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주막이 미친듯이 많았던 이유 / 조선시대 주막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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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іковано 24 січ 2025

КОМЕНТАРІ • 255

  • @mjd2785
    @mjd2785 Рік тому +16

    어디서 봤는데 국밥에 밥을 말아서 나오게된 이유가
    옛날엔 전기밥솥처럼 장시간 밥의 보온을 유지할수가 없으니
    가마솥에 밥을 지어놓고 한참뒤에 오는 손님들에게 찬밥을 내어줄수밖에 없었고
    찬밥을 받는 손님들 불만이 많아지니 머리를 쓴게 뜨거운국에 밥을말아주게 된것이라네요.

  • @푸들푸들강아지인형
    @푸들푸들강아지인형 Рік тому +33

    1978년도 강원도 철원군 동승읍 오지리에서 군복무하던 시절 외출 외박 휴가로 읍내에는 주막과 구판장이 있었음 음식도 반찬도 직접만들어 맛있고 직접 담근 동동주 막거리에서 모주로 특별한 단골손님에게 제공 이당시 소주병이 오늘날 정종크기의 소주병 주막의 메뉴는 딱히 정해저 있지 않음 그날그날 제공되는 음식이 달라서 겨울철에는 화목난로 석유곤로 연탄난로위에 양은주전자로 끓인 보리차물 제공

    • @lee-675
      @lee-675 Рік тому

      오지리면...포병? 88?

    • @깨비-u4y
      @깨비-u4y Рік тому

      반갑습니다..
      저도 그 시절 6사단 복무..
      수년전 동송읍 화지리 가보았더니
      옛 흔적은 없어지고
      청성 회관도 없어졌습니다..
      님 항상 건강하세요...

    • @삐용삐용-s8p
      @삐용삐용-s8p Рік тому

      조선시대 주막에는 '성매매'도 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해방 후에도 그런 기능이 존재했었을까요?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1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Ganadalamabasa59
    @Ganadalamabasa59 Рік тому +7

    늘 유익한 영상 감사합니다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좋은 영상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 @yongg12
    @yongg12 Рік тому +71

    주막이 편의점 수보다 많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가장 놀라운건 주막 신용결제 시스템이네요 조선의 주막 결제 시스템의 발전과 신용은 놀랍네요

    • @nightkebi6544
      @nightkebi6544 Рік тому +3

      인구수가 적고 과거는 모든 나라가 혼자서는 사는게 불가능한 힘든 시대

    • @덩쿨이
      @덩쿨이 Рік тому +4

      조선경제사 전문으로 한 교수님한테 물어봤는데 개소리라고합니다 이소문 출처가 어디냐고 말씀하시더군요 현대 사회에도 힘든데 조선에 그런게 가능하겠냐고 말하시든데

    • @덩쿨이
      @덩쿨이 Рік тому +2

      조선 후기까지도 주막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주막이 아니라고 합니다 마을사람 집에 숙박하고 돈줄태니 밥좀 달라 이런 구조였다고 합니다 물론 교통의 요지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주막이 있었겠죠 교수님 하시는 말씀이 단어에 속지마라 엿습니다 지금은 별로 없지만 제 어렸을때도 외지 사람이 요금지불하고 숙박하는 경우 몇번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제가 무지 나이 많아보이지만 저 90년대생입니다

    • @덩쿨이
      @덩쿨이 Рік тому +1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저 러시아 작가가 본게 뭐였나?가 문제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신용결제 시스템은 아니었을겁니다

    • @hks-w2j
      @hks-w2j Рік тому

      ​@@덩쿨이 교수가 옛날 꼰대마인드,,,제 생각엔 충분히 가능 했으리라 봅니다...그래서 버는돈이 전국주막 비슷비슷? 인구수도 몰빵이 아니라 전국 골고루 퍼져 있기때문에 만약 첫주막 손님한데 50마넌 받아놓고 나가는 손님한데 10마넌 내주면 40이남음 중간에 거쳐가는 손님들 돈거래 없이 나가도 처음에 큰돈을 받아논게 있기때문에 돈이 좀 여유롭게 남는 상황일듯 합니다 설명이 부족하지만 첫주막,중간주막,마지막주막 인구분포가 골고루 있으니 충분히 가능합니더

  • @경민이-q7l
    @경민이-q7l Рік тому +58

    많아도 한국교회가 더 많습니다
    최고의 개인 사업장

    • @전도사-j6x
      @전도사-j6x Рік тому +8

      아가리만 잘털줄알면 여자도 먹고, 돈도 벌고, 집도사고, 차도사고. 창업비용도 적고 최고의 직장.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정형복-o5w
    @정형복-o5w Рік тому +6

    이렇게 유익한 채널이 있었다니?
    단번에 구독 하고 갑니다.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돼지불고기-c2m
    @돼지불고기-c2m Рік тому +7

    퀄리티 높은 영상 잘 보고 갑니다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조민현-s2g
    @조민현-s2g Рік тому +7

    영상 퀄 미쳤네요..떡상하세요👍👍👍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1

      감사합니다. 좋은 영상으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 @승승장구-b7y
    @승승장구-b7y Рік тому +15

    주막끼리 네트웍이 대단하네..

