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테르의 『캉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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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Опубліковано 9 лют 2025
- 볼테르(Voltaire)의 대표작인 『캉디드(Candide)』는 1759년에 출간되어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문학의 정수로 평가받는 풍자 소설이다. 당대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 유행하던 라이프니츠의 ‘이 세상은 신이 창조한 최선의 세계’라는 낙관주의 철학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전쟁·종교·사회제도·철학 등에 대한 깊은 비판 정신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제목인 ‘캉디드’는 주인공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순진무구함(candide)’을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겪는 파란만장한 모험을 통해 인간 사회의 부조리와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동시에 볼테르는 결코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진정한 행복과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문제의식을 가볍고도 날카롭게 제기한다. 나는 『캉디드』를 읽으면서, 계몽주의 시대가 지녔던 낙관과 회의, 그리고 ‘합리성’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폭력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볼테르가 『캉디드』를 쓴 18세기 중반은 유럽이 계몽주의 사상으로 들썩이던 시기다. 과학과 이성의 발전이 인류를 보다 나은 세계로 이끌 것이라는 기대가 한창 높았고, 라이프니츠는 “이 세상은 신에 의해 창조된 최선의 세계”라는 낙관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볼테르는 이런 낙관론이 현실의 전쟁, 지진, 질병, 종교적 박해 등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소설은 30여 개의 짧은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인공 캉디드가 유럽·남미·터키 등을 방랑하며 온갖 시련을 겪는 여정이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이때 볼테르는 폭넓은 공간적 배경을 활용해 당시 유럽과 식민지 세계에서 벌어지던 모순, 종교적 위선, 전쟁의 참상 등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면서 동시에 인물들을 통해 낙관주의 철학을 조롱하는 날선 풍자를 펼친다.
『캉디드』가 가장 직접적으로 풍자하는 대상은 바로 ‘근거 없는 낙관주의’다. 소설 초반, 캉디드는 베스트팔렌 지방의 한 성(城)에서 스승 팡글로스(Pangloss)로부터 “현재 존재하는 이 세계는 가능한 세계들 중 최선이다”라는 낙관주의 철학을 배운다. 하지만 캉디드는 성에서 쫓겨난 뒤 연달아 전쟁과 지진, 기근, 고문, 배신, 죽음 등의 잔혹한 현실을 마주하면서, 스승의 교리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깨닫게 된다.
볼테르는 이를 통해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계획하셨으니 결국 잘될 것”이라는 막연한 신앙이나 “이 세상은 이미 최선으로 만들어져 있으니 불필요한 저항은 그만두라”는 운명론적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꼬집는다. 특히 실제 역사에서 거대한 사상자를 낳았던 리스본 대지진(1755) 참사가 소설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여기서 볼테르는 낙관론자들이 자연재해를 ‘신의 섭리’로 치부하며 실질적인 대처를 방해한다고 비판한다.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주요 서사는 ‘캉디드의 방랑기’다. 성에서 추방된 뒤 전쟁터로 끌려간 캉디드는 곧이어 리스본 지진을 겪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엘도라도라는 이상향도 발견한다. 그러다 다시 유럽으로 돌아오고, 마침내 동지들과 함께 터키로 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캉디드는 끊임없이 혹독한 시련을 마주하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은 최선일까?” 하는 물음을 떨쳐내지 못한다.
이 여행기는 겉보기에는 우스꽝스럽고 황당한 모험담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전쟁의 잔혹함, 종교재판의 부조리, 식민지 시대의 노예제, 유럽 상류층의 허영과 위선 등을 가차 없이 노출한다. 예컨대 재난을 겪은 리스본에서 캉디드는 뜬금없이 종교재판소에 잡혀 고문받는데, 이는 “신을 노하게 하여 지진을 불러온 이단자를 처벌하자”는 미신적 광기를 풍자한 것이다. 이는 볼테르가 당시 종교적 편협성을 조롱하고, 합리와 이성의 가치를 역설하는 방식을 잘 보여 준다.
캉디드의 주요 등장인물과 사상적 대립:
캉디드(Candide): 순수하고 어리숙하지만, 끝없이 시련을 겪으면서도 인간적인 선함을 잃지 않으려 한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독자가 볼테르의 풍자 세계를 함께 체험하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
팡글로스(Pangloss): ‘모든 것이 최선으로 되어 있다’는 라이프니츠식 낙관론을 맹신하는 철학자. 끔찍한 재난을 당해도 “이게 최선의 결과”라고 변명하는 모습이 독자에게 우스꽝스럽고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마르틴(Martin): 비관주의자 철학자로,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본다. 팡글로스와 대조적인 위치에서 늘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쿤에론데: 캉디드가 사랑하는 여성으로, 전쟁과 노예제, 약탈 등 온갖 비극에 휘말리며 운명을 전전긍긍한다.
