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리 전투, 프리만 대령, 리지웨이 사령관, 몽클라르 장군, 크롬베즈 대령,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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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24 вер 2024
  •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13일 부터 2월 15일까지 미 2사단 23연대가 배속된 프랑스 대대와 함께 중공군 4차 공세 시 경기도 지평리에서 중공군 6개 연대의 집중 공격을 전면방어로 격퇴하여 UN군의 재반격의 기틀을 다지게 된 전투입니다.
    세부 내용에 앞서 UN에 대해 개관해 보면, 제 2차 세계 대전 종료 후, 1945년 10월 24일에 UN을 창설하게 되는 데, 이는 세계 평화 유지 목적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51개국이 가입합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 후 안전 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미국 포함 16개국이 전투부대 파병안을 1950년 6월 28일 가결합니다.
    이에 따라 UN군은 6.25 전쟁 기간 전투병 파견과 의료지원 등에 63개국이 지원합니다.이러한 유엔군은 6.25 전쟁에서 불리한 전세를 역전시키게 됩니다.
    이번 시간에는 지평리 전투에 대해 다음 시간에는 설마리, 가평 전투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이 사진은 1950년 6월 28일 6.25 전쟁에 대해 유엔군의 파병을 결의하는 안전보장이사회의 회의 모습입니다.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은 총 5차에 걸쳐 공세를 실시하게 됩니다.
    먼저 1차 1950 년 10 25일 부터 11월 5일까지 청천강, 운산, 희천, 장진호 일대에서, 2차 공세는 11월 25일부터 12월 3일까지 개천, 장진호 일대에서, 이로 인해 유엔군은 38도선까지 후퇴합니다.
    3차 공세는 12월 31일 부터 51년 1월 8일 까지 실시 국군은 평택- 원주-삼척을 연하는 선으로 후퇴를 합니다.
    이것이 1.4 후퇴입니다.이때 한강이 얼어 피난민들은 용이하게 한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또 다시 중공군에게 서울을 점령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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