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이야, 다 잘 될거야.. 그런 말 저만 불편하게 아니었네요. 우리 삶은 모호성의 충돌과 시간의 불가역상 때문에 필히 삶의 비극성과 부조리를 안고 있다. 그리스 비극의 틀로 기독교의 고난을 설명하자면, 우리는 비극이 진행되는 동안 부조리한 현실을 일방적으로 받을 수 밖에 없고, 극이 마칠 때에야 비로소 토로하고 해석할 수 있는데, 그것 또한 완전한 설명과 해석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잠정적인 해석으로만 기능한다. 또한 사건이 해결된 뒤에도 온전한 회복은 불가능하며 상실과 상처를 가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리스도가 진리를 가지고 왓음에도 불구하고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는 현실 속에서, 그리고 우리가 성찬을 할 때마다 예수님의 비극의 원인이 우리었다는 사실을 마주하며 그 성찬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니라 매번 반복적으로 잠정적 의미를 깨닫아 가야 한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을 함께 나누는 동안 서로 애도할 수 있고, 부활을 근거로 잠정적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로완 윌리암스도 멋있고 해석도 멋지십니다~ 앞으로 누군가 삶의 고난에 대해 질문할 때 "모른다" 뒤에 이 비극적 상상력을 덧붙여 보완해 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귀한 영상 감사합니다! ♡♡♡
저는 장애아이를 낳고 하나님의 존재와 기독교 안에서 인생의 예기치 않은 고난과 고통에 대해서 찾아보다가 신정론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직도 왜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가 되지 않고, 여러 소개해주신 신정론도 명쾌한 답은 되지 않았습니다만... 목사님의 고민과 성찰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려운 상황을 나눠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어떤 이야기도 성도님의 삶과 마음을 쉽사리 위로할 수 없으리라 감히 짐작해봅니다. 그럼에도 삶의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 안에서 답을 찾아가시는 성도님을 하나님께서 동행해주시고 이끌어주시기를, 그리고 성도님의 아이도 주님 안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참으로 부족한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논의와 연구에 힘써주시니 신학이 세상을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 일하고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어서 또 고맙습니다. 욥의 이야기에서 고난 끝에 욥이 새 가족을 얻고서 욥은 비극의 경험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드리고 순종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비극의 경험 이후에도 욥이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던 것은, 고난 끝에 바로 회복되지 못한 처자식들과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욥이 고난 이후에도 고난 이전처럼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삶 끝에 새로 얻은 처와 자식에 더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처자식들까지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서 동행하는 것을 알았기에 욥은 그 비극의 삶에서도 확신을 갖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순종하는 삶이 가능한 것은 결국 하나님을 통해 내 삶이 완성된다는 것을 영적인 도약을 통해 알고 믿고 행하게 되는 과정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의로운 성도와 목회자도 암이나 병에 걸리거나 장애를 평생 안고 사는 것, 바울도 평생 복음을 전하면서도 온갖 고난과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지만 끝까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자신의 소명을 다 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모두 그 고난 이상의 의미에 대해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수반되어야 고난이 더이상 고난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고난 중에 있는 이가 겪는 고통과 슬픔이 너무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겠지요. 누군가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중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만날테니 너무 슬퍼하지 마!" 라는 말은 그 비극에 놓인 이의 마음을 처참하게 할 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는 커녕 그 비극의 주인공이 도리어 신정론에 매달려 하나님과 교회를 떠나게 만들 뿐일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의 과정에 있는 이웃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의 과정에 놓인 이웃을 위로하고, 그 아픈 목소리를 들어주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고난과 고통당한 이웃이 비극의 삶에서 영적인 도약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돕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비극적 삶에 놓인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삶이 비극인 상황에서 왜 삶이 비극적이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냐고 묻고 따지기 전에 그런 비극을 겪는 이에게 찾아가 그들을 먼저 