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 보기 전 필수 시청※ ‘국뽕주의🔥’ 이순신학과 교수가 말하는 부산포대첩의 비밀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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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4 лис 2022
  •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에게 결정타를 날렸던 임진왜란 최대 전투 [ 부산포 해전 2부 ] ' 부산시민의 날 '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을 멈추게 했던 결정적 전투
    [ 부산포 해전 2부 ]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옵니다.
    --------------------------------------
    1592년 음력 8월 24일 여수를 출발한 이순신의 함대가 9월 1일 부산포 해전을 치르는 과정을 이순신의 기록인 임진일기와 장계인 임진장초를 통해서 재구성합니다.
    그리고, 130여척의 왜선을 격파한 부산포 해전의 의미와 임진왜란에 미친 영향들을 분석합니다. 특히, 이순신 스스로 본인의 해전에 '대전'이라고 붙여서 부산포 해전을 언급한 내용을 처음으로 발굴, 프로그램에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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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ОМЕНТАРІ • 476

  • @user-qv4st7jy3r
    @user-qv4st7jy3r 9 місяців тому +39

    이순신 장군은 작은것 하나라도 안놓치고 작은것도 소홀히 하지않고 바로바로 격멸하고 작은정보도 놓치지않고 모든정보수집후 지식과 지혜로 적을 무찌른 장군님덕에 후손들이 편하게 살수있습니다 앞으로도 나라를 지켜주심에대한 감사함을 가지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hiroono1
      @hiroono1 Місяць тому

      당시 조선 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며 협력했다. 일본군에 식량을 제공해 길 안내를 했다. 서울 왕궁에 방화한 것도 조선인이다. 이순신 등 당시 조선군은 대부분 사망했기 때문에 현재 한국인은 당시 민중의 후손이다. 따라서, 이순신은 당신의 조상의 적이다. 당신의 조상의 아군은 일본군이다. 이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 @hiroono1
      @hiroono1 23 дні тому

      이순신은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이순신을 포함한 조선군의 대부분은 죽었다. 한국인의 조상은 살아남은 민중이다. 민중은 일본군에 협력하고 있었다. 앞으로 합리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은 이순신은 한국인 조상의 적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인 조상의 아군은 일본이다.

  • @user-ob6lw2jf6g
    @user-ob6lw2jf6g Рік тому +57

    우리나라 최고의 돌격장 정운장군님 감사합니다.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지 마라.
      부산포해전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부산 주변 곶에 포대를 설치했다. 배를 탄 대포보다 지면에 설치된 포대 쪽이 더 높은 위치에 있어 안정적이기 때문에 공격력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자 조선 수군의 포격은 무력해졌다. 실제로 이순신은 여러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패하고 퇴산했다. 결국 조선군은 전쟁 종료까지 한 번도 부산을 탈환할 수 없었다. 일본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상을 제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자 보급에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 @user-br9fx8kz4d
      @user-br9fx8kz4d Рік тому +3

      정 운. 후손이. 정주영. 정몽구.

  • @user-wh1wc8dg6e
    @user-wh1wc8dg6e 11 місяців тому +18

    고맙습니다.
    하동정씨 경렬공파의 정지장군 후손으로 정운장군 입니다. 정지장군은 우리나라 최초로 해군을 만들었습니다. 그의후손이 녹도만호로서 이순신 장군보다 10살 정도 위로
    임진왜란때 최고의 장수 입니다.
    정운 장군이 돌아 가시자 이순신 장군이 엄청나게 큰 손실의 보고 원통했다고 합니다. 돌아 가신 이날이 부산 시민의 날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동정씨 대종친회 사무차장 정재삼 올림

    • @hiroono1
      @hiroono1 Місяць тому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따라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패주했다. 난중 일기에 쓰고 있다.
      이순신이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수군을 이겼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 @hiroono1
      @hiroono1 Місяць тому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따라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패주했다. 난중 일기에 쓰고 있다.
      이순신이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수군을 이겼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 @user-rc9rd2eg3o
    @user-rc9rd2eg3o Рік тому +33

    이순신장군님과 수병들의 기염에 그저 감사 또 감사할 따름이다..ㅠ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지 마라.
      부산포해전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부산 주변 곶에 포대를 설치했다. 배를 탄 대포보다 지면에 설치된 포대 쪽이 더 높은 위치에 있어 안정적이기 때문에 공격력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자 조선 수군의 포격은 무력해졌다. 실제로 이순신은 여러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패하고 퇴산했다. 결국 조선군은 전쟁 종료까지 한 번도 부산을 탈환할 수 없었다. 일본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상을 제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자 보급에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 @hiroono1
      @hiroono1 23 дні тому

      이순신은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이순신을 포함한 조선군의 대부분은 죽었다. 한국인의 조상은 살아남은 민중이다. 민중은 일본군에 협력하고 있었다. 앞으로 합리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은 이순신은 한국인 조상의 적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인 조상의 아군은 일본이다.

  • @rustyd7413
    @rustyd7413 Рік тому +56

    이런 프로 많이 만들어서 한국 청소년들이 잘 보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세계관을 길러 줘야 한다.

    • @hiroono1
      @hiroono1 11 місяців тому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지 마라.
      부산포해전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부산 주변 곶에 포대를 설치했다. 배를 탄 대포보다 지면에 설치된 포대 쪽이 더 높은 위치에 있어 안정적이기 때문에 공격력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자 조선 수군의 포격은 무력해졌다. 실제로 이순신은 여러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패하고 퇴산했다. 결국 조선군은 전쟁 종료까지 한 번도 부산을 탈환할 수 없었다. 일본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상을 제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자 보급에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 @seune2635
      @seune2635 6 місяців тому +1

      그럼 모하노 대통령이 윤석열인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user-ek9jw8qq5z
      @user-ek9jw8qq5z 4 місяці тому +1

      문재인 이재명이면 달라짐??ㅋㅋㅋㅋ

    • @seune2635
      @seune2635 4 місяці тому

      @@user-ek9jw8qq5z 같겠냐? 뉴스도 안보나봐 ㅜㅜ

  • @admiralblue9324
    @admiralblue9324 Рік тому +78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임진왜란 전체에서 부산포 해전이 얼마나 의미있는 것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네요, 우리가 임진왜란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을, 일본인들은 ‘문록,경장의 역’ (文祿 慶長 の 役) 분로쿠 게이죠 노 에키 라고 부른다고 하죠, 우리에게는 가슴 아픈 전쟁인 것을 , 그들은 자기들이 그 당시에 썼던 연호에다가 글자만 붙여서, 그저 한낱 불길한 일이였던 것으로 깍아 내리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께서 정운 장군을 추모하며, 직접 부산대전이라고 명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이네요, 430년전 부산포 해전이 있었던 그 날을, 부산 시민의 날로 결정한 것도 참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산MBC 방송사에 길이 남을 명작입니다. 제작진 모든 분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지 마라.
      부산포해전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부산 주변 곶에 포대를 설치했다. 배를 탄 대포보다 지면에 설치된 포대 쪽이 더 높은 위치에 있어 안정적이기 때문에 공격력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자 조선 수군의 포격은 무력해졌다. 실제로 이순신은 여러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패하고 퇴산했다. 결국 조선군은 전쟁 종료까지 한 번도 부산을 탈환할 수 없었다. 일본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상을 제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자 보급에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 @user-ni3ne4vw5o
      @user-ni3ne4vw5o Рік тому +4

      부산시민의날 너무잘했다 박수 👏 👏 👏 👏 👏 👏 👏 👏 👏 👏 👏 👏 👏 👏 👏 👏

    • @hiroono1
      @hiroono1 11 місяців тому

      @@user-ni3ne4vw5o 한국인은 왜 역사를 날조하는가? 대답하십시오.