    • @ego6929
      @ego6929 Рік тому +5

      이걸 믿지 못한 외국인이 구한말에 조선을 여행하면서 굳이 엽전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다가 주막에서 체크카드처럼 사용이 된다는걸 보고 매우 감탄했다고 쓴 글이 남아있습니다. 처음 방문한 주막에 돈을 주고 차용증서를 받으면 다음 주막에서 그걸 보여주고 차용증서에 있는 금액에서 계속 차감하다가 어느 주막에 들려 돈이 필요하면 돈으로도 환전되고 마지막 주막에서 남은 잔금을 다 받으면 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개성상인등 조선중후기에 발전한 보부상과 과거를 보기위한 선비들과 여러 물자를 옮기던 인력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지혜가 담겨서 만들어진 시스템인데 발달한 서구사회조차도 아직 도입하지 못한 시스템이라 서구인들이 당시에 이를 보고 놀라워했다고 합니다. 은행은 없었지만 주막의 네트워크가 전국 단일은행의 역할을 했던거죠.

    • @휘휘-m6z
      @휘휘-m6z Рік тому

      ​@@ego6929 서구는 이천년 전부터 이미 화폐를 사용하니 그런 미개한 방법이 필요가 없던거고 조선은 미개해서 엽전들고다니다 강도 당하는 건 기본이고 화폐가 쌀이라 주막 외엔 엽전을 사용 못하니 엽전 대신 차용증 써준거고ㅉ 서양인이 놀란게 미개해서 놀란거지 무슨 신문물이라 놀란줄아냐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박영기-z4t
    @박영기-z4t Рік тому +1

    따봉 아주 좋아요 힐링 👍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yunkim9320
    @yunkim9320 Рік тому +3

    80년대 말 대관령 올라가는 옛길(조선시대 과거보러 가는 길이라고 함) 강릉에서 대관령 정상 중간쯤에 주막이 있었죠
    그때 장사는 하지 않았고 옛모습그대로인지 복원한건지 ..기억은 잘 안나는데 그 산중에 주막이 있었던거로 기억합니다.

  • @JungSungMock
    @JungSungMock Рік тому

    영상좋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콘텐츠 업로드 하도록 할게요!

  • @임진영-m3o
    @임진영-m3o Рік тому +14

    편의점의 전 개념이 주막,역,원 등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매우 신기합니다. 물론 지구촌 내의 모든 인간 사회에 여러 시스템이 존재했겠지만.
    주막 프렌차이즈 사업했더라면 조선 최대 회장이 됐을텐데. 신용 카드 없는 신용 거래 시스템도 신통방통합니다.

    • @벽을뚫는포신
      @벽을뚫는포신 Рік тому +2

      우리 옆에 흔히 보이는 편의점의 수보다 훨씬 많았다는 의미에서 예시를 든 것이지 주막은 편의점의 전 개념이었다고 설명하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는데 영상 제대로 본 건 맞아요? 편의점이 요식업이랑 숙박업을 같이 제공하던가요? 따지자면 모텔에 식당을 합친 거 아닌가? 굳이 비슷한 걸 찾는다면 찜질방이 있는데 뭔 소리를 하는 건지?

    • @인어왕자-m8c
      @인어왕자-m8c Рік тому

      편의점은 자는 곳 숙박 시설은 아닌 데...

    • @삐용삐용-s8p
      @삐용삐용-s8p Рік тому

      신통방통할 것이 없습니다.
      전국에 통용되는 지폐가 존재했다면, 저런 신용결제를 할 이유가 없죠.
      하지만 지폐는 조선사회에 통용되지 못했고, 화폐경제 자체가 18세기 숙종 때부터 시작되어서
      아직도 물물교환을 하는 세태가 많았고, 화폐의 실질 가치도 낮아서, 뭔가를 사려면 대량의 무거운 화폐를 지니고 다녀야 해서 운송비와 인건비가 더 나오는 상황이었죠.
      그랬기 때문에 저런 신용결제 시스템이 나온 것입니다.
      은행이 있고 은행이 발행하는 어음이 있다면 모두가 그걸 사용하면 되는데,
      조선 사회는 원시적인 상업 사회였기 때문에, 은행이 등장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주막이 은행의 역할을 맡았다고 보면 됩니다.
      모텔, 음식점, 은행 등의 영업이 분화되지를 못하고 주막이라는 원시적인 형태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 @나그네-v1y
    @나그네-v1y Рік тому +28

