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알려줌 시즌2] 세상이 놀랐다! 역대급 발굴 유적 TOP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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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29 січ 2025

КОМЕНТАРІ • 553

  • @ChangHyunKim9
    @ChangHyunKim9 3 роки тому +65

    흥미로운 내용이네요.
    하지만 수정해야 할 부분들이 적지 않네요.
    1. 용어 설명 오류
    총(塚)은 “왕과 같이 신분이 높은 사람의 무덤”이 아니라 →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다른 무덤과 구별되는 특징을 따서 붙이는 이름”
    예) 천마도의 천마총, 무용도의 무용총
    2. 역사적 고유명사와 오자
    김정희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금동대향로 → 백제 금동대향로
    풍납 토성 → 풍납토성
    을총년 홍수 → 을축년 홍수
    3. 설명과 자료 화면이 일치되지 않는 장면
    금관총 부분에 천마총과 황남대총 화면이 등장

    • @김앙드레-l7g
      @김앙드레-l7g 3 роки тому +14

      총은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왕과같이 신분이 높은 사람의 무덤, 각 무덤의 특징을 따서 이름을 지음."
      이래야 가장 정확하겠죠.

    • @ChangHyunKim9
      @ChangHyunKim9 3 роки тому +4

      @@김앙드레-l7g 맞습니다~~

  • @o.o5463
    @o.o5463 3 роки тому +40

    금동대향로에 향을 피우면 향 연기가 뚜껑 여러곳에서 올라와 안개처럼 표현이되며 무릉도원을 연상하게 하는 모습이 된다고 합니다.

  • @helookscool
    @helookscool 3 роки тому +374

    백제 금동대향로는 진짜 나라의 보배지.......저런 아름다운 걸작이 어딧겠어......중국 동시대 그어떤 유물도차도 대적할수 없는 아름다움이지....

    • @MalangMolang
      @MalangMolang 3 роки тому +2

      고대때{sov동이족}들{몽골어}+{한국어}+{만주어}가
      서로 대화가 통했다는 기록
      이 고대때 기록한{sov동이족}들
      동남아 뿌리이 기록한
      동북아 뿌리{sov동이족}들 기록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
      동이들이 서로 전하여 오기를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법이 부여와 대부분 같다
      (후한서 동이열전 감)
      예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고
      말하는데 언어와 법령과 풍속이 대체로 비슷하다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
      동옥저는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이 고구려와 비슷하다
      (양서 동이열전 백제)
      지금의 언어와 복장은 고구려와 거의 같지만
      걸을 때 두 팔을 벌리지 않는 것과
      절할 때 한 쪽 다리를 펴지 않는 것은 다르다
      (양서 동이열전 신라)
      그들의 절하는 방법과 걷는 모양은 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으므로 나무에 금을 새겨 신표로 삼는다
      언어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신당서 권220 열전 동이)
      달말루(두막루)는 스스로 말하기를 북부여의 후예하고 말한다
      고구려가 그 나라를 멸하자 유민들이 나하를 건너 그곳에 거주했다
      /부여가 멸망하고 부여의 유민들이 세운 두막루는
      300여년 이후 발해에 병합
      (위서 권100 열전 88 실위)
      실위(몽골)의 언어는 고막해(선비) 거란 두막루(부여)국과 같다
      /두막루는 실위(몽골의 기원)의 동쪽에 있었는데 두막루의
      언어와 선비족의 후예 고막해와 거란의 언어가 같음
      /1300여년 전에는 부여(고조선어)어와 실위(원몽골어)어와
      고막해(선비족 후예)어와 거란(선비족 후예)어가 의사소통에
      불편이 없을 정도로 비슷함
      /고조선의 해체기에 고조선에 종속해 있던 유목민족들은
      독립을 하고 그 후예들은 유라시아 대륙으로 흩어지고
      고조선 문명권에 속해있던 민족들의 언어는 고조선어를
      공통 조어로 공유함
      /두막루를 통합한 남북국시대의 발해는 고구려어를 사용함
      /발해가 고구려어를 사용했다는
      (속일본기 권13 천평 12년(740년))
      천황이 대극전에 임하여 신년조회를 받았다
      발해사신과 신라학어 등이 함께 참석했다
      /신라학어는 일본어를 익히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신라인
      일본은 발해 사신과의 통역을 위해 신라학어와 함께 참석
      /부여(한국), 실위(몽골), 고막해(선비족), 거란(선비족),
      옥저,예,맥,한,고구려,백제,신라,두막루,발해의 언어와
      풍습이 비슷했다는 기록들은 고조선에서 갈라져 나온 고조선어 후예!!!!!

    • @맨티스트로
      @맨티스트로 3 роки тому +2

      @@MalangMolang 그래서?

    • @MalangMolang
      @MalangMolang 3 роки тому +4

      @@맨티스트로 ㅇㅉ????????????????

    • @Black_Dove99
      @Black_Dove99 3 роки тому +14

      발견하게된 사연도 스펙타클해서 그 감동이 더 한듯

    • @Buzhidao12
      @Buzhidao12 3 роки тому +1

      풉 ㅎㅎㅎㅎㅎㅎㅎㅎㅎ 반도족들 미개족들이 중국과 비교하는 자체가 아주 엽기적이고 코미디이다. ㅎㅎㅎㅎㅎㅎㅎㅎ 저기 나오는 문자도 모두 한자이구만 무슨 ㅎㅎㅎㅎㅎㅎㅎ

  • @자녀교육최경선-m3p
    @자녀교육최경선-m3p 3 роки тому +18

    감사합니다. 발굴 유적에 대한 유익한 영상 참 좋았어요~

  • @파란나락
    @파란나락 2 роки тому +27

    금동대향로 정말 대박입니다 정말정말.....
    꼭 가셔서 보세요 사람없는 평일 감상하시는게
    좋을꺼에요

  • @끄떡이
    @끄떡이 3 роки тому +11

    이기환기자님 감사합니다~

  • @김현수-z4n
    @김현수-z4n 3 роки тому +72

    학생때 부모님이 박물관 진짜 많이 데리고 다니셨었는데 여기나온것들중 반은 가서 본것같네요 ㅋㅋ 살면서 한국 박물관은 전부 가보고싶네요....버킷리스트중 하나인데...

  • @3suns922
    @3suns922 3 роки тому +85

    우리나라 역사 대발견 유물은
    전곡리 주먹도끼,금동 대향로,
    무령왕릉,석굴암, 팔만대장경,
    직지,훈민정음 해례본,인사동 갑인자 등등이 역사를 바꾼 위대한 유물인것 같아요.

    • @manggoddang
      @manggoddang 3 роки тому +1

      다뉴세문경이 없네요

    • @rere5861
      @rere5861 2 роки тому

      @@manggoddang 출토품은 없고 다 도굴품임.

    • @거솔-q6i
      @거솔-q6i 2 роки тому

      훌륭하군요.

    • @연두-y1j
      @연두-y1j 2 роки тому

      도굴해서일본에팔아먹엇죠ㅡ
      우리어려서도엿장수가. 국채팔라고떠들고다녓는데

    • @문한국-o7s
      @문한국-o7s Рік тому +1

      순위에 의미가 전혀 없음..그쵸

  • @Black_Dove99
    @Black_Dove99 3 роки тому +17

    와 우연치않게 봤는데 진짜 재밌다

  • @jjkk5186
    @jjkk5186 6 місяців тому +7

    금동대향로가 일제시대 때 발굴되지 않은게 정말 너무나도 다행입니다ㅠㅠㅠㅠㅠㅠ

  • @chloekim7982
    @chloekim7982 3 роки тому +26

    한때 고고학도를 꿈꿨는데 ㅎㅎ 유익한 내용 감사합니다!

