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광주 이가들은 여주 영릉에 가지 않습니다. 한때 팔극조정(극자 항렬을 쓰는 광주이씨 8명이 정승과 판서 등을 동시기에 벼슬함)이라 불릴만큼 잘 나갔으나 미신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손 할아버지 묘소를 세종에게 빼앗긴 후부터...폐비윤씨에게 사약을 전달한 죄명으로 돌아가신 인손 할아버지의 손자인 이세좌...그 당시 멸문지화를 당했는데 손자 두명은 어리다고 살려 줘서...이세좌 손자 중에 한 분이 훗날 영의정이 된 동고 이준경입니다.
시아버님 께서 여기다 나를 묻어다오 하시며 명당을 잡아 놓으셨는데 첫부인의 큰 아드님이 거기에 쓰면 안된다고 하시는데 온통 친척어른들께서ㆍ 그 시아주버님 뜻에 따르라고 하여 제가 아버님이 이자리를 정해 놓으시고 아주 좋아하셨는데 하고 맞섰지만 시아주버님이 제일 큰 어른이니 따르라고 하여 그 자리를 못 쓰게 된게 늘 죄송하여 ㆍ 제사만 열심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게 얽히는 자체와 이유가 많다면 명당이 아니고 인간들의 어설픈 체계일뿐이죠 명당은 그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명당이어야 명당입니다 세종의 아픈 개인사와 더블어 우리의 역사는 지금 그 과정을 거쳐 한글이 사라지지 않고 it시대 더 빛나고 현재 대한민국의 모든 성장의 절대적 기반인 걸보면 명당은 명당인가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산에 푹 꺼지기보다 높은곳에서 내려다 보며 온국민들을 지켜 주었으면 더 좋은 명당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교를 국치로 삼은 조선이 일반 사가에서도 하지 않는 남의 묘자를 건드리다니 조선왕조가 얼마나 이율배반적 인가를 여실히 보여줌. 세종께서 대모산 아버지 곁에 20년이나 계셨는데 죽어서도 효를 행해겠다며 잡으신 자리니 그 머나먼 여주땅까지 가시려 했겠어요 문종 또한 아버지 세종 곁에 있고 싶어 했지요. 이상한 왠갖 사설을 만들어 내는 자들의 구린내가 엮겹다 아니할 수 없네요
재밋게 잘 보고 말씀 잘 들었습니다. 지금 국정원 자리 헌인릉 근처 원래 단국대 자리였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정부에서 이를 알고 국정원이 들어왔지만 단국대는 한남동을 떠나 용인 죽전이전 동문들은 동창회도 않는다는 소리를 들을정도로 재단측, 학교측에 불만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설에는 세종묘를 영릉 여주로 옮기고 조선역사가 100년 더 지속되었다는 설도 있더라구요. 짧은 지식이지만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 순리를 거스름엔 댓가 지불 각오는 맞는듯 합니다 고맙습니다
이인손 어른이 돌아가실 때 자식 5명(이극배 등)이 모두 장성했기에 묘터를 정할때와 장사지낼때 장지에 가셨으리라 보여지는데 매장후 6년뒤 세종대왕 묘 이장건으로 이인손 묘도 이장을 했다고 했습니다. 근데 매장후 돌다리를 놓고 제실을 완성했다하니 그 집안이 대단한 갑부였나 봅니다. 아울러 이장때 묘터에서 여기서 연을 날리어 떨어지는 곳에 이장지를 정하라고 하는 땅속에서 석판이 나왔다는데 근데 6년전 장사때 자식들이 하관 등을 지켜 보았을 것인데 이장할때 땅속에서 그런 석판이 나왔다고 하니 그것도 좀 설득력이 부족한 구담으로 보여집니다. 또한 보통 이장 할 곳을 정한후 같은날 칠성판에 시신을 수습후 새 묘터에 땅을 파서 시신을 묻는데 그날 연을 날어서 덜어진 곳이 현재 묘잣리나니 최초 이장할 자리가 아닌 연이 떨어진 곳으로 급히 묘지 위치를 변경했다고 할수 있겠지만, 그러나 좀 설득력이 없어 보여집니다.
