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원태왕(故國原 331~371) 영토 15대 미천태왕(을불, 우불, 300~331) 16대 고국원태왕(사유, 유, 쇠, 331~371) 17대 소수림태왕(구부, 371~384) 1. 331년(고국원1) 태왕 즉위 311년(미천12) 미천태왕와 주周씨 태후 사이에서 태어난 사유斯由(쇠釗)는 314년(미천15) 3살에 태자가 되고, 미천태왕 32년째 아비가 죽자 스무살로 태왕에 즉위했다. 2. 333년(고국원3) 대방 남부 6성을 쳐서 평정(백제와 대방은 사돈관계) 훗날 660년 백제가 망하고 백제유민이 대륙남부 왜와 합하여 일본을 세운다(670년 사서에 최초로 '일본日本' 등장). 애초에 고리적에 쓰여진 는 조선시대 사대주의에 맞춰 수정·가첨되고, 일제시대 때 자기네 조상 백제에 부정적인 내용은 축소하거나 빼는 방향으로 다시 한번 수정·가첨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적이었던 고구리史 역시 축소·은폐하므로, 고국원태왕이 '대방을 평정한 정복군주였'였음조차 우리가 모르고 있는 거다. 아마 고리적에 쓴 원본에는 다 나와있을 것이다. 3. 334년(고국원4) 환도궁 지음 8월 평양성을 증축하고, 환도(현 양원)에 새 궁전을 지었다. 서쪽 모용선비를 언젠가 치리라는 의지의 표명.. 4. 339년(고국원9) 전연의 군대가 신성新城을 공격 연나라 왕 모용황이 침략해 와 신성新城에 이르렀다. 고국원태왕이 동맹을 요청하자 곧 돌아갔다. 이 해에 왕자 구부(丘夫 소수림태왕)가 태어났다. 5. 342년(고국원12) 환도성 천도 & 연나라의 침공 2월 환도성을 보수하고, 국내성을 쌓았다. 그리고 8월에 국내성(현 북경) 서쪽에 위치한 환도성(현 양원)으로 천도하였다. 고국원태왕의 '환도성 천도'에 대해 전연(모용선비)은 "한번 붙어 자웅을 겨뤄보자"는 의도로 받아들이고, 10월에 전연의 모용황이 용성(현 태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입위장군 모용한이 모용황에게 권고하기를 "고구리를 공격해서 빼앗고, 그 다음 우문선비를 멸망시킨 후에야 중원(화하족)을 차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후방을 다진 다음 진짜 목표인 화하족 동진을 본격적으로 칠 수 있다는 얘기) 당시 고구리로 가는 길은 두 개였는데, 북쪽 길은 평평하고, 남쪽 길은 험하고 좁아 군신들이 북쪽 길로 가려고 하였다. 입위장군 모용한이 말하기를 "적국(고구리)은 일반적으로 상황을 고려하여 반드시 우리 연나라 대군이 북쪽 길로 오리라고 생각할 거요. 따라서 북쪽 길을 중요시하고 남쪽 길을 가벼이 여길 것이오. 왕(모용황)이 정예병력을 거느리고 남쪽 길을 따라 고구리를 불시에 공격하면 환도(현 양원)는 따로 공격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오. 또한 별도의 소규모 부대를 북쪽 길로 보내면, 설령 차질이 있더라도 그들의 심장부가 이미 무너졌으므로 사지를 움직일 수 없을 것이오.." 하였다. 모용황이 이 말을 따랐다. 6. 연나라의 침략전쟁 11월, 연나라 모용황이 정예병 4만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출정하였다. 모용한과 모용패를 선봉으로 삼았다. 별도로 장사長史 왕우 등에게 명하여 병력 1만5천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출정하게 하여 고구리를 침공했다. 고국원태왕은 동생 무武(고무)로 하여금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북쪽 길을 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남쪽 길을 방어하였다. 이때 모용한의 선봉 1만군이 먼저 도착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뒤에 모용황의 3만 대군이 도착하여 남쪽의 우리 고구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모용황의 전략, 적이지만 대단하지 않은가! 다 우리 동이족의 후예들이다. 연나라 좌장사(왼쪽 長史) 한수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의 목을 베자, 연의 여러 부대가 승기를 타고 마침내 환도성(현 양원)으로 쳐들어왔다. 고국원태왕은 해발 등을 데리고 단웅곡에서 단령을 넘어 평양으로 도망쳤다. 연나라 장군 모여니가 추격하고, 고국원태왕의 어머니 주씨(주태후)와 황후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이때 북쪽 길로 간 왕우 등은 우리 고구리 군사들과 싸우다 패하여 모두 전사했다). 이로 말미암아 모용황은 더이상 추격하지 않고, 사신을 고구리로 보내 고국원태왕을 불렀으나 태왕이 나가지 않았다. 아직 주력군이 남아있으므로 더 붙어볼 수 있는 상황이니까 나갈 일이 없다. 북쪽 길에서 승리한 5만 고구리군과 평양에 남아있는 주력군(2만 추정?)을 합하여 몰아치면 4만 모용황 군은 쪽수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태후와 황후들, 왕자들을 볼모로 잡고 있으니, 계략을 잘 써서 도망쳐야 하는 상황...