  • @태극무궁화
    @태극무궁화 3 роки тому +53

    우물정자 # 하늘의 우물 이라는뜻이고
    하늘의 태왕 이라는뜻 이라고 합니다
    즉 왕의 표시 이라고 합니다

    • @MalangMolang
      @MalangMolang 3 роки тому +1

      고대때{sov동이족}들{몽골어}+{한국어}+{만주어}가
      서로 대화가 통했다는 기록
      이 고대때 기록한{sov동이족}들
      동남아 뿌리이 기록한
      동북아 뿌리{sov동이족}들 기록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
      동이들이 서로 전하여 오기를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법이 부여와 대부분 같다
      (후한서 동이열전 감)
      예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고
      말하는데 언어와 법령과 풍속이 대체로 비슷하다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
      동옥저는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이 고구려와 비슷하다
      (양서 동이열전 백제)
      지금의 언어와 복장은 고구려와 거의 같지만
      걸을 때 두 팔을 벌리지 않는 것과
      절할 때 한 쪽 다리를 펴지 않는 것은 다르다
      (양서 동이열전 신라)
      그들의 절하는 방법과 걷는 모양은 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으므로 나무에 금을 새겨 신표로 삼는다
      언어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신당서 권220 열전 동이)
      달말루(두막루)는 스스로 말하기를 북부여의 후예하고 말한다
      고구려가 그 나라를 멸하자 유민들이 나하를 건너 그곳에 거주했다
      /부여가 멸망하고 부여의 유민들이 세운 두막루는
      300여년 이후 발해에 병합
      (위서 권100 열전 88 실위)
      실위(몽골)의 언어는 고막해(선비) 거란 두막루(부여)국과 같다
      /두막루는 실위(몽골의 기원)의 동쪽에 있었는데 두막루의
      언어와 선비족의 후예 고막해와 거란의 언어가 같음
      /1300여년 전에는 부여(고조선어)어와 실위(원몽골어)어와
      고막해(선비족 후예)어와 거란(선비족 후예)어가 의사소통에
      불편이 없을 정도로 비슷함
      /고조선의 해체기에 고조선에 종속해 있던 유목민족들은
      독립을 하고 그 후예들은 유라시아 대륙으로 흩어지고
      고조선 문명권에 속해있던 민족들의 언어는 고조선어를
      공통 조어로 공유함
      /두막루를 통합한 남북국시대의 발해는 고구려어를 사용함
      /발해가 고구려어를 사용했다는
      (속일본기 권13 천평 12년(740년))
      천황이 대극전에 임하여 신년조회를 받았다
      발해사신과 신라학어 등이 함께 참석했다
      /신라학어는 일본어를 익히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신라인
      일본은 발해 사신과의 통역을 위해 신라학어와 함께 참석
      /부여(한국), 실위(몽골), 고막해(선비족), 거란(선비족),
      옥저,예,맥,한,고구려,백제,신라,두막루,발해의 언어와
      풍습이 비슷했다는 기록들은 고조선에서 갈라져 나온 고조선어 후예!!!!!!!!!!!!!!!!!!!!!!!

    • @tonsk2k322
      @tonsk2k322 3 роки тому +2

      태왕이 아니고 호태왕임. 호는 강조의 뜻을 태왕 위의 호태왕 즉 황제급

  • @야옹이-f5h
    @야옹이-f5h 2 роки тому +12

    기사로만 만났던 이기환님을 여기서 뵈니 반갑네요.
    짧은 시간이 조금 아쉬웠지만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감독판도 있으면 합니다.

  • @별의커피-e6j
    @별의커피-e6j 2 роки тому +17

    유투브 채널의 순기능. 이런 재미있고 유익한 정보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잘 보고 갑니다 👍🏼

    • @koreanheritage
      @koreanheritage  2 роки тому +2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니 뿌듯한걸요~😄 앞으로도 많은 시청 부탁드립니다!👀💗

  • @THANKCUE
    @THANKCUE 2 роки тому +2

    #은 우물 정자입니다. 우물은 우주생성의 원리인 태극(불과 물)에서 물을 상징하죠. 또한 우물 井자는 열 십자 두개를 겹쳐 놓은 겁니다. 신을 상징하는 숫자가 10입니다.

  • @YOGAPILATV
    @YOGAPILATV 3 роки тому +5

    감사해요🎁🎉

  • @happyart.j7994
    @happyart.j7994 3 роки тому +55

    백제 금동대향로 직접보면 정말 아름답습니다 크기도 생각보다 큽니다

  • @끄떡이
    @끄떡이 6 місяців тому +2

    이기환기자님 ... 모습은 처음 뵙네요...'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때부터 팬입니다...항상 건강하세요~

  • @냥이수염
    @냥이수염 3 роки тому +15

    만드신 분들 수고하셨는데 중요한 내용중 빠진 내용이 많네요~

  • @sangkyu0101
    @sangkyu0101 3 роки тому +10

    8:27 을총년 -> 을축년 대홍수

  • @ypj5275
    @ypj5275 3 роки тому +19

    와... 이분이 이기환 기자님이시구나... 경향신문에 역사 기사 올리시는데 진짜 재밌던데 ㅎㅎ

  • @robertgarcia1371
    @robertgarcia1371 3 роки тому +14

    어렷을땐 이런거 진심 지루했는데 왜 이젠 재미있지 ㅋㅋ

    • @한숨두숨-c9g
      @한숨두숨-c9g 3 роки тому

      그때는 개세끼여서, 지금은 소세끼라서

    • @menssanoincorporesano
      @menssanoincorporesano 3 роки тому +5

      어린 시절 한옥에 살 때 뭔가 격이 떨어지는 느낌으로 양옥이나 아파트 사는 사람 보며 부러워하고 선망하다가 기둥마다 주련이 부착되어 있던 수려한 한옥이 철거되고 난 그 자리에 대형 식료품상이 들어 있는 것을 보는 중년이 아련히 옛 추억을 더듬으며 새삼스럽게 한옥에 대한 애착을 느끼는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권오희-n2p
    @권오희-n2p 2 роки тому +12

    역사 공부는 참 재밌어요ㅎㅎ

    • @koreanheritage
      @koreanheritage  2 роки тому +1

      즐거운 역사공부를 할 수 있는 콘텐츠로 느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이길상-l8m
    @이길상-l8m 2 роки тому +8

    대향로는 부여 국립 박물관에 진품이 전시되어 있어요. 꼭 보세요. 몇번 보세요...
    문화재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그냥 보자마자 와...소리가 나옵니다.

  • @decipherQ
    @decipherQ 2 роки тому +5

    井, 十, △, ▽,│, ─, □, ○...
    우리 유물에 나타나는 도형(?)은 문자의 초기 상형문자들입니다.
    약 4,500년 경부터 나타나는 글자들이죠.
    즉, 당시의 문자로 기록해서 특정인물을 나타내는 '씨칭'입니다.

  • @한귀남-c9s
    @한귀남-c9s 3 роки тому +15

    주차장에서 금동대향로
    아무리봐도 감동

  • @박지영-k5f7m
    @박지영-k5f7m 2 роки тому +4

    너무 감사합니다

  • @shinkunil6247
    @shinkunil6247 3 роки тому +4

    부여박물관에 가서 한가지만 봐야 한다면 '백제금동대향로'를 보시면 될듯
    느낌은?
    경이롭다. 끝!!

  • @지현손-k6g
    @지현손-k6g 2 роки тому +22

    금동대향로는 그냥 세계 유산 넘버원 넘사벽이다!!!