어려서 영릉부근에 살면서 듣던 이야기입니다. 다른 것은 연이 떨어진 곳에서 사방 30리 안에 어느 곳이든지(이미 묘가 있더라도!) 쓰도록하라는 왕명이 있었고, 이에 현재 자리에 원 주인 묘(이인손선생인지는 모르겠음)를 모셨다고 합니다. 연이 떨어진 곳이 연하리(현재도 있음)고 30리 안에 있는 현 묘소 신지리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과거 연하리는 여주읍이고, 신지리는 능서면 북성산 바로 아래 마을입니다.
실록에는 1468년(예종 즉위년) 12월 27일에는 “천릉할 땅을 여흥 성산의 이계전의 분묘로 정하고 술자리를 베풀다.”라고 되어 있다. 또 12월 28일에는 “이인손의 묘는 이계전의 분묘 옆에 있었다. 이극배(이인손의 장남)를 불렀다.”라고 되어 있다. 영릉 자리를 찾은 사람은 당대 최고의 지관 안효례이다. 원래 묻혔던 사람은 문열공 이계전(李季甸)과 충희공 이인손(李仁孫)이다. 두 사람 모두 세조의 계유정난에 참여한 공신이다. 세종대왕이 천장된 영릉은 이계전이 묻혔던 곳이 혈심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설화의 대부분은 영릉은 이인손이 묻혔던 자리라는 점이 부각된다. [출처] * 명당 주인은 세종대왕 1 - 존양재 이계전묘, 풍애 이인손묘|작성자 효천 효하 윤교수 여주박물관에서 제작한 동영상에도 "지역에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천정할 묘자리의 주인을 이인손으로 흔히들 알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상지관이 이계전의 묘자리를 보고 길하다 하였으며 이인손의 묘는 그 근처에 있어 같이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도 남의묘를 빼앗지는 않고 금전적인 보상을 해 주고 파묘한 그자리가 명 당이라 해서 자기를 사후 그곳에 매장 할 것을 유언 하여 실행해 그자리에 모 신후 부터 안좋은 꼴을 보 게 되더라 하고 말씀드리 고자 합니다 경기도 용인 양지 제일리 에 있던 임경업장군의 묘 를 고향으로 이전하게 되 어 60~70년대 사업을 해 서 유가증권으로만 100억 이상의 부를 창출 하였으 나 그후 본인은 물론 부인 도 2~3년후 사망하고 그 큰재물을 물려받아 지속적 으로 사업을 하였지만 결 국 자손까지도10년을 못 버티고 선대에 사방60리 가 자기네 땅이란 것도 제주귤농장도 용인 농장 도 모두 처분해 그냥 주져 앉고 마는 꼴을 보았습니 다,
지구상에서 어디든 언제든 땅의 주인이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개인이 소유한다고 해도 누구도 땅을 언제나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국가에서 정한 국유지는 다릅니다. 개인이 갖고 있는 땅도 국가에서 수용하면 국유지가 됩니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 개인의 사유지를 내 놓아야 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라에서 하는 일이니 그것을 수용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작은 나보다 큰 나인 국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는 왕정 시대이니 당연히 왕의 선택이 모든 것을 결정했을 것입니다.
살아생전 남들에게 많이 베풀고 선행을 많이하고 생을 다하면 비록 흉지라고 할지라도 길지인 명당으로 변할거라고 생각하고 보편적으로 능력껏 남에게 베풀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명당을 엄청 좋아하시면서 명당찾아 남의집 청마루밑에 암장도 마다 하지않으셨다던 우리 외가 이제는 흔적조차없습니다.
그 후손이 현재 여주시 삼교리에 살고 있답니다, 선배되는 분인데, 그분 부친께서는 일제강점기때 강제 징집되어 일본군으로 유황도에 끌려가서 군생활하다가 제대하여 돌아오는데 일본놈들은 군함에 태워 부산항에 돈한푼안주고 하선시켜 각자 알아서 집으로 가라 하였답니다,서울 사람들은 험악한 산길을 찾아 가다가 길을 잃고 굶주림에 죽는 사람이 많았답니다. 시골 출신분들은 가다가 어느민가에 들려 나무 한짐 해주고 밥 얻어먹고 하룻밤자고 하면서 집을 찾아왔더랍니다. 선배 부친은 다행이 무사하게 집에 돌아왔는데 동생분이 또 징집 영장이 나왔답니다, 조부께서 자식들을 불러 이루시길 선배 부친보고 얘야 너는 한번 갔다가 왔으니 아무래도 니가 동생대신 갔다오는게 낫겠다 하셔서 또 갔는데 당신 스스로 유황도로 가겠다고 자원해서 갔다온 기막힌 사연이 있죠
세종대왕릉에 얽힌 이야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말씀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경기도 여주시.세종대왕릉 영릉(英陵) 참상핍하
좋은 영상 잘봤습니다
광주 이씨 이인손 님 가문도 번창하세요
재미있는 이야기에 좋은 교훈까지 주시네요. 잘 봤습니다.