    • @user-dq8pb7tb4n
      @user-dq8pb7tb4n 8 місяців тому +4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제일 두려원했던 이순신 장군의 승전을 일본은 당연히 깍아 내리려 하겠죠.
      일본보다도 우리나라 국민들과, 청소년들이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위대한 삶을 알아야 합니다.
      일본의 정보까지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hiroono1
      @hiroono1 8 місяців тому

      @@user-dq8pb7tb4n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순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본 측 기록에 이순신이 쓰여진 것은 한 번만 그가 죽었다는 것뿐이다.
      이순신이 일본군을 이긴 것은 한산도 해전이 마지막이다. 그 후는 패전을 계속해 일본군을 두려워해 조선 정부로부터의 전투 명령을 무시하게 되어 백의병에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이 귀국할 때 이순신은 비겁에도 배후에서 공격했기 때문에 일본은 이순신을 죽였다.
      원래 일본군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로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에 흥미가 없었다. 일본군이 귀국할 때 한 명의 사령관도 죽지 않았지만 만약 혼자라도 죽으면 일본군은 다시 조선을 공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조선의 피해는 더욱 커졌을 것이다. 이순신은 바보이므로 쓸데없는 모험을 하고 죽은 것이다.

  • @user-pf2ph1ll9r
    @user-pf2ph1ll9r Рік тому +52

    충무공께선 녹도만호 정운장군님을 가장 총애하셨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얼마나 슬퍼하셨을지...
    가늠조차 못합니다

    • @user-hg8ve5qb5g
      @user-hg8ve5qb5g Рік тому

      범엘동자성대가왜성인가?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1

      李舜臣等攻釜山賊屯, 不克。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 @user-hg8ve5qb5g
      @user-hg8ve5qb5g Рік тому +1

      @@hiroono1 북의개입내지는소통이있엇을것!합리적의심이가는부분들많다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user-hg8ve5qb5g 한국인은 왜 거짓말을 하는가? 대답하십시오.

    • @user-gd9tu9rk5y
      @user-gd9tu9rk5y Рік тому

      @@hiroono1 이 유명한 비응신임 ㅋㅋㅋㅋ

  • @user-nh3xg9ol4e
    @user-nh3xg9ol4e Рік тому +18

    세심한 부하사랑에 눈물나네요~선조에게 올린 이순신의 장초(부산대전에서 하루종일 싸운 "정운"장수 위로해달라)

  • @user-hd3zo8gf7q
    @user-hd3zo8gf7q 9 місяців тому +6

    이순신 대원수께서 본인이 본인의 공적을 높이 자평하는 이유는,
    그 심성을 들여다 보았을 때,
    전투에 참여한 또 전투에서 전사한 자들의 공로를 높이 치하받게 하기 위해서
    그리하였다고 생각합니다.

  • @user-lp6bl7vx9j
    @user-lp6bl7vx9j Рік тому +34

    자랑스런 부산포대전, 부산시민의 날입니다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지 마라.
      부산포해전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부산 주변 곶에 포대를 설치했다. 배를 탄 대포보다 지면에 설치된 포대 쪽이 더 높은 위치에 있어 안정적이기 때문에 공격력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자 조선 수군의 포격은 무력해졌다. 실제로 이순신은 여러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패하고 퇴산했다. 결국 조선군은 전쟁 종료까지 한 번도 부산을 탈환할 수 없었다. 일본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상을 제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자 보급에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 @hiroono1
      @hiroono1 23 дні тому

      부산포해전 1592년 8월 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부산은 계속 일본 수군이 점거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부산을 탈환하지 못해 일본 수군에 쏠렸다.

  • @user-iq1is6rg6x
    @user-iq1is6rg6x 8 місяців тому +9

    정운장군님에 묘역은 해남 대흥사에서 북일면으로 넘어가는 산 기슭에 조촐하게 모셔져 있습니다.

  • @user-forpeople
    @user-forpeople Рік тому +18

    부산 MBC! 이런 역사 영상 너무 좋네요^^ 이런 역사 내용 자주 올려주세요~~~

  • @user-lw5dh6hh2l
    @user-lw5dh6hh2l 5 місяців тому +10

    위대하신 이순신 장군님❤

    • @hiroono1
      @hiroono1 23 дні тому

      이순신은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이순신을 포함한 조선군의 대부분은 죽었다. 한국인의 조상은 살아남은 민중이다. 민중은 일본군에 협력하고 있었다. 앞으로 합리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은 이순신은 한국인 조상의 적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인 조상의 아군은 일본이다.

  • @user-narrow-path
    @user-narrow-path Рік тому +18

    이순신장군님 감사드립니다
    부산포해전 명량해전을 앞두고
    꿈을 꾸셨다....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하셨는지
    알겠습니다
    이순신장군님이 치룬 전투에서
    부산포해전이 가장 공이 컸다라고
    예전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평가를 잘 못받고 있는 거죠
    예전이나 지금이나 의인은 살아 가는 게
    가시밭길이네요
    후손을 위해 거친 길을 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기획해 준
    부산MBC에도 감사드립니다^^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지 마라.
      부산포해전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부산 주변 곶에 포대를 설치했다. 배를 탄 대포보다 지면에 설치된 포대 쪽이 더 높은 위치에 있어 안정적이기 때문에 공격력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자 조선 수군의 포격은 무력해졌다. 실제로 이순신은 여러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패하고 퇴산했다. 결국 조선군은 전쟁 종료까지 한 번도 부산을 탈환할 수 없었다. 일본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상을 제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자 보급에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 @hiroono1
      @hiroono1 23 дні тому

      부산포해전 1592년 8월 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 @user-rv4un1zg9s
    @user-rv4un1zg9s Рік тому +33

    정운장군님의 명복을 빕니다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지 마라.
      부산포해전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부산 주변 곶에 포대를 설치했다. 배를 탄 대포보다 지면에 설치된 포대 쪽이 더 높은 위치에 있어 안정적이기 때문에 공격력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자 조선 수군의 포격은 무력해졌다. 실제로 이순신은 여러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패하고 퇴산했다. 결국 조선군은 전쟁 종료까지 한 번도 부산을 탈환할 수 없었다. 일본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상을 제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자 보급에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 @user-hb2qd4uo2z
    @user-hb2qd4uo2z Рік тому +21

