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치 고개가 막힌 걸 알고 작전회의 한답시고 비행기 타고 도망갔지. 그러니 순식간에 군단장이 튀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병사들은 방태산 쪽으로 도주. 죽을 때까지 작전회의 때문일 뿐 도주는 아니라고 발뺌하고 전작권 반환 앞장서서 반대한 놈. 하긴.. 저놈 최대의 치적이 전작권 빼았긴 거니...
물론 유재흥의 잘못이 크지만 저는 결코 유재흥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라고 봅니다.왜냐구요?유재흥도 처음부터 오미재고개의 중요성을 알고 자기휘하의 1개대대 병력을 배치하려고 했는데 알몬드가 이걸 그냥 쌩깠죠.그리고 3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인데 이걸 타군단 작전지역으로 한다?이건 이를테면 내 목숨줄을 이웃에게 맡긴꼴이 되는거잖아요.고로 가장 책임이 큰 사람이 저는 10군단장 알몬드.그리고 후퇴하면서도 인접부대에 연락을 안한 7사단장 그리고 유재흥3군단장 그리고 최석 9사단장이라고 봅니다.
최석 장군이 먼저 도망 치는 바람에...혼란 가중됨....ㅠㅠㅠ....패잔병들이....유재흥 군단장의 헬기를 보고 도망간다고 생각 하고 공포에 빠지면서 혼란이 초래 된 경우....정신 무장이 안되어 있고 포위된 상태에서 중공군에게 호되게 패한 경험이 있는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
@@정선영-f4k 사령부부터 알몬드 유재흥까지 다 죽일놈인데 다들 오판이나 무능의 영역이라서요...근데 최석이는 공격명령을 받고도 의도적으로 토낀거거든요. 놀랍게도 지금도 현리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오미재쪽으로만 나있어요.(오미재고개를 넘지는 않고 터널이 뚤렸지만) 강원도의 수많은 산중에 고지를 점령하라 한거면 여기가 아닌갑다 쏘리 할수도 있지만 오미재는 모를래야 모를수가 없거든요 ㅂㄷㅂㄷ
당시의 국군은 제대로 된 훈련도 안되 있었고 무기를 원활하게 다루지도 못한 상황이라 이런 무기력함을 보여준 것 이라고 본다 이 전투에서 눈 여겨 볼 부분은 중공군을 우리는 당나라 군대라고 우습게 보고 있었지만 중공군의 특징은 지구력이 뛰어나고 특히 산을 잘 타는 것으로 보여진다 지금은 우리도 분야 별로 특화된 특수부대도 있고 무기도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목숨 걸고 싸우고자 하는 투지다
그리고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아서 그런 방어선을 만들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군단이 5월 공세가 시작된다는걸 안 시점이 대략 일주일도 안되었는데 그 시간동안 방어선을 만드는게 더 이상하죠. 물론 금성전투에서는 군단의 충분한 준비를 통해 군단이 금성 돌출부 빼앗긴지 단 하루만에 반격으로 돌아와 중공군을 타격하였으나, 현리전투는 그러지 못했죠. 당시 국군 수뇌부는 거의 모든 면에서 뒤쳐지고 바닥이었습니다.
유재흥은 박정희와 함께 일제 시대 일본군 장교 출신입니다. 6.25 전쟁때는 이분이 맡았던 모든 부대가 해체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7사단,2군단,3단군...한국군의 작전권 또한 이분때문에 결정적으로 미군으로 넘어가게 되구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 장교 인맥으로 승승 장구하게 되는데 심지어 박정희 대통령떄는 국방부 장관으로까지 임명됩니다. 노무현 대통령때 전시작전권을 찾아오려하자 격렬히 반대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현재 국립묘지에 장군묘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전시작전권이 이때 넘어갔다고 하네요. 그래서 친북성향의 정권이 추진하는데 걱정이 당연히 따랐던것이고 , 전쟁의 대상이 사실 중공군이며 공군과 해군이 막강해진 전력이라 거의 북쪽 서쪽 남쪽 전부가 전장이 되니 우리 젊은이들의 생명을 생각해서라도 최강의 나라와 동맹은 명분에 앞서 유지해야 합니다
중공군의 5월 공세가 있기 몇칠전, 미군은 최근에 사로잡은 중공군 포로들을 대거 심문 조사를 하여 새로운 정보를 듣게 되는데, 그 정보란 바로 중공군이 대규모 공세를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즉 4월 공세가 끝난지 딱 한달만에 공세를 하겠다는 것이었죠. 따라서 미군은 동부전선에 집중적으로 공격을 맏은 미 10군단에게 하여금 대량 공격을 흡수케 하여 중공군의 운동력을 분산시키도록 조치하였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군단의 보급로인 오마치 고개에 대한 조치는 매우 미흡했습니다. 당시 3군단장이었던 유재흥 장군은 미8군에서 내려온 작전계획에 대해 불평을 쏟아내었는데 그 이유란 3군단의 주요 보급로인 오마치 고개에 대한 관할건이 한국군 3군단이 아닌 미10군단에게 넘어가 있었고, 오마치 고개에는 아무런 병력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3군단은 9사단 29연대에게 1대대 병력을 차출하여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도록 조치하였고 이 병력은 마침내 오마치 고개에 도착하여 그곳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 10군단장이었던 알모드는 이러한 조치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며 반대하였고, 이에 유재흥도 맞받아 치며 싸웠으나 미8군단의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3군단에게 오마치 고개에서 철수하라 지시를 내리며 사실상 미8군은 미10군단에게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오마치 고개에는 아무런 병력이 배치되있지 않아 중공군의 공격을 받을시 금방이라도 점령 당할수 있는 매우 위험한 지대가 되었죠. 