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화선생이 일본 왕립도서관에 11년간 근무한것이 사실로 확인되었고, 박선생이 조선의 고서를 관리한 부서에 근무한 것이 사실이면, 단순히 위서라고 단정해서는 안된다.그런 직책은 아무나 갈 수 없는 자리이다. 따라서 그분의 필사본 기록을 귀중한 보물로 취급해야 마땅하다. 또한 설문에 새겨진 화랑의 계좌와 필사본에 새겨진 화랑의 계좌가 다를수도 있다. 화랑은 수백명의 강도가 모여 그 집단의 대표가 화랑이므로 전국에 화랑은 수백명이었다. 따라서 석문의 기록에 화랑의 이름이 모두가 아니고 일부 일수도 있다 추정한다.
뼈속까지 식민사학자였던 이병도의 후세들인 서울대학교 역사학과와 노태돈 교수는 역시 화랑세기를 부정하기 위해 온갖 이유를 다 들이대네요. 화랑세기가 위작이라면, 이런 구체적이고 광범위한 역사적 사실을 스스로 한 번 창작해보라고 하고 싶군요. 과연 1500년이 지난 시점에 이전 시대의 이야기를 이렇게 구체적인 관직명, 풍습,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포함하여 창작할 수 있는지? 역사서는 소설이 아닌만큼 기존에 참고할 자료도 없이 이런 방대한 기록을 창작한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선생님들이 써준 역사서 외에 우리의 정사인 삼국사기, 고려사도 틀렸다고 부정하는 식민사관의 강단 사학자들이 정말 원망스럽습니다. 그런 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계속 왜곡하고 있는 현실도 안타깝네요.
에이 이미 교차 검증이 되는 중국 정사 속 우리 조상의 행적 조차 취사 선택 골라 먹기 하고 있는데 그걸 고려 하겠음? 중국 정사 속 한국 역사만 봐도 지금 한국인이 알고 있는 고대사는 전부 새로 다시 써야 함. 근본적인 지역 설정에서부터 건국자와 건국시기까지 맞는 거 찾는 게 더 빠를 정도임.
중국의 동북공정처럼 일본의 일제사관처럼 역사왜곡을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안타까운 연유로 인해 소중한 고대 역사서를 모두 잃어버렸으니 비록 원본 없는 필사본이기는 해도 내용이 모두 정확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잘 고증하고 또한 외국의 역사책들과 비교연구해서 비록 원본 역사책은 잃어버렸지만 우리 조상들이 만들었던 위대했던 고대사를 모두 힘을 합쳐서 복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류사학자라고 하시는 분들은 뭐 연구도 하기 전에 대안도 없으면서 일단 위서라고 그래 버리면 우리 후손들은 우리 조상들에 대해 어떻게 꿈을 꾸고 어떻게 자긍심을 이야기해야 합니까 제발 부탁드립니다 국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위서론이 주류를 차지 하고 있지만 진서론 쪽 주장에도 근거가 충분히 있으니 섣불리 어디가 맞다고 하기는 힘듬..기존 강단사학자들이 인정하면 불리한 내용이 너무 많아서 ㅋㅋ 기존 내용이 틀렸다는걸 증명하게 되면 자신들 입지가 좁아지기 때문에.. 학자적 양심이 없는거지.. 지금 저 책을 배꼈다고 해서 그대로 받아적는게 별거냐 할 수도 있는데 지금 저 책은 전 내용이 한문으로 되있는거고 위서론이 저 책은 창작 되었다 하는데 저 긴 내용의 책을 한문 원본으로 창작하라고 하는게 사람 혼자서 단기간에 해낼수 없는 수준이라고 생각됨 분명 창작이라 해도 참고해야할 자료가 있어야 창작을 하는거지.. 따라서 진서라고 본다 우리 상고 고대사는 너무 많이 왜곡되어있기 때문에 지금 기준의 역사관으로 바라보는거 자체가 무리
개인적으로 화랑세기는 진짜라고 생각한다. 화랑세기 자체가 우두머리를 기준으로 작성된거고 화랑들은 계층과 상관없이 모든계층의 화합용이기도 했다. 암각화에 모든 화랑이 이름 세기러 가는것도 아닐거고 일부 낮은지위 화랑들이 놀러가거나 일부 화랑들이 전쟁가기전에 이름 남겼을수도 있는거다. 막말로 피라미드가 완공되고 낙서를 한것과 클레오파트라때 낙서된것이 있는데 그당시 왕족이 이름을 남길까? 후세에 증거도 추정에 불과하다. 그리고 일제시대때 우리가 모르는 기록물이 많이 빠져나갔고 실제 1990년 전에 일본고미술거리에서 한국자료 저렴하게 구했다는 말들도 많이 들었었다
화랑세기는 위서가 아니고 정창원의 원본 필사본 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신의 근거는 황당하군요. 화랑세기 언급대로 화랑은 종교 의식을 담당하는 엘리트 집단입니다. 화랑이 하얗게 분칠했던 이유는 지배 계급인 성골이 백인이어서 하얀 피부색이 필요했던 거구요. 화랑의 동성애와 유사한 남자들간의 유대 또한 스키타이 문화와 유사합니다.
@@최지환-c3y 삼국사기에서는 김춘추 아빠 김용춘/김용수를 동일인물이라고 말함. (즉 용춘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표기가 용수)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김용춘과 김용수가 형제지간으로 원래 김춘추 친부인 김용수가 선덕여왕 즉위 초 혹은 그 이전에 먼저 죽자 형인 용춘에게 처자를 부탁한 것이라 말함. 그런데 훗날 황룡사지에서 발굴된 심초석을 보면 선덕여왕 12년에 황룡사 9층탑 공사를 감독한 인물이 용수라 하였고, 삼국유사에사는 9층탑 공사를 감독한 인물을 용춘이라 하였음. 즉 용수와 용춘이 별개의 인물이라 했던 화랑세기 필사본의 내용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고 또 용수가 선덕여왕 즉위 초 혹은 그 이전에 죽었다는 내용도 잘못된 것임.
@@최지환-c3y 또 삼국유사에서 승려 자장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무림은 그 이름이 고려 혜종 왕무의 이름을 피휘하느라 호림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되는데,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도 이걸 그대로 따와서 호림이라 씀. 화랑세기 필사봄이 신라시대 김대문이 저술한 원본이라면 굳이 고려시대 국왕의 이름을 피휘해서 무림을 호림이라 쓸 이유가 없음.
그 당시 정부관계자들은 나라는 안중에 없고 자기 주머니 돈만 챙기면 되는 자들이었나봅니다. 2022 새해가 밝았는데 지금은 더 심하죠. 사방에서 역사왜곡 하는데도 오히려 역사왜곡자들에게 국민세금으로 지원까지 해주고 있으니까. 알고 있는 왜곡 단체가 동북아역사재단. 이 나라 애국자들은 대체 어디로 갔나? 여기다 대고 막 하소연 해보고 있습니다.
청화수님이 다룬 영상에서도 봣지만.. 화랑세기를 위서라고 하기엔 적혀 있는 내용이 되려 위서가 아닐 수 있는 점들도 많습니다.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온 신라 성벽 구조가 실제 발견된 유적과 동일하다는 점, 포석정이 아니라 포석사라는 기록이 있는데 실제로 포석정이 사원 역할도 했고 실제 절터가 있던 걸로 밝혀졌던 점을 고려해봤을 때 화랑세기 필사본을 무조건 위서라고 까고 무시할 게 아니라 진서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정사 기록과 교차검증해 보충 보완할 참고자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필사본이라 못믿는 게 아니라 그동안 등장하지 않다가 갑자기 구한말 등장하니 믿을 수 없다는 거. 책이란 게 돌고 도는 거라서 다른 책에도 인용되고 하는데. 조선시대 내내 등장도 않고 실전됐다는 기록까지 나왔는데 갑자기 일제 비밀서고에 숨겨져있었다? 이걸 믿는 게 신기함..
예전에 봤지만 한번 생각나서 끄적여 쓰는댓글. 필사본이 있으면 원본도 있겠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일본서기도 원본이 없고 필사본만 존재합니다. 일본에 존재하는 오래된 고서나 역사서들도 그 원본이 아니라 필사본만 있는 경우 허다합니다. 당장 일본 최고로 오래된 역사서인 일본서기만 봐도 그래요. 그래서 여전히 화랑세기 논쟁은 미스터리인겁니다. 원본이 없고 필사본만 있다해서 그렇다고해서 위서로 치부하는건 이치에 맞지않다 사리에 맞지않다 이말입니다.
저는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공부만 한 학자들은 거짓말을 잘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험상 입니다. 그리고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거짓말을 해서 얻을 이익이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조국의 바른 역사를 전하기 위해서 노력하시는 분을 바르게 알아 주면 좋겠습니다.
