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사람인데요 이때생각 납니다 할머니댁이 샘밭이라 당시 할머니랑 소양댐에서 내려오는 거대한물을 보러갔지요 무서운기억 , 그리고 서있는 바로앞의 흙이 떨어져나가는데 그리고 소양댐은 인제 양구 등 상류지역에 비가 오는 유입량을 착공시 잘못계산하여 현재의 수문크기로는 84년도의 비처럼 조금만더 온다면 소양댐위로 물이 넘친다는거죠 그래서 그때문에 얼마전 방송에서 수문외의 수문을 더 만들었다는거죠
저 국민학교 2학년때로 기억 합니다 서울 사는데 비가 얼마나 일주일 넘게 오던지...지금 목동 아파트 있기전에 거기 전부 논 밭이었고 저는 목동 근처 주택에 살았어요 오목교 범람 한다고 대피 싸이렌도 울리고...한강 인도교 범람 직전 까지 실시간 뉴스에 나오고 저희도 짐싸고 아버지가 회사에서 가져오신 큰 트럭 타고 대피 하려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다행이 비가 멈춰 대피는 안했지만 지금 목동 오거리 물차서 사람들 스티로폼 연결해 배타고 다니고 친구들 물놀이 했던 기억이나요 ㅋㅋㅋ........아버지는 작년에 돌아 가셨네요 ㅠㅠ
이때 북한이 쌀 보낸이유는 순수한 구호의 목적이 아니라 우리 되게 여유롭다~ 이런거 보여줄 목적이었고 남한은 자존심 부리면서 안받을 줄 알고 허세좀 부려본건데 땡큐 하고 받아버림ㅋㅋㅋㅋㅋ 북한은 이때 일성이형 뻘짓에 고난의행군 들어가기 바로 직전, 국고 바닥나고 있을 시기라 지들 먹을 쌀도 없을 시기였는데 그래도 먼저 준다 해놓고 안주기엔 또 모양빠지니 중국한테 쌀 얻어다가 보내줬다고합니다.
국민학교 6학년때 인데 비가 엄청나게 와서 집 안방 벽 약1m까지 물이 찾었죠... 가전제품 이 문제가 아니라 새벽에 부랴 부랴 당시 태어난지 백일 막 되가는 막내동생 옷가지랑 우유병 챙겨서 지대가 높은 작은집으로 피난갔었죠... 다음날 와보니 당시 현대식 주택이었던 우리집과 우리동네는 반쯤 잠겨있었고 물빠지는데 며칠 걸렸었는데 그와중에 친구들과 동네를 삼킨 물속에서 수영도 하고 다라타고 잠수도 하며 별짖을 다했죠... 당시는 수세식 변기와 정화조가 없고 집집마다 푸세식 덩통?화장실 이었는데 그물이 이집덩 저집덩 다 합쳐진 덩물이란걸 잊은채 놀고있었으니 참 철이 없었네요...ㅋ~ 그래도 피부병 전염병 하나없이 잘 컷어요... 저도 그때 북한에서 지원한 쌀로 지은 밥을 먹어보았는데 자세한건 모르겠고 엄마들 말씀하시던건 쌀이 푸석하고 윤기가 없다 압력밥솥아닌 일반 솥에 밥하면 밥맛이 없다... 라는 말씀을 하시던게 기억이납니다... 여담으로 당시 당연히 쌀준다면 우리측이 안받을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우리가 받는다고 하여 북한 김일성이 똥씹은 얼굴로 인민들에게 줄쌀도 부족한데 어쩔수 없이 남한에 쌀지원해줘서 몇날 며칠 밤잠을 못잦다고 하며 그 제안한 북측 적십자사 대표단들 죄다 아오지로 보넸다고 하더군요... ㅂㅅ들이 가오잡으려다 지들 목아지 잡았네요~~~^-^
비슷한 시기에 군생활 같이 하셨네요. 저희 부대(31연대 3대대)도 야외종합훈련으로 그 해 7월 한 달간 오대산에서 숙영했었습니다. 그 훈련 후, 31연대 4대대(2사단 신병 교육대대)에서 하사관후보생으로 교육 중이었는데(교육중 퇴교하여 남들보다 일찍 병장 달고 다음해 7월 병장 제대), 그 때 큰 비로 부대 근처 도랑이 한순간 무너져 쓸려 내려간 것을 보았습니다. 교육중이라 그 때 비가 그렇게 많이 내려 큰 위협이 되었는지 몰랐네요.
생각납니다 우리나라가 수해로 피해를 크게 입자, 북한이 우리가 의향이 있다면 식량과 보급품을 지원해 줄수 있다고 말을 했는데, 훗날 그건 그냥 하는 말이었고, 우리정부가 당연히 거절을 할꺼라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감사하다고 받겠다고 하니 부랴부랴 전국에서 쌀을 수급해서 보냈는데, 그쌀의 질이 좋지가 않아서 사람이 먹기에도 미달되어 가축사료등으로 썼다고 하더군요 우리나라쌀이 햇쌀부터 2년, 3년차쌀까지는 먹고 이후부터는 정부미라고 해서 군인들이 먹고 나면 나머지 몇년차부터는 가축사료나 과자등의 재료료 쓰이거든요
소양강댐은 1984년 호우 1990년 호우때 계획홍수위 198미터 까지 근접한 197미터까지 올라 갔습니다. 소양댐이 만수위에 근접한 시기가 1984년 1990년 딱 두번 밖에 없지만 사력댐이라 월류 했다면 강원 경기 서울 인천도 피해가 갔을겁니다. 현재 보조 여수로가 있지만 초 극한 강우가 들이닥치면 이것도 무용지물 일지도 모릅니다. 충주댐도 1990년 2006년에 만수위에 근접한 일이 있었습니다.
