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반부로 갈수록 뿜어져 나오는 십자가의 사랑의 능력에 어쩔 수 없음을 느낍니다. ‘아들의 영’에 담긴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사랑을 뵐때에 뭐라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복음의 기이함과 하나님의 은혜가 이끄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말씀 증거 감사합니다. 기록한 노트 나눕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임한 사건을 기록하신 것은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동일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 세상과 구분됨을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의 증거로 성령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보다 아들의 하신 일을 마음에 품게하기 위함인 것이다. 영을 받음으로 인해서 아들의 일을 높이는 것이다. 이 성령을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과 양자의 영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은 왜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성령을 부르고 있는지 알팔요가 있다. 종의 영으로 사는 증거는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살지않으면 지옥가는 무서움이다. 즉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다른 곳으로 팔려갈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불안해하는 종의 모습이다. 양자의 영을 받은 자는 이러한 마음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자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다시는 자신을 종으로 삼으실 일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며 이 마음으로 사는것이 양자의 영으로 사는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은 파양을 당해도 마땅한 자인데 그러한 자를 파앙시키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것이며 이것이 양자의 영을 받은 증거가 된다. 이러한 자는 종의 영으로 부르던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양자의 영’이라고 부를때에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되었다’는 의미를 담고있는 것이다. 그래서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은 무엇으로도 끊어지지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탄해 하며 감사를 드리는 삶을 살게되는 것이다. 이것이 ‘양자됨’이다. ‘아들의 영’은 무언가를 잘했다고 보상받는 것이 없다는 뜻이 담겨있다. 즉 일의 보상을 받는 존재는 종이지 아들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모든것이 아들의 것이기 때문에 보상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위하여 고난받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의 영을 받은 자는 이 고난을 받는 것이 마땅한 것임을 아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아들의 영’에 담겨있는 의미가 된다. 고난에 함께하게 하시는 영이다. 예수님의 고난이란 고생이 아니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 세상에 임하신 것 자체인 것이다. 아들의 영을 받은 자들도 이러한 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아들의 영을 받은 자들은 복음을 븍음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에 사는 것 자체가 고난인 것이다. 즉 편하게 예수믿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고난에 참여해 함께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동역자’다. 만물의 창조는 ‘예수님이 아니라면 만물이 창조될 이유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아니라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것이 아들의 영을 받은 것이며 이 영으로 하나님을 알게된다고 해서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라 부르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로 끌어들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안에서만 하나됨이 있다. 다시 말해서 아들의 영으로 이 세상이 조롱하는 동일한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십자가지신 아들을 증거하라고 아들의 영을 부어주신 것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뿜어져 나오는 십자가의 사랑의 능력에 어쩔 수 없음을 느낍니다. ‘아들의 영’에 담긴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사랑을 뵐때에 뭐라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복음의 기이함과 하나님의 은혜가 이끄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말씀 증거 감사합니다. 기록한 노트 나눕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임한 사건을 기록하신 것은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동일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 세상과 구분됨을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의 증거로 성령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보다 아들의 하신 일을 마음에 품게하기 위함인 것이다. 영을 받음으로 인해서 아들의 일을 높이는 것이다. 이 성령을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과 양자의 영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은 왜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성령을 부르고 있는지 알팔요가 있다. 종의 영으로 사는 증거는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살지않으면 지옥가는 무서움이다. 즉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다른 곳으로 팔려갈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불안해하는 종의 모습이다. 양자의 영을 받은 자는 이러한 마음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자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다시는 자신을 종으로 삼으실 일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며 이 마음으로 사는것이 양자의 영으로 사는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은 파양을 당해도 마땅한 자인데 그러한 자를 파앙시키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것이며 이것이 양자의 영을 받은 증거가 된다. 이러한 자는 종의 영으로 부르던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양자의 영’이라고 부를때에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되었다’는 의미를 담고있는 것이다. 그래서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은 무엇으로도 끊어지지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탄해 하며 감사를 드리는 삶을 살게되는 것이다. 이것이 ‘양자됨’이다. ‘아들의 영’은 무언가를 잘했다고 보상받는 것이 없다는 뜻이 담겨있다. 즉 일의 보상을 받는 존재는 종이지 아들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모든것이 아들의 것이기 때문에 보상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위하여 고난받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의 영을 받은 자는 이 고난을 받는 것이 마땅한 것임을 아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아들의 영’에 담겨있는 의미가 된다. 고난에 함께하게 하시는 영이다. 예수님의 고난이란 고생이 아니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 세상에 임하신 것 자체인 것이다. 아들의 영을 받은 자들도 이러한 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아들의 영을 받은 자들은 복음을 븍음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에 사는 것 자체가 고난인 것이다. 즉 편하게 예수믿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고난에 참여해 함께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동역자’다. 만물의 창조는 ‘예수님이 아니라면 만물이 창조될 이유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아니라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것이 아들의 영을 받은 것이며 이 영으로 하나님을 알게된다고 해서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라 부르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로 끌어들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안에서만 하나됨이 있다. 다시 말해서 아들의 영으로 이 세상이 조롱하는 동일한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십자가지신 아들을 증거하라고 아들의 영을 부어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