  • @hyekyo-pv8op
    @hyekyo-pv8op 3 місяці тому +1

    정말 좋아하는.울 나라 국보~! 정말 멋진듯....^^

    • @hyekyo-pv8op
      @hyekyo-pv8op 3 місяці тому +1

      정말 좋아하는.울 나라 국보~! 정말 멋진듯....^^

  • @inthenameoffatherholyspiri9301
    @inthenameoffatherholyspiri9301 2 роки тому +4

    전 부여 갈떄마다 항상 보고옵니다.

    • @koreanheritage
      @koreanheritage  2 роки тому

      우와 부럽습니다~! 저도 부여 넘 가고 싶어요>.

  • @sarasoliz9902
    @sarasoliz9902 2 роки тому +4

    Grasias me ase bien escucharlos tanto queria este idioma publicidad ahora se cumple mi sueño

  • @alanshore8440
    @alanshore8440 3 роки тому +14

    최인호 선생은 저 해쉬 태그를 '하늘 우물' 즉 백두산 천지라고 보고 '호태왕의 싸인' 으로 보셨죠 ... 저는 '고구려 국기' 정도로 생각 합니다.

    • @daug_jang
      @daug_jang 2 роки тому +1

      저도 故최인호선생님의 "왕도의 비밀", 전권을 다 읽었습니다. 저 당시에는 국기가 존재하지 않았죠. 공식적으로 알려진 국기의 시초는 13세기 네덜란드의 단네브로(Dannebrog)입니다. 아마도 고구려에서 비공식적으로 사용했던 문장(紋帳)같네요. 그러나 이런 것이 동아시아에 유래가 없기에 신기할 따름이죠.

  • @귀여운밀크-y5k
    @귀여운밀크-y5k 3 роки тому +7

    백제나 신라가 금 유물이 많은 이유는
    해상무역으로 비단을 수출했습니다.
    유대인들과 거래를 하며 비단이 로마에도 수출됐다고 합니다.
    유대인 경제사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JuveSup
      @JuveSup 10 місяців тому

      그냥 그 시대엔 기술만 있으면 강에서도 쉽게 금을 캘 정도로 흔했던거 아닌가요 지금은 당연히 그때 다 캐버리고 없으니 귀한 취급이지만

  • @낭만사나이-i6m
    @낭만사나이-i6m 3 роки тому +7

    백제는 백제 금동대향로 아버지 그리움과 효심 입니다 (성왕과 위덕왕(창왕))
    신라에는 감은사지 아버지 그리움과 효심 입니다(문무왕과 신문왕)

  • @KiKi-zo9fc
    @KiKi-zo9fc 3 роки тому +22

    예전 TV에서 고구려의 모든 자기에는 바닥에 우물정자 #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백두산 천지를 의미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고구려는 백두산 천지를 신성시 여겼고, 고구려의 상징으로 생각했었다네요.. 광개토대왕 비석돌도 백두산에서 채취했고요..

    • @미제드론
      @미제드론 2 роки тому +1

      고구려 첫 도읍지 오녀산성 정상부의 연못도 천지라고 하더군요

  • @강산-k8q
    @강산-k8q 3 роки тому +5

    참조은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cinemool72
    @cinemool72 3 роки тому +5

    08:28 을총년 -> 을축년 육십갑자는 좀 알고 자막 다셔야죠 문화유산 채널인디

  • @gjochoi3650
    @gjochoi3650 2 роки тому +33

    호우총 발굴 그릇의 명문 상단에 그려진 "샆" 표시는 광개토왕의 문장입니다.
    최인호 작가님의 추리소설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보시면 그 문장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있습니다.

    • @myrmoi
      @myrmoi 2 роки тому +5

      그건 최인호 작가의 상상이고.... 상상과 현실을 구분 못하시면 안됩니다.

    • @김성겸-i2j
      @김성겸-i2j Рік тому

      흰소리... 을묘년애 재위한 고구리 제왕은 시호가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인 고국원왕이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아닌 것을 어찌 알랴...
      고구리 번국인 부상국의 인접 속국 녀국의 사신이 부상국 사신을 따라서 고국원왕을 알현한 때에 선물로 하사한 요강일 것이다.
      공주 사마의 릉이 무녕왕릉이라면 아들 명농 즉 성왕에게 독살되고 명농이 사람을 시켜 사후귀양지에 땅을 사서 묻힌 것이겠다. 무녕이 신하의 처를 배앗아서 명농을 낳았다고 한다.
      명농의 생모는 옛 지아비와의 정을 잊지 못하고 사마 즉 무녕을 독살한 것이다. 기록? 고구리사락!!

    • @시사랑-g5v
      @시사랑-g5v Рік тому +2

      저도 최인호작가님이 나오는 다큐를 본 적 있는데 거기에서 #을 우물정자로 보고 한민족의 성지 백두산 천지를 성징하는 것으로 풀이한 기억이 납니다.

  • @mincris7060
    @mincris7060 3 роки тому +12

    井자문양은 고구려를 상징하는 표식입니다. 최인호의 소설 [왕도의 비밀]에 나오는 내용인데 하늘의 우물을 뜻하는 말이며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해모수설화에서 기인했습니다.

  • @나그네구름
    @나그네구름 3 роки тому +21

    무녕왕릉의 발견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의 사망.날짜까지 정확한것을 확인함.
    삼국사기의 신뢰성이 만천하에 드러남.

  • @b.s-luck
    @b.s-luck 10 місяців тому +1

    금동대향로의 모습도 현재 대전연고지 대전시티즌 엠블럼에도있죠 그만큼 충청도의자랑중하나임 세기의발견bb 솔직히 대향로처럼 은닉해서 다숨겨놨다면 많은유물들이 약탈당하치않고 온전히우리가보존했을듯..

  • @쿠르쿠르롱
    @쿠르쿠르롱 3 роки тому +1

    7:30 초 가지들이 > 기자들이 자막수정 필요해보입니다

  • @존윅-q2y
    @존윅-q2y 3 роки тому +13

    향로는 불교제사에도쓰이지만 대대손손이어간다는의미도있습니다 중국에서는 황제의향로가꺼지다는 자손이없다는의미도있어요 즉망한다는뜻

    • @0019-i8p
      @0019-i8p 2 роки тому +1

      중국인은 아직도 대다수가 조상들 위패놓고 아침마다 향불 올리며 절 하잔아요,,명절 제삿날만 조상 찾는 우리보다 훨 나은듯,,,

  • @김중한-s2t
    @김중한-s2t 3 роки тому +9

    호우총을 열개를 제작해서 네번째 호우를 신라에서 확보한 것으로 고구려가 통치 하던 지역에 즉.총독이 주재하던 곳에 광개토 대왕을 제사용도로 썼던 그릇으로서,신라도 신묘년 광개토 대왕의 원정으로 당시 왜를 물리치고 신라를 구하여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국
    되었다.
    따라서 신라로서는 광개토왕의 죽을 후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제기로서의 용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 @의열단-q7r
    @의열단-q7r 3 роки тому +18

    #은 광개토대제의 문장이라고 배운 기억이 나네요

  • @Badagaese
    @Badagaese 3 роки тому +9

    무령왕능 발굴은 , 하루만에 유물들을 수습한 졸작이었어요
    추사 김정희는 금석학의 학자이고 그가 순수왕 진흥비를 발견한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 @yunheechoi2113
      @yunheechoi2113 2 роки тому +1

      진흥왕 순수비입니다..^^;;오타시겠죵

  • @김창현-x4o
    @김창현-x4o 2 роки тому +3

    천마총이 아니고 대릉원이라 부릅니다 최악의 발굴은 무령왕릉 빗자루 삽으로 유물을 쓸어담는 무지 취재경쟁

  • @하뚜슬쌤
    @하뚜슬쌤 2 роки тому +9

    부여출신이라 백제 금동대향로 진짜 많이 보고 많이 그렸는데 괜히 뿌듯하네요.(?

