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데리다의 경계 / 헤겔의 구덩이와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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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5 лют 2025

КОМЕНТАРІ • 3

  • @yirgacheffesongs3447
    @yirgacheffesongs3447 5 років тому +3

    데리다 강의는 언제나 선선해요..

  • @이도영-z5j
    @이도영-z5j Рік тому +1

    감사합니다

  • @TaegyoonKim
    @TaegyoonKim 5 років тому +1

    ㅇ라캉 이후에는 쭉 달렸는데, 데리다 6강을 되돌려 다시 듣네요. 생각이 많다는 흔적이지요.
    ㅡ동료에게 이렇게 메세지를 보냈군요. "이대로 가면 포스트모더니즘과 주요한 지점에서 대립할 듯.. 괜찮을지.."
    ㅡ전해온 답변(일부)은, 제 소감의 어떤 문장을 들고와.. "원인을 기원이나 계보일 수 있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음.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와 실천사이의 편차를 해결하려는 흐름이지.. 어떤 기원 혹은 계보학 같이 내가 아직 찾지 못한 진리의 문제가 아닐수 있음. 그래야 포스트모더니즘 스타일의 태도와 부합할 것 같음.."
    ㅡ카톡상의 소통은, 목소리를 통해 기호화되고 그리하여 의미를 발산하는 그런 현전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서 눈으로 직접보아 발산되는 의미를 읽어내는 문자들도 아니지요.
    ㅡ두차례 반복하여 들은 데리다에 대한 설명을 내 자신의 생각과 결부시키며 또다른 생각을 끌어내는 작업이, 카톡의 소통 이전과 이후가 많이 다르네요.
    ㅇ첫번째 강의를 들은 후, 기억 속에 남은 말은 의 존재로..
    ㅡ헤겔과 후설을 현전의 형이상학으로 비판하는 대목에서 나온 이야기이지요.
    ㅡ공감하기 어려워요. 플라톤과 칸트, 헤겔의 흐름에 비판적이면서도 진리와 의미를 에 위치지운다는데는 다른 생각이 드는군요.
    ㅡ신과 영혼의 목소리, 나아가 이성의 목소리를 들은 바 없거나 소홀히 여김에도, 눈으로 보아야하는 직접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문자에 대해 데리다처럼 무게를 둘 순 없군요.
    ㅡ결국 의식(인식)은 듣고자 하는 것을 듣고 보고자 하는 것을 본다 여기거든요. 바깥은 자극과 교란으로 나타나지요.
    ㅇ첫번째 듣기에서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이해했다 여겼는데, 동료와의 소통 후 듣는 그라마톨로지는 조금 결이 달랐어요.
    ㅡ말에서 문자로, 인식에서 존재로 등의 동일한 구별에서 선택이 다른 결로 이해했다가,
    ㅡ기원찾기에서 기원없음으로, 철학과 문학의 경계짓기에서 경계에서기 로 결이 달라져 있음을 보게 되요. 데리다가 문학에 비중을 둔다해도..
    ㅇ결국, 데리다를 통해 포스트모더니즘(포모)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어디까지 기대하느냐의 문제일텐데.. 플라톤-칸트-헤겔류와의 차이가 아니라 자기자신(고타마-루만류)과의 차이에 대한 질문으로 바뀐 셈이네요.
    ㅡ포모 스타일을 그 아이덴티티(정체성/통일성)를 살피긴 어렵지요. 아인하이트(차이동일성)은 더더욱요.
    ㅡ그러나 한가지 문제가 있네요. 첫번째 듣기에서 전 대단히 대결적인 자세로 긴장했지만, 두번째 듣기 이후에는 참신함을 느낀 정도로 느긋해 졌군요. 어떤 이해/자세가 옳을지요?
    ㅡ여전히 모더니즘을 대체할 어떤 것을 찾고 있는 걸까요? 데리다처럼(?) 모더니즘(말)과 포모(문자)의 경계에 있을까요? 그도 아니면 진리와 실천 사이(예측 혹은 인지)의 간극을 좁히는 과정에 있을까요?
    ㅇ그 동료는 진리를 "실재를 설명하는 명제"로 표현하던데 좋았어요. 조금 바꾼다면 "실재와 현상, 인식을 설명하는 바른 명제" 정도 겠지요.
    ㅡ포모 스타일은 "완전한 진리는 없고 마침표도 찍을 수 없다"고 보겠군요. 텍스트의 여백.. 인식(의식)의 바깥에요.
    ㅡ굳이 각을 세워본다면 진리는 의식과 소통, 생명의 담지자들이 그때 그 순간과 거기 그 공간속에서 드러나고, 그 작동과정에 있겠지요.
    ㅡ아직 저는 체계이론 학습자로.. 고타마/루만 스타일인 셈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