위로하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해주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성령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교회 공동체가 실천할 것을 강조하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극적 경험에 놓인 이들에게 함부로 하나님의 뜻을 단정하기 전에 손을 먼저 내미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로완 윌리엄스에게서 아쉬운 점은 욥의 삶이 비극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영적 도약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긍정의 메시지가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권헌일 목사님께서도 선한 마음으로 고난에 처한 성도들에게 그 심정을 헤아리고 그들이 겪는 비극에 공감하시려고 했다는 간증에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삶의 비극을 받아 들이되 그 안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한 영적 도약이 될 수 있도록 그 비극을 지켜보는 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이느냐에 대한 신학의 연구들을 통해 좋은 열매가 맺기를 저는 기도합니다. 지난 좋은 영상에서 저의 부족함에도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댓글로 나누려 했던 것이 영상에서 전하려는 내용을, 지난 영상을 시청하신 분들께서 받아들이시는데 방해가 되었을까 염려되고 죄송스럽습니다. 그래도 귀한 시간 내셔서 인터뷰에 응해주신 목사님도 교회의 예배에서 듣지 못하지만 중요한 내용들을 전하려고 늘 일하시는 오늘의 신학공부 관계자분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잘 들어주시고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욥기의 해석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할 수 없었던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을텐데요. 하나는 구약 성서 안에서는 내세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구약학 전문가가 아니라 세밀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구약성서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스올'로 간다는 것이 주된 관점이기 때문에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바로 꺼내기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난다는 '보상'의 관점을 윌리엄스가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에서 말씀드렸지만 윌리엄스는 상실이 그렇게 보상받을 것이라 판단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관찰할 수 있는 자리, 즉 하나님의 자리에 서야 하는데, 사람은 그 자리에 설 수 없기에 어떤 방식으로 보상받을 것이다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윌리엄스는 모든 고난을 추상화해서 원인을 밝혀내거나 결말을 정하는 것을 반대하고요, 모든 고난은 다 유일회적인 구체적인 고난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 다양한 반응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쉬워하신 부분에 대해서 조금은 답이 되셨기를 바래봅니다^^
@@ScholarPastorKwon우리가 하나님 자리에 서야 보상받을걸 알 수 있다고 하셨는데 물론 우리는 하나님 자리에 설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시면 가능한 것 아닌가요? 우리가 이 새상에서 받는 고난은 잠시 뿐 결국 영원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하나님 말씀이고 약속이지 않습니까. 그 말씀들을 믿는 것에 구원이 있는 것 아닐까요. 왜냐하면 아무리 아픔을 위로하거 공감한다 해도 궁극적 해결의 소망이 없다면 부질 없는 것 아닌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미가서 말씀처럼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행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hiswordisni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충분히 이야기를 하실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윌리엄스가 부활을 통한 회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윌리엄스도 십자가와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현재 고난이 우리 삶의 본질이나 결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영원한 보상으로 지금의 상실이 해결될 수 있다고 단정 짓는 것에 반대하는 겁니다. 그런 관점이 우리가 삶 속에서 겪는 고난들을 모두 추상화 해버리고 가벼운 문제로 다루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결국 상실을 당한 이에게 더 큰 폭력이 되기도 하지요. 윌리엄스의 비극적 상상력은 말씀하신 미가서에서 "겸손히" (신중하게의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한다는 겸손 가운데, 그럼에도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다음 걸음을 걸어나가는 것- 그것이 윌리엄스가 이야기하는 바라고 저는 생각해봅니다. 오늘 하루 평안하시고 복된 주일 되시길 바랍니다~