  • @sarasoliz9902
    @sarasoliz9902 2 роки тому

    Quisiera saber quien es que manda esta publicidad si yo rogaba tantos años que me gustaba esto quue estoy viendo resien me mandan eso estoy confundida quien esta interesado saber lo que pasa aqui me asombro como saben que me gusta esvucharlos su idia eso no lo se como fue que esta susefiendo lo que mas me gusta nobelas publicidafes peliculas todo con este idipma me encanta🤞👌👩❤

  • @tothehappiness4469
    @tothehappiness4469 3 роки тому +4

    8:28 을총년-> 을축년 으로 수정해야 할듯요

  • @jambread848
    @jambread848 3 роки тому +16

    백제는 일본말에서도 '대단하다, 훌륭하다'라는 뜻으로 아직도 남아 있는 대단한 나라.... '쿠다라'가 백제인데, 쿠다라나이 하면 그저 그런, 변변찮은 이지요 그럼 '쿠다라'는? 쿠다라는 대단한, 변변한 것이란 말이지요.

    • @Black_Dove99
      @Black_Dove99 3 роки тому +1

      그런 백제를 지들이 지배했다는 말도안되는 소리를 하기도 했죠..

    • @0019-i8p
      @0019-i8p 2 роки тому

      @@Black_Dove99 / 대체 역사를 어디서 배운건지,,,, 당시 일본은 마한,변한,진한의 삼한처럼 수많은 토호세력으로 분열된 상태엿으며
      일본의 서남해안, 한국의 서남해안+남해안 일부에서 해적질하면서 살던 집단들을 왜라고 불럿으며,,,
      가야지역에서는 왜에게 돈을주고 용병으로 쓰고 부족전쟁+신라의 공격을 막아내었기에 그게 빌미가되어 일본놈들이 왜 라는 이름으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거죠,, 천황도 백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데 일본 극우들이 주장하는것만 기억 하나보넹 ㅋㅋ
      또한 백제가 일본의 역사라고 하는건
      무령왕의 출신 성분이 불분명해서 그게 빌미가되어 백제가 일본 역사라고 우기는건데,,,, 아니 1명이 특정지역 출신이라면 그게 그나라 역사가 되나?
      그러면 중국의 청나라,금나라,제나라는 한국 역사게?

    • @최동규-u9x
      @최동규-u9x Рік тому

      백제와 일본은 한나라 였다

    • @djp2708
      @djp2708 5 місяців тому

      그들이 존중하는 백제 구다라에서 세기의걸작이 나왔으니 일본사람들이 얼마나 보고싶겠어

  • @남희정-m6r
    @남희정-m6r 3 роки тому +1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올립니다.손오공과삼장 저팔계.이야기가 중국의이야기인가 라는 궁금증이 있었는데 우연히 어느산에 바위로 자신의모습을 정확하게 드러나서 개인적으로 나의궁금증이 풀려서 적어봅니다. 손오공이야기가 우리정신세계이야기이며 시대는 아주오래된 이야기였다 라고합니다. 삼장과손오공이야기 바위로 정확하가 모습이 있습니다.

  • @lpc_mirror
    @lpc_mirror 3 роки тому +7

    땅속에 저런 말도안되는 향로가 파묻혀있었다는것도 놀랍고... 그걸 땅파다가 우연히 발견한것도 놀랍고... 계속 묻혀있었다던가... 아니면 땅팔때 흙이랑 같이 퍼져서 어디 버려지거나 했다면,.... ㅜㅜ

  • @juokhan6
    @juokhan6 2 роки тому +1

    해시테그라고 얘기하시는 것은 가야의 도기에 표시된 것과 혹시 연관 있지는 않나요? 무슨 이유로 도기를 대량 생산해야하면서 그들의 기호도 단순화된…

  • @dreamfreeker
    @dreamfreeker Рік тому +3

    다뉴세문경이 없어서 의외네요;;;
    한반도에선 '괴베클리 테페'급 발견인데..

    • @Paulwish
      @Paulwish Рік тому +2

      방송 기획자의 수준 차이 이겠지요

    • @jonggulee4607
      @jonggulee4607 4 місяці тому

      몇해전에 숭실대 박물관에 전시중인 국보 114호인 다뉴세문경을 직접 관람 했습니다. 청동기 시대에 만들었다고 믿기 힘들 정도의 세공기술과 아름다움에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실보다 가느다란 잔금과 동심원을 보시면 관람객들의 입이 쩍 벌어지는지 아시게 됩니다.😅

  • @keithcho4535
    @keithcho4535 2 роки тому +2

    우물 정(#)은 고구려 유물들에서 꾸준히 발견되는 문양 아닌가?
    최인호의 역사소설에서
    #을 따라서 중국 땅에 들어가 확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중국공안이 훼방을 놓고, 역사당국이 폐쇄한 고구려 유물장면이 나오던데...
    하백의 딸 유화와 해모수가 만났고
    고구려는 그들의 자랑스런 후손이란 의미라던데...
    해시태그라니.

  • @nythomaskwon
    @nythomaskwon 3 роки тому +8

    그때나 지금이나 기자들은 특종만 하면 된다. 문화재 파괴, 질서파괴는 생각하지 않는다. 국민의 알권리를 앞세워 온갖 불법을 저질러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 언론이다. 권력자도 언론을 이길 수 없다. 언론이 바로서면 나라가 바로 선다.

  • @tv-rv2fy
    @tv-rv2fy 3 роки тому +1

    #표시는 우물정자로
    생존시는 정안수용 물그릇이나
    사후는 제기용 물그릇 아닐까요?

  • @andrewcho5981
    @andrewcho5981 3 роки тому +7

    #물결모양. 하백을 의미. 태조의 어머니. 하백의 딸. 고구려의 국기.상징

  • @oz1h3
    @oz1h3 3 роки тому +38

    무령왕릉은 발굴 전 입구의 훼손이 있어서 유물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지요. 백제지역에 희귀한 벽돌무덤양식임에도 저런식으로 발굴된 것은 정말 처참합니다.

    • @있다-s2d
      @있다-s2d 2 роки тому

      지석부터 첨단과학적 검증을거쳐야함 , 내용자체도 매우 이래적임 출신내용 한줄 업적한줄 없고 생전이름이 적혀있고, 글씨는 고서예전문가 판단 졸작,
      무덤입구는 훼손후 마무리,
      왕무덤에 붙여조성한 곁 무덤이 존재하고,
      아무튼 의심투성이임

    • @Hyuchan1002
      @Hyuchan1002 Рік тому +1

      벽돌은 이미 개로왕 시절에도 구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삼화령
      @삼화령 Рік тому +1

      당시 국립박물관장이던 김원룡 박사 일생의 오점으로 남았죠. 고고학자로서 치명적인 실수를 했으니까요.

  • @측백과인동
    @측백과인동 3 роки тому +2

    그래도 좋아요 눌렀고 순위에도 동의합니다.

  • @gotrade21
    @gotrade21 2 роки тому +3

    샵 문양은 고구려의 문양의 하나로 군대의 깃발에 사용되었음. 다른 문양 하나는 원과 그 원을 통과하는 선이 있는 모양이 있음

  • @yh9684
    @yh9684 3 роки тому +23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 고서 들이 수없이 태워졌다는데
    아무리 감추려해도 드러나는 진실
    우린 천손임이 틀림없음

    • @frhyewfwd2579
      @frhyewfwd2579 3 роки тому +3

      20만권 태워졌다고 해요. 국회일지와 일제시대 당시의 관보에도 나왔어요 무자비하게 전국의 충의록, 단군사 중심으로 쓸어가고 남산아래서 태워지고 역사기록들이 수난을 당했네요

  • @JustRandomWonderer
    @JustRandomWonderer 3 роки тому +5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 @GingorangNews
    @GingorangNews 3 роки тому +17

    문화유산채널이 이렇게 재미있었나 인디아나존스 보듯이 가슴이 뛰었다

  • @bgkhan4475
    @bgkhan4475 3 роки тому +8

    레고랜드 밑에 다시 매몰되버린 한반도 유일 최대 환호유적지도 있습니다...