하지만 미10군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한국군 군단의 주요 보급로인 오마치 고개인데도 말이죠. 결국 중공군의 공격 개시일인 5월 16일, 중공군은 오마치 고개에 대한 총공격을 시작하여 한국군 방어선을 모두 돌파한 후 17일 오전 7경에는 오마치 고개 일대를 모두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때 오마치 고개가 점령되었다는 소식은 아무도 알지 못했고 심지어 오마치 고개를 맡은 미 10군단 조차 오마치 고개가 점령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죠. 한편 오마치 고개 전방에 배치된 한국군 7사단은 그야말로 얻어맞았는데 당시 7사단 정면에만 몰려든 중공군 병력만 무려 2개 사단급에 달하였고 통신선또한 중공군의 포격에 의해 모두 날라가버려 다른 부대에게 소식을 전할 기회조차 접지 못했으며 철수도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철수하는데에는 이미 중공군이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당시 중공군은 주력부대들을 추격에 나서게 하고 대대급 병력들은 미리 한국군보다 앞서나가 그들과 교전하게 한 뒤 시간을 끈 후 주력부대들이 도착하면 동시에 한국군을 포위섬멸한다는 원대한 전술을 이곳 현리전투에서 써먹었고, 그 결과 7사단이 보기좋게 얻어 걸려 포위섬멸 당하게 생긴 것이었죠. 물론 반격은 했었습니다. 다만 일시적이었을뿐 오래가지는 못했죠. 당시 7사단은 예비대 3연대를 내세워 철수하는 5연대와 8연대를 엄호하기 위해 가마봉과 대암산을 공격하게 합니다. 즉 안전한 철수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죠. 이후 3연대는 있는대로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고 그 결과 대암산을 점령하여 승전보를 울리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얼마안가 중공군 242연대가 나타나 반격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결국 3연대는 대암산에서 후퇴하고 마는데 당시 장병들은 대암산 전투와 지속된 퇴각으로 인해 피로도가 급증했고 이는 곧 사기저하로 이어져 결국 대암산 포기라는 선택을 할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죠. 이후 7사단은 기나긴 철수끝에 율전리에 도착하여 간신히 숨을 돌리기 시작하였고, 또다시 몰려오는 중공군 2개 연대를 향해 포격을 날리면서 그들을 격퇴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이때 미 제3사단 15연대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들도 없었다면 아마 횡성까지 밀렸을 겁니다.) 이때 모인 7사단 5연대 병력이 장교 7명, 병사 79명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대충 상상이 가죠. 또 9사단은 7사단에 비해 외외로 적은 피해를 입었는데, 당시 9사단은 중공군의 공세 당일인 16일날, 공격을 받지 않았으며 이후 빠른 철수를 전개하여 피해를 줄일수 있었죠. 하지만 5월 17일날 부터 전개된 전투과정을 보면 정말 가관입니다. 1951년 5월 17일 오전 1시, 한국군 9사단 30연대 2대대는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단 한시간만에 책임구역을 점령당하였고, 9사단 29연대는 원대리 북쪽에 대해 반격작전을 실행하였으나 곧바로 실패해 철수했으며 9사단 28연대는 포위될 위기에 처해 철수가 불가피해질 정도로 상황이 매우 긴박하게 전개되는등, 그야말로 7사단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때 9사단장 최석 장군은 새벽 3시경에 3군단장 유재흥과 통화하여 철수를 권하였으나 유재흥 장군은 "미 10군단 장알몬드가 아무 이상 없다는데? 철수 안됨"라는 식의 답변을 전하고, 철수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야간 철수시 혼란을 가중시킬수 있다는 이유도 덤으로 줬고요. 물론 9사단은 방법을 찾아 철수하는데에 성공을 합니다. 하지만 그 철수 방법이란 먼저 기동장비를 철수시키고 부사단장에게 설영대를 조직하게 한뒤 철수하는것이었고, 따라서 오마치 고개는 이미 점령되었으니 전술지휘소가 위치한 용포로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동중 중공군의 사격으로 인해 분산된 부대가 적잖아 있었고 이들 대부분은 본대로 돌아오지 않아 병력손실이 꽤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1951년 5월 17일 12시, 갑자기 용포 서쪽 능선에서 총소리가 나더니 총소리를 들은 9사단 장병들 대부분이 몽땅 분산되버려 사방팔방으로 흩허졌습니다. 이미 중공군은 용포로 거의 도착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죠. 이후 9사단은 북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여 오후 1시 40분경 현리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이때는 모두가 현 상황을 알아채버린 상태였죠.
