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u3p?? 나당 연합에 멸망한 백제가 왜나라로 망명해서 정착했으니까 지금 일본에 살아있는 백제의 후손들이 자신은 백제의 후손이라고 말하는건데 뭔 갑자기 전라도가 일본의 고향이라는 개쌉소리를 내뱉는지? ㅋㅋ 그럼 조선시대때 한반도에 북방민족이 들어와 정착해서 자신들의 씨족은 북방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면 그 북방 영토가 한국의 고향이라고 말하면 되는거냐? ㅋㅋ 말같지도 않은 쌉소리 그만하고 댓글이나 내리세요^^ 반박은 언제나 환영~
왜는 백제의 영향력하에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왜의 일식기록은 홍콩 부근에서 나타나고, 갑자기 없어지는 시기에 다시 일본에서 일식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왜의 정통성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동하지 않으면 않되는 중요한 일이나 외부세력의 압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신라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식기록이 8세기 중반에 양자강에서 갑자기 부산 부근으로 일식기록이 이동하여 이어지고 있습니다. 뭔가, 대륙에 변화가 있었던 걸까요. 설마, 발해가 그곳까지 영향력을 ...... 이란의 기록에는 바실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양이 발해와 신라로 양분되어 있는것이 맞으며, 발해가 앞에 있으니, 해동성국이 맞겠습니다.
일본이 백제식민지라고해도 언어를 흡수 못한게 천추의 한이네 아님 언어를 일부러 안가르쳐줬을 수도 동화정책을 안썼다는건 그만큼 백제인 수가 많지도 않았단거고 그럼 아스카문화는 그 많지도 않은 도래인들이 만들었단건데 제국시절 식민지랑 다른개념인거 같음 일본천황이 신격화된 것도 그렇고 ㄹㅇ 그야말로 원주민 짐승대하 듯 오구오구 해준거같음 격리 분리하는 문화였다고 추정할 수 있거든 그러다 결국 쪽수가 밀리니깐 오히려 도래인 쪽이 동화되어 말을 잃어버린거고 하지만 신격화된 황실형태는 계속 존재했던 듯 다른 세력들 무사계급 출현하면서 잏본 특유의 문화도 점점 정립해나간 듯 경직되고 가식적이지만 깔끔한 예술 문화는 그런 공포속에서 아스카의 선진기술을 베껴 만들어진거같음 즉 외부세력에 대한 동경과 내부에서 공포심과 모방 그게 일본인들의 표준 국민성인데 그러면 일제식민지 정책이 이해가 가지 짐승들 속국이라 넘지말아야할 선이 없단거고 또 외부세력으로 부터 항상 빌어쳐먹던 습성때메 외교도 꽤 잘한거 같음 단 자신들의 주제파악이 안되게 패망 원인
@@r.jh.r7147 660년 당·신라의 연합군(당·신라의 동맹)이 갑자기 백제를 멸망했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백제를 정복한 당군은 대부분이 끌어올려 1만 주류군이 남아 있을 뿐이었기 때문에 백제의 사평·오니무로 후쿠노부 등이 백제를 부흥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도 왔다. 당시 왜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중대형 황자(후의 천지 천황)는 왜국의 총력을 꼽아 백제 부흥을 지원하기로 결정, 도시를 치쿠시 아사쿠라궁으로 이동시켰다. 662년 5월 사이명천황은 도요리에 아즈미 히라오, 사오이 히로시, 박시 진조다 내진이 이끄는 병사 5,000개와 군선 170종을 곁들여 백제로 보내고, 도요리는 약 30년 만이 되는 귀국 을 했다. 도요리와 왜군은 오니무로 후쿠노부와 합류했고, 도요리는 백제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점차 실권을 잡는 오니무로 후쿠노부와의 확집이 태어났다. 663년 6월, 도요리는 오니무로 후쿠노부를 살해했다. 이에 따라 백제부흥군은 현저하게 약화되어 당나라 신라군의 침공을 초래하게 되었다. 도요리는 주류성에 농성하여 왜국의 원군을 기다렸지만, 8월 13일 성병을 버리고 탈출하고 왜국의 원군에 합류했다. 이윽고 당본국에서 류인 궤도가 있는 7,000명의 구원부대가 도착해 8월 27, 28일 양일 왜국수군과 시라무라에(한국에서는 시라에, 하쿠바에라고도 함)로 충돌했다. 그 결과 왜국·백제연합군이 대패했다. 이른바 시라무라에의 싸움이다. 도요미는 몇 명의 종자와 함께 고구려로 도망쳤지만 [3] 그 고구려도 내분에 박혀 668년 당에 멸망되었다. 도요미는 고구려왕족들과 함께 당나라의 수도에 연행되어 고구려왕의 보장왕들은 용서되어 당의 관작을 받았지만, 도요미는 용서되지 않고 영남지방으로 유형되었다[4]. 토요미의 동생에 대해서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왕선광(『속일본기』에서는 서황광)이라고 하며, 토요우와 함께 인질로서 왜국에 걸쳐 체재했지만 귀국은 하지 않았다. 시라무라에의 싸움 후, 백제왕족 유일한 생존자로서 지통천황으로부터 백제왕(성의 니키시)의 성을 받았다. 이것이 진짜 역사입니다.
