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에초에 나치 집권 공약중 하나가 라벤스라움, 독일인들의 생활권을 넓히겠다였고 또한 독일의 경제는 이미 씹창이 난 상태에서 점령국 금고 털어서 매꾸는 방식으로 돌아갔기에 전쟁을 멈추면 경제도 붕괴되는 시스템이였음. 더군다나 영국은 단기간내에 점령이 힘들것 같고 가장 중요한 소련의 성장이 점점 더 가시화되었기에 독일로서 소련침공을 어쩌면 예정된 일일지도 몰랐음. 특히 독일이 발칸에 힘 안빼고 독소전을 보다 일찍 시작했으면 진짜로 모스크바가 한번더 불타버렸을수도 있었겠지만 파스타의 개같은 트롤링을 예상하지 못해 개같이 동장군에게 떡실신당해버림.
영상에서는 분량문제로 지상전만 설명하고 있어서 아쉬웠지만 공중전 또한 만만치 않았음. 바르바로사 작전 당일 독일 공군은 미리 정찰해놓은 소련 공군의 비행장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소련 공군기들을 초토화시켰고 단 하루만에 소련 공군은 서부에 배치된 항공기 중 4분의 3 이상인 1100기를 손실함. 다음날 소련측 서부전선 공군 사령관인 이반 코페츠는 이에 대한 책임으로 사형이 선고되었고 코페츠는 자신의 권총으로 목숨을 끊음. 일부 비행장은 공격에서 살아남았고 공습을 받는 와중에도 소련 전투기가 이륙해 폭격기를 격추했지만 이후 들이닥친 경험많은 독일 전투기 조종사들을 감당할 순 없었음. 이후 제공권을 장악한 독일 공군는 끊임없는 폭격으로 지상군을 지원했고 그걸로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의 신화를 쓸 수 있었음. 제공권의 중요성과 장악하면 생기는 일은 지식해적단의 이전 영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니 참고하고 - ua-cam.com/video/ltqpDC2XQbo/v-deo.html 하지만 여기서도 '괴링'해버리는 루프트바페의 삽질 또한 있었는데 바로 모스크바 폭격임. 적국의 수도가 폭격 범위에 들어간다면 수도에 있는 철도와 공장을 폭격하는 것이 상도덕. 루프트바페 총사령관인 헤르만 괴링은 바르바로사 이후 1달 뒤인 7월 22일부터 모스크바 폭격을 진행함. 괴링은 전쟁 시작부터 소련 공군이 궤멸했고 소련 지상군을 공습하는 도중 대공포가 제대로 루프트바페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것을 봤을 때 모스크바 폭격 쌉가능이라는 행복회로를 돌림 그렇게 모스크바로 공습을 하러 가는 조종사들은 이런 말을 듣고 출격했는데 "제군들은 영국도 공습해봤다. 이번에는 훨씬 쉬울 것이다. 러시아에 대공포가 있기야 하겠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탐조등도, 방공기구도, 야간 요격기도 없다." 이런 괴링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모스크바에는 중기관총부터 기관포, 근처에서 폭발해도 파편으로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85mm 대공포까지 수천개가 배치되어 있었음. 탐조등은 도시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모스크바에 들이닥치는 폭격이 오기 전까지는 탐조등을 포함한 모든 건물이 소등상태여서 야간에는 목표물을 찾기도 힘들었음. 방공기구는 강철케이블로 연결된 풍선인데 케이블이든 기구 본체든 부딪히면 안 되니 독일군 폭격기는 방공기구 군집보다 높은 고도에서 폭격을 해야했고, 방공기구 혼자서는 2~2.5km, 방공기구 위에 또 방공기구를 달면 런던보다 높은 4km 상공까지 기구가 올라가 폭격의 명중률 더 떨어뜨리는 장애물이 되었음. 야간 폭격에서 탐조등에 걸린 폭격기는 집중포화를 받았고 전쟁 시작부터 궤멸당한 것으로 생각되던 소련 공군이 야간 요격기를 데려와 폭격기를 격추하기도 했음. 한마디로 괴링의 생각은 하나부터 열까지 맞질 않았고 100번이 넘는 폭격 결과는 폭격기들의 손실만 부각되었음. 전기 중 가장 규모가 컸던 모스크바 폭격은 41년 10월 29일에 있었던 폭격이었는데 이때 루프트바페 폭격기 300대가 발진해 47대가 격추당했음. 하지만 이 모든 소련의 노력과 괴링의 삽질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는 수천발의 폭탄을 얻어맞아 크렘린 궁,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볼쇼이 극장, 여러 철도역 등 건물이 손상되는 피해를 입었음. 추가로 독일군의 지상군 돌파 전술을 알아보자면 3:03 영상의 분량상 생략됐지만 독일군의 전차를 주축으로 한 포위하기 위해 방어선을 돌파하는 작전에는 독일군 전차 교리와 소련군의 방어 교리의 영향도 있었음. 독일군은 폴란드 침공과 '6주'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해 전차를 이용한 돌파 전술로 전차 소대(전차 5대)끼리 V자 대형을 이뤄 (독일군) 〈 ㅣ(소련군 방어선) 이런식으로 V자 대형의 양쪽 끝이 적을 향하는 모양으로 진격하는데 이 진형을 활용해 폭이 수백미터 밖에 안 되는 공간에 전차 수십대를 밀어넣을 수 있었음. 반면 소련군의 사단 교리에서는 전차를 상대하는 대전차포를 전선에 균등하게 배치하는 것이었음. 이러한 교리는 넓은 공간에 전차가 들이닥치면 어느곳이든 대전차포가 있었으니 효과적이었지만, 좁은 전선에 집중된 전차 공격에는 취약했음. 즉, 독일군 전차 수십대가 1km도 안 되는 폭에 들이닥치는데 소련군은 대전차포 몇 대만으로 막아야하는 흡사 7인 입구막기를 연상케하는 모습을 보임. 당시 독일군의 전차 중 적지않은 양이 구식 1호, 2호 전차였고 더 발전한 3호, 4호 전차들도 측면이 소련군 보병이 쏘는 대전차소총에게 관통당할 수 있었지만, 소련군의 사단 교리처럼 대전차 무기가 집중되지 않고 분산되어 있었기에 아무리 잘해도 독일군 전차 몇 대만 무력화 시킬 수 있었고 그대로 돌파당한 것이었음. 하지만 이것도 전쟁 초반 한정이고 독소전 중반이 되는 1943년에는 소련군이 수백미터마다 대전차소총과 대전차포 수십대가 밀집된 대전차 거점을 수백미터마다 건설함. 밀집해있는 대전차 거점 전술은 효과적이었음. 거점 사이를 돌파하려고 하면 전차의 측면이 노출되고, 정면으로 돌파해도 옆쪽 거점에게 측면을 내줄 수 밖에 없는 구조니 말임. 또 여기서 대전차 거점 전술만이 아닌 서너대의 대전차포끼리 연계하면서 일부러 뒤쪽에 있는 대전차포가 사격을 시작해 어그로를 끌고, 전차가 대전차포에 접근하면 측면에 위장해놓은 대전차포가 독일군 전차의 측면을 사격하는 전술을 쓰기도 했음. 아무튼 요약하자면 1. 영상 분량의 현실상 생략한 게 많았지만 공중전도 독소전에서 활발히 일어난 만큼 이를 빼놓고 설명이 진행된 것이 아쉬웠다. 2. 양군의 전술 또한 영상 분량의 한계로 등장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러한 전술 차이로 인해 독일의 전격전이 완성되어 방어선을 돌파했었고, 소련군이 이를 대처하기 위해 전술을 발전시키고 했다. 3. 괴링은 레전드다. 이렇게 요약이 가능할 듯?
................. 잘 모르시고 댓글단거 같은데 답글도 그렇고 ㅋㅋㅋㅋㅋㅋㅋㅋ 애초에 소련이 독일에 전쟁 초반에 그냥 처발린게 스탈린이 본인 정치적 입지 확고하게 다진다고 군부 숙청해서 장교가 없어서 군대가 개판오분전이라 개처발린거임 솔까 전세계에서 국토면적 가장 넓은 소련이라 버틴거지 에지간한 니라였으면 저 병신 삽질 하나로 이미 전쟁에서 졌을만한 큰 실책임 거기에 당시 소련군 최고 책임자는 스탈린이랑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군사 군짜도 모르는 놈을 임명해서 연전연패당함 그때문에 이미 전쟁 초기에 소련군은 천만명이 초반에 죽었음 그때문에 모스코바까지 밀리는 최악의 상황이 되서야 전권을 위임한거임 스탈린이 행정측면이나 효율측면에서 히틀러보다 우위에 있어서 이긴게 아님 당시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은 무려 600만명이였지만 당시 소련군은 2천만명 넘게 사상자가 발생했음 ㅋㅋㅋㅋㅋ 그 대부분이 전쟁 초창기에 사상자가 발생한것만 봐도 얼마나 스탈린이 병신 삽질했는지 알수 있지 그이후에 그 유명한 소련군 사단 20개를 전멸시켰는데 다시 20개가 생기는 즉 독일과 소련의 국토및 인구숫자의 체급차이로 전쟁에서 승리한것이고 당시 미국및 연합군이 소련에 물자를 미친듯이 보급해줘서 이긴거임 그렇게 초반에 개처발리고 이길수 있는 나라는 소련이라서 그런거지 절때 스탈린이 행정 효율적으로 히틀러보다 유능해서 전쟁에서 이긴게 아님 ㅋㅋㅋ 오히려 스탈린의 군부 숙청및 친구를 군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한 삽질덕에 독일과 비교할수도 없는 영토와 인구 인프라가지고도 질뻔했떤게 팩트임 ㅋ 막말로 히틀러는 600만명이 처발리고나서 다음이 없었지만 스탈린은 초반에 천만명이 죽도고 다시 군대로 동원할 천만명이 더 있었다 이차이지 ~ 그 유명한 히틀러 동부군 망상이 여기서 나온거임 독일은 소련침공한 600만명이 몰살하고 나서 그런 규모의 군대를 동원할 여력이 없었기에 소년병까지 동원해야 했음
@@green_._tea 알고보면 사실상 최악의 시나리오가 독일이 소련침공했을때 소련은 독일군이 모스코바 코압까지 진군하자 시베리아군을 빼서 전장에 투입했고 산업기지도 죄다 동쪽으로 옴겼음 그래서 소련 동쪽은 군대가 없고 산업시설이 밀집해 있는 무주공산이였고 전쟁학자들이 만약 일본이 미국을 안치고 소련의 동쪽 공업시설 무력화시키고 석유를 확보했으면 아마 소련은 무너졌을꺼라고 합니다. 그리고 2차대전의 판도도 바뀌었겠죠. 독일과 일본이 소련을 양분하고 소련의 천연자원을 확보하면 전쟁이 독 일 이 3국에게 유리하게 흘러갔을꺼임 다만 일본은 그러한 판단을 하지못하였고 미국이 수출을 금지하자 석유확보를 위해 동남아 침공을 준비하면서 미국이 참전못하게 진주만 기습공격을 감행한게 재앙이 되었음
@@EeeeGggg-w8t 동아시아는 단일민족이라 개념이 없는데...다른나라들은 소수민족도 많고 종교문화 언어 다른경우가 많아서 같은 민족인데 다른 나라 (쿠르드족, 파슈튼족)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인데 언어 종교가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크림반도도 타타르족이 지배하던 크림공화국 소련이 먹은거죠. 우크라이나 사람 굶겨죽인건 맞아요. 그곡물 수출했고 그돈으로 우크라이나 산업화 한겁니다. 최준영 박사의 지구본 연구소 확인해보세요. 곡물 빼앗은거 상당수 수출했어요. 다들 우크라이나가 단일민족이라고 착각하나본데... 3차례 러시아영토를 우크라이나에 병합해서 지금의 우크라이나 영토가 된거고 그안에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살고있어서 우크라이나가 민족주의 주장하면 돈바스 지역 분리독립도 인정해줘야 합니다. 러우전쟁 시작이 돈바스 내전입니다.