    우리는 장군님의 정신을 이어 받아야 하겠습니다

    • @user-lg3kx1vu7b
      @user-lg3kx1vu7b Рік тому +2

      주변에 적들이 많아지더이다. 넘 힘듦.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지 마라.
      부산포해전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부산 주변 곶에 포대를 설치했다. 배를 탄 대포보다 지면에 설치된 포대 쪽이 더 높은 위치에 있어 안정적이기 때문에 공격력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자 조선 수군의 포격은 무력해졌다. 실제로 이순신은 여러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패하고 퇴산했다. 결국 조선군은 전쟁 종료까지 한 번도 부산을 탈환할 수 없었다. 일본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상을 제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자 보급에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 @asahn2110
      @asahn2110 Рік тому

      무슨 정신이요? 뭔지나 알고 이어받어요

    • @user-pv2nr5dr9j
      @user-pv2nr5dr9j 28 днів тому

      ​@@asahn2110매사에 부정적으로 세상을 보는 재주를 가졌군요

  • @user-kg3ji7gx3o
    @user-kg3ji7gx3o Рік тому +42

    오래전
    드라마 이순신이 방영되었고 시청률이 높았을 때,
    한 국개의원이란 자가 이순신장군을 이런식으로 미친 말을 내뱉었다.
    "아, 외놈한테 총 맞아 죽은 놈"
    그자가 있었던 당이 지금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 @user-fn5di8cw5g
      @user-fn5di8cw5g Рік тому

      국짐당 매국노 집단들 이죠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2

      일본군은 불과 3주 만에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로를 제압했기 때문에 해로에서 물자를 옮길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수군에 배치하는 인원수를 수천명으로 줄인 것이다. 일본군에게는 부산만을 지키면 충분했다. 이순신도 그것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산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일본의 수비에 의해 한반도의 남쪽 해안에 거점을 만들지도 못했다. 결국 부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보급 거점이었던 것이다. 이는 이순신을 포함한 조선수군이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 @user-yi9sy4ej3e
      @user-yi9sy4ej3e Рік тому +1

      저런 ㅡㄴㅈ ㅊ ㅊ ㅎ ㄴ

    • @asahn2110
      @asahn2110 Рік тому

      하여간 정치병자 개소리 거짓말 지겹다 지겨워

    • @concon996
      @concon996 Рік тому +5

      ​@@hiroono1 평양까지 전선이 길어지니 해로로의 보급 필요성이 절실했을텐데 무슨 헛소리야?

  • @user-en7hg4gg6h
    @user-en7hg4gg6h Рік тому +25

    우리의 영웅 이순신 장군님을 만나게 되어서 감개무량입니다.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지 마라.
      부산포해전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부산 주변 곶에 포대를 설치했다. 배를 탄 대포보다 지면에 설치된 포대 쪽이 더 높은 위치에 있어 안정적이기 때문에 공격력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자 조선 수군의 포격은 무력해졌다. 실제로 이순신은 여러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패하고 퇴산했다. 결국 조선군은 전쟁 종료까지 한 번도 부산을 탈환할 수 없었다. 일본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상을 제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자 보급에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 @egatoki
      @egatoki 11 місяців тому +1

      왜 영웅인지 일본군 몰아내서 조선이 300년 더 갔구만

    • @asanjung4011
      @asanjung4011 10 місяців тому +1

      만나게...

    • @miya0714
      @miya0714 8 місяців тому +1

      ㅇㅇ 수정눌러서 만나게 바꾸세요 맛나게는 음식먹을때입니다 뭐죠 한글 유희 언어 유희인가요 세종대왕 이도능멸 농락인가요 제가넘 진지한가요 넴 물러감다 맞나게는 맛나게도 아니고 머징😅

    • @user-en7hg4gg6h
      @user-en7hg4gg6h 8 місяців тому +1

      @@miya0714
      쓰다 보면 오타가 나올때가 많아요. 잘못 썼네요.지적 감사합니다 😂

  • @audtjd222
    @audtjd222 Рік тому +6

    정운장군님 삼가고인 명복읗 빕니다.
    감사합니다

  • @anwoo9253
    @anwoo9253 Рік тому +59

    이순신장군이 왜 부산포 대전이라 표현했을까 왜
    해전사에서 거의 교본같은 전술이 총망라했다고 봐야 됩니다
    함포사격 전술은 정말 그이후 조선 수군이 더욱더 발전 했더라면
    동아시아 전력에서 우리가 역사를 바꿔읗것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해전전술 그가치를 다시 재평가 받길 기원합니다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지 마라.
      부산포해전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부산 주변 곶에 포대를 설치했다. 배를 탄 대포보다 지면에 설치된 포대 쪽이 더 높은 위치에 있어 안정적이기 때문에 공격력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자 조선 수군의 포격은 무력해졌다. 실제로 이순신은 여러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패하고 퇴산했다. 결국 조선군은 전쟁 종료까지 한 번도 부산을 탈환할 수 없었다. 일본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상을 제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자 보급에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 @hiroono1
      @hiroono1 23 дні тому

      부산포해전 1592년 8월 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부산은 계속 일본 수군이 점거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부산을 탈환하지 못해 일본 수군에 쏠렸다.

  • @zerotest2310
    @zerotest2310 Рік тому +13

    이런 멋진 영상들 더 만들어줘여잉~!~~~~

  •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Рік тому +71

    진짜 대전이자
    일본 수군을 완전히 확 눌러버린 그런 전투였습니다.
    본진인 부산포까지 화포 사격으로 쓸어버렸기 때문에
    그 때부터 일본군은 완전히 쫄았다고나 할까요?
    정운 장군님의 전사는 진짜 안타까운 희생이지만
    그 분이 전사한 날이
    지금도 부산 시민의 날로 기억되고
    대한민국 주력 잠수함 이름으로 그 분의 이름은 영원히 남게 되었으니............
    군인으로서 최고의 긍지이자 명예는
    자신의 이름이 무기의 이름으로 남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도
    니미츠 항공모함, 패튼 전차, 브레들리 장갑차 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기억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대한민국 영해를 수호하는 잠수함 전단의 이름들 중에
    이순신 장군님의 부하장수 분들의 이름이 4척이나 남았다는 것......
    거기에 그 4척 중 한 척의 이름이 정운함이라는 것은 진짜..........
    선조나 다른 그 당시 공신들의 이름이
    이순신 장군, 영의정 유성룡, 율곡 이이 선생님 말고는
    누구도 남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선조나 원균같은 그런 등신들은
    지금 지옥이나 천국이 존재한다면
    그 이순신 장군님과 그 부하장수들
    그리고
    유성룡, 율곡 이이 그 분들의 구두나 평생동안 광이나 내면서
    그분들이 고깃집에서 고기를 구워드시는 동안
    그 고기굽는 냄새나 평생동안 맡으면서
    쫄쫄 굷는 그런 벌 아닌 벌을 받을 거라는 생각이...........