향가, 금석문, 구지, 포석사 등 당시 전혀 알려지지 않았거나 최근에야 새로 밝혀진 내용이 이미 기술돼 있던 것으로 보아 위서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고 완벽하진 않을지언정 필사본이 맞는것으로 판단할수 밖에 없어 보입니다. 무엇보다 이런것들을 (과거에) 창작했는데 훗날 밝혀진 유적이나 사료들을 보니 맞는 부분이 있더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죠.
화랑세기는 누가봐도 진본이네...어떤 사람이 저런 소설을 쓸수 있는가...당시 발굴되지 않은 당시 사용 글자, 역사까지 다 짜 맞춰서 기록할수 있는 사람은 없다.. 향가만 봐도 향가는 일종의 암호문인데 창작할수가 없는것이다. 암각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화랑세기에 없다고 해서 위작 가능성을 운운하는것은 말도안된다고 본다. 학교 담벼락 낙서에 역사속 인물이 안나온다고 그 역사책이 위작이라고 단정지을수는 없으니 말이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화랑들과 금석문의 화랑들의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 : 화랑세기엔 당연히 화랑들 중에서도 거물급 화랑들 위주로만 언급이 되었을 것임 금석문엔 천전리에 놀러갔던 화랑들이 자기들 이름이나 자기랑 친한 화랑들 이름을 적어놓지 않았을까 나 관랑 천전리에 놀러왔다 ㅋ 나 천진랑도 갔이 왔음 ㅋ 세기랑, 문랑, 자인랑아 우리 우정 영원하자 ^^ 혹은 통주랑 개객끼 이런 식으로 자기 마음에 안드는 화랑 욕하기
역사도 인문과학이라는 엄연한 과학분야에요. 논리적이어야하고 근거와 증거가 바탕이 되어야 과학이라 부를수 있는거이죠. 출처와 서지사항이 분명하고 교차검증이 가능할때 비로소 진서라고 인정받는 겁니다. 화랑세기 필사본이라고 주장하는 책은 이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진서라 할수가 없습니다.
@@안드레아스-e8m 서지사항은 필사본일 수 밖에 없지 않나요. 그시대에 조선에 가져오자고 금속활자를 만들 수 있는거도 아니고. 그시대 저정도 촉탁사원 월급이면 계약직 수준 월급인데, 사진을 장만할 수도 없을테고, 일제가 책을 나눠서 보관했다는 점에서 몰래 조금씩 외워서 옮겼을 거 같은데 전문가도 이종욱 교수는 수십년째 진서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습니다. 노태돈 교수는 위서라고 판단했구요. 근데 웃기지 않나요? 신라에 화랑이 얼마나 많은데,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온 이름 말고 암각화에 이름이 있어야한다는 근거요. 풍월주급이나 간부급들이 계곡가서 돌에 이름남기는 경우는 매우 드물텐데 말이죠. 무관이라는 이름이 나왔는데도 확실하지 않다고 하고 ㅎㅎ방송에서 수많은 위서근거중 몇개를 알리려면 설득력있는걸 제시하던가 해야 의혹이 안생기죠. 김용춘 김용수 문제도 화랑세기 필사본 이전에는 다른인물일거라 생각도 못했는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 보면 다른인물로도 해석이 확실히 되고. 진서론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진서인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도 있긴한데 논란이 있는 책을 사료로 연구하면 나중에 위서로 판명났을때 자기 연구 결과가 화랑세기랑 같이 소설이 되어버리니까 자기 논문에 인용할 수가 없어요. 화랑세기가 진본이면 연구할 거리가 늘어나서 사학자들이 제일 좋죠. 근데 만약 저 책이 가짜면 나중에 그 뒷감당은 엄청난 문제니까 최대한 의심하면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게 맞죠
다 정리된 얘기에 뒤늦게 다큐보고 의견 쓰는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씁니다. 지배계급은 유목민집단이라 서강대 교수님의 설명이 타당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목상태에서는 여성들과 노약자를 대장이 접수해야 그들도 살 갈이 있을테고, 다른 유목집단이 데려가 노동력으로 삼지도 않았겠죠. 그런데, 신라는 정착농경민도 있었을테고, 진에서 건너온 농경민도 있었을테니, 그 당시에도 그 제도에 대한 반감이 있는 집단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목민이 정착민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에서 지나친 성적문란 같은 사회적 문제도 함께 심화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싸이의 춤이 처음 유행하기 시작할 때, 그 춤이 너무 외설스럽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성당의 체육대회에서(시골동네에 있는 넓은 잔디 운동장) 젊은 신부님이 그 춤을 추고 신자들은 체조처럼 간격넓게 서서 신부님 동작 따라 춤춘 적 있습니다. 그 때 싸이의 그 춤이 외설적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어요.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막히고 복잡한 공간에서 성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하는 것이고, 넓고 탁 트인 공간에서 인간은 자연스레 적정수준을 조절할 능력을 갖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분노와 같은 감정도 마찬가지겠지요. 다만, 사람 사이의 self의 전이가 매우 빈번한 것을 생각해보면 요즘처럼 빡빡하게 사는 세상에서는 그게 어디로 튀는지 잘 알 수 없고, 그래서 더더욱 유교적 가르침- 자기 몸과 생각을 잘 지킴- 이 중요하겠지요. 유교의 가르침은 중국에서 도시화가 진행되었던 그 시절에 만들어진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동해안오징어 저는 신화라고 믿는 것이 고대 사람들의 경험과 구전의 집합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 정신병자가 만들어낸 이야기 일 수 있지만 그 정신병자 조차 무의식의 어떤 연결에 의해 주장하게 되었겠죠. 왕건이 당 숙종의 조상이라 우겼나요? 그럼 왕좌를 잇지 못하게 된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먼 곳으로 도망간 자의 후손일 수도 있겠네요. 그런 사람들이 주로 항해나 유목에 종사하는 경우는 상식으로 생각해도 그럴 것 같지 않나요?
박창화라는 한 한학자이자 애국자가 목숨을 걸고 필사해 온 것으로 보여지고, 《화랑세기》를 일본 궁내성에서 회수하기 위해 고국에 돌아와서 노력하였으나 담당자가 그것을 외면했다니 통탄할 뿐이네요. 그래서 혹시 몰라 몰래 필사해 왔겠지요. 유포석정은 포석정에서 놀았다로 해석하기보다 포석정에서 머물렀다고 해석하는 편이 좋겠네요. 화랑 이름을 가수로 비유하자면 현인, 최희준, 홍민, 조용필 나오는데 암벽이 씌어질 당대 소녀시대, 샤이니, BTS 나온다고 위작이 아닐까라고 하는 비유는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신라 향가도 1930년대는 해석을 못 했을 것이라고 나왔으나 김대문의 당대에는 왜 해석이 안 되었겠습니까? 우리 역사를 지키고, 우리 역사서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신 박창화 선생님을 기억하겠습니다. 박창화 선생님의 글씨체가 미려하고 독특해서 따라 써 보고 싶군요.
짧은 식견으로 아마 박창화가 일본황실에서 화랑세기를 봤었는데 그 진서를 머리속에 기억해놓고 다시 재구성했을것 같음. 아마 진서를 황실에서 가져올 수도 없었을 뿐더러 기억에 의존해서 책을 재구성 해야했을거로 보임. 일본의 감시 아래 일했을테니 이런 고초가 있었을 것으로 보임. 여튼 한책 모두를 기억이나 메모로 그대로 옮기는건 불가능 했을거고 흐릿한 부분은 자신의 기존 책이나 역사서에 의존했을것으로 보임.
저도 이부분이 가장 가능성이 높아보임. 이런 상황이라면 반대쪽 논리들이 대부분 해결됨. 1. 틀린부분이나 현대 문체가 들어가 있다 -> 일본황실도서관에서 몰래 읽은 책을 열심히 기억해 쓰는 내용일 경우 당연히 기억에 의존해 전체적 맥락은 쓰더라도 세부적으로 실수가 생기게 됨. 2. 본인이 한국 역사서 대표작들중에 화랑세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또 진짜라면 대단한 업적인데도 직접 이자료를 발표하지 않았다. 몰래 본거고, 공식발표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 게다가 위처럼 옆에 보고서 배낀것이 아니라 기억을 토대로 적었을 경우 본인 스스로가 그 자료의 한계성을 충분히 인식했을 가능성이 커 직접 발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음.
