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페설 감사합니다 ! YTN 사이언스 감사합니다 ! 역사는 잊지않고 배워야 합니다 역사 스페설 . YTN. 사이언스 제작자님 들께 감사드립니다. 선조들의 문화 유산과 유물을 보고 역사를 통하여 많은 선조들의 지혜를 통하여 깨달음을 배우고 있습니다. 고려 청자와 신라 황룡사 목탑은 현대 기술로도 쉽게 접근을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비의 문화 유산과 유물을 남겨 선조들께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해설사님과 사학자 교수님 감사합니다 ! 🎉🎉🎉🎉
뺏기지 않고 지키려는자들 보다 뺏어 먹으려는 자들의 욕구가 더 왕성하다. 당시는 금과 구리 그리고 철의 생산이 국력을 키우는 요소였다. 가락국 중 이 3대 중요 산물은 그 어느 곳보다 아라가야 지역이 풍부했고 또 뱃길이 용이해 일찌기 진동포구와 합포를 이용해 왜와의 거래가 빈번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볼 때는 아라가야의 금과 구리와 철의 산지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고 크게 보면 바로 지척이나 다름이 없는 지역에 이 모두가 모여있었던 것이다. 즉 군북지역의 금과 구리 그리고 중리 지역의 구리와 철은 매우 근거리 지역에 매장이 되어있어 일본과의 교역이 더 우선했고 그로인해 한반도 내에서의 국토 확장의 의지 보다는 손 쉬운 무역과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 오히려 국력 확장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역으로 만약 금과 철과 구리의 산지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왜와의 뱃길이 쉽지 않았더라면 아라가야는 분명 자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군사력을 더 키워 국토 확장에 힘을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가야는 백제가 일으킨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죽고 백제가 대패하였습니다 그때 백제의 요청에 힘이 약해서 어쩔수없이 백제의 지시에 따라 동원되었던 대가야의 전병력이 1만명 정도였습니다 백제군들의 대량전사와 함께 백제연합( 백제군, 대가야군, 왜군 연합)이 신라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 군대가 지금의 용인 부근에 주둔 하였다가 남하를 하면서 지원하여 백제연합은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대가야의 전병력이나 마찮가지인 1만명이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되자 대 가야는 여자들만남게되고(15세 이상부터 노인들까지 참전) 신라장군 이사부가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도왔던 대가야를 정벌하러 출전 하였으나 이사부의 본진 4천명이(그중 2천명은 노인들로 이뤄진 보급부대) 오기도 전에 선봉대인 16세 화랑 사다함이 이끌던 청소년 낭도들에 대항하여 대가야는 싸울 군인들도 없어 수도가 함락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본진은 밀양쯤에 있는데 단1000명 정도로 함락이 될만큼 대가야는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신라군이 금관가야(김해와 그주변)을 정벌할때 이미 신라는 주변의 여러국가들을 정복하여 국가가 아주 커져있던 상태였습니다 신라도 처음에는 가야와 같이 지금의 경주정도 만이 신라였고 주변의 청도나 의성 경산 등 여러곳에 다른 국가들이 있었습니다 신라가 발전하는데 가야는 연맹체로 남아서 금관가야의 경우 신라를 기습침공하여 승리도 거두었으나 주변세력들과 이해다툼으 로 더이상 발전하지 못했고 백제와 같이 거대해진 신라가 쳐들어 오자 신라군의 규모에 도저히 방어할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항복 하고 신라는 금관가야의 왕족들을 귀족으로 편입시키면서 다른 주변국가 왕족들처럼 귀족으로 예우를 해주었습니다 신라가 침략 은 하였으나 큰전쟁없이 평화적인 합병이 되었습니다 백제나 고구려 역시 주변의 부족들이나 작은 국가들을 끝없이 공격하여 전쟁 으로 합병하여 영토가 넓어진 것입니다 신라와 백제가 커지기 전에는 한강이남에만 40여개 정도의 국가가 있었습니다
가야 고분 1600년 만에 문이 열리다. 대목이 신비롭습니다. 베일에 싸인 고대 역사를 배우고 알게 해주셨서 감사합니다. 김해 박물관에 가서 깨달고 배우고 왔습니다. 학예사 연구원을 비롯 하여 해설사님 들께 감사드립니다 역사를 배워야 미래가 보입니다 훌륭한 문화 유산과 유물을 남겨 주신 선조들께 고개숙여 감사 드립 니다. 교수님들이 연구를 하시면 더욱 발전된 결과물이 나타 나실것으로 생가합니다. 감사합니다 !🎉🎉🎉🎉🎉
대가야는 백제가 일으킨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죽고 백제가 대패하였습니다 그때 백제의 요청에 힘이 약해서 어쩔수없이 백제의 지시에 따라 동원되었던 대가야의 전병력이 1만명 정도였습니다 백제군들의 대량전사와 함께 백제연합( 백제군, 대가야군, 왜군 연합)이 신라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 군대가 지금의 용인 부근에 주둔 하였다가 남하를 하면서 지원하여 백제연합은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대가야의 전병력이나 마찮가지인 1만명이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되자 대 가야는 여자들만남게되고(15세 이상부터 노인들까지 참전) 신라장군 이사부가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도왔던 대가야를 정벌하러 출전 하였으나 이사부의 본진 4천명이(그중 2천명은 노인들로 이뤄진 보급부대) 오기도 전에 선봉대인 16세 화랑 사다함이 이끌던 청소년 낭도들에 대항하여 대가야는 싸울 군인들도 없어 수도가 함락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본진은 밀양쯤에 있는데 단1000명 정도로 함락이 될만큼 대가야는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죠 남경의 홍건적이 개성을 침입했는데 아직 원이 망하기 전인데 요동을 지나 한반도 깊숙이 개성까지 침입했다는게 말이 안되죠 홍건적이 명나라를 세우고도 산해관도 못넘었죠 물론 요동의 여진족이 명의 영향력을 받아서 임진왜란때 원군도 보낼수 있었고 사신도 지나 다닐수 있었으나 홍건적이 중국남부에서 원과 여진을 뚫고 개성까지 왔다는거는 말이 안됨 고려는 고구려와 같은 말로 고려는 옛고구려 땅을 지배했을거임
대가야는 백제가 일으킨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죽고 백제가 대패하였습니다 그때 백제의 요청에 힘이 약해서 어쩔수없이 백제의 지시에 따라 동원되었던 대가야의 전병력이 1만명 정도였습니다 백제군들의 대량전사와 함께 백제연합( 백제군, 대가야군, 왜군 연합)이 신라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 군대가 지금의 용인 부근에 주둔 하였다가 남하를 하면서 지원하여 백제연합은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대가야의 전병력이나 마찮가지인 1만명이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되자 대 가야는 여자들만남게되고(15세 이상부터 노인들까지 참전) 신라장군 이사부가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도왔던 대가야를 정벌하러 출전 하였으나 이사부의 본진 4천명이(그중 2천명은 노인들로 이뤄진 보급부대) 오기도 전에 선봉대인 16세 화랑 사다함이 이끌던 청소년 낭도들에 대항하여 대가야는 싸울 군인들도 없어 수도가 함락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본진은 밀양쯤에 있는데 단1000명 정도로 함락이 될만큼 대가야는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대가야는 백제가 일으킨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죽고 백제가 대패하였습니다 그때 백제의 요청에 힘이 약해서 어쩔수없이 백제의 지시에 따라 동원되었던 대가야의 전병력이 1만명 정도였습니다 백제군들의 대량전사와 함께 백제연합( 백제군, 대가야군, 왜군의 연합)이 신라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 군대가 지금의 용인 부근에 주둔 하였다가 남하를 하면서 지원하여 백제연합은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대가야의 전병력이나 마찮가지인 1만명이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되자 대 가야는 여자들만남게되고(15세 이상부터 노인들까지 참전) 신라장군 이사부가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도왔던 대가야를 정벌하러 출전 하였으나 이사부의 본진 4천명이(그중 2천명은 노인들로 이뤄진 보급부대) 오기도 전에 선봉대인 16세 화랑 사다함이 이끌던 청소년 낭도들에 대항하여 대가야는 싸울 군인들도 없어 수도가 함락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본진은 밀양쯤에 있는데 단1000명 정도로 함락이 될만큼 대가야는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국가의 조건에 미치지 못해서 1영토확장 2단일정부 3법율체계 가야는 연맹체 여러마을 부족단체 가야라는 이름만 보면 하나의 큰 국가라 볼수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라서 가야안에 여러세력이 많아서 하나의 국가라 볼수 없다는게 제일큼 그럼 4국이 아니라 최소 10국시대라 해야 하기 때문에 가야에만 최소7개국이니까
