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님은 보통 사람은 범접할수 없는 큰 그릇입니다. 일반인들이 장군과 같은 시련을 겪었다면, 좌절하거나 스스로 생을 정리했을겁니다. 명량해전의 실행도 , 그 수많은 이들이 반대해도, 심지어 든든한 지원자인 유성룡 마저도, 명량해전을 반대했지만, 장군은 해 내셨지요. 정말 큰 그릇이십니다. 정치인으로써는 부적합할수도 있으나, 기업, 학교, 군대 등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 만큼은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순신을 능가하는 이가 없읍니다. 그래서 곳곳에서 이순신 정신, 리더십을 따라 배웁니다.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고, 권한을 백성의 안전과 풍족한 삶에 의미를 두는 영웅은 언제나 기득권으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읍니다. 장군님은 군 고위 장성 신분임에도, 고단한 삶을 살다가, 나라를 구하고, 순국하셨읍니다. 대한민국의 영웅, 이순신 장군님 !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따라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패주했다. 난중 일기에 쓰고 있다. 이순신이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수군을 이겼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당시 조선 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며 협력했다. 일본군에 식량을 제공해 길 안내를 했다. 서울 왕궁에 방화한 것도 조선인이다. 이순신 등 당시 조선군은 대부분 사망했기 때문에 현재 한국인은 당시 민중의 후손이다. 따라서, 이순신은 당신의 조상의 적이다. 당신의 조상의 아군은 일본군이다. 이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이순신이 일본 수군을 이긴 것은 한산도 해전이 마지막으로, 그 후 7년간은 한번도 이길 수 없었다. 이순신은 여러 번 기습을 시도했지만 모두 일본 수군에 격퇴되어 도망가고 있다. 23전 23승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 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부산은 계속 일본 수군이 점거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부산을 탈환하지 못해 일본 수군에 쏠렸다.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에 쓰고 있다.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했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쓰촨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고, 그에 따라 삼로로 나뉘어진 명· 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지고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했다. 이순신은 일본전에 둘러싸여 쏠렸다.
한국인은 왜 역사를 날조하는가? 이순신이 일본 수군을 이긴 것은 한산도 해전이 마지막이며, 그 후 7년간 이순신은 기습 공격했지만 매번 일본 수군에 의해 격퇴되고 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명량 해전에서도 이순신은 결국 200km나 북쪽으로 도망치고 있다. 거북선이 준공한 증거는 없고, 일본군과 싸운 기록도 없다. 침몰한 기록도 없고, 잔해도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 기록에 이순신이 쓰여 있는 것은 한 번뿐이다. 그의 사망을 기록한 것이다. 일본 수군에게 이순신은 강한 적이 아니었던 증거이다.
@풀버젼야뎡저장소-v4u 이순신은 생각이 얕은 바보이다. 노량해전에서 일본 측 사령관에게 한 명의 죽은 자도 없었던 것은 조선에게 운이 좋았다. 만약 혼자라도 피해자가 나오면 일본군은 철수를 중지하고 조선을 재공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조선인의 죽은 자는 더욱 늘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일본 수군에 쏜 죽인 것은 조선에게 운이 좋았다.
그것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사실은 없다. 사실로는 한산도 해전 후 7년간 이순신은 한 번도 이기지 않았다. 기습 공격을 했지만 매번 일본 수군에 격퇴되어 퇴각하고 있다. 23전 23승은 후세의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왜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는가?
이순신이 일본 수군을 이긴 것은 한산도 해전이 마지막으로, 그 후 7년간은 한번도 이길 수 없었다. 이순신은 여러 번 기습을 시도했지만 모두 일본 수군에 격퇴되어 도망가고 있다. 23전 23승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 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부산은 계속 일본 수군이 점거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부산을 탈환하지 못해 일본 수군에 쏠렸다.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에 쓰고 있다.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했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쓰촨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고, 그에 따라 삼로로 나뉘어진 명· 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지고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했다. 이순신은 일본전에 둘러싸여 쏠렸다.
그것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사실은 없다. 사실로는 한산도 해전 후 7년간 이순신은 한 번도 이기지 않았다. 기습 공격을 했지만 매번 일본 수군에 격퇴되어 퇴각하고 있다. 23전 23승은 후세의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왜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는가?
한국인은 왜 역사를 날조하는가? 이순신이 일본 수군을 이긴 것은 한산도 해전이 마지막이며, 그 후 7년간 이순신은 기습 공격했지만 매번 일본 수군에 의해 격퇴되고 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명량 해전에서도 이순신은 결국 200km나 북쪽으로 도망치고 있다. 거북선이 준공한 증거는 없고, 일본군과 싸운 기록도 없다. 침몰한 기록도 없고, 잔해도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 기록에 이순신이 쓰여 있는 것은 한 번뿐이다. 그의 사망을 기록한 것이다. 일본 수군에게 이순신은 강한 적이 아니었던 증거이다.
@@eakor8560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그거 좌파 민좆주의 국뽕이 주작한 거짓선동인데 아직도 속는 사람이 있네요;; 에를들어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과거는 없다;이것도 민좆주의 국뽕 작품임 신채호선생은 살아생전 이 말 해본 적이 없음 좌파들이 왜 이런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파시즘 극좌적인 선동을 하냐면 반일을 해야 자신들 친북을 숨길수가 있음 물론 일본놈들은 나도 진짜 싫음 근데 국뽕들도 쓰레기들임 진짜 싫음
그것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사실은 없다. 사실로는 한산도 해전 후 7년간 이순신은 한 번도 이기지 않았다. 기습 공격을 했지만 매번 일본 수군에 격퇴되어 퇴각하고 있다. 23전 23승은 후세의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왜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는가?
그것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사실은 없다. 사실로는 한산도 해전 후 7년간 이순신은 한번도 이기지 않았다. 기습 공격을 했지만 매번 일본 수군에 격퇴되어 퇴각하고 있다. 결국 조선의 배는 거의 남지 않았다. 23전 23승은 후세의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왜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는가?