욥기는 고난을 견디면 보상이 온다는 메세지가 아니다. 욥이 흠없이 산 자신도 구속자가 필요한 것을 깨달은 것(19:25), 홀로 흠없이 사는 것이나 죄인을 다 잡아 심판하는 것(40:11-14)이 의가 아니라 자기 고난 중에 옆에서 극도로 자신을 괴롭힌 친구들을 용서하는 것(42:8-9)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의와 그의 십자가 용서를 깨닫게 하는 심판이자 계시였다. (이사야 26장 / 개역한글) 8.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9.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보상이란 없고 이런 은혜만 있을 뿐이다.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일군들이 언제 온 것과 무관하게 같은 품삯에 분노한 것은 이런 은혜를 보상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기준의 고난이 있다는것에서 결국 전지 전능 지선의 세가지가 동시에 성립할수없다는것에대한 답변이 명쾌하게 되지못한것같습니다 1부부터 2부 내용을 보면 마치 옛날 천동설을 믿던시대에 하나하나 나오는 증거를 억지로 궤도나 가설을 붙여서 겨우겨우 변명해내는것을 보는것 같습니다
저는 "신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라는 생각을 조금 더 하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말처럼 개개인들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이 내 삶에 개입하시는 구나 싶을 떄가 있지만, 공동체에게서는 그러지 않는 상황을 너무 많이 보게 되니깐(EX. 전쟁, 학살, 비극, 부조리 등등) 점점 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최근에는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지, 안하시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스스로가 하나님을 다시 만날 그날에 대한 소망을 갖고, 스스로에게 닥친 삶을 자녀답게 살아내는데 집중하고, 불안과 걱정 등의 부정적 감정에 집착하지 않는 것...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입장에 서지 않았으니 보상을 받을걸 단정지을 수 없다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구원 받은 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구원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판단하시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구원 받는 확신과 함께 현재의 고난에 대한 보상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학자라도 그 누구도 우리의 선생이 될 순 없습니다. 선생은 오직 하나입니다(마태23장)
전적 타락 교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도록 인간과의 관계를 단절 시키시고, 성경도 읽고 이해할 수 없도록 완전히 무능하게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현대 교회들은 전적 은혜로 얻게 되는 믿음과 구원의 길을 올바로 가르치지 않고, 예수님을 믿어라, 성경 읽어라, 설교를 듣고 ,열심히 성경 공부해라 등등 엉뚱한 가르침을 줍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믿을 수 없게 하셨지만, 신경쓰지 말고 여러분은 열심히 믿어라? 하나님은 절대로 이해 안되게 하셨지만 , 여러분은 열심히 읽고 배워라?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들에게 저주를 내리신 분이십니다 이런 황당한 논리를 펼치는 곳이 현대 개신교입니다. 정신 나간 엉터리 사이비 종교 아닙니까? 분노가 치미는 곳이 현대 교회입니다. 차라리 전적 타락 교리와 전적 은혜 교리가 없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이것은 전적 은혜로 얻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만든 생각들을 믿는 것입니다. 전적 은혜란 심지도 않았는데 거저 받는 , 공짜 은혜입니다. 믿으려 노력하고, 매주 예배 참석하고, 헌금하고, 설교 듣고, 성경 공부하고, 억지 웃음으로 봉사하고 등등은 많은 노력과 투자입니다. 투자로 믿음과 구원을 얻는다면 , 거저 주신다는 하나님과 성경은 거짓말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믿을 수 없도록 하신 것을 , 믿다 보면 믿어지는 것이 공짜로 얻는 은혜이고, 이해되지 않게 하신 것을 열심히 공부해서 이해된다면 ,그것이 전적 은혜입니까? 공짜로 얻는 믿음과 구원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 가르치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다. 이를 가르치지 않는 교회는 벌거숭이 임금님의 마법사들의 교회들입니다 멀쩡한 사람들을 세뇌 시키고, 망상 병자 만드는 끔찍한 일들을 멈추십시요. 현대 교인들 중 자신 스스로 믿기 시작하지 않은 교인들 0.00001프로나 될까요? 자기 양심과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믿기 시작한 믿음이 무슨 은혜로 얻는 개신교 믿음입니까?? 이런 사람들 주장이 유효한 부르심은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 스스로 먼저 믿기 시작했으니, 당연히 체험 못한다는 생각은 왜 안 하시나요!! 구원파의 중생은 먼저 믿다가 죄 사함을 체험한 것으로, 이는 개혁주의의 중생 의미와는 개념 자체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유효한 부르심을 통한 믿음이 아닌 것은 다 가짜가 아니라구요?? 진리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진실로 진리가 어떤 것인지 일고 믿습니까? 진리를 알고 믿는 믿음이 아닌 것은 다 거짓이고 가짜입니다. 진리가 어떤 것인지 모르면서, 진리를 믿는다는 것이 어찌 거짓이 아니란 말입니까? 진리를 아시는 분들 제게 답글을 주십시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이니 참으로 반갑겠습니다 제발 공짜로 얻는 믿음과 구원을 가르치는 신학자, 목회자들이 나오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거짓 믿음을 가르치신 분들 , 양심이 있다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안다면 , 나도 전적 은혜가 아니라 내가 먼저 믿기 시작했다고, 양심 선언이라도 하십시요. 당신들은 천국 문을 가로막고 서서 , 지옥 문으로 보내는 사람들입니다. 답글
*신학교에 가지 않아도 현대신학을 배울 수 있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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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이야, 다 잘 될거야.. 그런 말 저만 불편하게 아니었네요.