현리 패전은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볼 필요. 만일 유재흥 장군이 아닌 다른 지휘관이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까? 패배가 아닌 적의 공세를 작던지역에서 차단했거나 후퇴에 성공하여 적의 공세를 약화시키는게 가능했을까? 어쩌면 현리패전의 과정을 한 개인에게 떠넘기는 단순함을 보이고 있지 않을까? 해당 물음의 시작점은 이전과 이후에 중공군 공세에 의해 한국군 방어선이 무너진 사례가 존재한다는 점임. 또한 군단급이 무너진 경우에 과연 예하 사단장 및 연대장들은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하는 점임. 무엇보다 중공군의 전술적 강점에 대한 해석이 부족하고, 당시 한국군의 전술적 방어나 우발계획에 대한 이해부족, 작전지역내 초급 지휘관들의 지휘력이 나뻤을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것이 패전의 교훈이 지혜로 변화되는 시금석이라고 봅니다.
유재흥이 쓴 책은 다른 초기 고위 장군들 책과는 다르게 일본군 시절 이 잘 기술 되어 있고. 사실적으로 기술 되어 있음.. 그거는 인정 해 줄 만함... 패장이지만 양심적인 책을 쓴것은 높이 평가 할 만함...아마도 반성을 깊이 하는 마음에서 썻을 것으로 추측 됨..미군측 자료에는 제주도에서의 행적은 ...잘했다고...나와 있음...
오마치 고개가 막힌 걸 알고 작전회의 한답시고 비행기 타고 도망갔지. 그러니 순식간에 군단장이 튀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병사들은 방태산 쪽으로 도주. 죽을 때까지 작전회의 때문일 뿐 도주는 아니라고 발뺌하고 전작권 반환 앞장서서 반대한 놈. 하긴.. 저놈 최대의 치적이 전작권 빼았긴 거니...
아..쪽팔려!
저런넘이 국방장관했다는게...더 쪽팔려!
웃기는건 유재흥장군이 국립묘지에 묻혀있다는거 이양반때문에 1개군단이 괘멸되었는데
장진호 전투 포함하면 2개 군단 궤멸 시켰어요
1. 6.25 초기전투 때, 7사단 궤멸
2. 영천전투 군단장, 그나마 성공적으로 방어.
3. 덕천전투때 2군단 궤멸
4. 현리전투 때 3군단 궤멸.
전적으로 유재흥의 책임은 아니겠지만, 제일 책임이 큰 건 사실.
@@무허공-z7n 솔직히 7사단은 정말 끝까지 버티다가 망한거고 2군단 지휘때는 예비대가 발 묶여서 어쩔수 없었음.
@@무허공-z7n 그리고 7사단장 시절에 한거보면 비장미가 넘치는데 단순 패배했다고 뭐라하는건 솔직히 아니라고 생각함.
@@똘이장군-o2b 궤멸 궤멸 궤멸
적 보다 무서운건 무능한 아군 지휘관
청천강 전투를 패전으로 이끈 2군단장 (국군 3만명중 1만9천명 전사) 현리전투를 패전으로 이끈 3군단장 6.25에서 두번에 패전이 같은 지휘관이 이끌었습니다 진짜 5000년역사에 남을 최악에 지휘관이네~~~
이전투의 결과로
1. 육군 3군단 해체 1,2군단으로 배속
2. 전작권을 UN사령부로 이전
3. 돌파당한 전선때문에 모든 전선이 뒤로 후퇴함.
전작권넘어가서 다행이죠
장진호 전투는 중공군 수십만의 불시 남침에도 체계적인 후퇴로 그나마 피해가 적었지만, 현리전투는 그야말로 무능한 지휘관으로 말미암아 1개 군단이 병력도 장비도 대부분 망실/와해되는 한심하고도 처참한 전사입니다.
물론 유재흥의 잘못이 크지만 저는 결코 유재흥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라고 봅니다.왜냐구요?유재흥도 처음부터 오미재고개의 중요성을 알고 자기휘하의 1개대대 병력을 배치하려고 했는데 알몬드가 이걸 그냥 쌩깠죠.그리고 3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인데 이걸 타군단 작전지역으로 한다?이건 이를테면 내 목숨줄을 이웃에게 맡긴꼴이 되는거잖아요.고로 가장 책임이 큰 사람이 저는 10군단장 알몬드.그리고 후퇴하면서도 인접부대에 연락을 안한 7사단장 그리고 유재흥3군단장 그리고 최석 9사단장이라고 봅니다.
최석 장군이 먼저 도망 치는 바람에...혼란 가중됨....ㅠㅠㅠ....패잔병들이....유재흥 군단장의 헬기를 보고 도망간다고 생각 하고 공포에 빠지면서 혼란이 초래 된 경우....정신 무장이 안되어 있고 포위된 상태에서 중공군에게 호되게 패한 경험이 있는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
항상 깜이 안되는 놈들이 윗대가리에 앉아있으면 애들이 다 죽는다....