월성 발굴하기전에 구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몰랐었다. 당시에 파고 메웠기때문이다. 구지와 성벽 사이가 몇 미터 떨어지게 그래픽 화면으로 묘사했는데 발굴시 물과 성벽이 바로 붙어있었다. 그래서 정을 통하던 화랑이 넘다가 떨어 죽었다는 필사본의 내용이 지어냈다고 볼수없는 근거중 하나가 되기도한다.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저런 필사본이 있다라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 그 필사본이 우리가 아는 실제 역사와 접점이 있는지 탐구하고 하물며 다큐로도 이렇게 단서를 찾아서 연계시킬려고 애쓰는데... 단순히 이름 모를 사람이 썼다고 해서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느니... 가상의 인물들을 만들었다느니 이러고 앉았네... 저 사람이 정말 그냥 소설을 쓴거면 평소에도 소설 많이 썼다는데.. 굳이 저 방대한 분량을 저렇게까지 창작을 뭐하러 함... 걍 자기 소설 내면 되는데
18:11 지어낸 향가가 실려있기 때문에 는 위작이라는 주장, 그러나 향가전문가는 당시 1930년대 수준에선 지어낼 수 없다고 본다. 전문가는 당시 향찰로 표기된 것을 후대에 필사한 것으로 봄. 29:02 충북교육청에서 박창화의 일본궁내성 이력 확인 되었음. 30:59 일본궁내성 직원록에서 이름 확인됨. 41:40 천전리 암각화 금석문과 화랑세기 내용 비교>>겹치는 이름 없음. 46:17 영일 냉수리 비의 금석문과 화랑세기 내용 비교
일본과의 외교관계가 나쁘고 안나쁘고를떠나서 일본왕실도서관을 조사하게해달라고 민간단체나 교수들이 해야할게아니라 이건 한국정부가 해야될 가장 중요할일이죠. 서적의 반환까진 아니더라도 고대사 서적들의 공개라도해서 한국정부차원의 성과를 보여주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가지고 와서 씹선비잔당들 똥닦는 쓰라고 주려구여
역사스페셜을 부활하여 바른 역사를 알도록 온 국민과 젊은이들이 다알아야 한다고 생각힘
22년전 만든 프로인데도 정말 감동스럽다! 진심 시청료가 아깝지 않은 격있는 프로!!!
전문가 박사님들도 이젠 고인이 되셨을 것 같고ᆢ
작금의 공중파는 연옌들ㆍ연옌화된 그들만의 놀이터라서 시청료가 아깝다!!
책보고 tv가 있습니다
@@성이름-e4z6o 전문가가 아니라 지적 호기심이 많은 유튜버니까 앞으로도 계속 연구 공부하겠지요.
평양사람이면 다 아는 평양지도를 북경지도에 끌어다 덮어씌우고 평양은 북경에 있었다고 흥분하는 걸 보고 깔끔하게 손절.
악. ㅆㅂ. 유인촌 보고 끈다.
@@성이름-e4z6o 나도 대학사학에 다 동의하지 않지만 책보고 신뢰할수도없음. 그사람의 개인의견일뿐. 그냥 재미로 본다면은 이해하는데 그유투버를 진짜 학문적인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됌
잘 봤습니다.
지금도 역사스페셜 진행해주세요.
역사스페셜 제작진은 진짜...한국 역사학계가 못한거 정말 많이 해냄. 늘 썰만 풀지 결론을 못내던게 학계인데 결정적인 사료는 발로 뛰어 찾거나 일본에 있는데 그런거 협조공문 띄워서 최초로 공개시킨게 여러 번임.
박창희 씨도 유학자인데 마복자란 개념을 만들어서 위작하면 말이 안될거란걸 알텐데 만든어 낸건 아닌듯 머리속에 만들어진 프레임은 깨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사실상 조선사람이자나.
네 ㆍ
,.😅
,ㅡ
진짜 kbs가 공영방송이라면 역사스페셜같은 진중한 역사 프로그램 되살려야 한다.
닭치고 등 정치개그도 살려야죠.
공영방송?정권의개가 된게 언젠데ㅋㅋ유튜브 영상들만 봐도 답 없더만
지금같이 돈만 아는 세상에서는 불가능. 국가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했던 시템.
공감합니다
🐕🐕🐕🐕🐕🐕🐕🐕🐕🐕🐕
역사스페셜 지금 다시 부활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다.
이미 부활했습니다. 10월부터 매주 화요일 밤 10시에 UHD 역사스페셜 이라는 이름으로 방영되고 있으니 많은 시청 부탁드립니다^^
민노총산하 언론노조가 장악한 개백수는 다신 이런 작품제작 못합니다.
@@둔내터널 3
노무현이 없앤거라
댓글 쓴 3년전에는 부활이 불가능했지
박창화선생이 일본 왕립도서관에 11년간 근무한것이 사실로 확인되었고, 박선생이 조선의 고서를 관리한 부서에 근무한 것이 사실이면, 단순히 위서라고 단정해서는 안된다.그런 직책은 아무나 갈 수 없는 자리이다.
따라서 그분의 필사본 기록을 귀중한 보물로 취급해야 마땅하다. 또한 설문에 새겨진 화랑의 계좌와 필사본에 새겨진 화랑의 계좌가 다를수도 있다. 화랑은 수백명의 강도가 모여 그 집단의 대표가 화랑이므로 전국에 화랑은 수백명이었다. 따라서 석문의 기록에 화랑의 이름이 모두가 아니고 일부 일수도 있다 추정한다.
일본이사라지기전에우리의유물되찾아옵시다
삼국시대ㆍ고려ㆍ고구려조선시대의유물들ㅡ자꾸시간이갑니다
쓸데없이 정치평론가들 불러서 정치평론만 하지말고 이런 프로그램을 늘어야 한다
뼈속까지 식민사학자였던 이병도의 후세들인 서울대학교 역사학과와 노태돈 교수는 역시 화랑세기를 부정하기 위해 온갖 이유를 다 들이대네요. 화랑세기가 위작이라면, 이런 구체적이고 광범위한 역사적 사실을 스스로 한 번 창작해보라고 하고 싶군요. 과연 1500년이 지난 시점에 이전 시대의 이야기를 이렇게 구체적인 관직명, 풍습,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포함하여 창작할 수 있는지?
역사서는 소설이 아닌만큼 기존에 참고할 자료도 없이 이런 방대한 기록을 창작한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선생님들이 써준 역사서 외에 우리의 정사인 삼국사기, 고려사도 틀렸다고 부정하는 식민사관의 강단 사학자들이 정말 원망스럽습니다. 그런 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계속 왜곡하고 있는 현실도 안타깝네요.
역사스폐셜은 대단한 주말방송이었다.
하나의 단서에 대해 이런 저런 추적과 탐사를 했던 역사 다큐.
역사스페셜 다시 방송해주세요
웃기지 않나
사마천의 '사기'는 현재의 지명과 역사서내의 지명 혹은 발견된 유물과 엄청난 오차와 오류가 있거나 검증조차
안되지만 맹신하면서 필사본이 나온 화랑세기는 나중에 발견된 유물과의 교차검증이 확인되었는데도
인증을 안해주는것은 이마니시류의 그림자 때문인가?
에이 이미 교차 검증이 되는 중국 정사 속 우리 조상의 행적 조차 취사 선택 골라 먹기 하고 있는데 그걸 고려 하겠음?
중국 정사 속 한국 역사만 봐도 지금 한국인이 알고 있는 고대사는 전부 새로 다시 써야 함.
근본적인 지역 설정에서부터 건국자와 건국시기까지 맞는 거 찾는 게 더 빠를 정도임.
화랑세기나 백제삼서라든지 유기 신집 고대역사서 하나정도는 꼭 필요함 고대서적 하나라도있어도 중국의 역사왜곡을 대비하는데 정말 든든할거임. 필요한데 그래서 참 안타까움... 고대역사서가 많이 없어서
조선 탈레반들이 다 없애버림
@@우파상계동 공산이나 이슬람은 다른 종교나 문화를 인정하질 못하죠..
유교도 그러한면이 있다고 봄..
사실상 삼국사기 유사가 전부
성적으로 문란한 내용 때문에 위서 논란이 있다면, 이건 오히려 위서가 아닐 가능성에 무게를 더한다고 생각함.
유학이 뿌리 깊게 자리잡은 유학자 입장에서 이런 내용을 창작해 위서를 썼다는 게 더 생각하기 어려움.
위서가아니엇단 거죠
중국의 동북공정처럼 일본의 일제사관처럼
역사왜곡을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안타까운 연유로 인해
소중한 고대 역사서를 모두 잃어버렸으니
비록 원본 없는 필사본이기는 해도
내용이 모두 정확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잘 고증하고
또한 외국의 역사책들과 비교연구해서
비록 원본 역사책은 잃어버렸지만
우리 조상들이 만들었던 위대했던 고대사를
모두 힘을 합쳐서 복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류사학자라고 하시는 분들은
뭐 연구도 하기 전에 대안도 없으면서
일단 위서라고 그래 버리면
우리 후손들은
우리 조상들에 대해
어떻게 꿈을 꾸고
어떻게 자긍심을 이야기해야 합니까
제발 부탁드립니다
국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주류 사학자(酒流 詐學者): 술 처머고 노는 데는 도가 튼 사기꾼급 학자.