우리 삶은 모호성의 충돌과 시간의 불가역상 때문에 필히 삶의 비극성과 부조리를 안고 있다. 그리스 비극의 틀로 기독교의 고난을 설명하자면, 우리는 비극이 진행되는 동안 부조리한 현실을 일방적으로 받을 수 밖에 없고, 극이 마칠 때에야 비로소 토로하고 해석할 수 있는데, 그것 또한 완전한 설명과 해석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잠정적인 해석으로만 기능한다.
또한 사건이 해결된 뒤에도 온전한 회복은 불가능하며 상실과 상처를 가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리스도가 진리를 가지고 왓음에도 불구하고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는 현실 속에서, 그리고 우리가 성찬을 할 때마다 예수님의 비극의 원인이 우리었다는 사실을 마주하며 그 성찬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니라 매번 반복적으로 잠정적 의미를 깨닫아 가야 한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을 함께 나누는 동안 서로 애도할 수 있고, 부활을 근거로 잠정적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로완 윌리암스도 멋있고 해석도 멋지십니다~ 앞으로 누군가 삶의 고난에 대해 질문할 때 "모른다" 뒤에 이 비극적 상상력을 덧붙여 보완해 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귀한 영상 감사합니다! ♡♡♡
저보다 더 잘 정리해주신 것 같아요^^ 좋게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장애아이를 낳고 하나님의 존재와 기독교 안에서 인생의 예기치 않은 고난과 고통에 대해서 찾아보다가 신정론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직도 왜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가 되지 않고, 여러 소개해주신 신정론도 명쾌한 답은 되지 않았습니다만... 목사님의 고민과 성찰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려운 상황을 나눠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어떤 이야기도 성도님의 삶과 마음을 쉽사리 위로할 수 없으리라 감히 짐작해봅니다. 그럼에도 삶의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 안에서 답을 찾아가시는 성도님을 하나님께서 동행해주시고 이끌어주시기를, 그리고 성도님의 아이도 주님 안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참으로 부족한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ScholarPastorKwon
감사합니다.
이런 논의와 연구에 힘써주시니 신학이 세상을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 일하고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어서 또 고맙습니다.
욥의 이야기에서 고난 끝에 욥이 새 가족을 얻고서 욥은 비극의 경험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드리고 순종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비극의 경험 이후에도 욥이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던 것은, 고난 끝에 바로 회복되지 못한 처자식들과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욥이 고난 이후에도 고난 이전처럼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삶 끝에 새로 얻은 처와 자식에 더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처자식들까지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서 동행하는 것을 알았기에 욥은 그 비극의 삶에서도 확신을 갖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순종하는 삶이 가능한 것은 결국 하나님을 통해 내 삶이 완성된다는 것을 영적인 도약을 통해 알고 믿고 행하게 되는 과정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의로운 성도와 목회자도 암이나 병에 걸리거나 장애를 평생 안고 사는 것, 바울도 평생 복음을 전하면서도 온갖 고난과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지만 끝까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자신의 소명을 다 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모두 그 고난 이상의 의미에 대해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수반되어야 고난이 더이상 고난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고난 중에 있는 이가 겪는 고통과 슬픔이 너무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겠지요.