전 이런영상 볼때마다 느끼는거 절대적인 한가지가 있습니다...... 전무후무한 이순신 장군도 참으로 대단하지만 .... 그보다 더욱더 대단한거 한가지...... 일본이 저정도로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고 침략을 하는데는 .... 많은 시간도 반드시 필요했을텐데..... 그당시 조선의 정치권은 도데체 뭘하고 있었을까...?? 이순신장군을 기리기에 앞서.... 당시의 국제정세 무시하고 제 밥줄에만 전전긍긍하던 .... 파렴치의 끝판왕들에 대한 비판과 반성에 대하여서는..... 어느누구도 크게 필력하지 않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대한민국 이죠..... 이순신장군 칭송하기에 앞서.... 조선의 무능함과 현실안주의 상황이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음..... 당시의 개판정치인들 탄핵한번도 없었었다는 참으로 신기한 상황.... 그저 제밥그릇에만 눈이멀어 전쟁영웅들을 탄핵하고 숙청하는데도.... 당시 정치인들은 너무도 당당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임..... 하긴 뭐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아보이긴 함..... 지금 국회에 앉아서 사명감을 가지고 제데로 국정일에 전념하는 국회의원이 몇이나 될려나....????
이순신 장군이 한,중,일 삼국에 다 역사로 남아있고 심지어 자신이 쓴 일기까지 남아있는 인물이라서 그렇지 한 1천년전 사람이었으면 아킬레우스 처럼 신화적인 인물로 남아있었을듯. 한국인인 나도 그의 전적이 믿기지 않을정도로 뛰어남 위대한 장수는 자신이 원하는때에 자신이 원하는곳에서 싸운다에 딱 맞는 위인.
일본의 역사에 이순신이 기록된 것은 한 번뿐이다. 그것은 그의 사망 기록이다. 그 외는 모두 전쟁 100년 이상 뒤인 문서다. 일조의 국교가 회복된 뒤 조선의 문서가 일본에 전해져 그것을 바탕으로 아이를 위한 만화가 그려졌다. 일본인은 괴수가 실재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어도 고질라 영화를 즐길 수 있지만, 한국인은 사실과 픽션의 구별을 할 수 없는 것 같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이순신이 23전 23승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이 만든 거짓말이다. 실제로는 1592년 7월 7일 한산도 전투 이후 이순신은 한번도 이길 수 없다. 이순신은 3승 20패 정도의 평범한 조선인 지휘관이었다.
hiroono1 1시간 전 @daewook kim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사실은 없다. 덧붙여 와키자카 안지가 이순신 붙어 코멘트한 사실도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일도 없다. 모두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해 부끄럽지 않은가? 대답하십시오. 최명연 님은 이 사람의 말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일본 측 기록에 이순신이 나타나는 것은 정한록에서 이순신이 죽었다고 적힌 부분뿐이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라 3승 20패 정도의 평범한 지휘관이었다. 일본인이 이순신을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없고, 모두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한국인은 왜 역사를 날조하는가?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대답하십시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이순신이 23전 23승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이 만든 거짓말이다. 실제로는 1592년 7월 7일 한산도 전투 이후 이순신은 한번도 이길 수 없다. 이순신은 3승 20패 정도의 평범한 조선인 지휘관이었다.
@@카이로스-y9h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따라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패주했다. 난중 일기에 쓰고 있다. 이순신이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수군을 이겼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조선실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부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일본군은 불과 3주 만에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지를 제압했기 때문에 해로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수천명밖에 수군에 배치하지 않았지만, 부산에 전력을 집중하고 곶에 포대를 설치하는 전략에 따라 수만의 조선군을 모두 격퇴했다. 원균이 죽고 마지막으로 이순신도 죽었다. 한국인의 거짓말처럼 이순신이 23전 23승이라면 부산을 탈환할 수 있었을 텐데, 부산커녕 한반도 남부는 일본이 계속 지배했다. 이순신은 3승 20패 정도의 평범한 지휘관이었다. 일본인이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를 남긴 사실은 없다. 모두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야무영웅 4시간 전 서로 못죽여 안달이던 일본 미국도 강력한 동맹되어 있는데 한심하다 한심해 ㅋ 당신이 병원에서 진찰받는 의료기 고추가루 귤 감자 고구마 과일등등 일본에서 안온것 찾는게 힘든데 쌀밥에 간장만 먹고 아프면 침만 맞고 살아라 이 분의 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저 부산포 해전 당시 전사하신 정운 장군님의 이름은 지금도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 이름으로 영원히 남았고 부산포 해전의 날은 지금도 부산 시민의 날로 지금도 기억되니.... 그 잘난 선조의 이름과 선조가 공신으로 이름을 올린 인간들은 고작 조선왕조실록의 단 한줄로 남은 것을 보면 선조가 공신으로 이름을 올리지도 않은 정운 장군의 이름은 오히려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의 이름으로 지금도 대한민국 영해를 수호하는 존재로 기억되니...... 진짜 저승에서 선조가 그것을 알면 질투 때문에 속이 썩어문드러질 것 같으니까 말입니다. 지금도 선조의 이름은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려고 한 비겁자로 기억되고 있으니.......
일본 측 기록에 이순신이 나타나는 것은 정한록에서 이순신이 죽었다고 적힌 부분뿐이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라 3승 20패 정도의 평범한 지휘관이었다. 일본인이 이순신을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없고, 모두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한국인은 왜 역사를 날조하는가?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대답하십시오.