키예프 공방전 및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코멘트를 남겨봅니다. 일단 중부집단군이 쭉 밀었다면 역으로 포위당할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당시 중부집단군도 스몰렌스크에서 옐냐 교두보 반격전투로 진격이 막혔고, 남쪽에서는 남부집단군이 소련 키예프 특별 군관구의 저항에 막혀서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키예프군관구에는 이미 50만의 병력이 남부집단군을 상대로 선전하고 있었고, 지속적으로 지원군이 오던 상황이였습니다. 중부집단군이 남하하여 키예프를 포위했을 때에는 이미 전력보강이 되어 66만이라는 엄청난 병력이 키예프에 집결해 있었죠. 당시 소련군의 전체 전력이 500만에 아우르는데, 전체 전력의 8분의1을 키예프에 집중시킨 겁니다. 중부집단군이 계속 진격했다가 남부집단군이 키예프 군관구에게 패하고 이들이 북상하여 중부집단군의 측면을 급습한다면? 상상하기도 싫겠죠. 그대로 측면이 무너지고 포위망에 갇혀 궤멸당하는 겁니다. 게오르기 주코프도 41년에 구데리안이 계속 진격하였다면 상황은 더 악화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애초에 히틀러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기에 구데리안에게 키예프부터 먼저 뿌리를 뽑으라고 명령을 한거죠. 거기에 키예프를 장악함으로서 경제적,자원적 이점을 획득함과 동시에 포위의 위험성까지 없애면서 전선을 안정화 시킬 수 있는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였습니다. 다만 전선의 안정화와 자원적 이점을 택하는 대가로 전선의 고착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틀렸고, 구데리안이 맞았다라는 판단은 굉장히 섣부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키예프 전선의 문제는 누가 옳고 그르냐를 떠나서 당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부터 생긴 딜레마를 상징하는 것이죠. 히틀러의 소련 침공이 나치독일의 패망을 불러왔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죠. 또한 스탈린그라드에 대해서도 의견을 제시하겠습니다. 스탈린그라드는 그저 "스탈린"이라는 이름이 붙어서 중요한 도시가 아닙니다. 돈바스의 공업지대를 모두 날려먹은 상황에서 소련 남부에 그나마 남아있었던 공업 대도시가 스탈린그라드였고, 소련 남부의 자원을 모스크바로 보급해주는 매우 중요한 통로였죠. 전략적 가치가 매우 떨어지는 도시가 전혀 아니였습니다. 더 나아가 청색 작전의 궁극적인 목표는 캅카스 지방의 유전지대를 장악하는 겁니다. 항상 독일의 발목을 잡았던 "유전"이라는 문제를 단박에 해결 할 수 있고, 자신들이 겪어온 유전문제를 소련에게 떠넘기면 이길 수 있다라는 판단이 있었던 것이죠. 결국 캅카스로 진격할 A집단군의 후방을 방어해줘야 했고 그에따라 군대가 주둔할 도시가 필요했죠. 그 최적의 도시가 바로 스탈린그라드였습니다. 하필 측면 수비병력을 루마니아 및 이탈리아 군대로 메꿔서 문제였죠. 이 시기에는 히틀러가 "상징성" 하나만 보고 결정할 정도로 그렇게 바보는 아닙니다.
바르바로사 작전 수립의 심리적인 요인 일단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일인 1941년 6월 22일 이전까지의 독일군의 상황은, 타임라인으로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았습니다. 1939년 8월 25일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나눠먹기로 합의한 비밀 조약) 체결. 1939년 9월 1일 독일, 폴란드 침공. 1939년 9월 3일 영국/프랑스, 독일에 선전포고. 1939년 9월 17일 소련, 폴란드 침공. 1939년 9월 27일 독일, 바르샤바 함락. 이튿날 폴란드 전역 종결. 1940년 5월 13일 독일 A집단군, 스당 돌파. 일 주일 후 A집단군 도버 해협 도달. 황색 작전 성공. 1940년 5월 28일 벨기에 항복. 1940년 6월 22일 프랑스 항복. 서부 전선의 타임라인은 이 정도였습니다. 한 달 후 상당한 규모의 항공전이 개시되지만(이게 바로 그 배틀 오브 브리튼입니다), 독일은 작전 취소일인 10월 31일까지 무려 2천 대에 가까운 항공기를 잃고 영국 침략을 단념해야 했습니다. 타임라인에서는 빼 놓았지만 육-해군의 입체적인 작전이라 할 만했던 베저뤼붕 작전(Operation Weserübung, 덴마크와 노르웨이 점령작전) 과정에서 해군이 엄청난 타격을 입는 바람에 영국 본토로 쳐들어갈 심산이었던 바다사자 작전까지 취소되고 말았죠. 영국도 1,663대의 항공기를 잃는 등 피해가 막심했습니다만. 하여간 영국이 저렇게 뻣뻣하게 버티고 있으니, 히틀러 입장으로서도 상당히 답답하기는 했을 겁니다. 체스로 치면 룩이니 나이트니 하는 상대의 핵심 기물을 잘 잡아놓고 체크메이트를 두는 게 아닌 스테일메이트(비김수를 말합니다)를 당하게 생겼으니, 히틀러 본인의 심기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겠죠. 그리고 이 영국의 기를 죽이기 위해 선택된 것이 엉뚱하게도 소련이라는 겁니다. 황당한 소리죠. 거 왜 예전에 굽시니스트가 연재했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의 그 장면 기억하십니까? 도조 히데키가 작전 입안하는 장면 말입니다. 그 작전의 골자가 이렇습니다.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내가 귀싸대기를 존나 맛깔나게 후리면 감동먹어서 나랑 협상하겠지." 거의 이것과 다름없는 개소리로 들릴 지경이죠. 근데 그게 사실이었다는 거죠. 제 뇌내망상이 아니라,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p. 223에서 제프리 메가기가 영국을 단념시키기 위한 목표로 독일군이 선택한 것이 소련이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엉뚱하게도 바로 소련 그 자신인데, 겨울전쟁(소련-핀란드 전쟁)과 그 이후에 소련이 보여준 일련의 움직임들이 독일의 심기를 더욱 자극했기 때문이죠. 1940년 6월에, 소련은 순서대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점령합니다. 발트 3국이 소련의 손아귀에 넘어간 것은 이 때의 일이죠. 물론 점령지 주민들의 의사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짓이었고, 이 때문에 훗날 독소전이 벌어질 때 독일군을 해방자로 환영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공개되었던 카틴 학살(폴란드의 지식층 및 장교 등을 체포하여 카틴 숲에서 살인한 것으로, NKVD의 짓입니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이 NKVD에 의해 처형 또는 체포,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 수감 등을 당하게 되었죠. 강제 수용소로 이송된 인원만 그 작은 나라에서 무려 12만 7천 명으로 추산된다 하니(《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p. 91) 알 만하죠. 여하간 소련은 이렇게 대놓고 영토 확장 및 발트 해로 진출할 의사를 보였습니다. 게다가 독일은 심정적으로는 핀란드와 상당히 가까운 축이었고(안타깝게도 제가 읽은 책 중에는 왜 그런지에 대해 속시원히 설명해준 자료는 없습니다만, 태생부터 물과 기름이나 진배없는 전체주의와 사회주의간의 이념 갈등이 핵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따라서 이래저래 독일은 소련의 확장이 찜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욱 독일의 심기를 자극한 것이 엉뚱하게도 루마니아와 관련된 일인데, 발트 3국을 점령한지 불과 한 달 가량이 지나 소련은 루마니아에게 베사라비아(오늘날의 몰도바) 및 부코비나 지방(現 우크라이나의 체르니우치 주, Chernivtsi, Чернівецька область)의 할양을 요구한 것이죠. 루마니아가 아무리 군사적으로 중간은 가는 나라기로소니 소련의 그 거대함에 비할 바는 못 되었고, 때문에 얄짤없이 소련에게 영토를 할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이게 루마니아가 추축국에 적극 가담하는 한 원인이 됩니다). 헌데, 이게 왜 문제가 되었냐면, 루마니아는 플로에슈티 유전에서 나오는 다량의 기름을 독일에게 제공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죠. 쉽게 말해서, 소련이 루마니아에게 계속해서 압력을 가하면 독일의 기름줄이 끊길까봐 전전긍긍했던 겁니다. 길게 이야기했지만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소련의 팽창주의적인 정책이 히틀러의 심기를 제대로 거스른 겁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하자면, 장교단의 분위기였습니다. 1940년 7월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독일에게 "가장 빛나는 때"가 되었고, 서부 전역에서의 대성공으로 인해 '우리가 군사적으로 뭘 하려고 하면 막을 사람이 없다'는 자신감과 낙관주의가 독일 장교단 전체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겨울전쟁에서의 소련의 삽질을 보았으니, 소련군이 툭 치면 넘어갈 거라고 믿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죠. 서부 전선에 비하면 거의 '도상연습'이나 진배없는 수준의 전쟁이 될 것이라고 다들 예상하고 있었습니다(《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 제프리 메가기, p. 226). 아주 간단하게 한 줄로 줄이면, 간땡이가 제대로 부은 거죠. 아이러니컬하게도, 독일군에게 있어 대선배나 다름없는 클라우제비츠는 일찍이 이렇게 경고한 바 있었습니다. "막연한 느낌이나 불확실한 상상만으로 공격과 기동만이 전쟁의 모든 것이며, 머리 위로 긴 칼을 휘두르며 전방으로 돌진하는 기병의 모습을 전쟁 양상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중대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 출처 《전격전의 전설》, 칼 하인츠 프리저, p. 552 작전 수립 과정 - 왜 그들은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설정했나 제가 그간 접했던 2차 세계대전 관련 책에서 모두 간과하고 있는 것은, 대체 왜 독일이 굳이 세 개의 집단군으로 나누어서 불가능해 보일 정도의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냐는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드리죠. 서부 전선에서 독일은 군대를 세 개의 집단군(A, B, C)로 나눴습니다. A집단군은 스당을 돌파하여 적의 후방을 점령, 포위하는 "망치"의 역할을 맡았고, B집단군은 적을 벨기에로 유인하는 "모루"의 역할을 맡았으며(더 많은 적을 끌어들이기 위해 공수사단까지 동원될 정도였습니다), C집단군은 마지노 전선의 적군에게 허세를 부림으로써 적의 발을 묶어 취약한 A집단군의 측면을 간접적으로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게 성공적으로 돌아간 게 그 유명한 지헬슈니트, 폰 만슈타인의 천재적인 역작이죠. 그런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A, B, C집단군의 목표는 작전술적인 차원이고, 전략적인 차원, 다시 말해서 경제와 정치가 관여하는 레벨의, 국가와 국가간의 큰 그림의 범주에 넣기에는 분명히 무리가 있습니다. 헌데, 바르바로사 작전을 입안하면서 각 집단군의 목표는 다음과 같이 정해졌습니다. 엄청 간략하게 줄이면. 북부 집단군 - 레닌그라드를 점령한다 . 중부 집단군 - 모스크바를 점령한다. 남부 집단군 - 하리코프(Kharkov, 소련 제2의 공업도시, 現 우크라이나의 하르키우)를 점령한다. 이건 전략적 목표입니다. 전술적이나 작전술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닌, 명백한 전략적인 문제죠. 기껏 도시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들 도시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레닌그라드는 소련 해군이 발트 해로 나갈 수 있는 기지이자 구 러시아 제국의 수도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고, 모스크바야 말할 필요가 없으며, 하리코프를 위시한 우크라이나는 엄청난 곡창 지대로써 독일이 사용할 식량자원의 근원이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가질 수 있으리라고 독일 수뇌부는 믿었습니다. 대체 왜 이들은 전략적인 목표를 집단군에게 하달한 것이었을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독일군의 소련에 대한 방심과, 적의 주력을 섬멸하면 전략적인 목표는 쉽게 달성된다고 보는 독일군의 교리 때문이었습니다. 전략적인 목표로 보이는 것들은, 실은 적의 주력을 섬멸해버린 후 그에 따라 예상되는 전과 쪽에 가깝습니다. 쉽게 말해서, 적의 주력을 섬멸하고 얻을 수 있으리라 예상되는 게 터무니없이 컸기 때문에 전략적인 목표가 하달된 것으로 보이는 착시효과를 가져온 것이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한 방에 가질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스스로를 판단했기 때문에 별 반대 없이 전쟁에 돌입한 것이구요. 동원된 규모가 압도적이었기에 집단군 하나가 전략적 레벨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었다고 대강 얼버무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런 해석은 실제 프랑스 전역과 바르바로사 작전에 동원된 독일군의 전력(각각 335만 명, 380만 명)을 비교해 볼 때 명백히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독일군은 분명히 서부 전선에서는 기껏해야 작전술적 차원의 목표를 집단군에 하달했지만, 동부 전선 개전시에는 명백히 전략적 차원으로 여겨질 정도의 목표를 각 집단군에 하달했고, 또한 달성이 가능하리라고 믿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명령 자체는, 적 부대의 섬멸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p. 59). 히틀러 본인이 소련군의 기갑 전력을 섬멸하는 것과 모스크바의 점령을 놓고 비교했을 때 "모스크바는 별다른 가치가 없다"고 일축해버릴 정도였죠. 독일군은 최전방의 소련군을 다 섬멸해 버리면 알아서 적이 무너져내릴 것이라고 과신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초장에 적을 일거에 섬멸해 버리면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한 것입니다. 독일군의 교리는 철저하게 적 병력의 물리적 섬멸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적의 부대를 섬멸하면 동원 능력이 부족하고 전선에 구멍이 뚫린 적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설령 그 구멍을 적이 메꿀 능력이 있더라도 거기까지는 한참 시간이 걸릴 테니 그 전에 충분히 전과를 크게 올릴 수 있다는 것이 독일군 교리의 골자입니다. 독일군은 거의 병적이라 여겨질 정도로 적 전투력의 물리적 섬멸을 강조하고 강조하고 또 강조해 왔습니다. 