대가야는 백제가 일으킨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죽고 백제가 대패하였습니다 그때 백제의 요청에 힘이 약해서 어쩔수없이 백제의 지시에 따라 동원되었던 대가야의 전병력이 1만명 정도였습니다 백제군들의 대량전사와 함께 백제연합( 백제군, 대가야군, 왜군의 연합)이 신라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 군대가 지금의 용인 부근에 주둔 하였다가 남하를 하면서 지원하여 백제연합은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대가야의 전병력이나 마찮가지인 1만명이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되자 대 가야는 여자들만남게되고(15세 이상부터 노인들까지 참전) 신라장군 이사부가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도왔던 대가야를 정벌하러 출전 하였으나 이사부의 본진 4천명이(그중 2천명은 노인들로 이뤄진 보급부대) 오기도 전에 선봉대인 16세 화랑 사다함이 이끌던 청소년 낭도들에 대항하여 대가야는 싸울 군인들도 없어 수도가 함락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본진은 밀양쯤에 있는데 단1000명 정도로 함락이 될만큼 대가야는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대가야는 백제가 일으킨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죽고 백제가 대패하였습니다 그때 백제의 요청에 힘이 약해서 어쩔수없이 백제의 지시에 따라 동원되었던 대가야의 전병력이 1만명 정도였습니다 백제군들의 대량전사와 함께 백제연합( 백제군, 대가야군, 왜군의 연합)이 신라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 군대가 지금의 용인 부근에 주둔 하였다가 남하를 하면서 지원하여 백제연합은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대가야의 전병력이나 마찮가지인 1만명이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되자 대 가야는 여자들만남게되고(15세 이상부터 노인들까지 참전) 신라장군 이사부가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도왔던 대가야를 정벌하러 출전 하였으나 이사부의 본진 4천명이(그중 2천명은 노인들로 이뤄진 보급부대) 오기도 전에 선봉대인 16세 화랑 사다함이 이끌던 청소년 낭도들에 대항하여 대가야는 싸울 군인들도 없어 수도가 함락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본진은 밀양쯤에 있는데 단1000명 정도로 함락이 될만큼 대가야는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대가야는 백제가 일으킨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죽고 백제가 대패하였습니다 그때 백제의 요청에 힘이 약해서 어쩔수없이 백제의 지시에 따라 동원되었던 대가야의 전병력이 1만명 정도였습니다 백제군들의 대량전사와 함께 백제연합( 백제군, 대가야군, 왜군의 연합)이 신라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 군대가 지금의 용인 부근에 주둔 하였다가 남하를 하면서 지원하여 백제연합은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대가야의 전병력이나 마찮가지인 1만명이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되자 대 가야는 여자들만남게되고(15세 이상부터 노인들까지 참전) 신라장군 이사부가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도왔던 대가야를 정벌하러 출전 하였으나 이사부의 본진 4천명이(그중 2천명은 노인들로 이뤄진 보급부대) 오기도 전에 선봉대인 16세 화랑 사다함이 이끌던 청소년 낭도들에 대항하여 대가야는 싸울 군인들도 없어 수도가 함락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본진은 밀양쯤에 있는데 단1000명 정도로 함락이 될만큼 대가야는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가야는 김해부터 전라도 목포 나주 부근 북으로는 고령 성주 부근 까지 있었죠 6가야라고 해서 .. 그런데 전라도 나주부근에서 일본과 똑같은 양식의 오징어모양의 무덤도 많이 발견되었고 유물들도 일본의 유물과 똑같은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일본에서도 임나일본부를 주장하고 .. 광개토대왕비문에서도 바다를 건넜다는 이야기도 없는데 신라에 침입한 왜군들을 물리 쳐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주변의 중국이나 다른세력들이 언제 쳐들어 올지 모르는데 5만명의 병력을 배를 이용해서 바다를 건널 시간적 여유도 함선건조능력도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아마 그전에 중국을 먹어치웠을것입니다 고로 왜 는 한반도 남쪽에 있었다는 것이 일부 증명되기도 합니다
대가야는 백제가 일으킨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죽고 백제가 대패하였습니다 그때 백제의 요청에 힘이 약해서 어쩔수없이 백제의 지시에 따라 동원되었던 대가야의 전병력이 1만명 정도였습니다 백제군들의 대량전사와 함께 백제연합( 백제군, 대가야군, 왜군의 연합)이 신라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 군대가 지금의 용인 부근에 주둔 하였다가 남하를 하면서 지원하여 백제연합은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대가야의 전병력이나 마찮가지인 1만명이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되자 대 가야는 여자들만남게되고(15세 이상부터 노인들까지 참전) 신라장군 이사부가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도왔던 대가야를 정벌하러 출전 하였으나 이사부의 본진 4천명이(그중 2천명은 노인들로 이뤄진 보급부대) 오기도 전에 선봉대인 16세 화랑 사다함이 이끌던 청소년 낭도들에 대항하여 대가야는 싸울 군인들도 없어 수도가 함락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본진은 밀양쯤에 있는데 어린 보병인 낭도 단1000명 정도로 함락이 될만큼 대가야는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가야는 김해부터 전라도 목포 나주 부근 북으로는 고령 성주 부근 까지 있었죠 6가야라고 해서 .. 그런데 전라도 나주부근에서 일본과 똑같은 양식의 오징어모양의 무덤도 많이 발견되었고 유물들도 일본의 유물과 똑같은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일본에서도 임나일본부를 주장하고 .. 광개토대왕비문에서도 바다를 건넜다는 이야기도 없는데 신라에 침입한 왜군들을 물리 쳐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주변의 중국이나 다른세력들이 언제 쳐들어 올지 모르는데 5만명의 병력을 배를 이용해서 바다를 건널 시간적 여유도 함선건조능력도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아마 그전에 중국을 먹어치웠을것입니다 고로 왜 는 한반도 남쪽에 있었다는 것이 일부 증명되기도 합니다
대가야는 백제가 일으킨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죽고 백제가 대패하였습니다 그때 백제의 요청에 힘이 약해서 어쩔수없이 백제의 지시에 따라 동원되었던 대가야의 전병력이 1만명 정도였습니다 백제군들의 대량전사와 함께 백제연합( 백제군, 대가야군, 왜군의 연합)이 신라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 군대가 지금의 용인 부근에 주둔 하였다가 남하를 하면서 지원하여 백제연합은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대가야의 전병력이나 마찮가지인 1만명이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되자 대 가야는 여자들만남게되고(15세 이상부터 노인들까지 참전) 신라장군 이사부가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도왔던 대가야를 정벌하러 출전 하였으나 이사부의 본진 4천명이(그중 2천명은 노인들로 이뤄진 보급부대) 오기도 전에 선봉대인 16세 화랑 사다함이 이끌던 청소년 낭도들에 대항하여 대가야는 싸울 군인들도 없어 수도가 함락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본진은 밀양쯤에 있는데 어린 보병인 낭도 단1000명 정도로 함락이 될만큼 대가야는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Silla_Gates5 일단 당시엔 일본은 없음. 그래서 일본부라 볼순없음. 가야는 수많은 잡나라들의 모임이고 일본부라 주장되는 세력은 그냥 왜의 유물이 나오는 왜국임. 식민지나 번국 이런것도 아니고 왜의 땅임. 유물에서 지배층과 피지배층 이중적인 구조가 나오지 않는데 번국이니 식민지니 하는 개념이 아님. 현재까지 발굴된 유물로만 보면 그냥 왜국이다란게 맞음. 그범위가 어디까지이고 연대에 따른 변천과정만 보면댐
가야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가야를 논하다니.. 저것들이 파제끼는 곳은 가야가 있던 장소가 아니다..사서 한 줄은 읽어봤나? 금관국 금관 가야.. 금해(김해). 동북쪽은 가야산이 서북쪽은 지리산이 서남쪽은 창해 동쪽은 황산강이 남쪽은 나라의 끝.. 그래서 지금의 김해가 가야가 있던 지역이라고 구라칠래???