정말 조상님들이 조선을 구하기위해 내리신 불세출의 영웅입니다.. 일부 역사가들이 조선의 넬슨이라 표현하는데...ㅠ 영국의 이순신 이라는 표현도 아깝습니다 넬슨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싸웠지만 이순신장군님은 자신을 모함하고 죽이려는 조정부터..주위 원균같은 같지도않은 장군까지.. 너무 외로웠고 고독한 싸움을 해서 철저히 대승을 한 위대한 장군입니다
충무공이 위대한건 전시 이고 조정의 지원이 끊긴 상황임에도 농사와 어업 으로 군비를 확충하고 백성들을 거둬 먹였다는 거임 백성들이 당연히 장군을 따르고 복종하며 칭송 할수 밖에 없었지만 찌질한 선조는 질투한 나머지 장군의 없는 죄까지 만들어 내는 최악의 수를 두었슴 한국사에서 첫번째로 존경 하는 분은 한글을 창제 하신 세종대왕님이고 두번째가 충무공임 세번째는 이등박문을 처단하신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님임
이순신 장군님을 열심히 대규모의 인원으로 명예를 세울 생각은 기특하구나... 이제 각자가 이 땅에서 이순신 장군의 용맹함이 나라고 착각이라도 하여, 뜨거운 가슴에 모셔 외세의 적에 대해 분석 해보는 것은 지나친 것이겠나..? 너희의 아이들의 실망감이 극에 달했으며, 최소 나의 뇌리를 순간순간 뒤흔들고 있는구나...
민간인이었던 동안 수년간 모은 정황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인의 침략 및 전략과 전술을 파악해서 전쟁이 발발 했을때 가장 효과적으로 제합할수있는부분이 전라도를 지키는것이라는것파악하고 유성룡을 통해 선조를 설득해서 전라 좌수사 에 자신을 앉쳐달라고 간청해서 전라도를지켜 일본의 주요 전략인 양동 병진 전략을 무너트려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죠.
부산해전은 조정에서 출전을 독려하여 마지 못해 간걸로 아는데 효과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심리적인거 말고 큰 효과가 없다고 아는대요?? 부산해전은 아니지만 울두목에서 이순신 포로로 잡할뻔 했는데 거제현령 우수가 구해서 업고 탈출한걸로 압니다 부산에 왜군 수군 수군만 있는거 아니지만 임진왜란에 참전한 왜수군이 총 9459명 정도이니 그 무수한 해전으로 적 희생자 생각보다 크지 않을 겁니다 또 이순신 특성상 장시간 전투는 불가능하고 또 수군 특성성 장시간 전투를 못합니다 격군이 지치니 그렇죠 원균과 정운은 상륙 육지 접근전에 능하지만 이순신과 전라 좌수군 우수군은 잘해내지 못합니다 아참 참고로 진주성 전투는 6일 밤낮 적 2~3만을 상대로 싸워 이겻고 이치와 웅치에서 홀약한 김제군수 정담과 황진 함경도에서 활약한 정문부 등은 적어도 이순신보다 공은 크다고 봅니다
이길수 있을때 이길수 있는곳에서 이길수 있는방법으로 싸운다. 이순신장군이 압도적으로 이기는 전투가 많았던이유. 아군 적군 사상자 비교하면 거의 모든전투에서 한쪽에서 학살하다 싶은전투가 대부분. 이길수 있을때 싸운다는게 쉽게 느껴지지만 신립 원균 황진 등등은 그러지 못했다는걸 보면 철저하게 냉정하게 내가 어떤상황인지 적이 어떤 상황인지 정찰하고 연구한 장군
부산포가 한바도에 있지만 아메리카 플로리다주 옆에도 부산포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반도 아래 일본이 아닌 아메리카 바하마를 점령한 스페인이 아메리카의 부산포를 공격해 왔다고 임진란 미국에서 신간서적이 나왔습니다. 아메리카에서 부산포를 신간서적에서 부산포를 아메리카와 함께 지켜 주세요.
이순신 장군님은 보통 사람은 범접할수 없는 큰 그릇입니다. 일반인들이 장군과 같은 시련을 겪었다면, 좌절하거나 스스로 생을 정리했을겁니다. 명량해전의 실행도 , 그 수많은 이들이 반대해도, 심지어 든든한 지원자인 유성룡 마저도, 명량해전을 반대했지만, 장군은 해 내셨지요. 정말 큰 그릇이십니다. 정치인으로써는 부적합할수도 있으나, 기업, 학교, 군대 등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 만큼은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순신을 능가하는 이가 없읍니다. 그래서 곳곳에서 이순신 정신, 리더십을 따라 배웁니다.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고, 권한을 백성의 안전과 풍족한 삶에 의미를 두는 영웅은 언제나 기득권으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읍니다. 장군님은 군 고위 장성 신분임에도, 고단한 삶을 살다가, 나라를 구하고, 순국하셨읍니다. 대한민국의 영웅, 이순신 장군님 !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따라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패주했다. 난중 일기에 쓰고 있다.
이순신이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수군을 이겼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당시 조선 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며 협력했다. 일본군에 식량을 제공해 길 안내를 했다. 서울 왕궁에 방화한 것도 조선인이다. 이순신 등 당시 조선군은 대부분 사망했기 때문에 현재 한국인은 당시 민중의 후손이다. 따라서, 이순신은 당신의 조상의 적이다. 당신의 조상의 아군은 일본군이다. 이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이순신이 일본 수군을 이긴 것은 한산도 해전이 마지막으로, 그 후 7년간은 한번도 이길 수 없었다. 이순신은 여러 번 기습을 시도했지만 모두 일본 수군에 격퇴되어 도망가고 있다. 23전 23승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 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부산은 계속 일본 수군이 점거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부산을 탈환하지 못해 일본 수군에 쏠렸다.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에 쓰고 있다.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했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쓰촨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고, 그에 따라 삼로로 나뉘어진 명· 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지고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했다. 이순신은 일본전에 둘러싸여 쏠렸다.
한국인은 왜 역사를 날조하는가? 이순신이 일본 수군을 이긴 것은 한산도 해전이 마지막이며, 그 후 7년간 이순신은 기습 공격했지만 매번 일본 수군에 의해 격퇴되고 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명량 해전에서도 이순신은 결국 200km나 북쪽으로 도망치고 있다.
