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대당평백제국비명'과 새긴 시기 | feat. 정림사지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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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Опубліковано 11 лис 2024
- 최근 부처의 공양 그릇인 불발로 밝혀진 부여석조.
부여석조에는 대당평백제국비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대당평백제국비명이 새겨진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것과
비교하면 절반만 새겨져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살펴본 영상입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부여석조에
대당평백제국비명을 새긴 시기에 대해서도 언급해 보았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어 영상 시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여석조 #정림사지 오층석탑 #백제 #당나라 #대당평백제국비명
| 참고 자료 |
1. 喜田貞吉 1925, 「大唐平百濟國碑に關する疑問」, 『考古學雜誌』15-5.
2. 김윤경, 1928, 「평제탑에 대하여」, 『한빛』 3.
3. 今西龍, 1934, 『百濟史硏究』, 京城近澤書店.
4. 고유섭, 1955, 「조선탑파의 양식변천」 , 『동방학지』 2.
5. 김영심 1992, 「唐平濟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6. 노중국, 2004, 『백제 부흥운동사』, 일조각.
7. 배근흥, 2008, 「大唐平百濟國碑銘 문제에 대한 고찰」 『충북사학』 20.
8. 최영성, 2008 , 「사비 시대의 백제 금석문」, 『백제실록 의자왕』, 부여군.
9. 충청남도역사문화 구원, 2008, 『백제사자료역주집 한국편Ⅱ』.
10. 구자훈,한민섭, 2012, 「翁樹崐의 平百濟塔 釋文 硏究 」, 『고전과해석 』13.
11. 김영관, 2013, 「大唐平百濟國碑銘에 대한 고찰」, 『역사와 담론』 66.
12. 박지현, 2015, 「대당평백제국비명」, 『한국고대문자자료 연구』 백제(하), 주13. 류성출판사,
14. 전지혜, 2018,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초기 조사와 탑신 명문에 관하
여」,『한국고대사탐구』28.
15. 한정호,2020, 「백제 석조의 성격과 미륵신앙」, 『미술사학연구』306.
16. 김지호,조영훈,류진호,황선빈,다바오르지, 2023, 「디지털 가시화 기술을 활
용한 부여 석조 명문 재검토 기초연구」, 『목간과문자』30.
17. 이향배, 2024,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관련 기록을 통해 본 조선 문인들
의 인식」, 『대동한문학』78.
정말...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막연하게 '이쁘다', '조상님의 기술 멋져' 이런식의 내용이 아니라 철저한 근거자료, 기록을 통해 추리하듯 들어가는 내용에 감탄만 나왔습니다. 부여석조 영상부터 연달아 2개의 영상을 본 시간이 정말 최근 유튜브에서 본 시간 중 가장 알차고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한국 국가유산의 관한 채널은 답사채널 외에 그렇게 관심가는 곳이 없었는데 오늘 영상 보는 내내 감탄만 했습니다. 다만 원본 되는 비석과 그 탑본이 언제, 어떤 이유로 사라졌는지가 궁금하네요. 원본이 남아있었다면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었을텐데요.
귀한 시간 내어 영상을 봐 주신 것도 감사한데 알차고 기억에 남을것 같다는 말씀에 더 힘내서 영상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들어습니다.
영상 재밌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흥미롭네요.순서가 정림사지 오층탑에 먼저 새기고 그 이유는 이 탑이 백제 도성의 랜드마크이기 때문에 그 다음 왕궁에 있던 부여석조에 새기고 이후 유인원의 기공비가 새워졌다라고 보았는데...비석 형태의 평제비가 존재했고 유인원이 기공비가 새워질 당시에 정림사지 오층탑과 부여석조에 복각 되었다.
영상 흥미롭게 시청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신기하지. 저기가 백제의 수도였다는 유물 유적은 없고 백제가 망한 증거만 남아있다는 거....
그냥 내 생각입니다만 당나라군들이 이국땅에서의 일시적인 승리로 인한 뭔가 모를 두려움 철군에 대한 불안함과 조급함으로 인해 후세에 기록이라도 서둘러 잔 뜩 남겨두려고 여기 저기 덕지덕지 복각을 잔 뜩 해둔게 아닌가 싶습니다. 왜 비근한 예로 오늘날에도 전두환 처럼 장군으로서 쿠데타를 성공한 후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념우표며 기념주화이며 자신의 치적을 기록으로 하나라도 더 남기려고 안간힘을 썻던 것과 비슷한 심경이 아니었나 합니다. 특히 사마천 이후 기록이야 말로 역사라고 생각했던 중국의 역사의식에서 그 인식이 절정에 달했던 당나라였으니 만큼 소정방 유인원 이근행을 비롯 당장들의 기록유산에 대한 유혹과 경쟁도 그만큼 치열했었다고 봅니다
당나라 놈들이 바보도 아니고 정식 비석 하나 못구해서 불교 탑과 유물에 낙서하듯 승리 흔적을 남겨? ㅎㅎㅎㅎ
올바른 지적 입니다.
배신자들이.너무많응게
조작된 유적을 뭘 그리 따질일이 있는지.
제작년도 규명부터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