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는 우태 시조설, 비류 시조설, 온조 시조설을 모두 이야기하던데, 혹시 이런게 아닐까요? 비류가 시조가 맞고, 우태는 추존왕인거죠. 그리고 왕인 비류는 안전한 미추홀에 궁궐을 짓고 거기서 안전하게 정치를 했고, 동생인 온조에게 위례성 성주를 시키고 국경 수비를 맞긴 것이죠. 비류가 바보라서 미추홀에 나라를 건국한 것이 아니라 미추홀도 비류의 땅, 위례성도 비류의 땅인데 다만 수도를 미추홀로 잡고, 위례성은 온조한테 수비를 하라고 맡긴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세월이 흐르면서 나이를 먹고, 불합리하다고 느낀 온조가 이유있는 배신을 한 것 같아요. 막내 아들로 태어나서 고구려는 유리한테 주고, 새로운 국가도 고생은 자신이 다하는 것 같은데, 형한테 줘야 했으니깐요. 여기에 신하들이 부추겼다면 저였어도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됐을 것 같습니다. 혹시 이게 백제의 진실은 아닐까 싶네요. 모르긴 몰라도 이런 복잡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시조설이 남게 된 것 같습니다.
제가 부여시대 성곽에 대한 자료를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대체적으로 교통로와 하천에 인접한 구릉에 테뫼식으로 쌓은 형식들이 많아서 중국쪽의 부여인들은 둥근 성책을 쌓았다 라는 기록과 어느정도 일치하는것 같은데요 백제 산성터 가보면 대부분 소규모 테뫼식 산성들이고 고구려 신라에 비해 부여의 산성 스타일을 백제가 가장 잘 이어받은것 같습니다.
10:32 저는 무력투쟁 끝에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후기에도 대대로를 선출할 때, 동의하지 않으면 무력 싸움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유리왕도 해명태자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죠. 그만큼 고구려는 터프한 집단이었기에 무력투쟁까지 갔으리라 생각합니다.
삼국사기 온조편을 보면 말갈이 계속 침략을 하고, 온조가 이를 대비했다거나 성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많이 나오더군요. 그뿐만 아니라 낙랑과 마한을 공격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온조가 전쟁에 관한 능력이 탁월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과 같은 부류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chickkidnapper 감사합니다. 책까지 추천해 주시고, 제가 그 책을 보지 못했지만 예전에 제 책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만 기병도 말과 지형, 문화에 따라 큰 차이가 있고, 유럽 중국 유목민족 우리나라가 특성이 다릅니다. 기병만 가지고 얘기하기는 쉽지 않을 듯 한데요. 우리나라 기병이 좀 자세한 기록이 없는게 안타깝죠. 기회되면 살펴 보겠습니다
@@인문채널휴 와 답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이책에 대해서 알아보니 유럽기병 특히 냉병기에서 열병기로 넘어가는 시절의 이야기를 중점으로 담고있다고 들었습니다.제가 처음 답글을 남길때 지나치게 이야기를 뭉뜽그려 얘기했지만 현재 유럽기병의 이야기를 집대성한 굉장히 좋은 책이라 들었습니다.혹시라도 시간이 나신다면 꼭 보시고서 시청자들과 같이 이야기 나눌수있으면 좋겠네요 정말 감사하고 항상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제가 거기까지 하기는 그렇고 드리나강의 다리라는 역사소설 권합니다. 티토 정권 시절에 유고의 미래에 대한 장미빛 꿈을 안고 쓴 책인데요 지금 현실과 비교해보시면 착각이었음이 드러났지만, 당시 이 지역의 종교 민족갈등 아픈 역사. 즉 과거의 문제와 미래의 목표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다만 이 책에서는 문제는 알았지만 자신들의 해결책이 잘못되었던 거는 알지 못했던 거죠. 그러나 유고의 오랜 문제와 갈등구조는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서노가 밑으로 남하했는데.무작정 밑으로 갔을리는.없고 유리왕과늬 견제를 위해 좀 떨어진곳. 그 전에 남하하여 점령하엿거나 친인척이 있는곳으로 이주하지.않았을까합니다. 아니면 내전에서 대패하여 도주해서 남하했을지도 모르지요. 실권으르장악했던 무리들이 세력을 쉽게 내줬을리는.없고 아마 쫒겨나지 않았을까합니다.