모용황이 돌아가려 할 때 한수가 말한다. "고구리땅은 우리가 남아서 지킬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그들의 태왕(황제)이 도망가고 민중이 흩어져서 산골짜기에 잠복하고 있으나, 우리 대군이 떠나가면 틀림없이 다시 모여 나머지 군사를 수습할 것입니다. 이는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구리 태왕의 아버지인 미천태왕 시신을 싣고, 고구리태왕 어머니(생모)를 볼모로 잡아 돌아갔다가, 고구리 태왕이 제발로 와서 사죄하기를 기다린 뒤 돌려주시지요. 그러면 은혜와 신뢰로서 무마하게 되므로 상책이 되지요" 모용황이 그 말에 따라 미천태왕의 묘를 파서 그 시신을 싣고, 대궐 창고에 있던 역대 보물을 탈취하고, 남녀 1만명을 사로잡고, 궁궐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파괴하고서야 퇴각길에 나섰다. 고구리 무덤은 돌무덤이라 시신 가져가기 굉장히 힘든 구조다. 그런데 당시 미천태왕 무덤의 경우, 어미 주태후가 죽으면 아버지(미천태왕) 무덤에 합장하려고 문을 봉합하지 않은 상태(가문假門으로 만들어놓은 상태)였기에 모용황 군이 손쉽게 미천태왕 시신을 탈취할 수 있었다. 고구리군이 모용황 군 퇴로를 차단하려 하자, 모용황은 주태후(고국원태왕의 어미)의 조서로서 고구리군과 민중이 막아서지 못하게 하였다. 고국원태왕 역시 주태후와 여러 후들 및 왕자들의 안위 때문에 추격할 수 없었고, 모용황은 무사히 돌아갔다. 7. 343년(고국원13) 태왕의 동생을 전연에 보냄 봄2월 고국원태왕이 동생을 연나라에 보내 자신을 신하로 칭하면서("네가 천자 해라" 한 것) 예방하게 하고, 진귀한 물건 1천여점을 바친다. 이에 연나라의 왕 모용황은 바로 미천태왕(고국원태왕의 아비) 시신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고국원태왕의 어미(주태후)는 여전히 남게 하여 볼모로 삼았다. ※주태후는 이후 12년이나 더 지나서 355년(고국원25) 12월 고구리-연나라 화해 뒤에야 돌아오게 된다. 연나라는 이 시기, 화하족을 치는 중이었다. 가을 7월, 고국원태왕이 평양의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동황성은 지금(고리)의 서경(현 북경) 동쪽 목멱산에 있다. 8. 345년(고국원15) 전연이 남소성南蘇城 빼앗음 겨울 10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모용각으로 하여금 남소南蘇를 공격하게 한다. 모용각은 남소南蘇를 빼앗고 수비군을 두고 돌아갔다. 9. 346년(고국원16) 근초고((近肖古)가 백제왕이 되다 9월 백제의 설(契=계契왕 백제12대왕)이 죽고 비류왕(백제11대왕)의 둘째아들 근초고가 뒤를 이었다. 체격과 용모가 기이하게 크고,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식견이 있었다. 347년 정월, 근초고(近肖古王 346~375 ※近=큰)가 태산에 올라 단을 쌓아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며 '천자국'임을 표명했다. 이에 고국원태왕이 정벌하고자 신하들과 논의하였으나, 신하들이 만류하였다(모용선비랑 전쟁준비중이었기 때문). 