저정도면 거의 진짜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듯,
역사스페셜 정말 대단한 일 했음. 부활이 시급함
뭔 소리하노 위서라고 말하고 있는데 ㅋ
위서론이 주류를 차지 하고 있지만 진서론 쪽 주장에도 근거가 충분히 있으니 섣불리 어디가 맞다고 하기는 힘듬..기존 강단사학자들이 인정하면 불리한 내용이 너무 많아서 ㅋㅋ 기존 내용이 틀렸다는걸 증명하게 되면 자신들 입지가 좁아지기 때문에.. 학자적 양심이 없는거지.. 지금 저 책을 배꼈다고 해서 그대로 받아적는게 별거냐 할 수도 있는데 지금 저 책은 전 내용이 한문으로 되있는거고 위서론이 저 책은 창작 되었다 하는데 저 긴 내용의 책을 한문 원본으로 창작하라고 하는게 사람 혼자서 단기간에 해낼수 없는 수준이라고 생각됨 분명 창작이라 해도 참고해야할 자료가 있어야 창작을 하는거지.. 따라서 진서라고 본다 우리 상고 고대사는 너무 많이 왜곡되어있기 때문에 지금 기준의 역사관으로 바라보는거 자체가 무리
개인적으로 화랑세기는 진짜라고 생각한다. 화랑세기 자체가 우두머리를 기준으로 작성된거고 화랑들은 계층과 상관없이 모든계층의 화합용이기도 했다. 암각화에 모든 화랑이 이름 세기러 가는것도 아닐거고 일부 낮은지위 화랑들이 놀러가거나 일부 화랑들이 전쟁가기전에 이름 남겼을수도 있는거다. 막말로 피라미드가 완공되고 낙서를 한것과 클레오파트라때 낙서된것이 있는데 그당시 왕족이 이름을 남길까? 후세에 증거도 추정에 불과하다. 그리고 일제시대때 우리가 모르는 기록물이 많이 빠져나갔고 실제 1990년 전에 일본고미술거리에서 한국자료 저렴하게 구했다는 말들도 많이 들었었다
화랑세기는 위서가 아니고 정창원의 원본 필사본 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신의 근거는 황당하군요. 화랑세기 언급대로 화랑은 종교 의식을 담당하는 엘리트 집단입니다. 화랑이 하얗게 분칠했던 이유는 지배 계급인 성골이 백인이어서 하얀 피부색이 필요했던 거구요. 화랑의 동성애와 유사한 남자들간의 유대 또한 스키타이 문화와 유사합니다.
그냥 개인적으로만 생각하고 표현하지 마세요😂😂😂😂
노태돈 이미 위서라고 단정하고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고 하는데 노태돈이 잘못된 선택이 아닌지는 아닐까?
남의 의견을 소중히 하고 귀 기울이는 것이 학자의 바른 길은 아닐까?
노태돈은 그래서 학자라고 부르기가 어렵다
위서를 위서라 하지 아니면 뭐라 부르나
@@2208dlagkstn 왜 위서인지 말할 수 있느냐
@@최지환-c3y 삼국사기에서는 김춘추 아빠 김용춘/김용수를 동일인물이라고 말함. (즉 용춘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표기가 용수)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김용춘과 김용수가 형제지간으로 원래 김춘추 친부인 김용수가 선덕여왕 즉위 초 혹은 그 이전에 먼저 죽자 형인 용춘에게 처자를 부탁한 것이라 말함. 그런데 훗날 황룡사지에서 발굴된 심초석을 보면 선덕여왕 12년에 황룡사 9층탑 공사를 감독한 인물이 용수라 하였고, 삼국유사에사는 9층탑 공사를 감독한 인물을 용춘이라 하였음. 즉 용수와 용춘이 별개의 인물이라 했던 화랑세기 필사본의 내용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고 또 용수가 선덕여왕 즉위 초 혹은 그 이전에 죽었다는 내용도 잘못된 것임.
@@최지환-c3y 또 삼국유사에서 승려 자장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무림은 그 이름이 고려 혜종 왕무의 이름을 피휘하느라 호림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되는데,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도 이걸 그대로 따와서 호림이라 씀. 화랑세기 필사봄이 신라시대 김대문이 저술한 원본이라면 굳이 고려시대 국왕의 이름을 피휘해서 무림을 호림이라 쓸 이유가 없음.
@@2208dlagkstn 삼국사기가 맞다는 근거는 어디 있느냐.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사소하여 진위를 가리기 어렵다.
같은 시대에 번역본이라고 하여도 내용이 다른 것도 있는데 그런 사소한 것으로 위서라고 몰다니 너무 사고가 편협하다.
현대의 도덕적관념으로 이해가 쉽지않고 사회질서가 유지되기 어려울정도로 문란하다는 이유로 위서라 단정짓는 노태돈같은 경직된 사고를 가진 사람이 남을 가르치겠다고 교수에 앉아있으니....
고려중기까지 왕실은사촌,남매결혼이 있었읍니다.
이는 1차세계대전 전까지 유럽 왕족들은 근친혼이었읍니다
신라는 중앙 아시아에서온 최첨단 기술을 가지고온 소수 백인 지배층입니다.
혈통과 권력과 재물을 보존하기위한 근친혼입니다
근친혼은 의외로 전인류사적으로 흔했음
이병도-신석호-노태돈-송호정 ~~~
국내 강단사학자들의 문제점
@@User-qsaedi876g 로마 생각보다 보수적이었습니다 이집트도요
가장 안타까운건 박창화 선생이 해방이후 자신이 왕실도서관에서 조각내 보관하고있는 고문서들의 숨겨진 곳과 행방을 직접 찾아주겠다고 했는데도 정부에서 알아서 하겠다고 거절했다는거 ㅠ.. 그게 가장 안타깝네요..
예 정말 안타까운 사건이죠. 그때는 심지어 이승만 박정희 군사정권이었으니까 요청을 받아줄리도 만무하고말이죠.
그 당시 정부관계자들은 나라는 안중에 없고 자기 주머니 돈만 챙기면 되는 자들이었나봅니다.
2022 새해가 밝았는데 지금은 더 심하죠. 사방에서 역사왜곡 하는데도 오히려 역사왜곡자들에게 국민세금으로 지원까지 해주고 있으니까. 알고 있는 왜곡 단체가 동북아역사재단.
이 나라 애국자들은 대체 어디로 갔나?
여기다 대고 막 하소연 해보고 있습니다.
이것도 가족들 증언일 뿐이라서 신빙성이 떨어지며 정작 박창화 자신이 왜 직접 화랑세기 필사본을 안내놓고 죽은지 한참 지나서야 공개했는지 이해가 안되는 일입니다.
그때야 과거의 역사보다 현실의 삶은 굶어죽을판이라 인식부족은 어쩔수 없었음.
친일파가 정권을 잡았으니
그런데 한가지 덧붙이자면 박창화선생님이 필사한 화랑세기 추모경같은 필사본들말이지만 그걸 소설로 쓰실리가없음.
한학 한문에 통달하셨다고하는데 한학통달한분들은 대다수가 암기력이 뛰어남
일본에서 신라사연구논문까지 내신분이 그런실력으로 소설쓰는데만 백날 몰두했고 전부 소설들이라고? 말이 안되지
복사기가 없던 시절이라
필사자가 자신이 본것을 기억에 의존해 쓰다보니 몇몇의 이름 오류 같은 것은 있을 수 있다고 봐도
전체적 내용은 맞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라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보긴 본 것 같은데 문제는 그냥 필사하다 생긴 오류가 아니라 아예 비어 있는 부분을 창작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위서가 된 케이스지요
어디가 필사고 어디가 창작인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뒤섞었으니
@@이도형-x9x 화랑세기 어느부분이 필사고 어느부분이 창작인지 모른다면서..
화랑세기가 위서라~~? ㅋ
본인이 바본지
아님 모든 사람을 바보로 아는지~~~ ㅋ
@@강산-p8j 참과 거짓 구분 안되니 일단 거짓으로 보자는 거죠
@@이도형-x9x 뭐가 참이고 뭐가 거짓인지 모르면서 일단 부정적으로 본다~~?
그러한 책이 발견되면 우리의 위대한역사를 기록한 책이 발견되었다는 마음이 먼저여야 하거늘 ...위대하게 기록된건 위서라는 뼈속까지 일제식민사관~~
@@강산-p8j 화랑세기 왜 위서인지는 모르시죠?
식민사학의계보
제1세대 이병도, 신석호, ·손진태,
제2세대 김철준(전 서울대 교수)
제3세대 노태돈(서울대)·이기동(동국대)·
주보돈(경북대)
제3세대 직계는 교원대 노태돈의 제자 송호정
노태돈 나오네 나와서 역시 ;;
역쉬~~~
청화수님이 다룬 영상에서도 봣지만.. 화랑세기를 위서라고 하기엔 적혀 있는 내용이 되려 위서가 아닐 수 있는 점들도 많습니다.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온 신라 성벽 구조가 실제 발견된 유적과 동일하다는 점, 포석정이 아니라 포석사라는 기록이 있는데 실제로 포석정이 사원 역할도 했고 실제 절터가 있던 걸로 밝혀졌던 점을 고려해봤을 때 화랑세기 필사본을 무조건 위서라고 까고 무시할 게 아니라 진서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정사 기록과 교차검증해 보충 보완할 참고자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일본서기가 대표적 필사본.
원본 불타없어지고 1669년에 작성된 필사본.