임용한 박사님 영상 잘봤습니다 생각이 다른 점이 있어 댓글을 답니다 비류가 미추홀로 간건 소금(염전) 때문이라고 봅니다 고구려의 각궁이 나오게 된 계기 중 하나가 소금(자염)을 중국으로 교역하게 되면서 강남 지방의 물소 뿔이 들어오게 됬고 물소 뿔을 이용한 각궁이 나온 것으로 압니다 즉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온조와 비류도 소금의 중요성을 모를리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삼국사기 기록으로 추정한다면 온조는 10명의 귀족 가문의 지지를 얻고 방어하기 용이한 하남 위례성을 선택하고 비류는 방어하기 어려운 미추홀로 갔기에 결국 온조에게 흡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전략을 선택한 비류가 안정적인 노선을 선택한 온조에게 흡수 됬다고 봅니다
제가 인천 살면서 여기저기 가보니 비류가 잡은 미추홀이 물이 짜고 농사가 안돼서 동생한테 좌절해서 자결했다는거 온조측의 날조입니다. 인천은 생각보다 넓으며 농사에 부적합한 곳도 아니고 비류가 미추홀구에만 터잡고 영토확장 안할리가 없습니다(그렇지 않다면 서울시 송파구에 자리잡은(위례성) 온조와 만날수도 없어요). 다만 수비쪽으론 서울과 달리 지형의 이점이 너무나 없어 불리한건 맞는거 같더라고요. 저는 농사보단 장사해서 세력 키워보려고 이탈해서 나라세웠다가 그게 안되어서 힘 잃고 온조 백제에 흡수당했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당시 인천 보면 북쪽에는 한사군 동쪽에는 온조 남쪽에는 마한이 위치한 고로 교통의 요지라서 장사하기 좋은 땅이고, 굳이 미추홀에 터 잡은건 당시 중국 한나라까지 계산에 넣었던거죠. 당대 삼한과 고구려 부여 등이 국가들이 한사군(낙랑 대방 등)에서 조공무역을 하거나 한사군에서 중국인(한나라)들이 나와 이들 나라를 돌아다니며 장사했다는데, 비류의 생각에는 바닷길을 이용해 한사군에서 물건을 떼다가 빠른 배송으로 파는 식으로 삼한에 장사하든가 아니면 한사군 안 거치고 중국 직거래로 물건을 싸게 사서 삼한에 팔아먹으려고 한게 아닌가 싶어요. 비류가 살던 그 당시 중국 한나라는 황제(성제)가 여색에 빠져 일을 안하고 왕씨가문에 정사 넘기는 등 상황이 개판이고, 전매제 폐지로 중요물자인 소금과 철 술에 세금 안붙고 생산량이 많아 단가가 싸므로, 비류가 국제정세에 밝았다면 중국 직거래로 그걸 살수만 있다면 큰 이득 볼수 있을거란 계산이 들었을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태껏 이득 누려온 한사군과 거기 오가는 중국상인들이 그걸 놔둘리 없고 방해했을거고, 또 해상무역은 배가 침몰 난파 등 문제 생기면 막대한 손실입는 사업이니 얼마 못가 망해버리고 온조에게 흡수된게 아닌가 싶어요. 거창하게 무역 할거 없이 한사군과 삼한 사이에 세력 단단히 구축해서 중간에서 통행세 삥뜯으며 편하게 돈 버는 게 더 낫고 인구가 국력이니 농사지어 인구부양해서 정복전쟁하자는 온조쪽의 생각이 더 맞은게죠. 미추홀은 인구쪽수에도 밀리고 수비도 안되고 장사도 안되어서 흡수 당한거 같아요.