가야중에 가장컸던 대가야도 백제의 강요에 의해서 어쩔수 없이 참전을 하였던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연합( 일본서기에도 나오고 삼국사기인가 삼국유사에 나옵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정월에 백제가 상부 덕솔(上部德率) 과야차주(科野次酒)[14]와 간솔(杆率) 예색돈(禮塞敦) 등을 일본에 보내 군병을 요청했고, 왜는 6월에 전쟁물자를 백제에 보내주었으며, 554년 초에도 왜가 구원군, 말, 배를 백제에 보내주고, 백제는 역박사, 의박사, 음악가, 승려 등 선진 문물을 가진 도래인들을 왜에 답례로 보내주는 등 신라와의 결혼동맹은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일 뿐 은밀히 전쟁준비를 계속하고 있었다.《일본서기》에서 는 왜에 원군을 요청하고 왜가 병력과 무기를 보내주는 것 위주로 기록되었지만, 백제 성왕도 이 시기 전쟁 준비로 연합군 편성을 진행했을 것입니다 철저한 준비를 하여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운이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삼국사기에서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연합군(백제 대가야 왜군) 4만명중 29,600 명이 전사한 것으로 나옵니다
임나일본부에 대해서는 우리나라도 열린자세로 함께 조사해야한다고 봅니다. 임나는 금관가야 또는 가야 전체를 부르는 별칭이었습니다. 또한 임나일본부는 일본이 가야를 정벌한 후, 이에 대한 통치기관을 의미합니다. 이때는 백제가 가야를 적극적으로 공격하던 시기인걸 감안해야하는데, 백제 국가 구조상 .. 중앙군으로만 공격한게 아니고, 중앙군이 사령관과 함께 지방으로 내려오면, 그 지역 지방군이 보급을 담당하고 전투병력 차출하는 식으로 전개되었을겁니다. 백제 중앙에서 파견나온 가문은 목씨 가문 또는 사택가문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있습니다. 목씨가문은 백제와 해상무역으로 큰 가문인데, 나주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사택가문은 군사요충지인 부여지방에 기반을 두고 있고, 군사적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추정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제 생각인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목씨가문은 근초고왕의 가야남정시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나옵니다. 목씨가은 해상무역을 했기 때문에 일본과도 해상무역을 했었고, 일본내 목씨가문이 일본영주들을 규합해서 군대를 만들어 남정시 합류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연합군이 구성된 것인데, 백제 중앙군 + 백제 목씨가문 부대 + 목씨가문 동맹부대(일본) +사택씨 부대... 이렇게 공격군이 구성된것 아닌가 봅니다. 가야의 일정부분을 점령한 후, 이곳을 식민지화시키는데 이때 일본에 이권을 줘야했겠지요 이때 준게 점령지 일부일수도 있고,, 점령지의 이권일수도 있을거라 봅니다. 점령지 또한 이권에 대한 일본의 통치기관이 임나일본부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 생각엔 아마도 , 직접통치에 대한 능력이 일본에게는 없었을거라 봅니다. 애초에 이 지역의 무역이득을 제외하면, 농사가 일본보다 잘되는것도 아니고,, 괜히 군대 주둔시키면서 비용만늘어났을테니 차라리 임나지역의 무역권을 관리하기 위한 통치기관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조선이 대마도나 여진을 정벌하고, 유지비도 안나올것 같으니까 그냥 돌아간것과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일본 통치자 입장에서 바다건너 군대 주둔시키면, 그 부대장이 언제라도 마음 돌려서 백제한테 충성한다고하면 엿되는거니까요
@@Silla_Gates5 임나일본부를 가르치고 있다는 그 서양학계는 어디며, 어떤소스를 가지고 그렇게 주장한다는겁니꽈~ 지나족님? 가야사 전문적으로 파고 임나일본부 밝혀내려고 했던 일본 주류학자들이 한국 학자들한테 토론 ㅈ발리고 공식 폐기했는데 도대체 어떤 소스를 쓴건지 정보공유 부탁~ㅋㅋ
일본고서기 기록에 따르면 금관가야 왕족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규슈 북부 아소산에서 도래인들을 규합해 규슈와 오사카까지 정복하고 일본최초의 덴노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가야는 일본으로 건너가 덴노가 되었고 백제에 의해 정권을 잃기전까지 일본 규슈와 간사이를 지배했던 지배세력이다. 이 똥멍청이야
엥. 임나일본부설 그거 옛날에 한참 논란이 있었다가 한국 역사학자들과 일본 역사학자들이 함께 연구한 결과, 임마일본부설은 가짜인 것으로 결론 났어요! 님 배울 때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의혹을 제시하던 시기였나봐요. 한국사 강의 들으면서 알게 됐고요. 그래서 예전에는 한국사 과목이 있는 시험에서는 임나일본부 관련해서 어느정도 시험문제로 출제됐었는데 요즘은 가짜인 것으로 결론나서 다른 중요한 사건들도 많으니 비중이 크게 줄어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아 그런가요..? 그렇지만 전방후원분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그게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근거는 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전 배울 때 임나일본부설이 성립될 수 없는 이유로 우선 가야는 선진국이었고 또 임나일본부설이 가야에 식민지를 369~562년에 건설하였다는 내용이잖아요. 하지만 임나일본부설이라는 내용이 720년 일본서기에서 처음 등장하며, 일본이라는 용어 자체가 670년에 만들어졌기에 따라서 그 전에는 일본이라는 용어가 없었기에 한국과 일본학자들이 일본서기가 조작된 내용이다로 결론 냈었다고 배워서요! 나름 국가 관할 시험 준비하는 곳인데 가르쳐주시는 선생님께서 사학과 나오셨고 학식이 폭넓으시다는 느낌도 드시는 분이고 뭣보다 꽤 큰 시험이라 다들 저처럼 배우고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저도 깊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렇다 하더라도 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전 제가 맞는 것 같습니답 ㅠㅠ!
일본고서기 기록에 따르면 금관가야 왕족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규슈 북부 아소산에서 도래인들을 규합해 규슈와 오사카까지 정복하고 일본최초의 덴노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가야는 일본으로 건너가 덴노가 되었고 백제에 의해 정권을 잃기전까지 일본 규슈와 간사이를 지배했던 지배세력이다. 이 똥멍청이야
김유신배신이 크다고볼수있음 더웃긴건 경주김씨는 그떄 발음이 중국식(金)진 씨고 김해는 김씨인데 같은성씨라 말하고 들어감 그런데 과학적으론 전혀 다른 민족의 성씨이며 시대상으로도 맞지않음 소호금천이라 김유신이말한 성씨는 흉노성씨가아닌 중국 기원전의 황제의 칭호이며성씨도아님 지금으로치면 전주나 경주같은 성씨의 부속칭호이며 중국에서 김씨는 진씨로발음조차 금천과 다름 또한 흉노는 중국과 전쟁중인 적국으로 은 하 주 송 한 나라가 수개가 바뀔떄까지 흉노족과 대결중 한나라떄 배신한흉노에게 김씨(진) 성하사해서 전혀상관이없는데 구라침
역사 스페설 감사합니다 !
YTN 사이언스 감사합니다 !
역사는 잊지않고 배워야 합니다
역사 스페설 . YTN. 사이언스
제작자님 들께 감사드립니다.