부관참시를 해도 시원찮을 놈이 국립묘지에 있다니 ㅂㄷㅂㄷ
울 집안아재 욕하지 마쇼
전쟁중엔 지휘관의 판단과 지휘력.불퇴정신이 병사들의 생명과 사기에 막대한 영향을 줌.
사단장이 도망을 가버리니 ...
안타까운 패전사!
당연하지. 사촌형이 육사를 6월 19일에 입교했는데 6.25가 나서 소위로 임관됐다. 이게 말이되냐? 형은 대령으로 제대했고 지금은 대전에 안장돼 있다.
다른 유튜버들의 겉핧기식 감정적 내용만 보다가 이렇게 체계적 설명을 들을 수 있는게 정말 좋네요
국가보다 자신목슴이아까워 행동했던군인들중에는 살아남아 유공자로 대우받고있는자도 있겠구나 라는생각이드는구나
군단장 유재흥 부하들 두고 도망가서 박정희때 국방부장관하고 노무현 대통령때 작전권 회수 반대하던자
유재흥은 어릴적부터 일본말을 배웠기 때문에 해방후에도 우리 한국말도 전혀 할줄 모르는 작자였죠 아버지 유승렬도 일본군 좌관급 장교였습니다... 부하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도망간 자는 지휘관도 아닙니다 이 작자 때문에 작전지휘권이 미군에게 넘어가 버리고 말죠 ㅠ
다르게 생각해봐 작전지휘권이 넘어갔기 때문에 전쟁에서 안진거야
@@에구머니-m8o 이쉑, 존나 긍정적이네 ㅋㅋㅋㅋㅋㅋㅋ
내생각엔 알몬드가 최고 죽일놈 같은데요.
..당신의 부대는 지금 어디있소?
..잘 모르겠습니다..
이전투를 계기로 군사작전권이 미군으로...ㅠ
유엔군 총사령관 벤플리트 : 당신의 부대는 지금 어디있소?
이승만 인간백정정권 3군단장 유흥준: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국군은 창군이래 전투경험이 없었고 장교들도 교육수준 미달에 정신무장까지 약하니 만약에 전투경험이 많은 미군이 없었다면 큰일날번 했네요 from California
군단장도 군단장인데 9사단장이 진짜 죽일놈 같은데 ㅂㄷㅂㄷ
알몬드가 죽일놈 아닌가요?
@@정선영-f4k 사령부부터 알몬드 유재흥까지 다 죽일놈인데 다들 오판이나 무능의 영역이라서요...근데 최석이는 공격명령을 받고도 의도적으로 토낀거거든요. 놀랍게도 지금도 현리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오미재쪽으로만 나있어요.(오미재고개를 넘지는 않고 터널이 뚤렸지만) 강원도의 수많은 산중에 고지를 점령하라 한거면 여기가 아닌갑다 쏘리 할수도 있지만 오미재는 모를래야 모를수가 없거든요 ㅂㄷㅂㄷ
무능한 지휘관이야 말로 적 1개군단보다 무섭다
스스로 군단이 전멸한 전투로 한국역사 3대패전중 하나가 되었군요~
정말 오합지졸이 따로 없었네요~
안타까운 전쟁의 역사입니다. 지휘간의 판단이 병사들을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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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홍이 군단장을 하고 있으니 박살나는게 당연하지 구단장이 자신의 부대와 장비가 어떤지도 모르고 있다라... 그말은 지혼자 살기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 군생활때 유재홍이 국방부 장관이였다 그때 전쟁 났으면 큰일날뻔 했네
당시의 국군은 제대로 된 훈련도 안되 있었고 무기를 원활하게 다루지도 못한 상황이라 이런 무기력함을 보여준 것 이라고 본다 이 전투에서 눈 여겨 볼 부분은 중공군을 우리는 당나라 군대라고 우습게 보고 있었지만 중공군의 특징은 지구력이 뛰어나고 특히 산을 잘 타는 것으로 보여진다 지금은 우리도 분야 별로 특화된 특수부대도 있고 무기도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목숨 걸고 싸우고자 하는 투지다
진짜 무능의 끝이네... 무다구치 렌야급
아니다 적어도 렌야는 무책임하게 군대를 버리지는 않았지
렌야보다 못함. 작전도 그냥 입에서 나오는 실행가능성 없이 세우고 도망질에 책임 회피가 아니고 아예 자기군단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름. 이게 머 군인 군단장?
@@올리비아-l5i 애초에 준비기간이 고작 이틀인데 뭔 준비를 해 그리고 오마치 고개에 주요 병력 배치시키자고 한게 유재흥인건 알지?
렌야는 돌격이라도 했지.
완전 오합지졸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네; 미군이 중남미 중동지역에 무기 수백억원어치 깔아주고도 철수 후 몇달안에 나라 뺏기는거 보고 비웃었는데,,, 정말 군인은 죽음불사 정신이 무조껀 필요한듯
이런 지휘관이 국립묘지에 있음
퇴로인 오미재의 중요성을 간과한게 폐인인듯......후방에 예비대를 준비해놨어야 됐는데..
