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여행]회재 이언적의 별장 독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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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10 лис 2024

КОМЕНТАРІ • 15

  • @무돌환벽당
    @무돌환벽당 11 місяців тому +1

    멋지고아름다운
    동락당영상
    잘보고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예전에 방문한곳이라
    더욱정겹네요~~
    큰박수보냄니다
    덕분에 행복한저녁입니다
    자주찿아뵙겠습니다
    양림동에서
    무돌 보냄니다

    • @와덕부부
      @와덕부부  11 місяців тому

      늘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돌님 좋은 주말 되세요~~

  • @이원균-y8v
    @이원균-y8v 11 місяців тому +2

    서자와 여기서 같이 살지 못했습니다. 귀양간 적소에서 아들임을 처음으로 확인하고, 이름도 "조옥강"에서 "이전인"으로 바꾸어 줍니다,. 제발 제대로 알고 유튜브에 올리세요. 남명 조식이 쓴 을 읽어 보세요.

    • @와덕부부
      @와덕부부  11 місяців тому +1

      이전인은 이언적이 경주 주학(州學) 교관이던 25세 때 석비(石非)를 통해 얻은 아들이었다. 원래 석비는 감포 만호 석귀동과 경주 관비 족비(足非) 사이에 태어난 딸이었는데, 석귀동에 의해 속신(贖身)되어 이언적을 만났을 때는 이미 관비 신분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 석비는 이언적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경상도 수사(水使) 조윤손의 첩이 되었다. 결국 이전인은 조씨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하게 되었고, 조윤손은 이전인이 이언적의 아들인 것을 알았지만 자신이 살아 있을 때는 그 사실을 아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인도 오랫동안 조씨 행세를 하고 살았다. [최연식의 역사 이야기 - ⑭ 父 이언적의 학문 알린 庶子 이전인]
      이전인은 독락당에서 살지 못했을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 @이원균-y8v
      @이원균-y8v 11 місяців тому +1

      @@와덕부부 1515년 12월 경에 양주석씨楊州石氏가 경상도 수사였던 조윤손曺潤孫의 첩妾으로 들어가 7달만인 1516년[회재 선생 26세] 7월 4일에 아들을 낳아, 이름을 조옥강曺玉剛이라 지음. 양주석씨[22세]는 아들이 채 돌이 되기 전에 천인賤人의 신분에서 양인良人의 신분으로 속량贖良됨. 1517년[회재 선생 27세] 7월 내직內職으로 상경上京함. 당시 회재 선생께서 양주석씨의 회임懷妊 및 아들 낳은 사실을 전혀 인지認知하지 못함. 1548년 11월에 조윤손曺潤孫이 죽어 1549[옥강 나이 35세]년 1월에 장례葬禮를 치름. 1549년 1월 조윤손曺潤孫의 장례 후, 조윤손曺潤孫의 사위·딸 및 또 다른 서자가 조옥강曺玉剛의 가족을 내침 (1549년 3월 경) 조옥강曺玉剛[나이 35세]이 (상복을 입은 채로) 어머니 석씨와 부인 및 아들 2명[10살·6살]의 식솔을 데리고 옥산별장으로 정경부인 박씨를 찾아온 것으로 추정함 (1549년 6월 경) 조옥강曺玉剛[나이 35세]이 옥산별장에 식솔을 맡기고, 홀로 강계로 찾아가 회재 선생을 만나 부자간임을 확인하고, 이름을 이전인李全仁으로 고치고, 시봉侍奉하면서 글을 배운 것으로 추정함. (1549년 7월 경) 옥산별장인 독락당에 사시던 정경부인 박씨는 옥산별장을 이전인李全仁의 가족에게 맡기고 양동良洞으로 이사하고, 이후 분재分財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함

    • @jbj4497
      @jbj4497 11 місяців тому +1

      조식은 이전인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이황은 이전인이 없었으면 이언적도 없었을것이라 하며 이전인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언적 사후 그가 역사에 남게 되기까지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은 이황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 @이원균-y8v
      @이원균-y8v 11 місяців тому

      @@jbj4497 "이전인이 없었으면 이언적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원전을 알려주세요. 설마 아들(이전인)이 없었으면 아버지(이언적)가 없었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 @이원균-y8v
    @이원균-y8v 11 місяців тому +2

    정말 잘못 알고 있군요. 회재 선생이 여기서 첩 석씨와 같이 산 적이 없었습니다. 옥산서원은 경주 유림이 세웠지 서자가 세운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옥산서원은 여강이씨의 문중 유산이 아니고, 경주 유림의 향중 유산입니다.

    • @와덕부부
      @와덕부부  11 місяців тому +2

      손자들이 깊게 관여하여 옥산서원이 지어졌음에도 서얼이란 이유로 출입이 금지되었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KBS 역사스페셜- 독락당 어서각은 왜 굳게 닫혀 있었나]

    • @이원균-y8v
      @이원균-y8v 11 місяців тому +1

      @@와덕부부 큰 손자 이준은 1540년 생입니다. 권덕린權德麟(1529-1573)이 1566년 회재 선생께서 신원된 후부터 13명의 경주 유림과 함께 경주부윤慶州府尹 이제민李齊閔의 도움을 얻어 옥산서원 설립을 주도하였는데, 30살이 채 안 된 이준이 뭘 크게 관여했습니까? 13명의 경주 유림 안에 이준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 @swlee1967
    @swlee1967 4 місяці тому

    Kbs 역사스페셜보고 왔는데 다들 이상한 말씀 하시네요

  • @이원균-y8v
    @이원균-y8v 11 місяців тому +2

    회재 선생은 서손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알고나 떠드세요, 제발!!! 멋진 경치를 영상으로 찍어 올리는 것은 자유입니다만, 남의 사생활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떠들면 곤란합니다. 적서의 차별은 조선시대의 사회 관습이었습니다. 현재의 기준으로 판단하여 왈가왈부하는 태도는 역사에 무지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 @와덕부부
      @와덕부부  11 місяців тому +1

      살아가면서 남에게 상처주지 않고 하고싶은 말을 제대로 표현하는것이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 @이원균-y8v
      @이원균-y8v 11 місяців тому +1

      @@와덕부부 1540년에 회재 선생[나이 50세]이 당시 6살의 종질從姪 응인應仁을 사자嗣子로 정하였습니다. 당시 예조禮曹의 계제사稽制司에서 양자養子를 허가許可하는 문서인 예사禮斜를 발급할 때는, 친자親子가 없고 서자庶子가 있으면 서자가 가계家系를 있도록 하고 양자養子를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종질을 양자로 했다는 것은 당시 서자庶子인 이전인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회재 선생이 양자한 1540년에, 나중에 서자로 밝혀진 이전인은 자신의 큰 아들인 이준을 낳았습니다. 동일 년도에 회재 선생은 양자와 서손을 동시에 얻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회재 선생께서 서자와 서손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을 반증합니다. 아셨다면, 손자 얻은 해에 양자를 했겠습니까?

    • @황정아-y4k
      @황정아-y4k 11 місяців тому

      아주 재미있고 유익한우리역사의 한 단면이군요 더욱 기대 합니다 고맙습니다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