거북선이 준공한 증거는 없고, 일본군과 싸운 기록도 없다. 침몰한 기록도 없고, 잔해도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 기록에 이순신이 쓰여 있는 것은 한 번뿐이다. 그의 사망을 기록한 것이다. 일본 수군에게 이순신은 강한 적이 아니었던 증거이다.
@풀버젼야뎡저장소-v4u 이순신은 생각이 얕은 바보이다. 노량해전에서 일본 측 사령관에게 한 명의 죽은 자도 없었던 것은 조선에게 운이 좋았다. 만약 혼자라도 피해자가 나오면 일본군은 철수를 중지하고 조선을 재공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조선인의 죽은 자는 더욱 늘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일본 수군에 쏜 죽인 것은 조선에게 운이 좋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십니다.
생각할 수록 감사할 뿐입니다.
부산포해전에서는 이순신은 이길 수 없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왜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는가?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는 수 백 번을 들어도 흥미진진하군요.
그것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사실은 없다.
사실로는 한산도 해전 후 7년간 이순신은 한 번도 이기지 않았다. 기습 공격을 했지만 매번 일본 수군에 격퇴되어 퇴각하고 있다. 23전 23승은 후세의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왜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는가?
부산포 해전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정당한 의미 부여.. 제작진께 경의를 표합니다 (__)
이순신이 일본 수군을 이긴 것은 한산도 해전이 마지막으로, 그 후 7년간은 한번도 이길 수 없었다. 이순신은 여러 번 기습을 시도했지만 모두 일본 수군에 격퇴되어 도망가고 있다. 23전 23승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 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부산은 계속 일본 수군이 점거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부산을 탈환하지 못해 일본 수군에 쏠렸다.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에 쓰고 있다.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했고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쓰촨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고, 그에 따라 삼로로 나뉘어진 명· 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지고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했다. 이순신은 일본전에 둘러싸여 쏠렸다.
이순신장군님의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적이지요~
감사합니다!
그것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사실은 없다.
사실로는 한산도 해전 후 7년간 이순신은 한 번도 이기지 않았다. 기습 공격을 했지만 매번 일본 수군에 격퇴되어 퇴각하고 있다. 23전 23승은 후세의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왜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는가?
부산포해전에서는 이순신은 이길 수 없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왜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는가?
이순신장군 님의 이야기는 큰 감동을 주고 언제 들어도 그분의 고뇌와 고통 때문에 눈물이 납니다!
한국인은 왜 역사를 날조하는가? 이순신이 일본 수군을 이긴 것은 한산도 해전이 마지막이며, 그 후 7년간 이순신은 기습 공격했지만 매번 일본 수군에 의해 격퇴되고 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명량 해전에서도 이순신은 결국 200km나 북쪽으로 도망치고 있다.
거북선이 준공한 증거는 없고, 일본군과 싸운 기록도 없다. 침몰한 기록도 없고, 잔해도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 기록에 이순신이 쓰여 있는 것은 한 번뿐이다. 그의 사망을 기록한 것이다. 일본 수군에게 이순신은 강한 적이 아니었던 증거이다.
소중한 다큐멘터리네요. 예산은 이렇게 쓰는거죠. 아주 칭찬해!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이순신이 23전 23승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이 만든 거짓말이다. 실제로는 1592년 7월 7일 한산도 전투 이후 이순신은 한번도 이길 수 없다.
@@hiroono1 일본인 훈도시 미개한 가축아 번역기 통해 날조하냐
@@eakor8560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eakor8560 한국인은 왜 거짓말을 하는가? 대답하십시오.
@@hiroono1이순신의 전승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여러 문집 등 교차검증이 확실히 되는데, 오히려 그것이 거짓이라는건 어느 사료에도 없다. 오히려 니가 니말이 맞음을 증명해보는게 이치에 맞는게 아닐까?
각각 선박의 구조와 장단점, 특징, 무기들의 종류, 사거리, 병법 및 훈련 방법 등의 자세한 정보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는 처음 보는데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영국의 넬슨제독도 이순신과 비교하면 일개하사관정도...일본의 성웅 도고헤이아찌는 이순신과 비교하면 일개 참모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록을 보면 그 위대함은 가름하기 힘든 성웅이십니다.
그거 좌파 민좆주의 국뽕이 주작한 거짓선동인데 아직도 속는 사람이 있네요;;
에를들어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과거는 없다;이것도 민좆주의 국뽕 작품임 신채호선생은 살아생전 이 말 해본 적이 없음
좌파들이 왜 이런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파시즘 극좌적인 선동을 하냐면 반일을 해야 자신들 친북을 숨길수가 있음 물론 일본놈들은 나도 진짜 싫음 근데 국뽕들도 쓰레기들임 진짜 싫음
인류 역대 해군 지휘관계의 GOAT 그자체
그것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사실은 없다.
사실로는 한산도 해전 후 7년간 이순신은 한 번도 이기지 않았다. 기습 공격을 했지만 매번 일본 수군에 격퇴되어 퇴각하고 있다. 23전 23승은 후세의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왜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는가?
그것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사실은 없다.
사실로는 한산도 해전 후 7년간 이순신은 한번도 이기지 않았다. 기습 공격을 했지만 매번 일본 수군에 격퇴되어 퇴각하고 있다. 결국 조선의 배는 거의 남지 않았다. 23전 23승은 후세의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왜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는가?
거짓말이다.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했다는 기록은 한글만으로 쓰여 있다. 일본어 기록은 없다. 도고는 한국어를 말하지 않는다. 한국인은 왜 무엇이든 날조하는가? 대답하십시오.
전 이런영상 볼때마다 느끼는거 절대적인 한가지가 있습니다......
전무후무한 이순신 장군도 참으로 대단하지만 ....
