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 일깨워준 성령충만의 교본 (1) (요한복음 3:3-8) --- 안성삼목사 주일설교 - 목자들의교회 - 2024/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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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23 вер 2024
  • 설교 요약:
    한국 교회에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혼동하시는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는 결혼식과 사랑의 관계와 같습니다. 결혼식을 했다고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결혼했기 때문에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한평생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사도행전(성령행전)을 통해서 성령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의 본질에 대해서는 오직 요한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십니다. 사도행전이 [성령행전] 이라면 요한복음은 [성령교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함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요한사도님을 통하여 일깨워주신 말씀을 상고해봅니다.
    1. 성령충만함이란 생수의 강이 배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2. 성령충만함이란 가르침 받은 모든 말씀이 생각나는 것이다.
    3. 성령충만함이란 드러 내는 삶의 모습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1. 성령충만함이란 생수의 강이 배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요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인간의 배는 본래 더러운 탐욕의 상징입니다. 불의한 돈을 받았을 때, [그 사람이 뭘(뇌물을) 먹었데...] 라고 합니다. 육체적으로도 인간의 배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말씀으로 보아 더러운 욕망과 탐욕으로부터 자유할 때만 성령충만함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성령충만과 육적욕망은 절대로 병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아직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의 기도 소리가 아무리 유창하고 그의 찬송소리가 우렁차다 할지라도 그는 성령충만한 사람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녹은 쇠에서 생겨납니다. 그런데 쇠에서부터 나온 녹이 결국은 그 쇠를 잡아먹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인간의 내부로부터 생성됩니다. 그런데 그 더러운 욕망이 인간을 파멸시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했습니다.
    자기부인(自己否認, self-denial)은 무엇을 부인하라는 말씀입니까? 자기 욕망을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하는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자족]입니다. 즉 지금 있는 상태에 만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믿음도 성령충만도 거기서 시작됩니다. 바울이 빌립보서4:11-13절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하신 말이 그 뜻입니다. 왜 성령충만한 자는 자족할 수밖에 없습니까?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지금 자신과 함께하셔서 세세하게 간섭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2. 성령충만함이란 가르침받은 모든 말씀이 생각나는 것이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생각나도록 도와주실려면 대 전제가 있습니다. 말씀이 내 안에 가득차 있어야 성령님께서 말씀이 기억날 수 있도록 나를 도우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속이 말씀으로 채워져 있지 아니할 때는 성령께서 기억나게 해 주실래야 기억나게 할 말씀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마치 소프트 웨어 없는 하드 웨어와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소프트 웨어가 들어 있어야 하고 그 안에는 많은 데이터가 저장되어 있어야만 언제든지 자료를 불러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적어도 이 본문과 관련해서 두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① 말씀 없이 기도만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말씀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모든 기도는 대게 나의 개인적 욕망을 위한 기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② 요절 신앙의 위험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성경구절 몇가지만 가지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진리의 조각을 진리의 전부로 아는 것보다 더 분명한 파멸의 길은 없습니다. 사이비 신앙인의 태반은 통합적 진리가 아닌 파편적 진리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불현듯이 유혹이 엄습할 때는 예수님이 시험을 이기신 것 처럼 잠시 멈추어 서서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은 모든 것이 명료합니다. 명료하지 않은 것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도대체 말씀으로 우리를 채우지 아니하고서 어떻게 영이신 그분을 따라 살 수가 있겠습니까? 성령충만한 삶은 그 속을 말씀으로 채워가는 삶입니다.
    3. 성령충만함이란 주님을 증언하는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사도행전은 성령님을 가리켜서 예수의 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행16:6-7) 성령님은 아버지 속에도 계셨지만, 성자 예수 그리스도 속에도 계시던 영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도 바울이 그토록 강조했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더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해서 예수님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자신의 의지 만으로는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내 중심이 그 분을 향하고 있을 때, 나의 불완전함과 유한함으로 인하여 행할 수 없는 것을 그분이 날마다 채워주시고 세워주심으로 우리는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손이 지은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을 생각할 때마다 내 손에 그분의 사랑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됨은 예배당 안에서는 증명되지 않습니다. 예배당 안에서는 사악한 자도 거룩한 표정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됨의 증거는 예배당 밖에서, 삶의 현장에서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교회 안에서는 전혀 별 볼일이 없는 사람인 것 같았는데 삶의 현장에 가서 보니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더라] 는 말을 듣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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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성령충만함이란 세상을 책망하는 것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5. 성령충만함이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6. 성령충만함이란 내것을 갖고 주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7. 성령충만함이란 주님이 내쉬는 숨을 받아들여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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