슐리펜 작전이 그랬고, 황색 작전과 지헬슈니트 계획이 그랬으며, 바르바로사 작전 역시 마찬가지였죠. 근데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따릅니다. 일단 섬멸되는 것이 적의 주력이어야 하고, 적이 군대를 재건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설령 가능하더라도 다시 동등한 위치로 일어서기는 힘든 정도의 엄청난 타격을 입어야 합니다. 독일군이 제대로 오판한 것은 후자의 내용이었던 것이죠. 적의 병력이 손쉽게 섬멸 가능하고(여기까지는 작전 초기에는 어느 정도 옳기는 했습니다), 최전방의 적군을 섬멸해 버리면 더 이상 자신들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믿은 것이 바로 화근이었던 것입니다. 일단 상식적으로, 작전의 목표가 달성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작전의 수정이나 중지를 건의하는 게 정상입니다. 그러나 작전 수립 단계에서 이러한 작전계획의 수정, 다시 말해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하르키우로 대표되는 목표 중 어느 하나나 둘로 가용 병력을 집중하기를 수뇌진에서 줄기차게 주장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들은 바가 없습니다. 즉, 명백히 독일의 수뇌진은 소련을 얕보고 있었습니다.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의 p. 237-238에 있는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같이 러시아를 얕보고 있었으니 다른 결론이 나올 수가 없지." 이 말이 갖는 의미는 큰 것입니다. 애초에 러시아 어를 알지도 못하고 소련에 대해 깜깜이 수준이라고 해야 할 판인 사람인데다가 정보 특기도 아니었던 장교에게 소련에 대한 정보 수집을 맡겼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독일군의 수뇌진이 소련을 얕보고 있었는가에 대한 증거라고 저자인 제프리 메가기는 지적합니다. 게다가 이전에 몇 번 언급했던 적이 있던 사실이지만, 독일군은 소련군의 잠재력을 전혀 올바르게 평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 탐욕의 끝, 사상 최대의 전쟁》에서 폴 콜리어를 위시한 9명의 저자들은 독일군의 국경 지대에 대한 적의 규모 예측은 비교적 정확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나(예측 사단 147개 + 여단 33개, 실제 사단 170개, p. 577), 폴 콜리어와 제프리 메가기 공히 후방의 동원력에 대한 예측은 형편없는 수준이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제프리 메가기가 지적한 바에 의하면, 독일 첩보부는 1941년 1월에 동원 가능한 병력을 200만 명으로 보고 있었지만,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그 때 이미 425만 명이었으며, 그나마도 전쟁이 발발한 6월 22일에는 이미 500만 명을 돌파하고 있었습니다(《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 p. 244). 그렇다면 이 모든 책임, 다시 말해서 초반에 바르바로사 작전이 세운 지나치게 큰 계획을, 히틀러의 과도한 욕심(적어도 히틀러는 모스크바 방면으로의 진군과 우크라이나 점령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한꺼번에 모두 이루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혹은 정보부의 잘못된 정보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들을 비난해야 할까요? 회고록을 쓴 수많은 독일군 장성처럼? 안타깝다면 안타깝게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히틀러나 정보사령부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몇 번이고 말씀드립니다만, 독일은 전체적으로 소련을 얕잡아 보고 있었고, 바로 이 점에서 어느 독일군 장성이라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아, 의외로 독일군 장성들이 작전에 회의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건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의 제프리 메가기가 p. 225에서 신랄하게 쏘아붙이듯이, 진실과 절반의 진실, 그리고 새빨간 거짓말이 뒤섞인 잡탕에 불과합니다. 장성들이 가진 불만은 "영국과 전쟁 중인 마당에 굳이 우리를 건드리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소련을 상대로 불필요한 전쟁을 벌여서 군을 소모시킬 필요는 없다"는 쪽에 가까웠지, 그 누구도 실제로 전쟁이 개시되면 소련이 길게 버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도 볼셰비키를 없애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군 인사들은 굳이 소련을 친다는 작전계획에 반대할 어떠한 이유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괜히 작전과는 별 상관도 없는 절멸 계획이 작전 개시 이전부터 하달되었겠습니까. 사실 소련군, 시대를 약간 거슬러 올라가면 제정 러시아군은 삽질을 분명히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탄넨베르크 전투로 대표되는 어마어마한 참사가 벌어졌고, 그렇게 러시아가 깨지고 잠시 관심 밖에 있다가 러시아가 안방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망했기 때문에, (독일의 항복으로 휴지 조각이 되었습니다만) 혁명 정부를 수립한 레닌은 어마어마한 불평등 조약인(대충 폴란드, 벨라루스, 핀란드, 우크라이나 및 캅카스 일대를 포함한 어마어마한 영토에 상당 금액의 배상금까지 모조리 독일에게 넘겨준다는 내용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어야 했죠. 적백내전도 그렇고 폴란드-소련 전쟁도 그렇고 스페인 내전에서의 소련군도 그렇고 겨울전쟁에서의 대삽질도 그렇고 하여간 이래저래 소련군의 전투력에 의문이 많이 가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면모가 소련군의 전부는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죠. 대표적으로 할힌골 전투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전투에서 게오르기 주코프가 등판하여 멋지게 승리함으로써 숙청 대상자의 명단에서 제외된 바 있다는 이야기는 앞 글에서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은 이런 정보는, 즉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작전 진행에 차질이 될 만한 정보는, 모조리 의도적으로 무시해 버렸습니다. 예컨대 "극동의 병력들이 차출되어 동원되면 어쩌지?"에 대한 답은, "그럴 일 따위는 없음"인 식이었죠. 더구나 엄청난 넓이와,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인해 미국이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할 가능성이 있다는 - 미국이 독일과 직접적으로 전쟁하게 된 것은 진주만 이후 일본이 미국과 개전에 들어가면서 독일군이 먼저 미국을 상대로 선전포고한 이후의 일입니다 - 경고를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습니다(《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 p. 246 - 247). 그래서 그런 왜곡적인, 장밋빛 환상에 젖은 작전계획이 수립될 수 있었던 것이죠. 시간이 날 때마다 수학 문제를 푸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해서 "수학 교수"라는 별명이 있었던 할더조차 이럴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하여간 이런 과정을 거쳐서, 독일군, 특히 히틀러와 히틀러의 최고사령부는 전쟁이 개시되면 이렇게 나누어서 몰아치면 마치 죽은 나무가 힘없이 쓰러지듯이 소련군이 패퇴할 것으로 오판했고, 따라서 과도한 목표를 각 집단군에 하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목표가 달성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플랜 B조차 독일군에게는 없었습니다. 다들 그 정도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의 수준을 넘어, 당연하다고 본 거죠. 그러니 줄기차게 독일군 수뇌진들이 방심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구요. 결론을 내자면, 작전 계획을 수립함에 있어서 독일군 참모부는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골라서 수집했고, 그 정보라는 것의 실체도 시원찮았으며, 결정적으로 소련군을 툭 치면 넘어갈 정도의 연약한 군대로 얕잡아보고 있었기에 이 모든 것이 복합되어서 바르바로사 작전의 (지금 시점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작전목표라는 결과물이 탄생한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작전은 수립되었고, 작전 개시일은 5월 15일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만, 앞선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무솔리니가 발칸 반도에서 사고를 치는 바람에 작전 개시가 한 달 가량 뒤로 미루어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뇌진은 충분히 겨울이 오기 전에 12주 가량의 시간만 투자하면 우랄 산맥 서쪽의 소련을 전부 집어삼킬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날, 1941년 6월 22일이 밝자,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인 독소전쟁이 개시됩니다. 몇 줄로 요약하겠습니다.. 1. 영국을 단념시키기 위한 것. 2. 소련의 팽창주의적 정책이 독일(정확히는 히틀러)에게 가져온 위기감. 3. 우랄 산맥 너머로 슬라브 족을 몰아내고 독일이 살아갈 땅(레벤스라움)을 건설해야 한다는 히틀러의 망상. 1. 히틀러의 욕심. 2. 정보부의 낮은 정보력 : 최전방이 무너졌다고 가정한 후에 적이 후방에서 동원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병력의 규모를 크게 오판. 3. 독일군 수뇌진들의 소련에 대한, 철두철미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방심.
추축국들은 그냥 팀인데 지들 알하서 하는 개별활동이라 보면 될둣. 이탈리아 하는 꼬라지 보면 될듯하고, 이탈리아한테 점령지 때주기 싫어하는 낙지도 있고, 지리상 거리도 멀은 일본은 뭐 할말도 없고. 이탈리아의 공업력이 얼마인지 궁금한 사람들이 있다면 딱 그당시 일본 생각하면 됩니다. 열강중 최약체인데 유럽에 있어서 다른 열강에 비하면 진따 쓰레기임. 일본이 그나마 전쟁 할수있던데 근처 다른 열강이 없어서 그런거.
📌 사전등록하기 ntiny.link/Pirates_TOG 사전등록만 해도 11만 9천원 실제 판매 패키지 100% 지급! 사전등록자 전원!에게 지급되는 초호화 사전등록 보상! 기간 한정 지급중(~7/25) --- 🦜다음 화부터는 드디어 일본이 등장합니다...! 이젠 정말 세계대전 스케일 ㄷㄷㄷ 태평양 전쟁 기대해주세용~
@@_desaix9174 두고 어택땅 찍기에는 남부 키예프 방면에 있는 소련군 규모가 60만이나되고 만약 어택땅을하게된다면 측면 방어를 위해 중부 집단군중 일부를 방어를 위해 측방에 배치해야함 문제는 소련의 중부방어군은 건제하다는 사실임 이리되면 독일군 중부집단군은 병력이 쪼개진 상태에서 모스크바로 가면서 계속 소모전을 치뤄야한다는건데 이게 서부전선때 처럼 거리가 해볼만한 수준도 아니고 220키로미터나됨 거기다 남부집단군은 이미 키예프쪽에서 피해가 너무나도 막심해서 오히려 역공 맞을수도 있는 상황에다 중부집단군 측면을 방어해줄 만한 상황도 못됐음 이때만큼은 히틀러의 판단이 옳았었음
추가설명 1 콧대높은 융커출신 국방군 장성들이 휘투라 총통에게 반박못한 이유는 낫질작전이 컸습니다. 당시 국방군 장성들이 짠 작계는 1차대전 슐리펜 계획의 재탕이었거든요. 요걸 타개한게 만슈타인이고, 그 만슈타인을 채택한게 휘투라 총통..! 추가설명 2 키예프 포위하고나서도 논쟁이 있었습니다. 키예프 포위했으니 빨리 모스크바를 점령해야한다, 아니다. 키예프를 완전히 소탕해야한다 로 싸웠습니다. 키예프는 굉장히 중요한도시였고 또 막대한 병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이런 고민이 소련에게 시간을 주었습니다. 추가설명 3 독일군의 전과는 각 집단군이 달랐습니다. 북부집단군은 너무 빨랐습니다. 그래서 레닌그라드 포위하고 다른 집단군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레닌그라드는 포위당한 상태로 있었고, 최장기간 포위된 도시로 기록에 남았습니다.
독일도 제정신이 아니였지만, 소련은 9.11 테러 직후의 미국 마냥 복수귀가 되서 독일군을 썰다시피 했죠. 오죽했으면 베를린이 함락당하고도, 소련에 포로로 잡히면 시베리아 행이여서 끝까지 항복 거부하고 미군 포로가 될려고 끝까지 저항한 독일군들이 있을 정도. 실제로도 포로로 잡혔던 독일군들은 10년 동안 전쟁으로 무너진 소련 재건이나, 굴라크에서 강제 노역을 하면서 스탈린그라드에서 포로가 된 10만에 가까운 독일군 중에 5천명만 살아 돌아왔을 정도로 전쟁 끝나고도 노역으로 많이 죽어나갔죠.
강철의 대원수의 뚝심과 그 나비효과는 70여년 세월이 흘러흘러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가 재현하였군요. 나찌가 당했던 라스푸티챠의 악몽을 반대로 러시아에 돌려주기도 하였고... 다만 3일 키예프 컷이라는 예상이 나올정도의 더 나쁜 상황임에도 그걸 버텨낸 젤렌스키 쪽이 개인적으로 더 위대한듯 합니다. 이래서 지도자의 역량이 참 중요한것 같네요.
소련이 그렇게 허망하게 망하면 연합국은 독일에게 조건부 항복했을듯 노르망디 상륙도 대규모 상륙이 아니라 그냥 잠시 어그로끄는 상륙이였고 소련까지 먹은 독일을 육전으로 이기는건 절대 불가능 전쟁이 길어지면 독일이 영국 죽이고 일본+독일+이탈리아가 미국 서부에 상륙하면 미국 항복하면서 전쟁 끝 일본이 아시아 다먹고 독일은 나머지 꿀꺽
공장 분해해서 옮긴 건 ㄹㅇ 소비에트식이다... 상상을 초월하네
공장들고 산맥 뒤로 튀기 ㅋㅋㅋㅋ 독일뿐만 아니라 그 어떤 나라라도 예상 못하고 충격먹었을듯 ㅋㅋㅋㅋ
모스크바 안에서도 길 만들어 내야 한다고 건물을 들어 옮겨버렸습니다. 2차대전 전의 스탈린때 말이죠...
ㄹㅇ 저런나라를 어떻게 이기냐ㅋㅋ 공장까지 다 뜯어서 산맥
너머로 옮기는데 ㅋ
나중에는 집까지 뜯어옮기던데ㅋㅋㅋ
@@insane-human 엌ㅋㅋㅋ
강한 적보다 아군의 트롤짓이 더 무섭다는걸 알수 있었던 전쟁
??? : "파스타!!!! 가만히 있으라고!!"
"미국공격"
우히히 하와이공습
??? : 야! 몽키쌔꺄!!!!
히히 그리스 공격
히히 하와이 공습
독소전이 개꿀잼인 이유
1. 히틀러의 미친계획
2. 그걸 성공시킨 독일군
3. 그보다 훨씬 미친 소련군
무려 삼위일체 ㄷㄷ
히틀러가 전략적으고 욕을 많이 먹지만 만일 내가 히틀러의 위치였다면 이런 계획을 군사 전문가들 앞에서 밀어붙일수 있었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프랑스조차도 점령 못했을 것 같아요.