참 여러모로 아쉬운 방송내용입니다. 오래전에 제작된 것인데, 1) 칠지도가 백제가 일본왜왕이 후왕임이 분명한 해석인데, 마치 협력관계인듯한 묘사는 무엇인지, 2) 침미다례가 해남인지는 명확하지 않고 그건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것인데 마치 해남임을 전제로 하는데, 일본학자들의 위치 방법을 국내 역사학자들이 비판없이 수용하는 것이며, 3) 목라근자에 대한 해석은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내용으로 위 내용을 잘못해석하면 임나일본부설의 묘한 근거를 제공할 수 있고, 4) 칠지도는 일본서기에 나오는데, 그 내용이 일본 천황이 백제왕에게 주었다는 것으로, 정말 중요한 일본서기의 해석방법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즉, 일본서기는 일본과 백제를 거꾸로 해석한다면 되는 것이죠. 강조되어야 할 부분은 그러한 부분입니다. 5) 최악의 모습은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사군의 한반도 내재설은 지금의 역사학자들이 모두 믿는 내용인데, 그당시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만든 한사군이 모두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 과연 그럴까요 중원을 차지한 한나라의 입장에서 변방중에 변방에 한사군이 정말 있었을까요? 사실 이 부분은 정말 다시한번 꾸준한 연구와 사관이 형성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방송내용은 좋은데, 정말 아쉽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양국간의 시기와 시간상 전국기 시대를 달리던 원삼국 시대와는 다르게 청동기 시대를 이제 막 맞이한 왜인들이 처음부터 [접어서 두들긴다] 라는 계념의 재련술은 생각해 냈을리가 없어 ㅋㅋ 우리나라도 청동기 시대를 맞이했을때 고열로 녹인 청동을 거푸집에다가 부어서 찍어내는 방식으로 제작했고, 철기시대에 들어서며 열국시대에 돌입했을 무렵, 차츰 무기와 농기구의 내구성을 인지하면서부터 겹겹이 층을 내면서 접어야 된다는걸 알았음. 일본이 본격적으로 전국기시대에 돌입한것도 이후 백제와 가야의 전폭적인 선진문물 캐리로 야마토 정권이 열도 통합을 이루면서 백제를 본받아 군주제를 펼치면서부터 시작됨. 즉, 시기상 한반도의 전국기 시대가 일본의 전국기 시대보다 이미 훨씬 앞서 진행되면서 상업과 기술력이 발달했고, 통일 신라로 막을 내리면서 내전을 멈추게 되었음으로 그 시기동안 일본이 한반도에 침략을 감행하여 백제를 통치했다는 말같지도 않은 '임나일본부설' 따위가 성립되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뜻임. 현실에서 정말 그랬다면 친교는 개뿔, '원나라의 일본 원정' 이전에 이미 열도는 신라와 백제에 의해 열도 전역이 불바다가 되었을걸? ㅋㅋㅋ 그 당시 왜나라에게 있어 신라와 백제는 우리나라로 치면 미국이 한반도를 친다는 느낌이라고 보면 됨 ㅇㅇ
왜나라는 우리나라가 한창 열국시대 중후반을 달리던 시기, 마땅히 입을만한 갑옷도 개발이 안된 상태에서 백제와 친교를 맺고 백제에 파병하여 군인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후일에는 아예 백제와 가야 갑옷을 수입해다가 쓰기도 함 ㅋㅋㅋ 차양투구 같은거 검색해보면 백제, 가야 찰갑 그~~대로 가져다가 입혀놓은걸 볼 수가 있음 ㅋㅋㅋ
@@GuNdAmWiThYoU 닉이 아깝습니다. 백제와 열도는 남남이 아니라 형제예요. 백제인들이 건너가서 죠몽인, 야요이인들을 제압하고 야마토를 세웠고 그 야마토를 중심으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형성되어 간 겁니다. 당시 가야는 백제의 지방정권으로 됐기에 가야의 갑옷도 쓴 것이죠. 아니면 가야계 야요이인들을 굴복시키면서 그들의 갑옷 제조 기술을 익혔거나.
칠지도를 만든 이유는 비류계백제가 당시 왜왕에게 줍니다. 당시 왜는 신공 야마토와는 다른 세력입니다. 비류계의 공격대상은 부여계 백제입니다. 부여계 백제는 진충의 세력을 받아드리고, 비류계 백제는 왜를 원하게됩니다. 그래서 칠지도를 주게 됩니다. 당시 왜는 상당히 약한 상황이고, 비미호 야마토와 다른 위치에 존재합니다.
지금이야 왠 낡은 칼 하나가 뭔 감히 발걸음도 하지 말아야 할(금족) 보물이라고 저리 모셔놨을까 싶겠지만, 딱 저 시대 일본열도에서는 존재만으로도 정말 감히 발걸음도 하지말고 모셔야 할 이세계 유물수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왠만한 철기조차 없는 고만고만한 원시적 부족국가, 도시국가들이 있는곳에 어지간한 자기네 무기들은 맞서면 깨져버리는 철제 무기들과 그 제조법, 기타 선진 농경법과 행정체제들을 들고오고, 하사품이라면서 일곱 갈래로 갈라진 강철칼을 만들지 않나 그 표면에는 심지어 교육받은 고위층 아주 일부만 읽을 수 있는 문자까지 금으로 새겨진(새길 수 있는) 고급품을 받았으면 진짜 국가의 보물이니 감히 건들생각도 하지 말라고 할 만 하겠네요. 만드는 쪽에서조차 국가급 장인이 직접 두들겨서 만들어야 하는 엄청난 노동력이 드는것이라 날까지 잡아서 제사드리고 만든다는 물건이라니...저 칼을 백제에게서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받은쪽은 지역국 패자가 되었을게 자명합니다. 이 방송을 초등학생때 봤는데 이 방송 영향인지 이시기 어딜가든 역사관련해서는 칠지도는 어지간해선 꼭 등장하는 붐이 일었었죠. 성인으로서 다시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백제의 동생국, 속국, 백제출신 세력들이 일본 혼슈에서 정복전쟁을 한 듯함 백제출신 모용씨 선비족들이 왜 정복 전쟁을 통해 , 일본에서 터를 새로 잡음. 왜왕이 되다 그런 모용씨가 백제 왕(무령왕: 백제 출생)과 사돈지간이 되었겠지 모용씨가 일본 왕이 되어, 이때부터 왜의 군사력이 갑자기 강해진다.
비슷하지만 아닙니다.... 칠지도는 위에서 아래에게 주는 권위의 상징입니다...임명한 거죠. 쿠사나기노 쯔루기.....쿠사(사쿠=싹)+나기+노(네.의-소유격)+ 쯔루기(찌르기=검) 즉...싹나기검...즉 새싹검입니다. 환두대도에...새싹 보이죠?....새머리로도 표시되어있죠...삼족오도 그거구요. 그 새는 검은새입니다...제비.까마귀로 표시되죠....태양조로 불립니다. 이 새싹검이....고대로 올라가면....비파형청동검입니다. 비파형인 이유가....바로 새싹을 잎파리를 형상한 것입니다. 새싹이 크면...가지를 치고 나무가 됩니다.....즉 나무를 숭상한 민족이죠. 바로 신단수입니다.....고목나무를 숭상하고 절하던 민족. 나무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존재라고 믿었던 나라... 새싹은 시작과 뿌리를 암시하고....하늘을 향해 뻗어간다는 상징입니다 나무를 머리에 달면...신라금관이 되고.. 나무를 머리에 달고 다니는 동물이...사슴입니다..소호.소고.초고입니다. 새싹검은...비파형 청동검의 발전모델입니다.....3수분화 와도 관련있습니다. 또 그 하늘이 북두칠성.북극성이 있는.....북쪽하늘입니다....신들의 세상. 우리민족은..죽으면...그리로 돌아간다는 신앙이 있죠..그래서 돌아가셨다 하죠.
@대 신라후예 진흥 매금대왕 근초고왕 때 최고의 전성기였고, 당시 고구려와 전쟁하여 승리할 정도로 강했었죠. 왜구에 식민지 건설한 것도 그 쯔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기하네요. 중국의 짝퉁국가면서 동시에 왜국의 노예인 국가가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다는 것이 ㅎㅎ 백제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면 모든 의문이 풀리죠.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교류하여 문화적 우위에 서고, 왜구들과 동맹을 맺었다는 것.
@대 신라후예 진흥 매금대왕 ㅋㅋㅋ 신라가 흉노족 오랑캐 라는 걸 잘 알고 계시네요. 그리고 광개토대왕에게 원군을 요청해서 겨우 왜구의 지배에서 벗어낫다는 것도 잘 기억해 두시길 비랍니다. 적어도 백제는 왜구의 침략을 받아서 국가적 위기에 빠진 적은 없으니까요. 오히려 당시 중국을 위협하던 강대국 고구려와 수백년간 전쟁을 벌이다. 국력이 약화되어 천도를 거듭하였습니다.