군단의 보급로를 인접군단에 맡긴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의문점 ~ 예비사단은 없었나 ? 용문산전투처럼 일선은 얇게 2선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더라면 무질서한 후퇴는 없었을텐데 ㅠ
그래서 유재흥이 미8군에 마구 반발했습니다. 군단의 보급로를 왜 미10군에게 넘기냐구요.
그리고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아서 그런 방어선을 만들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군단이 5월 공세가 시작된다는걸 안 시점이 대략 일주일도 안되었는데 그 시간동안 방어선을 만드는게 더 이상하죠. 물론 금성전투에서는 군단의 충분한 준비를 통해 군단이 금성 돌출부 빼앗긴지 단 하루만에 반격으로 돌아와 중공군을 타격하였으나, 현리전투는 그러지 못했죠. 당시 국군 수뇌부는 거의 모든 면에서 뒤쳐지고 바닥이었습니다.
청천강 현리전투는 지휘관의 미숙함과 국군이 훈련이 부족한데다 너무 허술하게 빨리 북진해서가 아닐까요
당시에 사람이 없었기에 지휘관을 돌려가면서 임명햇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중대장급 인물이 사단 군단을 지휘햇으니 능력에 부친것은 사실입니다
32살에 참모총장이 되고 30살에 별달고 사단을 지휘햇으니 오직햇겟습니까
어케 저런 무지랭이가 군단장을 했을까?
무능한 지휘관 때문에 많은 인력장비 손실됨. 아픈 역사
ㅠㅠ슬프네요
자전거 차고왔네요
터널이 있어서 이젠 옛길로 가야하지만
갑자기 고지전생각난다 무능력한 신임중대장 권총으로 헤드샷 갈겨버리고 부대원 살려내는 장면 ...
유재흥 대단하다.
유재흥 같은 무능한 장군이 다시는 나오지 말아야함..
유재흥은 이러고도 늙어서 전작권 넘겨받는데 기를쓰고 반대를 하였죠. 군인이라고 말하기 조차 수치스런 인물 입니다.
한마디로 잡놈 이네 잡놈을.국방장관.
시킨 인간은 똑 같은 인간이내
유재흥 그인간이 전작권 반환에 가장 크게 반대한 인물임
군지휘관의중요성 다시떠올리게하는
6.25남침한국전쟁.
특히유재흥3군단장과9사단장,채병덕 육군참모총장땜에
국군이지리멸렬되었다
군기와사기가 군대의승.패를 좌우한다.
전시총살감이다
반드시책임을물어야한다.
군단장도 문제지만 사단장들이 더
문제라고 생각됨.....😢
사단 통솔 못하고 우왕좌왕 갈팡질팡 각개 36개하여 역사에 빛나는
업적을 세움😡😫😓
9사단장 총소리에 놀라 방태산으로 튄거여??
이름이 모냐??
유재홍 군똥별이 먼저 튄거여??
최석이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무능한 지휘관은 나라를 거들 낼 뿐이다, 도움이 않된다는 말이다
거덜이 아닌 거들이라 더 가슴애 와다음
유재흥이가헬기타고 도망감 비행기아님 한국말도 제대로 못했다는 말이있음 개쒜이
국방력이 약해서 나라가 망하고 다시 건국되면 이렇게 처참할정도로 무너집니다.병사들 훈련도 안되있고 장교은 장교대로 제대로 지휘도 못하고 그렇다고 좋은 장비도 없고
국립묘지에서 당장 파내야 합니다
저런 무능한 장군이니 질수밖에
유재흥은 박정희와 함께 일제 시대 일본군 장교 출신입니다. 6.25 전쟁때는 이분이 맡았던 모든 부대가 해체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7사단,2군단,3단군...한국군의 작전권 또한 이분때문에 결정적으로 미군으로 넘어가게 되구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 장교 인맥으로 승승 장구하게 되는데 심지어 박정희 대통령떄는 국방부 장관으로까지 임명됩니다. 노무현 대통령때 전시작전권을 찾아오려하자 격렬히 반대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현재 국립묘지에 장군묘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오미재...가 아닌 오마재...입니다
다섯마리의 말도 겨우 지날수있는 좁디좁은 길이라해서
현재의 지명이 어찌 저리된건지는 모르지만 옛 작전상 지명은 오마재입니다
응 아니야
유재흥 국립현충원안장은 부끄러운 일이다 전작권을 . .7사단 3 군단을 말아먹은 똥별 그런자를 국방장관시킨 대통령도 한심 !
폐급 지휘관
무능한 지휘관은 병사의 피와땀으로 대신한다
9사단장 아오...
미국한테 감사해여됨
한국군들을 북한군에데려다가 상납한 한국의 장군은 누구
이런거 보면 백선엽 장군 이 정말 대단 장군인걸 느끼게 하네 적의 포위망 뚫고 사단병력 크게 안잃고 지연 작전 펼치면서 사단병력 그대로 다부동전투 에서 최후 전투 펼친거 보면
무기등을 버리고 후퇴했음...거의 현리전투와 같은 급으로 후퇴.