+ 소련 3대도시의 가슴이 웅장해지는 공방전
소련은 동쪽에서 장정들 무한리필, 미국은 소련에 무기들 무한리필 독일이 이길수 없는 전쟁이었음
당시 소련인구 피라미드구조보면 10대20대 비율이 아주 빵빵했음
근데 에초에 나치 집권 공약중 하나가 라벤스라움, 독일인들의 생활권을 넓히겠다였고 또한 독일의 경제는 이미 씹창이 난 상태에서 점령국 금고 털어서 매꾸는 방식으로 돌아갔기에 전쟁을 멈추면 경제도 붕괴되는 시스템이였음. 더군다나 영국은 단기간내에 점령이 힘들것 같고 가장 중요한 소련의 성장이 점점 더 가시화되었기에 독일로서 소련침공을 어쩌면 예정된 일일지도 몰랐음. 특히 독일이 발칸에 힘 안빼고 독소전을 보다 일찍 시작했으면 진짜로 모스크바가 한번더 불타버렸을수도 있었겠지만 파스타의 개같은 트롤링을 예상하지 못해 개같이 동장군에게 떡실신당해버림.
상남자:독일군이 모스크바 코앞 까지 와도 도망치지않고 사기를 위해 연설과 열병식까지함
하남자:바그너 그룹이 모스크바 근처도
못갔는데 전용기 타고 튐
실제 패배가 뻔한 상황이긴했지만... 도망가도 죽는게 뻔한 상황인데;;; 그러면 시도를 하지 말던가 확실하게 푸틴을 재규어 하던가... 하나만 했어야 했는데... 동서고금 통털어서 이렇게 개허접한 반란 처음봤음 ㅋㅋㅋ
튀었는지 안튀었는지 불확실하지 않음?
괜히 이름에 쐬가 있는게 아님
반란 번복하고 합의하고 벨라루스로 도주vs모스크바 입성 전 전용기 타고 튐
진짜 푸씨 그 자체다
독일: 동쪽 좀 쳐줘!
일본: 동쪽? 알았어!
독일: ㅅㅂ...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동쪽은 맞넼ㅋㅋㅋㅋ
동쪽으로... 동쪽으로... 미국이 있군...
아니 니 기준 동쪽말고 내 기준 동쪽
@@그러니까-b9j 그러니까 영국 식민지를 쳐달라고? 알았어!
전쟁 한 번에 양측 사상자가 대한민국 국민 수 정도로 났다는 것과 사람 시체로만 이루어진 지층이 형성됐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전쟁한번정도가아니라
왠만한 며칠몇달짜리전투가
거의 소규모전쟁급이죠
대부분이 남성 시체. 난 런닝맨 찍을거다.
@@4422-wd1bu저거랑 철의장막이랑 뭔상관임
한국도 인구 참 많단 말이야
10:05 이때 소련 인구 피라미드 보면 ㄹㅇ 그 많은 인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있는 아름다운 정삼각의 형태던데ㅋㅋㅋㅋ물론 나치가 모래성 모래 빼기마냥 쑥 빼가서 전후에는 이상한 모양이 되긴 했지만...
어디서 볼 수 있어요?
정삼각>마름모?
@@I금괴I 마름모는 아니고 1차대전 이후 프랑스처럼 젊은층이 움푹 들어갔죠
@@I금괴I 정삼각형 그대로인데 1918인가 1919년생 남자가 2%만 남고 전멸해서 진짜 중간만 쏙빠짐
독소전쟁... 인류 역사상 가장 첨단무기가 난무하고 인력도 매우 많이 갈린 그 전쟁...
생각보다 한번에 풀기 힘든 전쟁인데 바르바로사부터 시작해서 잘 풀어주시길 기대합니다.
인류역사상 가장큰규모의 육상전장
인류역사상 가장큰참전규모
인류역사상 가장큰 사상자
ㄷㄷ
그러게요. 기대했던 역전다방에선 걸프전을 시작했고…
지상최대의 전쟁에서 벌어진 전투이자 숙청광과 미수생에 대결
러시아-소련 역사상 최고의 두 명장
1. 동장군
2. 진흙장군
첨단무기 전쟁은 아닙니다 ㅎ
독일 최대실수: 소련 건드림
일본 최대실수: 미국 건드림
이탈리아 최대실수: 그리스 건드림
젤렌스키가 했던 수도에 남아서 버티기를 소련 스탈린이 했었던거네 진짜 역사의 아이러니 오진다 ㅋㅋ
반면에 러시아는 나치와 똑같이 보급을 단기간에 맞춰 준비하는 바람에 동장군에 동사자 속출하고 결국은 수도 코앞에서 후퇴까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USSR"
진짜 그나치새끼들 몰아낸 소련은 어디가고 지들이 물리친 나치마냥 다른애들 침략하는게 한심하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의 패배 원인
1.독일이 소련을 친 것
2.일본이 미국을 친 것
3.이탈리아가 추축국에 참전한 것
1번과 2번은 옳은 선택임.....3번으로 인해서 1번이 뭔가 뒤틀려서 실패했고 2번은 그나마 항모까지 터트리고 시간끌고 핵떨궈서 강제로 항복밭을수 있는데 3번덕에 핵개발할 여유따위도 만들 자원도 없었서 실패함 결국 3번이라는 선택지덕애 개망함
적어도 1번은 옳은 선택임 3번은..
2번이 왜 옳은 선택? 육해군끼리의 세력다툼으로 일어난 일인데다 자기네들 체급 못재고 무리하게 중일전쟁 일으켜서 공세종말점 오게 만들어가지고 남방자원 필요하게 만든것도 자기네들 업보인데ㅋㅋ
@@EeeeGggg-w8t 대체 일본이 그걸 못한 이유가 이탈리아랑 뭔 상관임;;
@@한글-i2k옳은 선택 보다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음
3년간 6.25 전쟁 한국군 사상자가 100만명인데 전투 한두번에 수백만 넘어가는 사상사를 내는 상식을 벗어난 전쟁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아서 한 곳에 많은 병력이 모일수도 없고 패배하더라도 포위만 아니면 후퇴하기 용이하지만 저기는 완전 대평원이라 장애물없이 대병력으로 맞다이까서 그런듯
@@qudtlszz-n5v???: 평야 전투 6주 항복, 사상자 단 30만 내외, 열강vs열강 전투
@@박재성-w8c3r그건 엘랑이라서...
@@박재성-w8c3r ???: 이딴게...열강?
영상에서는 분량문제로 지상전만 설명하고 있어서 아쉬웠지만 공중전 또한 만만치 않았음.
바르바로사 작전 당일 독일 공군은 미리 정찰해놓은 소련 공군의 비행장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소련 공군기들을 초토화시켰고
단 하루만에 소련 공군은 서부에 배치된 항공기 중 4분의 3 이상인 1100기를 손실함.
다음날 소련측 서부전선 공군 사령관인 이반 코페츠는 이에 대한 책임으로 사형이 선고되었고 코페츠는 자신의 권총으로 목숨을 끊음.
일부 비행장은 공격에서 살아남았고 공습을 받는 와중에도 소련 전투기가 이륙해 폭격기를 격추했지만 이후 들이닥친 경험많은 독일 전투기 조종사들을 감당할 순 없었음.
이후 제공권을 장악한 독일 공군는 끊임없는 폭격으로 지상군을 지원했고 그걸로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의 신화를 쓸 수 있었음.
제공권의 중요성과 장악하면 생기는 일은 지식해적단의 이전 영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니 참고하고 - ua-cam.com/video/ltqpDC2XQbo/v-deo.html
하지만 여기서도 '괴링'해버리는 루프트바페의 삽질 또한 있었는데 바로 모스크바 폭격임.
적국의 수도가 폭격 범위에 들어간다면 수도에 있는 철도와 공장을 폭격하는 것이 상도덕. 루프트바페 총사령관인 헤르만 괴링은 바르바로사 이후 1달 뒤인 7월 22일부터 모스크바 폭격을 진행함.
괴링은 전쟁 시작부터 소련 공군이 궤멸했고 소련 지상군을 공습하는 도중 대공포가 제대로 루프트바페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것을 봤을 때 모스크바 폭격 쌉가능이라는 행복회로를 돌림
그렇게 모스크바로 공습을 하러 가는 조종사들은 이런 말을 듣고 출격했는데
"제군들은 영국도 공습해봤다. 이번에는 훨씬 쉬울 것이다.
러시아에 대공포가 있기야 하겠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탐조등도, 방공기구도, 야간 요격기도 없다."
이런 괴링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모스크바에는 중기관총부터 기관포, 근처에서 폭발해도 파편으로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85mm 대공포까지 수천개가 배치되어 있었음.
탐조등은 도시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모스크바에 들이닥치는 폭격이 오기 전까지는 탐조등을 포함한 모든 건물이 소등상태여서 야간에는 목표물을 찾기도 힘들었음.
방공기구는 강철케이블로 연결된 풍선인데 케이블이든 기구 본체든 부딪히면 안 되니 독일군 폭격기는 방공기구 군집보다 높은 고도에서 폭격을 해야했고,
방공기구 혼자서는 2~2.5km, 방공기구 위에 또 방공기구를 달면 런던보다 높은 4km 상공까지 기구가 올라가 폭격의 명중률 더 떨어뜨리는 장애물이 되었음.
야간 폭격에서 탐조등에 걸린 폭격기는 집중포화를 받았고 전쟁 시작부터 궤멸당한 것으로 생각되던 소련 공군이 야간 요격기를 데려와 폭격기를 격추하기도 했음.
한마디로 괴링의 생각은 하나부터 열까지 맞질 않았고 100번이 넘는 폭격 결과는 폭격기들의 손실만 부각되었음.
전기 중 가장 규모가 컸던 모스크바 폭격은 41년 10월 29일에 있었던 폭격이었는데 이때 루프트바페 폭격기 300대가 발진해 47대가 격추당했음.
하지만 이 모든 소련의 노력과 괴링의 삽질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는 수천발의 폭탄을 얻어맞아 크렘린 궁,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볼쇼이 극장, 여러 철도역 등 건물이 손상되는 피해를 입었음.
추가로 독일군의 지상군 돌파 전술을 알아보자면
3:03 영상의 분량상 생략됐지만 독일군의 전차를 주축으로 한 포위하기 위해 방어선을 돌파하는 작전에는 독일군 전차 교리와 소련군의 방어 교리의 영향도 있었음.
독일군은 폴란드 침공과 '6주'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해 전차를 이용한 돌파 전술로 전차 소대(전차 5대)끼리 V자 대형을 이뤄
(독일군) 〈 ㅣ(소련군 방어선)
이런식으로 V자 대형의 양쪽 끝이 적을 향하는 모양으로 진격하는데 이 진형을 활용해 폭이 수백미터 밖에 안 되는 공간에 전차 수십대를 밀어넣을 수 있었음.
반면 소련군의 사단 교리에서는 전차를 상대하는 대전차포를 전선에 균등하게 배치하는 것이었음.
이러한 교리는 넓은 공간에 전차가 들이닥치면 어느곳이든 대전차포가 있었으니 효과적이었지만, 좁은 전선에 집중된 전차 공격에는 취약했음.
즉, 독일군 전차 수십대가 1km도 안 되는 폭에 들이닥치는데 소련군은 대전차포 몇 대만으로 막아야하는 흡사 7인 입구막기를 연상케하는 모습을 보임.
당시 독일군의 전차 중 적지않은 양이 구식 1호, 2호 전차였고 더 발전한 3호, 4호 전차들도 측면이 소련군 보병이 쏘는 대전차소총에게 관통당할 수 있었지만, 소련군의 사단 교리처럼 대전차 무기가 집중되지 않고 분산되어 있었기에 아무리 잘해도 독일군 전차 몇 대만 무력화 시킬 수 있었고 그대로 돌파당한 것이었음.
하지만 이것도 전쟁 초반 한정이고 독소전 중반이 되는 1943년에는 소련군이 수백미터마다 대전차소총과 대전차포 수십대가 밀집된 대전차 거점을 수백미터마다 건설함.
밀집해있는 대전차 거점 전술은 효과적이었음. 거점 사이를 돌파하려고 하면 전차의 측면이 노출되고, 정면으로 돌파해도 옆쪽 거점에게 측면을 내줄 수 밖에 없는 구조니 말임.
또 여기서 대전차 거점 전술만이 아닌 서너대의 대전차포끼리 연계하면서 일부러 뒤쪽에 있는 대전차포가 사격을 시작해 어그로를 끌고, 전차가 대전차포에 접근하면 측면에 위장해놓은 대전차포가 독일군 전차의 측면을 사격하는 전술을 쓰기도 했음.
아무튼 요약하자면
1. 영상 분량의 현실상 생략한 게 많았지만 공중전도 독소전에서 활발히 일어난 만큼 이를 빼놓고 설명이 진행된 것이 아쉬웠다.
2. 양군의 전술 또한 영상 분량의 한계로 등장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러한 전술 차이로 인해 독일의 전격전이 완성되어 방어선을 돌파했었고, 소련군이 이를 대처하기 위해 전술을 발전시키고 했다.
3. 괴링은 레전드다.
이렇게 요약이 가능할 듯?
정보추
또 괴링이네 ㅋㅋㅋ
아오 괴링시치
ㄷㄷ
괴링이 말아 먹은 것들:노르망디 영국공중전 그외 다수
정말 그 시절에 태어나지 않은게 정말 정말 다행이다...이런 분들 덕분에 역사로 남고 우리가 안전하고 풍요로운 2024년을 살아갈 수 있었겠지 적어도 우리의 후손을 위해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남겼으면 좋겠네요🕊️
러시아-소련 역사상 최고의 두 명장
1. 동장군
2. 진흙장군
주코프는 뒷전이네ㅋㅋ
주코프는...?
@@장영주 주코프 애미가 와도 저 두 장군님 없었으면 떡발렸다
라스푸티차:누구맘대로 진격하려고 하죠?