누군가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중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만날테니 너무 슬퍼하지 마!" 라는 말은 그 비극에 놓인 이의 마음을 처참하게 할 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는 커녕 그 비극의 주인공이 도리어 신정론에 매달려 하나님과 교회를 떠나게 만들 뿐일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의 과정에 있는 이웃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의 과정에 놓인 이웃을 위로하고, 그 아픈 목소리를 들어주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고난과 고통당한 이웃이 비극의 삶에서 영적인 도약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돕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비극적 삶에 놓인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삶이 비극인 상황에서 왜 삶이 비극적이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냐고 묻고 따지기 전에 그런 비극을 겪는 이에게 찾아가 그들을 먼저 위로하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해주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성령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교회 공동체가 실천할 것을 강조하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극적 경험에 놓인 이들에게 함부로 하나님의 뜻을 단정하기 전에 손을 먼저 내미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로완 윌리엄스에게서 아쉬운 점은 욥의 삶이 비극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영적 도약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긍정의 메시지가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권헌일 목사님께서도 선한 마음으로 고난에 처한 성도들에게 그 심정을 헤아리고 그들이 겪는 비극에 공감하시려고 했다는 간증에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삶의 비극을 받아 들이되 그 안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한 영적 도약이 될 수 있도록 그 비극을 지켜보는 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이느냐에 대한 신학의 연구들을 통해 좋은 열매가 맺기를 저는 기도합니다.
지난 좋은 영상에서 저의 부족함에도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댓글로 나누려 했던 것이 영상에서 전하려는 내용을, 지난 영상을 시청하신 분들께서 받아들이시는데 방해가 되었을까 염려되고 죄송스럽습니다.
그래도 귀한 시간 내셔서 인터뷰에 응해주신 목사님도 교회의 예배에서 듣지 못하지만 중요한 내용들을 전하려고 늘 일하시는 오늘의 신학공부 관계자분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잘 들어주시고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욥기의 해석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할 수 없었던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을텐데요.
하나는 구약 성서 안에서는 내세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구약학 전문가가 아니라 세밀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구약성서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스올'로 간다는 것이 주된 관점이기 때문에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바로 꺼내기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난다는 '보상'의 관점을 윌리엄스가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에서 말씀드렸지만 윌리엄스는 상실이 그렇게 보상받을 것이라 판단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관찰할 수 있는 자리, 즉 하나님의 자리에 서야 하는데, 사람은 그 자리에 설 수 없기에 어떤 방식으로 보상받을 것이다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윌리엄스는 모든 고난을 추상화해서 원인을 밝혀내거나 결말을 정하는 것을 반대하고요, 모든 고난은 다 유일회적인 구체적인 고난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 다양한 반응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쉬워하신 부분에 대해서 조금은 답이 되셨기를 바래봅니다^^
@@ScholarPastorKwon 답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건승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ScholarPastorKwon우리가 하나님 자리에 서야 보상받을걸 알 수 있다고 하셨는데 물론 우리는 하나님 자리에 설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시면 가능한 것 아닌가요? 우리가 이 새상에서 받는 고난은 잠시 뿐 결국 영원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하나님 말씀이고 약속이지 않습니까. 그 말씀들을 믿는 것에 구원이 있는 것 아닐까요. 왜냐하면 아무리 아픔을 위로하거 공감한다 해도 궁극적 해결의 소망이 없다면 부질 없는 것 아닌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미가서 말씀처럼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행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hiswordisni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충분히 이야기를 하실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윌리엄스가 부활을 통한 회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윌리엄스도 십자가와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현재 고난이 우리 삶의 본질이나 결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영원한 보상으로 지금의 상실이 해결될 수 있다고 단정 짓는 것에 반대하는 겁니다. 그런 관점이 우리가 삶 속에서 겪는 고난들을 모두 추상화 해버리고 가벼운 문제로 다루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결국 상실을 당한 이에게 더 큰 폭력이 되기도 하지요.