    우리 마을에도 주막이 2개 있었다 함.. 두 주막거리가 500m 정도 되는데.. 하나는 광주에서 영광가는 길목.. 하나는 장성에서 영광가는 길목이였다.. 광주에서 영광가는 길목의 주점은 아마 1940년도까지 운영되었던거 같다 언제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왜냐하면 거기서 장사하신 한분이 우리 할머니와 나이가 비슷했었다..
    나의 할머니 대충 1900쯤에 태어났는데 그분도 그쯤 태어났으면 나이 40까지는 주막을 했을것이다..
    장성에서 영광가는 주막에 쓰인 초가집을 1970년 중반에 허물었는데 거기서 다량의 엽전이 나왔습니다..거기 살았던 사람이 술자리에서 이야기함. 이 주막은 대충 1870년 이전에 사용했을듯.. 엽전이 1880년 까지만 쓰였으니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samki530
    @samki530 Рік тому +5

    주막이 모습이 바껴서 우리옆에 있는지도 모르겠군요...편의점과 고속도로휴게소국도변의 휴게소그리고 졸음쉼터같은걸로변해서 말이죠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최병택-k9i
    @최병택-k9i Рік тому

    재미난 주막 이야기 감사합니다.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즐겁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ksmb2333
    @ksmb2333 Рік тому +5

    이 영상에서 보면 주막이 마치 조선 중기 이후부터 매우 성행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실제론 정조 시대 이후에나 인구+유동 인구가 늘면서 급증했고,
    조선 중 후기엔 주막이 그렇게 성행하진 않았던 거 같은 게.. 17세기 암행어사 같은 사람들 여행일지 보면 주막에 묵는 거 거의 못 봄.
    아무래도 주막들이 20세기 초까지도 선교사들이 기겁할 만큼 숙소로서의 환경이 열악했다고 하니, 다 즉석 에어비엔비 활용. (그 마을에 가서 잠 좀 잡시다~ 이러고 민가에 묵음)

  • @꿈큰아이
    @꿈큰아이 Рік тому +2

    주모! 여기 국밥 한대 말아주쇼! 한번
    해보고싶은데 언제 하나...

  • @addfy777
    @addfy777 Рік тому +2

    옛날 주막에서 국밥이랑 막걸리 한그릇 먹어보고싶다

  • @leeoma4423
    @leeoma4423 Рік тому +94

    70년대 나 어릴때 아버지가 주막에서 술빵내기 노름을 하셔서 거의 저녁마다 엄마가" xx야 주막가서 아버지좀 데리고 와라" 그러면 후레쉬도 없는 깜깜한 시골 밤길을 걸어서 부르러 갔던 기억이 있네.

    • @sr.johnson2411
      @sr.johnson2411 Рік тому +9

      공감합니다
      기억이 새롭습니다 😂

    • @hongfishjeonrado3318
      @hongfishjeonrado3318 Рік тому

      ㅋㅋㅋㅋㅋㅋㅋㅋ 쫀놈들 ㅋㅋㅋㅋ
      어릴때 시골에 가면......
      그 ... 그....그 미개함과 더러움에 까무라치게 놀라곤 했음
      지금도 마찬가지임 가뵤면.... 걍 거리와 집만 좀 번드르르르...해졌지 사람들은 정말 옛날 처럼 더러운 허연색 한복 같은 옷에서 벗어난것 빼곤 아직도 구질구질들함

    • @깨비-u4y
      @깨비-u4y Рік тому +4

      참으로 정겹고 그리운 시절입니다..
      잠시나마 즐거웠습니다.😅😅😅

    • @ninitoto8103
      @ninitoto8103 Рік тому +5

      70년대에 주막이 있었나요?

    • @bca-on6pb
      @bca-on6pb Рік тому +7

      틀딱이노

  • @성민배-w5q
    @성민배-w5q Рік тому +11

    퀄이 높은데 조회수가 안나온다는게 ㅜㅜ 그러다 확 올라가긴하지만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2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좋은 영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 @jjdrago2115
    @jjdrago2115 Рік тому +7

    그때부터 자영업이 많았군요 ㅎ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1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graycain
    @graycain Рік тому +1

    주막이 있고 객주가 있고. 주막은 식당 개념이고 객주는 보부상들이 묵고 가는 여인숙 같은 곳. 그리고 상단들마다 객주를 운용해서 해당 되는 상단이 그곳을 이용하고 물건을 떼가고 그렇게 판매함. 그리고 행수들이 지점장으로 그곳을 관리함.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clear-sky-6
    @clear-sky-6 Рік тому +7

    우리나라 마지막하나남은 예천 삼강주막 가보시길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인문학여행
    @인문학여행 Рік тому +5

    구한말에 주막 12만의 출처가 궁금하군요. 너무 많아 잘못된 정보로 보입니다.
    주막은 조선의 주요 6개 도로와 세부도로변에 10리~30리마다 있었다고 하는데,
    조선의 주요도로를 통해 전국을 자유롭게 통행하는 이는 매우 제한적이었죠.
    1. 3년에 한 번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오가는 유생들
    2. 전국의 보부상들 (주요 물자는 한강과 서해안을 통한 해상운송임)
    3. 한양과 지방을 오가는 파견직과 파발마의 관리직

    • @ego6929
      @ego6929 Рік тому +3

      주막은 그 마을 사람들도 많이 이용하는 주점이었습니다. 그런 주점에서 음식을 팔기 시작하고 잠자리를 제공하면서 주막형태로 발전한거죠. 동네사람들이 모여 통보 몇푼으로 술한잔 걸칠수 있는 곳은 마을마다 최소 하나는 있었고 규모가 좀 있는곳은 수십곳이 경쟁하기도 했다니까요.