동장군:ㅇㅇ누구 맘대로 공격하지!
스탈린이 행정측면에서는 효율적으로 운영해서 히틀러보다 우위에 있었죠.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부터 더이상 전략전술에 간섭안하고 전부 군부에게 전권을 위임함
마오쩌동:오 저전술 우리한테 딱인데?
스탈린 히틀러 둘다 학살자들.
................. 잘 모르시고 댓글단거 같은데 답글도 그렇고 ㅋㅋㅋㅋㅋㅋㅋㅋ
애초에 소련이 독일에 전쟁 초반에 그냥 처발린게 스탈린이 본인 정치적 입지 확고하게 다진다고 군부 숙청해서 장교가 없어서 군대가 개판오분전이라 개처발린거임
솔까 전세계에서 국토면적 가장 넓은 소련이라 버틴거지 에지간한 니라였으면 저 병신 삽질 하나로 이미 전쟁에서 졌을만한 큰 실책임 거기에 당시 소련군 최고 책임자는
스탈린이랑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군사 군짜도 모르는 놈을 임명해서 연전연패당함 그때문에 이미 전쟁 초기에 소련군은 천만명이 초반에 죽었음
그때문에 모스코바까지 밀리는 최악의 상황이 되서야 전권을 위임한거임 스탈린이 행정측면이나 효율측면에서 히틀러보다 우위에 있어서 이긴게 아님
당시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은 무려 600만명이였지만 당시 소련군은 2천만명 넘게 사상자가 발생했음 ㅋㅋㅋㅋㅋ
그 대부분이 전쟁 초창기에 사상자가 발생한것만 봐도 얼마나 스탈린이 병신 삽질했는지 알수 있지 그이후에 그 유명한 소련군 사단 20개를 전멸시켰는데 다시 20개가 생기는
즉 독일과 소련의 국토및 인구숫자의 체급차이로 전쟁에서 승리한것이고 당시 미국및 연합군이 소련에 물자를 미친듯이 보급해줘서 이긴거임
그렇게 초반에 개처발리고 이길수 있는 나라는 소련이라서 그런거지 절때 스탈린이 행정 효율적으로 히틀러보다 유능해서 전쟁에서 이긴게 아님 ㅋㅋㅋ
오히려 스탈린의 군부 숙청및 친구를 군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한 삽질덕에 독일과 비교할수도 없는 영토와 인구 인프라가지고도 질뻔했떤게 팩트임 ㅋ
막말로 히틀러는 600만명이 처발리고나서 다음이 없었지만 스탈린은 초반에 천만명이 죽도고 다시 군대로 동원할 천만명이 더 있었다 이차이지 ~
그 유명한 히틀러 동부군 망상이 여기서 나온거임 독일은 소련침공한 600만명이 몰살하고 나서 그런 규모의 군대를 동원할 여력이 없었기에 소년병까지 동원해야 했음
스탈린이 참견하다가 병력을 꼴아박아서 이후에 군 작전은 장성들한테 맡김.
이 시리즈는 진짜 영어로 번역되서 수천만 조회수 나와야됨
워낙 유명하고 다들 좋아하는 전쟁이라
이미 해외에선 이거보다 퀄 좋고 훨씬 재밌게 다룬 영상들이 넘쳐흐름 그냥 한국한정 최정상 퀄리티지 해외는 해외꺼있음
심지어 한국에서도 2차세계대전 영상은 ㅈㄴ 많음
전부터 영어채널운영하고있어요
그냥 전쟁중 전투 결과와 전선 상태 보여주는거 있는데 천만정도 찍더라
@@Preston-Garvey 호이 영상 많이 올렸던 자기 얼굴
프로필로한 그 사람 맞음?
소련이 이기긴 했는데 말이죠. 지금은 독일만 남았네요😅
유링게슝 당해서 그렇습니다
솔직히 벨라루스가 소련 승계국임.
즐겜모드 스탈린도 있잖어
지금 독일이 나치에요?
나치독일도 사라졌죠
하지만 소련을 정통 계승한 러시아는 상태가 이상하긴 하지만 제대로 살아있죠?
다음편은...
"거인의 기상"
"민주주의의 병기창"
지구서버 서버장 뿔났다!
"민주주의의 변기창의 여명"
*미국공장 500개*
운영자를 화나게 한 대가..
주간항모와 일간수송선의 나라...
@@thdata9276떻게 항모를 1주일 안에 뽑냐.....그리고 그런나라를 건들인건....
이 시기의 독일은 친구 고르는 법을 좀 다시 배울 필요가 있어보이네요 ㅋㅋ
저때 구데리안이
총통각하!병사들다얼어뒤지고있고
총과대포는 얼어서 움직이지도않습니다
!동겨장비를주던지 퇴각을 허가해주시던지 하십시오 몰살직전입니다!
히틀러:x까 바보들이 정신력으로 이겨!
190만이나돼고도 못이겨서 그런소리를해?
빨랑 모스크바점령이나 끝내!
구데리안:제 아이큐는 한자리수가틀림없다
군법에회부돼더라도 여기서 병사들을
갈아버릴순없지 계 말무시하고
도망가! 진퇴양난그자체였을겁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현대를 제외한 독일의 전통임
비스마르크가 프랑스 왕따시켜서 그려러고 했는데 국민들이 뽕에 취해서 적을 너무 만듬
이 나라들 제외하면 친구되어주는 나라가 없어서
@@남센터느림보크도 퇴각금지명령 내렸던걸로 들었는데 라스푸티차 시작된 후부터 진격하는건 무의미했지만 이 때 퇴각금지명령 내렸던게 무질서하게 후퇴하는것보다 더 적은 사상자 냄
퀄리티 최고 알아듣기 쉬운 설명 정말 유튜브 최고의 역사 유튭.. 왜 아직 100만이 안되는건지 ㅜ 2차대전 스토리 너무 재밌고 퀄리티 좋아요
2차대전은 독소전으로 제대로 시작한다...
프레드릭 바르바로사가 차가운 강물에 발을 딛어 기온차로 인한 심장마비로 죽었듯이, 어처구니 없는 바르바로사 작전은 어처구니 없이 끝났다.
진주만 습격때 독일 수뇌부 중에 오직 히틀러만
기분좋아서 날뛰었었죠
다른 장군들은 표정이
매우 어두웠었다고 하고요..
근데 그와중에 미국도
유럽전선에 뛰어들고
싶어했지만 명분이
없었는데
히틀러가 싱글벙글
선전포고 때려주는바람에..ㅋㅋㅋ
자기가 선전포고 해주면 같이 소련에 선전포고 해줄거라 생각했지만 일본은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이랑 싸우면 ㅈ된다는 걸 깨달아서...
적당한 성능 적당한 가격 무한한 생산력의 소련과
하자많은 성능 개ㅆ창렬 가격 제한적인 생산력의 닛뽕의 대결인데 당빠 일본이 발리지ㅋㅋㅋㅋㅋ
그저 본인들은 전쟁 준비도 없이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미국은 재무장이 늦을거란 그 안일한 생각..
@@green_._tea 알고보면 사실상 최악의 시나리오가 독일이 소련침공했을때 소련은 독일군이 모스코바 코압까지 진군하자 시베리아군을 빼서 전장에 투입했고 산업기지도 죄다 동쪽으로 옴겼음 그래서 소련 동쪽은 군대가 없고 산업시설이 밀집해 있는 무주공산이였고 전쟁학자들이 만약 일본이 미국을 안치고 소련의 동쪽 공업시설 무력화시키고 석유를 확보했으면 아마 소련은 무너졌을꺼라고 합니다. 그리고 2차대전의 판도도 바뀌었겠죠. 독일과 일본이 소련을 양분하고 소련의 천연자원을 확보하면 전쟁이 독 일 이 3국에게 유리하게 흘러갔을꺼임
다만 일본은 그러한 판단을 하지못하였고 미국이 수출을 금지하자 석유확보를 위해 동남아 침공을 준비하면서 미국이 참전못하게 진주만 기습공격을 감행한게 재앙이 되었음
히틀러가 초반에 패전도 하고 쓴맛을 봤다면 오늘닐 세계 질서의 중심은 독일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는데, 어쩌다 운이 잘 맞아 연전연승을 하니 자기의 의견이 다 옳다는 과신을 한게 결국은 나치 독일을 몰락으로 이끌게 됨
4:05 우크라이나는 소련치하로 강제편입이 아닌 애초 러시아소비에트가 생기고 나서 생긴 소련 창단 멤버였는데 스탈린의 집단화 농장 정책으로 매우 큰 대흉년을 겪고나서 소련정부(러시아)에게 큰 반감이 있었습니다.(+대숙청)
애초에 러시아때부터 하나였는데 ㅋㅋㅋ대흉년으로 우크라이나인만 죽은거 처럼 선동하는 것도 웃김
@@EeeeGggg-w8t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강제 편입된거 맞습니다.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볼셰비키들이 무너뜨리고 멋대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운 거에요.
@@EeeeGggg-w8t ㄹㅇㅋㅋ
애초에 저 근처 카자흐 러시아 우크게이 중앙아시아 등등 싹 다 기근 겪었는데 관심 급격하게 늘어나니까 립서비스식ㅋㅋ
@@EeeeGggg-w8t 동아시아는 단일민족이라 개념이 없는데...다른나라들은 소수민족도 많고 종교문화 언어 다른경우가 많아서
같은 민족인데 다른 나라 (쿠르드족, 파슈튼족)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인데 언어 종교가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크림반도도 타타르족이 지배하던 크림공화국 소련이 먹은거죠.
우크라이나 사람 굶겨죽인건 맞아요. 그곡물 수출했고 그돈으로 우크라이나 산업화 한겁니다.
최준영 박사의 지구본 연구소 확인해보세요. 곡물 빼앗은거 상당수 수출했어요.
다들 우크라이나가 단일민족이라고 착각하나본데...
3차례 러시아영토를 우크라이나에 병합해서 지금의 우크라이나 영토가 된거고 그안에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살고있어서 우크라이나가 민족주의 주장하면 돈바스 지역 분리독립도 인정해줘야 합니다.
러우전쟁 시작이 돈바스 내전입니다.
사실 소련이 그대로 되갚아줬으면 독일은 ㄹㅇ 지구상에서 소멸 엔딩이었긴 하지ㅋㅋ
현재 독일 유럽연합은 러시아를 고립시키고 있죠?
@@eesoggun 독일 지도자의 재무장 선언이 의회에서 기립박수를 받고...어어?
@@i9t-f4h 레오파드 우크라에 파견넣어
@@eesoggun 야, 젤렌스키...
왜 울고 있는 거야?
"넣을게"
@@eesoggun..? 소련 가스관 막으면 터질 나라가 한둘이 아닐텐데?
키예프 공방전 및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코멘트를 남겨봅니다. 일단 중부집단군이 쭉 밀었다면 역으로 포위당할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당시 중부집단군도 스몰렌스크에서 옐냐 교두보 반격전투로 진격이 막혔고, 남쪽에서는 남부집단군이 소련 키예프 특별 군관구의 저항에 막혀서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키예프군관구에는 이미 50만의 병력이 남부집단군을 상대로 선전하고 있었고, 지속적으로 지원군이 오던 상황이였습니다. 중부집단군이 남하하여 키예프를 포위했을 때에는 이미 전력보강이 되어 66만이라는 엄청난 병력이 키예프에 집결해 있었죠. 당시 소련군의 전체 전력이 500만에 아우르는데, 전체 전력의 8분의1을 키예프에 집중시킨 겁니다. 중부집단군이 계속 진격했다가 남부집단군이 키예프 군관구에게 패하고 이들이 북상하여 중부집단군의 측면을 급습한다면? 상상하기도 싫겠죠. 그대로 측면이 무너지고 포위망에 갇혀 궤멸당하는 겁니다. 게오르기 주코프도 41년에 구데리안이 계속 진격하였다면 상황은 더 악화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애초에 히틀러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기에 구데리안에게 키예프부터 먼저 뿌리를 뽑으라고 명령을 한거죠. 거기에 키예프를 장악함으로서 경제적,자원적 이점을 획득함과 동시에 포위의 위험성까지 없애면서 전선을 안정화 시킬 수 있는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였습니다. 다만 전선의 안정화와 자원적 이점을 택하는 대가로 전선의 고착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틀렸고, 구데리안이 맞았다라는 판단은 굉장히 섣부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키예프 전선의 문제는 누가 옳고 그르냐를 떠나서 당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부터 생긴 딜레마를 상징하는 것이죠. 히틀러의 소련 침공이 나치독일의 패망을 불러왔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죠. 또한 스탈린그라드에 대해서도 의견을 제시하겠습니다. 스탈린그라드는 그저 "스탈린"이라는 이름이 붙어서 중요한 도시가 아닙니다. 돈바스의 공업지대를 모두 날려먹은 상황에서 소련 남부에 그나마 남아있었던 공업 대도시가 스탈린그라드였고, 소련 남부의 자원을 모스크바로 보급해주는 매우 중요한 통로였죠. 전략적 가치가 매우 떨어지는 도시가 전혀 아니였습니다. 더 나아가 청색 작전의 궁극적인 목표는 캅카스 지방의 유전지대를 장악하는 겁니다. 항상 독일의 발목을 잡았던 "유전"이라는 문제를 단박에 해결 할 수 있고, 자신들이 겪어온 유전문제를 소련에게 떠넘기면 이길 수 있다라는 판단이 있었던 것이죠. 결국 캅카스로 진격할 A집단군의 후방을 방어해줘야 했고 그에따라 군대가 주둔할 도시가 필요했죠. 그 최적의 도시가 바로 스탈린그라드였습니다. 하필 측면 수비병력을 루마니아 및 이탈리아 군대로 메꿔서 문제였죠. 이 시기에는 히틀러가 "상징성" 하나만 보고 결정할 정도로 그렇게 바보는 아닙니다.