필사본 주제밖에 안되는 책 이용해 돈 벌어 쳐먹고 논문(특히 가야) 써대는 국내 교수 학자들 많죠.
한 번 비교해볼 만 하죠.. 근데 이 영상이 거의 20년도 넘은 영상이니 최근에는 어찌 보고 있는 지 궁금하네요..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존재 자체가 위서인데 혓바닥이 왜이렇게 길어?
@@kjkosa일본서기는 거기 나온 언어라든지 한자 음역 연구를 통해 7-8세기 쓰여졌다는 것이 확실해져서 인정받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화랑세기 원본이나 혹은 다른 역사서를 봤을 가능성은 큽니다
그런데 그걸 그냥 그대로 필사해야 하는데 미진한 부분이 있다고 봤는지 박창화가 손을 대버린것이 문제였죠
사료 필사와 손 댄 부분을 구분 못 하니 ....
우리나라 고서는 전부 빼앗기고 나타나면 가짜라하고
남의나라 신화는 성경으로 받들고ᆢ
우리나라민족성 참 일제식민지가 이래 우리나라를 아직도 지배한다는게 소오름이다 학자들 분발해라
박창화가 일본황실도서관서 가지고 나올수없으나 얼마나 많은 우리나라 고서를 읽었을지ᆢ 이분이 돌아가셨으니 참 애석하다
근데 필사본이라 믿을수 없다면 옛 서적중에 필사본이 아닌 책이 있나? 복사를 할수도 없고 프린트를 할수도 없고...대부분의 역사서가 누군가 필사한게 전해진거지 지은이가 직접 쓴거라는 증거가 있는것도 아니고...출판사가 있던것도 아니고...
대표적 필사본이 일본서기죠.
원본은 불타 없어지고 1669년에 작성된 필사본.
사기, 왜곡 내용 많고 그걸 이용해 밥 벌어먹고 사는 국내 교수들 많죠.
임나가 가야여야만 한다는 사기꾼 교수들.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필사본이라 못믿는 게 아니라 그동안 등장하지 않다가 갑자기 구한말 등장하니 믿을 수 없다는 거. 책이란 게 돌고 도는 거라서 다른 책에도 인용되고 하는데. 조선시대 내내 등장도 않고 실전됐다는 기록까지 나왔는데 갑자기 일제 비밀서고에 숨겨져있었다? 이걸 믿는 게 신기함..
@@품위있는녀석 ㅋㅋㅋ
그래서 필사본의 경우 정말한 연구가 들어갑니다. 심하게 연구하는 분들은 종이 재질 잉크 재질 분석도 합니다
일본왕립 도서관에는 우리역사의 비밀이 간직되어 있다.
그건 아마 백제 역사서가 아닐까함.
박창화 선생은 애국자고 진정한 역사학자네요.
진정한 역사학자가 한국역사가 뒤집어 질정도의 내용의 책을 필사하고 방구석에 쳐박아 두나요? 세상에 알릴 노력은 안하고 그걸 가지고 소설이나 쓰고 있다니 말이죠 솔직히 이점이 제일 위서같은 이유네요
@@kimmg-ub4wu위서? 뭐얻어먹겠다고 위서를 6:09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성적문람함은 고려초기 왕실의 결혼사례에 비춰바도 추측할수가 있다. 각간 김위홍은 진성여왕의 숙부였는데 진성여왕의 애인? 이지 않았는가? 김유신도 조카랑 결혼했는데? 성리학의 시각으로는 이런것들이 받아들여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일본 만연집도 성적표현이 많이 등장하지 않는가
당장에 고려 초 천추태후만 봐도 근친 상간의 끝판왕으로 탄생한 결과물인데.
예전에 봤지만 한번 생각나서 끄적여 쓰는댓글. 필사본이 있으면 원본도 있겠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일본서기도 원본이 없고 필사본만 존재합니다. 일본에 존재하는 오래된 고서나 역사서들도 그 원본이 아니라 필사본만 있는 경우 허다합니다. 당장 일본 최고로 오래된 역사서인 일본서기만 봐도 그래요. 그래서 여전히 화랑세기 논쟁은 미스터리인겁니다. 원본이 없고 필사본만 있다해서 그렇다고해서 위서로 치부하는건 이치에 맞지않다 사리에 맞지않다 이말입니다.
이게 위작이라고 하기에는 이 책을 적을 당시 전혀 알수 없었던 사실=월성에 해자가 있었고
거기에 어떤놈이 빠져 부상으로 디졌다는 기록이 이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옴....월성 해자는
그뒤 한참 있다 발굴 했음 -..-;;
ua-cam.com/video/bVmcVTvgVYc/v-deo.html 이거나 쳐 봐라 화랑세기 위서론자들아 ㅋㅋㅋ
방향이 뭐가 잘못됐다는건지~일제시대에 왕실도서관에 근무한거가지고 흠집을 내려는건지~박창화선생의 학문적열정은 존경할만하다 무슨 위작논란~이 분은 고대신라시대의 역사를 밝혀줄 중요연구자이다 좀 더 존중받을만한 분이다
삼대목과 같은 대구화상 위홍이 편찬한 향가집만 발견되도 정말로 감동이겠음
그냥 더도 말고 향가 10수만 더 남아있어도 좋겠는데
삼대목 발견하면ㅋㅋ혁명적인일이죠ㅋ 집에 고서적있으면 잘 찾아보세요ㅋㅋ
진짜 삼대목이 발견되면 너무 좋을 듯.
노태돈 교수도 좀 문제가 많은 교수입니다
지당하신말씀입니다 여명어르신
그런데, 공영방송에서 이렇게 소중한 프로그램을 왜 지금은 안 하나요?
진짜 ㄹㅇ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문서 하나 희귀한 상황임
조선 탈레반들이 다 없애버림
@@우파상계동 뭔 소리임
기록에 환장한 나라가 조선인데
@@treeslow 명나라에 도전하는, 고조선의 대륙 지배관련 책은 조선 스스로가 모두 없애버림.
@@우파상계동 그럼 삼국사기는 왜 남아있음? 중국 털어버리는 거 개많은데 심지어 김부식은 역사서에 불리한 기록 빠져있는 거보고 중국이 창피해서 지워버린거 깠는데
삼국사기도 태워버리던가, 적어도 저부분들은 빼야하는 거 아님?
@@treeslow 조선 탈레반들 때문에 우리 민족 고대 역사가 다 사라져버린거임. 삼국사기는 일부 고구려가 수나라 당나라 전쟁 승리 기록이 있지만, 명 입장에선 수나라와 당나라가 선비족이 세운 나라였기 때문에 문제 제기 안한거임.
일본 궁내청에 보관되어 있을거라고 추정되는 유기,신집,백제3서,국사 이 중 하나라도 돌려받으면 우리나라 고대 역사의 상당수가 다시 쓰여질수도....
시인 고 김지하 선생님이 1990년대 일본 궁내청 정창원에 있는 대한민국의 문화재와 고대 역사서 반환운동을 펼쳐왔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정창원에 고대 유물이 많다 들었습니다.그것도 완전 보존 상태 극강인 상태로요..오히려 한국에 있었음 다 사라졌을겁니다
저는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공부만 한 학자들은 거짓말을 잘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험상 입니다. 그리고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거짓말을 해서 얻을 이익이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조국의 바른 역사를 전하기 위해서 노력하시는 분을 바르게 알아 주면 좋겠습니다.
진짜 바보같은 소리 ㅋㅋ
ㅋㅋㅋㅋ 식민사관 학자들은 구라잘침
화랑세기란 역사자료가 나타나도 가짜라고 우기는 놈들은 무슨생각인지? 말도 안되는 이유를 갖다부쳐 가짜라고 우기는
바로 그 인간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강단 사학중에 식민사관에 사로잡혀 정신 올바로 박힌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가짜라고 우기는 대표주자가 노태돈이죠.
다시 만들어주세요
프로그램
분명한건 일본에 어마어마한 우리역사서적과 안중근의사의 이토저격영상 이순신장군의 영정까지 숨겨져 있다고 확신이 든다. 하루빨리 찾아와야 된다. 그나마 박창화 선생덕에 화랑세기 고구려사 연구에 큰 역활을 하셨지.
이순신 졸장 이병신아
여기 사학과 출신으로 보이는 이들의 행태를 보니 우리나라 사학계가 얼마나 썩었는지 알 수 있다. 한심하고 불쌍한 인생이 된 그들을 이제 원망하고 싶지도 않다.
저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양심인거지 중국의 동북공정마냥 가짜 서책으로 역사를 주장하는데 그럼 반대 소리를 내는게 학자의 본분
ㅂㅅㄷ ㅇㅈ.
제정신이라면 저런 행태를 보일 수가 없지요. 완전 맛이 제대로 간 놈들이라 중국 동북공정에는 찍소리도 못하는 것들이 우리 역사 밝히는 분을 물어 뜯는 꼬라지를 대놓고 보이는 게지요.