    • @인문학여행
      @인문학여행 Рік тому

      @@ego6929 여행객이 아닌 마을 사람들이 주막에서 숙식하지는 않았겠죠.
      일반인은 농사일에 바쁘고 겨울 눈길에 짚신으로 이동이 불가능한데
      구한말까지 조선의 주요 도로는 모두 논뚜렁길 이었다고 합니다.

    • @ego6929
      @ego6929 Рік тому +1

      @@인문학여행 위에 적었는데요 주점이 숙박시설로 진화한거라구요 마을 사람이야 숙박하지 않죠 일반 백성들이 남긴 글들에는 주막에 얽힌 이야기가 많습니다 군사적이유로 대형도로를 일부러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가은 길이 그만큼 험했으니 숙박을 하는 사람이 많았고 양반과 평민이 같은 방을 이용했고 일부 권력자가 혼자 방을 차지하고 이용객을 내쫒으려다 되려 당한 이야기도 흔하죠 내쫒긴 이용객중에 더 높은 관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거나 해서요. 그만큼 이용하는 사람이 많았다는거고 외국인의 기록에도 나와있죠 그리고 지역마다 역참이 있고 말을 어사가 말을 빌릴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길이란 개념도 상대적인겁니다 농두렁이라.

    • @세상어렵네
      @세상어렵네 Рік тому

      주막이 전국적으로 퍼진건 1800년은 되어야함
      실질적으로 주막이 존속한 기간은 200년이 안됨

    • @김가네백수
      @김가네백수 Рік тому

      잼민아 출저를 말하라니깐 니 뇌피셜을 짖어대냨ㅋㅋㅋ 천민 백정이 뜻은 몰라도 읽고 쓰게 만든 세종대왕 잘못이 크다 한글의 최대단점임

  • @nawsaelee8055
    @nawsaelee8055 Рік тому +2

    놀랍군요, 전국주막들이 신용결제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었다니.
    그런데, 이런 방식이라면, 분명 각 주막들 간의 정산시스템도 있었단 얘기인데 그것도 궁금하네요.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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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물고기-z8k
    @무...물고기-z8k Рік тому +1

    문소만록
    근데 자료화면은
    대동야승.
    편집자님 실수.

  • @삐용삐용-s8p
    @삐용삐용-s8p Рік тому +1

    조선의 주막도 조선이 원시적인 사회였다는 걸 방증함. 원래는 나그네를 대상으로 한 숙박업소에서 시작했다가, 숙박하면서 식사가 필요하니, 식사도 팔게 되었고, 또 식사를 하며 술을 곁들이니 술을 팔게 되었고,

    또 여행이나 이동을 하면서 짐을 들고 다니니 짐 맡길 곳이 필요해서 창고 역할도 하게 되고, 조선의 화폐는 인플레가 심해 많이 들고다녀야 하니 주막에 돈을 맡기고 어음을 가지고 소비를 해서 은행 역할도 하게 되고, 성욕을 풀 나그네들이 많으니 매춘 기능도 하게 됨.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6개 분야의 사업이 한 곳에 뭉쳐 있는 것임. 달리 말하면 각 분야가 분화되어서 독자적인 점포를 구성할만큼 조선 사회가 경제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발달하지 못했다는 방증임.​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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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ychoi7391
    @sychoi7391 Рік тому +1

    👍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해요!

  • @swshin469
    @swshin469 Рік тому

    신용결제 시스템이 저당시에 제대로 돌아간다는게 너무 신기하고 이해가 안가요.
    중간에 누군가 영수증을 조작하거나 하면 어떻게 하고..?
    처음에 맡긴 돈을 중간의 다른 주막에는 어떻게 전달할지 모르겠구요.
    주막들을 모두 관리하는 어떤 신용 기관이 있던걸까요..?

    • @삐용삐용-s8p
      @삐용삐용-s8p Рік тому

      지폐가 통용이 되지 않고, 동전 화폐의 실질 가치가 낮아서 다량의 화폐를 들고다니려면 운송비와 인건비의 증가가 수반되서, 저런 시스템을 만든 것이죠.

    • @swshin469
      @swshin469 Рік тому

      @@삐용삐용-s8p
      화폐가 제대로 쓰이지 않은 이유는 이해가 가는데
      제가 이해가 안가는건 여행자가 갖고다니는 그 영수증의 진위여부, 신뢰성의 문제가 첫째고
      그 영수증에 따른 주막에 지급 방법 및 주체가 궁금하다는 거죠.
      그당시 무슨 위조방지기술이 있는것도 아니고 ..

