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한국가곡) 정 지용 작시 채 동선 작곡 Soprano 이 주경 Piano 이 창덕 // 해 설 // 정지용은 어린 시절 느꼈던 고향이 변화되어 있는 모습에 상실감에 젖게 된다. 산꿩, 뻐꾸기, 꽃 등 고향의 자연은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세상이 변화되었음을 대조시켜 시 ‘고향’의 주제를 잡았다. 정지용의 이런 시에 일본과 독일의 유학파인 채동선은 1936년 그 당시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기 위해 유학 중 작곡하였고 고향의 그리움도 함께 선율에 담아 애절함으로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일제강점기 타지를 떠돌며 힘들게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의 고달픈 삶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 사랑받는 노래가 되었다. 시인 정지용은 6·25가 발발하기 직전에 이념적인 문제가 아닌 다른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수감자들이 북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그만 같이 월북하였고 그로 인하여 정지용의 시는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납북시인이 된 정지용이 그의 시가 모두 금지를 당하자 박화목 시인에게 개사를 부탁하여 1950년 ‘망향’이라는 노래가 나왔고 그후 1964년 유족들의 부탁으로 이은상 선생에게 개사를 부탁하여 ‘그리워’가 탄생하게 되었으니 한 개의 멜로디에 세 종류의 노래로 불려지는 정말 특이한 노래가 되었다. 1988년 금지당했던 정지용의 시가 해금이 되었고 다시 ‘고향’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소프라노 이주경이 부른 노래는 정지용의 시에 채동선이 곡을 붙인 노래 ‘고향’이다. ■ 채동선은 전남 낙안군 벌교리(현 보성군 벌교읍)에서 만석꾼 부호 채중현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성제1고보 재학 중에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3.1 운동에 참여하여 일본의 감시를 받자 자퇴했다.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슈테른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음악이론을 배웠다. 독일에서 귀국하여 정지용의 시를 가곡화하여 ‘고향’을 발표했다. 조선음악가협회가 창립되자 현제명, 홍난파 등과 활동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현악 4중주단을 결성해 활동했다. 창씨개명과 친일노래 작곡을 거부하며 서울 인근에서 은둔하며 민족적 절개를 지켰다. 채동선은 광복 직후 고려음악협회 회장, 작곡가협회 회장, 국립국악원 이사 등을 역임했다. 가곡 ‘고향’을 비롯해 ‘향수’, ‘망향’, 교성곡 ‘조국’, 우리나라 최초의 칸타타 ‘한강’을 창작했다. ‘진도아리랑’, ‘새야새야’, ‘뱃노래’, ‘도라지 타령’ 등 민요를 편곡했다. 서울대와 숙명여대에서 독일어를 가르쳤고 1953년 한국전쟁 도중에 급성 복막염으로 사망했다. 1964년 채동선가곡집이 발표됐고, 1979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1984년 '채동선 음악상'을 제정했고 2007년 채동선 음악당을 건립했고 음악당 앞길은 채동선로로 붙여졌다. 1933년 시인 정지용의 시에 작곡가 채동선이 곡을 붙인 가곡 ‘고향’이다. 정지용이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자 금지곡이 되었다. 1950년 박화목 작시의 ‘망향’, 1960년 이관옥 작시의 ‘고향 그리워’, 1964년 이은상 작시의 ‘그리워’ 등으로 바꿔 부르다가 1988년 정지용의 시가 해금되자 다시 ‘고향’으로 불리고 있다. 정지용은 충청북도 옥천 출신으로 김기림, 이태준과 함께 구인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을 등단시켰다. 해방이 되자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에 보도연맹에 가입했고 한국전쟁 중에 납북됐다. 출처 : 광주드림(www.gjdream.com) ■ 고향, 망향, 그리워. 무엇이 연상되는가? 시(詩), 향수, 이런 것들이 연상되지 않을까?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의 시인 정지용, 박화목, 이은상이 쓴 시의 제목이다. 그런데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사실 이 작품들은 너무나 아름다운 시다. 이를 노래한 가곡은 없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물론 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하나의 노래다. 작곡가 채동선의 곡이다. 매우 놀랍고 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부분이다. 하나의 시, 또는 같은 제목에 여러 작곡가가 곡을 붙이는 경우는 적지 않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들의 시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시성(詩性)을 갖춘 시인 만큼 느낌과 맛이 서로 다르기에 각각의 노래로 환생됐으면 좋았으련만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정지용’이라는 이름에서 답이 나오겠지만 이 일은 격동의 우리 역사 때문에 빚어진 결과였다.