미 할리웃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대사, 아마도 스타워즈 및 터미네이터 대사 아닐까 합니다.
      스타워즈의 명대사 우리 말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 " 내가 니 애비다. "
      터미네이터 시리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역시 우리 말로 옮기면 ------------------------> " 내 돌아올끼다. "

  • @ISSayGayTV-rairairairaichacha
    @ISSayGayTV-rairairairaichacha 2 роки тому +1

    일본군 짜리몽땅 미니전차랑 싸우다가 티거전차 만나면 ㅋㅋㅋ

  • @note20ultra5ggalaxy4
    @note20ultra5ggalaxy4 2 роки том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