선조들의 문화 유산과 유물을 보고
역사를 통하여 많은 선조들의 지혜를 통하여 깨달음을 배우고
있습니다. 고려 청자와 신라 황룡사
목탑은 현대 기술로도 쉽게 접근을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비의 문화 유산과 유물을 남겨
선조들께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해설사님과 사학자
교수님 감사합니다 ! 🎉🎉🎉🎉
뺏기지 않고 지키려는자들 보다 뺏어 먹으려는 자들의 욕구가 더 왕성하다. 당시는 금과 구리 그리고 철의 생산이 국력을 키우는 요소였다. 가락국 중 이 3대 중요 산물은 그 어느 곳보다 아라가야 지역이 풍부했고 또 뱃길이 용이해 일찌기 진동포구와 합포를 이용해 왜와의 거래가 빈번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볼 때는 아라가야의 금과 구리와 철의 산지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고 크게 보면 바로 지척이나 다름이 없는 지역에 이 모두가 모여있었던 것이다. 즉 군북지역의 금과 구리 그리고 중리 지역의 구리와 철은 매우 근거리 지역에 매장이 되어있어 일본과의 교역이 더 우선했고 그로인해 한반도 내에서의 국토 확장의 의지 보다는 손 쉬운 무역과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 오히려 국력 확장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역으로 만약 금과 철과 구리의 산지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왜와의 뱃길이 쉽지 않았더라면 아라가야는 분명 자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군사력을 더 키워 국토 확장에 힘을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에 교류를 할만한 다른 세력이 없었어요 ㅎㅎ 당시까지는 직접 지배. 같은 나라입니다. ㅎㅎ 혼슈는 아니고 큐슈까지겠죠. 거리상 가까운
모라노 김씨가 원래 100년전엔 국민의 50프로이상이 김씨였고 지금도 30프로이상인 김씨나란데
생뚱맞게 대마도에서 이장하던 고종이 한반도에 들어온거
추정한다
광양 순천지역도 철도공사때 가야토기유물이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전북. 전남동부권과 경상남도권이 풍습이나 어원들이 비슷한것들이 많습니다.
가야에서 규슈로 넘어가는 인구가 많았기에 신라보다. 항상 숫적 열세에 있다보니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했을것.
김유신 할애비가 금관가야를 신라에 팔아먹음.. 다른 이유는 없음
대가야는 백제가 일으킨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죽고 백제가 대패하였습니다 그때 백제의 요청에 힘이 약해서 어쩔수없이 백제의 지시에 따라 동원되었던
대가야의 전병력이 1만명 정도였습니다 백제군들의 대량전사와 함께 백제연합( 백제군, 대가야군, 왜군 연합)이 신라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 군대가 지금의
용인 부근에 주둔 하였다가 남하를 하면서 지원하여 백제연합은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대가야의 전병력이나 마찮가지인 1만명이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되자 대
가야는 여자들만남게되고(15세 이상부터 노인들까지 참전) 신라장군 이사부가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도왔던 대가야를 정벌하러 출전 하였으나 이사부의
본진 4천명이(그중 2천명은 노인들로 이뤄진 보급부대) 오기도 전에 선봉대인 16세 화랑 사다함이 이끌던 청소년 낭도들에 대항하여 대가야는 싸울 군인들도 없어
수도가 함락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본진은 밀양쯤에 있는데 단1000명 정도로 함락이 될만큼 대가야는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신라군이 금관가야(김해와 그주변)을 정벌할때 이미 신라는 주변의 여러국가들을 정복하여 국가가 아주 커져있던 상태였습니다
신라도 처음에는 가야와 같이 지금의 경주정도 만이 신라였고 주변의 청도나 의성 경산 등 여러곳에 다른 국가들이 있었습니다
신라가 발전하는데 가야는 연맹체로 남아서 금관가야의 경우 신라를 기습침공하여 승리도 거두었으나 주변세력들과 이해다툼으
로 더이상 발전하지 못했고 백제와 같이 거대해진 신라가 쳐들어 오자 신라군의 규모에 도저히 방어할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항복
하고 신라는 금관가야의 왕족들을 귀족으로 편입시키면서 다른 주변국가 왕족들처럼 귀족으로 예우를 해주었습니다 신라가 침략
은 하였으나 큰전쟁없이 평화적인 합병이 되었습니다 백제나 고구려 역시 주변의 부족들이나 작은 국가들을 끝없이 공격하여 전쟁
으로 합병하여 영토가 넓어진 것입니다 신라와 백제가 커지기 전에는 한강이남에만 40여개 정도의 국가가 있었습니다
가야 역사는
흡수했던 신라에서
불태우고 지워버렸을듯요..
그게 아니라면 역사서가 사라질 이유가..
이보세요? 가야가 없어다면 과연 신라가 있을까요. 저 시조가 김수뢍 자손이지만 학술이 중요해요 뿌리가 있어야 하거든.
김유신 할애비가 가야를 신라에 팔아먹음.. 가야의 고종 같은 개
산사람을 죽은 왕을 따라 순장하는 미개한 상태에서 역사서는 무슨 역사서?
신라역시도 초기기록이 부실해서 신뢰할수 없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가야기록을 불태웠다라는 것은 있슬수가 없습니다.
가야의 문명수준이 주나라초기즉중국으로보면
서주시대정도 미신이 판을치던시대
가야 고분 1600년 만에 문이 열리다. 대목이 신비롭습니다.
베일에 싸인 고대 역사를 배우고
알게 해주셨서 감사합니다.
김해 박물관에 가서 깨달고 배우고
왔습니다. 학예사 연구원을 비롯
하여 해설사님 들께 감사드립니다
역사를 배워야 미래가 보입니다
훌륭한 문화 유산과 유물을 남겨
주신 선조들께 고개숙여 감사 드립
니다. 교수님들이 연구를 하시면
더욱 발전된 결과물이
나타 나실것으로 생가합니다.
감사합니다 !🎉🎉🎉🎉🎉
대가야는 백제가 일으킨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죽고 백제가 대패하였습니다 그때 백제의 요청에 힘이 약해서 어쩔수없이 백제의 지시에 따라 동원되었던
대가야의 전병력이 1만명 정도였습니다 백제군들의 대량전사와 함께 백제연합( 백제군, 대가야군, 왜군 연합)이 신라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 군대가 지금의
용인 부근에 주둔 하였다가 남하를 하면서 지원하여 백제연합은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대가야의 전병력이나 마찮가지인 1만명이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되자 대
가야는 여자들만남게되고(15세 이상부터 노인들까지 참전) 신라장군 이사부가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도왔던 대가야를 정벌하러 출전 하였으나 이사부의
본진 4천명이(그중 2천명은 노인들로 이뤄진 보급부대) 오기도 전에 선봉대인 16세 화랑 사다함이 이끌던 청소년 낭도들에 대항하여 대가야는 싸울 군인들도 없어
수도가 함락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본진은 밀양쯤에 있는데 단1000명 정도로 함락이 될만큼 대가야는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가야 역사를 잘보고갑니다
끝으로 짧게 고려사 어필하고갑니다,고려 서경이 대륙북경입니다,구글지도로 검색이 가능한데 북경근처에 왕건마을 고려영 연개소문 비도훈련장 등등 많은 지명들이 그대로살아숨쉬고 있습니다,우리역사에 소소한 관심이라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ㅉㅉ 대륙삼국설 ㅉㅉ 그때 고려랑 국경 맞닿고있던 중국 어느나라임??
남경에 있던 홍건적이 고려서경에 침입했는데 아직 원이 존재했는데 어떻게 요동과 만주를 지나 반도의 개성까지 침입함?
홍건적이 명을 세우고도 산해관을 못넘었는데 어떻게 나라도 세우기전에 요동을지나 개성까지 침입했는지 설명좀 해줘. 이@@soosoosoo1234
그렇죠 남경의 홍건적이 개성을 침입했는데 아직 원이 망하기 전인데 요동을 지나 한반도 깊숙이 개성까지 침입했다는게 말이 안되죠
홍건적이 명나라를 세우고도 산해관도 못넘었죠 물론 요동의 여진족이 명의 영향력을 받아서 임진왜란때 원군도 보낼수 있었고 사신도 지나 다닐수 있었으나 홍건적이 중국남부에서 원과 여진을 뚫고 개성까지 왔다는거는 말이 안됨
고려는 고구려와 같은 말로 고려는 옛고구려 땅을 지배했을거임
한 수십개될껄
챕터라도 있어야지 8시간 짜리를 어떻게 보나....