그보다 더욱더 대단한거 한가지......
일본이 저정도로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고 침략을 하는데는 ....
많은 시간도 반드시 필요했을텐데.....
그당시 조선의 정치권은 도데체 뭘하고 있었을까...??
이순신장군을 기리기에 앞서....
당시의 국제정세 무시하고 제 밥줄에만 전전긍긍하던 ....
파렴치의 끝판왕들에 대한 비판과 반성에 대하여서는.....
어느누구도 크게 필력하지 않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대한민국 이죠.....
이순신장군 칭송하기에 앞서....
조선의 무능함과 현실안주의 상황이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음.....
당시의 개판정치인들 탄핵한번도 없었었다는 참으로 신기한 상황....
그저 제밥그릇에만 눈이멀어 전쟁영웅들을 탄핵하고 숙청하는데도....
당시 정치인들은 너무도 당당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임.....
하긴 뭐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아보이긴 함.....
지금 국회에 앉아서 사명감을 가지고 제데로 국정일에 전념하는 국회의원이 몇이나 될려나....????
백성과 나라를 위하는 마음. 위대한 영웅입니다
고맙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한,중,일 삼국에 다 역사로 남아있고 심지어 자신이 쓴 일기까지 남아있는 인물이라서 그렇지
한 1천년전 사람이었으면 아킬레우스 처럼 신화적인 인물로 남아있었을듯. 한국인인 나도 그의 전적이
믿기지 않을정도로 뛰어남 위대한 장수는 자신이 원하는때에 자신이 원하는곳에서 싸운다에 딱 맞는 위인.
일본의 역사에 이순신이 기록된 것은 한 번뿐이다. 그것은 그의 사망 기록이다. 그 외는 모두 전쟁 100년 이상 뒤인 문서다. 일조의 국교가 회복된 뒤 조선의 문서가 일본에 전해져 그것을 바탕으로 아이를 위한 만화가 그려졌다.
일본인은 괴수가 실재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어도 고질라 영화를 즐길 수 있지만, 한국인은 사실과 픽션의 구별을 할 수 없는 것 같다.
@@hiroono1얘는 임진왜란 컨텐츠마다 나타나서 일뽕 짓이네 ㅋㅋㅋㅋ 한심 그자체
부산시민의 날이 바로 부산포해전을 기념을 해서 만든게 부산시민의 날입니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이순신이 23전 23승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이 만든 거짓말이다. 실제로는 1592년 7월 7일 한산도 전투 이후 이순신은 한번도 이길 수 없다. 이순신은 3승 20패 정도의 평범한 조선인 지휘관이었다.
hiroono1
1시간 전
@daewook kim 도고 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한 사실은 없다. 덧붙여 와키자카 안지가 이순신 붙어 코멘트한 사실도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일도 없다. 모두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해 부끄럽지 않은가? 대답하십시오.
최명연 님은
이 사람의 말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daewookkim4795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답하십시오.
@@hiroono1 나보다 최명연 그 분에게 먼저 대답하면 저도 대답하겠습니다.
@@daewookkim4795 한국인은 스스로 조사해 생각할 수 없는 것인가? 그러니까 한국인은 노벨상을 잡을 수 없는 것이다.
명장 의 심기를 그누구도 모르죠
왜적침공 앞에서 간신질 한자
는부관참시 1000번도 모자라고ㅡ
풍전등화 위기속에서
나라를구한 충무공해군제독은
세계 최고의 명장 이십니다
총통 화력이 엄청났네요 ㅎ❤ 이순신 장군님 만세.!!! 😊🎉
일본은 이순신을 신으로 숭배한다고 하던데 적에 마음까지도 사로잡아 버린 이순신!
조선에 장수였다는게 믿겨지지 않음~
일본 측 기록에 이순신이 나타나는 것은 정한록에서 이순신이 죽었다고 적힌 부분뿐이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라 3승 20패 정도의 평범한 지휘관이었다. 일본인이 이순신을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없고, 모두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한국인은 왜 역사를 날조하는가?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대답하십시오.
그것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왜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는가?
부산포 해전을 자세하게 다룬 것 같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에 조선이 존재했네요 🌿🌿🌿
부산포해전 1592년 8월 29일 이순신들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부산은 계속 일본 수군이 점거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부산을 탈환하지 못해 일본 수군에 쏠렸다.
덕분입니다
바르게 살겠습니다~
일본놈들하고 싸워서 이기는 이순신 역사에 최대 영웅 이순신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이순신이 23전 23승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이 만든 거짓말이다. 실제로는 1592년 7월 7일 한산도 전투 이후 이순신은 한번도 이길 수 없다. 이순신은 3승 20패 정도의 평범한 조선인 지휘관이었다.
@@hiroono1 이순인을 20번 이겼다는 일본 사료 가져와봐ㅋㅋ 조선측 자료는 무조건 틀리고 일본측 자료는 무조건 맞을리도 없지만ㅋㅋㅋ
@@hiroono1 당신같은 사람 하나 있을줄 알았어. 23전 20패 2무 1승이라고 하지?ㅋㅋㅋ 에라이~ 일본만도 못한 인간아.
@@카이로스-y9h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쓰고 있다.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따라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패주했다. 난중 일기에 쓰고 있다.
이순신이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수군을 이겼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hiroono1당신이 말하는 그 자료는 당신이 꿨던 꿈에서 나온 것입니까?
왜란을 겪으신 옛 조상님들 과 국난극복을 위해 애쓰신 장군님 사명대사님과 승병님들 감사합니다!
이런 프로 강추합니다 ㅎ
녹도만호 정운 장군 숭고한 희생 ....
부산포 해전 장렬한 포격전 ....
이순신 장군의 전략은 뛰어난 신장 ~ !!