정말 소양강댐 이 없었으면 ~~ 박정희 대통령 미래를 보고 소양강댐을 건설 하셨지 ㆍ춘천댐의암댐청평댐ㆍ팔당댐 ㆍ이댐들 때문에 서울사람들 물걱정 없이 평온하게 살수있지ㆍ없었다면 ㆍ수도권사람들 해마다 물난리ㆍ식수문제 ㆍ정말 끔찍한 상상ㆍ박정희대통령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ㆍ특히서울사람들 ㆍ 고층아파트에서 수돗물이 잘안나온다? 특히 화장실은 어떻게 할뻔 ㅎㅎ
1981년 9월1일 토요일 아침에 이장님이 마을 방송으로 소양강댐이 위험하다고 젊은 청년들의 참세을 권해서 홍천터미널에 가서 대한통운 트럭타고 소양강댐 밑에 가니 경찰, 군인, 공무원, 예비군 등등이 도착해 있었음. 댐이 사력댐이라 물이 넘치면 댐이 붕괴된다하여 작은 마대를 댐위에 쌓기로 결정했는데 물이 너무 가끼이 올라와서 다들 너무 쫄아서.., 결국 군인이 제일 안쪽에 그다음이 경찰, 공무원순으로 서고 나는 예비군과 같이 마대에 모레 넣는 임무를 수행함. 저녁에 참가증 받고 귀가함. (참가증으로 다음년도 예비군훈련 면제 받음) 참고로 수해끝나고 북한에서 쌀, 시멘트, 옷감을 밭았는데 쌀은 밥을하니 너무 맛이 없어서 떡을 해서 나눠 먹고 옷감은 너무 허접해서 걸레로, 시멘트는 마을 공동으로 사용했던 기억이~~
1969년 강원도 춘천국민학교1학년2학기에 전학왔었는대, 담임여선생이 한살어린 본인 아들을 같은반에 불법으로 다니게 하면서 수업을하고, 아들놈은 엄마가 담임선생이라 학생들한테 폭력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담임여선생 역씨 폭력을 무자비하게 자행하던 악덕선생이였습니다... 학교에서 소풍을 가면, 그당시 다 어렵게 생활할때인대, 반장을 시켜서 애들이 싸온 과일, 과자같은것을 교묘하게 빼았아서 큰 시장바구니에 챙겨서 들고, 소풍끝나고 갈때 무거우니까 남학생들이 나눠가면서 들고 갔었다... 저도 사과를 아껴서 집에가서 먹으려다가 빼았긴게 기억납니다.. 아들놈은 다음해(1970년) 다시 1학년 입학해서 다니는걸 확인했고,, 나는 다른학교로 전학했다,,어릴때 일이지만 너무 또렷이 기억나서 그 이후로 강원도, 초등학교선생들에 대해 아주 안좋은 기억이 떠나지 않는다~~~ 그여생년은 지금은 나이도 많고 죄 받아서 돌아가셨을것으로 생각됩니다. ""1970년대 강원 두메산골 부부교사 이야기"" 이걸보나 상반된 삶이지만 ,,지나간 악몽이 떠오릅니다...
아무리 4대강 사업을 했어도 전세계 기후변화 때문에 안심할순 없습니다. 하루에 내리는 비의 양을 상향시켜 그것을 처리할수 있는 방재시설을 확보해야합니다 지역 중간 중간에 유수지 건설은 필수로 설치하여 평상시에는 밭으로 쓰면 됩니다. 물론 수해 방지용 이기 때문에 일년 농사를 망칠수 있기에 3~4개월에 수확이 가능한 작물로 경작하면 됩니다
당시 근무했던 회사 사내식당에 북한쌀로 지은 밥이 나왔는데, 밥 맛이 엄청 좋았음. 왜냐면 이전에는 정부미로 지은 밥을 배식했는데 먹어본 사람들은 알 것임. 냄새나고 펄펄 날라다니는 밥알들.. ㅎㅎㅎ 즉, 3년 저장된 쌀로 지은 밥보다는 북한쌀로 지은 밥이 맛이 있었다라는 것임. 북쌀에 대한 또하나의 기억은 쌀알들이 푸른기가 남았있었다는 것. 아마 일찍 수확해서 그런것 같음.
수령님의 은덕을 입은 사람이 여기 있었네. 그 당시 남한에 보낸쌀들이 오래된 치장 군량미라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몇년 묵은 쌀을 받아서 밥을 지으면 맛없다고 떡해먹으면서 흉봤는 데 댁은 맛있는 수령님의 잇밥을 얻어 먹었다고 거짓말하고 계시네. 하기야 자발적 간첩도 수만명이라니 탓해봐야 뭐하겠나
소양호 주변산 깎아내고 담수량 5배 더 늘리면 안되냐? 집중호우 때 피해도 피해지만 아까운 수자원 바다로 흘러 보내는게 너무 아까워! 건설 불황일 때 전국 굴삭기, 덤프트럭 모두 동원하면 좋을 듯 하다. 그 산더미 같은 흙 한중접경 수역에 여의도 10배 크기 인공섬 만들면 좋을듯 하다.
저 당시 장실운동장 근처 우성아파트, 그리고 풍남동 지금의 아산병원 근처 아파트 3층까지 물이 차오르고 풍납동은 스티로폼이 이동 수단 이었지요. 그때 수해물자 갖고 판문점에 온 북한트럭운전수들, 우리가 준 워커힐 도시락에 전자제품, 의류 받아가며 어리둥절 마지못해 받아가던 모습이 선합니다.