박사님 감사합니다!
유튜브에서 조상님의 묘소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다시 고찰해 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든사람이 죽어서 명당찾으면 산자들이 살수있는곳은 있을까 싶네요
우리선조 이인손 할아버지 묘인데 예종때
양도하였다는 말을 어려서 조부님께 ·들었는데 ~
여기서 다시 들을줄이야~
감사 함니다
저도 광주이씨인데. 저의 뿌리를 들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본관이 동일한 24대손입니다
저희 고모 이름하고 같으세요^^♡
19대손입니다^^
광릉 부원군 23대손 부산 이성수입니다~ 항상 자부심갖고 삽니다^^
우리 광주 이가들은 여주 영릉에 가지 않습니다. 한때 팔극조정(극자 항렬을 쓰는 광주이씨 8명이 정승과 판서 등을 동시기에 벼슬함)이라 불릴만큼 잘 나갔으나 미신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손 할아버지 묘소를 세종에게 빼앗긴 후부터...폐비윤씨에게 사약을 전달한 죄명으로 돌아가신 인손 할아버지의 손자인 이세좌...그 당시 멸문지화를 당했는데 손자 두명은 어리다고 살려 줘서...이세좌 손자 중에 한 분이 훗날 영의정이 된 동고 이준경입니다.
@@이권재-l3h억울하다는 말을 훈민정음으로 열심히 적고있네요ㅋ
광주이씨 23대 종갓집 후손으로, 몇번 윗 어른들께
들었을 땐 옛날 이야기 같았는데 박사님께 듣고보니
사실이었구나하며 감회가 새롭고 감사함을 느낌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고, 사랑과 존경을 드립니다~~^^♡
한산이씨 이계전 묘소라고
조선왕조실록에 나옵니다.
영상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23대손 입니다 ㅎ
죽어서도 명당이라. 사람의 욕심이 끝이없네
살아있을때 내주위를 둘러보고 같이 사는 삶이 최고의 삶입니다.
아들이 여주 전차부대에 복무 했던 관계로 남편과 면회가 세종대왕릉 에 가보았는데 이렇게 영상으로 보니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다.^^
넘 고맙습니다
명당이면 후손들이 왜 처참하게 되었나? 풍수는 후손이 위안받기위해 만드는 이론인것 같다.
오늘부로 나는 명당 안믿는다. 🛠🛠🛠
감사합니다
우리조상의 묘 이인손의 후손으로
교수님덕에 확실한 광주이씨묘에 얼힌사연 잘 배우고갑니다
말씀도 절도있고 정갈하게 이해할수있는 설명 감복하고 풍수가 중요하다는걸 느끼고 깨닫고 갑니다.
엄마가 광주있고 한음대감 후손정도로만 알고있습니다.
광주 이가에 훌륭한분이 계셨군요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귀한걸음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조상님께 깊은 감사를드립니다
광주이씨 22손입니다.
성실히 잘 살게습니다.
높은자리 권력을 이용해서 아래사람의 손해를 잎이면 좋은일이 될쑤없는것을 역사를통해서도 알쑤있네 😢🎉
꼭 그렇게 생각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ㆍ 다 나랏님을 위해서 빈자리를 내주신 이인손님이 더 훌륭 하시니 그 빈자리를 내주신 님을 더욱 더 빛날것입니다 ㆍ 긍정적인 맘을 후손에게 남겨 줍시다
제각을 짓지 말것을
이인손후손이지만.모르고 살았는데
교수님께서.밝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인손(우의정): 묘소는 여주시 능서면 신지리
아들 5명: 극배(영의정), 극감(이조판서) 극증(판중추부사), 극돈(좌찬성), 극균(좌의정) 이렇게 5극이고 3극은 조카들
극규(이조참판), 극기(공조참판), 극견(이조참의) 이들을 8극조정이라 부른다.