주몽과 소서노 온조 비류 유리등을 각자의 특정 인물로 해석했다가는 도무지 개연성을 추론할수가 없게 됩니다. 우선 소서노 입장에서는 소서노가 과부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주몽이 총각인지 결혼해서 아들이 있는 유부남인지 그런것부터 잘모르고 재혼을 했슬까요? 주몽이 총각인척 속이고 소서노와 결혼을 했다라고 한다면 나중에 주몽 아들 유리가 졸본으로 왈을때 순순히 유리세력에 온조/비류가 밀려야 할까요? 결국 개인이 아닌 정치집단을 함축하는 의미로 해석해서 주몽과 소서노의 결혼은 주몽이라는 부여계집단이 졸본으로 내려와 연타발세력과 협력을 하여 능력을 인정받아 세력을 장악하다가 결국은 주몽세력이 커지자 그들의 힘에 눌려서 남으로 밀려났다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yoru994 적어도 기록상으론 유리는 세력이라 할것도 없이 자기 몸뚱이 하나만 달랑 들고왔고, 그런 유리를 주몽은 전폭적으로 지원해 줍니다. 오자마자 태자로 세워주죠. 주몽을 죽일 사람들은 소서노와 비류, 온조겠지 유리일 이유는 없죠. 이후로 왕이 된 유리는 든든한 자기 세력이 없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만약 유리왕이 주몽의 아들이 아니라면 백제의 입장에서는 그 진실을 전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백제의 어느 전승이나 기록에도 유리왕이 주몽의 아들임을 부정하는 것은 찾을수 없습니다. 역사의 내면을 봐야 한다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말로 역사의 여기저기에 음모론이 난무하는것이 안타깝습니다.
송파 재건축 현장에서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오늘 떴는데, 박사님의 영상을 보고 그 기사를 다시보니 새로운 기분이 드네요.
항상 좋은 영상 보여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문화부: 돈안줄래... ㅋㅋ
선생님
밤에 틀어놓고 들으면서 자려고 누웠는데 4분쯤에 칼 소리가 들려서 무서워요 ㅠㅠ
언제나 선생님 방송은 즐겨듣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쓸데없는 배경음악이 없어서 참 좋습니다
동서양의 설화 에서 서로 비슷한것이 많은게 신기하네요 언제나 잘 보고있습니다😀
인간사는거 똑같다는거
강에서 터잡고 성장하는게 문명 공통점인데
정치권도 비슷할수밖에
사람 생각도 결국 똑같은거 아닐까요ㅋㅋ
삼국사기에는 우태 시조설, 비류 시조설, 온조 시조설을 모두 이야기하던데, 혹시 이런게 아닐까요? 비류가 시조가 맞고, 우태는 추존왕인거죠. 그리고 왕인 비류는 안전한 미추홀에 궁궐을 짓고 거기서 안전하게 정치를 했고, 동생인 온조에게 위례성 성주를 시키고 국경 수비를 맞긴 것이죠. 비류가 바보라서 미추홀에 나라를 건국한 것이 아니라 미추홀도 비류의 땅, 위례성도 비류의 땅인데 다만 수도를 미추홀로 잡고, 위례성은 온조한테 수비를 하라고 맡긴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세월이 흐르면서 나이를 먹고, 불합리하다고 느낀 온조가 이유있는 배신을 한 것 같아요. 막내 아들로 태어나서 고구려는 유리한테 주고, 새로운 국가도 고생은 자신이 다하는 것 같은데, 형한테 줘야 했으니깐요. 여기에 신하들이 부추겼다면 저였어도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됐을 것 같습니다. 혹시 이게 백제의 진실은 아닐까 싶네요. 모르긴 몰라도 이런 복잡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시조설이 남게 된 것 같습니다.
단순히 역사 얘기가 아니라 통찰력을 배울 수 있어요
임용한 박사님 정사 삼국지 도겸 약한 사람은 아니었네요🇰🇷🇺🇸🇯🇵🐅🐲🦅
제가 부여시대 성곽에 대한 자료를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대체적으로 교통로와 하천에 인접한 구릉에 테뫼식으로 쌓은 형식들이 많아서 중국쪽의 부여인들은 둥근 성책을 쌓았다 라는 기록과 어느정도 일치하는것 같은데요 백제 산성터 가보면 대부분 소규모 테뫼식 산성들이고 고구려 신라에 비해 부여의 산성 스타일을 백제가 가장 잘 이어받은것 같습니다.