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역사의 비극 속에서 ‘납북 시인’이 됐던 정지용은 오랫동안 지워진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시로 만든 노래들은 다른 이의 시로 교체됐고, 정◯용이라 표기되기도 했었다. 채동선과 정지용은 남다른 친분이 있던 작곡가와 시인이다. 채동선은 전남 보성의 대지주집 아들로 태어나 서울 제일고보(현 경기고)를 다니면서 홍난파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워 음악에 입문했다. 정지용의 아름다운 시어를 좋아했던 채동선은 그의 대부분 가곡에 정지용 시를 사용했다. ‘고향’이 포함된 그의 가곡집에는 12곡 중 8곡의 가사가 정지용의 시일 정도였다. ‘고향’은 당초 정지용의 시에 채동선이 곡을 붙였고 많은 이들이 애창하던 가곡이지만, 6·25 전쟁 발발로 정지용 시인이 납북되면서 금지 가곡으로 묶인다. 하지만 이미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린 상태였고 당시 출판된 명가곡집 등에 수록된 인기 가곡이었으니만큼 문제가 적지 않았다. 급한 대로 각 출판사들이 박화목의 시 ‘망향’으로 그 가사를 대신하게 된 것이 두 번째 제목이 탄생한 배경이다. 1964년, 채동선 타계 12주기에 맞춰 유족들이 ‘망향’을 이은상의 시 ‘그리워’로 바꾼다. 정지용의 시로 만든 모든 곡들을 새 가사로 바꾸는 과정에서였다. 그러나 여전히 교과서에 실릴 처지가 되지 못하다가, 1988년 마침내 정지용의 시가 해금되면서 ‘그리워’ ‘망향’은 애초 제목인 ‘고향’을 찾는다. 또 나머지 가곡들도 동시에 부활하게 됐다. 하나의 곡이 세 개의 제목과 가사를 달게 된 사연이다. 채동선은 6·25 전쟁이 터져 피란길에 나서면서도 자신의 악보들을 항아리에 담아 땅속 깊이 묻었을 정도로 작품에 큰 애착을 가졌던 작곡가였다. 그러나 이 악보들이 빛을 보는 것을 미처 못 보고 피란지 부산에서 병을 얻어 1953년 53세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채동선이 한국의 풍광과 감성을 아스라이 그리듯 풀어낸 정지용 시를 사랑한 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고향’을 다시 찾게 된 채동선의 가곡 앞에서 남다른 감회에 젖게 되는 건 그래서일 것이고. 물론 ‘망향’과 ‘그리워’도 아름답다. 그렇다고 ‘고향’을 영영 되찾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애석한 유실이었겠는가. 출처/ 2014.3.24. 매일경제 오피니언 // 가 사 //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이은상선생의 작시로 된 곡을 많이 연주하는데...
정지용선생의 시로 된 곡은 더 가슴에 와닿기도 한다.
한국가곡도 유행을 타는 요즈음,
고전을 읽어야 하는 것 처럼 이런 옛가곡도 많이 불리워 지길 바래 본다!
고향(한국가곡)
정 지용 작시 채 동선 작곡
Soprano 이 주경
Piano 이 창덕
// 해 설 //
정지용은 어린 시절 느꼈던 고향이 변화되어 있는 모습에 상실감에 젖게 된다. 산꿩, 뻐꾸기, 꽃 등 고향의 자연은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세상이 변화되었음을 대조시켜 시 ‘고향’의 주제를 잡았다.
정지용의 이런 시에 일본과 독일의 유학파인 채동선은 1936년 그 당시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기 위해 유학 중 작곡하였고 고향의 그리움도 함께 선율에 담아 애절함으로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일제강점기 타지를 떠돌며 힘들게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의 고달픈 삶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 사랑받는 노래가 되었다.
시인 정지용은 6·25가 발발하기 직전에 이념적인 문제가 아닌 다른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수감자들이 북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그만 같이 월북하였고 그로 인하여 정지용의 시는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납북시인이 된 정지용이 그의 시가 모두 금지를 당하자 박화목 시인에게 개사를 부탁하여 1950년 ‘망향’이라는 노래가 나왔고 그후 1964년 유족들의 부탁으로 이은상 선생에게 개사를 부탁하여 ‘그리워’가 탄생하게 되었으니 한 개의 멜로디에 세 종류의 노래로 불려지는 정말 특이한 노래가 되었다.
1988년 금지당했던 정지용의 시가 해금이 되었고 다시 ‘고향’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소프라노 이주경이 부른 노래는 정지용의 시에 채동선이 곡을 붙인 노래 ‘고향’이다.
■ 채동선은 전남 낙안군 벌교리(현 보성군 벌교읍)에서 만석꾼 부호 채중현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성제1고보 재학 중에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3.1 운동에 참여하여 일본의 감시를 받자 자퇴했다.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슈테른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음악이론을 배웠다.
독일에서 귀국하여 정지용의 시를 가곡화하여 ‘고향’을 발표했다. 조선음악가협회가 창립되자 현제명, 홍난파 등과 활동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현악 4중주단을 결성해 활동했다. 창씨개명과 친일노래 작곡을 거부하며 서울 인근에서 은둔하며 민족적 절개를 지켰다.