틀고놓고 자면 됨
하루 2시간씩 나눠보시요
ㅋㅋ 첨에 8분짜리인줄
진짜 여덜시간 이었네 ㅋㅋㅋ
보지마
망한 가야는 일본으로 건너가 큐슈 지방을 정복하여 살았다고 하죠.
대가야는 백제가 일으킨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죽고 백제가 대패하였습니다 그때 백제의 요청에 힘이 약해서 어쩔수없이 백제의 지시에 따라 동원되었던
대가야의 전병력이 1만명 정도였습니다 백제군들의 대량전사와 함께 백제연합( 백제군, 대가야군, 왜군 연합)이 신라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 군대가 지금의
용인 부근에 주둔 하였다가 남하를 하면서 지원하여 백제연합은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대가야의 전병력이나 마찮가지인 1만명이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되자 대
가야는 여자들만남게되고(15세 이상부터 노인들까지 참전) 신라장군 이사부가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도왔던 대가야를 정벌하러 출전 하였으나 이사부의
본진 4천명이(그중 2천명은 노인들로 이뤄진 보급부대) 오기도 전에 선봉대인 16세 화랑 사다함이 이끌던 청소년 낭도들에 대항하여 대가야는 싸울 군인들도 없어
수도가 함락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본진은 밀양쯤에 있는데 단1000명 정도로 함락이 될만큼 대가야는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잘 봤습니다~~! 요즘,우리나라 역사/유물유적에 다시 관심가지게되네요ㅎ
중량의 법칙 - 약한것은 강한것에 흡수됨- 따라서 평화타령 하기전에 스스로 강해져야함
김유신 할애비가 신라에 나라를 팔아먹어서지 뭔 다른 이유가 있나?
가야는 제대로 세상에 알려져야한다
너무 숨겨진게 많다
가야를 되찾아
가야를 위하여!
가야를 부흥시켜라!
대가야는 백제가 일으킨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죽고 백제가 대패하였습니다 그때 백제의 요청에 힘이 약해서 어쩔수없이 백제의 지시에 따라 동원되었던
대가야의 전병력이 1만명 정도였습니다 백제군들의 대량전사와 함께 백제연합( 백제군, 대가야군, 왜군의 연합)이 신라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 군대가 지금의
용인 부근에 주둔 하였다가 남하를 하면서 지원하여 백제연합은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대가야의 전병력이나 마찮가지인 1만명이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되자 대
가야는 여자들만남게되고(15세 이상부터 노인들까지 참전) 신라장군 이사부가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도왔던 대가야를 정벌하러 출전 하였으나 이사부의
본진 4천명이(그중 2천명은 노인들로 이뤄진 보급부대) 오기도 전에 선봉대인 16세 화랑 사다함이 이끌던 청소년 낭도들에 대항하여 대가야는 싸울 군인들도 없어
수도가 함락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본진은 밀양쯤에 있는데 단1000명 정도로 함락이 될만큼 대가야는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는 사국시대가 옳다. 그러나 엄연히 존재했던 가야왕국을 제외하고 왜 우리는 역사교육을 삼국시대라고 가르치나?
국가의 조건에 미치지 못해서 1영토확장 2단일정부 3법율체계 가야는 연맹체 여러마을 부족단체 가야라는 이름만 보면 하나의 큰 국가라 볼수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라서 가야안에 여러세력이 많아서 하나의 국가라 볼수 없다는게 제일큼 그럼 4국이 아니라 최소 10국시대라 해야 하기 때문에 가야에만 최소7개국이니까
한국사 공부좀 글좀 올립시다. 왜 4국이 안되는지 조금만 공부해도 알수 있는데
목지국은 안넣었나? 옥저 동예는 ㅋㅋㅋ
님 그런 논리면 가야 존속시기 부여도 그렇고 5세기 까지 독자적 세력의 모습을 보이는 영산강 유역 마한도 붙여야 됩니다
가야국의 식민지가 왜 였음. 그래서 빼지 않았을까 싶네요.
고대 지도에서 함창지역 (고녕가야) 빼고 이야기 하는 것이 뭔 가야사 연구를 올바르게 한다고 하는것일까요?
대가야는 백제가 일으킨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죽고 백제가 대패하였습니다 그때 백제의 요청에 힘이 약해서 어쩔수없이 백제의 지시에 따라 동원되었던
대가야의 전병력이 1만명 정도였습니다 백제군들의 대량전사와 함께 백제연합( 백제군, 대가야군, 왜군의 연합)이 신라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 군대가 지금의
용인 부근에 주둔 하였다가 남하를 하면서 지원하여 백제연합은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대가야의 전병력이나 마찮가지인 1만명이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되자 대
가야는 여자들만남게되고(15세 이상부터 노인들까지 참전) 신라장군 이사부가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도왔던 대가야를 정벌하러 출전 하였으나 이사부의
본진 4천명이(그중 2천명은 노인들로 이뤄진 보급부대) 오기도 전에 선봉대인 16세 화랑 사다함이 이끌던 청소년 낭도들에 대항하여 대가야는 싸울 군인들도 없어
수도가 함락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본진은 밀양쯤에 있는데 단1000명 정도로 함락이 될만큼 대가야는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청정심(평기허심) 박치우]
역사는 겨레의 정신이다
바른 정신을 가져야 사람이 바르게 살아가는 것처럼
바른 역사를 가져야 겨레가 바르게 살아간다
장수역사전시관 학예사님 최고
경북 성주에도 고분동 있는데 성산가야가 맞나요
맞습니다~~♡
블소 브금을 여기서 듣다니 ㅋㅋ
ㄹㅇ ㅋㅋ
대가야가 망한이유는 확실함.. 사방이 산이고 뚫린 길이 산세가 험해 전진이 불가할정도로 높음... 고령가 보면 아직도 산속에 마을이 분산되어 수십가구씩 있음. 도로도 옛국도임(신도로는 잘되어있으나 마을로 진입 못함)..발전가능성 제로.
대가야는 백제가 일으킨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죽고 백제가 대패하였습니다 그때 백제의 요청에 힘이 약해서 어쩔수없이 백제의 지시에 따라 동원되었던
대가야의 전병력이 1만명 정도였습니다 백제군들의 대량전사와 함께 백제연합( 백제군, 대가야군, 왜군의 연합)이 신라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 군대가 지금의
용인 부근에 주둔 하였다가 남하를 하면서 지원하여 백제연합은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대가야의 전병력이나 마찮가지인 1만명이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되자 대
가야는 여자들만남게되고(15세 이상부터 노인들까지 참전) 신라장군 이사부가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도왔던 대가야를 정벌하러 출전 하였으나 이사부의
본진 4천명이(그중 2천명은 노인들로 이뤄진 보급부대) 오기도 전에 선봉대인 16세 화랑 사다함이 이끌던 청소년 낭도들에 대항하여 대가야는 싸울 군인들도 없어
수도가 함락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본진은 밀양쯤에 있는데 단1000명 정도로 함락이 될만큼 대가야는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김해부터 장수까지 한반도 남중부 대부분이 가야 였구나...