348년(고국원18) 9월 연나라의 모용황이 죽고, (나이어린) 모용준이 뒤를 이었다. 10. 349년(고국원19) 9월 대방을 쳐서 5성을 뺏다 352년(고국원22) 2월 고국원태왕은 대방을 토벌하여 그 왕 장보를 사로잡고, 백제 근초고와 관미령(관미성)에서 싸워 크게 이겼다. 세 개의 성을 쌓아놓고 두 나라(대방과 백제) 남녀 1만명을 잡아 돌아왔다. ※대방과 백제는 사돈관계.. 11. 355년(고국원25) 주태후 돌려받음 정월 구부(丘夫 소수림태왕)를 태자로 삼았다. 구부는 339년(고국원9) 5월 태어났으니, 16세(연나이 17세)에 태자가 된 것.. 12월 전연에 사신을 보내 볼모와 공물을 바치고, 어미 주태후를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하여, 연왕 모용준이 이를 허락하였다. 주태후는 무려 12년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연은 고국원태왕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로 호칭하고, '낙랑군공'으로 불렀다. ※360년(고국원30) 정월, 모용준은 나이 42살로 죽고 아들 모용위가 즉위했다. 12. 369년(고국원39) 백제에게 패함 가을 9월, 고국원태왕이 병사 2만을 이끌고 남쪽을 백제를 정벌하여 치양(꿩이 있는 땅)에서 싸웠지만, 계속해서 패배하였다. 13. 371년(고국원41) 백제의 침략전쟁 & 고국원태왕 전사 겨울 10월 고구리 서쪽(연나라)을 정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백제가 공격해 왔다. 대구수(큰 구수 近仇首)가 북한漢성을 공격해 오자, 고구리가 한漢수에 복병을 숨겨놓아 크게 이길 무렵, 대초고(큰 초고 近肖古)가 손수 3만 정병을 이끌고 와서 대구수를 도왔다. 이에 고국원태왕이 친히 도성수비군을 이끌고 한漢성의 서산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고, 고국원태왕이 눈먼 화살 두대를 맞았다. 하나는 어깨에, 다른 하나는 가슴에 맞았다. 고국원태왕은 고상령으로 물러났다가 이달 23일 죽었다. 태왕의 죽음을 숨긴 채 도성(평양성)으로 시신을 옮긴 후 발상하였다. 북부여 후기도읍지역이었던 고국원(故國原) 들에 장사지냈다. ※물길을 이용해 수도를 친 근초고왕 고구리 주력군이 서쪽으로 옮겨간 틈을 타 도성인 평양성을 노리고 공격하는데, 안평, 신성 등 여러 성이 버티는 육로 대신 현 천진~현 북경에 이르는 물길을 노렸다. 허를 노려 적의 심장부를 찌르는 전략! 이 전략을 성공시켜 고구리 태왕을 죽이고 고구리를 혼란에 빠뜨리면서 백제는 산동곶을 백제땅으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한다.
고국원태왕(故國原 331~371) 영토
15대 미천태왕(을불, 우불, 300~331)
16대 고국원태왕(사유, 유, 쇠, 331~371)
17대 소수림태왕(구부, 371~384)
1. 331년(고국원1) 태왕 즉위
311년(미천12) 미천태왕와 주周씨 태후 사이에서 태어난 사유斯由(쇠釗)는 314년(미천15) 3살에 태자가 되고, 미천태왕 32년째 아비가 죽자 스무살로 태왕에 즉위했다.