2010 몇 년에 어떤 다큐프로에서 이 홍수에 대해 다룬 적 있었는데... 63빌딩 45층까지는 ㅎㅎㅎ 모르겠고, 당시의(201??년) 연구 결과로는 사력댐인 소양강댐이 범람으로 인해 붕괴되면, 북한강 수계의 모든 댐과 팔당댐은 모두 작살나고 서울 여의도는 사라지며 한강의 모양이 일부 바뀐다는 결과가 있었죠. 사실 춘천에서 시작된 홍수가 서울데 도달하가까지의 지형을 볼 때, 강 양 옆의 산들이 자연적 제방의 역할을 하여 그 막대한 수량이 다른 곳으로 퍼지지 못하고 거의 그대로 서울에 단시간 내에 그것도 일시에 도착한다니...
지원받는거 반대도 많았는데,남북 화합 차원에서 수용했었지요..북 김일성이가 대대적 선전했지만,결과적으로 북한인민들만 더 굶주리게 됬고,저때 이후 남한에서 식량 및 생필품을 북으로 정식으로 보낸 계기가 된 것입니다..저희 집도 쌀을 소량 받았는데,부친은 당장 내다 버려라 하셨고 모친은 쌀은 국적이 없다며 가래떡 만드셨드랬죠.
저시대 자원 봉사한 군인들 나이가 아마 63살 됬지
내가 84년도 전역 했으니 다들 그시절 고생들 했습니다
고생많으셨겠네요
제가 84년생입니다.고생들 하셨습니다.아부지들
당시에 북한 구호물자로 온 북한쌀이 품질이 너무 떨어져서 밥으로 지어는 못 먹고, 떡으로 만들어서 먹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쌀 모아다 방앗간에 가져가서는 떡으로 만들어서
나눠 먹었죠.
춘천 사람인데요
이때생각 납니다
할머니댁이 샘밭이라 당시 할머니랑 소양댐에서 내려오는 거대한물을 보러갔지요
무서운기억 , 그리고 서있는 바로앞의 흙이 떨어져나가는데
그리고 소양댐은 인제 양구 등 상류지역에 비가 오는 유입량을 착공시 잘못계산하여 현재의 수문크기로는 84년도의 비처럼 조금만더 온다면 소양댐위로 물이 넘친다는거죠
그래서 그때문에 얼마전 방송에서 수문외의 수문을 더 만들었다는거죠
유포리 막국수 동네
저 국민학교 2학년때로 기억 합니다 서울 사는데 비가 얼마나 일주일 넘게 오던지...지금 목동 아파트 있기전에 거기 전부 논 밭이었고 저는 목동 근처 주택에 살았어요 오목교 범람 한다고 대피 싸이렌도 울리고...한강 인도교 범람 직전 까지 실시간 뉴스에 나오고 저희도 짐싸고 아버지가 회사에서 가져오신 큰 트럭 타고 대피 하려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다행이 비가 멈춰 대피는 안했지만 지금 목동 오거리 물차서 사람들 스티로폼 연결해 배타고 다니고 친구들 물놀이 했던 기억이나요 ㅋㅋㅋ........아버지는 작년에 돌아 가셨네요 ㅠㅠ
오..님하고 가까운 동네 살었네요..저당시 국민학교 1학년 공항동에 살었네요..공항주유소 공항국민학교쪽..홍수나서 난리가 아니였죠..근처 논도 다잠기고 벌써 40년이 다되가네요..옛날버스 22번41번128번125번130번63번68번700번버스등등 생각이네요..ㅎㅎ
@@하태관-p2u 저도 22번 160번 버스타고 고등학교 다녔어요
@@고기집스님 아~~~22번 ㅎㅎ 지금6629 아직도 강서구 살고있네요..
그때 고1.. 노량진 한강대교 위를
버스가 서행.. 영등포 범람으로 서핑 보드 타고 가던 분 아직도 기억..
개봉역은 완전 침수..
군시절 휴가나와서 소양댐 구경간적있슴,
진짜살벌했어요,
이때 북한이 쌀 보낸이유는 순수한 구호의 목적이 아니라 우리 되게 여유롭다~ 이런거 보여줄 목적이었고 남한은 자존심 부리면서 안받을 줄 알고 허세좀 부려본건데 땡큐 하고 받아버림ㅋㅋㅋㅋㅋ
북한은 이때 일성이형 뻘짓에 고난의행군 들어가기 바로 직전, 국고 바닥나고 있을 시기라 지들 먹을 쌀도 없을 시기였는데
그래도 먼저 준다 해놓고 안주기엔 또 모양빠지니
중국한테 쌀 얻어다가 보내줬다고합니다.
시멘트로 농로까지포장도했지요
따봉!