인천사람으로서 이부망천의 역사가 이렇게 깊은줄 몰랐는데 배우고 갑니다
경인고속도로 전후로 나뉘겠죠. 그전은 진짜 미추홀, 제물포, 그후는 아테네의 피레우스항, 개경의 벽란도와 같은 역할. 부천을 매개로 서울과 점점 일체화돼가는 것 같네요.
19:52 / 지금 미추홀구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지만 그건 조선시대 이후로 꾸준히 간척해서 만들어낸거고 비류가 정착했을 당시에 미추홀구는 늪지 OR 갈대밭 OR 뻘밭이었을 겁니다.
삼국사기 기록대로 짠물이 들어온 땅은 맞아요...
감사합니다.
오늘도 감사히 보겠습니다!
20:00 간단히 말하면 온조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을 택해서 성공한 것이고, 비류는 외세의 침략이 없는 안전한 곳을 택한 것이네요. 그러고보면 삼국사기에 말갈이나 마한이 계속 침략을 하고, 온조가 맞서 싸워서 이겼다는 기록이 많은데 맞네요. ㅎㅎ
10:32 저는 무력투쟁 끝에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후기에도 대대로를 선출할 때, 동의하지 않으면 무력 싸움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유리왕도 해명태자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죠. 그만큼 고구려는 터프한 집단이었기에 무력투쟁까지 갔으리라 생각합니다.
임용한 박사님의 업청난 통찰력!
요즘 더 깊은 내용 다뤄주시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설명칸에 후원 은행 계좌도 넣어주시면 어떠실지 싶습니다.
아니 이게 왕좌의게임이야 백제건국이야
박사님 200번째
좋아요 😀 👍
교수님 자세히 길게 해주세요 헤헤 욕심이~~~
요즘 삼국시조들 공부하고 있었거든요
교수님 얘기가 듣고 싶어요^^
사랑합니다 💜 💜 💜
감사합니다.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는 말씀을 들으니 향토예비군 생각이 났습니다.
온조는 버티며 싸워볼만한 세력이 있었고
비류는 그러기에는 부족한 세력이었다고 볼수도 있겠네요
혹은
마한의 왕이든 그 지역에 영향력이 큰 집단이
온조만을 선택했을수도 있겠구요
삼국사기 온조편을 보면 말갈이 계속 침략을 하고, 온조가 이를 대비했다거나 성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많이 나오더군요. 그뿐만 아니라 낙랑과 마한을 공격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온조가 전쟁에 관한 능력이 탁월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과 같은 부류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마한 왕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보면 그 옛날 프랑스 왕이 바이킹들에게 결국 노르망디에 살게 해준게 떠오르네요
그 지역의 신화적인 이야기는 사실 백제가 아니라 마한에 있을텐데 알려진게 적어서 참 아쉽네요
언제나 영상 잘보고있습니다 ^^
최근에 역사책 신작을 찾다가 the new knights라는 굉장히 흥미로운 책을 찾았습니다.
기존에 알려진 기병에 대해서 정말 새롭고 정확한 이야기들을 담고있는데 한 번 봐주시고 기병과 관련해서 얘기를 해주실수 있을시까요?
기병이 돌격할때의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 않다거나 기병도 보병만큼이나 밀집해서 돌격하는것을 중요시 했다거나 등등 새로운 이야기들이 많아서 꼭 해주셨으면합니다
@@chickkidnapper 감사합니다. 책까지 추천해 주시고, 제가 그 책을 보지 못했지만 예전에 제 책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만 기병도 말과 지형, 문화에 따라 큰 차이가 있고, 유럽 중국 유목민족 우리나라가 특성이 다릅니다. 기병만 가지고 얘기하기는 쉽지 않을 듯 한데요. 우리나라 기병이 좀 자세한 기록이 없는게 안타깝죠. 기회되면 살펴 보겠습니다
@@인문채널휴 와 답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이책에 대해서 알아보니 유럽기병 특히 냉병기에서 열병기로 넘어가는 시절의 이야기를 중점으로 담고있다고 들었습니다.제가 처음 답글을 남길때 지나치게 이야기를 뭉뜽그려 얘기했지만 현재 유럽기병의 이야기를 집대성한 굉장히 좋은 책이라 들었습니다.혹시라도 시간이 나신다면 꼭 보시고서 시청자들과 같이 이야기 나눌수있으면 좋겠네요
정말 감사하고 항상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초기 강역의 시초는 중국본토에서 시작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고천문학의 효시를 연 박창범교수.