한사군이 평안도 황해도 ㅡ 예전엔 그렇게 배웠으니 시대를 생각하면 제작진도 어쩔 수 없는 표현이라 이해되는데, 거기서 한사군이 '철수'했단 표현에 정말 기가막히는 느낌. 한사군의 위치는 논외로 하더라도 한사군이 철수(스스로 물러나 다른 곳으로 감)한 게 아니라 멸망한 게 분명한데 저런 표현을 ㅡ 식민사학계의 입김이 명백한 용어선정. 옛날 프로그램인데 보다가 빡치네요. 심지어 저 당시 이미 중국 한나라가 멸망해 없어진지 언젠데 ㅡ 설사 저걸 맞다고 치더라도 저건 이미 중국의 식민국가가 아니라 독립왕국이잖아요? 식민사학, 식민사학, 내가 아무리 전문가가 아니라도 기가막히는게 무식의 소치는 아니죠?
백제가 왜국에 선진문물을 주는 댓가로 왜국에서 용병을 데려다 썼다는 소위 용병설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심각한 오해가 있습니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제가 나중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설명드릴 생각입니다. 그리고 저 칠지도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 삼국지 동이전에 모두 나오고 다 동일하기 때문에 오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칠지도에 나오는 글자들도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서에 다 나오므로 실물을 안 보아도 거의 다 알 수 있습니다.
단철(鍛鐵)로 만든 양날의 칼로 전체 길이는 74.9cm이며, 칼날의 길이는 65cm이다. 칼의 좌우로 각각 3개씩의 칼날이 가지 모양으로 뻗어 있어 칠지도(七支刀)라고 부른다. 칼의 양면에는 60여 자의 명문(銘文)이 금상감(金象嵌) 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무기로서의 실용성보다는 제의(祭儀) 등에서 상징적인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육차모(六叉鉾, ろくさのほこ)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왔으나, 1873년 이소노카미 신궁의 대궁사(大宮司) 간 마사토모[菅政友]가 칼날에 새겨진 명문을 발견하면서 칠지도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1953년에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이소노카미 신궁에 소장되어 있다. 칠지도는 광개토대왕비와 더불어 고대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를 알려주는 가장 오랜 문자 사료이다. 하지만 표면이 부식되어 일부 글자는 판독이 어렵다. 많은 연구와 방사선 촬영 등을 통해 총 60여 자가 확인되었으나, 몇몇 글자(侯·以·音·倭)는 여전히 해석의 어려움이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글자는 다음과 같다. [앞면] 泰□四年十□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七支刀□辟百兵宜供供侯王□□□□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世 제작 시기 간 마사토모는 명문에 나타난 ‘태□4년(泰□四年)’을 중국 서진(西晋)의 연호인 태시(泰始) 4년으로 해석해 268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45년 이후에는 이를 동진(東晋)의 연호인 태화(太和) 4년으로 해석해 칠지도가369년에 제작되었다는 설이 통용되었다. 하지만 한국 학자들은 삼국의 기록에서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사례가 드물다는 점에서 동진의 연호를 기준으로 제작 연대를 보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오히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나 전지왕(腆支王) 때의 독자적인 연호를 나타낸다고 보는 학설이 있다. 또한 ‘십□월(十□月)’을 11월로 보아 11월 16일에 병오(丙午)의 간지가 나타난 408년에 제작되었다고 보는 학설, 북위(北魏)의 연호인 태화(太和) 4년(480년)을 제작 연대로 보는 학설이 있다. 일부 학자는 금상감 기법으로 장식된 칼이 5세기 후반 이후가 되어서야 나타난다는 점에서 칠지도를 6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전달 목적 간 마사토모는 칠지도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실체를 뒷받침해 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에 진구황후 49년에 신라를 비롯한 7국을 평정하고 한반도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두었으며, 진구황후 52년에는 백제의 사신이 칠지도(七枝刀)·칠자경(七子鏡)을 비롯한 각종 보물을 헌상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나오는 칠지도(七枝刀)가 칠지도(七支刀)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학자들은 칠지도(七支刀)를 에 나오는 칠지도(七枝刀)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없으며, 더욱이 의 기록 자체가 고대의 신화를 근거로 편찬된 것으로 신뢰도가 낮다는 점에서 그러한 주장은 억지라고 비판한다. 또한 명문의 ‘공후왕(供侯王)’은 후왕(侯王)에게 제공(提供)·공급(供給)되었다는 뜻이므로 칠지도는 백제가 제작하여 제후왕(諸侯王)인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한편, 1935년 조선총독부 발굴단이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부여 군수리(軍守里)의 절터에서 칠지도와 유사한 형태의 유물을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유물의 형태나 행방에 대해서는 현재 자세한 정보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어떻게보면 일본에 오늘날 현대시대 21세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무기가 바로 백제 근초고왕이 일본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게보면 마치 칼날이 불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 철제 신검 칠지도(七支刀). 전세계 역사의 수많은 검들을 통틀어봐도 가장 멋있는 검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면 안되지만 탐내는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함.. 너무 멋있는 검이다보니.. 근초고왕이 너무 멋있는 검을 하사해줬어..
36:47 연구사님 고생하셨스니더..노고에 보답하고자 역사공부 단디할게요!!
재밌네요
백제 왕세자를 倭王으로 세운다는 뜻으로 만든 칼이네요 ㅋㅋ
백제가 일본 섬나라 원주민 문명을 발전 시켜준건 사실이네~~
한사군도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북경 동쪽에 위치했다..한사군이 한반도에 위치했다라고 하는것은 식민사관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것...
이도학교수님 헤어스타일이 맨날바뀜 🎉
솟대=토리이
공교롭게도 한국과 일본은 친척관계
임나일본부설 증거로 알고 국보로 지정하며 존나 기뻐했는데 해석해보니 일본서기가 구라친거 들통나버림
뭐 이런 ㅋㅋㅋㅋ
오늘 수행은 이거다@!
일왕이 자신은 백제의 후예다!
라고 공표했으니 무의미해졌군!
일본인은 인정안하지만 천황제부터 백제에서 시작한게 팩트
@@sordification 그럼 전라도가 일본의 고향인가요?
@@겨울-u3p?? 나당 연합에 멸망한 백제가 왜나라로 망명해서 정착했으니까 지금 일본에 살아있는 백제의 후손들이 자신은 백제의 후손이라고 말하는건데 뭔 갑자기 전라도가 일본의 고향이라는 개쌉소리를 내뱉는지? ㅋㅋ
그럼 조선시대때 한반도에 북방민족이 들어와 정착해서 자신들의 씨족은 북방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면 그 북방 영토가 한국의 고향이라고 말하면 되는거냐? ㅋㅋ
말같지도 않은 쌉소리 그만하고 댓글이나 내리세요^^
반박은 언제나 환영~
@@GuNdAmWiThYoU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건데요;; 그리고 반말 존댓말 한가지만하세요 그렇게 잘 알고 배우신분이 매너는 왜 그 모양인지..
@@겨울-u3p 백제는 경기도 충청도가 주요지였어용.
청자 계수호나 전문도기나... 후한말부터 만들기 시작한거라 백제가 수입했다고 하기에 애매한데 ?