  • @naramansin
    @naramansin 3 роки тому +34

    금동대향로는 직접보면 멍~~~~때리거될거임

    • @MalangMolang
      @MalangMolang 3 роки тому

      고대때{sov동이족}들{몽골어}+{한국어}+{만주어}가
      서로 대화가 통했다는 기록
      이 고대때 기록한{sov동이족}들
      동남아 뿌리이 기록한
      동북아 뿌리{sov동이족}들 기록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
      동이들이 서로 전하여 오기를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법이 부여와 대부분 같다
      (후한서 동이열전 감)
      예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고
      말하는데 언어와 법령과 풍속이 대체로 비슷하다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
      동옥저는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이 고구려와 비슷하다
      (양서 동이열전 백제)
      지금의 언어와 복장은 고구려와 거의 같지만
      걸을 때 두 팔을 벌리지 않는 것과
      절할 때 한 쪽 다리를 펴지 않는 것은 다르다
      (양서 동이열전 신라)
      그들의 절하는 방법과 걷는 모양은 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으므로 나무에 금을 새겨 신표로 삼는다
      언어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신당서 권220 열전 동이)
      달말루(두막루)는 스스로 말하기를 북부여의 후예하고 말한다
      고구려가 그 나라를 멸하자 유민들이 나하를 건너 그곳에 거주했다
      /부여가 멸망하고 부여의 유민들이 세운 두막루는
      300여년 이후 발해에 병합
      (위서 권100 열전 88 실위)
      실위(몽골)의 언어는 고막해(선비) 거란 두막루(부여)국과 같다
      /두막루는 실위(몽골의 기원)의 동쪽에 있었는데 두막루의
      언어와 선비족의 후예 고막해와 거란의 언어가 같음
      /1300여년 전에는 부여(고조선어)어와 실위(원몽골어)어와
      고막해(선비족 후예)어와 거란(선비족 후예)어가 의사소통에
      불편이 없을 정도로 비슷함
      /고조선의 해체기에 고조선에 종속해 있던 유목민족들은
      독립을 하고 그 후예들은 유라시아 대륙으로 흩어지고
      고조선 문명권에 속해있던 민족들의 언어는 고조선어를
      공통 조어로 공유함
      /두막루를 통합한 남북국시대의 발해는 고구려어를 사용함
      /발해가 고구려어를 사용했다는
      (속일본기 권13 천평 12년(740년))
      천황이 대극전에 임하여 신년조회를 받았다
      발해사신과 신라학어 등이 함께 참석했다
      /신라학어는 일본어를 익히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신라인
      일본은 발해 사신과의 통역을 위해 신라학어와 함께 참석
      /부여(한국), 실위(몽골), 고막해(선비족), 거란(선비족),
      옥저,예,맥,한,고구려,백제,신라,두막루,발해의 언어와
      풍습이 비슷했다는 기록들은 고조선에서 갈라져 나온 고조선어 후예!!!!!!!!!!!!!!!!

  • @jaeokElang
    @jaeokElang 3 роки тому +9

    고구려가 북쪽지역을 기반을 둔 나라여서 남쪽에
    너무 기록이 없다는게 한이네요
    아 그리고 석기시대 유물중에 주먹도끼 역시
    엄청난 발견인데,,, 세계사를 다시쓸 만큼,,,
    그게 안나오네요

    • @0019-i8p
      @0019-i8p 2 роки тому

      단군,고구려,부여,발해,옥저,동예 등은 한강이남과 별 상관 없는 역사죠,,,,삼국시대에 고구려,백제 지배층만 연관있구요
      마한지역이 경기도,충청도,전라도에 걸쳐잇엇는데 기원후 500년까지는 호남지역 마한이 백제와 피터지게 싸웟다가 정복 당했고
      경남지역 변한은 신라와 600년 가까이 피터지게 싸웟다가 김해김씨 김수로 후손이 가야지역 주민들 뒷통수 치고 신분보장 조건으로
      진한 지역 경주김씨 김알지후손인 진흥왕에게 세금걷은것 몽땅 신라에 바치고 항복해서 진흥왕 왕비로 들어가고
      가야는 신라에 정복당했죠,,, 그 후손이 가야지역 김해김씨 김수로 후손 김춘추 잔아요,,,
      김춘추가 처음부터 왕족 대접 못받은이유가 그 조상이 가야국 지역사람들 뒷통수 쳐서 그런것임
      그리고 진흥왕+왕비의 후손이 남북극 통일신라 + 고려시대에도 계속 왕족집안으로 대접받고 살았슴,,왕건이 장가를 26번이나 갔잔아요
      그 대접받던 경주 김씨 김알지의 사촌인 김알평 후손이 경주이씨며,,김해김씨 김수로의 후손이 전주이씨임
      또한 전세계에 고인돌이 6만개가량 있는데,고조선 지역포함인 만주에는 1만개, 한반도에 3만개중 호남 지역에만 2만개가 있슴
      변한지역 여러개의 가야가, 통합 되지 못한이유중 한가지가,,,
      고구려,백제,신라는 철기 문화를 도입하고 도입되지 못해서 주변에 상대적으로 좀 약한 부족들을, 주변1개 점령하고 > 2개 점령하고 3개 점령해서 키웟는데,,,
      가야지역은 철기제조술이 뛰어낫기에 주변모두가 동급의 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소수부족들을 통합을 못함,,강자가 주변에 널렷었다는거죠
      호남 마한은 여러 부족이 단합+ 통합 못해서 백제 무녕왕에게 정복 당햇고,,,
      김해지역 가야 변한은 단합+통일도 안되었고 + 왜를 용병으로쓰다가 김수로 후손이 전재산 들고 항복해서 진흥왕에게 정복 당한거죠
      또 왕건이 죽으면서 훈요10조 말하면서,,호남사람을 인재로 등용말라고 한것은 거짓말이죠,,,,전라도 까기위한것임
      왜그러냐면 왕겅의 뒤를 이은 혜종이,,나주부인 오씨 아들이거든요,,,왕위를 호남출신 아들에게 물려 줫는데,,,호남 사람을 멀리하라는게 유언? ㅎㅎㅎ

    • @미제드론
      @미제드론 2 роки тому +1

      파주 호로고루성 양주 불곡산보루 포천 반월성 서울/구리 용마산보루군 이천/음성 망이산성 안성 도기동산성 청원 부강면 남성골산성 대전 월평동산성 등이 고구려가 처음 쌓았거나 고쳐쌓거나 점령해서 사용했던 군사시설들 입니다.