수많은 역사학자들 박제상,이암,신채호,박은식,계연수,이상용,최태영,이이화,심백강,이덕일,강상원,박창범,전원철,김정민,책보고
환인에서 현 서울인근까지 내려갈때 많은 부족과 부족국가를 지났을텐데, 꽤 큰 무리가 남하하니까 그냥 보내줬나??
잘봅니다
교수님 덕분에 역사가 너무 재밌습니다
6,8세 아이들에게 역사교육을 시작하고 싶은데
교수님이 추천하는 방법이나 책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영상과 관련없는 댓글 죄송합니다
딱히 죄송할 이유가 없는데요???
처음엔 위인전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 저학년 들어가면 능인출판사에서 나온 OO왕조 700년 시리즈 추천합니다. 역사에 너무 쉽고 재미있게 빠져들 수 있어요. 저는 이거 보고 역사에 입문했습니다.
도망쳐서 도착한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다.
역사를.통한 가르침 감사합니다
삼한의 정치체계도 언젠가 영상으로 만들어 주세요!
교수님 항상 영상 잘보고있습니다.
근데 담번에 혹시 발칸반도의 역사에대해서 알려주실수있나요??
유고 시절부터 지금까지 쪼개져온 역사가 궁금합니다.
감솨합니다.
제가 거기까지 하기는 그렇고 드리나강의 다리라는 역사소설 권합니다. 티토 정권 시절에 유고의 미래에 대한 장미빛 꿈을 안고 쓴 책인데요 지금 현실과 비교해보시면 착각이었음이 드러났지만, 당시 이 지역의 종교 민족갈등 아픈 역사. 즉 과거의 문제와 미래의 목표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다만 이 책에서는 문제는 알았지만 자신들의 해결책이 잘못되었던 거는 알지 못했던 거죠. 그러나 유고의 오랜 문제와 갈등구조는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Limyonghan-TV 감사합니다. 교수님 ~
@@seongyoon1968 답변을 좀 보강했어요 아까는 핸드폰으로 썼더니
@@Limyonghan-TV 네. 제가 알고 싶은 부분이 약간 그거였어요. 당시에는 무조건 티토가 왕이고 맞다고 뿐이 판단 못했겠지만. 후대에서 판단하는게 역사 라고 생각해서~~ 지금 바라보는 관점이 어떨지 궁금했습니다.
👍
박사님. 매번 궁금했는건데. 박사님정도의 지식을 쌓으려면 엄청 공부하셨을텐데요. 박사님 공부하셨던 썰도 좀 풀어주십시요 ㅎㅎ
일본 궁내성에서 필사했다는 고구리사초략의 내용에서 백제 시작을 유투브로 보니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개연성이 있어 보이던데 이것 설명 좀 해주실수 있나요? 진짜 신화가 아닌 사실처럼 보입니다
임용한 교수님 비류계랑 온조계.. 고이왕 비류왕 근초고왕에 애해서도 다뤄주세요
고대시대부터 서울은 땅두고 싸웠국요
소서노가 밑으로 남하했는데.무작정 밑으로 갔을리는.없고 유리왕과늬 견제를 위해 좀 떨어진곳. 그 전에 남하하여 점령하엿거나 친인척이 있는곳으로 이주하지.않았을까합니다.
아니면 내전에서 대패하여 도주해서 남하했을지도 모르지요.