2. 333년(고국원3) 대방 남부 6성을 쳐서 평정(백제와 대방은 사돈관계)
훗날 660년 백제가 망하고 백제유민이 대륙남부 왜와 합하여 일본을 세운다(670년 사서에 최초로 '일본日本' 등장). 애초에 고리적에 쓰여진 는 조선시대 사대주의에 맞춰 수정·가첨되고, 일제시대 때 자기네 조상 백제에 부정적인 내용은 축소하거나 빼는 방향으로 다시 한번 수정·가첨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적이었던 고구리史 역시 축소·은폐하므로, 고국원태왕이 '대방을 평정한 정복군주였'였음조차 우리가 모르고 있는 거다. 아마 고리적에 쓴 원본에는 다 나와있을 것이다.
3. 334년(고국원4) 환도궁 지음
8월 평양성을 증축하고, 환도(현 양원)에 새 궁전을 지었다. 서쪽 모용선비를 언젠가 치리라는 의지의 표명..
4. 339년(고국원9) 전연의 군대가 신성新城을 공격
연나라 왕 모용황이 침략해 와 신성新城에 이르렀다. 고국원태왕이 동맹을 요청하자 곧 돌아갔다. 이 해에 왕자 구부(丘夫 소수림태왕)가 태어났다.
5. 342년(고국원12) 환도성 천도 & 연나라의 침공
2월 환도성을 보수하고, 국내성을 쌓았다. 그리고 8월에 국내성(현 북경) 서쪽에 위치한 환도성(현 양원)으로 천도하였다.
고국원태왕의 '환도성 천도'에 대해 전연(모용선비)은 "한번 붙어 자웅을 겨뤄보자"는 의도로 받아들이고, 10월에 전연의 모용황이 용성(현 태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입위장군 모용한이 모용황에게 권고하기를 "고구리를 공격해서 빼앗고, 그 다음 우문선비를 멸망시킨 후에야 중원(화하족)을 차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후방을 다진 다음 진짜 목표인 화하족 동진을 본격적으로 칠 수 있다는 얘기)
당시 고구리로 가는 길은 두 개였는데, 북쪽 길은 평평하고, 남쪽 길은 험하고 좁아 군신들이 북쪽 길로 가려고 하였다.
입위장군 모용한이 말하기를 "적국(고구리)은 일반적으로 상황을 고려하여 반드시 우리 연나라 대군이 북쪽 길로 오리라고 생각할 거요. 따라서 북쪽 길을 중요시하고 남쪽 길을 가벼이 여길 것이오. 왕(모용황)이 정예병력을 거느리고 남쪽 길을 따라 고구리를 불시에 공격하면 환도(현 양원)는 따로 공격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오.
또한 별도의 소규모 부대를 북쪽 길로 보내면, 설령 차질이 있더라도 그들의 심장부가 이미 무너졌으므로 사지를 움직일 수 없을 것이오.." 하였다. 모용황이 이 말을 따랐다.
6. 연나라의 침략전쟁
11월, 연나라 모용황이 정예병 4만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출정하였다. 모용한과 모용패를 선봉으로 삼았다. 별도로 장사長史 왕우 등에게 명하여 병력 1만5천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출정하게 하여 고구리를 침공했다.
고국원태왕은 동생 무武(고무)로 하여금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북쪽 길을 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남쪽 길을 방어하였다. 이때 모용한의 선봉 1만군이 먼저 도착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뒤에 모용황의 3만 대군이 도착하여 남쪽의 우리 고구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모용황의 전략, 적이지만 대단하지 않은가! 다 우리 동이족의 후예들이다.
연나라 좌장사(왼쪽 長史) 한수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의 목을 베자, 연의 여러 부대가 승기를 타고 마침내 환도성(현 양원)으로 쳐들어왔다.
고국원태왕은 해발 등을 데리고 단웅곡에서 단령을 넘어 평양으로 도망쳤다. 연나라 장군 모여니가 추격하고, 고국원태왕의 어머니 주씨(주태후)와 황후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이때 북쪽 길로 간 왕우 등은 우리 고구리 군사들과 싸우다 패하여 모두 전사했다). 이로 말미암아 모용황은 더이상 추격하지 않고, 사신을 고구리로 보내 고국원태왕을 불렀으나 태왕이 나가지 않았다. 아직 주력군이 남아있으므로 더 붙어볼 수 있는 상황이니까 나갈 일이 없다.