사실 여기에는 많은 설명이 있습니다.
"히틀러가 남쪽으로 왠지 모르겠지만 돌렸다."
"히틀러는 계속 진격을 명했고, 후퇴를 거부했지만 장군들의 만류와 지속된 요청으로 히틀러도 결국에는 후퇴를 받아들였다."
등등 여러가지가 있죠.
소련을 친 시점에서 망한게 아니라 미국한테 억까(당하게 자초한) 시점에서 망한거지
여윽시 유사열강 이탈리아;;; 하는게 없네
바르바로사 작전 수립의 심리적인 요인
일단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일인 1941년 6월 22일 이전까지의 독일군의 상황은, 타임라인으로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았습니다.
1939년 8월 25일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나눠먹기로 합의한 비밀 조약) 체결.
1939년 9월 1일 독일, 폴란드 침공.
1939년 9월 3일 영국/프랑스, 독일에 선전포고.
1939년 9월 17일 소련, 폴란드 침공.
1939년 9월 27일 독일, 바르샤바 함락. 이튿날 폴란드 전역 종결.
1940년 5월 13일 독일 A집단군, 스당 돌파. 일 주일 후 A집단군 도버 해협 도달. 황색 작전 성공.
1940년 5월 28일 벨기에 항복.
1940년 6월 22일 프랑스 항복.
서부 전선의 타임라인은 이 정도였습니다. 한 달 후 상당한 규모의 항공전이 개시되지만(이게 바로 그 배틀 오브 브리튼입니다), 독일은 작전 취소일인 10월 31일까지 무려 2천 대에 가까운 항공기를 잃고 영국 침략을 단념해야 했습니다. 타임라인에서는 빼 놓았지만 육-해군의 입체적인 작전이라 할 만했던 베저뤼붕 작전(Operation Weserübung, 덴마크와 노르웨이 점령작전) 과정에서 해군이 엄청난 타격을 입는 바람에 영국 본토로 쳐들어갈 심산이었던 바다사자 작전까지 취소되고 말았죠. 영국도 1,663대의 항공기를 잃는 등 피해가 막심했습니다만.
하여간 영국이 저렇게 뻣뻣하게 버티고 있으니, 히틀러 입장으로서도 상당히 답답하기는 했을 겁니다. 체스로 치면 룩이니 나이트니 하는 상대의 핵심 기물을 잘 잡아놓고 체크메이트를 두는 게 아닌 스테일메이트(비김수를 말합니다)를 당하게 생겼으니, 히틀러 본인의 심기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겠죠. 그리고 이 영국의 기를 죽이기 위해 선택된 것이 엉뚱하게도 소련이라는 겁니다. 황당한 소리죠. 거 왜 예전에 굽시니스트가 연재했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의 그 장면 기억하십니까? 도조 히데키가 작전 입안하는 장면 말입니다. 그 작전의 골자가 이렇습니다.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내가 귀싸대기를 존나 맛깔나게 후리면 감동먹어서 나랑 협상하겠지." 거의 이것과 다름없는 개소리로 들릴 지경이죠. 근데 그게 사실이었다는 거죠. 제 뇌내망상이 아니라,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p. 223에서 제프리 메가기가 영국을 단념시키기 위한 목표로 독일군이 선택한 것이 소련이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엉뚱하게도 바로 소련 그 자신인데, 겨울전쟁(소련-핀란드 전쟁)과 그 이후에 소련이 보여준 일련의 움직임들이 독일의 심기를 더욱 자극했기 때문이죠.
1940년 6월에, 소련은 순서대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점령합니다. 발트 3국이 소련의 손아귀에 넘어간 것은 이 때의 일이죠. 물론 점령지 주민들의 의사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짓이었고, 이 때문에 훗날 독소전이 벌어질 때 독일군을 해방자로 환영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공개되었던 카틴 학살(폴란드의 지식층 및 장교 등을 체포하여 카틴 숲에서 살인한 것으로, NKVD의 짓입니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이 NKVD에 의해 처형 또는 체포,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 수감 등을 당하게 되었죠. 강제 수용소로 이송된 인원만 그 작은 나라에서 무려 12만 7천 명으로 추산된다 하니(《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p. 91) 알 만하죠.
여하간 소련은 이렇게 대놓고 영토 확장 및 발트 해로 진출할 의사를 보였습니다. 게다가 독일은 심정적으로는 핀란드와 상당히 가까운 축이었고(안타깝게도 제가 읽은 책 중에는 왜 그런지에 대해 속시원히 설명해준 자료는 없습니다만, 태생부터 물과 기름이나 진배없는 전체주의와 사회주의간의 이념 갈등이 핵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따라서 이래저래 독일은 소련의 확장이 찜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욱 독일의 심기를 자극한 것이 엉뚱하게도 루마니아와 관련된 일인데, 발트 3국을 점령한지 불과 한 달 가량이 지나 소련은 루마니아에게 베사라비아(오늘날의 몰도바) 및 부코비나 지방(現 우크라이나의 체르니우치 주, Chernivtsi, Чернівецька область)의 할양을 요구한 것이죠. 루마니아가 아무리 군사적으로 중간은 가는 나라기로소니 소련의 그 거대함에 비할 바는 못 되었고, 때문에 얄짤없이 소련에게 영토를 할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이게 루마니아가 추축국에 적극 가담하는 한 원인이 됩니다). 헌데, 이게 왜 문제가 되었냐면, 루마니아는 플로에슈티 유전에서 나오는 다량의 기름을 독일에게 제공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죠. 쉽게 말해서, 소련이 루마니아에게 계속해서 압력을 가하면 독일의 기름줄이 끊길까봐 전전긍긍했던 겁니다.
길게 이야기했지만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소련의 팽창주의적인 정책이 히틀러의 심기를 제대로 거스른 겁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하자면, 장교단의 분위기였습니다. 1940년 7월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독일에게 "가장 빛나는 때"가 되었고, 서부 전역에서의 대성공으로 인해 '우리가 군사적으로 뭘 하려고 하면 막을 사람이 없다'는 자신감과 낙관주의가 독일 장교단 전체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겨울전쟁에서의 소련의 삽질을 보았으니, 소련군이 툭 치면 넘어갈 거라고 믿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죠. 서부 전선에 비하면 거의 '도상연습'이나 진배없는 수준의 전쟁이 될 것이라고 다들 예상하고 있었습니다(《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 제프리 메가기, p. 226). 아주 간단하게 한 줄로 줄이면, 간땡이가 제대로 부은 거죠.
아이러니컬하게도, 독일군에게 있어 대선배나 다름없는 클라우제비츠는 일찍이 이렇게 경고한 바 있었습니다.
"막연한 느낌이나 불확실한 상상만으로 공격과 기동만이 전쟁의 모든 것이며, 머리 위로 긴 칼을 휘두르며 전방으로 돌진하는 기병의 모습을 전쟁 양상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중대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 출처 《전격전의 전설》, 칼 하인츠 프리저, p. 552
작전 수립 과정 - 왜 그들은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설정했나
제가 그간 접했던 2차 세계대전 관련 책에서 모두 간과하고 있는 것은, 대체 왜 독일이 굳이 세 개의 집단군으로 나누어서 불가능해 보일 정도의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냐는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드리죠.
서부 전선에서 독일은 군대를 세 개의 집단군(A, B, C)로 나눴습니다. A집단군은 스당을 돌파하여 적의 후방을 점령, 포위하는 "망치"의 역할을 맡았고, B집단군은 적을 벨기에로 유인하는 "모루"의 역할을 맡았으며(더 많은 적을 끌어들이기 위해 공수사단까지 동원될 정도였습니다), C집단군은 마지노 전선의 적군에게 허세를 부림으로써 적의 발을 묶어 취약한 A집단군의 측면을 간접적으로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게 성공적으로 돌아간 게 그 유명한 지헬슈니트, 폰 만슈타인의 천재적인 역작이죠.
그런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A, B, C집단군의 목표는 작전술적인 차원이고, 전략적인 차원, 다시 말해서 경제와 정치가 관여하는 레벨의, 국가와 국가간의 큰 그림의 범주에 넣기에는 분명히 무리가 있습니다. 헌데, 바르바로사 작전을 입안하면서 각 집단군의 목표는 다음과 같이 정해졌습니다. 엄청 간략하게 줄이면.
북부 집단군 - 레닌그라드를 점령한다
.
중부 집단군 - 모스크바를 점령한다.
남부 집단군 - 하리코프(Kharkov, 소련 제2의 공업도시, 現 우크라이나의 하르키우)를 점령한다.
이건 전략적 목표입니다. 전술적이나 작전술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닌, 명백한 전략적인 문제죠. 기껏 도시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들 도시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레닌그라드는 소련 해군이 발트 해로 나갈 수 있는 기지이자 구 러시아 제국의 수도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고, 모스크바야 말할 필요가 없으며, 하리코프를 위시한 우크라이나는 엄청난 곡창 지대로써 독일이 사용할 식량자원의 근원이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가질 수 있으리라고 독일 수뇌부는 믿었습니다. 대체 왜 이들은 전략적인 목표를 집단군에게 하달한 것이었을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독일군의 소련에 대한 방심과, 적의 주력을 섬멸하면 전략적인 목표는 쉽게 달성된다고 보는 독일군의 교리 때문이었습니다. 전략적인 목표로 보이는 것들은, 실은 적의 주력을 섬멸해버린 후 그에 따라 예상되는 전과 쪽에 가깝습니다. 쉽게 말해서, 적의 주력을 섬멸하고 얻을 수 있으리라 예상되는 게 터무니없이 컸기 때문에 전략적인 목표가 하달된 것으로 보이는 착시효과를 가져온 것이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한 방에 가질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스스로를 판단했기 때문에 별 반대 없이 전쟁에 돌입한 것이구요.
동원된 규모가 압도적이었기에 집단군 하나가 전략적 레벨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었다고 대강 얼버무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런 해석은 실제 프랑스 전역과 바르바로사 작전에 동원된 독일군의 전력(각각 335만 명, 380만 명)을 비교해 볼 때 명백히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독일군은 분명히 서부 전선에서는 기껏해야 작전술적 차원의 목표를 집단군에 하달했지만, 동부 전선 개전시에는 명백히 전략적 차원으로 여겨질 정도의 목표를 각 집단군에 하달했고, 또한 달성이 가능하리라고 믿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명령 자체는, 적 부대의 섬멸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p. 59). 히틀러 본인이 소련군의 기갑 전력을 섬멸하는 것과 모스크바의 점령을 놓고 비교했을 때 "모스크바는 별다른 가치가 없다"고 일축해버릴 정도였죠. 독일군은 최전방의 소련군을 다 섬멸해 버리면 알아서 적이 무너져내릴 것이라고 과신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초장에 적을 일거에 섬멸해 버리면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한 것입니다.
독일군의 교리는 철저하게 적 병력의 물리적 섬멸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적의 부대를 섬멸하면 동원 능력이 부족하고 전선에 구멍이 뚫린 적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설령 그 구멍을 적이 메꿀 능력이 있더라도 거기까지는 한참 시간이 걸릴 테니 그 전에 충분히 전과를 크게 올릴 수 있다는 것이 독일군 교리의 골자입니다. 독일군은 거의 병적이라 여겨질 정도로 적 전투력의 물리적 섬멸을 강조하고 강조하고 또 강조해 왔습니다. 슐리펜 작전이 그랬고, 황색 작전과 지헬슈니트 계획이 그랬으며, 바르바로사 작전 역시 마찬가지였죠.
근데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따릅니다. 일단 섬멸되는 것이 적의 주력이어야 하고, 적이 군대를 재건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설령 가능하더라도 다시 동등한 위치로 일어서기는 힘든 정도의 엄청난 타격을 입어야 합니다. 독일군이 제대로 오판한 것은 후자의 내용이었던 것이죠. 적의 병력이 손쉽게 섬멸 가능하고(여기까지는 작전 초기에는 어느 정도 옳기는 했습니다), 최전방의 적군을 섬멸해 버리면 더 이상 자신들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믿은 것이 바로 화근이었던 것입니다.
일단 상식적으로, 작전의 목표가 달성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작전의 수정이나 중지를 건의하는 게 정상입니다. 그러나 작전 수립 단계에서 이러한 작전계획의 수정, 다시 말해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하르키우로 대표되는 목표 중 어느 하나나 둘로 가용 병력을 집중하기를 수뇌진에서 줄기차게 주장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들은 바가 없습니다. 즉, 명백히 독일의 수뇌진은 소련을 얕보고 있었습니다.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의 p. 237-238에 있는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같이 러시아를 얕보고 있었으니 다른 결론이 나올 수가 없지."
이 말이 갖는 의미는 큰 것입니다. 애초에 러시아 어를 알지도 못하고 소련에 대해 깜깜이 수준이라고 해야 할 판인 사람인데다가 정보 특기도 아니었던 장교에게 소련에 대한 정보 수집을 맡겼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독일군의 수뇌진이 소련을 얕보고 있었는가에 대한 증거라고 저자인 제프리 메가기는 지적합니다.