실권으르장악했던 무리들이 세력을 쉽게 내줬을리는.없고 아마 쫒겨나지 않았을까합니다.
어렸을 때 역사 동화를 읽으면서 비류를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제가 멍청했던 것이었네요. 외부의 압력을 피해 척박한 지역으로 이주한 세력들 중 역사적으로 가장 크게 성공한 세력은 베네치아가 아닐까요?
초모가 소서노 세력과 결탁해 그 지역을 장악하고 나중엔 결렬된거죠 뭐 그래서 떨어저나간거고 유류왕의 등장도 어느정도의 세력이 합류했다고 봐아하고
백제 건국사 잘봤습니다!!!
테슬라에서 전기차 관련 핵심 기술을 공개했을 때, 워렌 버핏이 테슬라가 성의 해자를 포기한다고 비판했고 일론 머스크는 오히려 기술 공개로 인한 경쟁자의 등장이라는 리스크를 무릅쓰고 전기차 시장을 키워서 테슬라의 플랫폼을 모두가 사용하게 하겠다고 반박했던 게 생각나네요.
주몽과 유리와의 관계는 계루부 안에서 고씨와 해씨와의 관계 및 그 집단을 함축하는 의미입니다.
임용한 박사님 영상 잘봤습니다 생각이 다른 점이 있어 댓글을 답니다 비류가 미추홀로 간건 소금(염전) 때문이라고 봅니다 고구려의 각궁이 나오게 된 계기 중 하나가 소금(자염)을 중국으로 교역하게 되면서 강남 지방의 물소 뿔이 들어오게 됬고 물소 뿔을 이용한 각궁이 나온 것으로 압니다 즉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온조와 비류도 소금의 중요성을 모를리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삼국사기 기록으로 추정한다면 온조는 10명의 귀족 가문의 지지를 얻고 방어하기 용이한 하남 위례성을 선택하고 비류는 방어하기 어려운 미추홀로 갔기에 결국 온조에게 흡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전략을 선택한 비류가 안정적인 노선을 선택한 온조에게 흡수 됬다고 봅니다
궁금한점이있습니다. 염전이라 말씀하신게 천일염이시라면 천일염은 일제강점기에 유입된 방법으로 알고있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자염으로 봐야 할것 같은데 굳이 나누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전호협트리미너 염전은 고대부터 있었습니다 다만 현대식인 천일염 방식은 일제 때 들어왔을뿐입니다 염전에서 적당히 말린 이후 자염 방식으로 끓여서 소금을 만들었습니다 즉 나눈게 아니라 같은 얘기입니다
@@전호협트리미너 농사로 비유하자면 논농사는 고대부터 있었지만 모내기 방식은 조선시대 들어와서 생겼습니다 이해가 되시죠? 염전이라는건 땅을 의미하고 자염은 소금 생산 방식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항상 재밌게 잘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제 ....토전사 프로이센 느낌이네
제가 인천 살면서 여기저기 가보니 비류가 잡은 미추홀이 물이 짜고 농사가 안돼서 동생한테 좌절해서 자결했다는거 온조측의 날조입니다.
인천은 생각보다 넓으며 농사에 부적합한 곳도 아니고 비류가 미추홀구에만 터잡고 영토확장 안할리가 없습니다(그렇지 않다면 서울시 송파구에 자리잡은(위례성) 온조와 만날수도 없어요). 다만 수비쪽으론 서울과 달리 지형의 이점이 너무나 없어 불리한건 맞는거 같더라고요.
저는 농사보단 장사해서 세력 키워보려고 이탈해서 나라세웠다가 그게 안되어서 힘 잃고 온조 백제에 흡수당했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당시 인천 보면 북쪽에는 한사군 동쪽에는 온조 남쪽에는 마한이 위치한 고로 교통의 요지라서 장사하기 좋은 땅이고, 굳이 미추홀에 터 잡은건 당시 중국 한나라까지 계산에 넣었던거죠.