항시 국방을 최우선으로 하지않은 결과 입니다 신성 모국방장관 부터 문제가 있었읍니다
적군보다 더 위험란게 무능한 지휘관 근데 유재홍이 국방장관까지.... 풉 이게 나라냐?
유재흥 장군은 저러고도 승승장구 했다죠?ㅠㅠ
자기의 부대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무능한 이런 똥별이 군단장에 국방부장관까지 하다니! 그냥 병사들과 같이 오미재고개를 탈환하고 부대를 안전하게 후퇴시켜야지. 이런 무능한 지휘관이나 장관이 아직도 존재한다.
유재홍, 최석 ㅜㅜ 최악의 무능한 지휘관
군인은 전장에서만 일해야
미국이 없는 이 나라 과연 존재 할까 ?
지금도 그때와 달라진게 없다
미쿡 어쨋든 감사하죠.
스스로 능력 못갖춘 우리나라 슬프죠.
그동안 안일하게 빌붙어 살며, 비리와 호의호식에
만족하던 기득권 자한당새누리당국민의짐놈들ㅋ
저래놓고 훈장쳐받고 참 이나라 꼬라지 바라
지금도 똑같을 걸
뭘 지키고 누굴 위해 지키냐 믿을 놈년도 없는데 그냥 다 도망가겠지.
삼군단기..없으면....내가삼군단 팔구년 일월전역....
잘했어 누구라도 그냥 버리고 튀어야지 근본이 뒤틀린 것을 단추를 처음부터 잘못 끼웠는데 다음부터는 잘하고 말고도 없지 다 틀렸는데
얼마나 개판이면 총도 버리고 도망가냐 ㅉㅉ
강릉 잠수함사건
작전 하는 꼬라지보니
여전히 오합지졸....
저래놓고 전작권이전 반대 ㅎㅎㅎㅎㅎㅎ
에고 뭐하자는 애기냐 어이가없네여
쫄보네. ㅋㅋㅋㅋ 베짱도 없는데 어떻게 군단장까지 갔네
더 일찍 철수했어야 했나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방부 장관
너무 피상적인 나레이션 같음.
전시작전권이 이때 넘어갔다고 하네요. 그래서 친북성향의 정권이 추진하는데 걱정이 당연히 따랐던것이고 , 전쟁의 대상이 사실 중공군이며 공군과 해군이 막강해진 전력이라 거의 북쪽 서쪽 남쪽 전부가 전장이 되니 우리 젊은이들의 생명을 생각해서라도 최강의 나라와 동맹은 명분에 앞서 유지해야 합니다
경험부족이네요
현리전투 우리국군이 대패한이유는 ???!
현리전투 패전 원인은 하기 3가지로 요약됩니다.
1.사단장과 연대장들의 무능
2.미 10군단장 알몬드와 7사단의 무능
3.특히 무능한 9사단장을 고집한 육군참모본부 수뇌부 \
그러나 결론은 유재홍 군단장이 독박을 쓰지요.
중공군의 5월 공세가 있기 몇칠전, 미군은 최근에 사로잡은 중공군 포로들을 대거 심문 조사를 하여 새로운 정보를 듣게 되는데, 그 정보란 바로 중공군이 대규모 공세를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즉 4월 공세가 끝난지 딱 한달만에 공세를 하겠다는 것이었죠. 따라서 미군은 동부전선에 집중적으로 공격을 맏은 미 10군단에게 하여금 대량 공격을 흡수케 하여 중공군의 운동력을 분산시키도록 조치하였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군단의 보급로인 오마치 고개에 대한 조치는 매우 미흡했습니다. 당시 3군단장이었던 유재흥 장군은 미8군에서 내려온 작전계획에 대해 불평을 쏟아내었는데
그 이유란 3군단의 주요 보급로인 오마치 고개에 대한 관할건이 한국군 3군단이 아닌 미10군단에게 넘어가 있었고, 오마치 고개에는 아무런 병력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3군단은 9사단 29연대에게 1대대 병력을 차출하여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도록 조치하였고 이 병력은 마침내 오마치 고개에 도착하여 그곳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 10군단장이었던 알모드는 이러한 조치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며 반대하였고, 이에 유재흥도 맞받아 치며 싸웠으나 미8군단의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3군단에게 오마치 고개에서 철수하라 지시를 내리며 사실상 미8군은 미10군단에게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오마치 고개에는 아무런 병력이 배치되있지 않아 중공군의 공격을 받을시 금방이라도 점령 당할수 있는 매우 위험한 지대가 되었죠.
하지만 미10군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한국군 군단의 주요 보급로인 오마치 고개인데도 말이죠. 결국 중공군의 공격 개시일인 5월 16일, 중공군은 오마치 고개에 대한 총공격을 시작하여 한국군 방어선을 모두 돌파한 후 17일 오전 7경에는 오마치 고개 일대를 모두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때 오마치 고개가 점령되었다는 소식은 아무도 알지 못했고 심지어 오마치 고개를 맡은 미 10군단 조차 오마치 고개가 점령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죠.