대가야는 백제가 일으킨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죽고 백제가 대패하였습니다 그때 백제의 요청에 힘이 약해서 어쩔수없이 백제의 지시에 따라 동원되었던
대가야의 전병력이 1만명 정도였습니다 백제군들의 대량전사와 함께 백제연합( 백제군, 대가야군, 왜군의 연합)이 신라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 군대가 지금의
용인 부근에 주둔 하였다가 남하를 하면서 지원하여 백제연합은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대가야의 전병력이나 마찮가지인 1만명이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되자 대
가야는 여자들만남게되고(15세 이상부터 노인들까지 참전) 신라장군 이사부가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도왔던 대가야를 정벌하러 출전 하였으나 이사부의
본진 4천명이(그중 2천명은 노인들로 이뤄진 보급부대) 오기도 전에 선봉대인 16세 화랑 사다함이 이끌던 청소년 낭도들에 대항하여 대가야는 싸울 군인들도 없어
수도가 함락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본진은 밀양쯤에 있는데 단1000명 정도로 함락이 될만큼 대가야는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가야는 김해부터 전라도 목포 나주 부근 북으로는 고령 성주 부근 까지 있었죠 6가야라고 해서 .. 그런데 전라도 나주부근에서
일본과 똑같은 양식의 오징어모양의 무덤도 많이 발견되었고 유물들도 일본의 유물과 똑같은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일본에서도 임나일본부를 주장하고 .. 광개토대왕비문에서도 바다를 건넜다는 이야기도 없는데 신라에 침입한 왜군들을 물리
쳐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주변의 중국이나 다른세력들이 언제 쳐들어 올지 모르는데 5만명의 병력을 배를
이용해서 바다를 건널 시간적 여유도 함선건조능력도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아마 그전에 중국을 먹어치웠을것입니다 고로 왜
는 한반도 남쪽에 있었다는 것이 일부 증명되기도 합니다
경남의 6가야 이외의 또다른 6가야는 충북 제천과 전북 장수및 전남 순천등에서 발굴되고있다
고령대가야 상주가야
잠잘때 들으면서 자게 잡소리배경음악좀배주세요
좋아요😮
가야
타임스탬프라도 찍어주세요
가야고분은 중앙아시아 쿠르간의 연장이고 신라고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지.
니가아냐-
김해 이하 경상도 전북 순천 곡성 하동 이지역이 다 가야라고 하였다 허황옥공주가 이나라에 와서 불교를 펼칠려고 하였으나 우리나라사람들이 무지하여서 펼치지를 못 하였다고 한다 싫고온 파사석탐은 가섭존자 부처님이 수행할때 앉았든 탑이라고 합니다
대가야는 백제가 일으킨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죽고 백제가 대패하였습니다 그때 백제의 요청에 힘이 약해서 어쩔수없이 백제의 지시에 따라 동원되었던
대가야의 전병력이 1만명 정도였습니다 백제군들의 대량전사와 함께 백제연합( 백제군, 대가야군, 왜군의 연합)이 신라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 군대가 지금의
용인 부근에 주둔 하였다가 남하를 하면서 지원하여 백제연합은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대가야의 전병력이나 마찮가지인 1만명이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되자 대
가야는 여자들만남게되고(15세 이상부터 노인들까지 참전) 신라장군 이사부가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도왔던 대가야를 정벌하러 출전 하였으나 이사부의
본진 4천명이(그중 2천명은 노인들로 이뤄진 보급부대) 오기도 전에 선봉대인 16세 화랑 사다함이 이끌던 청소년 낭도들에 대항하여 대가야는 싸울 군인들도 없어
수도가 함락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본진은 밀양쯤에 있는데 어린 보병인 낭도 단1000명 정도로 함락이 될만큼 대가야는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가야는 삼국시대 나라처럼 홍산문명을 잘이어갔다고 생각되네요
홍산문화는 문자가 없어서 문명은 아니네요 그리고 후계 문화가 없읍니다. 고조선으로 인정되는 정가와자 문화와 시기적으로 너무 멀고 부여세력인 서단산문화 등은 장춘지역 토착문화와 한나라문화가 뒤섞인 양상을 보입니다.
가야는 김해부터 전라도 목포 나주 부근 북으로는 고령 성주 부근 까지 있었죠 6가야라고 해서 .. 그런데 전라도 나주부근에서
일본과 똑같은 양식의 오징어모양의 무덤도 많이 발견되었고 유물들도 일본의 유물과 똑같은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일본에서도 임나일본부를 주장하고 .. 광개토대왕비문에서도 바다를 건넜다는 이야기도 없는데 신라에 침입한 왜군들을 물리
쳐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주변의 중국이나 다른세력들이 언제 쳐들어 올지 모르는데 5만명의 병력을 배를
이용해서 바다를 건널 시간적 여유도 함선건조능력도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아마 그전에 중국을 먹어치웠을것입니다 고로 왜
는 한반도 남쪽에 있었다는 것이 일부 증명되기도 합니다
고조선 사천년 역사 홍산문화고분 은 외 재조명 하지 않나요 한단고기 에 대하여 설명 하여주세요
가야는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잇엇던걸 진정모른단말이더냐?
니가가야하와이
가야 몰락한게 아니라.. 백제의 동맹국인 가야 안에 있는 사라국이 사라진거에요.. 가야도 여러 연맹 집단들이 있었고 아래 집단 가야는 신라에 흡수되서 산라졌다니보단 신라와 통합됩니다..
대가야는 백제가 일으킨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죽고 백제가 대패하였습니다 그때 백제의 요청에 힘이 약해서 어쩔수없이 백제의 지시에 따라 동원되었던
대가야의 전병력이 1만명 정도였습니다 백제군들의 대량전사와 함께 백제연합( 백제군, 대가야군, 왜군의 연합)이 신라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 군대가 지금의
용인 부근에 주둔 하였다가 남하를 하면서 지원하여 백제연합은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대가야의 전병력이나 마찮가지인 1만명이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되자 대
가야는 여자들만남게되고(15세 이상부터 노인들까지 참전) 신라장군 이사부가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도왔던 대가야를 정벌하러 출전 하였으나 이사부의
본진 4천명이(그중 2천명은 노인들로 이뤄진 보급부대) 오기도 전에 선봉대인 16세 화랑 사다함이 이끌던 청소년 낭도들에 대항하여 대가야는 싸울 군인들도 없어
수도가 함락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본진은 밀양쯤에 있는데 어린 보병인 낭도 단1000명 정도로 함락이 될만큼 대가야는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가야는 스키타이족+타밀족
역사를 유물에서 찾는 다는 것은 일부입니다. 인류를 먼저 연구하고 그들의 발전과 발달 이동을 먼저 알아야…
가야 망한것이 아니라 일본으로 이동 했음 낙랑 만주에 있었음
일본의 시조는 오태백이며 일본의 조상 나라들이 바로 오나라 월나라임
가야는 스키타이족+타밀족
@@Silla_Gates5 그게 사실이면, 왜 일본인들은 중국말 비슷한 언어를 쓰지않고, 한국말 비슷한 언어를 쓰나?
@@davidjacobs8558
일본어와 우리나라 말은 완전히 다름 ㅋ
@@davidjacobs8558
일본어는 오스트로네시아어에서 유래되어진 것이며 한국어는 신라어 신라어는 타밀어 즉 드라비다어에서 유래가 되어진 것임 ㅋ
소달구지시절인 마한(백제)과 가야(신라)는 소백,태벡산맥으로 인해 교류가
없었다.
요즘에나 표준어를 적극적으로 보급하는 방송으로 인해 서로 사투리를 알아들을 수 있지,
당시엔 전혀 언어가 통하지 않은 아예 상호간에 외국이었다.
백제철기마한이 경북가야 입니다. 경남지역으로 이주민인지 순장세력이 등장하며 백제와 멀어지고 신라 가야가 가까워 지는거죠. 그전까진 마한이나 경주나 고조선 단일문화권 이었고 .2000년 이후로는 철기마한이 경북가야로 진출해 단일 문화권 이었어요.
지금가야해😂
Fail to extend
난개발로ㅜ없어자누유물둘아ㅜ얼마나 많았을지
김해 박물관 갔다왔는데ㄷㄷ
삼국사기에 나오는 가야는 중국대륙 남부지역에 존재했습니다. 한반도의 가야라고 명칭된 문명은 삼국사기의 가야가 아닙니다. 별도의 한반도 문명입니다.
그래서 사기 네요
Ytn및을수 있는 방송국인가.묻고십다?
3.5국시대
Good😊
반도에.없었습니다.대륙에.가야의.역사 다.나오는데요...
한국사 📚 에 가야는 한장 분량도 안되게 실림
지금 대한국이 몰락되는데 가야가 문제냐?
그게 다 586 때문임
니 때문은 아니고?