당대 삼한과 고구려 부여 등이 국가들이 한사군(낙랑 대방 등)에서 조공무역을 하거나 한사군에서 중국인(한나라)들이 나와 이들 나라를 돌아다니며 장사했다는데,
비류의 생각에는 바닷길을 이용해 한사군에서 물건을 떼다가 빠른 배송으로 파는 식으로 삼한에 장사하든가 아니면 한사군 안 거치고 중국 직거래로 물건을 싸게 사서 삼한에 팔아먹으려고 한게 아닌가 싶어요.
비류가 살던 그 당시 중국 한나라는 황제(성제)가 여색에 빠져 일을 안하고 왕씨가문에 정사 넘기는 등 상황이 개판이고, 전매제 폐지로 중요물자인 소금과 철 술에 세금 안붙고 생산량이 많아 단가가 싸므로, 비류가 국제정세에 밝았다면 중국 직거래로 그걸 살수만 있다면 큰 이득 볼수 있을거란 계산이 들었을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태껏 이득 누려온 한사군과 거기 오가는 중국상인들이 그걸 놔둘리 없고 방해했을거고, 또 해상무역은 배가 침몰 난파 등 문제 생기면 막대한 손실입는 사업이니 얼마 못가 망해버리고 온조에게 흡수된게 아닌가 싶어요.
거창하게 무역 할거 없이 한사군과 삼한 사이에 세력 단단히 구축해서 중간에서 통행세 삥뜯으며 편하게 돈 버는 게 더 낫고 인구가 국력이니 농사지어 인구부양해서 정복전쟁하자는 온조쪽의 생각이 더 맞은게죠. 미추홀은 인구쪽수에도 밀리고 수비도 안되고 장사도 안되어서 흡수 당한거 같아요.
지금 미추홀이랑 저때 미추홀은 아예 다르죠 고려 조선시대 이후 계속 간척해서 그렇지 고대엔 농사 지을 땅 1도 없는 갯벌천지였을테구 심지어 호남평야도 삼국시대엔 싹 다 바다였어요
백제도 건국 설화 있을만한데
어느 백제왕이 고구려 장수랑 일기토하기전에
"나는 고구려 왕족과 같은 부여씨이다"라고 못박은거 보면 신기함
백제 왕실서는 고구려계열인거는 부정안한게 신기하고 그게 멸망내내 수백년간 안잊고 유지한것도 신기
백제는 스스로 고구려계가 아니라 부여계라고 정체성화하지 않았을까 해요. 고구려와 백제 모두 자신이야말로 정통성있는 부여계라고 생각했겠죠. 나 역시 너네와 같은 부여씨다 라는 말에는 그런 의미도 있지 않을까 하네요.
강의 내용을 이해하면. 백제는 설화가 만들어질 역사단계가 아니라는 것인데요. 백제를 세운이들이 부여 고구려로부터 내려왔기때문이죠. 설화라는게 어떤 역사적 단계의 설명방식인데 백제가 건국하는 시점에는 더이상 그런 방식의 기술이 유용하지않은거죠
서로 부여계 적통 경쟁을 한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국사시간에 배웠듯이 백제 성왕은 아예 나라이름을 남부여로 고쳤으니까요
😀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왔으면 해씨 또는 고씨를 성으로 써야하는데 부여씨를 성씨로 쓰는 이유는 ?
새로운 왕조와 새출발을 해야하니깐 최초가 되어야하니깐요, 새로운최초의 역사가 되야해서 초기화하는거죠. 그리고 갈라져나온거 자체가 좋게 나온게 아닐 확률이 크죠 쫒겨났거나 도망쳤거나인데
@@somebodyhelpmeno 온조가 동명왕 사당을 세워 참배한 까닭은?
여기서 동명왕은 추모 일까요 고두막한 일까요?
주몽과 소서노 온조 비류 유리등을 각자의 특정 인물로 해석했다가는 도무지 개연성을 추론할수가 없게 됩니다. 우선 소서노 입장에서는 소서노가 과부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주몽이 총각인지 결혼해서 아들이 있는 유부남인지 그런것부터 잘모르고 재혼을 했슬까요?
주몽이 총각인척 속이고 소서노와 결혼을 했다라고 한다면 나중에 주몽 아들 유리가 졸본으로 왈을때 순순히 유리세력에 온조/비류가 밀려야 할까요?