게다가 이전에 몇 번 언급했던 적이 있던 사실이지만, 독일군은 소련군의 잠재력을 전혀 올바르게 평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 탐욕의 끝, 사상 최대의 전쟁》에서 폴 콜리어를 위시한 9명의 저자들은 독일군의 국경 지대에 대한 적의 규모 예측은 비교적 정확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나(예측 사단 147개 + 여단 33개, 실제 사단 170개, p. 577), 폴 콜리어와 제프리 메가기 공히 후방의 동원력에 대한 예측은 형편없는 수준이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제프리 메가기가 지적한 바에 의하면, 독일 첩보부는 1941년 1월에 동원 가능한 병력을 200만 명으로 보고 있었지만,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그 때 이미 425만 명이었으며, 그나마도 전쟁이 발발한 6월 22일에는 이미 500만 명을 돌파하고 있었습니다(《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 p. 244).
그렇다면 이 모든 책임, 다시 말해서 초반에 바르바로사 작전이 세운 지나치게 큰 계획을, 히틀러의 과도한 욕심(적어도 히틀러는 모스크바 방면으로의 진군과 우크라이나 점령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한꺼번에 모두 이루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혹은 정보부의 잘못된 정보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들을 비난해야 할까요? 회고록을 쓴 수많은 독일군 장성처럼? 안타깝다면 안타깝게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히틀러나 정보사령부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몇 번이고 말씀드립니다만, 독일은 전체적으로 소련을 얕잡아 보고 있었고, 바로 이 점에서 어느 독일군 장성이라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아, 의외로 독일군 장성들이 작전에 회의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건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의 제프리 메가기가 p. 225에서 신랄하게 쏘아붙이듯이, 진실과 절반의 진실, 그리고 새빨간 거짓말이 뒤섞인 잡탕에 불과합니다. 장성들이 가진 불만은 "영국과 전쟁 중인 마당에 굳이 우리를 건드리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소련을 상대로 불필요한 전쟁을 벌여서 군을 소모시킬 필요는 없다"는 쪽에 가까웠지, 그 누구도 실제로 전쟁이 개시되면 소련이 길게 버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도 볼셰비키를 없애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군 인사들은 굳이 소련을 친다는 작전계획에 반대할 어떠한 이유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괜히 작전과는 별 상관도 없는 절멸 계획이 작전 개시 이전부터 하달되었겠습니까.
사실 소련군, 시대를 약간 거슬러 올라가면 제정 러시아군은 삽질을 분명히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탄넨베르크 전투로 대표되는 어마어마한 참사가 벌어졌고, 그렇게 러시아가 깨지고 잠시 관심 밖에 있다가 러시아가 안방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망했기 때문에, (독일의 항복으로 휴지 조각이 되었습니다만) 혁명 정부를 수립한 레닌은 어마어마한 불평등 조약인(대충 폴란드, 벨라루스, 핀란드, 우크라이나 및 캅카스 일대를 포함한 어마어마한 영토에 상당 금액의 배상금까지 모조리 독일에게 넘겨준다는 내용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어야 했죠. 적백내전도 그렇고 폴란드-소련 전쟁도 그렇고 스페인 내전에서의 소련군도 그렇고 겨울전쟁에서의 대삽질도 그렇고 하여간 이래저래 소련군의 전투력에 의문이 많이 가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면모가 소련군의 전부는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죠.
대표적으로 할힌골 전투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전투에서 게오르기 주코프가 등판하여 멋지게 승리함으로써 숙청 대상자의 명단에서 제외된 바 있다는 이야기는 앞 글에서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은 이런 정보는, 즉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작전 진행에 차질이 될 만한 정보는, 모조리 의도적으로 무시해 버렸습니다. 예컨대 "극동의 병력들이 차출되어 동원되면 어쩌지?"에 대한 답은, "그럴 일 따위는 없음"인 식이었죠.
더구나 엄청난 넓이와,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인해 미국이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할 가능성이 있다는 - 미국이 독일과 직접적으로 전쟁하게 된 것은 진주만 이후 일본이 미국과 개전에 들어가면서 독일군이 먼저 미국을 상대로 선전포고한 이후의 일입니다 - 경고를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습니다(《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 p. 246 - 247). 그래서 그런 왜곡적인, 장밋빛 환상에 젖은 작전계획이 수립될 수 있었던 것이죠. 시간이 날 때마다 수학 문제를 푸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해서 "수학 교수"라는 별명이 있었던 할더조차 이럴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하여간 이런 과정을 거쳐서, 독일군, 특히 히틀러와 히틀러의 최고사령부는 전쟁이 개시되면 이렇게 나누어서 몰아치면 마치 죽은 나무가 힘없이 쓰러지듯이 소련군이 패퇴할 것으로 오판했고, 따라서 과도한 목표를 각 집단군에 하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목표가 달성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플랜 B조차 독일군에게는 없었습니다. 다들 그 정도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의 수준을 넘어, 당연하다고 본 거죠. 그러니 줄기차게 독일군 수뇌진들이 방심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구요.
결론을 내자면, 작전 계획을 수립함에 있어서 독일군 참모부는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골라서 수집했고, 그 정보라는 것의 실체도 시원찮았으며, 결정적으로 소련군을 툭 치면 넘어갈 정도의 연약한 군대로 얕잡아보고 있었기에 이 모든 것이 복합되어서 바르바로사 작전의 (지금 시점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작전목표라는 결과물이 탄생한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작전은 수립되었고, 작전 개시일은 5월 15일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만, 앞선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무솔리니가 발칸 반도에서 사고를 치는 바람에 작전 개시가 한 달 가량 뒤로 미루어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뇌진은 충분히 겨울이 오기 전에 12주 가량의 시간만 투자하면 우랄 산맥 서쪽의 소련을 전부 집어삼킬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날, 1941년 6월 22일이 밝자,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인 독소전쟁이 개시됩니다.
몇 줄로 요약하겠습니다..
1. 영국을 단념시키기 위한 것.
2. 소련의 팽창주의적 정책이 독일(정확히는 히틀러)에게 가져온 위기감.
3. 우랄 산맥 너머로 슬라브 족을 몰아내고 독일이 살아갈 땅(레벤스라움)을 건설해야 한다는 히틀러의 망상.
1. 히틀러의 욕심.
2. 정보부의 낮은 정보력 : 최전방이 무너졌다고 가정한 후에 적이 후방에서 동원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병력의 규모를 크게 오판.
3. 독일군 수뇌진들의 소련에 대한, 철두철미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방심.
존경합니다. 두 번 읽었네요. 영상 멈추고
진짜 전쟁사 이야기 해주시니까 너무 행복합니다 ㅠㅠㅠㅠ
독일은 ㄹㅇ 팀원들 제대로 잘못만남ㅋㅋ 대놓고 개트롤인 이탈리아와 미국 참전시킨 일본까지
누가 질줄 알았겠냐ㅋㅋ결과론적 이야기하누. 일본도 사정있더만ㅋㅋ 미국이 수출 다 막아놔서 그랬더만
@@I_am_Terry그래도 이탈리아는 아니지....
이탈리아는 커버 못쳐줌 ㅋㅋ
@@I_am_Terry그래도 알바니아 뺏긴건 좀...ㅋㅋㅋ
@@twosometime2692 이탈리아
베를린 점령한 소련군 왈
우리가 독일군이 소련에서 한것처럼 하면 베를린에서 독일인은 사라졌을것이다.
아예 나쁜짓안한건 아니라서..강x 많이당했다죠
소련 점령시기 베를린 신생아 중 10분의 1이 생물학적으로 아버지가 러시아인이라는 얘기도 있죠
그래도 많이 참았다는 소리듣는 소련... 오죽 심하게 당했어야지
2차세계대전때 강간은 미군이 더많이
했음 소련은 새발의 피
독일군이 소련에서 자행한 학살과 강간을 생각하면 소련군은 독일에서 천사 수준이었습니다.
이번 시리즈 보면서 느끼는 건데 사람들이 롤을 팀운망겜이라 말하는 이유를 확실히 알 것 같음ㅋㅋㅋ
이탈리아, 일본이 독일이 원하는 것 반이라도 이행했으면 유럽 역사가 달라졌을 것 같음ㅋㅋ
일본은 그래도 1인분ㅁ만 했다라고 생각 이탈리는,,,,😢
추축국들은 그냥 팀인데 지들 알하서 하는 개별활동이라 보면 될둣.
이탈리아 하는 꼬라지 보면 될듯하고, 이탈리아한테 점령지 때주기 싫어하는 낙지도 있고, 지리상 거리도 멀은 일본은 뭐 할말도 없고.
이탈리아의 공업력이 얼마인지 궁금한 사람들이 있다면 딱 그당시 일본 생각하면 됩니다. 열강중 최약체인데 유럽에 있어서 다른 열강에 비하면 진따 쓰레기임.
일본이 그나마 전쟁 할수있던데 근처 다른 열강이 없어서 그런거.
@@ud35607 일본은 미국을 기습하는 역대급 트롤 짓을 해버림. 당시 미국은 고립주의라 전쟁은 우리일 아니다 이런 상황이었는데
일본이 만약 9월에서 10월 사이에도 동러시아를 쳤으면 스탈린도 시베리아에서 병력 데려오지도 못하고 히틀러가 그냥 이겼을 듯
@@ud35607미국 참전시킨게 1인분임..?
아 마이너스 일인분인가 ㅋㅋ
@@ud35607일본이 가장 트롤이지,
막말로 미국 참전만 안 시켜도 희망이 보이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
감사합니다.
전쟁이라는 것의 광기를 내다볼 수 있는 전쟁이라 생각합니다... 참. 독일에서 시작되었던 이 전쟁은 그야말로 광기의 시작이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 되더군요.
너무 재밌다 역대급인듯 ㅠ
애초에 소련이 질 체급이 아니긴 했는데 그놈의 대숙청이 너무 발목잡아서 2천만명이나 죽음
📌 사전등록하기 ntiny.link/Pirates_TOG
사전등록만 해도 11만 9천원 실제 판매 패키지 100% 지급!
사전등록자 전원!에게 지급되는 초호화 사전등록 보상! 기간 한정 지급중(~7/25)
---
🦜다음 화부터는 드디어 일본이 등장합니다...!
이젠 정말 세계대전 스케일 ㄷㄷㄷ 태평양 전쟁 기대해주세용~
광고 어딨나했더니 여깄네 아저씨 고정안되있어요
3개월만에 공업지대, 곡창지대 점령하고 적군 300만 갈아버렸는데 게임이 안끝남ㅋㅋㅋ
독일:미국만은 적으로 만들지 말자
일본:나 이미 진주만 공습했는데?
독일:?????
드디어! 다음이!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 아시아 전선의 서막!
기대하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지식해적님!
😊
독일편이라고 나와있는거 보니 독소전쟁 및 유럽 전선만 다룰 것 같습니다. 다만 태평양 전선에 대해선 간접적으로 언급되거나 나중에 나올 듯
제국주의vs나치즘,파시즘,vs볼셰비키즘 웅장한 싸움이 시작된다
지식해적단님
태어나주시고
유튜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재밌는 영상을 봅니다🤣
예나 지금이나 키에프 및 현 우크라이나 지역은 그 일대의 밥창고이자 격전지네요...
러시아가 독일이 통일할때도 우크라이나를 나토 가입에 대해 언급했고 동유럽나라가 나토에 가입할때도 마지막 라인을 우크라이나라고 계속적으로 언급했지요. 그 선을 넘으니...
세계 3대 곡창지대라고 할정도라니까요
물론 1위가 미친듯이 압도적
괜히 소련의 빵바구니 소리 들은게 아님
@@action5274 전쟁전 밀수출량을 보심 러시아가 1위 3위가 우크라이나라고 알고 있네요
3시간 늦었지만 나는 독일편을 보기위해 오늘도 이 채널을 눌렀다.
역사 공부할때 딴거는 다 지루한데 러시아는 ㅈㄴ 꿀잼임 ㅋㅋㅋ 공부할때도 재밌게 공부함 ㅋㅋ 뭐만 하면 싸우고 혁명 터지고 ㅋㅋ
불곰국을 너무 우습게 보셧닼ㅋㅋㅋ~~
사실 키예프 회군 이거에 대해선 요즘엔 다른 해석이 힘을 실리긴합니다.
이미 모스크바는 방어준비를 했고 키예르를 점령을 못하면 70만의 소련군이 중부 집단군 옆을 칠 수도 있었다고 하죠.