가오가 뇌를 지배하는 북한 ㅋㅋㅋ
반대로되버렸노 ㅋㅋㅋ
품질이 먹을 수도 없을 정도 였다던데
썩은내가 나서 먹을 수 없었다던 북한 쌀
국민학교 6학년때 인데 비가 엄청나게 와서 집 안방 벽 약1m까지 물이 찾었죠... 가전제품 이 문제가 아니라 새벽에 부랴 부랴 당시 태어난지 백일 막 되가는 막내동생 옷가지랑 우유병 챙겨서 지대가 높은 작은집으로 피난갔었죠... 다음날 와보니 당시 현대식 주택이었던 우리집과 우리동네는 반쯤 잠겨있었고 물빠지는데 며칠 걸렸었는데 그와중에 친구들과 동네를 삼킨 물속에서 수영도 하고 다라타고 잠수도 하며 별짖을 다했죠... 당시는 수세식 변기와 정화조가 없고 집집마다 푸세식 덩통?화장실 이었는데 그물이 이집덩 저집덩 다 합쳐진 덩물이란걸 잊은채 놀고있었으니 참 철이 없었네요...ㅋ~ 그래도 피부병 전염병 하나없이 잘 컷어요... 저도 그때 북한에서 지원한 쌀로 지은 밥을 먹어보았는데 자세한건 모르겠고 엄마들 말씀하시던건 쌀이 푸석하고 윤기가 없다 압력밥솥아닌 일반 솥에 밥하면 밥맛이 없다... 라는 말씀을 하시던게 기억이납니다... 여담으로 당시 당연히 쌀준다면 우리측이 안받을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우리가 받는다고 하여 북한 김일성이 똥씹은 얼굴로 인민들에게 줄쌀도 부족한데 어쩔수 없이 남한에 쌀지원해줘서 몇날 며칠 밤잠을 못잦다고 하며 그 제안한 북측 적십자사 대표단들 죄다 아오지로 보넸다고 하더군요... ㅂㅅ들이 가오잡으려다 지들 목아지 잡았네요~~~^-^
님 저랑 동갑. 어렴풋이 그 시절 홍수 기억나네요 ㅋ
후일담이 재밌네요 잘 읽었습니다 :)
저와 동갑이내요...학교 잠기고 전기 끊겨서 고생 많이 했지요..어린나이에 삽질하고 집에 농토는 하천이 되어서 또 삽질 다음해 까지 정말 힘들었지요,
@@윤희철-b6n 저는 가평국민학교 72회 이고 72년생 입니다.
북한도 당시에 보여주기 식으로 쌀 보내주고 그 다음에 다른 나라에 쌀 구걸했다고 들었어요 ㅋㅋㅋ
저당시는 아직 북한이 그래도 그냥 저냥 잘 나갈때라 그정도는 아닐걸요 그리고 당시는 아직 냉전라는 중이라
구호물품이랑 쌀 보내야 하는데 북한 내부에서 충당을 다 못해서 중국한테도 구걸해서 보내줬습니다
90년도 까진 북한이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쏘련이 망하고 동구라파 사회주의 시장이 망하면서 그리된거임
이 당시 서울 강동구 성내동 살다가 수해 맞았는데, 북한에서 쌀 보내준 거 받아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쌀에서 냄새가 나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서리... 밥은 딱 한번 해 먹고 나머지는 떡 해서 간신히 처치했었죠.
춘천 사람입니다
이때 피난하라고 난리도 아니였음
마지막에 개천에 대어가 나온다고 했는데
이건 소양댐위에 양식장이 수해로 터져서 생긴 해프닝 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양식장에서 나온건 수해후에 강에서 잡았던거고, 소양강댐 아래 샘밭에서는 냇가로 미터급 잉어들이 잔뜩 올라왔었내요.
닭장같은곳에 치던 철망을 냇가에 쳐서 잡아내고, 그거 잡다가 꼬리지느러미에 맞아 가슴에 멍든 동내분도 계셨고, 제방안쪽 논에 물빠진뒤에 잉어, 향어 에 난생처음보는 초어라는 물고기도 구경하고.
논농사하시던분들 농사 망쳐서 속상해 하면서도 그건 또 잡아다 동내분들 다 나눠먹었었는데.
@@sheart04 그나마 식량대용으로는 적절했겠네요
이 때 북한이 수해지원 하겠다는 걸 우리가 수용하면서 북한 경제 골로 감
ㅋㅋㅋㅋ 개웃김
와 시바 진짜 받을줄은 몰랐넼ㅋㅋㅋ
우리나라 수해 1984년 북한은 83년에 버마아웅산 테러 그래서 우리나라 수해입었을때 개일성이가 지은죄 많아서 쌀보낸것 아닌가 라고도 생각도 해봅니다ㅎㅎㅎ
이미 나라살림 안좋아지던 때에 우리 약오르라고 질러본 말을 진짜 받았으니 ㅋㅋ
서울 일대 풍납동 성내동 기억나네요
북한쌀 나중 배급 받은거 질이 형편없어 밥보다 아마 떡을 해먹었던
유신벼와 맞장 // 나도 떡해라고 했음 ㅋㅋ
2사단 지속 산악행군 양구에서 낮.밤으로48시간 걸어서 오대산에 도착해서 텐트치고 숙영하는데 이때 비가 엄청 쏟았지는데 정말 비 때문에 죽일뻔 했어요 아침식사 추진 나간 병력들이 아침식사 메고 저녁때 도착해었죠 계곡물이 불어서 산정상까지 올라가서 우회에서 계곡따라 내려오면서 숙영지까지 오는데 12시간 소요
비슷한 시기에 군생활 같이 하셨네요.
저희 부대(31연대 3대대)도 야외종합훈련으로 그 해 7월 한 달간 오대산에서 숙영했었습니다.
그 훈련 후, 31연대 4대대(2사단 신병 교육대대)에서 하사관후보생으로 교육 중이었는데(교육중 퇴교하여 남들보다 일찍 병장 달고 다음해 7월 병장 제대), 그 때 큰 비로 부대 근처 도랑이 한순간 무너져 쓸려 내려간 것을 보았습니다.
교육중이라 그 때 비가 그렇게 많이 내려 큰 위협이 되었는지 몰랐네요.
저는 양구살고 있어요. 양구서 군대생활했어요.