    • @user-lj7sn1jy
      @user-lj7sn1jy Рік тому

      그럼모함 일본을상국으로 모시는 국힘=일본 당인데 나라가망해도 국힘 만 찍어댈턴디 부산은 일본놈한테 주는게 낫을듯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지 마라.
      부산포해전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부산 주변 곶에 포대를 설치했다. 배를 탄 대포보다 지면에 설치된 포대 쪽이 더 높은 위치에 있어 안정적이기 때문에 공격력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자 조선 수군의 포격은 무력해졌다. 실제로 이순신은 여러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패하고 퇴산했다. 결국 조선군은 전쟁 종료까지 한 번도 부산을 탈환할 수 없었다. 일본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상을 제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자 보급에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 @Kesap541
      @Kesap541 Рік тому +2

      부산포해전역시 일본군이 이충무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대응해놓고 교전한거죠, 안골포해전까지 약 300척가까이 되는 함선을 조선수군에게 내준탓에 작전과 전략은 거의 못짠거죠.

    • @user-ni3ne4vw5o
      @user-ni3ne4vw5o Рік тому +2

      찬성입니다 당신은 한국인 입니다

    • @hiroono1
      @hiroono1 11 місяців тому

      @@Kesap541 한국은 왜 역사를 날조하는가? 대답하십시오.

  • @MsYounghwan
    @MsYounghwan Рік тому +83

    이순신 장군이 장계에 수많은 전투중에서 유일하게 대전이라 적은 부산대전이라는 사실이 그저 놀랍습니다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지 마라.
      부산포해전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부산 주변 곶에 포대를 설치했다. 배를 탄 대포보다 지면에 설치된 포대 쪽이 더 높은 위치에 있어 안정적이기 때문에 공격력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자 조선 수군의 포격은 무력해졌다. 실제로 이순신은 여러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패하고 퇴산했다. 결국 조선군은 전쟁 종료까지 한 번도 부산을 탈환할 수 없었다. 일본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상을 제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자 보급에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 @hiroono1
      @hiroono1 23 дні тому

      부산포해전 1592년 8월 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부산은 계속 일본 수군이 점거하고 있었다.

  • @mst0452
    @mst0452 Рік тому +10

    계속 이순신장군님 다큐 만들어주시길. 고퀄이네.

  • @user-eh5bo2wo3t
    @user-eh5bo2wo3t Рік тому +21

    부산에서 학교룰 다녔으면서도 부산시민의 날 부산포*부산대전*을 몰랐습니다.
    아이들에게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제작진과 방송에
    정말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 @ssolnamu
      @ssolnamu Рік тому +1

      왜 후손들은 이순신장군의 업적조차 장군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할까요 안타깝네요

    • @hiroono1
      @hiroono1 11 місяців тому

      @@ssolnamu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지 마라.
      부산포해전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부산 주변 곶에 포대를 설치했다. 배를 탄 대포보다 지면에 설치된 포대 쪽이 더 높은 위치에 있어 안정적이기 때문에 공격력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자 조선 수군의 포격은 무력해졌다. 실제로 이순신은 여러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패하고 퇴산했다. 결국 조선군은 전쟁 종료까지 한 번도 부산을 탈환할 수 없었다. 일본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상을 제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자 보급에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 @Flyingpotatos
      @Flyingpotatos 9 місяців тому

      釜山よりも、豊臣秀吉の大阪の方が発展しています。豊臣秀吉には感謝しています😂

    • @Tailless120
      @Tailless120 4 місяці тому

      원래 시샘많고 찌질한 애들 특징이예요
      지들못났다 지적질 당하기전에 먼저 공격해야ㅋㅋ 죠

  • @user-mt6qf5ls7e
    @user-mt6qf5ls7e 8 місяців тому +14

    가덕신공항 명칭이 이순신국제공항이 되는 이유중 하나가 바로 부산포 해전 당시의 이순신 연합함대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 @hiroono1
      @hiroono1 Місяць тому

      그것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사실로는 한산도 해전 후 7년간 이순신은 한 번도 이기지 않았다. 기습 공격을 했지만 매번 일본 수군에 격퇴되어 퇴각하고 있다. 결국 조선의 배는 거의 남지 않았다. 23전 23승은 후세의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왜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는가?

    • @hiroono1
      @hiroono1 23 дні тому

      부산포해전 1592년 8월 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 @user-mt6qf5ls7e
      @user-mt6qf5ls7e 23 дні тому

      @@hiroono1 이순신 장군 최대의 전적이 바로 부산포 해전이며, 이길수 없었던것은 이순신 장군이 수군이라 무리해서 부산포에 상륙할 지상군 병력이 적었기 때문이다.

    • @hiroono1
      @hiroono1 22 дні тому

      @@user-mt6qf5ls7e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해서는 안 된다.
      이순신이 일본 수군을 이긴 것은 한산도 해전이 마지막이었고, 그 후 7년간은 한번도 이길 수 없었다. 이순신은 여러 번 기습을 시도했지만 모두 일본 수군에 격퇴되어 도망가고 있다. 23전 23승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 @user-xg6qr3vk2q
    @user-xg6qr3vk2q Рік тому +19

    부산포해전 이라 함은 우리 스스로 내려 부른듯 하다.
    분명 이순신 장군님은 부산포대전이라 하셨으니 그대로 사용함이 옳다고 본다. 부산포대전

    • @hiroono1
      @hiroono1 23 дні тому

      부산포해전 1592년 8월 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 @kerryjihun
    @kerryjihun Рік тому +28

    정말 압도적인 승리. 최대 성과! 부산포대전. 당시 일본 지휘관들에게 배 한척은 100명의 병사에 견줄만한 가치가 아니였겠음? 10,000명을 격퇴한 대승리.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1

      일본군은 불과 3주 만에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로를 제압했기 때문에 해로에서 물자를 옮길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수군에 배치하는 인원수를 수천명으로 줄인 것이다. 일본군에게는 부산만을 지키면 충분했다. 이순신도 그것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산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일본의 수비에 의해 한반도의 남쪽 해안에 거점을 만들지도 못했다. 결국 부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보급 거점이었던 것이다. 이는 이순신을 포함한 조선수군이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 @Kesap541
      @Kesap541 Рік тому

      물리친 적의 수는 그롷게 많지 않았어요, 교전방식은 포구에 함대를 정박시키고 육지에서 공격한탓에 조선수군역시 판옥선 70척중 절반이 장기간 수리를 하게되었고 수군 50명가까이 전사하였으며 반면 일본군은 450척가까이 되는 함선중 170척이나 잃으니 더이상 교전을 하면 일본으로 돌아가는거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가 만들어졌다고 결과가 나온거죠.