한편 오마치 고개 전방에 배치된 한국군 7사단은 그야말로 얻어맞았는데 당시 7사단 정면에만 몰려든 중공군 병력만 무려 2개 사단급에 달하였고 통신선또한 중공군의 포격에 의해 모두 날라가버려 다른 부대에게 소식을 전할 기회조차 접지 못했으며 철수도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철수하는데에는 이미 중공군이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당시 중공군은 주력부대들을 추격에 나서게 하고 대대급 병력들은 미리 한국군보다 앞서나가 그들과 교전하게 한 뒤 시간을 끈 후 주력부대들이 도착하면 동시에 한국군을 포위섬멸한다는 원대한 전술을 이곳 현리전투에서 써먹었고, 그 결과 7사단이 보기좋게 얻어 걸려 포위섬멸 당하게 생긴 것이었죠.
물론 반격은 했었습니다. 다만 일시적이었을뿐 오래가지는 못했죠. 당시 7사단은 예비대 3연대를 내세워 철수하는 5연대와 8연대를 엄호하기 위해 가마봉과 대암산을 공격하게 합니다. 즉 안전한 철수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죠. 이후 3연대는 있는대로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고 그 결과 대암산을 점령하여 승전보를 울리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얼마안가 중공군 242연대가 나타나 반격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결국 3연대는 대암산에서 후퇴하고 마는데 당시 장병들은 대암산 전투와 지속된 퇴각으로 인해 피로도가 급증했고 이는 곧 사기저하로 이어져 결국 대암산 포기라는 선택을 할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죠.
이후 7사단은 기나긴 철수끝에 율전리에 도착하여 간신히 숨을 돌리기 시작하였고, 또다시 몰려오는 중공군 2개 연대를 향해 포격을 날리면서 그들을 격퇴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이때 미 제3사단 15연대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들도 없었다면 아마 횡성까지 밀렸을 겁니다.) 이때 모인 7사단 5연대 병력이 장교 7명, 병사 79명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대충 상상이 가죠.
또 9사단은 7사단에 비해 외외로 적은 피해를 입었는데, 당시 9사단은 중공군의 공세 당일인 16일날, 공격을 받지 않았으며 이후 빠른 철수를 전개하여 피해를 줄일수 있었죠. 하지만 5월 17일날 부터 전개된 전투과정을 보면 정말 가관입니다. 1951년 5월 17일 오전 1시, 한국군 9사단 30연대 2대대는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단 한시간만에 책임구역을 점령당하였고, 9사단 29연대는 원대리 북쪽에 대해 반격작전을 실행하였으나 곧바로 실패해 철수했으며 9사단 28연대는 포위될 위기에 처해 철수가 불가피해질 정도로 상황이 매우 긴박하게 전개되는등, 그야말로 7사단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때 9사단장 최석 장군은 새벽 3시경에 3군단장 유재흥과 통화하여 철수를 권하였으나 유재흥 장군은 "미 10군단 장알몬드가 아무 이상 없다는데? 철수 안됨"라는 식의 답변을 전하고, 철수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야간 철수시 혼란을 가중시킬수 있다는 이유도 덤으로 줬고요.
물론 9사단은 방법을 찾아 철수하는데에 성공을 합니다. 하지만 그 철수 방법이란 먼저 기동장비를 철수시키고 부사단장에게 설영대를 조직하게 한뒤 철수하는것이었고, 따라서 오마치 고개는 이미 점령되었으니 전술지휘소가 위치한 용포로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동중 중공군의 사격으로 인해 분산된 부대가 적잖아 있었고 이들 대부분은 본대로 돌아오지 않아 병력손실이 꽤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1951년 5월 17일 12시, 갑자기 용포 서쪽 능선에서 총소리가 나더니 총소리를 들은 9사단 장병들 대부분이 몽땅 분산되버려 사방팔방으로 흩허졌습니다. 이미 중공군은 용포로 거의 도착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죠. 이후 9사단은 북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여 오후 1시 40분경 현리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이때는 모두가 현 상황을 알아채버린 상태였죠.
@@님조랄 긴글 감사합니다
@@cityhuman1556 /독박이 아니라 전선이 일제히 무너지고
군이 도망하기 시작한게 유재흥이 도망갔다는 소문이 돌고나서이기 때문에
유재흥을 탓하는 게 더 옳은 것입니다.
유재흥은 더 심하게 조롱하고 욕해야 합니다.
@@님조랄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현리 패전은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볼 필요. 만일 유재흥 장군이 아닌 다른 지휘관이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까? 패배가 아닌 적의 공세를 작던지역에서 차단했거나 후퇴에 성공하여 적의 공세를 약화시키는게 가능했을까? 어쩌면 현리패전의 과정을 한 개인에게 떠넘기는 단순함을 보이고 있지 않을까? 해당 물음의 시작점은 이전과 이후에 중공군 공세에 의해 한국군 방어선이 무너진 사례가 존재한다는 점임. 또한 군단급이 무너진 경우에 과연 예하 사단장 및 연대장들은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하는 점임. 무엇보다 중공군의 전술적 강점에 대한 해석이 부족하고, 당시 한국군의 전술적 방어나 우발계획에 대한 이해부족, 작전지역내 초급 지휘관들의 지휘력이 나뻤을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것이 패전의 교훈이 지혜로 변화되는 시금석이라고 봅니다.