조선실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부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일본군은 불과 3주 만에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지를 제압했기 때문에 해로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수천명밖에 수군에 배치하지 않았지만, 부산에 전력을 집중하고 곶에 포대를 설치하는 전략에 따라 수만의 조선군을 모두 격퇴했다. 원균이 죽고 마지막으로 이순신도 죽었다. 한국인의 거짓말처럼 이순신이 23전 23승이라면 부산을 탈환할 수 있었을 텐데, 부산커녕 한반도 남부는 일본이 계속 지배했다. 이순신은 3승 20패 정도의 평범한 지휘관이었다. 일본인이 이순신에 대해 코멘트를 남긴 사실은 없다. 모두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야무영웅
4시간 전
서로 못죽여 안달이던 일본 미국도 강력한 동맹되어 있는데 한심하다 한심해 ㅋ 당신이 병원에서 진찰받는 의료기 고추가루 귤 감자 고구마 과일등등 일본에서 안온것 찾는게 힘든데 쌀밥에 간장만 먹고 아프면 침만 맞고 살아라
이 분의 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daewookkim4795 슨상님 잘못 된거는 비판 해야지요
정운장군의 사당 부산 어디에있죠?
@@dhkim5609 해남 .. ?
평택시는
원균무덤을파해쳐라
이순신 장군은 병법9단이셨고
원균장군은 병법초단이었다!!
선조임금님은 전쟁초보이셨다!!
이순신장군...감사합니다...화ㅡ이ㅡ팅....!
저 부산포 해전 당시 전사하신 정운 장군님의 이름은
지금도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 이름으로 영원히 남았고
부산포 해전의 날은 지금도 부산 시민의 날로 지금도 기억되니....
그 잘난 선조의 이름과
선조가 공신으로 이름을 올린 인간들은 고작 조선왕조실록의 단 한줄로 남은 것을 보면
선조가 공신으로 이름을 올리지도 않은
정운 장군의 이름은
오히려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의 이름으로
지금도 대한민국 영해를 수호하는 존재로 기억되니......
진짜 저승에서 선조가 그것을 알면
질투 때문에 속이 썩어문드러질 것 같으니까 말입니다.
지금도 선조의 이름은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려고 한 비겁자로 기억되고 있으니.......
일본 측 기록에 이순신이 나타나는 것은 정한록에서 이순신이 죽었다고 적힌 부분뿐이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라 3승 20패 정도의 평범한 지휘관이었다. 일본인이 이순신을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없고, 모두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한국인은 왜 역사를 날조하는가?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대답하십시오.
굿!!!
세조.연산군.선조.인조 조선 최고의 빌런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말이 생각나네요
말그대로 상대방을 알고 자신을 알라 이네요...
🎉🎉🎉
이순신 장군의 해전에 관한 전투 전략은 인간계를 초월한 분이다. 그 분이 창안한 장사진, 학익진은 근대에 사용했다고 하지 않던가.
역시 성웅 이십니다👍👍👍👍
저렇게 무능한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전란후 정권이 바뀌지 않았음. 만일 이때 정권이 바뀌었더라면 근대에 와서 그렇게 허약한 국가가 되었을까 싶음.
역성혁명이 안일어나고선 기존답습
한나라의 증상은 정치세력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정치인들의
당파싸움은 국가의 몰락을 가져온다.
애석하게도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는
임진왜란때의 정치판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본다
정말 조상님들이 조선을 구하기위해 내리신 불세출의 영웅입니다..
일부 역사가들이 조선의 넬슨이라 표현하는데...ㅠ
영국의 이순신 이라는 표현도 아깝습니다
넬슨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싸웠지만 이순신장군님은 자신을 모함하고 죽이려는 조정부터..주위 원균같은 같지도않은 장군까지..
너무 외로웠고 고독한 싸움을 해서 철저히 대승을 한 위대한 장군입니다
이순신함을 끌고 일본군이 지시하는 해군 훈련에 끌려나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ㅠㅠ
술독에 쩔어사는 잉간때문에...
일본이 빠가라요 인이유. 이웃나라를 서로 사랑허는마음을 갖고 서로 돕고 협력하는 좋은 이웃이라는 합리적인 생각을 가졎더라면...미국이 세계의 최강안이유ㅡ 생각이 이치적이고 합리적다.
반면 선조같은 임금은 꼭 누굴 연상시키네요~세계 최고의 장군이라 자부합니다~황현필 선생님의 임진왜란편 강의 꼭 보시길 추천합니다~
리승만.ㅎㅎㅎㅎ
❤
한심했던 선조 그게 임금이었다니!!! 왜 이 순신은 이씨왕조를 엎어자리지 않았나? 그랬다면, 구한말 치욕스런 일제에 치욕을 당하지 않았을 것인데. 그랬다면 만주를 잃지 않았을 것이다
전선의 장단점 만으로 조선수군이 승리한것일까?
아니라고 본다.
이순신이기때문에 그런 장단점을 전략으로 사용하는 지휘관 이었기에 가능했던것임.
그 이유가 원균이 한번에 전판옥선과 거북선을 말아 먹은거 보면 알 수 있다.
이순신장군 후손들 평안하시고 형통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ᆢ
❤❤❤
충무공이 위대한건 전시 이고 조정의 지원이 끊긴 상황임에도 농사와 어업 으로 군비를 확충하고 백성들을 거둬 먹였다는 거임
백성들이 당연히 장군을 따르고 복종하며 칭송 할수 밖에 없었지만 찌질한 선조는 질투한 나머지 장군의 없는 죄까지 만들어 내는 최악의 수를 두었슴
한국사에서 첫번째로 존경 하는 분은 한글을 창제 하신 세종대왕님이고 두번째가 충무공임
세번째는 이등박문을 처단하신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님임
30.05 아 거북선!!! 놀라운 조선의 기술력!!!
조총 유효사거리가 50미터..최대 100미터인데.. 엄청 유리하죠....100미터 까지 접근해서 싸우는데..
❤화포 와 대표 차이가 납니까?