모르는 역사를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얼마전에 여주를 갔는데 세종대왕 모셔 계신곳이 있다는걸 알면서도 못가본게 아쉽네요 만약 여주를간다면 꼭가서 선생님 말씀 저장해두었으니 다시보며 둘러볼까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낭만을찾아 돌고도는 여유만만 68세 초년영감입니다
여주에 집사서 자는데 조용하고 평안
선생님좋은 말씀 다음또들려주세요ᆢ
감사 합니다
조선시대 누구도 상대할수 없는 권력의 왕부터 시작해서 한국 명당자리는 왕족들이 모조리 갖고 집짓고 산소 만들었는데 왜 그리 단명한 왕들이 줄줄이 생기고 그나마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긴 수모에 고종은 독살됐을까요? 조상이 다들 명당자리에 누워있을텐데.......
자연의 순리를 거슬렀기때문에 하늘에서~
ㅖ
고종아버지ㅡ흥선대원군이
예천가야사절을태우고ㅡ자기아버지
남연국묘소를 이장해서 망국에올랐지요
좋은 정보 역사를 다시 되세겨 봅니다
역사 공부하고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명당찾기 쉽네요 손에쥐고 하면되니까요 ?
끝까지 보지 못하고 조금 오해했네요 좋은 정보와 강의 감사합니다 ☝
제가 광주이씨 이인손의 후손 입니다.
85세이신 아버지에게도 귀가 따겁게 들었는데 일면식도 없는 선생님케서도 광주 이씨
제 조상의 내력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네요 감사 합니다.
세종대왕님께 자리를 양보해 주신 공덕으로 광주이씨는 자손들이 크게 번창 했다지요?
저는 그 영릉을 찾아갔을때 마침 일본에서 높으신 분이 방문을 하셔서 ㆍ거기 해설사중에도 훌륭 해설사님께서 정성스럽고 재미나게 말씀하시는걸 듣는 행운이 였습니다
저는 경주이씨입니다
전주이씨 가문으로 시집을 와서 손주가 넷입니다 ㆍ 가문을 더욱 번창 시키고 싶은 영원으로 열씸 기도 합니다
시아버님 께서 여기다 나를 묻어다오 하시며 명당을 잡아 놓으셨는데 첫부인의 큰 아드님이 거기에 쓰면 안된다고 하시는데 온통 친척어른들께서ㆍ 그 시아주버님 뜻에 따르라고 하여 제가 아버님이 이자리를 정해 놓으시고 아주 좋아하셨는데 하고 맞섰지만 시아주버님이 제일 큰 어른이니 따르라고 하여 그 자리를 못 쓰게 된게 늘 죄송하여 ㆍ 제사만 열심 모시고 있습니다
@@공경-x8b 이장 후 몰락의 길로 갔죠
연산군 시절 두 번의 사화에 멸문지화
저에게 할아버지뻘이네요^^ 전 광릉부원군 23손 이성수 아버님은 이종득 할아버지는 이후재 ^^
감사합니다.자세히알려주셔서.다시금고맙습니다
자리를 뺏길걸 알고 지관이 다음 자리까지 점해놓은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드네요~ ^^
정말 신기하네요
오늘도 좋은 이야기 및 지식을 배우고 갑니다. 영상감시합니다.
명당은 없다
죽어면 끝나는거다
헐... 여주시 설화를 진실로 얘기하다니..
조선 왕조실록 이계전의 묘라고 나오고 이인손의 묘는 바로 옆에 있어서 함께 옮겼다고 나옵니다.