일본이 상국이라치면 그래 하국에서 상국에 바친걸 저렇게 아주 귀하게 보관 잘하내 ? 웃기내
ㅋㅋㅋㅋㅋㅋㅋ ㅇㅈ
그러게요~~~~~ㅋㅋㅋㅋ 고맙네 아주 ㅋㅋ 잘 보관해줘서
우리의역사를바로아는게우리의의무다
낙랑의 위치가 과연 그곳일까요?
칠지도에 새겨진 글자 일부를 일부러 지운 거 아녀!!!??
다좋은데 낙랑군 대방군을 엉뚱하게 그려놨네
항상 뭔가 부족혀
칼은 어떤 나라 역사에도 진상의 품목이였던적이 없음 하사의 품목이였지 그거도 아주 대표적인
七支刀(396년,近肖古王)=百済王(皇!)=倭侯王=傳示後世😂.
바둑판도 백제 의자왕이 선물한거 있음 줬나 좋음.
영상 감사합니다.
첫공중파 방송에서 시청했었는데.
유튜브로 올라와 있네요.
감사한 세상입니다.
고두심 선생님도 젊게 보이시네요.
40대 후반 이셨을텐데....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져야 합니다.
저도 젊을때 이 방송보고
역사에 눈이뜨고 더 관심을 가지게 됐었습니다.
세월이 참빠르네요ㅠㅠ
한국에서 건너간
일본고대문명
칠지도
백제의 근초고왕
왜는 백제의 영향력하에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왜의 일식기록은 홍콩 부근에서 나타나고, 갑자기 없어지는 시기에 다시 일본에서 일식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왜의 정통성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동하지 않으면 않되는 중요한 일이나 외부세력의 압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신라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식기록이 8세기 중반에
양자강에서 갑자기 부산 부근으로 일식기록이 이동하여 이어지고 있습니다. 뭔가, 대륙에 변화가 있었던 걸까요. 설마, 발해가 그곳까지 영향력을 ......
이란의 기록에는 바실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양이 발해와 신라로 양분되어 있는것이 맞으며, 발해가 앞에 있으니, 해동성국이 맞겠습니다.
별거 있어? 중간의 중심은 백제고, 곁가지 여섯은 가야란 거지. 결국 백제와 가야는 한몸이란 뜻이다.
전남 라주에서 발견된 고문서 라주의 옛이름은 금성이고 영산강은 금천이다 한반도 백제는 신라가 흡수통일하였고 섬나라 백제가 독립하여 일본이 되었다 일부 고구려 왕족과 고구려인도 일본으로 도망갔다
왜왕 하던 사람이 백제로 건너와 백제왕 제위를 이었던 사례가 종종 있는거 보면 백제 왕족이 일본의 제후로 파견되어있다가 백제왕 사후 제위를 이은듯
김현구 ㅜㅜ
예나 지금이나 조공이란게 있듯이,,, 물건을 받은쪽은 아래사람이 갖다 바쳤겠죠... 백제가 상국이라면 왜 일본은 백제에게 귀한 물건을 바친것이 없나요?
일본이 백제식민지라고해도 언어를 흡수 못한게 천추의 한이네 아님 언어를 일부러 안가르쳐줬을 수도
동화정책을 안썼다는건 그만큼 백제인 수가 많지도 않았단거고 그럼 아스카문화는 그 많지도 않은 도래인들이 만들었단건데
제국시절 식민지랑 다른개념인거 같음
일본천황이 신격화된 것도 그렇고
ㄹㅇ 그야말로 원주민 짐승대하 듯 오구오구 해준거같음
격리 분리하는 문화였다고 추정할 수 있거든
그러다 결국 쪽수가 밀리니깐 오히려 도래인 쪽이 동화되어 말을 잃어버린거고
하지만 신격화된 황실형태는 계속 존재했던 듯
다른 세력들 무사계급 출현하면서 잏본 특유의 문화도 점점 정립해나간 듯
경직되고 가식적이지만 깔끔한 예술 문화는 그런 공포속에서 아스카의 선진기술을 베껴 만들어진거같음
즉 외부세력에 대한 동경과 내부에서 공포심과 모방
그게 일본인들의 표준 국민성인데
그러면 일제식민지 정책이 이해가 가지
짐승들 속국이라 넘지말아야할 선이 없단거고
또 외부세력으로 부터 항상 빌어쳐먹던 습성때메 외교도 꽤 잘한거 같음
단 자신들의 주제파악이 안되게 패망 원인
여기 댓글만 보면 얼마나 한국이 잘못한 역사인식이 가지고있는지 알수있네요
이상한 추즉 하지말고 그냥 있는 것만 그대로 보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됨
칼이란건 왕이 신하에게 내래는 하사품임 옛날부터 그랬음 이 칼로 충성을 다해서 날 지키란 의미로 내리던게 칼임
백제가 일본에 인질을 내고 있는 것도 모르는가?
@@hideotaziri7659 칼은 어떤 나라 역사에도 진상의 품목이였던적이 없음 하사의 품목이였지 그거도 아주 대표적인
@@cleango3824
질문에 대답하십시오.
일본에 백제의 왕자가 두 명있었습니다.
인질로.
나중에 한 사람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잡혀 당나라로 데려가 거기서 죽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일본에서 천황보다 백제왕의 칭호를 받고 천황의 신하로 일본에서 살고 있습니다.
@@hideotaziri7659 부여풍은 백제의 태자가 아니었다..태자는 부여융..부여융은 백제멸망시 의자왕과 당나라 장안에 끌려갔으며 나중에 웅진도독으로 다시 백제땅으로 돌아온다
@@r.jh.r7147
660년 당·신라의 연합군(당·신라의 동맹)이 갑자기 백제를 멸망했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백제를 정복한 당군은 대부분이 끌어올려 1만 주류군이 남아 있을 뿐이었기 때문에 백제의 사평·오니무로 후쿠노부 등이 백제를 부흥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도 왔다. 당시 왜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중대형 황자(후의 천지 천황)는 왜국의 총력을 꼽아 백제 부흥을 지원하기로 결정, 도시를 치쿠시 아사쿠라궁으로 이동시켰다. 662년 5월 사이명천황은 도요리에 아즈미 히라오, 사오이 히로시, 박시 진조다 내진이 이끄는 병사 5,000개와 군선 170종을 곁들여 백제로 보내고, 도요리는 약 30년 만이 되는 귀국 을 했다. 도요리와 왜군은 오니무로 후쿠노부와 합류했고, 도요리는 백제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점차 실권을 잡는 오니무로 후쿠노부와의 확집이 태어났다. 663년 6월, 도요리는 오니무로 후쿠노부를 살해했다. 이에 따라 백제부흥군은 현저하게 약화되어 당나라 신라군의 침공을 초래하게 되었다.