설명을 해주고 말 하면 이해가 가요.
지금?
일본 도 대포 쏘는대
아군 배는 괜찬코.ㅋㅋㅋ
이순신 장군님을 열심히 대규모의 인원으로 명예를 세울 생각은 기특하구나...
이제 각자가 이 땅에서 이순신 장군의 용맹함이 나라고
착각이라도 하여, 뜨거운 가슴에 모셔 외세의 적에 대해 분석 해보는 것은 지나친 것이겠나..?
너희의 아이들의 실망감이
극에 달했으며,
최소 나의 뇌리를 순간순간
뒤흔들고 있는구나...
당장 오만원권 지폐에 "이순신장군" 초상화를 넣어시요!!!
지금 우리는 장군님게 부끄러울 뿐입니다 일본이 핵폐수를 이바다에 뿌린다는데 우리는 오히려 일본편을 들고 있습니다 부끄러움도 모른는 놈들입니다
🌹😍👍
7.05 송일입, 정운 결사항전 주장!!! 대박!!!
뭣이 중요합니까?
대전이든 해전이든 우리 장군님과 이하 장졸들은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기왕이면 대전으로 기록하면 좋겠지요ㅎㅎ
이순신 장군께서 당신들 친굽니까? 버릇이없군요
ㅎㅎ 그시절에도 밀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거죠~ 일인들은 집요합니다. 상황걸고 10 ~20년기다렷다 기회오면 칩니다😅
민간인이었던 동안 수년간 모은 정황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인의 침략 및 전략과 전술을 파악해서 전쟁이 발발 했을때 가장 효과적으로 제합할수있는부분이 전라도를 지키는것이라는것파악하고 유성룡을 통해 선조를 설득해서 전라 좌수사 에 자신을 앉쳐달라고 간청해서 전라도를지켜 일본의 주요 전략인 양동 병진 전략을 무너트려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죠.
이순신 3대 대첩 한산도 명량 노량 사이에 넣을만하다고 본다 전과만보면 더 큰 승리고 4대 대첩이다
뭐.. 같은내용 다른방송. 책. 사료들을 봐도봐도 안지겨워..
새로워..
신선해~~ ㅋ
[다시보기] 네트워크특선 | 부산포 해전 1부 (23.03.05) / MBC News
❤한산도 대첩 1592년 음력 7월 8일 (양력 8월 14일)
❤명량 해전 1597년 음력 9월 16일 (양력 10월 26일)
❤노량 해전 1598년 음력 11월 19일 (양력 12월 16일) → 대한민국 대한국인의 성웅(聖雄)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께서 전사하신 날
해설가 들이 참 해설을... 이순신이~ 성웅 이순신께서는 라고 호칭하면 안되시는지.
이순이라는 신은 신레벨도 쾌 됬나봐 노력을 올바르게 해서
Dam can you emagine how interesting it would be if i could😢understand.😊
이순신은 이율곡으로부터 두률천독? 두보의시를 천번읽으라는 집안어르신이기도한 덕수이씨 이율곡한데서 청소년기에 지나가는말로 일러준것을 잘 실행했기에 성웅이 될수 있었다 병법의 달인이 된것
이율곡이 십만양병설 주장함과 일찌기 이순신을 무과쪽으로 이끔
이순신은 인동살 가지고 태어나 살면서 고생했고. 탁월한 능력를 가지고 있었다.
자금 선조와 원균의 환장 콜라보 시대에 살고 있다.
통나무와 나무못을 썻던 조선배, 판재와 쇠못을 썻던 일본배...복원력이 좋았지만 속력이 느렸던 조선배, 복원력은 약하지만 속력이 빨랐던 일본배..지리적으로 가깝지만 상당히 상이하게 발달한 양국의 배들..
부산해전은 조정에서 출전을 독려하여 마지 못해 간걸로 아는데 효과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심리적인거 말고 큰 효과가 없다고 아는대요?? 부산해전은 아니지만 울두목에서 이순신 포로로 잡할뻔 했는데 거제현령 우수가 구해서 업고 탈출한걸로 압니다 부산에 왜군 수군 수군만 있는거 아니지만 임진왜란에 참전한 왜수군이 총 9459명 정도이니 그 무수한 해전으로 적 희생자 생각보다 크지 않을 겁니다 또 이순신 특성상 장시간 전투는 불가능하고 또 수군 특성성 장시간 전투를 못합니다 격군이 지치니 그렇죠 원균과 정운은 상륙 육지 접근전에 능하지만 이순신과 전라 좌수군 우수군은 잘해내지 못합니다 아참 참고로 진주성 전투는 6일 밤낮 적 2~3만을 상대로 싸워 이겻고 이치와 웅치에서 홀약한 김제군수 정담과 황진 함경도에서 활약한 정문부 등은 적어도 이순신보다 공은 크다고 봅니다
관우와 제갈량을 믹스한게 이순신 장군
ㆍ 2. ㅎㅎ 6ㅡ32ㄴㄷ즉ㄴㅂ
.ㅈ!9ㅈ
선조대왕재조명하라 임진왜란 진실을 말한다 경장겸선전관 정걸장군 임진왜란 최고의 구국공신 세계적인 장군 명량해전 진실을 말 한다경장겸선전관수군전문가수군최고의지휘관모든전투해전에서는경장정걸장군이승함해서지휘감독을하고같이싸웠다
뭐래는거냐 시밬..
근대 그게 내 경우보면 잘 알아서 그런게 아니라 하늘의 뜻이였어
이순신 장군님은 역사가 아무리 변해도 위대 하신 분이다.적을 알고 싸우는 준비 정신은 모든 전쟁과 일상에서도 반드시 배워야 할 점이다. 야구로 따지면 10할 타자 이다.늘 존경하시는 분이다.