    • @삐용삐용-s8p
      @삐용삐용-s8p Рік тому

      @@swshin469 그래서 저도 일반 여행자가 그걸 사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보고, 보부상 등의 전국 조직이 있는 유통 상인들이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정기적으로 주막을 이용하고, 안면이 있고, 상시적인 조직을 신뢰할 수 있는 측면이 있으니까요.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콘텐츠도 꾸준히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 @mk_bon4873
    @mk_bon4873 Рік тому +9

    한국엔 편의점보다 소위 교회로 포장한 프렌차이즈가 더 많은게 부정할수 없는 현실이다.심지어 한건물에 두개씩이나 입점해서 경쟁하는 모습도 봤다.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스터마구니-e7n
    @마스터마구니-e7n Рік тому +6

    주막은 조선이 한민족 역사 상 가장 나약한 왕조라는 편견과는 다르게 한민족이 가장 부유했던 시기였다는 증거 중에 하나임. 나머지는 국가에서 발행하는 화폐와 지방시장의 존재. 가장 강력하다던 고구려조차 경제규모의 한계로 화폐경제는 고사하고 초보적 수준의 물물교환을 벗어나질 못했음.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하다던 고려시대조차 경제규모가 일천해서 잉여물자의 유통이 원활하지 못한 나머지 화폐도입에 실패함. 하지만 조선시대엔 경제규모의 성장으로 잉여물자가 늘어나서 이들의 거래가 폭증하는 덕에 기존의 물물교환으로 이 물량이 감당이 안되게 됨. 그리하여 이를 원활히 하기 위래 화폐경제가 성장하게 됨. 경제발전으로 활발해진 물류의 유통 과정에서 물자를 사고파는 시장이 과거엔 경제적으로 가장 발달한 수도에서조차 버거웠다면 조선시대엔 거래가 활성화되고 지방에서도 시장이 열리면서 이들을 오가며 물건을 팔러다니는 상인 등에 의해 숙박과 식사에 대힌 수요가 증가하면서 주막이 생긴거임. 과거였다면 물자가 지역에서 바로바로 소비될만큼 경제규모가 작았으니 주막이나 화폐라는게 필요가 없었을것임.

    • @쉴레이만은솔로몬유수
      @쉴레이만은솔로몬유수 Рік тому

      가장 부유는 모르겠고 가장 평화롭고 빈부격차 적은 편에 개천에서 용 나는 구조

    • @마스터마구니-e7n
      @마스터마구니-e7n Рік тому +1

      @@쉴레이만은솔로몬유수 사실 상 조선이 가장 부유한게 맞습니다. 가장 강력하단 이미지를 가진 고구려는 하도 가난해서 주변 나라들을 약탈하는 경제구조를 이어가야만 했고, 신라는 서라벌만 벗어나면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그나마 삼국 중에선 무난하다 알려진 백제조차 화폐경제가 자리잡을 수준의 경제가 아니죠. 경제적으로 화폐의 상용화만큼 부의 발전을 보여주는 증거는 없습니다.

    • @미니요다새끼
      @미니요다새끼 Рік тому

      고조선때도 화폐씀

    • @마스터마구니-e7n
      @마스터마구니-e7n Рік тому

      @@미니요다새끼 중국이 쓰던걸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서 쓴거지 고조선 내부에서 만들어서 유통한게 아님. 그 논리면 2차대전 태평양 섬에서 미군이 발행한 군표 썼으니 태평양 원주민들끼리도 화폐를 쓸 만큼 경제가 발달했다고 얘기할거 아니자나 ㅋ

    • @각자도생-g5g
      @각자도생-g5g Рік тому +2

      ㅋㅋㅋ 이걸 또 이렇게 푸네.. 그냥 옆나라 일본만 비교하더라도 가마쿠라 시대때 화폐경제로 가는데 조선이랑 비교하면 거의 500년 가까이 차이남. 솔까. 조선시대 주막 생길때 런던에 지하철 생기고 있었슴. 정조가 수원성 올리고 50년 후인가 런던에 지하철 생기니까.. 그리고 조선시대 주막은 상당히 후기때 생긴 문화임. 거의 조선 목숨넘어가지 전. 어느 순간인가 문명은 비교문명으로 가는데 주변의 문명을 못따라가면 소멸하는 단계가 이단계인데.. 중국 일본 모두 농업혁명 상업혁명 다 지났고 과학혁명 선에서 멈췄고. 중국은 열강들에 아작났고 일본은 미국을 통해 산업혁명으로 감. 조선은 농업혁명 이후 상업혁명이 날까... 하는 순간 식민지로 갔슴. 국뽕도 무슨 이런걸 국뽕이라고.. 참나. 자기조상 비하하는것도 나쁘지만 국뽕질 하는것도 나쁨. 뽕에 취하면 한순간에 훅 간다고~ 정신똑띠 차려도 될까말까한 열강들 속에 낑긴 한반도 사람들이 뽕에 취해 헤롱거리고 있으면 그만큼 쉬운 먹잇감도 없지.