내가 인제에서 군생활 군생활 할때
첫휴가 나올때인데 비가 억수로 내리던 기역이 나네
지금은 춘천사람이지만 84년에 서울 서대문 한샘학원에서 재수할때 장마로 서대문일대가 물난리나서 갈현동에서 아현동으로 돌아서 버스타고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서울도 장난 아니었던 기억이 나네...
아주 어렸지만... 저당시... 비때문에 오도가도 못하고
엄마 치마자락 잡았던 기억이 나고 거리에...
스티로폼, 고무통을 보트 배처럼 이동수단으로 지나가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생각납니다
우리나라가 수해로 피해를 크게 입자, 북한이 우리가 의향이 있다면 식량과 보급품을 지원해 줄수 있다고 말을 했는데, 훗날 그건 그냥 하는 말이었고, 우리정부가 당연히 거절을 할꺼라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감사하다고 받겠다고 하니 부랴부랴 전국에서 쌀을 수급해서 보냈는데, 그쌀의 질이 좋지가 않아서 사람이 먹기에도 미달되어 가축사료등으로 썼다고 하더군요
우리나라쌀이 햇쌀부터 2년, 3년차쌀까지는 먹고 이후부터는 정부미라고 해서 군인들이 먹고 나면 나머지 몇년차부터는 가축사료나 과자등의 재료료 쓰이거든요
그때 부모님 잠실에 사셨는데 북한이 준 쌀로 방앗간에서 떡 만들어 먹었다고 하네요 ㅋㅋ
내가12살때네요 나이먹어서 가니 물은없고 80년대처럼 보기가힘드네요
당시 서산에도 비 많이 왔네요. 초등학교때 하늘에서 폭포수가 쏫아지니까 오전 수업중에 집가라고해, 동내 형동생들하고 비맞으며 즐겁게 집에 갔던 추억이...
학교 도착하자 마자 가라해서 갔는데 오던길이 순식간에 잠겼네요. 논뚝길로 돌아서 엄청 비 맞고 갔지요.
기억에 남는게 티브화면에 소야가 다모저대 본기억
받침자가 전부 물에 잠긴거 기억 납니다
소양강댐은 1984년 호우 1990년 호우때 계획홍수위 198미터 까지 근접한 197미터까지 올라 갔습니다. 소양댐이 만수위에 근접한 시기가 1984년 1990년 딱 두번 밖에 없지만 사력댐이라
월류 했다면 강원 경기 서울 인천도 피해가 갔을겁니다. 현재 보조 여수로가 있지만 초 극한 강우가 들이닥치면 이것도 무용지물 일지도 모릅니다. 충주댐도 1990년 2006년에 만수위에 근접한 일이 있었습니다.
1990 9 11 대홍수
2006 7 8 영서지방 폭우
2011 7 27 수도권 폭우
우리집은 두번다 수해를 이때 입었네요...그래서 삽질에 달인이 되어 군대가서 두번 휴가 받았네요.
중1때였는데. 이때 북한에서 구호 물자 보내줬었다.
진짜 비가 많이 왔던 기억.
1979년 1학년때도 비가 엄청 왔서 운동장에 물이 무릎까지 찼었던...
그리고 1994년 엄청 더웠던 기억.
1970년대 공지천에는 400미터 링크가 두개 설치되어 하나는 시함용, 하나는 연습용... 전국빙상대회가 매년 열림... 당시 리라국, 춘천교대부국이 거의 일등..
저때 우리과선배가 소양댐에서 떠내려온 1미터넘는 잉어를 건져서 고아가지고 우리과 몇십명이 먹었다는데...
ㅗㅜㅑ
내가 태어난 해에 저런 일이 있었구나, .
ㅋㅋㅋㅋㅋ
행님 저는 86년생임다ㅎ
와..저도ㅋㅋ엄마가 너 낳을때 그렇게 무서운 날씨 처음이었다고 하시더니.. 진짜네요....?
저때 북한이 구호품 보낸준다고 헛소리 해봤는데.. 정부가 그걸 받아버리내.. 북한 식겁하고 어떻게든 맞춰서 보냄.. 그 이후로 구호품 절대 말 안꺼냄...
당시에 한번궁금해서 부모님이 받아봤는데요 품질이 영아니더랍니다
중학교때네요 경성중학교 다녔는데
마포구 망원동 유수지 터져서 학교로 전부 피난와서 학교 몇 일 쉬었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 다시 가게 되니 망원동 살던 친구들이 북한쌀이라고 도시락을 싸왔는데 밥이 누랬던 기억도 있고 ㅎㅎ
저 당시 강원대 2학년, 아 옛날이여
불과 몇십년 전에 저렇게 힘을모아 재난을 이겨냈는데 지금은 세대, 남여로 싸우고 있으니
저때 우리집은 마당이 발목정도 잠기는 정도라 북한지원은 TV로만 봄.
저때 내가 입은 가장 큰 피해는 등교길에 무릎까지 차는 거친 물살을 조심조심 건너다 대충 꺽어신었던 샌들 한짝이 벗겨져 떠내려 간 것.... 😢
84년 강원도 인제에서 군대생활 했는데 수해때문에
김치도 못 먹고 양배추 김치 먹어서 지금도 양배추는 싫어함
천도리 근무할땐데 삼시세끼 비축된 미역으로 미역국만
영내 도랑을 못건널 정도로
제가 그때 서화에 살았지요.6학년이었지요,삽질만 엄청...ㅠ ㅠ
소양강댐 터지기 직전에 수문 다 열어서 방류하는거 보니... 살벌하네요.