  • @cyoomail
    @cyoomail 3 роки тому +1

    좋네요 역사를 재미있었어 읍니다. 이른프로가 절실팔요합나다

  • @닉샷
    @닉샷 3 роки тому +1

    성대현은 가수 입니다

  • @심심풀이-g7v
    @심심풀이-g7v 2 роки тому +3

    무령왕릉 순위는 더 높여야 됨. 신라왕릉은 도굴 불가능한데 무령왕릉은 도굴되기 쉬운 무덤인데도 완전한 모습으로 발굴됐으니까 더 높아야

  • @Kevin-br6wd
    @Kevin-br6wd 3 роки тому +4

    꿀잼~

  • @Kwansan1
    @Kwansan1 3 роки тому +10

    일제식민사관을 목숨걸고 사수하는 서울대역사학과 교수놈들을 비롯한 소위 강단사학자놈들을 참수하라

    • @유튜브채널-p9s
      @유튜브채널-p9s 11 місяців тому

      ㅋㅋ 언제적 식민사관이노?
      환빠들 본인이 꼬우면 다 식민사관으로 몰아가는게 개꼴받음

  • @정자연-b3c
    @정자연-b3c 2 роки тому

    8:28 을총년? 자막 오타
    을축년(1925년) 대홍수~

  • @phkair
    @phkair 3 роки тому +9

    금동대향로 하나로 부여박물관의 품격이 몇 단계 올라갔지....ㅎ 원래 국박에 넣으려고 했다가 부여로 갔다는....

  • @wincup
    @wincup 3 роки тому +13

    저 # 무늬 90년대말인가에 방영되었던 고 최인호작가의 고구려관련 다큐에서 다뤘던 기억이 납니다. 다른 내용은 약간 너무 상상이 가미된 대담한 가설이라 반감도 있었지만, 적어도 저 마크가 '광개토대왕'의 (혹은 특정시대 고구려의) 특유 마크였다는 내용은 꽤 신빙성이 갔었는데, 그 이유가 호우총 청동기만이 아니라 옛 고구려 고토지역(만주근방)에 직접 최 작가가 가서 발굴하던 고구려 토기등에서 저 마크가 나오더군요. 당대 백제나 신라 토기에선 전혀 없었구요. 하여간 신기했습니다. (관련 영상- ua-cam.com/video/ZCDv81x--_I/v-deo.html)

  • @정광우-x7w
    @정광우-x7w 3 роки тому +4

    제가살던 동네에 초등학교가있는데 이곳이 개발되기전에는 왕릉들과 비석등등 어마어마하게 많았는데 개발되면서 동네유지들이 하나씩 들고가고 타 지역으로 옮겨가서 개판된곳이죠. 어릴때 친구집마당에 높이3미터쯤되면 비석이 있어서 놀랏던 기억이납니다

  • @NaN_OTL
    @NaN_OTL 2 роки тому +4

    금동대향로는 발굴당시 사자보는데 눈물이났어요.

    • @koreanheritage
      @koreanheritage  2 роки тому +1

      금동대향로 발굴을 그야말로 '기적'이라 할 수 있죠..💫 따뜻한 댓글을 보니 저도 뭉클해지네요😢

  • @9전10승-g5s
    @9전10승-g5s 3 роки тому +8

    세종대왕이 집현전을 만들듯이 정부는 "바른 역사 쓰기 청"이라도 만들어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다시 써 정립을 해야 한다.

  • @파닥파닥-c4s
    @파닥파닥-c4s 2 роки тому +2

    금동 대향로는 진짜 엄청나게 중요하고 멋진 유물임... 거기에 철기병 나옴 참고로 백제유물 90%는 일본이 가져감 ㅋㅋㅋㅋ 왜 그럴까??? 백제는 왜나라의 상국임... 그러니 그 역사를 보여주고싶지 않은거임 백제영토는 엄청나게 큰 나라인데;; 유물이 다 사라져서 증명하기가 힘듬;;; 안타까움 제발 우리역사서는 반도사관을 지웠으면함.... 우리역사는 대륙의 역사이고 배달의민족의역사인데
    자꾸 삼한의 역사로 인식하게 만듬... 그러면 중국한테 고구려 역사도 뺏기게됨...우리역사의 시작은 지금의 바이칼 호수지역에서 부터 시작한 거의 만년의 역사임 오쳔년이 아니고;;; 그리고 엄청난 영토였음 지금의 터키 지역이랑 국경을 맞닿고있었으니깐 중국은 오랜 역사가 있는 국가가 없는 이유를 생각하면 됨 어느 전세계 어느나라역사도 천년이상의 역사가있는 국가는 거의없음 그러니 대륙의 거의모든 문화를 우리가 지배했던 시대가 3천년이상임!!! 제발 정신차리고 역사를 제데로 봐야함.... 우리나라는 절대 반도역사가 아님

  • @세계여행자-m4i
    @세계여행자-m4i 3 роки тому +6

    나도 금동대향로...가 1픽...
    정말 놀랍긴 하지...

  • @zpzgya
    @zpzgya 3 роки тому +4

    # 자는 고구려의 상징입니다
    우물 정의 뜻이고 우물은 생명 하늘과 이어주는 곳입니다
    고구려 국기로도 사용된걸로 알고 있습니다
    역사작가 최인호 선생님께서 고구려 역사를 추적하시다 발견하셨습니다

    • @MalangMolang
      @MalangMolang 3 роки тому

      고대때{sov동이족}들{몽골어}+{한국어}+{만주어}가
      서로 대화가 통했다는 기록
      이 고대때 기록한{sov동이족}들
      동남아 뿌리이 기록한
      동북아 뿌리{sov동이족}들 기록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
      동이들이 서로 전하여 오기를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법이 부여와 대부분 같다
      (후한서 동이열전 감)
      예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고
      말하는데 언어와 법령과 풍속이 대체로 비슷하다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
      동옥저는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이 고구려와 비슷하다
      (양서 동이열전 백제)
      지금의 언어와 복장은 고구려와 거의 같지만
      걸을 때 두 팔을 벌리지 않는 것과
      절할 때 한 쪽 다리를 펴지 않는 것은 다르다
      (양서 동이열전 신라)
      그들의 절하는 방법과 걷는 모양은 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으므로 나무에 금을 새겨 신표로 삼는다
      언어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신당서 권220 열전 동이)
      달말루(두막루)는 스스로 말하기를 북부여의 후예하고 말한다
      고구려가 그 나라를 멸하자 유민들이 나하를 건너 그곳에 거주했다
      /부여가 멸망하고 부여의 유민들이 세운 두막루는
      300여년 이후 발해에 병합
      (위서 권100 열전 88 실위)
      실위(몽골)의 언어는 고막해(선비) 거란 두막루(부여)국과 같다
      /두막루는 실위(몽골의 기원)의 동쪽에 있었는데 두막루의
      언어와 선비족의 후예 고막해와 거란의 언어가 같음
      /1300여년 전에는 부여(고조선어)어와 실위(원몽골어)어와
      고막해(선비족 후예)어와 거란(선비족 후예)어가 의사소통에
      불편이 없을 정도로 비슷함
      /고조선의 해체기에 고조선에 종속해 있던 유목민족들은
      독립을 하고 그 후예들은 유라시아 대륙으로 흩어지고
      고조선 문명권에 속해있던 민족들의 언어는 고조선어를
      공통 조어로 공유함
      /두막루를 통합한 남북국시대의 발해는 고구려어를 사용함
      /발해가 고구려어를 사용했다는
      (속일본기 권13 천평 12년(740년))
      천황이 대극전에 임하여 신년조회를 받았다
      발해사신과 신라학어 등이 함께 참석했다
      /신라학어는 일본어를 익히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신라인
      일본은 발해 사신과의 통역을 위해 신라학어와 함께 참석
      /부여(한국), 실위(몽골), 고막해(선비족), 거란(선비족),
      옥저,예,맥,한,고구려,백제,신라,두막루,발해의 언어와
      풍습이 비슷했다는 기록들은 고조선에서 갈라져 나온 고조선어 후예!!!!!!!!!!