  • @kimjunggee
    @kimjunggee Рік тому +1

    남편들은 일찍 죽거나 국가일에 끌려 나가고 여성들이 살길이 뭐였겠는가 술 밥 성매매 등이지
    아무것도 안해주는 왕가에 기대지 않고 억척스럽게 살아온 조상들~
    특히 여성들 가련하면서도 존경스럽다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괴뢰집단-윤거니
    @괴뢰집단-윤거니 Рік тому +1

    주막은
    숙박시설, 모텔, 식당, 술집, 카지노, 회의실, 만남의장소 등의 역할을 하는 곳이지.
    주막이 적정수를 넘어
    과도하게 많다는 것은
    공급자측에서는 출혈경쟁상태였고
    수요자측에서는 술과 노름역할이
    커진것이므로
    곧 국운이 쇠할 운명이었다.
    -조선--7:16-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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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kfle
    @dkfle Рік тому

    내가 어릴때 경북 어느 산골에 살았는데 마을에 집이 십여채 있었고 주막이 하나 있었어요, 7살무렵부터 아버지 술 심부름 하러 주막에 매일같이 다녀오곤 했죠. 이런얘기하면 친구들 안믿음 ㅎ

  • @크리에이터조제
    @크리에이터조제 Рік тому +2

    체인점 개념 오졌다....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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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yeonsseungsseungi
    @hyeonsseungsseungi Рік тому +1

    주막이 무슨 편의점보다 많아?
    조선 사회는 기본적으로
    밥을 사먹는 사회가 아냐
    나 어릴때 시골에는
    마을 입구 길목에
    작은 가게 하나 있고 땡이었음.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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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nrise_gogo
    @sunrise_gogo Рік тому +11

    화폐가 25kg이나 됐다는게 충격ㅋㅋㅋ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1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벽을뚫는포신
      @벽을뚫는포신 Рік тому +2

      지금도 동전 꾸러미 모아두면 무거움. 다른 말이지만 총 한자루도 4kg인데 그거 하나 들고 다니는 것도 벅찼잖음.

  • @MsTuring
    @MsTuring Рік тому +1

    주막은 식당개념으로 본다면 전국에 많은 식당수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예전 주막의 숫자보다 늘어난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MsTuring
      @MsTuring Рік тому

      @@으쯔-u1q 내상각이 그렇다고 넌 생각 없는 동물이니?

    • @삐용삐용-s8p
      @삐용삐용-s8p Рік тому +1

      식당 + 숙박업소 + 주점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haeyeonglee
    @haeyeonglee Рік тому

    조선시대면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않았을테니 목적지까지 거리가 몇백km더라도 걸어다녔을테고 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 거리가 400km인데 일반인이 걸어가는 속도는 보통 시속4~5km이니 얼추 계산해도 80~100시간(참고로 3일=72시간, 4일=96시간)걸림.
    문제는 사람이 쉬지않고 80~100시간을 걸어다닐수 없으니까 주막이 오늘날 여관역할을 했을것임.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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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iflora1996
    @hiflora1996 Рік тому

    궁금한게 주막에서 음식을 어떻게 팜? 냉장고도 없는데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이 내용은 [설렁탕] 편에 조금 더 자세히 다뤘습니다!

  • @광동아재廣東大叔
    @광동아재廣東大叔 Рік тому

    주막에서 손님이 요구시 여자도 불러주거나 심지어 주막 여주인이 매춘을 했다는 말도 있던데...

    • @맑은하늘-g9d
      @맑은하늘-g9d Рік тому

      그당시는 그랬겠죠
      일본에서는 료칸에서 게이샤가 들어가고 현대 한국에서도 여관바리가 들어가고는 했으니깐요

  • @데라-e5u
    @데라-e5u Рік тому +1

    호랑이 피해가려고
    파티원 모집해서 가는 사람이 많아서
    주막이 많더라는 개드립친 사람도 있는거 같던데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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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쥐쥐-k5m
    @쥐쥐-k5m 7 місяців тому +1

    대동법은 광해군이 직접 시행한 건 아니라고 합니다. 그냥 광해군 때 시행되었다로 간단히 설명해도 될 듯합니다.

    • @makerusorg
      @makerusorg  7 місяців тому

      내용 감사합니다!!!

    • @쥐쥐-k5m
      @쥐쥐-k5m 7 місяців тому

      @@makerusorg 유어웰컴

  • @QqDd-w2k
    @QqDd-w2k Рік тому +1

    대동의 시대가 다시 와야 한다...

  • @user-q389
    @user-q389 Рік тому

    주모도 유명하죠

  • @평창동-f8z
    @평창동-f8z Рік тому +6

    전국에 식당수를 생각해보면
    주막 12만개면
    많지도 않았구만

    • @ego6929
      @ego6929 Рік тому +1

      아주 작은 마을조차도 반드시 한개는 있었고 규모가 있는곳은 수십개도 있었다고 하네요.