채동선은 광복 직후 고려음악협회 회장, 작곡가협회 회장, 국립국악원 이사 등을 역임했다. 가곡 ‘고향’을 비롯해 ‘향수’, ‘망향’, 교성곡 ‘조국’, 우리나라 최초의 칸타타 ‘한강’을 창작했다. ‘진도아리랑’, ‘새야새야’, ‘뱃노래’, ‘도라지 타령’ 등 민요를 편곡했다. 서울대와 숙명여대에서 독일어를 가르쳤고 1953년 한국전쟁 도중에 급성 복막염으로 사망했다. 1964년 채동선가곡집이 발표됐고, 1979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1984년 '채동선 음악상'을 제정했고 2007년 채동선 음악당을 건립했고 음악당 앞길은 채동선로로 붙여졌다.
1933년 시인 정지용의 시에 작곡가 채동선이 곡을 붙인 가곡 ‘고향’이다. 정지용이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자 금지곡이 되었다. 1950년 박화목 작시의 ‘망향’, 1960년 이관옥 작시의 ‘고향 그리워’, 1964년 이은상 작시의 ‘그리워’ 등으로 바꿔 부르다가 1988년 정지용의 시가 해금되자 다시 ‘고향’으로 불리고 있다. 정지용은 충청북도 옥천 출신으로 김기림, 이태준과 함께 구인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을 등단시켰다. 해방이 되자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에 보도연맹에 가입했고 한국전쟁 중에 납북됐다. 출처 :
광주드림(www.gjdream.com)
■ 고향, 망향, 그리워. 무엇이 연상되는가? 시(詩), 향수, 이런 것들이 연상되지 않을까?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의 시인 정지용, 박화목, 이은상이 쓴 시의 제목이다. 그런데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사실 이 작품들은 너무나 아름다운 시다. 이를 노래한 가곡은 없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물론 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하나의 노래다. 작곡가 채동선의 곡이다. 매우 놀랍고 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부분이다.
하나의 시, 또는 같은 제목에 여러 작곡가가 곡을 붙이는 경우는 적지 않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들의 시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시성(詩性)을 갖춘 시인 만큼 느낌과 맛이 서로 다르기에 각각의 노래로 환생됐으면 좋았으련만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정지용’이라는 이름에서 답이 나오겠지만 이 일은 격동의 우리 역사 때문에 빚어진 결과였다.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역사의 비극 속에서 ‘납북 시인’이 됐던 정지용은 오랫동안 지워진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시로 만든 노래들은 다른 이의 시로 교체됐고, 정◯용이라 표기되기도 했었다.
채동선과 정지용은 남다른 친분이 있던 작곡가와 시인이다. 채동선은 전남 보성의 대지주집 아들로 태어나 서울 제일고보(현 경기고)를 다니면서 홍난파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워 음악에 입문했다.
정지용의 아름다운 시어를 좋아했던 채동선은 그의 대부분 가곡에 정지용 시를 사용했다. ‘고향’이 포함된 그의 가곡집에는 12곡 중 8곡의 가사가 정지용의 시일 정도였다.
‘고향’은 당초 정지용의 시에 채동선이 곡을 붙였고 많은 이들이 애창하던 가곡이지만, 6·25 전쟁 발발로 정지용 시인이 납북되면서 금지 가곡으로 묶인다.
하지만 이미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린 상태였고 당시 출판된 명가곡집 등에 수록된 인기 가곡이었으니만큼 문제가 적지 않았다. 급한 대로 각 출판사들이 박화목의 시 ‘망향’으로 그 가사를 대신하게 된 것이 두 번째 제목이 탄생한 배경이다. 1964년, 채동선 타계 12주기에 맞춰 유족들이 ‘망향’을 이은상의 시 ‘그리워’로 바꾼다. 정지용의 시로 만든 모든 곡들을 새 가사로 바꾸는 과정에서였다. 그러나 여전히 교과서에 실릴 처지가 되지 못하다가, 1988년 마침내 정지용의 시가 해금되면서 ‘그리워’ ‘망향’은 애초 제목인 ‘고향’을 찾는다. 또 나머지 가곡들도 동시에 부활하게 됐다. 하나의 곡이 세 개의 제목과 가사를 달게 된 사연이다.
채동선은 6·25 전쟁이 터져 피란길에 나서면서도 자신의 악보들을 항아리에 담아 땅속 깊이 묻었을 정도로 작품에 큰 애착을 가졌던 작곡가였다. 그러나 이 악보들이 빛을 보는 것을 미처 못 보고 피란지 부산에서 병을 얻어 1953년 53세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채동선이 한국의 풍광과 감성을 아스라이 그리듯 풀어낸 정지용 시를 사랑한 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고향’을 다시 찾게 된 채동선의 가곡 앞에서 남다른 감회에 젖게 되는 건 그래서일 것이고. 물론 ‘망향’과 ‘그리워’도 아름답다. 그렇다고 ‘고향’을 영영 되찾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애석한 유실이었겠는가.
출처/ 2014.3.24. 매일경제 오피니언
// 가 사 //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