    • @user-ud8do4ri2g
      @user-ud8do4ri2g Рік тому +2

      ​@@hiroono1 제압했다는 것도 일본의 시각이지 후방에 일어난 의병의 숫자를 생각해보셈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user-ud8do4ri2g 한국인은 역사에 무지하다. 당시 많은 조선인 시민들은 일본에 협력했다. 길 안내를 하고 식량을 제공했다. 시민은 양반의 정치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을 구세주처럼 응원한 것이다. 서울 왕궁에 방화한 것도 일본군이 아니라 조선인이다.
      의병은 양반에 고용된 병대다. 모두 금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군이 다가오자 의병은 곧 도망쳤다.
      한국인은 오해하고 있지만, 당시 양반은 이후 전쟁에서 거의 죽었기 때문에 현재 한국인의 조상은 당시 일반 시민이다. 특히 이, 김, 박씨 등의 대부분은 한일병합에 따라 일본이 해방한 노예가 조상이다. 그들은 일본군에 협력했다. 즉, 현재의 한국인이 일본군을 미워하는 것은 자신들의 선조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Kesap541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 @user-si7hd8dl6h
    @user-si7hd8dl6h Рік тому +5

    이순신 장군님은 임진왜란 때 하늘이 내린 구세주 같은 분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장군님의 병법을 알면 알수록 어떻게 저렇게 까지 병법을 연구했나
    할 정도로 조선시대에 조선사람 같지 않는 사람인것 같습니다.

  • @user-wx4mw7nu8y
    @user-wx4mw7nu8y Рік тому +1

    멋진방송 입니다

  • @user-eh5bo2wo3t
    @user-eh5bo2wo3t Рік тому +1

    영상 . . . 감사드립니다.

  • @user-vj8nd8bs7q
    @user-vj8nd8bs7q Рік тому +7

    평택시는
    원균의가묘를
    파묘하라

  • @na-bx7mn
    @na-bx7mn Рік тому +11

    한산해전이나 명량해전은 전황이 자세히 기록돼 전해오지만, 부산포해전은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지않고 격침된 적선의 숫자정도로 전해오고 그 또한 100척도 아니고 100여척이라고만 전해온다. 그래서 위영상에도 해전 전황을 설명하면서 추정된다, --------일 것이다 라고만 설명하고있다
    그런데 일본의 기록에서는 조금 다르다. 이순신함대가 부산포에 진격해들어갔는데 왜군들은 뒷산에서 조선군에서 노획한 대포로 응전한다. 예상외의 강한 응전에 이순신은 철수명령을 내린다.
    왜군은 조선함대가 도망가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이윽고 밤이 되어 이순신은 다시 부산포로 진격해들어가 정박해있는 왜선함대에 함포사격을 퍼붓고, 왜군쪽에서는 칠흑같은 밤바다로 조준사격을 하지 못한다. 조선함대는 100여척 격침이라고만 추정하고 동이트기전에 본영으로 향한다.
    물론 왜군은 날이 새서야 피해 전모를 확인하고 망연자실.

  • @audtjd222
    @audtjd222 Рік тому +3

    수고하셨습니다.
    이순신 장군님 ..찐 왕 입니다.

  • @USA-pt7pk
    @USA-pt7pk 10 місяців тому

    참,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user-vg7jc7hy6z
    @user-vg7jc7hy6z Рік тому +1

    고맙습니다

  • @user-jm9be1hy5o
    @user-jm9be1hy5o 11 місяців тому

    임진왜란 설명 정말 좋아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 @HappyMLetter
    @HappyMLetter Рік тому +4

    내용이 이순신 장군이면 다큐도 재미있다...

  • @ConnorJeon
    @ConnorJeon Рік тому +4

    Wow! This is a great documentary. I've leaned so much about a fairly unknown battle. This is great!

  • @han-seung-hee-and-frends
    @han-seung-hee-and-frends 9 місяців тому

    마음 시원한 함선 까부수기~~
    즐감합니다.

  • @user-dm6jy4kk1t
    @user-dm6jy4kk1t Рік тому +21

    굉장히 불리한상황에서 위험을 무릎쓰고 본진으로 쳐들어가 적선100여척을 깨부순덕에 그나마 임란 초기부터 일본군이 힘을 제대로 못쓰게되었다 부산포대전은 재조명되어야한다 이순신장군만세 부산만세

    • @hiroono1
      @hiroono1 11 місяців тому

      한국은 왜 역사를 날조하는가? 대답하십시오.

  • @user-ol2go3dv8t
    @user-ol2go3dv8t Рік тому +26

    지금 이순신 같은 분이 절실히 필요 한 때 인듯 하네요

    • @user-kb6uo5hr9i
      @user-kb6uo5hr9i Рік тому +1

      지금의 이순신같은 분은 바로 윤석렬대통령과 한동훈 법무장관 입니다.

    • @user-jf6fc9bt1f
      @user-jf6fc9bt1f Рік тому

      @@user-kb6uo5hr9i 근데 3.1절에 이완용 보는줄ㅋㅋㅋ

    • @user-oj2nl1vh9i
      @user-oj2nl1vh9i Рік тому +1

      좌우파 다 떠나서 김관진 전 국방부장관님이 제일 가까울듯

    • @zzohhodduoccohlh3493
      @zzohhodduoccohlh3493 Рік тому

      ​@@user-kb6uo5hr9i 응 윤완용~ 수고

    • @newkimjjjsss
      @newkimjjjsss Рік тому

      멍청아 일본하고 싸운전쟁이다
      무슨근거로 윤통하고 한동훈을 이야기 하냐
      친일파 윤통을 이순신장군이 울겠다

  • @user-fr9bi4cv3i
    @user-fr9bi4cv3i Рік тому +110

    자기배 전부 수장시키고 1대만 가지고 도망친 원균이 낄 자리가 아니지.....

    • @user-pc4pj5ei9c
      @user-pc4pj5ei9c Рік тому +15

      1대도아니고. 산으로도망 치다. 전사함

    • @user-jt8fc8kj5q
      @user-jt8fc8kj5q Рік тому

      @ᄋᄋ 1

    • @user-jt8fc8kj5q
      @user-jt8fc8kj5q Рік тому

      @@user-pc4pj5ei9c 1

    • @mcy2756
      @mcy2756 Рік тому +23

      원균의 자손들은 평택에서 아직도 부자로 잘살고 있습니다 원균 기념비도 있죠 ...

    • @vip1296
      @vip1296 Рік тому +20

      국민의짐당 소속이였던 원유철이 원균 후손?