그건 니 맘상 지휘관이 누구냐에 따라서 같은 지역에서 같이 고립되도 누구는 부대 전체를 전멸 시키고 자신도 뒤지지만 누구는 거진 온전하게 상대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철수함. 대표적으로 장전호 전투에서 ㅄ 같은 미육군 과 미해병대만의 차이만 봐도 답 나옴 .
유재흥에게도 물론 책임은 있지만.. 여러 불운에 불운이 겹친 면도 어느정도 있네요 ㅠㅠ
내생각엔 알몬드가 최고 죽일놈 같은데 이쉑히 혹시 중공군에게 포섭된거 아님?그러지않고서야 유재흥이 오마치고개의 중요성을 깨닫고 여기에 자기휘하 군단의 병력1개대대를 배치하겠다고 했을때 알몬드가 왜 그냥 쌩깠을까?
조선이 조선햇네
미국 알몬드소장과 유엔군본부에서 잘못했네~ 그렇게 중요한 오마지고개를 자기지역이라고 대대병력을 철수시키고 지키지 않고 등한시한 알몬드소장이 가장큰 책임자 인것 같네...
진짜 무능하네...
그나마 유능한 일본군 출신 장교들이 있어서 6.25때 나라를 지킬 수 있었지...
친일파 운운하는 건...진짜 아니다...
유재홍 친일파 장교입니다...한국말도 제대로 못했어요 ㅡ,ㅡ
유재흥은 한국말 통역병을 데리고 다닌 뼛속까지 친일파입니다
그리고 님의 발언은 너무나도 속보이는 매국이네요
혹시 빨갱이세요~??
유능하기는...대부분 무능했는데 ㅋ
소련 미국 한테 신나게 털린 병신같은 일본군 출신이 유능했을리가 있슴????
ㅋㅋㅋㅋ 😆 일본군출신들 땜시 우쨌다고? 광복군 김홍일 장군없었으면 1사단이고 7사단이고 뭐고 다 아작났다. 서부의 일선에 있던 백모야, 이모야, 유모야 장군은 다 깨졌고 강릉의 이성가와 춘천의 김종오는 잘싸웠지만 일본육사 출신 아닌데?
목숨걸고 싸워서 지킨 우리 국군의 숭고한
희생에 머리숙여 존경을 표합니다.
you are
사실 이 전쟁은 유재흥 장군의 잘못이 아닌 전적으로 미군의 책임이 아주 컸음.
현리전투를 들먹이는것은 정치적 의도 때문입니다. 육이오때는 밀고 밀리는일이 비일비재했는데 현리전투만 들먹이는 이유가 뭘까요. 그리고 그전투는 바로역습하여 파로호에서 침략한 중공군을 몰살시켯는데.
중공군을 역습한게 미군이지 국군은 아니잖어? 무능한 이승만이 국군에 무능한 지휘관을 앉혔고 병사는 제대로 훈련조차 안되어 있으며 이승만이 할 줄 알았던건 도망가는 것 뿐이었지.
전투에 질수도있지만 한심한 지휘부때문에....정치이야기는 하지맙시다...
@@jwl4836 니가 그당시 대통령이나 장군이었으면 잘할수 있었을것 같냐? 영상 내용 파악도 못한것 같은데. 그리고 파로호 대첩의 주인공은 국군 6사단이야. 미군은 지원을 잘한거고
유재흥이 쓴 책은 다른 초기 고위 장군들 책과는 다르게 일본군 시절 이 잘 기술 되어 있고. 사실적으로 기술 되어 있음.. 그거는 인정 해 줄 만함... 패장이지만 양심적인 책을 쓴것은 높이 평가 할 만함...아마도 반성을 깊이 하는 마음에서 썻을 것으로 추측 됨..미군측 자료에는 제주도에서의 행적은 ...잘했다고...나와 있음...
원인제공은 알몬든가 하는 맥아더의 똥개때문이 아닌가요 ?
말들은 쉽지 잘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논단하지 마시오
그래서 어쩌라고? 잘했다고? 누구나가 다 잘할 수는 없지만 그자리에 있으면 최소한의 능력과 책임감은 있어야 한다. 안그럼 그자리에 있음 안되지. 권한과 보상을 주었기에 실패하면 패전지장으로 옛날에는 삼족을 멸하였다. 부끄러움을 모르는자!
세상에. 유재흥 장관에 대한 극단작인 비난 일색이군요. 게다가 친일파라니...
당시 구도로 보았을 때 3군단의 현리전투 패배는 미군지휘부의 덫이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동일 시간에 용문산 전투의 승리가 있었지요.
이런식으로 물타기를 하는구나...
미군지휘의 덫??? 후방을 담당하고 있던 국군이 대 패배하면서 미군 전체가 위험해지고 전멸할 뻔했는데? 물타기와 조작도 좀 적당히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