도요리는 주류성에 농성하여 왜국의 원군을 기다렸지만, 8월 13일 성병을 버리고 탈출하고 왜국의 원군에 합류했다. 이윽고 당본국에서 류인 궤도가 있는 7,000명의 구원부대가 도착해 8월 27, 28일 양일 왜국수군과 시라무라에(한국에서는 시라에, 하쿠바에라고도 함)로 충돌했다. 그 결과 왜국·백제연합군이 대패했다. 이른바 시라무라에의 싸움이다. 도요미는 몇 명의 종자와 함께 고구려로 도망쳤지만 [3] 그 고구려도 내분에 박혀 668년 당에 멸망되었다. 도요미는 고구려왕족들과 함께 당나라의 수도에 연행되어 고구려왕의 보장왕들은 용서되어 당의 관작을 받았지만, 도요미는 용서되지 않고 영남지방으로 유형되었다[4].
토요미의 동생에 대해서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왕선광(『속일본기』에서는 서황광)이라고 하며, 토요우와 함께 인질로서 왜국에 걸쳐 체재했지만 귀국은 하지 않았다. 시라무라에의 싸움 후, 백제왕족 유일한 생존자로서 지통천황으로부터 백제왕(성의 니키시)의 성을 받았다.
이것이 진짜 역사입니다.
일본 역사학자들 미첬나 칼을 바친다니? 칼은 하사품인데 어떻게 바치냐
역사스페셜 영상많이 올려주세용 ㅠㅠ 잘보구갑니당"~!!
남의 것을 국보로 지정하고 자기네 것으로 교육하니 나쁜🐦🤬
물론 동북아에서 한자를 썼다고해도 백제말이랑 일본말이랑 다르고 한자를 차용하는 방법도 다른건데 일제때는 자기식으로 밀어붙힌거지
일본.정말믿을수없는나라다.초중고.학생들에게독도를일본땅이라가르치는이유..??그토록수십년간집요하게.주장하는이해못할의문점이다..섬주변및지하에천연자원이어마어마하게매장되어있는것일까.....
참 여러모로 아쉬운 방송내용입니다. 오래전에 제작된 것인데, 1) 칠지도가 백제가 일본왜왕이 후왕임이 분명한 해석인데, 마치 협력관계인듯한 묘사는 무엇인지, 2) 침미다례가 해남인지는 명확하지 않고 그건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것인데 마치 해남임을 전제로 하는데, 일본학자들의 위치 방법을 국내 역사학자들이 비판없이 수용하는 것이며, 3) 목라근자에 대한 해석은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내용으로 위 내용을 잘못해석하면 임나일본부설의 묘한 근거를 제공할 수 있고, 4) 칠지도는 일본서기에 나오는데, 그 내용이 일본 천황이 백제왕에게 주었다는 것으로, 정말 중요한 일본서기의 해석방법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즉, 일본서기는 일본과 백제를 거꾸로 해석한다면 되는 것이죠. 강조되어야 할 부분은 그러한 부분입니다. 5) 최악의 모습은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사군의 한반도 내재설은 지금의 역사학자들이 모두 믿는 내용인데, 그당시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만든 한사군이 모두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 과연 그럴까요 중원을 차지한 한나라의 입장에서 변방중에 변방에 한사군이 정말 있었을까요? 사실 이 부분은 정말 다시한번 꾸준한 연구와 사관이 형성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방송내용은 좋은데, 정말 아쉽습니다.
칠지도는 백제에서 왜에 후왕으로보낼 때 주어 보낸 것으로 당시 왜는 백제를 직접통치하고 있었다('고대일본은 백제가 지배했다'라는 책에 자세히 쓰여있다. 2023년 서점에서도 판매중임)
만약 백제가 조공을 했음 칼이나 만들어서 주진 않았겠지. 백제에서 나는 특산품을 바치지.. 칠지도 쓰인 명문이... 칼 한자루 내려줄테니... 나라 잘 키기고 충성해라 하는 느낌인데..
고맙네 칠지도를 최고의 국보로 지정해놓고 보관해준다니 후세 대대로 보관해주겠네
송서에
왜 임나 가라 신라 모한 진한 백제 안동대장군 작위요청했으나 백제빼고 6개 지역만 작위부여
참수한머리 꼽고 찾아간거다..
백제 내아들 머리내놓거라 툭 아나 6지도..
김현구 고대교수 저놈은 이덕일 사학자 재판에서 자기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모른다 말한, 일본에서 일본서기를 전공한 자라던데, 그렇다면 칠지도에 대한 일본놈들 주장과 같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양국간의 시기와 시간상 전국기 시대를 달리던 원삼국 시대와는 다르게 청동기 시대를 이제 막 맞이한 왜인들이 처음부터 [접어서 두들긴다] 라는 계념의 재련술은 생각해 냈을리가 없어 ㅋㅋ
우리나라도 청동기 시대를 맞이했을때 고열로 녹인 청동을 거푸집에다가 부어서 찍어내는 방식으로 제작했고, 철기시대에 들어서며 열국시대에 돌입했을 무렵, 차츰 무기와 농기구의 내구성을 인지하면서부터 겹겹이 층을 내면서 접어야 된다는걸 알았음.
일본이 본격적으로 전국기시대에 돌입한것도 이후 백제와 가야의 전폭적인 선진문물 캐리로 야마토 정권이 열도 통합을 이루면서 백제를 본받아 군주제를 펼치면서부터 시작됨.
즉, 시기상 한반도의 전국기 시대가 일본의 전국기 시대보다 이미 훨씬 앞서 진행되면서 상업과 기술력이 발달했고, 통일 신라로 막을 내리면서 내전을 멈추게 되었음으로 그 시기동안 일본이 한반도에 침략을 감행하여 백제를 통치했다는 말같지도 않은 '임나일본부설' 따위가 성립되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뜻임.
현실에서 정말 그랬다면 친교는 개뿔, '원나라의 일본 원정' 이전에 이미 열도는 신라와 백제에 의해 열도 전역이 불바다가 되었을걸? ㅋㅋㅋ
그 당시 왜나라에게 있어 신라와 백제는 우리나라로 치면 미국이 한반도를 친다는 느낌이라고 보면 됨 ㅇㅇ
임나일본부설이 종나 말이 안되는게 청동기 문화 놈들이 당시 철기문화였던 가야를 이겼다는거 부터가 말이 안됨 ㅋㅋㅋㅋ
왜나라는 우리나라가 한창 열국시대 중후반을 달리던 시기, 마땅히 입을만한 갑옷도 개발이 안된 상태에서 백제와 친교를 맺고 백제에 파병하여 군인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후일에는 아예 백제와 가야 갑옷을 수입해다가 쓰기도 함 ㅋㅋㅋ
차양투구 같은거 검색해보면 백제, 가야 찰갑 그~~대로 가져다가 입혀놓은걸 볼 수가 있음 ㅋㅋㅋ
2021년에 연구진들이 일본인 유전자를 분석한결과, 일본인은 조몬인,야요이인,한반도인의 후손임이 밝혀졌습니다
ua-cam.com/video/nKZ1Txln2S4/v-deo.html
금관가야 칠왕자다 큐슈 남부를 정복하고, 그의 후손이(왜의 초대 왕;,,,,)큐슈에서 혼슈로 가서 정복전쟁을 하여 왜왕이 되다
왜앙은 초기에 가야계 출신임
큐슈는 가야 세력의 활동 지역,,, 혼슈는 백제(고구려, 신라)의 활동지역
@@GuNdAmWiThYoU 닉이 아깝습니다. 백제와 열도는 남남이 아니라 형제예요. 백제인들이 건너가서 죠몽인, 야요이인들을 제압하고 야마토를 세웠고 그 야마토를 중심으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형성되어 간 겁니다. 당시 가야는 백제의 지방정권으로 됐기에 가야의 갑옷도 쓴 것이죠. 아니면 가야계 야요이인들을 굴복시키면서 그들의 갑옷 제조 기술을 익혔거나.