  • @youngkimkim8433
    @youngkimkim8433 Рік тому +1

    큰 그림을 작게 만드는 방법이 있을 거 같은데 그런 금속제작법이 있었지 않을까

  • @김창남-x5w
    @김창남-x5w 2 роки тому +2

    min cris
    1개월 전(수정됨)
    井자문양은 한민족의 성지 백두산의 천지를 의미한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 @롤로토마시-n7e
    @롤로토마시-n7e 3 роки тому +3

    # 기호는 첨성대에도 있고, 절의 우물에도 있고, 삼국의 성터의 우물에도 있어요.
    (고대 시대의 우물에는 다 저런 문양이 있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겠죠.)
    즉 우물 위에 설치된 틀 입니다. 물론 첨성대는 우물이 아니지만,
    이 우물 자체가 단순히 우물이 아니라, 하늘을 거울처럼 비추므로 하늘과 연결된 매개체입니다.
    첨성대는 비추지는 않지만 다이랙트로 하늘을 보는 곳으로
    우물과 같은 의미로 작용하고, 첨성대 꼭대기가 # 자 틀로 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 이유죠.
    즉, 이 우물은 단순히 물리적 개념의 우물이 아니라,
    신앙적 측면에서 북두칠성을 담는 그릇 입니다.
    우리 할머니들이 장독대에서 정수물에 물 떠놓을 때,
    그 그릇 안에 북두칠성이 비추게 하고 기도를 했더랬죠.
    그러니까 저 솥단지의 문장들이 제례적 성격이 강한 거죠.
    즉, # 기호는 바라옵 건데~ 비나이다 비나이다~ 라고 시작되는 기도 문처럼 제례용 호우라는 표시 입니다 .
    그러므로 저 솥단지의 문자들 내용은
    을미년에 광개토태왕님의 제례에 사용된 호우십 (열 개의 솥과 병이나 열 번 째 솥)이라는 뜻이죠.

    • @taratara6588
      @taratara6588 3 роки тому +2

      # 표식은 제가 연구하고있는 곳의 유물을 이탈리아 학회에 의뢰한 연대측정 결과16.500
      년것이라는 석판에도
      각인되어 있음니다
      십자표식과 # .이두표식은
      한반도에 존재하엿던
      역사이전의
      문명 중에서
      최고의
      권위자에게 내려젓던
      인장임니다
      광개토대왕은
      그들의
      혈통이라서
      # 표식을
      사용할수 있엇던
      것임니다

  • @정토-s3v
    @정토-s3v Рік тому +1

    부여가서 보고 왔음. 너무 아름답고 정교해서 놀랐음

  • @최우정-x8b
    @최우정-x8b Рік тому +1

    십여년전 부여박물관에서 일본인인듯한 남자분께서 한참동안 향로를 보고계시던게 기억나네요.

  • @성수김-f9o
    @성수김-f9o 2 роки тому +5

    훈민정음 혜례본 소유하신분... 정말 조국을 사랑하는 맘으로 나라에 기증하시길 부탁합니다... 세계에 유일무이한 국보중에 국보중에 국보 그 이상의 가치입니다. 혹여라도 소장하시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정말 암담합니다... 다시한번 깊이 사려해 주세요...

  • @박봉팔-q6j
    @박봉팔-q6j 2 роки тому +3

    금동대향로 이상세계 그림은 7,80년대에 형ㆍ누나 책들 중고등학교 관련서적 표지에도 나왔는데 발견은 늦게 했네.

  • @김성현샘
    @김성현샘 Рік тому +1

    금동대향로는 진짜 다보탑을 만든 아비지의 숨결에 비견할 만하네요.
    을축년 대홍수 아닌가요?

  • @celsius200do
    @celsius200do 3 роки тому +20

    성대현은 아직도 방송 잘하는데 왜 공중파에 안나오는지 미스테리네..

    • @DanJJSTChoi
      @DanJJSTChoi 3 роки тому +2

      사고 한번쳤지 기억도 안나지만요

    • @구피-z3f
      @구피-z3f 3 роки тому +4

      솔직히 공중파급은아니죠ㅡ

  • @michaelhong5774
    @michaelhong5774 3 роки тому +1

    위대한 유산들의 행진. 기리기리 그 유업 보전 합시다. 스스로.....

  • @fiatmihi2453
    @fiatmihi2453 3 роки тому +2

    무엇보다 성대현씨 올만에 봐서 반갑네요

  • @bill---gates
    @bill---gates 3 роки тому +5

    무령왕릉 발굴은 차라리 하지 말았어야 후대에 제대로 발굴 되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 @손원식-d4n
    @손원식-d4n 3 роки тому +5

    역사 소식 감사합니다~^^ 역사를모르면 나라가망한다!!??

  • @OYT0724
    @OYT0724 3 роки тому +8

    삼국사기에 백제의 첫 도읍지는 북쪽에 말갈이 있고 동쪽에 낙랑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기에, 남한의 서울이 한성백제의 수도였다면 강원도 산골짜기에 낙랑이 있었다는 소리인데 이건 말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백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크게 패한 직후 한반도에 들어왔던 것이고, 그 이전에는 만주 요동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역사 기록들이 엄연히 남아 있습니다.
    또한 백제의 두번째 도읍지 북쪽에 패하(浿河, 패수)가 있었다고 하는 동시에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였던 동시에 중국과의 경계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강은 역사적으로 중국과 고구려의 경계지역이었던 중국 만주에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백제는 나중에 고구려에게 크게 패하여 도읍지를 세번째로 옮겼을 때에서야 한반도로 이동했다고 나오는데 이 또한 지금의 서울이 아니라 현대 북한 대동강 지역 또는 압록강 지역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한반도 남쪽에 백제 성터나 유물이 거의 안나오는 이유는 백제의 원래 영토는 백제 역사 대부분 만주 요동지역과 한반도 북쪽에 도읍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북한이 한반도 북쪽을 차지하고 있고, 북한에서는 발굴이나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 지고 있지 않기에 기록이 없는 것입니다.
    참고로 백제는 도읍을 아주 여러번 옮겼습니다.
    =================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13년
    〔13년(B.C. 6)〕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註 001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사이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께서 돌아가셨다.註 002 형세가 스스로 편안지가 않으니, 장차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註 003 오래도록 편안한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다.”
    〔13년(B.C. 6)〕 8월에 마한(馬韓)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遷都]을 알리고,註 001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다. 북쪽으로는 패하(浿河)註 002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熊川)註 003을 경계로 삼으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註 004에 이르렀다.註 005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2
    분서왕 7년
    7년(304)註 001 봄 2월에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쪽 현(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註 002
    =================
    근초고왕 26년
    26년(371)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왔다. 왕이 듣고 군사를 패하(浿河)註 001 가에 매복시켜 그들이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6
    광개토왕 4년(394)
    가을 8월에 왕이 패수(浿水)위에서 백제와 싸워 이를 크게 패배시켰다. 사로잡은 포로가 8천여 급이었다.
    =================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
    나중에 점점 강대해지더니 여러 작은 나라들을 아울렀다. 그 나라는 원래 고구리와 마찬가지로 요동(遼東) 동쪽에 있었다. 진(晉)나라 때 고구리가 요동(遼東)을 쳤다. 백제(遼西)도 요서(遼西), 진평(晉平) 두 군현을 차지하고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
    (생략) 고구리와 싸워 크게 지고 힘이 약해진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나라를 남쪽 한(韓) 땅으로 옮겼다. 보통(普通, AD 520-526) 2년(521), 임금 여융(餘隆)이 처음으로 다시 사신을 보내고 글을 올렸다. 글에 하고 적혀 있었다. 백제가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
    =================
    사기 - 조선열전 제오십오 (史記 - 朝鮮列傳 第五十五)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하자, 요동의 바깥으로 나갔다. 한나라가 일어서자 그곳이 멀고 지키기 어려워 요동의 옛 요새를 고치니, 경계가 패수로[집해: '한서음의'에 '浿'는 沛가 바뀐것이다.][색은: '浿'는,沛가 바뀐것이다.][정의: '지리지'에, '패수'는, 요동의 요새밖에서 나오며,서남으로흘러, 낙랑현 서쪽에 이르러, 海로 들어간다.] 연나라에 속한다.
    '연왕 노관'이 반하여 흉노로 도망가고,'만'이 명령을 버리고[정의: 命은 敎令이라 한다.] 그 무리 천여명과 상투를 틀고 '만이'의 복식으로 바꾸고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벗어났다.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공지'인 '상하장' 땅에 살다가[색은: 지리지에 보면 낙랑에 '운장'이 있다.] 차츰 '진번조선'에 속하게 되고, 만이,연,제나라의 망명자들의 왕이 되어 '왕검'에 도읍을 하였다.
    [집해: 서광이 말하기를,창려에 험독현이 있다.]
    [색은: 위소에, 옛도읍 이름이다. 서광이,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 응소는 주(注)에서 지리지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도읍이라하고 신찬은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동쪽에 있다.]
    =================