결국 개인이 아닌 정치집단을 함축하는 의미로 해석해서 주몽과 소서노의 결혼은 주몽이라는 부여계집단이 졸본으로 내려와 연타발세력과 협력을 하여 능력을 인정받아 세력을 장악하다가 결국은 주몽세력이 커지자 그들의 힘에 눌려서 남으로 밀려났다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광개토대왕 주몽 비슷하 나이 급사 미스테리 고대시절이라도 40대면 한창인데
주몽이니 온조니 비류니 하는 인물을 특정개인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특정 정치집단이라고 해석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간 관계도 정치집단간 관계로 다루어야 합니다.
온조는 아무래도 주몽의 아들이 아닐까요. 백제에 주몽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박사님의 서제에 왜 서적이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로 적군요.
소서너가 첫째부인인데 주몽의 아들이 아리라니 ㅋ
역시 음모가 있었어. 주몽이 제거됐고, 소서노 일행의 탈출?
주몽이 소서노 일당에게 제거됐으면 걔네들이 거기서 왕 했겠죠ㅋㅋ
유리 세력이 내려와서 소서노 아들들 쫓아내고, 주몽은 뒷방늙은이 돼서 제거당했을수도
@@yoru994 적어도 기록상으론 유리는 세력이라 할것도 없이 자기 몸뚱이 하나만 달랑 들고왔고, 그런 유리를 주몽은 전폭적으로 지원해 줍니다. 오자마자 태자로 세워주죠. 주몽을 죽일 사람들은 소서노와 비류, 온조겠지 유리일 이유는 없죠. 이후로 왕이 된 유리는 든든한 자기 세력이 없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위장염 그냥 추측인데 유리세력이 편입되면서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소서노세력이 위기감을 느껴 무리해서 주몽암살했는데 유리가 다흡수해서 소서노를 쫓아넨듯
만약 유리왕이 주몽의 아들이 아니라면 백제의 입장에서는 그 진실을 전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백제의 어느 전승이나 기록에도 유리왕이 주몽의 아들임을 부정하는 것은 찾을수 없습니다. 역사의 내면을 봐야 한다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말로 역사의 여기저기에 음모론이 난무하는것이 안타깝습니다.
이 영상에서는 유리왕이 주몽의 아들이라고 하는데요? 온조랑 비류가 주몽의 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음. 그리고 주몽은 친아들 유리에게 죽은 거고요.
제 생각에는 유리가 주몽휘하의 부여계 장군이였는데 쿠데타를 일으켰거나 아니면 주몽이 전사한 뒤에 군대의 지지를 얻어서 주몽의 가솔들을 쫒아내고 고구려의 정권을 장악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왕망에게 주몽이 죽고 부하 유리가 왕좌를 차지했다든가 아니면...
우리동네 나오네
모자를 좋아하시는지 모자를 항상 쓰시네요ㅋㅋㅋ
물이짜서 농사가 안된다는건 제가보니 개소립니다. 영덕,포항에서 일하면서 불과 해안가로부터 150미터도 안되는곳에서 논농사 밭농사 잘만합니다. 바로옆 강에서 물 잘만끌어대구요.
우리역사바로알기 광개토대왕 비문 검색하면 기존에 알던 역사 상식 달라서 무엇이 정답인지 알아서 판단하시길
중국 사서엔 한국 기록엔 없는 구태백제 가 있는데, 이게 구다라 의 어원이다 . 구태라 > 구다라
좌빨 구라역사학자 S 와 H 의 콧대를 눌러주세요...임용한 박사님 만세...만만세....
엄연한 역사 기록을 왜 건국'설화'라고 할까?
비류, 온조의 백제건국사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그 내용이 나오는데, 식민사단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은 믿을수 없고 실제 백제는 근초고왕부터이다 라고 못박았기 때문입니다.
박사가 소설을 ㅆ네 아무튼 인용하는 사서도 없이 소설만 쓰고 백제의 진실도 일반 유투버 보다도 모르네 아이구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