백제와 ㅇ가야는 멸망한게 아니라
일본내 자신의 식민지로 건너갔죠. 천여년간 일본을 지배.
가야는 철기문화를 전수하고 원주민들인 일본넘들에겐 절대로 알려주지않고 일본내에 질좋은 철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사철로 무기를 만듬.
정말 돈많이도썻따
철을 제조할 능력도 없던 4세기의 일본세력이 철을 자유자재로 다루던 가야를 정복했다? 소도 웃을 일이다 🤣🤣🤣
ㅇㅈ 철기구도 없어서 궁핍하게 과일이나 따먹던 얘들이 무슨 ㅋㅋㅋ
유물을 훼손한 자들이 역사적 진실을 숨기고 싶은거지.
보통 칼은 임금이 신하에게 내려주지 않냐? 특히 황제면 무관이나 왕들에게.. 변방을 잘 지키라고 말이지. 조선시대에도 무관들에게 사인검 내렸고...
칠지도의 연호는 아무래도 전성기백제의 독자적인 연호같습니다 두번째 글자가 지워진게 아쉽네요
일제시대때 일제로 넘어간 우리나라 국보급 보물들 다 환수조치해야되고~ 6.25전쟁당시 해외로 빠져나간 국보급 문화재도 환수해야되는데~ 왜안하는지 모르겠네여~
국력이 약해서... ㅠ.ㅠ
입으로만 떠든다고 되는게 아닌데.
가져오려면...돈이필요합니다....
걱정되시면....기부좀 하세요..
나라탓만...그만하시구요..
대통령은 중국바라기라서 일본 프랑스 미국 등등 그딴거 신경도 안써요
임나일본부 웃고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초고왕때 일본에 전달됨
영원토록 기원하겠소이다. 이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 나오기를..
공부 잘 하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왜는 조작,왜곡,쌩 거짓말의 나라
입니다.
연호는 중국 연호가 맞을 거. 백제도 중국 연호를 썼다는.. 칠지도는 백제가 왜에 하사한..
칠지도를 만든 이유는 비류계백제가 당시 왜왕에게 줍니다.
당시 왜는 신공 야마토와는 다른 세력입니다.
비류계의 공격대상은 부여계 백제입니다.
부여계 백제는 진충의 세력을 받아드리고, 비류계 백제는 왜를 원하게됩니다.
그래서 칠지도를 주게 됩니다. 당시 왜는 상당히 약한 상황이고,
비미호 야마토와 다른 위치에 존재합니다.
훗! 옛날 최인호 씨가 직접 출연하시고 기획하셨던 '잃어버린 왕국'의 장면도 있군요.
그리워라....
근초고왕이 나라 팔아먹으려고 했네
지금이야 왠 낡은 칼 하나가 뭔 감히 발걸음도 하지 말아야 할(금족) 보물이라고 저리 모셔놨을까 싶겠지만, 딱 저 시대 일본열도에서는 존재만으로도 정말 감히 발걸음도 하지말고 모셔야 할 이세계 유물수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왠만한 철기조차 없는 고만고만한 원시적 부족국가, 도시국가들이 있는곳에 어지간한 자기네 무기들은 맞서면 깨져버리는 철제 무기들과 그 제조법, 기타 선진 농경법과 행정체제들을 들고오고, 하사품이라면서 일곱 갈래로 갈라진 강철칼을 만들지 않나 그 표면에는 심지어 교육받은 고위층 아주 일부만 읽을 수 있는 문자까지 금으로 새겨진(새길 수 있는) 고급품을 받았으면 진짜 국가의 보물이니 감히 건들생각도 하지 말라고 할 만 하겠네요. 만드는 쪽에서조차 국가급 장인이 직접 두들겨서 만들어야 하는 엄청난 노동력이 드는것이라 날까지 잡아서 제사드리고 만든다는 물건이라니...저 칼을 백제에게서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받은쪽은 지역국 패자가 되었을게 자명합니다.
이 방송을 초등학생때 봤는데 이 방송 영향인지 이시기 어딜가든 역사관련해서는 칠지도는 어지간해선 꼭 등장하는 붐이 일었었죠. 성인으로서 다시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백제의 동생국, 속국, 백제출신 세력들이 일본 혼슈에서 정복전쟁을 한 듯함
백제출신 모용씨 선비족들이 왜 정복 전쟁을 통해 , 일본에서 터를 새로 잡음. 왜왕이 되다
그런 모용씨가 백제 왕(무령왕: 백제 출생)과 사돈지간이 되었겠지
모용씨가 일본 왕이 되어, 이때부터 왜의 군사력이 갑자기 강해진다.
예나 지금이나 못난 조상들같으니....좁은 땅덩어리에서 중국을 큰형님 모시듯 하면서 수천년을 지들끼리 뺏고 뺏으며 살았꾼. 후대에 남겨준 산물은 눈치랑 사대주의 유전자뿐 얼마전까지만해도 교유정책이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에 수천번을 침략당하면서도 다른 나라를 침략해본일이없다는 희한안 자랑질과 교육을 했으니.
너 조선족이세요?
한일관계가밝히밝혀지길빕니다
일본은 말하겠죠 칠지도가 한국과는 관계없다고ㅋㅋ
발달하지 못한 일본을 재대로된 나라로 만드는걸 도운 사람이 쇼토쿠 태자라는 사람이 있는데 웃긴건 그 사람이 백제랑 고구려사람을 스승으로 받아드렸었다고함
이건 사실 무근입니다.
@@sih270 앗 헷갈렸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ㅠㅠ
파워레인저 다이노포스 도골드가 쓰는 무기다
저거 낙랑 대방 한반도에 없었음 낙랑군 축출할때 그 군민들이 요서지방으로 이주를 했는데 말이 됌? 고구려한테 축출 당했는데 고구려땅을 가로 몇만명이 질러 도망가나 ㅋㅋㅋ
근데 백제가 다른 나라를 제후국으로 지목할 국력이 되나? 고구려라면 모를까
꽃들이 화사한 웃음을 터뜨리는 예쁜
봄날 월요일 아침 입니다
이번 한주도 즐겁고 행복한
날 이어 가세요
건강도 잘 챙기시구요
저는 오늘 강릉 갑니다
여행 아니구요 작업 현장요
대륙에 백제 지명이 꽤남아있던데 중국땅의 일부가 백제땅 이였던데 황후 비석 발견되고 고대 김치 담가먹던 풍습남 아있고 특히 장족 사는지역
기저귀 차고 다니던 애들 글가르치고 금속 가르친게 백제인임. 도래인..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본..다시 일본을 앞지른 한국..5천년간 한국의 신하국이었던 일본..이게 진실임.