북쪽 길에서 승리한 5만 고구리군과 평양에 남아있는 주력군(2만 추정?)을 합하여 몰아치면 4만 모용황 군은 쪽수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태후와 황후들, 왕자들을 볼모로 잡고 있으니, 계략을 잘 써서 도망쳐야 하는 상황...
모용황이 돌아가려 할 때 한수가 말한다. "고구리땅은 우리가 남아서 지킬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그들의 태왕(황제)이 도망가고 민중이 흩어져서 산골짜기에 잠복하고 있으나, 우리 대군이 떠나가면 틀림없이 다시 모여 나머지 군사를 수습할 것입니다. 이는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구리 태왕의 아버지인 미천태왕 시신을 싣고, 고구리태왕 어머니(생모)를 볼모로 잡아 돌아갔다가, 고구리 태왕이 제발로 와서 사죄하기를 기다린 뒤 돌려주시지요. 그러면 은혜와 신뢰로서 무마하게 되므로 상책이 되지요"
모용황이 그 말에 따라 미천태왕의 묘를 파서 그 시신을 싣고, 대궐 창고에 있던 역대 보물을 탈취하고, 남녀 1만명을 사로잡고, 궁궐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파괴하고서야 퇴각길에 나섰다.
고구리 무덤은 돌무덤이라 시신 가져가기 굉장히 힘든 구조다. 그런데 당시 미천태왕 무덤의 경우, 어미 주태후가 죽으면 아버지(미천태왕) 무덤에 합장하려고 문을 봉합하지 않은 상태(가문假門으로 만들어놓은 상태)였기에 모용황 군이 손쉽게 미천태왕 시신을 탈취할 수 있었다.
고구리군이 모용황 군 퇴로를 차단하려 하자, 모용황은 주태후(고국원태왕의 어미)의 조서로서 고구리군과 민중이 막아서지 못하게 하였다. 고국원태왕 역시 주태후와 여러 후들 및 왕자들의 안위 때문에 추격할 수 없었고, 모용황은 무사히 돌아갔다.
7. 343년(고국원13) 태왕의 동생을 전연에 보냄
봄2월 고국원태왕이 동생을 연나라에 보내 자신을 신하로 칭하면서("네가 천자 해라" 한 것) 예방하게 하고, 진귀한 물건 1천여점을 바친다. 이에 연나라의 왕 모용황은 바로 미천태왕(고국원태왕의 아비) 시신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고국원태왕의 어미(주태후)는 여전히 남게 하여 볼모로 삼았다.
※주태후는 이후 12년이나 더 지나서 355년(고국원25) 12월 고구리-연나라 화해 뒤에야 돌아오게 된다. 연나라는 이 시기, 화하족을 치는 중이었다.
가을 7월, 고국원태왕이 평양의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동황성은 지금(고리)의 서경(현 북경) 동쪽 목멱산에 있다.
8. 345년(고국원15) 전연이 남소성南蘇城 빼앗음
겨울 10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모용각으로 하여금 남소南蘇를 공격하게 한다. 모용각은 남소南蘇를 빼앗고 수비군을 두고 돌아갔다.
9. 346년(고국원16) 근초고((近肖古)가 백제왕이 되다
9월 백제의 설(契=계契왕 백제12대왕)이 죽고 비류왕(백제11대왕)의 둘째아들 근초고가 뒤를 이었다. 체격과 용모가 기이하게 크고,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식견이 있었다.
347년 정월, 근초고(近肖古王 346~375 ※近=큰)가 태산에 올라 단을 쌓아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며 '천자국'임을 표명했다. 이에 고국원태왕이 정벌하고자 신하들과 논의하였으나, 신하들이 만류하였다(모용선비랑 전쟁준비중이었기 때문).
348년(고국원18) 9월 연나라의 모용황이 죽고, (나이어린) 모용준이 뒤를 이었다.