정말 소양강댐 이 없었으면 ~~ 박정희 대통령 미래를 보고 소양강댐을 건설 하셨지 ㆍ춘천댐의암댐청평댐ㆍ팔당댐 ㆍ이댐들 때문에 서울사람들 물걱정 없이 평온하게 살수있지ㆍ없었다면 ㆍ수도권사람들 해마다 물난리ㆍ식수문제 ㆍ정말 끔찍한 상상ㆍ박정희대통령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ㆍ특히서울사람들 ㆍ 고층아파트에서 수돗물이 잘안나온다? 특히 화장실은 어떻게 할뻔 ㅎㅎ
소양줌학교 다닐때네 소가 떠내려가구 양어장 터지구 난리도 아니였는데
1981년 9월1일 토요일 아침에 이장님이 마을 방송으로 소양강댐이 위험하다고 젊은 청년들의 참세을 권해서 홍천터미널에 가서 대한통운 트럭타고 소양강댐 밑에 가니 경찰, 군인, 공무원, 예비군 등등이 도착해 있었음.
댐이 사력댐이라 물이 넘치면 댐이 붕괴된다하여 작은 마대를 댐위에 쌓기로 결정했는데 물이 너무 가끼이 올라와서 다들 너무 쫄아서.., 결국 군인이 제일 안쪽에 그다음이 경찰, 공무원순으로 서고 나는 예비군과 같이 마대에 모레 넣는 임무를 수행함.
저녁에 참가증 받고 귀가함. (참가증으로 다음년도 예비군훈련 면제 받음)
참고로 수해끝나고 북한에서 쌀, 시멘트, 옷감을 밭았는데 쌀은 밥을하니 너무 맛이 없어서 떡을 해서 나눠 먹고 옷감은 너무 허접해서 걸레로, 시멘트는 마을 공동으로 사용했던 기억이~~
수확 앞둔 벼 버리는 일은 작년에도 있었죠
요즘 집중호우 오면 엘리뇨 어쩌구?? 라니뇨 어쩌구 지구온난화 어쩌구 ㅋㅋ ㅋㅋㅋ40년전에 비가 더많이 왔네 ㅋㅋㅋ
고등학교때 인대 바다가 해안 초소가 횟집으로 위장 하기도 했었죠.
그때 우리집 잠김 학교안가서 좋아라 했는데추억새록
기후변화??? 아무것도 아니다.. 물폭탄 냉기폭탄 수십년전에 몇번씩이나 겪어왔다..수백년 수천년간 겪어오던거다..저 84년에 비가 얼마나 왔는지 지금 애들 젊은이들은 상상도 못한다.
신북 ㅋㅋ 군생활 했던곳이라 반갑네
그때 원통에서 군생활 할때인데
생전에 그렇게 많은 비가 온건 처음였슴 도로가
끊기고 영내 아람들이 나무들이 다 쓸려가고 부식공급이 안돼 미역국으로 삼시세끼 때우고
수해복구 체력이 고갈됨....
어릴때 생각 소양강댐 물이 차가지고 우두강 물이 넘쳐 흘러 넘치던 일
1969년 강원도 춘천국민학교1학년2학기에 전학왔었는대,
담임여선생이 한살어린 본인 아들을 같은반에 불법으로 다니게 하면서 수업을하고,
아들놈은 엄마가 담임선생이라 학생들한테 폭력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담임여선생 역씨 폭력을 무자비하게 자행하던 악덕선생이였습니다...
학교에서 소풍을 가면, 그당시 다 어렵게 생활할때인대, 반장을 시켜서
애들이 싸온 과일, 과자같은것을 교묘하게 빼았아서 큰 시장바구니에 챙겨서 들고,
소풍끝나고 갈때 무거우니까 남학생들이 나눠가면서 들고 갔었다...
저도 사과를 아껴서 집에가서 먹으려다가 빼았긴게 기억납니다..
아들놈은 다음해(1970년) 다시 1학년 입학해서 다니는걸 확인했고,,
나는 다른학교로 전학했다,,어릴때 일이지만 너무 또렷이 기억나서
그 이후로 강원도, 초등학교선생들에 대해 아주 안좋은 기억이 떠나지 않는다~~~
그여생년은 지금은 나이도 많고 죄 받아서 돌아가셨을것으로 생각됩니다.
""1970년대 강원 두메산골 부부교사 이야기""
이걸보나 상반된 삶이지만 ,,지나간 악몽이 떠오릅니다...
우리집은 가마솥하고이불만챙겨서 경운기타고 공원묘지가서 이틀자고내려왔는데 ㅋㅋ
ㄷㄷㄷㄷ 강제담력단련
그당시 캠핑?
저때 묵동 살았는데 제방 무너질까봐 밤새 지켜보고 소양강댐 넘치면 아래 청평댐 무너진다고난리도 아녔음.그리고 북한이 그냥 해본 소린대 정부가 받는다고 하니까 북한이 구하느라 고생 했단 소리가 있었는데 ㅋ
저 입쌀을 묵고 부모님한테 투정 부린 생각이 나네.. ㅎㅎ 밥맛이 이상해~~! 엄마.. ㅋㅋ
1984 원더우먼 이랑 같은년도 네요!
마을 방죽이 터지고오 했지이.
그당시는 인구도 많아는데,
시골에에도!😊
북한이 지원했네....이때는😀😀😀
우리나라가 5배 더잘살았는데 군출신 전두환 대통령이 워낙 잘하니깐 김일성이가 전두환 한테 잘보일려고 집중호우 났을때 우리나라에 화해의 손좀 내밀었던것 같네요 수해는 1984이고 아웅산 테러는 1983년 사건 저지른 개일성
아무리 4대강 사업을 했어도 전세계 기후변화 때문에 안심할순 없습니다.