칠지도 비밀을 깨닳아 만들어 지식을 전하여 발전시켰다
잃어버린 왕국,,,,
약소국이 강국에 왕자.왕위후계자를 인질로 보낸게 역사적 사실이니, 백제의 욍위후계자들이 계속 일본(왜)에 가 있었다는 건, 어느쪽이 강국이었는지가 명확하지 않나?
백제가 상국인 왜에 볼모를 보냈고, 또 보물들(칠지도 포함)을 상납 했다는 걸 누가봐도 알겠구먼...
칠지도를 하사했고 제후국에 왕자중 하나를 보낸거지요...
칠지도 일본에서 유물 일왕직위식때 사용
참...임나일본부설은 허구라지만...백제일본은 뭔가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거는 븐명한데....누가 형인지...누가 동상인지...
역사왜곡은 수백년 수천년 지나도 못고치는병이였구나
💎ㆍ한국ㆍ👍ㆍ꼬레아ㆍ🇰🇷ㆍ조선ㆍ🎯ㆍ찬란하고 유구한 문화의 역사를 가진 빛나는 민족의 혼°'`~ㆍ🗝
감사한 마음으로 잘 보고 있습니다
일본이 만든 우리나라의 왜곡된 문제를 바로잡고 우리의 원래 역사를 찾고 이런 문제들에 관심을 갖고 우리 역사를 지킵시다
일본이 지금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역사를 보세요.답이 나오죠.그들은 거짓말 밖에 안해요.지금도 그렇고 예전에도 그랬고..,역사가 뭐예요.사실을 적어야 하는거잖아요.꾸며내서 적으면 뭐..그건 소설책이죠
일본이나 중국이나 ㅋㅋㅋ 거짓말하는건 똑같네
소설인 근거가뭐죠?
우리나라 역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특히 조선시대 편찬한 역사서는 완전 날조 역사임.
@@user-qr3ke9wm3b사료랑 교차가 안되고 유물도 부족해요
이도학 이제이제이제이제이제
칼이 나무 가지 처 럼 생겼네 여
일본은 정신이상에 판타지 소설 역사투성이. 자고나면 툭툭 텨나오는 유물과 역사인물들. 지겹네요 저런게 옆국이라니
백제가 나무라면 일본은 가지다. 라는 의미가 칠지도.
비슷하지만 아닙니다....
칠지도는 위에서 아래에게 주는 권위의 상징입니다...임명한 거죠.
쿠사나기노 쯔루기.....쿠사(사쿠=싹)+나기+노(네.의-소유격)+ 쯔루기(찌르기=검)
즉...싹나기검...즉 새싹검입니다.
환두대도에...새싹 보이죠?....새머리로도 표시되어있죠...삼족오도 그거구요.
그 새는 검은새입니다...제비.까마귀로 표시되죠....태양조로 불립니다.
이 새싹검이....고대로 올라가면....비파형청동검입니다.
비파형인 이유가....바로 새싹을 잎파리를 형상한 것입니다.
새싹이 크면...가지를 치고 나무가 됩니다.....즉 나무를 숭상한 민족이죠.
바로 신단수입니다.....고목나무를 숭상하고 절하던 민족.
나무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존재라고 믿었던 나라...
새싹은 시작과 뿌리를 암시하고....하늘을 향해 뻗어간다는 상징입니다
나무를 머리에 달면...신라금관이 되고..
나무를 머리에 달고 다니는 동물이...사슴입니다..소호.소고.초고입니다.
새싹검은...비파형 청동검의 발전모델입니다.....3수분화 와도 관련있습니다.
또 그 하늘이 북두칠성.북극성이 있는.....북쪽하늘입니다....신들의 세상.
우리민족은..죽으면...그리로 돌아간다는 신앙이 있죠..그래서 돌아가셨다 하죠.
@@김영원-w3q 뭔가 장황한데, 이해를 잘 못했군요, 부연해서 설명하자면 백제의 해외 개척 식민지 22 담로 중 하나가 일본 입니다.
신하의 신분인 백제가 감히 일본의 왕에게 칼을 바친 것이라고 말하는 일본은 잘 생각해 보시길.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칼을 내릴 수 있어도, 그 반대의 행동은 가문 전체가 멸족이 될 수 있는 행위이다.
@대 신라후예 진흥 매금대왕 증거 가져오세요. 백제는 부여에서부터 시작된 문화를 간직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수도 이름도 부여고요. 중국 남조? 왜나라? 어디의 쫄다구라는 건지 ㅎㅎ 백제가 외교를 하고 일본에 식민지 건설한건 왜왕도 인정한 사실이구만 ㅋㅋㅋㅋㅋㅋ
@대 신라후예 진흥 매금대왕 그리고 ㅋㅋㅋ 따지고 보면 중국에서 피난 온 흉노족의 후손이 신라 왕실아님? 문무대왕비석에 그렇게 적어놨잖아 ㅋㅋㅋㅋㅋ
@대 신라후예 진흥 매금대왕 신라가 흉노족의 후손이고, 백제가 수많은 국가들의 연합체라서 백제인거는 인정하나요? 그중 온조가 세운 남부여가 나중에 통일했고요.
@대 신라후예 진흥 매금대왕 근초고왕 때 최고의 전성기였고, 당시 고구려와 전쟁하여 승리할 정도로 강했었죠. 왜구에 식민지 건설한 것도 그 쯔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기하네요. 중국의 짝퉁국가면서 동시에 왜국의 노예인 국가가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다는 것이 ㅎㅎ 백제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면 모든 의문이 풀리죠.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교류하여 문화적 우위에 서고, 왜구들과 동맹을 맺었다는 것.
@대 신라후예 진흥 매금대왕 ㅋㅋㅋ 신라가 흉노족 오랑캐 라는 걸 잘 알고 계시네요. 그리고 광개토대왕에게 원군을 요청해서 겨우 왜구의 지배에서 벗어낫다는 것도 잘 기억해 두시길 비랍니다. 적어도 백제는 왜구의 침략을 받아서 국가적 위기에 빠진 적은 없으니까요. 오히려 당시 중국을 위협하던 강대국 고구려와 수백년간 전쟁을 벌이다. 국력이 약화되어 천도를 거듭하였습니다.
칠지도는ㅡ일본이 백제의 여러 담로국 중 남은 일곱개의 위성국 중 하나임 을 뜻한다,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답니다.