10. 349년(고국원19) 9월 대방을 쳐서 5성을 뺏다
352년(고국원22) 2월 고국원태왕은 대방을 토벌하여 그 왕 장보를 사로잡고, 백제 근초고와 관미령(관미성)에서 싸워 크게 이겼다. 세 개의 성을 쌓아놓고 두 나라(대방과 백제) 남녀 1만명을 잡아 돌아왔다.
※대방과 백제는 사돈관계..
11. 355년(고국원25) 주태후 돌려받음
정월 구부(丘夫 소수림태왕)를 태자로 삼았다. 구부는 339년(고국원9) 5월 태어났으니, 16세(연나이 17세)에 태자가 된 것..
12월 전연에 사신을 보내 볼모와 공물을 바치고, 어미 주태후를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하여, 연왕 모용준이 이를 허락하였다. 주태후는 무려 12년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연은 고국원태왕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로 호칭하고, '낙랑군공'으로 불렀다.
※360년(고국원30) 정월, 모용준은 나이 42살로 죽고 아들 모용위가 즉위했다.
12. 369년(고국원39) 백제에게 패함
가을 9월, 고국원태왕이 병사 2만을 이끌고 남쪽을 백제를 정벌하여 치양(꿩이 있는 땅)에서 싸웠지만, 계속해서 패배하였다.
13. 371년(고국원41) 백제의 침략전쟁 & 고국원태왕 전사
겨울 10월 고구리 서쪽(연나라)을 정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백제가 공격해 왔다. 대구수(큰 구수 近仇首)가 북한漢성을 공격해 오자, 고구리가 한漢수에 복병을 숨겨놓아 크게 이길 무렵, 대초고(큰 초고 近肖古)가 손수 3만 정병을 이끌고 와서 대구수를 도왔다.
이에 고국원태왕이 친히 도성수비군을 이끌고 한漢성의 서산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고, 고국원태왕이 눈먼 화살 두대를 맞았다. 하나는 어깨에, 다른 하나는 가슴에 맞았다. 고국원태왕은 고상령으로 물러났다가 이달 23일 죽었다. 태왕의 죽음을 숨긴 채 도성(평양성)으로 시신을 옮긴 후 발상하였다. 북부여 후기도읍지역이었던 고국원(故國原) 들에 장사지냈다.
※물길을 이용해 수도를 친 근초고왕
고구리 주력군이 서쪽으로 옮겨간 틈을 타 도성인 평양성을 노리고 공격하는데, 안평, 신성 등 여러 성이 버티는 육로 대신 현 천진~현 북경에 이르는 물길을 노렸다. 허를 노려 적의 심장부를 찌르는 전략!
이 전략을 성공시켜 고구리 태왕을 죽이고 고구리를 혼란에 빠뜨리면서 백제는 산동곶을 백제땅으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용훈박사님, 감사합니다.
0:19 왜국이 섬을 넘어서 생각보다 넓었네요.
잘 보고 있습니다 재미 있습니다 설명하실때 잠깐 시간을 백제 신라에게 투자를 해주세요 전체적인 삼국의 관계를 알고 싶네요 ^^
감사합니다 환도성 지금도 2개고성
이용훈박사님
339년 맹 해석을 한국사데이타베이스와 동일하네요 그맹의 뜻이 무엇이였을까요?
한글해석에만 혹 의존하신것은 아니신지 제가 비록 역사인식은 그리 크진않지만 해석상 한글판과 한자를 직접보는것은 상당히 다르다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왕...흠...글쿤.
정찰을 계속해야 하는군요. 1차로 출정한 선비의 부대만보고 판단한것이 폐착이네요.
매복을 했으면 좋았을걸..... 매복도 정찰을 계속해야 협공을 안당했겠내요....
정찰의 중요성이 느껴집니다.
고구리는 왕성을 다시츅조하고 천도하는등 심란한 상황일듯 싶기도 하고요.
정찰을 잘했으면 매복도 가능하고 역으로 빈 선비의 용성을 공격할수도 있었겠네요.
또는 빈성을 공격하면서 매복해서 돌아오는 선비를 박살낼수도 있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