광주리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군요,,,,감사합니다,,,
그렇게 얽히는 자체와 이유가 많다면 명당이 아니고 인간들의 어설픈 체계일뿐이죠
명당은 그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명당이어야 명당입니다
세종의 아픈 개인사와 더블어 우리의 역사는 지금 그 과정을 거쳐
한글이 사라지지 않고 it시대 더 빛나고 현재 대한민국의 모든 성장의 절대적 기반인 걸보면
명당은 명당인가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산에 푹 꺼지기보다 높은곳에서 내려다 보며 온국민들을 지켜 주었으면 더 좋은 명당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교를 국치로 삼은 조선이 일반 사가에서도 하지 않는 남의 묘자를 건드리다니 조선왕조가 얼마나 이율배반적 인가를 여실히 보여줌. 세종께서 대모산 아버지 곁에 20년이나 계셨는데 죽어서도 효를 행해겠다며 잡으신 자리니 그 머나먼 여주땅까지 가시려 했겠어요 문종 또한 아버지 세종 곁에 있고 싶어 했지요. 이상한 왠갖 사설을 만들어 내는 자들의 구린내가 엮겹다 아니할 수 없네요
저는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21대손
입니다 한 2주전에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 (고덕산) 이극배 조상님의 묘를 찾아뵙고 왔네요 이인손님의 묘도 시간내서 한번 다녀와야 겠습니다 ~
남의
산소자리
뺏고도
죄를받지않았을까
당연
죄를받아야
마당하죠
나중긑까지
잘되지는
않아요
후손들이긑까지
잘될까요
내가짛은죄를
후손이
받는다라고
말하는겁니다
옛날에는
양반
벼슬
이런인간들이
우지
좌지
했잖아요
요즘
안그러잖습니까
알게
모르게
죄받아요
옛맑그런말
하나도
없답니다
3대는달되고
3대는
잘안된다고
했잖아요
우리조상님들
지혜라던지
그런말들이
지나고보면
다맞아요
그래서
악한긑은
없어도
후한긑은
있더라
하는겁니다
답글은. 다맞지요
옳은말씀입니다
권력으로
못된짖은 다해
놓고 좋기를
바라나---
좋와요즐겁게
구독했읍니다
허허허나원세상에
남의산소를 뺏어놓니. 후손들이 허랑 방탕진하지
네네. 다맞지요
정말감동적입니다
수고하시고요
역사를. 계속
알려주세요
실감납니다
인걸은 지령이라는 말이 있지만, 역시 근본은 적덕인가봅니다. 영상 고맙습니다.
저도경기도광이가입니다
광릉부원군파 22대라고입니다
옜날 선인들께서는 후일에 발생
할일을 그렇게도 명확이 알았을
까 참신기함니다 광주 이씨후손
들의 인심은 큰복받을만함니다
밀양인 20.12.20.卞 源祚
응원합니다
재밋게 잘 보고 말씀 잘 들었습니다.
지금 국정원 자리 헌인릉 근처 원래 단국대
자리였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정부에서 이를 알고 국정원이 들어왔지만
단국대는 한남동을 떠나 용인 죽전이전 동문들은 동창회도
않는다는 소리를 들을정도로 재단측, 학교측에
불만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설에는 세종묘를 영릉 여주로 옮기고
조선역사가 100년 더 지속되었다는 설도 있더라구요.
짧은 지식이지만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
순리를 거스름엔 댓가 지불 각오는 맞는듯 합니다
고맙습니다
경기도지리지 기록에는 이씨조선 역사가 150년이 연장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광 릉부원군 19대손 이복래
할아버님의 좋은 이야기를
들어 감사합니다
적선과 천심으로 아름다운 그릇을 갖추면 하늘에서 복받을 명당을 지정해 줍니다
명당에 억지로 썼더라도 복 받을 그릇이 안되면 인재나 천재로 지형이 변하여 흉지로 변한다고 합니다
바른 교훈 얻고 갑니다~!!
안녕하세요 ^^ 광주이씨 좌의정공파 17대손 인사드립니다~^^
다음번엔 세종대왕 태실자리를 한번 올리시지요. 얼마나 아시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경남 사천에 세종대왕 태실이 인근의 단종태실과 함께 읺습니다.
광주이씨(경기도 광주) 물리학자 이희소 박사 , 야구 이승엽 감독 , 국민의힘 당대표 이준석 대표 광주이씨 라고 하네요
선생님한테 이십년전 장충동에서 관룡자 구입한 후학입니다 건강하시구 하는일마다 번창하십시요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항상 건강하시길 빕니다.
항상 즐겨 보고 있습니다.
저렇게 명당인데 아들과 손자들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라는 의구심이 듭니다.