    • @unikon88
      @unikon88 Рік тому +1

      당시 인구와 교통수준을 생각해봐라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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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ser-avq8afsa24e59fw
    @user-avq8afsa24e59fw Рік тому +3

    참... 이 땅의 자영업 전통은 유구하구나. 지금도 전세계에서 자영업 비중이 제일 높다던가 그러던데... 결국 나랏님이 책임 못지니 서민들이 먹고 살려고 뛰어드는 것.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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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mengoing
    @amengoing Рік тому

    주막수를 비교하렴 현대 식당수와 편의점 모텔수를 더하는게 공정하죠 ㅎ 여튼 조선시대니 주막수 많은거 인정이요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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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amessong8729
    @jamessong8729 Рік тому

    주막은 호텔입니다. 식당도 아니고 여관이 아닙니다. 식사와 숙소 즉 식당과 숙박업을 겸합니다 그래서 여관이 아니고 호텔입니다.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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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uJi503
    @YuJi503 Рік тому

    광해군 재평가…. 대동법이라니ㄷ ㄷ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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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w2p
    @신-w2p Рік тому

    주막은 그냥 식당 및 동네 술집 역활도 한거임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뽀도리
    @뽀도리 Рік тому


    정겹다 😅 주모~ 여기 국밥하나 말아주시고 탁주한사발 내오시오~ 캬

  • @jhs4652
    @jhs4652 Рік тому

    조선 말까지 여관이 없던 조선 외국인들이 조선와서 주막 비위생적이고 빈대와 이가 들끓는다고 비난을 한 이유가 있음 ㅋㅋ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LionelPark
    @LionelPark Рік тому

    이게 왜 놀랍지? 요즘도 식당 엄청 많으게 전혀 놀랍지 않은거 처럼

    • @0019-i8p
      @0019-i8p Рік тому

      없던 시스템이 생겻으니 획기적인거지,,

    • @LionelPark
      @LionelPark Рік тому

      @@0019-i8p 썸네일 어이없어서 영상 안보고 댓글담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DreamOn_TV
    @DreamOn_TV Рік тому +2

    삼각주막은 지금도 운영을 하고있죠 ㅎㅎ
    예천에 있죠
    거기서 배추전을 먹었었는데 배추한잎을 전으로 만들어주고 만원을 받았던 기억이납니다
    이것도 10년전 일....
    주모 한상주이소~ 라고 하고 2만원 이상받는데 받아보면 1인분정도 되는 것을 3인분정도 되느냥 말을 하고....
    이제는 좀 가격을 제대로 책정했으려나요
    그냥 가셔서 분위기만 느끼다가 오세요

  • @koreaYOUTUBER.
    @koreaYOUTUBER. Рік тому

    교회는 거리제한 없이 개인사업 가장많은데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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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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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크냐아수투아루
    @파크냐아수투아루 Рік тому +5

    난 80년대를 살아서 주막이란게 조선시대나 있는줄 알았음

    • @세상어렵네
      @세상어렵네 Рік тому

      조선도 극 후대에나 있었음
      내가보긴 화폐경제가 어느정도 돌아가는 18세기후반 19세기 초반이나 되어야
      전국적으로 일반화
      교통이 발달되고 신작로가 뚫리는 일제시대
      대부분 사라짐
      장터 국밥도 고기를 넣는다는건 말이 안됨
      냉장시설없이 고기를 소비하기가 쉽잔음

    • @벽을뚫는포신
      @벽을뚫는포신 Рік тому

      @@세상어렵네 ㅇㅇ 이 영상은 그거 말고도 뭔가 빠진 내용이 많음. 내가 알기로는 주막은 음식값만 지불하면 하룻밤 숙박을 할 수가 있었는데 그 설명도 없고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tojimari23
    @tojimari23 Рік тому

    여보게, 주모.......

  • @Luvchaser
    @Luvchaser Рік тому

    주모가 다른 서비스업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 @삐용삐용-s8p
      @삐용삐용-s8p Рік тому

      [기획]인문학적으로 풀어본 매춘문화사6: 우리 역사 속 성매매의 형태

      여기까지가 ‘국가 공무원’으로 분류되던 관기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일반인들은 어떻게 ‘성욕’을 해결했을까?

      몸 파는 여자는 많았다. 건리개의 처방에 따라 약값으로 세목 1필과 중목 1필을 주겠다고 한즉, 건리개가 대답하기를 "선달님이 본가를 떠나온지 2000리 밖이어서 약값을 구하기 어려우니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끝내 받지 않았다.

      - 부북일기(赴北日記) 1645년 1월 2일의 기록 중 발췌

      부북일기는 군관출신인 아버지와 아들이 쓴 일기다. 함경도 국경으로 배치 받은 아버지와 아들이 각각의 기록을 썼는데, 아버지는 1605년, 아들은 1645년 함경도로 배치 받아 가서 국경수비를 하는 과정을 상세히 적은 일기다. 이렇게만 보면, 비장한 내용일 거 같지만 그 내용의 20% 이상은 ‘섹스’이야기다.