  • @Kesap541
    @Kesap541 Рік тому +12

    물리친 적의 수는 5천명이었지만 분멸한 적선은 약 170척(전초전해전 34척 분멸, 본진공격 130척)
    실제로 부산해전끝나고 일본군은 수군폐지령을 받음
    2번만 더 공격 받는순간 본국으로 돌아가는 함대를 모두 잃을수있다는 판단으로

  • @user-jp3fz3gz2g
    @user-jp3fz3gz2g 10 місяців тому +1

    부산포 해전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명징한 고증이 빛납니다.. 화약과 화포 조달의 애로를 들어 전투시간을 가늠한 것도 대단.. 진주대첩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설명은 진짜 깜놀이었음 ㅎ

  • @entp9671
    @entp9671 Рік тому +12

    상상이지만 그 시대에 30mm 기관포가 있었다면 500척 몰살이 ㄹㅇ 가능했을듯 ㅋㅋㅋㅋ 탄환이 부족해서 무차별 사격이 어려웠다는건 처음안 사실이네요 :)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2

      일본군은 불과 3주 만에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로를 제압했기 때문에 해로에서 물자를 옮길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수군에 배치하는 인원수를 수천명으로 줄인 것이다. 일본군에게는 부산만을 지키면 충분했다. 이순신도 그것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산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일본의 수비에 의해 한반도의 남쪽 해안에 거점을 만들지도 못했다. 결국 부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보급 거점이었던 것이다. 이는 이순신을 포함한 조선수군이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 @user_4808
    @user_4808 Рік тому +7

    답답하네요. 여기에서 어떤분이 한배에 20명을 말하다니 너무 황당합니다. 배를 젓는 사람만해도 수십명이 되고 아마 전체 최소 200명을 생각해야 하는데 한배에 20명을 생각하고 1만명을 말했다니 어떻게 머리로 한배에 20명을 생각했다니 너무 한심다는 생각밖에 할수 없습니다. 아마 한배에 최소 200명 정도 될겁니다.

    • @qst595
      @qst595 11 місяців тому

      배 크길 생각하고 현대 함선운용을 생각라여 그렇게 말한 듯.

  • @user-xh2qj8ub7k
    @user-xh2qj8ub7k Рік тому +1

    이순신. 그 이름만 들어도 뜨거움을 느낀다!

  • @abcdeereijgfhd3215
    @abcdeereijgfhd3215 6 місяців тому +1

    이순신은 그냥 신이다. 하늘에서 조선을 구하려 보낸 전쟁의 신!

  • @user-rx5bz9oj8i
    @user-rx5bz9oj8i Рік тому +9

    이순신장군 정말 멋지다

  • @user-ui5rx2wo7m
    @user-ui5rx2wo7m 11 місяців тому +2

    이순신 장군..임란 7년 기간동안 부산에서 치룬 전투가 2번이죠...그러고 보니 원균, 이억기도 2번이네요...
    임진년 부산포 해전은 그나마 그 상징성과 성과 때문에 이렇게라도 재조명 되지만
    정유년에 있었던 2번째 부산 출진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 상황이죠...
    나중에 기회가 되면 2차 부산 출진도 1차 출진과 비교하며 무슨 차이가 있는지, 설명되면 좋겠네요.

  • @sooryang64
    @sooryang64 11 місяців тому +17

    임진왜란을 겪고도 또 다시 일제시대를 겪는 멍청한 나라
    절대 정신 못 차리는 나라에 사는 내가 한이 하늘을 찌릅니다.

    • @hiroono1
      @hiroono1 11 місяців тому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지 마라.
      부산포해전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부산 주변 곶에 포대를 설치했다. 배를 탄 대포보다 지면에 설치된 포대 쪽이 더 높은 위치에 있어 안정적이기 때문에 공격력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자 조선 수군의 포격은 무력해졌다. 실제로 이순신은 여러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패하고 퇴산했다. 결국 조선군은 전쟁 종료까지 한 번도 부산을 탈환할 수 없었다. 일본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상을 제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자 보급에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 @75umberto20
      @75umberto20 5 місяців тому

      그딴 멍청한 사고방식을 갖고 계신 분이라면 빨리 이민 가셔서 한국에서 없어지는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흥망성세를 겪습니다. 일제시대를 겪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일제에 저항했던 사실은 왜 보지 못합니까?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은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 입니다. 왜 우리역사에서 잠깐 있었던 암흑기를 이유로 이렇게 지나치게 비하하고 폄하하는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편향되게 바라보니 그런 겁니다.

  • @user-kb6uo5hr9i
    @user-kb6uo5hr9i Рік тому +1

    어릴적 지냈던 추억의 감만동 우암동 좌천동이 이런 아픔을 지닌곳이었네요.

  • @user-dq8pb7tb4n
    @user-dq8pb7tb4n 8 місяців тому +3

    부산 mbc에서 학자들의 고증까지 있는 이순신 장군의 부산포해전에 대하여,
    50분 이라는 짧은 시간의 다큐멘터리 재조명은,
    부산포해전이 진주성 대첩을 포함하여 임진왜란 7년 전쟁 전체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제대로 분석한, 훌륭한 다큐 입니다.
    이런 좋은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 주세요.
    진실을 보도하는 mbc를 응원합니다.

  • @BangGood2
    @BangGood2 Рік тому +8

    언제든지 본진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공포감, 부산 앞바다까지 조선 수군의 제해권이 닿는다는 경각심, 앞으로의 보급에 더욱 지장이 있을 것이라는 우려까지 모두 짊어지게 한, 대첩이라 해도 손색없는 전투라고 생각됩니다.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지 마라.
      부산포해전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부산 주변 곶에 포대를 설치했다. 배를 탄 대포보다 지면에 설치된 포대 쪽이 더 높은 위치에 있어 안정적이기 때문에 공격력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자 조선 수군의 포격은 무력해졌다. 실제로 이순신은 여러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패하고 퇴산했다. 결국 조선군은 전쟁 종료까지 한 번도 부산을 탈환할 수 없었다. 일본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상을 제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자 보급에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 @BangGood2
      @BangGood2 Рік тому +1

      @@hiroono1 어리석구나 이순신 통제공의 전투를 까내리면 까내릴수록 너희들이 신처럼 숭배하는 고니시 유키나가,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야키, 도도 다카도라, 구키 요시타카 같은 수많은 장수들이 통제공의 배 한척 깨지 못한 찌질이들로 전락한다는걸 왜 모르는지? 판옥선 한척 깨지 못했으면서 승리라고? 어처구니가 없군.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BangGood2 당신이 제시한 일본군의 지휘관들은 모두 무사히 일본으로 귀환했다. 한편 이순신과 원균 등 조선수군 지휘관은 많이 죽었다. 조선수군은 끝까지 부산을 탈환할 수 없었다. 오히려 한반도 남쪽은 계속 일본 수군이 지배하고 있었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운 기록은 없고, 명량 해전에 남은 13척에 거북선은 없다. 처음부터 준공하지 않았습니까? 아니면 침몰했습니까? 당신은 이 상황을 보고, 조선 수군의 어디가 우세했다고 말하는 것인가? 대답하십시오.

    • @BangGood2
      @BangGood2 Рік тому +1

      @@hiroono1 부하들을 화살받이로 내세우고 꽁지빠지게 도망간 장수를 어찌 장수라고 하리오? 장수에게 명예로운것은 전장에서 죽는것이거늘.... 거북선이 왜군과 싸운 기록이 없다고? 당신네들 기록, 조선정벌기나 좀 제대로 읽고 오시게. 그리고 13척 함대를 백여척 넘는 대 함대를 끌고가놓고도 단 한척의 판옥선도 격침시키지 못한 약해빠진 수군들이 남해를 지배? 어처구니가 없소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BangGood2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200km나 북쪽으로 도망쳤다. 일본군은 조선의 해안이나 지리에 자세하지 않기 때문에, 조선인이 도망치면 잡는 것은 어렵다. 어쨌든 일본군은 부산을 방어할 수 있으면 병참에 지장이 없다. 명량해전에서 도망친 이순신은 명량해협을 점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략으로 분명한 패배다.