@@지존형-d1u
아니지 ㅋ 586 때문이지 ㅋㅋㅋ
요즘보니 신라백제 가야가 중국에 있었다는 사람들도 많더라;;;
가야가 그냥 왜임
임나일본부그런게 아니라 왜 자체가 가야의 일부
응 아님
전라왜국 임나와 스키타이족+타밀족인 가야는 완전히 다른 나라임
그리고 임나일본부는 본국인 야마토 왜국의 번국 나라였음 ㅋ
@@Silla_Gates5 일단 당시엔 일본은 없음. 그래서 일본부라 볼순없음. 가야는 수많은 잡나라들의 모임이고 일본부라 주장되는 세력은 그냥 왜의 유물이 나오는 왜국임. 식민지나 번국 이런것도 아니고 왜의 땅임. 유물에서 지배층과 피지배층 이중적인 구조가 나오지 않는데 번국이니 식민지니 하는 개념이 아님. 현재까지 발굴된 유물로만 보면 그냥 왜국이다란게 맞음. 그범위가 어디까지이고 연대에 따른 변천과정만 보면댐
@@레발랑도르
왜국=야마토=일본 ㅋ
오프닝 브금이 블소 경공 브금이네
가야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가야를 논하다니.. 저것들이 파제끼는 곳은 가야가 있던 장소가 아니다..사서 한 줄은 읽어봤나?
금관국 금관 가야.. 금해(김해). 동북쪽은 가야산이 서북쪽은 지리산이 서남쪽은 창해 동쪽은 황산강이 남쪽은 나라의 끝..
그래서 지금의 김해가 가야가 있던 지역이라고 구라칠래???
가야시대가 5ㅡ6백년인데 자체역사기록이 전혀없다는게 신기하네요.
가야중에 가장컸던 대가야도 백제의 강요에 의해서 어쩔수 없이 참전을 하였던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연합( 일본서기에도 나오고 삼국사기인가 삼국유사에
나옵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정월에 백제가 상부 덕솔(上部德率) 과야차주(科野次酒)[14]와 간솔(杆率) 예색돈(禮塞敦) 등을 일본에 보내 군병을
요청했고, 왜는 6월에 전쟁물자를 백제에 보내주었으며, 554년 초에도 왜가 구원군, 말, 배를 백제에 보내주고, 백제는 역박사, 의박사, 음악가, 승려 등 선진
문물을 가진 도래인들을 왜에 답례로 보내주는 등 신라와의 결혼동맹은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일 뿐 은밀히 전쟁준비를 계속하고 있었다.《일본서기》에서
는 왜에 원군을 요청하고 왜가 병력과 무기를 보내주는 것 위주로 기록되었지만, 백제 성왕도 이 시기 전쟁 준비로 연합군 편성을 진행했을 것입니다 철저한
준비를 하여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운이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삼국사기에서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연합군(백제 대가야 왜군) 4만명중 29,600 명이 전사한
것으로 나옵니다
신라, 경상도 그 마들한테,
뒤통수 맞고 나와바리 빼긴거 아이가,
오늘의 교훈, 뒤빡을 항상 조심하자 ‼ ㅋㅋㅋ
누가 뒤통수를 쳤음? ㅋ
그리고 가야는 스키타이 서흉노 신라와 거의 같은 동족임 ㅋ
고구려 백제가 중국사들이며 전라왜구 임나가 일본사지 ㅋ
그리고 너도 김씨면서 니 조상인 스키타이 서흉노 신라 김씨 왕족을 막 까노 ㅋ 열나게 웃기노 ㅋㅋㅋ
ㅇㅇㅇㅇㅇㄸㄴㅇㅇㅇㄴㄴㅃㅃㄴㄴㅈㅈㅉㅈㅈㅈㅈㅈㅈㅈㄷㅁㅁㅈㅉㅈ1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ㅈㅉㅈㅈㅉㅉㅉㅈㅉㅈㅉㅈㅈㅉㅈㅉㅈㅉㅉㅉ@@Silla_Gates5
경남 창녕군의(비사벌) 비화가야.
임나일본부에 대해서는 우리나라도 열린자세로 함께 조사해야한다고 봅니다.
임나는 금관가야 또는 가야 전체를 부르는 별칭이었습니다.
또한 임나일본부는 일본이 가야를 정벌한 후, 이에 대한 통치기관을 의미합니다.
이때는 백제가 가야를 적극적으로 공격하던 시기인걸 감안해야하는데, 백제 국가 구조상 ..
중앙군으로만 공격한게 아니고, 중앙군이 사령관과 함께 지방으로 내려오면, 그 지역 지방군이 보급을 담당하고 전투병력 차출하는 식으로 전개되었을겁니다.
백제 중앙에서 파견나온 가문은 목씨 가문 또는 사택가문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있습니다.
목씨가문은 백제와 해상무역으로 큰 가문인데, 나주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사택가문은 군사요충지인 부여지방에 기반을 두고 있고, 군사적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추정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제 생각인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목씨가문은 근초고왕의 가야남정시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나옵니다.
목씨가은 해상무역을 했기 때문에 일본과도 해상무역을 했었고, 일본내 목씨가문이 일본영주들을 규합해서 군대를 만들어 남정시 합류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연합군이 구성된 것인데,
백제 중앙군 + 백제 목씨가문 부대 + 목씨가문 동맹부대(일본) +사택씨 부대... 이렇게 공격군이 구성된것 아닌가 봅니다.
가야의 일정부분을 점령한 후, 이곳을 식민지화시키는데 이때 일본에 이권을 줘야했겠지요
이때 준게 점령지 일부일수도 있고,, 점령지의 이권일수도 있을거라 봅니다.
점령지 또한 이권에 대한 일본의 통치기관이 임나일본부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 생각엔 아마도 , 직접통치에 대한 능력이 일본에게는 없었을거라 봅니다.
애초에 이 지역의 무역이득을 제외하면, 농사가 일본보다 잘되는것도 아니고,, 괜히 군대 주둔시키면서 비용만늘어났을테니
차라리 임나지역의 무역권을 관리하기 위한 통치기관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조선이 대마도나 여진을 정벌하고, 유지비도 안나올것 같으니까 그냥 돌아간것과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일본 통치자 입장에서 바다건너 군대 주둔시키면, 그 부대장이 언제라도 마음 돌려서 백제한테 충성한다고하면 엿되는거니까요
임나일본부는 일본의 부속 국가 맞음
지금 전라도에서 일본식 무덤들이 수두룩하게 계속해서 발견이 되어지고 있는 상태임
화교수준ㅋㅋ. 일본주류학계에서도 부정한걸 붙잡고있네 비응 신
@@aa-bz8jg
누가 부정을 함? ㅋ 일본 중국 심지어 서양에서도 다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데 말이지 ㅋ
@@Silla_Gates5 임나일본부를 가르치고 있다는 그 서양학계는 어디며, 어떤소스를 가지고 그렇게 주장한다는겁니꽈~ 지나족님? 가야사 전문적으로 파고 임나일본부 밝혀내려고 했던 일본 주류학자들이 한국 학자들한테 토론 ㅈ발리고 공식 폐기했는데 도대체 어떤 소스를 쓴건지 정보공유 부탁~ㅋㅋ
가야 먹히고 훗날 신라먹음
임나일본부 때문임
현실은 백제가 마한이랑 가야정벌하고 일본까지 먹음ㅋㅋ
@@aa-bz8jg
그런 기록 전혀 없음 ㅋ
@@aa-bz8jg
소설을 너무 잘 쓰고 역사를 니 뇌피셜로 쓰면 혼남
@@aa-bz8jg
그리고 백제는 중국사임
@@Silla_Gates5 소설은 지가쓰고 자빠짐ㅋㅋ 백제가 중국사ㅋㅋㅋ 🪳
가야는 고구려와백제 다음으로 세워졌습니다
신라에 뒤통수 맞은 것일테지...
가야 지역이 어디인지 모르면서 그저 비정 추정에 의한 위치를 진짜 역사처럼 .,...
순장 문화의 결정판인 가야. 끔찍하다
불과 2천년 전에 순장이 버젓이 이루어졌다니
소설 소나기나 보세요
34:49 임나일본부설을 그대로 인정하는거임??? ㅋㅋㅋㅋ 어이노노
157세 실화인가요
따로 따로 살자고 나가니 다같이 망하는 것 ㅋ
몰락은 무슨 몰락, 너희들속에 살아숨쉬고있지. 그들이없었으면 나도 너도 앞으로 그들도 없지. 너희집 계보나파봐!!