@@그냥조용했다 그럼 역사를 논하지 말고 소설을 쓴 다음에 아 이거 일본 어딘가에서 감춰져 있는거 몰래 빼와서 썻다 이딴식으로 하던가 ㅋㅋㅋ 화랑세기 위서인 증거가 넘치는데 엠병을 떨고 있네
@@dkskdf6664화랑세기를 누가 위서라고 단정했을까? 완진이랑 태돈이가 장난질했지. 왜? 진서라는 증거도 나오는 마당에 위서라고 너무 엠병을 떠는 건 아닌지.
몇 번을 봐도 좋은 프로그램이다. 24년 전에도 이 정도의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왜 지금은 만들 수가 없냐?
KBS는 연예인들 나와서 쓸데없이 노닥거리는 프로그램 말고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어라.
노태돈을 비롯해 강단사학자들...
식견이 좁고 안목이 졸렬하구나!
이런 사람들이 대학에서 학문을 논하고 제자를 길러낸다는 것이 슬프고 화가 난다.
식민사관이 무섭긴 무섭네 스승과제자 자기들이 배운게 틀린게 되니 어떤것도 인정하지 않는구나
진짜 식민사관이 무섭네. 본인 뇌속의 사실만이 절대 진리라 생각하고 어떤 것도 틀렸다는 확신을 하는 말을 하는 일말의 의심도 없네.
향가, 금석문, 구지, 포석사 등 당시 전혀 알려지지 않았거나 최근에야 새로 밝혀진 내용이 이미 기술돼 있던 것으로 보아 위서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고 완벽하진 않을지언정 필사본이 맞는것으로 판단할수 밖에 없어 보입니다. 무엇보다 이런것들을 (과거에) 창작했는데 훗날 밝혀진 유적이나 사료들을 보니 맞는 부분이 있더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죠.
ㅋㅋㅋㅋㅋㅋ 니맘대로 해석하네요 ㅋㅋㅋㅋㅋㅋ
위서라고 판정내린 경위를 보면 그냥 웃음만 나옵니다. 지들 입맛에 안 맞으면 위서 운운하는 행태 아주 진저리 날 정도죠.
@@그냥조용했다 성 문제가 부각되어 그렇지 다른 증거가 많습니다. 특히 박창화가 야설을 많이 쓴 것이 결정타였죠
@@이도형-x9x
그렇게 따지면 삼국유사도 위서라 봐야 함.
@@dri13829 삼국유사는 진서는 맞아요
내용이 맞냐 여부는 별개로 일연이 쓴 것은 맞거든요
화랑세기는 누가봐도 진본이네...어떤 사람이 저런 소설을 쓸수 있는가...당시 발굴되지 않은 당시 사용 글자, 역사까지 다 짜 맞춰서 기록할수 있는 사람은 없다.. 향가만 봐도 향가는 일종의 암호문인데 창작할수가 없는것이다. 암각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화랑세기에 없다고 해서 위작 가능성을 운운하는것은 말도안된다고 본다. 학교 담벼락 낙서에 역사속 인물이 안나온다고 그 역사책이 위작이라고 단정지을수는 없으니 말이다.
@동해안오징어 님 말대로 누가봐도 진본이 아니면 왜 논란임? ㅎㅎ 누가 봐도 진본인데 일부 트집잡는 학자들 때문에 논란이라는 뜻
@동해안오징어 그래 누가봐서 위서인데...ㅋㅋ
근데 박창화가 위작할 이유가 있나요?
뮈가 필요해서? 나로서는 절대 창작이 아니며 창작에 어찌 그많은 인명을 알수 있었을까? 그는 일본국내궁에 있을때 필사한것이 분명 합니다.
그분 성향상... 창작이라면 창작이라고 표기해놨을 거 같은데... 창작물을 굳이 복제본이라고 할리가 없는데..
박창화 선생이 어디 할 일이 없어 가짜책을 만들었겠니 ~~ 소위 역사교수라고 하는 너네들이 논문이라고 쓴 것들이 오히려 가짜책이 아니냐 ~~
이걸 위서라고 입터는 역사가들 부터 역사학자 위치에서 퇴출시켜야 합니다 또한 시대적 한계로 제한적으로 쓸 수밖에 없었던 분들을 신민사학자니 머니 하며 매도하려는 학자들도 퇴출시켜야 합니다 역사란 정석이 없어며 시대를빼고 역사를 논할순없습니다
예전 바이블 집대성 때도 저런 논란들이 있었죠. 진정성과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 문서의 저자로 예수의 제자들의 이름을 넣었던 경우들이 있었죠. 필사본의 경우 그게 진본이냐 위작이냐 이런 논란이 자주 있더군요.
진서라고 결론내기에는 이르지만 위서라고 단정짓는건 더 말이 안된다. 특히 위서론자들의 논리가 더 빈약해 보임..당시 성풍속이 가족의 개념을 흔들정도여서 말이 안된다는 부분에서는 실소..일본 왕실도서관 한국관련자료 공개를 공식 요구해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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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오징어 누가 저것만 근거라고 합니까? 그중에 하나로 들기에 그런거지..말하는 투를 보니 위서라고 생각하는것 같은데 당신생각이나 말해요.. 논문까지 뭘 찾아봅니까 인터넷에 다 올라와있는데..꼭 뭐 아는것처럼 말해요..
@동해안오징어 그럼 여기서 말해보시죠? 뭐가 안나와있는지..할수 있으면 쓸데없이 말 길게하지 말고..
@동해안오징어 말을 했으면 근거를 제시해야지..내가 당신때문에 논문 찾아볼까? 논문 내용 간략하게라도 기억안나면 닥치면 되고..걍 가던길 가면 되지..저 아래에도 쓸데 없는 댓글 달았더만..그리 아는척은 하고 싶은가?
@동해안오징어 진서, 위서 결론내기에 이르다고 했는데 그게 개소리인가? 논문 대략 내용은 고사하고 제목도 못대면서 정확한 정보출처? 이게 사람인가 오징어인가?
강단사학자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우선 부정부터 하지.
맞습니다. 저 노태돈이라는 교수놈도 보세요. 성이 이렇게 문란하면 가정이 유지가 안된다라는게 화랑세기가 위서라는 증거라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런 말 하면서 부끄럽지도 않았을까요?
@@ksjo2491 맞습니다. 노태돈 식민사학자 입니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화랑들과 금석문의 화랑들의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 : 화랑세기엔 당연히 화랑들 중에서도 거물급 화랑들 위주로만 언급이 되었을 것임 금석문엔 천전리에 놀러갔던 화랑들이 자기들 이름이나 자기랑 친한 화랑들 이름을 적어놓지 않았을까 나 관랑 천전리에 놀러왔다 ㅋ 나 천진랑도 갔이 왔음 ㅋ 세기랑, 문랑, 자인랑아 우리 우정 영원하자 ^^ 혹은 통주랑 개객끼 이런 식으로 자기 마음에 안드는 화랑 욕하기
일부 역사학자들의 문제는 ... 본인들리 배우고 아는건 외에는 틀린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는 것이다. 한두개 문제점이 보인다하여 위서로 결론짓는다면 맞는부분 한두개는 어찌 해석 해야하나. 학자라면 연구할가치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연구를 해봐야 하는것은 아닐까.
역사도 인문과학이라는 엄연한 과학분야에요. 논리적이어야하고 근거와 증거가 바탕이 되어야 과학이라 부를수 있는거이죠. 출처와 서지사항이 분명하고 교차검증이 가능할때 비로소 진서라고 인정받는 겁니다. 화랑세기 필사본이라고 주장하는 책은 이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진서라 할수가 없습니다.
@@안드레아스-e8m 서지사항은 필사본일 수 밖에 없지 않나요. 그시대에 조선에 가져오자고 금속활자를 만들 수 있는거도 아니고. 그시대 저정도 촉탁사원 월급이면 계약직 수준 월급인데, 사진을 장만할 수도 없을테고, 일제가 책을 나눠서 보관했다는 점에서 몰래 조금씩 외워서 옮겼을 거 같은데
전문가도 이종욱 교수는 수십년째 진서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습니다. 노태돈 교수는 위서라고 판단했구요. 근데 웃기지 않나요? 신라에 화랑이 얼마나 많은데,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온 이름 말고 암각화에 이름이 있어야한다는 근거요. 풍월주급이나 간부급들이 계곡가서 돌에 이름남기는 경우는 매우 드물텐데 말이죠. 무관이라는 이름이 나왔는데도 확실하지 않다고 하고 ㅎㅎ방송에서 수많은 위서근거중 몇개를 알리려면 설득력있는걸 제시하던가 해야 의혹이 안생기죠.