잘봅니다
사위가 광주이씨인데
몰랐던 역사가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이인손 어른이 돌아가실 때 자식 5명(이극배 등)이 모두 장성했기에 묘터를 정할때와 장사지낼때 장지에 가셨으리라 보여지는데 매장후 6년뒤 세종대왕 묘 이장건으로 이인손 묘도 이장을 했다고 했습니다. 근데 매장후 돌다리를 놓고 제실을 완성했다하니 그 집안이 대단한 갑부였나 봅니다. 아울러 이장때 묘터에서 여기서 연을 날리어 떨어지는 곳에 이장지를 정하라고 하는 땅속에서 석판이 나왔다는데 근데 6년전 장사때 자식들이 하관 등을 지켜 보았을 것인데 이장할때 땅속에서 그런 석판이 나왔다고 하니 그것도 좀 설득력이 부족한 구담으로 보여집니다. 또한 보통 이장 할 곳을 정한후 같은날 칠성판에 시신을 수습후 새 묘터에 땅을 파서 시신을 묻는데 그날 연을 날어서 덜어진 곳이 현재 묘잣리나니 최초 이장할 자리가 아닌 연이 떨어진 곳으로 급히 묘지 위치를 변경했다고 할수 있겠지만, 그러나 좀 설득력이 없어 보여집니다.
다시한번생각하게되나요
명당이라할지라도
해선안되는자리는 결코명당이안된다는걸
새삼 인과응보가생각나는군요
어려서 영릉부근에 살면서 듣던 이야기입니다. 다른 것은 연이 떨어진 곳에서 사방 30리 안에 어느 곳이든지(이미 묘가 있더라도!) 쓰도록하라는 왕명이 있었고, 이에 현재 자리에 원 주인 묘(이인손선생인지는 모르겠음)를 모셨다고 합니다. 연이 떨어진 곳이 연하리(현재도 있음)고 30리 안에 있는 현 묘소 신지리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과거 연하리는 여주읍이고, 신지리는 능서면 북성산 바로 아래 마을입니다.
또 다른 야사에는 장사 지낼려 는데
묘 자리를 뺏어 갔다고 합니다
여하튼 ~ 성군이...
교수님! 명강의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명당은 무슨? 큰아들 문종 일찍 죽고 손자 단종은 작은아들인 수양대군이 죽이고 수양역시 아들들 둘다 요절하고 손자인 성종도 일찍 죽었는데 무슨 명당일까?
후손이 단명해서 나중에 이장한거라고 하네요
세종대왕님이 먼저 묘를 썼다면 문종임금도 그아들 단종임금도 그런일이 없었을까요 문종임금님의 세종후반기 업적이 문종임금 업적인데 단명한 것으로 잘기억하죠
세종대왕 본인은 성주이씨 중시조
묘를 뺏어서 태봉으로
만든일도 있지요
명당은 없다 인간의욕심만 있을뿐
@@노세찬-r9k 옳소
현명한 명언?
잘 봤습니다. 가르침도 기억하겠습니다.
하늘의 순리를 져버리고 어찌 무사하리요
선생님 특별히 고맙습니다 이인손 선생님의 후손 광릉부원군의 후손입니다 .공유합니다
근데 성씨가 조씨일까요?
저는 광릉부원군 23대손 입니다 부산이지만 부모님 고향은 이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실록에는 1468년(예종 즉위년) 12월 27일에는 “천릉할 땅을 여흥 성산의 이계전의 분묘로 정하고 술자리를 베풀다.”라고 되어 있다. 또 12월 28일에는 “이인손의 묘는 이계전의 분묘 옆에 있었다. 이극배(이인손의 장남)를 불렀다.”라고 되어 있다.
영릉 자리를 찾은 사람은 당대 최고의 지관 안효례이다. 원래 묻혔던 사람은 문열공 이계전(李季甸)과 충희공 이인손(李仁孫)이다. 두 사람 모두 세조의 계유정난에 참여한 공신이다. 세종대왕이 천장된 영릉은 이계전이 묻혔던 곳이 혈심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설화의 대부분은 영릉은 이인손이 묻혔던 자리라는 점이 부각된다. [출처] * 명당 주인은 세종대왕 1 - 존양재 이계전묘, 풍애 이인손묘|작성자 효천 효하 윤교수
여주박물관에서 제작한 동영상에도 "지역에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천정할 묘자리의 주인을 이인손으로 흔히들 알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상지관이 이계전의 묘자리를 보고 길하다 하였으며 이인손의 묘는 그 근처에 있어 같이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런 기록을 족보에서 본적이 있어요!
본관이 성주입니다.
실록에 확실히 나와 있는데 후손들이 자기네 문중에 유리하도록 설화를 만들었군요. 조용한 이계전의 한산이씨 문중이 더 훌륭한거 같습니다.