카카투(Cacambo): 캉디드의 충직한 하인으로,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판단을 내린다. 그의 존재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감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이 인물들은 각각 ‘맹목적 낙관’, ‘극단적 비관’, ‘순수한 이상주의’, ‘실용적 현실주의’ 등 다양한 입장과 성격을 대변한다. 볼테르는 이 캐릭터들을 통해 철학적 사조와 현실 세계의 충돌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소설 중반, 캉디드는 신비로운 땅 엘도라도에서 황금과 보석이 길바닥에 널린 풍요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여기는 어떠한 종교적 억압도 없고, 계급 차별이나 전쟁도 없는 ‘유토피아’로 묘사된다. 실제로 이곳 주민들은 모두 평등하며, 자연과 사람, 신에 대한 경외심이 깃든 삶을 평화롭게 영위한다.
그러나 캉디드는 사랑하는 쿤에론데를 되찾고자 하는 욕망과, 엘도라도의 무한한 부를 이용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자 하는 야망으로 인해 결국 그곳을 떠난다. 그리고 현실 세계로 돌아오자마자 수많은 사기꾼과 착취자들에게 재산을 탕진당하고, 전쟁과 혼란에 다시 휩쓸린다. 이 부분에서 볼테르는 ‘진정한 이상향’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현실’ 사이의 간극을 예리하게 강조한다. 동시에 인간이 끝없는 욕심으로 인해 스스로 평온을 망쳐 놓는 모습도 풍자한다.
여러 풍파 끝에 캉디드 일행은 터키의 어느 농가에 정착한다. 그들은 한 노인에게서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고, 소일거리에 집중하면서 자신의 작은 밭을 경작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충분히 행복해진다”는 말을 듣고, 캉디드는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가꿔야 한다”라고 결론짓는다. 이는 『캉디드』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이자, 작품 전체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이 문장은 여러 해석을 낳아 왔다. 한편으로는 “현실이 아무리 부조리해도 개인은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으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긍정적 메시지로 읽히며, 다른 한편으로는 “거창한 낙관이나 부질없는 철학적 다툼보다는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낫다”는 볼테르의 냉소적·실천적 결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볼테르는 결국 모든 사회 참여를 포기하고 은둔을 권장했는가?”라고 논쟁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수많은 풍파와 상처 속에서도 스스로 삶의 작은 영역을 일구는 태도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희망”이라는 쪽으로 이해했다.
볼테르는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적 지식인이었으며, 『캉디드』에는 그가 지닌 비판 정신이 농축되어 있다. 그는 종교적 광신과 도그마, 무분별한 전쟁, 봉건적 위계질서 등을 공격하면서도, “이성만능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팡글로스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 이론만 되뇌는 태도나, 마르틴처럼 모든 것을 비관하는 태도 모두를 풍자하기 때문이다.
이는 “진정한 계몽”이란 자신이 속한 세계의 모순을 직시하고, 허무주의나 맹목적 낙관에 빠지지 않은 채, 최소한의 합리와 실천으로 조금씩 현실을 개선해 가는 과정임을 시사한다. 볼테르는 굳이 거창한 혁명이나 완벽한 유토피아를 외치기보다, ‘정원 가꾸기’라는 소박하고 구체적인 은유를 통해 그 방향성을 암시한다.
『캉디드』를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극단적으로 어둡고 참혹한 상황조차 가볍게, 때로는 희극적으로 그려 낸 볼테르의 문체다. 또한 볼테르가 보여 주는 세계관은 겉보기에는 냉소적이고 조롱 가득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작은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이 숨어 있다고 느꼈다. 비록 팡글로스의 낙관주의는 현실과 맞지 않아 무너졌지만, 캉디드가 품었던 순수함 자체가 전혀 부정당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고한 이들의 죽음과 고난을 목도한 후에야, 캉디드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더 성찰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고, 마침내 작은 농가에 정착해 “자신의 정원을 가꾸겠다”는 현명한 태도에 도달한다.
이 지점이 바로 볼테르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대단한 철학 이론이나 추상적 교리를 맹신하기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구체적 행동을 통해 스스로와 주변을 조금씩 개선해 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계몽’의 길이다. 근대적 합리주의의 한계를 일찍이 깨닫고, 동시에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볼테르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큰 의미를 가진다.
볼테르의 『캉디드』는 짧고 경쾌한 풍자 소설이면서도, 계몽주의 시대의 모든 빛과 그림자를 압축한 강력한 작품이다. “이 세상은 최선의 세계”라고 목청을 높이는 낙관주의를 깨부수면서도, 그것이 결코 완전한 허무주의나 냉소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캉디드의 순진함과 팡글로스의 허망한 철학, 그리고 온갖 재난과 부조리가 교차하는 서사를 통해, 독자는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이고, 역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마주한다.
결국 “자신의 정원을 가꾸라”는 결말 구절이야말로 『캉디드』가 던지는 핵심적 메시지다. 대규모 차원의 완벽한 구원이나 절대적 낙관에 몸을 맡기기보다는, 각자 삶의 자리에서 사려 깊은 태도로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의 부조리를 극복하는 현실적이면서도 진정한 길이라는 것이다. 폭로와 풍자라는 문학적 수단을 통해, 볼테르는 단순한 희극적 해학을 넘어, 우리에게 날카로운 자기성찰과 작은 실천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18세기 계몽주의의 지평 속에서 탄생했지만, 현대에도 변함없이 유효한 그 통찰에 공감하며, 나는 캉디드와 함께 “조용히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는 말이 이토록 묵직할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런데 볼테르는 마리 앙트와네트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고 말했다고 사기를 쳤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