하루에 내리는 비의 양을 상향시켜 그것을 처리할수 있는 방재시설을 확보해야합니다 지역 중간 중간에 유수지 건설은 필수로 설치하여 평상시에는 밭으로 쓰면 됩니다.
물론 수해 방지용 이기 때문에 일년 농사를 망칠수 있기에 3~4개월에 수확이 가능한 작물로 경작하면 됩니다
저도 수해를 격어 보니 물이 무섭네요,,,4대강 잘한건데 ...격어 봐야 안다고요...흙물이 다리도 삼키며 순식간에 사라지는걸...
영상에 보면 예비군들이 전부 특수부대 옷을 입고있는데 그건 왜그런건가요?? 궁금하네요.
수원 10비에서 쫄따구 군생활 할 때네
탄약고 무너져 사역 많이 나갔네
중3때 ㅎ
저때 강변역 근처에 살았는데 당시 우리집은 멀쩡하고 강건너 성내역 근처 아파트는 1층 다 잠김. 문제는 빗물펌프장, 없느니만 못하다 홍수에는. 저 때 강변역 둔치에서 구경하는데 오만가지 다 떠내려옴
저때 북한에서 보내준쌀이 냄새나고 그래서 안먹었던 기억이 있는데
소양강 댐이 세제와 세탁기와 무슨 상관?
장마철에는 동네즘겨서 학교못오는 친구들도있었는데 이제는 벌써 우리학교 사라질지 모르는 공포가 바로옆으로 왔네요.
저는 그때 ,,,그물에 잠겨서 삽질한 학교는 패교로 팬션으로 운영되고 동창회를 거기서 하네요.
그당시 모래주머니 수천개를 준비하여 댐위에다 더 쌓아 올리려고 준비태서를 갖추고 비상대기를 하고있었다
일병시절 휴가나와서 고생만하다갔슴
어릴때 국민학교때 수재민 돕기 500원 평화의 땜 건설 500원 이재민 돕기 700원 불우이웃돕기 300원 운동부돕기 400원 등등학교에서 애들 코 묻은돈 엄청 걷어갔지..ㅎㅎ
추울땐 제일춥고
더울땐 제일더운
비는 또 좀 내리나 억수로내리고
눈도 미친듯이 내리는 춘천
당시 근무했던 회사 사내식당에 북한쌀로 지은 밥이 나왔는데, 밥 맛이 엄청 좋았음. 왜냐면 이전에는 정부미로 지은 밥을 배식했는데 먹어본 사람들은 알 것임. 냄새나고 펄펄 날라다니는 밥알들.. ㅎㅎㅎ 즉, 3년 저장된 쌀로 지은 밥보다는 북한쌀로 지은 밥이 맛이 있었다라는 것임. 북쌀에 대한 또하나의 기억은 쌀알들이 푸른기가 남았있었다는 것. 아마 일찍 수확해서 그런것 같음.
수령님의 은덕을 입은 사람이 여기 있었네. 그 당시 남한에 보낸쌀들이 오래된 치장 군량미라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몇년 묵은 쌀을 받아서 밥을 지으면 맛없다고 떡해먹으면서 흉봤는 데 댁은 맛있는 수령님의 잇밥을 얻어 먹었다고 거짓말하고 계시네. 하기야 자발적 간첩도 수만명이라니 탓해봐야 뭐하겠나
저때는 어려워도 보기 좋았는데 살만하니깐 마약에 칼부림에 안탑깝다...
북한에서 지원해준 쌀로 도시락 싸온 친구들이 있었는데 맛이 없다고 불평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 저는 소양강댐 바로 아랫마을 윗샘밭에 살았는데 수문열때 장관이었습니다.
그 쌀 씻은 어머님들이 고생했음 돌졸라리 많아서 진짜 몇번을 씻었는 고생마니 하셨다고 들었음
우리나라 수해 1984년 북한은 83년에 버마아웅산 테러 그래서 우리나라 수해입었을때 개일성이가 지은죄 많아서 쌀보낸것 아닌가 라고도 생각도 해봅니다ㅎㅎㅎ
도발을 중단하고 평화롭게 왕래하며 지내면 얼마나 좋냐
저 때 내가 중학교 다닐때
지금 생각해도 아찔
지금은 뇐네? ㄷ ㄷ ㄷ
북괴에서 보낸 쌀 먹다가 돌 씹고 이가 부러졌던 사람임 오목교 뚝넘어 무허가촌 신정동 ㅎ
4대강 치수시업 정말 잘한 것임.
물난리 정말 너무 무서움
풍납동 태양금속 앞까지 물이 한강되고
We can draw lessons from the past, but we cannot live in it
소양호 주변산 깎아내고 담수량 5배 더 늘리면 안되냐? 집중호우 때 피해도 피해지만 아까운 수자원 바다로 흘러 보내는게 너무 아까워! 건설 불황일 때 전국 굴삭기, 덤프트럭 모두 동원하면 좋을 듯 하다. 그 산더미 같은 흙 한중접경 수역에 여의도 10배 크기 인공섬 만들면 좋을듯 하다.
담수량을 다섯배로 더 늘리면 현재의 댐이 물리적으로 그 무게를 견딜 수 있을까요?
학창시절에 물리학을 안 배우셨어요?
. 당시 대한민국사람들이 북괴가 저런 물자를 보내는 것을 보고, 북에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나 주라고 했다. 그리고, 쌀은 너무 형편이 없어, 밥을 해 먹을 수가 없었다.