김용춘 김용수 문제도 화랑세기 필사본 이전에는 다른인물일거라 생각도 못했는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 보면 다른인물로도 해석이 확실히 되고. 진서론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진서인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도 있긴한데 논란이 있는 책을 사료로 연구하면 나중에 위서로 판명났을때 자기 연구 결과가 화랑세기랑 같이 소설이 되어버리니까 자기 논문에 인용할 수가 없어요. 화랑세기가 진본이면 연구할 거리가 늘어나서 사학자들이 제일 좋죠. 근데 만약 저 책이 가짜면 나중에 그 뒷감당은 엄청난 문제니까 최대한 의심하면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게 맞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박창화라는 저분이 일본서고에서 압류된 조선의 옛고서들을 보고 참조해서 자기의 생각도 함께쓴것이 아닌가 생각됨. 필사본겸 창작본이 맞는듯. 다만 연구가지치가 있는부분은 참고해볼만하다고 생각하는데 너무 학계가 딱딱하게 생각하는것 아닌가..?
@@박선생-z2s 뭔가를 보긴 한 것 같은데 모자란 부분을 자기 상상력으로 채워서 문제죠 도저히 창작과 필사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겠으니 ....
아무튼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뜩이나 많지않은 국내 고대사 관련서적도 무조건 위서라 몰아부치고 심지어 삼국사기도 초기기록을 불신해가며 가급적 우리나라의 공간과 시간을 축소하려는 식민사학자들을 영구박멸해야 합니다
화랑세기 필사본 전체가 다 사실이라고 보긴 어려워도 그 당시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10년이 넘게 고서를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고 하면 화랑세기 필사본에 적은 내용중 일부는 실제 역사적 사실일 수도....
다 정리된 얘기에 뒤늦게 다큐보고 의견 쓰는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씁니다. 지배계급은 유목민집단이라 서강대 교수님의 설명이 타당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목상태에서는 여성들과 노약자를 대장이 접수해야 그들도 살 갈이 있을테고, 다른 유목집단이 데려가 노동력으로 삼지도 않았겠죠. 그런데, 신라는 정착농경민도 있었을테고, 진에서 건너온 농경민도 있었을테니, 그 당시에도 그 제도에 대한 반감이 있는 집단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목민이 정착민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에서 지나친 성적문란 같은 사회적 문제도 함께 심화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싸이의 춤이 처음 유행하기 시작할 때, 그 춤이 너무 외설스럽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성당의 체육대회에서(시골동네에 있는 넓은 잔디 운동장) 젊은 신부님이 그 춤을 추고 신자들은 체조처럼 간격넓게 서서 신부님 동작 따라 춤춘 적 있습니다. 그 때 싸이의 그 춤이 외설적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어요.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막히고 복잡한 공간에서 성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하는 것이고, 넓고 탁 트인 공간에서 인간은 자연스레 적정수준을 조절할 능력을 갖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분노와 같은 감정도 마찬가지겠지요. 다만, 사람 사이의 self의 전이가 매우 빈번한 것을 생각해보면 요즘처럼 빡빡하게 사는 세상에서는 그게 어디로 튀는지 잘 알 수 없고, 그래서 더더욱 유교적 가르침- 자기 몸과 생각을 잘 지킴- 이 중요하겠지요. 유교의 가르침은 중국에서 도시화가 진행되었던 그 시절에 만들어진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동해안오징어 석박김 중 박과 김씨는 유목민이 뿌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설사 그들이 표면적으로 추대된 지배층이고 실질적으로는 상인집단이 좌지우지했을지라도.
@동해안오징어 미치네 진짜 ㅋㅋ 라고 얘기하시는 이유가 있을테지요? 그 이유를 얘기해 주시면 이해에 많은 도움 되겠습니다.
@동해안오징어 유목민쪽에서 나오는 여러 유물들이 부장품으로 나왔고, 신라쯤에는 정착적 성격을 많이 띄었겠지만, 그래도 유목적 특성들이 잠재되어 있을테니. 특히 잘 변화되지 않는 y유전자는. 제 질문에 답을 먼저 하고 저에게 질문하는 것이 저에 대한 예의 아닐까요?
@동해안오징어 비석에서 자신들이 흉노라고 한 것도 없는 증거를 만들어낸 것인가요? 아니면 흉노가 농경민을 가리키는 말인가요?
@동해안오징어 저는 신화라고 믿는 것이 고대 사람들의 경험과 구전의 집합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 정신병자가 만들어낸 이야기 일 수 있지만 그 정신병자 조차 무의식의 어떤 연결에 의해 주장하게 되었겠죠. 왕건이 당 숙종의 조상이라 우겼나요? 그럼 왕좌를 잇지 못하게 된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먼 곳으로 도망간 자의 후손일 수도 있겠네요. 그런 사람들이 주로 항해나 유목에 종사하는 경우는 상식으로 생각해도 그럴 것 같지 않나요?
역사 다큐가 왜 단명 조기종영하는가 역사스패셜 부활이 가능 한가 촬영이 전국 팔도 또 외국 까지 전문가 교수 각게 각층 분 만나고 도서관 때론 유적을 찾아 심산에도 가서 촬영하니 제작비 많이 들어 종방 한것이죠
박창화라는 한 한학자이자 애국자가 목숨을 걸고 필사해 온 것으로 보여지고, 《화랑세기》를 일본 궁내성에서 회수하기 위해 고국에 돌아와서 노력하였으나 담당자가 그것을 외면했다니 통탄할 뿐이네요. 그래서 혹시 몰라 몰래 필사해 왔겠지요.
유포석정은 포석정에서 놀았다로 해석하기보다 포석정에서 머물렀다고 해석하는 편이 좋겠네요.
화랑 이름을 가수로 비유하자면 현인, 최희준, 홍민, 조용필 나오는데 암벽이 씌어질 당대 소녀시대, 샤이니, BTS 나온다고 위작이 아닐까라고 하는 비유는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신라 향가도 1930년대는 해석을 못 했을 것이라고 나왔으나 김대문의 당대에는 왜 해석이 안 되었겠습니까?
우리 역사를 지키고, 우리 역사서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신 박창화 선생님을 기억하겠습니다. 박창화 선생님의 글씨체가 미려하고 독특해서 따라 써 보고 싶군요.
비전문가들끼히 댓창에서 위서냐 진품이냐 라고 개싸움 하지말고, "필사본"이라는 시점에서 일단 신빙성이 아직 없다는 '사실'만 인정하고,
화랑세기랑 삼국사기의 차이 같은 재미있는 댓글이 달렸음 좋겠다...
팩트 삼국사기도 원본은 없다. 지금 완질본은 조선시대때 것이다
@@hannam63 현재 남아있는 삼국사기 원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고려시대 후기인 13C에 제작된 것입니다.
@@jinhongkim24 또또 어디서 나무 위키 주워읽고 아는척 하네 완질본이 뭔지 모르면 검색이나 쳐하고 와라 그리고 원본의 단어뜻도 모르냐? 지금 남아 있는 성암본은 고려말에 만들어진걸로 추정하는데 삼국사기가 언제 고려말에 편찬되었냐? 하여간 어디서 주워듣고 아는척하는 인간들이 제일 추해
제정신이 아니구먼 근거도 없이 뇌피셜~~~
이게정답이지
일본은 유실된 서류가 있으면 추정 복원한 자료도 전시하던데 우리는 있는 것도 부정하고 있어요.
화랑세기를 두고 하는 말이아니라 환단고기 같은 책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박창화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화랑세기 백제 본기, 고구려사략 등을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 궁내성에서 근무하면서 필사하여 한국으로 가져오셔서 역사의 명맥을 잇도록 해주시어 정말로 감사합니다
베껴쓴게 아니라 창작소설입니다
그리 많은데 십 여년간 근무 했다면서 달랑 화랑 세기만 필사 하셨나 중요하다고 생각된 건 최대한 필사 헸어야지
짧은 식견으로 아마 박창화가 일본황실에서 화랑세기를 봤었는데 그 진서를 머리속에 기억해놓고 다시 재구성했을것 같음. 아마 진서를 황실에서 가져올 수도 없었을 뿐더러 기억에 의존해서 책을 재구성 해야했을거로 보임. 일본의 감시 아래 일했을테니 이런 고초가 있었을 것으로 보임.
여튼 한책 모두를 기억이나 메모로 그대로 옮기는건 불가능 했을거고 흐릿한 부분은 자신의 기존 책이나 역사서에 의존했을것으로 보임.
님말이 맞을거 같음
이분도 식민사학논리다.
필사본은 원본을 놓고 그대로 배낀 것이다.
ㅇ
기억력으로 그 많은걸 어떻게 필사하나요.
직접 보고 그대로 필사한것이다
저도 이부분이 가장 가능성이 높아보임. 이런 상황이라면 반대쪽 논리들이 대부분 해결됨.
1. 틀린부분이나 현대 문체가 들어가 있다 ->
일본황실도서관에서 몰래 읽은 책을 열심히 기억해 쓰는 내용일 경우 당연히 기억에 의존해 전체적 맥락은 쓰더라도 세부적으로 실수가 생기게 됨.
2. 본인이 한국 역사서 대표작들중에 화랑세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또 진짜라면 대단한 업적인데도 직접 이자료를 발표하지 않았다.