저도 이 입장에 동의합니다. 수도만 점령하면 게임 끝 이런것도 아니고... 잘못 했다간 돌파군이 돈좌당한체 포위섬멸 당할수도 있었어요 히틀러의 결정이 맞았다고 봅니다
일점돌파 한번으로 적을 와해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괜히 모스크바 따거나 코앞에서 포위당해서 망할가능성이 높으니
하긴 당장 중부집단군,남부집단군이 와해되면 전력이 75%이상이 손실이라 북구집단군도 포위섬멸에 들어갈 가능성이높고 소련군이 일찍이 반격에 돌입해 들어갈수있죠
참고로 저때 미국이 전쟁참가법을 발의하여 통과시키는데 상원 전원 찬성, 하원 찬성 388표 반대1표가 나오는 역대급의 기적적인 투표수를 받아냅니다 또한 미국 청년들의 자원 입대율도 엄청났는데, 신검 탈락 때문에 입대하지 못한것을 이유로 자살하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애초에 남부 집단군이 키예프 점령못하고 대치하고있는 시점에서부터 독소전의 대전제가 틀어져버린거임 당장 키예프 점령못하고 모스크바로 중부집단군이 달리는건 측방을 너무 크게 노출하는거라 방법이 없었음
애초에 키예프 포위섬멸안하고 포위한채로 중부군은 계속 모스크바 갔어야함 거기서 시간끌리니 목표달성 실패한거지..전격전 자체가 측방이 노출된다고 실패하가아님 노출은 필연적인거고
@@_desaix9174 두고 어택땅 찍기에는 남부 키예프 방면에 있는 소련군 규모가 60만이나되고 만약 어택땅을하게된다면 측면 방어를 위해 중부 집단군중 일부를 방어를 위해 측방에 배치해야함 문제는 소련의 중부방어군은 건제하다는 사실임 이리되면 독일군 중부집단군은 병력이 쪼개진 상태에서 모스크바로 가면서 계속 소모전을 치뤄야한다는건데 이게 서부전선때 처럼 거리가 해볼만한 수준도 아니고 220키로미터나됨 거기다 남부집단군은 이미 키예프쪽에서 피해가 너무나도 막심해서 오히려 역공 맞을수도 있는 상황에다 중부집단군 측면을 방어해줄 만한 상황도 못됐음 이때만큼은 히틀러의 판단이 옳았었음
드디어 올라온 2차대전 시리즈😂😂😂
독일이 대단한 이유 : 미국.소련.영국을 상대로 유럽에서 사실상 자기 혼자서 몇 년을 버팀 우크라이나 하나에 어쩔 줄 모르는 지금 러시아하고 급이 다름
지금 독일도 군축으로 허약 해졌는데 됬는데 뭐가 대단함
이 편 엄청 기다렸었는데 잘볼께요~😊😊
인류사에서 이 전쟁만큼 잔혹한 전쟁은 또 없었지 싶다....
항상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
여러분은 지금,
민간인 수백만명 이상을 구덩이에 생매장 시키고, 적의 곡창•공장지대 장악하면 전쟁 이길거라고 생각하는 총통을 보고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지식해적단님 접니다(미카엘)😏
진짜 히틀러아니였으면 ㄹㅇ 소련먹고 전쟁이 좀 더 길어지거나
미국,영국이 협상을 준비했을 수도😂😂
독일이쏘련전체를먹진못해도
쏘련이 다시는나대지못하게
패는건 충분히가능했죠
지식해적단님 1만때부터 잘보고 있었습니다!
100만축하드립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천운으로 명 이어간 소련, 현재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패전하고 세계평화 이뤘으면 좋겠네요
자연의 위대함 자연앞에 시람은 먼지구나 ~~
나치독일군 뭉탱이로 있다가 유링게슝
얘는!
지가 콧수염을 잘기르는줄 알아!
광고 침투력 무엇ㅋㅋㅋ
모스크바는 교통과 운송 정치 행정의 중심지이고 소련공업의 30프로가 이 지역에 몰려있었습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않았다 라는 책을 보면 이 독소전쟁이야기를 단순히 꿀잼이야기넹 하고 볼수가 없게 된다.. 전쟁은 진짜 어떤 짓을 해도 막아야 하는것.. 그나마 미국위주의 세계질서가 성립되어 이런 미친전쟁이 일어날 일이 없어졌다는게 정말 다행
레닌이 혁명을 한다면서 선조들이 획득한 영토를 날리고 나서 얼마 뒤에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
레닌이 혁명한건 1차세계대전인데
아ㅋㅋ 레닌이 준영토 다시얻으러 왔다고ㅋㅋ
추가설명 1
콧대높은 융커출신 국방군 장성들이 휘투라 총통에게 반박못한 이유는 낫질작전이 컸습니다.
당시 국방군 장성들이 짠 작계는 1차대전 슐리펜 계획의 재탕이었거든요. 요걸 타개한게 만슈타인이고, 그 만슈타인을 채택한게 휘투라 총통..!
추가설명 2
키예프 포위하고나서도 논쟁이 있었습니다. 키예프 포위했으니 빨리 모스크바를 점령해야한다, 아니다. 키예프를 완전히 소탕해야한다 로 싸웠습니다. 키예프는 굉장히 중요한도시였고 또 막대한 병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이런 고민이 소련에게 시간을 주었습니다.
추가설명 3
독일군의 전과는 각 집단군이 달랐습니다. 북부집단군은 너무 빨랐습니다. 그래서 레닌그라드 포위하고 다른 집단군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레닌그라드는 포위당한 상태로 있었고, 최장기간 포위된 도시로 기록에 남았습니다.
북부집단군보단 중부집단군이 제일 빨랐지 그래서 중부집단군 일부는 북부집단군으로 이전되기도 했는데
16:00 자 드가자~~~ ㅋㅋㄱㅋㅋㅋ 갸웃기네
ㅋㅋㅋㅋㅋㅋ ㅁㅊ
Дгажа가 맞지 않음?
해적이행님 치트키 쓰셧네 ㅋㅋ 독소전쟁 ㅋㅋ 빨리 100만 되즈아
"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 이 게임에서도 독소전쟁이 전쟁 배경이었는데 플레이 해보면 얼마나 잔혹한지 알 수 있었음.
독일도 제정신이 아니였지만, 소련은 9.11 테러 직후의 미국 마냥 복수귀가 되서 독일군을 썰다시피 했죠. 오죽했으면 베를린이 함락당하고도, 소련에 포로로 잡히면 시베리아 행이여서 끝까지 항복 거부하고 미군 포로가 될려고 끝까지 저항한 독일군들이 있을 정도. 실제로도 포로로 잡혔던 독일군들은 10년 동안 전쟁으로 무너진 소련 재건이나, 굴라크에서 강제 노역을 하면서 스탈린그라드에서 포로가 된 10만에 가까운 독일군 중에 5천명만 살아 돌아왔을 정도로 전쟁 끝나고도 노역으로 많이 죽어나갔죠.
독소전쟁이 어떤 전쟁이었는지 알고 싶으면 영화 '컴 앤 씨'도 추천드립니다
베를린의 여인도
@@twosometime2692카르마온라인추가영
@@이정환-e4p5w컴앤씨는 진짜 영화가 끔찍함..
킹의탑 광고 나오길래 시무룩 했는데
분량이 개혜자라 기분 굿
소련의 진짜 군수공장은 바다 너머에 있었다...
공장을 우랄에!
@@EeeeGggg-w8t 미국 얘기하는거임
@@차재앙 무기대여법
아니 무기가 복사가 된다니까??
사실상 소련 공업력 1+1 이라 생산량 두배ㅋㅋㅋㅋㅋㅋㅋ
16:01 지나가는 노어과 입니다 해석 해보자면.
자, 자자 ~ (자자 드가자~ , 자자 반격가자~) 같은 말로 의역할 수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2:23 이 때 당시 스탈린이 모스크바 시민들과 함께 모스크바에 남아서 저항하겠다고 했다면 지금은 젤렌스키가 키이우 시민들과 함께 키이우에서 저항하겠다라고 말한걸 보면 역사는 반복된다는걸 증명하네
영웅 젤렌스키.
우크라이나에게 영광을!
그래도 빠져 나갈려고 지하에 대피소를 파놓긴했음(모스크바 지하철역 중 하나였는데 지금 폐쇄됨)
@@green_._tea 그래도 6.25때 누구처럼 다리 다 부시고 혼자 도망가는 것보단 낫지
@@KUKULUKUKU이승만도 안가려 했는데 부정선거 저지르게 된 밑에놈들 때문에 왔죠
@@thk6944 젤렌스키는 영웅! 우크라이나 만세! 😜
만약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때 일제가 같이 호응해서 블라디보스톡 같이 쳐들어갔으면 소련이 무너졌을까?
9:25 상식이 안통하는 소비에트 랜드! 독일 제 3제국 랜드를 폐업시킨 유명한 랜드! (현재는 폐업하였습니다.)
흐 너무 재밌어ㅜㅜㅜㅜㅜ
??? : 여기가 그 무한리필 가게인가요?
넘호 재미있읍니다 형님
강철의 대원수의 뚝심과 그 나비효과는 70여년 세월이 흘러흘러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가 재현하였군요.
나찌가 당했던 라스푸티챠의 악몽을 반대로 러시아에 돌려주기도 하였고...
다만 3일 키예프 컷이라는 예상이 나올정도의 더 나쁜 상황임에도
그걸 버텨낸 젤렌스키 쪽이 개인적으로 더 위대한듯 합니다.
이래서 지도자의 역량이 참 중요한것 같네요.
스탈린은 조지아 사람인데..이상하네..
극좌 vs 극우의 캐삭빵
7개월만에 봐도 재밌다
진짜 구데리안이 모스크바 점령하자 한대로 했으면
물류이송 막혀서 공업지대도 못옮기고 병력도 못 옮겨서 소련 발릴뻔 봤네요.
그나마 불행중 다행입니다.
둘당 망했음 한국이 분단도 안되고 좋았을텐데요
독소전쟁에서 구데리안의 묘책이 성공했다면 소련이 패망하고, 한반도도 분단되지 않았을테죠. 대신에 남북한 모두가 사이좋게 일본어를 쓰는 진풍경이 벌어졌을겁니다..
분단이 문제가 아니라 독립을 못했을 가능성이...
@@팝송용계정-d4g 독일이 승전해도 일본은 미국한테 결국 멸망 했을것 같네요.
어차피 독일 해군은 미국한테 못당할테니까요
근데 독일 소련 둘다 패망하는게 젤 베스트인것 같아요
대신 한국은 공산국가였습니다. 물론 북한같은 파탄국은 아니고 한 쿠바 정도는 됐을 거라고
소련이 그렇게 허망하게 망하면 연합국은 독일에게 조건부 항복했을듯 노르망디 상륙도 대규모 상륙이 아니라 그냥 잠시 어그로끄는 상륙이였고 소련까지 먹은 독일을 육전으로 이기는건 절대 불가능 전쟁이 길어지면 독일이 영국 죽이고 일본+독일+이탈리아가 미국 서부에 상륙하면 미국 항복하면서 전쟁 끝 일본이 아시아 다먹고 독일은 나머지 꿀꺽
너무재밌는데 빨리 다음영상좀 주세여
와 이 시절 소련 역량도 대단하네
사실 미국의 무기대여법이 아니였으면 소련군도 모스크바에서 밀리고 반격도 훨씬 늦어졌을거라는게 정설이죠
@@onlyROK 미국지원 본격적으로 들어갈즈음엔 이미 반격시점이었습니다
@@onlyROK 미국 아니었어도 결국 결과는 똑같았을거임
솔직히 2차 세계대전은 소련이 혼자 다 했다고 해도 무방할정도..
@@NAMSH1400 미국없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펼치고 아프리카에서 독일군 몰아내고 독일, 일본본토 폭격을 소련이 혼자 다한다는 말임???ㅋㅋㅋ 러뽕을 너무 심하게 맞으셨는데ㅋㅋㅋ
@@asynn269영미가 이탈리아 노르망디 2개 전선 안열어줬으면 소련 러남들 멸종했음ㅇㅇ
지식해적단!!!
구독자 100만 될때까지 구독 약탈가즈아!!!!!
근데 사실상 이 전쟁은 이긴편이 더 캐삭빵을 당함.
정신나간 이라는 말로 모든걸 요약할수 있었던... 독소전쟁
뭐야 언제 올렸어요!!
사망자 양측총합 4000만
사상 가장거대한 기갑전
최초로 단일전투 사망자200만
사상 가장규모가큰 단일작전 등
코뮤니즘vs나치즘
사회주의vs국가사회주의
독소전 시작
다음편은 언제
스토리는 재밌게 잘 봤는데... 역시 전쟁은 ㅠ ㅠ. 제발 3차대전 같은거 없길...
2차 세계대전 일본vs중국해주세요
사회주의국가 캐삭빵 당할뻔 했네
소련:들어올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때는 아닌곳
보급에 동원할 트럭은 부족하지만,
[가스바겐] 만들 트럭은 넘쳐나는 독일...
독일은 대체 무슨 나라일까...
나치 독일의 강점은 ' 에이 설마...'를 실현시켜서 허를 찌르는 것인데 소련은 허를 찔러도 체급 자체가 달라서...
진짜 임진왜란보다도 허를 잘 찔렀다고 생각되는데
독일: 대국(소련)을 공격하자!
일본: 대국(미국)을 공격하라고? ㅇㅋㅇㅋ
독일은 확실히 우세해는데 날씨와 지리적 이점이 소련을 살린거임ㅋ
이건 하난 확실하지
나치 독일이 이기는 건 최악이였고 소련이 이긴 건 차악이였다.
나치가 이겼으면 미독영소(애는 우랄가서도 싸움) 냉전일듯 일은 항모 못터트려서 희망이 사라짐
소련이 이겨서 한국 아직까지 분단됬는데 자유민주주의 한국 입장에선 정치외교학적으로 소련이 나치 독일만도 못한 최악인게 맞음.
@@thk6944하지만 동부유럽쪽을
모조리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시켰죠.
말이 해방이지 걍 지배국가,사상만 바뀐거죠.
@@thk6944 뭐가아닌데 반박해보던가
뭘 최악이야 ㅋㅋㅋㅋ
미국은 독일억까 안하고 독일 소련 끊임없이 싸우게 뒀으면 한반도 분단될일 없었다
소련이 초강대국이 돼서 세계에 끼친 해악이 너무 크다
전쟁의 결말을 알지만 이렇게 보는게 너무 재밌다 ㅋㅋ
15:58 이부분 '자 드가자'를 의도하신거라면 жа джажа가 아닌 жа дгажа(джа дгаза)가 맞는것이 아닐까 여쭤봅니다.
아직 노어로 쁘리볫밖에 못하는 개초보라...노어고수분들 도움주시면 저도 많이 배워가겠습니다..😢
너무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