이명박이 4대강 사업한 이후로 수재의연금 060 이런게 TV 에서 보이질 않는다.
난 학교 안 가려고 계속 오길 바랬는데
이제 지구온난화 가속으로 지금과는 비교도안되는 기상재난이 시작됩니다
1984년 이무렵 나는 강제 군복무를 맞치고 복학을해서 날마다 대모를 하였다.
(이당시에는 대모를 하다 잡히면 군대갈건지 ? 교도소 갈건지 쇼당 치던 시절이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그때는 최루탄 때문에 ~눈 주위가 집물러서
나을날이 없었다.
정말 암울하던 시절이다.
63빌딩45층까지 물이찬다?
북한 저 수해물자보내고 거지되서 망함ㅋㅋ
근데 북한이 준 수해물자들 다들 폐기물수준 ㄹㅇㅋㅋ
요때 사기꾼들. 싹쓸이 했어야지
상전벽해...그때를 아십니껴?
우리가 벼룩의 간을 빼먹었네 중진국인데
양구
중2
국어선생님한테 첫사랑 ㅋ
그때 부칸에서 물자 지원 한건가 안받을줄 알았는데 기냥 받아버림
4대강사업이전 매년 반복되던 홍수가. 어느순간 더이상 홍수라는게 없어졌죠.
그순간이 4대강사업 입니다
저 당시 장실운동장 근처 우성아파트, 그리고 풍남동 지금의 아산병원 근처 아파트 3층까지 물이 차오르고 풍납동은 스티로폼이 이동 수단 이었지요.
그때 수해물자 갖고 판문점에 온 북한트럭운전수들, 우리가 준 워커힐 도시락에 전자제품, 의류 받아가며 어리둥절 마지못해 받아가던 모습이 선합니다.
요즘 군대는 절대 못하지
뭔 소양강댐 무너진다고 63빌딩 45층꺼지 물이차 ㅎㅎㅎㅎㅎ 할배가 노망났네 ㅋㅋㅋ
만약 터지면 물이 차올라가는 수준이 아니라 파도로 치고 나간다는 썰이 있음
2010 몇 년에 어떤 다큐프로에서 이 홍수에 대해 다룬 적 있었는데...
63빌딩 45층까지는 ㅎㅎㅎ 모르겠고,
당시의(201??년) 연구 결과로는
사력댐인 소양강댐이 범람으로 인해 붕괴되면, 북한강 수계의 모든 댐과 팔당댐은 모두 작살나고
서울 여의도는 사라지며 한강의 모양이 일부 바뀐다는 결과가 있었죠.
사실 춘천에서 시작된 홍수가 서울데 도달하가까지의 지형을 볼 때, 강 양 옆의 산들이 자연적 제방의 역할을 하여
그 막대한 수량이 다른 곳으로 퍼지지 못하고 거의 그대로 서울에 단시간 내에 그것도 일시에 도착한다니...
소양강댐 터지면 청평댐 터지고 순차적으로 다터질껀대..
저때 북한산 쌀로 밥해먹었는데 맛이 괜찮았어요
와 북한에서 보낼 정도면 ㅆ비 ㅋㅋㅋㅋ
근데 소양호 향어 가두리는 왜 다 없앤거임?? 향어는 없고 블루길만 우글우글...낚시가 안돼..
가두리에 사료뿌리면 고기가 다 못먹고 바닥에 가라앉아서 부패되면 수질오염 된다고 다 없애버린듯
아무튼 가두리 양식장 있을때는 소양호 파로호에서 향어 낚시 재밌었는데
철근빼먹었나?
저때 존나 웃겼지 김일성이가 가오잡을라고 도와주까? 이랬는데 뻐꺼새끼가 진짜로 응 줘 이래버림 ㅋㅋㅋㅋㅋ
그때 북한한테 지원받을만큼 아니었던것 같은데
지원받는거 반대도 많았는데,남북 화합 차원에서 수용했었지요..북 김일성이가 대대적 선전했지만,결과적으로 북한인민들만 더 굶주리게 됬고,저때 이후 남한에서 식량 및 생필품을 북으로 정식으로 보낸 계기가 된 것입니다..저희 집도 쌀을 소량 받았는데,부친은 당장 내다 버려라 하셨고 모친은 쌀은 국적이 없다며 가래떡 만드셨드랬죠.
우리집은 북힌산쌀 시멘트 양복지 를 받았네요 시멘트는 강도가 약하고 양복지는 옷 수공비가 아까울듯 하여 보자기로 썼네요(44인치라서 보자기도 좀그렇지만)
MBC 는 언제 문 닫아요...?
빨리닫아 주세요...
쌴샤땜보다 더큰땜인가 붕괴까지하는거 보면 기술문제...???
당시 아시아 최대 댐이었죠. 산샤가 200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붕괴 안했습니다 ㅎㅎㅎ 워낙 비가 많이와서 급하게 차오르니 댐 터질까봐 걱정했겠죠
샨샤댐이 훨씬 커요 검색하고 오세요^^
소양강댐은 사력댐입니다.
사력댐이 뭔지는 아실테고...
사력댐의 장단점도 아실테니...
홍수로 인한, 즉 범람으로 인한 사력댐의 붕괴를 기술에 문제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좀........
김일성시대엔 그래도낭만이잇엇다 쌀도주고쎄멘도주고 개정은이랑은 인품이다르다 김일성수령님 극락왕생바랍니다
글게 왜 도와준다고 먼저 말하냐
대한민국에서 수해를 없앤 이명박각하 정말 감사합니다
즈랄하네
뭔 개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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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그렇게 사시다
가세요
도라나
쳐 돌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