      (물론, 당시 함경도 군관의 생활상, 국경수비 방법, 이동경로 등등 일반적으로 접하기 힘든 희소한 내용도 있지만)

      앞에 언급한 기록은 박취문이 강릉에 갔을 때 벌어진 사건을 발췌한 거다. 강릉에 도착하자마자 강릉에서 유명한 기생 연향과 같이 잤는데, 자고 난 며칠 뒤 또 다른 기생 건리개를 찾아가 섹스를 했던 거다. 문제는 연향은 매독에 걸렸다고 소문이 자자한 기생. 이 사실을 알게 된 건리개는 펑펑 울게 되고, 박취문은 미안하다며 약값을 주겠다고 말한다. 건리개가 이 약값을 거절하는 내용이다.

      (박취문은 이후 자신도 매독에 걸린 게 아닌지 걱정 되어 성생활을 잠시 자제했지만, 이후 또 열심히 ‘한다’. 이 사람이 참 대단하다고 느낀 게 각 고을의 유명한 기생, 관계한 여성의 이름, 상관이나 동료의 파트너 이름 등등 성생활에 대해서는 실록 수준으로 자세하게 기록해 놨다. 이 정도면 인정해 줘야 한다)

      (이 기록을 보면, 조선에서 ‘대단위 성매매’ 즉, 집창촌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약값을 세목 1필과 중목 1필을 주겠다는 건데, 이 당시까지도 조선은 쌀이나 옷감으로 거래를 했다. 화폐경제가 아니었기에 성매매를 할 때 대가를 주고받기 힘들었다. 기생들의 경우 누군가에게 ‘몸’을 허락한 경우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라면, 얼마간 숙식을 해결해 준다던가 하는 조건으로 거래를 마무리 짓는 경우가 많았다)

      부북일기에서 주목해 봐야 할 점은 박취문이 상대한 여성들의 ‘종류’다.

      일단 기생(유명한 기생들은 다), 노비(숙박한 집의 노비들), 술집 여인 등이다. 기생은 설명하지 않아도 될 거 같고, 노비의 경우는 ‘당연하단 듯’ 관계했다. 술집의 경우도 들르는 술집이 다 다른데, 하나 같이 여자와 관계했다.

      이걸 보면, 조선시대 성매매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일단 노비는 디폴트로 관계할 수 있는 여자이고, 기생과 술집 등등 성매매를 할 수 있는 곳은 넘쳐났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사극에서 보는 주막의 주모들, 이들은 술만 파는 존재가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조선에선 여자를 흔하게 살 수 있었다.​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콘텐츠도 꾸준히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 @후아유-w9o
    @후아유-w9o Рік тому +1

    거지여관 참 많았죠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1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candykrith1232
    @candykrith1232 7 днів тому

    전국 주막협회

  • @노답노바
    @노답노바 Рік тому

    동동주 줘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콘텐츠도 꾸준히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 @fnswleb3oab2l3
    @fnswleb3oab2l3 Рік тому

    진호박 다 판다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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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win-rj4rj
    @uwin-rj4rj 2 місяці тому

    주모만 12만명😂

  • @kitanoshinchi
    @kitanoshinchi Рік тому

    주막에 남녀 혼숙 했다카던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chanho_Lee91
    @chanho_Lee91 Рік тому

    그럼 바람의나라에 있는 주막은 주막이아닌거네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콘텐츠도 꾸준히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 @스티봉
    @스티봉 Рік тому

    주막은 사창가역활도 함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tigerlee3642
    @tigerlee3642 Рік тому +1

    뻥이 너무많다. 검증안된 카더라를 바탕으로 만든 영상같음.

    • @2jaemyungE
      @2jaemyungE Рік тому +2

      원래 한국사는 미화하지 않으면 절망스러운 역사임.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콘텐츠도 꾸준히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 @hjw332
    @hjw332 Рік тому +1

    주막을 소개하면서 정작 주모에 대해선 정보가 없네.
    듣자하니 주막의 주모는 사실상 봉사직에 가까울 정도라고 하던데..
    12만개가 존재했다면 주모만 적어도 12만명에 그 운영비며 술과 음식을 위한 재료를 대주는 사람들에 국밥만드는 일손이나 관리운영하는데 주모 하나만 있었을리도 만무하고 그거 참 대단한 운영사업이었는데 과연 배불리 챙긴 사람은 누구였을까?주모는 아니었을테고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yigajinsung443
    @yigajinsung443 Рік тому

    술이나 먹고 관리를 안하니까 일본한테 계속 침략 당한듯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hyunmin-l9j1v
    @hyunmin-l9j1v Рік тому

    조선 모텔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내개인채널-n2t
    @내개인채널-n2t Рік тому

    영상미 뒤지네요

  • @메이피아
    @메이피아 Рік тому

    공부 더 하셔야겠다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churlkoh8053
    @churlkoh8053 Рік тому

    일제가 철도와 기차를 놓아서 주막을 말살했네 , 주막을 부활시켜라!!

    • @인문학여행
      @인문학여행 Рік тому

      철도보다는 차량용 도로개설이 주막 쇠퇴의 주요 원인으로
      철도와 신작로가 겹치는 조선의 도로는 삼남로, 의주로 정도로 보입니다.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makerusorg
      @makerusorg  Рік тому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