윌리엄스의 비극적 상상력은 말씀하신 미가서에서 "겸손히" (신중하게의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한다는 겸손 가운데, 그럼에도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다음 걸음을 걸어나가는 것- 그것이 윌리엄스가 이야기하는 바라고 저는 생각해봅니다.
오늘 하루 평안하시고 복된 주일 되시길 바랍니다~
욥기는 고난을 견디면 보상이 온다는 메세지가 아니다. 욥이 흠없이 산 자신도 구속자가 필요한 것을 깨달은 것(19:25), 홀로 흠없이 사는 것이나 죄인을 다 잡아 심판하는 것(40:11-14)이 의가 아니라 자기 고난 중에 옆에서 극도로 자신을 괴롭힌 친구들을 용서하는 것(42:8-9)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의와 그의 십자가 용서를 깨닫게 하는 심판이자 계시였다. (이사야 26장 / 개역한글)
8.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9.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보상이란 없고 이런 은혜만 있을 뿐이다.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일군들이 언제 온 것과 무관하게 같은 품삯에 분노한 것은 이런 은혜를 보상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기준의 고난이 있다는것에서 결국 전지 전능 지선의 세가지가 동시에 성립할수없다는것에대한 답변이 명쾌하게 되지못한것같습니다
1부부터 2부 내용을 보면 마치 옛날 천동설을 믿던시대에 하나하나 나오는 증거를 억지로 궤도나 가설을 붙여서 겨우겨우 변명해내는것을 보는것 같습니다
박영선 목사님이 로완윌리엄스이야기를 자주 하셨던 이유를 알거 같네요
저도 박영선 목사님의 통찰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웁니다. 제 부족한 이야기에서 박영선 목사님을 떠올려주셨다는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권헌일 목사님 인터뷰 1부 보기
ua-cam.com/video/7NGkXF7cC3U/v-deo.html
*로완 윌리엄스 소개 영상 보기
ua-cam.com/video/IMT0dtmee2w/v-deo.htmlfeature=shared
인간은 살면서
좋은일과나쁜일이
죽을때까지일어나기때문에
인간의생각으로는
답이없죠
그래서세상의욕심을버려야만이
진정한평강이오지않을까요
무조건적인믿음만이가능할것같은데요
그런믿음을갖기가쉽지는않겠죠
참된목자거듭난 성도들로이루어진
교회안에서 나를
끊임없이연단을해야되는데
과연이시대에그런
교회가얼마나있을까요
그리고목사가
고난에대한 답을
제시해야한다고
봅니다
이 시대에고난은
혼자서는극복하기
힘듭니다
성도들과같이
극복해야만이
이길수있다고봅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교회가 함께 고난을 담아내고 애도하면서 나아가는 공동체 되기를 바래봅니다.^^
저는 "신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라는 생각을 조금 더 하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말처럼 개개인들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이 내 삶에 개입하시는 구나 싶을 떄가 있지만, 공동체에게서는 그러지 않는 상황을 너무 많이 보게 되니깐(EX. 전쟁, 학살, 비극, 부조리 등등)
점점 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최근에는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지, 안하시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스스로가 하나님을 다시 만날 그날에 대한 소망을 갖고, 스스로에게 닥친 삶을 자녀답게 살아내는데 집중하고, 불안과 걱정 등의 부정적 감정에 집착하지 않는 것...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31:10 마지막 언급해주신 책은 무엇인지 여쭤볼게요~ 로버트??? 책이요
로버타 본디,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입장에 서지 않았으니 보상을 받을걸 단정지을 수 없다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구원 받은 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구원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판단하시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구원 받는 확신과 함께 현재의 고난에 대한 보상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학자라도 그 누구도 우리의 선생이 될 순 없습니다. 선생은 오직 하나입니다(마태23장)
결국 모른다는거네요. . .약간 기운빠지네요.
근데 너무 알고 싶은데 신께서 왜 안알려주실까요. ..