예전에 이천살면서 영릉에 자주갔었는데
이런 비화가 있었군여~~
실제로 영능은 묘는 무엇보다 해가 잘드는곳입니다 음 의기운이없죠
지금의 대구 달성공원 자리도 원래는 달성서씨 땅이였는데 세종대왕께서 나라의 중요한 요충지로 쓰신다고 하셔서 내놓았다는 기록이 보첩에 실려있네요 아마도 남의땅 빼았는데 도사였는가봐요 ㅎ
나쁜역사.
조카의자리를뺏고
죽여서 강물에
던지고 끗이
좋을거없어
온몸에 종기 로
괘로움을당하며
벅벅 온몸을극다가
생을마감하고
그럼 세종대왕땅은 어디에?
미리 예견하고 연을 날려 떨어진 자리를
다시 묘로 썼다는 것은 양보하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분열을 초래하는 빼앗음
이란 좋은 이야기는 아니 듯 합니다
좋아요
광주이씨 후손으로써 좋은글과 말씀 감사합니다 ..꾸벅
이인손의 묘입니다
광주이씨는 대부분 아는 사실임다
광주이씨라 뿌듯합니다
영상 잘간직 하겠습니다
경북 성주군 월항면 선석사 옆에 세종대왕 세자들의 태실도 원래 농서이씨 (성주이씨) 산소였는데 강제 이장시키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세종이 나쁜짓을 많이 했네요 남의 자리 뺏고
태실에서 북서쪽으로 보면 정말 명당이 있는데 그걸 그냥 두었더군요
광주이씨가 인품이 좋군요
백성들이 그시대에 고혈과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 얼마나 고행을 했을꼬
비교적 객관적인 관점에서 묘자리로
풍수학을 설명하는 좋은 실례 입니다
또한 이조역사의 비사공부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조선역사 입니다
일본놈들이 만든교육이 이씨조선이라했지요
저도 남의묘를 빼앗지는
않고 금전적인 보상을 해
주고 파묘한 그자리가 명
당이라 해서 자기를 사후
그곳에 매장 할 것을 유언
하여 실행해 그자리에 모 신후 부터 안좋은 꼴을 보
게 되더라 하고 말씀드리
고자 합니다
경기도 용인 양지 제일리
에 있던 임경업장군의 묘
를 고향으로 이전하게 되
어 60~70년대 사업을 해
서 유가증권으로만 100억
이상의 부를 창출 하였으
나 그후 본인은 물론 부인
도 2~3년후 사망하고 그
큰재물을 물려받아 지속적
으로 사업을 하였지만 결
국 자손까지도10년을 못
버티고 선대에 사방60리
가 자기네 땅이란 것도
제주귤농장도 용인 농장
도 모두 처분해 그냥 주져
앉고 마는 꼴을 보았습니
다,
살아 진천 죽어 용인
광주 이씨 가즈아
남의 묘를 뺐은 곳이 이 곳 뿐일까요.
우리 할아버지 묘도 선릉(당시 광주군 언주리)에 있었는데 땅 다 뺐기고 그 너머 압구정리로 이장했지요.
삼춘이 조카를. 유배시키고
자리를뺏고 악녀
인수대비. 는
며느리쫏아내고
그것도0모자라서
사약을내리고
아주-사악한 역사
아무리 명당이라도 남의 묘를 빼앗은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예종.
지구상에서 어디든 언제든 땅의 주인이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개인이 소유한다고 해도 누구도 땅을 언제나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국가에서 정한 국유지는 다릅니다. 개인이 갖고 있는 땅도 국가에서 수용하면 국유지가 됩니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 개인의 사유지를 내 놓아야 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라에서 하는 일이니 그것을 수용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작은 나보다 큰 나인 국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는 왕정 시대이니 당연히 왕의 선택이 모든 것을 결정했을 것입니다.
세조와 신숙주간의 세조 묘터 이야기좀 올려주세요
전제부터 틀렸는데 이걸
유투브라고 봐야하나요?
조선왕조실록은 영릉의
자라가 한산이씨 존양재
이계전 선생의 묘소 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알아 보시고 다시
유투브 방송을 다시 하세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다시 찍어 올렸습니다.
ua-cam.com/video/LhQHJ4Ipblg/v-deo.html
좋은역사 감사합니다.