결국은 애구김을 기초로 하여 정보전과 또한 무기체계 선진기술로 무장 전력화를 이루어 놓고 기다렸던 결과 임 결국은 애국심에 기초한 정보전에서 이미 이겼다. 그리고 뒷받침된 최무선의 화약...
이순신장군님은 범접하지못할 장군이시다 누구는 대포를가지고 저정도도못하냐고하는 사람도 있었지 근데 화포도 어찌쏘는지가중요하지 이순신장군님이안계셨다면 아마도 어찌됬을지
이길수 있을때 이길수 있는곳에서 이길수 있는방법으로 싸운다. 이순신장군이 압도적으로 이기는 전투가 많았던이유. 아군 적군 사상자 비교하면 거의 모든전투에서 한쪽에서 학살하다 싶은전투가 대부분. 이길수 있을때 싸운다는게 쉽게 느껴지지만 신립 원균 황진 등등은 그러지 못했다는걸 보면 철저하게 냉정하게 내가 어떤상황인지 적이 어떤 상황인지 정찰하고 연구한 장군
왜 왜를. 일본으로 하는가
군사들에게 휴대폰 지어주고 편하게 지내게는 안했을 것
그만큼 왜군에대한 정보수집에 바빴을 것이고 무기 사용법에 대한 훈련 이런것들이 관심과 훈련없이는 결과를 바랄 수 없었다고 본다면
병사들과 함께 고생스런 훈련을 했을것
지랄싼다 훈련만큼 쉬는 것도 중요하다
@@화이팅-l1e 쉬지않고 365일 눈뜨고 있으라는 것을 상상한 것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원균이지^^
@@몽고메리-s8m 휴대폰 쥐어주지 말고 계속 굴리래자나 니가... 난독이냐?
@@화이팅-l1e 거품물지마라!!!
전쟁에서 이기는건 준비와 대비다
일본놈들같이 덴노헤이까 외칠꺼냐
이게 하늘의 뜻인지도 몰르겠다 이순이라는 신이 태어나서 모든게 가능한지
여긴 중국 조선족들이 댓글을 다는건가 한글을 틀리게 적는 사람들이 많이 보임
18무슨놈에 유튜브 하나 보는데 광고가 10번 넘개 나오네
미국놈들이야말로 돈만 되면 누구든지 손잡는 그런 사이코패스 다중인격자들이니.....
@@뀨우-v2b 이젠 스마트폰 구글로 영화 보는것도
안되더군요
햇살무늬 자위함을 오매불망 그리워하는 국짐과 윤가를 이순신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순신제독이라고 해야 옳다고 생각한다.
전세계 해전사에서도 독보적인 제독이시다.
소나무로 만든 배 옥을 덮어서 만든 배 판옥선 입니다
저당시 일본조총의 위력은 어느 정도 였을까요
후반에 해설이 잘못됐다.
백보정도는 조란탄(산탄)을 주로 써야한다.
대인용이니~
반드시 윤완용 구속 해야 한다
것보다 더 빨리 내뺀 선조는 대체...ㅋ
부산포해전 그나마 파도가 잔잔한 날 골라서 갔지 사실 저작은함대로 부산포진격하는거자체가 무모하지
PS:판옥선이 파도에취약한대 3m이상되면 판옥선운용불가해서 부산포에 가기가 힘든데 이순신이 9월1일 파도가 잔잔한날 골라간거죠 어쨋건 이순신은 부산포를 타격하려면 최소 250척~300척이있어야된다했는데 80척의배로 다행히 왜군이 육지로 올라가서 다행이죠
그리고 부산포보다 더 큰 해전이 있엇죠 노량해전입니다
후손들이 명분을위해 살라고 충무공 이순신 그리희생했는데 국민들은 대한민국헌법제일1 무시한체 국가 반역을하고있으니 나라를위해 그리고 모든 사람들위해 희생한 충무공 이순신 하늘에서 울고있다 이미친후손들이여 바라만보고있었으니까 잘못되가는 대한민국을 그저 바라만 보고있었다
38계중에서 마지막은 토사이지. ㅎ
병법에 나와있다. 선조가 포로로 잡혀서 모든 수모를 감당해야되나? 현실적인 방법이었고 미리 대비안한 죄를 물어야한다. 건데 시스템이 양반위주로 돌아가는 시스템이라 이런건 나중에 폭망이 답.
부산포해전에서
왜선 130척을 분멸했고
전초전에서 40척을 분멸했죠
부산포해전 이후 일본군은 더이상 해전을 포기했죠 2번정도만 더 공격받으면 본국으로 돌아갈 함선을 다 잃으니...
그태는 일본군이 아니라 왜군이다
선조는못난임금이다왜장수을의심하는임금이임금라할수있나요😢😢😢😢
아니 부산mbc에서 이런 고급진 다큐를 만들었단 말인가??? 허헛..
국민모두 역사에 속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한반도에서 임진왜란이 아닌 임진난이 일어난곳이 아닙니다
일본은 스페인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동일 인물입니다
명량해전이 더 3대 대첩에 들어가야 하는거 아닙니까?
부산은 임진왜란 7년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였구나ㅠㅠ
부산포가 한바도에 있지만
아메리카 플로리다주 옆에도
부산포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반도 아래 일본이 아닌
아메리카 바하마를 점령한 스페인이
아메리카의 부산포를 공격해 왔다고
임진란 미국에서
신간서적이 나왔습니다.
아메리카에서 부산포를
신간서적에서 부산포를
아메리카와 함께 지켜 주세요.
❤일본 은 대포 업나???
ㅋㅋㅋㅎㅎㅎ
이순신 장군님 생각하면 원균 놈이 생각난다 천하에 정말 나쁜놈 원균 평택 도일동에 원균 놈 묘가 있는데 예전에는 조그만 묘 였지만 원유철 놈이 아주크게 묘를 바꾸고 주위를 다 바꿔놨다
이순신 장군임이 전사하자 않았으면 선조는 과연 장군을 어떻게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