    • @OYT0724
      @OYT0724 3 роки тому +3

      475년에 백제는 고구려에게 수도가 함락되어 남쪽으로 갔다고 하며 동시에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다고 나옵니다. 지금 이 영상에서 주장하는 것 처럼 백제의 원래 수도가 항상 경기도 서울 이었다면 백제가 고구려에게 패한 이후 남하를 했기에 경기도 남쪽 어딘가에 백제의 궁궐이 있어야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백제는 광개토대왕에게 수도를 함락당하고 왕이 처형당했지만 원래 가지고 있던 영토는 대부분 유지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말갈과 고구려와 옛날과 같은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패수의 이름도 계속 나오고 한성 이북에 있다는 관미성(關彌城), 쌍현성(雙峴城), 석현성과 적현성 등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또 또 재미있는 점은 백제가 고구려군을 상대로 도움을 주었던 신라의 뒤통수를 때리려 하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 기록은 신라쪽 기록이 아니라 백제쪽 기록인 백제본기에 나오는 것 입니다. 553년 백제본기에는 신라가 동북 영토를 '빼앗았다'고 표현하는데, 전투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는걸 보니 고구려에게 밀려서 멸망 직전까지 몰려있던 백제 상황을 지켜보던 신라가 백제를 보호해 준다는 핑계로 백제가 잃어버린 영토들을 통보 없이 마음대로 가져갔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신라가 고구려군을 물리친 후 백제는 일단 왕의 공주를 신라에 보내 혼인을 맺게 하여 안심을 시킨 직후 몰래 신라의 뒤통수를 때리려 했습니다. 이 작전은 실패하고, 백제는 고구려군과 신라군을 동시에 싸우게 되고, 백제는 이때 수나라에게 조공을 바치며 속국이 되기를 자청하는 동시 고구려를 토벌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고구려가 이 사실을 눈치채고 열받아서 또다시 백제를 엄청나게 공격합니다.
      보병과 기병 50이라 함은 보병 기병 각각 50명만 데려갔다는 뜻이 아니라 기병 50명과 여러 보병들을 데려갔다는 뜻 입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2
      책계왕 13년(298)
      가을 9월에 한(漢)나라註 002가 맥(貊)註 003 사람들과 함께 쳐들어왔다. 왕이 나가서 막다가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근초고왕 26년(371)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註 001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3
      아신왕 12년(416)
      동진(東晉)의 안제(安帝)註 001가 사신을 보내 왕을 책봉하여 사지절(使持節)註 002 도독백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註 003 진동장군(鎭東將軍)註 004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註 005
      아신왕 15년(469)
      겨울 10월에 쌍현성(雙峴城)註 001을 수리하였다. 청목령(靑木嶺)註 002에 큰 목책을 세우고, 북한산성(北漢山城)註 003의 군사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개로왕 21년 (475년)
      (...생략) 이 때문에 창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지니 나라의 위태로움이 알을 쌓아놓은 것보다 심하였다.
      이에 도림이 도망쳐 돌아가 아뢰니 장수왕이 기뻐하며 장차 백제를 정벌하려고 장수들에게 군사를 주었다.
      근개루가 그 말을 듣고 아들 문주(文周)註 013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어 이 지경이 되었다. 백성이 쇠잔하고 군사가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을지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해 힘써 싸우겠느냐.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註 014에서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이로울 게 없다.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國系]을 잇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註 015․조미걸취(祖彌桀取)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對盧)註 021제우(齊于)註 022·재증걸루(再曾桀婁)註 023·고이만년(古尒萬年)註 024 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북성(北城)註 026을 공격하여 7일 만에 빼앗고 옮겨서 남성(南城)註 027을 공격하니 성 안에서는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다.註 028
      왕이 나가서 도망하자 고구려 장수인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나열한 다음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註 029 아래로 보내 죽였다.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註 030
      ================
      문주왕 1년 (475년)
      개로왕 재위 21년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하였다. 개로가 성을 막고 굳게 수비하면서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토록 하였다. 그는 구원병 1만 명을 얻어 돌아왔다.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으나註 003 성이 파괴되고 왕이 사망하여서註 004문주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원년 겨울 10월에 웅진(熊津)註 006으로 도읍을 옮겼다.
      ================
      백제본기 제4
      성왕
      성왕26년
      봄 정월에 고구려 왕 평성이 예(濊)註 130와 공모하여 한수이북의 독산성(獨山城)註 131을 공격해왔다.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이 장군 주진(朱珍)註 132을 시켜 갑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고구려 군사들과 일전을 벌려 크게 이겼다.註 133
      성왕 (523년)
      원년 가을 8월에 고구려 군사가 패수註 112에 이르자註 113 왕이 좌장 지충에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주어 출전케 하니 그가 적을 물리쳤다.
      성왕16년(538년)
      봄에 도읍을 사비註 121 소부리(所夫里)라고도 한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註 122라고 하였다.
      성왕 31년(553)
      가을 7월에 신라가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新州)註 142를 설치하였다.
      성왕 (553년)
      겨울 10월에 왕의 딸이 신라에 시집갔다.註 143
      성왕 32년(554)
      가을 7월에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註 145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註 146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
      위덕왕 45년 (598)
      왕이 수나라가 요동전쟁을 일으킨다는 소문註 037을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바치고, 군도(軍道)가 되기를 요청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년에 고구려가 조공을 바치지 않고 신하로서의 예절을 갖추지 않았기에 장군들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케 하였는데, 고원(高元)註 038의 신하들이 겁을 내며 잘못을 시인하기에 내가 이미 용서하였으니 그들을 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우리 사신을 후대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가 그 일을 모두 알고 군사를 보내 우리 국경을 침략하였다.註 039

    • @있다-s2d
      @있다-s2d 2 роки тому +3

      역시 현재 교과서는 소설이 맞네요,
      위 사료만봐도 저같이 역사를 조금아는사람도,
      현재 중국땅에서 벌어진 역사란걸 추정이 가능하네요

  • @user-psychefilm
    @user-psychefilm 3 роки тому +3

    금동대향로 보려고 일부러 부여를 갈 정도니..

  • @엑스칼리버-m8v
    @엑스칼리버-m8v Рік тому +1

    그릇 기호는 당시 그릇제작 주물공업사 메이커 표시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 @_Tidian
    @_Tidian 3 роки тому +15

    ㅋㅋㅋ 동공지진웃겨 저 분도 다 알면서 대본대로 하신거겠지만. 최태성쌤은 자연스럽게이해하면서 설명하셨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