  • @user-we7le8ro4x
    @user-we7le8ro4x 7 місяців тому +2

    이순신장군님의 부산포 대첩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조선백성 후손 중 한명 올림~

  • @jesuslovesyou3228
    @jesuslovesyou3228 Рік тому +5

    이민웅교수 라는 분은,
    과거 TV에서 해군사관학교 교수로 나왔던 분이신데,
    진급이 안되셨는지 전역하시고 사립대학교 교수라 가셨군요.
    안타깝습니다...
    군생활 계속하셨으면 장성을 달았어도 투스타 이상이었을텐데.
    교수사관이란 것이 전투군인이 아닌지라 진급에 막대한 지장이 있다보니..

  • @user-cy5ic7px8c
    @user-cy5ic7px8c Рік тому +1

    제가 이영상을 여려번봤는데요
    우암포.위치가맞고
    진성 동쪽산은 황령산입니다
    황령산에서 오리(2키로)밑 언덕아래라는 표기는
    배정박 위치가 동쪽산 아래 5리가 아니라 언덕위치가 5리입니다
    지금은 매축.간척을 했기에
    바다에서 본 이순신장군님의 눈의위치에서 봤을때는 다른 언덕산이 아니라 거리가 5리는 넘지만
    횡령사이라고 확신합니다
    황령산입니다

  • @Theearthisaching
    @Theearthisaching 2 місяці тому

    가슴이 뭉클하네 ㅋㅋㅋㅋ

  • @user-bn4og8dh7u
    @user-bn4og8dh7u Рік тому +3

    이미 수차례 패전으로 승선도 못하고 배가 부서지는걸 구경만 한 왜군입니다
    굴욕적으로 패배한것이죠 그러나 이후 충무공은 부산으로 출진하지않는데
    이유는 왜가 부산방면 방어진을 더 촘촘히 구축하여 첫 부산포 진입보다 피해가 너무도
    클것을 알기에 결행하지 않은것이죠

  • @song3175
    @song3175 20 днів тому +1

    부산 MBC 다큐 퀄리티 장난아니네....

  • @user-vg9he5jo5s
    @user-vg9he5jo5s День тому +1

    그랬군요.. 전혀 몰랐던 사실입니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옆에
    녹두만호 정운 장군도
    같이 있어주셔야 할것 같습니다

  • @user-tk1ci3xt9j
    @user-tk1ci3xt9j Рік тому +3

    임진왜란을 멈추개 한 결정적인 전투는, 민병 김천일 업적이다. 다른게 아니다.

  • @user-rx6qb3um8v
    @user-rx6qb3um8v Рік тому +7

    망각된 역사는 결국 살실 된다는 말 지금 현실의 정치를 말하는거 아닌가싶네요
    조상님들이 이나라를 어케 지켜 왔는지 정치하는 새끼들이 알아야 합니다

  • @sejinJ
    @sejinJ Рік тому

    다른 부분도 훌륭한 다큐지만 음악감독님 역량이 대단하네요
    어지간한 영화보다 나은듯

  • @user-yt6je6pi4m
    @user-yt6je6pi4m Рік тому +1

    썸네일 오달수 배우인줄 알고 코미디인줄 알았다가 바로 숙연해졌슴다..😂

  • @DS-nl5pp
    @DS-nl5pp Рік тому +4

    이 성우분 역사스폐셜이나 다큐멘터리에 나온 거 같네요

  • @sklee7071
    @sklee7071 10 місяців тому +1

    군대 조직력이 생명인 군대에서 병력이 10% 줄어들면 거의 진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한산도 에서부산포 까지 왜선 200척정도를 부셔서 부산포에 정박중인 470척중 370척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면 전체 570여척중 200척을 부신 것으로 왜 함선 35%를 없앤 것이므로 그 정도 잃었으면 왜군이 전쟁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았겠죠..

  • @user-cy5ic7px8c
    @user-cy5ic7px8c Рік тому +2

    여러 전문가.해설자들이
    대부분
    호남분들이군요
    호남에서 연구를 많이 했나봅니다
    참고로 이순신장군님은
    충남 아산입니다

    • @egatoki
      @egatoki 11 місяців тому

      반일친중의 고장 전라

    • @user-pi8cx5sd5y
      @user-pi8cx5sd5y 11 місяців тому

      지역이 뭔 상관임,,
      제발 개소리 자제하자~

  • @arkadas-kc8dt
    @arkadas-kc8dt 3 місяці тому

    녹도만호 정운님이 전사하신 음력 9월 1일을 기념해서 부산광역시에서 부산 시민의날로 지정하였고 대한민국 해군의 여섯번째 장보고급 잠수함의 명칭이 SS-067 정운이라고 들었습니다🧐국가와 국민들을 위해 목숨걸고 헌신하신 조상님들과 순국선열들께 다시 한번 머리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raincho7809
    @raincho7809 Рік тому +13

    우, 러 전쟁을 봐도, 적의 보급을 공격하고, 탄약고를 파괴하는게 결국은 러군이 스스로 헤르손을 버리게 만들었죠. 그런 전력적 전투를 16세기에 했다니..

    •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Рік тому +2

      훌륭한 전략적인 전투지만
      지금 헤르손은 다리니 발전소니 하는 모든 생활 인프라를 러시아가 다 박살내고 튀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복구하는 것만으로도
      우크라이나는 몇 년간은 진짜 힘든 시절을 보내야한다고........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일본군은 불과 3주 만에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로를 제압했기 때문에 해로에서 물자를 옮길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수군에 배치하는 인원수를 수천명으로 줄인 것이다. 일본군에게는 부산만을 지키면 충분했다. 이순신도 그것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산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일본의 수비에 의해 한반도의 남쪽 해안에 거점을 만들지도 못했다. 결국 부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보급 거점이었던 것이다. 이는 이순신을 포함한 조선수군이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 @user-zx7ws6ig1y
    @user-zx7ws6ig1y 11 місяців тому +1

    만드느라 수고들 하셨는데 현대의 지형사진보여주다가 과거로 전환할때
    부산항에 현대에 매립된 땅이나 낙동강하구 다대포 쪽에 근래에 생긴 모래섬들은 지워버리고
    옛 지형도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정성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19세기에 만들어진 대동여지도에도 을숙도는 안나올만큼
    김해부터 하단쪽까지의 낙동강 하구는 모래섬들이 빨리 성장하는곳인데
    지금 현재의 그 모래섬들을 다 살려서 렌더링입히는 모습보이는데
    옛 지형도를 고증하는 노력을 보여줬으면 합니다.

  • @jh.h0911
    @jh.h0911 Рік тому +2

    🌹😍👍

  • @GMCOMT
    @GMCOMT Рік тому +2

    존경심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없는것
    같습니다.