남의 묘자리 뺐으니 후손들이 잘댈리읺나 천벌받았지
광주이씨의 양반 됌을 알게되어
감사 드립니다
명당은임자가있는법남에자리를빼스면수명이짤버요
살아생전 남들에게 많이 베풀고 선행을 많이하고 생을 다하면 비록 흉지라고 할지라도 길지인 명당으로 변할거라고 생각하고 보편적으로 능력껏 남에게 베풀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명당을 엄청 좋아하시면서 명당찾아 남의집 청마루밑에 암장도 마다 하지않으셨다던 우리 외가 이제는 흔적조차없습니다.
예 전 며느리입니다.아들 둘과 손자 셋이 있습니다
제가 광주 이씨 인데. 족보에 나와있는것을 이렇게 유트브에서 보니
저희 조상님들이 대단하십니다
이글을 올려 주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맞습니다....족보에 나와있습니다.. ^^ 자세히..
그 후손이 현재 여주시 삼교리에 살고 있답니다, 선배되는 분인데, 그분 부친께서는 일제강점기때 강제 징집되어 일본군으로 유황도에 끌려가서 군생활하다가 제대하여 돌아오는데 일본놈들은 군함에 태워 부산항에 돈한푼안주고 하선시켜 각자 알아서 집으로 가라 하였답니다,서울 사람들은 험악한 산길을 찾아 가다가 길을 잃고 굶주림에 죽는 사람이 많았답니다. 시골 출신분들은 가다가 어느민가에 들려 나무 한짐 해주고 밥 얻어먹고 하룻밤자고 하면서 집을 찾아왔더랍니다. 선배 부친은 다행이 무사하게 집에 돌아왔는데 동생분이 또 징집 영장이 나왔답니다, 조부께서 자식들을 불러 이루시길 선배 부친보고 얘야 너는 한번 갔다가 왔으니 아무래도 니가 동생대신 갔다오는게 낫겠다 하셔서 또 갔는데 당신 스스로 유황도로 가겠다고 자원해서 갔다온 기막힌 사연이 있죠
풍애 는 이인손 선생의 호 입니다
여기는 이인손 묘소가 절대 아닙니다. 한산이씨 이계전 묘소라고 조선왕조실록에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손 할배 묘자리가 이장된 후 광주이가 집안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죠
폐비 윤씨의 사약을 들고 갔던 이도 그의 아버지도 처형되었죠
그럼 광주 이씨는 언제 흥했던 것인가요?
사약들고 가신분 이조판서 및 모든관직 다하시고 형방승지
이세좌 형방승지 입니다
유일하게제대로배운광주이씨인듯요
모두가자기성씨에씨자를붙여서광주이씨라해서댓글읽는중짜증났는데
님이제대로표현하셔서반가웠어요
궁금한게 있어요. 다른릉은 저 멀리서 봐야하고 가까이 갈수가 없는데, 왜 세종대왕릉만 가까이서 볼수있나요?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세정대왕 효종대왕 두능 가까이서 외롭지 않고 재미있게 지내시겠네요
아... 21대손인데 인손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한산이씨 조상의 묘라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세종대왕 이후 자손들을 보면 다들 않좋게 단명하고 병들어 죽던데요 임진왜란에 병자호란에 대기근에 그렇게 좋게 풀리지않은것같더라구요
일단 단명을 해서 옮긴겁니다...태종이랑 같이 있다가 욞긴 거죠 무학대사가 200년 이야기를 하신게 맞죠 경복궁을 보면서 200년동안평안하실거라고....딱 200년끝나자말자 임진왜란
저도 광주 이가예요~~~~
세상은 명당은 없다
시체를 던져놓은 곳이 곧 명당 입니다
역사에서 현재를 판단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자!
내것이 아닌것을 탐햇으니 자손들이 잘못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전설따라 삼천리ㅡㅡ연을 날려서 연이 떨어졌다는 자리 연라리가 맞고요 현재의 여주시 연라동( 여주읍 연라리 )지금의 아울렛 근처입니다 묘주인도 이인손은
아닐걸로 다만 이인손 묘는 신지리에 ㅡ아마도 명당 자리라 해서 정승을 지낸 이인손의 묘가 대신 결부 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세
그래서 연산군이 나왔나? 에휴...
자손이 잘 되었는데도 꾸미지 않는 묘가 있던데 이런 연유 때문이군요.
누각이 없었슴 비를 피하지 못했을거고 안 뺏겼을건데~
아이러니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