伽耶(=加耶,加倻)는金官伽耶(任那伽耶,廣開土大王碑엔 任那加羅로,)& 高靈의 大伽耶(加羅)!!😂金首露,許黃玉(中國出生??.印度아닌!)。古代殉葬風習變貌😊
나는 아직도 가야를 나라 취급 안하는거 이해가 안간다. 지나의 수많은 단명 군벌정권들도 다 황제국 대우 해주면서 말이다.
진한의 영토를 할애 한것이 가야요 신라인데
사람 죽여서 같이 묻는 순장을 그렇게 했으니 국력이 쇠퇴하지.
기아의 몰락으로 잘못보고 읭?
도시국가로분열되어서각개격파
ㅋㅋ수로왕 다문화가정의 원조ㅋㅋㅌ
망하든지 인지우짜라꼬?
사실적시명예훼손 폐지에 함께해주세요
전라도와 경상도는 가야사로 인해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이제 알게네요 훙건족이 김씨시조라 하던데 인도와 허왕후 뭇어온 가락국 실체네요.
야만적인 순장 문화
ㆍ
가야는 신라의 밥잂뿐
애초에 백제 식민지였는데 몰락이고 자시고 할께 어디있음?
교과서보고 이야기하는사람많으시네요, 가야는 아마도 당나라입니다, 당을 일본한자표기로 가라, 가야로 표기됩니다, 그리고 역사책에 김법민이 아당 이라고표현하구요, 당과신라의 왕족계보가 겹치는시기도있구요, 신목황후와 측천무후. 일초와이치등 그리고 신라와가야는 병합한거다보니,
여기서도 설치네 오마우당
여기서도 설치네 오마우당
아마도 라고 말하면 ㅋㅋㅋ 걍 뇌피셜 이잖아 ㅋㅋㅋ 가야는 아마도 아프리카에 있는 가이아나 가 가야의 자리입니다. 가야의 옛이름이 가이아나 입니다. 딱 들어 맞네요
뭐래는거야. 몰르면 가만히 뒤비지라. 나대지 말고
임라일본부🎉🎉🎉
좋은 프로인데 배경음악때문에 망했다
소음개판이디.내용에 집중이안되고 스트레스다.개판음악 잔혀어울리지 않는음악을 배경으로깔아 시청포기한다.참말로 개판이다!!!!!
일본국가 가야인가요?
일본고서기 기록에 따르면 금관가야 왕족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규슈 북부 아소산에서 도래인들을 규합해 규슈와 오사카까지 정복하고 일본최초의 덴노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가야는 일본으로 건너가 덴노가 되었고 백제에 의해 정권을 잃기전까지 일본 규슈와 간사이를 지배했던 지배세력이다. 이 똥멍청이야
응 아님
일본의 조상 나라들은 오나라 월나라임
@@Silla_Gates5 놀고있네 혼자 망상에 빠져사냐? 근거자료 말해봐라 ㅋㅋㅋ
@@NAYA_ESTJ
‘22명 집단 성폭행’ 피의자 부모 언행 논란 “이제 와서 어쩌라고” (2016-06-29)
흑수 부여(광개토)
고구려(문무)ㆍ백제(무열)신라(태조 왕건)
고령 가야(선덕여왕)
마한(근초?/성왕?)
ㅡㆍ전기:6국시대 400년
ㅡㆍ삼국시대는 근초고이후
300년
소설 쓰지 말기 바람 ㅋ
진짜 소설가네 ㄷㄷ
임나일본부설은 사실임
엥. 임나일본부설 그거 옛날에 한참 논란이 있었다가 한국 역사학자들과 일본 역사학자들이 함께 연구한 결과, 임마일본부설은 가짜인 것으로 결론 났어요! 님 배울 때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의혹을 제시하던 시기였나봐요. 한국사 강의 들으면서 알게 됐고요. 그래서 예전에는 한국사 과목이 있는 시험에서는 임나일본부 관련해서 어느정도 시험문제로 출제됐었는데 요즘은 가짜인 것으로 결론나서 다른 중요한 사건들도 많으니 비중이 크게 줄어든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막동이임다
응 아니야 ㅋ
@@막동이임다
그리고 지금 전라도에서 일본식 무덤인 전방후원분이 수두룩하게 발견이 되고 있음 ㅋ
아 그런가요..? 그렇지만 전방후원분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그게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근거는 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전 배울 때 임나일본부설이 성립될 수 없는 이유로 우선 가야는 선진국이었고 또 임나일본부설이 가야에 식민지를 369~562년에 건설하였다는 내용이잖아요. 하지만 임나일본부설이라는 내용이 720년 일본서기에서 처음 등장하며, 일본이라는 용어 자체가 670년에 만들어졌기에 따라서 그 전에는 일본이라는 용어가 없었기에 한국과 일본학자들이 일본서기가 조작된 내용이다로 결론 냈었다고 배워서요! 나름 국가 관할 시험 준비하는 곳인데 가르쳐주시는 선생님께서 사학과 나오셨고 학식이 폭넓으시다는 느낌도 드시는 분이고 뭣보다 꽤 큰 시험이라 다들 저처럼 배우고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저도 깊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렇다 하더라도 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전 제가 맞는 것 같습니답 ㅠㅠ!
@@막동이임다
임나일본부 즉 왜인들이 세운 한반도 전라도 임나는 중국 문헌들인 삼국지 후한서에도 벌써 다 나옴
장수지역은 가야가 아니고 반도왜야 어휴
왜 자꾸 반도왜를 가야로 변조하려 하는지..
똥멍청이야
일본고서기 기록에 따르면 금관가야 왕족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규슈 북부 아소산에서 도래인들을 규합해 규슈와 오사카까지 정복하고 일본최초의 덴노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가야는 일본으로 건너가 덴노가 되었고 백제에 의해 정권을 잃기전까지 일본 규슈와 간사이를 지배했던 지배세력이다. 이 똥멍청이야
@@NAYA_ESTJ
삼국사기 일본서기 중국 문헌들에 전라도에 왜인들이 살았다는 내용이 다 나옴 ㅋ
@@NAYA_ESTJ
그 좋은 예가 전라도 전방후원분들임 ㅋ
@@NAYA_ESTJ
그리고 중국사인 백제는 일본의 신하 나라였음 ㅋ
김유신배신이 크다고볼수있음 더웃긴건 경주김씨는 그떄 발음이 중국식(金)진 씨고 김해는 김씨인데 같은성씨라 말하고 들어감 그런데 과학적으론 전혀 다른 민족의 성씨이며 시대상으로도 맞지않음 소호금천이라 김유신이말한 성씨는 흉노성씨가아닌 중국 기원전의 황제의 칭호이며성씨도아님 지금으로치면 전주나 경주같은 성씨의 부속칭호이며 중국에서 김씨는 진씨로발음조차 금천과 다름 또한 흉노는 중국과 전쟁중인 적국으로 은 하 주 송 한 나라가 수개가 바뀔떄까지 흉노족과 대결중 한나라떄 배신한흉노에게 김씨(진) 성하사해서 전혀상관이없는데 구라침
가야에 대한 어떤 기록도 없는데 얼빠진 작들이 진실이니 뭐니 개나발을 불어대는구나. 역사왜곡이다.
저건 고구려 병사인데 김해구 가야라는 증거는 ??? 이름이 밝혀진 왕릉이 나오지도 않앗는데 ㅎㅎㅎ 가야의 위치도 모르면서 ㅎㅎㅎ 웃긴다 정말
만이들 저세상 떠나 벼렸지.
도둑놈들이 서로 도적질 했으면서ᆢ 역사학자들 이런건 ᆢ파괴하세요 ᆢ공부 열심히 하시니까
그런거짓말 이젠그만.인간이 알에서 태어났나구?
니기미 뽕이다.
알이란 표현은 알~>엘, 하나님 곧 구별된 탄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저딴게 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