  • @user-dl3pe7hq2d
    @user-dl3pe7hq2d Рік тому +4

    부산대전이라 쓰셨구나 정운 장군도 전사라니 얼마나 치열했는가

  • @user-dl5mh4gj7m
    @user-dl5mh4gj7m 6 місяців тому

    저 열악한 상황에서 23전 23승의
    불패신화을 업적을 남기신
    이순신장군님

  • @user-xf5ss5tk5b
    @user-xf5ss5tk5b Місяць тому

    부산포대전...... 앗싸~

  • @user-rl7jh6fc7z
    @user-rl7jh6fc7z 11 місяців тому +1

    부산포 대전의 영웅님들 감사합니다

  • @user-br9fx8kz4d
    @user-br9fx8kz4d Рік тому +3

    수류탄백발. 기관총50자루총탄. 천발만있어도. 임란은 인일어낮을것이다

  • @user-gu3uo3be9i
    @user-gu3uo3be9i Рік тому

    국잠당이 이 영상을 좋아할까싶다.

  • @user-oy1ps7px2e
    @user-oy1ps7px2e Рік тому +3

    잊혀진 전투라니요....ㅠㅠ
    이순신장군에 대한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런표현은 아닌듯 합니다.

  • @yong-gilchoi8614
    @yong-gilchoi8614 4 місяці тому

    이 영상에 만족하지 말고, 이나 < 난중일기>를 직접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영상에서 느끼는 것보다 백배 천배 더한 감동과 격분을 갖게 될 것입니다.

  • @shin-korea807
    @shin-korea807 Рік тому +3

    부산포 영화 나왔으면 좋겠다

  • @user-xf9jt1ln4q
    @user-xf9jt1ln4q Рік тому +2

    죄다 최대 전투야 부산포해전에서 귀선 안나가지 않았나

  • @jaejinlee495
    @jaejinlee495 7 місяців тому

    화약이 부족한 나라에서 수많은 적선을 격파했다는건 우리 수군은 흔들리는 전선에서도 일격필살 백발백중의 명사수였다는 증거지

  • @user-li4lg7xd7c
    @user-li4lg7xd7c 4 місяці тому

    부산포 대전 ㅡ엄청난 전세를 바꾼 큰승리의 전투군요ㅡㅡ용맹한 전운 장군이 전사하였고

  • @user-jq3ef8bl-5
    @user-jq3ef8bl-5 10 місяців тому

    👉한산섬 달 밝은밤에 긴칼을 옆에 차고 수루의 홀로 앉아~~~👈

  • @GO-zn5gk
    @GO-zn5gk 9 місяців тому

    썸네일에 오달수 행님인줄

  • @bombchive6111
    @bombchive6111 Рік тому +1

    [다시보기] 네트워크특선 | 부산포 해전 2부 (23.03.12)

  • @user-rw9on9kk8t
    @user-rw9on9kk8t Рік тому +2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이순신, 이억기, 원균 장군님들은
    가상 장군들이었고, 부산포해전과 한산도해전도 달나라 해전 이었구나.

  • @Yongc6101
    @Yongc6101 Рік тому +3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승승장구 했다는데 어이하다 육군을 잡지 못해 파죽지세로 한양을 점령, 선조가 의주까지
    피신을 해야 했는지 좀 의아 합니다.

    • @hiroono1
      @hiroono1 Рік тому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지 마라.
      부산포해전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부산 주변 곶에 포대를 설치했다. 배를 탄 대포보다 지면에 설치된 포대 쪽이 더 높은 위치에 있어 안정적이기 때문에 공격력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자 조선 수군의 포격은 무력해졌다. 실제로 이순신은 여러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패하고 퇴산했다. 결국 조선군은 전쟁 종료까지 한 번도 부산을 탈환할 수 없었다. 일본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상을 제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자 보급에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 @user-jq8fb2ke9o
    @user-jq8fb2ke9o 2 місяці тому

    ❤식량을 대 주는 길 파악 초토화 시키면 이긴다
    양반넘들이 할줄 아나
    7년반 임진왜란
    이룰성
    팔체질 도사 요

  • @younghoonkim9199
    @younghoonkim9199 Рік тому +1

    목소리가 문성근배우님 같네요~
    지금 해군을 강성해군으로 계속 키워가야 할때...

    • @hgrayson
      @hgrayson 6 місяців тому

      저 내레이션은 류다무현 성우님이라고 합니다.

  • @yoonhistory
    @yoonhistory Рік тому +3

    우리 수군이 부산에 간 것은 상징적이었지만, 이순신은 이후 부산에 가지 않습니다.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적정이 많은 곳을 다녀오느라 노젓는 사람들이 무척 힘들었을 것으로 봅니다. 부산포해전은 전국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제목처럼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결정타를 날렸으면 좋았겠지만, 그런 적이 없습니다. 부산포해전은 더더욱 아니고요.

  • @ktkim8945
    @ktkim8945 Рік тому +3

    부산포 해전에서 정운 장군의 큰 손실이 있었네요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 @user-pb9oc5zd5e
    @user-pb9oc5zd5e 8 місяців тому

    임진왜란 자료는 진주박물관이 잘 만들던데
    부산MBC는 창원 MBC랑 진주 박물관이랑 공동으로
    이순신장군님이 경상도 지방에서 치른 전투, 의병, 조선군이 치른 전투 관련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좋을 듯
    수군이 유일하게 육지 전투까지 치른 안골포 전투같은 주제로 다루면 꽤 괜찮은 거 나올 듯 싶은데 말이지..
    이순신장군이 치른 전투가 총 45회로 아는데, 사실 전투 벌인 지역이 몇 군데 빼곤 어디가 어딘지 잘 몰라
    지역을 명확히 알려주면 여행을 가더라도 느낌이 다를 거 아녀

  • @user-xm9jq5xc3s
    @user-xm9jq5xc3s 25 днів тому

    이순신이 부산대전이라고 표현을 쓴 이유는 부산해전에서 전사한 정운 큰 전투에서 목숨을 걸었기에 배향할 명분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user-xm9jq5xc3s
      @user-xm9jq5xc3s 25 днів тому

      이순신의 부하사랑 정이 느껴지는 모습이죠

  • @user-pe8ej6bi7q
    @user-pe8ej6bi7q Рік тому +3

    승정원일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후반동이 1km면 바다에서 화포를 제대로 못 쏘는 거 아닌가요? 포 몇번 쏘다간 전장이탈하겠는데...

  • @user-wu4sy2uw3p
    @user-wu4sy2uw3p Рік тому +7

    타임머신타고 장군 부하로 살고싶다

    •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Рік тому +3

      예전에 천군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 마지막 부분을 보면
      딱 글쓰셨던 분의 염원이 이루어졌다고나 할까요?
      그것도 황정민 그 분의 희망이 말이지요.....

  • @hyeryunchung7731
    @hyeryunchung7731 9 місяців тому

    어떤글에는13대 330척
    어떤때는 12 대 133척
    뭐가밎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