몰래 본거고, 공식발표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 게다가 위처럼 옆에 보고서 배낀것이 아니라 기억을 토대로 적었을 경우 본인 스스로가 그 자료의 한계성을 충분히 인식했을 가능성이 커 직접 발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음.
식민사학자 노태돈 본색을 드러냈네. 역시
역시네요 , 박창화와 사관이 다르니
??? 아니 위서 제작자 박창화와 다르다고 식민사학이라니 ㄷㄷㄷ 무서운 사람들인네
@@있다-s2d 촉탁사원 계약직이 어찌 서릉부 고서를 보았을까
@@song44560 맞아. 댁네 왜나라에서는 식민사관이라고 부르지는 않지. 어눌한 우리말 그만두고 왜말로 토 다시게.
@@고소미-n9s 한국사람이라
22:35
당시는
자유분방한 풍속
22:54 토룡
33:20 화랑세기 서적 목록
35:00 박창화 도서
36:40 고려때 만주도 우리영토
학자들이 일본인은 믿으면서
한국인은 못믿겠다는 일본 학자의 견해
역사가 역사로서 본(本)과 정체성을 찾기 되기를 기원하고 응원합니다.
화이팅!
저건 90%정도는 진실인거 같음
저시대의 생활을 지금 기준으로 보고
믿을수 없다고 하면 안됨
서울대 교수의 위작이라는 근거를 보며 기가 찼음.
오늘날의 눈으로 저 시대 풍습을 보고 가정이 파괴되니 어쩌니ㅋ
대체로 위작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뭔가 기득권 빼앗기기 싫어하는 느낌.
저도 저 책이 진품이라고 봅니다
역사체널 그날과 비교하게되는데 보는 사람과 차이도 있겠지만 비전문가 패널출연으로 역사를 게그소재로 삼듯 가볍게 역사체널 그날 게그멘 영화감독 시인 아나운서 등 역사에 깊이없으신 분들이 출연하면 시청자는 배울것도 없고 유머를 남발하지만 천박하게 느낄 뿐입니다
진심 동감입니다! 역사를 개그화하는 말장난 프로! 시청료 아깝습니다!!!
지금봐도 노태돈 교수가 좀 틀린 얘기하는 거 같아요. 조선시대 이후 유교적인 시각으로 마복자 제도를 볼 수 없다고 봅니다. 물론 엽기적인 제도이지만 그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듯...
월성 발굴하기전에 구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몰랐었다. 당시에 파고 메웠기때문이다. 구지와 성벽 사이가 몇 미터 떨어지게 그래픽 화면으로 묘사했는데 발굴시 물과 성벽이 바로 붙어있었다. 그래서 정을 통하던 화랑이 넘다가 떨어 죽었다는 필사본의 내용이 지어냈다고 볼수없는 근거중 하나가 되기도한다.
요즘학새들 역사너무모른다 이런 프로그램이많을수록좋을것같다
화랑과 낭도는 분명 차이가 있어야 한다.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저런 필사본이 있다라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 그 필사본이 우리가 아는 실제 역사와 접점이 있는지 탐구하고 하물며 다큐로도 이렇게 단서를 찾아서 연계시킬려고 애쓰는데... 단순히 이름 모를 사람이 썼다고 해서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느니... 가상의 인물들을 만들었다느니 이러고 앉았네... 저 사람이 정말 그냥 소설을 쓴거면 평소에도 소설 많이 썼다는데.. 굳이 저 방대한 분량을 저렇게까지 창작을 뭐하러 함... 걍 자기 소설 내면 되는데
접점을 탐구해 봤으니 위서라고 결론냈지
@@JH-ek5bn
접점을 탐구할 자료 자체가 없어요.
그리고 그 논리라면 삼국유사도 위서라 결론을 내야 함.
@@dri13829 자료가 서책 하나만 있나? 다른 책이나 고고학자료로 교차검증을 거치는건데 "원본"조차 아니고 진짜 필사인지 조차 불분명한 "필사본" 화랑세기가 그런 점에서 탈탈 털린거임
@@dri13829 삼국유사? 그건 한 권만 있는게 아니라 여러 권 전해와서 서로 확인이 가능하고 마찬가지로 여러 권 있는 삼국사기나 일본, 중국 사서에 고고학 자료가 있지
@@JH-ek5bn 탈탈털리기는? 목에 힘꽤나 주는 경성제대 출신 교수님들이 위서라고 하면 위서가 되어야 하는데 그에 대한 반박 자료들도 꽤 많이 있어서 그게 문제지.
52:24
놀 유 자 遊
사전에도, 여행하다..라는 뜻이 있네요.
가서 놀았다는 뜻이 아니라, 포석정에 갔다.는 뜻이 맞는 것 같네요.
18:11 지어낸 향가가 실려있기 때문에 는 위작이라는 주장, 그러나 향가전문가는 당시 1930년대 수준에선 지어낼 수 없다고 본다. 전문가는 당시 향찰로 표기된 것을 후대에 필사한 것으로 봄.
29:02 충북교육청에서 박창화의 일본궁내성 이력 확인 되었음.
30:59 일본궁내성 직원록에서 이름 확인됨.
41:40 천전리 암각화 금석문과 화랑세기 내용 비교>>겹치는 이름 없음.
46:17 영일 냉수리 비의 금석문과 화랑세기 내용 비교
옛날 책들이 사람손으로 베끼는 거죠. 요즘처럼 복사기가 있는것도 아니고.
여기에 나오는 며몇 교수라는 사람들의 수준이 정말 웃기죠. 신라시대를 이야기하고 연구하는게 화랑세기인데 그것을 조선시대의 유교적 시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고 그리고 유교적 관점에서 볼 때 틀리면 가짜라고 우겨대니 ...ㅋㅋㅋ
노태돈을 인터뷰 하다니 객관적이지 못하군요
위서 논란은 학문적인 근거는 거의 없고
화랑의 남녀관계가 현대와 안맞으니까
그걸 아예 묻어버리기 위한 핑게에 불과하네 ..
화랑세기 위서로 몰아간 인간이 누구더라? 그 인간은 지 기준에 안 맞으면 다 위서래.
그런 인간이 있는 곳이 경성제국대를 잇는 곳이라니 말 다했다.
대한민국이 수십년 수백년이 걸려도 옛고구려땅을 회복하도록 꾸준히 후세에 교육해 나갑시다. 일본이 약탈해간 우리 역사 옛고서등도 일본열도가 수장되기 전에 꼭 찾아 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 논리면 일본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 조선처럼 한국도 일본에 복속되어야 함
약탈이 아니고 조선인들이 매매하고 팔았어
朝鲜半岛从箕子朝鲜、卫满朝鲜、汉四郡开始就是中国土地,必须收复
왠지 일본 왕실 도서관에는 훈민정음 혜례본과 직지, 화랑세기 등등 한국의 중요한 서적들이 보관 되어 있을 듯 싶음.
이정도 수준의 문서를 한자로 창작한다고 하는것이 가능한 일일까? 더군다나 향가를..노태돈이라는 자가 끝내 인정하기 싫어하는 태도는 보기 역겹다
일제로부터 반듯이 돌려 받아야 한다.훗날 위대한 지도자가 반듯이 그 대업을 이루어지시길..우리 고서가 무지무지 많다 합니다.
반듯이 주화
역사스페셜 부활 ~~~
22:00 중세유럽에서도 결혼하는 농노들이 영주랑 먼저 첫날밤 보내는 법이 있었는데 ㅋㅋㅋ 왜 유교가 들어오기 전에 신라시대 일을 유교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는지 역사학자들 너무 멍청함
초야권은 19세기에 퍼진 낭설이고, 실제로는 몇몇 정신 나간 영주들 중에 비슷한 거 하려다 끌어내려진 것 정도입니다.
서강대 이종욱 교수는 훌륭히도 삼국사기에 관해서는 식민사학자 사부 이기백을 넘었지만 우리역사 발해를 부정하는 식민사관에 머무르고 있군.
ㅅㅂ 방구석에서 교수들 평가하고 있노 니가 직접 발굴하고 연구해서 성과 내라
수고하셨습니다
박창화 선생님 감사합니다.. 어린 시절 포석정 갔다가 이런데서 술잔 띄워 놀았다는 얘기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죠.
내부분란은 식민사관이 일으키죠
귀한자료 수집과 식민사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데 식민사관자들의 발목잡기에 휘둘릴 필요가 없어요
29:07 충북교육청 직원분 한복이 보기좋음
이 프로그램생기면 좋겠습니다 ❤❤❤
저 노태돈이라는사람 역사학자 맞나? 마복자 말할때 그시대를 현시대에 윤리관에 대입하네 기본이 안되있는거 같은데 저런 사람이 대표사학자?
잼있네여
11:20 동생이 임신했다고 불에 태워죽이려 하다니
신라시대에도 명예살인이...ㄷㄷㄷ
근데 정치쇼였음 진짜 죽일 생각도 없었고
일제식민지 시대 경술국치하기전 가문의 서적이나 모든것을 없애는 작업에서 필사본이라도 있는것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