잘못된 부분입니다
칠지도가 일본에게 상납조공을했다??ㅋㅋ 그럼 중국에는 왜 그기록이 없는가?? 근초고왕 근구수왕 시기 중국의 동진에게 조공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칠지도는 없음. 고로 칠지도는 상국이 하국에게 하사하는 검이였다는거임
ㄴ ㄱㅅㄴㄴ ㄴ ㄴ니ㅣㄴ ㅈㄴ ㄴ ㄴㅅㄴ ㄴ ㄴ ㄴ ㄴ ㅅ ㄴ ㄴ니 ㄹ ㄴ ㄴ ㄹ ㄴ ㄴㄴ ㄴ ㄴ ㄴㄴ ㄴㄴ ㄴ ㄴㄴ
ㄴ ㄴㅊㄴ ㄴㅈㅈㄴ ㄴ
ㄴ ㄴㄴ ㅊㄴ ㄴ ㄴㅊ
한사군이 평안도 황해도 ㅡ 예전엔 그렇게 배웠으니 시대를 생각하면 제작진도 어쩔 수 없는 표현이라 이해되는데, 거기서 한사군이 '철수'했단 표현에 정말 기가막히는 느낌. 한사군의 위치는 논외로 하더라도 한사군이 철수(스스로 물러나 다른 곳으로 감)한 게 아니라 멸망한 게 분명한데 저런 표현을 ㅡ 식민사학계의 입김이 명백한 용어선정. 옛날 프로그램인데 보다가 빡치네요. 심지어 저 당시 이미 중국 한나라가 멸망해 없어진지 언젠데 ㅡ 설사 저걸 맞다고 치더라도 저건 이미 중국의 식민국가가 아니라 독립왕국이잖아요?
식민사학, 식민사학, 내가 아무리 전문가가 아니라도 기가막히는게 무식의 소치는 아니죠?
하사품을 너무 좋은걸 줬네
일본 역사 컴플렉스가 너무 심해서
역사를 엿같이 가르치나
보통 예로부터 왕이검을주는건 대표적으로 신임의 증표로 하사하는 품목인데 당시 고구려를상대로도 백제가 연승하고있는 강국이 왜 따위에게 바칠이유가없죠 칠지도를만든 제철기술을 과시하며 일본의 군사력을 제공받았던것은 백제의 휘하에있던게일본인게 학계의 정설
백제가 왜국에 선진문물을 주는 댓가로 왜국에서 용병을 데려다 썼다는 소위 용병설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심각한 오해가 있습니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제가 나중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설명드릴 생각입니다. 그리고 저 칠지도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 삼국지 동이전에 모두 나오고 다 동일하기 때문에 오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칠지도에 나오는 글자들도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서에 다 나오므로 실물을 안 보아도 거의 다 알 수 있습니다.
한사군이 요동에 있었다니까요!!
근데 모순이 있는 게 동북아의 중심 국가라면서 중국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들여왔다는 걸 자랑처럼 말하는 게 이상하네요.
단철(鍛鐵)로 만든 양날의 칼로 전체 길이는 74.9cm이며, 칼날의 길이는 65cm이다. 칼의 좌우로 각각 3개씩의 칼날이 가지 모양으로 뻗어 있어 칠지도(七支刀)라고 부른다. 칼의 양면에는 60여 자의 명문(銘文)이 금상감(金象嵌) 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무기로서의 실용성보다는 제의(祭儀) 등에서 상징적인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육차모(六叉鉾, ろくさのほこ)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왔으나, 1873년 이소노카미 신궁의 대궁사(大宮司) 간 마사토모[菅政友]가 칼날에 새겨진 명문을 발견하면서 칠지도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1953년에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이소노카미 신궁에 소장되어 있다.
칠지도는 광개토대왕비와 더불어 고대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를 알려주는 가장 오랜 문자 사료이다. 하지만 표면이 부식되어 일부 글자는 판독이 어렵다. 많은 연구와 방사선 촬영 등을 통해 총 60여 자가 확인되었으나, 몇몇 글자(侯·以·音·倭)는 여전히 해석의 어려움이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글자는 다음과 같다.
[앞면] 泰□四年十□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七支刀□辟百兵宜供供侯王□□□□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世
제작 시기
간 마사토모는 명문에 나타난 ‘태□4년(泰□四年)’을 중국 서진(西晋)의 연호인 태시(泰始) 4년으로 해석해 268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45년 이후에는 이를 동진(東晋)의 연호인 태화(太和) 4년으로 해석해 칠지도가369년에 제작되었다는 설이 통용되었다. 하지만 한국 학자들은 삼국의 기록에서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사례가 드물다는 점에서 동진의 연호를 기준으로 제작 연대를 보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오히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나 전지왕(腆支王) 때의 독자적인 연호를 나타낸다고 보는 학설이 있다. 또한 ‘십□월(十□月)’을 11월로 보아 11월 16일에 병오(丙午)의 간지가 나타난 408년에 제작되었다고 보는 학설, 북위(北魏)의 연호인 태화(太和) 4년(480년)을 제작 연대로 보는 학설이 있다. 일부 학자는 금상감 기법으로 장식된 칼이 5세기 후반 이후가 되어서야 나타난다는 점에서 칠지도를 6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전달 목적
간 마사토모는 칠지도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실체를 뒷받침해 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에 진구황후 49년에 신라를 비롯한 7국을 평정하고 한반도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두었으며, 진구황후 52년에는 백제의 사신이 칠지도(七枝刀)·칠자경(七子鏡)을 비롯한 각종 보물을 헌상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나오는 칠지도(七枝刀)가 칠지도(七支刀)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학자들은 칠지도(七支刀)를 에 나오는 칠지도(七枝刀)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없으며, 더욱이 의 기록 자체가 고대의 신화를 근거로 편찬된 것으로 신뢰도가 낮다는 점에서 그러한 주장은 억지라고 비판한다. 또한 명문의 ‘공후왕(供侯王)’은 후왕(侯王)에게 제공(提供)·공급(供給)되었다는 뜻이므로 칠지도는 백제가 제작하여 제후왕(諸侯王)인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한편, 1935년 조선총독부 발굴단이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부여 군수리(軍守里)의 절터에서 칠지도와 유사한 형태의 유물을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유물의 형태나 행방에 대해서는 현재 자세한 정보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어떻게보면 일본에 오늘날 현대시대 21세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무기가 바로 백제 근초고왕이 일본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게보면 마치 칼날이 불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 철제 신검 칠지도(七支刀). 전세계 역사의 수많은 검들을 통틀어봐도 가장 멋있는 검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면 안되지만 탐내는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함.. 너무 멋있는 검이다보니.. 근초고왕이 너무 멋있는 검을 하사해줬어..
왜왕 ㅇㅈㄹ ㅋㅋㅋㅋ
칠지도[七支刀]일본이 7나라 였을때
7개로 나누고 이를 지점(支店)이라고
일본이라는 국호가 생기기 전에 고대 일본에는 여러 나라 중에 7개나라 있었죠
즉,백제가 일본 지역에 내린 하사품
4세기 열도에는 소국들이 무척 많았고 7개의 나라라고 특정할 만한 세력은 없었습니다. 백제인들이 세운 야마토만이 나라다운 나라였죠.
귀멸의 칼날 히노카미 보고 들어온 사람 손~
ㄷㄷㄷ 님아~~ 제발
@@김백작-p9w ㅋㅋㅋㅋ
겟앰 칠지도 진짜 똑같이 만들어놨던거네 ㅋㅋ
생각있는 놈들이라면 황급히 폐기시켰어야지 ㅎㅎㅎ
탄지로 아빠가 쓰는칼...
일본 고대사 컴플랙스.. . ㅋ ㅋ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