인간은 너무 악한데 이대로 두시다니...복음은 너무 강력하지만 사실 받아드리면 점점 어려워지는것 같습니다... 쉽지가 않습니다..😅
귀한 강의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우리 말은 바르게 사용했으면 합니다. '얘'는 이 아이의 준말입니다. 이것 저것이란 지시대명사가 있습니다. 사물을 보고 '이 아이'라는 인칭대명사를 쓰지 맙시다.
두서 없이 말을 하다보니 표현이 정확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언 잘 참고해서 표현에 신경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적 타락 교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도록 인간과의 관계를 단절 시키시고,
성경도 읽고 이해할 수 없도록 완전히 무능하게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현대 교회들은 전적 은혜로 얻게 되는 믿음과 구원의 길을 올바로 가르치지 않고,
예수님을 믿어라, 성경 읽어라, 설교를 듣고 ,열심히 성경 공부해라 등등 엉뚱한 가르침을 줍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믿을 수 없게 하셨지만, 신경쓰지 말고 여러분은 열심히 믿어라?
하나님은 절대로 이해 안되게 하셨지만 , 여러분은 열심히 읽고 배워라?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들에게 저주를 내리신 분이십니다
이런 황당한 논리를 펼치는 곳이 현대 개신교입니다.
정신 나간 엉터리 사이비 종교 아닙니까?
분노가 치미는 곳이 현대 교회입니다.
차라리 전적 타락 교리와 전적 은혜 교리가 없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이것은 전적 은혜로 얻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만든 생각들을 믿는 것입니다.
전적 은혜란 심지도 않았는데 거저 받는 , 공짜 은혜입니다.
믿으려 노력하고, 매주 예배 참석하고, 헌금하고, 설교 듣고, 성경 공부하고, 억지 웃음으로
봉사하고 등등은 많은 노력과 투자입니다.
투자로 믿음과 구원을 얻는다면 , 거저 주신다는 하나님과 성경은 거짓말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믿을 수 없도록 하신 것을 , 믿다 보면 믿어지는 것이 공짜로 얻는 은혜이고,
이해되지 않게 하신 것을 열심히 공부해서 이해된다면 ,그것이 전적 은혜입니까?
공짜로 얻는 믿음과 구원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 가르치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다.
이를 가르치지 않는 교회는 벌거숭이 임금님의 마법사들의 교회들입니다
멀쩡한 사람들을 세뇌 시키고, 망상 병자 만드는 끔찍한 일들을 멈추십시요.
현대 교인들 중 자신 스스로 믿기 시작하지 않은 교인들 0.00001프로나 될까요?
자기 양심과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믿기 시작한 믿음이 무슨 은혜로 얻는 개신교 믿음입니까??
이런 사람들 주장이 유효한 부르심은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
스스로 먼저 믿기 시작했으니, 당연히 체험 못한다는 생각은 왜 안 하시나요!!
구원파의 중생은 먼저 믿다가 죄 사함을 체험한 것으로,
이는 개혁주의의 중생 의미와는 개념 자체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유효한 부르심을 통한 믿음이 아닌 것은 다 가짜가 아니라구요??
진리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진실로 진리가 어떤 것인지 일고 믿습니까?
진리를 알고 믿는 믿음이 아닌 것은 다 거짓이고 가짜입니다.
진리가 어떤 것인지 모르면서, 진리를 믿는다는 것이 어찌 거짓이 아니란 말입니까?
진리를 아시는 분들 제게 답글을 주십시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이니 참으로 반갑겠습니다
제발 공짜로 얻는 믿음과 구원을 가르치는 신학자, 목회자들이 나오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거짓 믿음을 가르치신 분들 , 양심이 있다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안다면 ,
나도 전적 은혜가 아니라 내가 먼저 믿기 시작했다고, 양심 선언이라도 하십시요.
당신들은 천국 문을 가로막고 서서 , 지옥 문으로 보내는 사람들입니다.
답글
한겨레 신문을 인용하는 목사는 좀 아니지.......
틀딱
@@항상웃자-b1i 니 얘기니?
한심하다. 머리는 파마하라고 있는게 아니야.
@@nina726ify 당신이야 말로,,, 그만하자.. 어차피 너희들은 전체주의를 추앙하는 자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